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2 08:00 김삼웅

 

 

학교를 자퇴한 뒤 2년 동안은 함석헌에게 고뇌와 방황의 시기였다.

“공부를 중단하고 두 해 동안 번민할 때 포플러에 기대고 서는 밤도 많았고 숲 속으로 바다로 지향없이 헤매던 날도 많았지만, 무언지 아직 꼬집어 문제를 삼지 못했습니다.” (주석 5) 란 기록에서 잘 나타난다.

고향 마을에는 온갖 신문이 나돌았다. 만세 부르다가 학교에서 쫓겨나 맨날 산에 올라 창가만 부른다. 심지어 함석헌이 미쳤다는 등의 박소문이었다. 함석헌은 집안 형편이 어려운 줄을 알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심중을 꿰뚫고 다시 공부를 하도록 일깨웠다.

1921년 늦은 봄이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정처없이 서울로 올라왔다. 이곳저곳 학교를 돌며 입학의 길을 찾았으나 이미 신학기 개학날이 지나서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다시 귀향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거리에서 집안의 형이 되는 함석규 목사를 만났다. 그는 서울 배제학당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고향마을에 기독교를 맨 먼저 전도한 사람이다. 그는 대한청년단 재정부장과 대외문서작성 관계를 맡는 독립운동가였다. 어렸을 적부터 함석헌을 무척 아껴왔다.

함석규는 함석헌을 정주의 오산(五山)학교로 가라고 권했다.
그래서 오산으로 내려가 중학교 3학년에 입학하였다. 그때까지도 함석헌은 오산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이 학교의 존재도 몰랐다. 남 같으면 대학을 졸업할 나이에 오산중학 3학년생이 되었다. 명문이라는 관립 평고생이 무명의 오산에 가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의 오산학교 입학은 또 한 차례 인생의 길을 크게 바꾼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자신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였다. 3ㆍ1운동이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는 계기였다면, 오산입학은 새로운 얼ㆍ혼ㆍ알의 탄생이었다. 함석헌은 오산에서 민족정신의 수련을 닦게 되었다.

오산은 뒷날 함석헌이 풀이한대로 ‘다섯 뫼(五山)’의 지형으로, 익주의 고성(古城)을 중심으로 동북쪽에 연향산과 해성산, 서쪽에 제석산, 서남쪽에 천주산, 남쪽에 남산봉이 둘러쳐진 곳이다. 여기에 남강 이승훈이 1907년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를 세웠다.

사업으로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된 남강은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교육진흥론>이란 강연을 듣고 난 뒤 개인의 영달보다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결심 아래 금주ㆍ금연과 단발을 결행하고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평양에서 오산으로 돌아와 기존의 서당을 개편하여 신식교육을 가르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에 이어 오산학교를 세웠다.

함석헌이 오산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농가집 사랑방이나 건너방에 서로 끼어 욱적거리니 몸이 성하고 장질부사가 나고 더럽기 한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만큼 수준 이하의 교실이었다. 엉터리 교사도 더러 있었다.

학생도 합탕이었다. 전부터 있는 학생은 몇이 안 되고, 모두 새로 모여든 사람들인데 평고 퇴학자가 있지, 신성(학교)에서 닦아회(동맹휴교) 하고 온 자가 있지, 서른 된 수염난 이가 있지, 교회 장로 하는 사람이 있지, 훈장하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본 백화파(白樺派) 문학을 읽고 문사연하는 치가 있지. (주석 6)

본래의 학교 건물은 3ㆍ1운동 때 일본 헌병대가 ‘민족주의의 소굴’이라 하여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한 해 뒤 독지가 김기흥이 거금을 내놔 45평의 세 칸짜리 임시교사를 지었다. 함석헌이 입학했을 때는 이 교사였다. 설립자 남강은 민족대표 33인의 기독교 대표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다. 일본 관헌들은 눈에 불을 켜고 교사와 학생들을 감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누구 하나 겁먹거나 불평하지 않고, 민족의식으로 똘똘 뭉쳐 열심히 공부하였다. 함석헌에게 이런 모습이 경이로웠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생애에 걸쳐 스승으로 삼는 사람들을 ‘만났’다. 남강 이승훈ㆍ도산 안창호ㆍ고당 조만식이다. 이들은 당대의 민족지도자이고 인격자이며 교육자, 신앙인이었다.

함 선생이 오산학교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을 때 남강은 3ㆍ1운동 후 옥중에 있었다. 함 선생이 남강과 직접 접촉한 기간은 오산의 교사로 취임한 1928년 봄부터 남강이 급사한 1930년 5월까지 2년밖에 안 된다. 그리고 함 선생이 도산을 만나 뵌 것은 잠깐잠깐 두 번 뿐이라고 한다. 고당도 3ㆍ1운동 전후 두 번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었으나 함 선생이 오산에 편입했을 때는 이미 교장으로 있지 않았다. 함 선생은 고당에게 배운 일이 없다. 이처럼 세 분은 함 선생이 직접 글을 배운 선생님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맘속으로 참 스승으로 우러러 모신 이가 이 세분이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주석 7)


주석
5>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씨알의 소리>, 1970년 4월호.
6> 함석헌, <남강ㆍ도산ㆍ고당>, <전집>4권, 163쪽.
7> 노명식, 앞의 책, 221쪽.


저항인 함석헌 평전/[5장] 민족정신 세례, 저항의 젊은 시절

2012/12/11 08:00 김삼웅

 

 

함석헌이 평고 시절에 겪은 가장 큰 사건은 1919년 3ㆍ1운동에 참여한 일이다. 그의 나이 18살 때이다.
3ㆍ1운동은 한민족, 한겨레의 거족적인 항쟁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소외되고 푸대접 받아오던 평안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와 부상자를 낼 만큼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3ㆍ1운동의 집회횟수는 가장 많은 평안도가 315건으로 297건의 경기도(서울 포함) 보다 훨씬 많았다.
참가 인원은 인구밀집의 경기도가 665,900명인데, 평안도는 514,670명, 사망자수는 경기도 1,472명, 평안도 2,042명, 부상자수 경기도 3,124명, 평안도 3,665명, 피검자수 경기도 4,680명, 평안도 11,610명이었다.
(주석 1)

평안도에서 이처럼 많은 희생ㆍ부상ㆍ피검자를 낸 것은 일찍부터 전래된 기독교와 천도교 그리고 이 지역 특유의 외세에 대한 강한 저항정신의 발로였다.

함석헌은 3ㆍ1운동 당시 친척 형인 함석은이 평고로 자신을 찾아오면서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함석은은 평안남북도 학생운동의 책임자로서 평고의 책임을 함석헌에게 맡겼다. 함석헌은 몇몇 학우들과 밤을 세워 시위운동 때 나눠 줄 태극기를 목판에 새겨 찍었다.

1919년 만세를 부르는 그 해 처음 석은 형이 평양으로 왔다. 그가 3ㆍ1운동 때 평남북 학생운동을 맡은 관계로 자연 평고에서는 내가 연락을 하게 되었다. 독립선언서를 전날 밤중에 숭실학교 지하실에 가서 받아들던 때의 감격! 그날 평양경찰서 앞서 그것을 뿌리던 생각, 그리고 돌아와서는 시가행진에 참여했는데, 내 60이 되어오는 평생에 그날처럼 맘껏 뛰고 맘껏 부르짖고 그때처럼 상쾌한 적은 없었다. 목이 다 타마르도록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고 팔목을 비트는 일본 순사를 뿌리치고, 총에 칼 꽂아가지고 행진해 오는 일본군인과 마주 행진을 해 대들었다가 발길로 채여 태연히 짓밟고 일어서고, 평소에 처녀 같던 나에게서 어디서 그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 정말 먹었던 대동강 물이 도로 다 나오는 듯하였다. (주석 2)

3
ㆍ1운동은 함석헌의 생애를 바꾸게 되었다.
부모가 바라는 대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의사가 되어 가난한 이웃의 병을 고치겠다는 뜻이, 나라를 찾는 민족운동으로 바뀐 것이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한 명문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끝내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차마 양심상 그러하지 못했다.

만세를 부르고 난 후 한 반의 친구들은 거의 다 복귀했다. 그리하여 그대로 보통학교 훈도가 되고, 군 서기가 되고, 군수ㆍ경부가 되고, 의사ㆍ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한동안 계엄령이 내렸다가 안정된 뒤에 집에서 어른들이 학교에 다시 가라 하기도 하여 봇짐을 싸가지고 평양에 나왔으나 차마 학교문엘 들어설 수가 없었다. 머리를 들이밀기가 우선 싫고 한 번 박차고 나온 학교를 다시 갈 수가 없고, 또 함께 운동했던 친구 중에는 아주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어진 사람도 있는데, 의리상 배반이 되는 것 같아 학교에 가서 자복하고 계속해 다니기는 싫었다.

크게 용기가 있어서 아니라 맘이 약해 차마 할 수가 없어 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나의 인생은 딴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무엇을 할 지 모르지만 하여간 의사 되기는 그만 두었다.
(주석 3)

혁명가나 사회운동가 중에는 젊어서 의학(의술)을 공부하다가, 몇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보다 민중ㆍ민족의 병(해방)을 고치겠다고 ‘전업’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동학혁명을 주도한 전봉준은 아버지를 따라 한때 약업에 종사한 적이 있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만든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중국 5ㆍ4운동과 저항문학의 작가 루쉰, 중남미 해방의 게릴라 대장 체 게바라, 필리핀 독립전쟁의 영웅 호세 리잘의 전공은 의학이고 의사였다.

함석헌은 기미년의 저항과 좌절을 열여덟 피끓는 나이에 겪었다. 이름 없는 민중들이 어떻게 저항하고, 지도층이 어떻게 일제와 타협하면서 민중을 배반하는가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민중(씨알)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각성을 하게 되었다. 3ㆍ1운동이야말로 그에게 새 인간의 탄생이었다. 의학 지망생 함석헌이 씨알 사상가로 거듭나게 하는 하늘의 축복이었다.

3ㆍ1운동은 겉으론 실패라면 실패다. 만세만 부르면 독립은 세계에서 ‘거저 주는’ 줄 알았더니 그대로 되지 않았으니, 그 의미에서 실패다. 그러나 실패인 줄을 차차 알면서도 민중은 결코 풀이 죽지 않았다. 일본 군인의 총칼도 감옥의 생죽음도 무서워 않던 민중이 풀이 죽기 시작한 것은, 되는 줄 알았던 독립이 아니 돼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 소위 일본 사람의 문화정치 밑에서 사회의 넉넉한 층, 지도층이 민중을 팔아넘기고 일본의 자본자와 타협하여 손잡고 돈을 벌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게 됨에 따라 민중의 분열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운동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 운동의 뜻은 민중이 하나로서의 의식을 가진 데 있다. 씨알의 싹이 튼 것이다. 싹이 텄기 때문에 첫 번 열(熱)이 지나갔어도 낙심을 아니한 것이다. 낙심 아니한 증거는, 만세 이후 일어나서 한동안 밀물처럼 성행했던 강연회, 교육열이 그것이다. 그것은 자라는 현상이다.
(주석 4)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박과사전> 11,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2>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사상계> 1959년 3월호.
3> 앞과 같음.
4> 앞의 책.

  


01.jpg
1.51MB

저항인 함석헌 평전/[4장] 수난의 땅 평북 용천에서 출생 2

012/12/1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1914년 덕일학교 4년을 졸업하고 양시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병탄하면서 식민지 교육의 친일ㆍ우민화를 목적으로 <조선교육령>을 제정하고 교육제도와 내용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함석헌은 5학년에 편입이 가능했으나 일본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4학년에 편입되었다.

1914년 4월 양시공립보통학교로 편입했을 때의 일인데, 실제로 5학년에 들어갈 학력인데도 단지 “묻는 말에 일본말로 대답 못한다”는 이유로 4학년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왜 일본말로 말해야 한단 말인가? 소년 함석헌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일본어를 필수과목으로 배워야 한다는 학교규칙 때문이었다. (주석 9)

양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장래 의사가 될 꿈을 안고 1916년 4월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평고)에 입학하였다. 당시에도 평양은 큰 도시였다. 평안도 지역의 물산이 집결하고, 오래 전부터 중국과 교역이 이루어져 대륙문화가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함석헌은 대동강이 흐르는 평양 경창리 5번지에 하숙을 정하였다.

열여섯에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물아래 촌바우가 금수강산을 본 것이 이것이 처음이었다. 소년 시절의 3년을 그 속에서 자란 것은 일생에 잊지 못할 행복이다. 평양은 이른바-

긴 성 한 편에 굼실굼실 흐르는 물
한 벌판 동편 끝에 올망졸망 섰는 뫼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그 장관은 넓은 들과 그 복판을 흐르는 대동강이었다. 거기 중심이 되어 호령하는 자리에서 주산(主山)이 된 것이 모란봉이다. 모란봉이 크기 조막만한 데 지나지 않지만, 한번 거기 올라서면 사방 몇 백리의 산천이 지호간(指呼間)에 있다. 이것이 이른바 제1강산이다.
(주석 10)

함석헌의 평양 생활은 평범했다. 식민지 초기여서 일경의 감시가 삼엄하고, 평양도 하루가 다르게 왜색으로 변해갔다.

나는 어느 점으로 보나 학교에서 두드러진 것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부 성적으로는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조그만 시골구석에서는 재주 있단 말도 들었는지 모르나 평안 남북, 황해 일대의 수재가 다 모인 곳엘 가면 자연 그렇게 되기도 쉽지 않고 또 웬일인지 소위 공부벌레 소리 듣는 것은 속되어 보여서 머리 싸매는 공부는 한 일이 없다. 그렇다고 이른바 호걸 노릇을 했나 하면 물론 아니다. 맘은 타고난 약질이어서 바닷가에 났으면서도 헤엄칠 줄을 모르고 체조시간이 되면 철봉하잘까봐 그것만 걱정이었다. (주석 11)

평고 시절(1917년 8월)에 함석헌은 부모가 정해 준 고향 이웃마을 처녀 황득순과 결혼하였다. 17살, 아내는 한 살 아래였다. 효심이 두터웠던 그는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부모가 정해준 배필을 그대로 맞았다.

오래지 않아서 나는 결혼을 너무 이르게 했다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지식청년 사이에 유행했던 이혼 같은 것은 그때도, 그 후도 생각해 본 일 조차 없습니다. 아내는 전연 교육을 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 내가 졸업을 하고 돌아오기 전에 그에 대한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듯합니다.

그때 두 분이 교회에 나가시며 며느리까지 데리고 나가셨고, 아버지 어머니가 손수 며느리 교육하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리해서 어머니는 해방 직전까지 그 지방 여성계에서는 지도적인 인물이 되신 것입니다.
(주석 12)


주석
9> 이치석, 앞의 책, 83쪽.
10>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사상계>, 1951년 4월호.
11> 앞의 책.
12> 함석헌, <나의 어머니>, 노명식, <함석헌 다시읽기>, 46쪽.

 



저항인 함석헌 평전/[4장] 수난의 땅 평북 용천에서 출생

2012/12/09 08:00 김삼웅

 

 

함석헌이 덕일소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 용천군에는 11개의 사립학교가 세워졌다.
지역 유지들이 신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사립학교들의 운명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일제의 조선병탄 이후 제정된 <조선교육령>에 의해 대부분이 폐교되고 말았다.

함석헌이 네 살 적에 을사늑약이 강제되고, 여덟 살 때인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에서 처단하였다. 이 사건은 한국의 2천만 겨레에게 엄청난 환희와 감격을 안겨주었다. 소년들에게도 그랬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함석헌은 1912년 이용엽 등 친구 4명과 안중근의 ‘단지동맹’ 대신 잉크로 손도장을 찍은 문서를 만들어 하나씩 나눠 갖고 일심단(一心團)을 조직하였다.

안중근 의사처럼 왜놈들을 물리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어른들에게 알려지면서 일심단은 곧 해체되었다. 일본군과 러시아군으로 갈라서 ‘전쟁놀이’를 하던 철부지 아이들의 행동 치고는 유다른 일이었다. 당시 조선의 민심이기도 했다.

이 일은 함석헌의 끈질기고 치열한 저항사의 첫 번째 사건으로 꼽아도 될 것이다. 일심단은 해체되고 말았지만, 함석헌의 단심(丹心)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졌다.

이제 와 생각하면 꿈 같은 일이요 어린애다운 한 웃음거리지만, 그래도 잊을 수 없이 내 속에 남긴 무엇이 있다. 새파란 잉크를 일부러 불에 쪼여서 내 엄지손가락 인을 찍었던 그 모양이 지금도 눈 앞에 또렷 또렷이 보인다. 이놈의 손가락, 열두 살 때 한맘 바쳐 나라 위해 죽겠다고 내 손으로 인을 찍었던 내 손가락, 일제시대엔 일본 형사가 제 맘대로 끌어다 꾹꾹 찍고, 공산시대엔 소련 군인이 또 맘대로 끌어다 꾹꾹 찍은 이 손가락, 이 운명의 손가락, 그냥 둘까 잘라 버릴까? 글을 쓰다 말고 이 손가락을 들여다본다. (주석 6)

함석헌이 열 살 때 나라가 망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병탄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개국 이래 처음으로 국권이 왜적의 손에 넘어갔다.

나라는 망했다. 산도 그 산이요, 바다도 그 바다요, 하늘도 그 하늘, 사람도 다름없는 흰 옷 입은 그 사람들이건만 이제부터 자유는 없단다.

자유가 무언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자유 속에 자유가 무언지 모르고 살았던 나는 이제부터 자유가 무언지를 배워야 했다.

대한이라 하면 안 된다. 조선이라 해야 한다. 태극기는 떼어버려야 한다. 일장기 그리기를 배워라. 이제 우리나라 임금이란 것은 없다. 일본사람이 총독으로 와서 우리를 제 맘대로 한다. 나는 그 ‘흑노망향가(黑老望鄕歌)’란 노래를 들은 일이 있다.

온 세상이 다 재미 없고
늘 슬플 뿐일세
내 늘 원은
내 집에 보내주오.
(주석 7)

열 살 짜리 소년에게도 망국 - 국치의 소식은 충격이었다.
남달리 영민하고 집안이 일찍부터 민족주의사상에 접했던 까닭이었다. 비교적 일찍 개화의 물결을 탄 용천 지역의 정신사적 산물이기도 했다. 2년 뒤의 일심단 사건은 국치의 충격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내가 열 살 때, 나라가 망하던 때, 그가(함일형-필자) 몇 사람 되는 동리 어른들과 예배당에서 눈물을 흘려 통곡하며 “하나님…”부르짓던 것이 지금도 눈에, 귀에 선하다. 어른이 그렇게 통곡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무서운 것도 같고, 나도 섧기도 하고, 무슨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전신이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나라가 뭔지를 조금 깊이 느낀 것도 그것이 처음, 기도를 정말 들은 것도 그것이 처음. (주석 8)


주석
6> 함석헌, <나라는 망하고>, <사상계> 1959년 3월호.
7> 앞과 같음.
8> 앞과 같음.

 



저항인 함석헌 평전/[4장] 수난의 땅 평북 용천에서 출생

2012/12/08 08:00 김삼웅

 

 

함석헌의 치열하고 파란많은 생애를 예증이나 하듯이, 그가 태어난 이후 한반도 주변의 파고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갔다. 두 살이 되던 해 영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고, 용암포사건이 벌어졌다. 러시아가 두만강ㆍ압록강 유역의 삼림 벌채권을 얻고 이를 계기로 한국에 대한 경제ㆍ군사적 침투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용암포는 압록강 유역에서 베어 낸 목재가 모이는 곳이다. 러시아는 용암포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망루를 설치하는 등 군사기지로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과 일본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대치하게 되었다.

세 살 때인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그것도 접전이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다.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하고,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는 등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러일전쟁은 어린 함석헌의 정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자기집 사랑채에 다수의 일본군이 머문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일본군은 용암포의 아라사(러시아)를 몰아낸다는 구실로 진주하여 한동안 함석헌의 집에 주둔하였다.

함석헌은 뒷날 어른들로부터 당시 일본군의 행패를 듣게 되고, 주민들이 어떻게 일본군과 대처했으며, 총소리에 놀라 달아난 이야기까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싸우는 모습의 전쟁놀이를 하면서 자랐다. 어른들로부터 들은 어린 시절 그의 심중에는 외세의 분탕질이 아우라로 자리잡았다.

어수선하고 살벌한 국경 마을에서도 함석헌은 총명하게 자랐다.
별세할 때까지 가졌던 선풍도골의 잘 생긴 얼굴은 타고난 귀골이었다. 미모의 얼굴에 두뇌도 총명하여 첫 돌 전에 말을 다 하고, 여섯 살에 큰 누이와 고모가 공부하는 곁에서 천자문을 익혔다.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다섯 살에 서당 삼천재(三遷 )를 다니다가, 서당이 기독교 학교 덕일(德一) 소학교로 바뀌면서 신식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집안 아저씨뻘 되는 함일형(咸一亨)이 세운 것이다. 덕일소학교는 서당과는 달리 역사, 산술, 지리, 유년필독 등을 가르쳤다. 함석헌이 어린 나이에 신식교육을 받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어린 함석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함일형이다. 그가 아명 애놈으로 불릴 때, 항렬자 석(錫)자와 불화 변(火)의 법 헌(憲)자로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불화 변의 헌(櫶)자는 자전에도 없는 글자여서 그냥 법 헌자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함석헌은 1959년 자서전에서 이름과 관련, 다음과 같이 썼다.

당초에는 ‘헌’ 자를 불 ‘火’ 변에 憲을 한 자를 주었다.
석은 항열자요, 정말 내 것은 헌(헌)인데, 한문을 잘 아는 학자인 그가 왜 자전에도 없는 글자를 지어주었던지, 후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은 자전에 없는 자라 해서 불 ‘火’를 떼어버리고 憲만을 쓰게 됐다.

내 성격을 미리 알고 뜨거움이 부족한 듯해서 예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를 주었듯이 일부러 불을 붙여주었던 것인지, 혹은 본래 성격대로 되노라고 불이 떨어져 나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나, 나는 오늘날 불이 그리운데 불은 떨어져 나가고 없다. 이름대로 되는 것이라면 이제라도 다시 잃었던 불 도로 찾아 볼 ‘火’변에 쓰고 싶다.
(주석 4)

함석헌보다 한 해 뒤에 태어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朴烈)은 본명이 박준식이었다.
그러나 서당에 다닐 때 자기는 기질로 보아 스스로 열(烈)이라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렇게 썼다. 실제로 그는 이름대로 치렬하게 일제와 싸웠다.

<초의 불꽃>을 쓴 프랑스의 과학철학자ㆍ사상가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초의 불꽃은 현실에서 현실을 초월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본래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불꽃은 탈 때 하나의 살아있는 실체가 되며, 그 실체는 거기에서 타오르고 환하게 된다. 실로 여러 가지 존재가 불꽃에서 그 실체를 얻고 있다.”
“촛불은 원래 혼자이며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혼자서 꿈꾸는 것, 이것은 인간 본래의 모습이다.”
“불꽃은 하나의 꽃이다. 불꽃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걸친 불의 다리이며,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끝없는 공전이며, 철학자에 있어서는 형이상학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주석 5)

소년 함석헌에게서 불(불꽃)을 연상한 함일형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농민운동에 앞장서고, 1898년 용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용천부사의 해임을 주장하는 등 선각자였다. 고향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고 함석헌을 기독교에 인도한 것도 그였으며, 신식 체조를 가르쳐 준 것도 그였다. 함일형은 함석헌 일가에 민족주의의 혼을 심어 주었다.


주석
4> 함석헌, <물 아래서 올라와서>, <전집>, 89쪽.
5> 김삼웅, <백범김구 평전>, 30~31쪽 재인용, 시대의 창, 2005.

 


저항인 함석헌 평전/[4장] 수난의 땅 평북 용천에서 출생 2

012/12/07 09:18 김삼웅

 

제국주의 열강의 땅따먹기 광풍이 동북아 끝자락까지 세차게 몰려오는 20세기 첫 해 한반도 북녘 용천에서 한 총명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 한국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함석헌(咸錫憲)이다. 1901년 양력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마을이다. 당시 사람들은 섬의 생김새가 사자와 비슷하다하여 사점이라 불렀다. 원래는 섬이었으나 오래 전부터 좁은 바닷길을 매축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아버지 함형택(咸亨澤)과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난 함석헌은 첫째와 둘째가 출생 뒤에 곧 사망하였으므로 실제로 장남이 되었다. 위로 누이 1명과 아래로 1남 2녀가 더 태어났다. 함석헌의 아명은 애놈이었다. 부모는 둘 다 16세 때에 결혼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농부이고, 가문은 벼슬한 선대가 없는 평민이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스스로 ‘평안도 상놈’으로 자처하였다.

그가 태어난 1901년은 새 세기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한반도에 굵직한 인물이 다수 태어났다.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군이다.

우리 귀에 익숙한 1901년생 동갑내기들의 뚜렷한 족적과도 견줄 수 없었다. 예컨대 그의 말투대로 하자면, 춘사 나운규처럼 영화인도 못되고, 사회주의혁명가 박헌영처럼 해방투쟁가도 못되고, 장공 김재준처럼 기독교의 도착화도 실현시키지 못하고, 그리고 천재 시인 이상처럼 자기 몸을 던져 선구적인 시 한 편도 쓰지 못했다. (주석 1)

1901년생 중에 여기에서 빠진 인물이 있다. 약산 김원봉이다. 경남 밀양 출신으로 3ㆍ1운동 뒤 만주로 망명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폭렬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조선의용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역임한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평안북도 서단에 위치한 용천군은 동남쪽은 철산군, 동북쪽은 신의주시ㆍ의주군, 서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단둥(安東)과 마주보며, 서남쪽은 황해와 접하고 있다.

용천은 예부터 민족의 아픔이 굽이굽이 서린 곳이다. 본래 안흥군이라 불렀으며, 993년 거란의 제1차 침입 때 서희 장군의 활약으로 수복한 강동6주 가운데 한 곳이다.

1231년 몽골의 제1차 침입 때에는 몽골군에게 포위되었다가 항복하여 부사가 포로로 잡혀갔으며, 서북면의 요충이었기 때문에 거란ㆍ몽골ㆍ홍건족 등이 침입할 때마다 성이 함락되는 등의 비운을 겪었다. 수난은 계속되어 1270년 원나라의 동녕성에 속하였다가, 1278년 복구되었다.

조선시대 정묘호란 때에는 이광립ㆍ이립ㆍ김우 등이 용골산성을 끝까지 사수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안극함ㆍ차원철ㆍ장후건 등이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당하고, 1811년 홍경래의 난군에는 용천군이 함락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1895년 지방관제를 개혁하여 부ㆍ군제를 실시할 때 용천군으로 개편되어 의주부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평안북도 용천군이 되었다. 함석헌이 자랄 때는 홍경래에 관한 구전 설화가 많이 전해왔다. 그는 홍경래를 남달리 흠모하였다.

내가 난 곳은 평안도, 상놈이 산다는 평안북도, 거기서도 용천, 용천에서도 맨 서쪽 바닷가다. 거기를 ‘사점’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사자섬’이란 말이다. 백두산에서 서남으로 내리닫는 맥이 끝에 와서 천마산을 일으켜서 삭주ㆍ의주ㆍ구성 세 고을의 만나는 곳이 되니, 그 산을 의주, 천마, 삭주 천마, 구성 천마, 소위 삼천마(三千摩)라고 부른다. 거기서 내려와서 의주의 백마산이 있고, 그 백마에서 떨어져 몇십 리 내려오다가 솟은 것이 용골산, 그 아래에는 평지가 계속되어 폭 560리의 살진 들이 열리는데, 그것이 용천군이다.

일망무제라 하고 싶은 마냥한 들이 이어닿아 여름에는 푸른 비단이요, 가을에는 황금바다다. 그러므로 인총(人總)이 배여 그 빽빽하기가 전라도와 같은 곳이다. 사점은 그 끝에 내려가 있는, 길이 십리도 못 되는 조그만 섬이다. 그것이 가장 큰 것이고, 그 부근 십 리 안 팎에 신점, 간염, 삽섬, 구염, 남경하는 졸망졸망한 섬 다섯이 있어 그것을 합해 사자육도(獅子六島)라 하는데, 수 백년 전부터 둑을 막아 육지에 대었으므로 이젠 이름만 섬이지 섬이 아니다. 땅은 살져서 곡식은 많이 나고, 바다의 고기잡이도 잘 되어 살기는 괜찮으나 워낙 교통이 불편한 곳인지라 사는 사람은 대개 가난하고 하잘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주석 2)

인간은 자연(환경)의 산물이다. 함석헌이 태어나기 전이나 후에 그의 본향 용천은 ‘고난의 역사’ 중에서도 유독 수난이 심했던 곳이다. 반면에 일망무제의 바다와 넓은 평야, 수려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함 선생의 고향은 끝없이 파도치는 흰 물결이 서쪽 하늘에 맞닿는 황해 바닷가, 천마산 줄기의 백마산성 끝자락에 우뚝 솟은 용골산 아래, 여름에는 푸른 비단, 가을에는 황금 물결치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기름진 평야가 펼쳐지는 곳.

함 선생의 그 한없이 넓은 가슴은 하늘과 맞닿는 황해가 낳은 것이고, 어떠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는 용의 골격 같이 굳세고 준엄한 용골산이 낳은 것이고, 그 인자하고 온화한 마음씨는 비단같이 펼쳐진 용천 평야가 낳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주석 3)

함석헌의 부모는 1894년에 결혼했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이 해 8월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평안북도 철산 가두섬으로 피난하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모든 재산이 없어지고 폐허상태였다.

아버지는 평범한 소작농이었으나 그림을 잘 그리고, 가구를 직접 만들어 사용할 만큼 손재주가 있었다.
20세 무렵까지 서당에 다니고, 청년이 되어서는 스스로 한의술을 공부하여 인근 마을에까지 소문이 나서 농어민들을 치료해주었다. 아버지는 중년에 기독교에 귀의하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교회 장로가 되었다. 정의감이 강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한의사로 번 돈을 교회ㆍ학교 설립에 내놓았다. 함석헌은 아버지로부터 이런 성품을 타고났다.

어머니는 용천 진고지(진곶) 마을 농부의 둘째 딸이었다. 부모는 역시 소작농이었다. 어머니는 매우 부지런하여 농삿일은 물론 무명베, 삼베, 명주를 잘 짜고, 베틀이 방을 가득 차지하여 ‘장베틀집’으로 불렸다. 50이 넘어서야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공부할만큼 정신력이 강하고 인자하였다. 함석헌의 빼어난 정신력은 어머니의 유전자를 이었다. “내 사상의 밑돌을 어머니가 놔주셨다”고 했다.


주석
1> 이치석, <씨알 함석헌 평전>, 35쪽, 시대의 창, 2005.
2> 함석헌, <물 아래서 올라와서>, <함석헌전집 4권>, 한길사. (이후 <전집>표기)
3> 노명식 엮음, <함석헌 다시 읽기>, 82쪽, 인간과 자연사, 2002.

 



저항인 함석헌 평전/[3장] 씨알의 혼 야인정신

2012/12/06 09:02 김삼웅

 

 

함석헌이 좋아하는 인물은 김시습이었다. 둘은 닮은 데가 많았다.

김시습이 미친 모양을 하고 다니며 길가(세조치세)에 오줌을 쌌다. 그것이 누구냐? 그가 길을 가다가는 주저앉아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하고 통곡하던 바로 민중 그 자신이 아닌가? 오줌을 쌌다니 어디다 싼 것일까?

세조의 정치에 대해, 바로 세조의 얼굴에 대고 싼 것이지 뭐냐? 칼을 뽑아 물을 잘라도 물은 오히려 흐른다고, 사람의 모가지는 자를 수 있어도 민중의 오줌인 신화, 전설, 여론은 못 자를 것이다. 봐라! 두고 봐라! 한이 뼈에 사무쳤다니 원수라도 갚을까 봐 겁이 나 그러냐? 비겁하다! 그게 아니다. 미친 체 오줌을 싸는 것은 원수 갚을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비겁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에서 싸는 오줌이 아니야. 오줌 쌈을 받는 놈보다는 스스로 좀 넓고 큰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야. 소원이야 예수처럼 죽으면서도 죽이는 놈을 위해 복을 빌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만한 얼의 실력은 없으니, 오줌이라도 싸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장자, 휘트맨 등 들사람의 정신을 소개하면서 참 삶의 가치를 보여준다. 함석헌은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엔 영리한, 약은 문화인만 있고 어리석은 들사람 없어 이꼴이다. …들사람이어 옵시사! 와서 이 다 썩어져 가는 가슴에 싱싱한 숨을 불어넣어 줍시사!”

함석헌의 이 글은 5.16 쿠데타로 기백을 잃은 젊은 지성인들에게 한줄기 석간수처럼 목마름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본인은 한 마리 ‘야생마’처럼 포악한 독재와 싸우면서 민주주의와 씨알의 권리를 지키는 등대지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들(野)’은 거칠고 투박함을 상징한다. 그 대신 순수하고 자연적인 힘을 갖는다. 옛날에는 지배세력은 성(城) 안에 살고 피지배층은 성 밖에 살았다. 성 밖의 씨알ㆍ민초ㆍ백성들이 성안 귀족들을 먹여 살렸다. 전쟁이 나면 그들이 성을 지키려 싸우다 죽었다. 들은 이들의 백골로 덮히고, 부토가 되어 씨앗을 키웠다.

함석헌의 ‘들사람론’은 현실적 ‘약은 문화인’과 대비된다.

그럼 달리는 차 같은 이 시대 풍조에 어떻게 하나? 누가 죽을 각오를 하고라도 브레이크를 밟는 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는 미쳤다는 소리를 듣다 죽더라도 휩쓰는 이 물결을 막으려 홀몸으로 나서는 야인, 들사람이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엔 영리한, 약은 문화인만 있고 어리석은 들사람이 없어 이꼴이다.

함석헌은 태어나기를 평안도 용천 바닷가 상민출신의 야인이었다.
조선왕조가 지역차별로 소외시킨 데다 가계상으로도 한번도 벼슬을 하지 못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의 배경도 들사람의 상황이었다. 나라가 망할 무렵(1901년)에 태어나 감수성이 예민한 19세 때에 3ㆍ1운동을 겪었다. 오산학교에서 들사람 류영모ㆍ이승훈ㆍ안창호ㆍ조만식을 만나면서 기독교신앙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다. 동경 유학시절에 겪은 대진재와 야인사상에 접하게 되면서 함석헌의 ‘들사람’의 혼이 성장한다.

함석헌은 이 글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바벨탑 이야기를 모르나? 이제 우리가 아무리 지식 기술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정말 우주적인 크고 높은 정신에 철저하다면, 소련이나 미국의 지금 앞선 것쯤은 문제 아닐 것이다. 하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생각과 정력을 몇 해나 더 민중을 누르고 짜먹을 수 있나 거기만 쓴단 말이냐? 너희 생각이 그렇게 작고 비루하니까 너희 자식들이 저렇게 망나니가 되지. 그러나 이제라도 아니 늦다!
빈 들에 외치라!

함석헌이 살아 온 시대적 배경, 분단ㆍ6ㆍ25전쟁ㆍ연이은 독재정치는 그의 야인정신을 저항정신으로 체화시킨다. 그가 걸어온, 걷고자 한 야인의 길은 권력ㆍ종파ㆍ세력ㆍ집단화를 거부하는, 순수 재야의 들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말은 무게가 있었고 글은 비중이 실렸으며 그의 노선은 민중이 따랐다.

야인정신에 함께하기 마련인 저항정신으로 하여, 함석헌은 폭압의 시대에 ‘싸우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척박한 이 땅의 들길에서 반독재와 평화통일, 그리고 씨알이 주인이 되는 민주화의 소금수레를 끄는 야생마의 역할을 다 하였다.

 

 



01.jpg
1.51MB

저항인 함석헌 평전/[3장] 씨알의 혼 야인정신

2012/12/05 08:00 김삼웅

 

함석헌이 방점을 찍고자 한 부문은 권력을 우습게 여기는 엄자릉의 자유혼이다.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한 개 선비로서 일어나 어지러워 가던 한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전쟁이 다 끝나고 천하가 완전히 제 손아귀에 들어온 줄을 알게된 담, 맘에 좀 불안을 느꼈다. 이제 천하에 나를 칭찬 아니할 놈이 없고, 내게 복종 아니할 놈이 없건만, 단 하나 한 사내만이 맘에 걸린다. 그것은 엄자릉(嚴子陵)이다. 그는 광무제의 동창 벗이었다.

한 가지 성현의 도를 닦는 시절 서로 맘을 알아주는 벗으로 허락을 했었고, 높은 이상과 도타운 덕에 있어 그가 자기보다 한 걸음을 내켜 드딘 줄을 아는 광무제는 첨의 선비의 뜻을 버리고 권세의 길을 탐해 천자가 되기는 했지만 자릉이가 자기를 속으로 인정해 주지 않을 줄을 알았다. 그 생각을 하면 앞에 네 발로 기며 아첨하는 소위 만조백관이란 것들이 보기도 싫었다. 그래 사람을 부춘산에 보내 냇가에 낚시질하는 엄자릉이를 데려오라 했다.

자릉이 따라왔다. 대신이오 무어요 하는 물건들이 뜰 아래 두 줄로 버텨 서서 감히 우러러도 못보는 데를 자릉이 성큼성큼 걸어 광무 앉은 곳으로 쑥 올라갔다.

“아. 문숙(文叔)이 이게 얼마만인가?”

그동안에 몇 해의 전쟁이오 나라요, 정치요, 천자요, 그런 것은 당초에 코 끝에 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신하들은 어쩔줄을 몰랐다. 광무도 도량이 넓다고는 하나 짐승처럼 부려먹는 신하들 앞에서 제 위에 또 권위가 있는 것을 허락해 보여 주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릉이를 신하 대접을 했다가는 당장에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고 물론 자릉이 그럴 이도 없겠지만 광무의 맘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무엇인지 모르는 기(氣)에 눌림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신하들 보고는 “너희들은 물러가라, 내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서로 정을 좀 풀련다.”했다. 밤새 이야기를 하다 잤다.

천문을 보는 신하가 허방지방 들어와 “큰일 났습니다. 객성(客星)이 태백(太白)을 범했으니 무슨 일이 일삼는지 모르겠습니다.”했다. 태백이란 지금말로 금성인데 옛 사람 생각에 그것은 임금을 표시한다 했다. 객성이란 다른 별이란 말이다. 임금을 절대 신성하여 범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엄자릉이 자면서 광무의 배 위에다 다리를 펴 올려놓고 잤더라는 것이다. 그래 후의 시인이 자릉의 그 기상을 대신 말하여,

萬事無心一釣竿 (만사무심일조간)
三公不換此江山 (삼공불환차강산)
平生誤識劉文叔 (평생오식유문숙)
惹起虛名萬世間 (야기허명만세간)

일만 일에 생각 없고
다만 하나 낚시대라
삼공벼슬 준다한들
이 강산을 놓을소냐
평생에 잘못 봤던
유문숙이 너 때문에
쓸데없는 이름날려
온세상에 퍼졌구나.

함석헌이 이 무렵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엄자릉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이 가장 따르고자 했던 인물은 매월당 김시습이 아닐까.

세조 1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난 소식을 듣고 중이 되어 독서와 저작으로 일생을 마친 사람이다. 유교와 불교의 정신에 통달하고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당대에 으뜸이었으며 산천을 주유하고, 권력자들을 타매했던 ‘무관의 제왕’이었다. 매월당은 함석헌 그 자신이다.


저항인 함석헌 평전/[3장] 씨알의 혼 야인정신 2

012/12/04 08:00 김삼웅

 

함석헌의 글은 이어진다.

마케도니아 한 절반 야만의 자식인 알렉산더가 천하를 정복할 적에 당시 무화의 동산인 헬라를 말발굽 밑에 두루 짓밟았다. 감히 머리를 들 놈이 없었다. 오는 놈마다 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디오게네스란 유명한 어진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젊은 아이의 영웅심 자만심에, 으레 제가 나를 보러 오겠거니 했다. 기다려도 아니왔다. 약도 올랐고 호기심도 일어나고, 부하를 데리고 디오게네스 있는 곳을 찾아갔다.

가보니 늙은이 하나가 몸에는 누더기를 입고 머리는 언제 빗질을 했는지 메두사의 머리의 뱀처럼 흐트러졌는데, 바야흐로 나무통 옆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이 나무통은 그의 소유의 전부인데 낮에는 어디나 가고 싶은데로 그것을 굴려가지고 가고 밤에는 그 안에 들어가 자는 것이었다. 디오게네스는 누가 왔거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젊은 영웅은 화가 났다.

“너 알렉산더를 모르나?”

제 이름만 들으면 나는 새도 떨어지고 울던 애기도 그치는줄만 아는 알렉산더는 맘속에 “저놈의 영감쟁이가 몰라 그러지 제가 정말 나인줄을 알면야 질겁을 해 벌떡 일어설테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한 소리였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놀라지도, 코를 찌긋도 않고 끼웃해 알렉산더를 물끄럼 보고 하는 말이 “너 디오게네스를 모르나?” 그러고는 목구멍에 침이 타 마르고 있는 젊은 정복자를 보고 “비켜, 해 드는 데 그림자져” 했다.

산림학파(山林學派)가 있었다. 조선조 10대 연산군 이후의 계속된 사화와 당쟁으로, 이를 피하여 정계를 떠나 강호(江湖)에 파묻혀 독서와 문장으로 세월을 보내던 학자ㆍ문인들이다. 서경덕ㆍ이황ㆍ조식ㆍ이이 등이 대표적인 강호파이다. 이들 역시 순수한 들사람은 아니다. 함석헌이 이 시기에 살았다면 혹시 이 부류에 들었을까 싶지만, 아닐 것이다.

함석헌의 뜻은 단호하다.

뼈다귀가 빠질 대로 다 빠지고 살이 썩을 대로 다 썩은 우리나라 이씨네 500년에 있어서도 그래도 무슨 기백이 남은 것이 있다면 상투 밑에서 고린내는 났을망정 한 줌 되는 산림학자 있지 않았나? 정몽주를 때려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선죽교에 피가 흐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성계ㆍ이방원을 만고의 죄인으로 규정짓는 민중의 판단이지, 왕위에 또 왕이 있단 말이지 무언가? 야차(夜叉) 같은 수양으로도 미친 녀석 같은 김시습을 어떻게나 모셔보려 애를 쓴 것은 무엇인가? 칼보다 더 무서운 칼이 있고 곤룡포보다 더 아름다운 옷이 있단 말이지.


저항인 함석헌 평전/[3장] 씨알의 혼 야인정신

2012/12/03 10:00 김삼웅

 

 

우리 역사에서는 옛날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살던 만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다.
야만인이라는 뜻이 담겼다. 사전에서는 야인을 ① 교양이 없고 예절을 모르는 사람 ②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 ③ 시골사람 ④ 야만인으로 표기한다.

함석헌은 야인을 ‘들사람’이라고 해석했다.
종합교양지 <새벽> 1959년 11월호에 함석헌은 ‘들사람 얼’이란 부제가 붙은 "야인정신"이란 글을 썼다.
함석헌은 20권에 이르는 전집이 간행될 만큼 많은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인터뷰를 하였지만, 나는 그의 많은 글 중에서 한 편을 고르라 한다면 서슴지 않고 "야인정신"을 들겠다.

함석헌은 교육사상가, 언론인, 종교인, 역사학자, 민주화운동 지도자 등 다양하게 불린다.
실제로 ‘어느 하나’ 가 아니라 이들 모든 분야를 넘나들고 포괄하는 큰 그릇이었다. 그렇지만 나보고 누가 함석헌의 본령(本領)을 지적해보라면 서슴지 않고 ‘야인(野人)’, 바꿔말해서 ‘들사람’이라 하겠다. 단순히 관직이나 공직에 나가지 않았데서가 아니라 그의 품성과 생각과 활동이 ‘야인’이었다. ‘야인’, 곧 들사람 정신이야말로 함석헌의 본령이고 사상이고 행동철학의 준거가 되었다.

함석헌사상의 상징어인 ‘씨알’은 들사람의 올갱이다.
함석헌의 역사관, 교육관, 민중관, 언론관, 종교관은 하나같이 야인정신, 들사람 정신에서 발원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의 들사람 정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사상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야인정신"은 이승만 폭정의 말기에 많은 지식인, 언론인, 문인, 종교인들이 ‘관제화’, ‘어용화’ 된 시점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대다수 지식인ㆍ언론인들이 어용화된 시대에 함석헌은 광야에 선 모세처럼 ‘야인정신’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폭압과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권력에 기웃거리는 청년, 교사, 언론인, 종교인, 학자, 문인들에게 ‘내리치는’ 채찍이었다.

<새벽> 24〜38쪽에 이르는 권두논설은 함석헌 특유의 쉬운 구어체로 쓰였다. 함석헌사상의 모태이기도 하는 ‘야인정신’을 보여주는 몇 대목을 살펴본다.

“임금이구 뭐고 내게 상관이 뭐야?”

요(堯)가 천하를 얻어 임금이 된 다음, 세상에서 자기의 다스림을 어찌하나 알아보려 한번은 시골을 나갔다. 밭에서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농사꾼을 보고 슬쩍, “당신은 우리나라 임금을 아시오?” 했다. 농부가 그 말을 듣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흙덩이만 까면서 하는 말이 “아, 내가 해 뜨면 나오고, 해 지면 들어가고, 내 손으로 우물 파 물 마시고, 밭갈아 밥 먹고, 임금이구 뭐구 내게 상관이 뭐야?” 했다.

요가 속으로 내가 나 있는 줄을 모르리만큼 했으니 어지간히 하기는 했구나 하면서도 아무래도 맘이 시원치 못했다.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하자는 맘이오 가르치잔 생각이므로 호강이나 세력을 부리잔 뜻은 없어, 집을 지어도 백성보다 나은 것이 겨우 흙으로 싼 새 층대에서 더한 것이 없었음을 자기도 스스로 알지만, 그래도 어쩐지 맘의 한 구석에 불만이 있었다.

그래 사람을 영천(潁川) 냇가에 보내어 거기서 농사를 짓고 있는, 전에 도를 같이 닦던 시절의 친구인 소부(巢父)ㆍ허유(許由)에게 가서, 나와서 벼슬을 하고 같이 일을 하자고 권했다. 그랬더니 소부가 그 말을 듣고는 “예이, 더러운 소리를 들었군”하고, 그 영천수 흐르는 물에 귀를 씻었다. 허유가 송아지를 먹이면서 마침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그 모양을 보고 “야, 그 물 더러워졌다. 그것 먹이면 내 송아지 더러워진다.”하고 끌고 위로 올라갔다.

‘허유세이(許由洗耳)’의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요순의 성군이나 소부ㆍ허유의 무욕정신, 탈권력에는 함석헌 자신의 무욕ㆍ야인정신이 배어 있음을 보게 된다.

“감탕속에 꼬리치고 싶다 해라”

장자(莊子)가 초나라에 갔다가 어느 냇가에서 낚시질을 했더니, 그 나라 임금이 듣고 신하를 보내어 예물을 잔뜩 가지고 와 하는 말이, “우리나라 임금이 선생님의 어지신 소문을 듣고, 꼭 오시어 우리나라를 위해 일을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했다.

장자 그 이야기를 듣더니 하는말이 “이애, 여기 제사 돼지가 있다. 그놈 살았을 때 진장속에 뒹굴고 있지만 제삿날이 오면 비단으로 입히고 정한 자리를 깔고 도마 위에 눕히고, 칼을 들어 잡는다. 그때 돼지가 되어 생각한다면 그렇게 죽는 것이 좋겠느냐? 또 너희나라 사당 안에 점치는 거북 껍질 있지, 그놈이 살았을 때 바닷가 감탕 속에 꼬리를 끌고 놀던것인데 한번 잡힌 즉 죽어 그 껍질을 미래를 점치는 신령이라 하여 비단보로 싸여 장안에 간직해 두게 되니, 거북이 되어 생각한다면 죽어서 그 영광을 받고 싶겠느냐? 감탕 속에 꼬리를 끌면서라도 살고 싶겠나?”했다.

왔던 사신의 대답이 “그야 물론 진장, 감탕 속에서 딩굴고 꼬리를 끌면서라도 살고 싶지오.”, “그렇다면, 가서 너희 임금보고, 나도 감탕속에 꼬리를 치고 싶다고 해라. 천하니 임금질이니 그게 다 뭐라더냐?” 하고 장자는 물 위에 낚시를 휙 던졌다.

조선시대에 사림(士林) 세력이 있었다. 7대 세조 때에 갈리기 시작한 유림의 파벌 중 하나로, 김종직ㆍ김숙자ㆍ김굉필ㆍ정여창ㆍ조위ㆍ김일손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다. 9대 성종 때부터 관계에 등용되어 종래부터 정계에 뿌리박고 있던 훈구파와 대립하였다. 하지만 사림은 들사람, 야인은 아니었다. 그들은 권력을 추구했었다.


01.jpg
0.04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