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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회] 개혁진영 152석 확보, 입법부 장악했으나: 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22 08:00 김삼웅 2004년 4월 17일 저녁.. http://t.co/IwOjiMb3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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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22 08:00 김삼웅

 

2004년 4월 17일 저녁 광화문 촛불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이 '탄핵무효' 카드를 들어올리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남소연 기자.

 

제17대 총선의 정치사적 환경은, 두 번째로 정권을 잃은 한나라당이 반노무현의 감정에 빠진 민주당 일각과 야합하여 대통령 탄핵 감행 중에 치른 선거였다는 사실이다. ‘탄핵정국’은 곧 이어진 ‘촛불집회’와 맞물렸다. 국민은 민주평화의 기치를 든 신생정당 우리당을 저지하는 ‘이변’을 보였다. 국민은 우리당에 152석을 안겨주었다. ‘노무현 지지’의 의미가 담겼다.
민주개혁세력이 행정권과 입법권을 장악한 것은 헌정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4월혁명 뒤 민주당은 7ㆍ29선거를 통해 민ㆍ참 양원에서 압도적 다수당이 되었으나 곧 신민당의 분당사태로 ‘소수여당’이 되고,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는 거대한 다수 야당에 휘둘러서 개혁입법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김종필 국무총리와 한승헌 감사원장은 야당의 반대로 1년여 ‘서리’의 자격으로 국정을 맡아야 했다.

노무현의 참여정부도 다르지 않았다. 국회를 장악한 한나라당은 수구세력을 대변하는 조ㆍ중ㆍ동과 손잡고, 사사건건 노무현 대통령을 흔들고 마침내 탄핵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부메랑이 되어 총선에서 우리당에 다수당을 내주게 되고, 여기에 진보정당인 민노당이 10석을 얻어 진보개혁세력이 국회 다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2004년 4월 16일 창원을에서 당선된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와 비례대표 당선자들이 16일 오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3당 대표회담을 열어, 대통령 탄핵과 이라크 파병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종호 기자.

 

그러나 다수당이 된 우리당은 개혁입법 추진과 악법폐기 등 시대적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다. 정체성이 문제가 많은 인물들이 탄핵의 바람을 타고 공천=당선되고, 지도부의 리더십 부재의 요인도 지적되었다. 다음은 여론조사 전문가의 진단이다.

2004년 4월 9일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반(反) 탄핵 바람을 타고 대승을 거둔다. 여당이 마치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 마냥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을 때, 나는 총선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몸담고 있던 한국사회여론연구소는 총선 전반 판세를 여론조사를 통해 분석하고 있었는데, 그때 몇 가지 특이한 점들이 발견된다.

사실 그것은 ‘열린우리당의 암울한 미래’와 관련된 것이었다. 당시 여러 언론은 152석의 과반 여당 탄생의 의미를 분석하고 있었지만, 선거의 중간 흐름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2004년 총선의 흐름에서는 탄핵 주체인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패배라는 의미 외에 분명 또 다른 현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즉 17대 총선 기간 중 이미 선거기간 전부터 잡탕 정당이라고 비난 받던 열린 우리당의 지지도가 내려가는 대신, 민노당 후보에 대한 지지도가 소리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주석 4)

우리당은 17대 총선에서 원내 1당이 되었으나 ‘잡탕정당’의 구성원으로 하여 제 기능과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3선 의원이 된 김근태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그는 노무현 정부가 성공해야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서민대중의 생계가 보장되고, 남북관계가 화해협력의 관계를 더욱 진척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당내 개혁과 민주화에 열정을 쏟았다.

 


 


우리당의 역사적, 현실적 책무가 무거워질수록 김근태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국민이 152석의 국회의원을 준 것은 개혁을 하라는 지엄한 뜻이었는데, 과연 이것을 수행할 수 있을 지 걱정을 한 것이다.

김근태는 부드러움과 강건함을 고루 지닌 품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운동권 치고는 유약하다는, 다른 쪽에서는 지나치게 강경하다는 평을 동시에 듣기도 한다. 여당의 중진이 된 처지에서도 그의 진면을 제대로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이에 대한 언론인의 ‘심리분석’은 세월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있으면서도 상대를 인정할 줄 아는 그의 유연한 태도는 운동에서 겪게 되는 어려운 시기마다 그 진가를 발휘해왔다. 보스로서의 지도력이나 포용력은 감히 있다고 생각지도 않고 오히려 “소(小)소유자”가 되려는 소시민적 경향까지 있다고 자신을 평가하는 김근태가 내세울 수 있는 운동가적 자질은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따뜻한 가슴과 어머니의 핏줄에서 나온 고집스러움과 일에 대한 추진력이라고 한다. 이에 사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그 특유의 방법론이 곁들여져서 그는 어느덧 지도자의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

실제로 그의 이러한 특징들은 얼굴에서도 나타난다. 부드러워 보이는 얼굴의 선과 조용한 미소는 따뜻한 가슴을 엿보이게 하나, 고집스러워 보이는 곱슬머리와 차분한 말투에서 그의 단정한 일 매무새를 짐작할 수 있다.

짐작해보건대 무언가를 추진해 나가고 조직하는 그의 능력은 어머니의 핏줄을 이어받은 덕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어린 시절의 환경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성 싶다.
(주석 5)


주석
4> 김현태, <대중여론으로 읽는 한국정치-분노한 대중의 사회>, 11쪽, 후마니타스, 2009.
5> 한경심, <김근태>, <여성동아>, 1988년 8월호,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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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회] 17대의원 당선, 3선의 무거운 책무: 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21 08:00 김삼웅 2003년 10월 27일 오후 올.. http://t.co/lCBDH2Kg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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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21 08:00 김삼웅

 

2003년 10월 27일 오후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대회에서 김원기 준비위원장 등 발기인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남소연 기자.

 

집권 여당은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을 위한 신당추진모임’ (가칭)을 발족, 신당 창당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맞서 구주류는 거세게 비난하면서 신당 창당에 반대했다. 민주당은 당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는 중도파로 3분되어 치열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당무회의에서는 폭력사태까지 일어났다.

신주류는 7월 3일 국회의원 60명이 포함되는 신당추진기구를 출범하고 때마침 한나라당을 탈당한 이부영ㆍ이우재ㆍ김부겸ㆍ안영근ㆍ김영춘 의원이 합세하고, 재야 인사들이 참여하는 등 신당창당의 세를 이루게 되었다.

민주당 신주류는 9월 19일 ‘국민참여통합신당’의 명칭으로 원내교섭 단체를 구성하고 원내대표로 김근태를 선출하였다. 김근태는 분당상태에서 실질적으로 여당의 원내 대표가 되었다. 극구 사양했으나 다수 의원들의 권고를 물리치지 못하였다. 과도기의 원내대표는 고통스러운 자리였다.

신당파의원 40여 명은 9월 20일 민주당 탈당계를 내고, 한나라당 탈당의원 5명과 함께 ‘국민참여 통합신당’(통합신당)으로 국회에 교섭단체 등록을 마친데 이어 10월 22일 원외의 신당세력인 개혁신당창당추진위원회와 공동으로 범여권 신당의 당명을 ‘열린우리당’(우리당)으로 결정했다. 김근태는 여전히 원내대표직을 맡게 되었다.

신당은 11월 11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창당대회를 갖고 김원기ㆍ이태일ㆍ이경숙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하였다. 대선에서 승리한 민주당은 1년여 만에 민주당과 우리당으로 분열되었다. 이 기간이 김근태에게는 정계 입문 이래 가장 고통스럽고 고민이 많았다. 줄곧 진보민주세력의 통합과 연대를 주창해왔던 터였기에 고통과 고민이 더욱 깊었다.

김근태는 당의 분열과 신당창당의 와중에서 원내대표가 되고, 이어서 우리당의 당의장이 되었으나, 당시는 원내 활동보다 이합집산 과정이어서 국회에서 크게 활약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당 원내대표에 선출될 때는 여당의 분당사태로 한나라당이 다시 제1당이 되고, 우리당은 제2당의 신세로 전락했다. 더구나 친구가 갈라지면 적보다 더 멀어지듯이 잔류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밀접해지면서, 결국 노무현 탄핵 카드를 꺼내게 되었다.

 


2004년 4월 14일 단식중인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 등 당지도부는 투표 하루전날인 14일 저녁 정호준 후보의 지역구인 서울 명동에서 총력유세를 갖고 지지를 호소했다. 정동영 당의장, 김근태 원내대표, 정호준 서울중구 후보 등이 손을 들어 지지자들에 인사하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종호 기자.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대미문(상하이 임시정부의 이승만탄핵 제외)의 제17대 총선이 2004년 4월 15일 실시되었다. 한나라당과 여당의 보수세력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의결하면서 광화문에 연일 수만명 씩이 모이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선거는 의외의 결과로 나타났다. 정부도, 신당파도, 구당파도 한나라당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4ㆍ15총선은 47석이었던 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하고, 민주노동당도 전국구 정당투표제에 힘입어 10석을 얻었다. 그 대신 한나라당은 여전히 의석수가 많은 강고한 영남 지역주의에 힘입어 121석을 얻었으나 제2당으로 전락했다.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 탄핵에 앞장섰던 민주당 지도부는 줄줄이 낙선하여 9석을 얻는데 그침으로써, 민노당에도 뒤진 제4당으로 전락, 사실상 정당의 생명력을 잃게 되었다.

김근태는 4ㆍ15 총선에서 여유있게 당선되어 3선 의원이 되었다. 도봉 갑구 유권자들은 그를 신뢰하고 폭넓게 지지하였다. 총선 뒤 어느 신문사는 <17대 국회의원 인물사전>을 펴냈다. 다음은 김근태의 프로필이다.

‘햄릿형 정치인’으로 불릴만큼 우유부단하고 신중한 이미지를 보여왔으나 4ㆍ15총선을 계기로 대중성과 유연성을 선보이며 여권내 유력 차기주자의 한 사람으로 입지를 굳혔다.(중략)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양심고백을 선언한 뒤 중도하차했다.
하지만 “노무현 국민경선후보”가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나 2003년 민주당 탈당 및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늘 고민이 길어 ‘결단’이 반보 늦는다는 평을 들었고 노 대통령과도 한동안 불편한 관계를 보였다.

그러나 4ㆍ15총선에는 “노인폄하 발언”으로 한때 위기에 몰린 정동영 전의장을 적극 엄호하며 구원투수로 나서는 등 과단성과 신중함을 조화시키며 대중적 이미지를 확산시켰다.

총선 이후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 당선자 대부분과 오랜 재야출신 동지들을 포함해 40여 명을 원군으로 둔 ‘정통민주파’의 좌장으로 원내기반도 두터워졌지만 원내대표를 그만두고 입각 예정. 로버트 케네디인권상, 백봉신사상 등을 수상했다.
(주석 3)

이 책에는 김근태의 신상에 관한 여러 가지가 실렸다.

혈액형 : O형
존경하는 인물 : 김구ㆍ문익환
좋아하는 색깔 : 청보라
좋아하는 음식 : 해산물, 김치찌개, 된장찌개
감동받은 책 : 토지(박경리), 제3의 길(앤서니 기든스),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감동적으로 본 영화 : JSA, 서편제, 안토니아스라인, 부에나비스타 소설클럽, 내일을 향해 쏴라, 스팅, 아웃 오브 아프리카
좌우명 : 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정자정야 자수이정 숙감부정) 정치라는 것은 바르게 하는 것이니 올바른 것으로써 솔선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게 하지 않겠는가?


주석
3> 동아일보 발행, <17대 국회의원 인물사전>, 27쪽,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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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회] 이라크파병 둘러싸고 고민 깊어: 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20 08:00 김삼웅 24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http://t.co/kaz864Uv2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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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6장] 노무현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정 참여

2012/10/20 08:00 김삼웅

 

 

24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반전평화공동행동(준) 소속 단체 회원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이라크 팔루자 학살 규탄 및 파병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노무현의 정치적 미숙 또는 독선적 정책결정은 초반부터 지지층의 이반현상을 불러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북송금 특검과 이라크 파병 결정이었다. 대통령 취임 당일부터 한나라당은 자민련과 함께 원내 다수의 힘으로 김대중 정부의 이른바 ‘대북 비밀송금사건 관련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을 변칙 처리하여 정부에 보냈다. 노무현은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였다. 이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세간의 억측과 오해를 푸는 길이라고 믿었던 까닭이다.

정부는 3월 21일 국무회의를 열어 600명 규모의 국군 건설공병지원단과 100명 안쪽의 의무지원단을 이라크에 파병하는 내용의 국군부대 이라크 전쟁 파견 동의안을 의결하여 국회에 이송했다. 집요한 미국의 전투병 파병 요청을 물리치고, 대안으로 건설공병지원단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진보ㆍ보수단체 간의 뜨거운 쟁점이 되었던 관계로 국회 심의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사건건 노무현의 발목을 잡아온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지지하고, 집권당의 상당수 의원들과 진보언론이 반대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대북송금 의혹사건을 다룰 송두환 특별검사팀의 현판식이 16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해암빌딩내 14층에서 특검 사무실앞에서 열렸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김근태는 대북특검과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여러 채널을 통해 청와대에 이런 뜻을 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치적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깊은 고뇌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당내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꼬여갔다. 과거 집권당은 대통령이 총재가 되어서 재정, 인사권 등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으나, 노무현은 대선공약에서 당정분리를 내걸고, 집권해서는 이를 실행하면서 당은 백가쟁명, 중구난방의 상태가 되었다. 대선후보 선출과정의 감정과 특검, 이라크 파병 문제 등이 얽히고 설키면서 당내 분쟁ㆍ분열상이 심화되었다.

앞당겨서 말하자면 원내대표 시절(2003년 말에서 2004년 초) 김근태가 정치적으로 인간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던 일은 이라크파병 문제였다. 개인적 소신과 당론, 집권당의 원내대표와 정부의 정책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이 깊었다. 특히 당대표와 동료 의원들의 2중적인 언사와 태도에서는 정치 이전의 인간적 배신감에 가슴 아파하였다.

미국 부시 정부의 이라크 침공 이후 미국은 한국 정부에 전투병 파병을 요청했다.
노무현 정부로서는 ‘양날의 칼’이었다. 거부할 경우 엄청난 외교적 마찰을 감수해야 했고, 파병을 결정할 경우 다른 야당과 시민사회 민중운동 진영과 회복불능의 ‘절연’을 각오해야 했다.

노무현 정부로서는 이러기도 저러기도 어려운 ‘뜨거운 감자’를 국회에 넘겼다.
시민사회는 촛불집회를 열며 거세게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집권당은 분당하여 우리당은 45석의 소수의석에 불과했다. ‘뜨거운 감자’가 송두리쨰 김근태에게 넘겨진 것이다.

김근태는 이라크 파병안이 국회로 넘어오기 한참 전부터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그러나 사실 김근태 원내대표의 입장은 처음부터 확고했다.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미국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슬기롭게 이라크 파병을 거절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근태는 이런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황을 냉철하게 주시하며 지혜와 묘수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당내 일부 의원들은 파병을 반대하며 단식이나 농성을 하고 있었고, 어떤 의원들은 ‘무조건 파병’을 주장하며 원내대표실에 찾아와 김근태의 결단을 압박하곤 했다. 더러는 미국이 주도할 전후복구사업에서 소외당하지 않도록 미국이 주문하는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파병(참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원들도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한나라당이나 정부의 경제ㆍ외교 관료들과 똑같았다.

 


2004년 5월 11일 오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 선거에서 원내대표에 당선된 천정배 의원의 연설을 듣는 김근태 전원내대표, 정동영 당의장, 김원기 고문.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종호 기자.

 

우리당 의원들은 이 문제를 의제로 20번 이상 공개ㆍ비공개 의원총회를 열었다.
그야말로 난상토론이었다. 한국정당사상 의안 하나를 두고 이때처럼 격렬하게 당내 토론을 거친 경우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몇 달 동안 20여 차례 의총을 열면서 이라크 파병문제를 토론하도록 이끈 김근태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묘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의원총회의 수많은 논의 결과, 나름대로 찾아낸 묘안이 바로 ‘비전투병 중심의 인도적 지원부대’라는 새로운 파병방안이었다. 나중에 우리 정부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대민 의료지원ㆍ전후복구 등에만 참여하는 소규모 부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한 것도 의원총회 토론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이런 아이디어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김근태는 이라크 현지에 의원 실사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둘째, 정부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김근태는 정부가 미국 네오콘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굴복하지 않도록 국회와 여당이 힘을 보태고 싶었다. 정부가 미국과 협의를 하면서 국회와 여당을 핑계거리 삼아 국익에 유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숨통을 터주고자 했던 것이다. 김근태는 정부와 청와대에 이런 주문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전달했다. 국회와 여당이 이 문제로 격론을 벌이고 있고, 집권 여당에도 반대 기류가 강하다는 사실을 우리 정부가 미국 정부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협상력을 높이는 지렛대로 삼으라는 주문이었다.

셋째, 당내 의견통일이었다. 이라크 파병 문제는 개별 의원들이 정치생명을 걸고, 소신을 주장하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적당한 타협을 할 수 없는 화약고처럼 폭발력이 큰 사안이었다. 이 문제를 충분한 토론없이 결정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45석에 불과한 미니 여당은 다시 분열하고, 힘 한 번 쓰지 못한 채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 상황인식을 갖고 있었다.
(주석 1)

의총의 토론이 거듭되면서 청와대는 당론결정을 재촉하고, 조ㆍ중ㆍ동 등 보수수구신문은 연일 “국가 중대사에 대해 아무런 결정도 못하는 무능한 여당”이라고 몰아쳤다. 그런가하면 의총에서는 “김근태가 저래서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비난이 쏟아지고, 파병반대 시위는 날이 갈수록 거세어졌다.

의총은 마침내 당론으로 파병을 결정하고, 국회본회의장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 김근태는 찬성 버튼을 눌렀다. 임종석 등 몇 의원은 끝까지 소신대로 반대투표를 했다. 김근태는 소신과 원내대표 그리고 당론 사이에서 깊은 고민 끝에 결국 공인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날 오후 내내 원내대표실에는 깊은 정적만 흘렀다. 김근태는 원내대표실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방안에서 몇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 그 자리에서 당내 경쟁자 격인 동료에게 인생을 걸고 지켜온 소신에 대해 “타이밍에 대한 감각이 없다”고 공개리에 모욕을 당했고,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한 후배의 해괴한 민주주의 특강을 들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와 당의 결정에 승복한다는 뜻으로 찬 성 버튼을 눌렀다.

김근태는 그 방에 다시 들어가 홀로 몇 시간을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그날 그 몇 시간 동안, 김근태가 그 자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 몇 시간 동안을 그 방 앞 책상 의자에 앉아 민주주의와 김근태에 대해 생각하며 속으로 하염없이 속울음만 울었다.
(주석 2)


주석
1> 당시 우리당 원내대표실 비서팀장 증언, 2012년 9월 25일.
2>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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