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 (State Historical Museum) - 붉은 광장에서 본 원경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러시아어: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исторический музей)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과 마네쥐 광장(Manege Square) 사이에 4개의 탑이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이다. 

러시아 영토에 살았던 선사 시대 유물부터 로마노프 왕조까지 전 역사에 걸친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 - 붉은 광장에서 본 전경


원래는 1755년 미하일 로모노소프(Mikhail Lomonosov)가 세운 것으로, 모스크바 대학교의 학과 건물이었다. 

이후, 1875~1881년에 영국계 러시아 건축가 블라디미르 셔우드(Vladimir Osipovich Shervud)가 

네오 러시아 양식으로 설계해서 건축하여 역사박물관으로 출범​했다. 

셔우드는 19세기 초 러시아가 영국에서 초청해 온 면방직기계 엔지니어의 손자로 붉은광장도 설계했다.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 - 마네쥐 광장에서 본 원경


국립역사박물관 앞 마네쥐 광장은 '승마' '승마장'을 뜻하는 프랑스어 마네즈(manège)에서 나온 이름으로 
19세기 초반 근처에 건물 너비 45m, 승마 트랙 180m에 이르는 실내 마장(馬場)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장은 소비에트 시대 10월혁명 광장이 되었다가 사회주의 붕괴 후 옛 이름을 되찾았다.

박물관은 1872년 이반 자벨린(Ivan Zabelin), 알렉세이 우바로프(Aleksey Uvarov) 와 그외 여러 슬라보필에 의해 설립되어
개인의 기부금으로 유지해 오다가 러시아 혁명 뒤에 국립으로 개편되었다.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 - 마네쉬 광장에서 본 전경


역사박물관은 선사시대 유물부터 근-현대까지 1백만 점 넘는 소장품을 지니고 있다. 

로마노프 왕조가 수집한 고가 미술품도 많다고 한다. 

석기 시대의 단단한 참나무로 만든 거대한 보트, 소년 onfim의 노브 고로드 자작 나무 껍질 문자, 

첫 번째 인쇄 책 "사도", 이반 4세의 끔찍한 왕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웅장한 세이버, 

기본 도구, 보석류, 고대 동전, 늙은 러시아 연대기, 군사 갑옷 및 기타 여러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국립역사박물관 앞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장군 기마상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1896년 12월 1일 ~ 1974년 6월 18일.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이자 정치가.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소련의 군인으로, 소련 육군 최고 계급인 소비에트 연방 원수까지 승진했다.


주코프는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근처 스트렐코브카 촌락 농가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교육만 받고 모스크바로 와서 가죽직공의 도제가 되었다.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틈이 있을 때마다 독서를 했으며, 

결국 도제 과정을 마치고 가죽 장인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19살 때인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징병되어 일개 병사로서 제5예비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훈련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신병 훈련이 끝나자마자 장교의 권유로 부사관 교육 과정에 다시 들어갔다. 

1916년 봄 부사관으로서 교육을 받기 위해 제10용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주코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용감하게 싸운 덕분에 성(聖)게오르기 십자훈장을 2번 수여받았다.


러시아 민중들이 러시아 제국의 무능과 핍박에 저항한 러시아 10월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 군은 해체되어 주코프는 집에 돌아왔고, 티푸스에 걸려 1년 여를 요양했다. 

이후 소련군에 부사관으로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전하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처음에는 부사관의 계급이었으나, 부대 내에 배속된 정치 장교의 추천으로 장교 교육 과정에 입학했다.


이후 장교로서 군에 돌아와 계속 승진하여 기병 대대장이 되었고, 

이때 농민반란을 진압한 공적으로 인해 적기 훈장을 수여 받았다. 

1923년 기병연대장, 1930년 5월에는 기병여단장으로 계속 승진을 거듭했다. 

후에 소련군 기병감찰관 보좌관, 제4기병사단장, 제3기병 군단장, 제6기병 군단장을 역임하였다. 

주코프 원수는 군대의 기계화에 의한 전쟁 곧 군대의 시대 변화에 대비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그는 기계화부대의 운용과 새로운 이론의 강력한 제창자 중에 한 명이며, 

자신이 수립한 계획에 치밀하여 엄격한 훈련과 군율을 실시하는 군인으로 유명해졌다.


스탈린에 의한 1937년부터 1939년까지의 대숙청에서 살아 남았고, 

중장으로 승진하여 벨라루스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과 몽골인민공화국의 국경구획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일본의 관동군과 여러 번의 국경 충돌이 일어났다. 

6월의 국경의 노몬한에서 벌어진 몽골인민공화국군과 만주국군의 작은 충돌이 

양국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었던 소련과 일본의 충돌로 발전하였다. 

관동군은 처음에 소련의 국경 방위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의도로 전투를 개시하였으나 

급속히 대규모 전투로 발전하여 최종적으로는 전차 500대 이상, 항공기 500기 이상, 

병력수 수만 명이 투입되는 정규전 수준까지 이르렀다.


정세가 심상치 않자, 주코프는 6월 벨라루스에서 급히 이곳으로 전임되어 소련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주코프는 일본군의 공세가 소진되기를 기다려 충분한 전력을 준비해 1939년 8월 20일부터 관동군에 대한 반격을 지휘했다. 

기계화된 포병과 보병의 지원을 받는 2개 전차여단이 전선의 양익을 진격시킨다는 대담한 기동을 실시하여 

일본 제6군을 포위하고, 1개사단을 전멸시키는 대타격을 주었다. 

2주 안에 관동군은 후퇴하고 그 후 국경선은 소련, 몽골의 주장대로 확정되었다. 


이 공적으로 주코프는 "소련 영웅"의 칭호을 하사받았다. 

소련 이외에는 이 전투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주코프의 기계화부대의 기동적인 운용과 혁신적인 전술도 서방측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이러한 전술이 주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후에 나치 독일에 의해 폴란드와 프랑스의 전격전이 일어날 즈음이었다. 

이 공적으로 주코프는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1940년 5월초 스탈린은 주코프를 불러들여 키에프 특별군관구사령관에 임명하고, 

차수(Генерал армии, 상급대장과 소련방 원수의 사이에 있는 계급)의 계급을 수여했다. 

주코프는 키에프 군관구에서 임박한 전쟁에 대비한 엄격한 훈련을 실시했고, 

그가 훈련시킨 부대는 다른 곳과는 달리 1년 후 독일군의 남방집단군의 진격을 상당히 늦추었다.


12월 참모본부에 의해 각 군관구사령관의 회의가 이루어졌으나, 주코프는 독일군의 소련 공격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전차, 기계화부대의 편성을 가속하고, 공군, 항공부대의 강화를 최중요 과제로서 제기했다. 

1941년 1월 주코프는 소련군 총참모장, 부국방인민위원에 임명되었다.


1940년부터 나치 독일이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는 많은 경로로 소련 지휘부에 전달되었다. 

주코프는 총참모장으로서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티모셴코와 함께 독일군에 공세에 대한 방위 태세를 정비하였으나, 

나치독일을 자극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은 적극적으로 방위태세를 정비하는 것을 금지했다. 

주코프와 티모셴코는 거듭 경계령을 발령해 줄 것을 요청했고, 독일군의 침략 하루전인 1941년 6월 21일에야 

스탈린의 허가를 얻어 경계령을 발동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305만 대군으로 소련 침공을 개시했다(바르바로사 작전). 

주코프는 총참모장으로서 전선 여러 곳을 방문하고 상황을 조사하였다. 

주코프는 키에프가 포위의 위기에 몰리자 독일군의 예봉을 피해 일단 후퇴를 하여 

병력을 보존하기를 스탈린에게 권고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무시하였다. 

주코프는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이지 않자 총참모장 직을 사임하고 전선으로 나가기를 스탈린에게 희망하였다. 

스탈린은 주코프의 실력을 믿었으므로 당시 포위되어 있었던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그는 무능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대신하여 도시방어 임무를 맡았다. 

여기서 주코프는 눈부신 군사적 수완과 비정하기까지 한 결의를 보이며, 

갈팡질팡하던 방위군의 군율을 회복시키고, 시민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1941년 가을에는 레닌그라드 남쪽 교외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정지시켰다.


1941년 10월 모스크바에 독일군이 접근했기 때문에 주코프는 레닌그라드로부터 송환되어 

모스크바 방위 지휘관을 맡아 세묜 티모셴코를 대체하였다. 

그는 모스크바 주위의 방위선을 강화하고 극동에서 동계전투 훈련을 받은 부대를 차례로 철도수송시켰다. 

1941년 12월 소련군의 반격으로 인해 이 방면의 독일군을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대이동을 신속하게 성공시킨 주코프의 병참 수완이 없었다면 모스크바 방위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1942년 8월 주코프는 소련군의 최고 사령관 대리에 임명된 후, 

독일군의 맹공을 받던 스탈린그라드 구출을 위해 파견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소련측도 100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왔지만, 

1943년 1월 독일 제6군을 포위 궤멸시켜 동부 전선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공적으로 주코프는 원수로 승진했다.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장군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니콜라이 바투틴을 돈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1944년 1월에는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해제시켰다. 

1944년 6월부터 개시된 소련의 대반격작전(바그라티온 작전)과 계속된 1945년 1월 


독일본토에 대한 침공(오데르-나이세 작전)을 지휘하여 4월에 베를린을 점령하고 독일의 카이텔 원수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았다. 

전쟁 승리 후 그대로 소련의 독일 점령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대조국전쟁에서 대활약했던 군인으로 영웅시되어, 1945년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전승퍼레이드를 벌일 때 

주코프는 스탈린을 대신하여 말을 타고 참여부대의 사열을 받았다.


이러한 주코프의 존재와 인기는 스탈린의 독재정치에 대해 적지않은 위협이 되었다. 

게다가 그의 오만하고 투박한 성격 때문에 적도 많았다. 

그리하여 그의 안하무인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스탈린의 의심을 샀고, 

전리품 약탈 등의 혐의로 베를린으로부터 모스크바로 송환되었다. 

주코프는 스탈린 앞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자아비판했다. 

그래서 좌천되어 1947년에는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지휘 병력도 적었던 오데사 군관구, 후에 우랄군관구의 사령관을 전전하였다. 


스탈린 사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1953년 국방장관 대리, 1955년 국방장관에 취임했다. 

1953년에는 내무인민위원장(NKVD)으로 있던 라브렌티 베리야를 체포하여 처형하는 등 

스탈린 사후의 소련 공산당의 지도 체제를 지탱하였다.


1957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스탈린을 옹호하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조직한 

이른바 반당 그룹과의 권력 투쟁에서는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6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정치국)에서 군사면에 관한 정책을 둘러싸고 흐루쇼프와 중대한 의견 차이가 일어났다. 

흐루쇼프는 육해군의 병력 삭감과 함께 억제력으로 전략핵무기부대를 증강시켜서, 

남겨진 인적, 물적 자원을 민간 경제 발전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한편 주코프는 군의 이익을 제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정책에는 반대했다. 

흐루쇼프는 군에 대한 당의 우위성을 방패삼아, 주코프를 장관직에서 해임시키고 중앙위원회에서도 추방했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에서는 주코프가 쿠데타를 기도했다고 믿고 있었기에, 

중앙위원회의 회의에서 이를 이유로 주코프를 고발하여 추방시켰다고 회상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알렉세이 코시긴이 뒤를 이었고, 

그들로부터 주코프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정계에 복귀하지는 않았으나, 소련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인물 중 한명이었다. 


후에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 《추억과 회고》(Воспоминания и размышления)을 집필하여 

세계 30개국, 19개 언어로 약 800만부가 출판되었다.

1974년에 사망했고,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받으며 다른 원수들과 마찬가지로 크렘린 벽묘지에 안장되었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그의 이름이 붙은 거리가 존재한다. 

또한 모스크바, 에카테린부르크, 옴스크, 트베리, 하르코프, 쿠르스크 등에는 기념비와 동상이 

고향 스토렐코프카에는 화강암의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장군 기마상


그가 말발굽으로 밟고 있는 것은 독일 나치 깃발 군기(軍旗)와 뱀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표트르 대제 기마상이 뱀을 짓밟는 것과 비슷한 발상이다.


주코프는 전사(戰史)를 쓰며 만년을 보내다 78세에 세상을 뜬다.

붉은광장에 그의 동상을 세우려는 움직임은 소비에트 시대부터 있었지만 

사회주의 붕괴 후인 1995년에야 이뤄졌다.

유네스코 유산인 붉은광장에 새로 시설물을 들일 수 없어 이곳 역사박물관 앞 마네쥐 광장에 세우게 된다.

조각가 V M 클리코프는 주코프가 1945년 전승 퍼레이드에서 

군대를 사열하면서 손을 들어 인사하는 모습을 재현했다고 한다.




카잔성당 (Kazan Cathedral, Казањска катедрал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크렘린 성벽, 국립역사박물관, 부활의 문, 카잔성당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활의 문, 모스크바시청 관공서, 카잔성당


1802년 붉은광장 북쪽의 카잔성당 (By Fedor Alekseev)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국립역사박물관, 부활의 문, 모스크바 시청사 (Provincial Board), 카잔 성당


카잔성당은 폴란드를 상대로 거둔 승전을 기념하여 '카잔의 성모'를 보존하기 위해서  

1633년에 ‘고움(Goum)’과 인접한 넓은 지역에 포자르스키(Pozarsky) 대공이 건축하였다. 

그러나 카잔 성당은 1936년 주변에 있던 수녀원 몇 채와 함께 사라졌다. 

크렘린 궁전은 삼각형 모양의 성곽에 둘러싸여 있으며, 성벽에 5개의 문과 29개의 탑을 증축하였다.

파괴된 카잔성당


독재자 스탈린은 1936년 붉은광장 군사 퍼레이드에 방해가 된다며 광장의 교회들을 없애 버리라고 명한다.

이때 건축가와 뜻 있는 사람들이 말려 성바실리 성당은 화를 면했지만 카잔성당은 폭파돼 사라지고 만다.


카잔성당 (Kazan Cathedral, Казањска катедрала)


1612년 폴란드의 침입을 막은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세워진 뒤 

1936년에 러시아 군중집회 기간에 파괴되었다가 소련 해체 후 모스크바시 당국에 의해 

1993년에 건축가 바라노프스키가 이 성당을 재건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정면에 양파 돔을 하나만 세우고 왼쪽에 천막형 첨탑을 인 종루를 따로 올렸다.

3D 모델


삼면을 돌아가며 넓은 회랑을 둘러쳐 예배 공간과 종루를 연결했다.​

이층 외부에 끝이 뾰족한 코코슈니크 아치를 겹쳐 세워 꾸미고

파르스름하고 불그스레한 파스텔톤 칠을 해 ​은은하고 푸근한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카잔성당과 니콜스카야 거리, 백화점 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백화점 굼, 크렘린 성벽, 러시아 국립박물관, 카잔성당



성당은 수즈달의 대공 포자르스키(Dimitry Pozharsky) 왕자가 의병대장 쿠즈마 미닌(Kuzma Minin)과 함께

1612년 모스크바를 침공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을 물리친 뒤 

포자르스키가 사재를 내놓아 지은 목조 교회에서 출발한다.

성 바실리 대성당 앞에 쿠지마 미닌(Kuzma Minin)과 포자르스키(Dimitry Pozharsky) 동상이 있다.



폴란드 군으로부터 모스크바를 해방시킨 영웅 미닌(Minin)과 포자르스키(Pozharsky) 민병대에게

카잔성당의 성모 이콘(성상화)는 큰 의미를 지녔다. 

보차르스키는 전쟁 중에 여러 차례 '카잔의 성모'께 승전을 빌었고 

그 은총으로 폴란드 침공을 물리쳤다며 교회를 카잔의 성모에게 바쳤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 때 러시아군 총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성당에서 

카잔의 성모에게 경배하며 도움을 빌어  승리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카잔의 성모' 이콘


모스크바 카잔성당 현관 위 정면 아치 벽에도 '카잔의 성모' 이콘을 모시고  있다.

원래 목조 카잔성당이 모스크바 대화재 때 불탄 뒤 1636년 석조 건물로 새로 지을 때 복제화를 모셨겠지만 

지금 있는 것은 그 복제화도 아니고 1993년 성당을 새로 지어 복원할 때 만든 것이다.


모스크바 독재자 스탈린은 1936년 붉은광장 군사 퍼레이드에 방해가 된다며 

광장의 교회들을 없애 버리라고 황당한 명령을 한다.

당시 건축가와 뜻있는 사람들이 말려 성 바실리 성당은 화를 면했지만 카잔성당은 폭파돼 사라지고 말았다.


 '카잔의 성모'


'카잔의 성모'는 1579년 모스크바 남동쪽 옛 타타르 도시 볼가 강변의 카잔 마을에 사는 

9세 소녀 마토로나가 꿈에서 성모의 계시를 받아 성모 마리아가 알려 주는 대로 찾아가 

땅속에서 발견하여 가져왔다는 이콘(성화)이다.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성상화를 종교 작품으로만 여기지 않고 

구세주나 성모, 성인이 출현한 것으로 보고 숭배한다.

그 이콘 중에 가장 거룩하고 기적을 부르는 이콘으로 받드는 것이 '카잔의 성모'다.


러시아 정교회는 카잔의 성모를 기적의 힘을 주는 이콘으로 받들어 

발견된 장소에 테오토코스(성모) 수도원을 지어 이콘을 모신다.


그 후 카잔의 성모는 러시아를 수호하는 대표적 이콘이 되었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야로슬라프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카잔의 성모 복제화를 모신 카잔성당이 들어선다.


1904년 카잔 테오토코스 수도원에 도둑이 들어 카잔의 성모 원본을 훔쳐 갔다.

도둑은 나중에 붙잡혔지만 값비싼 보석들로 장식한 황금 액자만 챙기고 성상화는 잘게 잘라 태워 버렸다고 진술한다.

이 일로 온 나라가 좌절과 공황에 빠져 앞으로 나라에 나쁜 일이 닥칠 거라고 걱정했는데 

결국 1905년 노동자들 시위에 군이 발포하는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 러일전쟁에서 패한다.


카잔성당과 니콜스카야 거리


카잔성당은 성 바실리 성당 못지않게 귀중한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소련방이 무너지고 맨처음 복원한 종교 시설이다.

옛 사진과 미술작품을 참고해 3년 공사 끝에 1993년 지금 건물을 완공했다.    

어차피 진품이 아니긴 해도 원래 이콘은 파괴되기 전 러시아 정교회 총주교 교회인

모스크바 옐로코보 성당으로 옮겨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카잔성당의 남쪽 부분

비록 복원한 새 건물이긴 하지만 카잔성당은 코코슈니크 아치를 잘 구사한 건축물로 꼽힌다.





카잔성당 야경


카잔성당 내부




카잔성당 제단










부활의 문(The Resurrection Gate) _ 바스크레센스키 (Voskresensky) 문


1535년 붉은광장 들어서는 보행자 문으로 처음 세웠고

1680년 문 위에 다락같은 이층방을 얹어 약국이나 모스크바대 인쇄소로 썼고

1931년 카잔성당처럼 붉은광장 군사 퍼레이드에 쓸 장갑차, 차량을 드나드게 하려고 폭파해 찻길로 썼다가

소련방 붕괴 후 1995년 복원해 보행자 통로로 '부활'했다.

역사박물관 첨탑들처럼 부활의 문 두 탑도 꼭대기에 러시아 국가 문장의 쌍두 독수리상을 이고 있다.

오른쪽으로 카잔 성당이 보인다.


부활의 문(The Resurrection Gate)


문에 '부활'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붉은광장 쪽 가운데 기둥에 그리스도의 부활 이콘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정교회에서 '부활'이라면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나와 부활하는 장면과 그리스도가 승천하기 앞서 

지하에 있는 죽은 자의 나라를 찾아가 아담과 이브부터 솔로몬왕, 시바의 여왕 비롯한 제왕까지 

다양한 영혼들을 해방시켰다는 '그리스도의 황천 강하(Harrowing of Hell)​' 두 가지 이콘을 함께 이른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황천 강화'는 중세 미술과 연극의 주제로 애용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콘



양쪽 아치 문 위에도 이콘이 걸려 있다.

왼쪽은 988년 세례를 받아 정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임으로써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를 연 키예프공국 블라디미르 대공이다.

아래쪽 작은 이콘도 러시아 정교회 성인인 듯하다. ​



오른쪽엔 블라디미르 대공의 아들로, 

지금 우크라이나 지역에 있던 키예프공국을 전성기로 이끈 야로슬라프 대공의 이콘이 있다.

영토를 크게 넓히면서 당시 러시아 전역에 정교를 퍼뜨려 중요한 성인으로 모신다.


부활의 문과 이베르스카야 차소브냐 (Iveron Chapel)


문을 나서 뒤를 돌아본다.

붉은 광장은 바실리 성당 뒤쪽으로도 입장이 가능하고, 굼 백화점 앞으로도 입장이 가능하지만 

부활의 문이 진정한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러시아 건축물처럼 보이는 부활의 문은 입구 쪽의 기도실을 기준으로 좌우가 대칭되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의 상징 쌍두독수리 모양을 기준으로 뾰족한 두 첨탑을 간직한 부활의 문을 지나 

부활의 문에 붙어 있는 작은 교회당은 기적을 나타낸다는 성모의 이콘이 자리 잡고 있어서 

자그마한 예배실이지만 끊임없이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부활의 문과 이베르스카야 차소브냐 (Iveron Chapel)


이 채플은 1669년 부활의 문을 지키는 예배당으로 처음 목조로 지으면서 그리스 북부, 정교회의 영적 중심지 아토스산에 있는 

그레고리안 이비론 수도원에서 999년 발견된 이콘(성화) '이베론의 성모'의 복제화를 수호 성인으로 모셨다.

그래서 '이베르스키(이베리안)'라는 이름을 붙였고 '부활의 문'을 '이베르스카야 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문이 수차례 철거되었다가 재건되는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부활의 문'이란 이름은 

빨간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두 아치형 입구 위에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장면에서 따온 것이다. 


1534년에 처음 세워졌다가 1680년에 재건된 이 문은 

광장에서 소비에트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이유로 스탈린에 의해 철거되었다. 

하지만 1994년에서 1995년 사이에 다시 건축되었다. 

이 문을 지나면 바로 붉은 광장이 나온다.


이베르스카야 차소브냐 (Iveron Chapel)

 

이 부활의 문  가운데 위치한 ‘성모의 작은 교회당’은 성모 이꼰(성상화)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배실은 작지만 참 아름답다.


1781년 석조로 새로 지었고 그때 푸른 지붕과 지붕 위 천사상도 만들어 올렸다.

출입문 양쪽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을 부조상으로 모셨다.

짜르(황제)부터 거지까지 누구든 광장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은 이 채플에 경배하는 전통이 내려온다고 한다.


반구돔 지붕과 정교회 십자가를 받쳐 든 황금빛 천사상


황금빛 별이 반짝이는 파란 반구 돔지붕과 정교회 십자가를 받쳐든 황금빛 천사상이​​​ 멋지게 어울린다.

하지만 이 채플과 조각상 모두 1996년 새로 만들었고 안에 모신 이베론의 성모화 역시 새로 그려 걸었다.

부활의 문과 함께 소비에트 시대의 폭력과 야만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황금빛 천사상


이 천사상은 대표적 대천사 넷 가운데 미하일(마이클)인 듯하다. 

미카엘은 흔히 사탄을 물리치는 사령관으로 갑옷을 차려 입고 칼을 빼든 모습으로 표현하는데

이 천사상은 정교회 십자가를 치켜드느라 칼이 검집에 들어가 있는 것만 다를 뿐이다.

좌대에 새긴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한다.​


이베르스카야 차소브냐 (Iveron Chapel) 내부

병사에게 창으로 찔려서 피를 흘렸다고 전해지는 비잔틴 성모를 기념하는 이콘이 보관되어 있다.


병사에게 창으로 찔려서 피를 흘렸다고 전해지는 비잔틴 성모를 기념하는 이콘


바로 이 이콘이다. 정교회에선 이 성화를 누가복음을 쓴 누가가 그렸다고 믿는다.

오랜 세월 숱한 기적을 내려줬다고 해서 세계 여러 정교회 성당들이 모시고 있다.


킬로미터 제로 (Kilometer Zero) 나침판


이곳은 러시아의 고속도로망인 킬로미터 제로(Kilometer Zero)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따라서 이곳은 붉은 광장의 시작점이자 러시아 횡단 여행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다.


동전을 뒤로 던진 뒤 어디 떨어졌나 돌아본다.


동전이 벽돌 대신 동판 위에 떨어지면 행운이 온다고 한다.

동전을 던진 뒤 다시 집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변에서 차림 허름한 사람이나 집시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슬그머니 집어간다.


킬로미터 제로 (Kilometer Zero) 나침판에 서서 인증샷


함께 여행 중인 일행과 단체 인증샷


1880년대 붉은 광장과 부활의 문


19세기 그림엽서에 나타난 부활의 문

중앙의 부활의 문과 왼쪽은 모스크바시청사, 오른쪽은 역사박물관


[영상] 부활의 문과 카잔성당 / 걸어서 세계 속으로


부활의 문 앞에서 여행객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사진을 찍고, 동전을 던지고 있다. 

바닥에 있는 노란 표지판 속의 원이 모스크바 지도에서 정중앙이라고 한다. 

등 뒤로 동전을 던져 원안에 떨어지면 행운을 가져온다는 이야기가 여행객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 

던져진 동전들은 모두 집시할머니들 차지다. 

부활의 문을 통과하니 왼편으로 카잔성당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17세기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지었다는 이 성당은 러시아만의 독특한 양식이라고 한다. 

카잔성당을 지나면 길이 695m 폭 130m의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바로 붉은 광장이다.




스파스카야 탑 (Spasskaya Tower)


스파스카야 타워(Spasskaya Tower) 번역하며 구세주(Savior)탑이다.

크레믈린성벽에는 20개의 첨탑형 망루가 있다.

가장 높은 지상 80m 높이의 삼위일체탑(Troitskaya Tower)까지 크기와 형태가 다양하나

초기 크레믈 성채에 있어서 타워는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콘스탄틴과 헬렌 타워, 나바트나야 타워, 스파스카야 타워


늘어선 성벽 타워의 맨 앞이 1490년 이탈리아 건축가 솔라리가 설계한 37m 콘스탄틴과 헬렌 타워,

그 뒤가 1495년 세운 38m 나바트나야 타워이고 맨 뒤에 71m 스파스카야 타워가 서 있다


스파스카야 타워(Spasskaya Tower)와 성 바실리 성당


스파스카야 타워는 붉은광장을 굽어보는 크레믈린 동쪽 성벽의 주 출입구로

1491년 이탈리아 피에트로 안토니오 솔라리(Pietro Antonio Solari)에 의해 축조되었다.


스파스카야 타워(Spasskaya Tower)와 황제의 탑


과거에는 크레믈린의 3대 문 중 스파스카야는 황제가 출입하는데 이용하였고 

가장 높은 트로이츠카야(Troitskaya)는 대주교가 

그리고 보로비츠카야(Borovitskaya)는 일반서민이 이용하였으나 

현대에는 스파스카야는 대통령과 국빈, 고위공무원, 주요인사가 나머지는 일반 관광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왼쪽에​ 높이 16m로 스무 개 성벽 타워 가운데 가장 낮은 '황제의 탑'이 있다.  

가장 늦은 1680년에 세운 탑이기도 하다.  

목조 탑이던 시절, 이반 뇌제가 자주 올라 바로 앞 붉은광장을 내려다보기를 즐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기둥만 세우고 사방이 트여 있어 엄밀히 말하면 탑이라기 보다 전망대라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나바트나야 타워, 황제의 탑, 스파스카야 타워


소비에트연방체제하에서 원래 있던 두머리 독수리상 대신에 달아 놓은 

꼭대기의 별을 포함 전체 높이가 약 71m나 되고

1491년에서 1585년 사이에 설치된 시계는 문자판의 크기가 직경 약 6.12m나 될 만큼 크다.

좌측 하단 원형 모양의 제단이 로브노예 메스토 (лоБноемеСто)이다.


스파스카야 탑 (Spasskaya Tower)


시계탑을 겸한 스파스카야(구세주) 타워는 ​1491년 이탈리아 건축가피에트로 솔라리가 세웠다.

타워 아래에 난 동쪽 성벽 문은 크렘린의 주 출입구였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어야 했다고 한다. 

소비에트 시절엔 당 서기장을 비롯한 최고 정치 지도자들만 드나들었다고 한다.


시계는 15세기 말~16세기 중반에 단 것으로 짐작한다.  

시계에 맞춰 종이 울려 '크렘린 차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루비 스타


첨탑 꼭대기엔 원래 러시아 국가 문장의 핵심인 쌍두 독수리상이 올라 앉아 있었지만 

1935년 소련 정부가 끌어내리고 대신 소비에트의 상징 왕별을 세웠다.   

붉은 빛 나는 '루비 유리'로 만든 별이어서 '루비 스타'라고 부른다.


1917년 스파스까야 탑 부근의 노천시장 (By Boris Kustodiev, 1917)


19세기 초 스파스카야 다리의 서점상들 (By Apollinary Vasnetsov)


이 벽에는 3개의 문들이 뚫려 있었으며, 나머지 2개의 문은 붉은 광장의 반대편에 뚫려 있었다. 

19세기 초에 문들 중 하나가 벽돌로 아름답게 장식되었으나, 여전히 '스파스키 문'이 궁궐의 공식 정문으로 기능했다. 

스파스카야 문 앞 해자에는 돌로 된 다리가 있었으며, 이 다리에서는 책을 파는 노점상들이 들어서 있었다.


로브노예 메스토 (лоБноемеСто)


바실리 성당 앞에 우물 모양의 단이 있는데 이 조형물은 모스크바의 역사와 함께 해온 

유서 깊은 로브노예 메스토(лоБноемеСто)이다.

붉은 광장은 나라의 중심 광장으로 오랫동안 역사적 사건들을 지켜봤다.

‘로브노예 메스토’는 1549년 이반 뇌제가 카잔 한국에 승리를 한 후

바로 이곳에서 공식적으로 승전 사실을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의 기록에 언급됐다.

그 이후 이곳은 차르가 연설을 하거나 칙령을 선포하는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 때 주요 무대로 활용되었다. 

소련 시절에는 레닌 묘의 연단이 이 기능을 담당했다. 


이 ‘로브노예몌스따“는 ’단두대‘라고도 부른다.

단어가 단두대라는 의미도 있고, 이곳에서 농민반란 지도자 푸가초푸를 처형하기도 했다니 

단두대라고 하는 게 틀린 것은 아니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대규모 처형이 집행됐을 때가 있기는 했는데 

1698년 반란에 참가한 ‘스트렐치’(황실 친위대) 대원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스트렐치 처형 날 아침’이라는 바실리 수리코프의 그림도 있다.


로브노예 메스토에서 공개 처형이 있기는 했지만 자주 그런 용도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개 연설을 하는 장소에 가까웠다.


1801년 로브노예 메스토와 스파스카야 탑, 성 바실리 성당 장면


15세기 말부터 크렘린 정면이 광장으로 되었으며, 차르 (tsar,군주)의 선언이나 판결, 포고가 내려지던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팔던 장소로 상업광장 · 화재광장 등으로 불렸다. 

또 전쟁을 떠나는 군사들이 행진을 하던 곳이자 때때로 정치범이나 흉악범을 시민들 앞에서 처형하던 곳이기도 하다.

17세기 말부터 ‘아름다운(크라스나야,Krasnaya)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로브노예 메스토 (лоБноемеСто)


로브노예 메스토 (лоБноемеСто)


로브노예 메스토 (лоБноемеСто)


크렘린 벽 묘지 (Kremlin Wall Necropolis, Некрополь у Кремлёвской стены)


붉은 광장 굼 백화점에서 바라봤을 때 정면에 보이는, 레닌 영묘 바로 뒷편 쪽 성벽에 해당한다. 

레닌은 국부니까 특별히 개인 건물을 받았고 그 뒤엔 나머지 위인들이 묻힌 것. 

붉은 광장 가운데에 있어 참배객의 접근성이 굉장히 좋다.


국립묘지라고 해서 한국의 현충원이나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와 같이 

드넓은 풀밭에 비석이 가지런히 늘어선 모습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말 그대로 크렘린의 붉은 성벽 아래에 묻힌 것. 

국가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에만 수여되는 최고의 영예였다.


크렘린 벽 묘지


크렘린 묘지를 돌면 소련의 모든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장관들, 소련의 모든 군원수, 유리 가가린, 막심 고리키를 비롯한 많은 이가 이 곳에 묻히는 영광을 누렸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안치된 지도자는 콘스탄틴 체르넨코(1985)다.


스타 시티에서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로 떠나기 직전 소유즈에 탈 우주인들이 

평소 비행복 입고 언론에 나오던 것과 달리 정장, 군복을 말쑥이 차려입고 참배한다. 

이 때는 특히 유리 가가린을 비롯한 순직 우주인들과 

세르게이 코롤료프 등 우주 도전자의 레전드들에게 헌화한다.


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이나 세묜 부됸니 등 몇몇 인물들은 흉상이 따로 세워져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기 묘에 누워 있는 반면, 

소련 관료와 영웅 대부분은 크렘린 벽에 묻혔다. 

여기에 이오시프 스탈린도 묻혀있는데, 그는 1961년까지 레닌 옆에 누워있다가 쫓겨나 이곳으로 옮겨졌다


크렘린 벽 묘지


크렘린 벽 묘지


[영상] 2015 세계 군악대 축제, 스파스카야 탑




레닌의 묘 (Lenin's Mausoleum _ Мавзоле́й Ле́нина; Mavzoley Lenina)


이곳은 이런 레닌이 숨을 거둔 후 1924년 알렉세이 시추세프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 후 1930년에 적토색 화강암 건조물로 다시 지어진 레닌의 묘이다. 

묘는 피라미드와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서 깊은 크레믈린의 건물들과 잘 어울어져 있다.


소련 해체 이전까지 레닌은 신성한 존재로서 범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는 볼세비키 혁명을 주도했고 혁명후 대혼란 속에 빠져있던 소련을 신경제정책 NEP로 극복시킨

그야말로 소련의 영웅이었으며 공식적으로 종교를 부정하는 소련에서도 레닌만은 신적인 존재였다.


러시아 혁명을 완수한 이후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그의 유해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수많은 추모의 물결이 몇 주 동안 한겨울의 추위를 뚫고 몰려 들었다. 

여기에 영감을 받은 후임자 스탈린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어머니 곁에 묻어 달라던 레닌의 유언을 무시하고, 

레닌의 아내이자 혁명 영웅인 크룹스카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엠버밍(Embalming)을 결정했다.


레닌의 묘


후임자 스탈린도 죽은 뒤 방부처리되어 생전의 잠자는 듯한 모습으로 

레닌 곁에 합장되고 방문객의 관람 대상이 되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영묘 입구에도 레닌과 스탈린의 이름이 동시에 씌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스탈린은 흐루시초프 시대에 격하되면서 뒷편 크렘린벽 묘지로 이장되었다. 

굴라그에서 석방된 한 사람이 "꿈에 레닌이 찾아 왔는데 스탈린더러 방 빼랍니다"

라고 크렘린 연설대에서 증언했다고 한다.


레닌의 묘


소련 시대에는 내내 국부로서 참배의 대상이 되었지만 중국이나 북한, 베트남과 달리 

소련이 붕괴하면서 러시아는 공산당 일당독재가 무너졌고 더 이상 여론은 예전 같지 않다. 

러시아에서도 레닌을 존경하는 마음이 상당히 약해지고 러시아의 대통령들이 모두 

레닌에게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레닌 묘 안에 방부처리해서 안치되어 있는 레닌의 시신


건물 내부에서 23개의 계단을 내려가면 전시실 중앙부에 안치된 레닌의 유체가 있으며, 

그의 유체를 죽은 당시의 모습 그대로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방부제 처리를 해 놓아서 관람용으로 공개되어 있다.


최근에는 이제 유언대로 화장해서 어머니 곁에 묻어주자는 여론도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소련 시절부터 이미 관광 명소가 되었고 현재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데다가 

시신을 보존하는 전문 업체의 입장에서는 시신을 보존하는 기술이 어떤지에 대한 광고도 되기 때문에 

관광업계와 시신보존업체에서 레닌의 이장을 결사 반대하는 상황이다. 


푸틴과 메드베데프도 시신을 매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는 하지만, 

굳이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시신 매장을 강행해봐야 정치적으로 손해인 상황이다. 

대통령직과 의회, 모스크바 시장직을 전부 통합러시아당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장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렇게 해서 레닌은 오늘도 어머니를 못 만나고 관광객들이나 접대하는 신세다. 

사실 이건 옐친이 레닌 영묘 이장을 너무 정국전환용으로 써먹었고 옐친 이후로도 

간간히 간보기용으로 써먹었기 때문에 식상하다라는 이유도 있기는 하다.


레닌의 데드마스크


레닌 [Vladimir Il'ich Lenin, 1870.4.22~1924.1.21]


러시아의 혁명가 · 정치가. 러시아 11월 혁명(볼셰비키혁명, 구력 10월)의 중심인물로서 

러시아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이자 사상가이다. 

무장봉기로 과도정부를 전복하고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혁명정권을 수립한 다음 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영상] 모스크바 붉은광장 레닌영묘 미라 재방부처리 장면


[영상] 레닌 영상자료 LENIN SLEEPS - Ленин спит




[영상] 1. 성 바실리 대성당 남성 아카펠라 Doros



[영상] 2. 성바실리성당 아카펠라 Doros

















































성 바실리 성당 (St. Basil's Cathedral)


성 바실리 성당 (St. Basil's Cathedral)은 무려 240년 간 지속된 몽골족과의 전쟁에서 

마침내 카잔의 타타르 칸 국(kan 國)을 정벌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잔혹한 황제' 차르 (tzar) 

이반 4세 (Ivan IV)의 명에 따라 건축가 보스토니크와 파르마에 의해 1555년 건축을 시작하여 1561년에 완공하였다.  

 

1600년에 이반 대제의 종탑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기도 하였다.

건설 당시 '그리스도에 미친 바실리'라는 수도사가 기거하다가 1588년에 북동쪽의 별관에 묻혔는데, 

그 이름을 따서 성 바실리 사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집중식 플랜에, 외관은 높은 8각형의 첨탑(尖塔)을 중심으로 

예배당부(部)가 형성하는 4개의 다각탑 및 그 사이에 서 있는 4개의 원탑 등 

9개의 탑이 임립(林立)한 모양의 독특한 건축이다.

7m 높이의 팔각답을 중심으로 네 개의 중간 탑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사이에 

네 개의 작은 탑이 위치해 총 9개의 탑으로 구성됐으나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8개의 탑만이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사원을 구성하고 있는 9개의 탑은 각각이 독립된 공간이기에 탑과 탑은 비좁은 계단과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 성당 건물은 8개의 교회들이 중앙의 교회 건물 1개를 감싸고 있는 형태로, 

당시에는 '삼위일체 교회', 혹은 '삼위일체 대성당'으로 불렸다. 

1588년에는 러시아에서 존경받는 성인인 성 바실리의 무덤 위에 '중보의 교회'라고 불리는 

10번째 성당이 완공됨으로써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성 바실리 대성당의 모습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 이곳은 천국을 지상 세계 위에 재현한 것으로 여겨졌고, 

흔히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 총대주교와 차르가 참석한 성지주일 기도 때, 

이 곳이 예루살렘 성전의 역할을 맡아 예배를 집전하였다.


성 바실리 성당 (St. Basil's Cathedral) / 걸어서 세계 속으로


광장 남동쪽 끝에는 16세기 이반 4세가 몽골의 카잔 왕국을 몰아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성 바실리 성당이 있다. 

47m 높이의 중앙탑과 그 아래 여덟 개의 양파 모양의 탑이 불규칙하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보는 각도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러시아 정교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는 이 성당이 완성되자 이반4세가 다시는 똑같은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건축가의 눈을 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성당 안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16-17세기에 사용했던 다양한 물품들이 전시돼있다. 

이 족쇄와 사슬은 17세기 러시아 정교에서 수도사들이 수행을 위해 스스로 찼던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설명을 듣고 있는 이 방에는 여기서 살던 수도사 바실리의 유골이 안치 되어 있다. 

그의 이름이 성당에 붙여진 것이다. 정말 궁금했던 곳을 찾았다. 

양파모양으로 된 탑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천장에는 예수가 그려져 있고 벽면은 이콘화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성 바실리 성당 (St. Basil's Cathedral) _ Google earth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남쪽에 있는 러시아의 성당이자 문화유산. 

선명한 원색이 칠해진 9개의 매우 독특한 양파형 지붕이 특징이다. 

일반인들에게는 테트리스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성 바실리 성당의 가장 큰 특징은 매우 독특한 모양을 가진 성당이란 것이다. 

이 성당은 16세기의 유럽 건축은 물론 기존 러시아 건축과 비교해봐도 독특한 점이 많다. 

물론 세세하게 살펴본다면 같은 세계유산인 콜로멘스코예 예수승천교회(Church of the Ascension, Kolomenskoye)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건물이며 전체적으로는 러시아 고유의 양식과 비잔틴 양식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르네상스 건축의 영향 등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저 많은 탑과 각기 다른 모양의 돔 등이 가져다 주는 전체적인 형상은 닮은 건물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계단이 달린 토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높이가 46미터인 중앙탑과 그것을 둘러싼 8기의 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제실이 내부 회랑으로 연결된 특이한 형식의 성당이다. 

높이나 크기가 다른 둥근 지붕의 조각 면에는 극채색을 칠해 놓았으며, 코코시니크라고 하는 장식 박공널을 사용했다.


'부조화의 조화'


비잔틴 양식의 건축은 러시아에서 지역적 전통을 반영하면서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성 바실리 사원은 6m 높이의 아케이드가 기단이 되고 그 위에 아홉 개의 탑이 올려졌는데, 

47m 높이의 팔각탑을 중심으로 네 개의 중간 크기 탑이 둘러싸고 그 사이에 네개의 작은 탑이 위치한다. 


탑들은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닌 양파 모양의 돔 지붕을 갖고 있는데 그중 중앙 탑은 

아름다운 비잔틴 문양이 조각된 원추형의 지붕이다. 

바실리의 아홉 개 탑은 전체로 하나인 동시에 각각이 독특한 형상을 지니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형식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조화는 끊임없이 새로운 긴장감을 창출한다.


형태와 크기가 다른 아홉 개의 탑이 빚어내는 절묘한 조화가 훌륭한 동적 균형의 공간을 창출한다.

각각의 탑들은 대칭으로 잘 조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솟아 있는데 

오히려 이런 불균형이 멋진 조화를 자아내고 있다.

크레물린 궁전이 이탈리아 건축가에 의해 건설된 것과 달리 성 바실리 사원은 러시아 건축가들이 전통적인 기법으로 건설했다. 

서로 다른 다양한 탑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부조화의 조화' 라고 불리기도 했다. 


러시아 건축 최고의 걸작 성 바실리 사원은 서양건축사의 흐름과 러시아의 문화가 어우러진 건축으로,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동적 미학을 성취한 조각적 건축이면서 

아름다운 색채로 이루어진 회화적 건축이기도 하다.


성 바실리 성당 (St. Basil's Cathedral)


1. 꾸빨라(교회탑)  

2. 성 끼쁘리안과 우스찐 교회  

3. 성 바실리 블라줸느이 교회

4. 교회 입구  

5. 알렉산드르 총주교(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서 그리스 정교회의 최고 주교) 교회

6. 그리고리 아르먄스끼 교회  

7. 갤러리  8. 예루살렘 교회  

9. 빠야루슨의예 프론톤

10. 바를라마 후뜨인스끼 교회  

11. 성화벽: 성당의 성소(聖)와 외부를 막은 벽으로, 성화상이 걸려 있다.

12. 니꼴라이 빌리꺼레쯔끼 교회  

13. 성호사원 교회탑  

14. 성호사원 교회탑

15. 종탑  

16. 삼위일체 교회


위에서 내려다 본 성 바실리 성당


`황제가 성당이 무척 아름다워 똑같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건축가 눈을 멀게 했다`는 전설 속 상트바실리 대성당. 

유럽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높낮이가 다른 탑 9개가 숲 속 나무처럼 빼곡하게 들어섰다. 


성 바실리 대성당의 돔들은 마치 불꽃이 위로 솟아올라가는 듯한 양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 전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건축 방식이다. 

'러시아 건축과 서양'의 저자 드미트리 쉬브드코브스키는, 

"이 건물은 러시아의 그 어떤 건물과도 비슷하지 않다. 

또한 지난 1,000년간 내려오는 비잔티움 양식의 건물들과도 유사하지 않다..... 

이 건물의 아름다움은 그 비현실성, 복잡함, 찬란한 세부 디테일에 있다."라고 적었다. 

성 바실리 대성당은 17세기에 최고조를 이루는 러시아 전통 건축술의 원형이기도 하다.


이후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련이 들어서자, 소련은 무신론을 내세우며 

성 바실리 대성당을 1928년에 국립 역사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대성당은 옆의 붉은 광장과 크렘린 궁과 함께 199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냉전 기간 동안 '크렘린'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미디어에 워낙 많이 등장하였기에, 

아직까지도 이 건물을 크렘린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1997년부터는 다시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 곳에서 미사를 올리는 것이 허가되었다.


성 바실리 대성당에는 러시아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47미터 되는 팔각형의 첨탑을 중앙으로 하여 주변에 8개의 양파 모양의 지붕들이 배열되어 있으며 

예배당을 형성하는 4개의 다각탑과 그 사이 4개의 원형탑이 솟아 있어 총 12개의 탑이 있는데, 

이는 예수와 12제자를 상징한다. 

탑들은 서로 무질서하게 배열되어있는 듯 하나, 그 속에서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

성당은 하나의 기단 위에 아홉 개의 독립된 예배당으로 되어 있다.


평면도에서 보듯 중앙에 높은 탑을 인 주 예배당 성모 마리아 전구 (轉求- Intercession) 교회를 중심으로 

여덟 개 교회가 둥글게 모여 있고 각 예배당이 복도로 연결된 형태이다.

그리고 완공 27년 뒤 또 하나 작은 예배당 성 바실리 예배당을 증축하여  모두 열 개의 예배당이 되었고 

맨 나중에 지은 성 바실리 교회가 성당의 대중적인 이름이 되었다.


성 바실리성당의 모델이 되었을거라 생각되는 1879년 콜로멘스코에 성당(Kolomenskoye)


이반 4세의 건축


원래 성 바실리 대성당이 있던 곳은 크렘린 궁과 주거 지역 사이에 있는 북적이는 시장터였다. 

시장 한가운데에는 삼위일체 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는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크렘린 궁을 지으며 함께 지은 백색 돌로 지은 석조 건물이었다고 한다. 


이후 이반 4세가 제위에 등극하고, 러시아에서 카잔 칸을 몰아낸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삼위일체 교회 옆에 목조 기념물을 지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반 4세가 아스트라한 칸국 정벌을 끝마칠 당시에는, 

이미 교회 옆에 7개에 달하는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1554년 가을, 이반 4세에 의해 '중보의 교회'가 새롭게 지어졌고, 

그 다음 해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삼위일체 교회가 있는 자리에 

새롭게 석조로 거대한 대성당을 세울 것을 명했다. 

특히 이반 4세는 이 대성당을 크렘린 궁의 성벽 안쪽이 아닌 바깥쪽에 지었는데, 

이러한 조치로 인해 대성당에 더 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는 평민들은 좋아했으나, 

러시아의 귀족 계급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성 바실리 대성당을 지은 건축가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구전에 의하면 바르마와 보스트니크, 이 2명의 건축가가 이 성당을 설계하였다고 한다. 

러시아 문화부 사이트에서는 '바르마와 보스트니크 야코브레브'라고 적혀있기도 하다. 


어떤 학자들은 이 두 이름이 사실은 '보스트니크 야코브레브'라는 한 사람을 칭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주장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다. 

어쨌든 전설에 의하면 이반 4세가 성 바실리 대성당의 모습에 반하여, 

다시는 이런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대성당의 건축가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건축가의 이름은 모스크바 성모승천사원의 건축, 그리고 카잔 크렘린의 건축에도 등장하기 때문이고, 

보스트니크 야코브레브가 1560년대까지도 여전히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탁발 수도사 바실리 (1469~1552 ? )


탁발 수도사 바실리 (1469~1552 ? ) 는 가게 물건을 훔쳐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벌거벗은 채 

체인을 몸에 감고 다니는 기행과 고행을 해 '그리스도에 미친 바실리' '바보 바실리'로 불렸다.

바실리는 기이한 기적을 많이 행한 예언자로 덕망이 높아 러시아 민중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모스크바 화재 및 이반 4세의 앞날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고

이반 4세가 교회에 관심이 없다고 비난했지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반 4세는 그를 인정하고 경배해 그가 죽었을 때 직접 관을 들어 운반했다고 한다.​ 


1583년-1596년

삼위일체 교회는 1583년에 화재로 전소한 후 1593년에 복구된다. 
1588년에, 복구 작업과 함께 성 바실리에게 바쳐진 9번째 성소가 북동쪽에 있는 총대주교의 성소 옆에 새롭게 세워진다. 
또다른 성인인 '이반'은 1589년에 이 곳에 묻혔고, 그를 기리는 성소가 1672년에 동남쪽 아케이드 안에 세워졌다.

성 바실리 대성당의 천장 구조는 당대 러시아의 석조 건축술과 설계술의 진가를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다. 
러시아의 석조 건축술은 몇 십년 후 1596년에 지어진 코로소보의 삼위일체 성당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안타깝게도 이 기술은 동란 시대를 거치며 실전되었다. 
이후 동란 시대가 끝난 17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들은 대부분 16세기에 지어진 건물보다도 그 수준이나 질 면에서 떨어지며, 
이전보다 훨씬 더 두꺼운 벽들과 더 촘촘한 천장 골격을 사용해야만 하였다.

1680년-1683년


성 바실리 대성당은 1680년과 1683년 사이에 있었던 두 번째이자 가장 큰 규모의 개축 작업을 거친다. 

이 때 9개의 교회 건물 모두가 다시 강화되거나 꾸며졌으며, 특히 건물의 1층 구조와 2층 구조를 이 때 새롭게 지어, 

옛 건물에 완전히 새로운 구조물들을 더 덧붙이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구조로 인하여, 원래는 각기 따로 떨어져 있었던 9개의 교회들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의 단일한 건물로 변화한 것이다. 


이때 원래 열린 구조였던 1층의 아케이드들이 벽돌 벽으로 채워졌고, 

이로 인해 생긴 새로운 공간에 붉은 광장에 서있던 13개에 달하는 교회들에서 뜯어온 제단들이 놓였다. 

1층의 플랫폼에 있던 목재 구조들과 계단들이 모두 벽돌로 바뀌어, 화재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재는 텐트식 지붕이 덮여 있는 현관 구조를 포함한 거대한 갤러리 구조가 이때 함께 만들어진 것이다.


복구작업을 하며, 낡은 옛 종탑은 해체되었다. 

다만 그 사각형 모양의 부지는 철거되지 않고, 새로운 종탑의 부지로 재활용되었다. 

알렉시스 1세 시대 양식으로 지어진 이 종탑에는 이색적인 텐트식 지붕이 덮여있었고, 

그 위용도 대단하여 대성당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강력한 비대칭꼴로 만들어놓았다. 

참고로 이 종탑은 남쪽과 동쪽에서 볼 때 가장 잘 보이지만, 

워낙 그 크기가 크기에 서쪽으로 이동하여 관찰해도 눈에 잘 띈다.


공사와 함께 대성당의 첫 장식용 벽화도 이 때에 처음 그려졌다. 

벽화들은 주로 꽃무늬 장식이었는데, 새로 만들어진 갤러리들에 주로 칠해졌고, 

탑과 같은 구조물들은 그냥 벽돌 무늬를 그대로 내보이는 쪽으로 설계하였다. 

마지막으로 1683년에, 노란색과 청색의 처마 장식이 더해졌는데, 

이 장식에는 옛 슬라브어로 대성당의 역사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해 놓은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1737년-1784년


1737년에 대성당은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고, 

이후 '이반 미추린'이라는 이름의 러시아 설계자의 지휘 아래 재건되었다. 

1683년에 만들어진 비문들은 공사 도중 모두 제거되었고, 

복구 작업을 거치며 이때 처음으로 사람을 묘사한 벽화가 그려지게 된다. 

1층과 2층의 내벽과 외벽은 모두 화려한 꽃무늬 벽화로 아름답게 장식되었고, 

종탑은 신관을 통하여 대성당과 곧바로 통할 수 있도록 연결되었다. 

또한 1600년대에 미처 채워지지 못한 1층의 아케이드들이 모두 벽돌로 채워짐에 따라 

1층을 완전한 닫힌 공간으로 만들어 한때 이 9개의 교회들이 서로 독립적인 건축물이었던 흔적을 모두 없애버렸다.


표도르 알렉세예프 (Fyodor Alekseev)의 그림 (1800 ~ 1802)


1800년-1848년


표도르 알렉세예프가 1800년부터 약 2년간 그린 붉은 광장의 모습은 

당시 대성당이 즐비하게 늘어선 상업 시설들에 의해 감싸진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당시에는 열을 지어 배열된 상업용 건물들이 붉은 광장을 복잡한 마당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시켜 

그 어떤 때보다 광장이 사람들로 넘치고 혼잡하던 때였다. 


1800년까지는 크렘린 성과 성당 사이가 여전히 거대한 해자로 인해 분리되어 있었다. 

이 해자는 1801년에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할 때 대관식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물로 채워졌다. 

1812년에 나폴레옹의 지휘에 따라 모스크바를 점령했던 프랑스 군인들은 대성당을 마굿간으로 사용했고,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는 보물들은 모두 약탈해갔다. 


대성당은 1812년에 모스크바에서 일어났던 대화재, 나폴레옹 군대의 포격을 피해 살아남아 보존될 수 있었다. 

이후 러시아 군대가 모스크바를 되찾은 이후, 대성당은 1813년에 내부가 복원되었고, 

외관은 1816년에 완전히 복구되었다. 

다만 외관을 다시 덮을 때, 원래 있던 도기 타일을 복구하는 대신 주석으로 덮었다.


1813년 이래, 대성당의 애매한 위치는 러시아의 도시 계획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윌리엄 하스티에는 대성당 주위 건물들을 모두 철거하고, 모스크바 강까지 이르는 길을 트자고 제안하였다. 

실제 실행된 안은 표도르 로스톱친이 입안한 것이었는데, 

결국 대성당을 둘러싼 붉은 광장의 일부 공간을 비우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하스티에의 안은 도시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었지만, 반대로 인해 실패했고, 

최종 계획은 알렉산데르 1세가 1817년 12월에 칙령을 내려 실행되었다.


요세프 보베에 의해 진행된 재개발로 인해, 강과 성당 사이에 있는 크렘린 언덕의 사면이 깎였고, 

그 잔해를 치워 성 바실리 광장이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붉은 광장이 강변으로 트였고, 성 바실리 대성당은 조그만 언덕 위를 깎은 곳에 홀로 서있는 모양새로 바뀌었다. 

보베는 거대한 석조 테라스를 새로 쌓아 대성당과 모스크보레스카야 거리를 분리했다. 

테라스의 완공은 1834년에 완료되었다. 

추가적인 보수공사는 1848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로 인해 성당의 돔들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색깔을 갖추게 되었다.


1900년대 초반의 성당 모습


1890년-1914년


사람들은 1880년대와 1890년대에 걸쳐 성당을 적절히 보수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인해 대부분 이루어지지 못했다. 

성당은 자체적인 수입원도 갖고 있지 못했고, 오직 사람들의 기부금에만 의존하였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던 중앙정부와 모스크바의 현지 사회는 자발적인 기부와 모금을 통해 

주 정부와 시 정부가 직접적으로 성당에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어야 할 정도로 성당의 재정이 파탄에 이르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니콜라스 2세는 1899년에 중앙정부의 적자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주 정부와 시 정부의 예산을 

성당에 끌어쓰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주 정부, 시 정부, 심지어 교단의 성직자들까지 이 결정을 반대하였다. 

한편 러시아 내의 성당 모금액은 1909년까지 10만 루블이 모였다.


복원 작업은 성당 돔의 지붕을 갈아끼우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건축가들은 1810년대에 교체되었던 주석 지붕을 갈아끼우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타일들이 

사라지거나 파손된 것을 확인하였고, 치열한 토론 끝에 결국 지붕에 있던 모든 타일들을 새롭게 갈아끼웠다. 

또한 16세기에 쓰였던 벽돌들보다 더 작은 크기의 표준 크기 벽돌을 사용하여 복원한 점도 

이 복원 작업에서 눈에 띄는 변화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19세기에 그려진 그림들이 옛 전통을 간직한 '진실한 예술품들'로 교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중세 시대의 예술을 하나하나 고증해야 하는 방대한 작업이었기에, 

결국 작업가들은 진한 붉은색과 진한 녹색을 이용하여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1908년에 성당에는 따뜻한 바람을 이용하여 난방을 하는 시스템이 도입되었는데, 

워낙 긴 공기관 때문에 열이 중간에 모두 빠져나가, 멀리까지 가지 못하고 성당의 동쪽과 북쪽 부분만을 데우는 데에 그쳤다. 

결국 1913년에 온수 난방 시스템이 도입되어 성당의 나머지 부분까지도 데울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혁명 이전 성 바실리성당 모습


1918년-1941년


1차 세계대전 동안, 성당은 민족주의 연설가이자 러시아 인민 연합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이오안 보스토고브에 의해 지도되었다. 

하지만 보스토고브는 국유 재산이었던 교회 재산을 횡령한 혐의로 1918년에 볼셰비키에 의해 체포되었고, 

결국 1919년에 처형당했다. 

성당은 1923년에 공공 박물관으로 바뀌었으나, 종교 행사는 1929년까지도 계속되었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레닌이 죽은 이후, 성당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는 안을 생각해냈다.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성당은 스탈린이 주도한 도시 계획의 장애물로 여겨졌고, 

이로 인해 문화재를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과 끊임없는 충돌을 겪게 되었다. 

이 충돌은 1936년까지도 계속되었는데, 이로 인해 수없이 많은 기담들이 생겨났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로는, 예를 들어 한 설계자가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의 축소 모형을 만들어 

소련 지도부에게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성당의 모형을 들어 광장 밖으로 빼냈다고 한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스탈린이 '그 것을 있던 자리에 다시 내려 놓게'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성당을 없애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고, 

1933년 가을에는 성당을 철거하기 위해 기술자를 보낼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1937년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당 지도부까지도 이 성당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였고, 

결국 성 바실리 대성당은 혁명의 기간을 무사히 보내고 현대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1947년-현재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바로 그 다음 해에, 소련 정부는 성당 1층의 아케이드와 기둥들을 복구하였고, 

갤러리의 아치형 천장들을 다수 정리하였으며, 19세기에 그려진 '역사적이지 못한' 유화들을 모두 지웠다. 

이후 수많은 복구 작업들을 거치며, 나중에는 벽돌 모양을 본뜬 원래 그림이 1955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또한 오래된 석재 내부를 파내는 것을 허락하여, 성당을 처음 세울 때부터 있었던 목재 골조들을 헤쳐낼 수 있었다. 

이후 1960년대에, 주석으로 덮여있던 성당의 지붕들이 구리로 바뀌었다.


현재까지 성당의 마지막 복구 작업은 2008년에 있었던 복구 작업이었다. 

현재 성당은 여전히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나 1991년부터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종교적 의식을 치르는 것이 허가되었다. 

1997년부터는 정기적으로 미사를 드리고 있다.


건물


성 바실리 대성당의 기반은 중세 모스크바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과 같이 하얀 기반암으로 만들어졌다. 

성당 건물 자체는 28×14×8cm짜리 붉은색 벽돌들을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당시 붉은색 벽돌은 사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건축 재료였는데, 

모스크바에서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지어진 건물들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은 1485년에 만들어진 크렘린 성벽이었다. 

현대에 들어 진행된 조사에 의하면 건물의 지하 구조는 전문적인 설계와 도면 작성을 거쳐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나중에 지어진 건물일수록 점차 규칙성이 덜해지고 그 정확도도 덜해진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1954년과 1955년에 벽돌들을 교체하던 기술자들은 두꺼운 벽돌 벽 뒤에 숨겨져 있던, 

성당 전체 구조를 가로지르는 내부 목재 구조를 발견하였다. 

이 목재 골격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얇은 목판들을 엮어 만든 것으로, 

실제 성당의 크기로 미리 만들어놓은 다음 벽돌을 쌓아올려 그 뼈대 사이를 채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건축가들은 당시 벽돌을 이용한 신식 건축 공법에 워낙 매료된 나머지, 

벽돌을 사용하여 내부와 외부의 장식을 모두 꾸몄을 뿐만 아니라, 

최대한 많은 면적의 벽돌구조들이 외부로 노출될 수 있도록 신경썼다. 

만약 건물에 바위나 돌을 사용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었다면, 그 위에 벽돌로 무늬를 넣어 아름답게 치장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건축 구조로 인하여 성당이 건축될 때 만들어졌던 초기 러시아 양식의 성화나 아이콘 등은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꽃무늬 장식은 상대적으로 그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들이다. 

다만, 성당은 3차원의 복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벽돌 장식과 구조를 자랑한다.


이름


성당의 본디 이름은 '삼위일체 교회'였다. 

이 성당은 1561년 7월 12일에 처음으로 봉헌되어 대성당의 지위를 얻었다. 

'삼위일체'는 러시아 전통에 의하면 정교의 성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가운데에 있는 중앙 탑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것이며, 

서쪽에 있는 세 개의 탑이 동-서 축이 있어 각각 예수, 성모 마리아, 성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의 탑들은 모두 각각 나름대로의 성인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모스크바를 지켜 낸 쿠지마 미닌(Kuzma Minin)과 포자르스키(Dimitry Pozharsky) 기념비


성 바실리 성당 앞에는 정육점 주인 쿠지마 미닌(Kuzma Minin)과 

수즈달의 대공이었던 포자르스키(Dimitry Pozharsky) 의 기념비가 서 있다. 

이들은 1612년 크레믈린을 폴란드군으로부터 탈환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인물로 

1818년 조각가 이반 마르토스에 의해 청동 조각상으로 만들어져 세워졌다.



원래 광장의 한가운데 서 있던 이 동상은 1936년, 붉은 광장에 레닌의 묘가 들어서면서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한 사람은 서서 왼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고  한 사람은 앉아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구도로 되어 있어

다정함과 강인함이 함께하는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텐트지붕 모양의 성당 종루 (Bell-Tower)


러시아 정교회 특유의 십자가


정면에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돔과 탑을 바라보면 저마다 ​러시아 정교회 특유의 십자가를 이고 있다.

세로 막대가 아래쪽으로 더 긴 라틴 십자가에 가로 막대가 위와 아래로 하나씩 더 걸쳐 있는 십자가이다.

위쪽 가로 막대는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 위 명패를, 아래 가로 막대는 예수 양쪽에 매달렸던 두 강도를 상징한다.


성당은 기본적으로 벽돌과 돌을 섞어 지었고 어떤 곳은 석벽에 칠을 하고 금을 그어 벽돌을 쌓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벽이 비바람에 풍화 침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턉과 돔과 벽 곳곳에 채색 도자기 타일로 장식했는데 

이 돔탑의 중간 부분 아치 안에도 타일 장식이 보인다.


양파 돔 아래엔 동판을 오려낸 황금빛 띠를 둘러 장식했는데 

러시아 민가 주택 처마에서도 볼 수 있는 그 장식이다.


성당을 서쪽에서 쳐다본 모습으로 아랫쪽 하얀 돌로 지은 것은 정면에서 계단으로 오르는 이층 현관이다.


원래는 지붕이 없는 계단이었다가 1680년대에 기둥 세우고 지붕을 씌워 회랑처럼 만들었다.


현관 외벽엔 17세기 이후 꽃과 잎과 덩굴 무늬를 아름답게 그려 장식했다.​


성 바실리 대성당 뒤쪽 현관 계단에 앉아 있는 러시아 여인이 성당과 참 잘 어울린다.


정남쪽 뒷면에서 바라본 성당 모습으로 북쪽 정면 현관에서 이층 계단을 올라서면 

성당을 빙 둘러 한 바퀴 도는 이층 회랑으로 연결된다.


돔 탑마다 코코슈니크 아치형 긴 창을 모두 300개나 내어 성당 내부를 환하게 했다.


하얀 석벽과 꽃-잎 무늬가 아름답게 어우러졌고 기둥은 기하학적 패턴으로 장식했다.  

원래는 창이 트여 있었지만 비바람을 막으려고 유리를 댔다고 한다.


종교를 부인했던 소비에트 정권에선 성당을 폭파해 버리자는 주장이 여러 차례 나왔지만 실행되지는 않았고 

러시아 혁명 후 몰수한 뒤 1928년 부터 국립 역사박물관 분관으로 운영했고 

지금도 가끔 큰 행사 때만 미사를 올릴 뿐 성화를 비롯한 종교 미술 작품과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남쪽 벽에 18세기 성화(이콘) 한 점이 붙어 있다.

진품은 주예배당 성모 전구 교회 안에 전시돼 있고 이건 복제품이다.


18세기 성화

성모 전구(轉求)화 앞에 선 두 사람이 서 있는데 왼쪽은 17세기 러시아 정교회 성인 이반이고 

오른쪽은 '그리스도에 미친 바보'  성 바실리이다.​


이반은 표트르 대제 때 터키 전쟁에 나섰다가 포로가 돼 끌려간 뒤 갖은 고문과 회유를 받으면서도 

이슬람 개종을 거부하고 기적을 행했다.


둘 다 이곳 성당 안에 묻혔고 성 바실리는 이 성당의 대명사가 된 성인이다.

두 성인 사이에 있는 그림은 성 바실리가 풍랑 치는 카스피해에서 페르시아 어부를 구해낸 기적을 묘사하고 있다.

테라코타로 빚은 18세기 바로크식 성화 액자 틀도 아름답다.




성 바실리 성당 안내판


성 바실리 성당 인증샷








붉은 광장 [Krasnaya Ploshchad, Красная площадь] 


붉은 광장이라는 이름은 광장의 바닥이 붉은색이어서도, 공산주의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빨간색(붉은)을 뜻하는 러시아어 형용사 '크라스나야이(Красная)'가 '아름다운'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본래 성 바실리 대성당과 스파스카야 탑 중간에 있는 작은 구간이었으나, 

후에 황제가 광장을 넓히기 위해 인근에 있는 건물들을 불태우면서까지 광장을 확장, 개축하였다.


붉은 광장 전경


붉은 광장의 역사는 굉장히 풍부하고 오래되었다. 

원래 광장은 모스크바의 주요 시장터였으며, 주로 법령의 공포, 공공 행사 등이 이 곳에서 주로 집행되었고, 

특히 황제의 즉위식이 바로 이 곳에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전통을 따라, 후에 소비에트 연방, 현대 러시아 연방 또한 모두 공공 행사를 주로 이 곳에서 진행한다.


성 바실리 대성당 앞에서 바라본 붉은 광장 전경


총 길이 695m, 폭 130m, 넓이 약 7만 3,000㎡ 미터에 이르는 

러시아 최대의 광장으로 러시아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남동단의 화려한 성 바실리 대성당(16세기), 크렘린 쪽의 레닌묘, 북서단의 역사박물관 등 

아름다운 역사적 건물과 유명한 굼 백화점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붉은 광장은 본래 모스크바 강과 네그린나야 강이 서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구간에 있는데, 

이 구간은 크렘린의 방어가 취약한 곳으로 간주되었다. 

강이나 다른 자연물로 인해 보호받지도 못했고, 특별한 방어 시설 또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구간의 성벽은 크렘린 전 구간을 통틀어서 가장 높고 두껍고, 이 성벽을 짓는 데 참여한 

이탈리아 건축가들의 조언으로 인해 이반 4세는 성벽 주위에 있는 건물들을 모두 철거해 버렸다. 

1493년에 공포된 법령에 따르면, 벽에서 234m보다 가까운 건물들은 모두 철거, 소각하도록 하였다.


모스크바 강변의 붉은 광장과 크렘린궁 전경


동서로는 길고, 남쪽에는 대통령 관저, 블라디미르 레닌의 미라가 보존되어 있는 레닌 묘, 

북쪽에는 국립 백화점 GUM, 서쪽에는 국립역사박물관, 

동쪽에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인 성 바실리 성당과 처형장이었던 로브노예 자리가 있다.


모스크바 강변의 크렘린궁 전경


크렘린궁과 붉은광장 구글지도


크렘린궁과 붉은광장 위성사진 (구글어스)


1760년대의 붉은광장 (by Friedrich Hilferding)

이 주변에는 총을 파는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유명한 황제의 대포도 이 건물들 사이에 있었다.


1795년의 붉은광장 ( by Gerard Delabart)


성벽을 감싸고 있는 Alevizov 해자와 Nikolskaya 탑 (By Fedor Alekseev, 1800)


1508년부터 1516년까지, 건축가들은 크렘린의 동쪽 벽 아래에 

모스크바 강과 네그린나야 강을 잇는 거대한 해자를 파기로 결정하였다. 

이 해자는 541m의 길이를 갖고 있고, 그 너비는 36m이고, 9.5m에서 13m의 깊이를 갖고 있다. 

해자는 석회암으로 마감되어있다. 1533년에 해자의 양 옆에 안전을 위한 벽돌 벽을 쌓았다. 


1801년 광장


15세기 말부터 크렘린 정면이 광장으로 되었으며, 차르 (tsar,군주)의 선언이나 판결, 포고가 내려지던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팔던 장소로 상업광장 · 화재광장 등으로 불렸다. 

또 전쟁을 떠나는 군사들이 행진을 하던 곳이자 때때로 정치범이나 흉악범을 시민들 앞에서 처형하던 곳이기도 하다.

17세기 말부터 ‘아름다운(크라스나야,Krasnaya)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현재 노동절 등의 시위행사나 사열식이 행해진다.


스파스카야 다리의 서점상들 (By Apollinary Vasnetsov)


이 벽에는 3개의 문들이 뚫려 있었으며, 나머지 2개의 문은 붉은 광장의 반대편에 뚫려 있었다. 

19세기 초에 문들 중 하나가 벽돌로 아름답게 장식되었으나, 여전히 '스파스키 문'이 궁궐의 공식 정문으로 기능했다. 

스파스키 문 앞 해자에는 돌로 된 다리가 있었으며, 이 다리에서는 책을 파는 노점상들이 들어서 있었다. 


스파스카야탑 부근의 노천시장 (By Boris Kustodiev, 1917)


폴란드군을 격퇴시킨 미닌(Minin)과 보차르스키(Pozharsky) 기념비


이 동상은 1612년 폴란드군으로부터 모스크바를 해방시킨 영웅 미닌과 포자르스키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미닌은 정육점 상인이었고, 포자르스키는 수즈달의 대공이었는데 

두 사람이 애국심을 발휘하여 인민 의용군을 조직, 폴란드 군을 내몰았다. 


두 사람의 그 영웅적 행동을 기념하여 청동상을 만들었는데, 이반 마르토스에 의해 1818년에 완성되었다.

한 사람은 서서 왼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사람은 

앉아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구도로 되어 있는 이 동상은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1810년 붉은 광장  (Red Square in 1810s and building of Market Lines by Joseph Bove)


1850년대의 붉은 광장 (by I.Daziaro)


1856년 붉은 광장에서 있던 알렉산더 2세의 대관식 장면 


1850년대 붉은 광장


1860년대 붉은 광장 북쪽


20세기 초의 붉은 광장


소련의 건물 이동 기술


유럽 국가 수도들 중에서 철거된 그리고 철거 중인 건물이 가장 많은 곳이 바로 모스크바이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진 건물의 수에서도 세계 제일이다. 

믿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1930년대에 시작해 1983년까지 모스크바에서는 

무게가 수천에서 수만에 이르는 수많은 건물들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스탈린의 모스크바 재건 사업에 따른 것이었다.


‘건물 이사’는 소련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집 또는 다른 건축물을 통째로 이전해 왔다. 

‘건물 옮기기’ 방법을 처음 고안한 사람은 이탈리아 엔지니어인 아리스토텔레스 피오라반티로 알려져 있다. 

그가 바로 1455년에 볼로냐의 성모마리아 성당의 종탑을 10미터 이상 이동시킨 장본인이다. 

하지만 건물 옮기기 기술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소련에서였다.


1935년 수도인 모스크바에 새로운 사회주의적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한 모스크바 종합 재건 계획이 수립됐다. 

처음 재건에 들어간 것은 지금의 트베르스카야 거리인 고리키 거리였다. 

고리키 거리 양쪽으로 서 있는 건물들의 파사드 높이를 맞추고 스타일을 통일시킴으로써 

거리를 곧게 그리고 더 넓게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당국은 크렘린궁으로 통하는 이 거리가 웅장한 모습을 갖기를 바랬다. 

이에 따라 모스크바 지도 상의 고리키 거리 양편으로 붉은 직선이 그어졌다. 

이 붉은 선을 넘어 ‘튀어나온’ 건물들은 철거 또는 이동이 지시됐다.


준비작업에 4개월 이상이 걸렸지만, 정작 건물을 이동하는 데는 하룻밤밖에 걸리지 않았다. 

건물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불안한 나머지 이동할 때 사전에 고지를 해달라고 했지만 

당국은 주민들에게 일부러 잘못된 날짜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어느날 밤 이동 작업을 실시했는데, 

얼마나 조용히 이동이 끝났는지 대부분의 주민이 아침에야 창밖 풍경이 달라진 것을 알았다고 한다. 

심지어 떠도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에 따르면 

아이가 저녁에 큐빅으로 쌓아놓은 탑이 한밤의 이동을 겪고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고도 한다.


가장 어려운 작업은 트베르스카야 거리와 마모놉스키 골목 모서리에 위치한 

모스크바에서 가장 오래된 안과병원을 이동시킬 때 부딪혔다. 

건물을 자리에서 더 안쪽으로 밀었을 뿐 아니라 97도 방향을 틀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건물의 파사드가 마모놉스키 골목 방향으로 나게 됐다. 

이 경우에도 이동 중에 건물 안에서 정상적으로 진료가 진행됐다고 한다. 

건물 안에는 의사, 환자가 그대로 있었고 수술도 진행 중이었다. 

현재 이 건물에는 아직까지도 안과가 들어서 있다.


건물을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련 영화의 장면


건물 이동 기술


건물을 옮기기 전에 지반에서 분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건물 주위로 빙 둘러 구덩이를 판 후 강삭(綱索)을 이용해 건물을 지반에서 “잘라냈다.” 

그후 특수 빔으로 건물을 고정하고나서 차대를 만든 후 그것을 특수 굴대 위에 올렸다. 

굴대는 사전에 설치해 놓은 레일을 따라 움직었다. 

대개는 권양기로 건물을 앞에서 견인했고 기중기로 뒤에서 밀었다. 

준비 작업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이동 자체는 상당히 빠르게 진행됐다.


이동 작업에는 주로 지하철 터널 굴착시 비슷한 문제에 부딪혔던 지하철 건설자들이 동원됐다. 

수십 년 동안 모스크바에서는 거의 70채의 건물이 이런 방식으로 이동됐다.


‘아르히텍토르’ 통신사의 예카테리나 추구노바 사장은 

“우리 엔지니어들이 개발한 이 기술을 현재 해외에서는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뉴스포털 ‘스트라나(strana.ru)’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예로, 독일인들은 이 기술을 사용하여 오래된 교회를 새로운 장소로 이동시킨다. 

그러나 정작 기술이 개발된 러시아에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기술을 외면해 왔다. 

이제는 건물을 애써 ‘들었다 놨다’ 하는 것보다 그냥 철거하고 ‘똑같은 것’을 다시 짓는 게 더 쉽기 때문이다.


붉은 광장


붉은 광장


붉은 광장


[영상] 붉은 광장 2019. 08. 17





[영상] 야티니츠카야( Pyatnitskaya) 거리 
톨스토이 센터 (Tolstoy Center)를 지나 어젯밤에는 불야성을 이루더니 조용해진 아침 거리를 걷는다.






무려 1744년에 개업했다는 안내판


쿠니코프 (Kunikov) 광장  침례교회 종탑




야우자(Yauza) 강 - 모스크바 강 지류


모스크바 도시 내에 있는 야우자(Yauza) 강에는 21 개의 도로 교량, 5 개의 철도 교량, 1 개의 전용 전차 교량, 

2 개의 모스크바 지하철 교량, 수많은 보행자 다리 및 역사적인 로스토키노 수로로 이루어져 있다.


서울 도심을 가르는 한강에 여의도 섬처럼 모스크바 강 본류에서 아래쪽으로 갈라져 야우자(Yauza) 강이 흐른다.








레포르토프스키(Lefortovsky) 다리
모스크바에서 가장 오래된 레포르토프스키 다리는 1777년에 건설되었다.









모스크바 강 다리 위에서 멀리 스탈린 양식이라고 부르는 건물이 보인다


스탈린 양식 건물 세븐 시스터즈 (Seven Sisters) 중 예술인 아파트. 1953년 완성. 높이 176미터 26층


스탈린(Joseph Stalin)의 원대한 계획 - '세븐 시스터즈'의 숨겨진 진실들


1930년대 뉴욕의 마천루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은 자유와 시장경제의 상징이었다. 

이에 비해 당시 모스크바에는 상징으로 내세울 만한 고층 빌딩이 전혀 없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에도 소비에트 권력을 상징할 만한 권위 있는 고층 빌딩이 필요하다고 보고 

모스크바 건립 800주년을 기념하여 마천루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MGU), 우크라이나 호텔, 레닌그라드 호텔, 러시아 외교부, 쿠드린스카야 광장의 문화인 아파트, 

코텔니체스카야 강변로의 예술인 아파트, 크라스늬예 보로타 옆 행정 기관 건물이다. 

사람들은 그 건물들을 스탈린의 '세븐 시스터즈 (Seven Sisters)'라 부른다.



스탈린이 처음부터 7개의 마천루를 세우려 했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는 8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8개를 계획했으나, 마지막 하나는 끝내 세워지지 못했다. 

자랴지에 지역에 행정기관이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스탈린의 죽음으로 1953년에 결국 여덟 번째 마천루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그렇게 8개 중 7개 만 완공되어 '세븐 시스터즈'로 남게 된 것이다. 

여덟 번째 행정기관 마천루 자리에는 이후 러시아 호텔이 들어섰다.


모스크바 강 다리 위에서 성바실리 대성당이 보인다.






Video walking tour of Zamoskvorechye Historic District




Pyatnitskaya의 톨스토이 센터 - 주립 박물관


모스크바 주립 레오 톨스토이 박물관 (GMT)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 박물관 중 하나이다.
톨스토이 협회의 주도로 1911년에 설립되었다.
박물관에는 작가의 사진과 필사본, 사진, 원본, 인물 사진이 보관되어 있다.
Leo Tolstoy와 관련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아이템 컬렉션이다.

직접 관람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홈페이지와 구글 검색으로 대신 들여다 본다.


Pyatnitskaya 12의 Tolstoy Center에는 박물관 컬렉션,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문학박람회와 저녁 모임 및 콘서트, 주요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하고 전시회도 열린다.

건물은 1789 ~1795년에 세워졌다.
크림 전쟁에서 돌아온 젊은 톨스토이를 촬영한 사진이 있다.


주소 : 115035, Moscow, st. Pyatnitskaya, 12 (메트로 역 "Novokuznetskaya").
홈페이지 https://tolstoymuseum.ru/about/museum-and-branches/pyatnitskaya/



Pyatnitskaya의 톨스토이센터 안내판




톨스토이는 크림 전쟁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1857년 10월부터 1858년 말까지 이곳에서 방을 빌렸다.
박물관 웹사이트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동생 니콜라이와 누이 마리아, 세 명의 조카와 함께 살았으며
시인 아파 나시 페트와 극작가 알렉산더 오스 토프스키와 친구가 되었다.


톨스토이는 정기적으로 satirist Mikhail Saltykov-Shchedrin, 역사가, 변호사 및 철학자
Boris Chicherin, Aksakov 형제, Ivan 및 Konstantin과 같은 손님들과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졌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사는 동안 그의 유명한 소설 <코사크 >와 “죽은 자(Albert)”, “세 명의 죽음”에 관한 글을 집필했다.
그의 이야기 “가족 행복”도 여기에서 집필했다. 이 모든 작품들이 거의 동시에 쓰여졌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Tolstoy center in Pyatnitskaya street. Birthday - part 1


Tolstoy center in Pyatnitskaya street. Birthday -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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