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2장] 독재와 싸운 저항사상의 본질

2012/12/02 08:00 김삼웅

 

 

함석헌의 생애는 저항과 투쟁으로 일관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3.1만세시위 참여, 계우회사건, 성서조선사건, 독서회사건 등으로 구속되고, 해방후 신의주학생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속되고, 월남해서는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 정권에 의해 구속되는 등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는 펜이 요구될 때는 진짜 글을 통해 할 말을 하고, 제도 언론이 봉쇄당할 때는 온몸을 던져 행동으로 독재권력에 맞서 싸웠다. 언론이 압제자의 편이 되어 왜곡과 곡필을 서슴지 않을 때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하면서 직접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권력과 싸웠다.

그의 사상적 근저에는 노자와 장자의 무위사상, 기독교의 박애정신, 간디의 비폭력 평화주의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자연주의와 초월사상이 녹들었지만, 본바탕의 정신은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둔 비폭력사상은 저항이고 투쟁이었다. 휘트맨의 <풀잎>이나 쉘리의 <서풍>에서 보이듯이, 치열한 저항정신과 도전의식에서 삶의 본질을 찾고 고난의 가치를 일깨웠다.

그는 결코 유약한 선비나 초월적인 종교인, 관념론적인 사상가가 아니고 ‘정신의 순례자’는 더욱 아니었다.
이 세상의 모든 단어가 사라져도 저항이라는 말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행동한 ‘싸우는 평화주의자’ 이다.

근자에 함석헌을 지나치게 종교의 테두리 특히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시도가 있다. 특히 종교ㆍ정신계의 지도자인 유영모 선생과 동렬화 시키려는 것은 함석헌의 본령인 저항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가 아닌가 싶다.
평안도 호랑이, 아니 조선의 호랑이에게서 어금니와 발톱과 날램과 용기를 빼버려서는 안된다.

옛글에 ‘화호불성반위구(畵虎不成反爲狗)’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잘못하여 개를 그리게 된다”는 뜻이다.
함석헌의 모든 연구, 평가, 분석 은 마땅히 그의 투철한 저항사상 즉 비폭력 저항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함석헌 사상의 알파와 오메가는 ‘저항’ 바로 그것이다. 그의 저항정신은 오늘에 다시 발현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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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2장] 독재와 싸운 저항사상의 본질

2012/12/01 08:00 김삼웅

 

유신체제가 더욱 강고해지면서 긴급조치를 통해 모든 비판세력에 족쇄를 채우고 개헌운동을 폭력으로 봉쇄시킬 때에 함석헌은 분연히 일어나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함석헌 등 재야인사들은 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기념미사의 마지막 순서로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3.1 명동선언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선언문은 ①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위에 서야 한다. ②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③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과업이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정권은 이 일을 정부전복선동사건으로 몰아가면서 재야 지도급 인사들을 속속 구속했다. 구속자가 함석헌을 비롯, 김대중ㆍ윤보선ㆍ윤반웅ㆍ문익환ㆍ함세웅ㆍ신현봉ㆍ김승훈ㆍ이문영ㆍ서남동 등 18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은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3.1 민주구국선언사건에 이어 1979년 3월 1일에는 범민주진영의 연대투쟁기구로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이 결성되었다. 함석헌ㆍ김대중ㆍ윤보선 등 재야 지도급 인사들은 ‘3.1 운동 60주년에 즈음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평화적으로 재건, 확립하고 나아가 민족통일의 역사적 대업을 민주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자발적이며 초당적인 전체국민의 조직”으로서 ‘국민연합’을 결성했다. 함석헌은 김대중, 윤보선과 함께 공동의장에 선출되었다.

‘국민연합’의 산하에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NCC 인권위원회, 민주청년협의회 등 13개 단체가 가입할만큼 반유신 저항운동의 모태 역할을 했다.

함석헌의 반유신 저항운동은 지칠줄을 몰랐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되었지만 유신권력을 둘러싸고 권력내부에서는 치열한 음모와 권력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12.12 사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른바 ‘안개정국’이란 표현이 언론에 공공연하게 쓰일 만큼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1월 24일 함석헌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은 결혼식을 가장하여 서울명동 YWCA 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와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국민연합’,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회원 5백여 명은 △ 유신정권 퇴진 및 건국민주내각 조직 △ 공화당, 유신정우회, 통일주체국민회의 해산을 요구했다. 또한 △ 유신 대통령을 다시 선출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반역이며 △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대한 외부세력 개입을 일체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10.26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된 이래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검찰은 함석헌을 비롯 박종태ㆍ 양순직ㆍ김병걸 등 96명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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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2장] 독재와 싸운 저항사상의 본질

2012/11/30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누가 뭐래도 저항적인 행동주의자이다.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는 먹물쟁이가 아니라 치열하게 사유하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투사이고 들사람이고 저항인이었다. 그에게서 행동과 실천성을 빼면 사상가이고, 철학자이고, 문명비평가이고 종교인이 된다. 시인이고 역사연구가이고 언론인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이 함석헌의 본령은 아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식견과 학식을 두루 갖추고 있었지만, 그런 식견과 학식은 행동과 실천을 위한 에너지요 무기요 군량미였을 뿐이다. 학문을 위한 학문, 사상을 위한 사상, 철학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행동을 위한 학문, 실천을 위한 철학이었다. 그에게 행동과 실천을 배제한다면 평범한 저항적 지식인에 불과할 것이다.

함석헌의 생애를 추적하면 젊은 시절부터 투철한 행동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필두로, 일제식민지 시절에 대부분의 지식인이 침묵할 때 그는 성서조선사건, 계우회사건, 독서회사건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실제로 행동하고 그 행동의 결과 일제의 감옥에서 고난을 겪었던 것이다.

해방후 신의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북쪽에서 투옥되고 월남하여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체제에서 투옥되었다. 치열하게 저항하고 행동하다가 잡혀들어간 것이다. 그의 고난의 대부분이 말이나 글 때문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직접 행동하고 저항운동에 나선 적이 한 두차례가 아니었다.

자유당 독재가 극에 이르렀을 때 충남 천안의 씨알농장에서 단식하면서 저항하고,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여 14일 동안이나 삭발 단식투쟁을 벌이고, 1974년 11월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저항하여 한국신학대학생과 교수들이 삭발단식을 할 때, 이들을 격려차 방문했다가 거침없이 머리깎고 단식을 함께 하면서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이런 행동과 저항이 ‘소극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례를 들려드리겠다.
1971년 4월 19일 김재준ㆍ이병린ㆍ천관우와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를 주도한 것은 함석헌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재야 지식인 연합체로 기록되는 ‘민수협’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박정권에 도전한 이가 다름아닌 함석헌이었던 것이다.

‘민수협’은 70년대말부터 3선개헌의 후유증에서 깨어난 각계 인사들이 1971년 4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발아되었다. 이들은 1971년을 ‘민주수호의 해’로 정하고, 공명선거를 통해 1인 장기집권을 막아내고자 1970년 4월 8일 서울 YMCA에서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문화계 등 각계를 망라한 저명인사들이 모임을 갖었다. 그리고 4・27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명을 다짐하는 ‘민주수호선언’을 채택한데 이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모임에서 김재준ㆍ천관우ㆍ이병린ㆍ이병용ㆍ장용ㆍ김정례 등 6인으로 준비소위원회를 구성한데 이어 4월 19일 ‘민수협’을 정식 발족시키고, 함석헌ㆍ김재준ㆍ이병린ㆍ천관우를 대표위원으로 선출했다.

이후 ‘민수협’은 강연회, 좌담회, 성명서발표, 인권탄압 사례 조사, 공명선거를 위한 선거참관인단 구성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는 최초의 재야민주세력의 구심점으로서 이후의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등 긴급조치 시대 재야단체의 모태가 되었다. ‘민수협’의 지도자가 바로 함석헌이었고, 그는 모든 재야세력의 대부 역할을 하면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함석헌의 저항적인 실천운동은 1964년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불을 붙였다. 야당이 주최하는 전국적인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대학생들과 함께 반민족적인 한일회담반대 투쟁을 벌였다. 또한 1969년 박정권이 영구집권 야욕에서 자행한 3선개헌반대투쟁과 그 이후 반유신투쟁의 집회에서 어김없이 함석헌이 참석하여 사자후를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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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2장] 독재와 싸운 저항사상의 본질

2012/11/29 08:00 김삼웅

 

신학자 김경재(한신대)는 “함석헌의 문화 종교적 삶의 자리는 계몽주의적 자율적 이성에 대한 신뢰, 자연과학과 종교의 화해, 동양문화와 서구 기독교문명의 지평융합 그리고 세계문명 전체가 영적으로 크게 한번 털갈이를 하려는 진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문명전환기적 카이로스 의식으로 충만해 있었다” 면서 “오산학교 학장시설 다석 류영모와 남강 이승훈 선생을 만나 청년시절 기본사상의 기틀을 닦고, 일본 동경사범학교 유학시절 우치무라 간조, 간디, 톨스토이, 주세페 마치니, H.G.웰츠의 영향을 받아 그의 역사철학의 토양으로 삼았다.” (주석 14)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육화’된 저항사상은 어디서 기원하고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먼저 출생지역을 들 수 있다.
그는 “서북 끄트머리 평북 용천군에서도 바닷가인 부라면 원성동이다. 그는 ‘물 아랫놈들,’ 즉 ‘감탕물 먹는 놈’ 으로 자라났다. 그곳은 일명 사자섬이라고 하는데 일찍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소박한 농민생활에 히브리적 바탕의 신앙이 뿌리를 내린 동리였다.” (주석 15)

내가 난 곳은 평안도, 상놈이 산다는 평안북도, 거기서도 용천, 용천에서도 맨 서쪽 바닷가다. 거기를 ‘사섬’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사자섬’ 이란 말이다. …용천에서도 그 위대로 사는 사람들이 여기를 업신여겨 ‘물 아랫놈들’ ‘감탕물 먹는 놈들’ 하였다. 감탕이란 높은 지대의 흙이 비에 씻겨 흘러 바닷가에 내려가 가라앉아서 생긴 유기물질 많은 까만 충적토이므로 퍽 살찐 흙이나, 진흙이므로 샘물은 늘 흐리고 비가 오면 다니기가 참 불편한 흙이다. 그래 감탕물을 먹는다고 멸시하는 것이다. (주석 16)

함석헌은 그가 다른 글에서도 밝혔듯이 평안도 용천의 ‘상놈’으로 태어났다.
조선왕조가 지역차별로 소외시킨 데다 가계상으로 한번도 벼슬을 하지 못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와 같은 태생적인 환경은 생애를 두고 저항정신의 기본바탕을 형성하였다.

두번째는 성장기의 배경이다.
나라가 망하기 시작하는 1901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에 망국을 지켜 보고 감수성이 예민한 19살 때 3․1 운동을 겪었다. 직접 3․1 항쟁에 참여하여 평양고보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2년 후 오산학교에 들어가 류영모, 이승훈, 안창호, 조만식을 만나면서 신앙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다.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교보 시절에 겪은 대진재와 이 때 잔혹한 조선인학살을 지켜보면서 청년 함석헌은 식민지백성의 참상을 ‘육화’시킨다. 동경유학 시절에 무교주의자 우찌무라를 만나고, 셸리의 <서풍의 노래>에 접하게 되고, 김교신 등 동지들을 만난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이 움트기 시작한 정신사적 토양이다.

세번째는 시대적 배경이다.
식민지, 해방, 분단, 동족상쟁, 미군정, 이승만 독재, 5․16쿠데타, 한일굴욕회담, 유신, 5 ․17쿠데타 등 한국근현대사의 모순과 역리를 온 몸으로 겪으면서, 이에 대한 저항을 양심과 정의의 수단가치로 채택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저항의 방법은 비폭력 평화주의였다. ‘싸우는 평화주의자’라는 닉네임은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무저항주의라고, 아는 체 그런 소리를 하지 마라. 그것은 사실은 저항의 보다 높은 한 방법 일 뿐이다. 바로 말한다면 비폭력 저항이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 한 예수가 그렇게 맹렬히 악과 싸운 것을 보아라. 말은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늘에 올라가도 저항, 물속에 들어가도 저항, 허무 속에 가도 거기에 스스로 일으키는 회오리바람 속에 버티고 있는 하나님이 있는데, 너 만이 저항을 모른단 말이냐?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내가 너를 박차 너를 살려내고야 말리라.
(주석 17)


주석
14> 김경재, <함석헌의 ‘역사철학’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교수신문>, 2003. 1. 1.
15> 안병무 , 앞의 책, <씨알 인간 역사>.
16> <물 아래서 올라와서>,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4, 한길사.
17> 함석헌, 앞의 책, <저항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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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2장] 독재와 싸운 저항사상의 본질

2012/11/28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세상이 다 아는 대로 비폭력 저항주의자이다.
이에 따라 반체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부 인사들이 함석헌의 비폭력 저항주의를 두고 저항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짓’ 이라며 못마땅해 하였다. 역사적 허무주의나 패배주의가 아니냐고 힐난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반항은 하지만 미워하지 말고 싸움은 하지만 주먹질을 말라”고 비폭력 저항을 주창하였다. 그렇지만 함석헌은 딱 한 차례 ‘폭력’을 사용한 적이 있다. 성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 함석헌도 구조악 또는 공권력에 의한 현장폭력에는 폭력으로 대항한 것이다. 여성인권운동가 이우정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일은, 1975년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실천을 위한 투쟁을 지원하던 때의 일이다. 농성을 하던 기자들을 깡패와 경찰을 투입해서 끌어내는 과정에서 기자들이 많이 구타를 당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우리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무자비한 폭력에 항의하고, 부패정권의 포악을 폭로하는 증인이 되고자 해서였다.

우리가 도착해서 항의나 시위를 할 사이도 없이 함 선생님과 나 (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인권위원장)와 공덕귀 선생님(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인권위원장)은 경찰차에 쑤셔넣듯이 떠밀려 태워졌다. 그런데 함 선생이 벼락같이 소리를 치시더니 우리를 떠미는 순경의 뺨을 후려치시는 것이었다. 순경도 우리도 갑작스런 함선생의 행동에 잠시 벙벙했다. 나는 경찰차 (4인승의 조그만 차였다) 속에서 공 선생님과 함께 함 선생님을 놀리면서 실컷 웃었다.

왜냐하면 항상 비폭력투쟁을 강조하시면서 젊은이들이 경찰에 대해 욕을 하거나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을 극구 말리시고 경계하시던 분이 느닷없이 경찰의 뺨을 후려치셨기 때문이다. (…) 나는 함 선생님을 그렇게 분노케 한 것은 당신이 경찰에 떠밀렸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공 선생님과 나를 그렇게도 거칠게 질질 끌고 가서 차 속에 쑤셔 넣는 것을 보시고 격노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약한 자를 함부로 다루는 권력의 횡포에 참으실 수 없는 분노를 느끼셨던 것으로 짐작한다. 우리가 왜 그렇게 화를 내셨느냐고 물어도 쑥스러운 듯이 그냥 웃기만 하시던 모습은 꼭 부끄럼 타는 소년과 같았고, 그 인상은 지금도 내게 깊이 새겨져 있다.
  (주석 9)

함석헌은 어느 글에서 “이성과 감정이 대립할 때 감정의 편에 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말을 액면대로 이성 보다는 감정을 택한다는 것으로 치부하면 서툰 분석이다.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주의자인 함석헌의 비폭력사상은 폭력으로 무장한 구조악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다. 일본제국주의,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에 치열하게 저항한 것은 그것이 비인간적인 구조악의 폭력이기 때문이었다.

송기득은 “저항하는 사람이 영웅주의에 빠지면 참 저항자가 되지 못한다.” (주석 10)고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배에 순응하여 이미 말려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만 함석헌이 경찰관의 뺨을 때린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이 감정적이거나 권력주의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행동인이었던 그는 스스로 용기를 알았습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비겁이었습니다. 그는 비겁을 첫째 죄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살생 비폭력을 절대 주장했지만, 그러면서도 상대는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각오로서 싸울 실력이 없거든 차라리 폭력을 써서라도 힘껏 대적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죽을지언정 결코 구차하게 살려고 도망하거나 빌붙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석 11)

함석헌의 비폭력저항은 간디의 불살생 비폭력사상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다음에 인용한 <간디의 참모습>에서도 밝혔듯이 간디와 함석헌은 “싸울 실력이 없거든 폭력을 써서라도” 대적할지언정 결코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함석헌 저항사상의 본질이고, 철학이고, 실천윤리라 할 수 있다.

함석헌의 저항은 단순히 인간의 개체적 존재와 삶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사회와 역사의 현장에서 육화(肉化)시켰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적 저항’ 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대로 ‘존재적 저항’의 연장이다. 그는 나와 역사를 따로 떼어서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에게 있어 전체이다.(주석 12)

신학자 안병무에 따르면 “함석헌은 사상적으로 웰즈에게서 문화적 역사적 낙관주의, 톨스토이에게서 휴머니즘, 우찌무라에게서 성서, 타골, 칼라일, 라스키, 노자, 장자, 바가받 기타에서 최근의 데미아르 샤르뎅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편력을 계속했는가 하면 삶과 행동의 면에서는 인도의 간디에 심취해 왔다” (주석 13)라고 분석한다.


주석
9> 이우정, <민주화투쟁의 현장에서>, <나의 스승 함석헌>, 김용준 엮음, 해동문화사.
10> 송기득, <함석헌의 저항론>, <씨알 인간 역사 - 함석헌선생 8순기념문집>, 한길사.
11> <간디의 참모습>, <함석헌수상록, 바보새>, 동광출판사.
12> 송기득, 앞의 책.
13> 안병무, "순수와 저항의 길", <씨알 인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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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2장] 독재와 싸운 저항사상의 본질

2012/11/27 09:00 김삼웅

 

“항거할 줄 알면 사람이요, 억눌러도 반항할 줄 모르면 사람 아니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항거는 참 항거가 아니요, 대중이 조직적으로 해서만 역사를 보다 높은 단계로 이끄는 참 항거이다.”
(주석 1)

함석헌은 본디 태어나기를 온순한 천성을 갖고 세상에 나왔다. 어른이 되어서도 부끄러움,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겸손과 겸양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말대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저항의 인물이 되고 그 저항을 통해서 항일, 반소, 반분단, 반독재투쟁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씨알의 올갱이가 되었다.

“내가 반항을 좋아한다면 또 그만치 못지않게 순종, 온건, 평화도 좋아한다. 반항은 나의 후천적으로, 의식적으로, 뜻으로, 사상으로 하는 것인지 몰라도 평화는 내 선천적으로, 바탕으로, 감정으로 된 대로 하는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를 온순으로 났다. 인간 세상에 나서부터 나는 우리 집안에서 싸우는 건 보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다.”  (주석 2)

함석헌은 영국의 시인 셸리를 좋아했다.
특히 <서풍의 노래>를 좋아했다.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요” 라는 마지막 구절을 즐겨 인용하면서 셸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그의 불타는 반항정신 때문이다.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는 온갖 구속, 압박, 묵은 것에 대해 죽기로 반항하는 자유의 혼이었다.

서풍 노래의 셋째 절에서 그가 불어오는 서풍에, 지중해 고요한 물 위에 뜨는 옛 궁전의 꿈이 깨어지고, 대서양의 수평이 흔들려 깨지며, 바다 속의 해조들이 생기를 잃고 떨며 길을 여는 것을 본 그가 어떻게 그때 바야흐로 무르익으려는 문화에 있어서 벌써 그것을 벗어버리고 새 시대를 바라는 혼이 사무쳤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항, 항의, 생명의 바탕이 만일 자유에 있다면, 그 자유는 구속하고 뺏으려는 세력이 밖에서 오고 말라붙으려는 제도, 전통의 때가 안에서 꺼려 할 때, 거기에 대해 일어나 겨루는 정신이야말로 가장 귀한 도덕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영어를 나는 모르지만, 그 중에 resist란 말처럼 좋은 것은 없다. resit, revolt, protest... 다 좋은 말이다. 만일 resist란 말이 없다면 나는 영어를 아니 배울 것이다.”
(주석 3)

셸리의 저항정신은 함석헌의 저항정신으로 이어진다.
resist(저항), revolt(반항), protest(항의)는 모두 저항정신을 의미한다. 함석헌은 셸리의 <서풍의 노래>를 통해 포악한 독재에 시달리는 씨알들을 위로하면서 저항정신을 일깨웠다.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요”의 싯구는 분단과 냉전과 정치적 억압으로 신음하는 이 땅의 씨알에게 ‘새 봄’ 으로 상징되는 해방과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은 <저항의 철학> (주석 4)이란 글에서 보다 명료하게 제시된다. 그는 인격을 저항으로 인식한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고 서슴없이 갈파한다. 직접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유하는 것 아닌가? 우선 나는 나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는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주석 5)

함석헌은 저항을 존재론적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실천하였다. 저항에서 인격을 찾고, 인격의 원리로써 저항을 택한다. “인격은 생명진화의 가장 높은 맨 끝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전에 생명의 아주 낮은 원시적인 밑의 단계에 있어서도, 자유의 원리, 따라서 저항의 원리는 그 살림을 지배하고 있다” (주석 6)고 주장한다. 함석헌이 ‘저항’에 관해 얼마나 열정적인가를 살펴본다.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다 늙어 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라는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하던 그 말씀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말씀은 근본이 반항이다. 가슴 속에 갇혀 있지 못해 터지고 나오는 기(氣), 음(陰)한 주머니 속에 자지 못해 쏘아 나오는 정(精), 맨숭맨숭한 골통 속에 곯고 있지 못해 날개치고 나오는 신, 그것이 곧 말씀이다. 깨끗하라는 동정녀의 탯집도 그냥 있을 수 없어 말구유 안으로라도 박차고 나오는 아들이 곧 말씀이다. (주석 7)

천지창조하려는 하나님 곧 물 위에 운동하셨다는 그 운동은 무슨 운동이었나? 반항운동이었다. 암탉이 알을 까려 품고 앉은 듯한, 무슨 큰일을 저지르려는 사람이 골똘히 생각을 하고 앉은 듯한, 그러한 모양을 표시하는 그 운동이란 말은, 곧 영겁의 침묵을 깨치려는 첫 말씀의 고민이요, 무한 깊음의 혼탁을 뚫고 나오려는 코스모스의 몸부림이요, 원시의 어둠을 한 칼에 쪼개려는 빛의 떨림이었다. (주석 8)


주석
1> 함석헌, <레지스땅스>, <사상계>, 1966년 3월호.
2> <겨울이 만일온다면>, <함석헌전집 4>, 한길사.
3> <겨울이 만일 온다면>, 앞의 책.
4> 함석헌,<저항의 철학>, <씨알은 외롭지 않다>, 휘문출판사.
5> 앞의 책.
6> 앞의 책.
7> 앞의 책.
8>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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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장] 연재를 시작하면서

2012/11/26 09:46 김삼웅

 

 

100년이나 500년 쯤 뒤 사가들이 20세기의 한국(조선)의 대표적 인물로 누구를 꼽을까.
이승만이나 박정희, 김일성이나 김정일 등 독재자는 아닐 것이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 통일운동의 역군 중에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분야를 좁혀서(넓혀서)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가라면 누굴 꼽을까.
한민족은 시대마다 빼어난 사상가를 배출하였다. 신라의 원효와 최치원, 고려의 대각국사와 정몽주, 조선조의 퇴계ㆍ율곡ㆍ남명ㆍ서산대사ㆍ다산 등이 꼽힌다.

20세기 한국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격동과 격변의 시대였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고 처참한 식민시대, 독립운동, 해방, 외국 군정, 분단, 2개의 남북 정권, 동족상쟁, 독재, 냉전, 4월혁명, 군사쿠데타, 산업화, 민주화, 국제화 등 다른 나라 같으면 1000년 동안에 겪을까 말까 하는 일을 한민족은 100년 동안에 치뤘다. 여전히 분단상태는 지속되고, 내부 갈등은 치열하며, 낡은 자본주의체제(남한)와 쇠퇴한 공산주의체제(북한)가 대립하고 있다. 그 사이 수많은 인물이 명멸하였다.

우리가 세기적인 고통과 질곡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세계적인 큰 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한 것은 아이러니다. 앞에서 열거한 대로 왕조시대에도 오뚝한 철학ㆍ사상가를 배출한 것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사실은 큰 사상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변화된 상황 때문에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세계의 문이 열리다보니 외국의 인물이 쏟아져 알려져서 비교되고, 여기에 식자들의 남의 것만 돋보이고 제것을 하찮게 여기는 사대근성이 한 몫을 한 결과였다. 먹물들은 외래사상과 외국인물만 연구하여 학위를 따고 학생들을 가르치니, 학생들은 또 그대로 답습한다.

인물다운 인물이 크기 어려운 풍토의 탓도 작용한다. 병아리 부화시설과 닭도리탕용 양계장에서는 봉황이 나오기 어렵고, 진학 시험과 취직 위주의 공ㆍ사 교육장으로 변한 개천에서는 용이 자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속에서도 돋보이는 듯 하면 톱질을 하거나, 정치권에서 채다가 ‘1회용 반창고’ 로 써먹는다.

식민지, 분단, 전쟁, 냉전,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속화(俗化) 만이 살아남는다는 시대상황도 큰 인물이 성장하지 못하는 배경이 되었다. 실제로 반봉건, 반외세, 반분단, 반독재에 앞장섰던 선각자들의 처절한 운명을 지켜보면서, 이를 비켜가려는 안일주의 처세술이 생존의 법칙이 되다시피하였다.

독재세력과 보수언론의 비판자ㆍ반대자에 대한 도끼질과 가지치기는 생존권을 박탈하기 일쑤이고, 외세에 대한 정당한 저항은 안보의 이름으로 박멸의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재가 휴전선은 물론 국경선을 넘기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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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적인 인물이 있었다. 함석헌이다.
1901년 출생이니 20세기가 막 열리는 시대에 태어났다. 한반도에 먹구름이 몰려드는 불운한 시대였다. 젊은 나이에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신문명에 접한다. 많은 동시대인들이 뒷날 친일파가 되었지만 그는 반일사상에 투철하여 <성서조선>에 글을 썼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에 찍혀 서대문형무소에 갇힌다.

해방과 함께 소련군에게 붙잡혀서 감옥살이를 하고, 간신히 월남한 남한에서 장준하와 함께 <사상계>를 만들다가 이승만에게 밉보여 투옥된다. 이후 가장 먼저 박정희의 5.16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써서 필화를 입었다. 박정희에게 함석헌은 제1의 강적이었다. 김종필은 함석헌의 5.16비판을 ‘정신분열증에 걸린 노인’ 이라 막말을 하고, 군사정권은 그의 말과 글을 막으려고 온갖 핍박과 탄압을 가하였다.

함석헌의 저항은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만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 이래 독재 권력의 신도로 전락한 주류 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종교계, 독재의 어용기관이 된 우골탑의 교육자, 민중의 소리를 배반한 채 독재와 야합한 족벌신문과 방송, 사이비 지식인들을 가차없이, 거침없이 비판하는, 한국의 소크라테스 역할을 하였다.

그는 중년 시기부터 1일 1식으로 먹는 것을 줄이고, 흰수염ㆍ흰옷ㆍ흰고무신으로 조선 정신을 이으면서, 먹물들이 민중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은 민중을 속이는 것이라고 질타하면서, 구어체 우리 말과 우리 글로 뜻을 폈다.

그는 민(중)을 뜻하는 ‘씨알’이라는 표기를 통해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80평생을 싸우면서 살았다. 한마디로 철저한 저항인이었다. 일제, 공산당,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비롯한 권력집단과, 씨알의 피를 빠는 지배세력에 저항하였다. 비폭력 저항이었다. 그래서 ‘싸우는 평화주의자’라는 닉네임을 얻고, 한국의 모세, 한국의 간디라는 별칭이 따랐다.

함석헌과 관련해 지금까지 많은 책이 나오고, 적지 않은 글이 쓰여졌다. 그가 토해낸 글과 말이 20여 권의 전집으로 묶이고, 두 권의 평전이 나왔으며, 선생이 펴냈던 <씨알의 소리>가 지금도 격월간으로 간행되고 있다. 또 <함석헌연구>지가 반년 간으로 2호째 나왔다. 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연구모임이 있으며 기념학회도 결성되었다.

그럼에도 다시 <함석헌 평전>을 쓰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제목에 ‘저항인’ 이라는 부사를 부친 것은, 그의 생애가 온통 저항인이었는데, 마치 종교인, 재야사학자, 문필가, 시인 등으로 ‘왜소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맹호출림(猛虎出林)’ 의 호랑이를 고양이처럼 그림으로써 함 선생의 본령과 실존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서, 새로운 평전을 통해 본 모습에 접근하고자 한다. 강조하거니와 그는 88년 생애를 통해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특히 박정희와 전두환의 포악한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거의 모든 사건에는 빠지지 않고, 항상 저항의 대열에 앞장섰다. 우리 민주화투쟁의 전선에서 함석헌의 존재는 변수 아닌 상수였다. 그는 70이 넘고 80이 되어서도 반독재 투쟁에 어김없이 참여하였다.

이런 그에게 독재집단은 반체제 원흉, 기독교계와 학계는 이단자, 언론계는 독설가로 매도하였다. 대신 씨알들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들의 대변자, ‘할 말’을 하는 지도자로 존경하였다. 권력욕이 없는 지도자, 정파를 뛰어넘는 지도자로 사랑하고 좋아하였다. 탈물욕, 탈권위의 그의 본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찾기 어려운 지도자상이었다. 그러면서도 천착된 철학과 사상은 감히 누가 넘보기 어려웠다.

함석헌은 20세기 한민족의 소중한 자산이다. 같은 시대는 물론 전 후사를 통해 그이 만큼 폭넓은 지식과 학문을 두루 갖춘 사람도 찾기 쉽지않다. 종교ㆍ역사ㆍ철학ㆍ사상ㆍ교육ㆍ언론ㆍ민중ㆍ평화ㆍ비폭력ㆍ인권ㆍ민족ㆍ여성ㆍ시ㆍ아나키즘ㆍ퀘이커ㆍ세계사에 전문가 이상의 식견을 갖고 이것을 통섭하는 거대한 지식체계, 학문세계를 이루었다.

그의 생애는 곧 한국현대사요, 그의 철학은 한국철학사요, 그의 저항운동은 반독재 민권운동사다. 그런가 하면 주저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단재 신채호와 백암 박은식의 민족사관에 비견되는 독특한 씨알사관이고, 그가 필생의 사업으로 발행한 <씨알의 소리>는 한국민중언론의 통사다. 그의 구어체 문장과 문체는 외래어에 오염된 우리 말(글)의 복원이며, 거침없는 사유와 행동은 아나키스트의 전범이고, 문ㆍ사ㆍ철ㆍ시ㆍ서ㆍ화의 겸비는 조선 풍류사상의 정맥이다. 함석헌은 성인이 아니다. 그도 인간의 한계와 흠결이 있었다. 가정의 생계를 도외시하였고, 거대 담론에는 추상적인 내용이 많았다. 독선적인 언행도 적지 않았고, 중년에는 추종하는 젊은 여성과의 스캔들로 물의를 빚었다.

최근 번역되어 화제를 모은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한 명의 사상가가 20세기에 지울 수 없는 주요한 흔적을 남겼다고 한다면, 그는 마르크스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마르크스는 21세기를 위해서 다시 한번 너무도 필요한 사상가이다.” 란 대목이 나온다. 마르크스를 함석헌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고, 21세기에도 너무도 필요한 사상가이고 행동인이다.

그는 아무런 대가도, 어떠한 감투도 탐하지 않는, 보상이 없는 생애를 살았다. 그러면서 맨 정신으로 씨알의 신음소리를 듣고, 세상의 아픔을 대신 앓았다. 질곡의 20세기 한국의 씨알들에게 그나마 함석헌이 있어서 위로를 받고, 생명을 찾아 꿈틀거릴 수 있었다.

나는 10대 후반 <사상계>에서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이제까지 나의 생각과 처신은 함 선생의 영향이 절대적이라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내 역사관의 지침이 되고, 그의 많은 글은 내가 살아오는데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다. 7~80년대 여러 번 만나 인터뷰를 하고, <씨알의 소리>에도 몇 차례 글을 썼다. <씨알의 소리> 1975년 11월호에 장준하의 의문사 관련, <약사봉 계곡의 진혼곡>을 썼다가, 정보기관에 불려가 혼쭐이 나기도했다. 또 함 선생 사후에 일부 매체에 그의 언론사상과 역사관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런 경험과 인식, 연구를 토대로 하여 <저항인 함석헌 평전>을 쓰고자 한다.
무딘 붓이라 고결한 혼과 폭넓은 사상, 거인의 발자취를 모두 담기가 쉽지 않겠지만, 열과 성을 다할 각오이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생애를 추적하기보다 시대마다 불굴의 신념으로 전개된 저항(정신)을 중심으로 그려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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