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of Leo Tolstoy, 레오 톨스토이의 초상. 1884.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레오 톨스토이는 세상의 질서를 운용하는 진리를 찾기 위해 문학작품을 쓴 작가이자 사상가이다. 그의 작품의 예술성은 바로 치열한 진리 탐구로 생겨난 것이다. 그럼에도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들이 진리를 직접 표현하지 못한다며 항상 불만스러워했다. 그는 예술로 직접 진리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불멸의 진리를 밝혔음에도 그는 독자들이 진리를 금방 알아챌 수 있도록 후기에는 아예 예술을 부정하고 쉬운 민담 투의 단편이나 단순한 구도의 희곡, 심지어는 짧은 경구들을 쓰기까지 했다.
톨스토이에게 예술로 하여금 진리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점은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였던 셈이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은 이동파 화가 니콜라이 게는 『안나 카레니나』의 한 부분을 묘사한 그림 <진리가 무엇인가?>에서 관람자가 직접 진리를 체험할 수 있게 표현했다. 톨스토이가 평생 고민한 문제를 화가 니콜라이 게가 그의 영향을 받아 이룬 것이다.
니콜라이 게는 톨스토이와 친하게 됐고 그의 철학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후기의 니콜라이 게는 종교화와 인물화로 돌아왔다. 그의 신약에 근거한 종교화는 진보파의 환영을 받았으나, 동시에 보수파의 비난을 받았다. 1894년 체르니코프주 이와노프촌에서 6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니콜라이 게는 자신의 그림을 스위스의 한 후견인에게 넘겼는데 그 후 행방이 묘연했다. 1974년 스위스의 어느 수집가가 중고매매상에서 그림이 가치 있다 생각해 대부분 구입했다. 그림들이 분산 소장되는 걸 막기 위해 결국 트레치코프 갤러리가 나서서 러시아 국가 은행의 후원으로 전량 구매하여 영구 소장하게 되었다.
Portrait of Sophia Tolstaya, Leo Tolstoy's Wife, with Their Daughter Alexandra Tolstaya. 1886. Oil on canvas. The Leo Tolstoy Memorial Estate "Yasnaya Polyana", Tula, Russian Federation 레오 톨스토이 아내 소피아 톨스타야와 딸 알렉산드라 톨스타야 초상화.
Portrait of Tatyana Tolstaya, Leo Tolstoy's Daughter, 1887. charcoal on paper , The Leo Tolstoy Memorial Estate Yasnaya Polyana, Tula Region, Russia 레오 톨스토이의 딸 타티야나 톨스타야의 초상화.
Portrait of Maria Tolstaya, Leo Tolstoy's Daughter. 1891. Oil on canvas. The Leo Tolstoy Memorial Estate "Yasnaya Polyana", Tula, Russian Federation 레오 톨스토이의 딸 마리아 톨스타야의 초상화
Florence. The Cascina Park, 1868. Oil on paper mounted on cardboard.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Loading Marble in Carrara, 1868.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Mountain Gorge in Carrara, 186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Marble Quarry at Carrara, 1868. oil on canvas. 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Christ in front of Annas (study), 186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안나스는 BC 7~33년까지 유대 제사장으로 있었던 자인데
그는 그의 사위 가야바와 같이 대제사장이 된 듯하다. 예수가 잡히시던 밤에 먼저 안나스에게 가셨다 (요 18:13,24). 사도들이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 앞에서 삼문 당할 때 안나스도 거기에 참여하였다
Oak Trees in Carrara Mountains, 186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Carrara, 1868. Oil on canvas. The Taganrog Picture Gallery, Taganrog, Russian Federation
The Transportation of Marble at Carrara. 카라라에서의 대리석 수송. 1868.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an Unknown Woman in a blue blouse, 186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Joseph Daumangé, 1868.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Boys at the Beach. 1868.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o Venere. 1868.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Sorrento, 1869.
Portrait of the Historian Nikolay Kostomarov, 1870.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eter the Great Interrogating Prince Aleksei Petrovich in Peterhof (study).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Jesus Christ. 1871. Etching.
Portrait of A. N. Pypin, 187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Ivan Zabela, 1871. oil on canvas.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Portrait of the Poet Nikolay Nekrasov, 1872. oil on canvas. The Stay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the Author Mikhail Saltykov-Shchedrin. 1872.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Empress Catherine II at the Funeral of Empress Elizabeth (study). 1873.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Catherine II (1729-96) at the Coffin of Empress Elizabeth (1709-61), 187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V.A. Kochubei. 187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Temptation of Christ (study). 1874.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Tsar Boris and the Queen Martha, 1874.
Agafiya Ignatievna Sliusareva. 1875. oil on canvas. 109 X 83.5 cm. Tul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Tula)
Poet Alexander Pushkin in Mikhailovskoye. 1875. oil on canvas.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Portrait of Alexei Antipowitsch Potechin, 1876. oil on canvas. 107 x 79.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n Old Man. 1877. oil on canvas. Lviv National Art Gallery (Ukraine - Lviv)
Portrait of Piotr Ge, the Artist's Son, 1877. oil on canvas.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Portrait of a Boy. 1878. oil on canvas.
Portrait of E. I. Zabello. 1879. oil on canvas.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Portrait of M.A. Skoropadskaya with Her Sons. 1879.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An Old Peasant, 1880. oil on canvas.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Portrait of N.P. Magdenko, 1880. oil on canvas. Art Museum of Dnepropetrovsk (Ukraine - Dnepropetrovsk)
Portrait of Adam Olsufyev, 1881. oil on canvas.
Portrait of Anna Olsufyeva, 1881.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Duchess Olga Volkonsky. 1882. oil on canvas. State Hermitage Museum -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Portrait of Piotr Ge, the Artist's Son, 1884. oil on canvas.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Portrait of Maria Gabayeva, 1886. oil on canvas. Odessa Fine Art Museum (Ukraine - Odessa)
Portrait of Nikolay Ge, the Artist's Grandson, 니콜라이 게 손자의 초상화. 1889. oil on canvas The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Christ and Nicodim. 1889.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M. P. Svet. 1891. oil on canvas.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Portrait of Natalia Petrunkevich. 나탈리아 페트룬케비츠의 초상. 1892~1893.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Pavel Kostychev. 1892.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Yelena Likhachova, 1892. oil on canvas.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지적이면서도 조용한 노부인의 표정과 궤뚫어보느 듯한 예리한 시선이 매혹적이다. 초상화 속의 나이든 여인이 살아 숨쉬며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옐레나 리카체비(Yelena Likhachova)는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였다고 한다.
Old Park, 1893.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Crucifixion. 1894. charcoal.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postle St. Andrew.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Girl in a Red Kerchief. Date unknown. oil on canvas.
Head of a Jew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Judas. Date unknown. oil on canvas. Khanty-Mansiisk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hanty-Mansiisk
Judas.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Oak Trees and Sycamores. Date unknown.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Outskirts of Naples. Date unknown. oil on canvas. Art Museum of Dnepropetrovsk (Ukraine - Dnepropetrovsk)
The Road Into The Forest. 숲으로 난 길. Date unknown. oil on canvas. Kostroma State Museum (Russian Federation - Kostro)
Portrait of a Boy. Date unknown. oil on canvas.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Portrait of a Man. Date unknown. oil on canvas. Kursk Deineka Picture Gallery (Russian Federation - Kursk)
Portrait of A. N. Zabello. Date unknown. oil on canvas. Art Museum of Dnepropetrovsk (Ukraine - Dnepropetrovsk)
He Return of Tobias (study).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Sunrise.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wilight in Ukraine.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uslan and Lyudmila,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Olga Kostycheva, 올가 코스티체바의 초상. Date unknown. oil on canvas.
Self Portrait. 자화상. 1892. oil on canvas.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니콜라이 게 (Nikolai Nikolaevich Ge 1831- 1894)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로서 역사적, 종교적 그림으로 유명하다. 니콜라이 게는 조부가 18세기에 러시아로 이민 온 프랑스 혈통의 귀족 가문 태생이다. 조실부모하고 농노 유모의 손에 컸다. 키에프와 상 페테르부르그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 전공하다 황립예술학교로 옮긴다.
Nikolai Ge, portrait by Nikolai Yaroshenko. 니콜라이 게의 초상화. 니콜라이 야로센코 작품.
니콜라이 야로센코 (Nikolai Alexandrovich Yaroshenko)의 작품이다. 니콜라이 게는 우크라이나 사실주의 화가이면서 상징주의자로, 역사화와 기독교적 주제를 색다른 해석으로 진지하게 탐구했다.
니콜라이 게의 작품은 점점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어려서부터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하던 게(Ge)는 제정(帝政) 러시아 시절에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대학 (Kyiv University)과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던 과학도였다. 20세이던 1850년이 되어서 그동안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고, 뒤늦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미술학교에 입학해서 화가 수업을 쌓았다.
Portrait of painter Nikolai Nikolayevich Ghe. 1880. by Ilia Repine. oil on canvas. 82.5 x 66.2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화가 니콜라이 게 (Nikolai Nikolayevich Ghe)의 초상. 일리아 레핀(Ilia Repine)의 작품이다.
The Witch of Endor Calling Up the Spirit of the Prophet Samuel. 185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예언자 사무엘의 혼령을 부르는 엔도르의 마녀. 1857년 이 작품으로 금메달을 받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니콜라이 게 자신의 말로 칼 브률로프 (Karl Pavlovich Briullov 1799~1852)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Last Supper. 최후의 만찬. 1863.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누군가 서 있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찾아온 듯하다가 어둠 속에 놀란 베드로의 눈과 호기심 가득한 제자들 사이에 예수가 마지막 만찬의 침상에 비스듬이 누워 있다. 다가 올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다빈치의 것과는 다른 분위기가 당시의 분위기를 실감하게 한다. “유다의 검은 그림자가 일으킨 화면의 균열은 마치 『죄와 벌』 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균열이라는 뜻의 단어 ‘라스콜’에서 유래)를 떠올리게 한다”
최후의 만찬 Last Supper, 압권이다. 이제 최후를 맞아들여야 하는 예수의 고뇌에 찬 표정, 즐거운 작별의 만찬 모습은 아니다. 그 순간 모든 제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불길한 어둠 속의 검은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다. 정말 놀라운 그림이다.
전통적인 최후의 만찬 그림은, 서구식 식탁 의자에 두루 앉아 있는 모습이지만, 니콜라이 게의 최후의 만찬은 예수께서 비스듬히 누워 마지막 만찬을 맞고 있다. 십자가 처형에서 티(T)자형 십자가가 그렇듯이 유대인의 만찬 모습에 가까운 현장이다. 그가 절절한 사실주의 화가이듯이, 얼마나 고증에 충실했던 화가였는지를 보여준다.
알렉산더 이바노비치 헤르젠 (Alexander Ivanovich Herzen)의 초상화 사진
니콜라이 게는 장학금을 받아 독일, 스위스, 프랑스를 여행하고 이태리에 정착하여 알렉산더 안드레이비취 이바노프를 만나고 그의 영향을 받는다. 1861년 그린 "마지막 만찬"은 사진 속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그렸는데, 언론으로부터 "물질주의와 니힐리즘의 성공"이란 격찬을 받았다 한다.
알렉산더 이바노비치 헤르젠 (Alexander Ivanovich Herzen)은 러시아 혁명가, 작가 및 철학자다. 부유한 러시아 토지 소유자 I. Yakovlev와 젊은 독일 부르주아지인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Louise Hague의 사생아. 그는 Yakovlev의 집에서 자랐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프랑스 계몽주의자 작품에 익숙해졌고, Ryleev의 Pushkin의 금지된 구절을 읽었다. 헤르젠은 재능 있는 동료, 미래의 시인 N.P. Ogarev와의 우정에 깊은 영향을 받아 평생동안 지속되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Decembrist 봉기 소식은 소년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드미트리 레비츠키 (Dmitry Grigoryevich Levitsky 1735–1822)가 유명한 문인이었던 자신의 사촌 이바노비치 헤르젠 (Alexander Ivanovich Herzen)의 사진을 찍었고, 니콜라이 게는 그 초상화를 바탕으로 마지막 만찬의 예수상을 그렸다.
이것은 러시아에서 사진이 그림의 주제로 된 첫 번째 경우로, 후에 사진이 인상주의같은 미술 사조에 끼친 깊은 영향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마지막 만찬"은 알렉산더 2세가 샀고, 그 그림 덕에 니콜라이 게는 황립예술학교 교수가 된다.
Peter the Great Interrogating the Tsarevich Alexei Petrovich at Peterhof, 187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ussia.
페테스부르크에서 알렉세이 황태자를 심문하는 표토르 대제. 이 작품은 역사화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페트르코프는 황금빛 조각과 분수로 장식된 표트르 대제의 여름궁전이다. 표트르 대제의 위업을 아름답게 빛내주는 이곳은 실내 벽면에 대제가 수입한 서유럽의 명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당당한 풍채에 다리를 꽈아 자신감을 드러낸 대제에 비해 큰 키에 마른 체형의 황태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나약한 인상을 풍긴다.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배반한 아들을 노려보는 대제의 얼굴에서 비극이 암시된다. 좌우로 나누어진 구도에 의한 대립적 인물 배치 역시 마찬가지다. 비극에 대한 반복적인 복선을 설치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황제에 오르기 전, 형인 이반과 동생인 소피아를 물리치고 어머니 세력을 업고 황위에 오른 표트르 대제는 총병들의 반란을 겪은 후 형, 동생과 그 세력을 척결하고 자리를 공고히 굳혔다. 그리고 그 힘으로 서구화 정책을 밀고 나가기 시작한다. 그 후 유럽과의 통로 확보를 위해 스웨덴과 2차례 전쟁을 거쳐 발트해 연안을 확보하고 상트 폐테르부르크를 건설하였다.
황태자 알렉세이는 표트르 대제와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렉세이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알렉세이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자라났으며 옛 러시아 방식을 숭상했다. 대제의 개혁을 탐탁치않게 여겼던 보수주의자들은 알렉세이를 지지했다.
이를 알고 있는 포트르대제는 아들에게 생활방식을 바꾸던지 제위 계승을 포기 하던지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아들은 결국 제위 계승을 포기하고 국외로 도피한다. 이것은 단순한 부자간의 갈등이 아니고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심각한 사상적 대립이었다.
알렉세이는 1718년 러시아로 돌아왔으나 국가 반역죄로 체포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문하고 자백을 받아냈으며, 사형선고라는 잔혹한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알렉세이는 사체로 발견된다. 그림 속에서 벌어진 논쟁의 결론은 일단 역사가 증명한다. 제위 계승의 포기와 해외 도피로 이어진 알렉세이의 행보가 반증하듯이 그에게는 표트르 대제의 정책을 뛰어 넘을 대안이라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 이 그림이 그려진 1870년대 지식인들을 행동하게 했던 것은 서구주의자들의 사상이었다. 벨렌스키, 헤르첸, 바쿠닌의 사상은 헤겔 등의 독일 관념론에 기초한 것이며 훗날 사회주의 혁명의 기반이 되는 마르크시즘 역시 서구 사상이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진보와 발전, 이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마음 속 깊이 새겨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 법이다. 헤르첸의 영향을 받은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들은 혁명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서 민중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는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운동가들은 민중들의 몰이해와 불신 속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진리는 현실에서는 결코 단선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승리는 표트르 대제의 것이었지만, 그는 아들을 살해한 혐의를 받은 인륜에 어긋난 아버지였다. 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부정과 악에 대해서 예술이 어떤 답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가 확신을 할 수 없었던 니콜라이 게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대문호 톨스토이 때문이었다. 니콜라이 게는 톨스토이 철학의 신봉자가 된다. 화단에 복귀한 그가 남긴 명작 가운데 하나가 예수와 빌라도의 대화를 그린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작품이다.
1870년 역사 주제의 이 그림 '페테스부르크에서 알렉세이 황태자를 심문하는 표토르 대제'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같은 쟝르의 다른 그림들은 냉대를 받자 니콜라이 게는 '화가는 농사를 지어먹고 살아야지 그림을 판다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니콜라이 게는 우크레이나에 농장을 사서 이주했다. 니콜라이 게는 톨스토이와 친하게 됐고 그의 철학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페트르코프는 황금빛 조각과 분수로 장식된 표트르대제의 여름궁전이다 . 표트르대제의 위업을 아름답게 빛내주는 이곳은 실내 벽면에 대제가 수입한 서유럽의 명화들이 줄지어 걸려 있다.
아버지 표트르 대제는 자신감 있는 자세로 앉아 아들을 매섭게 노려본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문서는 방금 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테이블에 한손을 엊고 비스듬히 서 있는 아들 알렉세이의 허약한 실루엣은 아버지의 당당한 풍채와 비교가 된다.
표트로대제의 발밑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체스판 모양의 바닥은 심리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다 종국에는 반란까지 획책한 아들을 심문하는 대제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Quod Est Veritas? Christ and Pilate, 진리란 무엇인가? 예수와 빌라도. 1890, Oil on canvas. 233 х 171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진리란 무엇인가?>는 대위법적인 화면 구성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예수. 전자는 등을 보이고 있고 후자는 앞을 바라보고 있다. 한 사람은 빛을 받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림자에 싸여 있다. 빌라도는 자유로운 권력자의 제스처를 하고 있는 반면 예수는 손이 뒤로 결박된 상태다. 빌라도의 몸집은 다소 뚱뚱한 편이나 예수는 바짝 말랐다. 두 사람의 이런 대조는 화면을 매우 드라마틱하게 만들 뿐 아니라 관객이 예수가 처한 상황 속으로 급격히 빨려들게 한다.
그림 속 빌라도는 어둠 속의 예수를 바라보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도대체 네가 말하는 진리란 무엇이냐?” 그림 속 빌라도는 예수를 가소롭다는 듯 쳐다본다. 그는 예수를 그저 보잘 것 없는 정신병자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이 그림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가 예수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가 그럴 만한 가치조차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묵묵히 빌라도를 바라보는 예수의 눈빛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말도 할 의사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니콜라이 게의 예수는 결코 패자가 아니다. 저 높고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를 비롯하여 세상의 영광과 권위로 충만한 모든 제도와 기득권자들이 승리자가 아닌 것처럼 가난하고 누추하다고 세상에서 멸시를 받고 있다고 예수가 패자인 것은 아니다. 그의 침묵은 굴종이 아니며, 그의 슬픔은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토록 지독한 고통을 진리와 양심을 위해 스스로 감내했기에 니콜라이 게의 예수는 진정한 승리자인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What is Truth? 빌라도의 관저에 잡혀온 예수에 대한 심문 중에 로마 총독 빌라도가 던진 질문이다. 너는 유대인인데, 네가 그 유대인들의 왕이라면서? 빌라도는 두 번이나 따지고 물었다. 그런데 네 유대인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다. 네가 말하는 진리가 도대체 무엇이냐?
그러나 빌라도는 그 앞에 결박 당해 있는 예수의 다음 답변을 기다리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렸다면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 인류가 가장 듣고 싶었던, 들었으면 좋았을, 그 대답을 들었을 텐데.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군중들에게 넘겨주었다.
일반적으로 그림에서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표현할 때 키아로스쿠로 (명암 대조법)를 많이 쓰는데 선에는 밝은 빛을 주고, 악의 영역에는 어둠을 주어 극적 효과를 내며 주제를 극대화 시킨다.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말이다. 하지만 니콜라이 게는 그 반대로 표현하여 어둡고 칙칙한 그늘 속에 버려진 듯한 예수를 표현함으로써 쉽게 얻을 수 있는 진리와 선의 성격을 설명한다. 진실로 가치있는 진리는 쉽게 얻을 수 없다. 진정 찾고 고민해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으로 그림을 통해 그 진실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림이 시가 되고, 소설이 되고 , 철학이 되고, 그리고 가르침이 된다. 그림을 통해서 힐링을 얻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진리란 무엇인가?>는 한 편의 그림이라기보다는 철학이다. 선한 가르침을 통해 진리를 얻는다. 사람에 대한 애정과 인간 본연의 선한 양심을 바탕으로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판단해야 할지 길을 잡아준다.
예수와 빌라도가 마주 보고 서 있다. 한 사람에겐 밝고 화사한 빛이, 다른 한 사람에겐 그늘과 어둠만이 존재한다. 살찐 빌라도가 앙상히 야윈 예수에게 한쪽 손을 내밀고 거만히 어깨를 으쓱하며 질문을 한다. "진리가 무엇이냐?"
이 그림은 <요한복음 18장>에 나오는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를 바탕으로 한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네가 왕이냐?"라고 질문을 한다. 이에 예수는 왕이다고 대답하며 "난 진리를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세상에 왔으니 진리를 증언하려 한다. 그러므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고 따를 것이다"라고 답한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에게 되묻는다 "네가 말하는 진리란 무엇이냐" 예수는 이에 답하지 않고 무섭고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빌라도에게 응한다.
과연 진리는 무엇인가 그림 앞에선 우리에게 작가는 질문에 진지해지라고 한다. 또한 예수에게 거들먹거리는 빌라도의 거만함을 보여주며 부끄러움의 민낯을 가늠케 한다. 그리고 진정 선한 것이 무엇이며 진리는 무엇인지를 고민하라 한다. 어둠 속에서 예수가 세상사 안일하고 편한 것을 찾아 쉽게 야합하는 우리를 꾸짖듯이 쳐다본다.
작가는 어둡고 칙칙한 그늘 속에 버려진듯한 예수를 표현함으로써 쉽게 얻을 수 없는 진리와 선의 성격을 설명한다. 진정으로 찾고 고민해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진리와 선은 자동인출기의 물건처럼 돈을 넣고 누르면 나오는 인스턴트 식품이 아니다.
끝없는 노력과 연구, 자기 성찰을 통해야만 진리에 한 걸음씩 다가갈 수 있다. 수많은 빌라도들이 잘못된 선과 도덕의 잣대를 휘둘러 올바른 정신을 좀먹게 하는 현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진리와 선은 고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니콜라이 게는 말해준다. 조금만 주의력을 흩트려도 거짓이 참이 되는 세상이니 어둠 속에 있는 선과 진리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는데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는 거다
니콜라이 게는 톨스토이의 정신에 큰 감화를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다. 톨스토이는 내 안에 존재하는 이성으로 선을 찾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 선한 목적으로 삶을 정진하는 것이 인생이라 말한다. 일신의 안위 만을 추구해선 안 되며, 만인의 행복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 말하고, 교회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은 신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예수 또한 인간이므로 그를 신격화해 기도하는 것을 엄격히 반대했다. 사치와 무위도식의 생활에 빠져 있는 타락한 특권 계급을 부정하고 그들을 인간 사회에 불행을 가져다주는 악의 근원으로 규정지었다. 또한 폭력을 기반으로 세워진 국가를 부정하며 그들을 지지하는 교회 세력 , 학문, 예술 모두를 부정한다.
톨스토이를 지지한 니콜라이 게는 <진리란 무엇인가>에서 그리스도는 어둠에 갇혀 신음하는 러시아 민중, 즉 선하고 도덕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자를 대변하고, 극단적 이기심으로 자신의 안위만에 급급한 기득권층을 빌라도로 표현했다 어둠 속에서 두 손이 포박된 예수처럼 진리와 양심을 외치는 자는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차갑고 어두운 현실 속에 내팽개쳐질 때가 많다. 바로 진리와 선은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와 선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해야 올바른 진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 빛이 참다운 진리임을 빌라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빌어 분명하게 전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 삶이 고독하고 힘들더라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톨스토이의 가르침이며 니콜라이 게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사실주의화가들 가운데는 종교적 주제를 다룬 여러 명의 화가들이 있는데, 그들은 사회, 정치적인 내용을 기독교적 주제에 대비시켜 그 당시 부패하였던 정부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런 분야에서 활동한 화가 가운데 탁월한 사람이 바로 '니콜라이 게'이다.
그는 특히 네덜란드의 바로크 화가 램브란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니콜라이 게는 렘브란트로부터 빛의 효과나 그밖의 기법만을 배웠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렘브란트와 마찬가지로 복음서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생활의 심오한 드라마를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오른편 자색옷을 입은 그리스도는 견딜 수 없는 사회적 억압에서 민중들을 구원하는 하층 사회의 꿈을 대표하고, 자색옷은 희생, 헌신, 겸손, 고귀함을 표현하고 있으며, 밝은 빛을 받아 황금색 옷이 빛나는 빌라도의 모습은 권세, 귀족적 에고이즘, 교만함과 세속적 영화를 의미하고 있다.
물론 권세 있는 편이 오후에 어지러울 정도로 비추이는 태양빛을 받아 그 당당함이 더욱 빛나고 있지만 그림자 속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눈초리만큼 빛나고 있지는 않다. 지금 그리스도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는다. 빌라도는 이런 예수를 답답하게 생각하며 절반은 조롱 섞인 말투로 묻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네가 주장하는 진리란 겨우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냐?" 라고 묻고 있지만, 예수는 이 질문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 진리가 무슨 변명을 할 것인가? 진리는 변명할 수가 없다. 진리는 그 자체인데 어떻게 진리가 변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진리가 변명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침묵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고, 침묵은 곧 진리가 오히려 심판하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묘하게도 빌라도가 내밀은 손은 예수를 문책하면서 가리키는 손이 아니라, 예수를 지칭하면서 <당신이 진리입니다!> 하는 듯이 보인다. 사실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정죄하고 재판정에 예수를 세웠지만 예수를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들을 심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진리이고 그 말씀이 진리이셨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해는 짧다. 작가는 지금은 비록 빌라도가 오후의 눈부신 태양빛을 받고 있지만, 곧 빌라도는 어두움에 묻힐 것이고 그 밝은 빛은 예수님 쪽으로 비추어서 영적인 빛을 발할 것이다. 이미 그것은 그리스도가 빌라도를 바라보는 눈초리에서 그 빛을 읽을 수가 있다. 또한 그러한 염원은 작가의 마음 속에서 소원하는 민중을 대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예고하는 것이다. 항상 진리가 승리하는 것이므로. “ …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 (요한복음 18:37)
Conscience, Judas. 양심, 배반자 가롯 유다. 1891. oil on canvas. 149 x 21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31번 방.
'유다의 가책' 그날 밤 유다이다. 은화 30 냥을 돌려주기 위해서 어두운 길을 다시 걸어가고 있다. 저기 길 끝에 돈을 돌려 줄 유대 제사장 무리들이 보고 있다. 밤 그림자보다 더 어두운 밤.
겟세마네에서 기도의 모습과 가롯 유다의 가책, 상대적으로 정면 모습과 뒷면 모습이다. 이 대조적인 그림은 고뇌에 찬 모습과 한없이 격리되어 외로운 모습이라 할까? 특히 담요를 둘러쓰고 혼자 서서 가롯 유다가 바라보는 시선 방향 멀리 어둑한 어둠 속 횃불들 사이로 체포되어 붙들려가는 예수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 속에 어깨를 움츠리고 저멀리 한 무리의 사람을 바로 보고 서 있는 사람은 예수를 은화 30냥에 팔아 넘기고 그 죄책감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롯 유다다. 예수의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일신을 위해 갈등하는 유다의 양심의 빛깔은 온통 까맣게 칠해져 있다. 작가는 일상의 갈등 속에서 부정한 양심에 손을 들어주는 우리의 모순을 유다의 검은 욕심에 빗대어 보여주고 있다.
Golgotha, 골고다. 1893.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세 도둑과 함께 십자가 처형장 해골의 언덕으로 끌려가는 두려움과 고통이 가득하다. 홍포를 입은 예수가 골고다 처형의 언덕에서 로마 병정의 형 집행 지시에 두려워 벌벌 떠는 모습이다. 맨발의 예수 옆에 서 있는 함께 처형될 두 사람 강도의 시선 처리 모습도 이채롭다. 한 강도는 이미 체념했고, 다른 한 강도는 아직도 노려보는 시선이다. 그 사이에 예수의 모습은 아아 이 일을 어찌할꼬 하는, 바로 처절한 두려움 앞에 선 우리들의 모습이라 할까?
사형을 언도받은 예수가 다른 두 명의 사형수와 함께 처형장을 나아가는 모습에서 예수가 보여주는 파토스는 절절하다. 왼편에 보이는 형리의 손이 그를 가리키자 예수는 공포에 사로잡혀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 하고 있다. 진리와 정의를 외쳐 왔지만 예수 또한 한사람의 인간으로써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기에 스스로 죽음을 택해 저 자리에 선 저 남자가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임을 말하고 있다.
예수의 처형 죄목은 국가내란죄였다. 총독이 통치하는 나라 '유대의 왕'을 사칭한 죄목이었다. 십자가 위에 죄명 '유대의 왕" 사칭죄가 적혀 있었다. "예수 십가상 일곱 말씀" 고함치고 울부짖는 그의 목소리가 십자가 위의 일곱마디 비명이다. 이 그림보다 더 비참했을 것이다 T자형 십자가 형틀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고증에 충실한 화가인지 보여준다.
해골의 언덕 골고다에 십자가 틀에 매달린 세 명의 사형수, 끔찍하게 처형당하던 그리스도 최후의 모습에 숨도 쉴 수 없다. 십자가 형벌이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참혹한 처형이었으니,
그 고통은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르네상스 시대에서는 수많은 성화들이 골고다 언덕마저도 우아하게 묘사하였다. 성스럽고 부드럽고 신성했던 십자가 처형의 현장 모습이, 그 액체가 뜨거운 김처럼 솟구치며 펄펄 끓어 기체화했다고 할까? 이 참혹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초상은 '유물론적 변증법과 허무주의의 승리'라고 평가받는다.
Christ and Thief on the Cross (study). 십자가상에서 강도와 그리스도 (습작). 1893년. oil on canvas.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그리스도 옆에서 함께 처형당하던 훙악범 도둑이 고통 속에 괴로워하는 예수를 조롱하고 있다. 십자가 처형이 진행되는데 마태목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도 그를 욕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그를 모독하며"라고 되어 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며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했다. 유대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했고, 자나가는 자들도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며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조롱했다.
십자가 상에서 강도와 그리스도, 십자가 상의 강도의 조롱이 보인다. 예수 십자가 좌편과 우편에 구원과 지옥이 나란히 있었듯이, 한 강도는 너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하였지만, 다른 한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라고? 진짜라면 어디 한번 우리를 지금 구해 보렴' 하고 조롱하고 있다.
십자가 오른쪽 강도는 천국으로, 왼쪽 강도는 지옥으로 간다. 빛과 어둠, 삶과 죽음, 낮과 밤, 이 상반된 극단은 언제나 동전 양면처럼 함께 존재한다. 성스럽다는 것과 참혹하다는 것, 이 이율배반의 어긋남, 당착 (撞着)을 모순 (矛盾)이라고 부르는데, 유물론자들은 그 모순 (矛盾)이라는 이름의 컬트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본다.
Jesus' Preparation for the Crucifixion, 예수 십자가 처형을 채비하다. 1893년. oil on canvas. The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하나님의 아들로 성스럽게 그린 많은 성화들보다도 니콜라이 게의 성화는 인간의 아들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더욱 가슴에 와 닫는다. 니콜라이 게는 어느 누구보다 슬픔과 고통에 찬 사람의 아들 예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린 화가였던 것 같다.
He is Guilty! The Judgment of the Sanhedrin, 그는 유죄다, 산헤드린의 재판. 1892.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잡혀온 예수의 초라한 모습과 벽에 기대어 있는 예수를 능멸하듯 조롱하는 제사장들. '변방 갈릴리의 촌놈 너는 유죄다!'
Christ and his disciples entered the Garden of Gethsemane after the Last Supper, 1889. oil on canvas. 65.3 x 8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제자들과 게세마네 동산으로 향해가는 그리스도.
Christ and the Disciples Going out into the Garden of Gethsemane after the Last Supper, 1889. oil on canvas.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The Garden of Gethsemane. 게세마네 동산. 1869년에 사작하여 1880년 완성.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retyakov Gallery Room 31. 니콜라이 게 작품 전시실.
The Return from Christ's Entombement (study). 그리스도를 매장하고 돌아가는 일행들 (습작) 1859.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Harbingers of the Resurrection, 부활의 조짐. 1867.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부활의 조짐 (전조'). 동이 트는 새벽, 창을 든 로마 병정과 천사의 날갯짓. 니콜라이 게가 부활의 상징과 은유의 그림을 그렸다. 부활을 예감케 하는 그림이다. 부활의 예감, 무덤을 지키는 로마 병정들의 실루엣, 왼쪽 방향에서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막달라 마리아, 시선 방향으로 멀리 예사롭지 않은 새벽 먼동이 무엇인가의 특별한 조짐을 예감하게 한다.
예수 부활의 그 새벽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우리들의 고정관념에 맞선다 할까? 대단한 표현이다. 사실주의 화가인 니콜라이 게를 상징주의로 불리는 것을 대변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Christ in the synagogue, 유대 회당에서 그리스도. 1868.
Maria, sister of Lazarus, meets Jesus who is going to their house, 1864.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와 그들을 만나러 오시는 예수.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in Jerusalem,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1859.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앙토냉 아르토 (Antonin Artaud)는 천사를 가장 성스럽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손에 뱀을 들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가장 깊은 고요만이 바늘이 떨어지는 침묵을 깨는 소리가 가장 커다랗게 지축을 흔드는 소란이라고 표현했다. 니콜라이 게의 그림들 속에서는 극단적인 사실이 표현되면서도 그것이 다시 절대적인 상징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료들은 아직 미술사적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그림들은 지금 이해되고 있는 해석이나 가치 이상으로 앞으로 더욱 중요한 의미를 던져 줄 것이 확실해 보인다.
니콜라이 게는 다른 러시아의 이동파화가들 처럼 창작의 자유와 예술을 통한 민중 교화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를 원했다. 이동파 화가들은 그림을 들고 순회 전시하며 "민중아 꺠어나라"를 주창한 행동주의적 미술 경향이다. 그들은 단정하고 기품 있고 보수적인 기존 아카데미 미술교육에 반발하며 더 낮은 곧으로 그림이 달려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기존 회화의 틀을 벗어나 창작의 자유와 예술을 통한 민중 계몽에 역점을 두었으며. 이 혁명적인 표현 운동에는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핵심물들이 참여하였다. 따라서 미에 대한 탐구보다 사회적, 윤리적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화풍도 대중에게 더 잘 어필할 수 있는 사실주의을 지향했으며 삶의 진실이라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시켰다.
이들 작품은 시골과 도시의 일상생활 장면이 주요 테마가 되었고 일상과 축제 속의 농민과 도시민들이 주인공이 되었다. 그림을 들고 민중 곁으로 달려가는 '이동전시협회'를 결성함으로써 마침내 미술사에 이동파(Peredvizhniki)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동파의 목표는 예술을 관료행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예술을 통해 민중을 교화시키는 것에 있었다.
Portrait of Evdokiya Nikolaevna Kostycheva, 1845.
Leila and Khaji-Abrek, 1852. Oil on canvas.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Portrait of Nikolay O. Ge, Artist's Father, 1854. oil on canvas.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The Judgment of King Solomon. 1854. Oil on canvas.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Portrait of Yakov Merkulov, 1855.
Achilles with the Body of Patroclus. 1855. oil on canvas.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Achilles Lamenting the Death of Patroclus. 1855. Oil on canvas. The Art Museum of Belarus, Minsk, Belarus
Portrait of G. N. Ge. 185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ortrait of Piotr Zabela, 1856. oil on canvas.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Virginia's Death (study). 1857-1858 . oil on paper.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Death of Virginia, Study. 1857. oil on canvas
Young Italian Woman in a Folk Costume, Study, 1857. oil on canvas. The Art Museum of Belarus, Minsk, Belarus
Bridge in Viko, 1858.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Anna Ge, 1858. oil on paper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화가 니콜라이 게의 부인 안나 게 (Anna Ge)
Vineyard at Vico. 1858.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Mother at the Funeral of Her Child. 엄마가 아이의 장례식에서. 1857-185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Mountains in Vico. 185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Sea in Vico. 1858.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Sea in Vico near Naples. 1858. oil on pao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Vestal's Lover. 1857-1858. oil on paper. Art Museum of Dnepropetrovsk (Ukraine - Dnepropetrovsk)
Sketches of ornaments painted Vladimir Cathedral. 1885~1893.
Sketches of ornaments painted Vladimir Cathedral. 1885~1893.
The Virgin and Child Enthroned. 1885~1893. gouache, pencil.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ngel with a lamp. 1885~1896.
Bliss of paradise. 1885~1896. fresco.
Cathedral of Saints of the Universal Church. 1885~1896. fresco.
Christ Almighty. 1885~1896.
God of hosts. 1885~1896.
The Last Judgement Day. 1885 ~ 1896. fresco.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Mounted knights. 1896.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Vera Savvishna Mammoth. 1896. oil on canvas. Abramtsevo State Historical, Artistic and Literary Museum-Reserve, Moscow region, Abramtsevo, Russia
Prince Andrey Bogolyubsky. 1885~1896. gouache, pencil.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ussian Bishops. 1885~1896. fresco.
Seraphim. 1885~1896. gouache, pencil.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Seraphim. 1885~1896. gouache, pencil.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Chronicler Nestor. 1885~1896. gouache, pencil. watercolor on paper.
Gamaun, The prophetic bird. 1897. oil on canvas. Dagestan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Makhachkala)
Portrait of Tatyana Vasnetsova, the Artist`s Daughter. 1897. oil on canvas. 51 X 68.5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The project of the Russian pavilion at the Paris Exhibition. 1898.
Funeral Feast for Oleg. 1899. Watercolor on Paper.
Guslars. 1899. OIL on canvas. Perm State Arts Gallery (Russian Federation - Perm)
Prince Oleg Looking at the Skeleton of His Horse. 1899. watercolor on papoer. literary painting. State Literary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Wise Oleg, 1899. oil on canvas. 74.5 X 51cm. <출처 : Sotheby's> 2006년 5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344,000 파운드 (647,958 달러)에 낙찰된 작품
Prince Oleg Meeting the Wizard. 1899. watercolor on papoer. literary painting State Literary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Prince Oleg Bids Farewell to His Horse. 1899. watercolor on papoer. literary painting State Literary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Vladimir Vasnetsov, the Artist`s Son. 1899. oil on canvas.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17th Century Moscow. At Dawn. Voskresensky Gates. 1900 . oil on canvas. 136 X 122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Draft facade Tretyakov Gallery. 1900.
Draft facade Tretyakov Gallery. 1900.
Draft facade Tretyakov Gallery. 1904.
Deposition. 1888~1901. Omsk Museum of Fine Arts (Russian Federation - Omsk)
Drawing for banners. 1901.
Portrait of M. I. Ryazantseva. 1901.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T. V. Vasnetsova. 1901.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Christ the Savior. 190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Virgin and Child. 1901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Shroud of Christ. 1901.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Crucifixion. 1902. Karelia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Petrozavodsk)
Street in Yalta. 1903 .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Crucifixion. 1896~1904.
Descent into Hell. 1896~1904.
The Last Judgement. 1904. oil on canvas.
Savior in the crown of thorns. 1906. Vyatka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rov)
Boyan. 1910.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Portrait of Olga Poletayeva. 1912. oil on canvas.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Duel Peresvet with Chelubey. 1914. gouache. Samar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mara)
Knightly Galloping. 1914. oil on canvas.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A Bogatyr, 1920년. oil on canvas. 158.5 x 211.8 cm. <출처 : Christie's> 2011년 11월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1,105,250 파운드 (1,710,927 달러)에 낙찰된 작품
On Guard, 1914. oil on canvas. 64 x 43.7 cm. <출처 : Christie's> 2013년 11월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338,500 파운드에 낙찰된 작품
Archangel Michael. 1914~1915.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Baba Yaga. 1917.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Fight Dobrynya Nikitich with seven headed serpent Hydra. 1913~1918.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Frog Princess(Tsarevna). 1918. oil on canvas.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Georgy Victorious. 1919.
The princess at the window (Princess Nesmeyana). 1920. Chelyabinsk State Museum of Fine Arts (Russian Federation - Chelyabinsk
The Flying carpet. 1919~1926.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Flying carpet. 1919~1926.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Mikhail Nesterov. 1926.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Unsmiling Tsarevna. 1916~1926. oil on canvas. 190 X 262 cm.
After the Battle of Prince Igor with the Cumans. Date unknown. State Vladimir-Suzdal Historical Architecture and Art Museum-Reserve (Russian Federation - Vladimir)
Angel with a Lamp. Date unknown.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The Battle of Scythians and Slavs (study). Date unknown .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Moscow
Christ the Savior.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Crucifixion.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Akhtyrsky oak.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Bajarmaland. Date unknown.
The Descension to Hell. Date unknown.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The Flying Carpet,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Berendei Palace. Date unknown.
Bogomater. Date unknown.
Bogomater. Date unknown.
Bouquet. Abramtzevo. Date unknown.
Calling of Vikings. Date unknown.
Cathedral.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Children are ruining the nest. Date unknown.
Entertainment. Date unknown.
Fatherhood. Date unknown.
Game Preference (sketch).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God Son. Date unknown.
Hero. (Knight on Horseback). Date unknown.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Humpbacked Horse. Date unknown.
Ivan Tsarevich and the Swan. Date unknown. Vyatka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rov)
Joy in the Lord, the Righteous.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Joy in the Lord, the Righteous.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Joy in the Lord, the Righteous.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Kashchei the Immortal, Date unknown. oil on canvas.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Last Judgment. Date unknown.
Madonna. Date unknown.
Maria Magdalene. Date unknown.
Nestor the Chronicler. Date unknown.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Monk collector. Date unknown.
Monomakh`s hunting. Date unknown.
Nepomnjaschij. Date unknown.
On the earth. Date unknown.
Old Beggar. Date unknown. Etching.
Rough outline of the image of Ivan the Terrible. Date unknown.
Rough sketches for the painting on "A knights at the crossroad".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Sergei Alexandrovich`s Cross. Date unknown.
Temptation. Date unknown(1885~1896). fresco. 성 블라지미르 성당. 우크라이나 키에프
The Virgin and Child. Date unknown.
Veche in Pskov. Date unknown.
Virgin and Child. Date unknown.
Winter. Date unknown.
Portrait of a Woman. Date unknown. oil on canvas. Alupka Palace Museum (Russian Federation - Alupka)
Wrestler`s head. Portrait of wrestler N. D. Kuznetsov. Date unknown . Nizhny Tagil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y Tagil)
The Saints. Date unknown.
Sirin. Date unknown. Tempera on paper. State Fine Arts Museum of the Republic of Kazakhstan (Kazakhstan - Almaty)
The Sleeping Beauty. Date unknown. oil on vanvas.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St. Alipy. Date unknown.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The Unsmiling Tsarevna. Date unknown oil on canvas.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Girl Gathering Flowers in the Woods, 1876년. oil on canvas. 94 X 60 cm. <출처 : Sotheby's> 2013년 11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74,500 파운드 (120,452 달러)에 낙찰된 작품
[영상] Viktor Vasnetsov: A collection of 143 paintings (HD)
Self-portrait. 자화상. 1873. oil on canvas. 71 × 58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러시아 화가. 로비얄촌에서 출생,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배우고, 1878년부터 이동파에 참가했다. 러시아사와 민화를 테마로한 '3용사', '야료누시카', '회색 늑대를 걸터 타는 이반 왕자' 등을 그렸다.
바스네초프는 오늘날에는 키로프라고 불리는 밧캬에서 멀리 떨어진 로프얄에서 성직자의 여섯 아이 중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이콘 화가였던 할아버지의 피가 흘러서일까, 훗날 여섯 아이 중 세 명은 화가가 되었고 세 명은 선생님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던 그는 열 살이 되던 해 뱟캬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는데 그 곳에 와 있던 폴란드 출신 화가 안드리올리라의 조수로도 일을 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가지 길 앞에서 고민하던 바스네초프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왕립 아카데미에 진학하고 싶었던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작품 두 점을 경매에 올렸다고 하는데 이미 상당한 수준의 솜씨를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닐까 싶다. 열 아홉이 되던 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그 후 7년간 본격적인 수업을 받게 된다.
그 곳에서 훗날 이동파의 리더가 되는 크람스코이를 알게 되고 레핀과는 아주 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바스네초프는 은메달을 수상한다. 한편으로는 당대의 생활상을 묘사한 판화 작업도 진행하는데 졸업을 앞 둔 해 런던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그의 판화가 출품되었고 동메달을 수상한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그 다음 해, 파리에 있던 레핀이 바스네초프를 부른다. 파리로 건너 간 그는 당시 유행하던 인상파와 아카데미즘 기법을 두루 공부하고 그리고 살롱전에도 작품을 출품한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바스네초프는 러시아의 민담과 동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 모스크바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전래 동화와 전통 민요 빌리나를 삽화로 표현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이 완성되었을 때 주변의 평가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사실주의를 원칙으로 했던 이동파들의 입장에서 동화와 신화를 주제로 한 그의 작품은 이동파의 취지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유명한 감정인들마저도 그의 작품 구매를 거절했을 정도였다.
Self portrait. 자화상. 1868.
주위의 각박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바스네초프의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했다. 동화나 러시아 민담을 주제로 작품을 그린 화가가 바스네초프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러시아 민속미술에서 사용되던 방법과 기법을 새롭게 가져온 화가는 그가 처음이었다. 결국 바스네초프는 러시아 회화의 새로운 기법의 창시자가 되었다.
바스네초프는 사바 마몬토프가 후원을 하고 있던 모임에도 적극 참여하는데, 러시아 전통을 되살리는데 초점을 두고 암브라체보라는 곳에 근거를 둔 화가들 모임이었다. 한편으로는 키에프에 있는 성 블라디미르 성당의 프레스코화 작업을 맡게 된다. 이 작업은 거의 5년이나 걸리는 대 작업이었다. 그에게는 또 다른 거대한 도전이었고 멋지게 완성해 낸다.
1885년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오고 난 뒤 바스네초프의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된다. 바스네초프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눈 아가씨 (The snow maiden)’라는 오페라 작품의 무대 장식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이후 여러 작품의 무대 디자인을 하게 되는데 러시아 미술에서는 이 방면의 선구자가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건축에도 관심을 보여 4대 미술관 중 하나라고 불리는 트레차코프 미술관을 세우기도 했다.
1912년 니콜라스 2세로부터 귀족의 작위를 받은 바스네초프는 러시아 혁명 기간 중에는 트레차코프 미술관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그의 수입의 상당 부분을 미술관으로 돌렸고 미술관은 그 돈으로 작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10월 혁명 이후에는 교회의 종교화를 트레차코프 미술관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는데, 혁명의 어수선함으로 인해 그림이 손상될 것을 우려했던 것 아닐까 싶다.
1918년, 새로 창설된 소련의 붉은 군대 제복을 디자인했던 바스네초프의 창조적인 상상력은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그가 꿈꾸고 있었던 모든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바스네초프는 일흔 여덟이 던 해 7월, 미하일 네스테로프 (Mikhail Vasilevich Nesterov 1862 - 1942)가 바스네초프의 초상화를 그리던 중 네스테로프의 화실에서 숨을 거둔다. 판화와 유화, 무대 디자인과 건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던 멋진 인생이었다.
Portrait of the Artist Vikto Viktor Vasnetsov, 1926. oil on canvas. by Mikhail Nesterov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미하일 네스테로프 (Mikhail Nesterov)가 그린 바스네초프의 초상화.
미하일 네스테로프 (Mikhail Vasilevich Nesterov 1862 - 1942)는 좀 특이한 장르의 작가이다. 러시아의 종교 상징주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네스트로프는 예술에 관심이 많은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2살 되던 해 그를 기술자로 만들려고 기술학교 입학을 위해서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그러나 미술가이자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교사였던 투르토프스키의 눈에 띄어 그의 추천으로 러시아 예술가들의 요람인 모스크바 예술학교에 입학한다.
미하일 네스테로프는 1917년 10월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 정교회의 신자 입장에서 이 혁명을 받아 들일 수 없었지만 그는 외국으로 나가지 않고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친다. 혁명 이후 그는 당대 러시아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에 몰두한다.
네스테로프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인물을 앞에 배치하고 러시아 전통 풍경, 예를 들면 나무와 초원, 숲과 교회 그리고 강을 병풍처럼 둘렀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의 그림은 차분하고 시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만큼 그림을 놓고 생각할 것이 많다는 이야기도 된다.
네스테로프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영혼을 울리는 듯한 장면을 간결하게 그린 점이다. 복잡하지 않은 화면,그러나 풍부한 색상은 작품 속에 서정성을 듬뿍 담아 놓았다. 네스테로프를 두고 러시아 화화에 새로운 서정성의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스네초프는 일흔 여덟이 던 해 7월, 미하일 네스테로프가 바스네초프의 초상화를 그리던 중 네스테로프의 화실에서 숨을 거둔다.
빅토르 바스네초프 (Viktor Mikhailovich Vasnetsov)
러시아 사실주의 민속화 일러스트, 디자이너 및 그래픽 아티스트.
성직자의 아들로 뱌트카(Vyatka, Kirov 키로프) 출생, 1862~1867년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967년 페테르부르크 드로잉 학교에 입학하여 이반 크람스코이(Ivan Kramskoy, 1837~1887)에게 사사하였으며 1869~1875년 세인트 피터스버그 예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여 높은 실력을 쌓았다.
1878년부터 이동파에 참가하였다. 그는 러시아 민족 미술의 부흥을 꾀한 아브람체보(Abramtsevo)파 화가로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발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작품으로 러시아사와 민화를 테마로 한 '3용사', '야료누시카', '회색 늑대를 걸터타는 이반 왕자' 등이 있다.
New from the Front. 전선으로부터의 소식. 1878. Oil on canvas. 79.7 X 62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골목길,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벽에 붙은 소식을 보기 위해 잠시 우산도 접었다. 전선으로부터 날아온 기사를 읽는 사람들의 표정이 침통하다.
나이든 노인들과 여인 그리고 아이에게는 아들이고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는 사람들의 생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편한 얼굴일 수는 없다. 전쟁은 살아 남은 자에게 더 큰 고통이 된다.
그것을 알면서도 세상은 여전히 전쟁에 관한 한 진행형이다. 진정한 평화는 언제쯤 올 수 있는 것일까? 전선에 나갔던 사람들이 어서 돌아 오기를 기대하면서 벽보 앞에 서 있는 사람들, 움직일 줄 모르고 있다.
Acrobats (Festival in a Paris Suburb). 곡예사. 1877. oil on canvas. 221 X 136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피에로 분장을 한 배우가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무대 위에는 북과 트럼펫으로 구성된 작은 악단이
흥을 돋우고 있고 서커스에 등장하는 말도 올라 왔다. 붉은 색 칸막이 너머가 공연장이겠다. 몇 몇 사람이 입장하고 있고 계단 밑의 사람들은
부러움과 호기심으로 무대를 올려다 보고 있다.
지금은 거의 볼 수 가 없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큰 마당이나 광장에 가끔 서커스단이 장막을 치고 가설극장을 만들어 몇 주씩 공연을 했다. 서커스를 보면 어린 마음에도 줄을 타는 여인의 모습이 애처롭고 안타까워 아련한 기억으로 오래 남아 있다.
Acrobats (Festival in a Paris Suburb). 곡예사. 1877.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Moving House. 이사. 1876. oil on canvas. 53 × 6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추운 겨울, 남루한 옷차림의 부부가 길을 나섰다. 그동안 살던 집에서 또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중이다. 커다란 보퉁이 하나에 모두 담았으니 짐이라고 할 것도 없다.
주전자를 든 여인의 표정에는 삶의 피곤이 덕지덕지 내려 앉았고 초점 잃은 눈에는 더 이상 물러 날 곳이 없는 절망감 같은 것도 느껴진다. 아내를 여기까지 몰고 간 것이 미안했던지 남편은 곁눈으로 아내를 보고 있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남자들은 가장 괴롭다. 하늘은 낮게 내려 앉았고 항구는 얼어 붙었다. 힘든 고비를 넘는 두 사람에게 어서 봄이 와야 할 것 같다.
At a Bookseller's. 서점에서. 1876.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서점 앞이 소란스럽다. 아이들은 천연색으로 묘사된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고 그림을 골라 든 할아버지도 꼼꼼하게 살피는 중이다. 창문 옆에 여러 종류의 그림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책보다는 그림을 파는 곳처럼 보인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벽에 그림 한 장 정도 거는 마음의 여유는 가지고 있는 것이겠다.
가게 안쪽에 앉아 손님을 맞고 있는 주인이 보인다. 비록 허름한 가게이지만 아마 이 동네 유일의 ‘갤러리’일 것이고 ‘문화살롱’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동네 헌 책방을 자주 기웃거리곤 했다.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냄새도 좋았지만 책방 주인 아저씨의 해박함에 늘 놀랐던 기억이 난다. 자꾸 사라지는 작은 책방들이 안타깝다.
Tea Drinking in a Tavern. 선술집에서 마시는 차. 1874. Oil on canvas. The Museum of Visual Arts, Kharkov, Ukraine.
차를 마실 때 컵만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얇은 접시 같은 것도 사용되나보다. 납작한 접시에 담긴 차를 마시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양하다. 차 맛을 음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각한 얼굴로 설명을 듣는 사람들도 있고 서류를 살피는 사람도 있다.
맨 왼쪽에 따로 앉아 있는 사람은 손에 얼굴을 파묻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어쩌면 이미 마신 술에 취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루의 일을 마감하면서 한 잔 하는 사람, 타지로 가다가 잠깐 들러 요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선술집이다. 고단한 일상에 한 몸 잠시 쉴 수 있는 곳, 삶의 애환이 묻어 있는 곳이다.
Ivan Tsarevitch Riding the Grey Wolf.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 1889. oil on canvas. 249 × 18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2007년 12월 네덜란드 흐로닝겐의 흐로닝어 미술관에서 열린 ‘러시아 민담과 전래동화’ 전 관람객은 저마다 전시장 입구에 내걸린 안내 포스터에 매료됐다. 포스터의 바탕 그림은 한 젊은이가 매혹적인 여인과 함께 거구의 회색 늑대 등에 올라 탄 채 울창하고 어두컴컴한 숲을 빠져나가는 장면이었다. 러시아 화가 빅토르 바스네초프가 그린 이 그림은 러시아 전래동화인
‘이반 왕자, 불새, 그리고 회색 늑대’의 한 에피소드로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를 묘사한 것이다.
다소 길지만 동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전래동화에서 유래한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 옛날 옛적에 한 임금님이 세 명의 왕자를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그는 정원에 황금사과나무를 키웠는데 매일 불새가 나타나 한 개씩 가져가자 왕자들을 시켜 잡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두 형은 게을러서 잡지 못했고 막내 이반은
잡을 뻔 하다 놓친 채 깃털만을 가져와 왕에게 보여준다.
왕은 다시 새를 잡아오라고 명령하지만 두 형은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용감한 막내는 갈림길 앞의 이정표에 표시된 세 길 중
‘사람은 살고 말은 죽는 길’을 택해 힘차게 전진한다. 이정표의 예언대로 이반의 말은 거대한 회색 늑대에게 잡혀 먹히지만 이반을 불쌍히 여긴 늑대가 그를 등에 태워 불새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준다.
늑대는 불새를 가져오되 새장은 건드리지 말라 충고하지만 이반은 이를 잊고 새장을 건드려 그곳 왕에게 붙잡힌다. 이에 왕은 아홉제곱 나라 너머 세제곱 왕궁에 가서
황금 갈기를 한 말을 가져오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한다.
이반을 그곳에 데려다준 늑대는 이번에도 말을 가져오되 갈기는 만지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그는 다시 이를 어겨 붙잡힌다. 그곳의 왕이 어여쁜 헬렌 공주를 데려다주면 용서해주겠다고 하자 이반은 늑대의 도움을 받아 헬렌을 데려온다. 그러나 헬렌을 사랑하게 된 이반이 슬퍼하자 늑대는 자신이 헬렌으로 변신해 왕에게 갔다가 도망쳐 나옴으로써 헬렌과 말 모두를 구해낸다.
이반 왕자가 겁에 질린 헬렌 공주를 안고 거대한 회색 늑대 등에 올라타서 탈출을 하고 있다. 뒤 따라 오는 추적자를 살피기 위해 눈은 커질 대로 커졌지만 손으로는 공주를 굳게 잡고 있다.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허리에 두른 칼이 허공에 떠 있다.
이반이 이번에는 불새를 줘야 한다는 생각에 슬퍼하자 늑대는 다시 불새로 변신했다가 도망쳐 나와 이반은 모든 것을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던 이반은 안타깝게도 길에서 쉬던 중 두 형에게 발견돼 죽임을 당한다. 며칠 뒤 이반의 시신을 발견한 늑대는 생명수를 구해 이반을 소생시키는 한편 이반의 두 형을 죽인다. 이반은 마침내 왕국에 돌아와 헬렌 공주와 결혼식을 올리고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A Knight At the Crossroads. 갈림길에 선 기사. 1878. oil on canvas. 147 X 79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는 바로 이반이 늑대의 도움을 받아 헬렌 공주를 데리고 숲을 빠져나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또 다른 작품인 ‘갈림길에 선 기사’는 세 갈래 길 앞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까 고민하고 있는 이반을 묘사한 것이다. 주변에 널린 해골과 동물의 뼈, 시체를 쪼아 먹기 위해 주변을 맴도는 갈까마귀는 이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신비로운 그림들을 그린 바스네초프는 뱌트카(현 키로프) 주의 벽촌인 로프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자기보다 아래 계층인 농부의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열 살 때 뱌트카의 세미나리에 들어간 그는 마침 그곳에 망명 와서 성당 벽화를 그리던 안드리올리라는 폴란드 화가의 조수로 일하게 된다.
19세가 되던 해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는데 마침 그곳에서는 신화와 기독교적 주제만을 강요하는 전통 회화 교육에 반기를 들고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스네초프는 그룹의 리더인 이반 크람스코이와 핵심 멤버로 훗날 최고의 화가가 되는 일리야 레핀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바스네초프는 사실적인 주제보다는 러시아 농촌의 전래동화와 민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76년 레핀의 초대로 파리에 간 그는 그곳에서 프랑스의 아카데미즘과 함께 인상주의 같은 첨단의 미술 사조를 배우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러시아 미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가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를 구상한 것도 파리에서였다. 이듬해 러시아로 돌아간 그는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러시아 전통 민담과 동화를 연구하는 한편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빠져든다.
A Knight at the Crossroads. 1878. Serpukhov Historical and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rpukhov)
After the carnage Igor Svyatoslavich with Polovtsy (sketch). 1878. skeych and study.
Samolet. (The Flying Carpet), 하늘을 나는 양탄자. 1880. oil on canvas. 165 × 297 cm. Nizhny Novgorod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i Novgorod).
‘하늘을 나는 카펫’도 러시아 민담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보통은 ‘천일야화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후세인 왕자가 타고 다니던 카펫을 연상하기 쉽지만
러시아 민담에서는 바바야가 여신이 바보 이반에게 내린 신비로운 선물 중 하나다. 바보 이반은 러시아 민담에 등장하는 단골 캐릭터로 순진하지만 행운의 청년으로 늘 형제들의 질투로 위험에 빠지곤 한다. 바보 이반은 바바야가가 준 신비의 카펫을 타고 이곳저곳을 여행한다. 바스네초프는 그런 이반을 그림에서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양탄자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바보 이반이다. 여신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세상 이 곳 저 곳을 여행하는 중이다. 칼을 들고 아래를 내려다 보는 이반의 눈에는 긴장감과 당당함이 담겨 있다.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무모함과는 구별되는 당당함이 필요하다.
이 작품은 러시아 철도 회사가 주문한 것이라고 하는데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던 철도와 하늘을 나는 양탄자의 이미지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한창 근대화의 길로 들어선 19세기 말 러시아인의 낙관주의와 도전 정신이 표현돼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반이 타고 있는 양탄자 한 장쯤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싶다.
Sirin and Alkonost The Birds of Joy and Sorrow. ‘시린과 알코노스트-기쁨과 슬픔의 새’, 189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한 나무에 기쁨과 슬픔의 새가 나란히 앉아 각자의 소리를 내고 있다. 밝고 환한 얼굴의 기쁨의 새는 부드럽고 여유로워 보이는데 반해 슬픔의 새는 퀭한 눈으로 안간힘을 다하는 것 같다. 그런 그녀 자신이 더 슬퍼 보인다. 슬픔은 슬픔 자신도 슬프게 하는 모양이다.
문득 슬픔과 기쁨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처럼 나란히 다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기쁨이 올 수 도 있고 슬픔이 올 수도 있겠다. 무슨 소리를 들을 것인가는 결국 자신의 몫이다.
바스네초프의 그림에 대한 당대 화단의 평가는 냉혹했다.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같은 비평가는 “미적인 아름다움은 오로지 물리적인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데 있는 것이지 상상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바스네초프는 이런 비판에도 자신의 소신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모두가 유행을 뒤쫓던 근대화의 문턱에서 그는 오히려 사라져가는 러시아의 전통을 되살려 문화적, 예술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의 그런 노력은 뒤늦게 인정받아 이제 그는 러시아의 전통을 확립한 대표적인 화가로 기억된다. 그는 도전 정신으로 가득한 이반 왕자요, 순진무구한 바보 이반이었다.
Snow Maiden. 눈 아가씨. 1899. oil on canvas. 116 x 80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캄캄한 밤이지만 눈 아가씨가 서 있는 곳에는 빛이 환하게 내리고 있다. 겨울을 다스리는 임금과 봄을 관장하는 선녀 사이에서 태어난 눈 아가씨이니까 추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겠다. 멀리 보이는 붉은 등 켜진 마을과 하늘의 별을 배경 삼아 눈은 더욱 차갑게 빛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나중에 눈 아가씨는 태양신의 빛을 받아 녹아버리게 되고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도 그녀 뒤를 따르게 된다고 하니까 결국 비극이다. 전설이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사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허무한 것? 아니면 우리의 삶이 그렇다는 것일까? 별 같은 눈을 가진 눈 아가씨에게 물어 보고 싶다.
The Lake. 호수. 1902.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호수는 대지의 붉은 살과 숲 그리고 하늘을 담았다. 풀밭에는 들꽃이 가득하고 오랜 세월 이 곳을 지켰을 나무에는 그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꽃을 따는 여인이 등장했지만 여인마저도 동작을 멈춘 듯, 정물이 되었다. 풍경 속에서 깊은 울림을 듣게 된다. 모든 것들이 천천히 흐르기 때문에 절대로 서둘러서는 안 될 것 같은 엄숙함도 느껴진다.
Tretyakov Gallery Room 26. 바스네쵸프의 그림이 전시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26번 방 모습.
Tretyakov Gallery Room 26.
Three Bogatyrs, 1881. oil on canvas. 446 X 29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러시아의 전설적인 기사들 세 명을 그렸다. 일리아 무로메츠 (Ilya Muromets)가 중앙에 있고, 도브리냐 니키티치(Dobrynya Nikitich)는 왼쪽에 있고 알료샤 포포비치(Alyosha Popovich )는 오른쪽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농부의 아들인 일리아 무로메츠 (Ilya Muromets)는 무롬(Murom) 근처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키예프 시를 해방시키고 혼자서 체르니고프 시를 방어했다. 키예프에서 일리아 무로메츠 (Ilya Muromets)는 블라디미르 왕자에 의해 최고 보가티르(bogatyr 중세 기사)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국토와 국민의 보호에 전념하는 뛰어난 육체적, 영적 힘과 성실함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수많은 영화, 그림, 기념물, 만화 등등에서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유일한 서사시 영웅 시성 에 의해 러시아 정교회 .
도브리냐 니키티치(Dobrynya Nikitich)는 러시아 민족에게 가장 인기 있는 보가티르 (bogatyr) 중 하나다. 이 캐릭터는 키예프의 스뱌토슬라브(Svyatoslav) 대왕의 군대를 이끌고 그의 아들 블라디미르(Vladimir) 대왕을 가르친 실제 장군 도브리냐(Dobrynya)를 기반으로 한다 . 도브리냐는 종종 왕실과 가깝고 민감한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전문 궁수, 수영 선수 및 레슬러로 고귀한 전사 계급을 대표한다.
알료샤 포포비치(Alyosha Popovich )는 러시아 민족 영웅 보가티르 중 막내다. 알료샤 포포비치(Alyosha Popovich )는 "교황의 아들"을 의미하며, 아버지의 이름은 "Piest Levonty"또는 "대성당 사제 레온티(Leonty)"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이미지 역시 1071년 이교도 봉기에서 살해된 레온티 주교를 본떠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After Prince Igor`s Battle with the Polovtsy, 1880. oil on canvas. 167 x 308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Tsar Ivan The Terrible, 이반 뇌제. 1897. oil on canvas. 247 × 132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하늘 아래 절대 권력 이반 뇌제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며 진리며 법인 러시아 황제다. 그림에도 그런 고집이 그대로 배어 있다. 황제로 군림하는 내내 자신의 말에 거역하면 그 어떤 이도 단칼에 베어버린 폭군이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이반 뇌제는 딱 그대로 심술맞고 고집스러운 늙은이다.
바스네쵸프의 이반 뇌제는 워낙 잘 그려졌다 하여 러시아 오페라 등에 폭군을 표현할 때 거의 이 그림을 바탕으로 의상이며 분장 등을 한다. 특히 바스네쵸프는 역사 화가이면서도 당대 최고의 무대 미술 작가이기도 하다.
러시아 류리크 왕조의 황제. 흔히 이반 뇌제(雷帝)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Ivan the terrible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백성들이 그를 부른 칭호이자 별명인 그로즈니(Гро́зный)를 의역한 것으로 '두렵다', '끔찍하다'라는 의미로 현대 영어에서 사용되는 '형편 없는'이란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적을 두렵게 한다'라는 뜻이 있으며, 이반 4세 통치 초기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때려부수는 동시에 자국내 보야르들을 찍어누르던 시절에 주어진 별명이라 '강한' 리더라는 뜻이 강하다.
'뇌제'라는 표현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로즈니라는 단어 자체는 '무서운', '두려운'이라는 뜻이지만, 그 어원이 뇌우를 뜻하는 그로자(гроза)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 뇌제라고 번역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뇌(雷) 자에는 우뢰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나운 모양새를 나타내는 뜻도 있으므로 뇌제 자체가 사나운 황제라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가끔 '이반 뇌제' 대신 '폭군 이반'이라고 의역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로즈니'라는 표현에는 폭군 이미지만 포함된 것이 아니라, 민중에게 경외심을 일으킨다는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폭군 이반'이라는 표현은 이반 4세의 폭정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완전히 합당한 번역어는 아니다.
이반 4세는 이전까지 공국의 수준에 불과했던 러시아를 처음으로 국가의 지위에 올려 놓았고 스스로를 공작이 아닌 '모든 러시아인들의 차르' 라는 이름으로 대관한 최초의 러시아 군주이기도 하다. 차르라는 명칭 자체는 선군인 이반 3세 때부터 쓰였지만 그것은 서유럽 국가들과 주고받는 외교문서에 국한되어 있었을 뿐 군주의 정식 명칭은 '모든 러시아인들의 대공(大公)' 이었다. 또한 그의 시대에는 주변지역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러시아를 동유럽의 강국으로 만드는 등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하였다.
Alionushka, 1881년. oil on canvas, 221 x 17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Baptism of Russia. -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ortrait of Zinaida Median. 1909.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Helena Adrianovny Prahovo. 189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In the park. Date unknown.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ortrait of Natalia Anatolevna Mammoth. 1883.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영상] 빅토르 바스네초프 작품 전시실. Tretyakov Gallery Room 26.
Flowers. 184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ortrait of Tatjana A. Mamontova. 1848. oil on canvas. 58 X 72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Reaper. 1867.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Russian proverbs and sayings. 1866~1867.
Russian proverbs and sayings. 1866~1867.
Merchant family in the theater. 1869. sketch and study.
Portrait of the Artist Arkhip Kuinji. 1869. oil i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Girl with a bast basket. 1870.
Porters. 1870.
Portrait of M.V. Vasnetsov. 1870.
Away. 1871.
Brousov Calendar. 1871.
Grave digger. 1871. penc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harmacist. 1871.
Portrait of Appolinary Vasnetsov. 1872.
Beggars singer (Pilgrims). 1873. Vyatka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rov)
Children Raiding Nests In The Forest, 1874. oil on canvas. 60 X 40 cm. private collection. 2012년 5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181,250 파운드 (284,182 달러)에 낙찰된 작품
From Dominik. 1874. sketch abd study.
The farmer at the table. 1877.
The farmer with a sixth (study). 1877. sketch and stud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News of the capture of Kars. 1878. oil on canvas. Saratov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ratov Region)
Playmates. 1878.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the Artist A M Vasnetsov. 1878.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ortrait of V. Vasnetsov the Artist's Wife. 바스네초프의 아내 초상화. 1878.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head of the peasant. 1878. sketch and study.
Girl in a Headscarf. 1878. Private collection.
Vyatka River. 1878. Ryazan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Ryazan)
A Game of Preference. 1879. oil on canvas. 136 X 8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Fallen Knight. 1879. sketch and study.
Porch in Akhtyrka (Ochtir). 1879. oil on canvas. Museum Estate of V. Polenov
Three Tsarevnas of the Underground Kingdom. 1879~1881. oil on canvas. 165.2 X 152.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ree princess of the Underworld. (Three Tsarevnas of the Underground Kingdom) .1884. oil on canvas.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Alyonushka. 1880. sketch and study
Bayan (sketch). 1880. sketch and study. oil on canvas. Abramtsevo State Historical, Artistic and Literary Museum-Reserve, Moscow region, Abramtsevo, Russia
The Water Carrier. 1880.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nd in Akhtyrka. 1880. oil on canvas. Abramtsevo State Historical, Artistic
and Literary Museum-Reserve, Moscow region, Abramtsevo, Russia
Pond in Ochtir. 1880.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Sedge. 1880.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The Vorya River. 1880. oil on cardboard. 33 X 24 cm. Tul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Tula)
The valley of the river near the village of Vori whorl, landscape with children. 1880. oil on canvas. Vasnetsov House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Alenushka.(study) 1881. sketch and study.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Alyonushka (study). 1881. sketch and stud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Edge of the spruce forest. 1881.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The Forest Edge. 188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Landscape under Abramtzevo. 1881.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Self Portrait. 자화상.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ltava Regional Art Museum (Ukraine- Poltava)
야로센코 (Nikolai Alexandrovich Yaroshenko 1846~1898)는 폴타바에서 태어났는데, 당시는 러시아였지만 폴타바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이다. 이런 경우 야로센코는 러시아 화가인가, 아니면 우크라이나 출신 화가인가? 미술사에서는 러시아 화가로 분류하고 있다. 야로센코의 아버지는 군대의 장교였는데 그도 아버지의 길을 따르게 된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들들이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보고 듣는 것이 친숙하기 때문이겠지만 하늘이 내려준 재주는 감출 수가 없다. 야로센코도 아버지의 길을 따라 군인이 되지만 군복무를 하면서도 열 여덟이 되던 해부터는 야간에 크람스코이의 드로잉학교를 다닌다. 크람스코이는 이동파 (방랑파라고도 한다)를 창립해 러시아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화가였다.
3년간 크람스코이 학교에서 공부를 끝낸 야로센코는 곧 상트 페테스부르그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아마 정규학생은 아니었고 청강생이나 시간이 허락되는 때만 수업을 듣는 학생의 위치였던 것 같다. 그가 아카데미에 적을 둔 시간은 7년이었다. 1875년, 스물 아홉의 야로센코는 이동파의 전시회에 참가한다.
Self Portrait. 1895.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이동파는 젊은 화가들 14명이 모여 만든 단체였다. 이제까지 귀족 중심의 그림 감상을 민중도 참여하게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러시아 전역을 돌며 그림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876년 야로센코는 이동파의 정식 멤버가 된다. 그리고 1880년대 초 크람스코이가 이동파를 떠나자 실질적인 이동파의 리더로 자리를 잡았다.
같은 이동파 멤버였던 레핀이 야로센코에게 붙여준 별명은 ‘이동파의 양심’이었다. 원칙에 충실하고 성실한 그의 자세를 표현한 별명이었다. 야로센코 작품의 기본 주제는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들과
혁명애 우호적인 학생들의 적극적인 삶과 모습이었다,
풍속화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초상화도 남겼는데 그래도 야로센코의 주요 작품은 풍속화이다. 야로센코는 ‘이동파의 양심’답게 비인간적인 조건 때문에 파괴된 근로자들의 삶을 그림에 담기도 했는데,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들이 마주친 운명에 대해 배운 사람으로서
사회적인 책임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야로센코 (Nikolai Aleksandrovich Yaroshenko)
상트 페테스부르그에 주로 거주했던 야로센코이지만 서부 유럽을 폭넓게 여행했다. 원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우랄지역과 볼가강 유역, 크리미아 반도와 코카서스 등 그의 발길은 사방으로 이어졌고 그는 자연에 대한 공부와 함께 수 많은 풍경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1882년부터는 남부 코카서스 지역의 키슬로보드스크에 별장을 짓고 시간이 나면 이 곳을 찾았다. 그림을 보다가 잠시 잊을 수 도 있겠지만 야로센코의 원 직업은 군인이다. 1892년, 마흔 여섯의 야로센코는 소장의 계급장을 달고 군대를 제대한다. 장군이 된 것이다. 그리고 6년 뒤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러시아 화가 중 가장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제작했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쉰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나고 20년 뒤 키슬로보드스크에 훗날 세계적인 소설가 태어난다. 바로 알렉산더 솔제니친이었다.
Life Is Everywhere. 삶은 어디에나. 1888. Oil on canvas. 212cm x 106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24번 방
시베리아행 열차가 간이역에 잠깐 멈춘 사이, 유형 떠나는 혁명가들이 기차 창틀사이로 햇빛을 즐기며, 먹기에는 부족한 빵조각을 비둘기에 나눠주며 느끼는 사랑을 아이에게 가르치고, 극한 상황에도 사랑을 실천하며 행복을 느끼는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그림이다.
야로센코의 그림 '삶은 어디에나 (Life is everywhere)'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죄수 호송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쇠창살이 달린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 대다수는 차르에 반대하고 개혁을 주장하던 정치범이다. 창가 바로 옆의 젊은 여인과 아기 그리고 머리를 깎은 남자가 한 가족이다. 아기와 젊은 엄마는 호송 중인 아버지를 따라서 유형 길에 나섰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유형 길에 오를 때 고난의 길에 동행했던 아름다운 여인들에 대한 숭고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 여인도 사랑의 이름으로 쉽지 않은 삶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동료 죄수들과 함께 아기가 비둘기에게 먹이 주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사람들이 먹을 빵도 넉넉치 않을 형편에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일은 사치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친 삶을 위로하는 행위이다.
가난할 수록 나누고 척박할수록 풍요로운 영혼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의 기원이다. 두건을 쓴 창백한 젊은 여인과 금발 머리 아기의 모습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옛 그림을 연상시킨다. 비둘기들이 모이를 다 먹기도 전에 기차는 유형지를 향해서 덜컹거리며 떠날 것이다. 죄수를 싣고 떠난 기차는 더욱 단련된 혁명 전사를 싣고 올 것이다.
톨스토이는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최고의 감정인 사랑. 그것의 실천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궁극적 힘이라 말한다. 그는 자문자답을 한다. 첫 번째 질문은 '인간 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이다. 주인공 미하일은 자신을 돌봐준 구둣방 주인 부부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바로 '사랑'이다.
두 번째 질문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이다. 답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견'이다. 죽음은 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죽음도 삶도 주어진 것일 뿐이다.
세 번째 질문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우리는 바로 주위 '사람들의 사랑'으로 산다. 이 소설에 깊은 감동을 받은 야로센코는 바로 이 질문과 답을 시대적 사건을 매개로 형상화했다.
'삶은 어디에나'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정의를 화폭에 담는다. 차르에 반대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정치범들의 열차 안에도 삶이 생명이 있음을... 형극의 수형길 앞에서도 잠깐의 햇볕을 즐기며 새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눠줄 수 있는 여유가 있음을... 많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 아님을, 빵조각을 나눠주는 고사리 손을 통해 일깨워준다
화려하지 않아도 빛날 수 있고 가난할지라도 풍요로운 영혼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엄마의 품에 안겨 미소짓는 아기의 천진한 얼굴에서 우리는 순수의 절대 정의를 읽을 수 있으며, 혹한의 미래 앞에 굴하지 않고 찰나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혁명가들의 풍요로운 영혼을 통해서 러시아의 희망찬 역사를 점칠수 있다는 거다. 현실의 팍팍함에 투덜대는 내게 일침을 가하는 그런 그림이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에 이런 구절이 있다. "감동이 발작처럼 갑자기 그에게 복받쳐 올랐던 것이다. 한꺼번에 그의 마음은 녹아내렸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서 있던 모습 그대로 땅에 엎드렸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센나야 광장 한 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는 달콤한 쾌감과 행복감을 느끼면서 더러운 땅에 입을 맞추었다."
그림은 창살 안의 인물들과 아이가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날아든 새들로 구성된다. 새들은 그림 하반부의 정면을 차지하고 있고 인물들은 정면이 아닌 약간 옆으로 치우친 상반부에 묘사되어 있다. 죄수 차량 안에 있는 인물들의 시선은 모두 창 밖의 새들에 집중되어 있다. 정지된 듯한 인물들의 모습은 날개 짓으로 나타난 새들의 동적인 자유로움과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왜 새들은 정면에 묘사했으면서 창살 안의 사람들은 측면에 그려놓은 것일까? 창살 너머로 내민 아이의 손 아래에서 떨어졌을 빵 부스러기를 쪼는 새들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 위의 사람들도 정면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기차가 자유로운 세상을 뒤로하고 구속의 땅을 향해 막 출발하기 시작한 순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은 아닐까? 뒤로 가지 않는 한 기차가 떠나는 방향인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을 보면 그런 추측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든다. 이제 막 덜커덩하고 기차가 한 번 움직인 거리인 듯 우리의 시선에서 약간 비껴나간 풍경이다. 기차는 이미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 안에서 이들이 보고 있는 바깥 세상의 새들은 어떤 모습인가?
플랫폼을 차지한 새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아이가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를 먹으러 날아들어 먹이를 쪼고 있는 새, 막 내려 앉으려고 자리를 물색하고 있는 새, 내려앉아 먹을 기회를 엿보며 목을 빳빳이 긴장한 검은 새, 그리고 그 옆에서 움츠리고 앉아 또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참새 같이 작은 새. 모두 두 마리씩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 작은 놈만 짝이 없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열차 지붕 위에서 꽁무니를 치켜들고 긴장되게 아래 쪽을 향하고 있는 또 한 마리의 새가 있다. 새에게 먹이를 주다 보면 옆에서 새들 무리에 끼어들지 못해 주는 모이도 못 얻어 먹어 마음 짠하게 하는 놈들이 있게 마련이다. 바닥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작은 새가 신호라도 하면 당장 내려갈 양으로 준비 태세를 갖춘 듯이 모이 쪽이 아닌 작은 새를 향하고 있다. 힘 센 놈들이 먼저 먹기 마련이다. 그래도 새들은 창살 안쪽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바깥 세상에 있다.
빛 바랜 초록색과 황토색이 섞인 낡은 열차 죄수 칸 안에 좌석도 없이 빼곡히 바닥에 앉아 있을 죄수들 틈에서 창살 너머의 새들에 마음을 빼앗긴 인물들의 표정은 어떤가.
깡마른 아이 엄마는 한 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자신의 마지막 영양분까지도 젖으로 빼앗긴 듯 지친 얼굴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머리에 쓴 검은 스카프는 러시아에서 상복으로 쓰이기 때문에 그녀가 상중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남편이라도 죽은 것일까? 상도 끝나지 않은 그녀는 아이까지 데리고 대체 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약간 옆으로 기울인 얼굴의 각도, 지적이면서도 상념에 잠긴 듯한 슬픈 표정 등은 어딘지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예수의 고난을 예견하고 걱정하는 마리아처럼 앞으로 닥칠 아이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근심이 드러난 표정이다. 일반적으로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성상화에서 성모 마리아가 항상 예수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는 반면, 여기서 그녀는 아이의 반대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며 상념에 잠긴 표정이다. 그래서인지 성모와는 다른 인간적 고뇌가 느껴진다.
아이 옆의 사내가 쥐고 있는 빵 조각은 그녀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배를 주리며 남겨놓은 아침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를 안아 올린 손이 창백한 얼굴과 대조되게 붉은 빛을 띤 것을 보면 아이의 무게마저도 이젠 힘겨운 것 같다. 그녀의 체념한 듯 부러운 듯 새들을 향한 시선에서 앞날에 대한 걱정이 드리워져 있다.
침울한 여인의 표정과 대조를 이루는 흐릿하지만 흐뭇한 웃음을 띤 사내는 귀중한 흑빵을 창 밖의 새들에게 던져주고자 하는 철없는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며 빵까지 잘게 부숴주는 인정 많은 순박한 촌부의 모습 그대로다. 조금 남은 빵 조각을 쥐고 있는 투박한 손은 그가 살아 온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짧게 깎인 검은 손톱, 굵은 손마디, 꺼칠꺼칠한 피부, 커다란 손바닥과 짧은 손가락은 평생을 노동으로 일관한 일꾼의 손이다. 가족을 위해, 그들을 하루 세끼 먹이기 위해 자기 몸뚱이 하나는 기꺼이 아끼지 않은 순박한 손이다. 선한 웃음을 띤 그의 표정에서 무엇이든 할 것 같은 우직함과 삶에 대한 긍정이 나타난다.
메마른 여인과 광대뼈가 드러난 사내의 얼굴과는 대조되는 아이의 둥그스름한 완전함은 힘겨웠을 고난의 삶을 이겨내며 여인이 지켜낸 아이의 해맑은 표정, 젖 살 오른 포동포동한 볼, 생기 있는 입술, 통통한 손을 통해 잘 드러난다. 아이의 하얀 옷과 흰 얼굴이 그들의 순수함과 결백성을 대신해서 드러내는 것 같다. 창살 아래 가만히 내민 아이의 손은 보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무슨 죄가 있다고…
그들의 뒤에 있는 텁수룩한 수염의 노인은 마치 노년의 톨스토이 같다. 마을 촌장 같은 이미지의 듬직하고 풍채 좋은 덩치, 강직한 콧대, 넓은 이마를 가진 그는, 깊이 패인 눈으로 새들을 보는 것인지 아이를 보는 것인지, 아님 그 둘 다를 보면서 자기 상념에 빠진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이가 펼치는 작은 퍼포먼스로부터 역시 눈을 떼지 못하는 것 같다. 고향에 두고 온, 이제 막 재롱을 피기 시작한 손자 생각이라도 난 것일까?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여생을 보내기 위해 떠나는 유형길이 그에겐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그 옆에서 힐끗 곁눈질로 관심을 보이는 옆집 아저씨 같이 생긴 친근한 외모에, 일용직 노동자 같은 모자를 쓴 사내도 인상적이다. 풍채 좋은 할아버지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창 밖을 보려고 아마 까치발이라도 선 듯 약간 기우뚱하고 불안한 자세다. 할아버지의 어깨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그는 입 꼬리가 약간 올라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띠고 눈을 아래로 향한 채 바닥의 새들을 주시하고 있다. 새들을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아마 이 사내인 것 같다. 그가 부러운 것은 새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아닌 지도 모르겠다. 부족한 영양 상태를 드러내듯 검게 보이는 마른 얼굴의 그가 부러운 것은 빵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고 있는 상황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이 그림에서 마음 한 구석을 답답하게 하는 아픈 부분은 다른 쪽 창 앞에서 밖을 주시하고 있는 등 돌린 사내의 모습이다. 그 사내가 없었다면 이 그림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랑곳 하지 않고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사내. 언뜻 수염도 보이는 듯하고 구리 빛의 얼굴색에 완고해 보이는 얼굴선이 젊지 않은 그의 나이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유형지로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창살 안에 갇혀 버린 듯하다.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문을 닫아 버린 것 같이 무심히 서있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얼굴도 수 십 년의 유형 생활을 거치고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을 고향으로 돌아갈 때 쯤이면 그 무엇에도 관심 없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릴 것은 아닐지... 그런 그의 뒷모습이 마치 앞 사람들의 미래의 모습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사내의 뒷모습이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니콜라이 야로센코가 이 그림을 발표한 것은 1888년 제18회 ‘이동 전람파’ 전시회에서였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여인은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톨스토이 풍이 느껴진다’ 등의 질문들은 무성했지만 이 그림에 대한 해설은 별로 없다. ‘페레드비쥐니키(이동하는 자들)’로 불리던 러시아의 ‘이동 전람파’는 슬라브주의적 경향의 그림들을 선보였던 ‘아브람체보파’와 함께 러시아 회화사에서 양대 산맥을 이룬다.
이동 전람파 화가 그룹은 1870년대부터 1923년까지 약 48회에 걸쳐 상트 페테르부르그, 모스크바, 키예프, 하리코프, 카잔, 오데사 등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자신들의 그림을 전시하였다. 이 그룹에는 이반 크람스코이(1837-1887), 니콜라이 게(1831-1894), 일리야 레핀(1844-1900),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 이사악 레비탄(1860-1900)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이상주의적인 미학과 전통적인 회화 규범을 거부하고, 일반 민중들의 삶 속에 드러난 ‘민중적 요소들’을 화폭에 옮기려고 하였다. 이동 전람파 화가들은 그 당시 러시아의 잡계급 인텔리겐치야들, 우스펜스키, 도스토예프스키, 가르신, 오스트로프스키, 체홉 등등과 교류하면서 비판적 사실주의의 영향도 받게 된다. 러시아 자연의 아름다움과 민중의 생명력에 새롭게 눈뜨면서, 그것을 화폭에 옮겨 러시아 민중들에게 보여주려고 하였다.
1861년 농노제 폐지를 단행하여 ‘차르-해방자’로 불렸지만 1881년 ‘인민의 의지’ 당 요원들에 의해 피살된 알렉산드르 2세 이후 이어진 1880년대 후반의 러시아가 ‘반개혁’의 시기였던 점을 고려하면, 민중의 삶을 그대로 그린 사실주의적 경향의 그림들이 러시아 곳곳에서 전시된다는 것 자체가 귀족 사회와 전제 군주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고 민중들에겐 자신들의 처지를 다시금 각성하게 되는 계기였을 것이다.
이 그림의 제목 중에서 러시아어 ‘vsudu’는 원래 장소를 나타내는 ‘어디나’ 라는 뜻보다는 방향을 나타내는 ‘어디로 가나’에 더 가깝다. 창살 안에 갇힌 그들의 삶은 또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 유형지에선 과연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니콜라이 야로센코는 답하고 있다. ‘어디로 가나 삶’이라고, 러시아 속담처럼 ‘삶은 계속 된다’고…
19세기 러시아 미술은 ‘문학이 모델’이었다. “19세기 러시아 미술가들은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들이다. 러시아 화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당대 러시아의 삶 자체였다.” 러시아 미술의 이런 특성은 문학에 빚진 바 컸다.
“푸시킨 · 고골 · 도스토옙스키 · 톨스토이 · 투르게네프 · 오스트롭스키 등 위대한 작가들이 러시아 지성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엄격한 검열이 이루어지던 이 시기에 사회에 대한 진지하고도
급진적인 논의들이 문학비평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러시아 미술은 문학으로부터 ‘이야기 특성’만 빌려온 것이 아니었다. 미술은 문학과 내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고, 작가와 작품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그런 영향이 처음으로 나타난 그림이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다. 20년 세월을 바쳐 1858년에 완성한 이 대작에 이바노프는 작가 고골의 얼굴을 새겼다.
희곡 〈검찰관〉(1836)에서 러시아의 암담한 현실을 예리하게 풍자했던 고골은 이후 점차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졌다. 현실에서도 예술 속에서도 해답을 찾지 못한 고골리는 정신 착란 상태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는데, 이바노프는 자신의 그림에서 고골리의 그런 마음 상태를 표현했다.
19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반기를 들고 뛰쳐나온 크람스코이는 이 반란에 가담한 13명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묘사된 혁명가들의 이상적 공동체를 본보기로 삼아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생활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공동체가 이동파의 모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크람스코이는 레프 톨스토이와도 각별한 인연을 맺어 그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안나 카레니나〉에 감명받아 이 소설의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를 닮은 〈미지의 여인〉을 그렸다.
이동파의 대미를 장식하는 니콜라이 야로센코는 톨스토이의 소설 주제를 그림으로 옮겼다. 그의 대표작 〈삶은 어디에나〉(1888)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직접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사람은 결국 ‘사랑’으로 산다고 말한다.
야로센코의 〈삶은 어디에나〉는 죄수 호송열차에 탄 정치범과 그 고난의 길에 동행한 가족을 보여준다. 시베리아 유형지로 가는 열차가 잠시 멈추어 서 있다. 젊은 죄수의 아기가 호송열차의 창살 밖으로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준다. 모이를 먹는 비둘기를 보여 잠시 기쁨의 미소를 짓는 죄수와 아내와 아이는 성가족을 연상시킨다.
“예수가 고난 속에서 사랑의 승리를 성취했듯 그들은 어디에서나 삶을, 생명을 발견할 것이다. 비둘기들이 모이를 다 먹기도 전에 기차는 유형지를 향해 덜컹거리며 떠날 것이다. 죄수를 싣고 떠난 기차는 더욱 단련된 혁명 전사를 싣고 올 것이다.”
Prisoner. 죄수. 1878. Oil on canvas. 143.1 x 107.6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작은 창에 사내가 매달려있다시피 서 있다. 지금 사내는 빛이 들어 오는 곳을 향해 그리운 사람들을 향해 끝없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는가 보다.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창은 그러나 사내의 등 뒤에 자리를 잡고 있는 두꺼운 어둠에 비해 너무 작다. 감옥이 힘든 이유는 어둠이 깊기 때문이다.
어둠은 빛의 차단에서가 아니라 의사 소통이 막히면서 시작된다. 낯선 곳이 처음에 어렵게 다가 오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차차 그림 속 어둠에 눈이 익자 죄수의 등에서 간절함과 체념 그리고 막막함이 보인다. 뭔가 잘못되어 감옥에 갇힌 느낌이 든다. 지금 어딘 가에도 저렇게 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께다. 그리고 우리들 중에도 등 뒤에 긴 어둠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 어둠이 엷어지는 세상, 모두가 꿈을 꿀만한 세상 아닐까?
The Fireman. 화부 (火夫). 1878. Oil on canvas. 124cm x 89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화로에 불을 때고 있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기차는 아니고 혹시 선박의 기관실이 아닐까 싶다. 석탄 가루가 묻은 손과 불을 다루기 위해 봉을 들고 있는 손의 팔뚝에는 간단치 않았던 그동안의 노동과 세월이 굵은 핏줄로 남아 머리를 향해 달음질 치고 있다. 그 핏줄은 가슴을 거쳐 등으로 그리고 허벅지와 종아리를 거쳐 발에 이를 것이다.
온 몸을 써야 하는 노동은 그래서 내 몸의 핏줄을 움직이는 일이다. 그렇게 때문에 당당하지만 한편으로 고단함으로 남는다. 붉게 물든 얼굴, 이마에 자리를 잡은 주름살과 형형한 눈빛은 그래도 정직하게 온 몸으로 한 세상 살아왔다고 말하는 것 같다.
In Warmer Lands. 따뜻한 곳에서. 1880. oil on canvas. 107 x 81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
나무에도 풀밭에도 꽃이 달렸고 피었다. 계절은 아직 생명력이 가득한 시기인데 그림 속 여인은 두꺼운 옷에 머플러까지 둘렀다. 여인의 얼굴을 보니 창백하다. 혹시 몸이 안 좋아서 이 곳으로 요양을 온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인의 눈빛에 담긴 간절함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몸이 아픈 만큼 기다림과 그리움이 커지고 그것은 다시 마음이 아픈 것으로 이어진다. 여인이 바라보고 있는 곳, 그 어디쯤에 여인이 기다리는 사람이 오고 있겠지... 아니, 와야 할 것 같다.
A Student. 학생. 1881. Oil on canvas. 87cm x 60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간혹 이와 같은 눈빛을 그림에서, 주변에서 만나게 된다. 비어 있는 듯하지만 세상을 변혁시키고 싶은 꿈이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눈빛이다. 가슴에 들어 가 있는 손은 어쩌면 사정없이 뛰고 있는 심장을 지긋이 누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만으로도 구별되는 것이 젊음이다. 하여 속 마음을 쉽게 감출 수가 없다.
돌아보면 세월에 실려 가는 동안 심장은 느려지기 시작했고 눈빛은 조금씩 세월 속에 녹아 들어갔던 것 같다. 그림 속 학생을 보다가 언제쯤 저런 눈빛을 가졌을까... 그 때가 그리워진다.
Student Girl. 청강생. 1883 . oil on canvas. 131 x 81cm.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옆구리에 책을 끼고 남은 손으로는 푸른색 가디건을 꼭 잡았다. 입술은 야무지게 닫혀 있고 눈은 커질 대로 커졌다. 걸어 나오는 복도 뒤편이 희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마치 안개 속을 헤치고 나오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너무 또렷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모습도 당당하다. 어쩌면 야로센코가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바라는 모습이자 헌사가 아닐까 싶다.
Student Girl. 1883. oil on canvas. Kalug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aluga)
The Swing. 그네 위에서. 1888.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
아주 특이한 모습의 그네다. 요즘 놀이 동산에 갔다 놓아도 꽤 인기가 있을 것 같다. 두 연인은 요즘의 연인들만큼 낭만적이다.
아마 그네에 오르기 전, 팝콘을 사듯 먹을 것을 샀나보다. 그네가 흔들리자 먹을 것을 입에 가져 가는 여인을 보고는 남자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몸을 살짝 돌리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코가 너무 빨갛다. 좀 적당히 마셔야 될 것 같다. 뒤 배경으로 떠 있는 뭉게구름 때문에 두 사람은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할 수 있다면 두 사람을 하늘 끝까지 밀어 보고 싶다.
Funeral of the Firstborn. 첫 아이의 장례. 1893. oil on canvas.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온 세상이 눈으로 쌓인 추운 겨울 아침, 첫 아이의 관을 안고 묘지로 향하는 부모는 혼이 반쯤 나간 모습이다. 특히 아기가 담긴 푸른 색 관을 안고 가는 엄마의 눈에는 아이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두려움이 함께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아버지의 퀭한 눈도 마찬가지다. 그 나마 다행인 것은 묘지 너머로 해가 떠 오른다는 점이다. 밤새 세상과 이별을 한 아이 그리고 아이와 이별을 한 부모에게
아침은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슬픔도 극에 이르면 이렇게 푸른색으로 묘사될 수 있나보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4
In the Boat. 1869. Poltava Regional Art Museum (Ukraine - Poltava)
Old Man with a Snuffbox. 1873. oil on canvas. Nikolai Yaroshenko Memorial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slovodsk)
Peasant. 1874. oil on canvas.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Portrait of Painter Ivan Kramskoi. 1874.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ortrait of a Man. 1875. oil on canvas. Altai State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Barnaul)
Portrait of Maria Yaroshenko, the Artist's Wife. 1875. oil on canvas. Poltava Regional Art Museum (Ukraine - Poltava)
Portrait of Painter Ivan Kramskoi. 1876.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Head of a Man. 1878. oil on canvas. Poltava Regional Art Museum (Ukraine - Poltava)
Portrait of Painter Vasily Maximov. 187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Blind Pilgrims.1879. oil on canvas. Samar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mara)
Peasant. 1879.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
Clouds in the Mountains. 1880. oil on canvas. Poltava Regional Art Museum (Ukraine - Poltava)
Portrait of a Woman. 1880. oil on canvas. Tyumen Regional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Tyumen)
Portrait of a Woman. 1880. oil on canvas. Nikolai Yaroshenko Memorial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slovodsk)
Student Girl. 1880.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Old and Young. 188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an Unknown Lady. 188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Morning. 1882.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Mount Sedlo in the Outskirts of Kislovodsk. 1882. oil on canvas. Nikolai Yaroshenko Memorial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slovodsk)
Mount Uzhba in Svanetia. 1882. oil on canvas. Nikolai Yaroshenko Memorial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slovodsk)
Ravine near Kislovodsk. 1882.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Sudak Bay in Crimea. 1882.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In the Park (also known as Portrait of S.R. Levitskaya). 1883. oil on canvas. The State Museum of Fine Arts of Tatarstan Republic (Russian Federation - Kazan)
Hut in the Mountains. 1884. oil on canvas. Privation. collection.
Mount Elbrus. 1884. oil on canvas. Nikolai Yaroshenko Memorial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slovodsk)
Night on the Kama River. 188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ortrait of Actress Pelageya Strepetova. 188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G.I. Uspensky. 1884. oil on canvas. Yekaterinburg Museum of Fine Arts (Russian Federation - Yekaterinburg)
Portrait of Dmitry Mendeleyev. 188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Poliksena Solovyova. 1885. oil on canvas. Poltava Regional Art Museum (Ukraine - Poltava)
The Gypsy. 1886. oil on canvas. Serpukhov Historical and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rpukhov)
Man from Baku. 1886. oil on canvas. Nikolai Yaroshenko Memorial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slovodsk)
A Nurse. 1886. oil on canvas.
Portrait of Actress Pelageya Strepetova. 1886. oil on canvas. Nikolai Yaroshenko Memorial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slovodsk)
Portrait of a Young Man. 1886. oil on canvas. Vyatka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rov)
Portrait of Mikhail Saltykov-Schedrin. 1886. oil on canvas. Nikolai Yaroshenko Memorial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slovodsk)
Portrait of M.A. Plescheyev. 1887. oil on canvas.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Portrait of Vasily Polenov, by the Artist Ilya Repin. oil on canvas. 80 × 6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이 바실리 폴레노프 초상화는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 (Ilya Repin)의 작품이다. 러시아의 풍경화가 바실리 폴레노프(Vasiliy Polenov 1844-1927)는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아마추어 화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린시절부터 미술환경에서 자랐다. 폴레노프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변호사 자격증도 땄지만 화가의 길을 선택한다. 8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폴레노프는 공화국 인민화가의 칭호를 받는다.
바실리 폴레노프는 러시아의 역사화가, 풍경화가, 풍속화가이며 교육자였다. 폴레노프는 페테르부르크의 교양 있는 다자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고고학자였고, 어머니는 아동문학 작가이자 화가였다. 1861∼1863년까지 폴레노프는 올로네츠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고 1863년에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물리수학학부에 입학했다. 저녁에는 청강생 자격으로 페테르부르크예술아카데미에 다니면서 회화뿐만 아니라 해부학, 건축예술, 화법기하학, 예술사 등을 수강했다.
또한 오페라 극장과 콘서트 극장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였으며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고, 자신이 직접 예술아카데미 학생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음악곡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 후 대학교를 휴학하고 예술아카데미에서 미술에만 전념하다가 1868년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부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1869년 〈욥과 그 친구들〉로 작은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1871년 〈야이로의 딸을 살려낸 그리스도〉로 레핀과 함께 금메달을 땄다. 1872년 법학부와 예술아카데미를 동시에 졸업하고 아카데미 장학생으로 빈, 뮌헨, 베니스, 플로렌스, 나폴리, 파리 등 해외를 여행하면서 많은 창작을 하게 된다.
1876년 러시아로 귀국하여 무대장식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882∼1895년에는 모스크바회화조각건축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I. 레비탄, C. 코로빈, I. 오스트로우호프, A. 아르히포프, A. 골로빈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Portrait of the Artist Ilya Repin. by the Artist Vasily Polenov. 1879.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아 레핀 (Ilya Repin)의 초상화로 바실리 폴레노프 작품이다. 바실리 폴레노프 역시 이동파의 멤버였다. 그리고 프랑스의 외광파 기법을 러시아에 최초로 소개한 선구자였다. 외광파는 실내 광선이 아닌 태양 광선에 비추어진 자연의 밝은 색채 효과를 재현하기 위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 화파를 총칭한다.
1879년부터 ‘이동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887년 대표작 〈간음한 여인과 예수〉를 제15회 이동파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1910∼1918년에는 민중 계몽활동에 참여하여 민중극장 창립에도 참여하였으며 1924년 탄생 80주년을 기념하여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27년 툴스카야 주의 자신의 영지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Portrait of Isaac Levitan by Vasily Polenov. 이삭 레비탄(Isaac Levitan) 초상화. 바실리 폴레노프 작품.
초야권 primae noctus, 1874. oil on canvas. 120 X 17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폴레노프는 이태리, 프랑스의 역사적 주제를 담은 그림을 다수 그렸다. '나리의 권리, 초야권'라는 작품은 나리에게 세 농노 처녀를 데리고 와서 선보이는 모습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유럽이지만 러시아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가는 그때까지도 농노 처녀들의 초야권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 귀족의 모습도 비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귀족들은 농노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사랑의 대상은 더더욱이 아니었다.
러시아 감상주의는 진보적인 귀족 계급 문화의 한 현상으로, 18세기 후반 문학 및 예술 속에서 계몽주의적인 이성 우월주의의 위기로 인해 형성된 흐름이었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분출과 완성, 개인의 ‘감수성’을 맹목적으로 숭배하였고, 사회보다는 한 개인이 문학적인 지각의 중심에 들어서게 되었다. 인간의 내면세계는 물론 인간 주위의 자연 세계도 파헤쳐 보이려는 특징을 가진다.
감상주의의 특징적 대비로는, 순결한 자연, 비도덕적 문명, 전원의 한적한 생활, 번잡한 도회지 생활, 꾸밈없는 자연 그대로의 시, 이성적인 시 등이다. 또한 감상주의적 경향에서는 민중의 정신적인 특성, 민족적인 서사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된다. 계몽주의 시대에 발전했던 개방성, 사회적 기호와 자유로운 여론, 개성과 독립성을 존중하는 개별 인간의 고양된 가치에 의존하였지만, 사회적인 인간의 구체적인 성격을 밝혀내지 못했고, 인간을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묘사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소작농이 소작세를 갚지 못했나 보다. 이제 갓 피어 난 듯 싱그러운 소녀들이 지주에게 제물로 바쳐진다. 지주는 음흉한 표정으로 소녀들을 훑어 보고 있다. 그런 주인의 마음을 대변이나 하듯 지주의 사냥개들조차도 거만함이 묻어난다. 성문 입구에서 안타깝게 가로막힌 채 절망하는 아빠의 애틋함이 그림 한 쪽에서 강한 포인트가 되고 있다.
젊은 여자를 대동하고 노인이 영주를 보고자 찾아왔다. 한눈에 봐도 고약한 인상을 가진 영주는 허리에 손을 척하니 올리고 한 계단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불안한 눈으로 영주를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처녀의 눈빛은 겁에 질려 있다. 곧 결혼을 앞둔 처녀가 초야권을 영주에게 바치러 온 것이다. 중세 스위스에서는 남편이 아내 될 여자의 초야권을 갖기 위해서는 ‘초야세’라는 세금을 내야 했다는 기록도 있다는데, 지금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성직자나 그 지방의 영주가 그 권리를 행사하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권력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하는 습성이 있다. 어린 소녀의 가느다란 한숨소리, 음흉한 영주의 웃음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고 하루를 마감하는 해는 건물의 흰 벽에 불안한 붉은 그림자를 남기고 넘어가는 중이다. 그건 그렇고 눈에 거슬리는 개 두 마리. 왜 권력자들은 개를 데리고 나타나는 모습이 많을까? 하는 짓이 개와 닮아서 그런가?
폴레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높은 계급의 장교였고 한편으로는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미술을 좋아하는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이런 부모의 재능은 두 사람 사이의 아이들이 미술과 과학을 좋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Granny's Orchard. 할머니의 정원. 1878. oil on canvas. 54.7 x 65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그림 속 정원은 잡초가 무성히 자라 있고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어쩌면 버려진 듯한 느낌을 준다. 할머니 혼자 사는 대저택 같은데 늙은 노인이 손보고 가꾸기는 너무 커 보인다. 이미 연로한 할머니는 사실 누구의 도움 없이 산책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도시에 사는 손녀가 이렇게 찾아 와 따뜻한 햇빛을 선사해 주지 않는다면 할머니는 출입조차 힘들 것이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않는 저택의 정원처럼 할머니의 삶도 외롭고 또 외롭다. 할머니의 남은 인생과 내버려진 정원. 이 또한 얼마나 절묘한 비유한가.
이제는 허리가 구부정해져 지팡이와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하는 할머니가 정원 산책을 나섰다. 뒤로 보이는 건물도 할머니만큼의 나이를 먹었겠다. 어쩌면 훨씬 그 이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원의 나무와 꽃들은 여름의 햇빛 아래 푸르름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 길을 걷는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무수한 상념이 떠오르겠다.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나만 늙어가는 것일까?
분홍색 옷을 입은 젊은 여인에 비해 할머니가 입고 있는 검은색 옷은 이제는 되돌아갈 시간이 없음을 알려주는 징표 같아서 마음이 언짢아진다.
열두 살부터 체계적으로 드로잉을 배운 폴레노프는 3년 뒤 풍경화가인 치스타코프에게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다. 1863년 열아홉의 폴레노프는 법률을 전공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하는데 왕립 아카데미에도 입학을 한다. 법학과 미술을 같이 전공하기로 한 것이다. 성격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분야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폴레노프는 해내고 만다.
폴레노프는 러시아-터키 전쟁의 (1877-1878) 종군 화가를 지내고 돌아온 후 Peredvizhniki (이동파)에 참여했고, 파벨 트레치코는 그의 그림을 좋아하여 다수 구입했다. 그는 사실적인 풍경화에 집중하며 사람의 일상과 관련된 러시아 자연의 시적 정적감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폴레노프는 외광파의 생생한 색채를 예술적 구성 처리와 결합시킨 러시아 최초의 화가 중 일인이다. 그가 발전시킨 원칙은 훗날 소비에트의 풍경화 발달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폴레노프는 1893년 셍페테르스부그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고, 1926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인민화가로 지명됐다. 그는 모스크바 미술, 조각, 건축학교에서 가르쳤고, 아르히코프, 리비탄 등이 제자였다. 폴레노프가 살던 집은 국립박물관으로 되었고,
그가 살던 마을은 '폴레노포'라고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27년 83세로 사망.
Overgrown Pond, 숲이 무성한 연못. 1879.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어딘가 낯이 익은 풍경이다. 수련이 떠 있는 연못, 작은 선착장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고 우거진 숲의 품에 안긴 듯한 벤치가 보인다. 숨은 듯 만 듯한 여인은 벤치에 앉아 책을 펼쳤다. 고요하고 싱그럽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한, 언젠가 본 듯한 풍경화를 ‘무드 풍경화’라고 한다. 흰 들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는 길은 여인이 앉아 있는 곳으로 이어졌다. 조명을 흐리게 하고 음악이 있다고 해서 ‘무드’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괜찮다면 연못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1871년 스물일곱의 폴레노프는 변호사 자격증을 따며 대학을 졸업한다. 또한 왕립 아카데미에서는 ‘야이로 딸을 일으키심’이란 작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한다. 이렇게 되자 폴레노프의 고민이 시작된다. 금메달에 대한 부상은 유럽 여행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었다. 몇 달을 고민한 폴레노프는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하느님도 편애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On the boat. Abramtsevo. 아브람체보에서 보트를 타고. 1880. oil on canvas.
키예프 주립 러시아 미술관.
앞 작품 속 여인일까? 녹색의 한가운데를 흘러가고 있는 여인에게 마치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듯하다. 도드라져 보이지만 보트의 색과 주변의 수련으로 점차 엷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여름 한철 조금씩 흔들리는 배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다 싶다.
아브람체보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철도왕’ 사바 마몬토프의 집이 있는 곳이다. 당시 마몬토프는 러시아의 젊은 화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하던 사람이었다. 때문에 화가들이 자주 모이던 곳이었다. 그들 중 잠시 머문 화가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눌러앉기도 했다. ‘아브람체보파’가 형성될 정도였다.
1년간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폴레노프는 수많은 스케치와 드로잉을 제작한다. 그 후 파리에 정착, 4년간을 머무는데 이 기간 동안 폴레노프는 역사화와 풍속화,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제작한다. 그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가장 감명을 받았던 것은 야외에서 작업하는 프랑스 화가들의 모습이었다. 특히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작품에 매료되었는데, 폴레노프가 풍경화에 마음이 기운 계기가 되었다.
Old Mill. 오래된 물방앗간. 1880. oil on canvas. 세르푸호프 역사미술관.
숲속 물방앗간이 한여름을 나고 있다. 방앗간 벽에는 군데군데 지나온 세월의 흔적들이 머물고 있다. 한때는 힘차게 수레가 돌아갔고 사람들 소리로 소란했겠지만 이제는 줄어든 물의 양으로 물레방아는 움직임을 멈췄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숲들이 조금씩 대신하고 있다. 낚싯대를 물에 드리우고 있는 소년이 보인다. 방앗간은 움직임의 상징이지만 낚시는 고요함이 우선되어야 한다. 아이가 커서 세상으로 나가고 나면 물방앗간, 저만 혼자 외롭겠다.
이때부터 폴레노프의 작품 속에는 두 가지 요소가 나타난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받은 고전교육과 아카데미에서 배운 기법은 그를 고상한 역사화를 그리는 길로 이끌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풍경화였다. 결국 이 두 가지 요소가 오랜 기간 동안 그의 작품 속에 혼재되어 나타나는데, 1880년대 후반 그러니까 30대 후반부터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The Burnt Forest. 불타버린 숲. 1881. oil on canvas. 89.7cm x 170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예전에는 화전을 일구던 사람들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계층이었다. 그림 속 숲은 화전의 모습은 아니다. 자연 발화로 타버린 숲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화마가 훑었던 지역이었지만 자연은 다시 생명력을 회복했다. 검게 그을렸던 땅에는 풀들이 자라기 시작했고 사이사이 나물들도 자리를 잡았다. 무너지지 않는 생명력, 그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큰 가르침이다. 나물을 향해 뻗은 여인의 손과 등에서 끝나지 않은 인간의 생명력을 보게 된다.
5년 간의 외국 여행을 끝내고 서른둘의 폴레노프는 러시아로 귀국한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터키에 대한 독립을 주장하고 나서자 터키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는 범슬라브족을 보호한다는 이름 아래 터키를 침공하는 러시아-터키 전쟁이 일어난다. 폴레노프는 이 전쟁에 종군화가로 참여한다.
Moscow Backyard. 모스크바 뒷마당. 1878. oil on canvas. 80.1 x 64.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폴레노프의 유명한 1878년 그림 "러시아의 전형적인 안마당" 이다. 폴레노프는 상트 페테르스부르그 태생으로 1863-1871년 황립예술학교에서 공부했다. 동급생으로 이동파 미술가이자 유명한 사진사였던 라파일 레비츠키와 막역지우였다. 그들의 서간문은 폴레노프 저택 갤러리에 보관중으로 당대 미술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폴레노프와 레비츠키는 둘 다 독신일 때 처녀의 들판이란 뜻의 "Devich'e Pole" 거리에 있는 집의 다락방에서 함께 살았는데, 훗날 레비츠키가 이 집의 여주인과 결혼하였다.
밝은 햇살, 푸른 하늘, 깨끗한 공기, 세상에서 제일 환하고 평온한 모습을 표현한 듯한 그림 속 지역은 19세기 말엽 모스크바의 모습이다. <모스크바의 정원>은 19세기 모스크바 스타르이 아르바트 정경을 그대로 담아 놓았다. 지금도 모스크바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붉은 광장과 함께 꼭 들르는 관광 명소로 현재는 빌딩 숲이 우거진 대도시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19세기에는 그림과 같았다고 한다.
찬란한 태양 아래 밝게 빛나는 모스크바 정원의 새파란 잔디 위에서 어린 아이들이 놀고 있다. 그렇게 펼쳐지는 평온함과 건강한 생명력이 그림의 핵심이다. 이 그림은 19세기 모스크바를 재현한 것이기 때문에 모스크바 도시 행사의 카탈로그 표지나 국가적 차원에서 모스크바를 보여주어야 하는 책자같은 것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그림이기도 하다. 모스크바 시 성립 850주년 기념행사 포스터에도 이 작품이 대표 그림으로 사용되었다.
Moscow Courtyard.
멀리 보이는 교회의 건물들도 말쑥한 모습이지만 모스크바의 뒷마당에도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다. 닭의 모이를 주러 나온 아주머니, 풀밭에서 혼자 우는 아이, 놀기에 바빠 동생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는 신이 난 아이들, 모두 우리 사는 모습이다. 근사하고 멋진 교회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지만 세월을 이겨내고 있는 낡은 집은 땅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다. 햇빛 가득한 마당 위로 폴레노프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부르는 찬가가 흐르고 있다.
다음 해 전쟁이 끝나고 귀국한 폴레노프는 왕립 아카데미 시절부터 교류를 맺고 있던 화가들과 함께 이동파 전시회에 참가한다. 이때 출품한 ‘모스크바 뒷마당’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풍경에 서정을 듬뿍 담아 외광파 기법을 이용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외광파 기법이 러시아 최초로 소개되는 순간이었다.
On the Tiberiad Lake, 타이비어리드 호숫가. 1888.
이스라엘 북부 골란 고원 아래에 있는, 요즘 이름으로는 타이비어리어스 호수이다. 주변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의 모습이 많이 익숙하다. 폴레노프가 예수님과 관련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림 속 인물은 예수님을 상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제우스의 모습에서 가져와 조금씩 변형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유대 지방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모습은 그림 속 남자의 모습과 많이 닮지 않았을까 싶다. 길옆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있다. 길은 그 사이로 이어지겠지만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도 돌이 많은 길인 것은 분명하다.
‘타이비어리어스’는 영어 Tiberias의 발음을 그대로 적은 것 같다. 우리말 표기로는 ‘티베리아스’ 또는 ‘티베리우스’라 적어야 할 것 같다. 히브리어로는 ‘티베랴’. 본래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갈릴리 호수 서안에 있던 마을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로마 2대 황제 티베리우스에서 따왔다. 그러니까 타이비어리어스 호수는 곧 갈릴리 호수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때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폴레노프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깨끗하고 밝은 색, 색깔이 있는 그림자, 자유로운 붓 터치와 같은 기법을 소개했고 이 무렵부터 러시아 회화의 전통에 따라 사실적인 풍경화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풍경화를 통해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과 어우러진 러시아의 시적인 풍경들 전하고 싶어 했다. 그의 기법은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풍경화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00년 경, oil on canvas. 20.8 x 31.3cm, 볼로그다 시립미술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러시아의 인민화가 바실리 폴레노프(Vasiliy Polenov, 1844-1927)는 러시아 장성이자 고고학자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변호사 자격증을 땄지만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스와 중동을 여행하며 다양한 화풍에 접했고, 역사화, 풍속화, 풍경화, 초상화 등 다양한 작품을 그렸으며, 유럽의 풍경미술이론을 러시아에 최초로 소개시킨 인물로, 훗날 모스크바 미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888-1909년에 팔레스타인을 두 번이나 방문한 그는 예수님의 생애 연작을 60여 점이나 그렸고, 이스라엘 성지의 평화로운 풍경과 성지의 건축물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그렸으며, 사실주의에 입각한 그의 표현기법은 독특하였고, 그의 작품구성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예술을 통한 민중 계몽에 역점을 두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생애 연작 중 하나로 마태복음 16,13-20; 마가복음 8,27-30; 누가복음 9,18-21이 그 배경이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지리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갈릴래아에서의 활동기이고, 후반부는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졌으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면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묻는 것이 분기점이 된다. 그리고 화가는 이스라엘 성지를 다녀온 사람처럼 시냇물이 흐르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의 풍경을 배경으로 이 작품을 그렸다.
예수님께서는 돌다리가 있고 시냇물이 흐르는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손짓으로 당신을 가리키며 제자들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가 8,27) 이것은 공생활을 마감하며 예루살렘으로 가서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듣기 위한 질문이었다.
예수님 앞에는 제자 세 명이 앉아 있다. 한 제자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고, 다른 제자는 “엘리야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으며, 또 어떤 제자는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과소평가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가 8,29) 아마도 세 제자 중에서 가운데에 앉아 있는 제자가 베드로일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눈이 마주쳤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고 있다. 예수님의 신성은 수난과 죽음을 겪은 후에야 들어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도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일 때에야 빛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마가 8,34-35)
Christ and the woman taken in adultery.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188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복음 8:1~11)
1881년부터 다음 해까지 폴레노프는 독일과 중동 여행길에 오른다. 이미 러시아 최고의 풍경화가라는 이름을 얻은 그는 그가 좋아하는 풍경과 신약성서의 내용을 합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특히 성경 속 풍경을 연구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지방을 두번이나 방문해서 그곳의 풍경과 건축, 사람들을 연구했다. 당대 러시아 화가 중 가장 많은 해외 여행을 한 화가라는 말이 붙었는데, 현장을 중요시하는 사람에게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1861∼1863년까지 폴레노프는 올로네츠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고 1863년에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물리수학학부에 입학했다. 저녁에는 청강생 자격으로 페테르부르크예술아카데미에 다니면서 회화뿐만 아니라 해부학, 건축예술, 화법기하학, 예술사 등을 수강했다.
또한 오페라 극장과 콘서트 극장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였으며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고, 자신이 직접 예술아카데미 학생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음악곡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 후 대학교를 휴학하고 예술아카데미에서 미술에만 전념하다가 1868년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부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He that is Without Sin. 죄 없는 사람. 1908. oil on canvas. 118 x 239 cm. 2011년 11월. 런던 본햄스(Bonhams)에서 $ 6,395,619 낙찰
2011년 11월 바실리 폴레노프의 희귀한 작품 '죄 없는 사람'과 '그는 죽을 죄를 지었다' 2점이 런던 본햄스에 출품되었는데 문제의 그림 2점은 거의 100년 만에 햇볕을 보게 된 작품이다. 1912년 대서양 깊숙히 가라앉은 타이타닉에 실려 있던 그림. 폴레노프가 20년 동안 예수의 생애를 그린 연작 그림 60점 시리즈에 속해 있던 작품이다.
'죄 없는 사람'은 성 요한의 복음 중 예수가 간통한 여인에게 내린 판결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너희 중 죄 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는 말을 한 순간을 담아 냈다. '그는 죽을 죄를 지었다'는 예수가 고대 유대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에 입장하기 전 모습이 그려져 있다. 비극적인 사건을 품은 걸작답게 두 작품의 낙찰 금액 합계는 100억을 훌쩍 뛰어 넘었다.
Autumn in Abramtsevo, 아브람체보의 가을. 1890.
여름은 위대했다고 릴케는 노래했다. 위대한 이유는 다가올 계절에 대비해 생명력을 극에 이를 때까지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가을은 그 생명력이 몸 깊숙이 숨는 계절이다. 한여름 녹색 범벅이었던 숲에도 생명들이 깊은 곳으로 숨어들고 있다. 더러는 붉게 더러는 노랗게 숨고, 떠난 흔적을 나타내고 있는데 숲을 가득 안고 흐르는 물도 그만 숲을 닮아버렸다.
1882년 폴레노프는 모스크바 예술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제자로는 레비탄과 코로빈처럼 훗날 러시아 미술사의 큰 별이 되는 학생들이 있었다. 폴레노프가 러시아에서는 화가이자 훌륭한 스승이었던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폴레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의 회원이 된다.
Dreams (On the hill) 언덕 위에서의 꿈. 1894. oil on canvas.
꿈이 모이면 바람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理想)으로 자리를 잡는다. 광야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 약한 사람은 끝없이 약해지고 권력을 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권력을 잡는다. 설사 영혼을 악마에게 판다고 해도 그 자리를 지키고자 한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그림 속 젊은이는 30대 초반의 나이로 사형을 당한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이 역사 속에 한둘이었겠는가? 그래도 세상에 대한 그의 바람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시간은 지금까지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바위 위 젊은이는 오늘도 저렇게 앉아서 세상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다. 언제쯤 훌훌 털어버리고 크게 웃으며 저잣거리로 내려올 수 있을까.
그림뿐만 아니라 극장의 장식에도 폴레노프는 재능을 발휘해서 여러 극장의 개보수 작업에 참여하여 많은 성과를 이룬다. 그의 여동생 폴레노바도 화가였는데, 오랜 기간 명성을 얻은 최초의 러시아 여류화가였고 도자기, 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 진출해 성과를 이루었다고 하니까 타고난 피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Early Snow. 철이른 눈. 189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아직 잎들이 다 지지도 않았는데 눈이 내렸다. 지평선을 건너온 찬바람은 미처 떨어지지 못한 잎들을 흔들고 있고 아스라한 지평선은 파란색으로 남아 다가올 겨울을 더욱 차갑게 만들고 있다. 아직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다. 크게 휘어 나가는 강 위로 쌓인 눈은 조만간 강물도 덮을 기세이다. 겨울은 침묵해야 할 시간이다. 우리에게 침묵해야 할 시간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침묵 뒤에 오는 고요함은 다시 그 뒤를 이을 생명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되기에.
8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해에 폴레노프는 공화국 인민화가의 칭호를 받는다. 러시아의 풍경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그에게 어울리는 영예였겠다.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paziergangerin auf eneiem Waldweg, 숲길을 산책하는 여인. 1883. oil on canvas. 114.5 x 67.3 cm.
가을 속에서 여인이 걸어 나오는 것일까, 여인의 뒤를 가을이 따라오는 것일까? 프랑스나 이탈리아 화가들이 보기에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변방의 화가들’이 파리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만의 문화가 섞이면서 파리나 이탈리아 화가들과는 또 다른 맛을 주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Tretyakov Gallery Room 35
Downpour. 1874. oil on canvas. 120 x 17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ussian Village. 러시아의 마을. 1889. oil on canvas. 사라토프 미술관.
Portrait of the Artist Konstantin Savitsky, 1871 by Ivan Nikolaevich Kramskoi 화가 콘스탄틴 사비츠키의 초상. 이반 크람스코이 (1837 - 1887) 그림.
콘스탄틴 사비츠키(1844–1905)는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다. 타간록 (Taganrog)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타간록 소년 짐내지엄 (Gymnasium) 빌딩을 집으로 삼고 자랐다. 타간록은 오늘날 타그메트라는 철강회사가 있는 곳. 그의 가족은 프랑코브카에 여름 별장을 세내었는데 사비츠키는 아조브해 (Azov Sea 흑해 북쪽) 해변에서 스케치하기를 좋아했고, 짐내지엄 (중등학교)에서도 미술과목을 좋아했다.
사비츠키는 5학년 때 갑자기 부모를 잃고 라트비아의 숙부 댁으로 간다. 거기서 사립기숙학교를 마친 후 셍페테르스부르그로 와서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레핀(Ilya Repin), 쉬쉬킨( Ivan Shishkin), 스타소프(Viktor Vasnetsov) 등등 당대 러시아 문화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며 지대한 영향 속에 청년 사비츠키는 크게 성장한다.
Portrait of Savitsky by Nikolai Grandkovsky. 1902. Tretyakov Gallery 사비츠키의 초상화. Nikolai Grandkovsky 작.
왕립미술학교의 우수한 학생으로 장학금을 받아 유럽에 유학하고 "방랑자들"의 일원이 된다. "철도 복구작업"은 그가 노동자 계급을 그린 초기 작품이다. 제국 예술 아카데미를 졸업 한 후 20 년 이상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펜자의 미술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데 헌신했다. 그는 이후 왕립미술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1897년 사비츠키는 Imperial Academy of Arts의 회원이되었다.
House of Savitsky in Taganrog, built in the 1890s.
사비츠키 식구는 타간록(Taganrog) 남자고등학교 건물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학교에 거주하는 의사였다. 혹시 관사 같은 곳 아니었을까?
Repairing the Railway. 철도 복구작업. 1874. oil on canvas. 100cm x 175cm. Tretyakov Gallery. 철도 복구작업. 1874. 캔버스에 유채. 175 x 100 cm. 트레차코프 국립미술관.
얼마 전 내린 비로 작은 산사태가 일어 났던 모양이다. 철길을 다시 살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자세히 보니 대부분 나이 많은 사람이거나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들이다.
장비도 변변치 않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지구 끝까지 연결되어 있는 철길들은 대부분 이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 철길에 담긴 눈물은 얼마나 될까? 철길이 열리면서 부를 쌓은 계층은 따로 있다.
이 작품은 사비츠키의 대표작이 된다. 사비츠키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항구 도시인 타칸로그에서 태어났다. 이 곳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는 안톤 체홉도 있다.
Morning in a Pine Forest. 소나무 숲의 아침. 1886. oil on canvas. 139cm x 213cm. Tretyakov Gallery.
소나무 숲의 곰 무리를 묘사한 이 작품은 ‘숲의 화가’라고 불리는 쉬스킨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처음 이 작품이 발표 되었을 때, 사람들은 쉬스킨이 숲을, 사비츠키가 곰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그림에 두 사람의 서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따로 그린 것이 아니라 전체를 함께 그렸다. 그러나 훗날 사비츠키는 자신의 서명을 그림에서 지운다. 자신의 선배이자 러시아 풍경화의 전설이 된 쉬스킨에 대한 예의였다. 사비츠키는 민중의 삶의 실제를 그림에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동파 대부분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개인보다는 여러 사람의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많다. 이것도 이동파 풍속화가들의 특징이 되는데 바실리 막스모프나 블라디미르 마코프스키의 작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Father. 아버지.
아이를 안고 있는 아버지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다. 유아 세례를 받으러 온 것 같은데,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가슴에 안고 있는 아이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지키겠다는 각오 같은 것도 보인다. 굵은 손 마디를 통해서 아버지의 직업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이 순간 만큼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모습이다.
아버지는 늘 그런 모습이리라.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사비츠키는 부모를 따라 해변가에서 스케치 하는 것을 좋아했고, 드로잉 과목은 가장 좋아하는 학교 수업이었다. 그런 그에게 비극이 찾아온다. 열 여섯 살이 되던 해, 갑자기 그의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겠다.
Welcoming the Ikon. 이콘 환영식. 1878. oil on canvas. 141cm x 228cm.
마을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담긴 이콘화가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와 경배를 올리고 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도 보인다. 이 그림이 마을의 평화와 가족의 행복을 지켜 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이콘화는 그림이 아니라 상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라트비아에 살고 있던 삼촌이 사비츠키의 보호자가 된다. 삼촌은 그를 사립 기숙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상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이 곳에서 사비츠키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고 얼마 되지 않아 우등생 중 한 명이 된다.
Bad People. 서툰 사람들. 1882. oil on canvas. 106.5cm x cm.
갈대가 우거진 강변에 배를 대 놓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뒤에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고 행동도 몹시 조심스러워 보이는데, 앞에 앉은 사람은 몸을 뒤로 기울이고 느긋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역시 눈동자가 커져 있다. 애써 태연한 척 하는 것 아닐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왠지 믿음이 가지는 않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 여러번 은메달을 땄던 사비츠키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작품으로 마침내 금메달을 수상한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비츠키는 2년간 유럽 여행을 다녀 온다. 이 시기에 많은 러시아의 젊은 화가들이 서부 유럽을 여행하면서 인상파 화풍을 접했지만 그 기법을 바로 수용한 화가는 거의 없었다.
The Funeral Service. 장례식. 1885
눈이 잔뜩 내린 날,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무덤으로 오는 길은 빗질이 되어 있다. 슬픔에 고개를 떨군 가족들과 힘겹게 지팡이를 들고 행렬을 뒤따라 온 노인들도 보인다. 차갑고 슬픈 분위기인데 맨 앞의 어린 꼬마, 바로 옆 묘지에 내려 앉은 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슬픔은 앞으로 떠나갈 어른들의 몫이라는 것일까?
유럽 여행에서 돌아 온 사비츠키는 이동파의 멤버가 된다. 민중 속으로 들어 가고자 했던 이동파에게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니라 주제였다. 상대적으로 인상파는 주제보다는 기법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인상파 기법이 러시아 미술에 정착되는 데는 시간이 다소 필요했다.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귀국한 화가들에 의해 바로 인상주의가 자리를 잡은 미국과는 차이가 난다.
To the War. 전쟁터로. 1888. oil on canvas. 207.5cm x 303.5cm.
역이 아주 혼란스럽다. 전쟁에 징집되어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보여주는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터지는 울음을 조용히 닦아 내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지금의 이별을 영원한 이별로 받아 들이는 가족도 있다.
이런 상황에 관계없이 기차 앞에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업무 인수 인계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앞 쪽에 서 있는 어린 소녀는 이 상황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전쟁은 여인과 아이들을 힘들게 할 것이다. 아이의 표정은 폭풍 전야처럼 무덤덤합니다.
사비츠키는 상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동파 멤버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차르 체제 아래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비평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끝없이 묘사한 중요 멤버이자 러시아 혁명 전에 가장 뛰어난 풍속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 받고 있다.
Fugitives in Siberia. 시베리아의 도피자들.
한 밤중인데 사내 4명이 집 앞에 서 있다. 강제 노역장을 탈출한 것일까? 뒤를 돌아 보는 사내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붉은 불빛이 흘러 나오는 창 옆에 몸을 붙이고 실내를 살피는 사내는 어둠에 잠겼다. 추위는 푸른색으로 세상을 덮고 있는데, 이 밤 이들은 주인의 하락을 받고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문 밖에 오늘 밤을 부탁하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봐야겠다.
사비츠키는 화가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모스크바, 펜자 그리고 상페테르부르크 등지에서 20년 넘게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개인 삶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1897년, 쉰 셋의 나이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니까 화가로서 사회적인 지위도 확실했다. 사비츠키는 예순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The Field. 들판.
초록 들판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덩그렇게 수레들만 자리를 잡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풀잎들을 이리 저리 흔들고 있고 구름은 산 너머에서 초원들 기웃거리고 있다. 머지 않아 우리가 만날 풍경들이다.
이동파 화가들은 자신들의 조국인 러시아의 풍경에도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풍경화나 풍속화를 가장 낮게 평가했던 기존 화단의 기준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내가 태어난 땅만큼 사랑스러운 곳도 없겠다.
사비츠키가 세상을 떠나고 9개월 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다. 그리고 12년 뒤, 러시아 혁명이 완성된다. 혹시 그가 그 때까지 살았다면 그가 평생 애정을 담고 그림에 담았던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을까? 이동파는 1923년 마지막 전시회를 열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Summer. 1896. oil on canvas. Nizhny Tagil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y Tagil)
Summer. 1896. oil on canvas. Nizhny Tagil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y Tagil)
A peasant Girl. 1897. oil on panel. Kostroma State Museum (Russian Federation - Kostroma)
Arrival of a School Mistress in the Countryside. (Teacher Visiting a Village). 1896-1897. oil on canvas. 90 X 6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t Dominique's. 1897.
At Volga. 189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The Choice of Wedding Presents. (Choosing the Dowry )1898. oil on canvas. 54 X 40.5 cm.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Fisher. Finland. 1899. oil on pan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At the doctor's. 1900. oil on panel. Private collection
Before explaining (Date). (Rendez-vous). 1898. oil on canvas. 118 X 83 cm. Samar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mara)
Girls lightened by sun.(Sunlit Girls). 1901. oil on canvas. Astrakhan State Picture Gallery (Russian Federation - Astrakhan)
Ukrainian landscape with huts. 1901. oil on canvas. State Vladimir-Suzdal Historical Architecture and Art Museum-Reserve, Russia
AT Shepherds. 1903`1904. oil on canvas. Ryazan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Ryazan)
Waiting for an Audience. 1904. oil on canvas. Saratov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ratov Region).
In the Birch Forest. 1905 . oil on panel. Muzeum Narodowe w Warszawie (Poland - Warsaw)
Portrait of I. E. Tsvetkov. 1905. oil on canvas. Saratov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ratov Region)
Musical Evening. (Musical Soiree). 1906. oil on canvas. 41 X 50.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Two mothers. Native mother and stepmother. 1905. oil on canvas. 158 X 120 cm. Samar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mara)
Lover of painting. Portrait of a collector I. E. Tsvetkov. 1907. oil on canvas. Vyatka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rov)
Portrait of academician Ivan Yanzhul. 1907. oil on canvas. State Vladimir-Suzdal Historical Architecture and Art Museum-Reserve, Russia
Gastronome. 1909.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Tete-a-Tete. 1909. oil on canvas. 28 X 32.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y listen the gramophone. (Listening to Music). 1910. Krasnodar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rasnodar)
At the Theatre. 극장에서. 1911. 48 X 35cm. Oil on canvas
Without a master. (When the Master is Absent). 1911. oil on canvas. Yaroslavl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Yaroslavl)
Empress Maria Feodorovna. 1912. Oil on canvas. 267 x 192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Visiting the Cook. 1912. oil on panel. Private collection
At the kitchen. 1912.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f Armenia (Armenia - Yerevan, Armenia)
Portrait of I. E. Tsvetkov. 1912.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Old Lady Drinking Tea. 1914.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I. E. Tsvetkov. (Girl with a Mirror). 1916. oil on panel. 22.1 X 27.9 cm.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a man sitting on a park bench. 1917. oil on canvas. 19 X 24.5 cm. Private Collection
Tobacco taster. (The Smoker). 1918.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A Glass of Ale. 1919. Watercolor. Private collection
On the grand staircase. 1914. Watercolor. 패널에 유채. 19 X 24.5 cm. Private collection 2005년 12월 런던 소더비에서 $ 323,556 낙찰. 출처 : Sotheby's
On the Dnieper River. 1920. oil on canvas. 42 X 26.5 cm. Kostroma State Museum (Russian Federation - Kostroma)
The Apple Pickers.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 letter.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Boys in the field. Date unknown. oil on canvas. Kostroma State Museum (Russian Federation - Kostroma)
Contemplation.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Fair in Poltava. Date unknown. oil on canvas. Art Museum of Dnepropetrovsk (Ukraine - Dnepropetrovsk)
Evening company (A Party). Date unknown. oil on canvas. 144 X 108.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조명이 어두운 작은 방에 젊은이들이 모여 있다. 광원은 갓 아래에서 상승하는 등유 램프다. 학생들은 테이블 주위에 모여 사모바르가 끓을 때까지 모여 있다. 테이블이 설정되어 있고 차를 마실 준비가되어 있지만 아무도 식사를 시작하지 않는다. 캔버스의 영웅들은 열정적으로 연설을 하는 어린 소녀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모임은 지하 모임인 듯 하다.
중앙의 소녀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굳게 믿고
그녀의 말에 대해 매우 진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중의 얼굴에는 서로 다른 감정이 있다. 어떤 이들은 화자의 말을 열심히 듣고, 다른 사람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연설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녀를 인식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련을 극복 하고 이 아늑한 방의 벽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어려움을 감수할 준비가되어 있기 때문에 공통의 목표로 묶여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낄 수 있다. 마코프스키의 작품은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알려준다. 그의 각 그림은 특정 사건에 대한 일종의 이야기이다. 마코프스키는 러시아 영혼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모두 알고 백성의 운명에 정통했다. 그는 당시 사회의 문제를 반영하는 깊은 사회적 주제를 제기했다.
In the hut of forester. Date unknown. oil on canvas. Serpukhov Historical and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rpukhov)
Rest on the way from Kiev. 1888. oil on canvas. 61 x 84 cm.
Summer Day. Date unknown
The artist and the apprentice.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Malorossians in a Tavern. Date unknown. Watercolor. Private collection
An Old Town Square. Date unknown. Watercolor.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Elena Snegireva. Date unknown. oil on canvas. National Arts Museum of the Sakha Republic (Russian Federation - Yakutsk)
Violinis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 Walk into Town. Date unknown. Watercolor. Private collection
Sermon in Ukrainian Village Church. 1888. oil on canvas. 32 x 50 cm. 2006년 4월 뉴욕 소더비에서 $ 419,200 낙찰. 출처 : Sotheby's
Checkers Players. 1891. oil on canvas. 48 x 57 cm. 출처 : Sotheby's.
Mushroom pickers in Finland. 1898. oil on canvas. 125.5 x 179 cm. 출처 : Sotheby's.
Portrait Of A Noblewoman. 1906. 패널에 유채. 41.5 x 32.5 cm. 출처 : Sotheby's.
The Sulk. 1901. 패널에 유채. 41.3 x 26.7 cm. 출처 : Sotheby's
Miser. 1891. oil on canvas. 71.1 x 71.1 cm. 출처 : Christie's
On the Volga. 1895. Oil on wooden panel. 26.5 x 41 cm. 2007년 11월 런던 크리스티 $ 186,430 낙찰. 출처 : Christie's
The Vodka Maker. 1871. oil on canvas. 53.5 x 35.5 cm. 출처 : Sotheby's.
Shura. 1907. 보드에 유채. 26.5 x 22 cm. 출처 : Sotheby's.
Peasant girls. 1877. oil on canvas. 29.2 x 19 cm. 2007년 11월 런던 크리스티 $ 154,294 낙찰. 출처 : Christie's.
Four Hands. 1889. oil on canvas. 40.5 x 32.6 cm. 출처 : Sotheby's.
Children at Play. 1890. 패널에 유채. 26 x 40.5 cm. 출처 : Sotheby's.
The Declaration. 1885. 패널에 유채. 24 x 17.5 cm. 출처 : Christie's
Early Autumn in the Village. 1884. 패널에 유채. 18 x 27 cm. 출처 : Sotheby's.
Herd by the river. 1895. 패널에 유채. 14 x 25 cm. 출처 : Christie's
A seated man smoking a pipe. Pencil, black ink and gouache on paper.
31.1 x 24.2 cm. 출처 : Christie's
[영상] Vladimir Makovsky (Художник Владимир Маковский)
Self portrait. 1905. oil on cardboard. 38.6 X 34.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블라디미르 예고르비치 마코프스키는 러시아의 유명한 화가인 '콘스탄틴 예고르비치 마코프스키'와 '니코라이 마코프스키'와 형제이고. 누이동생인 '알렉산드라 마코프스키'도 화가였다. 러시아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기반이 되는 사실주의 양식에 영향를 끼쳤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마코프스키의 집안은 대단하다. 아버지는 미술품 수집가였고 모스크바 예술 학교의 설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마코프스키의 아버지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타고난 자질에 집안 환경이 더해진 탓인지 나중에 모두가 유명한 화가가 된다.
15세가 되던 해, 마코프스키는 러시아 화가들을 소개할 때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6년간의 학교 성적도 좋았던지 졸업하기 바로 전 해와 졸업하던 해에는 은메달을 수상했다. 그 뒤로 3년 정도 더 공부를 했는데 학교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당시 학생들의 진학 경로를 참고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것이 아닌가 싶다.
1870년 공부를 끝낸 마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된 방랑파(The Wanderers)의 창립 멤버로 참여한다. 이후 그는 방랑파 소속으로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면서 나중에는 방랑파를 이끄는 위치에 이르게 된다. 방랑파는 그때까지 러시아 미술을 좌지우지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 대항해서 만든 모임인데 그 멤버들 중 그 학교 출신이 많다는 것이 흥미롭다.
1870년대, 그러니까 서른 즈음에 마코프스키는 두드러진 러시아 사회의 강자와 약자에 대해 관심이 깊어졌다. 이것은 훗날까지 그의 작품 주제가 된다. 압제 받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세계에 대한 그의 연민이 솔직하게 그림에 담겼다. 서민들에 대한 황제 군대의 학대와 압박도 그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 마코프스키의 가슴에는 세상을 향한 불덩어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Self portrait. 1893.
어찌 보면 ‘삐딱선’을 타고 있었던 마코프스키였지만 1878년, 서른두 살의 나이에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다. 1880년대 러시아 회화가 다양하게 발전되는 ‘민주화’ 시대가 오면서 그의 걸작들이 탄생한다. 그림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그에게는 신나는 시절이었다. 서른여섯이 되던 해 모스크바 예술 학교의 교수로 임명된다. 바실리 페로프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자리를 이어 받게 된 것이다.
1880년대 말부터 마코프스키의 작품은 조금 더 ‘우울’해졌다. 좀 더 그의 이야기 톤이 높아졌다고 봐야겠다. 1894년 마흔 여덟의 나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학교의 교수로 임명되는데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일흔까지 학생들을 지도한다. 또 예술아카데미 예비학교의 교장을 맡게 된다. 그는 화가이자 선생님이었다.
마코프스크의 작품은 끝없는 유머와 냉소 그리고 부조리에 대한 풍자가 특징이다. 초기 작품은 비교적 점잖은 냉소를 깔고 당시의 관습과 도덕 기준을 묘사했는데 작품 무대는 주로 작은 러시아의 도시들이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힘 있는 사람들의 잘못된 동정을 비판했다. 그의 의식 속에 사회적인 문제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밑에 깔고 있는 러시아 작품들은 나중에 정형화된 이념만 걷어내고 보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1870년대, 그러니까 서른 즈음에 마코프스키는
두드러진 러시아 사회의 강자와 약자에 대해 관심이 깊어졌다.
이것은 훗날까지 그의 작품 주제가 된다. 압제 받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세계에 대한 그의 연민이 솔직하게 그림에 담겼다. 서민들에 대한 황제 군대의 학대와 압박도 그의 눈을 피해가지 못했다. 마코프스키의 가슴에는 세상을 향한 불덩어리가 있었던 것 아닐까?
1905년 1월 9일은 일요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왕궁을 향하여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하는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한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제1혁명이 시작된다. 혁명을 지켜 본 마코프스키는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과 같은 약자 편에 선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다. 마코프스키는 늘 마음에 두었던 힘없고 핍박 받는 사람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다.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완성되고 난 후 2년 뒤, 일흔 넷의 나이로 마코프스키는 세상을 떠난다. 그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가슴에 담고 그 때 떠났기 때문에 행복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뒤로 흘렀던 역사를 보면 혁명은 혁명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마코프스키는 사실주의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연결시켰다.
어린 시절 마코브스키의 모습, 1854년, 화가였던 친형 콘스탄틴 마코브스키의 작품.
그림은 황제와 귀족 등 지배계층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가난한 농민도, 노예도 그림을 감상하고 평가할 권리가 있다. 자신들이 그린 사실주의풍 그림을 들고 러시아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무료로 전시회를 개최했었던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미술운동 그룹 이른바 '이동파(移動派)'의 외침이다.
이들은 짧게는 5~6시간, 길게는 보름 이상씩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래서 러시아어로 이동하는 사람들이란 뜻의 '이동파'란 이름이 붙여졌다. 블라디미르 마코브스키 역시 이동파의 일원이었다.
이동파의 목표는 예술을 관료행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예술을 통해 민중을 교화시키는 것에 있었다. 보수적인 아카데미 미술교육에 반발하여 창작의 자유와 예술을 통한 민중 계몽에 역점을 두었으며,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핵심 인물들이 참여했다. 따라서 미(美)에 대한 탐구보다 사회적, 윤리적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다. 시골과 도시의 일상생활 장면이 주요 테마가 되었고, 일상과 축제 속의 농민과 도시민들이 주인공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해방된 농노들은 도시로 몰려 들여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빈민층을 이루었다. 풍요로운 집에서 태어난 마코브스키는 따뜻한 시선으로 러시아 민중의 삶을 묘사했다. 러시아 사회의 모순에 대한 유머와 냉소, 부조리에 대한 풍자를 통해 서럽고 고통 받는 사람들, 힘없고 핍박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비참한 생활을 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였다.
At the Boulevard. 가로수 길에서. 1887. oil on canvas. 68 X 5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겨울 초입, 벤치에 앉은 부부의 모습이 애처롭다. 옆에 보따리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시골에서 도시로 일을 찾아 올라온 것 같다. 그러나 생각처럼 일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얼굴에는 좌절이 어렸고 눈은 생기를 잃었다. 남편은 풀리지 않는 삶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겠지. 부부가 꿈꾸었던 세상은 벤치 뒤 철책 너머이다. 손풍금을 꺼내 망향가를 불러 보지만 답답한 심사가사라질까? 어떻게든 겨울을 넘겨야 한다. 부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 에서 "모든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 라고 소설의 처음을 연다.
<가로수길에서> 부부가 만들어내는 쓸쓸한 느낌의 아우라는 어떤 연유에서 만들어진 불행일까? 1861년 허울뿐인 농노해방 이후 러시아 현실은 척박하기 그지 없었다. 수많은 농노들은 토지를 잃고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의 최하층을 구성한다. 그리고 산업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값싼 노동력으로 전락한다. 다른 말로 하면 도시 이주 농노들은 춥고 헐벗고 굶주린 최악의 도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로수 길에서>는 이런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하루종일 보드카에 쩔어 사는 젊은 남자가 무릎에 아코디언을 끼고 벤치에 걸터 앉아 있다. 온몸에 적당히 퍼진 알코올의 힘과 두 손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적 감흥이 더해져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옆에는 시골서 갓 올라온 듯한 그의 앳된 아내가 갓난 아기를 품에 안고 일하지 않고 돈도 벌지 못하는 남편 곁에서 근심 어린 얼굴로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다. 곧 눈보라가 휘몰아 칠텐데 아내의 마음엔 이미 걱정이 폭풍우가 되어 내리친다. 남편의 대책없는 낙관과 아내의 현실 비관이 교차하는 그림의 느낌이 발밑에 구르는 가을 낙엽만큼이나 메마르고 우울하다.
이 그림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으로 새로운 틀을 가지기 전에 보여지는 체제 미성숙을 풍자적으로 꼬집은 장르화다. 당시 러시아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회화는 가치가 없다라는 예술적 풍토가 만연했다. 작가들은 붓필의 힘으로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스토리 텔러가 되어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정돈 되지 않은 사회, 불평등한 사회, 무엇을 해야 할지를 찾을 수 없는 사회. 어디에 서야 할지를 몰라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결국은 알콜에 의존하게 만드는 병든 사회. 19세기 말엽 제정 러시아의 모습이다.
<가로수 길에서>는 그림이 주는 메세지 또한 휼륭하지만 주제를 표현한 회화적 기법이 아주 뛰어나다. 유화지만 마치 맑고 투명한 수채화처럼 농도가 가볍고 산뜻하다. 배경의 초록빛과 노란빛의 자연스런 조화, 회색빛 하늘의 쓸쓸한 늦가을 정취, 오래된 명화의 한 장면처럼 그림이 주는 아우라가 강렬하다. 그림답다라는 말이 너무도 어울리는 작품이다.
‘못 들어가요!!’, 1892년.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현대의 수많은 마르멜라도프에게 술을 마셔 좋은 점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술이 지나쳐 생기는 나쁜 결과가 너무 많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는 술로 인해 인생을 망친 전형적인 인물 마르멜라도프가 나온다. 라스콜리니코프와의 첫 만남에서 마르멜라도프는 술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저도 한때는 공무원이었죠. 집에는 아픈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데, 나는 아내의 양말마저 내다 팔아 술만 마시고, 이제는 부인이 무서워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이렇게 술 마시기 벌써 닷새째.. 나에게 하나뿐인 딸은 황색 감찰(매춘부) 일을 하러 나가고, 그 애가 그렇게 벌어온 돈도 술값으로 다 써버렸지요. 난 돼지 같은 인간이에요" (중략)
라스콜리니코프가 몸도 가누지 못하는 그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자, 그의 부인이 울부짖는다.
"몰래 갖고 나간 11루블 다 어쨌나요? 옷마저 달라졌어! 입고 나간 옷은 도대체 어디 벗어놓고 온 거죠? 모두 굶주리고 있는데! 굶주리고 있는데! 아아, 저주받는 게 낫다! 그러고서도 부끄럽지 않나요?"
보드카는 맑고 깨끗하지만, 코를 빨갛게 만들고 평판을 검게 한다고 안톤 체호프는 말했다. 러시아만큼 술이란 주제가 문학에 자주 등장하고 사회를 지배하고 역사를 뒤흔든 나라도 드물다. 심지어 대통령이 금주령을 선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실 지나친 음주는 자신만 병들게 하는 게 아니다. 함께 사는 가족과 주변 모두를 음울하게 만든다.
마코프스키의 그림에서도 알코올 중독 말기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술집을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 온몸에서 알코올에 찌든 술 냄새가 막 풍기는 듯하다. 가족의 행색이 남루하다. 필사적으로 남자를 막아서는 아내의 절망적이고 힘든 몸짓. 엄마에게 딱 붙어 아빠를 바라보는 겁에 질린 딸아이. 남자의 손엔 술값으로 맡겨버릴 가족 중 누군가의 외투가 쥐어져 있다.
고골의 <외투>에서 알 수 있듯이 혹독한 날씨의 러시아에선 외투가 곧 생명이다. 러시아에서 외투 없이 겨울을 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온몸으로 남편을 막아서는 아내의 눈빛이 슬프다 못해 공허하다. 이 가족이 엮어내는 슬픈 아우라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알코올 중독으로 주위 가족을 힘들게 하는 건 인간이 만드는 가장 슬픈 범죄 중의 하나다. <탈무드>를 보면 아담이 처음으로 술을 빚을 때 신기한 음료수에 호기심이 이끌린 악마가 다가와서 한 모금을 청한다. 술 맛에 감동한 악마는 아담에게 감사의 선물을 하겠노라며 양, 사자, 원숭이, 돼지의 4마리 짐승을 잡아 와 포도밭에 동물들의 피를 거름으로 부으니 포도는 풍성하게 자라났다고 한다.
하지만 동물의 피 탓에 부작용이 생기게 되고 그 때문에 사람이 술을 마시면 처음엔 양처럼 순하다가 점차 사자처럼 사나워지고 좀 있으면 원숭이처럼 춤추고 노래하다가 지나치면 돼지처럼 더러워지는 단계를 거친단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다.
‘적당히’가 해답이겠지만 불가능한 경우가 너무 많아 안타까울 뿐이다. 마시는 당사자의 몸 또한 병들지만 그런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의 가슴엔 피멍이 든다. 이게 1800년대 러시아에서만의 현실일까?
Visit to the Poor, The Philanthropists or The Visit. 박애주의자들. 1874. oil on canvas. 69 x 96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아주 잘 차려 입은 부유한 사람들이 남루한 집을 찾아 왔다. 그런데 그를 맞이 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둡다. 맨 왼쪽 고개를 돌린 남자의 표정에는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이 역력하다. 손을 뺨에 대고 있는 문 앞의 소녀도 불편한 내색을 보이고 있다. 할머니와 아이만 손을 앞에 모으고 여인을 맞고 있지만 할머니도 마지 못한 얼굴이. 집 주인이 밀린 집세라도 받으러 온 걸까?
작품의 제목을 보면 부유한 두 사람은 밖에서는 박애 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불리고 있겠지만 장작도 별로 없어 차갑게 식은 난로가 여인에게 묻고 싶다. 박애주의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지? 가장 낮은 자세로 힘없는 사람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눈 높이에 맞춰 나란히 앉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럼 옷부터 벗고 목과 어깨 힘부터 줄이야 하지 않을까?
Dinner (Farmer's Market in Moscow), 1875. oil on canvas. 108 X 71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식사 때가 되자 농산물을 팔러 온 농부들이 모였다. 식사는 달랑 접시에 담긴 것 하나 뿐이다. 나이든 남자들 사이에 여인들 모습도 보인다. 모두 힘든 얼굴들이다. 1861년 러시아는 농노해방을 단행한다.
근대화를 위한 발걸음을 시작했지만 극심한 경제공황과 계속되는 전쟁으로 농민들과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양광이 내리는 시장, 죽 한 그릇이란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하다. 화면 오른쪽 햇볕을 등지고 앉은 사내의 멍한 얼굴을 보니 그는 그나마 죽을 살 돈도 없는 모양이다.
The Village Children, 시골 아이들. 1880. oil on canvas.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동네 아이들이 다 모였다. 맨 오른쪽에는 싸움이 난 모양이다. 모자를 쓴 아이가 맞았는지 울고 있고 제법 큰 아이가 때린 아이를 나무라고 있다. 나름대로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이다. 아주머니 앞에 앉은 아이는 발을 잡고 우는데 가만히 보니까 범인은 닭이다. 고개를 숙이고 도망을 치는 중이다. 두건을 쓰고 벽에 기댄 여자아이의 얼굴이 붉다. 뜨개질을 하는 중인가? 가을 어느 날, 시골 양지바른 곳에 모인 아이들은 러시아 아이들의 모습보다는 우리의 예전 추억으로 먼저 다가온다.
Date. 랑데부 (만남). 1883. oil on canvas. 40 × 31.5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24번방
부모로서는 자식이 배불리 먹는 모습을 지켜볼 때 아마도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께다.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하루 세끼를 배불리 먹는 것이 삶의 가장 큰 행복이고 목표였던 시절에 자주 듣던 말이다. 물론 지금도 다른 형태의 무한 애정을 쏟으며 자식에게 헌신하는 것이 우리 부모들이다. 솔직히 자식을 통해 느껴지는 사랑만큼 벅차고 흐믓하며 행복한 느낌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짝사랑일지라도 말이다.
열살 남짓해 보이는 그림 속의 남자 아이는 어린 나이에 도시로 나와 팍팍한 노동자로서의 눈물겨운 삶을 시작했나 보다. 엄마의 품속에서 좀더 보호 받아야 할 나이로 보이는데 말이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농촌에서의 삶은 아주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굶기를 밥먹듯 했다고 한다.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모들은 어린 아이들을
도시로 도시로 보내서 끼니라도 연명하게 했다고 한다 .
엄마는 그렇게 떠난 보낸 아들이 그리워 먼길을 찾아온다. . 얼마나 걸었을까? 엄마의 행색을 보아도 그리 쉬운 여정은 아니었을 거라 짐작이 간다. 걱정, 근심, 애틋함, 반가움... 수많은 감정이 엄마의 얼굴에서 교차한다. 얼른 " 엄마 잘 지냈어? 난 괜찮아" 하며 엄마의 하얀 손을 잡아주고 지친 어깨를 감싸주면 좋으련만 무심한 어린 아들은 엄마가 품고 온 빵 한덩이만을 허겁지겁 베어 물고 있다 . 섭섭함이 일기도 전에 엄마는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고단함은 잠시 잊어버린다. 분명 엄마도 배고픔을 참으며 달려왔을 텐데 말이다. 그리곤 가슴 한켠에 올라오는 뜨거움과 애틋함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아들을 쳐다본다 . 이들의 랑데뷰는 표현 못할 무엇이 되어 화폭 전체를 메우고 우리의 가슴도 어루만진다.
마코프스키는 이 가난한 모자의 만남을 보여주며 우리 가슴에 잠자고 있는 기본적이고 순수하지만 쉽게 외면해 버릴 수도 있는 절대적 사랑을 차분히 일깨워 준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 요샌 사랑의 척도를 물질로 가늠하는 몹쓸 풍토가 만연하지만 그래도 진정한 사랑은 관계 속에서 서로를 어루만지고 처지를 이해할 때 진정 느낄수 있다.
The Collapse of a Bank (study). 1880. oil on canvas. 71 X 46 cm.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Bankruptcy,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81. oil on canvas. 104.2 X 68.2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두 장의 그림이 거의 같은 내용이다. 화면 속 많은 사람들이 은행의 파산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자기가 예금한 돈을 돌려 달라고 아우성이다. 기가 막힌 소식에 정신을 놓고 의자에 쓰러지다시피 한 노인의 모습도 보인다.
퇴역 군인들은 받아야 할 연금이 순식간에 날아갔다는 말에 울분을 토하고 있는데 날아간 것은 돈뿐만 아니라, 목숨을 담보로 했던 시절도 날아간 것이겠다. 창구에 매달려 하소연을 해보지만 직원이라고 뾰족한 수가 없다.
이런 아수라 판에서도 자기 것을 확실히 챙기는 사람이 있다. 속 호주머니에 뭔가를 넣고 화면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의 눈은 정직해 보이지 않다. 어느 때고 힘 있는 사람은 계속 살아 남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던 사람은 계속 좌절해야 했다.
Goodbye, Papa (also known as The Farewell), 1894. oil on canvas. Samar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mara)
눈물이 흐를까 봐 눈을 크게 뜨고 애써 아빠의 눈을 피해 보지만 입술까지 와 있는 슬픔은 어쩔 수가 없다. 앙상하게 야윈 두 손으로 딸의 손을 감싸고 있는 아버지는 이제 떠나는 모습을 가슴에 담으려고 눈길을 딸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또 다른 세상을 여는 딸이 대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담긴 눈빛이다. 시집가는 딸을 보는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눈 빛 아닐까?
Study to "January 9, 1905 on Vasilyevsky island". 1907. sketch and study.
<1905년 1월 9일 바실리에프스키 섬의 스케치> 바실리에프스키 섬은 상트페테르브르그 근처에 있는 섬이다. 이 날 섬에서는 무장한 경찰이 비무장 상태의 사람들을 향해 발포한 일이 있었다. 마코프스키가 현장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 장면을 그림으로 제작했다.
뒤에 있는 남자는 겁에 질린 모습이지만 가슴을 열어 젖힌 남자의 표정은 비장하다. 억울하고 분해서 금방 울 것 같다. 배경만큼이나 흰 가슴이 안타깝다. 내 가슴은 눈처럼 희고 착하다. 너희처럼 시꺼멓고 힘을 가져 본 적도 없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 하는가? 내가 요구하는 인간으로서의 최소 권리에 대한 주장이 총을 맞아야 할 일인가? 정말 그렇단 말인가? 좋다, 그렇다면 내 이 흰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라. 목이 터질 것 같은 사내의 외침이 저에게 들려오고 있다. 생각해보면 역사의 일정 부분은 힘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먹고 여기까지 흘러왔다.
1905년 1월 9일은 일요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왕궁을 향하여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하는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한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제1혁명이 시작된다. 혁명을 지켜본 마코프스키는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과 같은 약자 편에 선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다. 마코프스키는 늘 마음에 두었던 힘없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다.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완성되고 난 후 2년 뒤, 일흔넷의 나이로 마코프스키는 세상을 떠난다. 그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가슴에 담고 그때 떠났기 때문에 행복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뒤로 흘렀던 역사를 보면 혁명은 혁명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A boy selling brew. 186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The artist, selling old stuff to Tatar (Artist's Studio). 186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Literary reading. 186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easant Boys Guarding Horses at Night. 1869.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Lover of of antiquity. 1869.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Knuckles (Children Playing). 187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he Church Choir. 1870. oil on canvas. Sevastopo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vastopol)
The Doctor's Waiting Room. 187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 deacon. 1871. oil on canvas. Omsk Museum of Fine Arts (Russian Federation - Omsk)
Fans of nightingales. 1872. oil on canvas. 76 X 5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 girl with geese. 1875. oil on canvas. 27.5 X 39 cm. Nizhny Tagil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y Tagil)
A gypsy lady. 1875. oil on canvas.
A Party. 1875. sketch and study. panci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Anticipation,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75. 83 cm X 122 cm,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186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귀족의 토지에 매인 농노를 해방했다. 전근대적인 농노 제도의 철폐는 역사적 당위였으나 해방된 농민의 사회통합 방책이 미비한 상태에서 졸속으로 이루어진 개혁은 혼란을 가져왔다. 땅 한 뙈기 없는 농민들은 전보다 더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농민의 참상을 목격한 진보적 지식인들은 농민 속으로 들어가 이들을 교육하고 농촌을 개선하자는 브나로드운동을 일으켰다.
미술도 이에 반응했다. 1871년 젊은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의 전통을 거부하며 이동파를 결성했다. 이동파는 주제와 전시 방식 모두를 혁신했다. 브나로드운동에 동조해 농민의 일상생활과 러시아의 자연을 주제로 삼았으며, 이름 그대로 지방 도시를 돌아다니며 전시회를 열어 관객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마코프스키는 1872년 이동파에 가담했다. 그는 뚜렷한 현실 인식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검열제도가 엄존했기 때문에 사회 비판은 조심스럽게 수위를 조절해야 했다. 이 그림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춥다’. 세상은 눈으로 덮여 있고, 누런 건물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옷을 덕지덕지 껴입고 숄, 모자 등을 뒤집어쓰고 있다. 문기둥 위쪽 아치에 쓰인 글씨가 이곳이 감옥임을 말해 준다. 이 사람들은 왜 감옥 앞에 모여 있을까?
이 부분에서 역사적 배경이 개입한다. 이들은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죄수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기다리는 가족들이다. 각자 죄수에게 전해 줄 보퉁이를 지니고 초조하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가운데 있는 세 사람(관객을 향하고 서 있는 남자와 그 옆의 두 여인)은 말쑥한 차림새로 그 옆의 누추한 농민들과 구분된다. 브나로드운동에 뛰어들었던 중산층 젊은이는 정치범으로 체포돼 정당한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베리아 유형을 갔다. 이 가족의 아들도 아마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들이 기다리는 죄수들은 무슨 죄를 저질렀을까? 불순분자일까? 테러리스트일까? 아니면 사법제도의 희생자일까? 그림은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가가 이들에게 공감을 표시하고 관객에게도 동의를 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미술평론가 이미혜
Making Jam,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76. oil on canvas. 49.5 X 33.9 cm. Samar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mara)
The Distribution of Pensions. 1876. oil on canvas. Nizhny Novgorod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i Novgorod)
Old Lady's Promenade. 1877. oil on canvas. Nizhny Novgorod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i Novgorod)
Two Peasant Girls. 1877 .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 Private Conversation. 1878. ink on paper. 20 x 25.5 cm. Private Collection
Buddies. 1878. oil on canvas. Chelyabinsk State Museum of Fine Arts (Russian Federation - Chelyabinsk)
Congratulations. 1878. oil on canvas. 35 X 29 cm. Serpukhov Historical and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rpukhov)
At Noon, 1878. oil on canvas. 125.5 X 84.9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Guitar player. 1879. oil on canvas. Saratov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ratov Region)
Moscow types. 1879.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Organ grinder. 1879.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Condemned. 1879. oil on canvas. 113 X 76.5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A portrait of E. I. Makovsky. 188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easant boys. 188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Midday Sun. 1881. oil on canvas. 32 X 24 cm. Serpukhov Historical and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rpukhov
Old man with a pipe. 1881. oil on canvas. Karelia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Petrozavodsk)
Fair. 1882. oil on canvas.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The Prisoner. 1882. oil on canvas.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Two ukrainians. 1882.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Not Guilty,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82 , oil on canvas, 105 X 79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Village Fair. 1882.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 letter. 1883.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In a Country School,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83. oil on cadboard. 42.5 cm X 66 cm. Tul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the Artist Illarion Mikhailovich Pryanishikov. 1883. oil on canvas. 70 X 8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eprimand. 1883. oil on canvas. Ivanovo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Ivanovo)
Fishing (The Angler). 1884.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Off to Get Medicine,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84. 64.6 cm X 47 cm.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In the Entrance. hall. 1884. oil on pan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oliticians.1884.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f Armenia (Armenia - Yerevan, Armenia)
The secret. 1884. oil on pan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Zaporizhzhya Cossack, 1884.
Two pilgrims. 1885. oil on panel. The State Museum of Fine Arts of Tatarstan Republic (Russian Federation - Kazan)
Fisherwomen. 1886. oil on cabvas. Krasnodar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rasnodar)
Mother and daughter. 188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rayer service at the farm in Ukraine. 188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Wandering fiddler. 1886.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From the rain. 1887. oil on canvas. Ulyanovsk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Ulyanovsk)
Hunters at Rest. 1887. oil on canvas. Serpukhov Historical and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rpukhov)
Miracle at Cana. 1887. oil on canvas. Vitebsk Art Museum (Belarus - Vitebsk)
Easter Te Deum,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87~1888. oil on canvas. 119 X 192 cm. Serpukhov Historical and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rpukhov)
In the Tavern. 1887. Private collection
Crimean seashore. 1889. oil on canvas. State Literary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Alexei Ivanovitch Strelkovsky. 1889. oil on canvas. 39 X 5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Doss House. 1889. oil on canvas. 143 X 9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I. E. Tsvetkov. 189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 portrait of E. S. Sorokin. 189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Declaration of Love. (The Explanation). 1889~1891. oil on canvas. 39.5 X 53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Hiring a servants. 1891. oil on canvas. Perm State Arts Gallery (Russian Federation - Perm)
Hiring a servants. 1891.
Morning tea. 1891. oil on panel. Private collection.
Over the chips. 1892. oil on canvas. Kursk Deineka Picture Gallery (Russian Federation - Kursk)
His First Suit,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92. oil on canvas, Arkhangelsk Regional Museum of Fine Arts (Russian Federation - Arkhangelsk)
At the porter's room. 1893. oil on canvas. Taganrog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Taganrog)
Two sisters. 1893.
A portrait of Dmitry Rovinsky. 189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Jesus Christ. 189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mateur Artist Working en Plein Air. 1896. Watercolor. Private collection
[영상] Vladimir Makovsky (1846 - 1920) Realism Russian
Vassily Maximov. portrait by Ivan Kramskoi. 1878. 막시모프의 초상화. 이반 크람스코이 작.
바실리 막시모프 (Vassily Maximovich Maximov. 1844-1911) 막시모프는 농가에서 태어나 일찍 고아가 되어 이콘제작소에서 일하며 그림을 처음 배웠다. 19살에 황립예술학교 입학, 1864년 "아픈 아이"를 그려 재학생 금메달 수상. 3년의 학교를 마친 1865년, 크람스코이가 이끌었던 14명의 학생처럼, 막시모프는 학교의 메이저 금메달 경연대회에 불참한다. 막시모프는 이 금메달의 부상으로 가는 유럽 유학보다는 러시아 농촌에서 그림공부하는 쪽이 낫다 생각했다. 그는 슈비노 마을로 이주하여 귀족 자제에게 그림지도를 하며, 농촌의 삶을 그렸다.
에칭화로만 남아 있는 "Sick Child." 1864.
이 그림은 막시모프가 그리기 전 해에 고향을 찾아 누나의 10살짜리 딸이 병으로 급사한 개인사를 그린 것이다. 아직 황립예술학교 학생일 때라, 농부의 침대를 마치 귀족의 휘장처럼 담요로 둘러댄 것이 바로 아카데미의 미술 기준의 영향이다. 그 결과 농촌의 실제 삶의 분위기가 흐려졌다는 것. 이런 기득권의 미적가치 강요를 거부한 게 "Peredvizhniki 이동파" 운동이다.
Grandmother's tales.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1867. Tretyakov Gallery.
우리에게도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 얘기를 화롯가에서 듣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다. 막시모프는 1867년 "이동파"의 전시에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Grandmother's tales)를 내어 입상하고 파벨 트레치코프가 구입한다.
1872년 "이동파" 회원이 된 후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주요 화가이다. 일리아 레핀은 막시모프를 가리켜, "이동파' 모임에서 가장 부서지지 않을 기반석"이라 평하기도. 1900년 전후로 러시아 사실주의는 쇠퇴했는데도 막시노프는 여전히 농부의 삶만 그려서 그림 구매자가 없었고, 따라서 그의 말년은 가난과 질병의 삶이었다. 상트 페테르스부그에서 사망했다.
Everything is in the past. 모든게 지난 과거. 1889. oil on canvas. 72 × 93.5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겨울의 차가움을 끝내고 봄의 화사함을 즐기는 두 노인. 귀족과 하인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뒤로하고 함께 차를 마시는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을 피붙이처럼 보내며 세속의 어떤 구속도 뛰어넘는 삶을 견디고 있다.
소파에 몸을 기댄 할머니의 표정이 아련하다. 땅 바닥인데도 발 받침을 깔아 놓았고 테이블 위에는 고급 그릇들이 놓여 있다. 한 때 아주 부유했던 모양이다. 그 옆의 노인은 시중을 드는 역할인 것 같은데, 두 여인의 표정이 대조가 된다. 소파에 앉은 여인은 하늘을 보고 있고 계단에 앉은 여인은 땅을 보고 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바로 앞의 것을 볼 수가 없다.
예전에는 꽤 근사했을 집이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으로 햇빛 아래 서 있는데, 할머니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모든 과거는 소중한 것이지만 지금 내가 당당하게 땅을 밟고 있을 때 더 빛이 나는 법이다.
1872년, 막시모프는 이동파의 멤버가 되었고
가입하자 마자 곧 이동파의 중요한 그리고 열성적인 멤버가 된다.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이동파의 취지가 맞았으니 흥이 날 수밖에 없었겠다. 막시모프의 작품에는 러시아 농민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이야기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처럼 다가 오기도 한다.
Everything is in the past. 부분.
허공을 바라보는 노파의 시선엔 그리움이 가득하다. 찬란하게 빛나던 젊음의 시간 속에 인생의 굽이마다 널려 있던 아련한 사연을 떠올린다. 그런 그녀를 위해 햇살은 아름다운 교향곡을 울려준다.
나이 들고 병들어 육신의 계절은 차디찬 겨울이지만 과거에 두고 온 젊음을 떠올리며 이렇게 또 하루를 견딘다. 노파는 보라색 라일락이 만개한 화려한 계절을 따라 타임머신을 타고 있다. 과거를 아련히 떠올리는 표정엔 만감이 교차한다.
Everything is in the past. 부분.
묵묵히 바느질하고 있는 여인은 하녀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무채색으로 이뤄진 그녀. 지금의 밝은 햇살이 고마울 따름이지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을 봄날은 없다. 오히려 머리맡에 앉아 뜨개질 하던 지난 과거를 지우고 싶은 듯하다.
세월의 눈이 하얗게 내려 앉은 그들은 하나의 사모바르 (러시아 차주전자)에서 차를 따라서 함께 마신다. 신분의 고하를 떠나 두 노인은 이미 서로를 의지하는 친구가 되었다. 험난했던 인생의 골짜기 굽이굽이 마다 함께 견뎠을 그들이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내려 앉는 것, 평생을 함께 해온 인생의 동반자로서 이 순리에 순응하며 끝까지 생을 함께 할 것이다. 반상의 차이는 물리치고 인간으로서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갈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조용히 가르친다.
이 한편의 그림에서 그들이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며 현재를 읽으며 그리고 함께할 미래를 가늠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의 삶도 그들과 함께 그림 속에 투영된다. “그렇게 우린 그림에서 인생을 배우고, 삶을 느낀다.”
The sick husband, 병든 남편. 1881. oil on canvas. 70.8 x 88.6cm.
그림 속 병상에 누워 있던 남자는 이제 더 이상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 남편을 보살피던 여인은 털썩 무릎을 꿇고 그녀가 섬기는 신에게 하소연한다. 그를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최선을 다했는데 꼭 그를 데려가야 하는가에 대한 절규인지...
그림에서 처럼 보통 러시아 가정은 집안의 가장 성스러운 곳에 이콘을 걸어놓고 기도를 올린다. 그래서 러시아 일반 가정집에 초대 받았다면 집안 어디에 이콘이 걸려있는지 살펴보고 기본적인 예를 갖추는 것이 좋다.
아내는 이콘화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바로 옆 침대에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고 병이 들어 누워 있는 남편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치마 밑으로 살짝 보이는 그녀의 맨발과 침대 아래 놓인 남편의 쓰러진 신발이 애처롭다.
남편이 누워 있는 침대도 나무 위에 짚을 깔고 모포를 그 위에 깐 것이다. 가난한 생활에 남편까지 병들었으니 이 부부의 앞날이 그을린 마루 바닥 같은 색일까? 그런데 울어 본 사람은 알지만 눈물만큼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도 많지 않다. 눈물은 절망의 가장 밑 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빛을 막기 위해 창에 걸어 놓은 천도 이제 곧 내리게 될 게다.
막시모프는 상페테르부르크에서 140km 정도 떨어진 노바야 라도가 근처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농부였는데, 어려서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가 수도원에서 공부를 끝내고 이콘 화가의 견습생 일을 시작한 것이 열 한 살 때였으니까, 부모를 여읜 것은 그 이전이나 그 언저리쯤의 나이가 아닐까 싶다.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나는 부모의 마음만큼 절절한 것이 또 있을까?
A Sorcerer comes to a peasant wedding. 1875년. oil on canvas. 116 × 188cm.
농민의 결혼식에 나타난 주술사. 장면은 겨울 해질 무렵 노브고로드의 한 농가의 방이다. 결혼 축하연이 벌어지고, 성스런 이콘 아래 신랑 신부가 자리잡고 있다.
돌연 눈을 잔뜩 뒤집어 쓴 주술사가 방으로 들어온다. 초대받지 못한 것에 대해 심술이라도 난 듯 주술사의 이미지가 뾰로통하다. 부모님은 빵과 소금을 들고 황급히 주술사를 맞이하고, 신랑 신부는 놀란 듯 일어선다. 사람들은 소곤거리기도 걱정스런 눈 빛을 보내기도 한다.
키가 아주 큰 주술사는 손에 목발을 짚고 마을 주민들을 쏘아본다. 그러자 그들은 돈주머니로 손을 옮기고 있다. 모두가 주술사가 어떤 말을 쏟아낼 지 긴장한 듯 보인다. 마치 연극 무대의 한 장면처럼 마을 사람들에겐 빛을 주고 주술사가 서 있는 쪽은 어둠에 묻어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농민의 결혼식에 나타난 주술사>에서 주술사 부분.
<농민의 결혼식에 나타난 주술사>에서 신랑 신부 가족들 부분.
In the Rye Field. 호밀 밭에서. 1903. oil on canvas.
호밀을 수확하는 노인 앞에 들꽃이 어지럽다. 풍성하게 보여야 할 수확철의 호밀 밭이지만 하늘이 무겁게 내려 앉은 탓일까? 혼자 있는 노인이 외로워 보인다. 마치 수 많은 난관을 헤치고 길을 만드는 모습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리 저리 제멋대로 서 있는 호밀 때문일 수도 있다.
조금은 힘들어 보이는 노인의 표정에서 긴 인생의 길도 저렇게 뚫고 왔겠구나 싶다. 그래도 그렇게 거둬 들인 호밀로 한 해를 버틸 수 있으니까 보람되겠다. 할아버지, 함내세요~!!
막시모프는 예순 일곱의 나이로 상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난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농촌의 슬픔’을 담고 싶었다던 그의 작품은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The Future Artist. 미래의 화가. 1899. The Future Artist.
흰 벽에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보인다. 한바탕 야단을 쳐야 할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아주 뛰어난 솜씨로 인물들이 묘사되고 있다. 일단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잘하면 작은 벽화 한 점이 탄생할 것 같다.
막시모프의 삶이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20년 전부터, 그는 가난과 건강 악화로 아주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러시아에서도 사실주의 작품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감소한다. 때문에 그의 작품을 구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이 그리고자 했던 주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The Division of the Family Property, 가족 재산의 분할. 1876. Tretyakov Gallery.
뭔가 평화롭지 않고 심상치 않은 긴장이 비치는 그림이다. '재산분할'이라는 그림 제목처럼 가족끼리 재산 분배를 하는 장면인데.. 테이블 쪽에 앉아 있는 노인들이 부부처럼 보이는 젊은이들과 언성을 높여 언쟁을 하고, 젊은 남자는 자기 몫이 적다고 항의하는 듯한 그림이다.
A Little Mechanic. 어린 기술자. 1871. oil on canvas.
톱니 바퀴를 만들어 끼운 다음 조심스럽게 돌려 보는 아들을 부모가 조용히 지켜 보고 있다. 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그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는 방금 들어 온 모습이다. 아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신이 만든 기계에 빠져 들었다. 대견하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도 좋지만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아버지의 눈빛도 재미있다.
자신보다는 자식의 삶이 더 좋기를 바라는 것은 세상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일 거다. 문제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아이의 삶을 보장한다고 부모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아이의 미래를 계획하곤 한다.
지금 아버지의 머리 속이 복잡한 것 같다. 이콘 화가의 견습생이 된 막시모프는 처음으로 미술에 대해 배우게 된다. 7년간 견습생으로 일하던 막시모프는 열 아홉이 되던 해, 상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일 때도 막시모프는 몇 개의 은메달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그의 재능이 동료들 사이에서도 탁월했다는 뜻이겠다.
Sad News from the Front. 전장에서 온 슬픈 소식. oil on canvas.
전장에서 돌아온 지휘관은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았다.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린 그의 표정에서 가족들은 그가 가져온 소식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는 눈치다. 어머니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맞잡아 보지만 체념한 표정이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돌처럼 굳었다. 무표정한 그녀의 표정에서 극도의 절망감이 보인다. 생각해보면 총알만 없을 뿐이지 오늘도 우리는 매일 전장에 선다. 살기 위해 전장에 나가야만 하는 아이러니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우리는 매일 집으로 살아 돌아가야 한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다음 해, 막시모프는 예술가 조합에 가입한다. 조합은 화가도 농부처럼 ‘일과 삶의 결합’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했는데, 1년만에 해산하게 되고 나중에 이 멤버들이 이동파의 주축이 된다. 평생 농민들의 삶에 집중하고자 했던 막시모프의 결심은 이 때부터 싹이 튼 것 아니었을까?
Who is there? 거기 누구세요? 1879. oil on canvas.
아직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깊은 밤, 밖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룻바닥에 놓여 있는 것은 작은 몽둥이 같은데, 여인은 그것보다는 톱을 들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것이 좀 더 효과적이겠다.
거기 누구세요? 여인 옆에 선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두려움의 크기만큼 커졌다. 두려움의 원인은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거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두려움이라는 것마저 잊어 버린 것일까?
1864년에 아카데미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막시모프는 다음 해에는 경선 대회 참가를 포기하는데, 이동파의 주창자였던 크람스코이의 운동에 동참한 것이었다. 경선에서 우승하면 외국 유학이 보장되는 것이었지만, 그는 ‘나는 외국 유학보다는 러시아, 러시아 농촌을 더 공부해야 한다’라는 이유를 내걸고 경선에 나가지 않았다. 그의 실력을 감안하면 대단한 각오였다.
The Blind Man. 장님. 1884. oil on canvas.
아이가 칭얼거리자 바구니를 짜던 아버지는 아이를 끌어 안고 음식을 먹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와 아버지의 시선은 엇갈려 있다. 아버지는 장님이다.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진 갈대 조각들처럼 아버지의 삶도 어지러웠겠다. 이콘화 앞에 앉은 그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다.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 대한 헌사일까? 하긴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뜬 장님들이 많은 요즘이다.
3년만에 아카데미 과정을 끝낸 막시모프는 실제로 학교를 떠나 슈비노라는 작은 시골 마을의 미술 교사로 일하기 위해 ‘도시’를 떠난다. 젊어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막시모프를 보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람이 떠 오른다. 그는 화가가 아니었으면 어쩌면 혁명가가 될 수도 있었겠다 싶다.
The Dead Wife, 죽은 아내. 1896. oil on canvas.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비록 예고된 것이었지만 마지막 이별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일 게다. 깨끗하게 깐 짚 위에 평생을 함께 했던 아내를 눕히고 흰 천으로 그녀를 덮었다. 물끄러미 흰 천으로 덮인 아내를 보는 남편의 눈이 가늘어졌다. 굵은 두 손을 무릎에 나란히 올려 놓고 끝없이 밀려 올라오는 눈물을 온 몸으로 참고 있다.
시골 마을의 미술교사로 부임하던 해, 볼가강을 여행한 막시모프는 생생하게 시골 사람들의 인상을 많은 작품을 통해 담는다. 그리고 이즈음 도시의 삶을 버리고 시골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로 한 것 같다. 이후 막시모프는 러시아 이 곳 저 곳을 여행한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풍속화가로, 풍경화가와 초상화가 그리고 목판화가와 에칭화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Girl. 1866.
농민 출신인 바실리 막시모프 (Vasily Maximov)는 평범한 러시아 농사의 삶을 묘사하는 데 전 생애를 바쳤다. 초상화는 작가의 아트 갤러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노인과 노인, 여성과 남성, 특히 마을 어린이의 이미지가 있다.
그림 “소녀”는 1866년에 예술 아카데미를 떠나 Shubino에 살 때 그렸다. 여기에서 그는 농민의 삶을 관찰하고 손을 채우고 작가의 스타일을 완성한다. 이때, "살아 있는"사람들을 끌어 들이기로 결정했다.
농민 소녀의 이미지를 만들 때 작가의 경험이 느껴지지 않는다. 엄선 된 색상, 선, 디테일, 빛과 그림자의 위치 등 모든 것이 작가의 이 이미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말해 준다. 우리는 지적이고 현명한 소녀의 얼굴, 나이가 없는 성인을 본다. 사실, 그녀는 여전히 아이지만 얼굴을 표현할 때 유치하지 않다. 반대로, 피로, 시련, 일과 일상 생활의 부담이 있다.
특히 소녀의 큰 눈이 부풀어 오른 표정이다. 아이의 시선은 지능적이고 진지하며 사려 깊다. 그림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있다.
당신이 소녀를 볼 때, 당신은 그녀가 방에서 당신과 함께 앉아 있고 당신이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듣고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당신보다 인생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말을 다소 교묘하게 인식한다.
진지함, 표정의 집중력, 통통한 입술에 미소가 없음은 십대의 염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우리는 소녀의 손을 보지 못하지만, 그녀가 노는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초상화에서 예술가는 소녀의 생생한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The reading lesson. 글공부. 1865.
Following Their Elders' Example, 어른들 따라하기. 1864. Irkutsk Regional Art Museum.
Peasant hut, 농부의 오두막. 1869.
Sewing of the Dowry, 혼수감 바느질. 1866. Tretyakov Gallery.
Dream of the future. 미래의 꿈. 1868.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Motherhood. 어머니. 1871.
Interior view of the hut. 오두막 실내. 1869. State Fine Arts Museum of the Republic of Kazakhstan.
Preparing for Festivities. 잔치 준비. 1869. State Fine Arts Museum of the Republic of Kazakhstan
트레티야코프 집 정원. 1877.
Poor Dinner 가난한 저녁식사. 1879.
Auction for the arrears. 체납금에 대한 경매. 1880-1881.
Old man. 노인. 1881. Vasily Maksimov 작품이라 인정됨. Tretyakov Gallery
Une mireuse d'oeufs, 촛불에 비추어 달걀이 신선한가 살피는 사람. 1882.
Farm girl. 농촌 소녀. 1883.
The Diploma. 학위 증서.
Trying on a Robe, 옷 가봉하기. 1878. Vyatka Art Museum.
Girl with a book. 책과 소녀.
At the Monastery Gate. 수도원 문에서.
Old Woman in the Field. 들판의 노파. 1891.
Likha in-law. 1893.
The Forest Keeper, 삼림지기. 1893.
Old woman in a snowstorm. 눈폭풍 속의 노파. 1896-7.
After Mass. 미사 후에.
View of the City of Rybinsk. 리빈스크 시의 전경. 1886.
Portrait of an Old Man, Vassily Maximov.
Russian peasant woman. 1896.
Outdoor Camping. 1869.
Peasant girl. 1865.
Red corner in the hut. 1869.
In the rooms.
Portrait of a Pensive Girl.
Portrait of a thoughtful girl. 1880.
Heard. 1864.
Inside view of the cottage. 1869.
Old peasant.
The head of a peasant.
Self-portrait and portraits of friends. 1864.
Man portrait.
Male portrait. 1888.
Jeune porteuse d'eau, 1878. oil on canvas. 29.5 x 20 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