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보데비치 묘지 (Novodevichy Cemetery) 구글 지도
노보데비치 묘지 (Novodevichy Cemetery)는 모스크바에 있는 공동 묘지로
16세기부터 노보데비치 수도원 남쪽 벽 옆에 자리 잡고 있어 왔다.
이 공동 묘지는 이반 마시코프(Ivan Mashkov)에 의해 설계되어 1898년에 재개장되었다.
[영상] 노보데비치 묘지 (Novodevichy Cemetery)
노보데비치 수도원 매표소로 향하는 우리 일행
노보데비치 수도원 입구와 개폐장 시간 안내판
역사적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사들의 묘지 위치를 안내하고 있다.
노보데비치 묘역에는 아무나 묻힐 수 없다.
이곳에 묻히기 위해서는 러시아 정부 허가가 필요하며,
지금까지 모두 2만 6천 여명이 이 곳에 안장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잘 조경된 숲길이 있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유명한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신 · 구(新舊) 두 곳의 부속 묘지에는
제정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니콜라이 고골 ·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 ·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Vladimir Mayakovskii) 등 저명한 학자 및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와 러시아 초대 대통령 옐친,
2차대전 당시 외무 장관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인류 최초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 등의 정치인들이 묻혀 있다.
또 대조국 전쟁 (1-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 장병들이 다수 잠들어 있다.
우리로 치면 국립묘지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노보데비치의 성당과 크렘린 궁전의 성당들은 16, 17세기에
지배자였던 왕족을 위한 묘지로 이용되었다.
벽에는 화장을 한 유골이 안치되었다.
벽면 앞에는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아내였던 여성 활동가
라이사 고르바체바(Raisa Maximovna Gorbacheva 1932~1999)의 묘와 묘비이다.
유골을 안치하고 묘비를 세운 벽
유골을 안치하고 묘비를 세운 벽
묘소와 묘비
묘소와 묘비
묘소와 묘비
소설가 안톤 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 묘와 묘비
안톤 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가이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호프는 시베리아, 사할린 섬 여행을 계획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사할린 섬에 유배된 수인(囚人)들의 비참한 생활은 체호프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는 후에 이때의 기행문을 쓴 바 있다.
7개월 이상이나 걸려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와 1892년,
교외에 저택을 사서 양친 · 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의사로서 이웃 농부들의 건강을 돌보거나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얄타를 마주보는 크림 반도로 옮겼다.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록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長幕物) 2편, 1막물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1887년에 쓰여진 <이바노프>는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교적으로는 <프라토노프>보다 앞섰으나 아직도 과잉된
극적 효과를 노리는 낡은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음의 <숲의 정(精)> 실패는 체호프의 극작을 한때 멈추게 했으나
이 무렵에 쓰인 1막물에는 <곰>(1888)이나 <결혼신청>(1889)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
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갈매기>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바냐 아저씨>(1899), <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3)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會話劇)을 확립했다.
<갈매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 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2년 후에
다시 새로 설립된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다루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희극으로서 쓰여진 이 작품을 오히려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정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체호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 체호프의 작품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상연하게 됐다.
<바냐 아저씨>는 앞서의 <숲의 정>을 다시 쓴 것으로서
그 톨스토이즘이나 멜로드라마의 성격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세 자매>는 초연 후 전집에 수록되자 다시 고쳐쓴 바 있다.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은 체호프의 44세 생일에 초연의 막이 올랐다.
체호프의 희곡(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訂正)된 해석이다.
<세 자매>나 <벚꽃동산>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1900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이에 항의하여 스스로 사임하고
1904년에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4년의 생애를 마쳤다.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Vladimir Mayakovsky)의 묘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Vladimir Vladimirovich Mayakovsky 1893~1930)는
소련의 시인, 극작가, 배우이다.
조지아의 한촌(寒村) 바그다티의 산림관(山林官)의 집에서 태어났다.
바쿠 유전지대의 혁명적 분위기가 소년기의 마야콥스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부친 사망 후 모스크바로 옮겨 볼셰비키 혁명 운동에 가담, 2년간에 세 번이나 체포되었다.
그 후 모스크바 미술학교에 입학, 미래파 시인 그룹에 속하면서
과거의 문학유산 및 부르주아 문학의 전통에 철저한 반항을 보였다.
노란빛 자켓을 허리 아래까지 내려뜨려 사람들을 몹시 놀라게 하는
화려한 시위로 유명해진 마야콥스키는 실제 작품면에서도 <바지를 입은 구름>(1915)이나
<등뼈로 만든 플롯>(1916) 등의 거친 리리시즘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마야콥스키는 혁명을 '나의' 혁명으로 받아들여 인간의 해방을 초래하고
개인의 역량을 개화시키는 혁명의 승리를 노래했다.
그는 모든 재능을 혁명의 대의명분을 위해 바쳤고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와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시의 제재(題材)를 찾았다.
그의 시법 또한 혁명적이었다.
토막토막 짤린 짧은 시구문이 그랬고 의미 및 음조를 강조할 수 있도록
단어를 행으로 나누어 나열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일상어의 교묘한 구사와 거친 유머의 사용도 혁명적이었다.
그는 집회나 공장에서 자작의 시를 자주 낭독했는데 그의 이러한 낭송하기 용이한 시는
고정화된 시어의 파괴를 지향했고 억센 힘과 동적인 비유에 충만해 있었다.
거기에다 뛰어난 서정적 재능과 기발한 발상 및 넘치는 유머 감각으로 해서
그의 작품이 단순한 프로퍼갠더로 전락되는 것을 막고 있다.
특히 혁명 초기의 작품이 그러하여 유토피아적이고 예언적인 밝음이 있다.
혁명 전부터 전위시인(前衛詩人)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창조적인 정열이 폭발한 것은 10월 혁명 이후로서 1918년
소련 극문학의 제일성(第一聲)이 된 <미스테리 부프>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장대한 비유형식을 빌려 혁명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미래의 사회를 엮은 것으로 아리스토파네스를 연상케 하는 활력이 있다.
다음 희곡 <빈대>(1928)와 <목욕탕>(1929)은 몽환희곡(夢幻戱曲),
혹은 기상천외의 풍자적 수법으로 시정인(市井人)의 근성과 관료주의를 폭로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비난한 서사시 <150000000>(1920)도 공상의 비약과 거친 유머에 차 있다.
20년대에 들어와 미래파의 옛 동지들을 중심으로 한 잡지 <레프>(예술좌익전선)를 발간,
전위적 문학운동의 중핵이 되는 한편, 레닌의 죽음을 노래한
<블라디미르 일리이치 레닌>(1924) 등을 내놓았다.
그러나 혁명의 정열을 격렬하게 노래하는 가운데 내부로부터 좌절감이 싹텄고
시사적 문제에 관해 노래하는 것이나 시를 낭독하는 일에도 싫증이 났다.
그의 국가에 대한 봉사는 자발적으로 자신이 부과한 의무였으나 그 노력도 헛되어
당시 점차로 재편성기에 접어든 문학계의 공적 권위자들이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1930년 4월 권총 자살을 했는데 죽기 직전에 쓴 유고에는
"사랑하는 작은 배는 세속에 충돌했다"고 씌어 있었다.
그의 자살은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스탈린이
그를 소비에트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세르게이 예세닌처럼
냉대를 받지는 않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의 명성은 높다.
니콜라이 고골 (Nikolai Vasil'evich Gogol)
니콜라이 고골 (Nikolai Vasilievich Gogol 1809~1852)은 우크라이나의 작가이며 극작가이다.
1809년 우크라이나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818년 풀타바 군립 학교를 거쳐 1829년 네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젊었을 때 배우를 지망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문학으로 전환한 고골은
철학, 문학, 역사에 관심을 두었고 이후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1827년에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 인민의 생활을 취재한 소설
<디카니카 근교 농촌 야화>를 출판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으며,
이때부터 푸시킨을 사귀고 이후 그가 남긴 대작의 소재는
거의 대부분 푸시킨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1834년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의 조교로서
세계사를 강의했으나 실패하여 곧 퇴직하였다.
1836년 희극 <감찰관>을 알렉산더 극장과 모스크바에서 상연하였다.
이는 진보 세력의 절찬을 받았지만,
지배 세력으로부터는 공격을 받게 되어 그는 로마로 갔다.
그 후 계속하여 스위스·파리·로마 등지에 거주하였다.
1847년에 또 하나의 대표작 <결혼>을 쓰고,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
명작 <죽은 혼>의 제1부를 완성했고 제2부의 집필을 시작하며
1848년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건강을 해친 뒤였다.
결국 <죽은 혼>을 모스크바에서 완성했으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정신적 고뇌와 사상적 동요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져
원고를 불 속에 던지고 10일간의 단식으로 자살하였다.
오페라 가수 모스카우 프리드호프 소비노프(Moskau Friedhof Sobinow)의 묘
레오니드 소비노프 (Leonid Vitalievich Sobinow 1872~1934)는 러시아 오페라 테너 가수였다.
1900년대에 그는 여러 유럽 국가에서 수많은 게스트 출연했고
1904 년부터 1906 년까지 밀라노의 Teatro alla Scala 에 참여했다.
1909년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볼쇼이 무대에서 다시 노래를 불렀다.
1917 ~ 1918 년 그리고 1921년부터 그는 볼쇼이 극장의 감독을 역임했다.
1923 년 소비노프는 RSFSR 의 People 's Artist 명예 칭호를 받았다.
그는 1933년까지 오페라 무대에서 공연했다.
러시아의 수많은 거리는 소비노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 되었다.
2007년 말 가수의 실물 크기 조각상이 그의 고향인 야로슬라블에 세워졌다.
소행성 4449는 1987년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러시아연방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 Boris Nikolayevich Yeltsin)의 묘
보리스 옐친( Boris Nikolayevich Yeltsin 1931~1996)은 소비에트 연방과
러시아 연방의 정치인으로, 러시아 연방의 제1 · 2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1987년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급진 개혁파 정치인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1990년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당선 이후 1991년 8월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저지하면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실권자로 떠올라 그 해 말 소련 해체를 주도하였고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초대 러시아 연방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또한 최초로 무소속이자 마지막 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이다.
옐친은 개혁파 정치인으로 처음 등장하여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러시아 시민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1991년 독립 이후 경제개혁 실패,
최고회의 해산 등 무능한 모습을 보이며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특히 충격 요법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추진해
러시아 경제를 양극화하고, 소련 시절 쌓은 경제 기반을 전부 무너뜨리면서
러시아는 1990년대를 통틀어 기나긴 불황을 겪어야 했다.
이후 1996년 체첸전 패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 위기 및
탄핵 시도로 정치적 입지가 땅에 떨어졌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했고,
건강 문제까지 겹쳐 1999년 12월 31일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정권을 넘기고 정계에서 은퇴, 2007년 사망했다.
니키타 흐루시쵸프(Nikita Khrushchov)의 묘
니키타 흐루시쵸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ov 1894~1971)는 러시아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 겸 공산당 서기장을,
1958년부터는 소련 총리와 겸 소련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낸 정치인이다.
그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와 공존을 모색하였다.
그의 탈스탈린화 정책과 반스탈린주의 정책은
공산주의 국가들에 폭넓은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집단지도 체제를 무시한 정책 결정, 농업 정책 실패,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에 대한 양보 등은 많은 반대파를 만들어내었고,
1964년 10월 13일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실각되었다.
그는 실권자로서는 축출되었지만, 당에서는 추방되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1966년까지 중앙위원회의 위원으로 남아 있었고,
죽을 때까지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풍족한 연금을 받으면서 정부에서 제공받은 주택에서 살았으나,
항상 국가보안위원회의 감시를 받았다.
은퇴 생활시 많은 인사들과 교류를 했으나
후임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회고록을 남겼고, 이것이 몰래 서방세계로 밀반출되어 출판되었다.
흐루쇼프는 1971년 9월 11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소련 정부는 흐루쇼프에 대한 국장과 소련에 공헌이 큰 위인들이 안장된
크렘린 벽 묘지에 매장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보다 한단계 격이 낮은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니키타 흐루시쵸프(Nikita Khrushchov)의 묘 부분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1880~1969) 장군의 묘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일제시대 항일 독립 운동가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1880-1969) 장군이 잠들어 있다.
김규면 장군은 만주ㆍ러시아 지역의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 직무대행으로 내정됐던 인물이다.
장군의 무덤에는 한글로 김백추(Ким Бяк-Чу)라 적혀져 있고
부인 김 나제즈다 여사와 합장되어 있다.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선생은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서 민족 종교 단체를 결성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항일무장투쟁을 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을 창설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첫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에 참가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에 앞장섰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선생의 투쟁은 러시아와 중국 혁명에서도 빛을 발했다.
기독교 선교사에서 항일독립군의 지도자로, 그리고 반제국주의 혁명가로서 활약한
선생의 자취는 러시아 · 만주지역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다.
선생은 1880년 함북 경흥의 빈농 가정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 학문을 익힌 선생은 구시대와 신시대의 전환기인 20세기 초
서울로 올라와 한성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쳤다.
당초 교육자가 되기 위한 선택이었으나, 교원의 꿈이 어려워지자 진로를 바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무관이 되려던 꿈도 이룰 수 없었다.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 체결한 일제가 육군무관학교를 통제하면서,
친러시아적 성향이 짙던 함경도 출신의 무관학교 학생들을 경계하며 차별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은 무관이 되려던 꿈을 포기하고 서울과 원산을 오가며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개항장인 원산에는 캐나다 장로회와 미국 남감리교회 등에서
파견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독립교회의 선교사로 활동하던 펜윅(Malcom C. Fenwick)과의 만남은
선생의 행로에서 새로운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펜윅을 통해 기독교에 입문한 선생은 선교사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것은 단지 기독교 전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은 서구 문명을 수용하는 통로가 되었으며,
새로운 문물과 교육을 통해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지사들이
기독교에 귀의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우는 가운데 1907년
선생은 가족들과 함께 훈춘(琿春)으로 망명을 단행했다.
그곳에서 선생은 대한기독교회(大韓基督敎會) 소속의 전도사로서,
연해주와 만주 일대를 오가며 전도활동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서북학회(西北學會)와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활동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대한기독교회는 1909년부터 간도구역을 새로운 정식 선교구역으로 지정하고
만주와 연해주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을 펼쳐 나갔다.
이때 선생은 대한기독교회의 순회목사 자격으로
연해주와 만주 등지에 한인사회의 민족적 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이동휘(李東輝), 김성무(金成茂), 장기영(張基永) 등과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니,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 사관학교 설립이 그것이었다.
당시 독립운동계는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에
제2의 러일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그 때를 광복의 기회로 삼아
해외 한인사회를 망라한 대규모의 독립전쟁을 준비해 나갔다.
사관학교의 설립은 그와 같은 원대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예상과 달리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 체제를 이루면서 대한광복군 정부의 독립전쟁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동휘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중국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인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를 설립했고,
선생도 이에 동참해 학생들을 모집하는 데 적극 나섰다.
일본은 한국을 강점한 후 노골적으로 종교적 탄압을 시도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포교규칙(布敎規則)’을 공포하며
직접적으로 종교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조선총독부의 포교규칙에 따르면, 국내에 선교총부를 두고 있는 교단은
매년 포교자 명부를 조선총독부에 신고해야 했고, 일제 경찰들도
포교규칙을 조사하고 감시한다는 구실로 교회에 수시로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한기독교회가 일제 종교탄압에 굴복하면서 포교규칙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이에 선생은 함경도와 만주, 연해주 일대의 교인들을 이끌고 대한기독교회를 떠나
‘대한성리교(大韓聖理敎)’를 만들었다.
종교 활동을 통해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선생 입장에서
일제의 포교규칙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은 대한기독교회를 떠나 대한성리교라는 새로운 종교조직을
만든 것인데, 당시의 심경을 비망록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독립교회를 선언하는데 찬성하는 300여 교회이고 인원으론 불과 3만여 명이었다.
노약을 제하고 좀 의식 있는 사람 2, 3백 데리고 독립교회 감독으로 행세하면서
전조선 예수교회 독립운동을 하려고 힘써 보았다.
얼마 안 되어 총독부 포교규칙이 발표되었다.
이 규칙은 교회일꾼 목사로부터 매서인까지 다 총독부 승인받은 자로서만 일하게 하였다.
그때 영어선교사들은 총독부 규칙을 복종하고, 총독부에 행사하였다.
영어선교사를 반대하고 교회독립운동 할 좋은 기회였다.”
선생이 대한성리교회를 조직한 것은 일제의 우회적인 탄압에 타협한
외국 선교사 교단의 한계를 깨닫고 ‘교회독립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느낀 데 따른 것이었다.
선생은 훈춘현 초모정자(草帽頂子)에 교단 본부를 설치하고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에 태평양서원(太平洋書院)을 설립하고
복음서를 판매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한편, 연해주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결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18년 3월 연해주 한인사회는 볼셰비키 혁명과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공에 대한 조직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하바롭스크에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朝鮮人政治亡命者會議)’를 개최했다.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당원인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와
항일의병의 상징인 홍범도(洪範圖), 이동휘 등 중국 ·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주요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선생은 훈춘 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 이후 볼셰비키 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강력히 주장한 김알렉산드라와 이동휘, 유동열(柳東說), 이인섭(李仁燮) 등은
1918년 5월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이 때 선생은 한인사회당 창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아마도 기독교 목회자로서 창당 가입을 유보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동휘와의 오랜 동지적 관계, 그리고 한인사회당을 통한 항일투쟁 방략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은 이듬해 한인사회당에 참가하게 된다.
1918년부터 일본군이 시베리아 침공을 단행하자 연해주와 만주 지역의 한인사회는
일본군에 맞서 싸울 항일무장단체 조직에 전력을 기울였다.
조선인 정치망명자회의 이후 선생은 훈춘 초모정자에서
대한성리교도를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 조직을 구성해 나갔다.
그리고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곧바로 3월 12일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이 창설되었음을 선언했다.
대한신민단의 공식적인 창설일은 1919년 3월 12일이지만,
선생은 그 이전부터 대한신민단 창설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연해주 지역에서는 1918년부터 한인 빨치산부대들이 조직되어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 백군(白軍)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수백 명에 달하는 독립군 단체를 조직하기에는 그에 앞서
인적 · 물적 자원 기반을 마련해야 했고, 이를 위해 상당한 준비 기간을 거쳐야 했다.
실제로 대한신민단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창설의 준비 과정이 있었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황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곧 대한신민단 창설을 공포한 것이었다.
선생은 대한신민단 강령을 통해 “조국(祖國)의 완전독립(完全獨立)”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며,
“민족(民族)의 대동주의(大同主義)를 제창하고 국부적(局部的) 당파(黨派)와
불공평적(不公平的) 야심(野心)을 박멸”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신민단문답(新民團問答)’을 통해 단체의 기원과 이름을
‘신민회(新民會)’에서 계승했다고 강조했다.
대한신민단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 청산리대첩 등에 참가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4월 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서 선생은
대한신민단의 주요 간부들과 함께 참석했다.
한인사회당과 대한신민단,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이 참석한 이 당대회에서는
3개 단체의 통일 연합 문제가 논의되었다.
선생은 대한신민단과 한인사회당의 통합에 동의하고
한인사회당 부의장 겸 군사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한인사회당의 결정에 따라 선생은 만주에 위치한
대한신민단 부대를 연해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볼셰비키 세력과 연대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함께 연해주 내 독립군 부대를 지원하는 활동도 함께 전개했다.
1919년 5월 김경천(金擎天)이 연해주 수청(水淸, 현재 러시아 파르티잔스크) 지역에서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 창해소년단)을 조직하자, 선생은 명예단장에 취임했다.
창해청년단은 수청 지역에서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마적들을 소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는데, 이 때 명예단장으로서 부대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공급하고
볼셰비키 당국과 교섭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20년 7월 레닌그라드(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코민테른
제2차 대회가 열리자 박진순(朴鎭淳)과 함께 한인사회당 대표로 참석했다.
곧이어 연해주로 돌아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인사회당은 1920년 설립된 극동공화국의 초대수상인
크라스노쇼코프(Krasnoshchyokov)의 후원을 받으며
극동공화국에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를 조직하고
만주와 연해주의 무장부대들을 통합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
한인사회당 군사부 위원장이었던 선생도 한인 무장부대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선생은 1921년 6월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에 의해 체포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당시 선생은 마자노프에 주둔하고 있던 독립군들이 사용할
의류와 약품 등의 물품을 준비하고, 아무르주 당국과 독립군 부대 수송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블라고베셴스크에 머물던 차였다.
블라고베셴스크 당국 정치부의 도움을 받아 체포를 면했지만,
고려혁명군정의회는 블라고베셴스크의 신문에 모함 기사를 게재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김규면이는 일본의 육군대학을 필하고, 일로전쟁(러일전쟁) 시에
고급장교로 공훈이 많고 19년 3·1폭동 후부터는 일본 군사정탐부 고등계 장교로서
평복하고 조선, 만주, 원동으로 비밀히 왕래하는데 붙들지 못하다가, 요행으로 체포되어
블라고베센스크 오께비토에 구금되었으니 불구에 총살될 것이다.”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오하묵(吳夏默) 등의 이르쿠츠크의
한인사회주의자들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인사들이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교섭해 만든 단체였다.
당시 고려혁명군정의회는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 (사할린부대, 대한의용군)와
독립군 통합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다.
한인사회당은 사할린부대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통합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에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지지를 받는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사할린부대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통합하는 것을 지지하던 선생을 체포하려 했던 것이었다.
블라고베셴스크 당국의 보호를 받아 위기를 면했으나,
선생은 곧이어 자유시 참변 소식을 듣기에 이르렀다.
자유시 참변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장기영, 이용(李鏞), 한운용(韓雲用) 등과 함께
이만(현재 러시아 달네레첸스크)으로 건너갔다.
당시 이만은 극동공화국과 백군 정부의 분계선 지대로 자유시에 있던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과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힘이 비교적 덜 미치는 곳이었다.
그리고 김홍일(金弘壹) 등이 군비단(軍備團) 군사부를 개편해 만든
고려혁명의용군(高麗革命義勇軍)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서고 있었다.
선생이 이만으로 건너간 것은 자유시 참변 이후 연해주 지역에 남아 있는
무장부대들을 새롭게 재편하여 항일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함이었다.
1921년 9월 고려혁명의용군 간부들과 자유시에서 이동해 온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인사들은 고려의용군사의회(高麗義勇軍事議會)를 재편했다.
이 때 선생은 프리아무르주 군정의회 전권위원 겸 고려 빨치산 군사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소비에트 당국과의 교섭을 담당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하는 데 힘썼다.
사령관에 선정된 이용은 고려의용군사의회 산하에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을 조직했다.
대한의용군은 1921년 12월 초 이만전투를 시작으로 연해주 해방전쟁에 투입되어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6연대와 연합해 인정거장 전투,
볼로차예프카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1922년 연해주에서 철수를 결심한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연해주에 있는 한인 무장부대의 해산을 요구했다.
그 해 11월 러시아 내전이 종결되자 러시아 당국은
한인빨치산부대들을 무장해제시킨 뒤 해산시켰다.
이에 따라 러시아 내전에 참가했던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개별적으로 항일운동의 길을 찾아 남 · 북만주나 중국 관내로 떠나기 시작했다.
선생도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장기영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선생이 상하이로 향한 것은 러시아 내전 종결 이후 변화된 상황 속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갈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선생은 국민대표회의에 관찰원 자격으로 참석한 것으로 확인된다.
국민대표회의 창조파(創造派)가 구성한 조각에서
군무총장(軍務總長)에 선임되었으나, 선생은 주로 개조파의 입장에 섰다.
이후 선생은 중국 혁명운동 지원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선생이 중국 혁명운동을 지원한 것은 한국의 해방은 중국 혁명운동과
분리해서 볼 수 없고, 한국과 중국 두 나라가 연대하고 단결해야만
일본제국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24년 4월 상하이 프랑스조계 안에서 윤자영(尹滋瑛) 등과 함께
상해청년동맹회(上海靑年同盟會)를 조직하고 잡지 ‘한인청년’을 출판했다.
상해청년동맹회는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데
뜻을 두었던 개조파(改組派)에 참여한 이들이 주로 참여한 단체로
국제주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선생은 이동휘 등과 연락하며 중국 군벌 타도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던
북벌전쟁(北伐戰爭)을 지원하기 위해 상하이로 온 한인들과
노동자들을 광동(廣東)으로 보내는 일에 힘썼다.
1924년 5월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총장(交通總長) 대리(代理)로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의 주요 업무는 통신연락이지만,
이외에도 재정자금의 모집 등도 담당했다.
그 해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소련 정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교통총장 대리직을 맡고 있던 선생이 소련 당국과의 교섭을 맡아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련 정부로부터의 자금 지원 요청 교섭은 실패했다.
그 해 12월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총장 대리직을 사임하고
중국 혁명을 지원하는 일에 더욱 집중했다.
1925년 2월 상하이의 한 방적공장에서 일본인 감독이
중국인 여공을 학대한 것을 발단으로 중국 각지에서 반제국주의 시위가 고조되었다.
5월 30일 상하이에서 반일운동을 하다 체포된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던 시위대를 향해
영국 경찰이 발포하여 13명이 사망하자 중국 각지에서 파업과 영업중단,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위는 중국 전역에서 반제국주의 시위로 확산되어
중국 내에서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선생은 중국 학생계와 혁명가들과 연대활동을 펼치며
반제국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선생은 상회청년동맹회를 통해 중국 학생계와 긴밀히 연락하며
반제국주의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노력했다.
1925년 중국 학생계와의 연대 방안을 모의하기 위해 열린
상하이청년동맹회 연석회의 도중 선생은 피습을 당했다.
권총으로 무장한 10여 명의 청년이 일본 정탐을 찾는다는 구실로 연석회의장에 난입해
선생을 구타하려는 순간 이용이 이를 막았다.
이 때 연석회의 참석자들과 난입한 이들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고,
난입자들이 발사한 총탄을 맞고 왼팔에 부상을 입었다.
후일 이 사건을 두고 선생은 보이틴스키(Voytinskiy)와 화요회(火曜會) 인사들이
협동으로 벌인 ‘파시스트’적인 행동이라고 회고했다.
이 짧은 일화는 국외의 민족운동 간의 파벌 싸움을 보여준 안타까운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그 해 11월 사회주의자동맹(社會主義者同盟)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뉜 독립운동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함께 한인 청년들을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로 보내고, 이용과 함께 한인들로 구성된
북벌지원 군대를 만들어 광동으로 파견하며 중국 혁명운동 지원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27년 4월 장개석(蔣介石)이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결렬시키고 사회주의자를 탄압하자,
선생은 중국을 떠나 연해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선생은 동양서적 판매원으로 일하는 한편,
연해주 지역 빨치산 위원회를 지원하는 일을 담당했다.
전러중앙집행위원회(ВЦИК)는 1933년 12월 원동 해방 10주년을 기념해
연해주 해방전쟁에서의 선생의 공적을 포상했다.
이 때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 비서 프셰니친이 선생을 체포하려 했다.
프셰니친은 지난 1921년 고려혁명군정의회 인사들과 함께
블라고베셴스크에서 선생을 체포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선생은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연해주를 벗어나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1880~1969) 장군
모스크바로 이주한 1934년 이후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선생이 머물던 소련 내에서 변화된 정치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스탈린(Stalin)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1935년부터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지도자들이 소련 당국에 체포되기 시작했다.
1937년에는 연해주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다.
이때 선생의 셋째 아들 김인덕도 소련 당국에 체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에 거주하던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1956년 흐루쇼프(Khrushchyov)의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스탈린에 의해 체포되거나 처형된
많은 이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졌고, 이 때 연해주 해방전쟁에 참여했던 한인 지도자들도 복권되었다.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선생은 1967년 소련 당국으로부터 러시아혁명 50주년을 기념해 적기훈장을 수여받고,
1969년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선생의 유해는 소련 당국으로부터 그 공훈을 인정받아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선생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역은 체홉, 흐루쇼프, 가가린 등
소련의 정치 · 문학 ·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다.
선생의 독립운동은 만주와 연해주, 상하이 등과 같이 광범한 지역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지만,
항일무장투쟁이라는 일관된 노선에 의해 추구되었다.
그렇다고 선생은 독립군 대장과 같이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항일무장투쟁의 일선에서 활약하던 최이붕(崔以鵬)은 선생을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위에만 있던’ 인물로 평가한 바도 있다.
그러나 선생이 지도적 위치에 머물기만 한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부대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부대를 조직했으며,
독립군 부대의 활동에 필요한 인적 및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 나간 지도자였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청년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했고,
러시아 내전이 발발했을 때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일본제국주의와 맞설 군대를 조직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통합운동이 좌절된 후에도 다시 군대를 정비해 항일무장투쟁을 이어 나갔고,
러시아 내전 종결 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부대 조직에 앞장섰다.
선생은 무장투쟁의 부대를 만들며 독립운동을 이끌어간 지도자였으며,
일관되게 제국주의 타도와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힘을 기울인 반제국주의 전선의 혁명가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1880~1969) 장군의 묘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장군은 일제강점기
대한의용군사회의 위원장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만주지방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애국계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 곳에서 이동휘(李東輝)· 박진순(朴鎭淳)· 김립(金立) 등
30여 명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하는 데 참가하였다.
그 뒤 이동휘계의 군사지도자 이용(李鏞)과 손을 잡고 시베리아의 한인군사조직을
상해임시정부 산하에 규합하는 데 힘쓰게 되었다.
1921년 6월 세칭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발생하기 직전
5월 18일 오하묵(吳夏默)의 특무대에 붙잡혔다.
이 때에 같이 붙잡힌 사람으로는 한운룡(韓雲龍)· 박원섭(朴元燮)· 우시욱(禹時旭)·
주영섭(朱英涉)· 안태국(安泰國)· 임상춘(林常春) 등이다.
당시 오하묵은 이른바 이르쿠츠크집단의 요인으로서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의 부사령관이었다.
김규면이 소지한 상자에는 3만여 원의 금은전(金銀錢)과 비밀문서가 들어 있었다.
그 뒤 처형을 면하여 이용과 함께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의 위원장이 되었다.
볼셰비키는 아니고, 다만 적군편에 들어 한국독립의 무장투쟁에 일생을 바쳤던 민족독립운동자이다.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1880~1969) 장군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노보데비치 묘역은 그동안 한국을 포함한 외국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모스크바 시내 관광 명소 중 하나였으나 백추 장군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지난 2002년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영상] 독립운동가 백추 김규면(白秋 金圭冕)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의 묘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Alekseyevich Kropotkin, 1842~1921)은
러시아에서 황족 다음으로 높은 귀족인 공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크로포트킨(Alexei Petrovich Kropotkin)은
로마노프 왕조 이전에 러시아를 통치 했던 류리크 왕가 스몰렌스크의 대공이다.
크로포트킨의 아버지는 3개의 지방에서 1200여 명의 농노를 거느렸다.
어머니는 코사크 장군의 딸이었다.
크로포트킨은 1857년 14세의 나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상류층의 자제들만 다니는 특권 군단 수습기사단(修習騎士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년 동안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부관으로 근무했다.
1862~67년 육군장교로 시베리아에 배속되어 군무 이외에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고 지리학적 탐사 활동에 열중했다.
자신의 탐사결과에 기초하여 산맥구조선(山脈構造線) 이론을 전개했고,
이 이론은 동아시아의 지도작도법을 수정하게 했다.
또한 빙하시대에 아시아와 유럽에서의 빙하작용에 관한 연구들을 발표했다.
연구 결과를 즉시 인정받은 크로포트킨에게는 과학자로서 대성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1871년 러시아 지리학회의 회장직을 거절한 후 귀족세습권을 포기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시베리아 복무 중에 그는 이미 모든 정부는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무정부주의 이론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867년 크로포트킨은 군대에서 제대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에 입학하여
수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러시아 지리학회 지리 부문의 비서가 되었다.
1871년 크로포트킨은 핀란드와 스웨덴의 빙하 퇴적물을 탐사했다.
1872년에는 스위스의 쥐라 산맥에 있는 시계 제조업자들을 방문했는데
이들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한 자발적 결사체에 감탄하여 자신의 자유주의적 신념을 확고히 했다.
또한 제네바에서 국제 노동자협회(IWA, International Workingmen 's Association ) 회원에 가입했다.
하지만 그는 국제 노동자협회의 사회주의 스타일 보다는 무정부주의적 신조를 채택했다.
크로포트킨은 러시아로 돌아온 후 친구인 드미트리 클레멘트의 소개로
사회주의 - 포퓰리스트 혁명 그룹인 차이코프스키 서클에 가입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혁명사상을 선전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차이코프스키 서클에서 일한 결과, 혁명적인 정치 활동으로 인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그의 귀족적 배경 때문에 그는 감옥에서 지리학 연구 작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감옥에서 특별한 허가를 받았다.
1874년 경찰의 대량검거 때 다시 투옥되었으나 2년 후 1876년에 크로포트킨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보안 수준이 낮은 교도소로 옮겨졌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감옥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 후 그는 배를 타고 영국으로 향했다가 짧은 체류 후,
1877년 파리로 이주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곧 서유럽의 급진파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부상했다.
1878년 스위스로 돌아와 쥐라 연맹의 혁명 신문을 편집하고 다양한 혁명적 팜플렛을 발간했다.
크로포트킨은 몇 년 동안 스위스에서 지내다가 188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혁명가들에게 암살당한 후 러시아 정부의 요구로 스위스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폭동을 주동했다는 날조된 혐의로 체포되어 3년 동안 감금되었다.
1886년에 석방된 크로포트킨은 헨리 시모어(Henry Seymour)와
샬롯 윌슨(Charlotte Wilson)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 갔고 세 사람 모두
헨리 시모어의 신문 <The Anarchist (무정부주의자)>에서 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샬롯 윌슨과 크로포트킨은 개인주의 아나키스트인
헨리 시모어와 뜻이 맞지 않아 헤어지고 아나키스트 신문 <Freedom Press>를 발간했다.
이 신문은 오늘날까지 계속 발행된다.
크로포트킨은 <Freedom Press>에 정규적으로 기고했고 샬롯 윌슨은
1895년 편집자 직위를 사임할 때까지 신문의 행정과 재정을 도맡았다.
이즈음 1887년 4월 15일에 그의 외동딸 알렉산드라(Alexandra)가 태어났다.
런던에 거주하는 동안 크로포트킨은 윌리암 모리스(William Morris)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를 포함하여 저명한 사회주의자들과 친구가 되었다.
1916년 크로포트킨과 장 그레이브(Jean Grave)는 1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군이 독일과 중앙 강대국에 승리할 것을 옹호하는 문서 (Manifesto of the Sixteen)를 작성했다.
이 선언문 때문에 크로포트킨은 무정부주의 운동의 주류에 의해 한동안 고립되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생하자 크로포트킨은 40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러시아의 수만 명 군중들은 그의 도착을 환호하여 맞이했다.
그는 혁명 임시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맡아 줄 것을 요청받았지만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무정부주의 원칙을 위반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즉시 거절했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의 묘
장기간의 망명 생활 동안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자유주의적 철학을 피력한
영향력 있는 저서들을 집필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어느 반항자의 이야기 Paroles d'un révolté〉(1885) ·
〈러시아와 프랑스의 감옥에서 In Russian and French Prisons〉(1887) ·
〈빵의 정복 The Conquest of Bread〉(1892) ·
〈들판·공장·작업장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1899) ·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Memoirs of a Revolutionist〉(1899) ·
〈상호부조 Mutual Aid〉(1902) · 〈러시아 문학 Russian Literature〉(1905) ·
〈1789~93년의 프랑스 대혁명 The Great French Revolution 1789~1793〉(1909) 등이 있다.
그가 종종 밝혔듯이 그의 목표는 과학적 기반 위에 무정부주의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는 〈상호부조〉에서 그는 적자생존이라는 다윈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종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은 풍부한 실례를 들어 사교성이 동물 세계의 모든 수준에서
지배적인 특징임을 증명하면서 인간 세계에서도 상호부조가
예외적이기보다는 일상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원시부족, 농촌 마을, 중세의 코뮌에서부터 강압적인 관료제 국가의 대두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 학회 · 적십자사 등 상호지원을 계속 실천하고 있는
현대의 각종 협동체에 이르기까지 자발적 협동결사체의 진화 과정을 추적했다.
크로포트킨은 현대사의 추세는 사람들이 지배자 · 성직자 · 군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그들의 창조적인 기능을 개발할 수 있는
지방분권적 · 비정치적 · 협동적 사회로의 복귀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유재산과 불평등한 소득 대신 물자와 용역의 무상분배가 이루어지는 '무정부적 공산주의'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크로포트킨은 무정부적 경제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임금의 원리를 필요의 원리로 대체했는데 그것은 각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판단하여 노동에 참여했건 안 했건 관계없이
필요한 물건을 공동의 창고에서 꺼내 쓰도록 하는 원칙이었다.
크로포트킨은 사람들이 공업과 농업에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함께 하는 사회를 마음 속에 그렸다.
각 협력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은 20~40대에 안락한 생활을 하기에 충분한 하루 4~5시간을 일하며
분업 대신 여러 가지 일을 즐겁게 함으로써 중세의 도시생활에서처럼
인격의 균형이 잡힌 유기적인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보다 행복한 생활을 준비시키기 위해 청소년 교육을 강조한 그는
정신적 · 육체적 능력을 골고루 개발시키는 '통합교육'을 실시하여
균형잡힌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학 · 과학의 기본원리와 인문학의 학습을 중요시하면서도
책만 가지고 가르치기보다는 적극적인 야외 교육을 통한 실험 관찰 학습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방법은 현대의 교육 이론가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자신이 직접 겪은 형무소 생활을 토대로 크로포트킨은 형벌 제도의 철저한 수정을 주창하기도 했다.
그는 형무소는 범죄자를 교화시키기는커녕 잔혹한 벌을 가함으로써
범죄 습성을 굳혀주는 '범죄의 온상'이라고 말했다.
상호부조를 바탕으로 한 미래의 무정부사회에서 반사회적 행동은 법과 형무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이해와 공동체의 도덕적 압력에 의해서 해결될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과학자와 윤리학자의 자질에다 혁명 조직가와 선전가의 자질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애로운 마음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폭력의 사용을 용인했다.
또한 무정부주의의 투사로 활약하던 초년에는 인민의 반항본능을 일깨우기 위해
말과 글을 통한 선전활동을 보완할 목적으로 '행동을 통한 선전'인 폭동 행위를 열렬히 지지했다.
크로포트킨은 영국과 러시아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창시했으며,
프랑스 · 벨기에 · 스위스의 무정부주의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그가 연합국을 지지하자 많은 동지들이 그를 떠났다.
그의 결정은 독일의 전체주의가 사회의 진보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은 무정부주의의 반군사적인 전통을 위배한 처사였으며,
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 그가 거의 반세기에 걸쳐 구축했던 운동은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의 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함께 사태는 호전되었다.
75세의 고령인 크로포트킨은 40년의 망명 끝에 서둘러 조국으로 돌아왔다.
1917년 6월 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수 만명의 민중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임시 혁명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그의 무정부주의 원칙을 위반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즉시 거절했다.
1917년 국가 없는 사회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코뮌과 소비에트 (병사·노동자 위원회)들이
자발적으로 구성되자 자유주의적 미래에 대한 그의 기대는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의 감격은 비통한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혁명의 매장이다"라고 그는 친구에게 말했다.
크로포트킨은 혁명이 자유주의적 방법이 아닌 전체주의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를 볼셰비키가 증명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만년을 윤리학사의 집필에 몰두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1921년 2월 8일 모스크바 근처 드미트로프 시에서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그의 장례식에는 블라디미르 레닌 (Vladimir Lenin )의 승인을 받아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과 반 볼셰비키 슬로건이 있는 배너를 들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그야말로 무정부주의가 러시아의 수도를 누빈 마지막 처음이자 기회가 되었다.
크로포트킨의 생애는 자신이 일관성 있게 주장한
높은 윤리기준 및 사상과 행동의 결합을 예증한 것이었다.
그에게서는 다른 많은 혁명가들의 이미지를 손상시킨 이기주의나
이중성 또는 권력에 대한 탐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동지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를
"단검과 폭탄에 불과하다"라고 매도한 사람들에게도 찬탄을 받았다.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은 그만이 톨스토이가 주창했던 삶을 살았다고 말했으며,
오스카 와일드는 자기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진정 행복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크로포트킨이라고 말했다.
1957년 모스크바 지하철의 드보레츠소베토프 역은 그의 명예를 위해
크로포트킨스카야(Kropotkinskaya)로 개명되었다.
그의 생애는 세계 5대 자서전 중 하나로 꼽히는 <한 혁명가의 회상>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노년기의 활동은 소비에트의 검열로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아나키스트들의 왕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바쿠닌과 함께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의 대표격으로
취급되며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의 분파인 아나코 - 공산주의는 크로포트킨이
창조하지 않았지만, 크로포트킨이 제일 많이 발전시킨 아나키즘 이론 중 하나이다.
그의 사상의 목표는 아나키즘 이론을 과학적으로 정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사상에 따라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을 경계로
공상적 아나키즘과 과학적 아나키즘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는 <상호부조론>에서 다윈의 이론에 반대해 종의 진화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쟁이 아닌 협동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사유재산에 반대해 물자와 인력의 무상분배를 주장하였다.
크로포트킨의 중요한 저작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 대혁명>(The Great French Revolution 1789-1793, 1909)
<빵의 정복>(La Conquêtedu pain, 1892)
<한 혁명가의 회상>(Memoirs of a Revolutionist, 1899)
<상호부조론>(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 1902)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혁명적 윤리학>(미완)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의 묘
크로포트킨은 노동 가치이론을 포함한 자본주의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에 동의하지 않고,
수행된 일과 상품 가치 사이에 필요한 연관성이 없다고 믿었다.
대신 임금 노동 제도에 대한 그의 공격은 노동에서 잉여 가치를 추출하는 것보다
고용주가 직원들에게 가한 권력에 더 많이 근거했다.
크로포트킨은 이 힘이 생산 자원의 사적 소유권에 대한 국가의 보호에 의해 가능해졌다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은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경제 체제의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했다.
그는 그들이 빈곤과 인위적인 희소성을 창출하고 특권을 키운다고 믿었다.
대신 그는 상호 원조, 상호 지원, 자발적 협력에 기반한 보다 분산된 경제 시스템을 제안했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조직에 대한 경향이 진화와 인간 사회 모두에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1902년 크로포트킨은 저서 <상호부조론(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을 출판하여
동물과 인간의 생존에 대한 대안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그 당시 프란시스 갈톤(Francis Galton)과 같은 일부 "사회적 다윈주의자" 는
대인 경쟁과 자연 위계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인간을 포함한 종의 성공을 이끈 다윈주의적 의미에서의 경쟁보다는
협력에 대한 진화적 강조"라고 주장했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동물계에서 우리는 대다수의 종들이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을 위한 투쟁을 위한 최고의 무기를 함께 발견했습니다.
물론 그 광범위한 다윈주의적 의미에서 이해했습니다.
존재 수단이지만, 종에게 불리한 모든 자연 조건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개인의 투쟁이 가장 좁은 한계로 축소되고......
상호 원조의 실천이 가장 큰 발전을 이룬 동물 종......
변함없이 가장 많고 번영하며 더 발전할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이 경우 얻어지는 상호 보호, 노령화 및 경험 축적 가능성, 높은 지적 발달,
사교적 습관의 추가 성장, 종의 유지, 그것의 확장과 더 진보적 인 진화.
반대로 연관되지 않는 종은 썩을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크로포트킨은 인간의 경쟁적 충동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역사의 원동력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는 갈등을 찾는 것이 국가나 교회와 같은 부당하고 권위주의적인 제도를
파괴하려는 시도에서만 사회적으로 유익하다고 믿었다.
그는 인간의 창의력을 억제하고 협력을 향한 인간의 본능적 추진력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크로포트킨은 봉건 이전 및 현대 사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인 원주민의
협력 경향에 대한 관찰을 통해 모든 인간 사회가 산업화된 유럽의 경쟁에
기반을 두는 것은 아니며 많은 사회가 개인 간의 협력을 보여 주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또한 지도자 , 중앙 정부 및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경우,
대부분의 산업화 이전 및 권위주의 이전 사회는 사망시 개인의 소유물을 공동체 내에
균등하게 분배함으로써 사유 재산의 축적을 적극적으로 방어한다고 결론지었다.
또는 선물 경제의 형태로 선물을 팔거나 물물 교환하거나
부를 창출하는 데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1892년 크로포트킨은 저서 <빵의 정복(The Conquest of Bread)>에서 자발적인
협력 시스템에서 이루어진 상호 교류를 기반으로 한 경제 시스템을 제안했다.
그는 필요한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수있을 만큼 사회적, 문화적, 산업적으로
발전된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필요한 것을 가져가는 것을 막는 특혜 분배, 가격 책정
또는 화폐 교환과 같은 장애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결국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화폐 또는 교환 토큰의 폐지를 지지했다.
크로포트킨은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의 집단주의 경제 모델이
단지 다른 이름의 임금 체계일 뿐이고 그러한 체계는 자본주의 임금 체계와
동일한 유형의 중앙 집중화와 불평등을 낳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사회 노동의 산물에 대한 개인의 기여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그러한 결정을 내리려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임금을 결정한 사람에 대한 권위를 행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크로포트킨은 현지 생산에 중점을 두어 국가가
자급 자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자체 상품을 생산하고 자체 식품을 재배하여 수입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지역 식량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관개와 온실을 옹호했다.
57세 시절에 표트르 크로포트킨 사진, 1900 년경
인간애로 가득 찼던 무정부주의자 표트르 크로포트킨.
보통 아나키스트, 혹은 무정부주의자들을 생각해 보면
과격하고 폭력적인 집단을 떠올릴 때가 많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고정 관념이다.
아나키스트는 말 그대로 정부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상상을 해보자. 우리는 정부가 없는 세상을 꿈 꿔본 적이 있나?
심지어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정부 없는 세상은 도무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 영역이다.
고대 노예제 이후 인류는 항상 국가라는 통치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나키스트들은 정부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나키스트들이 누구보다도 사람이라는 존재를
믿고 신뢰하는 휴머니스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간이 너무나 신뢰할만 하기에 정부 같은 통치 기구가 없어도
능히 서로 돕고 협동하며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따뜻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들에 가깝다.
대부분 아나키스트들이 성선설을 믿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오죽했으면 아나키스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인류에 아첨하는 자들”이라는 별명까지 붙였겠는가.
인간적인 면모가 너무도 훌륭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였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인간에 대해 가장 뜨거운 신뢰를 보여준 따뜻한 아나키스트가 있다.
혁명가 레닌과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태생의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그 주인공이다.
크로포트킨은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장군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러시아의 대공이었다.
집안이 얼마나 부자였는지 집안이 거느린 농노가 무려 1200명에 이르렀다.
크로포트킨은 전통적으로 군대에 입대했던 가문의 전통을 버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해 수학과 지리학을 공부했다.
이 때문에 크로포트킨은 가문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기꺼이 무정부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유럽 각국에서 쫓겨 다니던 크로포트킨은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이때 그를 맞이하는 환영 인파가 실로 엄청났다고 한다.
혁명 임시정부는 그의 높은 지명도를 감안해 그에게 교육부장관 자리를 제시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레닌의 정부가 아니었고 멘셰비키가 소비에트를 장악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아나키스트가 정부에 입각해서 교육부장관을 할 수는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
크로포트킨의 생애가 더욱 돋보이는 대목은
그가 실로 언행일치에 충실했던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사상은 훌륭하지만 돈과 권력 앞에 이율배반의 행동을 보였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돌이켜보면 크로포트킨의 생애는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다.
말로는 평등한 교육을 외치면서 자기 자식은 사교육을 시키거나 특목고에 진학시키는
이율배반적 행동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살 수 없다.
말로는 협동과 연대를 외치면서 이익이 눈앞에 닥치면 그것부터 챙기는 지도자는 존경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사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삶에 적용했다.
크로포트킨은 “인류는 천성적으로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동료를 돕고 희생할 줄 아는 존재다”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평생을 희생하고 헌신하며 살았다.
반면 그는 한 번도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다.
크로포트킨의 명저 <한 혁명가의 회상> 서문에서 덴마크의 평론가
게오르크 브란데스(georg Brandes)는 크로포트킨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 사람보다 청렴하고 인류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크로포트킨이 보여준 다양한 사상 중 경제학적으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상호부조론’이다.
크로포트킨은 경쟁을 앞세워 연대와 협동의 본성을 짓밟았던
자본주의를 상호부조론을 통해 통렬히 비판했다.
상호부조론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인간은, 아니 더 나아가서 생물은
이기적으로 생존경쟁을 하는 본성을 갖고 있지 않다.
상호부조, 즉 서로 돕고 사는 유전자를 운명적으로 갖고 태어난다.
물론 동물들끼리도 가끔 경쟁을 한다. 하지만 경쟁은 생명체의 본질이 아니다.
대부분 동물들은 경쟁을 통해 남을 짓밟을 때보다 서로 돕고 살 때가 훨씬 많다.
크로포트킨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동물 사회를 관찰해 상호부조론에 대한 확신을 더했다.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인간 외에 동물 중에 축적이라는 것을 하는 존재가 있을까?
축적은 저축과 다른 개념이다.
저축은 미래를 대비해서 필요한 만큼 모아둔다.
하지만 축적은 필요한 양을 훨씬 넘어 무한대로 몸집을 불리는 개념이다.
그래서 개미가 식량을 모아두는 것은 축적이 아니라 저축이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평생을 먹고 살 재산을 모아두고도 끊임없이 몸집을 불린다.
축적을 하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한 셈이다.
또 한 가지, 인간 외에 주변 동료를 죽이면서까지 자기의 삶을 도모하는 동물이 있을까?
하다못해 꿀벌이나 개미도 서로를 돕고 산다.
코끼리들은 무리 중 일원이 늪에 빠지면 혼신의 힘을 다해 동료를 구한다.
영장류 학자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원숭이들의 경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동료 원숭이가 고통을 받으면 자기의 배고픔을 참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크로포트킨은 “동물은 늘 상호부조 속에서 살아 왔고, 상호부조는
그런 종족을 보존하고 번성시키는 동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어떤 동물도 경쟁을 통해 약자를 죽임으로써 번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개별적인 투쟁을 최소화하고, 협동을 최고조로 높인 동물만이
수적으로 우세하며 번성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사회를 구성하고 그 사회를 지키려고 노력하며
협동하는 동물의 지적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도 찾아냈다.
사실 이것도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어떤 동물이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생각할 것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기 마련이다.
나만 생각하면 하나만 생각하면 충분하지만, 동료와 사회를 생각하면
배려나 소통하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협력적 존재의 지적 능력이 자기만 생각하는 존재의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이야기다.
크로포트킨은 동물들의 상호부조 경향을 인류사회에 적응해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했다.
인류가 문화의 전성기를 누린 시기를 보면 모두 연합이나 공동체,
함께 사는 세상이 최고조로 발달했을 때였다.
중세 길드나 고대 그리스 도시 사회는 모두 도시 공동체 정신이 활짝 꽃피웠던 시기였다.
이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권력과 결탁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종교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형성됐다.
초기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언제 공동체 안에서 경쟁에 뒤쳐진 자는 죽여 버리고,
서로를 경쟁으로 짓밟으며 살라고 가르쳤던가?
크로포트킨은 “국가가 전체주의로 변모하고 독재화될수록 종교는 그 반작용으로
끊임없이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로 발전해 국가의 독재를 견제했다”고 해석했다.
또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서로 돕고 사는 인류는 문화적,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냈을 뿐 아니라 구성원들의 행복감도 훨씬 높였다.
인류는 돕고 배려할 때 지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발전했고 더 행복했다는 이야기다.
자본주의가 짓밟은 것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인류의 공동체 정신이었다.
300년 역사의 자본주의 아래 살면서 우리는 상호부조의 중요성을 너무 쉽게 잊고 말았다.
경쟁을 통해 남을 짓밟는 일에 익숙해진 한국 사회가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크로포트킨의 외침을 진심으로 귀담아 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스트의 선구자로 불리는
피에르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을 만나면서 무정부주의자가 됐다.
정부의 권위를 부정한 탓에 크로포트킨은 스위스에서 쫓겨나고
프랑스에서 감옥에 갇히는 등 전형적인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벗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크로포트킨은 성자라 할 만큼 훌륭하다.
그의 붉고 탐스런 수염과 사랑스러운 모습은 양치는 모습과 흡사하다”라고 묘사했다.
그를 접한 모든 이들이 크로포트킨을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으로 표현할 정도로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1921년 79세 때 심장병으로 사망했는데 크로포트킨의 지지자들은
‘볼셰비키 비판’을 기치로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장례식을 치렀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의 묘
아나키즘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종류의 사회적 운동이다.
아나키즘이 근대 일본에서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면서 아나키즘이 폭동, 암살, 테러 등의
폭력적 운동들로 연상되지만, 아나키즘이란
그저 지배(권위)가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사회적 운동일 뿐이다.
그러니까 아나키란 지배자가 없는 혹은 권위를 거부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아나키즘이 거부하는 권위는 정부만을 특정하지 않는다.
아나키즘은 강압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종류의 권력에 저항하는 정신이다.
만약 누군가 거대한 폭압적 권력에 맞서고 있을때,
그는 곧 아나키스트이며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그의 동료가 된다.
아나키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제국주의가 전세계를 휩쓸던 시기
권력을 추종하던 지식인들에 의해 확산되었다.
폭압적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던 아나키스트들의 일부가 보여준 암살 및 테러가
과도하게 일반화되어, 아나키즘에 나쁜 이미지가 생겨났다.
하지만 제국주의와 국가의 폭력이 존재하던 모든 장소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조합을 만들어
자본에 대항하고, 협동조합을 통해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했으며, 국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발적인 시민단체 NGO를 조직해 온 모든 이들은 아나키즘에 빚지고 있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처럼 근대에 새롭게 발견된 이념이 아니라,
인류의 진화와 함께 우리의 본성에 녹아 있는 행동 양식에 가깝다.
아나키즘은 아프리카의 우리 조상들이 공동체를 유지하도록 만들어, 혹독한 자연 환경 속에서
그들을 생존하게 도와준, 우리 뇌의 신경회로에 쓰여 있는 유전적 지침서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지면,
사람들은 종종 아나키 혹은 무정부상태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아나키즘이 사상의 일종으로 역사에 등장했을 때에도,
아나키즘이라는 단어에는 무질서 혹은 혼돈이라는 의미가 스며들어 있었다.
정치적 리더십이 이끄는 민족국가 체제에 안착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도자의 부재는 곧 혼돈을 의미한다.
하지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강력한 권력을 지닌 정치적 지도자의 존재 또한,
역사적으로 많은 사회적 무질서를 초래했다.
권력을 지닌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가 곧 무정부 상태 혹은
무질서 상태를 의미한다고 믿는 사람은,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해 온
지난 인류의 역사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절대 권력을 통한 질서의 유지라는 환상은, 지난 세기 인류가
거대화된 집단을 구성하면서 스스로에게 세뇌시킨 환상일 뿐이다.
국가와 같은 거대 집단의 존재를 머릿 속에서 지우고 상상해보면,
절대권력의 부재는 결코 무질서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소규모 공동체에 나타난 절대권력이 무질서를 불러온다.
아나키즘이 아니라, 질서를 부르짖는 권력이야말로 무질서의 근원이라는 통찰은
19세기의 아나키스트 사상가 표트르 크로포트킨에게서 왔다.
그의 책 <질서에 관하여>는 노동자들의 연대와 쟁의를
무질서로 왜곡하던 당시의 권력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오늘날 그 자들이 뜻하는 질서란, 열에 아홉 명이 노동하여 한줌의 게으른 자들에게
사치와 쾌락을 제공하고, 극히 역겨운 열정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질서란, 열에 아홉이 번듯한 생활과 지적 재능의 정당한 발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과학적 연구나 예술적 창조에 의해 인간에게 제공되는 쾌락에 대해서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 돼지 상태로 열에 아홉 명이 전락하는 것이다. 질서란 이런 것이다!
질서란, 가난과 기근이 사회의 일상 상태가 되는 것이다.
질서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일랜드 농민이며, 디프테리아와 열병
그리고 식량 부족에 뒤이은 기근으로 죽어가는 러시아 제3제정의 농민이다”
크로포트킨, <질서에 관하여>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노동자와 시민의 정당한 요구들은 무질서로 포장된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권력자들이 말하는 질서의 추악한 모습들을 모두 보여준 뒤,
그들이 말하는 무질서의 역사적 사례들을 하나씩 나열한다.
권력자들에게 무질서란 “치욕스러운 질서를 거부하고자 속박을 끊고,
족쇄를 부숴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인민들의 봉기”다.
그것은 “임박한 혁명 전야에 닥친 사상의 반역”이고, “고대 노예제의 폐지”이며,
“왕을 전율케 하고, 일할 권리를 선포했던 1848년의 혁명”이다.
권력자들이 말하는 무질서란, 오히려 “인류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들이다.
1842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왕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러시아 출신의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스트다.
아나키즘의 역사에서 드물게,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과학자였다.
신채호, 박열, 이회영, 김원봉 등 우리에게 익숙한 아나키스트 대부분이
인문학에 기반을 둔 낭만적인 실천가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역사에서도 매우 예외적인 존재다.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을 통해 바쿠닌이 아나키즘을 사회혁명 차원에서 실천했다면,
크로포트킨은 운동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아나키즘에 과학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크로포트킨은 당시 여러 이념과 경쟁하던 아나키즘에 사상적 근거를 마련해주었고,
당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 및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며
아나키즘에 이론적 생명력을 제공해 준 인물이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Kropotkin)의 묘
크로포트킨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고,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으로 아나키즘을 알린 책은 <상호부조론>이다.
이 책에서 지리학자이자 동물학자였던 크로포트킨은 툰드라와 아시아의 자연을 통해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사상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아주 작은 동식물부터
인간사회에 이르기까지 자연계와 문명에서 나타나는 상호부조의 원리를 섬세하게 설명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허버트 스펜서가 <사회진화론>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적자생존으로 설명하려던 시도를 비판했고,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당시 서구사회는 물론,
식민지였던 동아시아까지 잠식했던 사회진화론을
과학적인 근거들과 역사적인 논증으로 통렬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가 비슷한 시기에 쓴 책인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아나키즘 운동에서 과학의 중요성과, 근대과학에 대한 앎이 어떻게 아나키즘을
사회에 확산시키는데 더욱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크로포트킨 식의 논증이다.
크로포트킨은 책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아나키’라는 관념은 어떤 과학적 연구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어떤 철학체계에서 나온 것도 또한 아니다.”
크로포트킨,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제 1장
즉, 아나키즘은 과학적 연구의 산물도 아니고,
어떤 철학체계로부터 기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20세기 초반의 사회과학이 처해 있는 현실을
당시의 자연과학의 성과와 비교해 정확히 지적한다.
”사회과학은 지금도 아직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정확성을 가지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풍토나 기후의 연구에 있어서 조차 1개월 또는 1주일 뒤에 어떤 날씨가 될지 미리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하물며 사회학과 같은 미숙한 학문을 가지고 바람이나 비 따위 보다 무한히 복잡한 사물을 다루어
장래에 일어날 사태를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하겠다.”
과학자 역시 보통 인간에 불과하며, 그들 대부분이 상류계급에 속해 있고,
그 계급의 편견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한 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나키즘은 민중 속에 기원을 갖고 있다.”
즉, 아나키즘은 “민중의 운동으로 전개되는 한에서만 활력과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상이다.
아나키즘을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여러 지적 운동들과의 맥락 속에서 설명하고 난 후,
8장 ‘근대과학에 있어서의 아나키즘의 지위’라는 장에 이르러,
그는 아나키즘이 근대과학을 통해 구현되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그건 바로 “아나키즘은 인간의 사회생활을 포함시켜
전 자연을 포괄하는 현상의 역학적 해명에 바탕을 둔 우주관”이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인간 사회만을 대상으로 하는 다른 이념들과는 다르다.
크로포트킨에게 아나키즘은 자연계에도 나타나는 현상이며,
따라서 그 설명에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필요하다.
방법론적 측면에서, 자연과학은 형이상학과 어떻게 다른가.
크로포트킨은 이를 헤겔의 이론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형이상학자는 인간의 지적 생활과 감정생활이
<정신의 내재적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라고 자연과학자에게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연과학자는 이와 같은 설명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명? 지식? 감정의
여러 현상에 대한 자기네의 연구를 참을성 있게 추진하여 이것들이 모두
물리적? 화학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들의 자연 법칙을 해명하려고 노력한다 .”
크로포트킨,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제 5장
크로포트킨이 보기에, 형이상학자의 말들은 아나키스트에겐 그저 ‘듣기 좋은 말’일 뿐이다.
아나키스트는 이러한 <듣기 좋은 말>에 승복하는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들은 “언제나 반드시 무지를-즉 불완전한 연구를-감추는 것이거나
아니면 더욱 나쁘지만 미신을 감추는 데에 유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는 “자연과학적 방법에 따라 과거와 현재의 사회관념 및 제도의 연구를 계속”하고,
인간의 사회발전에 대한 판단이 형이상학자들의 단순한 공식으로 판단하기엔
“훨씬 무한히 복잡하면서도 실천적 목적에 대하여 매우 흥미로운”것임을 인정한다.
바로 이런 관점을 확장해서, 크로포트킨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위해 변증법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의 황망함을 지적한다.
그는 변증법적 방법은 당대의 어느 자연과학자도 승인하지 않는 비과학적 방법임을 말하고 나서,
19세기의 역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인류학의 그 어느 발견도
변증법에 의해 발견된 바 없음을 지적한다.
그는 형이상학자들이 혐오하는 귀납적 방법이야말로 19세기 자연과학의 승리였음을 선언한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이념들 또한, 귀납적 방법론에 근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부르주아들의 형이상학적 이념으로부터 민중의 삶을 보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적자생존을 마치 자연과학의 결과를 사회에 적용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회진화론자들의 비과학성을 지적한다.
부르주아들의 상태를 고착화시키는 사회진화론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기대고 있는 사상이 아니라, 다윈의 이론에 기대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회진화론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시험되지 않은 비과학적 형이상학일 뿐이다.
크로포트킨에게 아나키즘과 근대과학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짝이었고,
그건 바로 과학적 방법론이야말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폭력으로부터
민중을 지켜내는 유일하고 확실한 무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아나키즘은 다른 형이상학적 이념과는 달리,
유일하게 과학적 방법론을 유연하게 사용해서 실천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사상이다.
따라서 크로포트킨에게 과학적 방법론이 결여된 아나키즘은 아나키즘일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 아나키즘은 다른 형이상학들의
독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측면과 다를바 없어지기 때문이다.
과학은, 과학이 발견한 이론과 결과들 때문이 아니라,
과학이 자연을 발견하는 방법론의 힘으로 아나키즘을 지키고 수호한다.
그것이 바로 크로포트킨이 과학적 아나키즘을 통해 말하고 싶어했던 결론이다.
러시아 인민배우 타티아나 사모일로바(Tatiana Evgenievna Samoilova)의 묘
타티아나 사모일로바(Tatiana Evgenievna Samoilova 1934~2014)는 구 소련 및 러시아 영화 배우다.
1957년 전쟁 영화 <학은 날아간다 (The Cranes Are Flying)>에서 베로니카 역으로 주연을 맡아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소련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유일한 영화가 되었다.
그 후 수많은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연기를 했다.
1967년에는 영화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에서 주연 안나 카레니나 역을 맡아 열연했다.
1958년 칸 영화제에서 사모일로바는 "가장 겸손하고 매력적인 여배우"로 특별한 언급을 받았다.
그녀는 1958년 Jussi Awards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 여배우상 을 수상했고,
1958년에는 독일 영화 비평가상 최우수 여배우 상을 수상했다.
1959년에는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Awards)에서 최우수 외국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다.
1970년대에 여러 역할을 수행한 후 사모일로바는 한동안 은둔해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 중 한 명으로 남아 있었다.
1993년 사모일로바는 러시아 에서 가장 높은 영예를 안은 러시아 인민 예술가로 선정되었다.
2007년, 그녀는 제 29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사모일로바는 2000년대에 컴백하여 여러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녀의 마지막 역할은 이고르 볼로신(Igor Voloshin)의 2008년 영화 니르바나(Nirvana)에서였다.
사모일로바는 4 번 결혼했는데 모든 결혼이 이혼으로 끝났다.
그녀의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러시아 국영 텔레비전은 2014년 5월 4일
사모일로바에 관한 일련의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공교롭게도 80세 생일 전날 사모일로바는 관상동맥심장병과 고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다음 날 23:30분에 사망하여 여기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사모일로바는 아들과 그녀의 이름을 딴 손녀가 살아 남아 있다.
러시아의 국민 희극배로 불린 유리 니쿨린 (Yuri Vladimirovich Nikulin)의 묘
유리 니쿨린 (Yuri Vladimirovich Nikulin 1921~1997)은
많은 대중 영화에 출연한 소련과 러시아의 유명한 배우이자 광대였다.
그의 도움으로 고아와 결손 가정 아이들을 위한 예술서커스 중점학교인
‘15번 학교’가 기숙학교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상] Yuri Nikulin
발레리 레가소프(Valery Legasov) 의 묘
발레리 알렉세예비치 레가소프(Valery Alekseyevich Legasov 1936~1988)는
소련의 무기 화학자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의 정회원이었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 그는 모스크바 물리학 및 기술 연구소의 교수였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참사 당시 레가소프는
쿠르차토프(Kurchatov) 원자력 연구소의 첫 번째 부소장이었다.
그는 재난의 원인을 조사하고 그 결과의 완화를 계획하기 위해
형성된 정부위원회의 핵심 위원이 되었다.
그는 반복되는 사고를 피하기 위해 많은 중요한 조치를 취하고
재난 지역의 상황을 정부에 알렸다.
그는 동료 과학자들과 언론에 파괴된 공장의 안전 위험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인근 프립야트(Pripyat)시의 전체 인구를 즉시 대피시킬 것을 주장했다.
1986년 8월 그는 국제 원자력기구 (IAEA)의 특별회의에서 소련 대표단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의 보고서는 비극의 범위와 결과를 논의하면서 깊이 있는 분석과 정직함을 보여주었다.
1988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2주년이 되는 날이자
재난 원인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하루 전에 레가소프는 목을 매 자살했다.
의사는 체르노빌 재난의 역경이 레가소프가 자살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자살하기 전에 레가소프는 재앙에 대해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밝히는 문서를 썼다.
BBC TV 영화 체르노빌 핵 재해의 녹음 분석에 따르면 레가소프는 IAEA 보고서에서
소련의 핵 비밀에 대한 언급을 정치적 압력이 검열했다고 주장한다.
레가소프의 자살은 소련 원자력 산업에 충격파를 일으켰다.
1996년 9월 20일 당시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 (Boris Yeltsin)은 사후 레가소프에게
재난 조사에서 보여준 "용기와 영웅주의" 에 대해 러시아 최고 명예 칭호인
러시아 연방 영웅의 명예 칭호를 수여했다.
미하일 불가코프 (Mikhail Afanasyevich Bulgakov)의 묘
미하일 불가코프(Mikhail Afanasyevich Bulgakov 1891~1940)는 소비에트연방의 극작가이다.
그는 1891년 5월 15일 러시아 제국 키예프에서 키예프 신학교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키예프 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근무했다.
혁명 후부터 모스크바에서 여러 신문과 잡지에서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주로 소비에트 정권에 비판적인 작품을 썼는데 그로 인해 스탈린 치하에서
그의 희곡 작품들은 여러 번 상연이 금지되는 아픔을 겪었다.
결국 그는 1930년 3월, 스탈린과 소비에트 정부에게 자신이 소련을 떠날 기회를 주거나
극장에서 생계를 위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쓴다.
한 달 후에 스탈린은 불가코프에게 전화를 걸어 극장 일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준다.
그 후 불가코프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조감독으로 일하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들을 출간할 수는 없었다.
첫 작품 <투리빈가(家)의 날>(1926)은 그의 장편 <백위군(自衛軍)>을 토대로 하고
혁명직후의 내전시대의 키예프를 무대로 백군장교(白軍將校)의 한 집안의
이산(離散)과 붕괴를 묘사한 것인데, 애절한 서정과 노여움에 찬 풍자와 유머,
그리고 숨막힐 듯한 극적 긴장 속에서 반혁명군의 파멸이라는 필연성을 추구한 것이다.
이 밖에 반혁명 진영의 정신적 퇴폐를 주제로 한 <도망>(1928), 사극 <몰리에르>
<최후의 나날>(푸슈킨) 등의 작품이 있다.
1938년, 희곡 <바툼>이 스탈린이 중심인물이라는 이유로
상연 금지되자 그는 1929년에 집필을 시작했다가 중단했던 장편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Мастер и Маргарита)>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이 작품의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불가코프는 1940년 2월에
작품을 탈고하고 한 달 후인 3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숨을 거둔다.
그러나 이 소설은 출간되지 못하고 27년이 지난 1967년이 되어서야 출간될 수 있었다.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묘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 1904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가이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호프는 시베리아, 사할린 섬 여행을 계획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사할린 섬에 유배된 수인(囚人)들의 비참한 생활은 체호프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는 후에 이때의 기행문을 쓴 바 있다.
7개월 이상이나 걸려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와 1892년,
교외에 저택을 사서 양친 · 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의사로서 이웃 농부들의 건강을 돌보거나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얄타를 마주보는 크림 반도로 옮겼다.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록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長幕物) 2편, 1막물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1887년에 쓰여진 <이바노프>는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교적으로는 <프라토노프>보다 앞섰으나 아직도 과잉된 극적 효과를 노리는
낡은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음의 <숲의 정(精)> 실패는
체호프의 극작을 한때 멈추게 했으나 이 무렵에 쓰인 1막물에는
<곰>(1888)이나 <결혼신청>(1889)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
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갈매기>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바냐 아저씨>(1899), <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3)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會話劇)을 확립했다.
<갈매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 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2년 후에 다시 새로 설립된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다루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희극으로서 쓰여진 이 작품을 오히려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정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체호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 체호프의 작품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상연하게 됐다.
<바냐 아저씨>는 앞서의 <숲의 정>을 다시 쓴 것으로서
톨스토이즘이나 멜로드라마의 성격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세 자매>는 초연 후 전집에 수록되자 다시 고쳐쓴 바 있다.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은 체호프의 44세 생일에 초연의 막이 올랐다.
체호프의 희곡(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訂正)된 해석이다.
<세 자매>나 <벚꽃동산>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1900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이에 항의하여 스스로 사임하고
1904년에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4년의 생애를 마쳤다.
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의 묘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Nikolai Vasilievich Gogol 1809~ 1852)은
우크라이나의 작가이며 극작가이다.
1809년 우크라이나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818년 풀타바 군립 학교를 거쳐
1829년 네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젊었을 때 배우를 지망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문학으로 전환한 고골은
철학, 문학, 역사에 관심을 두었고 이후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1827년에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 인민의 생활을 취재한 소설
<디카니카 근교 농촌 야화>를 출판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으며, 이때부터 푸시킨을 사귀고
이후 그가 남긴 대작의 소재는 거의 대부분 푸시킨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1834년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의 조교로서 세계사를 강의했으나 실패하여 곧 퇴직하였다.
1836년 희극 <감찰관>을 알렉산더 극장과 모스크바에서 상연하였다.
이는 진보 세력의 절찬을 받았지만, 지배 세력으로부터는 공격을 받게 되어 그는 로마로 갔다.
그 후 계속하여 스위스·파리·로마 등지에 거주하였다.
1847년에 또 하나의 대표작 <결혼>을 쓰고,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
명작 <죽은 혼>의 제1부를 완성했고 제2부의 집필을 시작하며
1848년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건강을 해친 뒤였다.
결국 <죽은 혼>을 모스크바에서 완성했으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정신적 고뇌와 사상적 동요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져 원고를 불 속에 던지고 10일간의 단식으로 자살하였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Sergeevich Prokofiev)의 묘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Sergei Sergeevich Prokofiev)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 손촙카 마을에서 농업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프로코피예프는 이미 5살의 나이에
특출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6살 때는 체스를 배웠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체스는 프로코피예프 일생 동안 열중하였으며,
그 당시 세계 챔피언들과 견줄 정도로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다.
1902년에 이르러 프로코피예프는 작곡에 있어서
개인적인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혁신적인 작품을 이미 작곡하였다.
1953년 3월 5일 사망하였지만, 소비에트 연방 정치인이자 국가 원수였던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의 사망과 겹쳐서 아무도 그의 사망을 알지 못하였다.
니키타 흐루시쵸프(Nikita Khrushchev)의 묘
니키타 흐루시쵸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1894-1971)는 러시아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 겸 공산당 서기장을,
1958년부터는 소련 총리와 겸 소련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낸 정치인이다.
그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와 공존을 모색하였다.
그의 탈스탈린화 정책과 반스탈린주의 정책은
공산주의 국가들에 폭넓은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집단지도 체제를 무시한 정책 결정, 농업 정책 실패,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에 대한 양보 등은 많은 반대파를 만들어내었고,
1964년 10월 13일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실각되었다.
2차 세계대전 조종사 이바노비치 포코프(Vitaly Ivanovich Popkov)
비탈리 이바노비치 팝코프(Vitaly Ivanovich Popkov 1922~2010)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비행 에이스가 된 소련 전투기 조종사였다.
전쟁 중 그는 약 40 번의 공중 승리를 거두었으며 소련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두 번 수상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군에 남아 1989년에 은퇴하였다.
그는 2010 년 88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류드밀라 자이키나(Lyudmila Georgievna Zykina)의 묘
류드밀라 자이키나(Lyudmila Georgievna Zykina 1929~2009)는 러시아의 국민 포크 가수였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47년 파야트니츠키(Pyatnitsky) 합창단에 합류했다.
1960년부터 그녀는 솔로 공연을 했다.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의 초청으로 평양에서 6 차례 공연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이 자이키나를 너무 좋아해서 2008년에는 그녀의 노래가 그의 병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녀를 평양으로 초청했다고 보도되었다.
자이키나의 많은 영예 중에는 레닌 상(Lenin Prize 1970)과 레닌 교단(Order of Lenin 1979),
그리고 소련 인민예술가 (1973)와 사회주의 노동 영웅 (Hero of Socialist Labor 1987)의 칭호가 있다.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에 따르면 자이키나는
"훌륭한 성악가 이상이었으며 그녀는 작곡가의 공동 저자이자 공동 창작자"였다.
그녀의 대표적인 노래로는 Techot Volga 와 Orenburgskii platok이 있다.
소행성 4879 Zykina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Lyudmila Zykina는 2009년 7월 1일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성 앤드류 훈장을 수여받는 자이키나(Zykina), 2004. 06. 15.
영화배우 뱌체슬레브 티코노프(Vyacheslav Tikhonov )
뱌체슬레브 티코노프(Vyacheslav Vasilyevich Tikhonov 1928~2009)는
구 소련과 러시아에서 유명한 배우이다.
그는 모스크바 근처의 파블로프스키 포사드(Pavlovsky Posad)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유치원 교사였고 그의 아버지는 지역 섬유 공장의 엔지니어였다.
티코노프는 연기를 꿈꿨지만 그의 부모는 다른 직업을 구상했고 전쟁 중 군수품 공장에서 일했다.
금속 노동자로 일한 후, 그는 1945년에 연기 경력을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어려움없이 VGIK의 Actors 'Faculty에 입학했고 1950년 우등생으로
VGIK를 졸업한 후 6 년 동안 영화배우 극장 스튜디오에서 연기 경력을 시작했다.
1948년에 그는 당시 인기 있는 여배우 논나 모르듀코바(Nonna Mordyukova)와 결혼했다.
티코노프는 시골 가족 드라마로 유명해졌고,
그 뒤를 이어 여러 전쟁 드라마에서 인가가 절정에 올랐다.
티코노프는 또한 톨스토이(Leo Tolstoy)의 전쟁과 평화 (1968) 연기로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그는 2009 년 12 월 4 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당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티코노프의 가족에게 애도를 표했다.
라이사 고르바체바(Raisa Maximovna Gorbacheva)의 묘
라이사 고르바체바(Raisa Maximovna Gorbacheva 1932~1999)는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아내로 여성 활동가였다.
그녀는 러시아 문화 유산 보존, 새로운 재능 육성,
어린이 혈액암 치료 프로그램을 위한 기금을 마련했다.
1989년 르미얀체프(Rumyantsev) 교수와 다른 사람들의 지원과 협조로
고르바체바는 자선단체인 "세계 아동을 위한 세계 혈액학협회"에 10만 달러를 기부했다.
고르바초프가 모금한 이 기부금과 추가 기부금은
혈액 은행을 위한 장비를 구입하고 러시아 의사를 해외에서 훈련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고르바체바는 1993년 10월 뇌졸중에 시달렸다.
그러나 1997년 그녀는 정치에 여성의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Raisa Maksimovna 's Club을 설립했다.
그녀는 또한 아이들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1999년 7월, 그녀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과 딸과 함께 독일의 뮌스터 대학병원 (Münster University Hospital)에서
혈액학자인 토마스 브에크니(Thomas Buechner) 교수의 주치로 두 달 동안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9월 20일 67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러시아로 송환 되어 모스크바의 Novodevichy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2006년 그녀의 가족은 어린 시절 암환자를 지원하기 위해
기금을 모금하는 라이사 고르바체바(Raisa Gorbacheva) 재단을 설립했다.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i)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ergeievich Stanislavski 1863~1938)는
러시아의 연출가이며 배우이자 러시아의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창립했다.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주장한 연기 기법은 오늘날의 사실적인 연기 방식의 원조이자 모범이 되었다.
그가 만들어 낸 시스템이 종래의 연극 시스템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예술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낳게 하는 원인을 분명히 갖고 있는 점이다.
그가 제일 흥미를 느낀 것은 희로애락이란 정(情)의 외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태어나 발전하는 과정과 논리였다.
그는 배우 예술에 있어서 자기가 주장하는 방향을 '마음으로 체험하는 예술'이라 이름짓고,
이것을 '형태로 나타내는 예술'과 구별하고 있다.
그는 예술 창조의 순간에 있어서의 심리체험의 성실성을 배우 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수성이라 생각하고, 관객에게 사상적 · 정감적(情感的)으로 작용하는
최대의 힘을 갖는 것은 그러한 예술임을 강조하였다.
스타니슬랍스키는 무대 위에서 배우가 자연스럽게 연기하여,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이 마치 실제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느껴야한다고 여겼다.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라고도 하는데 이를 위해 우선 그는
배우의 연기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전 극에서 등장하는 왕이나 영웅 역할같이 과장되고 격한 연기는
관객에게 사실적인 느낌을 주기 힘들었던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친숙해져 있는 모든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단순한
행동이라 해도 각광을 받으며 수천 명의 대중 앞에 섰을 때는 경직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바로잡고, 걷고, 앉고, 눕는 법을 새롭게 익힐 필요성이 있다.
무대 위에서 보고 듣는 법을 재교육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한 그의 구체적인 조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배우는 무대에서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게 행동하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해야한다.
둘째, 배우는 자신이 맡은 등장 인물이 지닌 "내적 진실"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배우는 무대 위에 드러나는 인물의 삶을 현실처럼 지속적이고
역동적인 것으로 표현해야 한다.
넷째, 같은 장면에 나오는 다른 연기자와 호흡을 잘 맞출 수 있어야 한다."
너무 크고 과격한 행동이나 과장되고 괴상한 목소리는 사실적인 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배우는 등장 인물의 특성을 드러낼 습관 같은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을 바보같다고 여기는 인물을
스스로를 주먹으로 쥐어박는 행동을 습관적으로 할 수 있다.
아무리 맡은 배역이 지닌 객관적인 겉 모양을 똑같이 흉내내더라도,
등장 인물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욕망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배우에게서 관객이 느끼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옷과 행동만 흉내낸다면, 관객은 배우를 '가짜 인형'으로 느낄 것이다.
배우는 등장 인물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어야한다.
예를 들어 연극에서 겉으로는 잘난체를 하며 남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행동을 하는 인물이라도, 그/그녀가 삶에서 정말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사랑'일 수 있다.
이때 그 인물의 목표는 '남에게 사랑 받는 것'이다.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할의 마음 속 진짜 목표를 알고,
그것을 관객에게 느끼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배우 중에는 극 중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대사를 할 때만 열심히 연기하고,
대사가 없을 때는 누워있거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바로 죽지 않는다.
스타니슬랍스키는 배우에게 마음 속으로
"집중의 원"(circle of attention)을 그리라고 권한다.
말 그대로 이 원을 그릴 때는, 배우가 집중해야하는 공간을 포함하게 그려야한다.
처음에는 작게 그려서 구체적인 사물을 담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다가 다른 연기자도 포함되도록, 점점 그 원을 넓게 그려 나가야 한다.
이렇게 여러 배우들이 서로를 신경쓰면서 호응하는 연기를, "앙상블 연기(ensemble)"라고 한다.
트베르스카야 거리 모스크바 예술극장으로 통하는 카메르게르스키 골목의 입구에서
두 명의 입상 기념비를 만난다.
주인공은 바로 사실주의적 연기 이론을 주창한 연출가 겸 배우이자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창립자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 (Konstantin Stanislavski)와 그의 선배이자 동료였던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 (Vladimir Nemirovich-Danchenko)이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의 묘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1906~1975)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그는 소비에트 정부와 복잡한 관계에 있었는데, 1936년과 1948년에는 그의 두 작품이
공개적인 경고를 받기도 했으며, 종종 그의 작품에 대해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그는 동시대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소비에트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자,
여러 개의 표창과 상을 받기도 했으며, 소비에트 최고 회의 위원이기도 했다.
초창기의 아방가르드 시기를 제외하면, 쇼스타코비치는 주로 낭만파의 작품을 썼으며,
특히 구스타프 말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무조주의 형식을 도입하였으며
종종 12음렬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강한 대조에, 그로테스크적인 요소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 가운데 교향곡과 현악 사중주 각각 열 다섯 곡씩이 유명하며,
오페라와 여섯 개의 협주곡, 그리고 여러 영화 음악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이나 기분을 잘 나타냈으며 듣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은 교향곡이 대표적이며, 교향곡 뿐만 아니라
오페라,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성악곡으로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은 총 15개로 이루어진다.
제 1번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의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이 곡을 통해 세상에 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알려지기 시작한다.
곡은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당시 예술과 혁명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서유럽의 현대음악 콘서트가 열리면서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번 교향곡, 3번 교향곡을 작곡한다.
2,3번 교향곡에서는 대위적인 기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2번 교향곡에서는 극단적으로 27성부 모두 폴리포니를 이루기도 한다.
4번 교향곡은 표제가 없는 순수한 절대 음악이다.
또한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인원(총 134명)이 필요한 기악곡이다.
하지만 4번 교향곡이 <프라우다>지에서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한 비판 사건으로 초연이 연기된다.
5번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의 15개 교향곡 중 으뜸으로 뽑힐 만큼 높은 작품성을 지녔다.
그는 그 무렵 <프라우다>에 쓰인 자신에 대한 비판,
즉 지나친 형식주의자라는 평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한 고민 끝에 탄생한 작품인 5번 교향곡은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과 극복-승리라는 내용으로 자주 비교되곤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회고록을 통해 5번 교향곡의 주제가 인간성(인격)의 확립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 작품은 4악장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는 모든 악장에 일정 리듬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조성을 명확하게 표시하지 않았는데,
1악장은 d단조, 2악장은 a단조, 3악장은 f#단조, 4악장은 d단조로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자 소련 정부는 예술에 대한 간섭을 더욱 심하게 한다.
그리고 애국적인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는데,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도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포위하였던 것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시작하였다.
이 작품 발표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은 전쟁의 시(詩)이며,
뿌리 깊은 민족정신의 찬가이다 라고 발표했지만
1악장을 제외하고는 묘사적 요소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이전,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비난을 했던 <프라우다>에서도
이 곡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곡은 훗날, 레닌그라드 시(市)에 헌정되었으며, 당시 스탈린상도 수상하게 된다.
이 곡은 표제 음악이며, 1악장은 '전쟁', 2악장은 '회상',
3악장은 '조국의 광야', 4악장은 '승리'로 알려져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9번 교향곡은 짧고 매우 경쾌한 소품 형식이다.
곡 자체는 완성도가 높은 편이었지만, 대작이 나올 것을 기대하였던 사람들에게
소규모의 경쾌하고 재치있는 곡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쇼스타코비치는 9번 교향곡은 만든 지 8년 후에 제 10번 교향곡을 발표한다.
이 곡은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에 쓰여진 작품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총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을 "확대된 타악기군을 포함하는 오케스트라"의
표준에 가까운 4악장의 교향곡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의 13번 교향곡과 14번 교향곡에는 성악 부분이 들어가 있다.
쇼스타코비치가 마지막으로 쓴 교향곡은 1971년의 15번 교향곡이다.
15번 교향곡은 순수 기악 교향곡이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사진, 1950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뿐만 아니라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오페라, 성악곡에 걸쳐 많은 작품을 썼다.
관현악곡은 모음곡, 서곡, 교향시가 대부분이다.
특히 모음곡에서는 발레 음악을 모은 발레 모음곡이 대표적이다.
또한 쇼스타코비치는 민족 음악에도 관심을 가져
러시아와 기르기스 민요 서곡 op.115같은 민속적 선율로 곡을 쓰기도 하였다.
<10월 혁명>이라는 교향시 op.131는 1967년에 있었던
10월 혁명 50주년을 기념하여 작곡된 작품이다.
협주곡은 피아노, 바이올린, 그리고 첼로 협주곡이 대표적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는 미완성 작품까지 모두 3개이다.
그 중 코(The Nose) Op.15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Lady Macbeth of Mtsensk District) Op.29이 대표적이다.
코(The Nose)는 고골리의 동명소설을 러시아로 번역한 것으로,
G. 이오닌, A. 플라이스, J.자미야틴과 쇼스타코비치가 함께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잃어버린 코를 찾아 원래 있던 자리에 붙인다는 내용의 원작을
모방하여 코믹적인 요소를 없앤 중후하고 무거운 음악이 오페라 전체에 흐른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1930년~1932년에 작곡되었다.
이 작품은 러시아어로 번역한 A. 플레이스와 쇼스타코비치의 공동 작품
<므첸스크의 백베스 부인>의 대본이 거의 그대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굉장히 규모가 큰 대작으로, 러시아 오페라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즉, 이 작품은 부정적인 일들을 고발하고, 풍자하며, 극적이고, 서정적이면서
인물에 대한 심리 묘사, 성격 묘사에 대한 음악이 어우러진다.
이 작품은 1934년 초연 된 이후, <프라우다>지에서
‘음악이 아니라 시끄러운 소리들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은 후, 상연이 금지되었다.
1979년에 원곡이 부활, 상연되었다.
두 번째 우주 비행사 게르만 티토프(Gherman Titov)의 묘
게르만 티토프(Gherman Stepanovich Titov 1935~2000년 9월 20일)는
1961년 8 월 6 일에 유리 가가린이 앞선 보스토크 2호를 타고
지구 궤도를 도는 두 번째 인간이 된 소련 우주 비행사였다.
발사 당시 26 세가 되지 않은 그는 여전히 우주를 비행하는 가장 어린 사람이다.
티토프의 비행은 마침내 인간이 우주에서 살고 일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는 지구를 여러 번 (총 17회) 공전한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최초로 우주선을 조종하고 우주에서 하루 이상을 보낸 사람이다.
그는 또한 처음으로 궤도에서 잠을 자고 우주에서 구토하여
우주 병으로 우주에서 고통을 받은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티토프는 궤도에서 최초의 수동 사진을 만들어 현대 우주 사진의 기록을 세웠다.
그는 또한 10분 동안 사용했던 전문가 급 Konvas-Avtomat
영화 카메라를 사용하여 지구를 촬영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티토프는 소련의 영웅 칭호, 레닌의 2개 상 수상, 그리고 수많은 메달을 받았다.
그는 불가리아의 사회주의 노동 영웅, 베트남과 몽골의 노동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달의 먼쪽에 있는 티토프 분화구와 하롱베이에 있는 섬은
그의 이름을 딴 티탑섬 (Ti Tốp Island)이다.
티토프 우주 센터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다.
소비에트 이후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해에 그는 공산주의 정치가가 되었다.
우주 비행을 위해 가가린 다음으로 두 번째로 선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소련 정부가 가가린이 비행한 날인 4월 12일을 우주 비행의 날로
정하도록 제안한 사람 또한 티토프였다.
오페라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Feodor Chaliapin 1873~1938)
표도르 샬리아핀(Feodor Ivanovich Chaliapin) 은 러시아 오페라 가수였다.
깊고 표현력이 풍부한 베이스 보이스를 소유한 그는 주요 오페라 하우스에서
중요한 국제적 경력을 쌓았으며 종종 자신이 선택한 예술 형식으로
자연주의 연기의 전통을 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샬리아핀은 1926년 호주를 순회하며 호평을 받은 일련의 독주회를 열었다.
샬리아핀의 개인 문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결과로 혼란스러웠다.
처음에 그는 새로 등장한 소련 러시아의 존경받는 예술가로 대우받았다 .
그러나 새로운 정권 하의 일상 생활의 가혹한 현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뒤따르는 불안정한 기류 그리고 공산당 당국에 의한
그의 재산의 압류 등으로 1921년 이후 그는 러시아 밖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반 소련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샬리아핀은 처음에는 핀란드로 이주했고 나중에는 프랑스에서 살았다.
러시아 이주민 인구가 많은 코스모폴리탄 파리는 그의 기지가 되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일생보다 큰 돌봄으로 유명했지만
그의 예술에 대한 헌신을 결코 희생하지 않았다.
샬리아핀의 마지막 무대 공연은 1937년 Monte Carlo Opera 에서 열렸다
그는 이듬해 1938년 백혈병으로 65 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1984년 그의 유해는 정교한 의식을 통해 파리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그리고 노보데비치 묘역(Novodevichy Cemetery)에 다시 묻혔다.
Portrait of Feodor Chaliapin, 1911. by Konstantin Korovin, Russian Gallery, St Petersburg.
러시아 최초의 인싱주의 화가 콘스탄틴 코로빈 (Konstatin Korovin)이 그린
표도르 샬리아핀(Feodor Ivanovich Chaliapin)의 초상화.
이 초상화를 바탕으로 묘지 석상을 세운 것 같다.
에카테리나 스바니제(Ekaterina Svanidze)
에카테리나 세묘노브나 스바니제(Ekaterina Semyonovna Svanidze 1880 ~ 1907)는
스탈린의 첫 번째 아내이다.
조지아의 귀족 부부인 스비몬 스바니제(Svimon Svanidze)와
시포라 스바니제(Sipora Svanidze)의 딸로 태어났다.
에카테리나 스바니제에게는 2명의 자매인 알렉산드라(Alexandra)와 마리아(Maria),
그리고 남동생 알렉산드레(Aleksandre)가 있었다.
에카테리나 스바니제의 아버지인 스비몬 스바니제는 쿠타이시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에카테리나 스바니제의 남동생인 알렉산드레 스바니제는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독일어, 프랑스어를 구사했으며 나중에
트빌리시 오페라 극장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마리아 코로나(Maria Korona)와 결혼하게 된다.
빈곤층 가문 출신이었던 에카테리나 스바니제는 자신의 언니들과 함께
재봉사로 근무했고 나중에 티플리스(현재의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여성복 매장인 마담 에르비외(Madame Hervieu)를 운영하게 된다.
마담 에르비외는 군인, 귀족을 위한 제복, 드레스를 판매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06년에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결혼했고
1907년 3월 31일에는 아들인 야코프 주가슈빌리를 낳았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생활고에 시달렸고 1907년 12월 5일에는
지병인 장티푸스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에카테리나 스바니제의 가족들은 나중에
이오시프 스탈린이 주도한 대숙청 과정에서 처형당하고 만다.
스탈린의 첫 아내 에카테리나 스바니제(Ekaterina Svanidze) 부분
파벨 트레티야코프(Pavel Mikhailovich Tretyako 1832~1898)의 묘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파벨 트레티야코프는 스물네 살 때인
1856년부터 러시아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많은 예술가를 후원하면서 작품을 수집했고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의 경우처럼
유명 작가 등의 초상을 그리도록 유명 화가들에게 의뢰하기도 했다.
그의 꿈은 러시아 미술가들의 그림으로 가득한 국민 미술관을 남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1856년 개관했다.
그 후 1892년 자신이 소장한 2천여 점의 회화와 조각, 드로잉 등을 모스크바 시에 기증했다.
미술관은 볼셰비키 혁명 직후인 1918년 국유화됐다.
오늘날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11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13만 점이 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최고의 러시아 미술 박물관이다.
트레티야코프의 꿈이 만들어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영상] Novodevichy Cemetery
노보데비치 묘지 (Novodevichy Cemetery)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면
웹 사이트 http://novodevichye.com/ 를 찾아 보시라.
여기에서 알파벳 색인과 사진 및 간략한 전기를 포함하여
묻힌 인물들의 직업 등을 주제별 영역별로 정리해 놓은 데이터베이스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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