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박열 동지 김중한, ‘모욕적 죽음, 비극적 망각’

1927년 2월24일 경성에서 언론 인터뷰 때의 김중한(왼쪽).

1934년 1월9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정치보위부 심문을 받을 당시 초췌한 모습을 찍은 사진. 임경석 제공

 

스탈린 집정 시기 소련 국가폭력의 희생자 가운데 ‘유동식’이란 조선 사람이 있다. 일본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이주한 지 5년째 되는 망명자였다. 그는 1933년 5월14일 체포당해 1년간이나 엄중한 취조를 받았다. 그는 끝내 자유를 얻지 못했다. 유죄로 간주된 그에게 극형이 선고됐다. 그리하여 1934년 5월21일 결국 총살되고 말았다. 향년 33살이었다.

 

유동식의 혐의는 ‘일본 제국주의의 스파이’ 행위를 범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근거가 있는 것일까? 소련 오게페우(통합국가정치보위부) 심문관들은 유동식이 적성국가인 일본 영토를 빈번하게 왕래한 점을 문제 삼았다. 소련 정부나 코민테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 일본제국 영토의 일부분인 조선으로 오갔다는 것이다. 그뿐이랴.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들을 안내하여 불법 월경을 방조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조선·소련·중국 국경 지대에 직업을 구해 장기간 체재한 사실도 문제였다. 그는 국경에서 불과 25㎞ 떨어진, 연해주 포시예트 지구의 얀치헤라는 곳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는데, 그 행위는 스파이 활동의 편의를 얻기 위한 위장일 뿐이라고 의심을 샀다.

 

1923년 ‘박열 사건’ 공범인 아나키스트

 

단지 혼자만 혐의를 받은 게 아니었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 오랫동안 교제한 사람들도 속속 체포됐다. 그들도 유동식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스파이이거나, 스파이 활동에 편의를 제공했으리라는 의심을 받았다. 이처럼 자신은 물론이고 가까운 친지, 동료들까지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탄압 사건’의 발단이 됐던 그 사람, 유동식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의 본명이 밝혀졌다. 놀랍게도 김중한(金重漢)이었다. 세칭 ‘박열(朴烈)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된 아나키스트, 1923년 도쿄 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의 소용돌이 속에 천지를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일왕 암살 모의 사건의 연루자 김중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김중한은 일왕 암살을 음모한 박열로부터 폭탄 구매를 요청받고 그를 위해 노력했다는 혐의로, 일본 사법부의 재판을 받았다. ‘대역 범죄’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법관의 판단에 따라 ‘폭발물취체규칙 위반죄’로 분리 재판을 받은 그는, 사형 언도를 받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보다는 훨씬 가벼운 형을 받았다.

 

김중한의 주검이 묻힌 모스크바 서북쪽 교외 바간코보 묘지 정문. 임경석 제공.

 

출옥 뒤 사회주의 강연 연사로

 

1927년 2월5일 김중한이 출옥했다. 체포된 지 3년5개월 만이었다. 도쿄 서북부 외곽에 위치한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는 예기치 않은 위험에 노출됐다. 그의 동정이 신문지상에 널리 보도됐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 국수주의자들은 분노했다. ‘천황 폐하’의 신변을 위협한 흉악한 범죄자를 고작 몇 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내보내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현행 법률이 범죄자를 응징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고 호언했다. 긴장감이 흘렀다. 출옥 뒤 요코하마 지인 집에서 머물던 김중한도 이 소문을 접했다. 그를 살해하려고 자객을 밀파했다는 정보를 들은 그는 이틀 만에 서둘러 길을 나서야 했다. 귀국길에 올랐다.

 

경성에 도착해보니 분위기가 달랐다. 비록 일본의 식민지이긴 하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진 않았다. 언론 인터뷰 요청도 있었다. 조선어로 간행되는 신문사 두 곳의 기자들이 그가 머무는 시내 중심지 한 여관을 찾았다. 분위기는 우호적이었다. 보도 기사에 따르면 그는 검정 모직 양복을 입고 안경을 낀 모습이었고, 매우 이지적인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 오랜 철창생활을 겪은 뒤인데도 조금도 초췌한 빛이 없이 도리어 씩씩한 기운이 넘치는 태도였다고 한다.1

 

옥중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이 질문을 듣고서 그는 자신의 독서와 사유 체험에 관해서 얘기했다. 심리·윤리·문학·생물학 등에 관한 책을 즐겨 읽었는데, 특히 ‘원시 인류의 생활 상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아마 그때를 억압과 차별, 계급, 착취가 존재하지 않은 이상향의 시기로 상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에도 주목할 만하다. 인생의 본질, 해방, 삶의 가치, 자기 파멸, 비애, 전투 등의 어휘가 그의 내면의식을 구성하는 주요 개념이었다.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답했다. 인생이란 영원히 계속되는 해방을 위한 투쟁이되 승리를 기약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비애감에 굴복되지 않고 계속 전투해나가겠다고 말했다.2 이어서 “좀더 사색하고 좀더 연구하여, 이제부터는 좀더 가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끝맺었다.

 

평안남도 용강군 지운면 두륵리가 그의 고향이었다. 대동강 입구의 항구도시 진남포에 이웃한 비옥한 농촌지대였다. 자택에서의 정양 기간은 길지 않았다. 김중한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6개월 만에 신문 지면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진남포를 무대로 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진우청년회라는 청년단체가 그의 거점이었다. 이 청년단체는 마르크스 사후 41주년을 맞이해 사회주의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4명의 연사 가운데 김중한의 이름이 있었다. 수년 전 무정부주의를 수용했던 김중한이 아나키스트 진영을 떠나 마르크스주의 진영으로 몸을 옮기는 중이었다. ‘좀더 가치 있는 일’이란 곧 그에게는 사회주의운동을 뜻했던 것 같다. 뒷날 김중한이 직접 작성한 진술조서를 보면, “나는 이병화, 양명 등 그곳에 있던 조선공산당 엠엘파와 연결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3 출옥 이후 머지않아 김중한은 공산주의 비밀결사에 가담했다.

 

김중한은 합법 공개 영역의 대중운동에 헌신했다. 특히 청년운동 확장과 사회단체 연대 운동에 힘을 쏟았다. 보기를 들면 진남포 일원의 각종 청년단체를 결속해 진남포시 단일청년동맹 결성을 이끌었다. 또 재만동포옹호 동맹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것은 22개 사회단체를 결속한 연합 단체였다. 평안도 일대 사회운동단체들의 연대활동에도 뛰어들었다. 평남 안주에서 열린 관서민중운동자대회에 참석했고, 그 대회의 단상에 올라 축사를 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신간회 활동이었다. 1927년 12월 신간회 진남포 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간부의 반열에 올랐다. 정치연구부 총무간사가 그의 직함이었다. 지회를 이끌고 가는 4인 집행부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이다.

 

2년 동안 여섯 번이나 구금·가택수색

 

김중한의 활동 반경과 내용은 아나키스트들과는 달랐다. 아나키스트들은 민족통일전선 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적대시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김중한은 이때 옛 동료 아나키스트들과 절연했던 것 같다. 동향 출신의 아나키스트 최갑룡은 김중한이 관서민중운동자대회에 참석해 축사한 사실에 비애를 느꼈다고 회고했다.4

 

김중한은 신간회 중앙기관에도 진출했다. 1929년 6월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 진남포구 대표위원으로 참석했다. ‘복대표’란 소수의 참석 인원만으로도 전국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끔, 각 지회에서 선출된 대표 가운데서 다시 대표위원을 선발하는 제도였다. 복대표는 전국에 걸쳐 34명이었는데, 그중에는 허헌(경성구), 황상규(양산구), 이주연(단천구) 등과 같이 집행부를 담당하게 될 저명 인사가 포진해 있었다. 진남포구를 대표하는 김중한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일본 경찰에게는 김중한의 활발한 사회운동 행위가 눈엣가시였다. ‘대역사건’ 연루자가 근신하기는커녕 대중 선동에 열성을 보이다니, 가만둘 수 없었다. 사소한 꼬투리라도 있으면 서슴없이 검속·구금했다. 그 탓에 김중한은 체포와 훈방을 뻔질나게 되풀이해야만 했다. 낱낱이 꼽아보자.

 

1927년 8월 현지 관련 유력자와의 알력으로 인한 가택침입죄 사건으로 진남포경찰서에서 10일간 구금됐고, 그해 10월 관서민중운동자대회에서 불온한 내용의 축사를 했다는 혐의로 안주경찰서에서 6일간 구금당했으며, 1928년 5월에는 진남포경찰서의 갑작스러운 가택수색을 겪었고, 11월에는 신간회 지회 활동의 불온 혐의로 진남포경찰서에 9일간 구금당했다. 1929년 6월에는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 참가하던 중 경성종로경찰서에 며칠 구금됐고, 마지막으로 그해 8월 공산주의비밀결사 연루 혐의로 평양경찰서에 이틀간 구금당했다. 2년 남짓한 기간에 무려 6회에 걸쳐 태클을 당했다.

 

‘박열 사건 공범 김중한씨 탈출’, 그의 해외 탈출을 보도하는 1929년 9월9일치 신문기사의 제목이다. 진남포 사회운동의 맹장으로 고투 중이던 김중한이 최근에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기사였다. 밤낮으로 그를 감시하던 진남포를 비롯한 인근의 경찰서가 발칵 뒤집혔고, 그의 거취를 엄중하게 뒤쫓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기자는 국경을 넘은 김중한이 만주 길림 방면으로 사라졌는데, 독립운동단체 국민부에 가담한 것 같다는 추측 기사를 썼다.5

 

아직도 모스크바 묘지에 외로이

 

기자의 추측은 절반만 맞았다. 국경을 넘은 김중한이 길림 방면으로 잠입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국민부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뒷날 김중한이 작성한 진술조서에 따르면, 그곳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의 비밀 공산주의그룹에 가담했다. 이른바 ‘서상파’라고 부르는,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던 강력한 단체였다. 서상파에 가담한 계기는 그 지도자 윤자영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선사회주의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그의 식견과 삶에 대해 내면의 공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다시 말하면 28살부터 33살까지 김중한의 생애 마지막 삶은 망명지에서 이뤄졌다. 북간도와 연해주를 주된 근거지로 하여 피억압 민족의 해방과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해 노력했다. 파란이 중첩한 그 구체적인 행적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달리 추적할 필요가 있다.

 

김중한의 죽음은 이중의 의미에서 비극적이다. 인간의 해방을 위한 노력이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고 일본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이름으로 단죄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 하나는, 그 비틀림과 망각이 무려 85년이나 계속됐다는 점이다. 정의를 위한 헌신이 그처럼 오랫동안 잊힌 채 방치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역시 슬프다.

 

처형된 김중한의 주검은 모스크바 서북쪽 외곽지대에 있는 바간코보 묘지에 묻혔다. 청년 시절에 그가 꿈꿨던 언어로 표현하자면, 해방을 위한 전투를 쉼 없이 계속했으나 도중에 스러지고 만 외로운 영혼이 거기에 지금도 묻혀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박열 사건 공범 김중한씨 입경’, <조선일보> 1927. 2.25.

2. ‘박열 공범자 金重漢씨 입경’, <동아일보> 1927. 2.25.

3. 오게페우 특별부 제1과장 전권대리 바산고프, ‘유동식(김중한) 심문조서’, 1934. 1.13.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편)>, 독립기념관, 765쪽, 2019년.

4. 박환, <식민지시대 한인아나키즘운동사>, 선인, 317쪽, 2005년.

5. ‘박열 사건 공범 金重漢씨 탈주’, <동아일보> 1929. 9.9.

 

 

윤선애와 아름다운 이야기
1980년 5월  이후  문승현 선배는 이 노래를 작곡했고 , 
그 해  그가 몸담았던 서울대 노래 동아리 "메아리" 공연에서 최초로 불려졌다고 합니다.  
이 노래는 많은 대학 내 노래 동아리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후 대학 노래동아리 출신의  사회인들을  모아 문승현 선배가  주도해 만들었던 
노래 모임 "새벽" 에서는  제가 이 노래를 주로 불렀었구요.
1989년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간혹 어떤 이는 제가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이 곡을 불렀다고 알고 계신 분도 있는데 그건 아닙니다.
제 노래는 2009년 '아름다운 이야기' 음반에  김의철 님의 기타연주와 함께  수록되기도 했지요.
채 못다한  마음의 응어리를 마치 영혼의 넋두리 하듯, 
살아남은 자 살풀이 하듯 노래로 풀어 내면서 추모의 마음 이어갑니다.

 

 



누가 알까 그대 소리없는 웃음의 뜻을

누가 알까 그대 흐트리는 만가지 꿈을

어찌 그 입으로 차마차마 말할 수 있나

가시나무숲에 불어가는 바람소리만

그대 이 시절에 피어나는 꽃이기 전에

숨 죽여 밤보다 짙은 어둠 적시던 눈물


큰 바람에 그대 소리치며 쓰러져 울고

다시 눈 떠 그대 부활하는 노랑민들레

살아 겨울 속에 눈물눈물 흘릴 일 많았고

죽어 잠 못드는 그대그대 불 타는 눈동자

그대 동터오는 산마루길 바삐 달려서

넋만 살아 다시 오시는가 노랑민들레

넋만 살아 다시 오시는가 노랑민들레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강물 위에

스텐카라친 배 위에서 노래 소리 들린다.

페르시아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띄운 그 입술에 노래 소리 드높다.


돈 코사크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 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리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에 볼가강은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라친 장하도다 그 모습.


일제 강점기에 항일독립군의 애창곡이었던 ‘스텐카 라진’의 노랫말이다. 

구슬픈 곡조의 이 러시아 민요에는 한때 러시아 온 땅을 톺고 지나간 반란의 주인공 

‘스텐카 라진’의 비극적 사랑이 담겨 있다.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은 애잔하고 굳센 선율은 라진의 무쇠 같은 의지를 잘 표현하여 

러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17세기 중엽 러시아는 여전히 농노제가 시행되는 낙후한 봉건국가였다. 

농노들은 영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을 하며, 남는 시간에 소작지를 경작했다. 

그나마 수확의 절반 이상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이중삼중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노들은 몰래 도망쳐서 카자크에 합류하였다. 

그런 와중에 카자크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간섭이 심해졌다. 

그러자 카자크들은 발끈하였고, 마침내 1667년에 무력봉기를 일으킨다.

 

카자크 무리는 스텐카 라진의 지도 아래 대상인과 귀족에 대한 약탈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많은 식량과 옷, 보석 등을 빼앗아 주변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후 2년간 스텐카 라진은 볼가 강 하류에서 카스피 해에 이르는 넒은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스텐카 라진은 농민들 사이에서 스타가 됐다. 무리는 점점 불어났다. 

더 많은 식량과 물자가 필요하게 됐다. 고심하던 스텐카 라진은 페르시아로 눈을 돌린다.

 

1670년, 카스피 해의 검은 물결을 가로질러 페르시아로 진격한 라진의 군대는 막대한 전리품을 얻었다. 

게다가 아름다운 페르시아 공주를 인질로 잡아왔다. 

그 소식에 힘을 얻은 러시아 농민들은 곳곳에서 스스로 봉기를 일으켰다. 

더불어 라진의 군대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볼가 강 유역의 볼고그라드와 아스트라한에 이어 사라토프, 사마라 등의 도시를 차례로 굴복시켰다. 

그들 앞에는 어떤 적도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때 한 가지 문제가 반란군의 발목을 붙들었다. 

스텐카 라진이 페르시아 인질과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공주의 미모에 취한 스텐카 라진은 정신 못 차리고 사랑에 탐닉하게 된다. 

당연히 봉기의 칼끝은 무뎌졌다. 마침내 반란군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곤혹스런 처지에 빠진 라진은, 결국 비장한 마음으로 공주를 강물에 집어넣고 만다.

 

공주의 비명을 뒤로 한 채 스텐카 라진은 분위기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차르 황제와 ‘맞장’을 뜨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향하였다. 

하지만 1670년 10월, 이들은 심비르스크 근처에서 정부군과 접전을 벌여 처참하게 패하고 만다. 

더불어 스텐카 라진은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간신히 카자크 마을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옛 동료들의 배신으로 1671년 4월에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됐다. 

그리고 1671년 6월 16일. ‘최대한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라’는 황제의 특별한 주문에 따라 

모스크바 광장에서 손과 발과 목이 차례로 잘려 나갔다. 

한편, 스텐카 라진이 공주를 물속에 던진 것을 두고, 오늘날의 ‘로맨스 중독자’들은 말들이 많다.


러시아 가수가 부른 곡



 

임경석의 역사극장

[역사극장] 종로 네거리가 좁았던 여성운동가 박신우

1927년 혜성처럼 등장한 근우회 책사이자 맹렬한 실행가, 갑자기 흔적 없이 사라져

 

 

1933년 11월28일 소련 국가정치보위부에 체포된 이튿날 찍은 박신우 사진. 표정에서 당혹감과 공포감이 느껴진다. 임경석 제공

 

박신우(朴新友)는 여성운동계에 혜성같이 나타났다. 1927년 초부터 사회주의 성향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에 출입하더니, 3월8일 국제여성의날을 기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국제무산부인데이’라고 불렀다. 이날을 기념해 여성동우회는 서울 종로2가 YMCA회관에서 대규모 강연회를 열기로 했는데, 여성운동계 유력자로 구성된 강사 명단 7명 속에 박신우도 포함돼 있었다. 그가 맡은 강연 제목은 ‘3월8일과 조선 여성’이었다.
 
조직 활동 계획 세우고 전국 돌며 강연회
 
박신우는 지방 강연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단지 여성 의식을 계몽할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여성단체 조직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지 <부녀세계>가 주관하는 지방 순회강연에도 선뜻 참가했다. 1927년 4월 창간한 <부녀세계>는 3·1운동 이후 발간된 <여자시론>(1920), <부인>(1922), <신여성>(1923), <부녀지광>(1924) 뒤를 잇는 대표 여성지였다. 잡지사는 창간호 발행을 기념해 남부조선 순회강연 사업을 벌였다. 4월17일 기자 2명이 출발하고 같은 달 23일에는 박신우를 포함해 후발대 4명이 경성을 떠났다. 순회 기일은 약 보름 예정이었고, 첫 강연지는 전북 이리(현재 익산)였다.1
 
박신우가 여성운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근우회 때부터였다. 그는 근우회 발기인 명단 40명에 이름을 올렸고, 그해 5월27일 창립총회에서는 집행위원 2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식민지 조선의 민족통일전선 기구이자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단체의 간부가 됐다. 창립 직후 처음 열린 집행위원회에선 7명으로 이뤄진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됐다. 핵심 간부가 된 것이다. 상무집행위원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매일 상근하는 집행위원이었다. 날마다 출근해 직업적으로 단체 일에 종사하는 직무이니만큼 업무도 많고 권한도 큰 자리였다.
 
박신우가 맡은 분야는 ‘선전·조직부’였다. 이 분야는 단체활동의 꽃이라 할 만큼 중요했다. 당시 사회주의 비밀결사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트로이카’라고 부르는 최소 인원 3명으로 집행부를 구성하곤 했는데, 이들의 직무는 으레 총무·선전·조직으로 나뉘었다. 그만큼 중책이었다. 박신우는 그 직무를 능히 감당했다. 취임 뒤 20일 만에 선전·조직 분야의 장단기 사업 계획안을 만들었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정보 보고서에 의하면, 6월15일치 근우회 집행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박신우는 10개 조목으로 구성된 조직 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여학생부’와 ‘노동부인부’ 두 기구를 만들어 지식계급과 노동계급의 여성들을 조직화하며, 조선 각지에 근우회 지부를 설치해 여성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쌓는다는 복안이었다. 조직 계획은 선전 계획과 밀접히 연결돼 있었다. 선전 계획을 들여다보면, 전국을 4개 권역으로 나눠 순회강연대를 파견한다, 각 권역의 요충지에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한 강좌를 3주간 개설한다, 연극단을 조직해 전국을 돌게 한다, 근우회 선언문과 선전 전단을 만들어 배포한다, 기관지 <근우>를 발행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2
 
1928년 초 남편 김규열과 소련 국경을 넘다
 
박신우가 작성한 선전·조직 사업 계획 초안은 하나하나 축조 심의 대상이 됐는데, 그 결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는 근우회의 책사였다. 사실상 근우회의 활동 계획 전반을 설계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런 비범한 안목과 수완을 어디서 익혔을까. 나이 서른 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여성이 말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기획력뿐이랴, 실행력도 출중했다. 박신우는 지방 강연을 위해 빈번한 출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근우회 결성 이후만 보더라도 평남 평양(6월6일), 경기 개성(6월27일), 경기 수원(8월8일), 전북 전주(8월24일), 경성 용산(8월26일), 전남 목포(12월3일), 전남 담양(12월23일)에서 여성 문제 강연회를 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년 내내 조선 전역을 누비고 다닌 셈이다. 신문에 아직 보도되지 않은 사례도 있었을 터이므로, 실제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이 노력은 그대로 조직 확대로 귀결됐다. 창립 첫해인 1927년에 근우회 지회가 설립된 지방은 4곳(전주·목포·담양·김천)인데, 이 중 3개 지회가 상무집행위원 박신우의 출장과 관련됐다. 지부 조직의 75%가 그의 활동 결과였다.
 
근우회 첫 1년은 활기찼다. 선전·조직부 동료이던 정칠성이 회고한 것처럼 “한참 당년, 근우회의 집행위원들의 멤버는 쟁쟁”했고, 종로 네거리를 좁다고 치고 다니는 그들로 인해 유쾌하고 씩씩한 기상이 넘치던 때였다.3 박신우는 그 활기찬 첫해의 선전·조직 담당 상무집행위원이었다. 근우회의 활력이 그의 헌신과 재능에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박신우의 신상 정보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박신우란 어떤 사람인가? 더욱이 그의 행적은 이듬해 1928년부터는 어떤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박신우의 동향은 뜻밖에 1929~30년 전국학생운동 사건에 연루된 함경북도 현지의 한 사회주의자 재판기록에서 발견된다. 그에 따르면, 1928년 1월 중순 매서운 추위가 몰아칠 때였다. 함경북도 최북단의 항구도시 웅기에 박신우가 나타났다. 남편 김규열과 함께 비밀리에 국경을 넘으려 애쓰고 있었다. 부부에게는 월경을 돕는 협력자들이 있었다. 두만강 하구 일대의 지리와 교통에 밝은 현지 비밀결사 동료들이 길안내를 맡았다. 그리하여 청진에서 웅기까지 배로 움직이고, 웅기에선 중국인이 경영하는 마차 한 대를 빌려서 얼어붙은 두만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소련 연해주로 월경하는 데 성공했다.4
 
박신우의 예기치 않은 월경은 남편과 관련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내부 사정 때문이었다. 1927년 12월10일 은밀히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김규열이 모스크바 파견 대표로 선출됐다. 소련을 근거지 삼아 코민테른과 관계를 맺고 조선·북간도와 통신 연락을 주관하는 것, 이것이 그에게 부과된 새 임무였다. 박신우·김규열 부부는 임무를 수행하는 데 적합한 경력과 재능이 있었다. 아내 박신우는 러시아 교민 2세 출신이었다. 박아니시야 다닐로브나, 이것이 그의 본명이었다. 그뿐인가. 두 사람은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동기생이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3년간 코민테른이 제공하는 고등교육 과정을 이수한 사회주의 엘리트였다. 러시아어 구사 능력도 높은 수준이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소양도 깊었다. 두 사람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근거지로 하여 조선공산당의 국외 부문 사업을 맡았다.
 
박신우·김규열 부부가 체포된 소련 모스크바 마르흘렙스키 거리 18동. 이 건물 한쪽에 그들의 거처가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밀류틴스키 소로’로 개칭됐다. 임경석 제공

 

소련 당국에 간첩 혐의 체포… 55년 뒤 복권
 
1933년 11월27일 모스크바 도심 동북쪽 마르흘렙스키 거리 18동 49호에 소련 국가정치보위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그곳에 사는 박신우·김규열 부부를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사유는 ‘일본 제국주의의 스파이 혐의’였다. 이튿날 찍은 36살 박신우의 초췌한 사진에는 중범죄자로 지목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한 당혹감과 공포감이 드러나 있다.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연루자가 더 있었다. 사건 번호 ‘P-37359’에 연루된 사람들로는 윤자영, 김영만, 김중한 등도 있었다. 누구 할 것 없이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간부이거나 열성 활동가였다. 1927년 말 당이 분열된 뒤 서상파로 지목된 사람들로, 일본의 탄압을 피해 소련에 망명한 사회주의자였다. 연루자가 더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체포된 이는 1933년 5월14일 김중한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6개월 먼저 구금돼 오랫동안 취조를 받았다. 다른 연루자들의 체포 일시는 거의 같았다. 박신우·김규열 부부는 11월27일, 윤자영과 김영만은 그다음 날이었다.
 
정치보위부 취조관들은 김중한이 스파이임이 틀림없고 그와 친교를 맺은 모든 조선인 망명자도 그렇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증거는 진술뿐이었다. 김규열의 심문기록을 보면, 그에게 들씌워진 혐의는 이미 밀정으로 판명됐다고 간주하는 김중한과 연락을 주고받은 점, 코민테른의 지휘나 승인 없이 조선과 만주로 사람을 파견하거나 직접 왕래한 점 등이었다. 소련 비밀경찰의 안목으로 보면 코민테른의 지도도 받지 않은 채 일본 영토와 세력권으로 왕래하거나 통신을 주고받은 행위는 스파이 행위나 다름없었다.
 
No.P-37359 사건은 바로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망명자그룹 탄압 사건’이었다. 소련 정치보위부는 피억압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혁명가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낙인을 찍었다. 그로부터 다시 6개월 뒤 사건 관련자 가운데 김규열, 김영만, 김중한에게 총살형이 집행됐다. 1934년 5월21일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한두 등급 아래 처분을 받았다. 윤자영은 노동수용소 8년 징역형, 박신우는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5
 
너무 뒤늦게 찾아온 정의
 
노동수용소 이후 박신우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관심 갖고 주시한다면 언젠가 드러날 것이다. 이 탄압 사건의 피해자들은 뒷날 소련의 국운이 저물어가던 1989년에야 비로소 소련 정부로부터 복권됐다. 55년이 지난 뒤였다. 너무나 뒤늦게 찾아온 정의였다. 그것을 정의라고 부를 수 있 을까.

범죄의 낙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기나긴 망각의 세월이 지금도 계속된다는 점이다. 박신우·김규열 부부를 비롯해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탄압 사건 희생자들은 조선혁명에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그 무명의 헌신을 계속 잊고 살아도 좋은 것인가.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婦女世界 巡廻隊 강연>, <조선일보> 1927년 4월25일치.2. 경성 종로경찰서장, ‘근우회 집행위원회의 건’, 1927년 6월17일. ‘사상 문제에 관한 조사자료’ 2,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3. 장원아, ‘근우회와 조선여성해방통일전선’, <역사문제연구> 42, 392쪽, 2019년.
4. 조선총독부 도순사 細上玖市, ‘金河龍 신문조서’, 1930년 7월2일.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0 (동맹휴교사건 재판기록 2), 2002년.
5.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48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715쪽, 734쪽, 740쪽, 745쪽, 764쪽, 2019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공자와 레닌을 사랑한 조선청년 김규열

조선공산당 분열 상징하는 사상논쟁을 최익한과 벌이다


1933년 소련 정치보위부 경찰에게 체포된 뒤 찍은 김규열 사진. 초췌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임경석 제공


외국 유학을 마친 김규열(金圭烈)은 국내로 돌아왔다. 1926년 가을 무렵이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3년간의 정규 교육과정을 졸업한 뒤였다. 고국을 떠난 지 3년6개월 만이었다. 1890년생이므로 귀국할 때 조선 나이로 37살이었다. 어느덧 청년기가 저물고 있었다.

전조선청년당대회 대표로 모스크바 유학


모스크바 유학은 1923년 3월 열린 전조선청년당대회 덕분이었다. 3·1운동 이후 조선 청년의 의식을 사회주의 방향으로 바꾼 획기적인 집회로 손꼽히는 이 대회는, 코민테른과 연계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대표자를 파견했다. 김규열은 대표자 3명 가운데 하나였다. 대표 업무를 마친 뒤 공산대학 진학을 희망한 그는 다행히 입학 허가를 받았다. 공산대학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정치학, 유럽·동양 혁명사, 러시아공산당사, 세계노동조합운동사, 군사교육, 유물사관, 정치경제학, 레닌주의, 당조직론 등의 과목을 이수했다. 두터운 유교 고전학 소양에 더해 최첨단 사회주의 사상을 익힌 준비된 혁명가가 탄생했다.

귀국길에는 8살 연하의 젊은 아내 박아니시야가 동행했다. 연해주 동포 2세 출신인 아니시야는 공산대학에 함께 있던 학우이자 사상 동지였다. 사랑을 불태우던 두 젊은이는 혼인하기로 했고, 졸업 뒤 진로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둘은 두만강 하류 조선~중국~러시아 3국 접경지대를 몰래 넘었다. 연해주 연추에서 북간도 훈춘으로, 거기서 다시 함북 국경지대로 잠입해 들어왔다.1

김규열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회주의운동에 복귀했다. 당시 사회주의운동은 급격한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 두 차례 대규모 검거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집행부가 교체되고 있었다. 김재봉과 강달영이 이끌던 옛 집행부 구성원들은 투옥되거나 외국 망명길에 올랐고, 그를 계승한 김철수 집행부가 당의 면모를 새롭게 하던 때다. 새 집행부는 당외 사회주의 세력을 통합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에 호응해 당 밖의 사회주의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 구성원이 차례로 입당했다. 1차로 1926년 11월 140명이 입당했다. 이듬해 3월 2차로, 나머지 인사 100여 명이 조선공산당에 들어왔다. 이때 ‘서울파’인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이 해체됐고, 조선 사회주의운동 대통합이 실현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은밀히 회자되던 ‘통일공산당’이 출현했다.

1922~23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한 학생 명단 속의 김규열, 16번이다. 4번에 박아니시야도 보인다. 재학 중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 임경석 제공


반지하에 활동 범위 두고 필봉을 휘두르다


김규열은 이 흐름을 탔다. 자신을 파견했던 서울파 사람들과 보조를 같이해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활동 범위를 ‘반지하’ 상태에 두기로 결정했다. 반지하 상태란 합법 공개 영역의 사회운동단체에는 전혀 가입하지 않고 비밀 영역에서만 활동하되, 일상적인 경제·문화 영역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지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개 사회운동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는 필명 ‘김만규’를 내걸고 종횡무진 필봉을 휘둘렀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간신문과 저명한 진보 잡지 <조선지광>이 김규열의 문필 활동 무대였다. 그는 민족통일전선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기고문에서 민족통일전선단체 신간회 설립을 위해 조선의 모든 사상단체를 해체할 것을 주장했다. 신간회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전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라는 상설적인 합법 노동자정당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다. 1926년 하반기부터 1927년 상반기 조선공산당이 견지한 핵심 정책이었다. 김규열은 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날카로운 이론가였다.

아내 아니시야도 가만있지 않았다. 아니, 남편보다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박신우(朴信友)라는 조선식 이름으로 공개 사회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신우’는 러시아 이름 ‘아니시야’와 소리가 비슷해서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 무대는 근우회였다. 사회주의와 기독교계 여성이 주축으로, 여성계의 민족통일전선단체였다. 러시아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고등교육까지 이수한 박신우는 당시 조선 여성계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고학력 인텔리였다. 근우회 발기총회와 창립총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집행부로 선출됐다. 선전조직부 상무위원을 했다.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 맡는 직책이었다.

김규열에게 논적들이 생겼다. 그가 기고한 정치 논설에는 반론이 따라붙었다. 보기를 들면, 사상단체 해체를 주장한 그의 논설에 잡지 <이론투쟁> 1927년 4월호가 반론을 폈다. <이론투쟁>은 일본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펴내던 사회주의 매체다. 필명 좌목군(佐木君)을 쓰는 사람과 최익한(崔益翰)이라고 실명을 밝힌 두 논객이 김만규(김규열)의 견해를 공박했다. 이 중 최익한에게 눈길이 간다. 그는 김만규를 가리켜 ‘속학적 혼합형’의 절충주의라고 몰아세웠다. 논의 수준이 낮고 사상단체와 정당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흐릿한 견해라는 비판이었다. 한 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최익한은 1928년 1∼2월 일간신문에 기고한 연재 칼럼에서도 같은 비판을 되풀이했다.2

김규열과 최익한, 둘의 논쟁은 사적인 말다툼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진영의 내부 소용돌이를 반영했다. 당시 통일공산당 내에선 새로운 분열의 움직임이 있었다. 파벌 청산을 내세우는 신진 사회주의자들이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선공산당 내부에 만들었다. 당내 당이었다. 바윗덩이처럼 단단한 결속을 지향하는 비밀 혁명단체 내에선 허용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비밀단체는 영문 이니셜을 따서 ‘엘엘당’ 혹은 ‘엠엘당’으로 불렀다. 엠엘당은 당내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장했다. 구성원이 하나둘 당 중앙에 진출했다. 1927년 9월에는 기존 당 집행부를 해산하고 그들만으로 새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일종의 당내 쿠데타였다. 이 사건으로 통일공산당은 두 그룹, 엠엘당과 비엠엘당으로 분열됐다. 엠엘당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는 ‘서상파’라고 했다. 과거 서울파와 상하이파 공산그룹에 속했던 사람이 다수라는 뜻이었다.


김규열과 최익한, 친밀하면서도 이론적으론 대립


김규열과 최익한의 논쟁은 바로 조선공산당의 새로운 분열을 상징했다. 최익한은 엠엘당의 중요 인물이었다. 당의 분열을 야기한 9월 새 집행부의 한 사람이었다. 김규열은 엠엘당의 전횡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더 나아가 1927년 12월 서상파 사람들만으로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두 사람의 개인적 인연을 살펴보자. 둘은 1927년 시점에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이론가로서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사실은 친밀한 사이였다. 공통점도 많았다. 김규열이 나이로 7년 위였으나 그것이 둘의 우정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유교 지식인 출신의 사회주의자였다. 보기 드문 사례였다. 청소년기에 유교 고전학에 침잠한 경력을 공유했다. 전남 구례 출신인 김규열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김택주의 훈도 아래 전통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엄격한 성리학자였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농민군에 맞서 전통질서를 옹호하는 민보군을 조직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 3·1운동 때는 유학자 137명이 연서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3

김규열은 26살 되던 1915년, 아버지 지시를 받아 경남 거창군의 저명한 유학자 면우 곽종석 문하에 들어갔다.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김규열은 거기서 최익한을 처음 알게 됐다. 경북 울진 출신 최익한도 면우 문하에 들어온 젊은 유교 지식인이었다. 둘은 동문수학하는 사이였다.

그들은 교분이 두터웠다. 김규열은 1917년, 1919년 두 차례 최익한을 초청해 구례 화엄사를 유람하고 구례·남원 일대의 저명한 유학자 집을 함께 방문했다. 그뿐인가. 스승 곽종석이 파리장서 사건으로 체포돼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됐을 때도 행동을 같이했다. 대구감옥의 노스승을 수발하기 위해 대구 시내에서 함께 유숙했다. 스승이 감옥에서 병을 얻어 6월22일 출옥할 때까지 그랬던 것 같다.4

그해 여름, 두 사람은 함께 상경하기로 결심했다. 뒷날 작성한 경찰 신문기록에는 신학문을 연구하기 위해서라고 돼 있지만 목적은 다른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 다 그해 가을과 겨울에 경성에서 비밀결사에 가담한 것을 보면 말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경찰의 탄압을 받았다. 최익한은 독립군자금 모집 혐의로 체포돼,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옥중에 갇혔다. 김규열도 다르지 않았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겨울, 경성에서 비밀결사에 가담했음이 확인된다. 비밀결사는 임시정부 파견원과 은밀히 연계해, 불온 인쇄물을 제작·배포했다. 김규열은 그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받았다. 1919년 12월 체포돼, 1922년 3월 출옥했다.5

두 사람은 옥중 생활과 외국 유학을 거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점도 동일하다. 최익한은 도쿄 와세다대학을 통해, 김규열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통해 잘 준비된 혁명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일본 유학과 소련 유학의 차이는 둘의 이론적·정책적 입지에 편차를 가져왔다. 두터운 우정과 상호 이해가 있었음에도, 둘은 서로 다투는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이론적 대표자라는 상극의 자리에 서게 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오게페우 특별부 제1과장 전권대리 바산고프, ‘김규열 심문조서’ , 1933년 11월29일.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 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736쪽, 2019년.

2. 최익한, ‘사상단체해체론’ , <이론투쟁> 1927년 4월호, 32쪽(朴慶植 編, <朝鮮問題資料叢書> 第5卷, 東京, アジア問題硏究所, 1983). 최익한, ‘1927년 조선 사회운동의 빛(4)’ , <조선일보> 1928년 1월30일치.

3. 김봉곤, ‘호남 지역의 파리장서운동’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0, 24~30쪽, 2015년.

4. 송찬섭, ‘일제강점기 崔益翰(1897-?)의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활동’ , <역사학연구> 61, 2015년.

5. 경성복심법원, ‘판결, 大正9年刑控 제701호, 702호’ , 1920년 12월4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 1466~1469쪽, 1977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일제 경찰이 발견한 ‘암호 일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이 목숨 걸고 쓴 기록 ‘비서부일기’



(왼쪽부터) 평상시 강달영. 옥중의 강달영. 일본 관헌이 해독한 ‘비서부일기’ 1926년 3월17일자 기록. 임경석 제공

강달영(40)은 수요일이 되어서야 느지막이 신문사에 출근했다. 1926년 3월17일이었다. 오전 10시, 출근 시간으로는 좀 지난 때였다. 수표정 43번지, 오늘날 서울 청계2가 교차로에서 3가 방향으로 남쪽 천변에 있는 조선일보사 건물에 들어섰다. 그는 조선일보사 영업국 촉탁으로 일했다. 촉탁이란 정식 사원이 아니라 일정 기간 임시로 업무를 맡는 직책이었다.

왜 무단결근했을까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연이틀이나 결근한 뒤였다. 촉탁이라 해도 근무 규율과 내용은 정식 사원과 별 차이가 없었다. 거듭된 결근은 이채로운 일이었다. 왜 무단결근했습니까? 혹여 누가 물었다면, 적당히 둘러대야 했을 것이다. 감기 몸살에 걸렸다거나, 긴급한 가정사가 있었노라고 변명했으리라. 실은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는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다. 경찰에 체포된 전임자 김재봉 뒤를 이어 1925년 12월 하순부터 그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너무 바빠서 지난 이틀 동안 도저히 직장에 나올 수 없었다.

신문사 영업국 촉탁 직책은 경성 생활을 가능케 해주는 합법적인 신분이었다. 경찰의 의심을 사지 않고서 경성 시내를 활보하거나 지방을 오가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직업이었다. 불과 4개월 전만 해도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선일보 지국장 일을 하던 그가 어떻게 이런 직장을 얻었을까. 아마도 신문사 간부사원인 공산당원 홍덕유(45)가 힘썼을 것이다. 그는 조선일보사 지방부장이었다. 각 지방에 설립된 지국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기사와 자금의 출납, 신문지 배급 등의 업무를 관리하는 책임자였다. 지방도시에 거주하던 신임 책임비서의 경성 체류 명분을 만드는 일은 그에겐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출근도 못할 지경이었을까? 일반적으로 비밀결사의 수뇌가 무슨 일에 종사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강달영 책임비서는 달랐다. 그는 국제당(코민테른) 연락과 후임자 업무 인계를 위해 기록을 남겼다. 암호로 쓰인 ‘비서부일기’가 그것이다.1

3월12일부터 5월14일까지 약 두 달 동안의 책임비서 활동상을 적었다. 강달영은 독자적인 암호 시스템을 고안했다. 자신만이 해독할 수 있는 비밀 알고리즘이었다. 만일 불행한 사태를 당해 발각된다면 목숨을 걸고서 지킬 결심이었다. 자기 하나 입 다물면 천하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기록이었다.

책임비서가 몰입했던 업무 가운데 하나는 국제당과 교신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식민지 수도 경성 한복판에서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당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쉽사리 수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신의주를 통해 국경을 넘어서 외국으로 보냈을까. 아니면 함경북도 너머 블라디보스토크로 밀사를 보냈을까. 둘 다 아니었다. 강달영은 그보다 훨씬 더 손쉬운 통로를 갖고 있었다. 바로 경성에 있는 소련총영사관이었다. 재경성 소련총영사관은 1925년 9월 개관했다. 그해 2월25일 비준된 소련-일본 기본조약에 따라 합법적으로 설립된 외교기관이었다. 경성 하늘에 적기를 휘날리는 이 기관의 위험성에 일본 경찰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총영사관 주변에 삼엄한 감시망을 펼쳐놓았다. 그 때문인지 감시를 두려워해 그곳에 공공연히 출입하는 사람은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고 경찰 기록에 쓰여 있다.2


출근날 새벽까지 극비 문서 옮기는 데 매달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감시망을 뚫는 데 성공했다. 경성 주재 총영사관의 정보 담당자 ‘윌리’가 모스크바의 외무성과 국제공산당 앞으로 보낸 첫 번째 정보 보고서는 1925년 9월19일자로 작성됐다. 거기에는 조선공산당 중앙과 접선한 결과가 기재돼 있다.3

김재봉 책임비서 시절에 이미 총영사관 쪽과 비밀 접촉 경로를 열었다. 강달영은 전임자에게서 그 접촉 시스템을 넘겨받았을 것이다. 책임비서가 직접 움직이지는 않았다. 접촉 실무자는 박민영(25)이었다. ‘박 니키포르 알렉산드로비치’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가진 그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신진 활동가였다.

느지막이 신문사에 출근한 바로 그날, 책임비서는 박민영을 만났다. 근 일주일째 그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다. 접촉이 쉽지 않았던 까닭은 박민영이 국내에 잠입한 지 얼마 안 돼 비밀활동 거점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책임비서는 열네 종류의 문서를 건넸다. 지난 며칠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작성한 극비 문서였다. 국제당의 조선담당관들만이 읽어야 할 문서였다. 당 현황과 간부진 변동, 상하이·만주·연해주 등 국외에 설치한 당 기관의 활동, 합법 공개 영역의 사상단체와 대중운동 정책에 관한 것이 포함됐다. ‘예산안’과 ‘예산안 설명서’도 있었다. 어느 문서에나 맨 끝에는 날짜를 적고 서명을 남겼다. 1926년 3월17일자였다. 출근하던 날 첫새벽까지 이 일에 매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날 오후 강달영은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화요회란 합법 공개 영역의 사상단체 이름이고, 프락치야란 그 내부에 설치한 당원 조직을 가리켰다. 당 규약에 따르면, 합법 공개 단체에 3명 이상 당원이 있을 때 그 내부에 프락치야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며, 그 임무는 당의 정책과 영향력을 대중에게 실현하는 것이었다.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를 서둘러 소집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바로 네 개 합법단체(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를 통합해 하나의 단체로 개편하는 과제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3월5일자 당 중앙집행위원회 석상에서 결정한 사안이었다.4

화요회는 가장 영향력이 큰 합법 단체였으므로, 그 속에는 두 개의 야체이카(세포)가 설치돼 있었다. 야체이카란 당의 ‘기본회’였다. 산업 현장을 중심으로 한 장소에 3명 이상 당원이 있을 때 조직했다. 구성원은 3~7명을 두도록 했고 그 이상 당원이 있을 때는 제2, 제3의 기본회를 조직하게 했다.


쉼 없이 열린 중앙집행위 회의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에는 그 내부에 있는 두 야체이카 구성원이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워낙 긴급히 소집된 탓에 성원이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 6명밖에 출석하지 않아서 개회할 수 없었다. 참가자들은 프락치야 회의를 다음날로 연기하고, 차후에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회의를 유력 분자의 집합으로 간단히 줄인다는 건의안을 상급 기구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강달영이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에 직접 참석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사안을 그날 저녁에 열린 당중앙 비서부 모임에서 비서부 차석인 이준태(35)에게서 보고받았다. 비서부는 당중앙 직속 핵심 부서로서 자신이 직접 이끌고 있었다. 이 회의가 하루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집행부를 체계화하고 효과적으로 가동하는 일은 강달영의 핵심 관심사였다. 책임비서직을 승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기에 그로서는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과제였다. 당의 최고 집행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를 굳건히 세우는 것이 선차적이었다. 중앙집행위원 정원은 7명이었다. 강달영은 그들을 결속해 그해 2월부터 3월 초까지 7회에 걸쳐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제3∼5회 회의는 2월26일부터 사흘간 날마다 쉼 없이 계속 열렸다.

중앙집행위원회 내부에 상설집행기구를 가동하는 것도 중요했다. 비서부·조직부·선전부 3개 부서를 두었으며, 비서부는 자신이 직접 이끌었다. 이날 비서부 회의에선 화요회 프락치야의 건의를 임시로 받아들이되, 최종 결정은 중앙 조직부에서 하도록 위임했다. 이어서 민족통일전선 결성 문제도 협의했다. 충분히 논의했지만 결정은 미뤘다. 당대회에서 결정할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1년에 1회씩 열기로 약속한 당대회 개최를 준비하는 것도 강달영 중앙이 해결해야 할 현안이었다. 당대회는 5월 중순 경복궁에서 떠들썩하게 열릴 조선박람회를 이용할 예정이었다. 당대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회 의안을 짜며, 대의원을 선출하는 등의 일정이 앞에 놓여 있었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당중앙 비서부 회의는 밤 12시에 폐회됐다. 강달영의 길었던 하루는 이렇게 저물어갔다.


쓸쓸한 마감


우리가 강달영의 어느 날 동선을 이처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비서부일기’ 덕분이다. 뒷날 불행히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을 때 그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암호 기록을 자신만이 해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문경관 요시노 도조 경부보는 “뼈가 돌이 되어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아니하겠다”는 결심이 그의 몸에서 풍겼다고 회고했다. 결국 강달영은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감시의 눈을 피해 자살을 시도했다. 머리를 힘껏 철제 책상에 부딪쳤다.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 주도면밀한 감시 때문에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는 그 시도를 몇 차례 되풀이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암호 해독 기술이 그의 알고리즘을 뚫었을 때,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키겠다는 그의 결심은 무너져내렸다. 강달영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미쳐버렸다. 정신이상자가 되고 말았다. 옥중에 있을 때도 그랬고, 출옥 뒤에도 회복하지 못했다.

그렇게 쓸쓸히 지내다가 1940년 7월12일, 향년 54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진주 3·1운동의 유공자, 조선 노동운동의 지도자, 인생을 기울여 헌신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혁명가, 그의 명복을 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비서부일기’, 1926년 3월12일~5월14일,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 제1집,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1932년.

2. 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の治安狀況(昭和2年版)>, 不二出版, 1984(復刻板).

3. Билль(윌리), Дорогие товарищи(경애하는 여러 동무들),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06 л.19-24, 1925년 9월19일.

4.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회록(제6회)’, 1926년 3월5일,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 제1집,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7쪽, 1932년.






전두환에 맞선 그때 운동권은 어떻게 살았냐면

[서평] 민청련 역사의 기록 '청년들, 1980년대에 맞서다'

이준영(news)


<오마이뉴스>에 연재됐던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가 수정과 보완을 거쳐 

<청년들, 1980년대에 맞서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이에 성균관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이준영 씨가 서평을 보내왔다. [편집자말]


▲ 서울 종로구 삼각동 소재 사무실에서 현판식을 하는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민청련 부의장 ⓒ 푸른역사 제공


2019년 6월에 방영된 SBS스페셜 다큐멘터리 <요한, 씨돌, 용현>의 주인공 김용현씨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시대의 의인(義人)'이라고 불렀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는 그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1950년대 초반 생으로 1987년 6월 항쟁에 참여했으며, 그해 13대 대선 부정선거 감시 및 폭로활동에도 앞장선 민주화운동가였다. 1989년에는 천주교정의구현연합 사회정화위원회 위원으로 정연관 상병의 의문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에도 나섰다.

민주화운동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감시와 미행은 물론이고, 연행에 이은 구타·고문도 감내해야 했다. 이후 그는 권력의 감시를 피해 강원도에 은거했다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 갑자기 나타나 민간구조대로 제 몸을 사리지 않고 사고현장을 지켰다. 사태가 수습되자 홀연히 산으로 떠난 그는 봉화치 산으로 다시 돌아가 산불감시원으로, 토종벌 지킴이로 은거하며 살았다. 이후 그는 풀벌레, 들짐승과 함께 묵묵히 자신만의 생명운동을 이어가며 자연인으로 살았다.


혁명가라기보다는 순교자에 가까웠다


▲ 민청련 초대 집행위원을 자원한 1.장영달 2.박우섭 3.연성수 4.박계동 5.이범영 6.홍성엽 ⓒ 푸른역사 제공
김용현씨의 이야기는 점점 세속화·기득권화되어가는 민주화세대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세대론에 기대 민주화운동 세대를 쉽게 폄하하는 세태에도 경종을 울렸다. 권위주의와 독재로 점철된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헤쳐오는 과정에서 김용현씨와 같이 민주화운동의 현장과 우리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는 그곳에 언제나 함께했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잠시나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책 앞표지 ⓒ 푸른역사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책 <청년들, 1980년대에 맞서다>는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웠던 청년들의 이야기다. 교과서를 통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배운 세대나, 영화 <1987>과 같은 미디어를 통해 이 시대를 접한 젊은 세대들에게 1987년 6월항쟁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고 하면 흔히 캠퍼스를 중심으로 한 대학생들의 시위를 상기하기 쉽다. 아니면 정치적 민주화를 주도했던 김대중·김영삼 등 야당 정치인이나 연단에 올랐던 문익환 등의 재야지도자의 이미지가 떠오를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주인공들은 역사의 무대 뒤편에서 민주화운동의 실질적인 전술을 제시하고 조직사업 등의 실무를 집행한 주체였지만, 그 후 민주화운동의 결실을 탐하지 않았고 묵묵히 자신의 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어디에나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었던' 세대였다. 이들은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아래 민청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자 했다. 이 책은 민청련의 이름으로 쓰인 영화의 각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1987년 당시 30, 40대의 청년들로서, 197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세대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에 맞서 반유신투쟁을 전개했던 학생운동 출신의 역전의 용사들로서 민주화운동의 '허리'와 같은 세대였다. 이들은 스스로에게 혁명가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어쩌면 민청련 세대는 혁명가라기보다는 순교자에 가까웠다.

이들은 스스로를 '빵잽이'라고 부르며 우스갯소리 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들이 웃어넘기는 죄목과 공소장, 신문기사들에는 체제전복·국기문란·좌경용공과 같은 무서운 단어들이 즐비했다. 이들에게 순교자와 같은 희생정신과 낙관주의가 없었다면 전두환 정권의 무도한 국가폭력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고문과 투옥은 계속되었지만, 그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김근태 등 민청련의 초기 지도자들은 196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였다. 이들은 4.19학생혁명의 후예였으며,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통해 사회의식·민족의식을 각성한 세대였다. 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박정희 정권의 독재체제가 유신으로 치달아가던 시기에 몇 차례의 수배와 투옥을 거치며 직업적인 운동가의 길을 걷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 이래로 지하에서 형성되어온 민주화운동의 네트워크를 가동해 광범한 청년운동가 집단을 묶어세우고자 했다. 이들의 뒤를 받쳐준 중추 세대는 197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학생운동 출신의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서울 유수의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경험하고 투옥과 수배를 거치며 단련된 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전쟁 후 베이비부머세대로서 대체로 농촌 출신이었으며 여러 명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촉망받는 구성원이었다. 이들의 대학진학은 다른 형제·자매와 가족구성원들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명문대 학생이 된 이들은 선택된 자식들이었고, 집안을 일으킬 기대주였다.

이러한 성장배경을 지닌 이들은 강한 엘리트의식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지닌 또래집단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사회의 모순적이고 억압적인 현실에 더욱 커다란 분노를 품고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운동의 길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현실에 대한 저항감은 입신양명이라는 개인적 욕망을 초월하는, 자기희생적인 사회적 결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1980년대 청년이 되어서도 민주화운동을 지속하며 고민과 결단 끝에 자기희생을 실천한 세대였다.

내 이웃의 현대사이자 민청련 세대의 무용담


▲ 1987년 대통련선거 유세장에서 민청련이 제작한 책자 <광주는 지속되고 있다>와 <민중의 소리>를 나눠주고 있는 민청련 회원들 ⓒ 푸른역사 제공


민청련이 창립된 1983년 시점에서의 조직구도는 40대가 대표직을 맡고, 30대들이 기층조직을 이루는 양상이었다. 민청련은 1980년대 내내 명확한 정치노선을 제시하고, 선도적인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한국 민주화운동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녹화사업·군 의문사 진상규명 투쟁, 1985년 2.12총선 대응 활동, 5월 광주항쟁 진상규명 투쟁, 김근태 의장 고문 폭로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6월 항쟁과 1987년 대통령 선거 등 굵직한 정치적 이슈의 중심에 민청련이 있었다. 민주화운동세력 내부의 CNP논쟁, AB논쟁, 1987년 대선 전술논쟁 등 이론·노선 투쟁을 주도한 것도 이들이었다.

이 책은 민청련이라는 조직과 그 구성원들이 써 내려간 회고담이기는 하지만,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커다란 흐름을 이해하는 데 손색이 없는 교과서적인 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문장이 매우 간결하고, 내용의 전개가 명쾌하다. 운동의 당사자들이 직접 쓴 스스로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다양한 조직들과 복잡한 이론·노선투쟁도 아주 쉽게 해설하고 있다.

한국민주화운동을 더 공부해보고 싶은 청소년들이나, 대학에서 한국현대사 강의를 수강한 경험이 있는 청년세대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간행된 <한국민주화운동사> 제3권을 통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큰 흐름을 일별한 뒤 곧바로 이 책을 통해 주요 사건사와 인물사, 그리고 논쟁사를 보완하는 독서를 시도해보기를 권유한다. 1980년대를 직접 겪은 세대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기성세대들 역시 나의 이야기이거나 내 이웃의 현대사로서 접근한다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민청련 세대의 '무용담'이기도 하다. 왕년의 무용담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택'(tactics, 전술)일텐데, 역시 이 책에서도 독자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는 것은 정치노선이나 이론투쟁과 같은 딱딱한 내용이 아니라 기발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투쟁전술들이다.

기억에 남는 선전전술을 몇 가지만 이야기해보자. 요즘과 같은 SNS 시대에는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로 수십 만 명의 독자에게 가 닿는 선전이 가능하지만, 이 당시에는 기껏해야 수백 장의 유인물을 배포하기 위해 검거까지도 불사해야 했다. 검거를 피하면서 효과적으로 유인물을 배포하기 위한 '택'들이 고안됐다.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야간에 주택가를 돌면서 우편함에 일일이 유인물을 집어넣는 방식이었다. 낮에 거리에서 배포하는 방법으로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가 정류장에 서면 천정 환기구를 열고 바깥에 유인물을 올려놓고 하차하는 방식도 사용되었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유인물이 바람에 날려 시내가 유인물로 뒤덮였던 것이다.

이러한 활동이 거듭되며 신기술이 개발되기도 했다. 세로로 긴 플래카드를 유인물과 함께 두루마리처럼 말아 접은 다음 비닐 끈으로 묶고 그 매듭에 담뱃불을 묶어 놓는다. 이것을 시내의 빌딩에 가지고 올라가 창문 밖에 두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건물을 빠져나온다. 담배가 천천히 타들어가 비닐 끈이 끊어지며 플래카드가 펼쳐지고 그 안의 유인물이 흩뿌려진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다시 생각해보기


▲ 1985년 민청련 탄압에 맞서 고문수사를 규탄하는 농성을 하는 민청련 간부들의 부인들 ⓒ 푸른역사 제공


그러나 민청련의 역사가 이런 소소한 무용담으로만 기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민청련이라는 이름 뒤에는 남영동·치안본부·안기부·취조실·고문과 같은 독재의 유령들이 항상 쫓아다녔다. 책에는 민청련 지도자 김근태와 이을호 등 고문 피해자들과 수배자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곳곳에 그려진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는 야수적인 고문과 반인권적인 탄압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가족애와 동료애, 그리고 인간의 위대한 신념에 대한 이야기들이 독자들을 위로해주고 있다.

이러한 고난의 가시밭길을 지나 민청련은 1987년 6월 항쟁의 산파역을 도맡을 수 있었다. 6월 항쟁의 역사는 대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이나, 국본 출범의 모태가 된 재야의 민통련, 야당의 민추위 등을 줄기로 하여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야와 야당 조직의 '허리'를 이룬 사람들 중 대다수가 민청련 출신의 30~40대 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의 사상적 뿌리와 조직적 활동의 모체는 민청련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민청련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복원한 이 책의 성과는 1987년 6월항쟁의 역사를 풍부화하는 성과이며, 나아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이론사·조직사·인물사를 한 걸음 나아가게 만든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이 1988년 이후 1992년 민청련이 해소되기까지의 시기를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집필 초기 기획된 민청련 회원 자녀들의 이야기 '민청련 가족사'가 추후 과제로 미뤄졌다는 점 또한 아쉬움을 더한다.

민청련의 고난은 곧 가족들의 고난이기도 했으며, 자아가 형성되던 어린 자녀들에게 부모의 수배·고문·투옥은 그들의 우주를 뒤흔든 사건이었을 것이다. 부디 이 책이 독자들의 좋은 평가를 받아 이 두 가지 과제 즉, 민청련을 중심으로 한 1990년대 민주화운동사의 서술과 민주화운동 가족사의 집필이라는 후속작업으로까지 꼭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처음 화두로 던졌던 김용현씨의 이야기로 돌아가 글을 마치고자 한다. 김용현씨의 사연이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그가 뇌경색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과거의 인연들에게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울림을 준 것은 김용현씨가 감독과 나눈 필답이었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은 감독이 휠체어에 의탁한 그에게 '왜 그런 삶을 살았느냐?'는 질문을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어눌해진 말 때문에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대신해야 했던 그의 대답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젊었던 민청련 회원들 역시 김용현씨처럼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을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많은 동료들이 온갖 고초를 당해 건강을 잃거나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많은 민청련 회원들은 여전히 이름없는 우리의 이웃으로 지하철 옆 자리에, 아파트 주민대표 회의장에, 동네 생활협동조합에, 그리고 투표소 선거 대기줄의 맨 앞자리와 촛불집회의 맨 뒷자리에 우리들과 함께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이제는 거의 반백이 된 초로의 아저씨·아줌마들이 촛불집회가 끝난 뒷풀이 자리에서 함께 촛불을 든 자식뻘 되는 이 시대 청년들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는 무용담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민청련이 먼저 간 동지들에 바치는 조사(弔詞)이자, 스스로의 역사를 정리한 집단적 자서전임과 동시에 후대에게 전하는 비망록이다.

민주화운동 세대에 대한 날선 감정들이 유령처럼 사회를 배회하는 요즘, 땀과 눈물로 써 내려간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찬찬히 되짚어 보며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






임경석의 역사극장

사진 한장 안남은 조선 사회주의운동사 지도자

조선공산당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안광천은 혁명가인가 배신자인가


조선공산당의 역대 책임비서. (왼쪽부터)초대 김재봉, 제2대 강달영, 제3대 김철수와 제4대 안광천의 펜글씨 필적. 고등교육을 이수한 지식인답게 세련된 필치를 보인다. 그의 인물 사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임경석 제공

안광천(安光泉)은 비밀결사의 최고 지도자였다. 일제강점기의 가장 강력한 항일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다. 1926년 12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재임 기간이 10개월인 점이 눈에 띈다. 짧아 보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고등경찰과 밀정의 삼엄한 감시망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하단체의 수뇌로서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선임자들의 재임 기간에 비하면 오히려 긴 편이었다.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은 8개월, 제2대 책임비서 강달영은 5개월, 제3대 책임비서 김철수는 5개월간 재임했다.

제4대 안광천 책임비서의 당내 입지는 강력하고 안정돼 있었다. 당권 승계 과정이 적법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내 최고 의결기구에서 선출됐다. 1926년 12월6일 경성에서 비밀리에 열린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서 그의 책임비서 취임이 결정됐다. 창당대회에서 선출된 제1대 김재봉 책임비서에 뒤이어 두 번째였다. 제2대, 제3대는 달랐다. 그들은 일제 탄압으로 책임비서 자리가 비게 된 급박한 조건에서 보선(補選)으로 취임했다. 보선이란 당규약에 명시된 중앙위원회의 권한으로서, 중앙위원 가운데 결원이 생겼을 때 당대회 결정을 거치지 않고 자체 결의로 후임자를 충원하는 제도였다. 강달영과 김철수는 선임자가 경찰에 체포된 뒤 잔존 중앙위원들의 합의에 따라 책임비서에 올랐다. 그에 비하면 안광천의 취임 과정은 훨씬 더 적법할 뿐만 아니라 당당했다.


사회주의 진영의 통합을 이루다


안광천은 문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항일 비밀결사의 요직에 오르기 전부터 언론 지면에 그의 이름이 빈번히 오르내렸다. 일본에 유학 중일 때는 물론이고 국내에 귀국한 이후에도 신문과 잡지 지면에 곧잘 그의 글이 실렸다.

그는 이름 높은 논객이었다. 기고 활동을 통해 사회운동의 진로와 정책에 관해 다채로운 담론을 생산해냈다. 그의 문필 능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보기를 들어 조선어 종합잡지 <동광>의 흥미로운 한 앙케트 기사를 보자. 잡지사는 경성에서 간행되던 4대 조선어 신문사(<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보>)의 언론인 44명에게 물었다. 여러 신문을 통폐합해 단일한 거대 신문사를 세운다고 가정하면, 과연 어떤 인물들이 그 신문사를 이끌어가는 적임자가 될 것인가? 놀랍게도 안광천이 편집국장 직위에 올랐다. 다수의 언론인이 안광천을 가리켜 거대 통합 신문사의 지면 배치와 논조를 좌우하는 넘버 3위의 요직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꼽았다.1

정연한 이론 능력과 뛰어난 문장이 그를 공산당 책임비서 물망에 오르게 한 요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안광천은 신진 세대의 대표자로 간주됐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서울파와 화요파 사이에 전개됐던 이전 시기 사회주의운동 내부 대립에서 자유로운 위치에 서 있었다. 새로운 간부 인선에는 전임 책임비서 김철수의 의중이 실려 있었다. 김철수는 당대회를 열기에 앞서 옛 중앙위원들과 함께 신임 중앙위원회 윤곽을 미리 협의했다.2


특히 책임비서 인선이 중요했다. 김철수의 판단에 따르면, 안광천은 재능이 뛰어난데다 분파투쟁에 가담한 경력이 없으므로 각파를 망라한 통일된 공산당을 이끌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제 안광천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책임비서 취임 이후 조직, 대중, 정책 각 영역에서 눈에 띄는 약진이 있었다. 첫째, 양분된 국내 사회주의 진영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전임 김철수 책임비서 시기인 1926년 11월 당외 서울파 공산그룹의 구성원 140명이 입당한 데 뒤이어, 안광천 취임 이후인 1927년 3월 나머지 서울파 구성원 100여 명이 최종적으로 공산당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던 두 공산그룹 화요파와 서울파가 조선공산당 이름 아래 통합하게 됐다. 대단결을 바라는 사회주의자들의 숙원이 해결된 셈이었다.


당 사조직에 가담


둘째, 합법 공개 영역의 대중운동에 대한 장악력이 급격히 높아졌다. 보기를 들면 1927년 5월 전국 923개 가맹단체를 망라하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가 열렸을 때 그 진로를 안광천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의사대로 좌우할 수 있었다. 공산당 집행부는 그 협의회 설립을 저지하기로 결정했고, 대회 석상에서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정책을 관철할 수 있었다.

셋째, 민족통일전선 기관인 신간회가 설립된 것도 안광천 책임비서 재임 시기의 업적이다. 1927년 2월 신간회와 민흥회 두 갈래로 나뉘어 추진된 민족통일전선 설립 운동이 결국 신간회라는 이름 아래 단일화될 수 있었던 것도 비합법 영역의 사회주의운동이 통합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안광천의 공로이자 통일된 조선공산당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립물로 전화하지 않는 사물은 없는가보다. 달도 차면 기운다. 1927년 9월 즈음, 안광천의 리더십이 위기에 빠졌다. 위기의 진원지는 둘이었다. 하나는 당내 조직 문제고, 다른 하나는 정책 문제였다. 조직 문제란 공산당 내부에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이라는 비밀단체가 은밀히 만들어져 1년 이상 암약해왔음이 동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사건을 말한다. 일부 간부가 ‘당 중 당’을 만든 것이다. 이 단체는 ‘엘(L)단’ ‘엘엘(LL)단’ ‘엠엘(ML)단’ ‘엠엘당’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당원들 사이에 쉬쉬하면서 널리 회자됐다.

당 중 당을 몰래 만드는 것은 당의 규범에 반하는 범죄행위였다. 바윗덩이같이 강고한 단결을 지향하는 전위당 조직론에 배치되는 행위였다. 이전에도 분파투쟁은 있었지만 그것은 조직체를 달리하는 공산그룹 사이의 분쟁이었다. 당 내부에 은밀히 분파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충격적인 것은 책임비서 안광천이 그 일원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당원이 책임비서가 당의 규범을 해치고 사조직을 운용했음을 알게 됐다. 책임비서가 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내 비밀분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당원들은 배신과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안광천 등 중앙위원 연서명. 임경석 제공


‘친일파·자치파’와 협동 사업 주창

정책 문제도 리더십 위기를 낳은 또 하나의 진원이었다. 당내에서만이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그의 명성이 실추되는 사건이 터졌다. 영남친목회 사건이다. 영남친목회란 경성에 거주하는 경상남북도 출신자들의 친목단체였다. 이 단체가 창립된 1927년 9월 즈음에는 동향 출신자들의 친목단체가 경성에 여럿 존재했다. 호남 출신자들의 친목단체인 호남동우회, 서북 5도 출신자들이 결성한 오성구락부, 일부 영남 출신자들이 따로 만든 상우회 등이 있었다. 지방에서 태어나 경성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출신지 동일성을 식별 기준으로 하여 이 단체들을 조직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인간집단이 참여했다. 출신지가 같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입회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관리, 부유한 지주와 상공업자도 있고 노동운동 참가자와 사회주의 문필가도 포함돼 있었다.

문제는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안광천이 영남친목회에 가담했다는 사실이었다. 단지 참여만 했을 뿐 아니라 깊숙이 주도적으로 개입했음이 드러났다. 그는 단체 설립의 이유와 논리를 적은 ‘영남친목회 취지서’를 작성했다.3

그 단체의 이론가 역할을 자담한 것이다. 취지서에는 눈길을 끄는 곳이 있었다. “용기를 고취하여 전 민족적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 분투”하겠노라고 천명했다. ‘전 민족적 사업’이란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을 뜻할 수도 있고, 일본제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자치제를 실시하거나, 제국의회나 지방의회의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끔 참정권을 획득하자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총독부 관료, 대지주들과 같이하는 ‘전 민족적 사업’이란 적어도 조선 독립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향 각지에서 영남친목회 반대운동이 터져나왔다. ‘영남친목회반대책강구회’라는 단체가 결성되고, ‘영남친목회 반대 성명서’가 발표됐다. 머지않아 운동의 외연이 확장됐다. 단지 영남친목회 한 단체만이 아니라 그와 성격을 같이하는 모든 지방열단체를 반대하는 사회적 캠페인으로 확장됐다. 그것을 ‘지방열단체 반대운동’이라고 불렀다. 지방열단체는 ‘반동단체’로, 그에 참여한 사회운동자들은 ‘반동분자’로 간주됐다. 반대운동은 광범한 호응을 받았다. 전국 규모의 3대 대중단체로 촉망받던 노총(조선노동총동맹), 농총(조선농민총동맹), 청총(조선청년총동맹)이 지방열단체를 반대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그뿐인가. 전 조선의 ‘민족유일당’으로 존중받는 신간회도 지방열단체 배척을 결의했다. 막중한 무게를 갖는 결정이었다. 여론의 향배는 이미 결정된 거나 진배없었다.

조선공산당 내부 동향도 심각했다. 안광천의 책임을 묻는 당내 흐름이 나타났다. 책임비서가 ‘친일파·자치파’와 협동 사업을 주창하는 것은 심각한 과오였다. 누가 혁명의 적이고 누가 벗인지를 가르는, 혁명운동의 근본 문제를 혼란하게 하는 행위였다. 안광천을 책임비서 직책에서 면직시킴과 아울러 당에서 제명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됐다. 이 때문에 조선공산당은 다시 둘로 나뉘었다. 안광천을 옹호하는 그룹과 그의 면직을 요구하는 당원들로 분열됐다. 전자에는 엠엘당 그룹이 섰고, 후자에는 엠엘당을 비난하는 그룹이 섰다.

결국 1927년 10월 안광천은 책임비서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영남친목회에 참여하여 사회적 분란을 야기한 책임을 진 셈이다. 조선공산당이 출범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의 최고 지도자가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책임비서 직위에서 물러나는 현상 말이다. 그러나 엠엘당 그룹이 반대파의 요구를 백퍼센트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책임비서 직위만 벗을 뿐이지 중앙위원 자격은 그대로 유지됐다. 당내 갈등은 계속됐다.


사진 한 장 안 남아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는 조선 사회주의운동사의 한 전성기였다. 그의 재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운동 진영이 하나로 통일될 수 있었고, 그의 사임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이 새롭게 분열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안광천은 조선공산당 성쇠의 바로미터였다. 또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는 전환기이기도 했다. 이전의 내부 다양성이 화요파와 서울파의 갈등으로 대표된 데 반해, 안광천 이후에는 엠엘파와 비엠엘파의 대립으로 표출됐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래저래 안광천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 속 인물이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용모를 전하는 사진 한 장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용모에 관한 묘사가 남아 있다. “머리를 길러 뒤로 젖혔으나 지나치게 길지는 않았다. 얼굴은 빼빼 말라 골격이 훤히 드러났으며, 좌우 뺨은 두드러지고 턱은 뾰족했다. 과묵한 편이고, 말을 하고 나면 해죽해죽 웃는 습관이 있어서, 다정스럽고 친절한 기분이 느껴졌다. 키가 호리호리하고 약질이었다. 체격만을 놓고 보면 투사 같은 느낌은 없었다.”4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新聞戰線總動員, ‘大合同日報’의 幹部 公選’, <동광> 29호, 1931.12, 63쪽.

2. <김철수 외 20인 조서(2)> 419~420쪽,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3>, 청계연구소, 1986, 197쪽.

3. ‘영남친목회 취지서’ 1927.9. (김철수, <福本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중요 재료> 1928.4.1, 4~5쪽 수록),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5 л.43~45об.

4. ‘名士諸氏 맛나기 前 생각과 맛난 後의 印像’, <별건곤> 11호, 1928.2, 68쪽.




임경석의 역사극장

레닌에게 면박당했다는 소문의 정체

1930년대 사회주의 잡지 <이러타>에서 비난당한 이동휘 사회주의 내부 불화 과정에서 이득 얻은 세력은 누구일까


1921년 11월28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 접견실에서 만난 왼쪽부터 레닌, 박진순(캐리커처), 이동휘. 임경석 제공

잡지 <이러타> 1931년 8월호에는 이동휘(1873~1935)에 관한 흥미롭지만 자못 기이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이동휘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회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봉변당했다는 얘기다. 조선 실정에 관한 무지로 레닌에게서 책망받았다는 거였다.

회견 석상에서 레닌이 물었다. 현재 조선에 부설된 철도 길이가 얼마인지, 또 해안선이 몇 마일이며, 최근 1년간 산물이 얼마인지를 질의했다. 이동휘는 쩔쩔맸다. 거듭되는 질문에 한 번도 제대로 답을 못했다. 레닌이 책망하듯 말했다. “동무여, 그렇게 조선 실정을 모르고 어떻게 조선 일을 하시렵니까?”

과연 사실일까? 일국의 혁명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그처럼 면박을 주었다는 게, 아무리 세계를 뒤흔든 러시아혁명의 지도자 레닌이라 할지라도 있을 법한 일인지 의심스럽다. <이러타>는 1931년 6월 창간해 <비판> <시대공론> <신계단> <대중> 등과 더불어 여론에 영향력을 미치던 합법 사회주의 잡지였다.1)


유학생 출신 2030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비난


이동휘 에피소드의 집필자는 필명 ‘지양’(止揚)을 썼다. 그는 ‘레닌과 우리 선구 이동휘군’이라는 기사를 써서 이동휘에 관한 무지와 책망의 서사를 소개했다. 혁명운동 노선배를 ‘군’이라고 일컫는 것을 보면 일본식 풍습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일본 유학생 출신 젊은이였을 것이다. <이러타> 관련자들은 사회주의 실천 운동과는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비밀운동을 이끌던 이재유는 <이러타> 같은 합법 사회주의 잡지를 ‘프롤레타리아트혁명운동과 유리된 유동분자들의 무책임한 언론’으로 지목했다. 이로 미뤄보면 <이러타> 관련자들은 비밀결사와 연계하지 않은 채 합법 영역에서만 활동하던, 유학생 출신 20~30대 사회주의 지식인 그룹인 것으로 판단된다.

아니나 다를까, <이러타> 기사는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당시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종합지 <삼천리> 1931년 11월호 지면에 ‘시베리아의 회상, 잡지 <이러타> 소론에 대하여’라는 비판 기사가 떴다. 이 글을 쓴 필명 ‘창해거사’는 러시아 조선인 사회에 오랫동안 체류했음을 밝히고, 자신이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음을 피력했다. 이어서 그는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앞뒤 맥락을 잘 모르는 일개 서생의 무책임한 발언에 분노가 솟구친다고 통박했다. 그는 레닌과 이동휘의 회견에 관해서 자신이 아는 내용을 소개한 뒤, 필명 ‘지양’을 향해 혁명운동의 오랜 선배에게 존경을 표할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동휘에게 들씌운 불명예는 그 뒤로도 계속 사람들 입에 회자됐다. 레닌 회견 때 무지로 인해 면박당했다는 소문은 수그러들지 않고 꾸준히 유포됐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1905~38)도 그 일화를 들었다고 한다. 1937년 중국 연안에서 미국의 진보적 언론인 님 웨일스에게 조선혁명 역사를 술회하던 김산은 이렇게 말했다.


“1918년에 이동휘가 맨 처음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갔을 당시 그는 이론이라고는 전혀 갖고 있지 못했으며, 오로지 대중운동과 소련에 대한 믿음밖에 없었다. 조선에- 공장, 철도, 농촌에- 얼마만큼의 노동자가 있느냐고 레닌이 물었을 때, 그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은 하나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레닌은 웃으면서 지노비예프를 불러서 말했다. ‘우리는 여기 있는 이동휘 동지를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이동휘 동지는 조선 독립에 대한 뜨거운 피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방법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동양의 자연적인 상태입니다. 그들은 혁명적 기지를 전혀 갖지 못하고 다만 테러리즘과 군사행동의 배경만을 갖고 있을 따름입니다.’”2)

김산이 노혁명가 이동휘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려던 것은 아니리라. 그는 아마 들은 대로 가감 없이 얘기를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산의 진술 내용은 근거 없이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 회견 연도도 틀렸고, 배석자 정보도 근거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후대로 내려갈수록 이동휘 불명예 서사는 덧붙여지고 윤색까지 됐음을 알 수 있다.


이동휘 불명예 서사를 퍼뜨린 잡지 <이러타> 창간호(1931년 6월호) 속표지. 임경석 제공

한인사회당 vs 고려공산당

악의적인 풍문은 왜 오랫동안 지속됐을까? 앞뒤 맥락을 잘 아는 이동휘 쪽 인사들이 백방으로 나서서 변호했는데도 말이다. 혹시 그 풍문이 사실이기 때문일까. 사실의 힘이 그처럼 오랫동안 소문에 생명력을 줬던 게 아닐까. 또 다른 추정도 가능하다. 이동휘 불명예 서사로 이득을 얻는 세력이 있다면, 게다가 그 세력이 복수였다면 그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의문에 답하려면 이동휘와 레닌의 회견이 어떤 맥락에서 언제 어떻게 이뤄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동휘는 한국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든 인물이다. 그가 45살이던 1918년 4월, 망명지이던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란 이름의 혁명정당을 결성해,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에 올랐다. 식민지 조선의 해방 투쟁에 헌신하기 위해 망명길에 오른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망명길에 함께 나섰던 비밀결사 신민회의 젊은 동료들이 행보를 같이했다. 이 단체에는 재러동포 출신의 저명한 여성 혁명가 김알렉산드라도 합류했다. 그녀는 하바롭스크를 임시 수도로 하는 극동소비에트 정부의 외교부 장관이자, 러시아 볼셰비키 지방당의 임원이었다.

한인사회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적백 내전에 휩싸인 러시아의 혼란한 정세 속에 볼셰비키와 보조를 같이했다.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창설되자, 지체 없이 당대표단 3명(박진순·박애·이한영)을 파견한 데서도 이 당의 성격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당대표단은 한인사회당을 국제당 지부로 가입시키고, 러시아 레닌 정부에서 거액 지원을 약속받는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이동휘 자신이 직접 국제당에 대표로 나간 것은 3년 뒤였다. 1921년이었다. 국제당 조직 원칙에 따라 고려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 이동휘는 당면한 당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했다. ‘위기’란 무엇을 말하는가? 국제당 동아시아담당관들과의 불화가 그것이다. 국제당의 동방부와 극동비서부의 요직에 취임한 보리스 슈먀츠키, 그리고리 보이틴스키 등이 이동휘 그룹을 배제하고, 이르쿠츠크에 기반을 둔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을 내세워 조선혁명을 주도하려고 나섰다. 이에 호응한 조선인 그룹이 있었다. 이른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다.


이동휘 불명예 서사를 퍼뜨린 <아리랑> 1941년 영문판 초판 표지. 임경석 제공

민족해방혁명 vs 사회주의혁명

당시에는 조선혁명의 성격에 관해 민족해방혁명이냐, 사회주의혁명이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심각하게 벌어졌다. 이동휘 그룹은 전자를 지지했고, 이르쿠츠크파 세력은 러시아혁명과 마찬가지로 조선혁명도 사회주의혁명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양쪽 대립은 심각했다. 화해할 수 없는 적대성마저 나타났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동휘가 직접 모스크바로 간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21년 11월28일 이동휘 일행은 레닌과 만났다. 고려공산당 대표단 자격으로 러시아공산당과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의 지도자인 레닌과 공식 면담을 했다. 약속 시간은 오후 5시, 장소는 크렘린 내부 접견실이었다. 회견에 초대된 조선 대표단은 4명이었다. 고려공산당 대표단 이동휘·박진순·홍도 3명과 러시아어 통역 김성우(러시아 이름 ‘김아파나시’)였다. 박진순과 김성우는 러시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재러동포 2세였다.

예정된 회견 시간은 30분이었다. 통역 김성우의 기록에 따르면, 접견실로 들어서는 레닌은 활달했다. 일제히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조선 대표단에 가깝게 다가와 한 사람씩 악수했다. 그의 첫 발언은 “고려공산당과 만나니 참으로 기쁩니다”였다. 그는 안락의자에 앉으면서 손님 일행에게도 앉으라고 권했다. 이동휘가 조선어로 먼저 말을 꺼냈다.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혁명운동의 여러 문제를 솔직하게 묻겠다고 했고, 레닌도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양쪽 사이에 조선의 정치·경제 상황, 일제의 식민정책, 고려공산당의 내부 상황, 3·1혁명 운동의 특성, 조선혁명 투쟁 조건 등의 얘기가 오갔다. 레닌은 특히 조선에 부설된 철도선과 산업화에 관심을 표명했다. 조선인들은 책상 앞에 놓인 지도를 가리키면서 레닌의 질의에 답했다.

담화 중에 비서관이 들어왔다. 회견 시간이 다 지났다고 통보하기 위해서였다. 레닌은 여유 시간이 25분 있으니 좀더 얘기해도 괜찮다고 했다. 회견 시간은 1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회견 말미에 양쪽은 작별 인사를 했다. 레닌은 대표단장 이동휘의 손을 굳게 쥐고 오랫동안 석별의 정을 표했다.3) 그때 레닌은 51살, 이동휘는 48살이었다.


이동휘·레닌 회견기를 남긴 러시아어 통역 김성우(김아파나시). 임경석 제공


레닌의 지지가 불러온 악의적 풍문

이동휘는 레닌과의 담화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뒷날 국내 신문에 기고한 회상기에서 말하기를, 그날 레닌은 다섯 개 요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첫째, 테러 정책을 사용하지 말 것. 둘째, 일본 노동계급과 연대할 것. 셋째, 대중에 대한 선전과 조직에 노력할 것. 넷째,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철도가 큰 역할을 했음에 주목할 것 등이었다. 끝으로 가장 깊은 감화를 줬던 것은 조선혁명의 성격에 관한 견해였다. 레닌은 조선혁명의 첫 계단이 민족혁명운동이라고 지적했다.4) 레닌은 초창기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혁명 성격에 대한 논쟁에서 이동휘 그룹의 견해를 지지했던 것이다.

이동휘에게 들씌운 불명예가 어떤 맥락 속에 형성됐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것은 이동휘 그룹이 성취한 조선 사회주의운동 주도권을 자파의 수중으로 옮기기를 바랐던 경쟁자들, 국제당 동아시아담당관들과 이르쿠츠크파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였다. 이동휘에 대한 악의적 풍문은 그들에게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줬다. 그 풍문이 지속해서 유포된 배경에는 바로 이런 사정이 가로놓여 있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1930년대 초 사회주의 잡지 <이러타>의 성격과 지향’, 전명혁, <역사연구> 34, 2018.
2. <아리랑>, 님 웨일스 지음, 조우화 옮김, 동녘, (개정4판), 96~97쪽, 1992.
3. ‘레닌과의 회견기’, <태평양의 별>, 김아파나시, 1929년 1월22일. <재소 한인의 항일투쟁과 수난사>, 김블라지미르 지음, 조영환 옮김, 국학자료원, 177~180쪽, 1997.
4. ‘동아일보를 통하여 사랑하는 내지 동포에게 (5)’, 이동휘, <동아일보> 1925년 1월22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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