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교외의 다차(Dacha)

다차(Dacha)는 러시아, 구 소련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간이 별장과 텃밭 농장을 말한다. 
러시아인들은 주말이나 휴가철에 가족 단위의 별장인 다차에서 휴식을 즐기는 문화가 있다.

"dacha"라는 단어는 "davat"또는 "give"에서 유래했으며 

원래 차르가 귀족에게 할당한 땅을 의미했다. 
그리고 실제로 소비에트 시대의 dacha는 일부 서방 국가의 할당량과 유사하다. 
이것은 지방 정부가 개인 소비를 위해 채소를 재배하거나 정원을 가꾸도록 
시민들에게 일반적으로 무료로 할당한 토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토지의 이름이 건물에도 적용되었다. 

Dachas는 구 소련의 대부분 지역과 구 동구권의 일부 국가에서도 널리 퍼져 있다. 
러시아인은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이곳에서 2박 3일 간 기거하며 농사를 짓고 휴식을 취한다.

러시아 어느 도시든 도심을 잠깐만 벗어나면 다차가 줄지어 서 있다. 
다차는 서방에서 보통 별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주말 농장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도시에 사는 사람 가운데 70% 이상이 다차를 소유하고 있으니, 
러시아의 속살을 제대로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주 5일 근무하는 러시아의 대도시들은 금요일 오후만 되면 교통 혼잡으로 몸살을 앓는다. 
다차로 향하는 차량 행렬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의 마음은 금요일 점심 때쯤이면 다차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레닌 대로(大路) 등 모스크바 교외로 향하는 대부분의 큰길은 다차를 찾아가는 
모스크바인들의 차량으로 극심한 교통 체증을 겪는다. 
 
다차는 대개 대도시의 도심에서 100~200㎞ 안에 위치해 있다. 
자동차로 한두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수록 다차의 가격은 떨어진다. 
모스크바에서 다섯 시간쯤 떨어진 곳의 다차는 

800루블(한화 10만원)이면 살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러시아의 다차 문화는 19세기 제정(帝政) 러시아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귀족들은 여름이면 별장에서 살며 파티를 즐겼다.
러시아 정부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다차를 갖고 싶어하는 직장인들에게 600㎡의 땅을 무상(無償)으로 분배하면서, 

다차는 러시아인들의 삶 깊숙이 자리하게 되었다.

 

블라디미르 바바쉬킨 교수 다차(Dacha)

 

우리 일행을 인도하는 김창진 교수는 모스크바에서 전문대학에 재직 중인
블라디미르 바바쉬킨 교수와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다.
바바쉬킨 교수는 모스크바에서 고등학교 영어 선생으로 재직 중인 부인과 함께 
시내에서 승용차로 1시간 여 거리에 있는 마을에 아름다운 다차를 가지고 있는데 
꽃과 나무와 열매, 채소 등을 가꾸고 키우는 일로 보람과 즐거움에 빠져 
아예 모스크바의 집을 처분하고 다차를 확장해서 생활하고 있다. 

 

바냐(Баня)

바냐(Баня)는 러시아의 목욕탕이다. 
통상적으로 바냐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핀란드식 사우나와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수세기 동안 이어온 러시아의 사우나 문화여서 자세히 들여다 보면 좀 다르다.
러시아 사람들은 다차에 대부분 바냐를 가지고 있다.

 

바냐(Баня)

 

바냐에 들어가기 전에 심장과 혈관이 놀라지 않도록 따뜻한 물로 샤워를 먼저 해야 한다. 
비누를 사용해 씻으면 안 된다. 
피부가 너무 건조해지는 걸 막아주는 피부 지방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한증실에서는 드러누워 있는 상태가 가장 좋다. 


처음 들어갈 때는 기온이 그리 높지 않은 아랫편 의자에 앉아서 시작해야 한다. 
한증실에서 나온 직후에는 샤워를 하고 냉탕에 풍덩 뛰어들거나 눈밭에 뒹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부가 땀과 함께 몸에서 나온 모든 유해 요소를 흡수해버리기 때문이다. 
의사가 일광욕과 야외 수영, 운동을 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냐는 금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바냐(Баня)

머리카락 보호를 위해서는 특수 모자를 써야 한다. 
사람들은 증기로 몹시 뜨거운 열기 속에서 러시아 어로 '베닉'이라 부르는 
자작나무 가지 뭉치로 서로 등을 때려 주고는 한증실에서 뛰쳐나와 얼음물 속에 뛰어든다. 
이렇게 하면 시원할 뿐만 아니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효험도 있다고 한다. 
러시아 바냐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면 힘이 넘치는 기분을 느낀다. 
모든 독소가 몸에서 빠져 나가고 나면 피부가 깨끗하고 팽팽하고 젊어지기 때문이다.

 

바냐(Баня)

자작나무 가지를 모아 굵기에 따라 분류하고, 

풀어지지 않도록 묶는 작업은 상당한 기술과 숙달을 요구한다.
베닉 제조 전문가들은 “보름달이 뜬 짝수 날에 이것을 만드는데 
줄기가 둘로 나뉜 자작나무나 홀로 서 있는 자작나무는 피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가지를 말린 상태로 묶음을 만들어야 제대로 사우나를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베닉은 사용할 시기에 맞춰 따로 준비한다. 
“여름에 쓸 가지들은 5월에서 6월 사이에 준비해야 하고, 
겨울에 쓸 요량이면 7월 7일부터 ‘엘리야의 날’인 7월 20일 사이에 마련해야 한다. 
이 나뭇가지들은 다음 해 다시 철이 돌아올 때까지 보관하며 사용한다.” 
특히 “5월에 만든 베닉은 아주 부드러워서 어린 아이에게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골프 경기에서 용도에 따라 다양한 클럽을 사용하듯 

러시아식 사우나에서도 목적에 따라 다양한 베닉이 등장한다. 
전나무 가지는 살균효과가 있다고 한다. 
감초(licorice) 가지 묶음에 야생 약초인 마요라나(majoran)와 고추나물(St. John’s wort) 등을

함께 사용하면 피부의 멍든 부위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감초 가지는 기침에 효과가 있고, 전나무 가지는 감기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전해 온다. 
그래도 역시 으뜸은 자작나무 가지라고 한다.

자작나무 베닉은 지친 몸의 근육통 및 관절통 해소에 도움이 되며 피부도 깨끗하게 해 준다. 
자작나무 잎이 방향유, 탄닌, 비타민 C, 비타민 A 등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모두 '바냐'로 불리는 사우나를 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탁구 게임도 하고.

 

다차에서 먹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저녁이면 집 마당의 식탁에 보드카와 소시지 그리고 '샤실릭'을 차린다. 
샤실릭이란 장작을 태워 숯불을 만든 뒤, 
여기에다 돼지고기, 쇠고기, 철갑상어를 꼬치에 꿰어 구워 먹는 것이다.

 

보드카와 곁들여 먹는 샤실릭의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한 잔씩 마시다가 흥에 겨우면 노래를 부르고 음악에 맞춰 한바탕 춤을 춘다. 
그리고 달빛 아래 차를 마시며 밤늦도록 시간을 보낸다.

 

음악에 소질이 뛰어난 바바쉬킨 교수 부부는 두 딸과 함께 
우리 일행을 위해 작은 음악회를 열어 주었다. 
그들은 '백만송이 장미" "백학(白鶴)" "스텐카라친" 등 우리가 알만하여 신청한 

러시아 노래를 거침없이 화음에 맞춰 능숙하게 불러 주었다.

 

다차는 야채와 과일 그리고 곡식을 생산하는 식량창고 역할도 한다. 


러시아가 경제난에 시달리던 1990년대 초반 

다차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시내 상점에는 살 물건이 부족해 긴 줄이 늘어서 있는데, 
러시아인들의 다차에는 곡식들과 과일, 통조림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는 것이다.
다차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것은 감자와 오이다. 
다차에서는 한 가족이 1년 정도 먹을 양의 감자와 오이가 나온다고 한다. 
러시아인들은 주식을 다차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남으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바바쉬킨 교수 부부는 다차를 가꾸고 꾸미느라 

아예 모스크바로 매일 출퇴근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영상] 블라디미르 바바쉬킨 교수 다차 (Dacha)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모스크바 강 가운데 
초승달 모양으로 떠 있는 섬의 볼로트나야 광장(Bollotnaya Square)을 향해서 가다보면 
예쁜 다리 (Tretyakovsky Most Bridge)를 건넌다.

 

다리 입구에 있는 분수가 시원하고 아름답다.

 

이 다리는 사랑하는 연인들을 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루즈코프 (Luzhkov) 다리에 사랑의 나무


이 보행자 다리의 공식 이름은 트레치야코프스키(Tretyakovsky Most Bridge)

다리로 1990 년대에 지어졌다.  
2007년에는 연인들을 위해 사랑의 나무를 설치하여 자물쇠를 달 수 있게 했다. 
신혼 부부는 다리에 와서 자물쇠를 걸고 열쇠를 강에 던진다고 한다. 

 

모스크바를 가로 질러 흐르는 강을 따라 멋진 분수를 볼 수 있다. 

 

인증샷

 

사랑의 자물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루즈코프 (Luzhkov) 다리를 건너면 레핀스키 광장(Repinskiy Skver)이 나오고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 (Ilya Yefimovich Repin)의 동상이 서 있다.

 

일리야 레핀 동상 뒤에서 본 모습

 

볼로트나야 광장(Bollotnaya Square)에 들어선다.

 

예쁘게 조경된 꽃밭

 

여기에도 아름다운 분수가 있다.

 

 '어른들 부도덕의 희생양, 어린이들' 조각 전시회. by 미하일로비치 쉐먀킨

러시아 모스크바 강 가운데 떠 있는 섬의 볼로트나야 광장에
'어른들 부도덕의 희생양, 어린이들'이란 주제로 전시되어 있는 조각물이다.
마약, 매춘, 절도, 알콜중독, 무지, 거짓교육, 무관심, 폭력의 선전, 

사디즘, 어린이 노동 착취, 가난, 전쟁 등을 풍자하고 있는 이 조각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쉐먀킨의 작품이다.

쉐먀킨 예술의 영역은 기념비에서 극장 무대, 보석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대단하다.
그는 1971년부터 파리에서 살았으며 1981년부터는 뉴욕에서 살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유럽, 미국, 브라질,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의 유명한 작품들을 예로 들자면 표트르 1세의 동상들 

(상트 페테르부르크 1991년, 노르망디 1991년, 런던 2001년),
정치탄압의 희생양들에게 바치는 기념비 (상트 페테르부르크 1995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최초 건축자들을 기리는 기념비 (상트 페테르부르크, 1995년),
자코모 카자노베 (베니스, 1998년) 등이 있다.

15개의 조각물로 이루어진 '어른들 부도덕의 희생양, 어린이들'이란 작품은
오늘날 세계의 각종 부도덕 및 악과의 싸움을 우화한 것이다.
이로써 쉐먀킨은 오늘날 그리고 내일 세대를 보호하기 위해 

싸울 것을 관찰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 작품은 쉐먀킨이 모스크바 시에 선물한 것이다.
이 선물은 2001년 모스크바 시의 날 9월 2일 (첫째주 일요일)에

현재 장소에서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뒷편 조각물들 왼쪽에서부터 무관심, 폭력의 선전, 사디즘을 풍자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For those without memory.

 

왼쪽에서부터 마약, 매춘, 도둑, 알콜중독, 무지를 풍자하고 있다.

 

뒷편 오른쪽에서부터 전쟁, 가난, 어린이 노동 착취,
For those without memory, 사디즘, 폭력의 선전.

 

왼쪽에서부터 매춘, 도둑, 알콜중독, 무지, 거짓교육, 무관심, 폭력의 선전.
엄마 품에 안겨 어른들의 잘못들을 구경하며 혀를 끌끌 차고 있는 아기.

 

[영상] The Repin Square & Bolotnaya Square

 

 

 

 


러시아 최대의 굼(Gum) 백화점

 붉은 광장 내 레닌 묘 맞은 편에 길게 세워져 있는 베이지 색의 건물이
러시아 최대의 국영 백화점 굼(GUM, ГУМ)이다.
1893년에 지어져 오래된 건물이지만 1950년대에 대폭적으로 수리되어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에서는 최고급 백화점으로 손꼽히고 있다.
3층 높이의 이 건물의 1, 2층에는 200여 점에 이르는 최고급 외제산 상점들이 위치하여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굼 (Gum) 백화점


굼이란 러시아어로 '종합 백화점'을 의미하는 정식 명칭
글라이니 우니베르살니 마가진(Главный универсальный магазин)의 약어이다.
제정 러시아 시대인 1893년에 건축되었다.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백화점이면서 러시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의 시점에서 점포 수가 1200개 였으며,
혁명 후 굼 자체는 소련 정권에 의해 국유화되었지만, 개인 상점은 그대로 영업을 인정 받았다.
그 후 소련 성립 전후로 경제 정책의 변경을 거쳐 스탈린 독재 체제 하에서
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28년에 굼의 모든 점포는 국영화되었다.
그 후에도 굼은 모스크바의 소비 생활의 중심이자 소련에서는 몇 채 밖에 없었던
'물자가 부족하지 않은 상점'으로 소련 경제의 쇼윈도우 역할을 했다.


1985년에 등장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따라
굼 (Gum)에서 개인 상점이 부활하기 시작하여 서방 자본주의 국가 기업과의 합작한 상점이 진출했다.
소련 붕괴에 따라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가 부활한 후
1993년 예고르 가이다르 등에 의한 급진적인 경제 개혁 노선에 따라 굼 (Gum)도 민영화 되었다.
이 때 기존의 '국영 백화점'에서 '종합 백화점'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으나,
러시아어로는 국영도 종합도 "G"로 시작하는 맞춤법 때문에 GUM의 약어가 계속 사용되었다.
또한 붉은 광장에 접해 있어 과거의 입구가 다시 개방되어 굼은 러시아 혁명 이전의 모습으로 회귀했다.
2005년에는 러시아의 명품 유통 그룹이 대주주로 취득하고 현재까지 경영권을 쥐고 있으며,
굼에는 200 점포가 영업하고 있다.

굼 (Gum) 백화점


굼 (Gum) 백화점 야경


굼 (Gum) 백화점
광장 쪽 건물 중앙 현관의 맨 위엔 중세 러시아식 쌍탑을 올렸다.


현관 아치 위에 만물의 지배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예수 판토크라토르' 이콘이 붙어 있다.


현관 아치 안에 'ГУМ (굼)'이라는 약칭과 쌍탑 파사드(전면 구조),   완공 연도 1893, 
그 아래 '크라스나(붉은)광장' 이라고 썼고 맨 아래엔 영어 알파벳 이름 'GUM'도 딸려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전까지 1200개 가게가 들어서 번성했고
국유화된 뒤로도 계급을 초월해 이용할 수 있는 국영 백화점으로 운영하다
1928년 부터 스탈린이 경제개발 계획을 주관하는 관청으로 쓰면서 영업이 중단됐다.
1953년 다시 국영 백화점으로 문을 열면서 '국영 종합 스토어'의 약자 GUM
(러시아 알파벳으로는 ГУМ )이라는 이름을 비로소 얻었다.


굼 백화점 현관 아치 안에서 붉은 광장을 바라보며


굼은 민영화 후에도 GUM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는데 ​예전 '국영'을 뜻하는 단어의 첫자
G( 러시아알파벳 Г)  대신 '주된(Main)'이라는 단어의 첫 자 G( Г )로 바꿨다.
영어로 직역하면 'Main Universal Store'쯤 된다.

생필품난이 심했던 소련 시절에도 굼만큼은 언제나 풍족한 상품으로 넘쳐나
서방에 소비에트 경제를 과시하려는 '쇼윈도' 구실을 했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 줄이 붉은광장을 가로질러 늘어서곤 했다고 한다.


굼은 소련 붕괴 후 민영화 됐고 ​수퍼마켓 체인 메레크리오스토크를 거쳐 
2005년 명품 수입유통회사 '보스코 디 칠리에기'가 소유하고 있다. 
이탈리아식 이름이지만 러시아 회사이다.

현관 들어서면 남북으로 긴 회랑이 이어진다. 


천장을 돔유리로 처리해 시원스럽고 자연 채광이 환한 회랑 구조가 굼 설계의 백미다.
이런 회랑이 동서로 나란히 세 개가 가면서 쇼핑 공간의 축을 이룬다.
역사(驛舍)처럼 둥근 유리 천장을 이고 길이 200m 넘는 회랑이 늘어선 백화점은 세계 어디에도 다시 없을 것이다.

시원스럽고 자연 채광이 환한 천장


엔지니어 슈코프는 19세기 런던역을 본떠 유리 돔 천장을 설계했다.
직경 14m 둥근 천장에 유리 2만 장을 썼고 반원형 철골 5만 개(743톤)로 유리를 받쳐
폭설이 쌓여도 버텨내게 했다.

3층에 있는 삼성전자 매장


3층 명당 자리에 있다.


삼성 매장 앞에 서서 회랑을 내려다 본다.
굼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흔히 등장하는 전경이다.

화장실이 3층에 있어서 올라가면 입구에 보이는 장면.





굼 백화점 2층에서 인증샷


굼 백화점 2층에서 인증샷


[영상] 굼 백화점 1층


[영상] 굼 백화점 2층


굼 백화점 1층에서 인증샷




굼 백화점 1층에서 인증샷


굼 백화점 1층에서 인증샷


[영상] 굼 백화점 1층




모스크바 트베르스카야 거리(Tverskaya St) 지도


스타니슬라프스키(Stanislavsky) & 네미로비치-단첸코(Nemirovich-Danchenko) 기념비


트베르스카야 거리 모스크바 예술극장으로 통하는 카메르게르스키 골목의 입구에서

두 명의 입상 기념비를 만난다. 

주인공은 바로 사실주의적 연기 이론을 주창한 연출가 겸 배우이자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창립자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 (Константи́н Станисла́вский)와 그의 선배이자 동료였던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 (Владимир Немирович-Данченко).


스타니슬라프스키 & 네미로비치-단첸코 기념비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라프스키(Константи́н Серге́евич Станисла́вский, 1863년~1938년)는 

러시아의 연출가이며 배우이다. 

러시아의 모스크바 예술극장(Moscow Art Theater)을 창립했다.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주장한 연기 기법은 오늘날의 사실적인 연기 방식의 원조이자 모범이 되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 사상

그가 만들어 낸 시스템이 종래의 연극 시스템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예술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낳게 하는 원인을 분명히 갖고 있는 점이다. 

그가 제일 흥미를 느낀 것은 희로애락이란 정(情)의 외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태어나 발전하는 과정과 논리였다.

그는 배우 예술에 있어서 자기가 주장하는 방향을 '마음으로 체험하는 예술'이라 이름짓고, 

이것을 '형태로 나타내는 예술'과 구별하고 있다. 

그는 예술 창조의 순간에 있어서의 심리체험의 성실성을 배우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수성이라 생각하고, 

관객에게 사상적 · 정감적(情感的)으로 작용하는 최대의 힘을 갖는 것은 그러한 예술임을 강조하였다.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연기를 개척

스타니슬랍스키는 무대 위에서 배우가 자연스럽게 연기하여,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이 마치 실제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느껴야 한다고 여겼다.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라고도 하는데 이를 위해 우선 그는 배우의 연기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전 극에서 등장하는 왕이나 영웅 역할같이 과장되고 격한 연기는 관객에게 사실적인 느낌을 주기 힘들었던 것이다.


너무 크고 과격한 행동이나 과장되고 괴상한 목소리는 사실적인 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배우는 등장 인물의 특성을 드러낼 습관 같은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을 바보 같다고 여기는 인물을 스스로를 주먹으로 쥐어박는 행동을 습관적으로 할 수 있다.

아무리 맡은 배역이 지닌 객관적인 겉 모양을 똑같이 흉내내더라도, 

등장 인물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욕망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배우에게서 관객이 느끼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옷과 행동만 흉내낸다면, 관객은 배우를 '가짜 인형'으로 느낄 것이다. 


배우는 등장 인물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연극에서 겉으로는 잘난 체를 하며 남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행동을 하는 인물이라도, 

그 또는 그녀가 삶에서 정말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사랑'일 수 있다. 

이때 그 인물의 목표는 '남에게 사랑 받는 것'이다.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할의 마음 속 진짜 목표를 알고, 그것을 관객에게 느끼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배우 중에는 극 중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대사를 할 때만 열심히 연기하고, 

대사가 없을 때는 누워 있거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바로 죽지 않는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배우에게 마음 속으로 "집중의 원"(circle of attention)을 그리라고 권한다.

말 그대로 이 원을 그릴 때는, 배우가 집중해야 하는 공간을 포함하게 그려야한다. 

처음에는 작게 그려서 구체적인 사물을 담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다가 다른 연기자도 포함되도록, 점점 그 원을 넓게 그려 나가야 한다. 

이렇게 여러 배우들이 서로를 신경쓰면서 호응하는 연기를, "앙상블 연기(ensemble)"라고 한다.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Немирович-Данченко, 1858 ~ 1943)는 

러시아의 연출가다.

그의 예술의 특색은 가열성과 준엄성에 있으며, 그 연출의 필치는 힘의 집중과 간결성에 넘쳐 있었다. 

그의 연출법은 자연주의나 형식주의와도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희곡의 이념에 따라, 극에서 불필요한 것은 가차 없이 제거해 나가면서 

가장 풍부한 표현과 필요 불가결한 세부를 찾아 나갔다. 

그는 거짓말투성이의 '연극성'에 대적하면서도, 자연주의적인 단순성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가를 온순한 사진가로서 이해하는 일을 단연 거부하고, 동시에 정신빠진 형식주의 · 유미주의와 싸웠다. 

그의 예술적 입장, 원칙, 미학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와 동일하며, 

이 두 사람의 연극개혁자가 지향하는 길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러시아의 대표적 극단 및 그 극장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정식 명칭은 '고리키기념 국립 모스크바 예술 아카데미'로 그 대문자를 따서 므하트(MXAT)로 약칭한다. 

1890년 모스크바를 순방한 마이닝겐극단의 영향을 받아 1898년 아마추어 배우이자 연출가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y)와 극작가인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

(Vladimirovich-Danchenko)에 의해 설립되었다. 


초창기 극단의 주체는 창립자 두 사람에게 지도를 받은 예술문학협회와 

필하모닉 음악연극학교를 졸업한 아마추어들이었다.

두 창립자는, 새로운 극장은 누구든지 입장할 수 있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민중의 극장이 되어야 하고, 

또 무대 약속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연극의 이상에 반대되는 것을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의도 아래 극장을 열었다. 

그리고 스타니슬랍스키는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무대에 올린 첫 작품은 알렉세이 톨스토이(Aleksey Tolstoy)의 《표도르 요안노비치 황제》였다.


새로운 극장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연 작품이 필요했는데, 

이 극장의 큰 수확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와 

막심 고리키(Maxim Kor'kii) 두 극작가를 얻은 일이다. 

체호프의 《갈매기:The Seagull》 공연이 성공함으로써 극장은 획기적인 발전을 했으며, 

뒤를 이어 《바냐 아저씨》《세 자매》《벚꽃동산》 등이 공연되었다. 

1905년 혁명으로 이어진 당시 사회의 격동은 고리키의 《밑바닥》에 잘 반영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V.I.레닌(Lenin)과 A.V.루나차르스키(Lunacharsky)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서 

1920년대에 유럽과 미국을 순회공연했고, 1941년까지 러시아 고전극과 소비에트 창작극을 공연했다. 

이 극장은 1932년 고리키의 문학생활 40년을 기념하여 '고리키 기념극장'이라고 명명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1950년대 이후는 잠시 정체상태에 빠지기도 했으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런던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1970년에 I.A.예프레모프를 주임연출가로 맞아들였고, 

1987년에는 구관 및 부속극장, 1975년에 개관한 신관, 소무대까지 갖춘 총인원 400여 명의 대무대로 확장하고, 

신관을 제(諸)민족우호극장으로 개칭하였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탄생이 세계의 근대극 운동에 끼친 영향은 연극사상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술극장이라면 우선 <세 자매>나 <밑바닥>의 무대가 생각나는 것처럼,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안톤 체호프와 막심 고리키에 의해 성장한 극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극장의 상연 목록은 그러한 제정러시아 시대의 고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러시아 연극사에 한 시기를 이룬 프세볼로트 이바노프의 <장갑열차>, 

니콜라이 포고진의 <크레믈린의 큰 시계>를 비롯하여 수많은 현대극이 상연되고 있다. 

이것은 무대의 진실을 지향하는 리얼리즘을 향한 이 극장의 전통을 말해주고 있다. 

이 극장은 시가의 북쪽, 일반 주택지가 있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으며 

내부도 요란스런 장식이 전혀 없는 간소한 것으로 객석수는 1,183개, 3층 좌석의 제일 뒤 객석에서도 

무대가 잘 보여서 드라마 극장으로서는 아주 이상적인 규모이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Moscow Academic Art Theatre) 내부




[영상] 모스크바 예술극장


트베르스카야 거리 (Tverskaya St)



[영상] 트베르스카야 거리 (Tverskaya St)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기념비 (Monument to Sergei Prokofiev)


이 골목이 톨스토이나 차이콥스키 등 모스크바의 예술가들이 많이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고,
혁명기에 살았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Серге́й Проко́фьев)의 집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념 박물관이 된 그의 집 앞에 역시 그의 모습을 한 동상이 서 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기념비 (Monument to Sergei Prokofiev)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Sergei Prokofiev,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Прокофьев)는 구 소련
손초프카 (現 우크라이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에 심취해 다섯 살 때 첫 작품인 피아노 소품 '인디언 갈롭'을 작곡했다.
이어 아홉 살 때는 첫 오페라인 '거인'을 작곡해 집에서 연주하기도 했고, 체스에 몰두하기도 했다.
참고로 체스는 6살 때부터 두기 시작했고 체스도 음악만큼의 위상은 아니어도
알레힌, 카파블랑카, 라스커 등의 굵직굵직한 체스챔피언들과도 경기한 기보도 남아 있다.


아들이 확실히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간파한 어머니는 1902년에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을 맡고 있었던
작곡가 세르게이 타네예프에게 조기 교육을 시켜줄 것을 부탁했는데, 타네예프는 자신의 대위법 제자였던
작곡가 라인홀트 글리에르에게 손초프카로 가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해주도록 했다.
프로코피예프는 처음에 글리에르의 수업에 열성적으로 따랐지만,
이내 글리에르의 보수적인 이론 교육에 싫증을 냈다.


프로코피예프의 부모는 손초프카가 아들이 음악 교육을 받기에는 너무 낙후되고 고립되어 있다고 판단했고,
190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그 곳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에게
아들이 쓴 작품의 악보를 보여주면서 입학 시험을 치르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글라주노프는 제안을 받아들여 프로코피예프에게 시험을 보게 해 입학시켰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여기서도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고, 학생들이나 교수들도
프로코피예프의 도발적인 행동과 무례함에 당혹스러워했다.
여기서 쓴 작품들에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반음계 어법과 불협화음이 자주 사용되었고,
이는 보수적인 성향의 음악원에서 자주 논쟁을 유발했다.


음악원 졸업 후 프로코피예프는 젊고 도발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러시아 음악계에 일찌감치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처음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들에서
보수파와 혁신파 사이에 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일찍부터 주목받은 프로코피예프는 1911년 러시아의 유력 음악 출판사인
유르겐손과 계약해 자신의 작품들을 출판했고, 1913년부터는 해외 연주 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이들 여행에서 프로코피예프는 당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젊은 작곡가들과 손을 잡고
신작 발레들을 공연하던 흥행주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만났고,
디아길레프는 이 젊은 작곡가의 똘끼에 감탄했는지 발레를 써보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첫 번째로 나왔던 '알라와 롤리'는 디아길레프가 거부했고,
1차대전으로 인해 유럽의 음악 활동 전반이 위축되자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전쟁 중에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음악원에 재등록해 오르간을 배우기도 했고,
1917년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가지고 오페라 '도박사'를 완성해 초연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초연 계획은 같은 해 발생한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대신 프로코피예프는 고전주의 양식을 응용한 첫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면서 혼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혁명 후 수립된 사회주의 정권에서도 프로코피예프는 음악 활동을 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고,
당시 교육인민위원장이었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의 허가를 받아 191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니스트로 꽤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기서도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의 초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빚만 잔뜩 지고 버로우해야 했다.
미국에서도 실망한 프로코피예프는 다시 프랑스 파리로 옮겨갔고,
여기서 전쟁 전 만난 디아길레프에게 두 번째 발레 작품을 위촉받아 '어릿광대'를 작곡했다.
'어릿광대'는 1921년에 파리에서 초연되어 대박을 쳤고, 스트라빈스키와 모리스 라벨,
장 콕토를 비롯한 진보적 문예 인사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에는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을 시카고에서 초연해 역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후 뉴욕에서 재연했을 때는 망했어요 상태가 되어 또 한 번 미국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1923년에 다시 파리에 이주해 오페라 '불의 천사'의 작곡에 주력하는 한편,
두 번째 교향곡과 발레 '강철 계단'으로 모더니즘 작곡가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도발적인 작풍에도 점차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후 작곡 스타일을 조금씩 바꾸어갔다.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불의 천사'도 1927년에 베를린에서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시립 오페라단이 초연하기로 일정을 잡았지만, 악보 발송에 차질이 빚어지는 바람에 취소되어 또 물을 먹었다.

같은 해에는 1918년 출국한 이래 거의 9년 만에 소련에서 연주 여행을 했는데,
레닌그라드에서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이 소련 초연되어 절찬을 받고
자신도 피아니스트로 호평을 받는 등 예전과는 다른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때부터 프로코피예프는 다시 소련으로 귀국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소련 정권이 보여주던 억압과 통제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1929년에 디아길레프가 발레 '방탕한 아들'을 공연한 것을 끝으로 사망하자,
프로코피예프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소련 문화예술계와 작업을 시작해
발레와 영화음악 등을 소련에서 발표했다.
결국 1936년에 프로코피예프는 영구 귀국을 선언했고,
곧 전년도에 쓴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초연을 위해 당국과 교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부터 소련의 문화 정책은 소위 '사회주의 사실주의'노선을 따라가기 시작했고,
비록 초기의 독기와 똘기가 상당히 빠지기는 했지만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들도
차츰 형식주의에 빠졌다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도 여타 소련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정권의 노선에 영합하는
소위 '접대용' 작품들에 주력하는 쪽으로 창작 노선을 바꾸었고,
10월 혁명 20주년 기념 칸타타나 소련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
음악 동화 '피터와 늑대'등을 작곡해 선보였다.
하지만 칸타타의 경우 지나치게 거대하고 난잡하다는 당국의 비판을 받아
이후 프로코피예프 생전에 연주되지 못했고, 그 반대로 1937년에 작곡한 노골적인 쇠돌이 아저씨
써킹 작품인 '우리 시대의 노래'는 반대로 너무 단순하고 밋밋하다는 이유로 디스 당했다.
뭐 어쩌라고 부르주아 정신을 인민에게 깃들게 하지 않으려는 정책과 충돌한다고 했다나.
다만 피터와 늑대는 어린이를 위한 우화로서, 그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다.


이 시기 이후로 프로코피예프의 해외 여행은 크게 제한을 받았고,
1938년에 마지막으로 미국 순회 공연을 가진 뒤에는 당국으로부터 여권을 압수당해
이후 평생 동안 소련에 짱박혀 있어야 했다.
게다가 소련 정주 선언 이래 의욕적으로 작곡한 오페라 '세묜 코트코'도 초연에 심하게 애를 먹었는데,
초연 직전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독일과 관계가 개선되면서 독일을 악역으로 설정한 대본을 급히 수정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오페라의 초연을 같이 준비하던 연출가 브세볼로드 메이에르홀드가 대숙청에 쓸려나갔고,
프로코피예프는 자신도 마찬가지로 끔살당할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로코피예프는 1939년에 스탈린 동무의 60번째 생일에 맞추어
 '건배'라는 제목의 한층 더 노골적인 후빨 칸타타를 발표했고,
이 작품은 폐기된 이전의 두 교성곡들과 달리 공식적으로 환영받았다.
그리고 당시 소련에서 가장 주목받던 영화 감독들 중 한 사람이었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
프로코피예프에게 자신의 신작 영화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OST를 작곡해 달라고
부탁해온 것도 '명예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예이젠시테인은 프로코피예프에게 가능한 모든 편의를 베풀었고,
심지어 몇몇 전투 장면에서는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리듬에 영상을 맞추어 촬영하는 등
매우 긴밀한 협업으로 걸작을 만들어냈다.
프로코피예프는 영화 발표 후 OST의 일부를 연주회용 칸타타로 다듬어 내놓았고,
이 칸타타는 프로코피예프의 후기 작품들 중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도 피아노 소나타 6-8번(흔히 전쟁소나타라고 부름) 같은 순수 기악 작품들도 호평을 받았다.


독소전쟁이 터진 뒤에는 다른 주요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동부로 피신했고,
거기서도 이런저런 정권 영합성 작품들 외에 바이올린 소나타나 현악 4중주 등을 계속 작곡했다.
전쟁 후반기인 1944년에 작곡한 교향곡 5번은 이듬해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하차투리안의 교향곡 2번 등과 함께
전쟁 중 작곡된 소련 교향곡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 널리 선전되었다.


하지만 그 즈음 낙상 사고로 입은 뇌진탕으로 인해 건강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해고,
종전 후 스탈린의 심복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를 앞세워 다시 문화예술계를 조이기 시작한
소련 당국의 압박에도 다시금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피아노 소나타 9번과 교향곡 6번이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1948년에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친선'으로 불붙은 대대적인 음악계 숙청 운동에도 휘말려
공공의 적으로 신나게 까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전쟁 중 버로우해야 했던 '세묜 코트코'를 대신할 새 오페라였던 '전쟁과 평화'도 생전에 초연되지 못했고,
예이젠시테인과 작업한 《이반 뇌제》의 2부도 상영금지크리를 먹는 등 계속 불운이 이어졌다.
이미 건강도 계속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창작 활동도 크게 위축되어 있었고,
1952년에 교향곡 7번의 초연을 마지막으로 예전 작품들을 개작하면서 투병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3월에 뇌출혈로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필이면 프로코피예프가 죽은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강철의 대원수 스탈린의 사망 소식이 발표되면서,
프로코피예프의 사망 소식은 완전히 묻혔다.
심지어 프로코피예프의 집이 붉은 광장에서 가까웠던 탓에, 서기장 동무를 조문하고자 광장으로 몰려들던
수십만 명의 군중들을 피해 다른 거리들을 전전하며 한참을 돌아나가 관을 운구해야 했다.
노보데비치 묘지에서 극히 간소한 장례식이 열린 뒤에도 한 동안 소련 언론은
인간백정 아저씨의 장례식만 줄창 보도하느라 프로코피예프의 부고를 싣지도 않았다.
심지어 조화조차 스탈린을 조문하기 위해 인민들이 몽땅 구입해가서,
프로코피예프의 장례식에는 조화를 쓸 수 없었다.
그나마 평생 앙숙이었으면서도 서로 능력은 인정하는 사이였던 쇼스타코비치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게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 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1860년 1월 29일 ~ 1904년 7월 15일)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가이다.


체호프는 1860년 흑해 위에 있는 아조프 해 연안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Taganrog)에서
식민지 수입 상품점을 하는 아버지 파벨 예고로비치 (Pavel Egorovič)와
어머니 예브게니야 야코브레브나 모로조바 (Evgenija Jakovlevna Morozov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조부는 원래 농노였으며 부친은 조그마한 채소가게를 했었다.
체호프는 어릴 때부터 가게를 도와야만 했다.


1867년 고향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예비학교를 다닌 후,
1869년 고전 교육을 목표로 하는 타간로크 인문학교에 입학한다.
1872년 성적 불량으로 3학년 과정을 반복하며, 3년 뒤 고대 그리스어 시험에 낙제하여 다시 5학년 과정을 반복한다.


지방정치와 교회합창에 너무 열중한 부친은 파산, 체호프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며,
학교 때문에 홀로 남은 체호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스크바로 나왔다.
15세의 체호프는 큰 형 알렉산드르와 함께 문학 창작에 열중한다.
두 형 알렉산드르와 니콜라이 그리고 동생 이반이 5년 과정으로 타간로크 학교를 졸업한 반면,
체호프은 1879년 8년 과정으로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대학 진학 자격을 얻는다.
같은 해 타간로크 모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모스크바로 올라가 그 곳에 이미 자리를 잡은 부모 형제들과 재회하며,
같은해 10월 모스크바 대학의 의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 때부터 체호프는 의학공부를 하는 한편 타간로크에서 받는 장학금과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의 잡지에 유머 단편을 써서 그 기고료로 부모와 세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


1887년 연극 이바노프의 첫 상연이 있기까지 체호프은 문학잡지 《귀뚜라미(Strekoza)》, 《파편(Oskolski)》,
《자명종(Budilnik)》, 《페테르부르크 신문》 등에 100줄에서 150줄로 한정된 짧은 단편과 수필을 일주일이 멀다하고 기고한다.
특히 1883년에는 《Oskolski》에 매 이주일마다 모스크바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컬럼을 맡는다.
체호프의 글은 호평을 받았으며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신진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이처럼 글을 써 돈벌이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83년 10월부터 의학 졸업시험 준비에 열중하여 다음해 9월 졸업을 했다.
그러나 23세 때 걸린 폐결핵이 체호프의 건강을 늘 위협하게 된다.
그 해 11월에 처음 결핵 증세로 요양하게 되었다.
1884년에는 또한 첫 단편집 《멜포네네의 우화》가 출판된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호프는 시베리아, 사할린 섬 여행을 계획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사할린 섬에 유배된 수인(囚人)들의 비참한 생활은 체호프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는 후에 이때의 기행문을 쓴 바 있다.


7개월 이상이나 걸려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와 1892년, 교외에 저택을 사서 양친 · 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의사로서 이웃 농부들의 건강을 돌보거나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얄타를 마주보는 크림 반도로 옮겼다.
1900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이에 항의하여 스스로 사임하고
1904년에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4년의 생애를 마쳤다.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록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長幕物) 2편, 1막물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1887년에 쓰여진 <이바노프>는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교적으로는 <프라토노프>보다 앞섰으나 아직도 과잉된 극적 효과를 노리는
낡은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음의 <숲의 정(精)> 실패는 체호프의 극작을 한때 멈추게 했으나
이 무렵에 쓰인 1막물에는 <곰>(1888)이나 <결혼신청>(1889)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


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갈매기>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바냐 아저씨>(1899), <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3)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會話劇)을 확립했다.


<갈매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 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2년 후에 다시 새로 설립된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다루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희극으로서 쓰여진 이 작품을 오히려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정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체호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 체호프의 작품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상연하게 됐다.


<바냐 아저씨>는 앞서의 <숲의 정>을 다시 쓴 것으로서 그 톨스토이즘이나
멜로드라마의 성격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세 자매>는 초연 후 전집에 수록되자 다시 고쳐쓴 바 있다.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은 체호프의 44세 생일에 초연의 막이 올랐다.


체호프의 희곡(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訂正)된 해석이다.
<세 자매>나 <벚꽃동산>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인증샷


트베르스카야 거리 (Tverskaya St) 레스토랑에서 점심 메뉴


유리 돌고루키 (Юрий Долгорукий)의 기마상

유리 돌고루키 (1099 ~ 1157)는 키예프 대공국의 대공 (재위: 1149년 ~ 1151년)으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Monomakh) 대공의 작은 아들이다.


1121년에 영지를 로스토프에서 수즈달로 옮김으로서 그의 영지는 로스토프-수즈달 공국으로 불리게 된다.
유리 돌고루키는 발트계 및 핀족 계열의 이민족들과 맞서 싸우며 영토를 넓히고,
트베리, 모스크바 등 수많은 도시와 요새들을 건설하였다.
유리 돌고루키는 이후 랴잔 공국을 굴복시킨 후 1149년 키예프를 점령하였지만
1151년 이자슬라프에 의해 키예프에서 쫓겨났으며,
1155년 키예프를 재점령하고 난 후 1157년에 급사하였다.

유리 돌고루키 (Юрий Долгорукий)의 기마상


레닌(Влади́мир Ле́нин)의 좌상
유리 돌고루키의 동상 뒤, 광장의 동편 끝에는 레닌(Влади́мир Ле́нин)의 좌상이 있다.

혁명광장


부활의 문을 나서면 나오는 큰길 오코트니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500m쯤 가면 혁명 광장이 있고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흉상 뒷 모습과 광장 건너편 북쪽에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볼쇼이 극장이 보인다.

 칼 마르크스 (Karl Marx)의 흉상


볼쇼이 극장 앞으로 대로 건너편 혁명 광장에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흉상이 있다.
기단에 새겨진 문구는 그가 쓴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

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Bolshoi Theater)


볼쇼이극장은 대극장이란 뜻으로 모스크바 역사에서 빛나는 문화 유산이다.
현 볼쇼이극장의 연혁은 1776년 페터 우루쏘브(Peter Urussov) 대공의 저택에서
오페라와 발레를 공연했던 소규모 극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몇 년 후 우루쏘브 대공의 개인 저택에서의 공연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페트로브카 (Petrovka)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공인을 받아 오페라와 발레를 정식으로 공연하기 시작했다.


1805년 이 극장이 화재로 전소되자 제정러시아는 당대의 안드레이 미하일로프(Andrei Mikahilov)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새로운 위용의 오페라극장을 짓도록 했다.
미하일로프는 인근에 말리(Maly)극장을 건설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모든 극장은 제국황실 소유였다.
당시 모스크바와 생페테르부르크에는 각각 두 곳의 극장이 있었다.
하나는 주로 오페라와 발레를 공연하는 극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극이나 코미디 연극을 주로 공연하는 극장이었다.
오페라와 발레는 연극보다 좀 더 귀족적이라고 생각한 제정러시아는 오페라와 발레 전용 극장을
볼쇼이 (그랜드: Large) 극장이라고 부르고 연극전용 극장은 말리 (소규모: Little) 극장이라고 불렀다.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Bolshoi Theater)


볼쇼이 극장은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했지만 한 번의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확장 증축하여 현재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격조있는 공연이 열리며
이를 관람하는 사람들 또한 매너있는 태도로 감상한다고 한다.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Bolshoi Theater) 내부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Bolshoi Theater)




바흐탄고프 극장 (E. Vakhtangov State Academical Theatre)


이 건물은 배우이자 연극 감독이었던 예브게니 바흐탄고프

(Yevgeny Bagrationovich Vakhtangov, Евге́ний Багратио́нович Вахта́нгов 1883~1922)의 

이름을 붙인 바흐탄고프 극장 (E. Vakhtangov State Academical Theatre)이다. 

1921년 11월, 바흐탄고프의 연극 스튜디오로 만들어져 1922년에 “투란도트 공주”를 첫 시연했다. 

바흐탄고프가 첫 시연 후 사망하자 그의 명 연출을 추모하기 위해 투란도트 공주 분수대를 만들었다. 

그의 사후에도 재능 있는 제자들은 창립자의 뜻을 훌륭하게 이어갔다.


러시아 말르이(Maly, 1824년) 극장이나 모스크바 예술극장(1898년)처럼 지금도 제1선의 극장이다. 

여전히 이 극장에 대한 애호가와 지지자들이 많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현재의 건물은 독소 전쟁(1941~1945)때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건축물. 

대형 객석은 최대 1055석, 작은 객석은 최대 250명을 수용하며 부대시설로 예술 카페 등이 있다. 

비록 이 극장에서 공연은 보지 못하고 극장 내부에 붙여진 포스터를 보는 것으로 족했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공연을 보고 싶은 곳이다.


바흐탄고프 극장 


예브게니 바흐탄고프는 러시아의 연출가다.

혁명 전부터 모스크바 예술극장 및 그 연구 극장에서 연출가 · 배우로서 일하는 한편, 

젊은 학생들의 연극 서클의 지도자가 되었고 또한 몇 개의 연극학교에서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가르침을 넓히는 배우 교육자가 되었다. 


1920년 그가 이끄는 집단은 예술극장 제3 연구 극장의 명칭을 받고, 이듬해 11월 그가 연출한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성 안토니의 기적>으로 새로운 극장이 공식적으로 발족하였으며, 이것이 바흐탄고프 극장의 창립일이 되었다. 

이 밖에 그가 연출한 작품은 예술극장 제1연구 극장에서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에릭크 14세>, 

유태극장 가비마에서의 S. 안스키의 <가디부크>, 카를로 고치(Carlo Gozzi) 원작의 <투란도트 공주>뿐이다. 

이들 4개의 작품은 혁명 전 그가 연출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920년대에 있어서의 혁명연극은 무대에서의 내면적 체험을 부정하고, 배우술을 단순한 외면적 기술로 만들고 말았다. 

그들의 연기는 그 기교의 다채로움으로 해서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기는 했으나, 

등장인물의 행동은 내면의 심리적 필연성이 결여(缺如)된 것이었다. 

바흐탄고프의 길은 이와는 달리, 자연주의나 심리주의 연극에서 가치있는 것, 

즉 인간감정의 살아 있는 진실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로부터 구한 것이다. 

이것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와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의 연극 시스템의 유기적 결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흐탄고프 극장


아르바트 한가운데에 1921년부터 화려한 연극 극장이 있었다. 

1941년 7월 독일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되고, 1947년 재건되었다.

극장을 더욱 화려하고 섬세하게 꾸미고 각 공연을 축제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 연극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바흐탄고프의 이름을 따 극장을 설립하였다. 


 '투란도트 (Turandot) 공주의 상'


오른편 분수 한가운데에는 1922년 초연된 '투란도트 공주'의 무대에 올랐던 배우들을 기념하여 

황금동상으로 된 투란도트 공주의 상이 세워졌다.

1997년 오페라 투란도트 (Opera Turandot) 초연 75주년에 맞춰 알렉산더 부르가노프라는 조각가가 세웠다.

오페라 공연의 투란도트 줄거리는 중국의 공주 투란도트가 청혼의 조건으로 수수께끼를 내걸자

페르시아의 칼리프 왕자가 도전하여 공주의 사랑을 쟁취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오페라 <투란도트 Turandot>는 전설의 시대 중국이 배경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우화 작가 카를로 고치(Carlo Gozzi:1720~1806)가 이야기를 썼고, 

후일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1759~1805)가 근대 희곡 스타일로 다시 만든 것을 

오페라의 원작으로 삼았다.


남자를 협오하는 중국의 공주 투란도트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오는 구혼자들을 모두 물리치는데, 그 방법이 독특하다.

공주는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낸다. 모두 맞히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지만, 하나라도 틀리면 곧바로 참수형이다.

이때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Calaf)가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그녀에게 구혼장을 내민다.

왕자는 우여곡절 끝에 난해한 수수께끼를 모두를 풀어내지만 그래도 공주는 계속해서 그의 구애를 거부한다.

왕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내 이름을 알아내면 공주 당신의 승리,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랑으로 당신의 마음을 녹여낼 것입니다."


위대한 사랑의 승리를 노래한 푸치니 (Giacomo Puccini:1858~1924)의 찬연하게 빛나는 최후의 오페라.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푸치니는 교회 음악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서북부의 도시 루카(Lucca)에서 나고 자랐다. 

1876년 '아이다'를 보기 위해 루카에서 피사까지 30km나 되는 거리를 걸어갔을 정도로 

베르디의 작품에 깊은 애정을 가졌으며, 그의 작품에 크게 감명받고 오페라 작곡가의 꿈을 품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베르디의 작품처럼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이탈리아 오페라 전통의 상징이 됐다.


푸치니 음악의 특별함은 극적인 음악표현에 있다. 

그는 대본과 음악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완벽주의자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강렬하고도 섬세한 음악은 마치 귀로 한 편의 극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특히 유작이 된 '투란도트'에 많은 애정을 쏟았는데, 작곡할 당시 푸치니는 

“이 전의 오페라는 잊어도 좋다” 라고 말했을 만큼 작품에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음악을 창작해 내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투란도트'의 어두운 동화 속 분위기와 고대 중국설화의 소재를 극대화하기 위해 

동양적인 언어와 중국 선율을 가져와 풍부한 소리 세계를 만들어 내면서 

그는 이전의 작품들보다 훨씬 더 독창적이며 화려한 음악색을 표현해 냈다.


'투란도트'는 카를로 고치(Carlo Gozzi)의 희곡으로 페르시아의 서사시 '7명의 미녀(Haft Peycar)'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12세기 시인 니자미(Nizami)가 고대 중국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투란도트 공주에게 

구애하기 위해 노력하는 칼라프 왕자의 이야기를 썼다고 전해진다. 

푸치니는 주세페 아다미와 레나토 시모니와 함께 대본 작업에 들어갔다. 

그동안 한 번도 다뤄 보지 않은 초현실적인 시대 배경과 낯선 중국문화를 재현해 내기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음에도 환상적인 내용은 그를 매료시켰고, 

끊임없는 창작과 수정을 거듭하고서야 마침내 2막을 완성할 수 있었다.


<투란도트>는 푸치니에게는 여러모로 낯선 소재였다. 

그동안은 청순가련형의 여주인공을 앞세워 달콤한 로멘티시즘으로 가득 찬 오페라를 만들었던 그였다. 

<라보엠>의 미미, <토스카>의 토스카와 <나비부인>의 초초상 등은 모두 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전형적인 푸치니 형의 여주인공이다.

그러나 투란도트 공주는 출발부터 다르다. 

남자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남자를 혐오하거나 멸시한다.


그는 이탈리아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머나먼 땅 중국의 공주다. 

이 색다른 테마를 푸치니는 보다 현대적인 음악어법으로 풀어가기로 마음먹는다. 

바그너의 반음계와 불협하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현란한 관현악, 

드뷔시의 섬세하고 신비한 인상주의 음악의 요소를 모두 다 쓸어 담았다.


마침 내용 자체도 비극과 희극이 뒤섞여 있다. 

영웅적인 구애자인 칼라프 왕자와 차가운 매력의 투란도트 공주, 그리고 두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며 

속을 태우는 여자 노예 류(Liu)는 전형적인 낭만 오페라의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그들 주위를 핑(Ping) · 팡(Pang) · 퐁(Pong)이라는 희극적 이름의 중국대신들이 감싼다.


조성의 모호함이 던져주는 신비감은 곧 동양세계를 다룬 이 오페라를 보다 실감나게 만들었고, 

뒤뚱거리듯이 불완전한 리듬으로 단숨에 중국 음악의 분위기를 표현해 낸 것도 

분명 푸치니만의 천재적인 능력이다.


5성부로 폭넓게  구성된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섬세한 감정선을 표현하고, 

무대 위와 뒤쪽에 각각 배치된 트럼펫, 트럼본, 섹소폰 등은 현란한 입체음향으로 관객들의 귀를 즐겁게 한다. 

팀파니, 트라이앵글, 북, 심벌즈, 공, 첼레스타, 탐탐, 글로겐슈필 등 총동원된 타악기들이 

이국적 신비감이 넘치는 음악을 들려주고, 동양적인 5음계 등도 절묘하게 깊은 매혹의 세계로 이끈다.


3막의 도입부에서 동터 오는 북경의 신비로운 새벽하늘을 묘사하는 음악은 

특히나 푸치니 음악 세계의 절정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음악을 통한 인물묘사도 대단히 뛰어나다. 

칼라프는 현악기, 투란도트는 목관과 현, 류는 목관 현 솔로, 핑·팡·퐁 

세 대신들은 피콜로와 첼레스타, 황제는 트럼펫을 위시한 금관 등이 테마악기로 배치돼 

관객들은 들리는 음악만으로도 각 인물들의 개성과 상호관계를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고려인 3세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


러시아 젊은이들의 자유 영혼이 숨쉬는 아르바트 거리 한쪽에는 

우리에게 조금 익숙한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아르바트 거리 한쪽, 길이 100m가 채 안되는 골목에 빅토르 초이의 벽화가 있다.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1962 ~ 1990)는 소련의 록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겸 영화배우이며, 소련 록 음악 밴드 키노(КИНО)의 리더였다.


이 골목은 초이가 무명가수일 때 노래를 부르던 곳이었다.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등진 이후 이곳은 초이를 위한 성전이 되었다. 

골목 담벼락에는 초이를 기리는 낙서들과 사진으로 가득했다. 

'초이를 사랑 한다.' '초이는 영원하다'... 같은 내용들이라고 한다. 

한 구석에는 누가 갖다두었지 싱싱한 장미꽃이 한다발 놓여져 있고, 

담배불이 향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빅토르 초이는 한국인 3세로 아버지 쪽이 고려인이다. 

락밴드 '키노'를 이끌었고 글도 쓰고 영화도 만들었다. 

영화를 사랑했던 초이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출연까지 했었다. 

그의 노래 모두는 4장의 앨범으로 나왔다. 

그 앨범 모두가 러시아 젊은이들의 가슴에 강하게 자리잡았고, 

1991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자동차 사고로 요절하면서 

그의 노래와 이야기는 신화가 되어 러시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 (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1962~1990)


빅토르 초이는 1962년 6월 21일,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슬하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출생하였다. 

친조부 막심 초이(최승준)는 본래 대한제국 함경북도 성진 출생이었고 

후일 일제 강점기 초기에 러시아 제국으로 건너간 고려인 출신이었다.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소련 카자흐스탄 사회주의 자치공화국 

키질로르다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 차트 등의 대중 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 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그 당시 소련 정부에게 너무도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 표현의 자유 등 표현 관련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원조를 받지 못했고 관영 매체에 의해 마약 중독자나 

부랑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빅토르 초이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세로프 미술전문학교에 입학였으나, 

결국 낮은 성적 때문에 1977년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 후 레닌그라드 기술전문학교에서 목공업을 공부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또 중퇴하였다.

이와 같은 사항들로 인하여 그의 학력은 전문대학 중퇴이다. 

그러나 그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록 음악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보일러 수리공으로 일을 하면서 파티 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

레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던 극소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초이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데 솔로로 연주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그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데뷰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키노

(러시아어로 영화, 극장이라는 뜻이다)를 결성한다. 

그들은 빅토르 초이의 아파트에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이 테입은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의 록 매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


1982년 키노는 첫 앨범인 45(소로크 피아트; 러시아어로 45라는 뜻)를 발표한다. 

이 앨범의 이름이 45로 정해진 것은, 이 앨범의 재생 시간이 총 45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46 (쏘록 쉐스찌)라는 앨범도 냈다. 

이 앨범에서 빅토르 초이는 음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엘렉트리치카(Elektrichka, 소련의 광역 전철)"이란 노래는 원치 않은 곳으로 가는 

전차에 끼여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가사는 분명히 당시의 소련에서의 삶을 은유한 것이었으며, 이 노래는 공연이 금지된다. 

이 노래의 메시지로 노래는 반항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며 

키노와 빅토르 초이는 그들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제2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콘서트에서 키노는 자신의 정치색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키노는 빅토르 초이의 반전음악 작품인 "내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포한다"로 1등을 차지하고, 

이 노래는 당시 수만의 소련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다.


1987년은 키노의 해였다. 

7집 앨범 《혈액형(Gruppa krovi)》은 "키노마니아"로까지 불리는 사회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글라스노스트로 조금 더 개방적이 된 정치상황은 그의 가장 정치색이 짙은 앨범인 

"혈액형"을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앨범의 메시지만이 청중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고, 앨범에 담긴 음악 또한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곡은 소련의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었으며, 능동적으로 나가서 국가를 변화시키라고 호소했다. 

몇 개의 노래는 소련을 옥죄고 있던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앨범은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켰다. 

1988년에는 영화 《이글라》의 주연으로 영화배우 데뷔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년간 그는 몇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찍었으며 영화제에 

그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으며 밴드는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당시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런 것에 비하여 그는 소위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 실에서 살며 일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즐기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라도 금액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매우 충분했다.


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열어 6만 2천의 팬들을 모았다. 

1990년 8월 14일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쳤으며, 레닌그라드에서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8월 15일 아침 소련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투쿰스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마주오던 트럭과 충돌하였고 그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가 운전하였던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으며, 타이어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음모론에 따르면, KGB가 의도적으로 초이를 살해했다고 한다. 

평소 반전과 평화 사상을 주장하던 초이가 러시아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럭 기사가 종적을 감추고, 초이에게 유리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기각되었으며

초이는 졸지도 운전 규칙을 어기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트럭 기사가 그에게 돌진했다는 사실, 

시체가 봉인된 관에 담겨 서둘러 매장되었다는 사실 등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현재 러시아 경찰과 정부는 27년 동안 이 사안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1990년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의미를 간추린다.


"빅토르 초이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도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빅토르 초이였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인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없는 유일한 락커가 빅토르 초이이다. 

그는 그가 노래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


놀랍게도 교통사고에서 온전하게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다음 앨범에 쓰일 

그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이었다. 

목소리는 남은 멤버들의 나머지 녹음과 합쳐져 현재는 "블랙 앨범"으로 불리는 앨범으로 남아 있다. 

이 유작 앨범은 밴드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며 러시아 록 역사에 있어서 키노의 자리를 확고하게 했으며, 

빅토르 초이를 최고의 영웅이자 전설로 만들었다.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 인증샷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 인증샷


[영상]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


러시아 록 음악의 전설 빅토르 초이


키노(КИНО)가 소비에트 음악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들은 이전의 다른 어떤 그룹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악과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키노는 모던 러시아 록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키노는 아직도 러시아 전역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레닌그라드 벽에는 그들에 대한 그라피티가 그려지고 있으며,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에는 한 벽 전체가 그들에게 헌정되었고, 

그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팬들이 모인다. 

사망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록 밴드들이 모여 빅토르 초이의 38번째 생일을 맞아 

빅토르 초이의 헌정 음반을 만들었다.


러시아 록 음악의 전설 빅토르 초이


사후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는 여전히 우상시되고 있으며 그의 팬덤은 더욱 거대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적어도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로 “그와 같은 가사를 쓴 사람은 없었다”

빅토르 최는 1980년대 중반 소련 사회의 급진적 개혁의 시기였던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청년 대중문화의 가장 돋보이는 스타였다. 

당시 소련 정부가 록음악을 허가함으로써 신문들은 록 콘서트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 시절 빅토르 최와 그가 이끈 그룹 ‘키노’는 가장 인기 있는 록밴드 중 하나였다.


키노의 노래들에는 당시 청년층의 세계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었다. 

기성 세대와는 다른, 젊은이들의 언어로 씌여진 키노의 노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와 시적 울림을 갖고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록 음악의 또 다른 우상이었던 그룹 

‘아크바리움’의 리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빅토르는 단순, 명료, 진실 그 자체다. 

그와 같은 가사를 쓴 사람은 러시아에서 아무도 없었다. 

그가 아직 새파란 애송이였을 때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제 뒤로 물러나고 자네들이 러시아를 대표하는 그룹이 될 거야’라고. 

그러자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상] Виктор Цой - Перемен '변화'


둘째로 ‘변화’의 시대

그의 노래 대부분이 한 개인이 겪는 감정에 대한 것이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징이었던 히트곡 ‘변화’도 그가 만든 노래였다. 

사람들은 이 노래 속에서 소련식 생활방식의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들었다. 

‘변화’가 처음 공개된 것은 1986년이었지만 이듬해 개봉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의 전설적 영화 <아싸(Асса)> 덕분에 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리고 말그대로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서 ‘페레스트로이카의 노래’로 각인됐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반영한 빅토르 최의 노래가 

자신이 소련의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우리의 심장이 변화를 원한다

우리의 두 눈이 변화를 원한다

우리의 웃음소리와 우리의 눈물 속에서

그리고 혈관 박동 속에서

변화가 꿈틀거린다!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이 후렴구에서 정치적 마니페스토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룹 키노의 멤버들은 그런 직설적 해석에 거부감을 표했다. 

키노의 기타리스트 알렉세이 리빈은 빅토르가 염두에 둔 것이 

‘정치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더 깊은 변화’였다고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클럽 캄차카(Камчатка)


셋째로 그의 생애

빅토르 초이의 인기에는 그의 경력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소련 엔지니어를 부친으로 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 초 그는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보일러실에서 화부로 일했다. 

이 보일러실에는 ‘캄차카’라는 별칭이 붙었으며 전설적인 장소가 됐다. 

자신에 대한 한 다큐 영화에서 그는 바로 이 보일러실의 화실에 석탄을 퍼넣으며 

“나는 내가 자유롭다고 느낀다. 나는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했다.


그가 보일러실에서 일하게 된 것은 그의 음악 활동이 당시의 공권력 구조 밖에서 행해졌기 때문이었다. 

소련에서 무직자는 형법의 ‘무위도식죄(тунеядство)’로 기소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현재 ‘캄차카’ 보일러실은 빅토르 초이의 박물관 겸 클럽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클럽 캄차카(Камчатка)


클럽 캄차카는 빅토르 초이를 기념하는 공간으로서, 그가 활동했던 당시의 자료도 보관되어 있고, 

관련 영상이나 CD를 팔며, 빅토르 최 - 키노의 커버 공연을 비롯해 

80년대 당시의 러시아 록 관련 공연을 하는 곳이다. 

키노의 시대를 기념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캄차카는 원래 러시아의 지명인데, 이 단어가 '보일러'를 뜻하는 별명 같은 것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캄차카가 보일러로 쓰이는 까닭인즉슨 빅토르 초이는 원래 저작권이나 정부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음악 활동을 하며 수입을 거의 얻지 못했고, 그래서 보일러공으로 일하면서 록밴드 활동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이 클럽 캄차카가 세워진 장소는 바로 빅토르 최가 보일러공으로 일했고, 

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했던 지하의 작은 보일러 방이었던 것이다. 

캄차카는 빅토르 초이의 흔적 위에 세워진 곳이다.


[영상] Bar-Museum Kamchatka (бар-музей "Камчатка")


[영상] Club Kamchatka "Acoustic Bard - Rock Concert (Акустический бард - рок концерт)

넷째로 영화 속 ‘키노’ - 영화 <바늘>의 장면


빅토르 초이와 키노에 유명세를 안겨준 것은 영화였다. 

키노의 공연 장면으로 끝이 나는 위에서 언급한 영화 <아사> 외에도 빅토르는 1988년 

<바늘(Игла)>이란 영화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영화에서 빅토르는 마약상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주인공 역을 맡았다. 

영화 속에서 키노의 최고 인기곡인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과 

‘태양이란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이 OST로 울려퍼진다.


<바늘>은 1989년 소련에서 개봉된 영화 흥행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다. 

당시 인기있던 영화잡지 ‘소련 스크린’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빅토르는 

‘올해 최고의 남자배우’로 뽑히기도 했다.


러시아 젊은이들이 빅토르 초이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


다섯째로 빅토르 초이의 우상화

빅토르 초이는 1990년 8월 리가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사고는 그가 몰던 자동차의 중앙선 침범으로 일어났으며 과로로 인한 졸음 음전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시 그는 28세였다. 그의 비극적 죽음 이후 팬들은 그를 우상화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의 유명한 예술가의 거리 아르바트에 등장한 ‘빅토르 초이의 벽 (Стена Цоя)’은 그를 상징하는 것이 됐다. 

그가 죽은지 30년이 지났지만 벽 위에는 ‘최는 살아 있다’ 또는 

‘비탸(빅토르의 애칭)는 죽지 않았다. 담배 한 대 피우러 갔을 뿐’이라는 글귀 등 

그래피티와 새로운 문장들이 계속 추가되고 있다. 다른 도시들에도 이런 벽이 존재한다.


빅토르 초이는 여전히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 중 한 명이다. 

검색포털 ‘얀덱스’의 집계 결과에 따르면 ‘얀덱스 음악’ 서비스에서 

빅토르 초이의 노래가 플레이된 총 시간은 무려 1000년이 넘었다. 

유명 영화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조만간 빅토르에 대한 영화 촬영을 시작할 계획이며 

키노의 노래는 주기적으로 여러 인기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옛 정취가 서린 골목은 빅토르 초이 벽을 지나 오른쪽으로 있다.


스파소페스콥스키 골목을 들어서면 전형적인 모스크바 스타일의 교회를 볼 수있다.

다섯 개의 쿠폴과 높은 종탑이 있는 그리스도 변용 교회는 1711년에 건축되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화가 폴레노프의 <모스크바의 뜰>이라는 그림에서

이 교회가 시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교회 앞 정원은 푸시킨이 자주 산책을 했다고 하여 푸시킨 정원이라고 불리며

푸시킨 동상 앞에는 그의 대표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원문이 적혀 있는 비석이 놓여 있다.


아르바트스카야역


아르세니 모로조프 (Arseny Morozov) 저택


메트로 3호선 아르바트스카야 역에서 나와 맞은 편에 보이는 네오 고딕 양식의 독특한 건축물은

19세기 후반 모스크바의 부호 모로조프의 저택이다.

10월 혁명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본거지가 되었고 1918~1928년에는 예술가협회 극장이 들어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동참하여 아방가르드 연극이 상연되기도 하였다.


이후 외무 인민위원회에 넘겨져 여러 국가의 대사관들이 이 건물에 들어오게 되었다.

1928~1940년에는 일본 대사관이, 1941~1945년은 영국대사관과 신문사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1952년부터 2년간은 인도대사관이 들어오기도 했다. 

1958년부터 민족 친선의 집이라고 불리기 시작아여 콘퍼런스, 해외 문화행사, 영화상영, 관계자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2006년 G8 회담을 준비하여 2003년부터 정부의 관할 아래 보수 및 재건축을 하고 

현재까지 국가 회담이나 국제기관 콘퍼런스 장소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아르세니 모조로프 저택이 있는 길과 연결된 대로는 신아르바트 거리이다.




러시아 동방정교회 (Khram Prepodobnogo Simeona Stolpnika Na Povarskoy)

구 아르바트와 대조되는 현대적인 아스팔트 대로 신아르바트 거리 (New Arbat Ave)에 있다. 



러시아 동방정교회 내부


러시아 동방정교회 내부


러시아 동방정교회 내부


러시아 동방정교회 내부


신 아르바트 거리 (New Arbat Ave)


아르바트 거리 옆에 건물을 넘어 나란히 위치한 커다란 대로를 신 아르바트라는 뜻의 '노븨 아르바트'라고 부른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구 아르바트와는 대조적으로 높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넓은 아스팔트 도로가 펼쳐져 있다. 

1935년 모스크바 중심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는 대로를 건설하는 도시계획에 따라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

레스토랑과 고급 쇼핑몰 등이 들어서 있고, 늘 차량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돔 끄니기(Dom Knigi, Московский Дом Книги) 


젊은이들의 거리인 신아르바트 거리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돔 끄니기는 외국어 서적도 다량 구비하고 있는 

모스크바 최대의 서적센터이다. 

지도, CD, 오래된 서적과 미술서적, 과학서적 등 폭넓게 갖추고 있다. 

서점 밖 도로 변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서적상에게서도 의외로 싼 가격에 원하는 책을 구입할 수 있다.


돔 끄니기(Dom Knigi, Московский Дом Книги)


돔 끄니기 매장





[영상] 신 아르바트 거리와 돔끄니기


[영상] 신 아르바트 거리와 모스크바 롯데호텔 건물




젊음과 문화의 상징, 아르바트 거리(Arbat Street)


우리 나라로 보면 명동 거리와 같은 곳으로 아르바츠까야(Arbatskaya, Арбатская)역 입구에서 

스몰렌스카야(Smolenskaya, Смоленская)역 외무성 건물까지 약 2km정도 보행자 전용 거리이다. 

이 거리가 생긴 것은 15세기이며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이 이 거리 No.53의 

2층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더 유명해 졌다. 

옛날에 아르바트 거리는 귀족들의 저택이 한적하게 들어서 있던 곳으로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이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한 곳이다. 


스몰렌스카야역(Smolenskaya, Смоленская)


모스크바 롯데호텔 건물

스몰렌스카야역(Смоленская)에서 나오면 한 편에 모스크바 롯데호텔 건물이 있다.


모스크바 롯데호텔 건물


스탈린 양식의 러시아 외무성 청사. 


스몰렌스카야역 다른 한 편에는 스탈린 양식의 러시아 외무부 청사가 있다.

구소련 시절을 대표하는 스타일의 건물로, 유럽풍의 화려한 외관에 압도적인 스케일이 특징이다. 

모스크바를 비롯 과거 동구공산권 국가들에는 이런 풍의 건물들이 종종 있다.


아르바트 거리 (Arbat Street)


주변으로 각종 전문 직업인들이 모여들어 골목마다 목공골목, 대장간 골목, 과자와 빵 골목, 

음식점 골목, 식탁보 골목 등의 이름이 붙여 있다.

아르바트는 번화한 거리로 변모하여 한쪽에서 소규모의 악단이 연주를 하는가 하면,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노브이 아르바트 거리에는 지금 거의 외국 브랜드 상점과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 가게와 노점상 등이 있어 러시아의 현주소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자, 

개혁과 개방의 거센 바람을 주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모스크바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이 거리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혼이 숨쉬는 곳이다. 

무명화가들의 고향이자 이름없는 화가, 연극배우, 가수들의 안식처이자 

전시장이고 무대이며 히피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1988년 "아르바뜨의 아이들"이라는 소설이 우리나라에도 소개됐고,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었다.


아르바트 거리 (Arbat Street)


안드레이 벨리(Andrey Belyi)의 기념 아파트


작가 안드레이 벨리가 태어나고 자란 곳

푸시킨 박물관인 하늘색 건물 입구 바로 옆에 시인이자 작가인 상징주의자 안드레이 벨리의 박물관이 있다.


안드레이 벨리(Andrey Belyi)의 기념 박물관


그는 1880년 이곳에서 태어나 26살까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다.

예전에 작가가 살던 집에서 현재 방 2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전시된 사진을 통해 작가의 작품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안드레이 벨리(Andrey Belyi)의 기념 박물관

안드레이 벨리(Андрей Белый, 1880 ∼ 1934)는 러시아의 상징주의 시인이자 소설가, 문학 비평가이다. 

본명은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부가예프(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Буга́ев)이다.


수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고 모스크바 대학교 물리-수학학부에 입학하였고, 

이때 다윈을 비롯하여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종교 철학가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와 교제하면서 그의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는데, 

필명인 '안드레이 벨리' 는 블라디미르의 동생 미하일 솔로비요프가 지어준 이름이다. 


상징주의자로서 벨리의 사상은 복잡한 발전 과정을 겪는다. 

초기에는 솔로비요프의 철학과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사상, 리케르트의 신칸트주의 이론에 매료되었다가, 

후기에는 루돌프 슈타이너와 같은 신비주의 철학자의 인지학 이론을 주창하게 된다.


작가로서 창작 활동을 시작한 벨리는 1904년 첫 번째 시집 《쪽빛 황금》(Золото в лазурь)을 출간한다. 

두 번째 시집 《재》(Пепель, 1908)는 네크라소프를 기념하는 것이고, 

《유골 항아리》(Урна, 1909)는 마지막 시집이다. 

이와 함께 벨리는 소설 작가로서 《심포니야》(Симфония) 4부작(《영웅》(1903), 

《드라마》(1902), 《귀환》(1904), 《눈보라의 잔》(1908)을 비롯하여 《은빛 비둘기》(Серебряный голубь, 1909), 

《코틱 레타예프》(Котик Летаев, 1922) 등 산문소설을 창작하였고, 

1911년에 집필을 시작한 《페테르부르크》(Петербург)는 1916년 단행본으로 출판한다. 


이 밖에도 《녹색 초원》(Луг Зеленый, 1910)과 《상징주의》(Символизм, 1910), 《아라베스크》(Арабески, 1911) 등 

상징주의 철학과 문학 이론에 대한 많은 논문을 저술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벨리는 세 편의 회상록을 저술하는데, 이들은 당대를 풍미했던 상징주의 문학은 물론, 

격동기 러시아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흐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회상록은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까지 집필되었고, 

《두 세기의 분수령에서》(На рубеже двух столеций, 1930), 《세기의 시작》(Начало века, 1933), 

《두 혁명 사이에서》(Между двух революций, 1935)가 출간되었다.


〈페테르부르크〉는 조이스의 《율리시스》, 카프카의 《변신》과 더불어 20세기 모더니즘 산문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특히 은유와 환유, 반복과 전위, 라이트모티프 등 독특한 스타일로 

모더니즘 계열 작품들 중에서도 실험성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난해한 상징으로 가득찬 이 소설에는 니체와 베르그송 같은 20세기 초 철학자들의 사상에 투영된 

러시아 상징주의 특유의 역사적, 철학적 사색이 담겨 있다.


Belyi Museum-Apartment는 1993년에 설립되었지만 박람회의 공식 개관은 2000년 9월에 이루어졌다. 

Arbat와 Money Lane의 모퉁이에 있는 집에서 Bely는 1880년부터 생애 첫 26년을 살았다. 

2018년 초, 박물관에는 가족 사진, 작품 사본, 개인 용품, 그림 등 4천 점이 넘는 기념품이 있다.


Belyi Museum-Apartment 내부


안드레이 벨리(Andrey Belyi) 사진


Belyi Museum-Apartment 내부


Belyi Museum-Apartment 내부


Belyi Museum-Apartment 내부


푸시킨 박물관 전시장 (Vystavochnyy Zal Muzeya A.s. Pushkina)

푸시킨이 결혼 후 3개월 간 살았던 집


푸시킨 박물관 뒤로 스탈린 양식의 러시아 외무성 청사가 보인다.


푸시킨 박물관 1960년대 사진


푸시킨 박물관과 러시아 외무성





푸시킨 박물관은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옆 건물로 들어가 지하 통로를 통해 입장하도록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므로 그렇게 출입구를 별도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기념관 입구에서는 신발에 얇은 1회용 비닐 덧신을 신도록 되어 있다. 

기념관의 바닥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도 러시아에서 극장, 박물관, 기념관, 식당 등에 들어갈 때처럼 두터운 겉옷은 보관소에 맡겨야 한다.


Vasily Tropinin. Portrait of Alexander Pushkin. 1827. Oil on canvas.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1799 ~ 1837)은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흑인(지중해 인종) 출신 귀족이었다.


그는 모계로 흑인(지중해 인종)의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은 

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외증조부 간니발은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였으나 표트르 대제에 의해 속량받아 군인이 되었고, 

실력을 인정받아 표트르 대제는 그의 세례 때 대부(代父)가 되어주기도 했다 한다.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 지중해 인종 출신 귀족이었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신의 몸속에 에티오피아 지중해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로부터 

러시아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담과 민요를 들었다. 

또한 그는 유모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어렸을 때 유모 아리나가 들려준 러시아의 옛날 이야기 및 설화가 그를 대시인으로 성공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가정교사로부터 배운 외국어 가운데 프랑스어에 가장 뛰어나 10세경에 이미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1811년(12세), 차르스코예 셀로에 있던 학습원에 들어가서 자유주의적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 

1816년(17세)의 공개 진급시험에서는 자작시 <차르스코예 셀로의 추억>을 낭독하여 

이곳에 나와 있던 노시인 가브릴라 데르자빈을 감격시켰다고 한다.


1817년(18세), 학습원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간다. 

그 후 거의 3년간은 고등 룸펜이 되어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나 명석한 판단력은 잃지 않고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농노 제도 및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 《자유》(1817), 《마을》(1819) 등을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1820년 남러시아로 추방당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설화를 주제로 하면서 구어를 대담하게 채용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여서 

러시아 시에 새 경지를 개척하는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추방생활 중 바이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카프카스의 포로》(1822), 《집시》(1823), 《바흐치사라이의 샘》(1824) 등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서사시 및 서정시를 썼으며, 이 동안에 릴레예프 등 데카브리스트와 친해졌다. 

1824년 오데사 총독과 충돌, 프스코프 현에 있는 모친 영지 미하일로프스코 촌에 칩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바이런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미 남방체제 중에 제1장을 발표한 바 있는 

시형식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후속 장이나 《보리스 고두노프》에는 리얼리즘에의 이행이 엿보인다.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 반란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거주는 허용되었으나 

위험인물로 취급되어 황제의 직접 검열을 받아야 하는 중압하에 우울한 기분을 나타내는 

서정시나 연애생활을 하면서 기분전환을 꾀하다가, 1830년부터 새로운 창작생활 시기에 들어간다.


그는 우선 《오네긴》을 완성하고 이어 《인색한 기사》(1833) 등 시작품을 내는 한편, 

신문에도 손을 대 단편집 《벨킨 이야기》(1830), 《스페이드 여왕》(1834), 소설 《대위의 딸》 등 허다한 걸작을 썼다.


1831년 미모로 소문난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하였다. 

나탈리야는 그보다 13년 연하의 여성으로 첫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다. 

1831년 푸시킨은 격렬한 구애 끝에 나탈리야 곤차로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집을 마련하고 정착했다.

그는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고 표트르 대제 치세의 역사를 쓰도록 위촉받았다. 

1834년 황제의 시종보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그의 실력 보다는 부분적으로는 

나탈리야가 궁정행사에 참석하기를 바란 황제의 속셈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이 기간 중 그의 아내 나탈리야와 황제 표트르 간의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1836년에는 잡지 SOVREMENNIK를 간행하는데 참여하였다.

1837년 그의 반역정신을 적대시하는 귀족들이 나탈리야가 부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조된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푸시킨은 나탈리야가 바람을 피운다고 지목한 프랑스인 귀족 조르주 단테스와 결투를 벌이다가 

총상으로 인해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는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로서 문학의 온갖 장르에 걸쳐 그 재능을 발휘했다. 

과거 100년간 러시아 시 분야에서 그의 간결하고 평이 명료한 시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시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문에 있어서도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그에 의해 구축되었다.


푸시킨은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다. 

막심 고리키의 말대로 ‘시작의 시작’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비평가 역시 푸시킨의 작품을 심도 있게 연구하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성’(도스토옙스키의 표현)을 강조했다. 

그의 문학작품은 모든 예술사조(ism)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예술사조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의 모든 요소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아이러니한 대화를 하고 있다.


그는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고무된 러시아 민족의 애국주의 사상,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역사적 시기에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 사상과 감정을 훌륭히 표현한 러시아 국민 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다. 

국민 생활과의 밀접한 유대, 시대의 선구적 사상의 반영, 풍부한 내용 등의 측면에서 그를 따를 러시아 작가는 없다. 

투르게네프가 푸시킨 이후의 작가들은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매우 크다.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 (Nataliya Nikolaevna Pushkina-Lanskaya, 1812 ~ 1863년)


푸시킨 박물관 전시장


건물 안에는 푸시킨의 초상화와 친필 유고, 그리고 그림을 곧잘 그렸던 푸시킨이 연필로 스케치한 몇몇 얼굴들, 

시계, 테이블, 의자, 피아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1층 한쪽 구석에는 길쭉한 모양의 당시에 사용하던 권총이 작은 유리장 안에 있었는데, 

이유는 푸시킨이 권총 결투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결투 때 사용했던 그 권총은 아니지만 일종의 상징물인 셈이다. 


당시 귀족들간의 결투는 일반적으로 입회인의 건네준 권총을 들고 서로 등진 채 

일정한 거리만큼 걸아간 다음 돌아서서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돌아서” “발사” 등 입회인의 구령에 따라 진행됐다. 

첫 발에 맞은 자가 없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당시 단테스의 총이 먼저 발사됐고 푸시킨은 복부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푸시킨은 복부를 움켜쥐고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 단테스를 향해 쐈다. 

그러나 이 총알은 단테스의 오른팔과 갈빗대 두 대를 부러뜨렸을 뿐이었다.


결투가 벌어진 곳은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 페테르부르그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의 집은 푸시킨이 나탈리야 곤자로바와 결혼한 1831년에 

3달가량 신혼생활을 했던 곳으로 이집 2층이 주거 공간이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로 이사한 후론 내내 그곳에서 살았다.


기념관 이층의 한쪽 벽에는 나탈리야 곤자로바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이미 사진에서 본 얼굴이지만 과연 그림 속의 그녀는 백옥과 같은 피부의 절세 미인이다.



실내에는 생전에 푸시킨이 사용했던 집기며 피아노, 의자, 탁자 등이 보존되어 있고, 

벽 곳곳에는 그의 초상화와 글, 그에 대한 정보가 전시되어 있다. 



결투용 권총









푸시킨의 신혼집 맞은편에 있는 알렉산드르 푸쉬킨과 나탈리야 곤자로바의 동상


관람을 마치고 다시 아르바트 거리를 걷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푸쉬킨과 나탈리아의 동상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관광객뿐 아니라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줄을 서 가며 이 동상과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푸쉬킨은 러시아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모스크바에 몇 개의 푸시킨 박물관이 있지만 아르바트의 푸시킨 박물관은 관광 중 쉽게 찾을 수 있는 높은 접근성과, 

대문호의 삶을 직접 볼 수 있는 푸시킨의 생가로서의 의미, 그리고 전 세계에 러시아의 이름을 알린 대문호 푸시킨에 대한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에게는 만족스러운 장소가 되고 있다. 


푸시킨 박물관 앞 아르바뜨 거리 인증샷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재즈음악을 배경음악으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그림처럼 지나간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들, 배우들,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소년들, 

노천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 친구들, 연인들, 모두 풋풋한 젊음을 보이고 있다.


음유시인 불라트 샬보비치 오쿠자바

불라트 샬보비치 오쿠자바(Bulat Shalvovich Okudzhava, Булат Шалвович Окуджава, 1924 ~ 1997)는 

러시아의 시인이며 작곡자이자 가수이다.


오쿠자바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노래를 직접 쓰고 부르는 러시아 음유시가의 개척자로 평생 200여 곡을 작곡하고 노래함으로써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와 더불어 잔나 비쳅스카야와 같은 음유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쿠자바가 어렸을 때 조지아인 아버지는 소련 공산당에 의하여 사형 당하였으며 아르메니아인 어머니도 
감옥에서 18년간이나 복역하는 아픔을 겪어 일찍부터 독재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에 참전한 후 트빌리시 주립대학교에 진학하여 1950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1956년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몰도다야 그바르디야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작곡을 하고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서정적인 멜로디를 지적인 음성으로 부른 그의 노래는 1970년대 말까지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못하였으나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비공식적으로 녹음되어 여러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쿠자바의 노래와 시는 1980년도에 들어 와서와 공식적으로 출판되었으며 
1991년 [USSR State Prize]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1997년 6월 12일 파리에서 사망하였으며 모스크바의 바간코보 묘지에 묻혔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 그를 추모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아르바트를 노래한 음유시인의 동상


1924년에 태어난 그는 러시아 역사의 격동의 시간을 겪으며 전쟁에 관련된 많은 노래와 서정적인 사랑의 시,

그리고 모스크바에 관한 노래들을 남겼다.

아르바트 거리에 대한 찬양이 담겨 있는 그의 대표곡 '아르바트 거리의 노래'를 기념하여 2002년에 동상을 세웠다.


그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저항 정신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시와 노래는 1980년에야 해금되었다. 

그가 만든 <<아르바트 거리의 노래>>는 시인이 성장한 이 거리를 찬미하는 시다. 


너의 낯선 이름과 너의 아스팔트는

강물처럼 흐르고 강물처럼 투명하다

아, 아르바트 거리, 나의 아르바트 거리여.

너는 나의 부름이요,

너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불행이다.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장군


1896년 12월 1일 ~ 1974년 6월 18일.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이자 정치가.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소련의 군인으로, 소련 육군 최고 계급인 소비에트 연방 원수까지 승진했다.

붉은광장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 앞에 주코프 장군 기마상이 있고 여기에도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이순신 장군 만큼이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분인 듯하다.


[영상] 젊음과 문화의 상징, 아르바트 거리(Arbat Street)


[영상] Walking in Moscow 4K - Old Arbat Street





알렉산드롭스키 정원(Alexander Garden ; Александровский сад) 정문


정문 입구로 들어서서 돌아 보면 출구 쪽으로 러시아 국립박물관 건물이 바로 보인다.


입구 왼쪽 크렘린 서쪽 성벽 아래 무명 용사의 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1941 ~ 1945년 사이에 전사한 수백 만 명의 소비에트 군인들에게 헌정된 전쟁기념관

무덤의 왼쪽에는 "1941 조국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에게 1945"라고 적힌 화강암 벽이 있다.



“1941-1945년에 희생된 무명용사에게 바침. 

비록 그대들의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그대들의 숭고한 희생은 영원하리라”


러시아 사람들은 결혼식과 같은 개인적인 기념일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무명용사의 묘’를 찾는다.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이름 모를 영웅들에게 헌화하며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한다.


묘 양 옆의 경비병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동 자세를 유지하며 무명의 용사들을 지키고 있다. 

매 시 정각에 치르는 경비병 교대식으로 유명하다.


대통령 직속 연대의 '제1영예 위병부대'는 붉은광장의 레닌묘를 지키다가 

1997년 대통령령에 따라 무명 용사 묘를 지키도록 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붕괴 후 레닌보다는 무명 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것이 더 값지다고 판단한 듯 하다.



영원한 불꽃 - 꺼지지 않는 불 (Eternal Flame)


중앙부에 있는 별 모양의 조형물에서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른다. 

1957년 이래 상트 페테르부르크 마르스광장에서 타고 있는 불에서 채화해 왔다고 한다.

이렇게 무명 용사 시신과 꺼지지 않는 불을 모시는 묘는 1921년 파리 개선문 아래에 

제1차 세계대전 무명 용사의 묘를 처음 만든 이래 여러 나라에서 본뜨고 있다.


1967년 5월 8일 당시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여기 ‘꺼지지 않는 불’에 최초로 점화했고, 

2010년 초 보수 공사 이후 메드베데프 당시 대통령이 재점화했다. 

꺼지지 않는 불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름 없는 병사들의 

애국심과 정신을 영원히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월계관 청동 조각과 군인 헬멧


가운데 대리석 묘엔 모스크바 외곽에 있던 전몰 장병 묘지에서 이름 모를 병사의 시신 한 구를 옮겨와 묻었다.

짙은 붉은 반암 기념물은 월계관의 청동 조각과 배너에 군인의 헬멧으로 장식되어 있다 . 


별 조각과 영원한 불꽃 (Eternal Flame)

기념비 앞에는 중심에서 영원한 불꽃을 발산하는 라브라도 라이트의 사각형 필드에 5개 별이 있다. 

불꽃은 청동색 비문 " Имя твоё неизвестно, подвиг твой бессмертен "를 밝게 비추고 있다. 




[영상] 2019. 08. 17


영웅 도시의 기념비


무명용사의 묘 옆쪽으로 크레믈린 성벽을 따라서 ‘영웅 도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주요 격전지 도시들의 명칭이 새겨져 있으며 기념비 내부에는 

각 도시에서 가져온 흙이 보관되어 있다.


영웅 도시 레닌그라드 , 키예프 , 스탈린그라드 , 오데사 , 세바스토폴 , 민스크 , 케르치 ,

노보로시스크 , 툴라 및 브레스트 , 무르만스크 및 스몰렌스크의 토양이 보관되어 있는 붉은 반암 블록. 















[영상] 근위병 교대식 영상 자료



[영상] 문재인 대통령, 러시아 '무명용사의 묘' 헌화




마네쥐 광장 옆에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이 있다.


알렉산드롭스키 정원 앞


알렉산드롭스키 정원(Александровский сад) 정문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은 크렘린 서쪽 성벽 아래로 865m를 뻗어 간다.​

공원 초입에 무명 용사 묘가 있다.


크렘린 성벽 쪽으로 길게 꾸민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동쪽 입구로 

청춘 남녀는 누가 보건 말건 서슴없이 애정 표현을 한다.


정문 입구로 들어서서 뒤로 돌아 보면 출구 쪽으로 러시아 국립박물관 건물이 바로 보인다.


알렉산드롭스키 정원(Alexander Garden ; Александровский сад)


1156년에 유리 돌고루키(Yuri Dolgoruki)는 크렘린을 보호하기 위해 모스크바(Moskova) 강과 

니에글린나야(Nieglinnaya) 강이 만나는 지점 언덕 위에 목조 요새를 축조하였다. 

오늘날 이 요새가 있던 지역은 알렉산드로프스키(Alexander)정원으로 뒤덮여 있다. 

14세기에 드미트리 돈스코이(Dimitri Donskoi)가 통나무 성곽을 쌓았고 

나중에 처음으로 석조 성곽을 건설하였다.


역사와 배치가 변화함에 따라 프스코프(Pskov), 툴라(Tula), 카잔, 스몰렌스크(Smolensk)같은 

러시아의 옛 성채들이 크렘린을 모델로 하여 건축되었다.

현재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면적은 10 헥타르이다.


알렉산드롭스키 정원 의병대의 교대식 모습.


의병대의 교대식 모습.


알렉산드롭스키 정원(Александровский сад)


여러 정원을 포함하는 것으로, 모스크바 마네지 광장과 크렘린 사이에 있는 정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1812년 나폴레옹군 침공으로 쑥대밭이 된 도심을 재건하면서 알렉산드르 1세가 

네글리나야 강의 바닥에 정원을 지으라고 명하면서 1819년에서 1823년까지 건설한 러시아 첫 공공 공원이다. 

그래서 크렘린 가든으로 불렸다가 나폴레옹 침략 전쟁에서 승리한 알렉산더 1세를 기리는 의미로 황제의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에는 정원의 이름을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으로 지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옛날옛적에 니에글린나야(Nieglinnaya) 강은 크렘린 성벽 근처로 흘러 갔다. 

그곳에는 욕조, 단조 공장, 제재소가 있었다. 강에 댐을 설치한 후 연못이 형성되었다. 

니에글린나야(Nieglinnaya) 강은 점차 쓰레기와 하수로 심하게 오염되었고 강은 얕아 졌다.

정원은 지하에 자리 잡은 니에글린나야(Nieglinnaya) 강 위에 석조로 세워졌다. 

이 프로젝트의 저자는 건축가 Osip Bove였다. 웅대한 정원의 개통은 1821년 8월 30일에 열렸다.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영토에는 많은 관광 명소가 있다. 


포시즌스 호텔


마네쥐 광장 북동쪽엔 포시즌스 호텔이 있는데 제일 싼 방값이 50 몇만 원에서 시작하는 6성급 호텔로 

유서 깊은 1930년대 호텔 모스크바 자리에 2014년 새로 들어섰는데  

전면 구조는 옛 모스크바호텔 구조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롭스키 정원 서쪽으로는 짤막한 개울이 흐른다. 


모스크바 중심부에는 복개 하천 네글린나야 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인공 터널을 통해 

모스크바강으로 들어가는데 크렘린도 이 강을 해자 삼아 지었다.

이 개울은 1996년에 네글린나야 강을 지상으로 드러냈다며 만든 인공 개천이지만  

실제 강은 이 개천보다 한참 더 지하로 흐른다고 한다.

개천 왼쪽과 크렘린 성벽 사이에 알렉산드롭스키 공원이, 오른쪽으론 아케이드가 늘어서 있다.



네글린나야 강  주위로 알렉산드롭스키 공원의 인공 개천 끝에 네 마리 말 동상이 선 분수대가 있다.




말 조각상이 분수와 함께 어우러져 보기에도 시원스럽다.

러시아 예술아카데미 원장을 지낸 그루지야계 조각가 주라브 체레텔리의 작품 '사계' 이다.  

네 마리 말로 각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표현했다고 한다.


말 조각상들은 갈기를 날리며 금방 분수대로 뛰어들 듯 역동적이다.



크렘린과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꽃들을 본다. 오른쪽에 솟은 크렘린 성벽 탑은 트로이츠카야 타워


헤르모겐 (Hermogenes)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에 십자가를 치켜 든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의 동상이 서 있다.


거룩한 순교자 헤르모겐 (Hermogenes)


모스크바와 러시아의 총 대주교인 거룩한 순교자 헤르모겐(Hermogenes)은 

돈 코사크(Don Cossacks)에서 1530년경 태어났다. 

그는 1582년 이래 성 니콜라스라는 이름으로 카잔 수도원의 성직자였다. 


카잔에서 총 대주교를 섬기는 동안 

그는 1579 년에 신의 어머니의 기적적인 카잔 아이콘이 나타나고 은사를 받았다.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가진 그는 1594 년에 기적적인 아이콘의 출현과 그로부터 나온 기적에 관해 서술했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에 대해 겸손하게 썼다.

“그러나 그때 나는 마음이 따뜻하지만 하나님의 어머니와 기적적인 아이콘과 

영원한 유아, 구주 그리스도에게 울며 울었습니다 ... 

그리고 대주교의 명령에 따라 툴라 (Tula)라고 불리는 성 니콜라스 (St. Nicholas) 근처 교회에 

다른 거룩한 십자가와 함께 아이콘을 가지고 갔습니다."


1592년 1월 9일, 헤르모겐은 카잔에서 신앙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정교회 군인들에 대새

각별한 기념식을 올려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족장 욥에게 보냈다. 

이 편지에 대한 응답으로, 총 대주교는 2월 25일자로 법령을 보냈다.

카잔 근처와 카잔에서 살해된 모든 정통 군인들에게 토요일에 카이로와 카잔 대도시 전역에서 

추모식을 개최하고 가장 신성한 시토코인들의 보호를 받고 큰 회당을 쓰도록 명령했다. 


1595년에 성도의 적극적인 참여와 함께 카잔의 기적 일꾼들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유물의 주인공은 카잔의 첫 대주교인 성자 구리아와 성도들이었다. 

차르 테오도레 이바노비치는 성도들이 묻힌 곳의 카잔 수도원에 새로운 석조교회 건축을 명령했다. 

성도들의 관이 발견되었을 때 헤르모겐은 성직자 협의회와 함께 관을 열도록 지시했으며 

성도들의 부패한 유물과 예복을 보고 가부장과 차르에게 알렸다. 

성결 축복과 왕의 명령에 따라 새롭게 채굴된 경이로운 성도들의 유물이 새로운 교회에 배치되었다. 

헤르모겐은 카잔의 성도 게리와 바사누 피우스의 삶을 정리했다.


1606년 7월 3일 헤르모겐은 모스크바와 모든 러시아의 총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70 세가 넘었다.

성 헤르모겐의 가부장은 시대의 어려운 시기와 일치했다. 

특히 그는 총 대주교가 러시아 국민을 노예로 만들고, 러시아에서 일원주의와 카톨릭교를 도입하고, 

정교회를 근절하기를 원했던 조국의 반역자와 적들을 반대했다. 

1608년 6월 거짓 드미트리 2 세가 모스크바에 접근하여 투시노에서 멈췄을 때, 

헤르모겐 총 대주교는 반란군과 반역자에게 두 가지 메시지를 보내서 그들을 비난하고 훈계했다. 


"당신은 당신의 형제에 있지 않습니까? 조국을 망치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 내고, 끝까지 멸망하지 않을 시간이 있는 동안 

당신의 사업에서 나를 내버려 두십시오 ...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알고 회심하여 부모, 아내, 자녀, 그리고 우리 모두를 기쁘게하십시오. 

우리는 당신을 위해 하나님을기도하기 시작합니다 ... "


한편, 모스크바에서 기근이 시작되었다. 

가부장 헤르모겐 (Patriarch Germogen)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침략자들로부터 수도원을 

이기적이고 영웅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삼위 일체-세르지오 라 브라 승려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608년 9월에 수천 개의 강력한 분리가 Lavra를 포위했다. 

1614년 1월, 침략자들은 수치심으로 후퇴했다. 

이때 총독 대주교는 메시지를 계속 전하면서 신앙과 조국의 방어를 요구했다.


1610년, "투시 노 도둑"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기꾼은 그의 친한 동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는 외국 침략자들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면서 러시아 국민들에게 고국을 지키라고 촉구했다. 

헤르모겐의 축복을 받은 성모 마리아의 카잔 아이콘이 카잔에서 옮겨져 민병대의 주요 성소가 되었다.


1611년 밝은 월요일에 러시아 민병대는 몇 달간 지속된 크렘린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폴란드는 한번 이상 크렘린에 포위되어 대사관을 족장에게 파견하여 러시아 민병대에게 

도시를 떠나라고 명령하고 사형을 선고 할 것을 요구했다. 

성자는 확고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무엇을 위협하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의 신이 두렵다. 

리투아니아인 여러분 모두가 모스크바 주를 떠나면, 

러시아 민병대가 모스크바에서 나올 수 있도록 축복하겠습니다. 

이곳에 머무르면 모든 사람이 당신을 대적하여 정통 신앙을 위해 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교도소 수감자인 헤르모겐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들에게 믿음에 강하게 서서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Prechistaya의 집과 믿음에 두는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할 것을 촉구했다. 


생 헤르모게네스 (Saint Hermogenes)는 9개월 이상 동안 투옥되었다. 

1612 년 2 월 17 일에 그는 굶주림과 갈증으로 순교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민병대를 더욱 강요했다. 

결정적인 전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3 일 전에, 거의 절망적인 러시아 군대는 금식과 기도에 소비했다. 

그리고 1612년 10월 27일, 폴란드-리투아니아 분리의 격렬한 저항이 마침내 무너졌다.


성 헤르모겐이 그처럼 흔들리지 않는 용기로 서 있던 러시아의 해방은 

러시아 국민에 의해 그를 대표해서 성공적으로 완료하게 되었다. 

거룩한 순교자 헤르모겐의 몸은 기적 수도원에 합당하게 장사되었다. 

가부장적 위업과 그의 성격 전체의 신성함은 나중에 성도의 유물과 함께 1652년에 부검에서 조명되었다. 

사망한 지 40년 만에 헤르모겐은 살았고, 

1654년 그의 불멸의 유물은 모스크바 크렘린의 가정성당으로 옮겨졌다.


정통의 순수함과 러시아 땅의 단결을 위해 지칠 줄 모르는 헤르모겐은 국가적 중요성이 크다. 

몇 세기 동안, 그의 교회적이고 애국적인 활동은 러시아 남자들에게 

그의 백성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사랑의 생생한 모범이 되었다. 

고위 계층의 교회 활동은 세심하고 엄격한 예배 태도를 특징으로 한다. 


뛰어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성 헤르모겐 (Saint Germogen)은 수도원 도서관에서 

주로 모스크바 기적 수도원의 가장 부유한 도서관에서 많은 것을 공부했다. 

그는 고대 사본에서 연대기의 기초가 된 가장 귀중한 역사적 정보를 썼다. 

러시아 교회 영장류와 그의 대목장 서한에는 지속적으로 역사에서 취한 성경과 예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과 그 당시 교회 기록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증거한다. 

1913 년에 러시아 정교회는 총대주교 헤르모겐을 성자로 찬양했다. 






각종 병장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푸쉬킨의 스페이드의 여왕 시대를 그대로 옮긴 듯한 전시물이다.


19세기 중반, 나폴레옹 전쟁의 전승 기념과 전사자들의 위령을 목적으로 알렉산드르 1세부터 니콜라이 1세 시대에 

이 배경이 된 장소에 교회가 세워진 것 같다. 복원하기 전의 교회도 이런 형태였다.


1881년에 테러 조직에 의해 암살된 알렉산드르 2세가 습격당했을 때의 전시물.

실제와 같은 종류의 폭탄은 현대 역사 박물관에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순수 러시아 스타일의 교회, 
알렉산드르 2세의 죽음을 애도하며 '피 흘린 구세주 교회'가 그 자리에 세워졌다.

마지막 로마노프 황제인 니콜라이 2세 (1868년 5월 18일 ~ 1918년 7월 17일)

본명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러시아어: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이다.


마지막 로마노프 황제인 니콜라이 2세


로마노프 왕조의 14번째 군주로 1917년 혁명으로 퇴위했으며, 1918년 총살당했다. 

2001년, 니콜라이 2세는 가족 및 다른 러시아 혁명시의 교회 순교자들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니콜라이 2세는 영국의 조지 5세의 이종사촌이다. 

즉, 조지 5세의 모후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의 모후 다그마르는 자매 지간이다.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와 이종사촌, 

즉 알렉산드라의 어머니 앨리스와 빌헬름 2세의 어머니 빅토리아는 서로 자매지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1868년 5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시 황태자였던 사샤와 덴마크 출신의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애칭은 니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남에게 봉사하는 따뜻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유약했기 때문에 군주감으로는 적합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1881년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1891년 극동 방문 중 일본 제국에 들렀을 때, 

오쓰 사건의 주모자 쓰다 산조의 암살시도로 부상을 입었으나 동행중이었던 친척 요르요스에게 구조되었다.


진외재종매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자 앨리스 공주의 4녀와 열렬한 연애 끝에 

1894년 4월 8일 코부르크에서 약혼했다.


선제인 알렉산드르 3세는 1888년 10월 29일 가족 여행 중 의문의 열차사고를 당했으며 

후유증으로 추측되는 신장병이 1894년에 발병했고 같은 해 11월 1일에 갑자기 사망했다. 

니콜라이는 장남으로서 같은 날 즉위한 뒤 같은 달 26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에서 부랴부랴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황제가 될 준비가 아직 안 되어 무척 당황했다고 전해진다. 

공식적인 대관 행사들은 18개월 뒤인 1896년 5월 26일에 시작되었는데,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모안식주교좌당에서 열린 대관식의 도중 

목걸이가 그의 목에서 떨어지자 모두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기고 목격자들을 함구시켰다. 

축제기간인 1896년 5월 30일에도 역시 불길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옥외행사에 10만~수 십만 명의 군중이 몰려 1,389명이 압사하고 1,300명이 부상당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애도의 뜻을 표하고 행사를 취소했다. 그 불길함은 1917년에 현실이 되었다.


헌신적인 남편이자 매우 가족적이고 관대한 아버지였던 니콜라이 2세는 

정치보다 가정생활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그는 근본적인 개혁의 소리에 대해서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변화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언론은 엄격히 감시받았고 젬스트보의 권한은 축소되었으며 비정교회 신자들과 소수민족, 

특히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아 그 결과 차르와 그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1901년 교육부 장관 니콜라이 보골레포프가 암살되고 

1902년 내무장관 드미트리 스피야긴이 암살되었으며

1903년 우파 지사 보그다노비치와 스피야긴의 뒤를 이은 내무장관 플레프가 암살되었으며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범을 사냥한 경찰 간부이자 새 내무장관으로 임명된 비야체슬라프 플레베도 

1904년 6월 폭탄 테러로 암살되었다.


황후 알렉산드라는 혈우병을 앓고 있는 아들 알렉세이를 치료하기 위해 

라스푸틴을 초청했는데 이것이 큰 화근이었다. 

라스푸틴은 황후의 후원을 등에 업고 정치에 그다지 관심 없는 황제를 대신하여 

나라를 암묵적으로 다스렸는데 아주 크게 악정을 행하여 결과적으로는 

니콜라이 2세가 황제가 되고 나서 부황 못지않은 시대착오적인 반동정치를 계속 펼쳐 

전제 정치의 힘만 더욱 강해지는 결과물을 초래했다.


피의 일요일


1905년 1월 22일, 여느 때라면 성당에 갈 시간에 굶주림에 지친 15만 명의 노동자들이 

황제에게 급료를 올려달라고 청원할 생각으로 성가를 부르며 눈길을 걸어 황궁으로 갔다. 

청원서를 가지고 행진하는 대열은 점점 불어나 급기야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이 행렬 앞에는 이콘과 황제의 초상이 게양되어 있었다.


그 행렬 선두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게오르기 가폰 신부가 있었다. 

브치로프의 공장에서 노동자 3명이 부당해고를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가폰 신부 아래 노동자가 결집하게 되었고, 

이들이 황제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게 된 것이다. 

이 파업은 이미 1주일 전에 발생하여 계속되다가 이날 22일에는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쓰게 된 것이다.


청원서 행렬은 오후 2시, 광장에 집결했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들이여, 국민들을 쏘지 말아라”고 하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막아선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다. 

뒤이어 대포도 여러 발 발사되었다. 

이 일제사격으로 1천 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행렬에 대해 마지막으로 황제의 기병대가 돌진하여 칼을 휘둘렀다. 

이리하여 거룩한 주일은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모스크바, 사라토프, 바르샤바 등지에서 노동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44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항의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이때까지 니콜라이 2세가 이 사건이 얼마나 큰 파정을 가져올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사이, 

10월에는 대규모의 파업이 발생하여 러시아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되었는데 

3000가구 이상의 귀족 저택이 파괴되고 1월 ~ 10월까지 봉기가 2700회나 일어났다.


그리고 유사한 시기 니콜라이의 숙부 세르게이(1857년 ~ 1905년, 알렉산드르 2세의 다섯번째 아들)와 

1906년 장성 두브라소프까지 암살되면서 지금까지 하느님을 받들듯이 섬겨온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수많은 동료들이 살상된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 민중 속에 신앙과 같이 뿌리 깊던 황제 숭배는 

일시에 무너지고 사람들은 황제에 대해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당시 조선과 만주를 놓고 일본과 전쟁 중(러일 전쟁)이던 러시아 정부로서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은 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포츠머스 회의에 전권대사로 파견된 세르게이 비테는 

의회를 구성하겠다는 약속으로 국민을 설득하여 가까스로 난국을 진정시켰으나, 

제국 정부의 도덕적 정통성이 무너짐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은 훗날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무능함과 더욱 악독해진 전제정치


니콜라이는 정치적으로 무능했고, 미신을 신봉하기도 했다. 

라스푸틴은 니콜라이 2세를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고 1881년의 임시법을 

계속 적용, 확대하여 언론과 사상을 엄격히 통제했고, 교육에도 일부 제한을 가했다. 

젬스트보와 시 정부의 권한은 더욱 축소됐다. 

젬스트보의 과세대상도 줄였고, 젬스트보 위원과 고용인의 임명 비준을 거부하여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만이 공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때 라스푸틴은 라스푸틴대로 황권을 등에 업고 사리사욕을 챙기느라 급급했다.


니콜라이 2세의 치세기간동안 러시아의 국민들로부터 착취한 보물들은 전부 라스푸틴이 가로챘다. 

종교 핍박도 더욱 심해졌다. 

분리파 정교도가 심한 탄압을 받았고, 아르메니아 교회와 그 밖의 종파들에도 일부 제약이 가해졌다. 

유대인의 지위도 더 악화됐다. 

유대인의 토지 매입을 일부 규제했고, 1903년 베사라비야의 키시뇨프에서 시작돼 

우크라이나 일대로 확대된 대규모의 유대인 약탈과 학살을 방관했다.


1809년 러시아에 합병된 이래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받고 있던 핀란드에도 

강력한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여 많은 권리를 박탈했다. 

반대 운동이 격화되면서 핀란드는 혁명 세력의 주요 근거지가 됐다. 

이렇게 니콜라이 2세는 파계성직자인 라스푸틴에게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여 

군주로서의 리더쉽적인 자질에 대해 의심받기도 했다.


경제 면에서는 1906년까지 비테를 계속 중용, 

강력한 산업화 정책으로 큰 성과를 낳았으나, 균형 잃은 산업화는 결국 위기에 처하게 된다.


피의 일요일 이후


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로 진전되지않다가 1907년 즈음 가서야 겨우 진전되어 갔다. 

또한 러시아에는 표트르 스톨리핀 총리의 개혁에 힘입어 연평균 7%의 산업 성장화를 보이면서 

한때 로마노프 왕조의 위세를 떨치기도 했으나 

1911년 9월 14일 스톨리핀 총리까지 암살되면서 개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한편 노동자와 농민층이 황제에 대한 불만세력이 여전하다고 여긴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국내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때 총동원령을 내려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처음에 민중들은 애국심에 불타서 1차세계대전에 지지를 하였고, 

무려 1500만 명이 전선에 나가 지원했었다.


하지만, 지휘관들의 무능함이 여실히 드러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자멸적인 대패를 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한 것 때문에 러시아의 노동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국내의 불안은 고조되어가면서 제정 러시아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914년 8월 ~ 1915년 8월까지 러시아군은 병력의 절반을 잃어 

140만 명이 전사하고 97만 6000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각지에서 파업과 시위가 발생하고, 

니콜라이 2세 황제는 1915년부터 직접 최전선 전투 지휘에 나서며 국정은 황후에 맡기고, 

황후를 등에 업은 라스푸틴을 중심으로 자연히 되어가면서 국정도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라스푸틴의 폭정과 착취는 전대미문의 엄청난 규모에 달했다. 

예를 들어 민중들 사이에서는 검열되지 않은 책 같은 것이 출판되어 

그리고리 라스푸틴과 황후, 공주들이 불건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등 내용의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였다.


결국 황제와 친했던 관리들마저 라스푸틴의 악행에 치를 떤 나머지 

사퇴하여 혁명파에 붙은 자도 있었는데 이후 1916년 12월, 

니콜라이 2세와 친척 측근인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을 비롯한 관리들이 

라스푸틴을 죽이려고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지만 라스푸틴은 극약을 먹고도 

2시간 동안 춤을 추는 등 초인적인 체력을 보여주다가 총에 맞고도 죽지 않았다.


그 후 라스푸틴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는데 사망 원인은 독극물도, 총살도 아닌 익사였고 

혁명의 기운은 날이 갈수록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진압령과 배신


1917년 3월 8일, 마침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9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이 파업 데모에 참가하여 “빵을 달라”고 외쳤다. 

이틀 후에는 시위가 시내 전체로 확산되었다(2월 혁명). 

시위대는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붉은 깃발을 휘날렸다.


이에 니콜라이 2세는 알렉산드라의 총신이자 내무장관 알렉산드르 프로토포포프에게

 '체제안정에 유지해라'는 사실상 무력진압을 명령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수만 명의 군 병력과 예비군을 배치시켜 시위대를 저지하려 했으나 

3월 12일 월요일 아침 6시 유명한 볼린스키 연대의 한 하사가 자신의 지휘관을 쏘는 것을 시작으로 

다른 세모노프스키, 이스마일로프스키, 리토프스키, 

마지막에는 표트르 대제가 직접 창설한 역사가 오래된 프로오브라젠스키 수비대까지 혁명에 가담했다.


이로써 군대는 물론이요 예전에 혁명가들을 칼로 살해했다던 악명 높은 기병대조차도 

시위대에 동정심과 자책감을 느껴 결국 혁명군에 가담했고 그리하여 혁명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시위진압 지휘를 하던 사령관들은 진압을 포기했으며, 

황제와 친했던 관리들마저 사퇴하여 혁명파에 붙은 자들도 있었다.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며 절망에 빠진 니콜라이 2세는 제위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당시로서는 큰 변화를 예고하는 선언을 하게 된다. 

정부는 총사퇴하고,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케렌스키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원래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의 아들 알렉세이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어린 나이인데다 혈우병을 앓고 있는 알렉세이였기에 

자신의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제위를 양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은 미하일 역시 니콜라이 2세와 다를 바 없다 하여 반대했다.


이러한 사태를 지켜보던 임시 정부는 미하일에게 제위를 버릴 것을 권고했고, 

미하일은 그러한 제의를 받아들였다.

미하일은 "저 또한 폐하처럼 백성들로부터 욕들을 짓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로써 군주제는 폐지되었고, 

304년 동안 지속되어 온 독일계 왕조인 '홀슈타인-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임시 정부와 10월 혁명


2월 혁명을 주도했던 케렌스키 임시정부(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가 집권해도

 '가난한 국가'라는 오명을 벗기지는 못했다. 

케렌스키가 내놓은 정책은 아주 파격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식량 부족만은 여전했다.


1917년 6월에 대공세를 펼쳤으나, 자멸에 가까운 패배를 겪고 1917년 9월 어느 날, 

당시 러시아의 영토였던 라트비아에서는 독일의 겨자가스 살포로 

수많은 러시아의 사병과 장교들이 죽음을 당했다.


당시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現 상트페테르부르크)조차 

독일-오스트리아 주도의 동맹국들에게 점령을 당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나돌았다. 

그 시기에 케렌스키 내각은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에게 전복당할 뻔한 아찔한 상황을 겪게 된다.


1917년 10월 어느 날, 민중들은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2월 혁명이 피를 많이 흘렸는 데 반해, 

10월 혁명은 무혈 혁명으로 마무리되었으며 기간도 길지 않았다. 

여기에 케렌스키 내각은 퇴임을 선언하게 되고 레닌 주도의 볼셰비키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된다.


하지만 케렌스키는 니콜라이와는 달리 

서유럽의 제도를 러시아에서 제도화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자유인의 몸이 된다.

케렌스키는 어렸을 때 레닌과 동문이었고 당시 심스부르크 학교의 교장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레닌이 힘들어할 때 항상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케렌스키나 레닌은 둘 다 제정반대자였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케렌스키는 당시 러시아 인구의 20%도 채 안 되었던 '대졸자'였고, 

신용을 잃지 않는 성격 덕분인지 정계 진출도 쉬웠다. 

실제로 1912년 두마에도 진출했다. 그는 내각으로 집권하여 온건 정책을 내세웠다.


퇴위 이후


니콜라이의 처리를 놓고 사형을 하자는 볼셰비키 강경파와 

수감으로 끝내자는 멘셰비키 및 케렌스키 일파의 의견이 대립했다. 

하지만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가 집권한 뒤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였던 1918년, 

러시아에는 내전의 기운이 감돌았다. 

국민들은 기근으로 죽어갔고, 볼셰비키에 반감을 드러낸 자들은 

그들로부터 숙청 당하여 백군으로 돌아선 자도 있었다. 

니콜라이가 퇴위당한 이후 케렌스키와 온건파 및 일부 멘셰비키는 

니콜라이의 동생 미하일 대공을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1개월만에 암살당하고 만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동맹국과 상대로 맺은 가혹한 조약 때문에 

서방 연합국들은 물론이요 일본과 미국조차도 볼셰비키를 비판하여 백군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이들 중에는 수억 달러의 돈을 들여서라도 우랄 지방에 감금된 니콜라이 가족을 구해주자는 자도 있었다.


백군은 제정 러시아 시절의 장교들의 강력하고도 냉철한 지휘력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특히 알렉산드르 콜차크, 안톤 데니킨, 라브르 코르닐로프 등이 지휘하는 백군은 

볼셰비키 정권을 심각하게 위협했었다. 

하지만, 백군에는 구체제로 구성된 지주 출신들이나 장군들이었으며, 

이들에게 뚜렷한 제도나 정책이 없었다.


백군의 목표는 단순히 볼셰비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구체제로 회복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백군에 등을 돌려 볼셰비키 정권에 지지했다. 

결국 백군은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하였다. 

10월 혁명으로 내각에서 물러난 케렌스키도 백군을 지원했다가 

참패를 당하여 프랑스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다.


2월 혁명 이후의 니콜라이


2월 혁명 이후, 니콜라이와 그의 가족들은 황제의 명령이 아닌 케렌스키의 명령을 따르게 된 군인

러시아가 아닌 케렌스키 개인 소유의 군인들의 감시를 받아 가면서 우랄 지방에 거처하게 되었다.


약 8개월 동안 단란한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예전에 깨끗했던 궁전이 아닌, 평범한 민가(民家)에 살아야 했다. 

군인들은 그들의 대화까지도 엄격히 검열했다. 

이때 황후 알렉산드라만은 아주 지독한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된다.


니콜라이와 그의 가족들은 1918년 7월 어느 날, 

유대인 출신의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의 적군(赤軍)에 의해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감금되었고 바로 그날 총살형을 당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전원 불태워져 소각되었고, 

소각된 시신들은 1991년에 들어서야 발굴되었다. 

이때 적군은 니콜라이 일가족들을 서둘러 처형했는데 

니콜라이 황제의 지지세력인 백군(白軍)이 

그들을 구출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니콜라이의 사후


사후 무려 7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소련이 해체되었고 러시아 연방이 들어서면서 

1991년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직계가족들은 순교자로서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991년 예카테린부르크 근처의 숲에서 발견된 시신이 유럽 족보 기록을 바탕으로 

니콜라이 2세 및 황후 가문의 사람들과의 혈연 관계 대조를 통한 DNA 검사에서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시신으로 밝혀졌다.


이후 러시아는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시신을 찾았다고 공식 발표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베드로-바울로 성당에 안치하였다. 

2008년 10월 1일에 러시아 대법원은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정치적 탄압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판결을 내려, 그의 정치적 복권이 이뤄지게 되었다.

















































박물관의 전시물품은 혁명 이후를 제외한 러시아의 전 역사에 관련된 것을 

석기시대의 것부터 전시해 놓고 있으며, 전시품이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전부 돌아보기는 힘들다. 



국가 행사 등에 사용되고 있는 크렘린 안의 대궁전 천장을 본따 만든 입구


1883년 알렉산드로 3세의 대관식에 맞춰 개관했으며,

1986년부터 2002년까지 내부를 개조해서 다시 오픈하였다.



박물관 천장에 그려진 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는 참으로 대단하다.


천장에 그려진 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



천장에 그려진 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


천장과 벽 등 내부 인테리어에서 러시아의 독특한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노브코로드와 키에프공국 시대 전시실


이 박물관은 2층과 3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2층에는 원시시대부터 류릭왕조, 로마노프왕조 전까지.

3층에는 17세기 로마노프 왕조와 표도르 대제부터 최후의 니콜라이 2세까지의 시대를 순서대로 전시되어있다.

러시아 역사가 소련이 되기 전까지 전부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키에프공국은 동(東)슬라브 민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이다. 

창시자는 류리크의 친족이자 왕조의 후계자인 올레크 공(公)으로 

오늘날 노브고로드 부근였던 근거지를 882년 키예프로 옮기면서 시작된다.

12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었던 동슬라브 부족들이 키예프 공국에게 정복되면서 통일이 되었다.


원주민인 슬라브 및 우랄계와 북유럽에서 이주해 온 바이킹계 주민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미 올레크의 뒤를 이은 스뱌토슬라프 대에 하자르의 수도 아틸을 함락했고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거의 점령하는 등 그 군사력을 입증한 바 있다.  

이런 키예프 공국의 병사들의 활약을 본 동로마 제국은 바랑인 친위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12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발트해에서 우랄산맥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점유했던 중세 루스국가이다. 

공화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존엄한 대(大) 노브고로드(Gosudař Gospodin Velikij Novgorod)라고 불렀다. 


학자들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당대로서 상당히 높은 문헌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천여 점의 자작나무껍질 문서를 발굴했는데, 그 연대는 모두 11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걸쳐 있다. 

이 문서들 중 약 950 개는 노브고로드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화재로 노브고로드의 문헌 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발굴된 것과 유사한 문서 2만여 점이 도시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471년 7월 모스크바군은 셸론 강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그로 인해 노브고로드의 자유는 심대한 침해를 받게 되었다. 

노브고로드는 이후 7년 동안 형식적인 독립을 유지했으나, 마침내 1478년 이반 3세가 군대를 보내 도시를 점령했다. 

이반은 학살을 벌이고 베체를 파괴했으며, 도서관과 기록보관소를 불태웠다. 

이 시점에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역사는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반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영토 81.7%를 차지하고 그 중 절반은 자기 땅을 삼고 나머지는 대공족들에게 분배하였다.


여러 공국으로 분열된 키예프 공국


12세기 초반부터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무역로가 쇠퇴함에 따라서 키예프 공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시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이 잡혀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무역 쇠퇴는 치명적이었다. 

더욱이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이 갖춰졌다기 보다는 왕위 계승자들이 각 지방 도시를 다스리며 

상황에 따라 서로 내전을 벌이는 상태였기에, 국력을 단결시키기 어려웠다. 

종종 볼로디미르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쇠퇴기에 접어든 키예프 공국을 중흥시켰을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마련되지 못했다. 

하자르 칸국과 페체네그인을 주무르던 키예프 공국이었지만, 

말기에 접어들면 유목민족인 쿠만과 볼가 불가르의 침략 앞에 끙끙대기 시작한다.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던 보리스테네스 강(드니프로 강) 일대 비옥한 흑토 평야는 

전성기 시절에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평야 지대 특성상 유목제국의 기습과 침략에 매우 취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13세기 중반에 몽골 제국이 침공하면서 처참하게 멸망하였다. 

키예프 공국의 난민들은 북쪽에 척박한 삼림 지대로 대거 피난을 떠났다 한다.

이후 키예프 공국의 영토 대부분 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리게 된다.


류리크 왕조의 블라디미르 시대.


류리크 왕조는 초대 노브고로드 공국 대공 류리크를 시조로 하는 동유럽의 가문. 

70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하면서 수없이 많은 러시아 공국들의 대공들과 

그들을 하나로 묶은 루스 차르국의 차르를 배출해 내며 동유럽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블라디미르는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는 여러 설화에서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바이킹으로 전해진다.


류리크 왕조는 이후 전세계를 강타한 몽골 제국과 그 후계인 킵차크 칸국의 침략과 억압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새로이 성장한 모스크바 대공국이 러시아 통합, 몽골 축출의 업적을 이루고 루스 차르국으로 거듭나면서 

차르를 배출해 내는 황가로 거듭난다. 

그러나 제권 강화를 위해 친척들을 숙청하고 황태자와 임신한 며느리를 직접 때려 죽인 이반 4세의 화끈한 폭정과 

그 뒤를 이은 병약한 표도르 1세의 요절로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고, 

러시아의 제위는 혼란 끝에 로마노프 왕조에게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굉장한 막장 드라마가 시전되었는데 이반 4세의 막내아들인 우글리치 공 드미트리라 자처한 

가짜 드미트리가 3명씩이나 나와서 그 중 한 명이 차르에 즉위하여 

9개월 동안의 치세기간을 지내는 데 성공하는 등 왕조가 개판이 되었다.


블라디미르 - 수즈달 시대


블라디미르 - 수즈달은 1157년부터 1331년까지 동유럽 일대에 존재했던 공국이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전신이며 수도가 로스토프 벨리키, 수즈달이였던 적도 있어서 

로스토프-수즈달 공국으로도 불린다.


당시 키예프 대공국은 류리크 왕조 일원에게 분할상속된 여러 루스 공국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대공국이었다. 

키예프의 대공은 다른 공국들의 공작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여서 키예프의 대공이 되기 위해서 

다른 루스 공국의 공작들은 키예프를 점령하여 키예프의 대공이 되었고 

그 키예프를 다른 공작이 점령하여 키에프의 대공 자리를 뺏는 식이 되었다. 

유리 돌고루키도 키예프를 점령해 키에프의 대공이 되었다.

블라디미르-수즈달은 몽골로부터의 독립과 루스의 완전 통일을 열망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확장 정책에 의해 1331년 흡수되었다.



수즈달의 크렘린, 로즈데스트벤스키 성당의 13세기의 문 '황금의 문'을 모방했다.


13세기 타타르의 멍에


타타르의 멍에는 1240년부터 1480년까지 루시가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은 시기를 말한다.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은 1236년 조카 바투에게 15만의 병사를 주어 다시 루스로 보냈다.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바투의 유럽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바투의 원정군에 맞선 루스의 군대는 용감히 싸웠으나 몽골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단지 바투의 군대가 대군이라서만이 아니었다. 

몽골군은 당시 어느 군대도 따를 수 없는 조직력과 무기 ·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군은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으로, 중장 기마대와 경장 기마대를 함께 운용했으며, 

군대를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편성하고 지휘부에는 참모부를 두는 등, 잘 조직되어 있었다. 

또 정찰과 첩보공작을 조직적으로 전개했고, 투석기와 파벽기를 앞세운 공성술도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전략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예컨대 야전에서는 보조부대를 진의 중앙에 두고 양측방에 활을 가진 주력부대를 배치했다. 

적병이 돌격해 들어오면 중앙이 후퇴하면서 양측방에서 적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적병은 처음엔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나 곧 함정에 빠져들었음을 깨닫는다.


몽골군은 적의 용기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했지만 자비심을 베푸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칭기즈칸이 '후회는 동정의 열매'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투는 우랄 산맥을 넘어 먼저 볼가 불가르인을 침략했다. 

그리고 1237년 뜻밖에도 북쪽에서 돌연히 나타나 루스-목셀 대공국인 랴잔 대공국으로 들이쳤다. 

랴잔의 병사는 물론 온 시민이 나서서 끝까지 항전했으나, 

5일간의 싸움 끝에 도시는 함락되고 시민들은 몰살당했다.


다음 차례는 블라디미르 대공국이었다. 

1237~1238년 사이의 겨울에 몽골군은 얼어붙은 강을 빠른 속도로 건너다니며 

당시 루스-목셀 최강의 군대를 가지고 있던 대공국의 여러 도시를 휩쓸었다. 

아마도 역사상 루스를 겨울에 침략하여 성공한 유일한 예일 것이다.


이어서 야로슬라블과 트베르, 볼가 강변의 여러 도시가 몽골군의 발굽 아래 초토화됐다.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북서부 루스-목셀 대공국만은 유일하게 화를 면했다. 

얼음이 풀려 그 일대가 뻘수렁으로 변하면서 몽골군이 전진을 포기하고 초원지대로 말머리를 돌렸기 때문이다.


초원지대를 평정하며 잠시 재정비를 마친 몽골군은 이제 키예프 루스로 들이닥쳤다. 

1240년 키예프가 점령되어 주민이 모두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몽골군은 이어 갈리치와 볼린을 휩쓸고 루스의 국경을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폴란드에 침입한 몽골군은 계속 서진해 슐레지엔의 발슈타트 전투에서 독일군을 크게 무찔렀고, 

헝가리로 진출한 몽골군의 선발대는 오스트리아까지 나아갔다. 

온 유럽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 때 몽골 본국의 카라코룸에서 오고타이 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바투는 군대를 초원지대로 불러들여 1243년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도읍으로 킵차크 한국을 세웠다. 

이후 거의 대부분의 루스는 킵차크의 칸에게 무릎을 꿇고 몽골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고 장남 구유크가 몽골 제국 제 3대 칸이 되자, 

바투는 루시땅에 남아 킵차크 한국을 세우게 된다. 


동유럽을 정복한 몽골의 바투는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도읍으로 킵차크 한국을 세우고 

거의 대부분의 루스를 지배한다. 

루스인들은 킵차크 한국을 '졸로타야 오르다'라 부르고 몽골족의 루스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라 했다. 

'졸로타야 오르다(금장한국, 金帳汗國)'는 

'황색 천막 속에서 칸이 중심(황색은 중앙의 상징이기도 함)에 앉아 지배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타타르의 멍에'는 루스의 서부 지방에서는 약 1세기, 북부와 중부 지방에서는 약 2세기, 

남동부 지방에서는 3세기 이상 이어졌으며, 지역과 시기에 따라 지배의 강도가 달랐다. 

몽골족이 루스를 침략하면서 루스에 끼친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대량학살로 인한 인명의 손실, 약탈과 파괴로 인한 재산의 손실, 

노예로 팔려간 포로들은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조세의 수취로 땅은 척박해지고 사람들은 절대 극빈에 시달렸다. 


몽골은 키예프 루스의 유산을 송두리째 사라지게 했다. 

키예프 루스의 찬란한 문화는 그 뿌리를 뽑히고 문화의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도시와 마을의 몰락은 각계 각층의 기반을 없애 상업, 공업, 경제, 산업, 과학기술을 멸망시키고 

루스를 농업 일색의 사회로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북서부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민회와 함께 시민의 자유를 박탈해버리고 

국민들을 질곡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루스를 지배하게 된 몽골은 처음에는 직접 다루가치(총독)와 바스카크(사정관)를 파견해서 

행정 · 징세 · 징병 등의 업무를 집행했다. 

세금을 거두기 위해 인구조사도 세 차례나 했다. 

1275년에 실시한 세 번째 인구조사에서 당시 루스 인구는 약 1,000만 명이었다. 

세금은 납세능력에 관계없이 머릿수대로 거두었다. 

사정관의 징세는 철저했고, 이에 저항하는 주민들은 참혹하게 진압됐다. 

인구조사 결과는 징병에도 이용돼, 많은 루스인 청년이 몽골을 위해 병역에 복무했다.


그러나 루스인의 반발을 고려하여, 13세기 말에 루스의 여러 공에게 

권한을 위탁하고 세금을 받는 간접지배 방법으로 전환했다. 

킵차크의 칸은 루스 공들에게서 세금을 받고 그들에게 공국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허가장인 

야를리크를 내주었으며, 그들 가운데 가장 믿음직한 공에게 '전 루스의 대공' 칭호를 주어 

러시아의 모든 공후 위에 서게 했다. 

루스의 공들은 야를리크를 받기 위해, 그리고 '전 루스의 대공' 칭호를 얻기 위해 

앞다투어 사라이를 드나들었고, 킵차크의 칸은 루스 공후들의 대립과 반목을 교묘히 이용하여 지배를 강화했다.


몽골 지배하에서 루스는 북서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상업, 공업, 경제, 산업, 과학기술이 몰락하여 

농업이 유일한 주된 나라로 변했다. 

그나마 혹독한 기후와 황폐한 땅에서 쉽게 농업을 정착, 발전시키는 것마저도 어려웠다. 

게다가 몽골의 징세가 빈약한 루스 경제를 더더욱 쥐어짰다. 

한 역사가는 몽골의 수탈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 거대한 기생충이 루스인 대중의 생체에 달라붙어 그 즙을 빨아먹었다. 

그리하여 그 생명력을 고갈시켰고 때때로 그 생체 안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 

농민들의 지위는 계속 악화되어 점점 더 지주에게 예속돼갔다. 

그와 함께 여러 단계의 군신 관계가 형성되면서 귀족들의 봉건제후화 경향도 강화됐다. 

루스는 몽골의 지배를 거치면서 봉건제 하의 중세 유럽과 유사한 사회구조를 갖게 된다."


몽골 지배하에서 가장 큰 발전을 보인 것은 동방정교회였다. 

가혹한 지배자였던 몽골인도 종교에 대해서만은 가장 관대했다. 

교회와 수도원은 면세특권을 부여받았고, 재산도 보호를 받았다. 

또 사라이에까지 주교 관구를 설치하고 교회도 건립했다. 

루스의 여러 공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 대가로 교회에 많은 재산을 기증했다. 

몽골 지배 말기에 이르면, 경지의 약 1/4이 교회의 소유가 된다.


모스크바가 가장 화려했던 시대



이반 5세 시절에는 암염이 아주 귀했다고 한다.


암염으로 만든 도구들도 전시되어 있다.


표도르 대제 부모님의 초상화가 있는 방.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의 시대


유명한 오페라 대작으로 만들어진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 시대 

이 후 류리크 시대는 끝나고 러시아는 전국 시대를 거쳐 로마노프 왕조의 시대가 된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황권 찬탈의 야심을 품고 황태자를 살해하고 그 망령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의 러시아는 일명 ‘동란 시대 (Time of Troubles)’였다.  

‘동란 시대’란 러시아 역사에서 류리크 왕조의 멸망과 로마노프 왕조 탄생 사이의 공백기를 일컫는다.


1601년에서 1603년 사이에 러시아는 인구의 3분의 1 가량인 2백만 명이 죽는 대기근을 겪었다.

또한 1605년에서 1618년 사이에는 가짜 드미트리 전쟁으로 인해 폴란드 제1공화국에 일시적으로 점령당하여

민중들이 고통을 겪은 아주 힘들었던 고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황제 이반 4세의 최고 고문으로 활약했으며 자신의 여동생을 

황제의 아들 표도르 1세에게 시집보내며 엄청난 권력을 누렸다. 

이반 4세의 사망 이후 표도르 1세가 왕위에 오르자 보리스는 황제의 배후에서 섭정으로서 통치하였다.


보리스는 섭정 기간동안 비밀경찰들을 이용해 자신의 대항세력에게 심문, 고문, 사형 등을 감행했다.

표도르 1세가 사망한 후 보리스는 정식 황제가 되어 1598년부터 1605년까지 재위했다.


이후에 황제가 된 보리스 고두노프는 몇몇 왕족들을 추방하고 귀족들의 힘을 견제해 자신의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러시아 대기근이 닥치고 보리스는 일명 ‘가짜 드미트리 전쟁’이라고 불리는 

폴란드-모스크바 전쟁의 시작과 함께 사망한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는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동명 희곡을 원작 삼아 무소륵스키가 완성한 유일한 오페라로, 

‘러시아판 맥베스’라 불릴 만큼 권력의 비극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작품이다. 

솔로 가수의 화려한 기교와 아름다운 선율의 아리아가 중심인 이탈리아 오페라와 달리, 

또다른 주역인 민중들의 장엄하고 숙연한 합창과 중창이 두드러지는 무대다.


17세기 초, 이반 4세의 어린 아들 드미트리를 살해하고 왕좌에 오른 보리스 고두노프는 

민중의 기대와 의심을 동시에 받으며 내내 시달린다. 

죽은 드미트리를 사칭하는 젊은 수도승 그리고리가 폴란드 군대를 앞세워 나타나자 

보리스 고드노프는 스스로 무너지지만, 

민중들은 가짜 드미트리를 환영하며 새로운 비극을 예고한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는 그의 생애 중에서 그가 표도르 1세 뒤에서 섭정하던 시기부터 사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전 황제였던 이반 4세의 어린 아들 드미트리가 죽고 사람들은 당시 섭정하던 보리스가 그를 죽였다는 의혹을 거두지 않는다.

이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심지어 드미트리의 망령에 시달리기까지 한 고두노프는

결국 자신이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는 ‘가짜 드미트리’의 등장과 함께 비극적으로 사망한다.


이 ‘가짜 드미트리’는 사실은 왕자 드미트리가 죽지 않았다는 소문에 힘입어

자신이 사실 살아있는 진짜 드미트리라고 주장했던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라는 사람이다.


푸시킨은 이처럼 러시아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비극적인 희곡을 탄생시켰으니 그것이 바로 <보리스 고두노프>이다.

작곡가 무소륵스키는 이 희곡과 니콜라이 카람친의 '러시아 정부의 역사'라는 책을 바탕으로 대본을 작성했고

개정판본이 187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 상영되었다.


우리나라 국립오페라단에서도 2017년 4월 20~23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상영한 바 있다.



국립 역사 박물관 3층 로마노프 왕조

유명한 표트르 1세의 초상화와 머리 동상. 18세기 초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황제다.


표트르 1세는 키가 무려 2m 3cm의 거구에 얼굴은 이렇게 생겼다고 한다.


표트르 1세의 커다란 손바닥이 부조로 남아 있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Романов 1672 ~ 1725년)


루스 차르국 로마노프 왕조의 4대 차르이자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임페라토르)로 

표트르 대제(표트르 벨리키 Пётр Великий)라고 불린다. 

표트르는 베드로에서 따온 이름이므로 문화권에 따라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영어권)', 

'페터 대제(Peter der Große, 독일어권), '피에르 대제(Pierre le Grande, 프랑스어권), 

'페드루 대제(Pedro o Grande, 포르투갈어권)'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몽골-타타르의 멍에 때문에 서유럽과의 교류 단절 및 중세 수준 문화에 머물던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서구화를 밀어붙인 지도자다. 

지나친 서구화의 반발로 여러 번의 정변이 있었으나, 모두 피의 숙청으로 마무리했고,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에서 대승해서 변방의 국가였던 러시아가 

이후 유럽에 주요 정치세력으로 당당히 등장할 수 있게 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훗날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비견되는 인물. 스탈린이 존경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스탈린 시절에 표트르 대제가 높이 평가된 사실을 봐도 알 수가 있다.


참고로 키가 엄청나게 컸는데 지금 기준으로도 장신이다 못해 거인인 203cm였다. 

오늘날로 따지면 농구선수나 배구선수에게서나 나올 법한 체격.


로마노프 왕조의 여제시대를 전시하고 있다.


예카테리나 2세와 주변 인물들의 초상화

에카테리나 2세가 거느린 남자들 사진도 모두 전시되어 있다.


예카테리나 2세 (1729년 5월 2일 - 1796년 11월 17일)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이자 여제(1762년 - 1796년)다.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로, 본래는 프로이센 슈테틴 출신의 독일인이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임페라토르가 되었다.


그는 남편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기 이전부터 정부들을 두었다. 

67세 되던 해 뇌졸중으로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나이가 젊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 

사실상의 남편으로 여겨지던 포템킨과의 관계가 끝나고 난 후 

그녀의 공식적인 애인 또는 첩은 20명 이상 바뀌었다. 

그녀는 평민 출신 사병과 시종을 비롯한 잘생기고 신분이 낮은 젊은 남자들을 정부로 골라서 동거했다. 

이들 중 몇명은 적당한 때에 두둑한 상금이나 관직을 주어 내보내는 한편 

일부는 평생토록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후일 이들 중 한 사람은 자신들은 여제의 남자 후궁이나 남자 첩이라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대로 예카데리나의 남자들은 황제의 후궁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그녀의 남성 편력에 대한 비판은 당대에도 나왔지만 그는 남자 첩, 후궁을 두는 것이라며 

군주가 후궁과 정부를 두는 것을 근거로 들어 이를 반박했다. 

또한 옐리자베타 여제가 많은 남자와의 관계로 염문을 뿌렸던 것을 예를 들며 

자신은 정식으로 남자 후궁을 둔 것이라며 반박했다. 

그녀는 권력과 국정, 정복 사업 등에 집중하였지만 한편으로 

서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끊임없이 희구하기도 했다 한다. 

지능이 낮았던 남편과의 원만하지 못했던 성생활은 일찍부터 그녀의 그런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1745년 러시아의 황태자이던 표트르 3세와 결혼했으나 

지능이 부족하던 남편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다. 

그러나 남편 표트르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정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무대와 문화생활에 완전히 편입시켰다. 

내각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 반도와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넓혔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류하였고, 

문학과 예술, 학예와 교육 등의 장려에 큰 관심을 쏟았고 

각 지방관들로부터 직접 정무를 결재받음으로써 황권을 강화시켰다.


투르크와 싸워 영토를 넓혔으며 폴란드 분할의 주역의 한사람이었다. 

내각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 제도를 개혁했다. 

본래 이름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독일어: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며, 

개명한 이름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러시아어: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다. 

루터교 세례명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러시아 정교 세례명은 예카테리나, 

이후 그는 러시아 정교회 세례명을 이름으로 사용했다. 

행정 개혁과 내치, 문예 부흥 등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예카테리나 대제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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