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피살 51년 만에 발견된 빨치산 비밀 아지트의 주인공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으로 빨치산 이끌다
1954년 피살된 박영발의 청년 시절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을 떠날 즈음에 촬영한 36살 박영발. 임경석 제공

 

2005년 2월, 지리산 깊은 산중에서 박영발(朴榮發) 비트(비밀 아지트)가 발견됐다. 반야봉 중허리 함박골의 험한 산비탈에서였다. 세월이 흘러 백발이 성성한 빨치산 참가 생존자들이 찾아낸 이 천연동굴에는 놀랍게도 옛 자취가 남아 있었다. 무전 통신에 사용됐을 전선줄, 흰색 주사용 앰풀, 깨진 갈색 유리병, 수십 개의 폐배터리, 낡은 검정 고무신짝 등이 뒹굴고 있었다.1

 

주인공이 사망한 지 51년이 지났는데도 생전에 그의 손길이 닿았을 유품은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뿐인가. 반경 10m 내에는 3층으로 쌓아올린 돌 위에 흙을 얹어 평평하게 다진 구들장이 있었고 근처 바위틈에서 인쇄용 등사기와 롤러, 잉크통이 발견됐다. 잉크통 속에는 마르지 않은 등사용 검정 잉크가 가득 차 있었다.2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으로서 1954년 3월19일 피살될 때까지 최후 국면의 빨치산을 이끌던 박영발의 조난 장소 풍경이었다.

 

1932년 9월2일 체포 당일 동대문경찰서에서 작성한 피의자 박영발 신문조서 첫 장. 임경석 제공

 

“몰락해가는 부농층 봉건 가정”의 산골 소년

 

“1913년 6월12일 경북 봉화군 내성면 화천리에서 출생하였다. 곳은 산골 농촌이며, 집은 몰락해가는 부농층 봉건 가정이었다. …학교 입학은 거주하는 지리적 조건과 가정의 빈궁(어머니의 사정)과 불화로 인하여 불가능하였다.”3

 

박영발은 뒷날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길에 오를 때 작성한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산골 농촌’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줄기가 나뉘는 산악지대에서 태어났다. ‘봉화군 내성면 화천리 176번지’, 이것이 그의 본적지이자 출생지 주소였다. 오늘날 도로명 주소로 표기하면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사계당길 17’에 해당한다.

 

자기 집을 ‘부농층 봉건 가정’이라고 표현한 점이 눈길을 끈다. ‘가정의 빈궁과 불화’로 인해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뒷부분 언급과 모순된다. 하지만 집안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문장 다 실제와 같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부친은 1년에 40석 정도를 수확하는 부유한 농촌 거주자였다.4 중소지주였던 것 같다. 1910~20년대 농가 호당 평균 수확량이 5∼6석이었음을 고려하면,5 부친의 생활수준은 농촌 평균보다 7∼8배 더 유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부친은 두 집 살림을 차렸다. 자신과 동갑내기인 아내가 35살이 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8년 연하의 젊은 여성을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아마 ‘첩’이었을 것이다. 과연 새로 맞은 부인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첫아들을 낳은 데 이어 몇 년 뒤 둘째 아들도 출산했다. “첩 살림은 밑 빠진 독에 물 길어 붓기”라는 속담도 있듯이, 부친은 둘째 부인의 살림에만 돈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정실 부인이 36살에 뒤늦게 아들 박영발을 낳았음에도 부친의 편애 습성은 바뀌지 않았다. 박영발이 ‘가정의 빈궁과 불화’라는 말에 괄호를 달아서 ‘어머니의 사정’이라고 덧붙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모스크바 유학 중 박영발이 직접 쓴 <자서전>. 임경석 제공

 

‘왕복 4시간’ 학교 대신 한문 서당에서 학업

 

박영발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어머니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학교에 보낼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이유는 ‘지리적 조건’이었다. 그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초등 교육기관은 군청소재지인 내성면 포저리의 내성보통학교였다. 거리가 8.9㎞에 달했다. 성인 걸음으로 2시간15분이 걸렸다. 학교에 가려면 날마다 왕복 4시간30분을 걸어야 했다.

 

그 대신에 박영발은 전통 방식의 한문 교육을 받았다. 7살 되던 1919년부터 15살 되던 1927년까지 동네에 개설된 한문 서당에 통학했다. 학업이 중단된 적도 있었다. 집안의 농사를 돕기 위해서였다. 중단된 기간을 제외하면 그의 한문 수학 기간은 1919년 6월∼1922년 3월, 1925년 4월∼1927년 12월, 도합 5년5개월이다.

 

“1930년 7월에 동리에서 박학택, 황윤경 등 13인 동지들과 함께 독서회 조직에 참가하였다. 그것의 발전으로 1931년 5월에는 봉화적색농민조합 조직에 참가하였다. … 1932년 2월에 서울로 왔다. 그때 정길성 동지의 지도 밑에서 경성적색노조준비회라는 지하조직의 연락 공작을 맡았다.”

 

박영발이 처음 비밀결사운동에 참가한 것은 18살 때였다. 1930년 7월, 봉화군의 청년 13인이 은밀하게 만든 독서회를 통해서였다. 명단이 다 판명된 것은 아니지만 그중 지도적 역할을 맡은 이는 황윤경(黃潤慶)과 박항택(朴恒澤)이었다. 연령으로 보면 각각 7년, 4년 연상의 선배들이었다. 특히 황윤경은 1920년대 중반부터 이미 그 지역 사회주의운동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다. 프로운동자동맹, 봉화청년동맹, 경북청년연맹 집행위원, <조선일보> 봉화지국 기자, 신간회 봉화지회 조사부장 등이 그가 맡은 직책이었다. 독서회 참가자 가운데 박영발은 나이로 치면 막내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독서회란 18∼25살에 해당하는 봉화군 청년층이 비밀리에 조직한 사회주의 연구 단체였다.

 

독서회를 만든 그해에는 혁명적 고양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대중 투쟁의 급격한 분출이 있었다. 반일시위와 동맹파업 등 전 조선의 학생 봉기가 고조된 게 바로 그해 봄이었다. 농민들도 움직였다. 해마다 평균 200건 안팎이던 소작쟁의가 700건 안팎으로 급증한 해가 1930~31년이다. 농민폭동도 자주 일어났다. 특히 함경도 일대에서는 마치 해방구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농민운동이 활발했다.6

 

박영발 비밀 아지트 출입구. 통일뉴스 김규종

 

경북 봉화군 청년들의 비밀 독서회

 

독서회 참가자들은 그 시기 혁명적 정세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들은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봉화적색농민조합을 조직했다. 1931년 5월의 일이었다. 적색농민조합이란 모스크바에 소재하는 농민조합인터내셔널(크레스틴테른) 계열의 혁명적 농민단체를 가리키는 말인데, 지주와 부농을 배제하고 빈농·중농을 위주로 하는 농민단체였다. 당연히 비밀결사였다.

 

박영발도 적색농민조합에 참여했다. 그는 조직과 선전 분야를 담당했다. 각 마을 단위로 8개 농민야학을 설립했고, 그것을 중심으로 적색노조의 마을별 세포조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사는 마을, 내성면 화천리에도 야학교를 세웠다. 농민 30여 명이 모여들었는데, 주로 조선어와 산수를 가르치고 계급의식 고취에 힘썼다. 특히 양반과 상민 사이 차별적인 계급적 언어를 폐지하고 평등한 언어를 사용하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존댓말과 반말을 구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하도록 이끌었다. 파격적인 시도였다. 오래된 언어 규범을 바꾸는 일이라 대도시에서도 어려웠을 터인데, 하물며 유교적 전통 규범이 강력하게 잔존한 경상북도 농촌지대에서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농민야학, 반상 차별 반대, 소작료 인하 투쟁…

 

그해 12월에는 소작쟁의까지 이끌었다. 소작료 인하가 쟁점이었다. 당시 통용되던 소작료율 50%를 40%로 낮추려고 했다. 4·6제를 내건 것이다. 그에 더해 고용 농민인 머슴의 품삯 인상도 요구했다. 쟁의는 한때 성공했다. 그러나 마을 중소지주들은 대부분 그의 친척이었다. 그는 문중의 배척을 받았다. 친척 어른들에게 경제적으로 손해를 끼치는 것도 문제거니와, 양반·상민 사이 엄연한 위계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비밀결사의 존재가 노출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박영발은 고향을 떠나야 했다.

 

1932년 2월 경성으로 갔다. 봉화군에 인접한 이웃 고을 영주 출신인 정길성(丁吉成)의 인도를 받았다. 정길성은 7년 연상으로, 영주청년동맹, 신간회 영주지회에 참여한 이래 경성과 영주를 오가면서 적색노동조합과 사회주의운동에 줄곧 몸담은 신뢰할 만한 고향 선배였다. 박영발은 상경과 동시에 비밀결사 경성적색노동조합준비회에 가담했다.

 

“1932년 9월2일 종연방적(鐘淵紡績) 앞에서 살포된 격문 사건과 국제청년데이 경계수색을 겸하여 동대문 밖 신설리 방면에 출장하여 밀행하던 중, 신설리 132번지 앞에서 일견 노동자풍의 조선인 남자를 목격하고 거동이 수상한 자로 인정하여 현장에서 취조한바….” 7

 

동대문경찰서 순사부장 김승종은 상부에 올리는 ‘사건 인지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사건의 첫 단서를 얻은 경위에 관해서였다. 신설리 132번지 앞에서 잠복경계근무 중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전철 신설동역 오거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전날 밤 근처 방적공장에서 격문이 살포됐고 이틀 뒤에는 국제청년데이가 도래하기 때문에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현장에서 거동이 수상해 뵈는 노동자풍의 조선인 남자를 포착했다. 아마 잠복근무 중인 사복경찰들을 발견하고서 쭈뼛거렸던 것 같다. 경찰은 그를 붙잡았다. 그게 뜻밖에도 ‘좌익노동조합조직준비회 사건’의 발단이 됐다고 한다.

 

연락원 임무 수행 중 경찰에 붙잡혀

 

박영발은 레포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레포란 연락원을 뜻했다. 그의 품에는 인텔리 출신의 저명한 국어학자이자 언론인인 대산(袋山) 홍기문(洪起文)에게 전하는 정길성의 비밀 편지가 감춰져 있었다. 전차를 타고서 동대문경찰서로 연행 중이었다. 박영발은 틈을 봐서 편지를 입속에 집어넣었다. 씹어 삼킬 작정이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발각되고 말았다. 강제로 입을 벌려야 했고, 결국 유일한 증거물품이 압수됐다. 단지 의심스러웠을 뿐인 그의 혐의는 지극히 엄중한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9월2일에 시작된 수사는 10월18일까지 계속됐다. 혐의자 백수십 명이 경찰에 피검됐고, 삼엄한 취조 끝에 비밀결사 관련자 29명이 검찰로 송치됐다. 이 기간에 박영발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문을 겪어야 했다. 그의 표현을 따른다면 “고문에 의하여 발병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박영발은 제 발로 걸어 나오지 못했다. 함께 피검됐던 노동운동 동료 정재철에게 업힌 채로 경찰서 문을 나와야 했다. 그는 근육 위축으로 인한 앉은뱅이가 됐다. 필사적인 재활 노력 끝에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4년이 지난 1936년 5월부터였다. (다음 연재에 계속)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김경대 기자, ‘전후 빨치산 비트 최초 발굴’, <시민의 소리> 2005. 2.19. http://www.siminsori.com/news(검색일 2021. 4.27.)

2. 이현정 기자, ‘살아남은 빨치산들, ‘박영발 비트’ 찾다’, <통일뉴스> 2005. 5.10., https://www.tongilnews.com/news(검색일 2021. 4.27.)

3. 박창일(본명 박영발), <자서전>, 1948. 8.9.,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2-14об

4. 경성동대문경찰서, ‘피의자신문조서(朴榮發)’, 4쪽, 소화 7년(1932) 9월2일.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85-국편-0259-0006

5. 김재훈, ‘1925-1931년 미가 하락과 부채불황’, <한국경제연구> 15, 233쪽, 2005

6. 이준식, <농촌사회변동과 농민운동>, 민영사, 465쪽, 1993

7. 京城東大門警察署 巡査部長 金昇鍾, ‘좌익노동조합조직준비회사건 인지보고’, 1~2쪽, 1932년 9월2일,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85-국편-0259-0005

 

 

임경석의 역사극장

혁명의 별을 새긴 강철 관에 잠들다

고려인 사회주의 혁명가 채그리고리의 첫 고국 방문, 경찰에 발각됐으나 비밀결사와 동료는 지켜내

 

채그리고리의 주검을 세브란스병원에 항구적으로 보존할 목적으로 제작한 철제관.

비밀결사 동료 7명이 둘러싸고 있다. 임경석 제공

 

국경을 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현 단둥시)에서 평북 신의주로 입국하는 길은 실정법을 어긴 사람들에게는 위험했다. 비밀활동을 하는 혁명가에게는 더욱 그랬다. 조밀한 감시망이 겹겹이 깔려 있었다. 신의주경찰서는 ‘중범자’가 많기로 전국에서 첫손을 꼽는 관서였다. 1928년 한 해 검거한 ‘범죄’ 총수는 3109건이고 그중 중범에 해당하는 건 711건이다. 정치·사상범 사건은 131건에 이르렀다.1 한 달에 평균 10건이 넘었다. 국경을 넘으려던 독립군과 사회주의자가 얼마나 자주 그들에게 발각됐는지 보여준다.

 

1928년 1월11일, 채그리고리는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37살의 러시아 태생 조선인, 즉 고려인이었다. 본명은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채였고, 조선식 이름은 채성룡(蔡成龍)이었다. 국내에 무사히 안착한다면 박준호라는 가명을 쓸 예정이었다. 2주 전에 중국 베이징을 떠나, 여러 준비를 마치고 입국을 결행하는 순간이었다. 함께 입국하기로 약속한 동료는 세 사람이었다. 다만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따로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졸인 가슴 내려놓은 그 순간

 

국경을 통과하는 열차가 정거장에 도착하면 경찰관, 헌병, 세무관리 세 종류 관헌들이 객차마다 올라탔다. 소설가 심훈은 그 양상을, “국경을 지키는 정사복 경관, 육혈포를 걸어멘 헌병이며, 세관의 관리들은 커다란 벌레를 뜯어먹으려고 달려드는 주린 개미 떼처럼 플랫폼에 지쳐 늘어진 객차의 마디마디로 다투어 기어올랐다”2고 썼다. 승객들은 시렁에 올려놓았던 짐짝과 가방을 검사받기 쉽게끔 내려놓고, 속을 열어 보여야 했다.

 

채그리고리는 안동역과 신의주역을 무사히 통과했다. 기차는 경성을 향해 남쪽으로 달렸다. 졸이던 가슴을 막 진정하던 차였으리라. 하지만 그는 ‘신의주 다음 정거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신의주경찰서 소속 경찰대였다. 아마 남시역이거나 차련관역이었을 것이다. 의심받을 만한 빌미가 있었던 것 같다. 조선 사람인데도 조선말이 서툴다거나, 입국 목적을 자연스럽게 답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그는 국경의 경계망을 통과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취조가 시작됐다. 누군지, 무슨 목적으로 조선으로 들어오려 하는지, 연루자가 있는지, 있다면 누군지, 집요한 신문이 계속됐다. 사상범 의혹이 있어 조사 과정은 혹독했다. 전국 각지에서 연루자로 의심되는 이들도 삼엄한 취조를 받았다. 보기를 들면 경성 숭삼동(명륜동 3가)에 사는 남정석은 “이 사건에 연락관계가 있다 하여 지난 1월16일 엄중한 가택수색을 당하고 신의주서로 잡혀갔는”데, 22일 무사히 방면돼 귀경했다고 한다.3 하지만 경찰의 의도와 달리 사건을 확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런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채그리고리는 구금 20일 만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단독범이었다.

 

치안 당국 상층부는 못 미더워했다. 사건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첩하라고 지시했다. 1인 단독 사건으로 간주하기에는 피의자 신원이 너무 이채롭고 거물급이었기 때문이다. 채그리고리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사회주의운동의 한 씨앗이 발아할 때부터 거기에 참가한 고참이었다. 모스크바에서 공산대학을 졸업했고, 러시아공산당 연해주당 고려부 비서, 연해주당 정치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그뿐인가. 문필 능력이 탁월해 이론가라는 지목을 받았다. 총독부는 정예 관리를 투입해 밑뿌리부터 재조사할 필요를 느꼈다.

 

그해 2월4일 채그리고리는 포승줄에 묶인 채 경성으로 호송됐다. 밤 8시40분 경성역에 도착했을 때다. 역두에는 경찰 경계망을 피해 다수의 동료가 몰려들었다. 그의 얼굴을 잠시나마 보려는 의도였다. 웅성거리는 출영객들의 소란이 호송 중인 피고인에게 위안과 격려를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30살의 채그리고리. 임경석 제공

 

1928년 2월4일 포승줄에 묶인 채 경성으로 이송 중인 채그리고리(왼쪽). 임경석 제공

 

그리운 산천에 대한 호기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채그리고리는 예심을 받아야 했다. 예심이란 피고인의 공판 회부 여부를 심리하기 위해 도입한 일제강점기 형사소송법상 절차인데, 주로 사상범에게 적용된 악명 높은 제도였다. 이 제도 아래서 피고인의 인신을 무기한 구류할 수 있었다. 채그리고리는 언제 끝날 줄 모르는 조사를 받았다. 조사는 2월 초부터 5월 말까지 약 4개월 동안 계속됐다.

 

결국 ‘예심 종결서’가 1928년 5월28일자로 채택됐다. 총독부 예심판사는 공판에 회부해야 할 피고인의 ‘범죄행위’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1926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신철·정운해와 모임을 열고 조선의 적화를 위해 국내에 비밀리에 들어와 선전에 노력하기로 협의한 점. 둘째, 그해 10월부터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조선 내지의 사회주의자 마명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선 내부의 정세를 탐지한 점. 셋째, 비밀리에 국내에 잠입하다가 체포된 점이었다.4

 

채그리고리의 진술 전략이 일정한 효과를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관되게 비밀결사에 가담한 혐의를 부인했다. 예심 종결서에 동료 이름이 몇몇 거론되지만, 단체 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적 관계로 간주했다. 또 다른 진술 전략은 합법 운동론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신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에 들어와서는 합법 사상단체에 참여해 경찰 당국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운동하려 했노라고 주장했다. 재외국 조선인의 입장도 적극 내세웠다. 자신은 러시아 동포 3세로서 조선에 대한 향수가 있다고 말했다. 고국인데 일찍이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으므로, 이번 기회에 그리운 산천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채그리고리는 이런 논리를 경찰, 검찰, 예심 취조 과정에서 일관되게 견지했다. 공판 법정에서도 동일한 진술 전략을 택했다. 결국 채그리고리는 단독범으로 기소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징역형을 피하진 못했으나 비밀결사의 존재와 그에 속한 동료들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중형의 위험에서도 벗어났다.

 

조선 사회주의 좌경화의 선도자

 

채그리고리는 비주류 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였다. 1926년 3월 결정서에서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지부 승인이 이뤄진 뒤, 당외에 남아 있던 두 공산그룹이 독자 노선을 표방하면서 통합을 결의했다. 북풍파와 노동당(일명 국민의회파) 공산그룹이다. 이들은 중앙위원회 소재지를 베이징에 두었다. 채그리고리는 이 당외 통합그룹의 중앙위원회 멤버였다. 아마 책임비서였던 것 같다.

 

그는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좌경화를 선도했다. 1927년 초겨울, 북·노 통합그룹의 중앙간부들은 일련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국내외 운동 정세를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였다. 국제적으로는 중국 국공 합작의 파탄, 코민테른 중국 정책의 좌선회, 중국 공산당 내 급진적인 취추바이(구추백) 노선 정립 등에 주목했다.

 

국내 운동 정세도 심상치 않았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이 분열해 이른바 서상파와 엠엘파가 분립하게 된 것이다. 북·노 통합그룹은 조선 사회주의운동을 바로잡을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를 위해 베이징의 중앙위원회 소재지를 국내로 옮기기로 했다. 채그리고리를 비롯해 정운해, 신철, 마명 등이 국내로 입국하려 꾀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신정책을 발표하여 노선 전환을 도모했다. 1928년 1월21일 경성청년회 명의로 ‘모든 수정파들의 기회주의적 연합전선을 공박함’이라는 긴 성명서를 발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에 호응해 경북 상주청년동맹, 함남 영흥청년동맹, 경기도 안성청년회 등을 비롯한 전국 도처에서 급진적인 노선 전환을 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30년 4월19일 채그리고리가 사망했다. 경성역 맞은편 세브란스병원 제5호 입원실에서 치료받던 중이었다. 사인은 폐병이었다. 3월29일 형기를 마치고 감옥 문을 나서던 때부터 그는 심하게 앓고 있었다. 자유를 잃은 지 2년2개월 남짓, 건강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도대체 유치장과 감옥에서 어떤 처우를 받았기에 유명을 달리할 만큼 심각한 건강 손상이 있었을까.

 

숨을 거두기 하루 전, 채그리고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속에 담아둔 얘기를 꺼냈다.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이 죽으면 유해를 의학상 연구재료로 사용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사후라 할지라도 신체를 훼손하는 일은 불효가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선각자다운 풍모가 여실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또 하나는 동지들을 만나고 싶으니 내일 오실 수 있는 분은 모두 모여달라는 부탁이었다. 국경에서 체포되지만 않았다면 의기투합해 혁명사업을 도모했을 동지들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의 두 번째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밤새 병세가 급속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병실이 마치 감옥 같다는 느낌이 든다, 포근한 조선식 온돌방에 눕고 싶다.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유해를 연구재료로 쓰라”

 

러시아 연해주에는 아내와 함께 자녀 7남매가 있었다. 그중 맏딸은 20살 성년이었고, 막내아들은 아직 7살이라 했다. 고국에는 한 사람의 친척도 없었다. 채그리고리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준비했다.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결합해 만든 신간회 본부가 장의위원회를 맡기로 했다.

 

4월22일 그의 영결식이 있는 날, 폭우가 쏟아졌다. 퍼붓는 비를 무릅쓰고 300명이 운집한 속에 영결식이 진행됐다. 일본 경찰은 채그리고리의 장례식이 무사히 치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약력을 소개하는 도중, 임석 경관은 발언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집회 중지를 명령했다.

 

채그리고리의 유해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해부학 실습에 사용됐다. 의전 학생들의 학습 교재로 그의 인체 표본이 오래 활용됐다고 한다. 고인의 뜻이 제대로 실현됐다. 사후 1주기가 됐을 때 그의 동지들이 세브란스병원에서 이채로운 추도회를 열었다. 강철로 관을 만들어 그의 유해를 안치하기로 했다. 병원 내에 항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몇백 년이라도 보존될 것을 생각하니 매우 기쁘다고, 제작에 참여한 동료 신철은 토로했다.

 

당시 사진이 남아 있다. 등신대(사람 크기)의 철제관이 세워졌고, 청년 7명이 이를 둘러싸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채그리고리와 비밀결사를 함께했던 동료들이라고 생각된다. 철제관 머리쪽에 혁명을 상징하는 별이 양각돼 있다.5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국경의 1년간 검거된 범죄 수’, <매일신보> 1928년 12월23일치.

2. 심훈, ‘동방의 애인(1)’, <조선일보> 1930년 10월29일치.

3. ‘체포된 蔡某(채모)는 공산대학 교수’, <동아일보> 1928년 1월25일치.

4. ‘예심 종결서’, 경성지방법원, 쇼와 3년 5월28일.

5. ‘月餘(월여) 두고 鐵棺(철관) 제작, 동지 유골을 안치’, <조선일보> 1931년 4월19일치.

 

 


임경석의 역사극장

총상 입은 뒤 스스로 권총을 겨눴다

빨치산 박종근, 경북 지역 산으로 올라가 유격대를 이끌었으나
군사 경험도 전투력도 장비도 부족… 눈 덮인 겨울산에서 최후를

 

박종근의 20대 초반 시절. 아내 이숙의가 평생 품에 간직한 빛바랜 사진이다. <이 여자, 이숙의> (삼인, 2007)

 

제1346호(‘빨치산 아버지가 남긴 사진 4장’)에서 박종근의 삶을 소개했다. 지리산이나 신불산 지역에 비해 경북 쪽 양상이 덜 알려졌기 때문인지 그의 빨치산 활동이 어떠했는지를 묻는 분들이 있다. 미흡하나마 그에 답할 필요를 느낀다. 미국 국립기록관의 북한 노획 문서함 속에는 빨치산 시절 박종근이 작성한 몇몇 기록이 있다. 그것을 이용하면 국지적이나마 그의 빨치산 활동의 개략을 그려볼 수 있다.

 

실천과 이론 면에서 준비된 간부

 

러시아 유학에서 되돌아온 박종근에게 주어진 보직은 경북도당 위원장이었다. 29살이었다. 젊은 나이였지만 경력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17살부터 반일운동에 참여했으니 혁명운동 경력이 벌써 13년째였다. 사상범으로 투옥된 기간만도 3년7개월이나 됐다. 대중운동 현장 경험도 갖추고 있었다. 농촌지대인 경북 의성군에서 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군당 선전부장·조직부장을 했다. 해방 직후 합법적 활동이 일시 가능했던 조건 속에 대중을 진두에서 지휘한 경험도 있었다. 중앙당 간부 활동도 했다. 서울 시내에서 비합법 조건 아래 당 중앙 선전부 소속 중간간부로 1년간 일했다. 그뿐이랴. 외국 유학도 다녀왔다. 모스크바 조선당학교 2년간의 유학에서 견문을 넓혔고,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도 배웠다. 실천과 이론, 어느 방면에서 보더라도 잘 준비된 간부였다.

 

발령 시기는 1950년 7월 하순이었다. 평시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였다. 박종근은 즉시 임지로 향했다. 짐작하건대, 8월 초 경북 경계를 넘어 진군하는 북한군을 따라 임지에 도착했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이 생각난다. 그도 박종근과 함께 모스크바 조선당학교를 수료한 간부였다. 그는 북한군 제6사단이 7월23일 전남 광주를 점령한 뒤, 8월 초 임지에 도착했다.1

 

박종근은 그보다는 약간 늦게 경북에 입성했을 것이다. 소백산맥을 경계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전투가 치열했기 때문이다. 충북 영동과 경북 상주·김천 일대의 방어전은 7월22일부터 30일까지 계속됐고, 예천·안동 일대의 방어전은 7월30일부터 8월1일까지 벌어졌다. 북한군이 경북 북부 지방을 장악한 것은 7월 말~8월 초였다. 북한군은 7월25일 영동을 접수한 뒤, 7월31일에는 상주를 점령했다. 예천·안동 방면도 비슷했다. 영주에는 7월23일, 예천에는 7월30일, 안동에는 8월1일 각각 북한군이 입성했다.

 

박종근의 임무는 여느 도당위원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도당 집행부를 편제하고 행정단위별로 군당·면당 조직을 구축했다. 군·면 인민위원회 등의 정권 기관도 설립했다. 하지만 범위에 제한이 있었다. 북한군 점령지가 경북 북부 지역에 한정됐기 때문이다. 경북의 중부 지역은 격전지였다. 낙동강 방어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동해안 영덕부터 의성군 낙정리까지 동서 방향으로 180㎞, 낙정리에서 마산까지 낙동강 물길을 따라 남북 방향 160㎞ 전선이 한국전쟁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후 방어선이었다.

 

북한군의 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일거에 뒤집혔다. 남한 깊숙이 진공했던 북한군은 서둘러 퇴각해야만 했다. 그해 9월25일 당 중앙에서 특별 지시가 하달됐다. 모든 당 조직을 비합법 지하당 기구로 개편하라는 내용이었다.

 

제3유격지대장이던 박종근의 친필 서명. 임경석 제공

 

미군에 쌀 한 톨도 남기지 말 것

 

경북도당 집행부는 산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일월산이었다. 해발고도 1219m에 이르는 이 산은 영양군의 청기면과 일월면, 수비면에 걸쳐 있었다. 소백산을 제외하면 도내에서 가장 고도가 높고, 일찍이 비정규 유격전의 무대로 활용됐다. 대한제국 말기, 신돌석 의병부대가 활동한 곳도 바로 여기였다. 신돌석을 가리켜 ‘일월산의 호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시기 박종근의 주된 임무는 ‘당 단체들을 지하로 옮기는 것’과 ‘유격대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알려 한다면, 그해 10월11일자로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이 방송에서 하달한 지시 사항을 상기하면 좋으리라. 당 조직을 비합법적 지하당으로 전환·개편할 것, 산간지대에 식량과 시설·설비를 비축·은닉하고 미군에는 쌀 한 톨도 넘기지 말 것, 야산대 경험자와 유격전 참여가 가능한 당원을 모두 입산시켜 유격대를 편성할 것 등의 내용이었다.2

 

경북도당은 일월산에 오래 체류하지는 않았다. 한 달쯤 뒤인 10월31일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멈춘 곳은 ‘남대리’였다.3 경북 영주군 부석면 남대리가 도당 집행부의 두 번째 산악 근거지가 됐다. 경북 영주와 강원도 영월을 가르는 소백산맥 능선부의 깊은 산골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산악의 해발고도는 1천m가 넘었다. 선달산 1236m, 어래산 1064m 등이었다. 왜 옮겼을까? 아마 안전과 연락 때문일 것이다. 토벌대의 압박을 모면하고 당 중앙과 연락하는 데 좀더 유리한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든 경북 행정구역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을 읽을 수 있다.

 

남대리 지역으로 거점을 옮긴 뒤에도 당 중앙과의 연락이 쉽지 않았다. 박종근은 “오랫동안 중앙과 연결을 가지지 못한 처지”인 탓에, 정세 분석도 사업 진행도 큰 곤란을 느꼈다고 술회했다.4 귀머거리 같았다고 표현했다. 급변하는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다행히 1951년 1월13일 곤란이 타개됐다. 중국 지원군 참전 이후 재반격에 나선 북한군 제2군단 부대들과 남대리 지구에서 조우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1월20일에는 총사령관의 명령서도 접수할 수 있었다. 제3유격지대를 편성해, 곧 있을 북한군과 중국 지원군의 총공격에 호응하는 제2전선을 구축하라는 내용이었다. 지대장으로는 박종근이 임명됐다. 경북도당 위원장과 제3지대 사령관을 겸하게 됐음을 의미했다.

 

즉각 제3지대 편성 사업에 착수했다. 고충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군사활동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거야 젊음과 각오, 헌신을 통해 극복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도당 당원들은 무장부대를 편성하거나 이끌 만한 간부 역량이 적었다. 무기와 장비가 부족한 것도 해결해야 했다. 박종근은 도당 집행부를 이끌고 강원도 방면으로 북상했다. 자기 지역을 벗어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제3지대를 속히 편성하려면 북한군 정규군의 인적·물적 원조를 받아야 했다. 제2군단 본부가 주둔한 횡성군 둔내면으로 향했다. 둔내면은 횡성군 동쪽 끝에 있는, 해발고도 500m의 고원지대였다. 산과 언덕이 둘러쌌다. 주봉인 태기산은 해발 1261m였다.

 

미국 국립기록관의 빨치산 노획 수첩에 그려진, 제3유격지대 부대별 분산 투쟁 배치도. 임경석 제공

 

젊은 20대 대원은 35%뿐

 

가장 큰 난관은 시간 부족이었다. 임박한 총공격은 대전과 안동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들었다.5 속히 적군의 등 뒤로 움직여 후방 교란 작전을 해야 했다. 1951년 2월14일 박종근은 제3유격지대를 이끌고 서둘러 둔내면을 출발했다. 4월20일까지 보현산(1124m) 지역으로 진출해, 그곳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경북 영천군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에 걸친 이 산은 대구에 인접한 요충지였다.

 

출발할 때 병력 총수는 356명이었다. 각자 소총 1자루에 탄환 40발이 지급됐고, 수류탄을 평균 1.3개씩 소지했다. 공용화기는 경기관총 2정뿐이었다. 장비도 빈약했고 대원들의 전투력도 문제였다. 70%가 경북 출신인데 후퇴할 때 입산한 사람들이었다. 대중 사업과 군중 정치운동에 종사한 당원으로서 군사 경험이 없는 동무들이었다. 연령도 30살 이상이 60%를 점했고, 젊은 20대는 35%에 지나지 않았다. 박종근은 유격대 대원이 전투 성원으로는 적당치 못한 일꾼이 대부분이었다고 평했다.6 그가 기대한 수준은 훈련된 군사 간부가 지휘하는 1천 명의 병력이었다. 당 중앙과 유기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조건 아래 이 정도 병력을 갖는다면, 보현산 지구를 근거지로 제2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났다. 4월20일이 됐을 때, 제3지대는 출범 당시 계획과는 사뭇 다른 상황에 처했다. 가장 큰 곤란은 국군과 북한군이 대치하는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숫자와 장비, 기동력이 월등히 우세한 정규군이 밀집한 지역을 뚫고서 이동하는 것은 많은 희생을 초래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전투와 쉴 새 없는 행군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 결과 전사, 낙오, 실종 등으로 대원 257명이 줄었다. 그 대신 낙오된 북한군 편입, 경북 관내 지하당원 편입 등으로 121명이 보충됐다. 전체 대원 수는 220명 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중 환자가 43명이었다. 사령관인 박종근조차 재귀열에 걸려서 3월 말부터 5월 초까지 한 달 이상 병고에 신음해야 했다. 장비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대원들이 소지한 탄환 수는 1인당 7~8발이 고작이고, 수류탄을 가진 자는 거의 없었다. 공용화기는 탄환을 전부 소모했기에 무용지물이었다.

 

제2전선 구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최전선 형성이 애초의 예상과 달라졌다. 대전~안동 라인은 언감생심이었다. 1951년 5월 접어들면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제3지대는 국군 토벌대의 포위 속에 갇힌 꼴이 됐다.

 

박종근 사령관은 결심했다. 애초 계획을 폐기하고 ‘부대별 분산 투쟁’ 방침을 세웠다. 역량 보존에 적합한 방침이었다. 대원을 네 부대로 나눴다. 자신이 이끄는 본대는 일월산에 거점을 두고, 다른 세 부대는 경북 관내의 다른 산악지대에 분산 배치했다. 지휘관의 성을 따서 도부대·백부대·강부대라고 부르는 세 예하 부대는 각각 청량산 지구, 금장산-명동산-주왕산 지구, 태백산-소백산 지구에 주둔했다.

 

대규모 토벌 작전의 시련을 넘어서지 못했다

 

박종근이 이끄는 제3지대는 악조건 속에서도 10개월을 더 버텼다. 그러나 1951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전개된 대규모 토벌 작전의 시련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작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1952년 2월 어느 날, 박종근 제3지대 사령관은 총상을 입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이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동료들은 들것을 만들어서 사령관을 싣고 다녔다. 그러나 눈 덮인 한겨울 산중에서 쉴 새 없이 추격해오는 토벌대를 피해 다니면서 부상자를 돌보는 일은 불가능했다. 결국 박종근은 권총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길을 택했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에 있는 포도산(748m)의 한 기슭, 1952년 2월27일의 일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정관호, <전남유격투쟁사>, 선인, 35쪽, 2008년.

2. 김광운, ‘한국전쟁기 북한의 게릴라전 조직과 활동’, <군사> 48, 104쪽, 2003년.

3. 박종근 조선로동당경상북도당부 위원장, ‘조선로동당경상북도당부 결정서: 도당단체들의 강화를 위한 당면과업’, 3쪽, 1951년 5월2일.

4. 박종근 경북도당부, ‘조선로동당중앙당본부 허가이 동지 앞’, 2쪽, 1951년 5월3일.

5. 이선아, ‘한국전쟁기 강원·경북 지역 빨치산 활동 연구노트’, <역사연구> 23, 198쪽, 2012년.

6. 박종근 제3유격지대 지대장, ‘제3유격지대 2개월간의 사업보고서(1951년 2월14일부터 1951년 4월20일까지)’, 1951년 5월3일.

 

 

 

 


임경석의 역사극장

빨치산 아버지가 남긴 사진 4장

경북 의성 출신 자생적 사회주의 운동가 박종근, 한국전쟁에서 전사하다

 

 

아내 이숙의가 평생 품에 간직한 빛바랜 사진,

박종근의 20대 초반 시절. <이 여자, 이숙의> (삼인, 2007)

 

빨치산의 딸 ‘박소은’은 평생 아버지 품에 안긴 적이 없었다. 세상에 태어난 1948년 4월21일, 아버지는 집에 있지 않았다. 집은커녕 38도선 이남에도 없었다. 엄마 뱃속에 회임 중일 때, 그러니까 미처 태어나기도 전인 1947년 12월에 아버지는 38도선 이북으로 올라갔다. 결혼한 지 6개월 만이었다. 야속하게도 왜 그때 가족을 버리고 떠났을까? 탄압을 피하려고 그랬겠거니 짐작하지만, 그 이유를 몰랐고 그 이후로도 똑바로 알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 박종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월남했으나, 집에는 들르지도 않은 채 산으로 올라갔다. 경북도당 위원장이자 제3유격지대 사령관으로서 산악지대의 빨치산 활동을 이끌기 위해서였다. 결국 그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1952년 3월엔가 ‘태백산 총사령관 박종근 사살’이라는 대서특필된 신문 기사를 통해 아버지의 최후를 알았다. 딸의 나이 네 살 때였다. 요컨대 소은이는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아빠의 체취를 느끼지 못했고, 전적으로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만 자라야 했다.

 

1941년 3월14일, 20살 때 ‘독립청년회’ 사건으로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 중 촬영한 ‘범죄자’ 식별용 사진. <빨치산자료집 1>(한림대, 1996)

 

증명사진으로 처음 만난 20대 때 아버지

 

어머니는 76살 평생 빛바랜 증명사진 한 장을 소중히 간직했다. 딸이 아버지 존재를 어렴풋하나마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었다. 거기에는 한 청년이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고 있다. 머리를 짧게 깎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다. 하지만 혈육이라는 실감이 들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딸 소은이 미처 본 적이 없는, 좀더 젊었을 적의 아버지 사진이 있다. 소화16년(1941년) 3월14일,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찍은 것이다. 형무소에 수감된 범죄자를 식별하기 위해 강제로 찍은 것이었다.1 소년형무소는 만 18살 미만 범죄자를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사진 속 인물은 검정 학생복을 입고 있다. 소년형무소 수감자들의 평상시 복장이었을 것이다. 가슴에는 식별용 이름표가 붙어 있다. 한자로 ‘신정종근(新井宗根)’이라고 쓰여 있다. ‘아라이 소네’라고 읽는다. 일본식 창씨명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모든 이가 강제로 일본식 씨명으로 바꿔 불리던 때였다.

 

도대체 왜 소년형무소에 갇혔을까? 일본 형무소 당국은 모든 수감자의 개인별 카드를 작성했는데, 거기에 그의 죄명이 적혀 있다. ‘치안유지법과 육군형법 위반’이었다. 치안유지법이란 천황제 국가체제의 변혁과 사유재산제도 반대를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거나 그에 가입한 자를 처벌하는 악법이었다. 반체제 비밀결사를 탄압하기 위한 법이었다. 주로 사회주의운동과 독립운동 참가자를 체포·투옥하는 데 쓰였다. 육군형법은 1941년쯤 민간인에게도 곧잘 적용됐는데, 이른바 군사 스파이 혐의자를 처벌하는 용도였다. 산업시설과 공장 등을 염탐해, 가상 적국인 소련에 넘길 우려가 있다는 명목을 씌우곤 했다. 요컨대 수감자인 소년 박종근은 사상범이었던 것이다.

 

뒷날 박종근이 작성한 <이력서>와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고향인 경북 의성군 안계면의 보통학교를 6년간 마친 뒤, 부산과 황해도 신천 등지를 전전하며 상점 점원과 정미소 급사 등으로 일했다. 그때 일터에서 만난 몇몇 종업원에게서 사상적 감화를 받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피억압 민족의 일원이라는 정치적 각성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 시절의 박종근.

1948년 27살 때 찍은 사진이다. 독립기념관

 

소년 사상범 박종근의 비밀결사 활동

 

행동에 처음 나선 것은 열일곱 살 되던 1938년이었다. 그해 3월 고향으로 되돌아온 그는 ‘독립청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공개단체인 야학과 농촌진흥조합 등을 무대로 삼아 활동한 결과 약 40명의 회원을 모았다고 한다. 회원은 주로 향리에서 고락을 나누며 성장한 친구들과 그의 모교인 안계보통학교 동창생들이었다. 이 단체의 비밀운동은 미성숙했다.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그 어느 지도자도 없었으며, 어떠한 조직적 계열 또는 연락도 없는 순전히 내 독자적인 아주 의식성이 어린 운동이었다”고 한다.2

 

그래서일까, 결성 1년 남짓 만에 비밀이 노출되고 말았다. 1939년 4월 이 결사의 구성원들은 일망타진됐다. 박종근이 체포된 곳은 해외였다. 만주국 수도 신경(오늘날 창춘)에 가서 해방운동과 삶의 새 진로를 모색하려던 참이었다. 신경에서 붙잡힌 그는 조선으로 압송됐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1년 가까이 경찰서에서 취조받았고, 대구지방재판소 안동지청에서 1940년 10월31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인천소년형무소에서 복역 뒤 만기로 석방됐다고 한다. 입소 연월일은 소화 15년(1940년) 11월8일이고, 출소 연월일은 소화 17년(1942년) 11월7일이었다.

 

출옥한 뒤에도 박종근은 ‘반성’하지 않았다. 출옥 뒤 해방에 이르기까지 그는 고향에서 농사짓는 한편, 정미소와 미곡창고 사무원으로 일했다. 이 기간에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다고 뒷날 술회했다. 현실 생활과 비밀결사 운동 경험에 더해 몰래 읽은 사회주의 서적의 영향력이 그렇게 이끌었다고 한다. 급기야 해방 전야인 1944년 12월 사회주의 비밀서클을 조직했다. 4명으로 이뤄진 소규모였다. 박종근은 나중에 스스로 평하기를, “의식성과 이론의 부족에다가 아무런 지도자도 없고 다른 조직과 연결 없는 고립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경험이 해방 뒤 그를 투철한 사회주의자로 나아가게 하는 전환점이 됐다.

 

딸 소은이 미처 보지 못한, 또 하나의 아버지 사진이 있다. 짙은 색 양복에 화려한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다. 와이셔츠가 눈부시게 희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연령층에 속한 건강한 남성상이다. 엷은 미소를 띠고서 앞을 바라보고 있다. 이마에 두 줄 주름살이 있고 광대뼈가 약간 솟은 터라 질박하면서도 신뢰감을 준다. 높지 않은 콧대에 두꺼운 입술이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러시아 모스크바 당학교에서 작성한 개인 파일에 보관된 사진이다. 러시아로 출국하기 전 평양에서 찍었거나, 아니면 모스크바에서 증명용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1948년 8월께 박종근 모습이었다.

 

박종근이 젊은 아내와 유복자를 남겨두고, 38도선 이북으로 올라간 이유는 ‘당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조선 노동당 중앙부는 그를 모스크바에 유학시키기로 결정했다. 해방 뒤 박종근은 민중운동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박종근은 1945년 8월부터 두 달 동안 의성군 안계면의 면인민위원회 결성에 참가해 부위원장에 선임됐다. 그해 10월부터는 의성 읍내로 진출해 조선공산당 의성군당 선전부장으로서 일했다. 의성군 내에서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1946년 10월 민중항쟁 때는 의성군당 조직부장으로서 의성군 투쟁의 총책임자 역할을 했다. 11월에는 그에 대한 책임으로 경찰 수배를 받았다. 탄압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박종근은 1946년 11월부터 월북하던 이듬해 12월까지 당 중앙위원회 선전부의 선전선동과장으로 일했다.

 

제3유격지대 사령관 박종근의 최후.

<빨치산자료집 1>(한림대, 1996) 국사편찬위원회

 

박헌영 “열성적 투쟁” 높은 평가

 

박종근의 헌신성과 업무능력의 탁월함은 당 지도부의 눈에 띄었다. 당시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재임 중이던 박헌영은 그를 가리켜, “박종근 동무는 당 사업에 정력적으로 참여했고 당 업무와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 열성적으로 투쟁하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3

 

박종근의 러시아 유학 기간은 2년간이었다. 모스크바의 당학교 내부 기록에는 그가 “1948년 9월15일부터 1950년 7월1일까지 조선당학교에서 수학”했다고 적혀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모스크바에 체류 중이었음이 눈에 띈다. 아마 최초 계획으로는 4년 이상 유학이 예정됐겠지만 전쟁 발발로 단축됐던 것 같다. 서둘러 유학을 종료하고 풍전등화에 놓인 조선 혁명을 구하기 위해 하루속히 귀국해야만 했다.

 

성적표가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2년간 모두 14개 과목을 수강했다. 그중에는 자본주의 정치경제학,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 소련공산당사, 소련 국제관계와 대외정책의 역사, 법과 소비에트 건설, 세계의 정치·경제 지리, 당건설론, 러시아문학, 러시아어 등이 포함됐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사회주의 건설의 정책 문제를 중시했음을 엿볼 수 있다. 시험 점수가 명시된 과목은 12개였는데, 모두 5점 만점에 5점을 받았다. 오늘날 한국 대학 제도에 비하면 ‘올 A+’를 받은 셈이다.

 

2000년 9월 초, 6·15 공동선언 이행 사업의 하나로 ‘비전향 장기수 송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며칠 뒤였다. 벌써 53살 중년 부인이 된 딸 소은은 장기수 선생들이 함께 모이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통일광장’이란 곳을 찾았다. 그곳에 가면 장기수들이 구해놓은 자료 속에 아버지에 관한 기록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딸 소은은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아버지 사진을 대면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아버지의 최후 사진을 맞닥뜨린 것이다. 거기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주검이었다. 몇 번의 복사를 거쳤는지 윤곽선이 흐려진 흑백사진이었다. 허리와 허벅지 두 군데에 밧줄이 꽁꽁 묶여 있었고, 잘린 머리가 목 위에 부자연스레 얹힌 상태였다. 영문 설명이 쓰여 있었다. 게릴라 지도자 박종근, 제3유격지대 사령관. 1952년 2월17일 한국 쪽 군경 합동작전 때 203410 지점 근처에서 사살됐다고 적혀 있었다.4

 

 

흑백사진 속 숨진 아버지 모습에 전율

 

딸 소은은 아버지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에 직접 총알이 박히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등을 타고 흐르는 피가 굳어서 조여들듯이 온몸이 경직되어”왔으며, 책상을 꽉 붙잡아야만 했다.5 소은은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 존재를 뚜렷이 실감했던 것 같다.

 

아! 그랬구나. 자신의 삶에서 아버지가 왜 부재했는지, 그 부재의 의미가 우리 역사와 관련됐음을 똑똑히 보았다. 이제야 아버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 없이 자랐던 어린 시절, 6개월의 짧은 신혼 생활 뒤 50여 년의 긴 세월을 홀로 견뎌야 했던 어머니의 인생이 한꺼번에 뇌리에 떠올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新井宗根(朴宗根)>, 1941년 3월14일 촬영,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2. 박문우(박종근), <자서전>, 2쪽, 1948년 8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9 л.14-16.

3. Зам.Председатель ЦК Трудовой партии Южной Корея Пак Хенен(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заместителя заведующего отделом пропаганды ЦК Трудовой Паприи Южной Кореи, Пак Чен-гын (남조선노동당 중앙위 선전차장 박종근에 대한 평정서), 1948년 7월31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9 л.9.

4. ‘사진: Guerrilla leader Pak Chong Kun’, <빨치산자료집 1>(문건편 1),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486쪽, 1996년.

5. 박소은, ‘느닷없는 사모곡: 남북 해외로 조각난 나의 가족사’, <이 여자, 이숙의>, 삼인, 423쪽, 2007.

 

 

임경석의 역사극장

[역사극장] “3년 뒤 돌아올게”했던 남편이 해방 뒤 주검으로

독립운동가 김창숙의 아들 김찬기,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활동으로 세 차례 옥고,
젊은 아내 손응교에게 약속 뒤 중국 망명길 오르지만

 

‘왜관 사건’으로 4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직후의 김찬기 모습.

때는 1941년 2월로 추정. 고향 후배인 이명동 사진작가가 찍었다. 김주 제공

 

“네가 옥에 갇힌 지 벌써 이태가 지났구나. 네 애비는 꿈이나 생시, 먹을 때나 쉴 때 언제고 오직 네가 무사히 돌아올 것만 축수하고 있다. 9월 그믐께 네 처가 편지로 예심에 회부되었다고 전해주더니, 어제는 다시금 네 병이 위독하다고 알렸더구나.”1

 

61살 김창숙이 감옥에 갇힌 아들 김찬기에게 쓴 편지의 일절이다. 아들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지 벌써 2년 가까이 지났다고 한다. 둘째 아들이었다. 큰아들 김환기가 19살 젊은 나이에 일본 경찰의 고문 탓에 저세상으로 간 뒤 맏이 노릇을 하는 아이였다. 큰아들을 옥중에서 잃었는데 성년이 된 둘째마저 감옥살이를 하다니,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맏이 노릇 하던 둘째마저 감옥살이

 

찬기가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까닭은 비밀결사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왜관 사건’이라는 사회주의 비밀결사 사건에 관련된 혐의였다. 경상북도 왜관경찰서가 수사를 주관했으므로 그렇게 지칭된 이 사건은, 1938년 일어난 3대 사상사건의 하나로 꼽을 만큼 영향력이 컸다. 관련자 기준으로 보아 제2차 혜산 사건, 원산 사건에 뒤이은 대규모 비밀결사 사건이었다. 대구·경성·도쿄 등지를 무대로 하는 광역 조직을 꾀했고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운동, 유학생운동, 노동자문화운동 등을 포함해 다각적인 활동 양상을 보였다. 규모뿐만이 아니었다. 노선상으로도 전환점 같은 의의가 있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 관련자들은 민족주의 적대 정책을 버리고 항일투쟁을 위해 상호 연대를 꾀하는 ‘인민전선 전술’을 실행에 옮겼다. 사회주의운동의 물꼬를 바꾸는 역할을 했다.2

 

2년 전이란 어느 시점인가. 1938년 2월이다. 그달 19일, 비밀결사 구성원들의 검거가 시작됐다. 김찬기는 사건 초기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서점 운영을 생업으로 삼던 그는 대구경찰서에 연행됐고, 머잖아 왜관경찰서를 거쳐 김천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그의 서점은 비밀결사 구성원들의 연락 거점으로 활용됐다는 혐의를 받았다.

 

감옥 밖의 아버지 김창숙도 자유롭지 않았다. 14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8년 만에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엄중한 감시하에 출옥한 상황이었다. 몸이 아주 쇠약했다. 보도 기사에 따르면 급성 맹장염, 신경쇠약, 치질 등 갖가지 병에 시달렸다. 심지어 대소변을 받아낼 사람이 있어야 했다. 사상범 처우에 극도로 인색한 조선총독부가 형 집행정지를 승인할 정도였다. 이즈음 그의 처소는 경상북도 울산 도심에 가까운 사찰 백양사였다. 1936년 3월 구석진 방을 하나 구해 4년간이나 정양하고 있었다. 그곳에 자리잡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파리장서 사건과 유림단 독립자금 모금 운동의 동지이자 사돈 사이인 유학자 손후익이 울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심리적으로 서로 의지할 만했다. ‘찬기의 처’가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며느리 손응교다. 17살 되던 1933년, 세 살 연상의 신랑 김찬기와 결혼한 새댁이었다. 울산 동지 손후익의 둘째 딸이다. 남편이 투옥된 1938년 5월 초순, 첫 손자 ‘김위’를 낳아서 큰 기쁨을 준 며느리였다. 며느리가 보낸 음력 9월 그믐께 편지에는 찬기가 예심에 회부됐다고 하더니, 어제 받은 편지에는 찬기의 병이 위중하다는 내용이 실렸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왜관 사건 피의자들이 취조를 마치고 송국된 것은 1939년 10월25일이었다. 이날 피의자 91명 가운데 혐의가 무거운 30명이 기소됐다. 김찬기는 예심에 회부됐다 하니 기소자 명단에 포함됐음이 분명하다.

 

찬기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의 마음은 고통스러웠다. “오장육부가 터질 듯하는” 아픔을 느꼈다. 되돌아보면 찬기가 본래 체질이 약한 편이었다. 그런 아이가 “몇 년씩 고문을 받았으니 결국 큰 병에 걸린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치료비가 많이 들 거라고 감옥 의사가 말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재산을 다 기울인다 해도 아까울 게 없다”고 결심했다.

 

김찬기의 필적. 왜관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일 때 아버지 김창숙에게 올린 1940년 9월6일치 옥중 편지 첫 장이다. “아버님 전 상서, 옥중에서 세 번째 가을철이 닥쳐왔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김위 제공

 

오장육부가 터질 듯한 아픔

 

김찬기의 옥고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생애 첫 투옥을 17살 때 겪었다. 진주고등보통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 학생시위운동이 전 조선을 휩쓸었다. 1929년 11월3일과 11월12일 광주학생운동을 기폭제로 하여, 12월3일 경성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 12월9일 경성 제1차 연합시위 운동, 이듬해 1월15~16일 경성 제2차 연합시위 운동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이 운동은 전 조선에 퍼졌다. 진주의 중등학교 학생들이 그에 호응한 것은 1930년 1월17일이다. 이날 진주의 3개 중등학교 학생들이 연합 거리시위를 벌였다. 진주고등보통학교,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진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진주 시가지를 돌며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그날 이후 학생 40여 명이 검거됐고, 학교와 거리에는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졌다. 항일 열기는 고조됐으나 거센 경찰 탄압에 부딪혔다. 며칠째 진주 시내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이 분위기를 깬 게 바로 1월20~21일 이틀간 밤마다 살포된 격문이었다. 3천여 장이 뿌려졌고, 시내 중요한 곳에는 격문을 써넣은 대자보가 첨부됐다. 시위 재발로 이어질까 경계하던 경찰이 맹렬한 수사에 나섰다. 마침내 혐의자가 체포됐다. 바로 김찬기였다. 진주고보에 입학한 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 고보생이었다. 그는 격문 제작과 살포를 자기 혼자 다 했다고 주장했다.

 

김찬기는 자신을 방어하는 법을 아는 영민한 소년이었다. 그는 법정에서 유창한 일본말로 주장했다. 자신의 나이가 만으로 14살 미만이며, 법률적 책임을 지지 않는 미성년이라고 강조했다. 기발한 법정 투쟁이었다. 그의 실제 출생연월일은 1914년 2월19일이다. 그러나 호적에 어떻게 기재됐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해방 뒤 작성된 호적 제적부를 확인했더니 ‘단기 4248년(1915년) 5월5일생’으로 올라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호적은 연도가 달랐던 것 같다. ‘대정 5년(1916년) 5월5일생’으로 등재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찬기의 법정 투쟁은 효과를 거뒀다. 격문 사건의 주동자라는 사실이 인정됐음에도 1년6개월 징역형에 5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3

 

김찬기의 두 번째 투옥은 1934년, 21살 때 일이었다. 결혼 이듬해 아내와 함께 대구 남산동에 살림집을 냈을 때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했을 뿐 아니라 그 실천 운동에도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김창숙이 회고하기를, “찬기는 17살 때부터 혁명사상을 품고 있더니, 그 후로는 몇 번 옥에 갇히고 일본 경찰이 항상 그 뒤를 미행하면서 감시가 심하였”다고 했다.4

 

17살 때부터 혁명사상 품어

 

김찬기는 결국 러시아혁명 기념일을 앞두고서 대구 각지에 불온문서를 살포한 혐의로 체포됐다. 11월5일이었다. 함께 체포된 혐의자가 40명이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혐의자가 많아서 사건이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는 불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고 한다. 다행히 조직 사건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결국 김찬기는 그해 12월6일 풀려났다.5

 

김찬기의 세 번째 투옥은 1938년, 25살에 겪은 ‘왜관 사건’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대구형무소에서 3년 정도 복역했다고 알려졌다. 그가 언제 출옥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추정할 단서는 있다. 호적 제적부에 따르면 그의 딸 ‘김주’의 생년월일은 단기 4274년(1941년) 12월23일이다. 이로부터 미뤄보면 그의 출감연월은 대략 1941년 2월 전후였을 것이다. 출옥 직후, 그것을 기념해 찍은 사진이 있다. 동향인 성주 출신 사진작가 이명동이 찍었다. 단정하고 지적인 풍모를 풍긴다. 머리카락이 아직 충분히 자라지 않은 것을 보면 출감한 지 한 달쯤 지난 때인 듯하다.

 

“자고 나면 떠날 것 뻔히 알지만 그때는 어른들도 계시고 해서 애정표현이라고 있나. 둘이 말도 잘 못했는데, 표정으로 주고받았지. 갈 때 하는 얘기가 ‘자식 둘이 있으니까 나중에 얻어먹을 형편이 돼도 아이들하고 같이 얻어먹고 그냥 살아라. 내가 늦으면 3년, 잘되면 2년 반 되면 돌아온다. 앉은뱅이 아버지 잘 부탁한다’ 하면서 갔지.” 6

 

아내 손응교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야의 젊은 남편을 이렇게 회상했다. 남편의 3년이면 돌아온다는 말은 아내를 안심시키려고 한 빈말이었을까, 아니면 제2차 세계대전의 귀추를 전망하는 뚜렷한 정세관이 있었기 때문일까.

 

지키지 못한 약속

 

젊은 아내는 딸의 첫돌이 지난 뒤 남편이 출발했다고 기억했다. 첫돌은 12월23일이었다. 이 회상은 문헌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김찬기는 “1942년 12월27일에 집을 떠나 대구에서 동지들과 규합하여 준비를 마치고 1943년 1월13일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의 망명이 개인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게 아니라, 동지들과 협의해 상당한 준비를 거친 뒤 이뤄진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같은 시기에 국문학자 김태준과 박진홍 부부가 연안으로 망명했던 일이 떠오른다. 태평양전쟁 때 김찬기와 김태준 부부의 행동 양상에 일정한 공통성이 있음이 흥미롭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와의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김찬기는 해방 직후 죽어서 돌아왔다. 1945년 11월 귀국한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이 김창숙에게 소식을 전했다. 김찬기는 1944년 중경에 도착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몹쓸 병이 들어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유골은 화장했으며, 머잖아 2진 귀국 인사들이 봉환하리라는 소식도 함께였다.

 

유골이 성주 고향집에 도착했을 때 온 마을이 울음바다가 됐다. 나무로 짠 유골함을 본 아내는 그게 그리 크지 않다고 여겼다. 아내는 울지도 못했다. 시아버지도 울고 친정아버지도 우는데, 자기까지 울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말이 안 나왔다. 마음으로는 뭔가 의사표현을 하려는데, 목이 잠겨서 발음할 수 없었다. 10월23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 벙어리처럼 지냈다. 6개월 가까이 그렇게 지냈다. 아내는 그렇게 남편과 작별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아들 승우(承宇)에게’(찬기燦基라고도 함), 1939년 겨울, <국역심산유고>,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384쪽, 1979년.

2. ‘왜관지방비밀결사, 재동경조선인유학생연구회, 동경프롤레타리아연극계조선진출 3사건 검거상황’, <高等外事月報> 8호, 조선총독부경무국보안과, 9~16쪽, 1938년 3월.

3. ‘이력서’ 1쪽.

4. 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 <국역 심산유고>,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782쪽, 1979년.

5. ‘이력서’ 1쪽.

6. ‘인터뷰: 격동의 세월에 온몸으로 맞섰던 심산 김창숙의 자부 손응교’, <향토와 문화> 15, 대구은행, 16~25쪽, 1999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역사극장] 차마 적지 못했네, 죽은 아들 이야기는

베이징 망명 독립운동가 김창숙의 회고록 그리고 아들 김환기와의 서신

 

1927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김창숙.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중국옷을 입고 있었다. 임경석 제공

 

“네 아비는 병들어 죽고 말아 너의 성공을 보지 못할 것이 한스럽구나. 아아! 네 아비는 집이 있으면서도 집이 없고, 죽어도 돌아갈 곳이 없도다. 더구나 너는 아직 어려서 만리를 달려와 상면하기가 쉽지 않으니 그 얼마나 슬프냐. 하지만 요즘은 교통이 매우 신속해서 남한에서 북경까지 단 사흘밖에 걸리지 않으니, 네가 한번 와서 이 죽어가는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지 않으련? 너는 이 정황을 이회 숙씨 및 문중 여러 어른들께 빠짐없이 말씀드리고 떠날 채비를 서두르도록 하여라.” 1

 

“죽어가는 아비를 위로해주지 않으련?”

 

아버지 김창숙이 어린 아들 김환기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중국 베이징에 체류하던 1923년 5월16일에 쓴 편지였다. 국외 망명길에 오른 지 5년째 되던 해였다. 음력 5월이므로 더위가 시작되던 때였다. 양력으로는 6월29일이었다. 그해 여름, 김창숙은 건강 문제로 고생했다. 오래전부터 앓던 치질이 악화했다. 통증이 심해 걷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인용문 첫 문장에서 아비가 병들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비관하는 마음을 토로한 까닭이 바로 여기 있었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가난한 망명객 처지임에도 그랬다. 미국인 의사가 경영하는 협화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수술은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해 가을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간헐적인 편지 왕래가 가능했다. 망명지 베이징과 경상북도 성주군의 고향 마을 사이에 말이다. 공식 우편제도를 통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경찰 수배를 받는 망명자 신분으로는 불가능했다. 아마 인편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자료에 따르면 김창숙은 1923년 4월, 5월, 8월에 각각 국내로 비밀리에 편지를 보냈다. 받는 사람은 아들과 문중의 믿을 만한 친척이었다. 그 반대 통로도 열려 있었다. 김창숙은 4월과 8월에 국내에서 밀송한 편지를 받았다. 두 사람의 문중 친척이 보낸 글월이었다. 4~9월 편지 다섯 통이 오간 것을 보면, 한 달에 한 번꼴로 서신 내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 김환기는 15살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중학교 3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였다. 아버지 나이 서른에 처음 얻은 아들이었다. 늦게 얻은 귀한 자식이었다. 김환기는 10살 이후부터 아버지 없는 집안에서 자라야 했다. 고향 마을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서 어린 두 동생과 함께 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집안의 큰일과 교육에 관한 일은 가까이 사는 의성 김씨 문중의 ‘숙씨’(아버지와 같은 항렬의 친족)들에게 물었다. 소년 김환기는 보통학교를 마친 뒤 일본식 근대 교육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황매산에 가서 이회(而晦) 숙씨 휘하에서 일을 따르”기로 했다.

 

황매산은 경상남도 합천군과 산청군의 경계에 있는 높이 1113m의 고봉으로서, 남쪽 기슭 만암 마을에 이회 숙씨가 거처했다. ‘이회’란 김황(金榥)의 자(字)였다. 나라가 망하자 깊은 산골로 이사해 유학 고전 연구에만 전념하는 유학자였다. 김창숙보다 나이는 17살 아래지만 의성 김씨 문중의 항렬로는 아저씨뻘이었다. 숙씨라고 일컫는 이유였다. 김황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과 1927년 유림단 독립자금 모금 사건에 연루돼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른 반일지사였다.

 

김창숙은 고향에서 온 편지를 통해 알았다. 10대 중반의 맏아들이 근대 교육을 중단하고 유학 고전 연구의 길로 나아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아이 교육에 관한 것이므로 중대한 사안이었다. 하물며 유학자의 정체성을 가진 이로서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아버지 김창숙은 답장 편지 속에 ‘과히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고 답했다. “네가 옛 성인의 학문에 오로지 전념하여 뛰어나게 일가견을 세워, 우리 집안을 번성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라고 의견을 써서 보냈다. 기대 반 우려 반의 뜻을 담았다.

 

교육 위해 아들을 베이징으로 불러

 

그러나 김창숙의 속마음은 달랐다. 아들이 베이징에서 교육받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 편지에 “네가 한번 와서 이 죽어가는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지 않으려는가”라는 문장이 있다. 이와 관련되는 말이었다. 처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김창숙은 전달에 쓴 편지에서도 “내가 죽기 전에 만나볼 수 있게 북경에 와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아마 1923년에 접어들면서부터 맏아들 환기를 베이징으로 불러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게 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창숙은 베이징으로 오는 절차를 세심히 일러뒀다. 교통이 매우 신속하므로 경북 성주에서 베이징까지 단 사흘밖에 걸리지 않는다, 김황을 비롯한 문중 어른들에게 이 정황을 말씀드려야 한다, 길을 인도해줄 성인이 있어야 하므로 동행할 만한 이에게 편지를 드려서 의논하라, 서울에 사는 지인에게 주선을 부탁해놓았으므로 서울에 도착하거든 그 사람 댁 방문을 요한다, 일정이 정해지면 속히 편지를 보내라, 떠날 채비를 서둘러라 등등 자세하게 썼다.

 

“지난날 내희 숙씨께서 편지를 보내셨더구나. 말씀이 몹시 도리에 어긋나 미친 사람이 실성한 것 같아, 내가 이미 공박하고 절교를 알렸단다. 너와 이회 숙씨 및 여러 종친께서도 이 뜻을 아시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대략 전한다.”

 

편지 속에는 또 하나 아버지의 뜻이 담겨 있었다. 의성 김씨 문중 가운데 내희(乃希) 숙씨를 경계하라는 당부의 말이었다. ‘내희’라는 자(字)로 불리는, 김창숙의 가까운 친족 김한상(金漢相)이 지난 4월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서 도리에 어긋난 말을 했다고 한다. 김창숙은 미친 사람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편지 속에 무슨 말이 담겼기에 이처럼 분노했을까.

 

전향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조선총독부가 경북 경찰부를 통해 망명자 김창숙에게 제안했다.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국내에 들어와 귀순한다면, 과거 ‘범행’을 모두 불문에 부치고 후대하겠다는 말이었다. 집을 고치고 논밭을 새로 사줘 생활을 보장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내희 숙씨는 경북 경찰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전향을 권유하는 편지를 베이징의 김창숙에게 보냈다. 메신저 역할만 하지 않았다. 총독부 당국이 관대한 처분을 내렸으니 이제 가정의 즐거움을 누리기 바란다고 권면했다.2

 

김창숙은 큰 분노를 느꼈다. “머리털이 빳빳해지고 간담이 흔들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가까운 친족으로서 유교 고전학에 관한 담론을 나누고, 대소사 문중 일을 협의하던 사이 아닌가? 실망감 때문에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김창숙은 바로 붓을 들고서 답장을 썼다. 절교 선언이었다. 전향 권유가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를 통렬히 논박하고, 앞으로 다시는 내왕하지 않겠노라고 단언했다. 그는 아들 환기에게도 사정을 전했다. “말씀이 몹시 도리에 어긋나 미친 사람이 실성한 것 같아, 내가 이미 공박하고 절교”했노라고 알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중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김황에게 편지를 써서 자초지종을 알리고, 내희 숙씨가 더는 일족의 일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1923년 베이징에서 김창숙이 맏아들 환기에게 보낸 비밀편지. <심산유고>(국사편찬위원회, 1973년) 수록.

 

친족의 전향 권유에 분노해 건강 잃어

 

심중의 고통을 이기기 어려웠던 김창숙은 술에 손댔다. 폐결핵 기운이 있어서 음주와 흡연을 삼간 지 수년이 지난 때인데도 그랬다. 가슴에 울화가 치밀어 오른 김창숙은 고량주 한 두름을 혼자 다 마시고 대취해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나니 저녁 무렵이었다. 옆 사람에게 물었더니 이미 이틀이나 지난 뒤였다고 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번뇌가 생길 것 같으면 큰 잔으로 술을 퍼마시는 습관이 들었다. 묵은 병이 다시 도졌다. 금주하라고 권하는 이가 있었지만 그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거듭된 폭음의 뒤끝은 건강 상실이었다. 만성 치질이 급격히 나빠졌다.

 

마침내 큰아들 환기가 베이징으로 건너왔다. 1925년 봄이었다. 베이징행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지 1년10개월이나 됐을 때다. 환기는 벌써 17살이 되었다. 7년 만에 이뤄진 부자 상봉이었다. 김창숙은 아들이 근대 교육의 길로 나아가게끔 인도했다. 먼저 두 개의 언어를 배우게 했다. 중국어와 영어다. 베이징에서 학업을 쌓으려면 마땅히 중국어를 익혀야 하는데, 영어 공부를 시킨 점이 이채롭다. 망명지에서 겪고 목격한 국제적 감각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 재편이 미국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똑똑히 지켜본 결과였으리라.

 

김창숙은 아들의 어학 능력이 늘기를 기다렸다가, 때가 무르익자 정규 교육과정에 들어가게 했다. 중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김창숙의 회고록에는 ‘북경중학’에서 수학하게 했다고 쓰여 있다.3 ‘북경중학’이 학교 이름을 뜻하는 고유명사인지, 아니면 베이징에 있는 중등교육기관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아버지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근대 정규 교육을 이수하게 했다.

 

제 아들만이 아니었다. 김창숙은 조선 청년들의 베이징 유학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1923년 현재 베이징에서 조선인 유학생 수는 600여 명이었다. 그중 중등학교와 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 200여 명이고, 무관학교에 적을 둔 사관생도는 70여 명이었다. 입학을 희망하는 조선 청년들은 해가 갈수록 늘었다. 그래서 1923년 9월17일 베이징에 거주하는 조선인 유력자 60여 명이 모여 유학생을 후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그 첫 자리에 김창숙의 이름이 거명된다. 그날 회의에서 입학 준비를 위한 강습소와 유학생들 단결을 위한 친목 클럽을 조직하기로 의결했다.4

 

그러나 큰아들 김환기의 베이징 시절은 길지 않았다. 1년6개월이 채 되지 않아 조선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질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회고록을 보자. 1926년 “7월에는 환기의 귀국을 명하였는데 그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고 적혀 있다.5 의문이 든다. 실제 병에 걸렸다면 국내보다도 도리어 베이징에서 더 잘 치료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다른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유학·체류 경비를 뒷받침할 경제적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 있다. 혹은 독립운동에 관련된 사명을 부여해 입국시켰을 수도 있다. 김창숙은 1925년 8월부터 1926년 5월까지 10개월 동안 국내에 비밀리에 잠입해 유림단 독립자금 모금운동에 종사한 바 있다. 그의 베이징 귀환 시점과 아들 김환기의 국내 입국 시점이 두 달의 시차를 두고 나란히 이어졌다.

 

갑자기 귀국한 아들의 비참한 죽음

 

김환기의 귀국 결정이 지혜롭지 않았음은 이후 사건 전개를 보면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귀국 뒤 얼마 안 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국내에서는 ‘유림단 독립운동자금 모금 사건’이 발각돼 검거 선풍이 일었다. 사건 주모자 김창숙의 아들이자, 중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김환기는 이 회오리바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환기는 혹독한 고문의 희생자가 됐다. 1927년 2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출옥했다. 19살 청년의 신체는 손쓸 여지도 없이 훼손됐다. 그는 치료 중에 1927년 12월20일 사망했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김창숙의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만년에 작성한 그의 회고록에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차마 그 아픔을 되살려 적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참혹한 소식을 들은 뒤로 자신의 병이 더욱 깊어졌다고만 썼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아들 환기(換基)에게, 계해(1923) 5월 북경 의원에 있을 때’, <국역 심산유고>,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382~383쪽, 1979년.

2. 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 <국역 심산유고>, 739~740쪽, 1979년.

3. ‘벽옹 73년 회상기’, 746쪽.

4. ‘북경 유학이 從此 편리’, <조선일보> 1923년 10월5일치.

5. ‘벽옹 73년 회상기’, 763쪽.

 

 

임경석의 역사극장

[역사극장] 송계월, 여학생 만세 사건을 주도하다

1930년 2차 ‘경성 연합시위 사건’ 주도 혐의로 옥고… 폐결핵으로 23살에 요절

 

옥고를 겪고 출옥한 ‘여학생 만세 사건’의 지도자 6인. 왼쪽 셋째가 송계월이다. 임경석 제공

 

검사가 피의자에게 물었다. 식민지 조선 최초의 사상검사로 유명한 이토 노리오 검사였다. 왜 여학교 학생 대표들이 너를 다 알고 있느냐고. 예리한 추궁이었다. 경성 시내에 있는 13개 여학교 대표들이 어떻게 네 하숙집을 다 알고 찾아왔느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무슨 단체라도 가입한 때문이냐고 물었다. 송계월은 부인했다. 단체에 가입한 일은 없다고. 다만 2년 전 경성여자상업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한 까닭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고 신문에도 관련 기사가 나고 그랬는데, 아마 그 영향인 것 같다고 답했다.1 무난한 대답이었다. 아귀가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심문은 다른 문제로 넘어갔다.

 

임경석 제공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 대중투쟁

 

송계월의 혐의는 시위 주동이었다. 1930년 1월 제2차 경성 연합시위 사건을 주도적으로 모의한 혐의로 붙잡혔다. 제2차 연합시위란 1월15일부터 16일까지 여러 중등학교 학생들이 교내 만세운동 범위를 넘어 거리시위에 진출한 사건을 말한다. 이때 6개 남녀 중등학교 학생들이 거리시위에 나섰고, 거리 진출이 막혀 교내에서 만세를 고창한 학교가 경성 시내에서만 18개 학교 7천여 명에 이르렀다. 1929년 11월부터 1930년 2월까지 전개된, 광주에서 시작해 전 조선으로 확대된 항일 학생운동의 절정이라 표현할 만했다.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대중투쟁이었다.

 

송계월은 디데이 전야에 열린 ‘여자중등학교 대표자 회합’에 참석했다. 모교 경성여자상업학교의 대표 자격이었다. 이 회합에는 13개 여학교 대표 학생 30명 안팎의 학생이 모였다. 참가자들은 다음날 오전 9시30분에 각 학교에서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종로 네거리에 집결해 거리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했다. 구호로는 ‘광주학생 석방 만세’ ‘약소민족 해방 만세’를 쓰기로 했다. 눈길을 끄는 점이 있다. 회합 장소였다. 다름 아닌 송계월의 처소였다. 그가 사전 모의 과정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인 송계월은 하숙하고 있었다. 가회동 48번지, 경성 북촌의 전통 주택가 골목 깊숙한 곳에 있는 평범한 민가였다. 회합이 끝나자 밤 9시였다. 참가자들은 인근의 주목을 끌까 염려해 두세 사람씩 떨어져서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경찰 당국은 이 시위운동을 ‘여학생 만세 사건’ 또는 ‘여학생 사건’이라고 불렀다. 남녀 학생이 함께 들고일어난 사안인데도 이렇게 호명했다. 정세가 급박했기 때문이다. 광주학생운동 이래 전국에 걸쳐 항일시위가 급증한 까닭에 체포자가 날마다 늘고 있었다. 유치장과 형무소가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엄벌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총독부는 관대한 태도를 보여 민심을 위무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제2차 연합시위 사건 피의자들을 성별로 나눈 것은 이 때문이었다. 여학생만 떼어내 사법절차를 따로 진행했다. ‘여학생 만세 사건’이라는 호칭이 나온 이유였다. 경찰은 체포한 여학생 가운데 89명만 문제 삼았다. 그중 27명은 구속, 62명은 불구속 상태로 검사국에 송치했다. 송계월은 당연히 구속자 명단에 포함됐다. 그는 다른 구속자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여자중등학교 대표자 회합’이 열린 송계월의 하숙집, 서울 종로구 가회동 48번지. 임경석 제공

 

사상과 이론 투쟁에선 비타협적인 투사

 

경찰과 검사 취조의 핵심 문제 가운데 하나는 각 학교 연대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밝히는 데 있었다. ‘배후 세력에 의한 계획적인 책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총독부 경무국장은 ‘배후 책동의 악분자를 철저히 밝히겠다’고 천명했다.2 이토 검사가 여학교 학생 대표들이 송계월의 하숙집 위치를 다 알고 있는 이유를 궁금하게 여겼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이 지점에서 가혹한 고문 수단을 동원해 비밀결사 연루자를 밝히려고 노력했겠지만, 때는 바야흐로 비상시국이었다. 게다가 총독부는 관대한 처분이 가져올 정책적 이익을 계산했다. 배후 문제는 뜻밖에도 쉽사리 낙착됐다. 공개 여성단체 근우회가 수사망에 포착됐다. 근우회 집행부 자체는 여학생 만세운동에 관계하지 않았지만, 두세 임원이 개인 자격으로 여학생들과 접촉해왔음이 드러났다. 특히 근우회 상무위원 허정숙이 지목됐다. 경찰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허정숙이 이화여고보 학생 최복순, 김진현 등과 정기적으로 모여 여학생 만세 사건을 주도했다고 한다.3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여자중등학교 대표자 회합’에는 여학생만이 아니라 남학생도 참석했다. 휘문고보 학생 3명이 출석했고, 남학생이 회합의 진행 사회를 보았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행동 계획 합의를 도출하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뿐이랴. 남자 중등학교 학생 대표자들의 독자적인 협의체가 작동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여학생들보다 앞서 1월13일부터 여러 차례 모여 연합시위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허정숙의 지휘와 별도로 독립적인 네트워크가 작동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비밀결사를 매개로 비공개 움직임이 잠재해 있었다고 판단된다.

 

송계월은 이제 막 20살이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그는 고등경찰과 사상검사의 날카로운 심문을 이겨내고 비공개 네트워크의 노출을 방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송계월이 비밀활동에 익숙했다는 증거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는 사상과 이론 문제에 관해서는 비타협적인 투사가 되곤 했다. 송계월과 교유하던 남녀 문인들은 말했다. “계월이는 그렇게 얌전하다가도 이론 투쟁에만 들어서면 열화가 솟아오르는 기개가 있어 건드리기가 어렵다”고 평했다. 한 걸음도 사양하지 않는 조리 있는 언변과 불길을 일으키는 듯한 열정으로 무리 가운데 우뚝 섰다고 한다.4

 

학생 비밀결사에 참여했다고 보는 가장 두드러진 증거는, 문단에 데뷔한 뒤 송계월이 쓴 작품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쓴 작품에 ‘가두연락의 첫날’이라는 글이 있다. 이채로운 작품이다. 비밀활동에 참여한 연락원의 내면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일제하 비밀결사의 활동상을 그처럼 생생하게 재현한 문학을, 과문한 탓인지 일찍이 본 기억이 없다. 당대 한 평론가도 인정했다. 소재가 신선해 매우 새로운 맛이 나고 감동까지 준다고.5

 

송계월의 하숙집, 오늘날 모습. 임경석 제공

 

비밀 연락원의 내면 담긴 소설도 써

 

비밀활동의 긴장감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그 부분을 축약해보자. 점심시간에 짬 내어 거리 연락 임무에 나선 젊은 여성이 주인공이었다. 여성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12시13분. 아직 약속 시각까지는 꼭 7분이 남아 있었다. 행여나 시계가 오작동하지 않을까, 불안했다. 다행히 종로 거리에는 가게마다 귀퉁이에 벽시계가 걸려 있었다. 두 번, 세 번 시간을 확인한 다음에야 마음이 놓였다. 종로 네거리에서 황금정(을지로) 네거리의 중간, 이곳이 연락 장소였다. 여성은 마음을 침착하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발길을 옮겼다. 복장과 손동작이 중요했다. 그는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양말, 흰 고무신, 그리고 왼편 손으로 두루마기 옆구리에 팔짱을 지르고” 있어야 했다. 상대편은 남자라고 들었다. “검은 중절모자에 검은 대모테 안경, 키는 보통보다는 작은 키, 구두는 황색, 왼편 팔에 남색 책보를 끼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약속 장소에 가까이 접근하면서 걱정이 들었다. 그 사람을 몰라보고 지나치면 어찌하나. 저편에서도 나를 몰라보면 어찌하나.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행동을 눈여겨봤다. 혹시 벌써 지나쳐버리지나 않았을까 싶어서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도중에 상대방이 붙잡히지나 않았나. 만나는 장소에 밀정이 있으면 어찌하나. 공포심이 제어할 수 없이 솟아올랐다.6

 

실제 겪지 않고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구체성과 세밀함이 있었다. 접선을 앞둔 사람의 흥분과 긴장감, 의복과 태도, 약속 시각과 장소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다. 송계월이 비밀결사 참가 경험이 있음을 시사한다. 더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있다. 비밀활동을 바라보는 송계월의 시선이다. 무사히 소임을 다했다는 성취감과 자긍심이 작품에 가득 차 있다. 마치 나치 치하 프랑스에서 비밀리에 저항운동에 나선 레지스탕스의 활동상을 보는 듯한 독후감을 준다.

 

“싹터나는 반도 여류문단의 빛나는 별”

 

송계월은 인물도 고왔다. “높은 코, 뚜렷한 눈동자, 날씬한 키, 가다듬은 듯한 두 다리”로 인해 “보는 사람마다 눈을 바로 뜨지 못할 만한” 미모를 갖추었다. 송계월이 거리에 나서면, 마주치는 사람들이 “한 번 더 바라보기를 주저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평론가 이서구는 늦은 봄날 명동 길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얼굴이 참 좋구나 했을 뿐인데, 걸음 걷는 뒷맵시가 물 찬 제비같이 새뜻한 양이 참으로 황홀하”더란다. 자기도 모르게 안국동 네거리까지 뒤따라 걸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7

 

송계월은 문장이 뛰어났다. 형무소 출옥 뒤 잡지사 개벽사의 기자로 뽑힌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는 기자로 재직하는 한편 문단에 데뷔했다. 그리하여 “싹터나는 반도의 여류문단의 빛나는 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1933년 조선 문단을 전망하는 글에서 송계월을 가리켜 신흥문단 작가 20여 명 가운데 하나로 지목했다. ‘신흥문단’은 기성문단에 대칭되는 말로서 프롤레타리아트문학을 가리킨다. 노동계급 문학의 거대한 약진과 성장을 이끌어낼 작가군의 한 명으로 손꼽았다.

 

그러나 건강이 문제였다. 송계월은 폐결핵을 앓았다. 고향인 함남 북청으로 요양차 귀향한 송계월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33년 5월31일 사망했다. 나이 23살이었다. 그의 요절 소식을 들은 기자 송봉우는 평했다. “글 쓴 것을 보아도 논지가 분명하고, 말하는 것을 보아도 조리가 있고, 좀더 자라면 여류 운동객으로 장성할 분”이었는데 정말 아깝다고 말했다.8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선총독부 검사 伊藤憲郞, ‘송계월 신문조서’ 1930년 1월30일.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1(동맹휴교사건 재판기록 3), 국사편찬위원회, 2002년.

2. 김성민, ‘광주학생운동연구’, 국민대 박사학위 논문, 206쪽, 2007년.

3. 서대문경찰서, ‘의견서’, 1930년 1월30일.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1(동맹휴교사건 재판기록 3), 국사편찬위원회, 2002년.

4. 紅衣童子, ‘美人薄命哀史, 早逝한 文壇의 名花 宋桂月孃’, <삼천리> 제7권 제3호, 142쪽, 1935년 3월.

5. 洪九, ‘1933年 女流作家群像(續)’, <삼천리> 제5권 제3호, 1933년 3월.

6. 송계월, ‘가두연락의 첫날’, <삼천리> 제4권 제3호, 110~112쪽, 1932년 3월.

7. 白樂仙人, “現代 ‘長安豪傑’ 찾는(座談會)”, <삼천리> 제7권 제10호, 88쪽, 1935년 11월.

8. ‘천하 대소 인물 평론회’, <삼천리> 제8권 제1호, 44쪽, 1936년 1월.

 

 

임경석의 역사극장  

[역사극장] 반항아, 조선 청년들 가슴에 불을 지르다
광주 학생운동에서 전국 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 나아간 반항아 장석천

 

적색노조 사건으로 체포된 뒤 형무소에서 찍은 장석천(30살), 앙다문 입꼬리가 반달처럼 아래로 휘었다.

애써 감정을 숨기고 있지만 반항기가 느껴진다. 임경석 제공

 

1929년 12월3일 새벽이었다. 경성 시내가 발칵 뒤집어졌다. ‘불온’ 격문이 대량 살포됐기 때문이다. ‘조선 학생청년 대중아 궐기하라’라는 제목의 전단을 비롯해 6종의 등사판 유인물이 발견됐다. “검거된 광주의 조선 학생을 즉시 탈환하라” “식민지 노예교육에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전날 밤부터 시작해 새벽에 먼동이 틀 때까지 누군가가 그 격문들을 경성 시내에 있는 거의 모든 고등·중등 교육기관에 은밀하게 뿌렸다. 십수 개 대학,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교정에 동시에 살포한 것을 보면 한두 명의 소행이 아니었다.1

 

경성 시내는 물론이고 전 조선 각지에도 발송됐다. 도중에 발각되기도 했다. 광화문우편국과 경성우편국에선 지방 배송 직전에 8천 장 분량의 격문을 압수했다. 경찰은 제작·살포된 유인물을 모두 2만 장으로 추산했다. 등사판 인쇄만으로 그 분량을 제작하기란 쉽지 않다. 등사원지 한 장을 등사판에 걸고서 최대 500장을 뽑을 수 있었다. 그나마 숙련된 등사 기능공이라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2만 장을 인쇄하려면 최소한 등사원지만 40장을 제작해야 했다. 소수 인원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2만 장 유인물 전국 청년학생에게 발송되다

 

일본 경찰은 긴장했다. 경기도경찰부가 지휘를 맡고 시내 각 경찰서가 분주하게 활동을 개시했다. 아침 일찍 모리 종로경찰서장이 오토바이를 몰아서 도경찰부를 방문하는 것이 목격됐고, 다나카 도경찰부장을 비롯한 경찰 고위 간부들이 집결해 장시간 밀의를 계속한다는 기사가 언론에 보도됐다. 마침내 전격적으로 일제 검거가 이뤄졌다. 신간회, 근우회,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청년동맹 같은 공개 사회단체 임원진이 속속 체포됐고 그 사무실과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중등학교 학생들도 잡아갔다. 그리하여 사건 발발 이틀 뒤인 5일 오전, 이미 혐의자 127명이 마구잡이로 끌려갔다.

 

마침내 5일 오후, 종로경찰서 요시노 도조 경부보가 이끄는 고등계 경찰이 단서를 잡았다. 고등계란 ‘대일본제국’의 치안을 위태롭게 할 정치범죄와 사상범죄를 전담하는 특수 부서였다. 20대 젊은이 10여 명이 보름 전부터 밀의를 거듭한 끝에 저지른 ‘범죄’임을 밝혀냈다. 신문기사 표현에 따르면 ‘견딜 수 없는 취조’로 인해 얻은 정보였다.2

 

가혹한 고문과 악행이 자행된 끝에 알게 된 정보임을 말해주는 은유였다. 하지만 주모자로 지목된 장석천, 차재정 등은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 경찰은 사방에 경계망을 풀어서 그들의 행적을 쫓았다. 수은동, 당주동, 간동, 적선동, 청운동 등 경성 시내 오래된 주택가 일대에 정사복 경찰이 조밀하게 깔렸다. “골목골목과 산과 개천 등 사람들이 통행할 만한 곳은 전부 파수를 세우고” 수색했다. 그 결과, 주택가 두 곳에 나눠 보관하던 등사판 6대가 압수됐다. 명백한 물증이었다.

 

장석천(27)은 결국 붙잡혔다. 차재정 등 동료 10여 명도 함께였다.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이 일어나고 사흘째인 12월5일 밤이었다. 그날 밤부터 종로경찰서에서 시작된 취조는 이듬해 1월5일까지 한 달간 계속됐다. 이 기간에 작성된 경찰 ‘신문조서’ 5회 분량이 남아 있다. 이 문서들이 실제 취조 상황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견딜 수 없는 취조’와 극한적인 고통이 불꽃을 튀었겠지만, 이 문서들에는 평면적인 문답만 기재돼 있다.

 

취조 현장이 얼마나 격렬하고 극단적이었는지를 시사해주는 사건이 있다. 취조실에 갇힌 장석천이 몰래 예리한 단도를 지니고 있다가 발각됐다. 체포된 지 20여 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격문 사건의 주모자로 의심받는’ 그의 몸을 검사한 결과 “왼쪽 양쪽 바지 정강이에다가 보기에도 끔찍스러운 단도를 숨겨넣은 것”이 드러났다.3

 

취조 상황이 밖으로 흘러나온 이례적인 기사였다. 언제 어떤 경로로 흉기를 구했는지, 어떤 목적으로 그것을 몸에 지녔는지 추궁당했겠지만, 후속 보도는 더 없었다. 아마 탈출을 꾀했거나, 막다른 상황에 몰려 자해를 결심했거나 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가 얼마나 담대하고 신념에 찼는지를 잘 말해준다.

 

장석천이 사망한 자택. 광주군 누문리 93번지의 현 위치. 광주 학생운동의 발상지 광주고보 정문 앞에 있다.

네이버 지도 갈무리

 

20일 동안 바지 안쪽에 단도를 숨기고

 

경찰이 물었다. 언제 무슨 목적으로 상경했느냐고. 광주에서 운동권 간부로 활동하는 자가 상경한 데는 불순한 의도가 있으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장석천은 터놓고 얘기했다. 11월17일 아침 경성에 도착했고, 목적은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시위운동의 진실을 경성에 전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경성에서도 학생들을 선동해 일대 시위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취조의 초점은 경성에서 누구와 만났고, 12월3일 격문 2만 장 사건에 어떻게 관련됐는지 확인하는 데 있었다. 장석천은 합법 공개단체의 간부들과 만난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이항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차재정·황태성), 중앙청년동맹 집행위원(곽현) 등과 협의했음을 인정했다. 장석천 자신도 청총 중앙집행위원이었다. 의견이 같은 사람들끼리 업무를 나눠 맡았다고 한다. 시내 학생들의 연합시위가 필요하다고 본 자신과 황태성은 학교별로 적임자를 물색하기로 했고, 그에 반해 차재정과 곽현은 군중을 선동하는 대량의 격문 살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장석천은 격문 2만 장 사건에는 관계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취조가 거듭됐지만 그 진술을 지켰다. 다만 각 고등보통학교에 연락해 연합시위를 준비한 사실은 시인했다. 접촉한 학교는 경성제2고보, 경신학교, 중동학교였노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어느 경우도 성공하지 못했다. 자신은 연합시위의 필요성을 설득했지만, 상대방은 교내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거나 역량 부족 등의 이유로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는 것이 장석천의 진술 전략이었다.

 

장석천의 진술에는 일정한 특징이 발견된다. 경찰이 이미 인지한 사실은 시인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안에는 단호히 부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물증이 제시되거나 자신의 주장 근거가 무너지는 상황이 됐을 때, 그제야 슬그머니 말을 바꿨다.

 

그는 비밀결사 존재를 노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격문 사건이나 연합시위 계획과 비밀결사 사이의 연계를 극구 부인했다. 설령 관계가 있더라도 비밀결사 구성원 일부가 개인적인 결단으로 참여했던 거라고 진술했다.

 

장석천의 진술 투쟁은 유효했다. 그는 광주에서 학생운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제1심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6개월형을, 제2심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형을 언도받았다. 광주 학생운동의 또 한 명의 지도자 장재성의 제2심 선고형량이 4년인 점과 비교하면 매우 낮다. 하지만 판결 이유 중에는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도, 서울 지역 연합시위운동도, 비밀결사 조선공산청년회 가담 사실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노출되지 않은 비밀결사 동료들의 안위를 지켰고, 자신의 법정 형량도 최소화하는 데 성공했다.

 

전국 194개 학교로 시위 확산되다

 

12월3일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의 의의는 컸다. 당시 경성의 학생운동은 교내 문제에 국한됐다. 광주 학생운동이 1929년 11월3일과 11월12일 두 차례 거리시위 형태로 폭발했는데도 그랬다. 식민지 통치 당국은 이 폭발의 재연과 확산을 막으려 총력을 기울였다. 총독부는 언론 보도를 틀어막았고, 경찰은 닥치는 대로 체포·구금했다. 일본인 이주민들은 갖은 흉기로 무장한 채 위력 시위를 벌였다. 그 때문에 대중투쟁이 광주 일원에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3·1운동 이후 처음 있는 대중적 거리시위 투쟁이 그대로 잦아들지도 몰랐다.

 

이때 장석천이 나섰다. 11월17일 긴급 상경한 그가 추구한 것은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 학생들의 연합거리시위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의 노력은 주효했다. 12월3일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이 터졌고, 그것이 징검다리가 됐다. 교내 문제에 얽매여 학교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운동 수준을 일거에 한 단계 올리는 역할을 했다. 12월9일 제1차 연합거리시위가 터졌고, 다음달인 1월15∼16일 제2차 연합거리시위가 벌어졌다. 대폭발이었다. 그리하여 전 조선에서 광주 학생운동을 지지하는 연대투쟁이 전개됐다. 전국 194개 학교에서 5만4천여 명이 거리시위, 동맹파업, 격문 살포 등의 형태로 행동에 나섰다. 그로 인해 1462명이 피검됐고, 2330명이 무기정학, 582명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

 

장석천은 광주 학생운동을 전 조선 학생운동으로 바꾼, 놀라운 성취를 거둔 지도자였다. 도대체 전 조선 학생운동으로 전환시킨 동력이 어디서 나왔을까? 뒷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고립되고 말았는데, 1929년엔 어떻게 그 고립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 네트워크 효과를 들어야겠다. 장석천은 비밀결사 조선공산청년회(공청)의 전라도 책임자였다.4 그 덕분에 그는 상경하자마자 공청 중앙집행위원회 멤버들과 회합할 수 있었고, 신속히 광주 학생운동의 전 조선 확산을 가져올 조처를 준비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요인은 합법과 비합법 활동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1927년부터 광주에서 합법 공개 영역의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광주청년회, 광주청년동맹, 전남청년연맹, 신간회 광주지회 등 단체에 가입해 집행위원·조사연구부장·상임간사 등의 중책을 맡았다. 1929년 말까지 3년간 헌신해 광주 지역 운동권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성에 본부를 둔 전국 규모 단체에도 진출했다. 신간회 본부대회 출석 대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직에 취임했다. 이처럼 광주와 경성에 걸쳐 합법과 비합법 영역을 넘나드는 전업적인 활동 경력이 그에게 대중투쟁의 전국 확산 가능성을 부여했다.

 

장석천의 서대문형무소 수형자카드. 출소 예정일이 1934년 12월28일이라고 쓰여 있으나, 중병에 걸려 1933년 11월7일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임경석 제공

 

불꽃 같은 혁명가의 삶과 갑작스러운 죽음

 

장석천은 학생운동 현장에서 노동운동 현장으로 이전한, 지식계급 출신의 전형적인 혁명가였다. 1931년 12월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적색노동조합운동 현장으로 달려갔다. 무대는 경성이었다. 조선제사회사, 인쇄소 인쇄직공, 지물회사 직공과 사무원들 속에서 노동조합 조직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성과가 채 무르익기도 전에 경찰에 적발됐다. 장석천은 다시 투옥됐다. 1932년 11월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제21007호 사진 원판이 남아 있다. 검사국으로 송치되고 한 달쯤 지난 시점이다. 벽돌 담장을 배경으로 찍은 수형자 사진이다. 무명으로 지은 하얀 한복을 입었는데, 확정판결을 받기 전 미결수 신분의 옷차림인 것 같다. 때가 묻어 꼬질꼬질하다. ‘장석천 4511’이라고 적힌 어깨띠를 매고 있다. 식별을 위해 형무소 쪽에서 강제로 착용하게 했을 것이다. 숫자는 수인번호일 터이다. 네모진 얼굴에 광대뼈가 도드라져 있어 다부진 느낌을 준다. 코밑과 턱에 다듬지 못한 수염이 덥수룩이 자랐다. 무감각하고 음울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턱을 치켜든 채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앙다문 입꼬리가 반달처럼 아래로 휘었다. 애써 감정을 숨기지만 반항기가 느껴진다.

 

이 억누르지 못하는 반항기 때문일까?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형기를 다 채우지 못했다. 중병에 걸린 채 보석으로 출옥했다. 고문 후유증이라고 판단된다. 1935년 10월18일, 광주 학생운동의 발상지 광주고보 정문 맞은편에 있는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새파란 나이 33살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6종 격문을 인쇄, 전 조선 각지에 배부’, <동아일보> 1929년 12월28일치 호외.

2. ‘격문사건 逐日확대, 今曉에 40여명 검거’, <동아일보> 1929년 12월6일치.

3. ‘張錫天 懷中에 단도를 발견’, <동아일보> 1930년 1월1일치.

4. 朝鮮總督府 警務局長, ‘朝保秘第465號 朝鮮共産靑年會竝朝鮮學生前衛同盟檢擧ニ關スル件’, 1930년 4월15일. 현자29, 375쪽.

 

 

임경석의 역사극장

[역사극장] 인정받지 못한 독립유공자 장재성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 주도 뒤 옥중 처형… “사회주의 계열” 서훈 안 줘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장재성(왼쪽). 1943년 찍은 가족사진.

장재성 옆에 부인 박옥희와 큰아들 장상백(11개월). 장재성기념사업회

 

1962년 3·1절 일간지에 이채로운 기사가 실렸다. 독립운동유공자 서훈을 받기로 예정된 한 인물의 자격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스였다.

 

“내각 사무처에 설치되어 있는 독립운동유공자심사위원회는 (1962년 2월) 28일 하오 제3차 회의를 열고 수훈 대상자를 다시 검토한 끝에, 단장을 받게 된 장재성씨에 대한 수훈을 취소키로 결의하였다. 알려진 바로는 장씨에 대한 취소는 공산당에 관련한 혐의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써 건국공로훈장 수훈자의 총수는 205명으로 줄어들었다.”1

 

1962년 첫 독립유공자 서훈심사에서 탈락

 

문제의 인물은 장재성(張載性)이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지도자로 손꼽히는 이였다. 그에겐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수여할 예정이었다. 단장은 포상 등급을 가리키는 용어로, 1등 중장(重章), 2등 복장(複章)에 뒤이어 3등 훈장을 뜻했다.

 

해방 뒤 처음 시행하는 독립유공자 서훈이었다.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17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실행에 옮겨졌음에 눈길이 간다. 공동체의 규범과 정의를 세우는 일이 이처럼 지체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정부 수립 이후 역대 정권이 정체성 확립과 관련해 얼마나 무신경하고 무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62년 독립유공자 서훈 제도에는 정치공학적 책략이 숨어 있었다. 5·16 쿠데타가 벌어진 이듬해였음에 주목하자. 자신의 취약한 적법성과 정통성을 보완하려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애국선열 포상, 유공자 후손에 대한 원호, 민족문화 보존 등의 정책은 식민지에서 벗어난 독립국의 공동체적 가치를 선양하는 효과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그를 노렸다. 집권 뒤 첫 3·1절을 이미지 개선에 활용하려 했다. 민족적 규범과 가치를 수호하는 공공성의 대표자라는 이미지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온몸에 뒤집어쓴 오물을 가리려고 비단옷을 갖춰 입은 셈이다.

 

왜 서훈을 취소했는가? 서훈 결정을 번복한 까닭은, 신문 보도에 따르면 ‘공산당에 관련된 혐의’ 때문이었다. 상훈심의위원회에서는 ‘6개 제외 규정’을 운용했다. 독립유공자라 하더라도 서훈하지 않는 경우를 명시했던 것이다. 이 중 반공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게 3개항이었다. ‘국시 위배’ ‘납북’ ‘해방 후 월남하지 않은 자’ 등의 항목이다. 설령 독립운동에 큰 공로가 있더라도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에 공감한 경우 유공자 서훈을 하지 않겠다는 지침이었다. 장재성은 이 내부 지침의 희생양이 되었다.

 

광주고보 5학년 때 사회과학 연구모임 결성

 

장재성이 처음 비밀결사에 가담한 것은 그가 19살 때 일이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이던 1926년 11월3일이었다.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 16명이 ‘성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깰 성(醒), 나아갈 진(進)이라는 모임 이름은 세계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을 지침 삼아 함께 전진하자는 뜻을 담았다. 사회과학 연구모임이었다.

 

22살 때 장재성의 비밀결사 관련성은 더욱 심화했다. 광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주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가, 1929년 6월 귀국했다. 전업으로 비밀결사운동에 뛰어들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새 사회과학 비밀모임은 광주 각급 중등학교로 퍼졌다. 앞에 언급한 두 학교에 더해 광주사범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독서회’ 또는 ‘소녀회’라는 이름의 사회과학 연구모임이 움직였다. 장재성은 이 비밀단체들을 규합했다. 그리하여 학교별 독서회를 지휘하는 ‘독서회중앙부’를 결성하고 책임비서 직위에 올랐다.

 

광주고보 독서회 사례를 들여다보자. 구성원은 17명인데, 5개 반으로 나눠 반별로 독서모임을 열었다. 즐겨 읽은 책은 <공산당선언> <자본론> 같은 마르크스 저작, <사회주의 대의> <무산자정치교정> 등의 해설서, <노동자전> <학생과 정치> 등과 같은 참고서였다.

 

이들은 그해 6월 하순 무등산 중머리재에서 회합했다. 참가자 최성원의 기억에 따르면, 장재성이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발언을 했다. ‘우리가 저들의 쇠사슬에 묶여 영원히 노예 노릇을 할 것인가, 아니면 멍에를 벗어던지고 자유인이 될 것인가? 이는 우리 스스로가 결정지을 일이지 남의 자비심에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날 독서회 학생들은 점심을 먹고 난 뒤 평탄하고 광활한 중머리재를 누비며, 난생처음 혁명가를 부르면서 시위행진 연습을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랬다고 한다. 그때 예행연습이 없었더라면 11월3일의 대시위가 과연 이루어졌을까? 아마 <학도가> 따위의 창가나 부르면서 거리행진을 하다 경찰에 손쉽게 해산당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장재성은 활동 영역을 비밀결사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합법 영역의 공개적인 사회운동도 중시했다. 1929년 광주 출신 국내외 유학생들을 규합해 ‘광주유학생회’를 조직하고 간부로 취임했다. 또 같은 해에 조선청년총동맹 전남도연맹에도 참가했다. 1929년 9월 광주에서 열린 도연맹 제2회 대회에 참석해 집행위원 2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그의 활동상은 다각적이지만, 외연이 일정한 범위 안에 있음이 눈에 띈다. 바로 광주 일원의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이었다. 그는 합법과 비합법의 양 공간에 걸쳐 광주의 청년·학생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장재성과 그 동료들이 개척한 합법 영역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소비조합운동이었다. 학생들 왕래가 잦은 북성정(北城町) 네거리, 오늘날 금남로4가역 교차로 금남로공원 중앙로변에 위치한 일본식 2층 목조가옥을 임대했다. 그곳에 문구점과 빵가게를 열기 위해서였다. 빵가게 이름이 이채롭다. ‘장재성빵집’이었다. 당시 학생들이 즐겨 찾던 호떡을 만들어 파는 가게였다. 다다미 18장이 깔린 널찍한 2층 공간이 유용했다. 비밀모임이나 은밀한 작업 공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그곳을 압수수색한 일본 경찰의 보고서에 따르면,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 회의용 탁자가 덩그러니 놓였다고 한다.2

 

일본 경찰이 그린 독서회중앙본부의 합법 소비조합 건물. ‘장재성빵집’과 문방구. 1층에 두 개의 가게를 열었고,

다다미 18장이 깔린 2층은 비밀모임과 인쇄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썼다. 장재성기념사업회

 

거듭된 옥살이 끝 6·25 때 옥중 총살당해

 

장재성은 11월13일 체포됐다. 광주 학생들의 11월3일 첫 시위, 11월12일 2차 시위를 배후 조종한 혐의였다. 그는 ‘광주 3대 비밀결사 사건’의 피고인 116명의 수뇌로 간주됐다. 그리하여 1930년 10월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6월13일 상급심인 대구복심법원에서 4년형을 언도받았다. 동료 피고인 가운데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1934년 4월11일 만기 출옥한 뒤에도 장재성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1937~40년 반일 시국 사건에 연루돼 다시 3년을 복역해야 했다.

 

해방 뒤 장재성의 행적은 단편적인 정보만 알려져 있다. 8·15 직후 광주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 조직부장으로 일했고,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대회에 전남 대표 14명 중 한 사람으로 일했다. 그는 민전 활동으로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했다. 1947년 7월11일 우익 청년단체 50여 명이 광주민전 사무소를 습격해 사무국장 장재성을 비롯한 2~3명이 무수히 폭행당했다. 경찰이 출동했을 때, 현장에는 ‘상당한 길이의 단도’와 흉기, 몽둥이가 팽개쳐져 있었다고 한다. 장재성은 인사불성의 중상을 입고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3

 

광주민전 피습 사건 이후 장재성은 비합법 영역으로 활동 중점을 옮긴 것 같다. 1948년 8월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황해도 해주를 다녀왔다고 한다. 하지만 대의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지는 않다. 언론매체에 그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피검 기사다. 그에 따르면, 장재성은 1949년 4월4일 밤 11시30분 서울 시내에서 종로경찰서 사찰계 형사들에게 체포됐다.4  남로당에 가담한 혐의였다.

 

장재성은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는 살아서 형무소 문을 나서지 못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6·25전쟁이 벌어지고 인민군이 빠르게 남하하는 정세 속에 그는 다른 정치범 수감자들과 함께 총살됐다고 한다. 아무런 재판도 받지 못한 채였다. 전시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됐던 것이다.

 

독립유공자 서훈 심사 기준에 문제가 있다. 이 제도가 처음 시행되던 때부터 군사독재 정권의 책략적인 의도가 숨어 있었음을 이미 살펴봤다. 다행히 민주화가 진전됨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개입은 약화했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도 점차 유공자로 인정받는 사례가 나타났다. 노무현 정부 시절엔 더 큰 진전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외압이 이뤄지고 있다. 국가보훈처의 현행 독립유공자 심사 기준에는 문제 조항이 살아 있다. 해방 뒤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거나 동조한 경우에는 설령 독립운동에 현저한 공로가 있더라도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조항이다.

 

이데올로기적 외압 조항은 역사적 진실에 배치된다. 독립유공자 여부는 오직 순수하게 독립운동 공적 유무만으로 판단해야 한다. 1945년 8·15 이전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적이 있는지만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도 사후적인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외압은 배제돼 있다.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가 애국지사다. 그로 인해 순국한 자는 순국선열이다.

 

이데올로기적 외압 조항은 시민사회 여론과도 배치된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중진으로 구성된, 보훈처의 자문기구 ‘국민중심보훈혁신위원회’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에 관해 권고한 내용에 귀 기울여야 한다. 판단 시점을 1945년 8월15일에 두고, 그때 독립운동을 했다면 그전에 그의 사상이 어떠하든, 또 해방 뒤 정치적 행적이 무엇이든, 그 사람은 독립유공자로 판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독립운동 공적만으로 유공자 판단해야

 

이데올로기적 외압은 역사학계 정설과도 충돌한다. 2019년 5월 열린 ‘정책토론회: 독립지사 서훈,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도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은 “해방 이후의 행적은 포상의 대상에서 불문에 부쳐야 한다. 사회주의자들과 현재 북한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정용욱 교수도 “해방 이후 불행한 역사를 겪었다고 그들을 방치하는 것은 지금 우리 국격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 토론회 자리에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의 수장으로 있는 역사학계 원로들도 합석했음에 유의해야 한다.5

 

장재성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교·대학 시절부터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고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작가, 지금은 장재성기념사업회 운영위원으로 일하는 황광우는 되묻는다. “독립운동하다 청춘을 감옥에서 보낸 분을 서훈하지 않으면 누구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할까?”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張載性씨 수훈 취소’, <동아일보> 1962년 3월1일치.

2. 光州警察署 道警部補 福本直能, <檢證調書>, 1929년 12월17일. <思想月報> 1-11, 254쪽, 1932년 3월.

3. ‘광주민전사무소를 백여 명이 습격 테로’, <경향신문> 1947년 7월15일.

4. ‘남로 孔慶漢등 검거’, <조선일보> 1949년 4월7일.

5. ‘독립유공자 공적 기준 시기 1945년 8월14일 이전 한정해야’, <연합뉴스> 2019년 5월2일.

6. 황광우, ‘광주학생독립운동 장재성, 부끄러운 광주’, <남도일보> 2020년 1월27일치.

임경석의 역사극장

[역사극장] 젊은 여성 동지를 팔아넘긴 배신자

김단야가 기관지 <콤무니스트>를 통해 폭로해 응징하려 한 ‘이자’

 

독고전, 1928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서울 서대문감옥에 수감 중 찍은 사진(왼쪽). 김명시, 1932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을 때 신문에 보도된 사진. 임경석 제공

 

러시아 모스크바의 옛 코민테른기록관에서 발굴된 어느 문서에 한 인물의 정보가 쓰여 있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의 전설이라고도 할 김단야가 1937년 자필로 작성한 기밀문서에 말이다. 누군가에 관해 발언하고 있다. 식민지시대 반일운동 역사에 관심 가진 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인물이다.

 

이자는 1921년 당원으로 1925년에 당중앙 검사위원, 국경연락원으로 있던 자로서 4년 징역을 살고 나온 자이다. 그는 진실한 공산주의자로 일반의 신임을 받는 자이다. 1931년부터 상해에서 발행한 우리 기관지 연락원으로 있었는데….1

 

4년 수감 생활한 공산주의자는 누구인가

 

‘이자’란 누굴까? 일찍부터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한 열렬한 투사였던 것 같다. ‘진실한 공산주의자로 일반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는다. 경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과연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된다. 3·1운동 직후 사회주의를 수용했고, 비밀결사의 중요 직책을 맡았다. 1925년에 주목해보자. 당 중앙간부로 국경연락원의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1925년이란 바로 그해 4월17일 경성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을 염두에 둔 표현임이 틀림없다. 그 단체의 국경연락 임무를 맡았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을 찾아보면 ‘이자’가 누군지 단서를 잡을 수 있다.

 

1925년 12월 제1차 검거 사건이 터졌을 때, 국경지대에서 체포된 비밀결사 참가자는 셋이었다. <조선일보> 신의주 지국장이며 현지 사상단체 신인회 집행위원인 독고전(38), 신의주의 공개 청년단체인 국경청년동맹 간부 김경서(24), 국경 너머 중국 안동(오늘날 단둥)에 거주하는 조동근(30)이 그들이다. 이 중 4년간 징역살이를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따져보자. 셋 다 검거 초창기인 1925년 12월 초에 체포됐는데, 그중 김경서와 조동근은 1927년 4월 초 면소 조처로 출감했다. 두 사람의 수감 기간은 1년5개월가량이다. 독고전은 어땠나? 그가 출옥한 때는 1929년 8월이었다. 요컨대 그의 수감 기간은 3년9개월이다.

 

그렇다. 앞 인용문에서 말하는 ‘이자’란 곧 독고전(獨孤佺)이었다. ‘독고’는 성이고 ‘전’이 이름이었다. 그는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국경연락을 총괄하는 책임자였고, 조동근은 그의 지휘 아래 압록강 너머 안동현에 체류하는 현지 담당자였다.2 “1921년 당원”이라는 구절에 눈길이 간다. 바로 그때부터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는 뜻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가 태동하던 초창기였다. ‘당’에 가입했다는데, 그 시기 과연 어떤 단체를 말하는 것일까? 고려공산당이었다. 1921년 5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와 호흡을 같이하면서 설립된, 초창기 한국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던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바로 그것이었다. 뒷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는 김재봉이나, 대한민국 제2대, 제5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시현 등이 이때 독고전과 더불어 고려공산당에 입당한 동료였다.

 

말하자면 독고전은 조선 사회주의운동 초창기를 개척한 1세대 멤버였다. 그의 운동 경력은 화려하다.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조선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그해 10월 자바이칼주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도 이르쿠츠크파 대표로 참석했다. 그뿐이랴.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이 국내로 이전된 뒤에도 그의 활동은 계속됐다. 1925년 4월 경성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출석한 19명의 대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모스크바, 시베리아, 경성, 신의주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연구자 이준식의 평가에 따르면, “최초의 전위당 창립의 주역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3

 

김명시의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생 신상조사서. 러시아식 이름은 ‘스베틸로바’이고, 1907년 2월15일생이며, 일본어를 자유롭게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으며, ‘경남 마산 189’에서 출생했고, 아버지는 소상인이라고 적혀 있다. 임경석 제공

 

“최초의 전위당 창립의 주역”

 

긴 옥고를 치른 뒤에도 그의 정체성은 변함없었다. 머잖아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출옥 뒤 1년6개월쯤 지나 다시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앞 인용문에 따르면 “1931년부터 상해에서 발행한 우리 기관지 연락원”으로 일하게 됐다. 상해에서 발간한 기관지란 <콤무니스트>를 가리킨다. 이 잡지는 1928년 12월 조선공산당 지부 자격을 취소한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직접 지도하기 위해 설립한 ‘코민테른 조선위원회’의 기관지였다. 이른바 ‘국제선’이라고 하던, 1930년대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주류라고 칭해도 좋을 대표적인 공산주의 그룹이었다.4 이 그룹은 1932년 여름까지 국내에 20개 미만의 야체이카(세포단체)와 90여 명의 비밀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독고전이 국제선 공산그룹의 국경연락을 주관한 때는 1931년 5월부터였다.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압록강 하구의 삼엄한 국경 경비망을 뚫고, 사람과 물자를 은밀하게 이동시켰다. <콤무니스트> 창간호와 제2·3호 합병호, 제4호가 이 경로로 국내 각 야체이카에 전달됐다. 김형선, 김명시 등을 비롯한 국내 공작 책임자들이 오갔다. ‘이 거점의 노련한 비합법 연계자’라는 평을 들을 만큼 그의 활동상은 빈틈이 없었다.앞서 소개한 기밀문서를 다시 들여다보자. 독고전에 관한 소개에 뒤이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있다. 충격적인 내용이다.

 

1932년에 그자가 우리 동무를 잡아준 사실(그와 서울연락원 사이에 쓰는 비밀접선 암호를 형사에게 주어서 서울서 비밀접선 현장에서 동무가 잡혔다)을 들어, 밀정이란 것을 내가 우리 기관지 <콤무니스트>(Коммунист)에다가 폭로했다.

문장이 복문인데다 괄호 안에 보충 설명까지 하다보니 문맥이 복잡하다. 낱낱이 풀어보자. 1932년 독고전이 ‘우리 동무’를 경찰에 붙잡히게 했다. 비밀접선 암호를 형사에게 건네주었고, 그 탓에 비밀접선 현장에서 ‘동무’가 체포됐다. 김단야는 그가 밀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며, 그 사실을 기관지 <콤무니스트>에 폭로했다는 내용이다.

 

독고전이 동지들을 배신했다는 정보다. 그가 비밀접선 정보를 일본 형사에게 넘겨준 탓에 약속 장소에 나갔던 동지가 체포됐다고 한다. 이때 체포된 ‘동무’는 누구인가?

 

인쇄 거점이 털리고 동지들 하나둘 검거돼

 

김명시(金命時)였다.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뛰어든 25살 여성, 기나긴 옥고를 겪은 뒤에도 굴하지 않고 외국에 망명해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 거인이었다.

 

김명시가 국경연락 책임자 독고전의 배신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는 기록은 그의 동지이자 친오빠인 김형선의 활동 보고서에 쓰여 있다. 그에 따르면 독고전은 비밀접선 암호를 경찰에게 알려주는 방법으로 동료들을 팔아넘겼다고 한다. 두 번이나 그랬다. 한 번은 서울에서 김형선을 노렸고, 또 한 번은 압록강 건너편 안동에서 김명시를 노렸다는 것이다. 김형선은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으나, 김명시는 그만 그의 마수에 걸려들었다.5

 

1931~32년 김명시는 국제선 공산그룹의 국내 파견원으로서 인천을 거점 삼아 지하운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1932년 메이데이(5월1일) 기념투쟁 때 살포한 격문이 문제가 됐다. 국제선 공산그룹의 국내 거점이 경찰에 탐지되고 말았다. 인쇄 거점도 털리고, 동지들이 속속 검거되는 중이었다. 김명시는 국외 탈출을 결심했다. 신의주의 국경연락 거점을 경유해서 상해로 망명할 작정이었다.

 

뒷날 김명시가 남긴 회고담이 있다. “나는 인천으로 와서 동무들과 <콤무니스트> <태평양노조> 등 비밀 기관지를 발행하다가, 5월1일 노동절에 동지들이 체포당하는 판에 도보로 신의주까지 도망갔었는데, 동지 중에 배신자가 생겨서 체포”됐다고 말했다. 김명시는 이때 7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5살부터 32살까지 옥중에서 지내야 했다. 젊은 여성의 꽃다운 시절이었다. 회한에 찬 그의 표현을 들어보자. “나의 젊음이란 완전히 옥중에서 보낸 셈이죠.”

 

독고전의 배신은 동지들의 삶을 구렁텅이로 밀어넣었을 뿐 아니라, 국제선 공산그룹의 활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비밀조직 구성원이 대거 체포됐고, 국경을 통해 이뤄지던 국내외 연락이 더는 불가능하게 됐다. 코민테른이 직접 지도하던 당 재건 운동은 침체에 빠졌다. 독립운동이건 사회운동이건 할 것 없이 인간의 이념적·조직적 운동은 내부자의 배신과 변절로 쇠락하는 일이 많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동지가 적의 편으로 넘어갔을 때, 송두리째 몰락하는 위기에 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밀정 행위로 얻은 것은 무엇일까

 

독고전은 도대체 왜 배신했을까. 밀정 행위로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일신의 안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큰돈을 벌고 싶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독고전의 이후 행적도 암흑 속에 있다. 해방 이후까지 살았는지, 그의 범죄행위는 상응하는 업보를 받았는지 아직 알 수 없다.

 

김단야는 분노했다. 일제의 밀정으로 전락한 독고전의 배신 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기관지 <콤무니스트> 지면을 통해 독고전이 혁명의 대의를 배신하고서, 동지를 경찰에게 팔아넘기고 있음을 동지들 사이에 널리 폭로했다고 한다. <콤무니스트>는 창간호부터 제7호까지 발간됐다. 그중 제2호와 제3호는 합병호로 나왔기 때문에 실제로는 여섯 번 간행됐다. 이 중 코민테른기록관에 보존된 것은 네 개호다. 제5호와 제7호가 빠져 있다. 현존하는 텍스트 속에는 김단야가 말한, 독고전의 배신 행위를 폭로하는 기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 결락된 그 두 호 중 하나에 담겼을 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김단야, ‘1929년에 조선 가서 일하든 경로’, 13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1937년 2월23일2. Член ЦК Коркомсолола Квон-о-сель·Ким-тон-мен(고려공청 위원 권오설·김동명), Испоолкому КИМа(국제공청 집행부 앞), с.

2, РГАСПИ ф.533 оп.10 д.1894, 1926년 1월31일

3. 이준식, <조선공산당 성립과 활동>, 독립기념관, 72쪽, 2009년

4. 임경석, ‘잡지 ‘콤무니스트’와 국제선 공산주의그룹’, <한국사연구> 126, 2004년

5. Kimdanya, Report on the publication of journal “Communist” for Korea, pp.13-14,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94, 1934년 2월8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