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of Vasily Polenov, by the Artist Ilya Repin. oil on canvas. 80 × 6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이 바실리 폴레노프 초상화는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 (Ilya Repin)의 작품이다.
러시아의 풍경화가 바실리 폴레노프(Vasiliy Polenov 1844-1927)는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아마추어 화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린시절부터 미술환경에서 자랐다.
폴레노프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변호사 자격증도 땄지만 화가의 길을 선택한다.
8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폴레노프는 공화국 인민화가의 칭호를 받는다.
바실리 폴레노프는 러시아의 역사화가, 풍경화가, 풍속화가이며 교육자였다.
폴레노프는 페테르부르크의 교양 있는 다자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고고학자였고, 어머니는 아동문학 작가이자 화가였다.
1861∼1863년까지 폴레노프는 올로네츠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고
1863년에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물리수학학부에 입학했다.
저녁에는 청강생 자격으로 페테르부르크예술아카데미에 다니면서 회화뿐만 아니라
해부학, 건축예술, 화법기하학, 예술사 등을 수강했다.
또한 오페라 극장과 콘서트 극장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였으며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고,
자신이 직접 예술아카데미 학생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음악곡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 후 대학교를 휴학하고 예술아카데미에서 미술에만 전념하다가
1868년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부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1869년 〈욥과 그 친구들〉로 작은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1871년 〈야이로의 딸을 살려낸 그리스도〉로 레핀과 함께 금메달을 땄다.
1872년 법학부와 예술아카데미를 동시에 졸업하고 아카데미 장학생으로
빈, 뮌헨, 베니스, 플로렌스, 나폴리, 파리 등 해외를 여행하면서 많은 창작을 하게 된다.
1876년 러시아로 귀국하여 무대장식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882∼1895년에는 모스크바회화조각건축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I. 레비탄, C. 코로빈, I. 오스트로우호프, A. 아르히포프, A. 골로빈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Portrait of the Artist Ilya Repin. by the Artist Vasily Polenov. 1879.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아 레핀 (Ilya Repin)의 초상화로 바실리 폴레노프 작품이다.
바실리 폴레노프 역시 이동파의 멤버였다.
그리고 프랑스의 외광파 기법을 러시아에 최초로 소개한 선구자였다.
외광파는 실내 광선이 아닌 태양 광선에 비추어진 자연의 밝은 색채 효과를 재현하기 위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 화파를 총칭한다.
1879년부터 ‘이동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887년 대표작 〈간음한 여인과 예수〉를 제15회 이동파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1910∼1918년에는 민중 계몽활동에 참여하여 민중극장 창립에도 참여하였으며
1924년 탄생 80주년을 기념하여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27년 툴스카야 주의 자신의 영지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Portrait of Isaac Levitan by Vasily Polenov.
이삭 레비탄(Isaac Levitan) 초상화. 바실리 폴레노프 작품.
초야권 primae noctus, 1874. oil on canvas. 120 X 17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폴레노프는 이태리, 프랑스의 역사적 주제를 담은 그림을 다수 그렸다.
'나리의 권리, 초야권'라는 작품은 나리에게 세 농노 처녀를 데리고 와서 선보이는 모습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유럽이지만 러시아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가는 그때까지도 농노 처녀들의 초야권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 귀족의 모습도 비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귀족들은 농노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사랑의 대상은 더더욱이 아니었다.
러시아 감상주의는 진보적인 귀족 계급 문화의 한 현상으로,
18세기 후반 문학 및 예술 속에서 계몽주의적인 이성 우월주의의 위기로 인해 형성된 흐름이었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분출과 완성, 개인의 ‘감수성’을 맹목적으로 숭배하였고,
사회보다는 한 개인이 문학적인 지각의 중심에 들어서게 되었다.
인간의 내면세계는 물론 인간 주위의 자연 세계도 파헤쳐 보이려는 특징을 가진다.
감상주의의 특징적 대비로는, 순결한 자연, 비도덕적 문명, 전원의 한적한 생활,
번잡한 도회지 생활, 꾸밈없는 자연 그대로의 시, 이성적인 시 등이다.
또한 감상주의적 경향에서는 민중의 정신적인 특성, 민족적인 서사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된다.
계몽주의 시대에 발전했던 개방성, 사회적 기호와 자유로운 여론, 개성과 독립성을 존중하는 개별 인간의
고양된 가치에 의존하였지만, 사회적인 인간의 구체적인 성격을 밝혀내지 못했고,
인간을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묘사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소작농이 소작세를 갚지 못했나 보다.
이제 갓 피어 난 듯 싱그러운 소녀들이 지주에게 제물로 바쳐진다.
지주는 음흉한 표정으로 소녀들을 훑어 보고 있다.
그런 주인의 마음을 대변이나 하듯 지주의 사냥개들조차도 거만함이 묻어난다.
성문 입구에서 안타깝게 가로막힌 채 절망하는 아빠의 애틋함이 그림 한 쪽에서 강한 포인트가 되고 있다.
젊은 여자를 대동하고 노인이 영주를 보고자 찾아왔다.
한눈에 봐도 고약한 인상을 가진 영주는 허리에 손을 척하니 올리고
한 계단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불안한 눈으로 영주를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처녀의 눈빛은 겁에 질려 있다.
곧 결혼을 앞둔 처녀가 초야권을 영주에게 바치러 온 것이다.
중세 스위스에서는 남편이 아내 될 여자의 초야권을 갖기 위해서는 ‘초야세’라는
세금을 내야 했다는 기록도 있다는데, 지금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성직자나 그 지방의 영주가 그 권리를 행사하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권력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하는 습성이 있다.
어린 소녀의 가느다란 한숨소리, 음흉한 영주의 웃음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고
하루를 마감하는 해는 건물의 흰 벽에 불안한 붉은 그림자를 남기고 넘어가는 중이다.
그건 그렇고 눈에 거슬리는 개 두 마리.
왜 권력자들은 개를 데리고 나타나는 모습이 많을까? 하는 짓이 개와 닮아서 그런가?
폴레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높은 계급의 장교였고 한편으로는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미술을 좋아하는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이런 부모의 재능은
두 사람 사이의 아이들이 미술과 과학을 좋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Granny's Orchard. 할머니의 정원. 1878. oil on canvas. 54.7 x 65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그림 속 정원은 잡초가 무성히 자라 있고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어쩌면 버려진 듯한 느낌을 준다.
할머니 혼자 사는 대저택 같은데 늙은 노인이 손보고 가꾸기는 너무 커 보인다.
이미 연로한 할머니는 사실 누구의 도움 없이 산책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도시에 사는 손녀가 이렇게 찾아 와 따뜻한 햇빛을 선사해 주지 않는다면 할머니는 출입조차 힘들 것이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않는 저택의 정원처럼 할머니의 삶도 외롭고 또 외롭다.
할머니의 남은 인생과 내버려진 정원. 이 또한 얼마나 절묘한 비유한가.
이제는 허리가 구부정해져 지팡이와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하는 할머니가 정원 산책을 나섰다.
뒤로 보이는 건물도 할머니만큼의 나이를 먹었겠다.
어쩌면 훨씬 그 이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원의 나무와 꽃들은 여름의 햇빛 아래 푸르름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 길을 걷는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무수한 상념이 떠오르겠다.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나만 늙어가는 것일까?
분홍색 옷을 입은 젊은 여인에 비해 할머니가 입고 있는 검은색 옷은
이제는 되돌아갈 시간이 없음을 알려주는 징표 같아서 마음이 언짢아진다.
열두 살부터 체계적으로 드로잉을 배운 폴레노프는
3년 뒤 풍경화가인 치스타코프에게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다.
1863년 열아홉의 폴레노프는 법률을 전공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하는데 왕립 아카데미에도 입학을 한다.
법학과 미술을 같이 전공하기로 한 것이다.
성격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분야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폴레노프는 해내고 만다.
폴레노프는 러시아-터키 전쟁의 (1877-1878) 종군 화가를 지내고 돌아온 후
Peredvizhniki (이동파)에 참여했고, 파벨 트레치코는 그의 그림을 좋아하여 다수 구입했다.
그는 사실적인 풍경화에 집중하며 사람의 일상과 관련된 러시아 자연의 시적 정적감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폴레노프는 외광파의 생생한 색채를 예술적 구성 처리와 결합시킨 러시아 최초의 화가 중 일인이다.
그가 발전시킨 원칙은 훗날 소비에트의 풍경화 발달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폴레노프는 1893년 셍페테르스부그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고,
1926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인민화가로 지명됐다.
그는 모스크바 미술, 조각, 건축학교에서 가르쳤고, 아르히코프, 리비탄 등이 제자였다.
폴레노프가 살던 집은 국립박물관으로 되었고,
그가 살던 마을은 '폴레노포'라고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27년 83세로 사망.
Overgrown Pond, 숲이 무성한 연못. 1879.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어딘가 낯이 익은 풍경이다.
수련이 떠 있는 연못, 작은 선착장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고
우거진 숲의 품에 안긴 듯한 벤치가 보인다.
숨은 듯 만 듯한 여인은 벤치에 앉아 책을 펼쳤다. 고요하고 싱그럽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한, 언젠가 본 듯한 풍경화를 ‘무드 풍경화’라고 한다.
흰 들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는 길은 여인이 앉아 있는 곳으로 이어졌다.
조명을 흐리게 하고 음악이 있다고 해서 ‘무드’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괜찮다면 연못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1871년 스물일곱의 폴레노프는 변호사 자격증을 따며 대학을 졸업한다.
또한 왕립 아카데미에서는 ‘야이로 딸을 일으키심’이란 작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한다.
이렇게 되자 폴레노프의 고민이 시작된다.
금메달에 대한 부상은 유럽 여행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었다.
몇 달을 고민한 폴레노프는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하느님도 편애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On the boat. Abramtsevo. 아브람체보에서 보트를 타고. 1880. oil on canvas.
키예프 주립 러시아 미술관.
앞 작품 속 여인일까?
녹색의 한가운데를 흘러가고 있는 여인에게 마치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듯하다.
도드라져 보이지만 보트의 색과 주변의 수련으로 점차 엷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여름 한철 조금씩 흔들리는 배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다 싶다.
아브람체보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철도왕’ 사바 마몬토프의 집이 있는 곳이다.
당시 마몬토프는 러시아의 젊은 화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하던 사람이었다.
때문에 화가들이 자주 모이던 곳이었다.
그들 중 잠시 머문 화가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눌러앉기도 했다.
‘아브람체보파’가 형성될 정도였다.
1년간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폴레노프는 수많은 스케치와 드로잉을 제작한다.
그 후 파리에 정착, 4년간을 머무는데 이 기간 동안 폴레노프는
역사화와 풍속화,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제작한다.
그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가장 감명을 받았던 것은 야외에서 작업하는 프랑스 화가들의 모습이었다.
특히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작품에 매료되었는데, 폴레노프가 풍경화에 마음이 기운 계기가 되었다.
Old Mill. 오래된 물방앗간. 1880. oil on canvas. 세르푸호프 역사미술관.
숲속 물방앗간이 한여름을 나고 있다.
방앗간 벽에는 군데군데 지나온 세월의 흔적들이 머물고 있다.
한때는 힘차게 수레가 돌아갔고 사람들 소리로 소란했겠지만
이제는 줄어든 물의 양으로 물레방아는 움직임을 멈췄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숲들이 조금씩 대신하고 있다.
낚싯대를 물에 드리우고 있는 소년이 보인다.
방앗간은 움직임의 상징이지만 낚시는 고요함이 우선되어야 한다.
아이가 커서 세상으로 나가고 나면 물방앗간, 저만 혼자 외롭겠다.
이때부터 폴레노프의 작품 속에는 두 가지 요소가 나타난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받은 고전교육과 아카데미에서 배운 기법은
그를 고상한 역사화를 그리는 길로 이끌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풍경화였다.
결국 이 두 가지 요소가 오랜 기간 동안 그의 작품 속에 혼재되어 나타나는데,
1880년대 후반 그러니까 30대 후반부터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The Burnt Forest. 불타버린 숲. 1881. oil on canvas. 89.7cm x 170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예전에는 화전을 일구던 사람들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계층이었다.
그림 속 숲은 화전의 모습은 아니다. 자연 발화로 타버린 숲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화마가 훑었던 지역이었지만 자연은 다시 생명력을 회복했다.
검게 그을렸던 땅에는 풀들이 자라기 시작했고 사이사이 나물들도 자리를 잡았다.
무너지지 않는 생명력, 그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큰 가르침이다.
나물을 향해 뻗은 여인의 손과 등에서 끝나지 않은 인간의 생명력을 보게 된다.
5년 간의 외국 여행을 끝내고 서른둘의 폴레노프는 러시아로 귀국한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터키에 대한 독립을 주장하고 나서자
터키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는
범슬라브족을 보호한다는 이름 아래 터키를 침공하는 러시아-터키 전쟁이 일어난다.
폴레노프는 이 전쟁에 종군화가로 참여한다.
Moscow Backyard. 모스크바 뒷마당. 1878. oil on canvas. 80.1 x 64.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폴레노프의 유명한 1878년 그림 "러시아의 전형적인 안마당" 이다.
폴레노프는 상트 페테르스부르그 태생으로 1863-1871년 황립예술학교에서 공부했다.
동급생으로 이동파 미술가이자 유명한 사진사였던 라파일 레비츠키와 막역지우였다.
그들의 서간문은 폴레노프 저택 갤러리에 보관중으로 당대 미술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폴레노프와 레비츠키는 둘 다 독신일 때 처녀의 들판이란 뜻의 "Devich'e Pole"
거리에 있는 집의 다락방에서 함께 살았는데, 훗날 레비츠키가 이 집의 여주인과 결혼하였다.
밝은 햇살, 푸른 하늘, 깨끗한 공기, 세상에서 제일 환하고
평온한 모습을 표현한 듯한 그림 속 지역은 19세기 말엽 모스크바의 모습이다.
<모스크바의 정원>은 19세기 모스크바 스타르이 아르바트 정경을 그대로 담아 놓았다.
지금도 모스크바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붉은 광장과 함께 꼭 들르는 관광 명소로
현재는 빌딩 숲이 우거진 대도시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19세기에는 그림과 같았다고 한다.
찬란한 태양 아래 밝게 빛나는 모스크바 정원의 새파란 잔디 위에서 어린 아이들이 놀고 있다.
그렇게 펼쳐지는 평온함과 건강한 생명력이 그림의 핵심이다.
이 그림은 19세기 모스크바를 재현한 것이기 때문에 모스크바 도시 행사의 카탈로그 표지나
국가적 차원에서 모스크바를 보여주어야 하는 책자같은 것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그림이기도 하다.
모스크바 시 성립 850주년 기념행사 포스터에도 이 작품이 대표 그림으로 사용되었다.
Moscow Courtyard.
멀리 보이는 교회의 건물들도 말쑥한 모습이지만
모스크바의 뒷마당에도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다.
닭의 모이를 주러 나온 아주머니, 풀밭에서 혼자 우는 아이,
놀기에 바빠 동생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는 신이 난 아이들, 모두 우리 사는 모습이다.
근사하고 멋진 교회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지만
세월을 이겨내고 있는 낡은 집은 땅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다.
햇빛 가득한 마당 위로 폴레노프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부르는 찬가가 흐르고 있다.
다음 해 전쟁이 끝나고 귀국한 폴레노프는 왕립 아카데미 시절부터
교류를 맺고 있던 화가들과 함께 이동파 전시회에 참가한다.
이때 출품한 ‘모스크바 뒷마당’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풍경에
서정을 듬뿍 담아 외광파 기법을 이용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외광파 기법이 러시아 최초로 소개되는 순간이었다.
On the Tiberiad Lake, 타이비어리드 호숫가. 1888.
이스라엘 북부 골란 고원 아래에 있는, 요즘 이름으로는 타이비어리어스 호수이다.
주변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의 모습이 많이 익숙하다.
폴레노프가 예수님과 관련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림 속 인물은 예수님을 상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제우스의 모습에서 가져와 조금씩 변형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유대 지방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모습은 그림 속 남자의 모습과 많이 닮지 않았을까 싶다.
길옆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있다.
길은 그 사이로 이어지겠지만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도 돌이 많은 길인 것은 분명하다.
‘타이비어리어스’는 영어 Tiberias의 발음을 그대로 적은 것 같다.
우리말 표기로는 ‘티베리아스’ 또는 ‘티베리우스’라 적어야 할 것 같다.
히브리어로는 ‘티베랴’. 본래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갈릴리 호수 서안에 있던 마을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로마 2대 황제 티베리우스에서 따왔다.
그러니까 타이비어리어스 호수는 곧 갈릴리 호수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때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폴레노프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깨끗하고 밝은 색, 색깔이 있는 그림자,
자유로운 붓 터치와 같은 기법을 소개했고 이 무렵부터 러시아 회화의 전통에 따라
사실적인 풍경화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풍경화를 통해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과 어우러진 러시아의 시적인 풍경들 전하고 싶어 했다.
그의 기법은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풍경화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00년 경, oil on canvas. 20.8 x 31.3cm, 볼로그다 시립미술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러시아의 인민화가 바실리 폴레노프(Vasiliy Polenov, 1844-1927)는
러시아 장성이자 고고학자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변호사 자격증을 땄지만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스와 중동을 여행하며 다양한 화풍에 접했고,
역사화, 풍속화, 풍경화, 초상화 등 다양한 작품을 그렸으며,
유럽의 풍경미술이론을 러시아에 최초로 소개시킨 인물로,
훗날 모스크바 미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888-1909년에 팔레스타인을 두 번이나 방문한 그는 예수님의 생애 연작을 60여 점이나 그렸고,
이스라엘 성지의 평화로운 풍경과 성지의 건축물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그렸으며,
사실주의에 입각한 그의 표현기법은 독특하였고,
그의 작품구성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예술을 통한 민중 계몽에 역점을 두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생애 연작 중 하나로
마태복음 16,13-20; 마가복음 8,27-30; 누가복음 9,18-21이 그 배경이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지리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갈릴래아에서의 활동기이고,
후반부는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졌으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면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묻는 것이 분기점이 된다.
그리고 화가는 이스라엘 성지를 다녀온 사람처럼
시냇물이 흐르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의 풍경을 배경으로 이 작품을 그렸다.
예수님께서는 돌다리가 있고 시냇물이 흐르는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손짓으로 당신을 가리키며 제자들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가 8,27)
이것은 공생활을 마감하며 예루살렘으로 가서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듣기 위한 질문이었다.
예수님 앞에는 제자 세 명이 앉아 있다.
한 제자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고,
다른 제자는 “엘리야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으며,
또 어떤 제자는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과소평가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가 8,29)
아마도 세 제자 중에서 가운데에 앉아 있는 제자가 베드로일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눈이 마주쳤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고 있다.
예수님의 신성은 수난과 죽음을 겪은 후에야 들어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도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일 때에야 빛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마가 8,34-35)
Christ and the woman taken in adultery.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188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복음 8:1~11)
1881년부터 다음 해까지 폴레노프는 독일과 중동 여행길에 오른다.
이미 러시아 최고의 풍경화가라는 이름을 얻은 그는 그가 좋아하는 풍경과
신약성서의 내용을 합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특히 성경 속 풍경을 연구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지방을 두번이나 방문해서
그곳의 풍경과 건축, 사람들을 연구했다.
당대 러시아 화가 중 가장 많은 해외 여행을 한 화가라는 말이 붙었는데,
현장을 중요시하는 사람에게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1861∼1863년까지 폴레노프는 올로네츠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고
1863년에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물리수학학부에 입학했다.
저녁에는 청강생 자격으로 페테르부르크예술아카데미에 다니면서
회화뿐만 아니라 해부학, 건축예술, 화법기하학, 예술사 등을 수강했다.
또한 오페라 극장과 콘서트 극장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였으며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고,
자신이 직접 예술아카데미 학생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음악곡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 후 대학교를 휴학하고 예술아카데미에서 미술에만 전념하다가
1868년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부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He that is Without Sin. 죄 없는 사람. 1908. oil on canvas. 118 x 239 cm.
2011년 11월. 런던 본햄스(Bonhams)에서 $ 6,395,619 낙찰
2011년 11월 바실리 폴레노프의 희귀한 작품 '죄 없는 사람'과 '그는 죽을 죄를 지었다' 2점이
런던 본햄스에 출품되었는데 문제의 그림 2점은 거의 100년 만에 햇볕을 보게 된 작품이다.
1912년 대서양 깊숙히 가라앉은 타이타닉에 실려 있던 그림.
폴레노프가 20년 동안 예수의 생애를 그린 연작 그림 60점 시리즈에 속해 있던 작품이다.
'죄 없는 사람'은 성 요한의 복음 중 예수가 간통한 여인에게 내린 판결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너희 중 죄 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는 말을 한 순간을 담아 냈다.
'그는 죽을 죄를 지었다'는 예수가 고대 유대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에 입장하기 전 모습이 그려져 있다.
비극적인 사건을 품은 걸작답게 두 작품의 낙찰 금액 합계는 100억을 훌쩍 뛰어 넘었다.
Autumn in Abramtsevo, 아브람체보의 가을. 1890.
여름은 위대했다고 릴케는 노래했다.
위대한 이유는 다가올 계절에 대비해 생명력을 극에 이를 때까지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가을은 그 생명력이 몸 깊숙이 숨는 계절이다.
한여름 녹색 범벅이었던 숲에도 생명들이 깊은 곳으로 숨어들고 있다.
더러는 붉게 더러는 노랗게 숨고, 떠난 흔적을 나타내고 있는데
숲을 가득 안고 흐르는 물도 그만 숲을 닮아버렸다.
1882년 폴레노프는 모스크바 예술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제자로는 레비탄과 코로빈처럼 훗날 러시아 미술사의 큰 별이 되는 학생들이 있었다.
폴레노프가 러시아에서는 화가이자 훌륭한 스승이었던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폴레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의 회원이 된다.
Dreams (On the hill) 언덕 위에서의 꿈. 1894. oil on canvas.
꿈이 모이면 바람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理想)으로 자리를 잡는다.
광야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
약한 사람은 끝없이 약해지고 권력을 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권력을 잡는다.
설사 영혼을 악마에게 판다고 해도 그 자리를 지키고자 한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그림 속 젊은이는 30대 초반의 나이로 사형을 당한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이 역사 속에 한둘이었겠는가?
그래도 세상에 대한 그의 바람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시간은 지금까지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바위 위 젊은이는 오늘도 저렇게 앉아서 세상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다.
언제쯤 훌훌 털어버리고 크게 웃으며 저잣거리로 내려올 수 있을까.
그림뿐만 아니라 극장의 장식에도 폴레노프는 재능을 발휘해서
여러 극장의 개보수 작업에 참여하여 많은 성과를 이룬다.
그의 여동생 폴레노바도 화가였는데, 오랜 기간 명성을 얻은
최초의 러시아 여류화가였고 도자기, 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 진출해
성과를 이루었다고 하니까 타고난 피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Early Snow. 철이른 눈. 189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아직 잎들이 다 지지도 않았는데 눈이 내렸다.
지평선을 건너온 찬바람은 미처 떨어지지 못한 잎들을 흔들고 있고
아스라한 지평선은 파란색으로 남아 다가올 겨울을 더욱 차갑게 만들고 있다.
아직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다.
크게 휘어 나가는 강 위로 쌓인 눈은 조만간 강물도 덮을 기세이다.
겨울은 침묵해야 할 시간이다.
우리에게 침묵해야 할 시간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침묵 뒤에 오는 고요함은 다시 그 뒤를 이을 생명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되기에.
8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해에 폴레노프는 공화국 인민화가의 칭호를 받는다.
러시아의 풍경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그에게 어울리는 영예였겠다.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paziergangerin auf eneiem Waldweg, 숲길을 산책하는 여인. 1883. oil on canvas. 114.5 x 67.3 cm.
가을 속에서 여인이 걸어 나오는 것일까, 여인의 뒤를 가을이 따라오는 것일까?
프랑스나 이탈리아 화가들이 보기에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변방의 화가들’이 파리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만의 문화가 섞이면서
파리나 이탈리아 화가들과는 또 다른 맛을 주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Tretyakov Gallery Room 35
Downpour. 1874. oil on canvas. 120 x 17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ussian Village. 러시아의 마을. 1889. oil on canvas. 사라토프 미술관.
Sick Girl. 아픈 소녀. 188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Golden Autumn. 1893. oil on canvas. Museum-Estate of V. Polenov.
River Svinka near Aleksin. 1900s. oil on canvas.
River Klyazma. Zhukovka. 클리즈마 강. 1888. oil on canvas. 니지니 노브고로드 주립미술관.
He is Guilty of Death. 그는 죽을 죄를 지었다. 1906. oil on canvas. 113 x 220 cm.
2011년 11월. 런던 본햄스(Bonhams) $ 4,461,193 낙찰.
Egyptian Girl. 1876. oil on canvas. 88.5 x 118 cm.
2008년 11월 런던 소더비(Sotheby's) $ 1,585,207 낙찰
First Snow. 1892. oil on canvas. 71 x 142 cm.
2007년 11월 런던 소더비(Sotheby's) 1,480,129 낙찰.
The River Oyat. 1883. oil on canvas. 46 x 92 cm.
2008년 4월 뉴욕 소더비(Sotheby's) $ 1,385,000 낙찰
The Lookout. 망보는 사람. 1876. oil on canvas. 127 x 91 cm.
2012년 5월 런던 소더비(Sotheby's) GBP 481,250 ($ 754,552) 낙찰
Barge on the River Oka. 1897. oil on canvas. 40.5 x 65.5 cm.
2009년 6월 런던 소더비(Sotheby's) GBP 169,250 ($ 273,170) 낙찰.
The River Oka in Flood. 1918. oil on canvas. 45.3 x 93.5 cm.
2011년 6월 런던 크리스티(Christie's) £ 157,250 ($ 258,205) 낙찰
Forest Pathway. 1874. oil on canvas. 38 x 56 cm.
2011년 11월 런던 크리스티(Christie's) £ 109,250 ($ 169,119) 낙찰.
Christ by the Sea of Galilee. oil on canvas. 31 x 64.5 cm.
The River Oka in Golden Autumn. oil on canvas. 35.5 x 58.2 cm.
2012년 11월 런던 소더비(Sotheby's) GBP 99,650 ($ 159,898) 낙찰.
Fountain In The Environs Of The Village Brestovets. 1870s. 보드에 유채, 34 x 24 cm.
2008년 4월 뉴욕 소더비(Sotheby's) $ 121,000 낙찰.
From the window of the flat in Rome. 1895. oil on canvas. 22.3 x 12.5 cm.
2011년 11월 런던 크리스티(Christie's) £ 46,850 ($ 72,524) 낙찰.
The Garden of Eski Saray in Constantinople. 1882. Oil on canvasboard. 31 x 35.5 cm.
2011년 11월 런던 크리스티(Christie's) £ 37,250 ($ 57,663) 낙찰.
Caesarian Fun. 시저 식 여흥. 1879.
꽃다발. 1880.
The Birchwood Alley. 자작나무 숲길. 1880.
Imochentsy. 이모첸치의 겨울. 1880.
A yard. 뜰. 1881.
River Voria. 보리아 강. 1881.
게세마네 언덕의 올리브 나무. 1882.
Baalbek. Ruins Of Jupiter Cathedral And Cathedral Of Sun. 1882.
발벡에서. 쥬피터 신전과 태양 신전의 폐허.
Baalbek. Ruins Of Jupiter Cathedral And Cathedral Of Sun. 1882.
발벡에서. 쥬피터 신전과 태양 신전의 폐허.
Eski Sarayskiy Garden. 1882.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노플. 에스키 사라이스키 정원.
Erechtheion. The Portico Of Caryatids. 에레크테이온 신전.
Erechtheion. The Portico Of Caryatids. Detail.
Parthenon. Temple Of Athena. 아테나 판테온 신전. 1882.
Fountain Of The Virgin Mary In Nazareth. 나사렛 성마리아 샘물. 1882.
Marienquelle in Nazaret.
The Ruins Of The Palace In Palestine. 팔레스타인의 폐허가 된 궁전. 1882.
Upper Pond In Abramtsevo. 아브람체포의 윗 쪽 연못. 1882.
A Soldier With A Bundle Of Firewood. 나뭇단을 진 군인. 1883.
Cordoba. 코르도바. 1883.
Hall In The Magic Castle. 매직 캐슬의 홀. 1883.
Killed Soldier. Near The Village Of Mechka. 메치카 인근에서 죽음을 당한 병사. 1883.
성으로 가는 계단. 1883.
The Head Of The Pharisee. 바리새인의 두상. 1884.
팔레스타인 승려. 1886.
오카강 둑의 교회. Chapel On The Banks Of The Oka. 1893.
인디언 써머. 1893.
Christ among the doctors. 의사들 사이에 계신 예수. 1896.
베니스. 1896.
로키산 협곡. The Gorge Of The Rocky Mountains. 1897.
Monastery Over The River. 강 저 편의 수도원. 1898.
Cheops And Chephren. 체옵스와 체프렌의 대 피라마드. 1899.
And He Returned To Galilee In The Power Of The Spirit. 1900.
그리고, 예수는 성령의 힘으로 갈릴리로 돌아왔다.
마르타가 예수를 영접하다. 1900.
Tarusa Station. 타루사 역 근처의 철로. 1903.
The Mosque In Jenin. 제닌의 모스크. 1903.
House Of Polenov In Behovo. 베호포의 폴레노프 집.
Lord's Supper. 주님의 만찬.
Pond at Wehle, 웰리의 연못. 1874.
Ruschuksk. 파견대 사령관의 방. 1878.
Volga village.
Pond in Abramtsevo.
The road near the village, 1877.
In the village of Turgenev's 1885.
Crossing the river Oyat.
River Oyat.
Pine Forest on the banks of the River.
Oka Evening.
Palestinian landscape.
They brought a child.
The mosque in Jenin.
Haram Esh-Sherif - the area where the ancient Temple of Jerusalem.
Fishing Boat, Etretat, Normandy.
The epic storyteller Nikita Bogdanov.
Went into the hill country.
Оdalisque, 1875.
[영상] Vasily Polenov: A collection of 271 works (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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