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를 작곡한 피트 시거(Pete Seeger)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포크 가수 겸 작곡가 중 한 사람이다.
피트 시거는 바이올린 연주자 어머니와 버클리 음대 학장이던 아버지로 태어났다 191센티미터 장신으로 하버드대에서 수학하던 피트 시거는 우디 거스리의 권면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보다나은 세상을 추구하며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 곁으로 다가간다 2014년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할때까지 초지일관 노래를 통한 환경 인권 반전 등 보다나은 세상을 추구하며 노래하였다.
포크 송은 대개 멜로디가 쉽고,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포크 가수들은 현재 사건에 대한 곡을 쓰는데, 피트 시거도 다르지 않았다.
피트 시거가 공동으로 작곡한 <우리 승리하리라 We Shall Overcome>는 1960년대의 민권 시위 때 자주 부른 노래였다.
이 노래를 부른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은
1960년대 가장 중요한 사회 문제였던 흑인 민권 운동에 상징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녀가 부른 프로테스트 송 ''We Shall Overcome''은 당시 인권 운동의 찬가였다. 마할리아는 특히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그 유명한 워싱턴 연설에 앞서 열창했고, 1968년 킹 목사의 장례식 때에도 애도 곡을 불렀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스펠 여성 싱어이다. 가스펠 송은 그녀에 의해 전세계에 전파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을 비롯한 여러 소울 가수들의 영웅이 바로 마할리아 잭슨이다.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someday. Darling, Here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언젠가는 반드시 승리하리라, 그대여, 내 마음 속 깊이, 나는 믿네, 우리 반드시 승리하리라,
We'll walk hand in hand, we'll walk hand in hand, We'll walk hand in hand someday. Darling, Here in my heart, I do believe, We'll walk hand in hand someday.
손에 손을 잡고, 우리 행진하려네, 우리 반드시 서로의 손을 잡고 나아가려네, 그대여, 내 마음 속 깊이, 나는 믿네, 우리 반드시 함께 손잡으리라,
We shall live in peace, we shall live in peace, We shall live in peace someday; Darling, Here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live in peace someday.
평화롭게 살려네, 평화롭게 살려네, 언젠가는 반드시 평화롭게 살려네, 그대여, 내 마음 속 깊이, 나는 믿네, 우리 반드시 평화롭게 살려네,
We are not afraid, we are not afraid, We shall overcome someday; Darling, Here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
두렵지 않네, 두렵지 않네, 언젠가는 반드시 승리하리라, 그대여, 내 마음 속 깊이, 나는 믿네, 우리 반드시 승리하리라,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someday. Darling, Here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언젠가는 반드시 승리하리라, 그대여, 내 마음 속 깊이, 나는 믿네, 우리 반드시 승리하리라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Round yon virgin, mother and child Holy infant so tender and mild 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Silent night, holy night Shepherds quake at the sight Glories stream from heaven afar Heavenly hosts sing Alleluia Christ the savior is born Christ the savior is born
Silent night, holy night Son of God love's pure light Radiant beams from thy holy face With dawn of redeeming grace Jesus Lord, at thy birth Jesus Lord, at thy birth...
◇ Mahalia Jackson
그녀는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행복을 안겨 주었다.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은 1911년 10월 26일 미국에서 태어나 1972년 1월 27일 소천했다.
그녀는 다섯살 되던 해에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이모의 엄격한 통제와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가정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가족들과 함께 교회를 다니면서 가스펠과 처음으로 접했던 마할리아 잭슨은 집안의 엄격한 신앙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뉴올리언즈에 널리 퍼져 있는 재즈 음악과 불루스에 점점 심취하게 된다.
특히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첫 번째 여성 불루스 가수 Ma Rainy와 Bessie Smith의 음악을 즐겨 들었고,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후일 가스펠 가수로 대성하는 그녀의 창법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열 여섯 살이 되던 1927년, 가족과 함께 대도시인 시카고로 이주한 마할리아 잭슨은 가정부와 세탁부 등의 일을 하는 한편, 살렘 침례교회(Greater Salem Baptist Church)의 성가대에 들어가 주일이면 가스펠을 부르며 생활하게 된다. 또한 프로 가스펠 그룹인 Johnson Gospel Singers와 함께 인근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며 가스펠 공연을 하였다.
1929년 가스펠의 아버지(Father of Gospel)라 불리어지는 토마스 도르시(Thomas A. Dorsey)를 만나 193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투어에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1931년 데뷔 싱글 "You Better Run, Run, Run"을 발표하였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 하였다. 하지만 이 싱글 음반은 마할리아 잭슨의 데뷔 싱글이라는 이유로 많은 음반가들이 찾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체로 찾아보기 힘든 희귀 음반으로 남게 된다.
1935년 한 장례식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우연히 보게된 데카(Decca)레코드 관계자의 눈에 띄어 음반 계약을 체결하고 1937년에 "God's Gonna Separate the Wheat From the Tares"와 "My Lord" 그리고 "God Shall Wipe All Tears Away"와 "Keep Me Everyday"라는 곡들을 발표하였지만 모두 실패하게 되자 마할리아 잭슨은 데카 레코드사를 나오게 된다.
1947년 마할리아 잭슨은 가스펠 전문의 소규모 레이블인 아폴로(Apollo)와 계약하였고 이때부터 그녀는 눈부신 비상을 시작하여 "가스펠의 전설"로 남게 된다.
그 시작은 1948년에 발표하여 가스펠의 명곡이된 "Move on Up A Little Higher"로 이 곡은 목사이자 가스펠 작곡가인 윌리엄 허버트 브루스터(William Herbert Brewster)가 천국으로 통하는 사다리를 오르는 기독교도를 상상하면서 작곡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 전쟁 때 전투 중인 주한 미군 병사들을 위문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온 그녀는 영감으로 부르는 영혼의 노래를 열창하여 음악을 좋아하는 많은 한국인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기도 했다.
마할리아 잭슨은 1960년대 가장 중요한 사회 문제였던 흑인 민권 운동에 상징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녀가 부른 프로테스트 송 ''We Shall Overcome''은 당시 인권 운동의 찬가였다. 그녀는 특히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그 유명한 워싱턴 연설에 앞서 열창했으며, 1968년 킹 목사의 장례식 때도 애도곡을 불렀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스펠 여성 싱어이다. 가스펠 송은 그녀에 의해 전세계에 전파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을 비롯한 여러 소울 가수들의 영웅이 바로 마할리아 잭슨이다.
마할리아 잭슨은 1972년 1월 27일 투병 중이던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1972년 자신을 존경한 후배 가수 아레사 프랭클린이 장례식에서 가스펠 ''Precious Lord''를 불렀다.
그녀의 사망 후 76년 그래미어워드 최우수 소울 가스펠상을 비롯 각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가스펠의 여왕(Queen of Gospel)'이라는 극찬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Mahalia Jackson~! 목석도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투터운 입술과 거구, 그리고 흑인. 누가 보더라도 전혀 노래를 부를 것 같지 않은 그녀의 외모로 인해 '과연 저 여성이 노래를 불렀단 말인가'라며 의구심과 호기심, 궁금해 공연장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Mahalia의 콘서트에 한없이 침몰하다 결국은 같이 눈물을 흘리고 만다.
거구의 몸을 겨우 지탱하면서도 늘 깍지낀 손을 다소곳이 모아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영혼 깊숙히 몰입해서 눈물을 흘리며 영감으로 노래를 부르는 마할리아 잭슨~ 하나가 되어 같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청중들~ 출신이나 성장 배경, 외모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늘이 주신 목소리와 영혼이 담긴 천상의 노래로 그녀는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행복을 안겨 주었다.
그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자 정치민주화와 경제민주화에 생애를 바쳤다. 그는 불의에는 강하되 약자에는 따뜻한 품성이었다. ‘투사’의 이미지 때문에 흔히 극단적인 인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는 혁명보다 개혁, 투쟁보다 참여를 선택한 민주주의자였다. (한승동)
김근태는 말했다. “나는 정직과 진실에 이르는 길을 국민과 함께 가고 싶다. 정직하고 성실한 99%의 사람들이 무시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고 믿는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정치가 다만 현실일 뿐이라면 개선과 개혁은 어떻게 가능하며, 왜 우리가 피흘리며 군사독재와 싸워야 했는가.”
이명박의 반동적 ‘민간독재’에 분노를 터뜨리며 ‘2012년의 결단’을 추구했다. 2010년 가을부터 그의 말투는 어눌해지고, 거동이 불편해진 데다, 두 어깨가 굽어져갔다. 고문의 깊은 트라우마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민주화의 훈장’이라고 덕담을 건넸으나 결국 그는 ‘훈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모든 고결한 혼들은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까뮈) 그대로였다.
그가 생애를 두고 추구하는 목표가 민주주의였다면, 병마에 쓰러질 때까지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인간의 존엄’이었다. 민주주의적 ‘목표’는 인간존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수단치였다. <한겨레> 성한용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담론과 슬로건’을 묻자 “경제의 인간화라고 할까,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정책을 도입하자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근태를 비롯하여 수많은 선각(지)자들, 무릇 권력을 탐하는 쿠데타 패거리가 아닌,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혁명가와 민주인사들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만이 ‘인간의 존엄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근태가 군부독재 시절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진 것이나, 정치판에 진출했던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해서였다. 그리고 탁류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냈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불변의 가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애착은 종교의 엄숙주의에 가까웠다. 그가 운명했을 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민주주의자 김근태’란 정명을 붙였다. 그에게 하나의 수식어만 주어진다면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민주주의자’다. 그래서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덧붙이거니와 김근태가 추구한 본원적인 가치는 ‘인간의 존엄’이었고, 민주주의는 이를 위한 수단이고 외피였다. 그의 말과 글과 행위를 분석하면, 인간을 경외하고 인권을 존중하면서 소외된 사람들을 보듬는 따뜻한 속살이 드러난다.
장관으로는 처음으로 소록도를 방문하여 한센병 환자들을 껴안은 것이나, 서울역 노숙자들을 찾고 노숙을 체험한 일 등은 입이나 구호로만 떠드는 사람들의 ‘소외계층 사랑’과는 격이 달랐다. 지난날의 힘겨웠던 삶이 내면을 깨끗하게 하고, 내면에 꽉찬 휴머니즘이 ‘인간의 존엄’으로 배양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인류의 발전이나 문명의 진보는 ‘인간의 존엄’을 향한 긴 여정이다. 모든 철학ㆍ사상ㆍ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고 확산하기 위한 것일 터이다. 천부인권, 주권재민, 사인여천이 모두 이에 속한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1494)가 <인간의 존엄성에 관하여>(1486)를 간행하여 이슈로 제기한 이래 학문과 철학, 종교적으로 연구가 지속되었다. 대표적으로는 프린스턴 대학 교수 조지 카텝이 근년에 쓴 <인간의 존엄성>이다.
카텝은 “인간의 존엄은 인간 개개인이나 인류 전체의 정체성에 부여된 실존적 가치”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존엄이 도덕적 가치가 아닌 실존주의적 가치라는 주장이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존재 자체도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문제는 실존적이다.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은 개인 혹은 인류의 적절한 정체성에 대한 인식, 즉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개인, 그리고 다른 종들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인류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을 강조한다.”(조지 카텝 지음, 이태영 옮김, <인간의 존엄>, 말글 빛냄)
이제 마무리 하자. 김근태의 이름에는 동시대의 인물들과는 크게 다른 실존적 울림이 담긴다. 젊은 시절 그는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한다”며 독재와 싸우고 모진 놈들을 만나 지옥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스노부들이 판치는 정치판에서 정권교체와 정치개혁에 온몸을 던졌다. 많은 일을 이루었으나, 정상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하지만 삿된 정상보다 그의 길과 역할은 훨씬 값지다.
그의 생애는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민중의 아픔, 민주주의의 상처를 자신의 상처로 겪으면서, 반동적 권력 그리고 시대의식이 없는 도구적 지식인ㆍ정치인들과의 힘겨운 싸움이었다. 두려움 없는 저항정신과 사심없는 비판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심했으나, 따뜻한 심성과 깨끗한 도덕성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2012년을 점령하라”는 유언과 함께 대회전을 앞두고 파란많은 생을 접었다.
64세, 아직 할 일이 많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범인들이 600년을 산대도 하기 어려운 일을 다하고 갔다. 새는 떠나도 울음소리는 남듯이, 그는 실존적 긴 울림을 국민들 가슴에 남긴 채 홀연히 떠났다. 어느 죽음인들 애절함이 없으련만, 김근태 선생의 때 이른 죽음에는 애절함과 더불어 통절함이 묻어났다. 많은 국민이 애통해하였다.
아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도 벵갈 출신의 작가 타고르의 시, <혼자서 걸어가라>를 김근태 선생의 영전에 헌사한다.
혼자서 걸어가라
당신이 불러도 그들이 대답하지 않거든 혼자서 걸어가라. 그들이 면벽한 채 움츠리고 떨고 있다면 오, 고독한 이여, 마음을 열고 혼자 외쳐보라.
황야를 건널 때 그들이 당신을 버리고 떠난다면, 오, 고독한 이여, 가시밭길을 내딛고, 붉은 피를 흩뿌리며, 혼자서 걸어가라.
폭풍이 몰아치는 맘 그들이 빛을 밝혀주지 않는다면, 오, 고독한 이여, 고통의 번갯불로, 당신 가슴에 불을 붙여라. 그리고 홀로 타게 내버려두라.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결식이 민주사회장으로 엄수된 3일 서울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노제가 열리고 있다.
김근태는 11월 27일부터 여러 장기의 기능이 동시에 떨어지면서 회복불능 상태에 빠졌다가 30일 새벽 5시 31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장례 절차는 그의 동지ㆍ후배들의 뜻에 따라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발인제는 3일 오전 7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미사와 영결식은 당일 8시 30분부터 명동성당 본당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사망 소식은 많은 국민에게 충격과 아픔을 주었다. 연말 연초의 혹한에도 시신이 안치된 서울대병원에는 수많은 조문객이 찾아와 애도하였다. 그러나 국가 폭력의 하수인 이근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추모객 1,000여 명이 참석한 영결식에서 강론을 맡은 함세웅 신부는 “착한 사람들이 악인의 피로 발을 씻고 그 보복당함을 보고 기뻐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르기를, ‘과연 착한 사람이 상을 받는구나. 하느님이 계셔, 세상을 다스리시는구나’ 하게 하소서.”(시편 58. 10~11)라고 기구하였다.
3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하관식이 엄수되고 있다.
운구 행렬은 청계천 전태일 다리와 민주통합동 도봉갑 지역위원회 사무실에서 노제를 지내고, 오후 1시 30분 고인의 생전의 뜻에 따라 민주화의 동지 전태일, 문익환 등 130여 명의 민족ㆍ민주열사가 묻힌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의 ‘민족ㆍ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생전의 친구 조영래의 옆 자리였다.
활짝 웃고 있는 고인의 모자이크와 “2012년 투표하라. 참여하는 사람이 권력을 만들고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민주주의자 김근태”라 적힌 걸개그림이 세찬 바람에도 찢기지 않고 버티었다. 고인의 꿋꿋한 의지를 닮은 듯 했다. 추모문화제과 영결식에 참석한 시민들은 “우리 모두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고 입을 모았다.
<경향신문>은 사설 <민주화운동의 큰 별 김근태를 보내며>(12월 31일)에서 “그는 정치개혁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했다. 정치권에서 그는 진정성의 정치를 실천한 몇 안 되는 존재였다”면서 “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사람’이 되고자 늘 삼가는 모습을 보였다”고 추모했다.
<한겨레>는 사설 <‘인권’, 영면한 김근태의 영원한 희망>(1월 4일)에서 “그의 영면으로 말이 많은 빈자리가 한없이 크지만, 오히려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유지가 눈 속의 댓잎처럼 더욱 시퍼렇게 살아나”는 까닭을 전하고, “전기 고문 속에서도 그가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치, 곧 민주주의와 인권의 희망이었다. 이제 누구인가. 그가 남긴 그 희망을 품고 전진할 이들은” 이라고 생자들의 의무를 일깨웠다.
영국의 권위지 <더 타임스>는 1월 3일치에서 5단 크기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신문이 한국 정치인 부고를 한 면의 3분의 1 이상을 할애해 취급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기사에서 그의 민주화 투쟁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도 30일치 인터넷판에 부고 기사를 싣고, “그의 얼굴에 늘 보이는 미소는 그가 독재정권에서 당했던 고문 흔적을 가렸다”고 썼다. 19대 총선에서 도봉구민들은 고인과 함께 민주화투쟁에 헌신해온 그의 ‘바깥사람’ 인재근을 국회의원으로 뽑았다.
고 김근태동지를 대신하여 인권상을 수상하는 인재근의원
고인의 업적을 기리는 일은 사후에 진행되었다. 고문생존자 단체 ‘진실의 힘’은 “제2회 진실의 힘 인권상”을 고인에게 수여하기로 결정, 2012년 6월 27일 부인 인재근 의원이 남편을 대신해 받았다. 인재근은 수상소감에서 “김근태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였을 것” 이라며 “고문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법안을 만들려고 준비 중이며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치유센터도 설립하려 한다”고 말했다.
사법부와 기득권 세력의 비상식을 겨눈 영화 <부러진 화살>을 찍은 정지영 감독은 고인의 고문 실상을 주제로 <남영동 1985>를 제작하고, 석좌교수로 활동했던 우석대학에서는 2012년 9월 7일 <김근태 민주주의 연구소>(소장 최상명 행정학 교수)를 개설하여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종합대학에서 정치인 개인의 연구소를 개설한 것은 이례적이다.
2011년 3월 8일 민주당 내 재야·친노·486 그룹을 망라한 '진보개혁모임' 창립대회에서 김근태 공동대표와 임채정 전 국회의장, 정세균 최고위원 등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총선에서 낙선한 김근태는 보좌진을 해체하고 자동차도 팔았다. 수입이 없어서 비서에게 줄 월급의 마련도, 승용차의 기름값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품성대로 서민의 생활로 돌아갔다. 여느 정치인들처럼 입으로는 ‘서민 대변자’를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귀족 생활을 하는 것과는 격이 달랐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회의나 집회에 참석했다가 귀가할 때면 버스나 전철을 타는 곳으로 투벅투벅 걸어갔다. 주위에서 지인들이 중고차라도 한 대 사주고자 했으나 그는 한사코 반대했다.
“자가용에선 혼자서 나라를 생각했지만 이젠 내 옆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부딪힐 수 있어 좋다”고 말하곤 하였다.
6월항쟁 24돌이던 지난 2011년 6월 10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반값등록금 이행 촉구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시민들과 함께 앉아 있는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모습
김근태는 사망할 때까지 도봉구 창1동에서 살았다. 2004년에 처음으로 매입한 집이었다. 70년대에는 부천시 신곡동과 신내동에서 살다가 1980년 5월 인천남구 구월동, 1983년 5월 부천시 역곡동으로 이사하였다. 서울시민이 된 것은 1986년 3월 강북구 수유2동으로 전입하면서였다.
이어서 수유2동과 수유3동의 전세로 전전하고, 1995년 10월 말 형의 집 근처인 도봉구 창1동으로 이사하여 2000년까지 7년을 살았다. 김근태의 가족이 전세를 면한 것은 2000년 4월 재선 뒤 창1동의 삼익빌라를 매입하면서였다. 김근태는 이 집에서 6년여를 살다가 운명하였다.
앞에서도 잠깐 소개한 적이 있지만, 김근태는 3선 의원과 장관, 집권당 대표를 지낸 정계의 중진인데도 그의 집은 평범한 서민생활 그대로였다. 부부가 함께 물욕이나 사치ㆍ호사와는 거리가 멀었고, 젊은 시절부터 노동자ㆍ서민과 더불어 살겠노라 다짐해온 의지의 소산이었다.
김근태는 정치권에서 신분과 위상의 변화에도 도덕적 결백성을 지키는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모진 박해와 정치적 격랑에도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도덕적 결백성’ 때문이다. 그는 지식인의 엄격성과 정직성을 신조로 하면서 스노브(속물)들이 판치는 정치판에서 “때 묻지 않은 영혼”을 지켜냈다.
김근태는 매년 9월경이 되면 몸살ㆍ열병을 앓았다. 1985년 9월에 고문을 당한 이후부터다. 멀쩡하다가도 9월이 되면 거짓말 같이 열병이 도져서 열흘 쯤 앓는다. 이때가 되면 각별히 조심을 하고, 정치활동의 일정도 느슨하게 잡았다. 병마가 서서히 다가왔다는 신호였다. 2006년에는 파키슨씨 병 증후군이 나타났다. 약을 계속 먹어서인지 병세가 크게 진전되지는 않았다.
병세가 악화된 것은 2011년 가을이다. 뇌정맥혈전증이란 진단이 나왔다. 몸 상태가 안 좋아 MRA를 찍으니 뇌졸증과 비슷한 것으로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가 있는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병이라 했다. 혈압도 높지 않고 하여 의심조차 안 했던 병이다.
뇌정맥혈전증은 신경계 교란으로 생긴 것인데, 보통 전기고문을 받으면 신경계 교란이 생긴다. 외국 의료잡지에도 논문이 실렸다고 한다. 10월 중순까지도 언론 인터뷰를 하는 등 그렇게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건강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상 손수건을 들고 다닐 정도로 만성비염을 앓고 있었다. 남영동에서 고문을 당할 때 고춧가루 탄 물을 코로 너무 마셔서 만성비염이 생긴 것이다.
김근태는 12월 초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딸의 결혼식을 서둘렀다. 남달리 사랑했던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지만, 병세의 악화로 끝내 딸의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10년 만에 정권 탈환에 성공한 이명박 정권은 거칠 것이 없었다. 검찰ㆍ족벌언론과 3각편대를 이루면서 퇴임 뒤 향리로 내려간 전임 대통령 노무현(과 일가)에 대한 융탄폭격으로, 끝내 그를 투신자살의 길로 내몰았다. 이어서 노무현 국민장의 뙤약볕 아래 3시간을 버티었던 김대중 전대통령도 얼마 뒤에 서거하였다.
여기에 두 전임 대통령과 함께 반독재 민주세력의 정족(鼎足)을 이루었던 김근태마저 병석에 눕게 되었다. 진보민주 진영은 3년여 사이에 민주화의 3대 축을 잃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