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도시락’ 문제가 많은 국민들을 허탈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하는 자괴감을 느낀 분들이 많았습니다.

 

책임을 통감합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문제의 발단은 ‘준비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작년 하반기, 방학 때 여러 가지 이유로 밥을 못 먹는 아이들이 많다는 점이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니까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일을 시작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실은, 정부 안에서도 준비가 부족하다는 문제제기가 있었고 논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밥 못 먹는 아이는 없게 하자’는 쪽으로 정책결정이 이뤄졌습니다.

 

‘학기 중에 학교에서 무료급식을 받는 아이들을 방학 때는 아무 대책 없이 방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판단과 주장 앞에 ‘준비가 덜 되어 있다’

‘5만 5천 명에서 25만 명으로 확대할 때 뒷받침이 가능한 인프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대가 있었지만 ‘그래도 해내자’ 하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이런 방침에 따라 실제로 이 일을 맡을 지방자치단체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정책결정 취지에 대해 일선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한게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마음’을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정책이라는 재료에 ‘사랑과 정성’을 보태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이들의 입장에서 한번만 더 생각했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질책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지행정은 정책이라는 그릇에 세심하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 전달하는 일입니다.

특히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서귀포에서 부실 도시락이 전달 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며칠 뒤 ‘밤골 공부방’이라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천주교 수녀님들이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공부도 가르치고 점심도 제공하는 곳입니다.

 

여기 아이들은 모두 명랑하고 활발했습니다.

그 다음에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초등학교 여학생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학생으로부터 ‘못산다고 친구들이 잘 놀아주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목이 메었습니다.

 

이 여자 아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양극화의 두려운 결과이고, 참으로 무서운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정말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뇌관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배고픔이나 외로움보다

주위에서 ‘낙인찍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의를 기울여 왔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번에 우리 사회 복지 시스템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특히 복지정책을 전달하는 시스템에 허점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어쩌면 불행 중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 해결할 방법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니까요.

그렇게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읽으시는 여러분께 ‘참여’도 함께 고려해 주실 것을 요청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공직사회가 자기 역할을 다하도록 각별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사회 구석구석에 빠짐없이 피가 돌게 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참여가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공직사회가 핏줄 구실을 제대로 하는 바탕 위에 지역사회가 모세혈관 역할을 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제도적 지원을 해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공감대를 이뤄나갈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널리 모아질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함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2005.1.24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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