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7장] 해방, 소련군에 투옥 그리고 월남 2

012/12/25 08:00 김삼웅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아 해방의 해방의 종이 울린다.
- 독립행진곡

함석헌은 자신의 표현대로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고 있다가”가 해방을 맞았다. 그의 나이 44세 때이다.

“내게는 라디오도 없었습니다. 비밀 뉴스의 줄도 없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정말 시골 농사꾼이었습니다. 용암포에서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내게 알려주는 순간 나는 정말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농부로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또 농부답게 놀라지도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주석 1)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항복했다. 일왕 쇼화는 1945년 8월 14일 밤 11시 25분부터 궁내성 내정청사 2층에서 이른바 ‘항복방송’을 녹음하였다. 4분 37초가 걸린 이 녹음은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로 시작되는 항복선언이지만, 정작 최고 전범자로서 사죄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녹음된 방송은 이튿날인 8월 15일 정오에 발표되었다. 의도된 것인지 우연인지 이 ‘종전조서’는 8백 15자(字)로 되어 그 배경을 살피게 한다. 어쨌던 일제는 항복하고 한민족은 해방의 날을 맞았다.

연대표 위에는 틀림없는 36년이건만 느낌으로는 360년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일제 36년’하면, 그렇게밖에 아니됐던가 의심 난다. 그 고난은 그렇게 심했고 영원히 벗겨질 것 같지 않았다.

그 악착한 이리가 이 양(羊)을 놓고 물러갈 줄은 저희도 생각 않았거니와 우리도 감히 생각 못하였다.
그 이빨은 간 잎갈피에까지 들어갔고 그 발톱은 우리 등뼈 마디 짬에까지 박혔었다. 적어도 이성을 가지고는 그 물러날 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정치권이 그들 손에 있고, 경제정책이 그들 자기네 본위요, 토지가 대부분 그들 소유가 됐고, 교육방침이 철저한 일본 국민이나 혹은 그들의 영구한 종 기름에 있었고, 마지막에는 풍속을 고치고, 성을 갈고 말을 없애고, 글을 말살하려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세계사조 조차 혼란에 빠져, 민족 사이의 동정의 생각도 얻어볼 수 없고 국제간의 정의감도 찾아볼 수 없어져 세계 모퉁이에서 대낮에 인간의 대량학살을 공공연히 하게 됐으니, 아무도 그 종살이에 끝이 오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옛날에 지사(志士)라던 사람들도 다 넘어가고,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다 타협하고, 지식인도 다 팔려버리고 말았다. 교육자는 학생보고 일본인돼야 한다고 아는 거짓말을 하고, 종교가는 교도들보고 일본섬기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짐짓 짓는 죄로 인도하고 있었다. 순 조선대로 남아 견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식한 못난 민중이었다.
(주석 2)

함석헌은 8ㆍ15 해방이 ‘도둑같이’ 왔다고 했다. (주석 3)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중경과 미주 그리고 국내에서 단파방송을 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제가 그렇게 빨리 항복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총독부의 정보ㆍ언론의 통제로 전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두 손에 수갑이 채워 일경에 끌려 갈 때에 아는 채도 않던 사람들이 다투어 인사를 하고, 여기저기 모임에서 불러냈다. 용천과 용암포에서 열린 해방축하회에 불려나가 만세를 부르고 시기행진도 하였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해방은 ‘도둑맞고’ 있었다.

“해방 후 분한 일, 보기 싫은 꼴이 하나 둘만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참 분한 일은 이 해방을 도둑해가려는 놈들이 많은 것이다.” (주석 4)

곳곳에서 정치 모리배들이 해방을 마치 자기네들이 쟁취한 것인양 민중을 속이고 공을 가로채고 있었다.

함석헌은 지극히 비사교적 인물이다. 비정치적이고 감투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데 해방 공간에서 여기저기에 끌려나가 ‘감투’를 쓰게 되었다. 본의와는 상관없이 용암포 임시자치위원회 회장, 용천군 자치위원장, 평안북도 임시자치위원회 문교부장 자리에 앉혀졌다. 평북 자치위원회위원장에는 독립운동가 이유필이 추대되었다. 함석헌이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것이 정치꾼들의 눈에도 이용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민중들에게 그를 앞세워 써먹자는 심산이었다.

“새 역사의 어떤 매력이 나를 매혹시켰다면 시켰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는 별별 잡것이 다 떠서 돌고 있었습니다. 저것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주석 5)


주석
1>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전집> 4, 274쪽.
2>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357쪽, 일우사, 1962.
3> 앞의 책, 358쪽.
4> 앞과 같음.
5>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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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회] 김교신을 기리며 쓴 ‘그 사람을…’: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4 08:00 김삼웅 동경 유학시절 1927.. http://t.co/Jft8ZemP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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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4 08:00 김삼웅 동경 유학시절 1927년 2월 성서조선 동인 윗줄 좌로부터 유인성 함석헌, 아랫줄 좌로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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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4 08:00 김삼웅

 

 

동경 유학시절 1927년 2월 성서조선 동인 윗줄 좌로부터 유인성 함석헌, 아랫줄 좌로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사진은 씨알의 소리에서.

 

‘인생대학’ 3차년의 옥살이는 만 1년으로 1943년 봄에 석방되었다. 그는 감옥을 ‘인생대학’이라 불렀다. 사이고 다까모리의 시처럼, 함석헌은 거듭되는 세 차례의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마음은 더욱 굳어지고, 생각은 한량없이 깊어졌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불교 경전을 읽었다. <무량수경>을 비롯하여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 <금강경> 등을 읽으면서 “불교와 기독교와는 근본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석 22) 그만큼 종교와 사상의 폭이 넓어졌다.

출감하고 얼마 뒤 가슴 아픈 비보를 들어야 했다. 혈맹의 동지, 신앙의 동지 김교신의 부음이었다. 1945년 해방을 얼마 앞둔 4월 25일 흥남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이다.

<와규>의 필자, <성서조선>의 발행인으로 일경은 그를 악질 불온분자로 낙인하고 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의 돌연한 사망은 장티푸스였으나 극심한 옥고로 육신이 쇠약해지면서 발생한 병이었다. 김교신의 때 이른 죽음은 함석헌에게 큰 충격이고 슬픔이고 아픔이었다. “벗할 수 없다면 참다운 스승이 아니고,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면 좋은 벗이 될 수 없다”는 중국 명말 청초의 개혁사상가 이탁오(李卓吾)의 말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좋은 벗이고 훌륭한 스승의 관계였다.

함석헌이 월남하여 1947년 7월 20일에 지은 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는 김교신을 그리면서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 깨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주석 23)

함석헌은 김교신을 기리면서 <돌아간 김교신 형 집을 찾고>도 지었다.

문 앞에 흐르는 물 의구히 흘러 있고
울 뒤에 맑은 송풍(松風) 제대로 맑았구나
봄볕은 서창을 비쳐 눈의 얼굴 보는 듯

이 시내 마시면서 이 바람 쏘이면서
흐리운 이 세상을 맑히자 애쓰던 맘
그 마음 어디 찾느냐 북악산만 높았네

시냇물 흘러가고 솔바람 불어가고
산사의 저문 종이 울리어 가는 저녁
다녀간 님을 그리며 나는 어딜 가려노.
(주석 24)

함석헌은 친구를 떠나보내고 그가 내던 <성서조선>도 폐간되어 어디에 글 한 줄도 쓸 수 없는 암담한 처지에서, 낮에는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책을 읽었다.

“집에 돌아온 후 늘 공부하면서도 감히 손을 못 대던 <노자>를 읽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없이 참고서도 없이 읽었으니, 읽었던들 변변히 읽었다 할 것이 없지만, 그래도 속이 트이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주석 25)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오고 있다는 징조이다. 일제는 1943년 11월부터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는 학생은 강제로 휴학시켜 징용하고, 1944년 8월에는 여자정신근로령을 공포하여 꽃다운 조선의 소녀와 처녀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끌어갔다. 막장이었다. 함석헌은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면서 먼동이 트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석
22> 함석헌, <이단자가 되기까지>, <전집> 4, 196쪽.
23> 함석헌 시집, <수평선 너머>, 133~134쪽, 일우사, 1961.
24> 앞의 책, 132~133쪽.
25> <전집> 4,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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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회] <성서조선>사건, 세번째 구속되다: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3 08:00 김삼웅 일제는 눈엣가시처럼 여기.. http://t.co/PBWTEkk2V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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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3 08:00 김삼웅 일제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성서조선>팀을 덮쳤다. 아무리 전시체제라고 해도 개인의 종교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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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3 08:00 김삼웅

 

 

일제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성서조선>팀을 덮쳤다.
아무리 전시체제라고 해도 개인의 종교잡지, 신앙전문지까지 덮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다. 함석헌은 1940년 11월 서울로 올라와 김교신의 집에서 <성서조선> 창간 14주년 기념 감사집회를 갖고, 1941년 3월에는 장남 국용의 결혼식을 치렀다. 김교신이 주례를 서주었다. 일상적인 생활 중에서도 <성서조선>에는 꾸준히 글을 썼다. 일제는 함석헌과 동지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책의 내용을 분석하고 덮쳤다.

일제는 <성서조선> 1942년 3월호(제158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弔蛙)>를 트집잡았다.
<조와>는 “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면서, 혹한 속에서도 봄이 오면 부활하는 개구리를 통해 민족독립 정신을 담은 짧은 글이다.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봄비 쏟아지든 날 새벽 이 바위 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랜만에 친구 외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저 속을 구부려 찾었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 마리 담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는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적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주석 18)

김교신은 이 책에 <조와>외에 <강성지도(强盛之道)>, <부활의 춘(春)> 등 일제의 탄압과 침략전쟁, 결국 그들이 패망하고 민족 부활의 새봄이 올 것을 상징하는 단문을 실었다. <성서조선>은 당시 규정에 따라 모든 언론ㆍ출판물처럼 총독부의 사전검열을 받고 간행하였다. 검열에서 통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뒤늦게 발매금지는 물론 샅샅이 뒤져 10년도 더 지난 창간호부터 전량을 회수하고, 김교신과 함석헌 등 12명의 필자 그리고 200여 명의 독자 중에 상당수를 구속하였다. 함석헌의 글 특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도 필화의 한 원인이었다.

함석헌과 그의 동지들에게 유일의 매체이었던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발행인 김교신과 주요 필자 함석헌 등은 ‘일망타진’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함석헌에게는 세번째 투옥이다. 수사과정에서 심한 구타를 당하고, 일본인 검사와는 치열한 논전을 벌였다.

검사 :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지?
함석헌 : 그렇다.
검사 :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죄라지?
함석헌 :그렇다.
검사 : 그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데 그것도 사실이냐?
함석헌 : 잘 들어라. <성경>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다. 믿음을 가르칠 때는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하지만, 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때는 하나님이 나중에 모든 사람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구원한다는 약속이 있다.
검사 : 에이, 그런 협잡 종교가 어디 있느냐?
함석헌 : 그게 왜 협잡이냐? 탄력이지.
(주석 19)

검사의 신문은 함정이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데 일왕(천황)도 멸망한다는 죄목을 걸어 국사범으로 처벌하려는 흉계였다. 함석헌은 이를 꿰뚫고 ‘성경의 탄력’을 이유로 빠져나왔다.

함석헌이 수형번호 1588번을 달고 미결수로 1년 동안 수감된 서대문형무소에는 여운형이 부일을 거부하다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수형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시인 김광섭도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3년 8개월의 옥살이를 하는 등 많은 항일 인사들이 수감돼 있었다. 1942년 1월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된 33명은 대부분 함흥감옥 등에 수감되었다.

함석헌은 여러 차례 형사와 검사의 수사를 받으면서 스스로 지켜야 할 ‘원칙’을 정하였다. 결코 그들의 동정을 살 요량으로 비굴해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형사와 턱 마주 앉으면 인정도 도리도 다 없고 저와 나와는 이해가 서로 상반되는 양극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 비위를 맞추어서 일을 쉽게 만들어보려는 따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아니된다. 비위를 거슬러야 매를 맞는 것 밖에 없는데, 사람이 매를 맞아서는 여간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내 지킬 것인 담에는 터럭만한 것이라도 지켜야지 일단 그것을 내놓으면 그 담은 다시 찾을 길이 없다.

고집이란 말을 들어도, 경위로 따짐을 당해도 잡아뗄 것은 딱 잡아떼야 한다. 내가 언제나 저보다 위에 서야 한다. 맘의 가라앉음으로, 심리를 더듬음으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리로 저보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 봐야 한다. 형사에겐 동정이란 털끝만큼도 없는 법이다. 저는 나를 먹으려다 못 먹으면 그저 아까운 것을 놓쳤다 하는 정도가 아니다. 나를 죄로 만들지 못하면 손해가 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와 이해싸움이다. 그러므로 절대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주석 20)

함석헌은 악독하기로 소문난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가면서 시 한 편을 지었다. <다시 감옥에 들어가서>다.

다시 감옥에 들어가서

꿈 속에 다녀간 길 꿈 같이 다시 왔네
깼던 꿈 잇는건가 깼다던 것 꿈인가
모두 다 꿈속엣 일을 맘 상할 것 없고나

강남밥 한 웅큼이 삭아서 피어나니
스물네 마리 끝에 가지가지 생명의 꽃
거룩한 창조의 힘을 몸에 진고 있노라

쉬인 해 가르치자 다시금 채치시니
내 둔도 둔이언맘 아빠 맘 지극도 해
날 아껴 하시는 마음 못내 눈물 겨워서
짓밟는 형틀 밑에 흘린 피 술로 빚고
풀무교에 타고난 밤 금잔으로 쳐 나오니
아버지, 눈물 섞어서 이 잔들어 주소서

바람아 네가 불면 언제나 불 것이냐
울부는 가지 끝에 네 만가(輓歌)높았더라
겨울이 왔다면이야 봄을 멀다 할 거냐
삭풍아 불어 불어 마음껏 들부숴라
떨어진 내 잎새로 네 무덤 쌓아놓고
봄 오면 우는 꽃으로 그 무덤을 꾸미마.
(주석 21)


주석
18> 김교신 <조와>, <성서조선>, 1942년 3월호.
19> 이치석, 앞의 책, 292~293쪽.
20>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5쪽.
21> 김삼웅, <서대문형무소근현대사>, 168쪽, 나남출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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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회] 창씨개명 거부, 오산고보 떠나: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2 08:00 김삼웅 1931년 2월 오산학교에서.. http://t.co/Cu0bEKOV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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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2 08:00 김삼웅 1931년 2월 오산학교에서는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이 일어나고, 어느 때는 함석헌의 교실에 장학관이 불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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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2 08:00 김삼웅

 

 

1931년 2월 오산학교에서는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이 일어나고, 어느 때는 함석헌의 교실에 장학관이 불쑥 들어와 일본어로 강의하는가를 감시했다.

다시 고난의 현장으로 돌아오자, 함석헌은 1938년 3월 오산고보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창씨개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 오산을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 심정에서입니다. 감히 일본제국주의에 반항을 한다기보다는 소위 가르치는 교사라는 물건이 학생들 앞에서 일본말로 일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더구나도 정말 일본 사람이 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한다면 또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것은 피차 서로 빤히 알면서, 다만 목숨 하나가 아까와서 거짓 연극을 하는 것이 차마 인간 양심에 허락이 되지 않아서, 할 수 없어서 못한 것 뿐입니다.(…)

일본식으로 창씨를 하라는 기한의 마지막날이 되던 날,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 앞에서 단 둘 밖에 없는 형제끼리 마지막 의론을 하다가 저는 고치겠다는데 나는 감히 그러자는 말이 나오지 않아, 감히 죽을 각오를 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아니 고치겠다.” 선언을 하고 서로 딴 길을 걷기로 한 다음 얼마 아니 있다가 나는 내 권속을 데리고 평양 만경대 앞 송산리로 나갔습니다.
(주석 15)

함석헌은 제자들에게 일본말로 일본식 교육을 시킬 수 없어서, 그리고 조선인의 혼, 성씨와 이름까지 고치라는 창씨개명에는 견딜 수 없어서 교사직을 내던졌다. 예나 지금이나 불의에 저항하여 직장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신념도 신념이지만 ‘권속’의 생계가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함석헌에게는 부인과 여러 명의 자식이 있었다. 1919년 장남 국용이 태어나고, 1921년 8월 장녀 은수 출생, 1926년 4월 2녀 은삼 출생, 1929년 8월 3녀 은자 출생, 1931년 9월 2남 우용 출생, 1933년 4녀 은화 출생으로 2남 4녀가 있었다. 퇴직 이후인 1939년 1월에 5녀 은선이 태어났다.

이런 대가족을 거느린 함석헌은 교직을 떠나서 평양 송산리에 있는 송산고등농사학원을 인수하여 거처를 옮겼다. 퇴직 2년여가 지난 1940년 3월의 일이다. 이 학원은 조만식의 뜻을 이어받은 김두혁이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를 본받아 사람을 길러보자고 세운 농사학원(農事學院)이었다. 이것을 함석헌이 인수한 것이다. 그동안 월급에서 모아 둔 돈을 털어서 인수했다.

20여 명에 불과한 학생들과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땅을 파고 씨를 뿌려 농사를 지었다. 아직까지 농사일과는 거리가 있는 먹물에게 농삿일은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여 심은 참외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8월에 때 아닌 서리가 내렸다. ‘서리’의 정체는 일본 경찰이었다.

설립자인 김두혁이 일본에서 동경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의 모임인 계우회(鷄友會)를 조직하여 활동중에 그가 구속되고,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었다. 함석헌은 9월 평양 대동경찰서에 갇히게 되었다. 세 번째 투옥이다. 이와 관련 평양 숭인상업학교 학생들이 ‘장학축상계’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그중 한 명이 일본에서 함석헌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경찰의 가택수색으로 적발되어 학생 6명이 검거되었다. 함석헌은 자신의 옥고보다도 작은 실수로 구속된 학생들에 대해 두고두고 자책하였다. 평소 주의를 해서 편지를 불태웠는데 한 통이 쓰레기통에서 적발되면서 이들은 2년 반씩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이듬해 초여름에 출감할 때까지 1년여를 대동경찰서 유치장에서 미결수로 옥살이를 하였다. 농사학원은 폐농이 되고, 옥고 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일제는 ‘불온분자’로 찍힌 함석헌에게 아버지의 임종을 허가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 자식이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은 큰 불효에 속한다. 아들 대신 김교신과 송두용 두 친구가 서울에서 내려와 상주 노릇을 했다.

감옥에서 나온 함석헌은 하릴없는 농사꾼이 되었다. 서툰 농사일이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남긴 땅이 2만 평 정도가 되었다. 7명의 자식들까지 식구가 열 명이 넘은 대가족이었다. 아버지의 땅을 상속할 것인가를 두고 며칠 고심 끝에 결국 상속하여 농사일을 맡았다. 이것이 뒷날 화근이 되었다.

함석헌은 세 번째 옥고를 치루면서 ‘과외’의 소득을 얻었다. 같은 구치소에 있던 한 노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일본인 사이고 다까모리(西卿隆盛)의 시였다. 사이고는 대표적인 정한론자였으나 그럴 듯한 싯구를 남겼다.

그때에 지낸 가지가지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당장 기억에 새롭게 잊히지 않는 것은 한 방에 잠깐 들어왔다 나간 어떤 늙은이에게서 들은 일본 사이고 다까모리의 시다. 그는 내게 그것을 일러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기나 했던 것처럼 생각된다.

옥 속에 쓰고 신 맛 겪으니 뜻은 비로소 굳어진다.
사내가 옥같이 부서질지언정 기왓장처럼 옹글기 바라겠나
우리 집 지켜오는 법 너희는 아느냐 모르느냐
자손 위해 좋은 논밭 사줄 줄 모른다고 하여라.

獄中辛酸志始堅
丈夫玉碎 愧甑全
我家遺法人知否
不用子孫買美田
(주석 16)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내가 호주가 됐는데 남은 것은 빚뿐이었습니다. 땅이 2만 평 정도 있었는데 상속을 할 것이냐 생각을 하다가, 이상으로 하면 상속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반드시 아깝다는 생각에서도 아닌데, 종시 단행을 못하고 그냥 풍속대로 따라 상속을 했다가 4년 후 공산당이 와서 지주 숙청하는 것을 당하면서야 “그때에 차라리 단행했더라면”하고 뉘우쳤습니다. (주석 17)

함석헌의 농삿꾼 생활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시국은 점차 어려워지고, 일제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극악해졌다. 1936년 12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이 시행되고, 1937년 6월에는 민족주의계열 인사 18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수양등우회 사건이 일어났다. 흥사단 계열의 실력 양성 단체이던 수양동우회를 수사하면서 무관한 기독교계 인사들까지 구속한 것이다. 같은 해 7월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38년 2월에는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청장년들을 침략전쟁에 끌어갔다.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3차) 하여 ‘국체명징’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황국신민서사’의 암송을 의무화했다.

1938년 4월,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 폐지,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창립, 1939년 10월 국민 징용령 실시, 1940년 2월 창씨개명 실시,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 도발, 1943년 3월 징병제 공포, 10월 학병제 실시 등 일제의 폭압통치는 막장으로 치달으면서 이땅의 청장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맞이로 내몰았다.

따라서 반일ㆍ항일 인사들에 대한 탄압도 그만큼 심해졌다. 1년 만에 석방된 함석헌은 서투른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농삿군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40년 8월 <성서조선>사건을 일으켜 다시 구속한 것이다.


주석
15> 함석헌, <내가 맞은 8ㆍ15>, <전집> 4, 270쪽.
16>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3~24쪽.
17> 앞의 책,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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