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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회] ‘혈맹의 벗’ 김교신을 잃고: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1 08:00 김삼웅 동경 유학시절 1927년 2월.. http://t.co/hPhPhHnQ3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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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1 08:00 김삼웅 동경 유학시절 1927년 2월 성서조선 동인 윗줄 좌로부터 유인성 함석헌, 아랫줄 좌로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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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1 08:00 김삼웅

 

 

동경 유학시절 1927년 2월 성서조선 동인 윗줄 좌로부터 유인성 함석헌, 아랫줄 좌로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사진은 씨알의 소리에서.

함석헌이 오산고보에서 ‘선생질’(자신의 표현)을 하고 있던 1930년 5월 9일 남강 이승훈이 눈을 감았다.
105인 사건으로 피체되어 3년여 옥살이를 하고 풀려나 3ㆍ1운동을 주도하고, 민족대표로 참가했다가 다시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1922년 가출옥하여 오산고보로 돌아와서 이 학교의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승훈은 함석헌이 일본 유학 중일 때인 1924년 김성수의 간청으로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이때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하고, 다시 오산고보로 돌아와 학교운영에 힘을 쏟다가 66세를 일기로 삶을 접었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자기의 유골을 해부하여 생리학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고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행되지 못하고 오산학교 동산에 안장되었다.

함석헌에게 남강은 생애의 큰 스승이었다. 그의 죽음 앞에 여러 날 목 놓아 울었다. 그는 스승에 대한 상념을 이렇게 썼다.

여순이 지났어도 언제 몸을 찌그리는 일도 다리를 뻗고 버둥버둥하는 일도, 대낮에 낮잠을 자는 것도 나는 본 일이 없다. 그에게는 어려워서 자란 곳이 놋점(유기농장)이었던 것 같이 인생을 다듬어냄이었고, 젊어서 직업이 장사였던 것 같이 삶이란 개인이거나 나라거나 밑져서는 아니되는 것이었다. 갈 때는 올 때보다 이를 남긴 것이 있어야 한다. 그야말로 성경에 있는 착하고 진실한 종, 작은 일에 충성하는 종이었다.

할 것은 하자는데 좋고 언짢고, 높고 낮고, 네 거 내 거가 있을 리 없다. 3ㆍ1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하자고 부서를 다 짜놓은 민족대표들! 이 선언서에 뉘 이름부터 먼저 쓰느냐가 문제가 되어 옥신각신하는데 어디 나갔다 들어오다가 비로소 그것을 알고 “그거 무슨 문제될 것 있느냐, 순서가 무슨 순서냐? 죽는 순서야! 어서 손병희부터 먼저 써라”해서 막혔던 일이 동이 터지듯이 일사천리로 됐다는 것은 세상이 잘 아는 이야기 아닌가?
(주석 12)

함석헌은 이같은 스승을 오산동산에 묻고 한동안 슬픔에 잠겼다.
강토는 아직 캄캄한 미명인데 나라 걱정하던 스승이 떠나고, 그의 빈 자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함석헌은 1930년 학교 교정에 세운 동상 앞으로 신입생들을 데리고 현장학습으로 ‘남강정신’을 강의하였다. 당시 전교생이 500명 정도여서 교사와 학생들은 가족처럼 유대가 이루어졌다. 교사는 붉은 벽돌로 지은 3층 건물이었다.

1930년 일제의 압력으로 신간회가 해체되고, ‘민중대회사건’으로 40여 명의 핵심간부가 체포되었다.
그는 언제까지 평범한 교사생활로 안주하지 못하였다. 함석헌은 일경의 감시 뿐 아니라 교무처 직원들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경찰에 보고했다. “하나님의 발길”은 그를 고난의 현장으로 내몰았다.

1930년 여름방학에 서울에 사는 김교신과 정릉 그의 집에서 2주일 동안 독일어 공부를 하고 새학기를 위해 오산으로 내려간 날이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경찰에 붙잡혀 갔다. 불문곡직, 무슨 혐의인지 밝히지도 않고 정주 경찰서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언론에서는 ML당(마르크스ㆍ레닌당) 간부를 체포했다고 보도했지만, 그는 ML쪽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함석헌은 일주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한 주일에 유치장이 어떤 것임을 비로소 그 풍속화 맛을 알아서 이것이 훗날에 퍽 도움이 되었다.” (주석 13)고 말했다.

두번째 투옥까지는 일종의 ‘맛 뵈기’ 수준이였다면, 세번째는 좀 더 강했다.
세번째 투옥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함석헌은 1938년 3월 오산고보를 사직하였다. 이유는 창씨개명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억누름에 더 이상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양심에 따른 결단이었다. 그는 감시자들의 압박에도 수업시간에 우리 말로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가치있는 책들을 읽으라고 추천하면 학생들은 정주로 나가 사왔다. 1930년 7월에는 ‘성서조선 독자회’를 열어 성경 연구와 함께 민족혼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행동은 ‘불온’의 대상이 되고, 압박이 심하여 차라리 그만 두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를 폐지하고, 조회 시간에 <황국신민서사>를 낭독케 했다. 그리고 친일인사들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시국 강연회를 통해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옹호했다. 함석헌의 동경고사 동창이며 오산학교 교사를 지낸 서춘도 이 대열에 끼었다. 함석헌은 더 이상 ‘교사질’을 버티기 어려웠다.

오산시절의 함석헌은 학생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함 도깨비’로 통했다.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해서였다. 어느 해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의 스트라이크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평소 친일 성향으로 밉보였던 교사들을 두들겨 주기로 했다. 그런데 사전에 정보가 새나간 것인지, 막상 대상 교사들은 피신하고 엉뚱하게 존경하는 함석헌이 구타를 당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한다.

학생들이 폭행하려 하자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라는 것, 나중에 학생들이 반성하면서 그 이유를 묻자 “나도 사람인데 때리는 학생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지 않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작가ㆍ언론인 선우휘는 <사상계>에 쓰기도 했다.

그 이전 이미 나는 학생시절에 함옹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을 듣고 있었다.
오산고보에 다니는 고향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의 화제에서 곧잘 ‘도깨비’라는 닉네임을 가진 교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함옹이다.

처음이나 “도깨비가 개천물 마시듯 한다”는 속언이 생각시켜 “술을 잘 마시는 선생이냐”고 물었더니 “노오”, “그럼 성품이 고약하냐” 그것도 “노오”, “우악스럽게 생겼느냐”, 그것도 “노오”, 내가 곤혹을 느끼자 연민과 그제야 자기들만이 안다는 자랑이 뒤섞인 얼굴도 “무엇이고 못하는 것이 없어서 도깨비란다”고 알려주었다. 이어서 그들은 “오산고보를 나오고 동경일고와 동경고사의 입시를 보았는데 두군데 다 합격되었으나 하루라도 빨리 은사 이승훈 옹의 육영사업을 도울 생각에서 동경고사를 다닌 것이라 하여 너무 성적이 좋아 그것을 시기한 일인 학생에게 칼로 찔린 일이 있다”느니 “회화ㆍ작시ㆍ작곡 못하는 것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늘 조선옷(한복)만 입고 다닌다고 했다. 개중에는 “일본말 교과서를 내놓고 조선식 한문자음을 옥편으로 찾아내라는 것은 질색이라”고 투덜거리는 친구도 없지 않았다.
(주석 14)


주석
12> 함석헌, <남강ㆍ도산ㆍ고당>, <전집> 4, 166~167쪽.
13> 함석헌, <한배움>, <전집> 4, 23쪽.
14> 선우휘, <주관적 함석헌론>, <사상계>, 196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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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회] ‘씨알사관’의 역저, 고난의 산물: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해방을 맞아 이.. http://t.co/UYOGXRO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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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해방을 맞아 이 책을 펴내게 된 사연도 적었다. 그가 소련군에 피체되어 북한에 억류중일 때 먼저 내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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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2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해방을 맞아 이 책을 펴내게 된 사연도 적었다.
그가 소련군에 피체되어 북한에 억류중일 때 먼저 내려온 친구 노평구가 묵은 잡지에서 어렵게 원고를 찾아서 자기가 내는 <성서연구>에 다시 연재를 하고, 이것이 마치면서 단행본으로 내게 되었음을 밝힌다. 함석헌의 서문은 이어진다.

골방에서 무릎을 겯고 앉아 친구들에게 이야기로 한 그대로를 다듬지도 못하고 일반 세상에 내어놓은 저자의 맘은 부끄럽고 두려울 뿐 아니라 차라리 설음을 금할 수 없다. 본래 이것은 자신 홀로의 탄식이며 반성이요, 친구에게 하는 위로며 권면이다. 우리의 기도요 신앙이지, 역사연구가 아니다.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은 자 같이 다듬을 겨를도 없이 내어놓는다고 하기는 하면서도 될 수 있다면 ‘고난의 역사’를 연구해 보자고 뜻만은 먹었다. (주석 10)

함석헌은 해방 뒤의 혼란과 자신의 투옥 등으로 원고를 보완하지 못한 사정을 밝히면서 책의 제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이라는 말이 일반 독자에게 걸림이 될 듯하니 빼면 어떨가 하는 의견이 잠깐 나왔으나 그것은 사슴에게서 뿔을 제하는 일과 같아서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이 글이 이 글이 된 소이는 성서적 입장인 데 있다. 저자의 생각으로는 성서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 입장에서만 역사는 쓸 수 있다. 엄정한 의미의 역사철학은 성서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희랍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적으로 보는 이 성서의 입장에서만 성립이 된다. (주석 11)

2003년 한길사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은 1962년 3월 “사슴에서 뿔을 제하는” 격의 ‘성서적 입장’을 빼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재, 대폭 보완하여 재출간하였다. 초판 출간이 그의 표현대로 ‘박옥’이었다면, 개재 증보의 신간본은 ‘금옥(金玉)’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해방 뒤 역사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저술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책과 관련해서는 뒤에 다시 쓰겠다. 그는 민족사의 어둠이 짙던 시대 민족사관과 식민사관이 부딪히던 1930년대에 ‘씨알사관’을 바탕으로 하는 독특한 민중의 고난을 중심으로 하는 이 책을 저술하였다.


주석
10> 앞의 책, 2쪽.
11> 앞의 책,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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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회] <성서조선>에 ‘조선역사’ 연재: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1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오산고보 시절, .. http://t.co/CLBmZ1vBz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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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1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오산고보 시절, <​성서조선>에 종교(기독교)에 관해 많은 글을 쓸 정도로 독실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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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6장] 오산고보 교사 10년 ‘조선역사’ 쓰고 옥고

2012/12/19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오산고보 시절, <성서조선>에 종교(기독교)에 관해 많은 글을 쓸 정도로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초기의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서 차츰 벗어나 독자적인, 조선적인 기독교로 바뀌어 갔다. 함석헌의 ‘종교사상의 계보’를 연구한 강돈구 교수는 그의 종교적 특징을 지적한다.

“김교신과 마찬가지로 함석헌도 우치무라로부터 무교회주의를 받아들이되, 우치무라의 ‘일본적 기독교’ 대신에 ‘조선적 기독교’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함석헌의 ‘조선적 기독교’는 김교신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김교신은 한반도의 강역에 의미를 부여한 반면, 함석헌은 한반도의 강역보다는 오히려 역사에 착안하였다.” (주석 5)

그는 이어서 둘째 특징으로 “그의 다원주의적 종교관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다원주의적 종교관은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그것보다 한층 더 진전된 것으로, 유영모로부터 받은 영향에 기인한다.” (주석 6)라고 분석했다. 함석헌은 1940년대 초 무교회주의와 멀어질 때까지 충실한 기독교인으로 30대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함석헌은 1934년 2월부터 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 (61~83호)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하였다.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과 조선역사 교육이 금지된 시국에 그는 소수나마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자 ‘조선역사’를 지었다. 연재에 앞서 1933년 12월 30일부터 새해 1월 5일까지 서울 오류동 송두용의 집에서 6박7일 동안 동계 성서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그는 ‘조선역사’의 초고를 발표하고, 참석자들과 토론하였다. 그의 명저가 태어나게 된 고고지성인 셈이다.

박은식과 신채호가 망명지 중국에서 나라를 빼앗겨도 “국혼과 국사만 잃지 않으면 독립이 가능하다”면서 <한국통사>(박은식)와 <조선상고사>(신채호)를 지은 것과 비교된다. 함석헌이 <성서조선>에 연재했던 것을 보완하여 엮은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신채호의 민족사관에 비견되는 민중사관의 독특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 책은 망명지가 아닌 일제의 억누름이 극박스러운 오산에서 씌여졌음에 의미가 각별하다.

그가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칠 때, 이미 한국의 역사학계는 ‘민족주의’, ‘유물사관’ 그리고 ‘실증주의’라는 세 가지 흐름으로 근대 사학의 뿌리를 내리는 중이었다. 예컨대 신채호는 1931년부터 조선의 <상고문화사(上古文化史)>를 <조선일보>에 연재 중이었고, 백남운은 1933년에 계급투쟁사론의 관점에서 <조선사회경제사>를 동경에서 출판했다. 그리고 1934년 5월에는 실증주의를 내건 이병도에 의해서 진단학회도 창립되었다. 우연한 일이지만, <성서조선>에 <조선역사>가 연재되기 시작한 것은 이병도의 진단학회가 설립되기 석 달 전부터였다. 그밖에도 문일평은 1933년부터 <조선일보>에 <사안(史眼)>으로 본 조선>을, 정인보는 1936년부터 <동아일보>에 <5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하여 각각 민중중심과 유물론적 사관의 일단을 선보였다. (주석 7)   

한편 이 무렵 조선총독부는 <조선반도사> 35권을 편찬하였다. 일제는 병탄 초기부터 조선사 관련 각종 사서를 불태우거나 주요한 것은 일본으로 가져가고, 1923년 1월부터 총독부 정무총감이 배석하고(편찬위원장), 1925년부터는 중추원으로 이관하여 1937년까지 27년에 걸쳐 식민사관에 기초한 <조선반도사>를 편찬하였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97만5천원이 투입되고, 일본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를 총동원하였다. ‘조선사’ 35권 외에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천 623편을 별도로 펴냈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관학자와 조선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조선반도사>를 편찬하면서 내건 ‘편찬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 백성의 지능과 덕성을 개발하여 그들을 훌륭한 제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이번에 중추원에 명하여 <조선반도사>를 편찬하게 한 것도 또한 민심훈육의 일단에 기하고자 함이다. 일본에서는 ‘신부(新府)’의 인민을 교육함‘을 불평과 반한의 기풍을 조작하는 결과로 끝나는 것이 상례라 하고…. 이제 조선인에게 조선역사를 읽는 편의를 제공하면 그들 조선인에게 옛날을 생각하여 그리워하는 자료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고 하지만…. 조선에는 고대의 사서가 많으며 또한 새로이 저작한 것이 적지 않다…. <한국통사> 등 후자는 근대 조선의 청일, 노일간의 세력걱정을 서술하여 조선이 등을 돌릴 길을 밝히고 있으니 이들 사서가 인심을 심히 곤호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서들의 ‘절멸’을 가함은 오히려 그것의 전파를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공명ㆍ정확’한 새로운 사서를 읽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가 현저할 것이다. (주석 8)

일제는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야욕에서, 그리고 속국화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조선은 본래 북만부는 중국의 속국이고, 남반부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억지를 ‘역사적 사실’로 꾸미고자 온갖 궤변과 망설을 끌어들이면서 왜곡과 날조로 <조선반도사>를 편찬한 것이다.

일제의 <조선반도사> 편찬 시기는 함석헌의 일본 유학과 오산고분 교사 시절과 맞닿는다. 그가 남달리 재능이 있고 탐구하고 싶었던 미술, 기독교사 등을 뒤로 하고 역사를 지망한 데는 일제의 한민족사 왜곡에 대한 반발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온갖 억누름 속에서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한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고 하겠다. 조선총독부가 <조선반도사>를 편찬할 때 일본의 관학자들과 조선에서는 최남선ㆍ이병도ㆍ신석호 등 어용사학자들이 다수 참여하고, 편찬 과정의 여러 가지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이런 추론은 가능하다.

함석헌의 조선사 연재는 그때마다 일제 관헌들의 요시찰의 대상이 되고 잡지는 회원 외에 배포가 금지되었다. 그는 초년 교사 시절에 총독부의 눈초리를 의식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글을 썼다. 그리고 해방 뒤 1950년 4월 이 원고를 단행본으로 묶어 간행하였다. 발행처는 성광문화사, 값은 750원이었다, 함석헌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밝힌다.

이 조그마한 글은 본래 20년 전 10여 인의 신앙동지 앞에서 이야기로 한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우리 거문고를 바빌론 시냇가 언덕 위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 놓던 때다. 외적(外的) 압박, 내적(內的) 비탄으로 말이 자유롭지 못한 그때에 쓰디 쓴 입에 붙이어 우리의 온 길, 갈 길을 이야기 해 본 것이 이 고난의 역사다.

그 후 그것을 그 동지의 1인이요, 지금은 고인이 된 김교신 군이 <성서조선>지에 연재하였다. 광고도 선전도 않은 그 잡지는 독자가 가장 많을 때에도 2백이 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나마도 압박자의 뜻에 거슬려 폐간을 당하게 되는 때에 이 역사도 그 이유의 하나였고, 책은 모두 수색되어 없애 버린 바 되었으니 이 고난의 역사는 그 바빌론 거친 들에서 지나가는 바람결에 잠깐 들렀다가 들 끝에 사라지는 외로운 포수(捕囚)의 신음성 같이 아주 없어져 버린 듯하였다. (주석 9)


주석
5> 강돈구, <함석헌 종교사상의 계보>, <종교연구>, 2001년 여름호, 18쪽, 한국종교학회.
6> 앞의 책, 19쪽.
7> 이치석, 앞의 책, 303쪽.
8>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선사편수회 개요>, 김삼웅,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 223쪽 재인용, 인물과 사상사, 2004.
9>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서문, 1쪽, 성광문화사,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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