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7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김홍일 의원 후원회에는 민주당 동교동계 의원들이 대거 참석했다.
김근태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면전에서 최고 권력자에게 간언은 여간해서 쉽지 않는 것은 고금이 다르지 않다. 지난 해 12월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 최고위원들의 청와대 회동에서 김근태 최고위원은 가장 먼저 발언했다. 그 핵심은 첫째, 당정의 핵심 포스트에 있는 사람들을 교체해야 한다. 둘째, 비공식 보고라인을 제거해야 한다. 셋째, 이러한 일을 늦출 경우 당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맨 마지막에 발언한 정동영 최고위원의 ‘권노갑 퇴진 발언’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을 뿐 김 최고위원의 발언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주석 18)
김근태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김 대통령에게 간곡하게 개혁을 주문했다. “대통령께서는 개혁이 성공해야 정권재창출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개혁이 중단되면 정권재창출은 물론이고 나라가 망하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 가서는 개혁이 안 됩니다.” (주석 19)고 간언했다.
김근태는 청와대 회동에서 김대통령과 민주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변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개혁정책을 추진하려면 도덕적 신뢰라는 동력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국무총리, 당대표, 비서실장 등 당과 행정부의 핵심인사와 운영방식의 전면적인 교체와 변화를 요구했다. 김근태는 이어서 대통령의 업무량이 너무 많아 격무에 시달린다고 지적했다.
“대통령 혼자서 어떻게 모든 일을 다합니까.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니까 업무량이 과도한 겁니다. 그렇다면 장관이라도 유능해야 하는데 DJP공조로 인재 풀은 적고 그나마 나머지도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등용하니까 일을 맡기고 논의할만한 장관이 나올 수 없습니다.” (주석 20)
김근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대중 대통령과 핵심 측근들에게 개혁을 촉구했다. 반세기만의 정권교체로 수립된 DJ정권이 실패하면 정권재창출도, 민주주의의 발전도 어렵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동교동 실세그룹과 충돌하기 일쑤였다. 김대중이 동교동계 실세인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을 민주당 대표로 지명하자 김근태는 공개적으로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다음은 한 언론의 보도다.
“김근태 최고위원이 재야민주화운동 시절의 투사로 되돌아간 것 같다.”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이 한광옥 대표 지명에 반대하면서 동교동계를 향해 연일 적격탄을 퍼붓자 당내에선 “늦었지만 진짜 투사가 된 것 같다” “요즘 시대에 왠 민주투사냐” “투사로 나선 것은 좋지만 한 발 늦었다” 등 여러 갈래 평가가 나왔다. 재야시절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등을 지내며 투옥됐던 김 최고위원은 9월 12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비장한 표정으로 “지난 날 민주화운동 할 때가 생각난다. 김근태가 투쟁하다가 고립되면 국민에게 알려달라”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이 동교동계 해체를 주장하자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노갑 전 최고위원이 “동교동 해체 주장은 당을 해체하란 말이나 다름 없다”고 반박하면서 양측 갈등이 확산되었다. 당내 뿌리와 한 갈래 줄기 간의 싸움으로 비유되는 양측 대결은 미국의 테러 참사로 일단 잠복했지만 머지않아 다시 표면화할 것으로 보인다. (주석 21)
2003년 2월, 청와대를 떠나 동교동으로 돌아오는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동교동계 인사들.
김근태의 ‘민주당개혁론’은 멈추지 않았다. ‘동교동계의 해체’까지 들고나왔다. 김대중이 고난을 받을 때 그와 함께해 온 동교동계가 집권 뒤 기득세력화 하면서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 김근태의 판단이었다.
대통령 임기 중반기에 권력의 핵심에 도전하는 것은 여간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차기 대권 후보를 겨냥하는 처지에서 당내 최대 계보인 동교동계와 척지는 일은 정치적 자살골에 속하는 일이었다. 한 언론의 머리 부문이다.
최근 TV 토론회에 참가해 논리적이고 신사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혀 정치인으로서 참 면모를 보여 주고 있는 김근태 최고위원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 비논리적이고 목소리만 큰 정치인과는 사뭇 다르다.
김 의원의 팬클럽은 든든한 후원자가 되고 있다. 과거 민주화운동의 선두주자에서 집권당의 차기 대권후보로 변한 그에게 기대하는 국민의 관심은 크다. 이 시대가 새로운 정치문화와 정치인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김 위원은 잘 알고 있다.
지금 김 최고위원은 차기 대권의 중심에 서 있다. 자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세계화를 잘 알고 있으며 책임감이 있는 정치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김 위원은 사실상 자신의 대선캠프인 한반도포럼의 지부 확장과 지구당원 상대 강연, 지역구민 직접 접촉 등을 통해 대중 속으로 다가가는 활동을 본격화하고 있다.
2006년 11월 2일 저녁 김대중 도서관 후원회 행사에서 김대중 전대통령과 참석인사들이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최근 김 위원은 당내 특정계보인 ‘동교동계’의 해체를 거듭 공개요구하고 있다. “당의 공적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선 비공식라인이 더 이상 작동돼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동교동계를 거론하며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하나회’가 있었듯이 민주주의 정권에서의 ‘하나회’가 돼선 안 된다”는 소신을 피력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 탄생이 그들만의 잔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독점과 전횡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김 위원은 이같은 상황이 시정되지 않으면 국민의 냉소와 패배주의가 심화되면서 민심 이반이 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석 22)
주석 18> <대통령이 변해야 산다>, <신동아>, 2001년 7월호, 92쪽. 19> 앞과 같음. 20> 앞의 책, 94쪽. 21> 2001. 9. 27. 1990년. 22> <내외저널>, 2001년 10월호 79쪽.
김근태는 대단히 청렴결백한 정치인이다. 그의 집을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다들 믿기 어려워했다고 한다. 3선 의원에 장관을 지낸 사람의 집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는 전세를 맴돌다가 1994년 도봉구 변두리에 30평짜리 아파트를 처음으로 장만했다. 저서 <남영동>과 <우리 가는 이 길은>,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등의 인세와 친척의 도움으로였다. 이 집은 모처럼 네 식구가 오랫동안 오순도순 살게 되는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은 그 집의 단촐한 부엌살림과 가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사람들은 도대체 집이 왜 이렇게 썰렁하게 텅 비어있냐고 놀린다. 집권당의 최고위원 집이라고 하면 외제 가구도 보이고 화장대도 있을법하지만 부인 인재근 여사와 김 의원은 그런 화려함을 한번도 경험하지도 또 원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조금 모이면 얼른 나누고 사는 두 사람, 이런 양심에 많은 사람들이 애정을 주는 것일게다.(…)
그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끔씩은 구멍난 양말을 신고서도 국사에 열심이고, 단벌신사임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넉넉한 모습을 본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노트나 만년필, 그가 소지하고 있는 모든 물건들은 우리 모두가 매일 쓰고 있는 물건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주석 14)
김근태는 국회의원 시절 세비와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는 성금으로 지구당을 관리하고 의정활동을 하였다. 대선 후보경선에 나섰을 때는 ‘GT클럽’이라는 자발적인 정치 후원과 팬클럽이 조직되어, 어느 정도 지원을 받게 되었다. 미약하지만 나름대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분들이 돼지저금통을 모아서 전달해주신 취지는, “김근태 너무 상처 받지 마라, 우리가 있다. 함께 가자” 이런 뜻이라고 본다.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꼭 옛날 군사독재 시절 데모하고 피신할 때 “우리집에 와서 숨어라”고 성원해주던 사람을 만난 것 같아 가슴에서 눈물이 난다. 물론 그것이 현실 정치에서 정치자금을 대신할 만한 액수는 못 된다.
나는 정치자금을 정말 투명하게 해야 하고 투명하게 하는 사람에 대해선 보상이 따르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재정 보조를 중앙당으로 하지 말고 국회의원들한테 해줘서 투명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국고보조를 그만큼 늘리는 매칭펀드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석 15)
정치인이 어느 정도 위상에 올라가면 계보를 거느리고 연구소를 차리고, 사조직을 하다보면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다. 그리되면 기업에서는 ‘보험금’이 들어오고, 상임위의 유관 기관에서는 후원금 뿐만 아니라 이런 저런 이권과 거래되기도 한다. ‘떡고물’을 만지다보면 차기와 노후를 위한 축재가 생기고 집이 넓어지면 가구도 차츰 외제로 바뀌게 된다.
김근태는 예외였다. 그는 동료 의원이나 언론인 그리고 유관기관장들과 어울려 골프치거나 고급 요정에 가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신체 단련과 운동을 위해 골프를 하라는 주문이 많았지만, 끝내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
아직 체력도 괜찮고 정신력도 버틸 만하다. “나이가 더 들면 도봉산이 가까우니 산에 오르겠다”고 하면 고등학교 때부터의 친구들이나 대학 때의 친구들은 나를 설득한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망설임이 있다. 골프장 건설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고, 골프장에서 뿌려대는 농약이 식수로 흘러들고 있다는 주장이 걸린다. 대중화됐다고는 하지만 중산층과 서민들이 마음 편하게 골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토요일이나 일요일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 또한 내 게으름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주저에 대해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되어 있는 어떤 친구들은 거리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내가 민주화운동을 할 때의 그 고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이질감도 느끼는 모양이다. 아니 분명히 말하건대 적대감 같은 것은 없다. 우리 사회에서 의사결정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이 무거운 스트레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골프가 제일이라는 주장에 대해 나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중산층ㆍ서민들의 정서와 우리 사회 지도층이 필요로 하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는 없을 것인가. 아직 그때는 오지 않고 있는 것인가. (주석 16)
김근태는 골프 대신 축구를 즐겼다. 새벽에 마을 학교 교정에서 주민들과 어울려 차는 축구 말이다.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교정을 이리저리 뛰는 것을 즐겨한다. 끝난 뒤에는 ‘선수’들과 어울려 마을 어귀의 해장국집에 들러 푸짐하게 한 그릇을 비운다.
“나는 축구가 사람들이 만든 가장 매력적인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이른 아침 한 경기를 뛰고 난 뒤, 땀 흐르는 등줄기를 스치는 서늘한 전율이 참으로 좋다.” (주석 17)
김근태의 ‘축구예찬’이다.
김근태는 영화도 축구못지 않게 좋아했다. “일상생활에 윤기를 더해주는 영화의 매력”을 즐겼다. 두고 두고 인상 깊었던 영화로는, 독특한 페미니즘 영화인 <안토니아스 라인>, 감동적인 음악영화 <캔사스 시티>와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같은 영화다. 젊은 시절에 봤던 <내일을 향해 쏴라>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팅>, 그리고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잊지 못한다. 감동적인 국산영화는 <서편제>, 등이 있다.
형님들과 누님 덕분에 어렸을 적부터 책과 접하게 되고, 그래서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또 5년 여의 옥살이와 긴 수배 기간에 책을 항상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책은 박경리의 <토지>와 김지하의 <황토>, 김용택의 <섬진강>,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든다.
김근태는 그림도 좋아하였다.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을 특히 좋아하여, 한때 그의 서가에는 복제품이 놓여 있었다.
주석 14> 박영숙, <주한 호주대사관 문화공보실장>, <푸른내일> 21호, 2001년 1월. 15> 김근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인물과 사상>2002년 7월호. 16> 김근태, <김미연과 봉숭아꽃>, <이코너미스트>, 1999년 11월 9일. 17> <내가 좋아하는 것들>, <희망은 힘이 세다>, 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