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서울 구치소의 겨울



지난 겨울을 지독히도 추웠다.

더구나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버림받은 것 같은 이곳 감옥이 춥지 않을 리는 없는 것이지만,

나는 정말 두 다리 와들와들, 온몸을 떨면서 지내 왔다.

나는 병동 아래층 맨 끝, 북쪽 방에 밀어 넣어졌다.

방의 북쪽 벽에는 얼음이 빙판처럼 깔리고, 저녁 형광등 불이 깜빡거리며 들어오면

얼음은 비수처럼 새파랗게 곤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매트리스 밑은 흥건하게 습기가 차 한겨울에도 곰팡이가 슬고,

두 겹 비닐로 막은 창문은 매서운 칼바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습기가 차다고 가막소 간부들에게 얘기해 봐야 헛일일 뿐이고, 우이독경이었다.

칼날처럼 매섭게 얼어붙은 벽을 가리켜도 그것은 한낱 엄살일 뿐이고 마이동풍이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아무 소리도 없었던 것과 진배없었다.

내 얘기는 처음부터 귀를 꼭 틀어막도록 지시를 받았거나, 의논하여 합의 결정한 것으로조차 보였다.

85년 9월 4일 미명,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꺼내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던 나를 변호인들이 처음 만난 것은 3개월 5일만이었고,

내 처와 형제들은 그러고도 열흘 뒤 첫 공판이 열린 다음 날부터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뜨거운 눈시울, 매캐해 오는 콧속, 그리고 치받치는 목메임에서 그냥 뜨겁게 쳐다보다가,

그러다가 말문을 열어 고문에 대해 지칠 때까지 얘기를 헀다.

 

이러기를 며칠 한 후, 당시 내 몸이 워낙 안 좋고 보행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데다가

날씨마저 혹독하게 추워 걱정이 된 가족과 변호인들은 내 감방사정을 자꾸 물어보았다.

 

망설이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얘기를 했다.

사실대로 말하면서 나는 이를 견디어 내기로 작정하였음을 밝혔고,

내 방안의 추위와 얼음에 대해 문제제기하지는 말라고 웃으면서 얘기했다.

헌데, 이튿날 구치소 직원 두 사람이 내 방에 들어와 북쪽 방벽을 만져 보고,

곰팡이가 아우성치고 있는 매트리스를 들쳐 보곤 조금은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울러 넌지시 방을 옮길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나갔다.

 

그 후 간부 한 사람이 올라와 전방 얘기를 꺼내기에 "인심 한번 쓰려면 후하게 쓰라"고 말했다.

마침 건너편인 7방은 비어 있고, 공간도 비교적 넉넉하여 그걸 요구했다.

내가 있는 8방은 겨울 해와는 완전히 원수지간으로 햇볕 꼬랑지 하나 구경할 수 없었지만,

이 7방은 오후가 되면 햇볕이 비쳐 들어 왔다.

내가 7방에 눈독을 들인 이유는 바로 이 햇볕 때문이었다.

외로움과 추위 속에서 햇볕은 은혜처럼 축복같이 날아드는 것이다.

낙관적인 느낌도 동반해 오고.....

이유는 언제가 그렇듯 잘 모르겠지만, 난색을 표하면서 8방과 거의 똑같은 조건인 9방을 말하였다.

이들이 방을 바꿔줄 생각을 한 것은 아직도 학대행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비난이

바깥 사회에서 제기될 근거에 대한 우려 때문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나는 9방으로 옮김에 대해서는 거절했다.

얼마 전까지 징벌을 받던 사람이 살던 방이었고, 정신 질환자를 수감하느라고 부착했다는 조그만 구멍이 뚫린 쇠철판을 붙이고

완전히 밀봉해 놓은 컴컴한 방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추운 북풍 들이치는 8방에 그냥 있는 것이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8방도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고 꽉 막힌 정신질환자 수용독방이었다.

내가 이 가막소에 온 즉시 8방에 들어갔는데, 그렇게 숨통이 조여지는 듯한 어두움 속에서 두 달여를 보냈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이 8방에서 고문으로 인한 상처로 끙끙 앓으면서 나는 요구했고, 호소도 했다.

결국은 화를 잔뜩 내고서야 11월말 경에 쇠철판을 제거하고 바람이 통하는 창문을 얻어냈다.

그토록 어렵게 얻어 낸 흐르는 바람을, 창문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눈치 챈 그 사람들은 9방을 뜯어 고쳐 여닫을 수 있는 창문을 닫고 쇠철판을 뜯어냈다.

12월말 경 9방으로 이사했다.

추위야 별 차이가 없었지만 맨살로 부딪치는 북벽을 갖지 않는 것이 기분상 훨씬 좋았고,

무엇보다 습기가 8방보다 덜차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병사 하 9방의 내 매트리스 밑에는 습기가 고이고 곰팡이가 피어나지만,

이곳은 큰 체하는 간부들이 말하는 특별 권력관계가 작용하는 곳이니까, 여기는 사회가 아니니까,

그까짓 습기와 그 정도 곰팡이는 더불어 같이 살기로 결심을 했고 그 심정 탄탄히 지켜내고 있는 중이다.

12월 중순 경쯤일까, 병사 아래 위층 15~16개 방 모두에 조그만 구공탄 난로를 하나씩 피워 주었다.

그런데 나 혼자 그 혜택에서 제외되었다.

병사 하 9방은 지옥이고 나머지 방들은 천당처럼 바라다 보이기도 했다.

다른 방 사람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녹이고 가슴의 외로움도 녹였으며,

성령처럼 내려 앉는 햇볕에 다시 행복해지는 모습을 나는 본 것 같았다.

 

거기에다 얼굴이 벌개지는 난롯불을 한 가운데 두고 둘러앉을 수도 있었으니, 끝내주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아픈 분들 방에 난롯불을 놓은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나만 빼놓은 이 서러움,

그 옆에서 어느 순간 번쩍하는 숨겨진 적대감을 보곤 내 가슴의 추위는 더 매서워져 갔다.

 

사람이 계속 바뀌어서 정신 질환자들이 7방 또는 8방으로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과 나는 지난 겨울 내내 영원히 저주받은 동토의 나라에서 살았다.

어느 땐가 꼭 두 번, 내게도 난로 좀 놔 달라고 간부들에게 요구를 했다.

 

모 계장은 이렇게 말했다.
"난로는 병약자들에게만 놓아주는 것이다.

당신같이 건강한 사람까지 놓아준다면 전 사동 재소자들에게 다 놓아주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예산이 없다."

순간 나는 몸 속에서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부들부들 노여움으로 몸은 떨려오고 '당신도 인간이냐, 나의 부서진 이런 모습을 보면서,

늘상 누워있는 나를 당신의 두 눈으로 보지 않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애써 목소리를 누르면서 무겁게 뱉어냈다.

단식과 아우성 등 싸움과 싸움을 통해서 학생들이 따낸 보온 수통도 나는 제외시켰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지급했다고 한다.

85년 12월 13일, 고문당할 때 생겼던 발뒤꿈치 상처딱지를 폭력적으로 강탈해 가던 날,

이미 지급했던 감옥 담요 4장조차 도로 빼앗가 간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비인도적 처사,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대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지만

난 당시 싸울 기력이 없었다.

그저 물러서서 이미 입은 상처가 더 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인간 도살장이었던 남영동에서 이곳 서대문구치소로 온 9월 26일 이후 한 일주일쯤 지나서였을까.

9월 13일에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은 이후 나는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식욕은 물론 없고 이가 모두 흔들리고 아파서 씹을 수 없었고, 소화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여기 가막소에서는 죽을 나눠 주었다.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 있담.

그래도 여기는 살만한 곳이구나' 하면서 죽을 오랜 시간 걸려서 천천히 먹었다.

그런 나에게 이 모 주임이라는 사람이 병사 하층을 담당한 사람을 시켜,

또 담당은 이른바 소지를 시켜서 '죽은 떨어졌으니 밥을 주라'는 지시를 했다.

별안간 밥이 나와서 소지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담당에게 얘기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애걸하다시피 죽을 달라고 매달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없다'고 차갑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밥을 먹으려 해도 먹을 수가 없어서 국물만 좀 마시고 짬밥으로 고스란히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시를 받은 담당은 복도 내 방 옆에 몰래 붙어서 밥을 먹나 숨어서 지켜보았고,

식구통으로 나오는 짬밥에 손이 갔는지를 확인하는 숨결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하루 정도 나에게 밥만 주었다.

그러니까 강제로 하루를 굶은 꼴이었다.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이 담당은 투덜거리며 내 방 옆을 떠나갔었다.

 

아! 그때 이 사람이 내뱉은 한 마디, 그것은 내 가슴에 상처를 만들어 버렸다.

듣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이 담당은 나에게 "씨발 새끼"라고 욕을 하면서 멀어져 갔는데, 내가 왜 이런 욕을 먹어야 하는지,

그것을 멀거니 듣고도 해댈 수 없는 나의 상시의 쓰러져 일어나지 못함이 아주 쓰라렸다.

나에 대한 조직적인 학대는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근래까지 이 상처를 잊지 못해 그 담당과 주임을 미워했었다.

이제는 용서하기로 작정을 해버려 괜찮게 되었지만.....

이 모 주임이라는 사람은 그 후에도 공연히 나에게 두어 번 시비를 걸고 욕설을 해대곤 했다.

구둣발 채로 내가 누워 있던 방으로 들어서기까지 했다.

간부인 자기가 순시하는데 내가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면서 모욕을 가했다.

내 몸과 마음의 상태가 누워있을 수밖에 없다며 양해를 구해도 막무가내였다.

멀쩡한 사람이 꾀병을 부린다고 욕을 하면서 나보고 애비도 없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나도 견딜 수가 없어서 같이 싸웠고, '불과 나보다 댓 살 많은 당신같은 애비도 있느냐!'고 조롱도 해주었다.

이 사람이 본래 냉혹하고 염치를 모르는 철판 깐 사람이기도 했지만,

위로부터 은연 중에 오는 모종의 신호에 맹목적으로 충성하고자 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참 우스운 것은 이젠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서 이 사람과도 그럭저럭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가막소 간부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멀쩡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의사들은 비교적 성실하게 진찰하려고 했다.

지금은 그만둔 어떤 의사 한 사람은 특히 더 그러했다.

일부터 나를 불러내서 살펴보고 약도 지어 주었으며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기도 했다.

 

나는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큰 약이었다.

당시 소생하는, 소생하려고 발버둥치는 나에게는 이 의사의 선의가 무엇보다 효험있는 치료였다.

그러나 이런 선의들이 자꾸만 차단되고 거부와 외면의 몸짓으로 돌아서 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가막소 의무과에서는 내게 10여병의 링거와 영양제를 놔 주었다.

처음 실려서 업혀 왔을 때 몇 병 맞고, 증거 보전 신청이 제출되었던 시점 이후,

사회적으로 내가 고문받은 사실이 알려진 이후 몇 번을 더 맞았다.

가끔 어지럽고 두통으로 시달릴 때는 그저 하루분 정도의 진통제, 아스피린, 수면제 등을 얻어먹고 견디곤 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건강하고 멀쩡한 사람으로, 다만 병사에 격리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내외에 발표되고 선전되었다.

의료보호 또는 도움으로부터 사실상 버림을 받았는데 나는 이것을 시정시킬 기력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도 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85년 9월초 남영동에서 전기고문, 물고문에 못견뎌, 나는 발가벗기고 두 눈이 가려진 채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면서

항복한다고 용서해 달라고 두 손으로 빌었다.

그때 고문자인 김수현, 백남은, 그리고 전기고문 기술자 잎에 번졌던 소리없는 웃음, 그 웃음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아니, 이 하수인 뒤에서 충혈된 두 눈으로 낄낄거렸을 이 폭력적 정치군부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인간 파괴자들을.......

그런데 나는 이들에게 살려달라고, 아니 곱게 죽여달라고 애걸복걸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이들 박해자들의 소매에 매달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두 번 다시 입지 않겠다고 말이다.

 

일제하에서 옥사했던 윤동주, 이육사를 그리며 나는 시인도 못되고 이 서대문 가막소에서 죽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죽어 갈지도 모르는 내 모습을 단단히 지켜보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인간적 긍지를 다시 세우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그리고 올바른 의료 제공,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싸워야만 할텐데, 당시 나는 심신이 거의 무너진 상태였고

기력이 없었으며, 고문당할 때 엄습해왔던 공포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대항할 수가 없었다.

또 그런 부딪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상태가 악화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병사 하층 8방의 내 이불 속 깊숙이 들어가 그 속에서 혼자 깊게 앓았던 것이다.

다만 10월초, 중순경부터 내 발뒤꿈치에 났던 상처, 고문으로 인한 유일한 외상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고 의사와 이곳 간부들도 보자고 했다.

정치권력은 의사의 진료행위를 이용하여 고문의 유일한 외적 증거를 수시로 확인하고자한 것이다.

처음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도 않았던 부위에 대해 한두번도 아니고 여러 번 여러 사람이 보자고 하는 데에도 넌덜머리가 났다.

그리고 그 가증스러움이라니!

변호인단이 제출한 고문 증거보전 신청과 내 처 인재근과 민주활동가 여러분의 고문 폭로 규탄 때문에

정치군부의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어떻게 해서든지 고문을 완벽하게 은폐하기로 결정내렸을 것이다.

만일 정치군부의 열렬한 희망과 기대에 반해 나에게서 어떤 충격적인 음모나 내막이 폭로되었다면

그들은 뭐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 하며 태연스럽게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더우기 고문의 역력한 증거를 내 처인 인재근과 이을호 씨의 처 최정순, 김상철 변호사

그리고 여러 검사들이 두 눈으로 명백히 보았고 이에 따라 민주인사 여러분들의 뜨거운 분노와 항의에 부딪쳤던 것이다.

 

이른바 국가보안법으로 제대로 엮지 못했던 것이다.

궁지에 몰린 정치군부는 단단히 결심했을 것이다.

고문을 완전히 은폐하고 관계 언론을 동원해서 내 주위에 수상쩍은 분위기를 형성하도록 말이다.

이야말로 '방귀 뀌고 성내는' 격이었다.

철저하고 완전하게 은폐하기 위해서 나는 아프지 않아야 했고, 치료를 받지 말아야 했으며, 받을 필요 또는 없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 동안은 누구와의 만남도 봉쇄되어 고문사실과 그 증거가 확인되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발 뒤꿈치 상처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가족과 변호인은 물론 이곳 가막소 내의 누구와도,

일반 제소자까지 절대로 말을 주고 받지 못하도록 봉쇄되었다.

내가 있던 8방의 앞 7방과 9방은 비워 두거나 정신이상자들만 수용함으로써 그 차단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던 것이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4>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기사입력 2011-07-05 오전 9:10:33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을 만났다. 김근태 고문은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리고 지난 15, 16, 17대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력 정치인이기도 하다. 또한 현재 민주당 진보개혁모임의 대표로서 민주당의 개혁을 위해 여러 세대 정치인들과 시민사회를 규합하고 이끄는 수장이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수식어보다 그를 더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지난 겨울 방현석의 '당신의 왼편'에서 만났던 그 김근태를 만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신의 왼편'은 1980년대 반독재와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했던 사람들의 아픔, 사랑, 고뇌들에 대한 가슴 저릿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던 소설이다. 역사기록물이 아닌 소설에 특정인이 실명으로 언급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그 소설에 김근태가 실명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엄혹했던 시절, 김근태란 존재는 그만큼 어떤 이에게는 희망을, 또 어떤 이에게는 투쟁의 단어를 떠올리게 했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그를 만나러 갔다.

인터뷰 내내 그는 매우 고뇌에 찬 모습으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그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특히 민주당의 개혁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단호했다.


"민주당이 반한나라당 전선에 자신을 위치 짓고, 현 정권을 심판하는 국민 정서에 안주해서 그로 인한 승리를 향유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서민과 중산층을 위하는 정치노선과 정치를 과감하게 실천해야 한다. 정권교체를 위해선 야권과 한나라당이 일대일 구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결단을 해야 한다. 기득권을 양보하는 모습. 또 진보정당들과 시민사회와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결단하고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냐는 드러날 것이다. 그 토론의 과정에 충실하게 임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민주당 내에서 대혁신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프레시안(최형락)

그리고 무비판 · 무검증 하의 박근혜 대세론이 가져올 위험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표했다.


"박근혜 대표의 경우 지난 대선 후보 경쟁에서는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를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평생 맞춤형 복지, 생애주기형 복지 등을 주장한다. 이 두 주장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 사이의 간격을 검증하고 물어야하는데, 언론도 그렇고 전문가들도 그렇고 국민들도 그렇고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이 간격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거야말로 포퓰리즘이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이 평사원에서부터 기업의 CEO가 되었기 때문에 서민과 충산층의 삶을 잘 이해하고 이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지'라는 기대 속에 대통령에 당선 되었듯이, 그럴 것이라는 추측 속에 검증 없이 지도자를 뽑는 과오를 2012년에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 그는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주요 정치인으로서 여러 번에 걸쳐 자기 반성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잃고 중산층과 서민들이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든 것에 말할 수 없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가 처한 구조적인 한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의 실수와 실패로부터 온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을 극복할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나름대로 반성하고, 고민을 많이 하는데 잘 안되고 어렵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그의 사과를 받고 있는 것 같아, 또 왠지 꾹꾹 눌러둔 그의 속울음을 듣고 있는 것 같아 미안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땅의 청년들에게 죄송스럽다는 말과 함께 라는 '"함께 분노하고 계속 싸우자"라는 이야기를 남겼다.


"사실 지난 정권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제도를 물려준 것이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청년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래서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 하지만 청년들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정치인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도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하고 도전을 해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것을 극복할 힘이 생긴다. 분노할 것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행동이다. 나도 함께 분노하고 계속 싸울 것이다. 분노하자."

그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내내 1980년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희망을 싹틔웠던 그의 분노가 2011년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가슴에도 동일한 희망의 불씨가 되어주길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다.

자유에 대한 생각을 여쭙고 싶다.

ⓒ프레시안(최형락)
근래에는 자유에 대한 생각을 좀 하는데 사실 이전까지는 자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온 것은 아니다. 우리세대에 자유라 함은 타는 목마름 내지 그리움이었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자유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났다. 이발사가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상황, 말하자면 말할 자격이 박탈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유라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존재케하는 그 어떤 의미였었다.

하지만 자유주의하면 좀 느낌이 다르다.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사회 각계각층이 자유롭게 사유하고, 각자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주화에 의해 확보된 자유의 공간 속에서 이른바 권력, 재산 등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권한과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한 이념적 도구로 자유주의를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 하면 연상되는 것이 부패한 언론, 검찰, 재벌, 관료, 뉴라이트 등이 연상이 되어서 좀 상종 못할 그룹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계의 지도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고민하지 않은 채, 국민들의 정서는 전혀 고려치 않고 뚱딴지 같은 이야기만 계속 하고 있다. 최근 언론에 드러나는 것처럼 자기들이 내는 법인세와 재산세는 감세를 지속할 것을 요구하면서 학생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반값등록금 요구는 포퓰리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단적이 예이다. 오히려 재벌은 감세로 이익을 누리고,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할 사회적 책임인 교육투자는 국민고통으로 전가하는 이중적 무임승차자다.

국민들 속의 화합이나 통합, 타협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봉쇄하는 사람들, 이런 그룹들이 자유주의 깃발을 든다. 한 예로 한국의 검찰이 있다. 근래에 벌어지고 있는 저축은행사건에 대해 국민적 비판 여론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왜 발생했는지, 혹시 권력형 비리는 아닌지 등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경찰과 검찰 간의 수사권을 둘러싼 갈등에서 기선을 잡기 위해, 자기들이 보호해야 할 서민들의 고통을 볼모삼아 자기들의 권한을 확대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것은 국민들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연유 때문에 자유주의는 아직 한국사회에서 긍정적인 흐름을 갖추고 뿌리를 내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사실 자유인이라는 단어는 어려서부터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 학교 교훈이 자유인이었다. 이 단어에 담긴 함의가 너무 크고 복잡해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학교 조례 등에서 자유인이라는 구호를 외칠 때는 당혹스러웠다. 다만 교정에 4.19혁명 때 목숨을 잃은 분 두 세분의 기념물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앞에 서면 자유인은 저렇게 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유를 떠올리면 죽음이 연상되 곤혹스럽고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자유'하면 죽음을 연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위해 싸워왔던 것인가?

자유를 위해 싸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사실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한국사회가 낙원 같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좀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민주화 운동 내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공포가 있었기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는데, 민주화를 이루어내기만 하면 지난 100년 동안 수많은 희생과 고통을 겪은 한반도의 오천만 내지 칠천만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도래할 거라고 생각했다. 관념적으로 그런 희망과 기대를 가슴에 품고 '그렇다면 내 비록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것이 정말 보람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왔다.

그렇게 민주화는 나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화두였던 것에 반해, 자유는 민주화로 인해 얻게 되는 열매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즉, 민주화를 이루면, 그 세부 항목인 자유는 자연스럽게 획득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싸워온 것 같다. 그것이 민주화를 위해 싸워왔던 70년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자유에 대한 감각이 아닌가한다.

김근태에게 "자유란?",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자유는 우리세대에게 타는 목마름으로 그리워하는 대상이었다. 공포,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공포의 시대로부터 해방되기 바라는 것. 그렇게 자유는 소중하고 그리운 것이었다. 그래서 자유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가 없다면 생명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근황에 대해 여쭙고 싶다.


ⓒ프레시안(최형락)
운동을 열심히 한다. 놀고 땀 흘리고 운동을 많이 한다. 일주일에 한 반 정도는 도봉구에 내시 환관 묘 수백 개가 방치되어 있는 초안산에 올라갔다 온다. 요새 같은 날씨에 한번 올라갔다오면 땀에 흠뻑 젖는다. 주말에는 축구 동호인들과 함께 축구를 한다. 작년까지는 골을 꽤 넣었는데 요즘엔 골이 도통 들어가지 않아 고심이다.(웃음)

가끔 시간이 나면 지난 민주정부 10년을 돌아보고, 그 때 우리의 한계는 무엇이었고 실수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본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생각해보고 유사한 실패나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공부를 한다. 그런데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최근 4.27 재보선 결과와 관련하여 특별히 민주당에게 주문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2010년 6.2 지방선거와 올해 4.27 재보선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었다. 민주당에게는 정치적으로 축복된 선거결과였다. 하지만 두 번의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족해서는 안 된다. 사실 지난 승리는 민주당이 잘해서라기보다 부자정당인 한나라당을 심판하고자 하는 유권자들이 그 비판의 일환으로 민주당을 선택한 경향이 컸다. 따라서 민주당이 반한나라당 전선에 자신을 위치 짓고, 현 정권을 심판하는 국민 정서에 안주해서 그로 인한 승리를 향유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서민과 중산층을 위하는 정치노선과 정치를 과감하게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4.27 재보선과 지자체 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민생문제가 절박하다. 이 민생문제를 완화하고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당은 이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현 민생문제를 돌파해나가야 한다. 지금 반값등록금도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는 의무급식, 무상급식이라는 내용이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그리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정책을 민주당이 자신감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당이 중도진보적 성향을 띠긴 하지만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선택할 때마다 여전히 내부적으로 진통을 겪는 것 같다. 민주당이 진보적, 개혁적 정책노선을 선택하도록 하는 동력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나?

민주당의 정책, 또는 민주당을 견인하는 힘은 국민들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이번 4.27 재보궐선거는 비교적 성공적이었고 승리를 했다고 본다. 하지만 작년 6.2 지방선거 이후 치러진 7.28 재보궐 선거의 경우 민주당이 참패를 당했다. 국민들이 공감을 하거나 국민들의 가슴에 감동이 있다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선거로 드러난다. 그러나 정치공학적으로 문제를 풀고 접근을 하면 국민들에게 절대로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런 감동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기득권을 포기하는 모습에서 국민들은 감동을 받는다. 지난 4.27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순천에 무공천을 한 것 등에서 국민들이 야권 승리를 향한 민주당의 진정성을 느낀 것이 아닌가 한다. 감동은 그런데서 나오는 것 같다. 이번 4.27 재보궐선거도 한나라당 정권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라 생각한다. 그 배경에는 이명박 정부가 권력을 이렇게 사용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민주당이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선택하도록 견인하는 것은 민주당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회를 향한 국민들의 요구, 이를 추구하는 정당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민주당은 스스로 개혁하고 기득권을 포기하는 모습을 통해 국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준비하며 야권통합 논의가 활발하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내년에 총선이 있고 대선이 있다. 총선과 대선을 통해서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한 번의 정권교체, 다시 말해 세 번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절박한 민생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수출대기업에만 이롭고 국민들이 피부적으로 느끼는 물가는 폭등하는 고환율 제도나 부동산 버블의 원인이 되는 인위적 저금리 등의 정책을 고쳐 나아가야 한다. 정권교체를 통해서 철학과 마인드를 바꾸지 않으면 이러한 정책의 변화를 이루기 힘들고, 민생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보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경제의 구성주체 중에 재벌과 부자들을 우선 고려하고 있다. 진정으로 민생문제를 해결 하려면 경제정책운용의 철학적 기저를 거시지표 중심의 '국가경쟁력'보다는 국가 구성원 하나하나가 경쟁력을 갖추는 '국민경쟁력'에 기초하는 경제구조로 바꾸어야 한다.

한국이 놓인 국제사회 현실에서 보더라도 냉전 이후 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냉전이 지속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중국, 여기에 친미세력과 친중세력이 동아시아에서 갈등을 하고 있다. 한국은 상당한 딜레마에 놓여 있다. 한국은 그간 정치경제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확대 심화,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최근에 경제관계에서 중국과의 교역이 획기적으로 늘고 인적교류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는가, 물론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것만 바라고 이에 대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2012년 총선과 대선은 큰 변화, 즉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상과 관계를 고민하고 추진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정권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치비전의 정책연합을 기초로 통합과 연대의 과정을 이루는 원탁테이블의 구성을 통해 한나라당과 1:1구도를 만들어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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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정치인들이 당장의 정치현황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반해, 국제적인 시각으로도 한국정치를 조망하시는 것 같다. 이유가 있나?


폼 잡는 거다.(좌중 웃음)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이라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한반도의 평화나 동아시아의 협력과 공동번영을 이루어 낼 수 있기 위해서는 중국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한 방향으로 치우친 정책은 실패로 돌아간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 상황 시 그에 대한 준비와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은 한반도의 밝은 미래를 위한 당연한 준비이고 최소한의 의무라고 본다.

동아시아 협력에 관련해서도 한국과 중국 일본은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이다. 천안함 사건 이후 일본의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가 좌절되었다.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에 의한 후쿠시마 원전 사태도 만약에 편서풍이 아닌 편동풍이 불었다고 한다면 한반도와 중국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2008년 미국의 리먼브러더스 금융회사 도산 이후 한국의 경제지표는 그나마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수출시장으로서 중국시장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을 고려하여 국제관계에 대한 정책을 고민하고 수렴해 나아가야한다. 미국과 중국이 동아시아 내에서 패권적 경쟁을 하게 되면 현재의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년 총선과 대선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협력과 공존, 번영의 시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정권이 되어야 한다. 6자회담과 같은 채널을 통해서도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그것을 디딤돌로 활용할 수 있는 고민도 함께 해야 한다.

현 정권이 그렇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그렇다면 한반도의 평화 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정권을 잡아야 할 텐데, 과연 정권교체가 가능할까?

국민들이 현 정권 및 여당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5년 전 참여정부, 열린우리당의 경우에도 민심을 잃어버렸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질적'으로는 지금이 더 악성인 것 같고, 민심을 잃어버린 '정도'로 보면 그 때가 더 심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은 민주당이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민주당이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권교체를 위해선 야권과 한나라당이 일대일 구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이 총선에서 다수당이 될 수 있고,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결단을 해야 한다. 어떤 결단인지는 국민들의 가슴 속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일정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결단을 해 낼 수 있어야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감동을 줄 수 있는 결단이란? 혹시 생각하고 있는 히든카드가 있는지?

히든카드 그런 건 없다.(웃음) 예를 들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난 4.27 재보선에서 순천을 무공천 했다. 김해를 결국 양보를 한 것이다. 또 한나라당한테는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분당 지역구에 민주당 대표인 손학규 대표가 입후보하는 것 등이 모여서 전체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된 것 같다. 기득권을 양보하는 모습. 또 진보정당들과 시민사회와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결단하고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냐는 드러날 것이다. 그 토론의 과정에 충실하게 임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민주당 내에서 대혁신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2012년 대선을 맞아 박근혜, 손학규 등 여러 인물들이 대선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 필요한 리더십을 꼽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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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기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압도적 다수의 사회경제적 약자, 그리고 아주 소수의 사회경제적 강자 간의 대타협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아닌 상호 존중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말 그대로 G2의 책임과 역량을 동아시아에서 건설적으로 기여하는 방안과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리더십이다. 또 6자 회담을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동아시아 협력에 기여할 수 있는 리더십, 이러한 비전을 갖고 이해하고 그 필요성을 채울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표의 경우 지난 대선 후보 경쟁에서는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를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평생맞춤형 복지, 생애주기형 복지 등을 주장한다. 이 두 주장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런 차이를 국민들에게 해명을 해야 하는데, 해명도 안 되고 설명도 안 되는 부분이다. 이 사이의 간격을 검증하고 물어야하는데, 언론도 그렇고 전문가들도 그렇고 국민들도 그렇고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이 간격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거야말로 포퓰리즘이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이 평사원에서부터 기업의 CEO가 되었기 때문에 서민과 충산층의 삶을 잘 이해하고 이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지'라는 기대 속에 대통령에 당선 되었듯이, 그럴 것이라는 추측 속에 검증 없이 지도자를 뽑는 과오를 2012년에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대선 시기가 되면 대권주자로 부각되어왔다. 대선과 총선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어떠한지?

대선은 밑천이 다 떨어졌다.(웃음) 중요한 것은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여당의 중요한 정치인 중 한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잃고 중산층과 서민들이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든 것에 말할 수 없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가 처한 구조적인 한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의 실수와 실패로부터 온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을 극복할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나름대로 반성하고, 고민을 많이 하는데 잘 안되고 어렵다. 또 중요한 점은 지도자가 중요하지만 메시야 같은 지도자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한국사회가 이전의 양김처럼 그런 정치적 영웅을 만들어내는 토대는 이미 사라졌다.

개인의 리더십보다는 '우리사회가 정말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가, 또 어떻게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고 그에 대한 대안을 분명히 제시하는 정당과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또 정당과 지도자들은 스스로 그렇게 할 때, 국민들에게 자신을 선택해 달라는 요청과 부탁을 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지만 국민들로부터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미래상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오래 전부터 한국은 작은 미국이 아닌, 큰 스웨덴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미국처럼 소득도 높고 영향력도 강한 미국이 되자는 바램이 한국의 엘리트 및 시민들 사이에 두루 퍼져 있는 것 같다. 많은 엘리트들이 자신의 출신 대학이 미국인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미국화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국민들도 미국처럼 잘 살았으면 좋겠고 영향력이 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미국 시스템이 가져오는 빈부의 격차 심화나 이로 인한 사회불안정성은 사회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다. 반면, 스웨덴은 금융위기 이후에도 경제성장률이 괜찮았고 국민들 사이에서 화합과 통합이 어느 국가보다 잘 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스웨덴 유형은 언제부터 생각하셨는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2006년도였는데 스웨덴 모델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이전인 1998년도부터였다. 1998년도에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취임사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배정되었다. 거기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두 수레바퀴로 합의를 구하자'는 주장을 당선자가 했는데, 당선자가 없는 자리에서 '민주주의와 민주적 시장경제'라고 하자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혼자 주장하다 물러서고 말았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시장경제,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불안전성 이런 것을 다른 수레바퀴인 민주주의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즉, 시장이 가진 폭력성을 경제시스템 내에서 제어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민주적 시장경제다. 김대중 대통령도 71년 대통령 선거 때는 대중경제라고 해서 시장경제의 폭압성, 폭력성을 제어하기 위한 제어장치를 두자는 주장을 했었다.

그래서 1997년 IMF 위기가 왔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IMF가 요구하는 것은 마치 미국과 유럽의 채권은행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국민들을 희생시키는 것이라며 재협상을 요구했다가 기득권 세력에 총공격으로 대선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래서 결국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IMF와 맺은 합의를 꼭 지키겠다고 서명하고 말았는데 굴욕적이었다. 이런 과정들을 겪으며 스웨덴 모델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의식이 당시 일부의 경제학자들에게도 있었는데 한국 사회 전반이 미국식으로 경제시스템을 만들자는 생각이 팽배해서 논의가 힘을 받지 못했다. 근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확산력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다.

ⓒ프레시안(최형락)

말하자면 미국식 모델보다 유럽식 모델이 우리에게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 시스템보다는 북유럽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 더 적합한 모델이라고 보는 이유는 우리에게 힘이 없는 다수와 가진 것이 많은 소수가 대타협을 해 나아가자는 시스템이 다른 그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유럽 시스템에는 사회협약, 사회합의의 구조와 정신이 배겨있다. 그런 제도들을 통해 우리 사회시스템에 대해 논의를 함으로써 우리의 제도적 시행착오를 줄이고 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토대로 한국 고유의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데,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 사회 시스템을 보니 한국의 시스템으로도 적합하다는 생각이다. 스웨덴 인구가 천만명 정도인데 한국은 오천만명, 남북한 합치면 칠천만명 정도되니 동아시아의 큰 스웨덴이 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미국식이냐 스웨덴식이냐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아직도 미국이면 옳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미국 시스템 중에서 배워야할 것들도 많이 있지만 잘못한 것들도 많다. 미국은 스스로 예외주의 국가임을 자청하며 이라크 전쟁도 안보리의 합의 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의식 없이 미국에 대한 관성적이고 무비판적인 선호 혹은 지지는 곤란하다.

유달리 대타협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시는 것 같다. 솔직히 나와 뜻이 다른 사람들과 싸워 이기는 것보다 그들과 대타협을 이뤄내는 것이 더 힘든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승리를 얻어내는 것보다 대타협을 이뤄내는 것에 더 고도의 정치력이 필요한 것 같다. 한국 사회의 여러 세력들 간의 깊은 골을 극복하고 대타협을 이룰 방안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는가?

연세대학교의 모 교수가 '한국 사회같이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적 상황이 발생되지 않는 것이 참 기적이다'는 말을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혁명적 상황이라는 것은 적대적 관계가 노골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소득불평등, 재산불평등 정도가 악화되고 더욱이 부자감세로 더 악화되고 있다. 노인의 46% 정도가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고, OECD국가 중 한국의 자살률은 1위이다.

이런 고통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은 더욱이 분단 상황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적 분위기가 고조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이런 고통스런 사회를 지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각자 양보를 해가며 절충과 타협을 해 나아갈 것인가를 물어보았을 때 절충과 타협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나아가는 것이 훨씬 훌륭한 선택이다. 혁명적 갈등 상황은 인간을 망가뜨린다. 이런 고통스런 사회를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변화는 기본적으로 힘이 있어야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정치인들은 어떻게 이런 힘을 집결시키고 운용해야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최근 관심사나 흥미를 가지고 계신 것은?

요새는 축구를 하는데 골을 못 넣어 속상하다. 컨디션이 안 좋거나, 킥을 하는 순간 발의 각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를 운동장에서는 고민을 하는데 막상 운동장을 벗어나면 또 잃어버린다. 어쨌든 골이 들어갔으면 좋겠다.(웃음)

그리고 우리 사회가 자유롭게 꿈을 꿀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1등부터 100등까지 서열화해 놓고 1등이 나머지 99명을 먹여 살린다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100명 모두가 각각의 고유한 꿈을 꿀 수 있는 넉넉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요즘 계속 생각하고 있다.

결정적일 때 골이 잘 안 들어가서 고민이라는 답을 들으니 지난 몇 번의 선거가 연상된다. 축구라는 것이 전후반 내내 열심히 뛰어도 골을 못 넣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인데, 선거를 축구라 비교하면, 매번 대선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대선후보가 되지 못했던 것이나, 또 지난 2002년 대선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양보한 것이나, 지난 총선에서 신지호 한나라당 후보에게 진 것이나. 결과적으로 골 결정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것이 아닌가. 그 때마다 마음이 어떠했나?

사실 2002년 대선 민주당 경선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라 포기한 것이었다. 고통스러워서 경선을 할 수 없는 마음 상태였고, 내 실력이 거기까지였다고 본다. 대선에서 당시 노무현 의원이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 대통령 본인의 역량이 컸던 이유도 있었지만 크게 두 가지가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지역주의와 싸우기 위해 당선이 보장되는 종로를 떠나 부산에 출마해서 떨어지는, 정치적으로는 어리석지만 국민들의 가슴에는 감동을 주는 그의 정치여정이 공감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호남 유권자들이 당시 이회창 후보가 당선돼 사실상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영남후보가 주목을 받으면서 영남에서 표를 모으고 호남이 단결하면 이회창 후보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을 수 있다는 집단지혜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시 내 가슴 속에서는 노무현 후보보다 내 자신이 후보로 더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라고 보는데, 우선 내가 나라를 더 잘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노무현 후보 쪽으로 전개되었는데 그에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 사퇴를 하였다.

지난 총선에서의 실패는 쓰라렸다.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많이 앞서있었고, 계속 추격되긴 했지만 총선 사흘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상당히 앞서있었다. 상황이 엄중하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는데 그 엄중한 정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참여정부나 열린우리당에서 바른 선택과 바른 길을 주장해왔었다고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권자와 국민들에게는 나도 지난 정부의 지도자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에서 당대표도 하고 장관도 했다. 따라서 나 역시 지난 정부의 실패에 대해 궁극적으로 책임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뉴타운 열풍이 분 탓도 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1.1%라는 간발의 차이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의 심판이었다. 가슴이 많이 쓰라렸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프레시안(최형락)

민주화운동의 아이콘, 민주주의 투사로서 청춘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투사로서의 김근태가 아닌 청년 김근태까 꾸었던 꿈과 낭만에 대해서 알고 싶다.


가슴을 열어야겠다.(웃음) 며칠 전에 가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들었다. 낭만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요소다. 마치 기름칠을 하지 않으면 기계가 뻑뻑하게 돌아가다가 결국 멈추게 되고 말듯이, 낭만은 한 개인과 사회를 부드럽게 돌아가게 해주는 윤활유와 같은 것이다. 나는 사실 60년대 중반세대인데 당시 한국에서 세시봉 이야기라고 해서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와 같은 사람들이 유명하였고 이 사람들의 노래도 유행하였다. 비틀즈가 유행하였고, 무하마드 알리도 유명했다.

무하마드 알리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무하마드 알리가 캐시우스 클레이라는 본명을 바꾼 것에 대해서 미국 언론들, 미국 주류사회가 불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나 또한 미국주류 언론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한국의 학생운동은 베트남 반대투쟁을 내용으로는 담고 있지 않았지만 분위기로는 그 당위성에 대해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하마드 알리는 헤비급 복서로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면서 군대 입영을 거부함으로 인해서 챔피언 자격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자 노력했는데, 한국에서 청년 학생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알리의 이러한 행동을 당연히 찬성하고 지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TV중계로 알리 시합을 볼 때면 오히려 반대편 선수를 응원하곤 했다. 당시 미국 주류사회와 주류언론들이 알리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편한 시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그렇게 일관되지 못하고 모순된 행동을 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

행복했었던 기억은 광나루에 백사장이 있었다. 그 앞에 배에서 음식점을 하는 곳이 있었는데 식사도 팔고 술도 파는 식당이 있었다. 그곳에서 집사람하고 데이트를 하고 프로포즈를 했다. 소주를 마시고 프로포즈를 하고 나오는데 비가 내렸다. 우산이 없어서 비를 흠뻑 맞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앞에 원형으로 된 콘크리트 수로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으로 들어가서 비를 피했는데 그때 전해지는 온기가 참 따뜻했다. 프로포즈도 성공하는 것 같았고, 비에 젖었지만 아내의 체온이 전해지는 것이 행복했다. 당시 지명수배 중이었는데 참 행복했던 기억이다.

지명수배 중에 프로포즈! 그래서 프로포즈에 성공하셨나?

'예스'라는 답은 얻질 못했다. 다만 "노"라고 하지 않았다.(웃음)

현재 꿈이 있으시다면?

북한과 중국의 동북 3성을 왕래하고 방문하고, 그리고 물류를 이동시키는 상황을 꿈꾼다. 그리고 우리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북한도 가난에서 극복되었으면 좋겠다. 동아시아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북한뿐만이 아닌 동북 3성의 조선족, 중국의 한족, 러시아 등과 협력도 하며 머리를 맞대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을 만들어 가는데 한국이 솔선수범할 수 있기를 꿈꾸어본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소수자, 다문화 가정 등 사회적 소수집단이 보호받고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만 시혜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친구로 한국 사회에서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총선에서 떨어지고 한양대와 우석대에서 강의를 했다. 우석대 대학생들에게 등록금 인하 투쟁을 하고 일자리가 제공되도록 정부에 요구를 하라고 하였다. 비유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밥을 달라고 보채야 밥을 준다. 이 사회 기성세대들은 대학생,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청년들을 비인간화 시키는 이런 경향과 세력들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 광장으로, 소셜미디어로 참여하여 분노를 집결시켜야 한다. 반값등록금이 국민의 공감대를 널리 얻고 있는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를 해서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라야 한다. 그래야 개선되고 바뀌기 시작한다.

사실 지난 정권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제도를 물려준 것이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청년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래서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 하지만 청년들이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정치인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다. 청년들이 분노해야 정치인들이 올바른 것을 밀고 나가고, 올바른 것을 실천하기 위해 싸움을 불사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도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하고 도전을 해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것을 극복할 힘이 생긴다. 분노할 것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행동이다. 나도 함께 분노하고 계속 싸울 것이다. 분노하자.

[에필로그]

ⓒ프레시안(최형락)
이런! 마치 우리 맘을 읽은 것처럼 젊은이들을 향해 "분노하라"는 이야기를 거듭하시다니. 사실 인터뷰 가기 전 93살 레지스탕스 영웅 스테판 에셀이 쓴 "분노하라"를 읽었다. 그 책을 읽으며, 또 김근태 고문이 살아온 여정을 공부하며, 스테판 에셀의 삶과 김근태의 삶이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문득 김근태 고문의 나이를 헤아려보았다. 김근태 1947년생. 이제 64세. 스테판 에셀. 1917년생. 이제 95세. 이런 한국의 스테판 에셀로 불리우기엔 그가 아직 너무 젊다. 아직 30년 이상을 더 분노하고 더 뛰어야 한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시간들 동안 그가 어떤 '분노의 성과'들을 이뤄낼지 기대가 되었다. 아마도 그가 말한 것처럼 민주화 이후에 올 줄 알았던 자유, 빈곤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자본으로부터의 자유, 그 자유를 위해 뛰고 있지 않을까. 한국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던 김근태 고문에게 경제적 민주화, 사회적 민주화의 상징 또한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너무 무리일까 걱정했는데, 그가 도리어 우리더러 분노하라고 한다, 또 같이 분노하겠다고 한다. 잘 됐다. 그래서 같이 분노하겠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한국판 "분노하라"와 마침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불어판 "분노하라"를 선물해드렸다. 분노를 공유했는데 기뻤다. 아마도 그건 우리가 나눈 분노가 희망을 위한 분노여서 그랬던 것 같다.

(인터뷰 및 정리: 김경미, 양태성 정치경영연구소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10703135240§ion=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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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땅굴과 엘리베이터

법원 검찰청 밑으로 굴이, 침침한 땅굴이 뚫려 있는 줄은 나는 몰랐다.

감옥 출입이 잦았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얘기들은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건 얘깃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지 모른다.

쇠창살 사이사이에 맺히는 서러움만 얘기해도 끝이 없을 텐데, 이 땅굴까지 포함시키면 필경 지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땅굴 얘기를 좀 해야겠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기록해둘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구치감으로부터 검찰청 빌딩 5층 공안부 검사실까지 걸어가는데 꼭 30분이 걸렸다.

논스톱 엘리베이터를 탔는데도 말이다.

보행을 아주 느리게 할 수밖에 없었고, 계단은 부축해서야 오르내릴 수 있었다.

나는 이 땅굴에 들어서면 늘 환상적인 세계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갈래 길도 있으며 계단도 있다.

가끔씩 흐릿한 바깥 빛이 조금씩 새어드는 데도 있고.

 

그러나 무엇보다 굴 벽 여기저기 걸려있는 노란 불. 이것이 나를 어질어질하게 했다.

여기 들어서면 속이 느글느글해지고, 굴 전체가 왼쪽으로 기우뚱 오른쪽으로 기우뚱 끊임없이 흔들렸다.

이런 것을 롤링이라고 하는지 핏칭이라고 하는지 헷갈리지만, 멀미가 날 것 같아 멈춰서서 벽에 기댄 채 호흡을 조정해야만 했다.

눈을 감고 자꾸 속을 내리 누르면서.

 

어떻게 보면 자베르 경감에게 쫓겨 도망쳤던 장발장의 암담한 하수도 같이 생각되었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악당 무림인들을 쳐부수기 위해 당당하게 쳐들어갔을

무협지 속의 의협심 있는 청년 검술인의 지하통로일지도 모르겠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몸을 피하는 장발장은 분명 아니었고,

불의한 도배를 무찌르기 위해서 짓쳐 들어가는 경천동지할 힘을 가진 청년 검객도 아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장발장과 청년 검객이 짬뽕된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런 수백명 중의 하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 땅굴을 구역질내면서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9월말부터 11월말까지 두어 달 동안. 남영동에서 송치되던 날 말고는 맨 첫 번째로 가막소에서 검찰취조 호출을 받던 날,

나는 앰블런스인가 지프차인가를 타고 구치감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땅굴을 걸어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도관과 더불어 검찰서기의 에스코트를 구치감에서부터 받았다.

이 정중한 배려에 나는 감사하는 마음조차 가졌다.

내가 고문받아 엉망이 된 것을 알고 이런 배려를 해 주는 것인가.

어쩌면 VIP 대접을 하느라고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그런 중에도 기분 나쁘지 않아서 은근히 희희낙락하며 이 땅굴을 통해 검찰청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피의자, 피고인은 모두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데

유독 나는 엘리베이터를 지하층까지 끌어내려 손님으로는 오직 혼자 타고 5층까지 논스톱 직행했다.

어떻게 실수로 1층이나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서 문이 열리게 되면

검찰 서기와 교도관이 엄숙하게 입장금지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오는 짜릿한 그 기분을 누를 수 없어 높은 사람들은 별 희한한 짓도 다하는 것일 게다.

 

내 손에는 벨기에제 특별 수갑이 채워져 있고, 벌건 포승줄이 칭칭 동여매져 있지만 나는 여유있게 웃어 주었다.

혹시 내가 정치인 경력이 있었다면 손으로 V자를 그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조바심쳤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도 약간은 머리가 회전되는 편이어서 이런 특별 에스코트에 '홍이야 홍이야' 하며

잠에 취해 꿈에 취해 계속해서 헤맬 리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태는 분명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철저한 고문은폐 수단이었다.

아니 완전무결한 고문은폐의 예기치 못한 실패로 인해 책임추궁을 당한 검찰이 취한 그렇고 그런 것이었다.

 

이 지하 땅굴을 가끔씩 오가며 학생들, 오랏줄로 꽁꽁 묶여서 더욱 기가 사는 학생들의

아는 체하는 인사와 목소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을 차단하기 위한 권력의 방어조치였다.

고문받은 얘기를 주고받아 그것이 가막소에 퍼지고, 그리하여 바깥으로 흘러나가면 골치가 아프므로....,

 

다른 모든 기회는 완전 차단이 가능한데, 가족, 변호인, 다른 재소자와의 만남은 물론

담당교도관 이외에는 누구도 접근이 봉쇄되는데, 이 땅굴이 성가신 것이다.

 

사실 나는 거기서 많은 학생들과 부딪쳤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정어정 벽을 붙잡고 기어가는 나를 보고 대략 알아봤으며, 큰 소리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슬슬 고문 얘기도 하고 시간은 불과 3~4초 정도씩 밖에 안되었지만 꽤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검찰 서기의 에스코트는 대략 한 달 반 이상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약화되고 흐지부지되기까지 시간이 제법 흘렀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 편 사람들은 마음 놓고 만나서 서로 눈빛도 교환하고 서러운 가슴을 열어보이기까지는 세 달 여가 걸렸던 것이다.

 

그동안 검찰 서기의 에스코트 차단을 포함해서 정치군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던 것이다.

단 한 차례의 예기치 못한 실패를 제외하고 정치군부는 완전무결하게 성공했다.

그러나 단 한 차례의 실패, 그것은 대단히 치명적이었고 그들에게는 큰  정치적 부담이 지워졌다.

고문의 증거, 발뒤꿈치 상처 딱지 탈취사건

85넌 12월 31일. 고의적인 변호사 접견 봉쇄가 풀린 지 닷새가 되던 날, 나는 흥분하여 깊숙이 간직해 두었던,

양쪽 발뒤꿈치에서 아물어 떨어진 상처딱지를 이돈병 변호인과 목요상 의원에게 드리면서 재판의 증거로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이 통할 리 있겠는가.

행형법상 교도관 입회라는 것을 이용, 간섭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지당하고 결국은 강탈당하고 말았다.

그들로서는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고문의 증거가 내 가족이나 민주화운동가 손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해야했고,

그래서 나는 모든 주의를 다했던 것인데 정치군부의 뻔뻔스러움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이 또다시 증명되었다.

 

그토록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고도 또 당했으나, 역시 나는 맹하고 순진한 경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여러 사람이 보았다 하더라도 뭐든지 필요하다면 언제나 깔아뭉개버리는 그들인데도....나는 또 설마 했던 것이다.

정치권력의 수작은 이렇게 성취되었다.

절취의 시도. 실패, 노골적 강탈, 말썽이 생길 소지가 있는 사람들의 사전 인사이동 조치, 그리고 거짓말로 진행되었다.

특권적 군부의 본질이 이 작은 사건에서도 축약되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폭력적 대처와 뻔뻔스런 은폐, 그리하여 끊임없이 불신과 증오를 조장하고 갈등과 대결적 분위기를 반복해서 불러 일으켰다.

절취의 시도는 이랬다.

변호사 접견을 끝내고 내 방으로 돌아와 대략 한 시간 쯤 지나자 면도를 하라며 면도사가 왔다.

보통 병사는 목요일에 면도를 하는데 금요일에 온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또 이상한 것은 다른 때와 달리 방 바깥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다른 방에 있는 재소자들에게 내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언제나 방안에 앉아서 면도를 하곤 했기에 묘하게 생각했었다.

 

문밖으로 나가 앉았더니 다시 내 감방 안을 볼 수 없는 거리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좀 이상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거절할 필요가 없어서 그대로 따랐다.

면도를 시작하자 곧 검방 담당 교도관이 내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옆모습을 보니 얼굴이 굳어진 표정이었다.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서 면도를 중단시키고 내 방으로 들어가니 역시였다.

나는 그동안 모은 상처 딱지를 이들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평범하게 휴지에 싸서

두루마리 화장지 가운데 틈새에 끼워 놓았었는데, 검방교도관은 이미 상차딱지를 싼 휴지를 훔친 다음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변호인 접견시 이들이 똑똑히 보았고. 이에 대해서 즉시 보고를 받은 가막소 간부들과 또 뭐시뭐시들은 절도를 지시받았을 것이고,

그 하수인으로 이 검방 담당관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변호인에게 전달하는 것을 방해받은 뒤 나는 줄곳 불안해 했지만 또 '설마'하고 화장지 틈새에 끼워 놓았으니,

이 교도관이 찾아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던 것이다.

이 배신감이라니, 이 저주받아 마땅한 가증스러움이라니!

얼굴이 확 달아오른 나는 "생사의 고비를 넘어 온 나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교도관은 쩔쩔매고 주저하다가 십 분 정도 지나자 마지못해서 모자를 벗어 자기 이름 써 놓은 곳,

거기에서 휴지를 꺼내어 놓았다.

나는 이번의 절취 시도, 도둑질은 이렇게 막았지만 또 다시 훔치러 올텐데,

특히 내가 없을 때는 어디다 두어야 하나 궁리하면서 막연해 하고 있었다.

이럴 즈음 권력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염치 따위는 벗어 짓뭉개 버리고,

주저하지 않고 강도의 본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서는 나의 상상력,

아니 우리의 양식범위를 간단하게 넘어버리는 본래의 흉측한 모습이 나타는 것이다.

검방 담담 교도관이 물러간지 십여 분이 되었을까, 최덕이라는 주임이 와서 내 방 창문을 열고

"상처 딱지는 불법소유이니 내 놓으라"고 협박을 했다.

 

"사람은 최소한도의 양심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윗자리에서 시킨다 해도 해야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지 않는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나는 외쳐댔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 있겠는가.

시비를 걸고 폭력으로 빼앗도록 지시를 받은 이들은 창백하게 질릴 것도 같고, 겁을 잔뜩 집어먹는 눈으로 그냥 돌진해 왔다.

가막소 간부들은 싸우는 소리가 시끄러워지자 다른 방 재소자들은 목욕을 보내서 텅 비게 해놓고 설쳐 대었다.

 

그들은 나에게 욕을 하고 공갈도 쳤지만 이것이 통하지 않자 나를 끌어낸 다음, 방을 샅샅이 뒤지고 엎어 놓았다.

그 상처 딱지는 내 허리춤에 있었으니 이제는 내 몸에 손을 댈 차례가 되었다.

부소장 권태정, 보안과장 송선홍, 보안계장 방을룡, 주임 최덕, 보안과 배치부장,

그리고 교도관 7~8명이 지옥사자 같은 얼굴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가 왔다.

이들이 내 방을 뒤지는 동안 나는 권태정과 의무관실에서 말싸움을 했으나 이미 사태는 너무나 명백하였다.

당시 화내지 않고 마주 앉은 권태정에게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이건 당신에 대한 배려이다. 결국 나는 빼앗길 것이고 그것으로 고문의 구체적 근거는 잃게될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당신 개인들에게도 반드시 피해가 갈 것이다. 난 꼭 그렇게 하겠다. 그러니 당신은 서둘러 내려가라."


최덕의 직접 지휘와 권태정, 송선홍, 방을룡이 치료실에서 지켜보는 사이에 병사 복도로 끌려나온 내게

이른바 검신을 한다며 옷을 벗기려 했다.

 

아! 몸을 부딪쳐 싸워야 할텐데 어떻게 하나.

남영동에서 고문받은 후 나는 공포심에 눌려 그야말로 기가 죽어 있었고, 몸도 제대로 움질일 수 없어서 저항할 수가 없었다.

지켜봐 주는 눈 하나 없이 양팔를 꽉 붙잡은 채 허리띠를 풀은 이 강도들은 허리춤에서 상처딱지를 발견하고 강탈해 갔다.

 

내 몸이 아마 지금만 같았어도 격렬하게 저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분하고 원통했지만 울화병이 깊어지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안정시켜야 했다.

첫 공판 기일 85년 12월 19일.

남영동에서 고문당한 얘기 뒤에 이 파렴치한 강도행위를 짤막하게 얘기했다.

권태정은 빼놓고. 내 충고를 스스로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송선홍을 증인 신청 했다.

며칠 후 연말쯤, 갑작스럽게 송선홍과 접견과장이 각각 안양교도소와 대구교도소로 전보 발령나 버렸다.

접견과장은 나와 변호인의 접견을 봉쇄했기 때문에, 송선홍은 딱지사건으로 말썽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구치소에는 의아해 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나의 '공판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수군대는 것이 내 귀에도 들려왔다.


이 상처딱지에 대한 재판부의 조회에 대해 구치소측은 '빈 휴지를 압수해서 폐기처분했노라'는 회신을 했다.

고문, 은폐, 거짓말, 중첩적 범죄행위를 감행하고도 여전히 늠름하게 웃어대는 저 정치군부의 가면에

우리는 침을 빝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사건에서 내가 잊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 검방 교도관이 도둑질에 실패하고 간부들에게 몰려 나에게 닥치기 전까지 얼마나 닥달을 당하였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이 검방 교도관은 상처딱지를 손에 넣으면서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만일 이것이 재판부에 제출된다면 자신은 파면됐을 것이고, 나이 50세인데 식구들과 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당신을 평생 저주했을 것'이라면서 씩씩거렸다.

 

이 교도관 얘기대로 됐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용케 재판부에 증거로 현출되었다면

이 구치소 직원과 간부들에게 일정한 부담과 피해가 돌아갔음은 거의 틀림없었다.

나는 교도관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 슬프고 다른 한편으로 혼란이 일어났다.

피해와 부담은 늘 자신 혹은 나와 비슷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만 짊어져야 하는가.

민주화의 귀결은 우리에게만 돌아오는 것이 아닌데,

전제와 자의적 지배로부터 진정한 법 지배의 실현 채무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정치군부가 이런 나약함, 비열함의 틈을 뚫고 끊임없이 공포심을 조장, 확산시킴으로써,

자신들이 지배를 계속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하는 이 무서운 쇠사슬을 어떻게 끊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는가. 왜 우리에게 부담을 안기는가. 당신들의 뜻은 잘 알지만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구속되기 전에도 이런 얘기를 여러 번 들었지만, 구속 이후 그야말로 어디서나 귀가 따갑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도 위에서 시키는 일은 그것이 옳은지, 어떤지를 불문하고 행해지는 모습에서 참으로 깊은 외로움에 빠지곤 했다.

 

나는 이것을 고문 현장인 남영동에서, 이 구치소에서, 검찰에서, 그리고 공판정에서도 반복해서 들었다.

그 표현되는 방법과 분위기는 달랐지만 나는 모두에게서 분명히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는가, 자신들을 이해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들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직위가 낮은 사람은 '이 밥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얘기하는 데에 비해서 직위가 높은 사람은

에둘러서 완곡하게 말하거나 '자리를 유지하려면 별 수가 없다'는 씁쓸한 자조 속에서 그것을 표현했던 차이는 있다.

물론 아주 드물게 적대적인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뭔가 대단히 큰 존재인것처럼 어깨에 힘주는 사람이나

자리가 제법 높아 그에 걸맞게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눈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그 윗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

그런 지식인들을 왜 내가 모르겠는가. 정치 군부의 졸렬한 하수인들을......


나는 이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이 가막소 맨 땅바닥에 침 한번 뱉고 신발바닥으로 문질러 버린다.

 

 

 

 

이번 4.27선거는 국민 분노의 폭발이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었다.

 

물가대란을 비롯한 절박한 민생문제에 대해 해결할 수 있는 아무런 방편도, 실효성 있는 조치도 없었다.

그런 저들에 심각한 패배를 안긴 것이다.

 우리는 반사이득을 본 측면이 강하다.

야권연대가 상당한 정도로 이뤄져 국민이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심판론을 불붙게 만들었다.

민주당도 쉽지 않은 부담을 나눠진 것 사실이다.

순천에서 무공천한 것과 김해에서 야권단일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것,

분당에 위험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손학규 대표가 후보로 나선 것 모두 국민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후보가 직접 당선된 곳은 분당과 강원도지사 둘 뿐이다.

하지만 국민의 관심과 주목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가 민주당을 “지금 이대로”에 안주하게 만들 개연성이 있다.

그것은 민주당을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명박 세력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 “거짓 희망”에 대해 다시 주목하고 관심을 갖게 만들 수 있다.


이번 4월 27일에 동시에 치러진 지자체 장 · 의원 선거에서 양양 군수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둔 곳이 없다.

작년 6.2지방선거에서 그야말로 대승을 거두고서도 그 몇 개월 뒤 치러진 10월 재보선은 참패를 당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지나간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세력은 과반수를 넘어섰다.

 

첫 번째 당선자 워크숍에서 당시 당을 주도했던 이른바 “주류측”이 중도적 실용주의를 내걸었다.

과반수에 고무되어 오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간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른바 “중도 실용주의”를 주장했다.

 

이런 깃발이 국정운영기조에 큰 충격을 준 것은 물론이다.

참여정부는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데, 당시 여당이었던 정치세력은 그것을 반대하는 듯한 중도실용주의 깃발을 내걸었다.

그 결과는 말할 것 없이 혼선과 혼란이었다.

중간계층의 획득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확고한 철학에 기초한 정책과 대안의 제시, 그것의 실천을 통한 중간계층의 참여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번 4.27 분당선거에서 인물론을 강조한 것은 고심에 찬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집결시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있다.

출근 전, 점심시간 때, 퇴근시간 때 30~40대가 대거 투표장으로 나선 것은 아무래도 “심판론‘에 공감하고 동조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심판론이 적극적이고 강하게 제기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일부에서 위험천만한 이야기가 들려나온다.

이번 분당선거에서 인물론이 통했다.

중간층이 민주당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중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중도노선을, 중도주의를 내걸자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중도실용이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로 보이지만 곧 낭떠러지가 나타나는 길이다.


이번 4.27선거도, 작년 6.2 지방선거도, 작년10월 선거도 국민의 승리, 야권연대의 승리였다.

범야권 연대는 조건이 아니라 승리의 전제이다.

그것을 위해 진보적인 다른 야당들, 개혁적인 시민단체와 꾸준히 정책연합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총선과 대선에서 후보단일화를 하되, 감동적으로 이룰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논의해야한다.

원탁테이블을 서둘러서 만들어야한다.

시간이 충분치 않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주당을 개혁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국민이 바라는 절박한 민생문제 해결과 평화, 복지, 민주적 시장경제의 실현을 향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당조직 개혁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모든 인사와 세력에게 공정한 기회가 보장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이 독선적이고 오만한 특권 부자세력의 지배를 끝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전진기지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2011년 5월 2일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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