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차(Dacha)는 러시아, 구 소련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간이 별장과 텃밭 농장을 말한다. 러시아인들은 주말이나 휴가철에 가족 단위의 별장인 다차에서 휴식을 즐기는 문화가 있다.
"dacha"라는 단어는 "davat"또는 "give"에서 유래했으며
원래 차르가 귀족에게 할당한 땅을 의미했다. 그리고 실제로 소비에트 시대의 dacha는 일부 서방 국가의 할당량과 유사하다. 이것은 지방 정부가 개인 소비를 위해 채소를 재배하거나 정원을 가꾸도록 시민들에게 일반적으로 무료로 할당한 토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토지의 이름이 건물에도 적용되었다.
Dachas는 구 소련의 대부분 지역과 구 동구권의 일부 국가에서도 널리 퍼져 있다. 러시아인은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이곳에서 2박 3일 간 기거하며 농사를 짓고 휴식을 취한다.
러시아 어느 도시든 도심을 잠깐만 벗어나면 다차가 줄지어 서 있다. 다차는 서방에서 보통 별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주말 농장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도시에 사는 사람 가운데 70% 이상이 다차를 소유하고 있으니, 러시아의 속살을 제대로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주 5일 근무하는 러시아의 대도시들은 금요일 오후만 되면 교통 혼잡으로 몸살을 앓는다. 다차로 향하는 차량 행렬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의 마음은 금요일 점심 때쯤이면 다차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레닌 대로(大路) 등 모스크바 교외로 향하는 대부분의 큰길은 다차를 찾아가는 모스크바인들의 차량으로 극심한 교통 체증을 겪는다.
다차는 대개 대도시의 도심에서 100~200㎞ 안에 위치해 있다. 자동차로 한두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수록 다차의 가격은 떨어진다. 모스크바에서 다섯 시간쯤 떨어진 곳의 다차는
800루블(한화 10만원)이면 살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러시아의 다차 문화는 19세기 제정(帝政) 러시아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귀족들은 여름이면 별장에서 살며 파티를 즐겼다. 러시아 정부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다차를 갖고 싶어하는 직장인들에게 600㎡의 땅을 무상(無償)으로 분배하면서,
다차는 러시아인들의 삶 깊숙이 자리하게 되었다.
블라디미르 바바쉬킨 교수 다차(Dacha)
우리 일행을 인도하는 김창진 교수는 모스크바에서 전문대학에 재직 중인 블라디미르 바바쉬킨 교수와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다. 바바쉬킨 교수는 모스크바에서 고등학교 영어 선생으로 재직 중인 부인과 함께 시내에서 승용차로 1시간 여 거리에 있는 마을에 아름다운 다차를 가지고 있는데 꽃과 나무와 열매, 채소 등을 가꾸고 키우는 일로 보람과 즐거움에 빠져 아예 모스크바의 집을 처분하고 다차를 확장해서 생활하고 있다.
바냐(Баня)
바냐(Баня)는 러시아의 목욕탕이다. 통상적으로 바냐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핀란드식 사우나와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수세기 동안 이어온 러시아의 사우나 문화여서 자세히 들여다 보면 좀 다르다. 러시아 사람들은 다차에 대부분 바냐를 가지고 있다.
바냐(Баня)
바냐에 들어가기 전에 심장과 혈관이 놀라지 않도록 따뜻한 물로 샤워를 먼저 해야 한다. 비누를 사용해 씻으면 안 된다. 피부가 너무 건조해지는 걸 막아주는 피부 지방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한증실에서는 드러누워 있는 상태가 가장 좋다.
처음 들어갈 때는 기온이 그리 높지 않은 아랫편 의자에 앉아서 시작해야 한다. 한증실에서 나온 직후에는 샤워를 하고 냉탕에 풍덩 뛰어들거나 눈밭에 뒹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부가 땀과 함께 몸에서 나온 모든 유해 요소를 흡수해버리기 때문이다. 의사가 일광욕과 야외 수영, 운동을 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냐는 금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바냐(Баня)
머리카락 보호를 위해서는 특수 모자를 써야 한다. 사람들은 증기로 몹시 뜨거운 열기 속에서 러시아 어로 '베닉'이라 부르는 자작나무 가지 뭉치로 서로 등을 때려 주고는 한증실에서 뛰쳐나와 얼음물 속에 뛰어든다. 이렇게 하면 시원할 뿐만 아니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효험도 있다고 한다. 러시아 바냐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면 힘이 넘치는 기분을 느낀다. 모든 독소가 몸에서 빠져 나가고 나면 피부가 깨끗하고 팽팽하고 젊어지기 때문이다.
바냐(Баня)
자작나무 가지를 모아 굵기에 따라 분류하고,
풀어지지 않도록 묶는 작업은 상당한 기술과 숙달을 요구한다. 베닉 제조 전문가들은 “보름달이 뜬 짝수 날에 이것을 만드는데 줄기가 둘로 나뉜 자작나무나 홀로 서 있는 자작나무는 피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가지를 말린 상태로 묶음을 만들어야 제대로 사우나를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베닉은 사용할 시기에 맞춰 따로 준비한다. “여름에 쓸 가지들은 5월에서 6월 사이에 준비해야 하고, 겨울에 쓸 요량이면 7월 7일부터 ‘엘리야의 날’인 7월 20일 사이에 마련해야 한다. 이 나뭇가지들은 다음 해 다시 철이 돌아올 때까지 보관하며 사용한다.” 특히 “5월에 만든 베닉은 아주 부드러워서 어린 아이에게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골프 경기에서 용도에 따라 다양한 클럽을 사용하듯
러시아식 사우나에서도 목적에 따라 다양한 베닉이 등장한다. 전나무 가지는 살균효과가 있다고 한다. 감초(licorice) 가지 묶음에 야생 약초인 마요라나(majoran)와 고추나물(St. John’s wort) 등을
함께 사용하면 피부의 멍든 부위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감초 가지는 기침에 효과가 있고, 전나무 가지는 감기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전해 온다. 그래도 역시 으뜸은 자작나무 가지라고 한다.
자작나무 베닉은 지친 몸의 근육통 및 관절통 해소에 도움이 되며 피부도 깨끗하게 해 준다. 자작나무 잎이 방향유, 탄닌, 비타민 C, 비타민 A 등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모두 '바냐'로 불리는 사우나를 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탁구 게임도 하고.
다차에서 먹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저녁이면 집 마당의 식탁에 보드카와 소시지 그리고 '샤실릭'을 차린다. 샤실릭이란 장작을 태워 숯불을 만든 뒤, 여기에다 돼지고기, 쇠고기, 철갑상어를 꼬치에 꿰어 구워 먹는 것이다.
보드카와 곁들여 먹는 샤실릭의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한 잔씩 마시다가 흥에 겨우면 노래를 부르고 음악에 맞춰 한바탕 춤을 춘다. 그리고 달빛 아래 차를 마시며 밤늦도록 시간을 보낸다.
음악에 소질이 뛰어난 바바쉬킨 교수 부부는 두 딸과 함께 우리 일행을 위해 작은 음악회를 열어 주었다. 그들은 '백만송이 장미" "백학(白鶴)" "스텐카라친" 등 우리가 알만하여 신청한
러시아 노래를 거침없이 화음에 맞춰 능숙하게 불러 주었다.
다차는 야채와 과일 그리고 곡식을 생산하는 식량창고 역할도 한다.
러시아가 경제난에 시달리던 1990년대 초반
다차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시내 상점에는 살 물건이 부족해 긴 줄이 늘어서 있는데, 러시아인들의 다차에는 곡식들과 과일, 통조림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는 것이다. 다차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것은 감자와 오이다. 다차에서는 한 가족이 1년 정도 먹을 양의 감자와 오이가 나온다고 한다. 러시아인들은 주식을 다차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모스크바 강 가운데 초승달 모양으로 떠 있는 섬의 볼로트나야 광장(Bollotnaya Square)을 향해서 가다보면 예쁜 다리 (Tretyakovsky Most Bridge)를 건넌다.
다리 입구에 있는 분수가 시원하고 아름답다.
이 다리는 사랑하는 연인들을 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루즈코프 (Luzhkov) 다리에 사랑의 나무
이 보행자 다리의 공식 이름은 트레치야코프스키(Tretyakovsky Most Bridge)
다리로 1990 년대에 지어졌다. 2007년에는 연인들을 위해 사랑의 나무를 설치하여 자물쇠를 달 수 있게 했다. 신혼 부부는 다리에 와서 자물쇠를 걸고 열쇠를 강에 던진다고 한다.
모스크바를 가로 질러 흐르는 강을 따라 멋진 분수를 볼 수 있다.
인증샷
사랑의 자물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루즈코프 (Luzhkov) 다리를 건너면 레핀스키 광장(Repinskiy Skver)이 나오고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 (Ilya Yefimovich Repin)의 동상이 서 있다.
일리야 레핀 동상 뒤에서 본 모습
볼로트나야 광장(Bollotnaya Square)에 들어선다.
예쁘게 조경된 꽃밭
여기에도 아름다운 분수가 있다.
'어른들 부도덕의 희생양, 어린이들' 조각 전시회. by 미하일로비치 쉐먀킨
러시아 모스크바 강 가운데 떠 있는 섬의 볼로트나야 광장에 '어른들 부도덕의 희생양, 어린이들'이란 주제로 전시되어 있는 조각물이다. 마약, 매춘, 절도, 알콜중독, 무지, 거짓교육, 무관심, 폭력의 선전,
사디즘, 어린이 노동 착취, 가난, 전쟁 등을 풍자하고 있는 이 조각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쉐먀킨의 작품이다.
쉐먀킨 예술의 영역은 기념비에서 극장 무대, 보석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대단하다. 그는 1971년부터 파리에서 살았으며 1981년부터는 뉴욕에서 살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유럽, 미국, 브라질,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의 유명한 작품들을 예로 들자면 표트르 1세의 동상들
(상트 페테르부르크 1991년, 노르망디 1991년, 런던 2001년), 정치탄압의 희생양들에게 바치는 기념비 (상트 페테르부르크 1995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최초 건축자들을 기리는 기념비 (상트 페테르부르크, 1995년), 자코모 카자노베 (베니스, 1998년) 등이 있다.
15개의 조각물로 이루어진 '어른들 부도덕의 희생양, 어린이들'이란 작품은 오늘날 세계의 각종 부도덕 및 악과의 싸움을 우화한 것이다. 이로써 쉐먀킨은 오늘날 그리고 내일 세대를 보호하기 위해
싸울 것을 관찰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 작품은 쉐먀킨이 모스크바 시에 선물한 것이다. 이 선물은 2001년 모스크바 시의 날 9월 2일 (첫째주 일요일)에
현재 장소에서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뒷편 조각물들 왼쪽에서부터 무관심, 폭력의 선전, 사디즘을 풍자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For those without memory.
왼쪽에서부터 마약, 매춘, 도둑, 알콜중독, 무지를 풍자하고 있다.
뒷편 오른쪽에서부터 전쟁, 가난, 어린이 노동 착취, For those without memory, 사디즘, 폭력의 선전.
붉은 광장 내 레닌 묘 맞은 편에 길게 세워져 있는 베이지 색의 건물이 러시아 최대의 국영 백화점 굼(GUM, ГУМ)이다. 1893년에 지어져 오래된 건물이지만 1950년대에 대폭적으로 수리되어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에서는 최고급 백화점으로 손꼽히고 있다. 3층 높이의 이 건물의 1, 2층에는 200여 점에 이르는 최고급 외제산 상점들이 위치하여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굼 (Gum) 백화점
굼이란 러시아어로 '종합 백화점'을 의미하는 정식 명칭 글라이니 우니베르살니 마가진(Главный универсальный магазин)의 약어이다. 제정 러시아 시대인 1893년에 건축되었다.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백화점이면서 러시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의 시점에서 점포 수가 1200개 였으며, 혁명 후 굼 자체는 소련 정권에 의해 국유화되었지만, 개인 상점은 그대로 영업을 인정 받았다. 그 후 소련 성립 전후로 경제 정책의 변경을 거쳐 스탈린 독재 체제 하에서 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28년에 굼의 모든 점포는 국영화되었다. 그 후에도 굼은 모스크바의 소비 생활의 중심이자 소련에서는 몇 채 밖에 없었던 '물자가 부족하지 않은 상점'으로 소련 경제의 쇼윈도우 역할을 했다.
1985년에 등장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따라 굼 (Gum)에서 개인 상점이 부활하기 시작하여 서방 자본주의 국가 기업과의 합작한 상점이 진출했다. 소련 붕괴에 따라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가 부활한 후 1993년 예고르 가이다르 등에 의한 급진적인 경제 개혁 노선에 따라 굼 (Gum)도 민영화 되었다. 이 때 기존의 '국영 백화점'에서 '종합 백화점'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으나, 러시아어로는 국영도 종합도 "G"로 시작하는 맞춤법 때문에 GUM의 약어가 계속 사용되었다. 또한 붉은 광장에 접해 있어 과거의 입구가 다시 개방되어 굼은 러시아 혁명 이전의 모습으로 회귀했다. 2005년에는 러시아의 명품 유통 그룹이 대주주로 취득하고 현재까지 경영권을 쥐고 있으며, 굼에는 200 점포가 영업하고 있다.
굼 (Gum) 백화점
굼 (Gum) 백화점 야경
굼 (Gum) 백화점 광장 쪽 건물 중앙 현관의 맨 위엔 중세 러시아식 쌍탑을 올렸다.
현관 아치 위에 만물의 지배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예수 판토크라토르' 이콘이 붙어 있다.
현관 아치 안에 'ГУМ (굼)'이라는 약칭과 쌍탑 파사드(전면 구조), 완공 연도 1893, 그 아래 '크라스나(붉은)광장' 이라고 썼고 맨 아래엔 영어 알파벳 이름 'GUM'도 딸려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전까지 1200개 가게가 들어서 번성했고 국유화된 뒤로도 계급을 초월해 이용할 수 있는 국영 백화점으로 운영하다 1928년 부터 스탈린이 경제개발 계획을 주관하는 관청으로 쓰면서 영업이 중단됐다. 1953년 다시 국영 백화점으로 문을 열면서 '국영 종합 스토어'의 약자 GUM (러시아 알파벳으로는 ГУМ )이라는 이름을 비로소 얻었다.
굼 백화점 현관 아치 안에서 붉은 광장을 바라보며
굼은 민영화 후에도 GUM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는데 예전 '국영'을 뜻하는 단어의 첫자 G( 러시아알파벳 Г) 대신 '주된(Main)'이라는 단어의 첫 자 G( Г )로 바꿨다. 영어로 직역하면 'Main Universal Store'쯤 된다.
생필품난이 심했던 소련 시절에도 굼만큼은 언제나 풍족한 상품으로 넘쳐나 서방에 소비에트 경제를 과시하려는 '쇼윈도' 구실을 했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 줄이 붉은광장을 가로질러 늘어서곤 했다고 한다.
굼은 소련 붕괴 후 민영화 됐고 수퍼마켓 체인 메레크리오스토크를 거쳐 2005년 명품 수입유통회사 '보스코 디 칠리에기'가 소유하고 있다. 이탈리아식 이름이지만 러시아 회사이다.
현관 들어서면 남북으로 긴 회랑이 이어진다.
천장을 돔유리로 처리해 시원스럽고 자연 채광이 환한 회랑 구조가 굼 설계의 백미다. 이런 회랑이 동서로 나란히 세 개가 가면서 쇼핑 공간의 축을 이룬다. 역사(驛舍)처럼 둥근 유리 천장을 이고 길이 200m 넘는 회랑이 늘어선 백화점은 세계 어디에도 다시 없을 것이다.
시원스럽고 자연 채광이 환한 천장
엔지니어 슈코프는 19세기 런던역을 본떠 유리 돔 천장을 설계했다. 직경 14m 둥근 천장에 유리 2만 장을 썼고 반원형 철골 5만 개(743톤)로 유리를 받쳐 폭설이 쌓여도 버텨내게 했다.
3층에 있는 삼성전자 매장
3층 명당 자리에 있다.
삼성 매장 앞에 서서 회랑을 내려다 본다. 굼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흔히 등장하는 전경이다.
그가 만들어 낸 시스템이 종래의 연극 시스템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예술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낳게 하는 원인을 분명히 갖고 있는 점이다.
그가 제일 흥미를 느낀 것은 희로애락이란 정(情)의 외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태어나 발전하는 과정과 논리였다.
그는 배우 예술에 있어서 자기가 주장하는 방향을 '마음으로 체험하는 예술'이라 이름짓고,
이것을 '형태로 나타내는 예술'과 구별하고 있다.
그는 예술 창조의 순간에 있어서의 심리체험의 성실성을 배우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수성이라 생각하고,
관객에게 사상적 · 정감적(情感的)으로 작용하는 최대의 힘을 갖는 것은 그러한 예술임을 강조하였다.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연기를 개척
스타니슬랍스키는 무대 위에서 배우가 자연스럽게 연기하여,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이 마치 실제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느껴야 한다고 여겼다.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라고도 하는데 이를 위해 우선 그는 배우의 연기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전 극에서 등장하는 왕이나 영웅 역할같이 과장되고 격한 연기는 관객에게 사실적인 느낌을 주기 힘들었던 것이다.
너무 크고 과격한 행동이나 과장되고 괴상한 목소리는 사실적인 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배우는 등장 인물의 특성을 드러낼 습관 같은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을 바보 같다고 여기는 인물을 스스로를 주먹으로 쥐어박는 행동을 습관적으로 할 수 있다.
아무리 맡은 배역이 지닌 객관적인 겉 모양을 똑같이 흉내내더라도,
등장 인물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욕망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배우에게서 관객이 느끼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옷과 행동만 흉내낸다면, 관객은 배우를 '가짜 인형'으로 느낄 것이다.
배우는 등장 인물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연극에서 겉으로는 잘난 체를 하며 남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행동을 하는 인물이라도,
그 또는 그녀가 삶에서 정말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사랑'일 수 있다.
이때 그 인물의 목표는 '남에게 사랑 받는 것'이다.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할의 마음 속 진짜 목표를 알고, 그것을 관객에게 느끼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배우 중에는 극 중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대사를 할 때만 열심히 연기하고,
대사가 없을 때는 누워 있거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바로 죽지 않는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배우에게 마음 속으로 "집중의 원"(circle of attention)을 그리라고 권한다.
말 그대로 이 원을 그릴 때는, 배우가 집중해야 하는 공간을 포함하게 그려야한다.
처음에는 작게 그려서 구체적인 사물을 담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다가 다른 연기자도 포함되도록, 점점 그 원을 넓게 그려 나가야 한다.
이렇게 여러 배우들이 서로를 신경쓰면서 호응하는 연기를, "앙상블 연기(ensemble)"라고 한다.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Немирович-Данченко, 1858 ~ 1943)는
러시아의 연출가다.
그의 예술의 특색은 가열성과 준엄성에 있으며, 그 연출의 필치는 힘의 집중과 간결성에 넘쳐 있었다.
그의 연출법은 자연주의나 형식주의와도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희곡의 이념에 따라, 극에서 불필요한 것은 가차 없이 제거해 나가면서
가장 풍부한 표현과 필요 불가결한 세부를 찾아 나갔다.
그는 거짓말투성이의 '연극성'에 대적하면서도, 자연주의적인 단순성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가를 온순한 사진가로서 이해하는 일을 단연 거부하고, 동시에 정신빠진 형식주의 · 유미주의와 싸웠다.
그의 예술적 입장, 원칙, 미학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와 동일하며,
이 두 사람의 연극개혁자가 지향하는 길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러시아의 대표적 극단 및 그 극장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정식 명칭은 '고리키기념 국립 모스크바 예술 아카데미'로 그 대문자를 따서 므하트(MXAT)로 약칭한다.
1890년 모스크바를 순방한 마이닝겐극단의 영향을 받아 1898년 아마추어 배우이자 연출가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y)와 극작가인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
(Vladimirovich-Danchenko)에 의해 설립되었다.
초창기 극단의 주체는 창립자 두 사람에게 지도를 받은 예술문학협회와
필하모닉 음악연극학교를 졸업한 아마추어들이었다.
두 창립자는, 새로운 극장은 누구든지 입장할 수 있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민중의 극장이 되어야 하고,
또 무대 약속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연극의 이상에 반대되는 것을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의도 아래 극장을 열었다.
그리고 스타니슬랍스키는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무대에 올린 첫 작품은 알렉세이 톨스토이(Aleksey Tolstoy)의 《표도르 요안노비치 황제》였다.
새로운 극장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연 작품이 필요했는데,
이 극장의 큰 수확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와
막심 고리키(Maxim Kor'kii) 두 극작가를 얻은 일이다.
체호프의 《갈매기:The Seagull》 공연이 성공함으로써 극장은 획기적인 발전을 했으며,
뒤를 이어 《바냐 아저씨》《세 자매》《벚꽃동산》 등이 공연되었다.
1905년 혁명으로 이어진 당시 사회의 격동은 고리키의 《밑바닥》에 잘 반영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V.I.레닌(Lenin)과 A.V.루나차르스키(Lunacharsky)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서
1920년대에 유럽과 미국을 순회공연했고, 1941년까지 러시아 고전극과 소비에트 창작극을 공연했다.
이 극장은 1932년 고리키의 문학생활 40년을 기념하여 '고리키 기념극장'이라고 명명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1950년대 이후는 잠시 정체상태에 빠지기도 했으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런던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1970년에 I.A.예프레모프를 주임연출가로 맞아들였고,
1987년에는 구관 및 부속극장, 1975년에 개관한 신관, 소무대까지 갖춘 총인원 400여 명의 대무대로 확장하고,
신관을 제(諸)민족우호극장으로 개칭하였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탄생이 세계의 근대극 운동에 끼친 영향은 연극사상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술극장이라면 우선 <세 자매>나 <밑바닥>의 무대가 생각나는 것처럼,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안톤 체호프와 막심 고리키에 의해 성장한 극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극장의 상연 목록은 그러한 제정러시아 시대의 고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러시아 연극사에 한 시기를 이룬 프세볼로트 이바노프의 <장갑열차>,
니콜라이 포고진의 <크레믈린의 큰 시계>를 비롯하여 수많은 현대극이 상연되고 있다.
이것은 무대의 진실을 지향하는 리얼리즘을 향한 이 극장의 전통을 말해주고 있다.
이 극장은 시가의 북쪽, 일반 주택지가 있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으며
내부도 요란스런 장식이 전혀 없는 간소한 것으로 객석수는 1,183개, 3층 좌석의 제일 뒤 객석에서도
무대가 잘 보여서 드라마 극장으로서는 아주 이상적인 규모이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내부
[영상] 모스크바 예술극장
트베르스카야 거리 (Tverskaya St)
[영상] 트베르스카야 거리 (Tverskaya St)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기념비 (Monument to Sergei Prokofiev)
이 골목이 톨스토이나 차이콥스키 등 모스크바의 예술가들이 많이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고, 혁명기에 살았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Серге́й Проко́фьев)의 집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념 박물관이 된 그의 집 앞에 역시 그의 모습을 한 동상이 서 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기념비 (Monument to Sergei Prokofiev)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Sergei Prokofiev,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Прокофьев)는 구 소련 손초프카 (現 우크라이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에 심취해 다섯 살 때 첫 작품인 피아노 소품 '인디언 갈롭'을 작곡했다. 이어 아홉 살 때는 첫 오페라인 '거인'을 작곡해 집에서 연주하기도 했고, 체스에 몰두하기도 했다. 참고로 체스는 6살 때부터 두기 시작했고 체스도 음악만큼의 위상은 아니어도 알레힌, 카파블랑카, 라스커 등의 굵직굵직한 체스챔피언들과도 경기한 기보도 남아 있다.
아들이 확실히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간파한 어머니는 1902년에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을 맡고 있었던 작곡가 세르게이 타네예프에게 조기 교육을 시켜줄 것을 부탁했는데, 타네예프는 자신의 대위법 제자였던 작곡가 라인홀트 글리에르에게 손초프카로 가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해주도록 했다. 프로코피예프는 처음에 글리에르의 수업에 열성적으로 따랐지만, 이내 글리에르의 보수적인 이론 교육에 싫증을 냈다.
프로코피예프의 부모는 손초프카가 아들이 음악 교육을 받기에는 너무 낙후되고 고립되어 있다고 판단했고, 190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그 곳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에게 아들이 쓴 작품의 악보를 보여주면서 입학 시험을 치르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글라주노프는 제안을 받아들여 프로코피예프에게 시험을 보게 해 입학시켰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여기서도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고, 학생들이나 교수들도 프로코피예프의 도발적인 행동과 무례함에 당혹스러워했다. 여기서 쓴 작품들에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반음계 어법과 불협화음이 자주 사용되었고, 이는 보수적인 성향의 음악원에서 자주 논쟁을 유발했다.
음악원 졸업 후 프로코피예프는 젊고 도발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러시아 음악계에 일찌감치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처음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들에서 보수파와 혁신파 사이에 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일찍부터 주목받은 프로코피예프는 1911년 러시아의 유력 음악 출판사인 유르겐손과 계약해 자신의 작품들을 출판했고, 1913년부터는 해외 연주 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이들 여행에서 프로코피예프는 당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젊은 작곡가들과 손을 잡고 신작 발레들을 공연하던 흥행주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만났고, 디아길레프는 이 젊은 작곡가의 똘끼에 감탄했는지 발레를 써보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첫 번째로 나왔던 '알라와 롤리'는 디아길레프가 거부했고, 1차대전으로 인해 유럽의 음악 활동 전반이 위축되자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전쟁 중에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음악원에 재등록해 오르간을 배우기도 했고, 1917년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가지고 오페라 '도박사'를 완성해 초연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초연 계획은 같은 해 발생한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대신 프로코피예프는 고전주의 양식을 응용한 첫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면서 혼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혁명 후 수립된 사회주의 정권에서도 프로코피예프는 음악 활동을 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고, 당시 교육인민위원장이었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의 허가를 받아 191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니스트로 꽤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기서도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의 초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빚만 잔뜩 지고 버로우해야 했다. 미국에서도 실망한 프로코피예프는 다시 프랑스 파리로 옮겨갔고, 여기서 전쟁 전 만난 디아길레프에게 두 번째 발레 작품을 위촉받아 '어릿광대'를 작곡했다. '어릿광대'는 1921년에 파리에서 초연되어 대박을 쳤고, 스트라빈스키와 모리스 라벨, 장 콕토를 비롯한 진보적 문예 인사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에는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을 시카고에서 초연해 역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후 뉴욕에서 재연했을 때는 망했어요 상태가 되어 또 한 번 미국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1923년에 다시 파리에 이주해 오페라 '불의 천사'의 작곡에 주력하는 한편, 두 번째 교향곡과 발레 '강철 계단'으로 모더니즘 작곡가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도발적인 작풍에도 점차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후 작곡 스타일을 조금씩 바꾸어갔다.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불의 천사'도 1927년에 베를린에서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시립 오페라단이 초연하기로 일정을 잡았지만, 악보 발송에 차질이 빚어지는 바람에 취소되어 또 물을 먹었다.
같은 해에는 1918년 출국한 이래 거의 9년 만에 소련에서 연주 여행을 했는데, 레닌그라드에서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이 소련 초연되어 절찬을 받고 자신도 피아니스트로 호평을 받는 등 예전과는 다른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때부터 프로코피예프는 다시 소련으로 귀국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소련 정권이 보여주던 억압과 통제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1929년에 디아길레프가 발레 '방탕한 아들'을 공연한 것을 끝으로 사망하자, 프로코피예프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소련 문화예술계와 작업을 시작해 발레와 영화음악 등을 소련에서 발표했다. 결국 1936년에 프로코피예프는 영구 귀국을 선언했고, 곧 전년도에 쓴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초연을 위해 당국과 교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부터 소련의 문화 정책은 소위 '사회주의 사실주의'노선을 따라가기 시작했고, 비록 초기의 독기와 똘기가 상당히 빠지기는 했지만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들도 차츰 형식주의에 빠졌다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도 여타 소련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정권의 노선에 영합하는 소위 '접대용' 작품들에 주력하는 쪽으로 창작 노선을 바꾸었고, 10월 혁명 20주년 기념 칸타타나 소련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 음악 동화 '피터와 늑대'등을 작곡해 선보였다. 하지만 칸타타의 경우 지나치게 거대하고 난잡하다는 당국의 비판을 받아 이후 프로코피예프 생전에 연주되지 못했고, 그 반대로 1937년에 작곡한 노골적인 쇠돌이 아저씨 써킹 작품인 '우리 시대의 노래'는 반대로 너무 단순하고 밋밋하다는 이유로 디스 당했다. 뭐 어쩌라고 부르주아 정신을 인민에게 깃들게 하지 않으려는 정책과 충돌한다고 했다나. 다만 피터와 늑대는 어린이를 위한 우화로서, 그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다.
이 시기 이후로 프로코피예프의 해외 여행은 크게 제한을 받았고, 1938년에 마지막으로 미국 순회 공연을 가진 뒤에는 당국으로부터 여권을 압수당해 이후 평생 동안 소련에 짱박혀 있어야 했다. 게다가 소련 정주 선언 이래 의욕적으로 작곡한 오페라 '세묜 코트코'도 초연에 심하게 애를 먹었는데, 초연 직전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독일과 관계가 개선되면서 독일을 악역으로 설정한 대본을 급히 수정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오페라의 초연을 같이 준비하던 연출가 브세볼로드 메이에르홀드가 대숙청에 쓸려나갔고, 프로코피예프는 자신도 마찬가지로 끔살당할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로코피예프는 1939년에 스탈린 동무의 60번째 생일에 맞추어 '건배'라는 제목의 한층 더 노골적인 후빨 칸타타를 발표했고, 이 작품은 폐기된 이전의 두 교성곡들과 달리 공식적으로 환영받았다. 그리고 당시 소련에서 가장 주목받던 영화 감독들 중 한 사람이었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 프로코피예프에게 자신의 신작 영화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OST를 작곡해 달라고 부탁해온 것도 '명예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예이젠시테인은 프로코피예프에게 가능한 모든 편의를 베풀었고, 심지어 몇몇 전투 장면에서는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리듬에 영상을 맞추어 촬영하는 등 매우 긴밀한 협업으로 걸작을 만들어냈다. 프로코피예프는 영화 발표 후 OST의 일부를 연주회용 칸타타로 다듬어 내놓았고, 이 칸타타는 프로코피예프의 후기 작품들 중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도 피아노 소나타 6-8번(흔히 전쟁소나타라고 부름) 같은 순수 기악 작품들도 호평을 받았다.
독소전쟁이 터진 뒤에는 다른 주요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동부로 피신했고, 거기서도 이런저런 정권 영합성 작품들 외에 바이올린 소나타나 현악 4중주 등을 계속 작곡했다. 전쟁 후반기인 1944년에 작곡한 교향곡 5번은 이듬해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하차투리안의 교향곡 2번 등과 함께 전쟁 중 작곡된 소련 교향곡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 널리 선전되었다.
하지만 그 즈음 낙상 사고로 입은 뇌진탕으로 인해 건강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해고, 종전 후 스탈린의 심복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를 앞세워 다시 문화예술계를 조이기 시작한 소련 당국의 압박에도 다시금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피아노 소나타 9번과 교향곡 6번이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1948년에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친선'으로 불붙은 대대적인 음악계 숙청 운동에도 휘말려 공공의 적으로 신나게 까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전쟁 중 버로우해야 했던 '세묜 코트코'를 대신할 새 오페라였던 '전쟁과 평화'도 생전에 초연되지 못했고, 예이젠시테인과 작업한 《이반 뇌제》의 2부도 상영금지크리를 먹는 등 계속 불운이 이어졌다. 이미 건강도 계속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창작 활동도 크게 위축되어 있었고, 1952년에 교향곡 7번의 초연을 마지막으로 예전 작품들을 개작하면서 투병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3월에 뇌출혈로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필이면 프로코피예프가 죽은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강철의 대원수 스탈린의 사망 소식이 발표되면서, 프로코피예프의 사망 소식은 완전히 묻혔다. 심지어 프로코피예프의 집이 붉은 광장에서 가까웠던 탓에, 서기장 동무를 조문하고자 광장으로 몰려들던 수십만 명의 군중들을 피해 다른 거리들을 전전하며 한참을 돌아나가 관을 운구해야 했다. 노보데비치 묘지에서 극히 간소한 장례식이 열린 뒤에도 한 동안 소련 언론은 인간백정 아저씨의 장례식만 줄창 보도하느라 프로코피예프의 부고를 싣지도 않았다. 심지어 조화조차 스탈린을 조문하기 위해 인민들이 몽땅 구입해가서, 프로코피예프의 장례식에는 조화를 쓸 수 없었다. 그나마 평생 앙숙이었으면서도 서로 능력은 인정하는 사이였던 쇼스타코비치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게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 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1860년 1월 29일 ~ 1904년 7월 15일)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가이다.
체호프는 1860년 흑해 위에 있는 아조프 해 연안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Taganrog)에서 식민지 수입 상품점을 하는 아버지 파벨 예고로비치 (Pavel Egorovič)와 어머니 예브게니야 야코브레브나 모로조바 (Evgenija Jakovlevna Morozov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조부는 원래 농노였으며 부친은 조그마한 채소가게를 했었다. 체호프는 어릴 때부터 가게를 도와야만 했다.
1867년 고향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예비학교를 다닌 후, 1869년 고전 교육을 목표로 하는 타간로크 인문학교에 입학한다. 1872년 성적 불량으로 3학년 과정을 반복하며, 3년 뒤 고대 그리스어 시험에 낙제하여 다시 5학년 과정을 반복한다.
지방정치와 교회합창에 너무 열중한 부친은 파산, 체호프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며, 학교 때문에 홀로 남은 체호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스크바로 나왔다. 15세의 체호프는 큰 형 알렉산드르와 함께 문학 창작에 열중한다. 두 형 알렉산드르와 니콜라이 그리고 동생 이반이 5년 과정으로 타간로크 학교를 졸업한 반면, 체호프은 1879년 8년 과정으로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대학 진학 자격을 얻는다. 같은 해 타간로크 모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모스크바로 올라가 그 곳에 이미 자리를 잡은 부모 형제들과 재회하며, 같은해 10월 모스크바 대학의 의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 때부터 체호프는 의학공부를 하는 한편 타간로크에서 받는 장학금과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의 잡지에 유머 단편을 써서 그 기고료로 부모와 세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
1887년 연극 이바노프의 첫 상연이 있기까지 체호프은 문학잡지 《귀뚜라미(Strekoza)》, 《파편(Oskolski)》, 《자명종(Budilnik)》, 《페테르부르크 신문》 등에 100줄에서 150줄로 한정된 짧은 단편과 수필을 일주일이 멀다하고 기고한다. 특히 1883년에는 《Oskolski》에 매 이주일마다 모스크바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컬럼을 맡는다. 체호프의 글은 호평을 받았으며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신진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이처럼 글을 써 돈벌이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83년 10월부터 의학 졸업시험 준비에 열중하여 다음해 9월 졸업을 했다. 그러나 23세 때 걸린 폐결핵이 체호프의 건강을 늘 위협하게 된다. 그 해 11월에 처음 결핵 증세로 요양하게 되었다. 1884년에는 또한 첫 단편집 《멜포네네의 우화》가 출판된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호프는 시베리아, 사할린 섬 여행을 계획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사할린 섬에 유배된 수인(囚人)들의 비참한 생활은 체호프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는 후에 이때의 기행문을 쓴 바 있다.
7개월 이상이나 걸려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와 1892년, 교외에 저택을 사서 양친 · 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의사로서 이웃 농부들의 건강을 돌보거나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얄타를 마주보는 크림 반도로 옮겼다. 1900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이에 항의하여 스스로 사임하고 1904년에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4년의 생애를 마쳤다.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록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長幕物) 2편, 1막물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1887년에 쓰여진 <이바노프>는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교적으로는 <프라토노프>보다 앞섰으나 아직도 과잉된 극적 효과를 노리는 낡은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음의 <숲의 정(精)> 실패는 체호프의 극작을 한때 멈추게 했으나 이 무렵에 쓰인 1막물에는 <곰>(1888)이나 <결혼신청>(1889)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
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갈매기>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바냐 아저씨>(1899), <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3)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會話劇)을 확립했다.
<갈매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 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2년 후에 다시 새로 설립된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다루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희극으로서 쓰여진 이 작품을 오히려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정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체호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 체호프의 작품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상연하게 됐다.
<바냐 아저씨>는 앞서의 <숲의 정>을 다시 쓴 것으로서 그 톨스토이즘이나 멜로드라마의 성격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세 자매>는 초연 후 전집에 수록되자 다시 고쳐쓴 바 있다.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은 체호프의 44세 생일에 초연의 막이 올랐다.
체호프의 희곡(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訂正)된 해석이다. <세 자매>나 <벚꽃동산>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인증샷
트베르스카야 거리 (Tverskaya St) 레스토랑에서 점심 메뉴
유리 돌고루키 (Юрий Долгорукий)의 기마상
유리 돌고루키 (1099 ~ 1157)는 키예프 대공국의 대공 (재위: 1149년 ~ 1151년)으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Monomakh) 대공의 작은 아들이다.
1121년에 영지를 로스토프에서 수즈달로 옮김으로서 그의 영지는 로스토프-수즈달 공국으로 불리게 된다. 유리 돌고루키는 발트계 및 핀족 계열의 이민족들과 맞서 싸우며 영토를 넓히고, 트베리, 모스크바 등 수많은 도시와 요새들을 건설하였다. 유리 돌고루키는 이후 랴잔 공국을 굴복시킨 후 1149년 키예프를 점령하였지만 1151년 이자슬라프에 의해 키예프에서 쫓겨났으며, 1155년 키예프를 재점령하고 난 후 1157년에 급사하였다.
유리 돌고루키 (Юрий Долгорукий)의 기마상
레닌(Влади́мир Ле́нин)의 좌상 유리 돌고루키의 동상 뒤, 광장의 동편 끝에는 레닌(Влади́мир Ле́нин)의 좌상이 있다.
혁명광장
부활의 문을 나서면 나오는 큰길 오코트니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500m쯤 가면 혁명 광장이 있고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흉상 뒷 모습과 광장 건너편 북쪽에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볼쇼이 극장이 보인다.
칼 마르크스 (Karl Marx)의 흉상
볼쇼이 극장 앞으로 대로 건너편 혁명 광장에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흉상이 있다. 기단에 새겨진 문구는 그가 쓴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
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Bolshoi Theater)
볼쇼이극장은 대극장이란 뜻으로 모스크바 역사에서 빛나는 문화 유산이다. 현 볼쇼이극장의 연혁은 1776년 페터 우루쏘브(Peter Urussov) 대공의 저택에서 오페라와 발레를 공연했던 소규모 극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몇 년 후 우루쏘브 대공의 개인 저택에서의 공연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페트로브카 (Petrovka)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공인을 받아 오페라와 발레를 정식으로 공연하기 시작했다.
1805년 이 극장이 화재로 전소되자 제정러시아는 당대의 안드레이 미하일로프(Andrei Mikahilov)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새로운 위용의 오페라극장을 짓도록 했다. 미하일로프는 인근에 말리(Maly)극장을 건설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모든 극장은 제국황실 소유였다. 당시 모스크바와 생페테르부르크에는 각각 두 곳의 극장이 있었다. 하나는 주로 오페라와 발레를 공연하는 극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극이나 코미디 연극을 주로 공연하는 극장이었다. 오페라와 발레는 연극보다 좀 더 귀족적이라고 생각한 제정러시아는 오페라와 발레 전용 극장을 볼쇼이 (그랜드: Large) 극장이라고 부르고 연극전용 극장은 말리 (소규모: Little) 극장이라고 불렀다.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Bolshoi Theater)
볼쇼이 극장은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했지만 한 번의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확장 증축하여 현재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격조있는 공연이 열리며 이를 관람하는 사람들 또한 매너있는 태도로 감상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