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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회] 역사 가르치며 일제에 저항: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18 08:00 김삼웅 1927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 http://t.co/5dZVXFXK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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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18 08:00 김삼웅 1927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 한국인학생들과 함께 졸업기념(가운데줄 중앙). 사진은 함석헌 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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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18 08:00 김삼웅

 

1927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 한국인학생들과 함께 졸업기념(가운데줄 중앙). 사진은 함석헌 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ssialsori.org/)에서

함석헌은 동경고사를 졸업하고 1928년 지체없이 귀국했다. 4월부터는 모교인 오산고보의 교사가 되어 교단에 섰다. 동경고사에서 교사자격증을 땄기에 가능했다. 자신의 얼을 키워 주고 유학비를 지원해 준 모교에 지원하여 발령을 받았다. 일본으로 건너갈 때 품었던 얼을 한아름 키워서 모교로 돌아온 것이다. 함석헌은 수신과 역사지리 과목을 맡아 가르쳤다.

교사 함석헌은 한복으로 일관했다. 여름에는 흰 옷 모시 두루마기, 겨울이면 무명옷에 회색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었다. 이같은 옷차림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나는 현해탄을 건널 때 품고 간 것이 있습니다. 비바람보다 더한 눈총 속에서도, 땅을 태우고 하늘을 지키는 불길 속에서도, 번쩍이는 창검 속에서도, 내버리지 못하고 품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하던 일 다 마치고 얼굴 빛 더 그을어지고 현해탄 도로 넘어 다시 돌아올 때도 품고 돌아온 것이 있습니다. 속알 여물려면 물론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이미 씨알로서의 올갱이는 넣어주심을 받은 것이 있노라고 믿고 있습니다. (주석 1)

함석헌이 귀국하여 오산고보에서 교사 생활을 하게 될 무렵, 조선에서는 이태 전의 6.10 만세운동의 여진이 남아 있어서 전국의 학교에는 일경의 감시가 심했다. 1927년 1월에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통일전선운동 단체로 신간회가 발족하여 이상재를 회장으로 선출하는 등 활동을 시작하고, 5월에는 여성운동 통일체 근우회가 발족하였다. 1928년 1월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34명이 구속되고, 5월에는 조명하 의사가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 구미노미야 기니히코 육군대장을 독검으로 공격했다가 현장에서 피체되어 10월에 처형되었다. 6월에는 치안유지법을 개정하여 사형ㆍ무기형을 추가하는 등 독립운동가를 더욱 심하게 탄압하였다. 7월에는 제1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70여 명이 피체되었다. 일제에 병탄되어 20여 년이 지났는 데에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그치지 않았다.

3ㆍ1운동 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의 미명 아래 다소 유화책을 펴는 듯 했지만, 내실은 더욱 한민족을 옥죄고 탄압하였다.

 


935년 오산학교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2번째. 사진은 함석헌 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ssialsori.org/)에서

“병탄 이후 식민지 교육정책의 핵심이었던 ‘동화(同化)=일본화(日本化)=충량화(忠良化)’ 정책을 기독교학교에도 강요ㆍ관철시키려”  (주석 2)했다. 기독교학교 뿐만 아니었다. 이것은 종교계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식민정책이었다. 일제는 한국 민족을 일본적 가치관을 주입시켜 일본화하기 위해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제시하고, 인종적인 면에서 동일 근원성의 이론을 날조했다. 그리고 이를 달성키 위해 더욱 심하게 동화정책을 폈다.

병합 이래 소위 동화정책은 대체로 일본의 조선통치 근본방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사내(寺內), 장곡천(長谷川) 양 총독의 시정을 보면 끄덕여지는 바가 있다. 원(原) 수상은 동화라는 말을 피하여 전에는 내지연장(內地延長)이라 하고, 후에는 일선융화를 주장하고 있다. 동공이곡(同工異曲)의 어휘지만 그간 통치 방침의 점차적 추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석 3)

일제의 동화정책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반발하면 가혹한 형벌로 처벌하고, 친일 조선인을 앞세워 민중을 억압하고 ‘교화’시켰다. 총독부는 1928년부터 1936년까지 8년 동안 조선의 초등교육의 진흥이라는 명분 아래 ‘공립보통학교 일면일교(一面一校)계획’으로, 매년 130여 교씩 1,074교를 설립하였다. 어디까지나 조선의 아동들을 일본적 가치관으로 키우려는 ‘일선동화책’의 일환이었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민족교육의 요람이라는 오산고보에 대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동화정책은 특히 심했다. 함석헌의 힘든 교사생활은 이런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가운데 초년 교사 노릇을 하게 된다.

동경 고등사범을 졸업하고 나는 곧 오산에 돌아와 선생 노릇을 시작해서 1938년 봄 그만둘 때까지 만 10년을 있었는데 그때가 내 인생에서 황금시대라 할 만한 시절입니다. 취임하는 날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의 구절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정성을 다 붓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못되어 나는 역사 교사가 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것은 소위 역사란 것은 온통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를 정직하게 볼 때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야 옳은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 자포심만 날 터이요, 남이 하는 식대로 과장하고 꾸미자니 양심이 허락지 않고, 나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주석 4)

역사 교사 함석헌의 고민은 깊어갔다. 망국의 교사로서 망국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는 처지였고, 외적으로는 날이 갈수록 억누름이 심해졌다. 김교신을 도와 <성서조선>을 계속 내고, 여기에 매달 빠지지 않고 글을 썼다. 그리고 무교회주의 신앙생활에도 열심을 보였다. 김교신과 함석헌은 오산에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 방식의 신앙운동을 철저하게 지켰다. 건물로서의 교회를 부정하고, 교회의 정례를 없애고, 교회의 성직을 두지 않는, 그래서 특정한 교직자가 없는 신앙생활이었다. 이 때문에 전통적 기독교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함석헌은 <성서조선> 창간호에 <먼저 그 의를 구하라>를 쓴 것을 시발로 동경고사 시절 <주여 믿어지이다>(2호), <선지자>(3,4호)에 이어 귀국하여, <살아계신 하나님>(4호), <신앙은 힘이다>, <조선에 기독교는 필요하나>,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 <우연과 연기>,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 <대담>, <고통의 가치>, <의와 악>,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하시나>, <성삼문과 스테반>, <큰 식물>, <부활>, <민족 생명의 촛불 남강 선생>, <산 신앙>, <20세기의 출애굽기>, <프로테스탄트의 정신>, <그리스도 모방/토마스 아 켐피스 번역>, <의인은 멸절하는가>, <신 우주 시편 19장 연구>, <창구세주>, <예수 출현의 우주사적 의의>, <하나님은 이 시대를 버리시었나>, <러시아에 감사함>, <아모시스 연구>, <고난의 의미 - 시편 44장 연구>, <인생의 두 길-시편 1장 연구>, <순교의 정신>, <무교회신앙과 조선>, <무교회>, <서풍의 노래>, <강재선 선생의 일생>, <매소랜 도의 발시>, <세상을 이기는 용기>, <전도사를 기다림>, <바디매오와 삭개오>, <하늘나라 백성의 자격>, <결혼의 의미>, <요엘서 강의> 등을 기고하였다. 오산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10년 동안에 이밖에도 많은 글을 썼다.


주석
1> 함석헌,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전집> 4, 241쪽.
2> 김승태, <식민권력과 종교>, 4쪽,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2.
3> 지바 사타루(千葉了), <조선의 현재 및 장래>, <조선통치문제논문> 제1집, 38쪽, 경성, 1929.
4>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1>, <전집> 4,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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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회] <성서조선> 창간, “의를 구하라” 처녀작: 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7 09:44 김삼웅 함석헌은 1927년 고등사.. http://t.co/0yYeFhFK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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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7 09:44 김삼웅 함석헌은 1927년 고등사범 4학년이 되었다. 이 해는 졸업반의 의미보다 그의 생애에 비중 있는 가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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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7 09:44 김삼웅

 

 

함석헌은 1927년 고등사범 4학년이 되었다. 이 해는 졸업반의 의미보다 그의 생애에 비중 있는 가닥이 되는 동인지 <성서조선>의 창간에 참여한 일이다.

우치무라의 문하에서 신앙적, 민족적 뜻을 함께 한 김교신을 비롯한 함석헌ㆍ정상훈ㆍ송두용ㆍ양인성ㆍ유성동은 1927년 7월 도쿄에서 동인지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창간호는 국판 44쪽으로 김교신의 창간사에 이어 6인의 무교회 신앙의 고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논문을 실었다. 창간사에서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신앙인에게는 국경이 있어야 할 것”을 상기시키면서, 쓰라린 민족의 시련을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한 순수한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해 나가자고 주장하고, 기성교회의 비리를 비판하며, 민중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영혼을 신앙으로 각성시키자고 강조하였다.

창간호는 뒷 부분에 동인들이 1편씩 단상을 실었다. 함석헌은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글을 발표했다. 생애의 첫 활자화 된 글이다. 처녀작인 셈이다. 꽤 긴 글이다. 마태복음 6:31-33을 인용한다.

“그런 고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외방 사람이 구하는 것이요. 이 모든 것을 너희 천부(天父)가 너희 쓸 것인 줄 아시나니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또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함석헌과 그의 동지들은 적도 일본에서 잡지를 내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의 야수적인 식민통치를 비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성서를 인용하면서, 알아듣는 사람들은 깨우치게 하는 방법을 활용했다. 함석헌의 대 사회 발언의 첫 마디가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제목이었음은, 27세 청년 함석헌의 의식의 척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고난에 찬 생애의 방향성을 예시한다.

이 논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함석헌은 정작 자신이 하고자 한 말을 한다.

근역(槿域-무궁화가 많이 피는 땅, 즉 한국)의 자녀들아.
의를 구하자. 생명을 위하여 먼저 그 의를 구하자 - 현실이 아무리 급박한 듯 해도 이는 우원하고 어리석은 말 같고 점점 더 파멸로 인도하는 말 같으리라. 끌어올리는 두레줄을 놓으라는 것 같아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듯 하리라. 그러나 진리다. 생명에 이르는 진리다.

근역의 자녀들아. 오늘날 우리는 불행에 우는 자다. 환난의 물결은 우리 위를 넘고 비탄의 부르짖음은 우리 입에 가득하다. 우리는 온갖 것을 저주하고 싶고 온갖 것을 파괴하고 싶다. 그러나 아니다. 그로 인하여 살길은 아니 온다. 구원은 오직 의의 신으로부터 온다.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장막이 우리에게 있으며 그가 우리와 함께 거하시리니,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고 그가 친히 우리와 같이 계셔 하나님이 되고 눈물을 우리 눈에서 다 씻으시며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요한계시록 21:3~4)

흰 옷 입은 근역의 자녀들아. 그 의를 구하여라. 네 입은 옷은 정의의 흰 빛이 아니냐. 네 맘도 그같이 희기를!
(주석 21)

<성서조선>은 동인들이 귀국하면서 서울에서 계속 발간되었다.
1930년 6월호인 제17호부터는 동인들의 사정으로 김교신 단독의 이름으로 편집, 발행되어 그의 개인잡지 성격의 신앙월간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인들의 투고는 계속되고, 함석헌도 계속하여 기고하였다. 그의 대표 저작으로 통하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성서조선>에 연재하였다. 이 부문은 뒤에서 다시 쓸 것이다. 


주석
21> <성서초선>, 1927년 7월(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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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회] 우치무라의 무교회신앙 배워: 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6 09:48 김삼웅 당시 조봉암 등은 흑도회에서 이탈하여 볼쉐.. http://t.co/pdyrqJg0I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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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6 09:48 김삼웅 당시 조봉암 등은 흑도회에서 이탈하여 볼쉐비즘을 통한 민족해방의 길을 걷고, 박열 등 아나키스트들은 체포되어 길고 긴 옥고를 치루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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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6 09:48 김삼웅

 

 

당시 조봉암 등은 흑도회에서 이탈하여 볼쉐비즘을 통한 민족해방의 길을 걷고, 박열 등 아나키스트들은 체포되어 길고 긴 옥고를 치루었다. 이들에 비해 함석헌은 지극히 온건한 지점에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이 무렵, 즉 일본 사회에 신사조의 물결이 넘실대고, 재일 유학생과 노동자들이 조국해방 투쟁의 노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과 희생을 감수할 때, 그는 비교적 안전지대에서 우찌무라의 무교회 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형편을 살펴볼 때 교육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 교육으로 결성했습니다. 조선사람이라면 하숙도 잘 아니주려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던 어느 일요일, 나는 나보다 한 반 위인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의 이름은 오산 있을 때 유 선생님(유영모-필자)에게서 이미 들어 알았습니다. (주석 15)

함석헌이 동경고등사범에 다니면서 우찌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성경연구회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의 생애를 두고 또 한 차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3ㆍ1운동의 체험으로 얻게 된 민족주의 정신을 이으면서도 우파 계열의 독립운동가나, 일본 유학 중에 지켜보아 온 아나ㆍ불 계열의 좌파 독립운동가가 아닌 기독교사상을 통한 정신적ㆍ사상적 연마에 집중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우치무라를 만난 것은 오산에서 남강ㆍ도산ㆍ고당을 만난 것과 궤를 같이할만큼 생애에 두고 두고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훗카이도 출신인 우치무라는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한때 신문기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일왕의 칙어를 비판하여 역적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교회 안의 형식과 위선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독립전도를 시작하면서 지식 수준이 높은 크리스찬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무런 형식이나 의식 없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해서 무교회란 이름이 붙었다.

함석헌은 동경고등사범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틈틈이 성경연구회에 나갔다. 여기서 평생의 지우 김교신과 사귀고, 함께 한국에 무교회주의를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신과 신앙 동지들의 둥지가 된 <성서조선> 발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치무라 모임에 다닐 때 한국 학생이 여섯 사람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모임 후에는 우리끼리 또 모여 우리말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몇 해 계속되다가 다들 졸업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할 때 여섯이 의결하고 동인지의 잡지를 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고 했습니다.

여섯이 다 귀국한 후 첨에는 경비와 글을 분담해 가면서 내다가 나중에는 김교신이 전담하여 거의 개인잡지처럼 됐습니다. 중학교 선생 노릇을 하면서 한 것이지만, 김(金)은 본업보다 부업이 더 크다고 하면서 전력을 기울여서 했습니다. 나중에 일본 관헌에게 발행금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주석 16) 여섯사람은 함석헌ㆍ김교신 외에 유석동ㆍ송두용ㆍ정상훈ㆍ양인성이다.

함석헌이 유학중에 일본사회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저물고, 황도파 세력에 의한 치안유지법 제정, 노동자와 일본공산당 탄압, ‘대역사건’이라 하여 박열과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 사형선고(무기형으로 감형), 간토 대진재 와중에서 5천 명 이상의 조선인 학살과 일본 아나키스트ㆍ사회주의(공산주의) 지도자 암살(처형) 등이 자행되고 있었다.

함석헌은 학교 교육보다 우치무라를 통해 그리고 교우들과의 토론으로 폭 넓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김교신ㆍ송두용 등과는 평생 신앙의 동지가 되었다.

함석헌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그를 추종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배울수록 생각의 범주가 넓어지고, 동서양의 명저를 통해 안목이 확대되었다. 우치무라는 두 개의 J를 내세울만큼 일본을 사랑하는 일본인이었다. 하나의 j는 예수이고, 다른 하나의 j는 재핀 즉 일본이다.

나는 차차 의식적으로 선생 모방을 피하고 나는 나대로 서는 자리에 가려고 힘을 썼습니다. 첨에는 모임의 형식, 예배절차, 성경 해석하는 태도, 회비 받는 주머니의 모양까지도 우치무라 식을 본떴는데, 하는 줄도 모르게 그렇게 했는데, 후에 가서 생각해 보니 도무지 사람답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책을 참고하는 태도조차도 고쳤습니다. 덮어 놓고 참고하기를 그만두고, 나로서 성경 본문을 놓고 씨름을 하여서 일단 내 생각의 초점이 잡힌 후에야 그 책을 열기로 했습니다. 성경해석의 참맛을 조금 알고 어느 정도 확신이 서기 시작한 것은 그 후부터였습니다. 그리고 나면 “나는 모든 것이어서 우치무라가 표준이다”하는 사람보다는 나 자신이 선생에게 더 친근하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주석 17)

애를 더듬어 보면 지극히 자주 정신의 소유자임을 알게 된다. 어릴 때부터 움트기 시작한 자주성과 창조성은 뒷날 독재권력과 싸우게 되는, 민주주의와 씨알사상으로 영글게 되었다. 뛰어넘어 자기의 주체성과 폭넓은 신앙체계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평생 자주하는 정신으로 살았고, 민주주의 사회의 씨알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줄기차게 싸웠다.

동경고사를 다니는 동안 많은 배움의 인물들을 알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영국의 요절한(31세 때 선박 전복사고) 낭만파 시인 쉘리(1792~1822)다. 그의〈서풍의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시에 담긴 저항정신을 높이 산 것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그의 불타는 반항정신 때문이다.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는 온갖 구속, 압박, 묵은 것에 대해 죽기로 반항하는 자유의 혼이었다.〈서풍의 노래〉의 셋째 절에서 그가 불어오는 서풍에 지중해 고요한 물 위에 뜨는 옛 궁전의 꿈이 깨지고 대서양의 수평이 흔들려 깨지며 바다 속의 해조들이 생기를 잃고 떨며 길을 여는 것을 본 것은, 그가 어떻게 그때 바야흐로 무르익으려는 문화에 있어서 벌써 그것을 잊어버리고 새 시대를 바라는 혼이 사무쳤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몇 사람 아니되는 세 시대의 정신적 영웅의 한 사람이다. 도덕의 테두리에서 견주어 볼 때 그에게 비난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을 그가 가진, 세 시대에 대해 날카롭고 억센 힘으로 나가려는 독수리 같은 정신에 비하면 아무것서도 아니다.
(주석 18)

오, 사나운 서풍아, 너 가을의 산 숨이야,
네가 볼 수 없이 올 때 그 앞에 몰리는 시든 잎새
술사에게 쫓기는 유령의 때와 같으니,(…)

예언의 나팔소리를 외치라, 오,
겨울이 만일 왔거든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주석 19)

함석헌은 <서풍의 노래>의 마지막 구절 “겨울이 만일 왔거든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를 민족 해방의 메시지로 환치하면서 쉘리를 배우고, 간디를 읽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와 인도의 시인 타고르, 독일의 문호 괴테를 좋아한 것도 이 시기였다.

괴테는 많은 사상적 편력을 했다고 한다. 스웨덴붉에서 신비주의, 헤델에서 능동주의, 스피노자에서 단독사상, 자연에서 범신론 등으로….

이 점이 함 선생님과 통하는가? 그는 사상적으로 웰즈에게서 문화적ㆍ역사적 낙관주의, 톨스토이에게서 휴머니즘, 내촌(內村)에게서 성서, 타골ㆍ칼라일ㆍ카스키ㆍ노자ㆍ장자ㆍ바다받기타에서 최근의 데이아르 샤르뎅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편력을 계속했는가 하면 삶과 행동의 면에서는 인도의 간디에 심취해 왔다. (주20)


주석
15> <전집> 4, 215쪽.
16> 앞의 책, 218쪽.
17> 앞의 책, 218~219쪽.
18> 함석헌, <겨울이 만약 온다면>, <전집> 4, 111~112쪽.
19> 함석헌, <역사와 민족>, 233~238쪽, 제일출판사, 1964.
20> 안명우, <선생님께 드리는 글>, <씨알 인간 역사-함석헌선생 80순기념문집>, 5쪽, 한길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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