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of the Artist Konstantin Savitsky, 1871 by Ivan Nikolaevich Kramskoi
화가 콘스탄틴 사비츠키의 초상. 이반 크람스코이 (1837 - 1887) 그림.
콘스탄틴 사비츠키(1844–1905)는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다.
타간록 (Taganrog)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타간록 소년 짐내지엄 (Gymnasium) 빌딩을 집으로 삼고 자랐다.
타간록은 오늘날 타그메트라는 철강회사가 있는 곳.
그의 가족은 프랑코브카에 여름 별장을 세내었는데
사비츠키는 아조브해 (Azov Sea 흑해 북쪽) 해변에서 스케치하기를 좋아했고,
짐내지엄 (중등학교)에서도 미술과목을 좋아했다.
사비츠키는 5학년 때 갑자기 부모를 잃고 라트비아의 숙부 댁으로 간다.
거기서 사립기숙학교를 마친 후 셍페테르스부르그로 와서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레핀(Ilya Repin), 쉬쉬킨( Ivan Shishkin), 스타소프(Viktor Vasnetsov) 등등
당대 러시아 문화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며 지대한 영향 속에 청년 사비츠키는 크게 성장한다.
Portrait of Savitsky by Nikolai Grandkovsky. 1902. Tretyakov Gallery
사비츠키의 초상화. Nikolai Grandkovsky 작.
왕립미술학교의 우수한 학생으로 장학금을 받아 유럽에 유학하고 "방랑자들"의 일원이 된다.
"철도 복구작업"은 그가 노동자 계급을 그린 초기 작품이다.
제국 예술 아카데미를 졸업 한 후 20 년 이상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펜자의 미술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데 헌신했다.
그는 이후 왕립미술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1897년 사비츠키는 Imperial Academy of Arts의 회원이되었다.
House of Savitsky in Taganrog, built in the 1890s.
사비츠키 식구는 타간록(Taganrog) 남자고등학교 건물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학교에 거주하는 의사였다. 혹시 관사 같은 곳 아니었을까?
Repairing the Railway. 철도 복구작업. 1874. oil on canvas. 100cm x 175cm. Tretyakov Gallery.
철도 복구작업. 1874. 캔버스에 유채. 175 x 100 cm. 트레차코프 국립미술관.
얼마 전 내린 비로 작은 산사태가 일어 났던 모양이다.
철길을 다시 살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자세히 보니 대부분 나이 많은 사람이거나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들이다.
장비도 변변치 않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지구 끝까지 연결되어 있는 철길들은
대부분 이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 철길에 담긴 눈물은 얼마나 될까? 철길이 열리면서 부를 쌓은 계층은 따로 있다.
이 작품은 사비츠키의 대표작이 된다.
사비츠키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항구 도시인 타칸로그에서 태어났다.
이 곳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는 안톤 체홉도 있다.
Morning in a Pine Forest. 소나무 숲의 아침. 1886. oil on canvas. 139cm x 213cm. Tretyakov Gallery.
소나무 숲의 곰 무리를 묘사한 이 작품은 ‘숲의 화가’라고 불리는 쉬스킨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처음 이 작품이 발표 되었을 때, 사람들은 쉬스킨이 숲을, 사비츠키가 곰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그림에 두 사람의 서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따로 그린 것이 아니라 전체를 함께 그렸다.
그러나 훗날 사비츠키는 자신의 서명을 그림에서 지운다.
자신의 선배이자 러시아 풍경화의 전설이 된 쉬스킨에 대한 예의였다.
사비츠키는 민중의 삶의 실제를 그림에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동파 대부분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개인보다는 여러 사람의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많다.
이것도 이동파 풍속화가들의 특징이 되는데 바실리 막스모프나
블라디미르 마코프스키의 작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Father. 아버지.
아이를 안고 있는 아버지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다.
유아 세례를 받으러 온 것 같은데,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가슴에 안고 있는 아이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지키겠다는 각오 같은 것도 보인다.
굵은 손 마디를 통해서 아버지의 직업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이 순간 만큼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모습이다.
아버지는 늘 그런 모습이리라.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사비츠키는 부모를 따라 해변가에서 스케치 하는 것을 좋아했고,
드로잉 과목은 가장 좋아하는 학교 수업이었다. 그런 그에게 비극이 찾아온다.
열 여섯 살이 되던 해, 갑자기 그의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겠다.
Welcoming the Ikon. 이콘 환영식. 1878. oil on canvas. 141cm x 228cm.
마을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담긴 이콘화가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와 경배를 올리고 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도 보인다.
이 그림이 마을의 평화와 가족의 행복을 지켜 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이콘화는 그림이 아니라 상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라트비아에 살고 있던 삼촌이 사비츠키의 보호자가 된다.
삼촌은 그를 사립 기숙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상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이 곳에서 사비츠키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고 얼마 되지 않아 우등생 중 한 명이 된다.
Bad People. 서툰 사람들. 1882. oil on canvas. 106.5cm x cm.
갈대가 우거진 강변에 배를 대 놓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뒤에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고 행동도 몹시 조심스러워 보이는데,
앞에 앉은 사람은 몸을 뒤로 기울이고 느긋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역시 눈동자가 커져 있다.
애써 태연한 척 하는 것 아닐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왠지 믿음이 가지는 않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 여러번 은메달을 땄던 사비츠키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작품으로 마침내 금메달을 수상한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비츠키는 2년간 유럽 여행을 다녀 온다.
이 시기에 많은 러시아의 젊은 화가들이 서부 유럽을 여행하면서
인상파 화풍을 접했지만 그 기법을 바로 수용한 화가는 거의 없었다.
The Funeral Service. 장례식. 1885
눈이 잔뜩 내린 날,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무덤으로 오는 길은 빗질이 되어 있다.
슬픔에 고개를 떨군 가족들과 힘겹게 지팡이를 들고 행렬을 뒤따라 온 노인들도 보인다.
차갑고 슬픈 분위기인데 맨 앞의 어린 꼬마, 바로 옆 묘지에 내려 앉은 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슬픔은 앞으로 떠나갈 어른들의 몫이라는 것일까?
유럽 여행에서 돌아 온 사비츠키는 이동파의 멤버가 된다.
민중 속으로 들어 가고자 했던 이동파에게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니라 주제였다.
상대적으로 인상파는 주제보다는 기법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인상파 기법이 러시아 미술에 정착되는 데는 시간이 다소 필요했다.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귀국한 화가들에 의해 바로 인상주의가 자리를 잡은 미국과는 차이가 난다.
To the War. 전쟁터로. 1888. oil on canvas. 207.5cm x 303.5cm.
역이 아주 혼란스럽다.
전쟁에 징집되어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보여주는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터지는 울음을 조용히 닦아 내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지금의 이별을 영원한 이별로 받아 들이는 가족도 있다.
이런 상황에 관계없이 기차 앞에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업무 인수 인계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앞 쪽에 서 있는 어린 소녀는 이 상황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전쟁은 여인과 아이들을 힘들게 할 것이다.
아이의 표정은 폭풍 전야처럼 무덤덤합니다.
사비츠키는 상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동파 멤버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차르 체제 아래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비평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끝없이 묘사한 중요 멤버이자 러시아 혁명 전에 가장 뛰어난 풍속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 받고 있다.
Fugitives in Siberia. 시베리아의 도피자들.
한 밤중인데 사내 4명이 집 앞에 서 있다. 강제 노역장을 탈출한 것일까?
뒤를 돌아 보는 사내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붉은 불빛이 흘러 나오는 창 옆에 몸을 붙이고 실내를 살피는 사내는 어둠에 잠겼다.
추위는 푸른색으로 세상을 덮고 있는데, 이 밤 이들은 주인의 하락을 받고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문 밖에 오늘 밤을 부탁하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봐야겠다.
사비츠키는 화가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모스크바, 펜자 그리고
상페테르부르크 등지에서 20년 넘게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개인 삶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1897년, 쉰 셋의 나이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니까 화가로서 사회적인 지위도 확실했다.
사비츠키는 예순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The Field. 들판.
초록 들판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덩그렇게 수레들만 자리를 잡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풀잎들을 이리 저리 흔들고 있고 구름은 산 너머에서 초원들 기웃거리고 있다.
머지 않아 우리가 만날 풍경들이다.
이동파 화가들은 자신들의 조국인 러시아의 풍경에도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풍경화나 풍속화를 가장 낮게 평가했던 기존 화단의 기준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내가 태어난 땅만큼 사랑스러운 곳도 없겠다.
사비츠키가 세상을 떠나고 9개월 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다.
그리고 12년 뒤, 러시아 혁명이 완성된다.
혹시 그가 그 때까지 살았다면 그가 평생 애정을 담고
그림에 담았던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을까?
이동파는 1923년 마지막 전시회를 열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마녀, 1869.
오베르뉴의 여행자들, 1875.
숲 속에 선 농가 처녀, 1876.
아이들과 닭. 1872.
사냥꾼. 1874.
가정불화, 1890.
사제. 1897.
Dreams. 1879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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