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프지 않아야 한다고 단단히 결심을 했다.

몸이 아파서 쓰러지는 것은 정치군부에 대한 두 번째 패배가 될 것이다.

남영동 고문에 불복한 것에 뒤이은 또 다른 패배가 될 것이다.

나는 두 발로 버텼다. 나는 자생력을 믿었다.

 

봄과 함께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은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

이제 남은 것은 심하게 옭죄는 두통이다.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 않는 것뿐이다.

 

지난 4월초 구치소 의무과는 스크린 테스트(개략검사)로 가슴과 머리 사진, 피검사, 소변검사를 했다.

의무과장은 이상이 없다고 말해 주었다.

우선 다행스런 일이다.

 

그렇다면 이 견딜 수 없는 두통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게 하고자 했다면 타이밍을 놓쳐 버린 것일 게다.

 

보다 엄밀한 진료와 검사가 필요한 단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죄어 오는 아픈 머리와 푸석하게 부은 두 눈으로 이 글을 써내려간다.

그러면서 나는 은근히 걱정한다.

이 두통과 부조화들이 정신적 외상으로 인한 신체적 반응 증상은 아닌가 하고.

 

전기와 물고문의 그 고통, 공포와 혼란으로 입은 정신구조의 깊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혹시 이을호씨가 앓고 있는 그것을 나도 부분적으로 가슴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나의 가슴앓이를 지그시 누르면서 또한 박영진 형제의 가난한 죽음 앞에, 경원전문대의 한 학생의 분신,

그리고 서울대의 두 학생의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항의에 부끄러운 옷깃을 여미면서, 울컥 치솟는 뜨거운 것을 꾹꾹 누르면서,

내 얘기를 내 사건이라는 것을 이것저것 따져 보고 짚어 나가겠다.

 

정치군부는 재판에 끊임없이 간섭하고 장애를 조성했다.

그렇게 하여 재판부 판사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였고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85년 12월 19일 첫 공판 기일 이래 매 공판 때마다 법원구내와 주변에 많은 정, 사복 경찰병력을 배치시켜

삼엄한 분위기를 고의적으로 만들었고, 문익환 선생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을 불법적으로 자택에 감금시켜 방청하지 못하도록 했다.

 

미국에서 급거 날아온 두 명의 변호사 역시 기만과 강박으로 인해 방청을 봉쇄당했다.

한 사람인 에이미 영 미법률가협회 총무는 공판기일에 법원 구내까지 들어왔다가 방해받아 방청하지 못했다.

구치감 앞에 머문 지프차에서 내리는 나를 먼 발치서 바라보고 난 후 곧 강압적으로 어디론가 안내되었다.

자칭 미대사관 직원이라고 하는 건장한 사내들에 의해 사실상 끌려간 곳은 공안연구소장 김경한 검사 앞이었다.

김 검사는 말했다고 한다.

 

"남영동에 있을 때 변호인 접견이나 조력을 요청하지 않았다. 고문 받지 않았다.

만일 고문 받은 사실이 판사에 의해 인정되면 석방될 것이다.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물론 자기의 외래의사 진료와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프지 않다."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이 뻔뻔한 거짓말 중에 그래도 꼭 하나 사실과 맞는 얘기가 있다.

그렇다. 나는 변호인의 조력과 접견을 요청하지 않았다. 못했다.

 

그러나 어떠했을까?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한심한 작자라고 구박받으면서 한 차례 더 전기고문, 물고문이나 당하지 않았을까?

 

재미동포들과 우리의 미국 친구들을 대신해 대표로서 이들이 찾아왔다.

비열한 고문행위에 항의하고 재판을 방청하려 했던 인권 변호사들의 목적은 효과적으로 막혀졌다.

이 고문, 이 사건에 대한 국제적인 주시, 비판을 정치군부는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아주 능률적으로 차단해 버린 것이다.

 

정치군부는 협조라는 이름으로 신문사 사주, 편집국장을 협박하여 남영동 짐승들의 고문에 관한 것은 전혀 기사화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공판정에서는 많은 기자들이 열심히 메모를 하는 데도 고문에 관한 것이나 중요한 쟁점은 보도되지 않았다.

 

이는 언론자유를 침해한 것일 뿐 아니라 재판의 공개주의를 훼손시켜 버린 것이다.

개개인의 방청자유는 물론 현재 대중사회에서는 재판에 대한 보도자유가 보장됨으로써만

국민은 재판이 성실하게 행해지는지의 여부를 감시하고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공개주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어용보도기관인 KBS와 연합통신을 동원하여 사실을 왜곡, 날조함으로써 사전에 관제여론재판을 강행하려 시도했으며,

그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고문 사실의 일부가 노출된 이후 KBS등은 더욱 기승을 부렸는데,

이것은 맞붙어 자름으로써 고문은폐 효과를 거두고 의도된 정치보복을 최종적으로 완수코자 한 것이었다.

 

서성 판사는 공판정에서 이 사건이 신문, 방송에서 보도된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것에서 만들어진 편견에서 해방되느라고 무척 힘들었다는 의미의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정치군부와 관제언론에 의해 만들어지고 강요된 편견 속을 헤매었으며,

남영동에서 각색된 피 묻은 서류에 파묻혀 영원히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서성 판사를 비롯하여 재판부 전원이 아주 깊숙이 침몰돼버린 것이다.

 

1심 재판에는 예단과 편견배제의 원칙을 저버리고 공정성을 잃어버림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연합통신 제공으로 반 강요된 기사가 각 일간신문에 획일적으로 크게 보도되었고,

KBS 뉴스시간에 여러 번, 거기다가 2회에 걸쳐 40여분짜리 나 개인에 관한 특집 기획물까지 만들어 방영했다.

 

이것은 정치군부 보복의지가 얼마나 강렬한가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른바 이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군부 보복의지 강도의 문제이다.

이 우렁차게 선포된 강고한 의지 앞에 재판부는 뼛속까지 얼어 버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성 판사는 공소제기일로부터 제1회 공판기일까지 근 두달여 동안 단독결정으로 가족면회를 금지시켰다.

검찰에서 묵비고수 때문이라는 것이다.

묵비권 행사가 죄증을 인멸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아닌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군부가 고문증거를 인멸할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그 진정한 이유다.

공소제기 전, 경찰, 검찰수사 단계에서도 역시 두 달 가까이 가족은 물론 변호인까지

서로의 만남이 완전 봉쇄되었던 것을 잘 알면서도 내린 이 결정은 잔인한 것으로서 그 자체가 무효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친밀한 인간적 만남 속에서 비로소 존엄성와 가치를 누릴 수 있으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서성 판사의 이러한 결정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차단당하고 만 것으로 바로 헌법 제9조 위반이다.

그러나 뭐 위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처음부터 논리나 양식 그런 문제는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성 판사는 제1회 공판기일부터 공연히 방청권을 발행하여 가족과 민주인사들의 재판 방청을 사실상 방해했고,

그럼으로써 고문을 규탄하고 항의하는 분위기를 삭히는데 누구보다 노력했다.

 

아무런 이유없이 방청인 수를 대폭 제한하였으며, 그나마 절반정도는 기관원 또는 그렇게 동원된 사람들에 의해 점거되게 했다.

이렇게 하여 오히려 일정한 긴장을 유발시켜 놓고도 방청에 제한당한 사람들이 소란을 피운다는 명목으로

법정 경찰권을 동원해서 잔인하게 제지를 가하는 결과를 빚어지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나의 처 인재근은 경찰의 폭행으로 졸도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제1회 공판조서의 기재내용이 지나치게 부실하여 이에 대해 변호인도 나도 이의제기를 하고 시정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이랬다.

 

"다른 사건에서는 피고인이 이익되는 진술을 30여 분 해도 고작 한 두줄 정도로 기재하는 것이 현행 관례다.

개선되어야 할 관례지만 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충실한 편이었다"고.

 

나는 첫 공판기일에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을 아주 짧게 줄여서 말했다.

그런데 그것을 극도로 줄였을 뿐 아니라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기재하여 고문사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정도였다.

거절을 수긍할 수는 없었지만 갈 길이 멀고 멀어서, 또 고문을 참혹하게 하고서는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정치군부를 의식한 판사들이 안되어 보여서, 그 정도로 하고 지나치기로 했다.

 

증인 심문 단계 중간쯤부터 서성판사는 공정성을 저버리고, 유죄를 예단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증인에게 두서없이 던졌으며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집시법 부분에서 거론한 최민화 씨 증언시에 서성 판사는 다음 같이 증인에게 물었다.

 

"왜, '민주화의 길'의 논설을 의장만 쓰는가? 그렇게 하면 영향력이 의장에게 집중되지 않느냐."

 

당시 서성판사의 뉘앙스까지 합쳐보면 민청련 운동은 거의 나 혼자 해온 것처럼 인상을 지우면서

동시에 사건을 은폐하려는 저의가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예단이니 편견배제니 그런 것을 넘어선 도전적이고 적대적인 것이었다.

 

나는 울컥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을 누르면서 '참자, 또 참자' 고 자신을 억누르면서

'논설은 의장단이 써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아서 결국 나에게 부담으로 돌아온 것" 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학생들처럼 엎어버리지는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서 '참고 넘어가 주자' 고 하며 그냥 지나간 것이 지금에서는 몹시 억울하다.

점잔을 뺀 것이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시쳇말로 쪽은 쪽대로 팔려 버렸으니......

 

서성 판사는 내가 제출한 탄원서에 대한 변호인의 열람을 거짓말로 따돌렸다.

활용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까지 힘을 다해 남영동 고문을 생생하게 기록했었다.

탄원서라는 이름의 서류에.

3월 4일. 선고 날 이틀 전에 아마 재판부에 도착했을 것이다.

 

선고가 있은 후 닷새째 날인 3월 11일, 변호인은 이 탄원서의 열람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서성 판사는 "이미 소송기록을 보냈다"고 하면서 따돌렸던 것이다.

앞뒤 사정을 봐도 그렇고 검찰의 말을 들어 봐도 그렇고, 이미 소송기록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거짓말로 열람요청을 방해한 것이다.

 

이것은 작전이었다.

그 작전을 모른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패대기쳐진 것이다.

완전히 해낸 것이었다. 치밀하게. 그리하여 훌륭하게 여러가지 현실적인 고려를 하고 대처하여 서성 판사는 승리했다.

 

 

본래 이 사건에 대한 의혹과 고문에 대한 광범한 분노를 잘 읽고,

형식 또는 절차는 주고(그것도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문사실은 안되고), 내용은 완전히 꼴깍 먹어치운 것이다.

 

그럼으로써 '짱' 박아두었던 '충성'이 매우 빛을 발하게 되었으며 정치군부의 승리를 남영동. 검찰에 이어 또 한번 튼튼하게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 공로에 대한 보답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 정부에 대해 위헌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현 정부는 자극을 받아 외교통로를 통해 일본정부에 대해 협의를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외교부 부대신이 “이미 청구된 문제는 1965년 한일 기본협정으로 다 해결됐다” 고 주장했다.

일본의 궤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의 딱한 사정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봄에 발생한 대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 사고, 그리고 중국에 추월당한 국제적 위상과 최근의 신용등급 강등은

여러 측면에서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다.

노다 수상이 새롭게 일본을 맡게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미일 안보동맹강화를 지지한다는 목소리 이외에는 들리지 않는다.

 

일본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 원인이 있다.

그 중 세 가지를 주목한다. 신자유주의, 탈아입미(脫亞入美), 관료주의다.

 

 

90년대부터 미국을 모방해 시작된 일본의 신자유주의는 고이즈미 전 총리시절 정점에 이르렀다.

그 오랜 신자유주의의 결과는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2011년 재정 악화와 신용등급의 강등이다.

 

 

두 번째로 미국을 추종하는 ‘탈아입미’ 노선이 일본의 발목을 잡았다.

‘탈아입미’는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었던 20세기 후반에 유용했지만 21세기엔 그렇지 않음에도 일본은 변하지 못했다.

 

21세기의 미국은 스스로 금융위기를 자초하고 20개의 국가들을 불러 모은 G20으로

문제를 미봉책으로나마 해결해야하는 수준으로 약화되었다.

자민당 일당 장기집권을 청산한 민주당 정권교체가 ‘탈아입미’를 ‘탈미입아(脫美入亞)’로 바꿀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사그라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관료주의에의 포획이 문제다.

사실 일본에서 신자유주의와 ‘탈아입미’ 노선은 관료를 통해서 전파되고 계승된다.

20세기 일본경제신화의 주인공인 관료들은 21세기 일본의 재앙이 되어있다.

 

일본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일본이 측은한 만큼 우리의 처지도 애처롭다.

 

 

이명박 정부의 미국에 몰입하는 외교노선과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추진, 그리고 관료에 포획된 정치라는 상황은 일본과 비슷하다.

그리하여 일본과 비슷한 일들이 한국에서도 벌어진다.

과도한 친미외교로 대외 영향력의 약화, 양극화의 심화와 재정의 악화, 관료를 극복하지 못하는 선출된 권력의 무력감이

한국에도 나타나고 있다.

만약 이런 추세가 지속되고 한나라당의 노선과 정책이 혁명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채 박근혜 전 대표가 정권을 잡는다면

한국의 제2의 일본화는 더 가속될 것이다.

 

문제는 민주당이다.

솔직히 이명박 정부는 민주당 10년의 민심이반으로 탄생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시절 IMF위기 극복 등의 여러 이유로 신자유주의가 한국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되었음을 인정하고 반성해야한다.

 

 

그러한 반성과 성찰 속에 집권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비전과 대안이 명확하지 않은 채 반MB정서 덕분에 정권을 잡는다면 다시 정체와 좌절이 찾아올지 모른다.

 

 

진정 승리하고 싶은가 !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되돌아보고 성찰로 김대중·노무현 정신을 계승하자.

대선에서의 승리를 함께 모색해야하듯이 승리 이후의 비전과 대안에 대해서도 함께 길을 찾자.

우리를 먼저 열어야 승리도 우리에게 길을 열어줄 것이다.

 

2011년 9월

김근태

 

7. 선택하라! 선택하라!

 

말하기 거북스런 것이 또 하나 있다.

아마 이것은 나의 심약함의 반영이었을 게다.

 

재판부, 변호인, 검사, 나, 방청객, 신문기자 모두가 반 정치군부적 분위기 속에서 암묵적으로 의사가 통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게다가 법정 구성의 당사자들은 거의 서울대 출신들이었으며,

재판장인 서성 판사는 경기고등학교 4년인가 선배라는 말에 뭔가 기대를 건 적이 있었던 것이다.

 

웃기는 얘기겠지만 난 사실 그랬다.

육사 몇 기로 뭉쳐서 설쳐대는 저 정치군부들의 흉내를 내고 싶어 했던 것일까.

정치군부가 자기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서 어떻게 작용을 가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할 수 없는 내가,

조금만 양식이 있으면 누구의 눈에도 보이는 이것을 나는 얼마동안 눈감아, 애써 눈감아 외면했던 것이다.

그 대신 아주 사소한 끈에 매달리려고 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이건 시궁창에 빠져 버린 쥐새끼처럼 참담해지고 만 것이 아니겠는가.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마음을 돌려 앉혀놓고보니 오히려 잘된 점도 있는 것 같다.

나에 대한 판결은 기본권 보장이니, 실체적 진실 발견이니 또는 사법적 정의실현이니 하는 주절거림으로부터

'깨어나라, 꿈을 깨라'는 통렬한 타격이었다.

 

사실, 하려면 이렇게 빨가벗고 나서서 "재판부는, 판사는 정치군부 편이다"고 선언해 주는 것이 속 편하다.

처음에는 분기탱천하는 바가 없지 않았지만, "아! 결국 당신들은 역시 그렇구나"라고 인정하면서 깨끗하게 끝낼 수 있었다.

더 이상 공연히 알쏭달쏭하게 만들고 헷갈리지 않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지난 4월 13일 전후 이곳 구치소 전 사동은 낮에도 밤에도 열기와 함성으로 들썩들썩했다.

병사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 나는 늘 형광등 신세를 벗어나지 못해 어리벙벙했지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화려한 송별식이었다.

터져 나오는 통곡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예 처음부터 재판과는 담을 쌓았던 '민정당 연수원 사건' 관련 학생들의 형이 확정되던 날 시작된 것이었다.

전국 각지의 가막소로 실려 나가는 날 아침까지 학생들의 아우성은 솟구쳐 올라왔었다.

 

이들의 목소리에 방 창문을 열고 귀 기울이면서 나는 미안한 마음이 되었다.

과격하고 무모하다는 비난을 흠뻑 뒤집어쓰면서 학생들이 싸우고 있을 때 재판 속을 헤매고 있던 나 자신을 되돌아봤다.

학생들에 대한 정치군부의 야멸찬 매도, 핏대올린 선전이 귀가 따갑게 울리는 동안

학생들은 외침으로, 떨리는 가슴으로 대치해왔던 것이다.

이런 학생들을 나무라는 점잖은 사람들이 있는 줄 안다.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나에게 있다.

가막소 벽에, 구치감 벽 여기저기에 쓰여있는 글을 보면서 학생들의 가슴에 새겨 있는 한숨과 외로움을 나는 보았다.

 

'군사독재는 물러가라', '민주주의 만세', '민주화운동은 승리한다', '서민생계 보장하라' 등이 시멘트 벽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서울대 학우여 투쟁하라', '고대, 연대, 성대, 이대, 서강대, 숙대 학우여 나서라!' 등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당신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바인가? 그렇지 않다.

당신들은 그 글자는 알지만 거기에 쓰여있는 눈물과 설레임은 모르는 것이다.

당신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졸전을 벌였다고 공박을 받은 무하마드 알리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들이 링사이드에서 찬 맥주를 마시면서 낄낄거리고 있을 때, 나는 배에, 턱에 강력한 주먹을 얻어맞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헉헉거렸다. 당신들은 이 고통, 이 외로움을 알 수 없는 얼간이들이다"라고.

 

이 말을 점잖은 당신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일단 정치군부에 찍히면 그것으로 결정난 것이다.

그 이후는 하나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나같이 뒤통수 얻어맞고 꿈을 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들 학생처럼

분식행위, 가식적절차를 처음부터 거절해 버리는 사람도 있다.

서성 판사의 승진소식을 들으면서 선뜻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넉넉한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도 있지만 따져봐야할 것이 있어서다.

 

아마 능력이 있고 충분한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정치군부의 요구와 기대대로 재판 결과가 마무리된 때문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보다 공정한 재판 결과가 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잘 모르는 일이다.

서성 씨에 대해서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그 개인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서 법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이 사실상 형해화 되어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다시 말하면 정치군부에 유리하게 했는가 아니면 불리하게 판단을 내렸는가가

법관 인사조치에 영향을 미치고 또 그렇게 추측되는 상황에서 자유심증주의는 매우 위험한 도구로 전락돼버리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엿장수 마음대로, '오야' 마음대로, 결국은 정치군부 마음대로

민주화 실현을 저지하고 국민을 탄압하는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벌써 그렇게 돼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법관의 인적, 물적 독립이 훼손되어 있는 상황 아래에서 법관 개인에게, 개인의 양심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정치군부가 맹렬하게 제기하는 사건에서 법관은, 법관의 양심은 피고인이 된 민주인사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라도 법관 자신의 안전에 대한 고려가 작용하여 유죄로 예단하고 추정하게 될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자유심증주의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앙상레짐을 타파하고 자유, 평등, 박애의 인류라는 이상을 드높인 불란서 대혁명 정신인 합리주의의 다른 표현이다.

전체적, 자의적 왕권지배, 규문주의적 재판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 획득된 원칙이다.

 

그런데 이 자유심증주의가 정치군부 독재 아래에서는 인권을 탄압하는 그럴 듯한 원칙으로 타락되어버린 것이다.

이번 나의 재판도 그 경우의 하나일텐데,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이렇다.

 

최민화씨가 증인으로 증언하고 있을 때,

서성 판사는 '민주화의 길'에 실려있는 '80년 서울의 봄에 대한 반성과 평가'에 대해 나에게 질문했다.

"그 글을 누가 썼는지 말할 수 없습니까? 대표라면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게 여겨 할려고 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공판정에서 어떤 심문에도 진술을 거부한 적이 없었는데도 이처럼 느닷없이 도발적인 질문을 한 것은

법관이 '심리 도중에 피고인으로 하여금 유죄를 예단하는 취지의 말을 한 경우'(대판 74. 10. 16. 74모68)가 되어

당연히 기피신청의 사유가 되고, 예단과 편견배제원칙을 위배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자유심증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치군부는 사실상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번 법관의 인사는 그것을 더 한층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현직판사로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나갔던 사람들, 청와대 비서관을 했던 사람이

법원의 여러 요직에 발탁되어 임명되고 있는 것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정치군부의 또 다른 혹심한 탄압이 무르익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하며, 유죄를 99.5% 강요,

이제 거의 100%까지 올리고야 말겠다는 결의의 표명, 전 세계 최고기록을 달성하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도 해석해야될 것이다.

 

폭력적 경찰, 나아가서 검찰이 야만적 정치군부의 하수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유신시대에서 본 것처럼, 5. 17과 광주사태 이 후 경험한 바와 같이 법관도, 법원도 이미 정치군부의 품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잇는 것이다.

 

거듭 소용없는 일임을 시퍼런 두 눈으로 확인해 가면서도.

정치군부의 폭력적 본성을 논리라는 당의정으로 겹겹이 싸 바르는 지식인들이여 ! 법관들이여 !

이제 당신들은 최종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우리시대의 대의인 민주화실현 대오에 설 것인지, 아니면 끝끝내 정치군부 옆에 서서 영원히 민족과 역사의 저주를 받을 것인지 선택하라 !

 

선택하라 !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당신들의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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