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키맨’ 홍도, 베일 속 불꽃같은 삶

초기 사회주의 운동사 의문점 열쇠 쥔 홍진의,

1935년 러시아에서 반혁명 활동 체포 뒤 기록 찾을 수 없어…

해방 뒤 61년 만인 2006년 애국장 받아

 

홍도의 사진, 1921년(27살)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코민테른 파견 대표로 활동하던 시기.

 

노년기의 김철수는 국내 첫 사회주의 단체에 대해 구술 기록을 남겼다. 그에 따르면,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 가을에 사회혁명당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우리 조선 안에 공산주의 비밀결사로는 처음” 조직된 것이었다. 절대 비밀이었다. 어지간한 동지는 다 떼어내버렸다. 3·1운동에 헌신한 이 중에서도 결심이나 각오가 평균보다 약간 더한 수준의 동지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직 ‘사생을 같이할 사람들’만 들였다. 죽음마저도 기꺼이 함께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하는 동지들만 규합했다.

 

김철수 회고담 “오직 사생을 같이할 사람들의 앞자리”

 

구성원은 열대여섯 명이었다. 김철수는 기억을 더듬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밝혔다. 그중 앞자리에 호명한 한 사람에게 눈길이 간다. “저 홍진이라고, 시베리아에서 죽었어. 홍도라고 별명을” 불렀다고 한다.1

 

‘홍진이’라고 적은 것은 구술을 녹취한 사람의 착오였다. 김철수가 의도한 발음은 ‘홍진의’였다. 기록에 따라서는 더러 홍진의(洪鎭義)라고도 표기됐지만, 그의 본명은 ‘홍진의(洪震義)’이다. 동지들 사이에서는 홍도(洪濤)라는 가명으로 즐겨 불렀다. 본명은 아버지가 지었으므로 자식의 의중이 실리지 않는다. 하지만 가명은 자신이 직접 지으므로, 그의 내면 의식이 담기기 마련이다. ‘큰물 홍’ ‘큰 물결 도’라는 글자를 선택한 데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일제의 식민통치 체제를 쓸어버리는 대혁명의 큰 파도를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그 큰 물결이 되려 했다.

 

김철수의 회고담에 따르면, 홍도의 역할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국외 연락이었다. 비밀 사명을 띠고서 “홍도라고 하는 사람이 상해를 갔다 왔”다고 한다. 국외의 한인사회당과 연락해 전국 규모의 통일된 공산당을 조직한다는 사명을 띠고서 왕래했다는 말이다.

 

김철수의 회고담을 다른 관점의 자료로 검사할 가능성은 없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홍도가 작성한 자필 이력서가 남아 있다. 그 속에 홍도 자신의 시선으로 본 전후 사정이 적혀 있다. 왜 중국 상하이에 왕래했는지, 그 의미를 뚜렷이 보여준다.

 

“1919년 2월에 다시 내지에 들어가서 내외지간의 연락 급 3·1운동에 직접 노력하다가, 체포를 피키 위하여 이해(그해) 5월에 다시 상해에 망명함. 1919년 9월에 해삼(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가 이곳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 참가하였으며, 또 입당하였음. 1920년 6월에 한인사회당의 사명을 가지고 비밀히 내지에 들어가서 한인사회당 내지부 조직에 대하여 일하다.”2

 

1919년 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년4개월 동안의 행적을 썼다. 인용문에서 말하는 ‘내지’란 바로 조선 국내를 가리킨다. 국경을 넘어다니면서 참으로 분주하게 투쟁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1930년 작성된 홍도의 이력서 러시아어 번역본 첫 페이지.

 

한자, 러시아어 등 3개 언어로 쓰인 홍도의 1930년 3월20일치 자필 서명.

 

한인사회당과 사회혁명당 연대의 매개 역할

 

이 기록에는 기왕에 어느 역사책이나 논문에서도 밝힌 적이 없는 미지의 중요 사실이 포함돼 있다. 홍도가 1919년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 참석했고, 또 한인사회당 내지부 조직을 위해서 국내로 다시 잠입했다는 진술에 유의하자. 초기 사회주의운동사의 한 비밀을 드러내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독립운동사상 전환점이 되는 결정을 여럿 채택했다. 박진순·박애·이한영 3인 대표단을 러시아 모스크바에 파견해 코민테른(국제공산당)에 가입하게 한 점, 책임비서 이동휘 등을 중국 상하이로 파견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게 한 점, 활동의 중점을 조선 내지에 두려고 노력한 점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주의할 점은 세 번째 사안이다. 종래에는 이 결정 사항이 어떻게 실행에 옮겨졌는지 알지 못했으나, 이제 홍도의 기록을 통해 실마리를 얻게 됐다. 서울 복판에 한인사회당의 내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홍도가 직접 파견됐다고 한다. 김철수가 회고한 국내 최초의 사회주의 비밀결사 사회혁명당이 곧 한인사회당 내지부의 위상을 가짐을 시사한다.

 

이로 인해 초창기 사회주의운동사의 큰 의문점이 해소됐다.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대의원을 파견한 두 개의 단체, 한인사회당과 사회혁명당이 어떻게 연대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사회혁명당은 성립 당초부터 한인사회당과 연계했을 뿐 아니라 그 내지부라는 조직 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관계를 매개하고 실행에 옮긴 이가 바로 홍도였다.

 

홍도의 자필 이력서는 역사학자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흥미롭기 짝이 없다.

 

그는 20살 되던 1914년 서울에서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비밀결사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28년 러시아로 망명할 때까지 쉼 없이 혁명운동에 참여했다. 배달모듬, 신아동맹단, 신한청년당, 한인사회당, 사회혁명당, 고려공산당, 적기단, 조선공산당. 이것이 그가 가담했던 비밀결사 목록이다.

 

이 단체들의 근거지는 러시아를 포함해 동아시아 4개국에 널리 분포했다. 홍도의 동선을 뒤따라가보자. 함경남도 함흥(보통학교), 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 배달모듬), 도쿄(메이지대학, 신아동맹단), 상하이(신한청년당), 서울(3·1운동), 상하이(임시의정원), 블라디보스토크(한인사회당), 서울(사회혁명당), 상하이(고려공산당), 모스크바(국제당 파견 대표), 베르흐네우딘스크(고려공산당 연합 당대회), 상하이(국민대표회), 함흥(노동동무회), 서울(적기단 사건, 서대문형무소), 함흥(조선공산당, 함흥농민조합), 블라디보스토크(망명) 등의 도시가 줄을 잇는다. 어지러울 정도다. 그가 불꽃같은 삶을 영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출옥 후 조선공산당 최고위 간부 대열에

 

30살 되던 해에 홍도는 시련을 겪었다. 1924년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북간도에 본부를 둔 비밀단체 적기단에 연루된 혐의였다. 함흥의 부호 고형선에게서 거액의 군자금을 받아낸 적기단원 이정호를 후원했다는 죄목이었다. 불행한 일이었지만, 다행스러운 점도 있었다. 상하이파 공산당의 비밀 당원이던 홍도는 일본 경찰의 가혹한 취조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당 조직의 노출을 막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으로 홍도는 감옥살이를 겪었다.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서 1927년 8월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옥 뒤 얼마 안 돼 홍도는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1927년 12월 비밀리에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당대회에서 중앙간부 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3 당의 최고위 간부 대열에 올랐다. 그는 합법 운동 내에도 거점을 구축했다. 고향인 함흥으로 되돌아가 현지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 함흥농민조합 위원장에 취임했고, 신간회 함흥지회에서도 위원으로 선출됐다. 합법·비합법 양 방면으로 국내 사회운동에 뿌리를 내리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출옥 1년 만에 홍도는 다시 체포될 위험에 처했다. 이번에는 공산당 조직 자체가 노출됐다. 1928년 4월부터 몇몇 당 간부가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수사망이 조여들었다. 수사망을 피해가며 비밀조직을 지휘하던 홍도는 부득이 그해 7월에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소비에트러시아였다. 8월1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는 환대받았다. 한글신문 <선봉>의 기자로 일한 데 뒤이어,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혁명 이론과 전술을 본격적으로 연수할 기회를 가졌다.

 

다시 김철수 노인의 회고담에 주목해보자. 그는 홍도가 시베리아에서 사망했노라 말했다. 도대체 소비에트러시아로 망명한 홍도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홍도의 러시아 망명 사실은 조선 국내의 지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1932년 3월 서울에서 간행된 월간지 <동광>에는 망명자 홍도의 안부를 묻는 기사가 실렸다.

 

“러시아에는 조선의 선배인 이동휘씨도 있거니와, 청년 활동가로서도 상당한 인재가 집중되어 있으니, 필자가 아는 이름만 얼른 열거하여 보면 윤해, 박진순, 주종건, 홍진의(홍도) 등 제씨가 그것이다. …앞으로 세계전쟁이 인다면 그것은 소비에트러시아의 소위 세계혁명에 대하여는 일대 호기회일 것이므로, 동양 방면에 대한 재러시아 동포의 활동이 상당히 유력시될 것을 넉넉히 추측할 수 있다.”4

 

적기단 사건으로 3년 복역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홍도. 1927년 8월.

 

기대 속에 러시아 망명, 반혁명 활동 혐의로 체포

 

러시아에 망명한 사회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홍진의(홍도)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들 망명자에게 거는 국내 지인들의 기대는 컸다. 앞으로 자본주의 열강의 모순이 격화돼 세계대전이 도래한다면, 세계적 범위의 혁명적 위기가 고조될 것이다. 러시아는 세계혁명의 참모부를 자임했으므로, 그때는 소비에트러시아에 망명한 조선인 혁명가들의 역할이 강력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렇게 기대하고 있음을 본다.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1935년 12월 홍도가 연해주 포시에트 지구 우스치시디미 마을에 거주할 때였다. 두만강 건너 조선~러시아 국경선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웃 마을 베르흐네시디미에 있는 트랙터정비소 정치부 보조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달 19일 홍도는 비밀경찰 기구인 내무인민위원부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반혁명 활동 혐의였다. 스탈린 시기 소비에트 국가폭력이 맹렬하던 때였다. 홍도는 항변이나 해명도 변변히 하지 못한 채 취조를 받았다. 그리하여 체포된 지 11개월 만에 내무인민위원부 처분으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5

 

그 뒤 홍도의 삶에 관한 정보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베리아 깊은 곳 케메로보 수용소에서 복역했다는 기록 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형기를 무사히 마쳤다면 아마 1940년 12월에는 출옥했을 텐데, 과연 그러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홍도가 시베리아에서 사망했다는 김철수의 증언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아마 사실일 것만 같다.

 

그에게 들씌워진 반혁명 혐의는 근거 없는 것이었다. 홍도는 스탈린 사후 소련 정부에 의해 무혐의로 인정받았다. 1955년 10월 범죄구성요건 부재로 판정받아 복권됐다. 그의 조국에서는 훨씬 더 늦게야 명예가 회복됐다.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던 한국 정부는 마침내 해방된 지 61년이 지나서야 태도를 바꿨다. 한국 정부는 2006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애국장을 수여했다.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지운 김철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1999년

2. 洪濤(Мальцев), ‘리력서’, 1930년 3월20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384 л.25-26

3. 김영만·김철수, ‘중앙집행위원 명부’ 1928년 2월24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5 л.9

4. ‘國際波瀾에 부대끼는 海外同胞의 安否’, <동광> 제31호, 1932년 3월

5. ‘홍도 Хон До, 말리체프 Мальцев’,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 (인명편2)>,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47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601쪽, 2019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우물 속 주검을 둘러싼 교활한 각본

‘살모사건’으로 불렸던 송하살인사건, 농민조합을 집단범죄자로 만들기 위한 일제의 계략

1931년 성진농민조합의 메이데이 기념사진. 구성원 가운데 여성이 다수를 차지한 점이 이채롭다. 임경석 제공

 

이른 아침 동네 우물에서 주검이 발견됐다. 1932년 5월23일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송하마을에서였다. 170가구쯤 있는 큰 동네였다. 철길 건너 송상마을까지 합하면 300가구가 넘는 번성한 농촌 마을이었다. “성진농민조합운동의 가장 강력한 근거지요, 검거 바람이 그칠 줄 모르는” 동네로 이름난 곳이었다.

 

주검을 발견한 사람은 이웃집 아낙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코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뜨린 여성은 으레 듣던 출렁하는 물소리가 아니라 둔탁한 충돌음을 들었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우물 속을 내려다봤으나,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우물 귀틀 안에 얼굴을 박은 채 한참 동안 내려다보려니까, 그제야 희멀끔한 것이 시선에 들어왔다. 머리칼이 쭈뼛이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1

 

성진농민조합 검거에서 아들 구하려

 

주검의 주인공은 동네 주민인 농부 허간씨의 아내 김씨였다. 54살의 초로에 접어든, 평범한 농촌 여성이었다. 남편도 있고 다 자란 아들딸을 거느린 유복한 가정의 안주인이었다. 집에는 28살 아들 허철봉을 비롯해서 큰딸 허어금(19)과 작은딸 허주화(17)가 함께 거주했다. 김씨 부인은 조선 여느 집안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특히 아들 사랑이 지극했다.

 

아들 허철봉은 열성적인 운동권이었다. 20살이 되자 청년운동에 참여했고, 민족통일전선 단체인 신간회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머지않아 면 단위 조직의 간부로 성장했다. 1928년 3월11일 열린 성진청년동맹 학중면 지부 설립대회에 참석해 집행위원 24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이듬해 12월24~25일 신간회 성진지회 제4회 대회에서 집행위원 후보로 선출될 만큼 비중이 커졌다. 군 단위 운동단체의 간부 반열에 이름이 오른 것이다. 1931년 사회운동이 농민조합 중심으로 개편될 때도 허철봉은 그 흐름의 한가운데 있었다. 5월30일 성진농민조합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 2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성진농민조합은 조합원 수만도 2천 명에 이르는 큰 단체였다. 지부 조직이 14개고, 기층 세포단체인 반의 수가 45개였다.2 1930년대 격렬한 함경도 농민운동을 대표하는 유명한 농민조합들 가운데 하나였다.

 

김씨 부인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그해 12월 말 어느 새벽이다. 아들 허철봉이 성진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덜컥 체포되고 말았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눈이 펑펑 퍼붓는 날 해가 뜨기도 전인 새벽 5시께 패검(차는 칼) 소리를 요란스레 쩔렁거리며 정복 경찰대 30명이 송하마을을 습격했다.3 이날 청년 30여 명이 체포됐고 그 속에 허철봉이 포함됐다. 검거는 계속됐다. 이른바 ‘성진농민조합 제1차 사건’이다. 1931년 9월에 개시된 검거가 해가 바뀐 뒤에도 계속됐다. 성진군 전역에서 젊은이 700여 명이 체포됐다.

 

김씨 부인은 노심초사했다. 아들의 석방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면 주재소와 읍내 경찰서를 연거푸 찾아다녔고, 경찰에 선이 닿는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했다. 어머니의 노력 덕분일까? 허철봉은 성진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됐다. 여전히 갇혀 있는 다른 수감자의 처지에 비하면 이례적인 조치다. 1932년 5월 초순의 일이다.

 

소설 <설봉산>(1958년 재판)의 마지막 페이지, 탈고 날짜 ‘1955.11.5.’가 기재돼 있다. 임경석 제공

 

일제 경찰은 “딸들이 살해했다”

 

경찰은 김씨 부인 죽음을 살인으로 간주했다. 경찰이 타살로 보는 관점은 사건 당일이 아니라 그 이튿날에야 수립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일 오전 현장에 나타난 주재소 순사는 이 사건을 심드렁하게 대했다. 그런데 하루 만에 태도가 바뀌었다. 이튿날 경찰은 주검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주검은 면 주재소를 거쳐 읍내에 있는 성진도립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의 검시 소견을 얻으려는 목적이다. 시신 이송 과정에 성진경찰서 고등계가 개입했음을 시사한다. 의사는 경찰의 요구에 호응했다. 육안 검시에 더해 해부까지 했다. 그 결과 주검의 옆구리와 후두부에 타박상이 있고 그것이 치명상이라는 검시 소견을 냈다.

 

경찰은 이 소견을 근거로 주검이 타살의 결과라고 못박았다. 남은 문제는, 누가 왜 죽였느냐를 밝히는 것이었다. 경찰은 가족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허어금, 허주화 두 딸이 혐의를 받았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두 자매가 힘을 합해서 곤봉과 기타 흉기로 어머니 김씨를 난타해 기절시킨 뒤, 부엌에 들여다 눕혔다. 그곳에서도 난타를 그치지 않아 결국 22일 밤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 뒤 범죄 사실을 감추기 위해 주검을 동네 우물 속에 버렸다고 했다.4

 

왜 죽였는가. 경찰 조사에 따르면 김씨 부인이 아들의 석방을 위해 농민조합의 비밀을 경찰에게 누설했음이 알려졌기 때문이란다. 피신 중이던 다른 농민조합 간부의 체포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허철봉은 어머니의 행위를 비난했고, 동지들에게 차마 얼굴을 들고 대할 수 없다며 집을 떠나버렸다. 5월17일 일이다. 그 뒤 어머니와 두 딸의 갈등이 깊어졌다. 딸들은 오빠를 동정하고, 어머니를 비난했다. 경찰 취조에 따르면, 갈등은 언쟁에 머물지 않고 폭행 양상으로 번졌으며 급기야 살인사건으로 나아갔다.

 

자매는 살해 혐의를 부인했다. 어머니와 갈등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폭행을 가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어머니는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처가 왜 났는지는 자신들도 모르고, 아마 투신 중에 부딪쳐서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자매는 법정 심문에서도 일관되게 그와 같이 진술했다.

 

그러나 총독부 판사는 자매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피고인들의 유죄를 인정했다. 그리하여 두 자매는 청진지방법원 공판에서 각각 징역 10년형과 7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사건치고 형량이 매우 낮다는 여론 때문이었을까. 경성복심법원에서 행한 공소(항소) 재판에서는 자매의 형량이 더 늘었다. 큰딸에게는 징역 15년형, 작은딸에게는 징역 10년형이 선고됐다.

 

해방 전 함경북도 성진군 지도. 붉은 점 찍은 곳이 성진군 학중면 송하마을이다. 임경석 제공

 

농민운동 추락시킬 호재

 

송하살인사건은 농민운동의 위신을 추락시킬 수 있는 호재였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밀정이라고 어머니를 때려죽이는 것이 주의상으로 보아 옳은 일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저주받을 죄’ ‘뱀같이 쌀쌀한 태도’ ‘동정할 길이 없는 대죄악’ ‘저주하는 분노성’ ‘말세가 된 세상’ 등의 수사로 농민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를 부추겼다.5

 

사건 자체가 갖는 센세이션 때문일까. 다른 신문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논조를 보였다. 언론 보도는 이 사건을 ‘살모사건’이라고 불렀다. 두 자매는 어머니를 살해한 악녀로 지목받았다. 손가락질의 대상이 됐고 사회적으로 고립됐다. 형기를 다 마치고 출소했다면 큰딸 허어금은 34살에, 작은딸 허주화는 27살에 세상에 다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후 삶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경찰과 재판부의 시선이 아닌, 농민운동 쪽 기록은 없을까? 송하살인사건의 진실을 보여주는 자료 말이다. 다행히 있다. 허성택이 1936년에 작성한 성진농민조합 활동에 관한 자전적 기록이다. 허성택은 성진에서 나고 자랐으며, 1931~1933년 성진농민조합에 주도적으로 참가했고, 뒷날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유학했다. 그에 따르면 “송하스파이사건 검속자 구원으로 각 동에서 구조사업”을 행했다.6 ‘송하스파이사건’이란 곧 송하살인사건을, ‘검속자’란 허어금과 허주화 자매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성진군의 여러 마을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구조사업을 수행했다고 한다. 이 기록 안에 두 자매에 대한 비난의 함의는 없었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또 있다. 작가 한설야가 집필한 <설봉산>이라는 장편소설을 주목할 만하다. 1956년 북한에서 간행된 이 작품은 일제하 성진농민조합운동을 소재로 다뤘다. 특히 송하살인사건 관련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설 형식을 띠고 사건이 일어난 지 2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나왔음에 유의해야 한다. 다만 일정한 조건하에선 사실을 반영한다고 봐도 좋으리라. 왜냐하면 작가가 집필에 앞서 성진농민조합운동 자료를 조사하고 참가자들의 증언을 널리 청취했기 때문이다. <설봉산> 내용에서 경찰 자료와 신문 보도 등으로 교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실로 간주해도 좋다고 본다.

 

예를 들면 이런 정보다. 김씨 부인은 자살하기 며칠 전 농민조합 사문위원회에 출석했다. 마을 뒤 산중에 구축한 대형 토굴에서였다. 50~60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그 자리에 여러 마을의 농민조합 간부와 열성자들이 모였다. 불을 켜지 않아서 서로 얼굴도 볼 수 없고, 어디에 누가 앉아 있는지도 알기 어렵게 만든 조건에서 문답이 이뤄졌다. 농민조합 간부를 하나 잡아주면 아들을 석방해준다는 약속을 받은 일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김씨 부인은 그 사실을 끝내 부인했다.

 

오욕을 짊어질지언정

 

성진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은 교활한 취조 전략을 구사했음이 드러났다. 그들의 첫 노림수는 농민조합을 집단범죄자로 낙인찍는 것이었다. 김씨 부인의 밀정 행위를 알아챈 조합원들이 작당해 그를 타살했다는 각본을 짰다는 것이다. 그러나 딸들은 끝내 이 각본에 응하지 않았다. 아무리 고문해도 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부득이 차선의 계책을 택했다. 딸들을 살해범으로 만드는 길이었다. 요컨대 허씨 자매는 스스로 오욕을 짊어질지언정 무고한 농민조합에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은 결단코 거절했던 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한설야, <설봉산>, 조선작가동맹출판사, 355쪽, 1958년(재판). 이 자료를 성균관대 김성수 교수에게서 받았다. 감사드린다.

2. ‘성진농민조합 사건 81명, 10일 송국’, <동아일보> 1932년 9월14일

3. ‘경관과 지주협력 50여 촌민 검거’, <조선일보> 1932년 1월3일

4. ‘친모 살해한 양 자매, 控訴公判 금일 개정’, <동아일보> 1932년 11월15일

5. <매일신보> 1932년 11월19일

6. 김일수, <연역(이력서)>, 6쪽, 1936년 4월3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40 л.12-20об

 

 


임경석의 역사극장

형무소에서도 세 개의 이름을 가졌던 농민운동가

농민운동 지원 덕에 모스크바 유학 갔다 온 허성택, 러시아에서는 김일수로 학업 뒤

감옥에선 허성택·허국택·허영식으로 기록, 해방 후 21만 조합원 ‘전평’ 위원장

 

1934~1937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시기의 허성택. 사진 뒷면에

러시아어 필기체로 ‘김일수’라는, 모스크바에서 사용하던 이름이 적혀 있다. 임경석 제공

 

허성택은 해방 후에 전평 위원장을 지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전평이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준말로서 해방되던 그해 11월에 설립된 전국적 노동자단체였다. 16개의 산업별 단일노동조합과 1개의 합동노동조합을 아울렀고, 그 내부에 194개의 분회 조직과 21만 명의 조합원을 지닌 힘있는 단체였다. 전체 노동자 수 추정치가 212만 명이던 때였다.1 10%의 조직률을 자랑하고 있다. 허성택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해방 전에 무슨 일을 했기에, 해방공간에서 그와 같이 영향력 있는 단체의 지도자로 나설 수 있었을까?

 

‘언변 좋아 선동 분야 사업 종사 적합’ 평가

 

양복을 갖춰 입은 젊은 남성의 사진이 있다. 이제 막 이발소를 다녀온 듯, 잘 다듬은 하이칼라 머리가 눈에 띈다. 양복 깃이 넓고, 십자 무늬로 멋을 낸 넥타이도 두껍다. 1930년대 중엽 그 당시 유행하는 패션인 것 같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갸름하게 잘생긴 얼굴이다. 하지만 왠지 부자연스럽다. 흑백사진이라 불분명하지만 얼굴색이 검은 편이라서 그런 것 같다. 늘 양복을 입는 사람이라면 느껴질 자연스러움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서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복장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진 뒷면을 뒤집어 보았다. 이름이 적혀 있다. 러시아어 필기체로 ‘김일수’(Ким-Ир-Су)라고 쓰여 있다.

 

‘김일수’는 허성택이 러시아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시기에 사용한 이름이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재학할 당시 작성한 자필 이력서가 그를 증명해준다. 거기에는 자신의 본명이 허성택이고 그 외 허국봉, 허성봉이라는 이름도 썼으며, 지금은 김일수라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쓰여 있다.2

 

실제로 공산대학의 각종 기록에서는 일관되게 김일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입학 첫해 겨울에 작성된 학적부 기록을 보면, 김일수의 학업 성적은 ‘정치 상식’에서는 최우수, ‘모국 문제’에서는 우수 평점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5년 6월7일자 평정서에도 그의 이름은 김일수로 표기돼 있다. 학과장 김단야가 작성한 평정서에 따르면, 김일수는 입학 때부터 그때까지 학업에서나 학과 내 정치·사회 생활 분야에서 가장 열성적인 학생 집단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학업 성취가 빨랐다. 신입생 때에는 지식이 부족했으나, 그사이 큰 진전을 봐서 독립적으로 소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한다. 다만 문장력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문필력은 그저 그렇습니다만 언변은 좋습니다”라고 기재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졸업 이후에는 다른 어떤 업무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선동 분야 사업에 종사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3

 

공산대학 내에서만이 아니었다.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동안 줄곧 그 이름을 사용했던 것 같다. 보기를 들면 국제당 제7차 대회에서도 그랬다. 허성택은 1935년 7월25일부터 8월21일까지 개최된 그 국제대회에 조선을 대표하는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는 대의원 신상 조사서를 작성하도록 요구받았다. 18개 항목에 걸쳐서 여러 가지 신상 정보를 기재하도록 인쇄된 서식이었다. 그는 각 항목에 응답한 뒤 이 문서의 마지막 페이지 날짜 및 서명란에 ‘1935년 7월17일, 김일수’라고 적었다.4

 

국제당 제7차 대회는 파시즘의 위협적인 대두에 맞서서 ‘인민전선 정책’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국제대회였다. 그 정책은 조선 같은 식민지 처지에 있는 나라에서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민족통일전선 정책’의 부활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허성택의 출석은 눈길을 끈다. 그가 앞으로 민족통일전선 정책의 부활을 선도하는 역할을 맡게 되리라고 예측되기 때문이다.

 

허성택이 1936년 4월3일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재학 중에 작성한 자필 이력서. 임경석 제공

 

농민운동을 주도한 사회주의 비밀결사

 

허성택이 모스크바에 유학할 수 있었던 동인은 무엇일까. 돈이 많거나 우수한 시험 성적을 올렸다고 해서 모스크바 유학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혁명운동에 대한 헌신성과 투쟁 경력이었다. 허성택이 선발될 수 있었던 것은 함경북도 성진군의 농민조합운동에 헌신한 덕분이었다.

 

성진 농민조합운동은 1931~1932년 두 해 동안 절정에 달했던 대중적인 농민운동이었다. 그것은 1930년대 함경남북도를 휩쓴 혁명적 농민운동의 한 고리였다. 그중에서도 함경남도의 단천, 영흥, 정평, 홍원군과 함경북도의 성진, 길주, 명천군의 농민운동이 특히 거셌다. 이 운동들은 예외 없이 사회주의 비밀결사가 주도했다는 특징이 있다. 함경도 해안의 농업지대가 광범하게 혁명화했던 것이다.

 

허성택은 성진군 토박이였다. 아버지는 1.3정보(4천 평) 규모의 농지를 가진 소농이었다. 여러 자식 가운데 맏아들만 중등교육까지 뒷바라지했다. 보통학교를 거쳐 길주농업학교를 졸업하게 했으나, 둘째 아들인 허성택부터는 교육시키지 않았다. 아니, 돈이 없어서 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허성택은 어릴 때는 소를 먹이러 다녔고, 봄가을에는 나무하러 다녔으며, 10살 때부터 농업 노동에 참가했다.

 

그는 교육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부모는 돈이 없다고 다니지 말라고 하는데도 고집부려서 겨울철을 이용해 한문 서당을 다녔다고 한다. 3개월 통학하는 데 4원의 학비가 들었다. 12살 때부터 6년간 그렇게 했다. 그래서 성인이 됐을 때 국한문 혼용으로 쓰인 일간 신문 지면을 읽을 수 있었다. 일본어는 읽지 못하지만, 한자가 많이 섞인 책은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정도였다.

 

허성택이 학식이 있어서 농민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아니다. 소년기 이래 농민 사회의 네트워크에 익숙해 있었고, 헌신적으로 농민조합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그는 10대 중반부터 신양소년단에 참가했고, 20살에는 성진청년동맹 학상면지부에 가담했다. 농민조합에 가입한 것은 23살부터였다. 한번 발을 내디딘 이후에는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각종 농민운동에 참여하다 감옥으로

 

보기를 들어보자. 1930년 1월, 출옥동지 환영회를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서대문형무소 복역을 마치고 귀환한 3인의 출옥자가 성진역에 도착하자 2천 명 군중을 이끌고 붉은기를 휘날리며 굉장한 시위행진을 벌였다. 허성택은 그 행진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행진은 대대적인 검거 사건의 단서가 됐다. 이른바 제1차 성진농조 검거 사건을 초래했다.

 

그해 5월에는 메이데이 기념식을 조합원끼리만 산속에 들어가서 비밀리에 거행했는데, 어떤 경로인지 경찰에 발각돼 쫓기게 됐다. 허성택은 이때부터 ‘망명’하게 됐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망명이란 국외로 피신하는 것이 아니라 산속에 토굴을 파는 등으로 거처를 마련하여 산중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1931년 9월에는 학중면 농성동의 지주 김상초 일족 반대운동에 가담했다. 이른바 ‘농성시위사건’은 농민 수백 명이 몽둥이를 들고 지주 쪽 아성인 농성동을 습격한 사건이다. 양쪽에 충돌이 일어나 다수의 부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지주 김상초는 기독교회 장로인데, 교회와 교인들을 이용해 재산을 증식하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농민조합의 비밀을 누설하는 등 관청과 유착한 인물이었다.

 

1932년 6월에는 성진군 농민조합 중앙부의 임원으로 선임됐다. 제1차 성진농조 사건으로 타격을 받은 집행부 조직의 재건에 참가한 것이다. 그는 아지프로(선전선동) 부장을 맡았다. 그뿐 아니라 사회주의 비밀결사에도 가입했다. 성진군의 공산당 준비기관 설립에 참여해 자위부와 농민부 책임을 맡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외에도 허성택이 참여하거나 지도한 투쟁 사례는 더 많았다. 차용증서 36종, 액면가 6천여원의 빚문서 소각 투쟁, 학동면 수립조합 반대투쟁, 신작로 개설 반대운동, 수동마을 소작쟁의 등이 있었다.

 

옥중에서 촬영한 한 남성의 사진이 있다. 머리카락을 박박 밀었고 죄수가 입는 수인복 차림이다. 가슴에 성명과 수인번호를 기재한 표시판을 달았다. ‘허국택(許國澤) 729’라고 적혀 있다. 머리 모양은 길쭉한 말머리형이다. 코가 쭉 내리뻗고 좀 두꺼운 듯한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건강해 보이는 30살 청년이다. 눈동자가 카메라 아래쪽을 응시해 표정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간수의 지시에 순응하는 듯하지만 내면의 자아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고투하는 표정으로 읽힌다.

 

허국택이란 이름은 허성택이 모스크바에서 되돌아온 이후 국내에서 사용하던 가명 가운데 하나였다. 허영식이라는 이름도 썼다. 그래서일까. 형무소 당국이 작성한 허성택의 수감자 카드는 세 종류가 남아 있다. 각각 허성택, 허국택, 허영식이라는 서로 다른 표제 이름을 달고 있지만 내용은 사실상 동일하다. 옮겨적는 과정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1938년 6월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허성택의 사진. 치안유지법,

폭력행위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았다. 임경석 제공

 

출감하자마자 예방 구금

 

허성택이 모스크바에서 귀환한 때는 1937년 3월께다. “김일수 동무의 출발 및 파견시 행동 지침에 관한 요청을 허락한다”는 공문서가 발급된 시점이 그해 3월8일이다.5 그로부터 얼마 안 된 시점에 국경을 넘어서 조선으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그는 지체 없이 함경도 일원에서 사회주의 비밀결사 운동에 복귀했다. 각 군에 비밀리에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복원하는 사업이 그 핵심이었다. 그러나 활동 기간이 길지 못했다. 얼마 안 돼 성진경찰서에 검거되고 말았다.

 

그의 혐의가 형무소 수감자 카드에 적혀 있다. “공산주의에 공명하고 조선독립을 열망하는 자이고, 성진 농민조합원으로서 학교급 문중의 채권 장부를 소각·폐기하고 자기 행위에 방해되는 자를 구타하여 상해를 입혔다”는 내용이다.6 구체적인 혐의 사항이 모두 1931~1932년의 농민조합 활동에 관련돼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 경찰은 모스크바 유학과 국제당 제7차 대회 사안은 전혀 탐지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허성택의 출소 예정일은 1942년 6월6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41년 3월부터 시행된 이 법령은 ‘재범의 우려가 현저하다’는 검사의 판단만으로 인신을 구속하는 악법이었다. 허성택도 그에 해당했다. 일본 관헌 쪽의 치열한 전향 공작을 뚫고 끝까지 비전향을 고집했던 것 같다. 그는 출감하자마자 예방 구금됐다. 다시 감옥에 갇혔다. 기약 없는 수감생활이 계속됐다. 그는 해방돼서야 비로소 감옥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안태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현장에서미래를, 2005(제2판), 100쪽

2. 김일수, ‘연혁’, 1936년 4월3일, 1-15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40 л.12-20об

3. Зав.секцией Ким-Даня(학과장 김단야), Харатеристика Ким-Ир-Су(김일수 평정서), 1935.6.7.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134 л.10

4. Анкета Ким-Ир-Су(김일수 신상조사서), 1935.7.17, РГАСПИ ф.494 оп.1 д.480 л.72-73об

5. Отношение от 8/Ⅲ-37 г. за N4/585 (1937년 3월8일부 공문서, 번호 4/585),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134 л.2

6. ‘許國澤’(隆熙 2년 5월16일생),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임경석의 역사극장

암살용 사제폭탄과 함께 등장한 이름 ‘의열단’

일본 경찰이 대경실색한 대규모 폭발물, 김원봉이 밝힌 사건의 진상

 

갸름한 술병 모양의 암살용 폭탄(위)과 대형 통조림 모양의 파괴용 폭탄(아래). 임경석 제공

 

의열단 사건이란 1923년 3월에 발각된 폭발물 비밀 반입 사건을 가리킨다. 언론매체에서는 으레 의열단 사건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제2차 대암살·파괴 계획’이라고 지칭했다. 그것은 1920년 6월 ‘제1차 암살·파괴 계획’(일명 밀양 폭탄 사건)에 뒤이어, 의열단이 두 번째로 주도한 더욱 큰 규모의 의열투쟁 계획이었다.

 

김상옥 이어 또 폭파 계획 “끈기도 무섭다”

 

계획이 발각된 때는 1923년 3월15일이다. 김상옥 사건에 대한 총독부의 보도 금지가 해제된 날이기도 했다. 김상옥 사건이란 1월17일 삼판통(현재 서울 용산구 후암동)과 1월22일 효제동에서 벌어진 총격전을 아울러서 부르는 명칭인데, 두 달간 줄곧 보도가 금지됐다. 일본 경찰 간부 4명이 숨지거나 중상을 입은데다, 일본 경찰 수천 명이 동원돼 관련자 체포에 혈안이 됐던 사건이다. 그 보도 금지 조처가 이날 풀렸다. 일간신문들은 앞다퉈 호외를 발간했다. 대문짝만한 굵은 글자로 김상옥 사건의 전말을 전하는 기사와 사진을 내놓았다.

 

그 지면 한쪽에 이채로운 기사가 실렸다. ‘관공서 폭파 계획 발각’이라는 제목 아래 총독부 경무국의 또 다른 발표 내용이 자그맣게 게재됐다. 국경지대와 경성 시내에서 폭발물 수십 개와 권총, 탄환, 불온 유인물 등이 대량 압수됐고 관련자 다수가 체포됐다는 내용이었다. 의열단 사건에 관한 첫 보도였다.

 

비록 작은 기사였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컸다. 온 경성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상옥 사건이 일단락되자마자 또 다른 의열투쟁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의열투쟁 사건이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현실이 사람들에게 경외감마저 가져다줬다. 일간지의 한 편집기자는 “한 가지 사건이 겨우 끝나면 또 한 가지 사건이 뒤를 이어 일어나니, 경관의 괴로움도 많으려니와, 뒤를 이어 계속하여 일으키는 사람들의 끈기도 무섭다”고 논평했다.1 신문기사는 경성의 민심이 소란하고 흉흉하다고 전했다.

 

두 군데였다. 국경도시 신의주와 식민지 수도 경성, 두 도시에서 대규모 폭발물이 은닉됐음이 드러났다. 신의주경찰서는 3월14일 밤에, 경기도경찰부는 3월15일 새벽에 일제히 검거 작전에 착수했다. 그 결과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올렸다. 폭탄 36개, 폭탄장치용 시계 6개, 권총 5자루, 실탄 155발, 뇌관 6개, ‘조선혁명선언’과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라고 제목을 단 불온 문서 900여 장을 압수했다. 또 연루 혐의자로 조선인 18명을 체포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폭탄이었다. 한두 개가 아니라 무려 36개였다. 경찰은 폭탄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전문가들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폭발물은 용도에 따라 세 종류로 이뤄졌고, 각자 놀랄 만한 위력을 가졌음이 밝혀졌다.

 

의열단 사건의 세 주체 가운데 하나인 조선공산당(내지당) 지도자 김한. 임경석 제공

 

파괴용·방화용·암살용으로 분류된 폭탄

 

하나는 경찰의 이름 붙이기에 따르면 ‘파괴용’이었다. 대형 통조림처럼 생겼는데, 셋 중에서 가장 크고 무거웠다. 무게가 3.06㎏이었다. 일본군이 쓰던 대정 10년도(1921년) 제작 ‘10년식 수류탄’이 530g이었으니, 그보다 6배나 무거웠다. 사람이 팔을 휘둘러 던지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미뤄보아 투척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내부 충전재로 젤리그나이트(Gelignite)가 가득 들어 있었다. 조물조물 빚어 형태를 만들 수 있는 가소성 폭약으로, 폭발력이 강하고 외부 충격에 저항성이 뛰어난 맹렬한 폭약이었다.2 내부 바닥에는 기폭용 뇌관이 장치돼 있었다. 요컨대 대형 통조림 폭탄은 은밀한 곳에 숨겨놓았다가 도화선이나 전기 발화 기구 등을 써서 기폭시키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철교나 건축물 폭파에 적합했다. 폭탄장치용 시계를 도화선에 연결해 예정된 시간에 폭발시킬 수도 있었다. 압수된 폭발물 가운데 2개가 이 유형에 속했다.

 

다른 하나는 ‘방화용’이었다. 외부에 발화용 돌출 장치가 있는 대추씨 모양의 폭탄인데 무게는 980g이었다. 이것은 곧바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감정을 맡은 폭약 전문가는 군용 수류탄과 매우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돌출부를 뽑아내거나 외부에 드러난 나선 장치에 힘을 가하면, 판자 모양의 격철이 회전하면서 내부에 있는 뇌관을 쳐서 발화시키는 장치가 내장돼 있었다. 그 폭발로 표면의 철갑이 다수의 파편이 되어 살상용으로 쓸 수 있고, 그와 동시에 불길이 맹렬히 일어나서 주위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었다. 폭약 전문가는 이 폭탄이 고관의 마차나 자동차를 표적으로 삼아 투척하기에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그 효력을 예상하자면, 폭발 위치에서 반지름 4~5m 이내의 사람은 확실히 살해할 수 있고, 22~23m 이내의 사람은 살해하거나 중상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하나는 ‘암살용’이었다. 갸름한 술병처럼 생겼는데, 모양만 다를 뿐 기계부 발화장치는 앞에서 말한 ‘방화용’과 동일했다. 무게는 850g으로 세 종류 폭탄 가운데 가장 가벼웠다. 몸통 부분에는 폭약을 채워넣었고, 잘록한 입구 모양의 약실 내에는 다량의 황린을 담았다. 황린이란 노란색을 띤 화학물질인데 독성이 강하고 공기 중에 발화하는 특성이 있다. 한번 폭발하면 강철 파편 조각과 함께 황린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장치였다. 황린이 인체에 조금이라도 닿으면 곧바로 발화해 뼛속까지 타들어가게끔 의도된 것이었다. 결국 인 중독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폭탄이었다.

 

일본 경찰은 대경실색했다. 이처럼 살상력 높은 폭탄을 범죄자들이 어떻게 획득할 수 있었을까? 폭약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폭탄들은 어느 열강의 군용 기성품이 아니었다. 사제 폭발물이었다. 경찰은 체포된 혐의자들의 입을 통해 진실을 알려 했다. 하지만 속 시원히 진상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저 유대계 러시아인 폭약 전문가가 중국 톈진 방면에서 제작한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었다.

 

의열단 사건의 한 주체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시당)의 내지부 위원이자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부 황옥. 임경석 제공

 

자금은 소비에트러시아가, 제조는 헝가리 청년이

 

뒷날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이 폭탄들을 어떤 경로로 얻었는지 술회했다. 해방 직후 작가 박태원과 한 수차례 인터뷰에서다. 성능 좋은 폭발물을 입수하는 건 의열투쟁을 성공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예컨대 1921년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이 김익상의 결사적인 모험 끝에 단행됐지만 겨우 회계과 마룻바닥에 작은 구멍을 뚫고 사무실 집기를 부수는 데 그쳤음을 보라. 폭탄 성능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두 개를 던졌는데, 한 개는 불발이었다. 위력적인 폭탄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자금과 기술이 필요했다. 자금 문제는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의 원조에 힘입어 해결할 수 있었다. 조선혁명자금 제2회분 26만원을 관장한 한형권의 결산보고서에 따르면, 4만6700원을 의열단에 지급했다고 한다.3 지방부 신문기자 월급이 40원, 사무관급 관료 월급이 50원 하던 때다. 오늘날 현금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23억원에 해당한다. 이 금액은 폭발물 전문가 고용비, 폭발물 재료비, 중간 연락거점 유지비, 운송비 등에 지출됐다.

 

기술 문제를 해결한 폭약 전문가는 헝가리 청년 ‘마쟈르’였다. 중국 상하이 프랑스조계의 서양식 주택을 임차해 그곳에서 폭발물을 제조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마쟈르라고 불렸다는 점 외에 그의 신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의열단 사건의 숨겨진 논점 가운데 하나는 주체 문제일 것이다. 강력한 폭발물을 국내에 반입해 암살과 파괴를 실행에 옮기려는 이 거창한 의열투쟁의 주도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다. 아니, 의열단 사건의 주도자는 그 단체의 리더인 김원봉이 아닌가, 그 외에 달리 주도세력을 설정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의열단 단독 주도론의 기원은 사건 발발 당시 일본 경찰의 관점에서 연유한다. 경찰 당국은 이 사건을 가리켜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열단이 러시아공산당에서 자금을 받아서 대관을 암살하고 관공서를 파괴함으로써 조선을 적화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한 음모”라고 간주했다.4 또 경찰과는 정반대 입장에서 작성된 기록 <약산과 의열단>도 마찬가지다. 그 사건은 의열단의 제2차 암살·파괴 계획이며 시종일관 김원봉 단장의 다각적인 노력의 결과로 이뤄진 것으로 묘사됐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건 가담자들은 의열단원이거나 개인적 협력자들로 이해된다. 무산자동맹회장 김한, 경기도경찰부 소속 경부 황옥 등의 가담이 개인적 협력의 두드러진 사례로 간주된다.

 

두 공산당 주요 간부들 참여 의미는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의열단 사건의 피고인은 18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몇몇 사람은 의열단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치단체의 구성원이었음이 확인된다. 황옥은 이시당(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내지부의 위원이었고, 장건상은 이시당의 최고 간부인 중앙위원이었다. 김시현과 권정필은 이시당의 국내 활동을 위해 1922년 3~5월 잠입한 당원이었다. 말하자면 의열단 사건 가담자 가운데 적어도 4명은 이시당의 간부이거나 중요 당원이었음이 뚜렷하다.

 

김한의 협력도 개인적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망명자 중심의 양대 고려공산당(상하이파, 이르쿠츠크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조선공산당(일명 내지당, 중립당)의 간부였다. 단지 간부의 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아쉬움이 느껴지는 영향력 있는 간부였다. 1922년 당시 국내 사회주의운동을 이끄는 양대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요컨대 1923년 의열단 사건을 의열단이 단독으로 이끌었다고 보는 것은 사실과 배치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의열단과 더불어 두 공산당(이시당, 내지당)이 ‘제2차 암살·파괴 계획’의 공동 주도세력이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휴지통’, <동아일보> 1923년 3월16일

2. 明石東次郞 외, ‘爆彈鑑定書’, 1923년 3월21일. <정보(경찰부의 1부)>, 경성지방법원검사국, 1923년(아세아문제연구소 희귀문헌 29)

3. 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 과정과 참가 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44쪽, 2009년

4. ‘의열단사건 내용발표’, <동아일보> 1923년 4월12일 호외

 

 

 

임경석의 역사극장

조훈이 두 차례나 국내 잠입했던 이유는

‘국제공산청년회’ 조훈의 두 번의 서울 비밀 잠입, 그 목적은

 

위조증명서에 첨부된 조훈의 사진. 중국식 교복을 입고 안경을 쓴, 유학생 분위기를 잘 자아내고 있다.

 

조훈이 비밀활동을 위해 서울에 처음 잠입한 때는 1922년 7월이었다. 26살 때의 일이었다. 그는 밀입국하던 전후 사정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1921년 8월 국제당 극동비서부에 의해 국제공청 해외뷰로 전권위원 자격으로 상해에 파견됐다. 1922년 7월 말 국제공청 해외뷰로 업무차 서울에 체류했다. 9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공청 제3차 대회에 파견됐다.”1

 

이력서 등속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건조한 문장이다. 하지만 문장마다 두텁고 복잡한 서사가 배후에 깔렸음을 느끼게 한다. 국제당, 국제공청, 상해, 모스크바 등의 어휘가 그런 느낌을 준다.

 

서울에 몰래 들어온 당시 그의 직책이 드러나 있다. ‘국제공청 해외뷰로 전권위원’이었다. 국제공청이란 ‘국제공산청년회’라는 단체의 줄임말로, 1919년 11월 독일 베를린에서 창립대회를 가진 국제기구였다. 1921년 7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대회부터 비(非)서구 여러 민족의 사회주의 청년운동도 포함하는 명실상부한 국제기구가 됐다. 조훈은 바로 그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4년 만에 벌목 노동자에서 국제공청 조선 대표로

 

놀랍다. 32명의 사관생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랄산맥 페름현 나제진스크 목재소에서 벌목노동에 종사하던 무명 청년이 불과 4년 만에 국제대회의 조선 대표로 선임된 점이 말이다. 도대체 4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관생도 다수가 연해주로 되돌아간 데 반해, 조훈을 비롯한 4명의 생도는 현지에 잔류하는 길을 택했다. 그 의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 상급학교 진학을 희망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들은 시베리아의 대도시 예카테린부르크로 나아갔다. 그곳에서 세탁소 고용원, 담배말이 노동 등에 종사했다. 러시아 내전이 소용돌이치던 시절이다. 조훈도 시베리아 일대에서 내전에 휩쓸렸다. 적위파 일원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한때 재판도 없이 총살당할 뻔한 위기도 겪었다. 1919년 10월에는 이르쿠츠크에서 평생의 동지 남만춘을 만났다. 그보다 5살 연상의 믿음직한 선배였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상 ‘이르쿠츠크파’라고 불리는 공산주의 그룹의 중추 멤버로 성장했다. 조훈이 국제공청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나가게 된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제2차 대회에서 조훈은 국제공청 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아울러 이르쿠츠크에 있는 국제공청 극동비서부 위원직도 차지했다. 이 기관은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청년운동을 지휘하는 부서였다. 조훈이 관장하는 지역은 그의 조국인 조선이었다. 조선 내지에 국제공청 지부를 결성해 신진 세대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을 보급하는 것이 그의 소임이었다.

 

조훈은 기민한 사람이었다. 국제공청 제2차 대회가 끝난 지 불과 한 달 만에 고려공산청년회 집행부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1921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였다. 집행부를 ‘중앙총국’이라고 불렀다. 위원은 5명이었다. 국제공청을 대리하는 조훈 자신 외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파견한 위원 1명, 각지 공청 세포기관에서 발탁한 위원 3명이 구성원이었다. 상하이 공청 세포기관에서 온 박헌영이 그 속에 포함된 점이 이채롭다.2

 

고려공청 중앙총국의 긴급한 과제는 활동 근거지를 조선 내지로 옮기는 데 있었다. 조훈은 그 과제 수행을 위한 거점으로 상하이를 선택했다. 국내로 공청 기반을 옮기는 데는 그곳이 최적의 중개 기지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해 각종 단체와 비밀결사가 잠행하는 곳이고, 갖가지 이상을 품고서 몰려온 조선인 망명객과 청년들이 은신하는 대도시였기 때문이다. 조훈은 중앙총국 위원진을 재구성했다. 5명이었다. 국내 공작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인물들로 새로운 진용을 짰다.

 

1922년 7월 조훈이 첫 번째 국내 잠입 때 사용한 위조 신분증. 중국 광둥중학교 2학년을 수료한 유학생 김창일로 위장했다.

 

총국을 베이징에서 서울로, 중개기지는 상하이

 

1922년 중앙총국 소재지를 국내로 이전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중앙총국 5명 위원 가운데 조훈은 상하이에서 국제공청과의 연락을 맡고, 다른 4명은 모두 국내에 잠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원활하게 집행되지 못했다. 책임비서 박헌영과 총국의 두 위원 김단야와 임원근이 국경선을 넘는 도중에 체포됐기 때문이다. 잠입에 성공한 위원은 고준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혼자로는 역부족이었다. 수개월 동안 고준이 조직한 세포단체는 단 1개에 지나지 않았다.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조훈은 1922년 7월 조선으로 직접 잠입하기로 결심했다.

 

밀입국 때 사용한 위조 신분증이 남아 있다. 그는 중국 광둥중학교에 유학 중인 조선의 전라북도 무주군 출신 김창일(25)로 행세했다. 신분증은 정교했다. 한문 활판으로 인쇄된 증명서 양식에 고유명사를 세필로 써넣은 증명서였다. 인지 석 장이 붙어 있고, 광둥중학교장 야오궈시의 개인 도장에다, 학교장 직인까지 붉게 찍힌 감쪽같은 재학증명서였다.3 2학년을 마친 뒤 질병으로 휴학했으며, 치료차 고국에 돌아온 중국 유학생인 것처럼 꾸몄다.

 

서울에 무사히 안착한 조훈은 공청 조직운동의 방향을 바꿨다. 독자적으로 세포를 늘려가는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국내에서 왕성한 사회주의 운동 열기를 이끄는 비밀결사 대표들을 고려공청 중앙총국 위원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그해 8월 새로운 중앙총국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 세 번째 형성된 간부진이라는 의미로 ‘고려공청 제3차 중앙총국’이라고 불렀다. 위원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5명이었다. 종래의 두 위원에 더해 3명을 받아들였다. ‘내지당’ 혹은 ‘중립당’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신생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대표 김사국, 대중적 영향력을 지닌 공개단체 노동연맹회 대표 전우, 서울청년회 대표 김사민이 그들이다.4 책임비서에는 김사민이 선임됐다. 당시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실제를 잘 반영한, 최선의 인선이었다고 생각된다.

 

서울 한복판에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설립한 직후 조훈은 다시 국외로 빠져나갔다. 국제공청과의 연락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1922년 9월의 일이었다. 서울에 비합법적으로 체류한 지 한 달 남짓했을 뿐인데도, 획기적인 성과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국경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의 어깨에는 그해 12월 개최 예정인 국제공청 제3차 대회에 출석할 고려공청의 대표자라는 자격이 부가돼 있었다.

 

일상생활 중에 자연스레 찍은 조훈 사진.

 

의열투쟁과의 제휴를 둘러싸고도 이견

 

조훈이 다시 국내로 잠입한 때는 1년6개월이 지나서였다. 1924년 2월 두 번째로 서울에 나타났다. 그의 <자서전>을 들여다보자.

 

“1924년 2월부터 5월까지 국제공청집행부 전권위원 자격으로 조선에서 활동했다. 6월 국제공청 제4차 대회에 참석했고, 국제공청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두 번째로 잠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조선 내지에 설립한 고려공청 중앙총국 위원이 둘로 분열됐기 때문이다. 분열을 낳은 문제는 국외 기반의 기존 두 세력(상해당·이르쿠츠크당)을 공산당 건설에 포함할지였다. 책임비서 김사민과 당대표 김사국은 두 세력의 배제를 주장했다. 왜냐하면 공고한 공산당을 건설하려면 국내 대중에 기반을 둬야 하고, 국외 두 세력은 과오가 많았기 때문이다.

 

의열투쟁의 전술 적합성 문제도 분열을 낳은 또 하나의 진원이었다. 김사국 그룹은 의열투쟁을 반대했다. 그것은 대중 속에 투쟁 의욕을 북돋기는커녕 광범한 대중과 혁명 세력을 유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었다. 따라서 의열단과 제휴해 폭탄 반입을 추진하는 내지당의 다른 간부들에게 반발했다. 김사국과 김사민은 고려총국 중앙총국 위원직을 사임했고, 내지당에서도 탈당했다. 대신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을 결성해 독자 노선을 걸었다. 이 비밀결사는 합법단체 서울청년회를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했기에 ‘서울파’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분열은 조선혁명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비밀운동은 물론이고 공개 합법 영역에도 그랬다. 국제공청 집행부는 갈라진 두 그룹이 통합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양자 통합을 실행하는 책임을 조훈에게 부여했다. 조훈은 ‘국제공청 집행부 전권위원’ 자격으로 통합 공청을 실현하는 소임을 띠고서 국내로 잠입했다.

 

조훈은 자신의 소임을 두 단계로 나눠서 추진했다. 첫 단계는 이완된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책임비서 직위에 있던 신철을 해임하고, 중앙총국을 새 위원들로 재조직했다. 1923년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책임비서 자격으로 국내 공산청년운동을 이끈 신철이 해임된 이유는 ‘사보타주’ 혐의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제공청 집행부 전권위원 조훈의 권한 행사 범위가 넓고도 강력했음을 잘 보여준다. 새로운 중앙총국 위원진의 중핵은 일찍이 1922년 3월 밀입국 도중에 체포된 트로이카(삼두마차)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이었다. 그들은 출옥하자마자 곧바로 비밀결사운동에 복귀했음을 알 수 있다.5

 

두 번째 단계는 통합 공청을 결성하기 위해 고려공산청년회창립대회준비위원회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 내에는 조훈의 과업 수행에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대통합 움직임이 일었다. 합법 공개 영역의 청년운동도 그랬고, 비밀 사회주의 운동도 그랬다. 국내에 존재하는 내지당과 고려공산동맹, 양대 비밀결사가 주동이 되어 ‘6인회’라는 명칭의 조선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를 출범했다. 그 덕분에 조훈이 추진하는 고려공청 통합운동은 6인회가 이끄는 공산당 통합운동과 나란히 굴러갈 수 있었다.

 

실패한 두 번째 밀입국, 그러나 망외의 소득

 

양대 공청 그룹의 협상 테이블이 가동됐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가 논의 석상에 올랐다. 고려공청 중앙총국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해산할 수 있는지, ‘6인회’로 대표되는 공산당 지도부의 지휘를 받을지, 국외에 소재하는 공산그룹들과 연계를 단절할지, 통합 공청대회 대의원을 야체이카(세포단체)에서 선출할지 아니면 개인별로 초청할지 등이 쟁점이 됐다.

 

그러나 조훈은 1924년 5월 출국할 때까지 자신의 소임을 완성하지 못했다. 통합 공청 결성은 달성하기 어려운 난제였기 때문이다.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비록 통합 공청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 뒤 공청 운동의 큰 흐름이 되는 근간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의 두 번째 밀입국이 거둔 망외의 소득이었다.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훈 동무의 자서전 (Автобиография тов.Те-Хуна), 3쪽, 1927년 3월28일, РГАСПИ ф.531 оп.1 д.247 л.14-17

2. 작자 미상, <高共靑一般進行情況> 1쪽, РГАСПИ ф.533 оп.10 д.1908 л.1-11

3. 廣東中學校, <修業證書, 金昌一>, 중화민국11년(1922) 5월2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40 л.5

4. <高共靑一般進行情況>, 4쪽

5. 윤상원, ‘국제공산당과 국제공산청년회 속의 한인 혁명가’, <마르크스주의 연구> 55, 경상대학교, 2019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러시아 벌목장, 막일하는 사관생도들

조훈 등 나자구 사관학교 32명 생도들,
학교가 폐쇄 위기에 빠지자 페름현 산악지대에서 육체노동해 재개 자금 모아

 

1921년 7월 국제공청 제2회 대회 대표증에 첨부된 증명사진. 임경석 제공

 

조훈은 19살 되던 해에 나자구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의 전후 사정을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상하이에서 나는 미국으로 밀입국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간도로 갔다. (…) 그 후 의병 투쟁을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자금 결핍 때문에 학교는 단지 11개월 동안만 존속할 수 있었다. 1915년 말이었다.”1

 

대전학교 혹은 동림무관학교, 도미 실패 뒤 향한 곳

 

평양의 기독교계 중등학교에서 수학하던 조훈은 식민지 조선의 교육 환경에 울분을 품고서 미국행을 꿈꿨다고 한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리라. 평안남북도의 기독교 청년 가운데 미국 유학을 떠나는 사람이 꽤 있었다. 조훈이 중국 상하이로 간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세 명의 학우가 행동을 같이했다. 그러나 장벽이 높았다. 태평양을 건너는 뱃삯도 문제려니와 출입국 서류를 마련하는 일이 큰 난제였다. 식민지 조선인이 미국으로 건너가려면 일본 정부가 발급하는 여권과 출국 서류, 미국 정부가 발급하는 입국비자가 있어야 했다.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지 않고서는 출입국 서류를 떼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밀입국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상하이는 미국, 영국, 프랑스 조계지가 자리잡은 대도시이자 동아시아와 유럽·북미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곳에만 가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미국 밀입국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진로를 변경해야 했다. 고심 끝에 조훈이 선택한 곳은 북간도였다. 두만강 국경 너머 조선인 이주민이 수십만 명 거주하는, 그곳으로 나아갔다. ‘의병 투쟁을 위한 비합법 속성 군사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나자구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길이었다.

 

중국 길림성 왕청현 나자구에 있는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왕청현 제1고등국민학교’였다. 중국 교육법상 정규 중등교육기관의 하나로서 지방정부 길림 동남로 행정 당국의 승인을 받아서 개설된 학교였다. 설립 당시 지방정부 수반으로부터 3천원의 특별지원금까지 받을 정도로 합법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중국인이었다.

 

사관생도 전체는 아니지만 그중 45%에 이르는 54명의 이름과 나이를 확인할 수 있다.2 최연소자는 20살이고, 연장자는 30살이었다. 오늘날 대학교 1~3학년에 해당하는 20~22살 주니어층이 15명이고, 대학교 4학년에서 석사과정에 해당하는 23~25살 중간층이 22명이었다. 대학원 박사과정생에 해당하는 28~30살 시니어층이 13명이었다. 평균 24.4살이었다.

 

나자구라는 지명은 일명 대전자라고도 불렸다. 그래서 이 사관학교를 조선인들은 대전학교라고도 불렀다. 자료에 따라서는 동림무관학교라는 호칭도 쓰였다. 나자구 사관학교를 포함한 이 명칭들은 모두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조선인들끼리 은밀하게 부르는 이름이었다.

 

사관학교를 유지하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교육을 맡은 교수들이 보수를 받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설립 과정에서 토지와 건물은 장만했지만, 생도들의 의복과 식비를 다달이 마련해야 했다. 일본 관헌의 첩보에 따르면 매달 700루블의 경비가 필요했다. 학교 당국은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머지않아 재정난에 빠져들었다.

 

32명의 사관생도에 관한 회상기를 담고 있는 조훈 자서전 첫 쪽. 임경석 제공

 

1년은 2년으로 노임은 절반으로, 포드랴치크의 농간

 

1915년 12월 혹은 이듬해 3월에 결국 나자구 사관학교는 폐쇄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일본 영사관 쪽 방해 공작도 영향을 끼쳤지만 주로 자금난 때문이었다. 사관생도들은 독립군 장교 양성 사업이 중단되는 것을 차마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조훈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이 학교의 120명 사관생도 가운데 32명이 결사를 맺고서 군사학교 재개 자금을 벌기 위해서 러시아로 갔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인 청부업자에게 고용됐다. 그는 우리를 페름현 나제진스크 공장으로 보냈다. 그들은 우리를 6개월간 장작 제조공으로 채용하고, 선불금을 받고서 달아났다.”

 

사관생도 32명이 동맹을 맺었다는 문장에 눈길이 간다. 사관학교 재개를 위한 자금을 벌기 위해 육체노동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다.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사적 이익을 기꺼이 내려놓기로 작정한, 수준 높은 윤리적 행동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구체적인 성명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참가자의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예외적이다. 보기를 들면 뒷날 독립자금 조성차 일본은행 현금 수송대를 습격한 15만원 사건의 주역이 되는 임국정, 이 글의 주인공이자 뒷날 국제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이 되는 조훈 등이다. 앞으로 언젠가 사료 여건이 개선돼서 그 외 사관생도들의 신원을 알게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당시는 전시였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군수 생산을 위한 노동력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32명의 사관생도는 일자리를 찾아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나아갔다.

 

그들은 조선인 청부업자의 힘을 빌렸다. 저 멀리 시베리아 너머 우랄산맥 깊은 곳에 있는 페름현 산악지대에서 벌목노동에 종사하기로 고용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 청부업자는 정직하지 않았다. 그자는 사관생도들이 러시아어에 서툰 점을 악용해 근로계약서를 위조했다. 1년 기한을 2개년으로 몰래 늘렸고, 약정된 근로 할당량을 채우려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도록 꾸몄으며, 노임 수준도 통상 임금의 절반도 안 됐다. 약정 내용을 달성하지 못하면 고용 기한이 다 찼더라도 작업장을 이탈할 수 없었다. 노예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사관생도뿐만이 아니었다. 청부업자의 농간으로 페름현의 공장과 사업소에서 노예노동에 얽매인 조선인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

 

청부업자는 ‘포드랴치크’라고 부르는데, 러시아어에 능숙하고 이미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이들이 맡았다. 그들은 철도 공사장이나 광산, 어장 등지에 노동자를 모집해주거나 관청과 군대에 물품을 조달하는 일에 종사했다. 러시아어를 잘 모르는 신이주민과 관청 일에 어두운 러시아어 문맹자는 일자리를 얻으려면 그들을 통해야만 했다. 근로계약의 관행도 청부업자에게 유리했다. 그들은 고용주에게서 노동자의 임금 총액을 직접 수령해, 소관 노동자 개인에게 나눠주는 권한이 있었다. 연해주 조선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이 있던 문창범, 최봉준, 최재형, 김두서 등은 모두 이 직업을 통해 재산을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사관생도 32명이 독립군자금을 벌기 위해 고용돼 일하던 러시아 페름현의 위치. 구글지도

 

벌목장 착취에 주목한 김알렉산드라

 

문제의 청부업자는 김병학이라는 자였다. 그는 사관생도 등 조선인 노동자 몫의 임금 선불금을 받고서 자취를 감췄다. 그도 연해주 조선인 사회의 유력자였다. 시베리아철도 건설공사 청부, 러시아 군납용 쇠고기 조달업 등으로 재산을 모았다. 1912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민회 회장, 민족운동 단체 권업회의 외교부장 등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사관생도들은 노예노동의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그들의 고난은 1년 이상 계속된 뒤에야 끝났다. 사관생도들이 억류에서 벗어난 시점이 눈에 띈다. 1917년 6월이었다. 바로 그해 2월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이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벌목장의 사관생도들이 노예노동의 처지에서 벗어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1917년에 발발한 러시아 2월 혁명 덕분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인 최초의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라가 우랄산맥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항의 캠페인을 조직한 덕분이었다.

 

김알렉산드라는 이주민 2세로 러시아의 정규 초등, 중등학교를 졸업한 여성이었다. 그는 재학 중에 혁명사상을 수용해 비밀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사관생도들이 우랄산맥에서 노예노동에 종사하던 그때, 김알렉산드라도 페름현 일대에서 거주했다. 왜냐하면 혁명당의 일원으로 지목돼 우랄산맥 방면으로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페름현 벌목장에서 노동과 착취에 고통받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주목했다. 특히 사관생도 그룹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뜨거운 동지애를 느꼈다고 한다. 김알렉산드라는 조선인 노동자를 조직하는 한편, 그들의 대표자로서 노사 교섭의 현장에 섰다.

 

김알렉산드라는 가능한 모든 종류의 합법투쟁을 밀어붙였다. 조선인 노동자를 대리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전술도 병행했다.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지방법원의 판사들은 시종일관 자본의 편에 섰다.

 

2월 혁명이 일어났다. 그 덕분에 페름현 조선인 노동자 소송 사건은 여론의 주목을 받는 일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했다. 지방법원 둘레에 수만 명의 사람이 에워쌀 정도였다. 마침내 법원의 최종 판결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처럼 조선 노동운동사의 첫 페이지는 32명의 사관생도와 김알렉산드라에 의해 열렸음을 알 수 있다.

 

 

1년간 노동해 2개월치 학교 경비 벌어

 

2월 혁명 이후 전 러시아가 혁명적 정세에 휩싸인 조건 속에 사관생도들은 연해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청부업자 김병학에게서 1200루블을 받아냈고, 그 돈을 우랄동맹 31명의 명의로 북간도 무장투쟁 준비사업에 기부했다. 왜 32명이 아닌가? 유감스럽게도 사관생도 한 사람이 우랄산맥 벌목공장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름이 뭔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1년여 세월에 걸친 사관생도 32명의 용기와 모험치고는 성과가 보잘것없다고 보는 독자도 있겠다. 북간도로 송금한 1200루블은 나자구 사관학교의 약 2개월치 경비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돈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헌신 결과는 고조된 조선 독립운동을 지탱하는 근간으로 자랐음에 주목해야 한다. 1920년 초 독립군이 발흥하던 때였다. “오늘날 중국·러시아 영토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청년은 나자구 사관학교에서 나온 자가 가장 다수”라는 평가가 나왔다.3 그 한가운데에 바로 32명의 사관생도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참고 문헌

1. 조훈 동무의 자서전(Автобиография тов.Те-Хуна), с.1, РГАСПИ ф.531 оп.1 д.247 л.14-17, 1927년 3월28일.

2. 琿春副領事 北條太洋, ‘機密公信第10号, 汪淸縣ニ於ケル不逞鮮人ノ設定ニ係ル學校職員並生徒名簿ニ 關スル件’,3~5쪽, 1916년 3월11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の部-在滿洲の部> 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3. 四方子, ‘北墾島 그 過去와 現在’, <독립신문> 1920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정의의 군대가 북을 쳐도 일어나지 않으니

내몽골 3만 정보 개간권을 획득하고 200억원의 자금을 모집하려

1925년 밀입국한 김창숙

 

1925~1926년 국내 비밀활동을 할 즈음의 김창숙. 눈매가 형형하고 날카롭다. 임경석 제공

 

김창숙이 국경을 넘은 때는 1925년 8월23일께였다. 그의 나이 47살이었다. 1919년 4월 망명길에 오른 지 6년4개월 만에 다시 고국 땅을 밟으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합법적인 귀국길이 아니었다. 행여 남의 눈에 뜨일세라 몰래 잠입하는 길이었다.

 

조선으로 밀입국하려면 어느 경로를 택해야 할까? 그는 압록강을 건너기로 했다. 신의주와 건너편 중국 쪽 국경도시 안동(현재 단둥) 사이를 오가는 철교가 놓인 코스였다. 이 철교는 일본 경찰과 헌병의 삼엄한 감시 아래 관리됐다. 1909년 5월 착공하고 1911년 11월 준공한 이 철교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세운, 길이 944m의 현대식 교량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진출을 위해 부설된 이 철교는, 국외로 망명하는 지사들과 국내로 비밀리에 잠입하는 혁명가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기도 했다.

 

국경을 관리하는 신의주경찰서는 바쁘고 사건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1928년의 보기를 들면 1년간 관내 검거 사건은 3109건으로 조선의 모든 경찰관서 가운데 1위였다. 당연히 정치·사상범 사건도 많았다. 제령 위반과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이 각각 47건, 84건으로 이를 합하면 131건에 이르렀다. 대다수가 국경을 넘으려다가 적발된 경우였다.1

 

김창숙은 걸어서 넘기로 결심했다. 철로를 따라 기차에 탑승한 채 월경을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허름한 농민 복장을 했다. 거기에도 검문과 감시망이 깔려 있었다. 경찰과 헌병이 경쟁적으로 운용하는 밀정이 도처에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누런 베옷을 입은 40대 후반 추레한 농민에게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1927년 2월, 용수를 쓰고 포승에 묶인 채 재판정에 들어가는 유림단사건 피고인들. 갓 쓰고 두루마기를 갖춰입은 방청객들이 도열한 채 피고인들을 지켜보고 있다. 임경석 제공

 

면우 선생의 문집 간행을 기회로 삼아서

김창숙이 비밀스레 조선으로 되돌아온 까닭은,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결사입국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2 죽음을 무릅쓰고 모험을 벌이는 까닭은 바로 독립운동자금 모금 때문이었다.

 

1924년 10월께 중국의 진보적 군벌 펑위샹(馮玉祥, 1882~1948)이 집권할 때, 김창숙은 중국 정부와 교섭해 내몽골 미간지 3만 정보의 개간권을 어렵사리 획득했다. 쑤이위안성 바오터우 일대였다. 그곳에 재만주 동포를 불러모아 농업과 군사훈련을 병행하는 둔전 농장을 개척할 수 있게 됐다. ‘3만 정보’란 9천만 평의 넓이로 대농장을 경영할 만한 땅이었다. 농장 자립 기반을 확충하면서 사관학교를 세우고 병농일치의 군대도 준비할 수 있었다. 중장기 전망을 갖고 조선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문제는 사업비였다. 조선 농민들을 이주시키고, 가옥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는 데 큰 자금이 필요했다. 모두 합쳐 20만원이 들 것으로 추산됐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얼마나 되는 돈인가? 1919년 당시 관청 ‘서기’의 1개월 급여는 본봉 30원에 수당을 합해 약 50원이었다. 1920년 일용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1원 내지 1원10전이었고, 1925년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의 월급은 40원이었다. 따라서 사업비 20만원을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150억∼200억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김창숙은 국내 모금으로 사업비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조선의 유교 역량과 자신의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유교 학맥으로 연결된 대지주 출신의 부호 10명에게서 1만~2만원씩 모금하고, 나머지는 각 지방 문중을 통해 형편 닿는 대로 수백~수천원씩 거둘 수 있다고 계산했다. 혹여 동의하지 않는 부호가 있다면 강제로라도 징수할 생각이었다. 권총 두 자루와 실탄을 산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좋은 기회가 왔다. 면우 곽종석 선생의 사후 6주기에 즈음해 문집을 간행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곽종석은 그의 스승이었다. 또 1919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유학자 137명의 연명으로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때 그 첫머리에 서명한 대표 유학자였다. 그 사건으로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순국한 애국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국 여러 곳에서 문집 간행을 도모하기 위해 결집하고 있었다. 김창숙은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 판단하고 비밀 입국을 기획했다.

 

두터운 인맥이 겹겹이 보호

 

김창숙의 국내 비밀활동은 예상보다 길었다. 경성에 도착한 1925년 8월25일 시작한 비합법 지하운동은 이듬해 3월24일 출국할 때까지 만으로 7개월이나 계속됐다. 신분을 보장해줄 아무런 합법적 보호 장치가 없는데도 그랬다. 그 자체로도 놀라운 현상이었다.

 

장기간 비밀활동을 가능하게 해준 원동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다층적 협력자들이 있었다. 20대 중반의 중국 베이징 유학생 청년 그룹이 있었다. 송영호, 김화식, 이봉로가 그 사람들이다. 이들은 김창숙의 망명지인 베이징에서 2년 전부터 친교를 맺은 혁명계 후배였다. 베이징 고등교육기관에 재학 중인 이들은 김창숙과 크고 작은 일을 상의했다. 김창숙은 기록하기를, “때때로 내가 있는 곳을 찾아와 경서의 뜻을 질문했는데, 그 질박하고 진실함이 서로 의지할 만하여” 기뻤노라고 썼다. 이들은 국내 비밀활동 계획을 입안 단계부터 함께 논의했다. 여비 조달, 권총의 구매와 국내 반입, 밀입국과 물품 반입 정보, 국내 사전 잠입 등도 나눠 맡았다.

 

다음으로 학맥과 문중, 망명시 교유 등의 경험으로 신뢰감을 갖게 된 측근 그룹이 있었다. 곽윤, 김황, 정수기, 손후익 등이 그들이다. 연령층은 다양했다. 두 살 차이의 동년배(곽윤)이거나 9년(손후익) 혹은 17년 차이(김황, 정수기)의 연하자였다. 이들은 김창숙을 대리해 각지를 순방하면서 모금 활동을 대행했다. 걷어들인 자금을 보관하는 일도 맡았다(정수기). 김창숙이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쳐서 요양이 필요할 때는 기꺼이 자기 집을 내주기도 했다(손후익).

 

혈연, 지연, 학연을 통해 형성된 인맥도 김창숙의 협력자 네트워크 구실을 했다. 김창숙은 전통사회 내부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의성 김씨, 동강 김우옹의 13대 종손이었다. 그로 인해 문중과 친척 사이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가문은 경북 성주군 대가면 사도실마을에서 450년 동안 세거(대대로 살다)해온 까닭에 지역사회에서도 우뚝한 존재였다. 경북 봉화군도 그의 지역 기반 가운데 하나였다. 아버지 김호림이 봉화군 해저마을에서 성장하다가 23살 성년이 된 뒤에야 성주의 동강 김우옹 가문의 종손 자격으로 입양돼 왔기 때문이다. 성주 사도실마을과 봉화 해저마을의 의성 김씨 문중은 2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함없이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3

 

요컨대 다중 동심원 같은 협력자층 존재가 김창숙의 장기 비밀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동지적 유대를 맺은 유학생 청년 그룹, 두텁게 신뢰를 쌓은 측근 그룹, 전통사회의 두터운 인맥 등이 겹겹이 그를 보호하는 형상이었다.

 

법정에 선 유림단사건 피고인들. 앞줄 오른쪽부터 송영호, 김화식, 손후익, 이종흠, 이우락. 두 사람이 상투를 튼 모습이 이채롭다. 머리카락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유교 윤리의 근본이라 하여 형무소 쪽 박해를 무릅쓰고 버텨냈다고 한다.

임경석 제공

 

“누이동생을 보더라도 나에 대해 말하지 마라”

장기간 비밀활동의 또 하나 원동력은 김창숙 자신의 재능이었다. 그는 지하운동에 요구되는 엄격한 절제력을 시종일관 유지했다. 은신처를 한번 정하면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을 극소수 필요한 동지로만 한정했다. 예컨대 1925년 9월께 경성 적선동 한적한 곳에 은신처를 정했을 때는 오직 곽윤, 김황, 송영호, 김화식 네 사람만이 때때로 연락할 수 있게 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가족과 연락도 일절 시도하지 않았다. 사촌동생 김창백과 접선했을 때다. 김창백은 때마침 넷째 여동생이 경성에 체류 중이니 한번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 김창숙은 정색하면서 거절했다. “내가 이번에 온 것은 친척에게 인사를 닦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니, 비록 내 본가라 하더라도 절대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이동생을 보더라도 나에 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4 말이 돌고 돌아서 결국 일이 실패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비밀활동 기간이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모금이 순조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심이 1919년 3·1운동 때와 달랐다. 일신의 위해를 무릅쓰고 공공선을 증진하려 헌신하던 혁명적 열정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김창숙이 각지에 파견한 유학생과 측근 등 대리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민심을 전했다. “백성의 기운이 이미 죽어 냉담하게 불응하는 자도 있고, 겁이 나서 불응하는 자도 있으며, 비록 응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몇 사람의 일시 노잣돈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5라고 말했다.

 

각별한 수단을 택해야 했다. 김창숙은 직접 전면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첫 넉 달 동안 경성에 거점을 두고 지방 각지에 대리인을 파견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1925년 12월25일 김창숙은 대구로 거점을 옮겼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최후의 일책을 결행해보겠다”는 작정이었다.

 

목표액 1.8%, 요즘 돈으로 3억5천만원

 

석 달이 더 흘렀다. 1926년 3월 초, 부산 범어사 금강암에서 은밀한 회의가 열렸다. 김창숙은 7명의 가까운 청년과 측근, 친척을 불러모았다. 국내 비밀활동을 매듭짓는 마지막 회합이었다. 김창숙은 입국 목적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국민이 호응해주리라 기대했다고 한다. 실제는 달랐다. 지난 7개월 동안 정의의 군대가 북을 쳐도 민심이 일어나지 않고, 지금은 일본 경찰이 사방으로 흩어져 수사망을 좁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하운동을 종결짓고 다시 망명하겠다고 심경을 밝혔다. 밖에서 다시 국내 민심을 고무할 새로운 운동을 준비하겠노라고 밝혔다.

 

모금한 자금은 3500원이었다. 목표액의 1.8%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약 3억∼3억5천만원 되는 돈이었다. 휴대한 채 국경을 넘기에는 큰돈이었다. 김창숙은 일족이자 무역상인 김창탁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기차 편으로 압록강 너머 봉천까지 그 자금을 반출해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3월22일 부산 삼랑진역에서 기차에 올라타 24일께 압록강을 넘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국경의 1년간 검거된 범죄 수’, <매일신보> 1928년 12월23일

2. 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 <국역 심산유고>, 748쪽, 1979년

3. 최미정, ‘봉화 해저마을 의성김씨 문중의 유림단 의거 참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9, 96쪽, 2014년

4. 김창숙, 앞의 책, 750쪽

5. 김창숙, 앞의 책, 753쪽

 

 

임경석의 역사극장

“자녀 셋과 아내, 어디 사는지 모릅니다”

사회주의자 방준표가 입산하기 전 거쳐간 서울·부산·모스크바…

노동조합운동, 반탁 진영과의 싸움, 10월 항쟁 속으로

 

자필로 작성한 방준표의 ‘간부이력서’ 첫 페이지. 임경석 제공

 

1945년 8월15일 해방되던 날, 방준표는 경상남도 밀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덧 나이 40살이었다. 읍내 ‘밀양의원’이라는 이름의 병원에서 ‘고용인’으로 일했다. 의료 부문 종사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전력이 인쇄소 직공, 정미회사 사무원 등이었음을 고려하면 원무 행정을 맡은 사무직이나 관리직 노동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해방 뒤 서울, 운동 현장으로 되돌아가

 

해방되자 그는 즉시 상경했다. 익숙한 운동 현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서울에 도착한 때는 해방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8월17일이었다. 그는 곧 30대 전반기를 불태우던 서울지역 노동조합운동에 복귀했다. 29~35살 용산과 영등포 일대의 인쇄소, 서적회사, 맥주공장, 철도공장 노동자들 속에서 사회주의 비밀결사 활동을 한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그가 전념한 부문은 철도였다. 용산철도공장을 비롯해 서울 철도노동자의 모든 직장이 그의 활동 무대가 됐다. 용산철도공장은 26만㎡(약 7만9천 평)의 드넓은 면적에 들어선 중공업 기지였다. 기관차와 객차, 화차를 제작하고 수리하는 곳이었다. 종업원이 1500명에 이르는 대규모 공장이었다. 그중 현장노동자는 1300명인데 선반, 조립, 마무리, 쇠불림, 원통 제조, 주물, 객차, 도색, 전기, 강판 등 11개 제조공정별로 나뉘어 일했다.1 철도노동자를 조직하고 의식화하는 일이 그의 주력 활동 분야였다. 사업장 속에서 노동조합 조직을 짜고 노동자를 대중투쟁으로 이끌었다.

 

비밀결사운동에도 가담했다. 그해 10월15일 조선공산당 용산·마포 지구당에 입당했다. 줄여서 ‘용마구’라고 부르던 이 지구당은 영등포지구당과 더불어 노동자 밀집 지구로 손꼽히는, 당내 요충지였다. 그는 평당원이 아니라 지구당 상임 간부로 일했다. 당증 번호도 부여받았다. 1275번이었다.2

 

노동조합과 비밀결사, 두 분야에서 행한 맹렬한 활동 탓일까. 그는 감옥살이를 겪어야 했다. 해방 뒤 첫 투옥은 1946년 1월23일에 일어났다. 이날 미소공동위원회 개회에 즈음해 ‘미소대표환영시민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서울시인민위원회가 주도하는 이 대회에 거대한 군중이 모였다. <조선일보> 기사에는 10만 명, <해방일보>에는 30만 명이 모였다고 적혔다. 서울 인구가 120만 명으로 추산되던 때의 일이었다.

 

군중집회는 거리행진으로 이어졌다. 서울운동장을 기점으로 종로, 안국동, 광화문 앞 대로, 신문로, 남대문으로 이어진 거리행진은 해 질 녘에야 끝났다.3 이 시위 행렬은 도중에 신탁통치 반대 세력의 습격을 받았다. 종로2가 종각 사거리에 숨어 있던 ‘반탁전국학생연맹’의 극우 청년 약 300명이 벽돌, 돌멩이, 기왓장 등을 집어던졌다. 그때 방준표는 시위 대열 속에 있었다. 그는 철도노동자를 동원해 반탁 진영의 테러에 맞섰다. ‘반동분자들과 격투’를 불사했다. 결국 그는 미군에 체포돼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마침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징역 1년에 벌금 6만원형이 선고됐다.

 

첫 투옥 기간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마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방준표는 그해 4월18일에 석방됐다. 수감 기간이 3개월이 채 안 됐다. 형기를 채우지 않았는데도 풀려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공동성명 덕분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4월17일 합의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지지를 서명하는 한국 쪽 정당과 단체는 모두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케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합의가 곧 제5호 공동성명이었다. 이 성명 때문에 정세가 일시적으로 호전됐다. 적대적 대치 국면이 부드럽게 이완됐고, 투옥된 사상범들은 석방됐다. 방준표는 그 덕을 봤다.

 

북한 주재 소련민정청 간부부장 아바세예프가 발급한 1948년 10월20일자 유학 대상자 신원 증명서. 방준표의 사진이 첨부돼 있다. 임경석 제공

 

‘반동분자들과 격투’ 반탁 진영과 싸우다 투옥

 

석방된 방준표는 지체 없이 운동 현장으로 복귀했다. 이때 그의 당내 소속이 변경됐다. 용마구 당부에서 서울 철도구 당부로 옮겨갔다. 직급은 상임위원이었다. 용산과 마포 지구에 국한되지 않고 서울 전역의 철도노동자 사업을 총괄하는 위치로 바뀐 셈이다. 그의 책임과 권한 수준이 더 높아졌다. 그해 메이데이에는 ‘철도노동자 투쟁 열성자’로 선정돼 표창장까지 받았다.4 그는 해방공간에서 철도노동자 투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부산은 방준표의 삶에서 적잖은 인연을 맺은 곳이다. 그가 부산과 첫 인연을 맺은 시기는 20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한 23살 때 부산보통학교 교원으로 발령이 나서 1년간 근무했다. 부산 영주동에 있는 초등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과 갈등을 겪었고, 좌익으로 지목받은데다 호흡기 질환을 앓은 탓에 그만두고 말았다.

 

41살 되던 1946년 8월, 그는 다시 한번 부산에 옮겨가 살았다. 경남도당 간부로 발령 났기 때문이다. 도당위원회 상임위원으로서 노동부장직을 맡았다. 8월4일자로 임기가 시작됐다.

 

경남도당에서 그가 역점을 둔 활동 분야는 <자서전>에 쓰인 바에 따르면, ‘철도노동자들 사이의 당조직 견고화’ ‘반당분자와의 투쟁’이었다. 철도 부문에서 당조직을 강화하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서울에서 줄곧 해온 일이고 노동부장이라는 그의 소임에 비춰봐도 그렇다.

 

흥미로운 점은 반당분자와의 투쟁이다. 반당분자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즈음 삼당 합당이 현안이었다. 공산당과 인민당, 신민당이 합해 근로대중의 단일정당을 표방하는 남조선노동당을 수립하는 문제였다. 삼당 내에서 합당을 추진하는 열기가 뜨거웠지만, 그와 동시에 합당 추진 방법을 둘러싸고 반대파가 형성됐다. 공산당 내에서는 이정윤과 김철수를 중심으로 하는 6인 반간부파가 만들어졌다. 경남도당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흐름이 강력했다. 경남 출신의 당내 중진인 윤일 등이 앞장서서 각 도의 대표 40여 명을 규합해 당대회 소집을 요구했다. 이른바 대회파가 만들어졌다. 방준표는 경남도당 간부의 입장에서 이 흐름에 맞섰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반당분자와의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했다.

 

부산에서의 10월 항쟁 뒤 ‘야수적 고문’

 

방준표가 부산에서 직면한 최대 사건은 9월 총파업과 그에 뒤이은 ‘10월 항쟁’이었다. 9월 총파업이란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전국적인 노동자 파업투쟁을 가리킨다. 1946년 9월23일 부산지역 철도노동자 7천여 명의 파업이 출발점이었다. 경남도당 노동부장인 방준표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 자신의 표현으로도 “9월의 철도 파업을 부산서 조직 지도함에 전적으로 가담하였다”고 한다. 그가 맞섰던 대상은 대한노총, 무장 경찰, 미군 헌병 ‘3자의 합작적 공세’였다. 9~10월 “장렬한 피투성이 반항 투쟁에 직접 참가 지도하였다”고 기록했다.5

 

9월 총파업은 10월1일 대구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난 사건을 계기로 해서 전국적 군중봉기로 확산됐다. 방준표는 이 와중에 또다시 투옥됐다. 해방 뒤 두 번째 겪는 불운이었다. 그해 10월7일 경찰에 체포된 그는 ‘야수적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고문 피해를 더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야수적’이란 표현이 그가 겪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재판에 넘겨져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해방 뒤 겪은 두 번째 징역살이는 10개월가량 계속됐다. 이듬해인 1947년 7월14일 부산형무소에서 출옥했다. 이번에도 형기를 다 채우지 않고 석방됐던 이유는 미소공동위원회 덕분이었다. 그해 5월21일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6월 말, 7월 초에 이르러 서울과 평양에서 본회의를 거치며 큰 진전을 보이는 듯싶었다. 그에 힘입어 정치범 석방 요구를 미군정 쪽이 수용했다.

 

1947년 12월, 방준표는 38선을 넘어 월북했다. 러시아 모스크바 당간부학교 입학 대상자로 선정된 까닭이었다. 당 집행부는 중견 간부 양성 기지를 모스크바에 세웠다. 장래가 촉망되는 신진·중견 간부를 유학시켜 당의 근간을 튼튼히 하려 했다. 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이 작성한 추천서에는 “방준표 동무는 노동조합 운동조직에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민주조선 건설 사업에 충실하다”고 적혀 있다.6

 

방준표는 1948년 2월1일부터 8월1일까지 평양에 개설된 러시아어 예비과정에 재학했다. 이 기간에 러시아공산당사와 러시아어를 배웠다. 이어서 1948년 9월15일부터 1950년 7월1일까지 모스크바 당간부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기간에 사회주의 이론과 정책에 관한 14개 과목을 수강했다.

 

뜻밖의 현상이 눈에 띈다. 당학교 성적표가 남았는데, 다른 유학생들보다 성적이 그리 좋지 않다. 5개 과목에서 5점 만점을 받았고, 4개 과목에서 4점을 받았다. 1개 과목은 과락이었다. 동료 유학생 박종근이 12개 전 과목에서 5점인 것에 비하면 상당히 뒤처졌음을 알 수 있다. 젊어서 경성사범학교 입학생으로서 ‘진정한 수재’라는 지목을 받던 방준표가 아닌가?

 

방준표가 해방 직후 철도노동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서울 용산철도공장 전경. 임경석 제공

 

모스크바 당간부학교, 고질병 폐질환

 

이 의문을 당학교 교무 담당자 니콜라예프의 의견서를 통해 풀 수 있다. 그는 방준표에 대해 평가하기를, “인내심이 강하고 열심히 공부한다. 오래 병을 앓아서 장기간 결석했는데도, 학업 성적에서 뒤처지지 않았다. 근면함과 노력 덕분이다”라고 썼다.7 원인은 질병이었다. 방준표는 모스크바에서도 병을 앓았다. 장기 결석이 불가피할 정도였다. 폐질환은 그의 고질이었다. 23살 때 호흡기병에 걸려서 6개월간 정양했고, 35~37살 때는 폐디스토마로 각혈이 심해 2년간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 그의 폐질환은 10년에 한 번꼴로 재발했다. 43~45살 모스크바 유학 중에도 질병으로 장기 결석한 것을 보면 말이다.

 

방준표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자서전>에는 가족에 대해 이렇게 쓰였다.

 

“가정 형편은 대단히 곤란하다. 부양가족으로서 처와 아이가 셋이 있으나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고, 특히 처는 여성운동에 참가한 관계로 경찰의 추궁을 받고 있다.”8

 

놀랍게도 가족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전혀 가사를 돌보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했음을 알 수 있다. 아내 ‘김정’은 32살, 11년 연하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도 당원이었고 합법적 공개 영역에서 부녀총동맹 일을 맡은 까닭에 경찰의 사찰을 받는 형편이었다. 자녀는 2녀1남이었다. ‘영희, 명희, 성부’라는 이름을 가진 10살 미만의 어린아이였다. 이들은 아버지가 부재하고 어머니가 경찰의 시달림을 받는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라야 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용산철도공장, 일반에 縱覽’, <조선일보> 1934년 6월28일치

2. 방준표, ‘간부리력서’, 1쪽, 3쪽, 1948년 8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2-13об

3. ‘환영의 깃발을 고양, 미소대표환영 시민대회’, <조선일보> 1946년 1월24일치

4. ‘간부리력서’, 3쪽

5. 김준(방준표), <자서전>, 3쪽, 1948년 8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4-16об

6. Зам.Председатель ЦК Трудовой партии Южной Корея Пак Хенен(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박헌영),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зав.отделом труда провинциального комитета Трудовой Паприи Южной Кореи, Пан Дюн Пе(남조선노동당 경남도당 노동부장 방준표에 대한 평가서), 1948년 7월31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9

7. Учевная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слушателя Корейской партийной школы Пан Дюн Пе(조선당학교 수강생 방준표의 학업 평가서), 1950년 7월25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4

8. <자서전> 3쪽

 

 

임경석의 역사극장

수재를 사회주의자로 키운 경성사범

방준표가 사회주의를 배우고 노동운동조직을 만든 서울, 병들면 찾아가던 고향 통영

1948년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 시절의 43살 방준표.

 

통영은 남해안의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수목 울창한 언덕과 짙푸른 바다, 중첩한 섬들이 놀라운 경관을 만든다. 그곳은 16세기 일본의 침략을 막아낸 이순신 장군의 도시이기도 하다. 지명 자체가 ‘삼도수군통제영’의 약칭이다. 그뿐인가. 윤이상, 박경리로 대표되는 예술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은 그곳에서 나거나 교육받았으며 결혼도 하고 가족을 잃기도 했다. 통영 골목길에는 그들 삶의 체취가 배어 있다.

 

고향에서 처음 해방운동 참가

 

이제 한 사람을 추가해야 하겠다. 바로 방준표(方俊杓)다. 6·25전쟁 때 전라북도 도당위원장으로서 빨치산을 이끌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통영’이라 쓰고 ‘토영’이라고 발음하는 현지 토박이다. 이력서처럼 중요한 문서에조차 통영을 가리켜 저도 모르게 ‘토영’이라고 잘못 적곤 했다.1 일제하 행정구역 명칭으로 하자면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346번지’가 그의 본적이자 출생지였다. 거기서 1906년 4월28일에 태어났다. 지금도 이 주소지는 남아 있다. 이순신 사당인 충렬사 정문에서 멀지 않다. 150m쯤 떨어져 있으며, 걸어서 2분 거리다.

 

그의 형제자매는 남녀 9명이었다. 방준표는 그중 둘째 아들이었다. 당시 풍속으로는 자손이 번성해 다복한 가정으로 여겨질 만했다. 그렇더라도 대식구였다. 식솔을 거느리는 아버지 방한정은 해산물 상점의 사무원이었다. 하지만 ‘술 잘 먹는 사람’이었다. 가정 형편이 빈궁했다고 한다. 어머니 공재복이 생업에 나서야 했다. 그녀의 바느질품 노동이 가정을 지탱하는 한 기둥이 됐다.

 

방준표는 통영에서 서당을 3년간, 보통학교를 6년간 다녔다. 중등학교 진학차 서울로 향하던 17살 때까지 그 도시에서 성장했다. 유학 중에도 방학만 되면 고향에 내려와 친구들과 어울렸다. 유학 4년차이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는 고향에 내려와서 통영수해구제회 활동에 참여했다. 간부 1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간부들이 3대로 대열을 나누어 통영 각지에 나가서 모금 활동을 했다. 그는 ‘재외유학생학우회’ 대표 자격으로 통영면 일대를 순회했다.

 

방준표가 해방운동에 처음 참가한 곳도 고향인 통영이었다. 1929년 24살 때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본격적이라 함은 다른 직업 없이 그 일에 전업적으로 종사했음을 뜻한다. 그해 8월 통영청년단 위원장 자리에 취임한 것은 그 상징이었다.

 

본래 통영청년단은 3·1운동 참가자들이 중심이 돼 결성한, 합법 공개 영역의 청년단체였다. 만세시위운동이 사그라들던 1919년 7월 발족한 이후 통영 지역사회의 공개 대중운동을 이끌어가는 주도체 역할을 했다. 1923년에는 벽돌로 번듯한 2층짜리 회관 건물까지 건축할 만큼 현실적 영향력을 갖췄다.

 

1929~31년 방준표가 위원장으로 재임하던 통영청년동맹 회관.

 

가택수색, 체포, 검거… 위원장의 험난한 삶

 

위원장 방준표가 걷는 길은 험난했다. 경찰서 유치장과 형무소를 제집 드나들듯이 빈번하게 출입했다. 신문에 단편적으로 실리는 지방 기사만 훑어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위원장 취임 두 달 뒤인 그해 10월9일에 통영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가택수색을 당했다. 같은 달 21일에는 결국 체포됐다. 이번에는 동래경찰서 고등계였다. 악명 높은 조선인 경찰간부 노덕술 경부가 지휘하는 수사망에 포착돼 부산까지 압송당했다. 동래청년동맹과 통영청년동맹 간부들이 비밀결사 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는 혐의였다. 10월28일에는 청년 12명이 검사국에 송치됐는데 증거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부산형무소 구치감에 수용돼 검찰 조사를 받던 중 11월6일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2

 

수난은 계속됐다. 이듬해인 1930년 8월1일 경찰에게 또 체포됐다. 청년동맹회관에서 통영학생회 정기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회관 한편 흑판에 ‘오늘은 적색 데이’라는 불온 메모를 의도적으로 기재해놨다는 혐의였다. 1932년에도 그랬다. 메이데이를 며칠 앞둔 4월26일 반일 격문이 발각돼 검거 선풍이 일었다. 통영 사회운동의 주요 간부 15명이 체포됐는데, 방준표도 포함됐다. 취조가 시작된 지 20여 일 지나 혐의자 가운데 3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방준표는 마지막날까지 취조받은 유력한 혐의자였으나, 다행히 송치자 명단에는 들지 않았다.3

 

방준표는 그해 말에 또 검거됐다. 12월13일이다. 당시 그의 지위는 통영노동조합 간부였다. 어느 땐가 청년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활동 분야를 옮겼던 것 같다. 혐의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조합 간부 3명, 소비조합 간부 4명을 검거한 것을 보면 통영지역 사회운동과 관련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통영은 방준표에게는 어머니 같은 곳이었다. 객지에 나가서 병에 걸리면 치료차 되돌아오는 곳이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호흡기질환을 자주 앓았다. 일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병이 악화하곤 했다. 첫 직장인 부산보통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하던 중에도 그랬다. 교장과의 불화도 원인이 됐지만, 병 치료를 위해 고향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1929년 4월부터 10월까지 통영에 머물면서 치료에 전념했다. 24살 때 일이다.

 

35살 때도 그랬다. 서울에서 노동운동에 종사하던 중 폐질환에 걸렸다. 폐디스토마로 심한 각혈을 거듭했고 더는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그가 선택한 길은 귀향이었다. 1940년 4월부터 1942년 3월까지 무려 2년 동안이나 병고에 시달렸다. 하지만 병석에 오래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생계를 세워야 했다. 11년 연하의 어린 아내 ‘김정’이 있었고, 뒷날 세 아이를 얻었다. 뭔가 일해야 했다. 통영읍내 정미회사, 밀양읍의 인쇄소와 밀양의원 등에서 사무원이나 직공으로 일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1922~28년 방준표가 재학한 경성사범학교 본관 건물.

 

조선인은 10명에 불과했던 수재 학교

 

식민지 수도 서울은 방준표에게는 가슴 설레는 중등학교 유학지였다. 17살 청소년 방준표는 1922년 이제 막 개교한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서 식민지 시기에 설립한 최초의 관립 사범학교였다. 인기가 매우 높았다. 입학생은 학비를 전액 면제받고 매달 생활비를 지급받았기 때문이다. 졸업 뒤에도 보통학교 교사로 취업이 보장됐고, 판임관 관등의 교육 관료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가정 형편이 어렵고 머리 좋은 학생들에게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방준표에게도 그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집안 형편은 상급학교로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서울에서 사범학교가 설립돼 관비로 학생 모집을 하”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4

 

입학 시험은 매우 어려웠다. 방준표가 응시한 1922년도 입학정원이 102명이었는데, 응시자가 733명이었다. 대략 7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민족별로도 입학정원이 할당돼 있었다. 대부분은 일본인 몫이었다. 조선인 합격자는 10명에 불과했다. 1922년 당시 조선인 응시자는 221명에 달했다. 상위 4.5%에 들어야만 했다.5 일본인 학생들이 뒷날 남긴 기록을 보면, 경성사범의 조선인 학생은 엄청난 입시 경쟁을 통과한 ‘진정한 수재’였다고 회고했다.

 

경성사범학교에는 기숙사가 있었다. 모든 학생이 원칙적으로 기숙사에 입사해야 했다. 황금정(을지로5가)에 위치한 캠퍼스에는 기숙사 3개 동이 있었고, 방 하나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지 않고 12명의 학생을 수용했다. 기숙사 학생들은 고도로 통제된 단체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밤 9시에는 야례(夜禮)라고 부르는 점호에 참석해야 했다. 각 방에는 상급생과 하급생 사이 위계질서가 엄격했다. 상급생에게는 존칭으로 ‘~상’을 붙이고, 하급생에게는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 오셋쿄(說敎)라는 집단 뭇매가 있었다. 단체기합이었다. 군대 내무반 생활의 복사판이었다.

 

방준표는 이 사범학교에서 6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다. “전부 일본인 학생이었고 조선인 학생은 1할 정도밖에 안 됐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놈들의 민족차별 대우에, 특히 민족적 자각과 일제에 대한 증오를 느꼈다”고 술회했다. 졸업에 즈음해서는 이미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책들을 탐독했다.

 

방준표가 사회주의를 수용한 배경에는 경성사범학교 체험도 있지만, 가족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8살 위 큰형 방정표(方正杓)는 통영 3·1운동에 참가한 열혈 청년이었고, 통영청년단 창립멤버이기도 했다. 1920년대 중엽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 정화회(正火會)에 참가해 기관지 <횃불> 편집인으로 일했다. 결국 필화사건에 연루돼 사상범으로 재판까지 받았다.

 

1920년대 중후반기 서울에서의 학창생활은 방준표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가져다주었다. 서울은 그에게 사상의 고향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울은 방준표에게 노동운동의 무대이자 비밀결사운동의 거점이었다. 그가 서울에서 노동운동에 참가한 것은 29살 때였다. 그의 회고를 들어보자.

 

“1934년 조선 사람은 조선에서 일해야 되겠다는 것을 느끼고 조선으로 나와 고향을 거쳐 서울에 왔다. 인쇄직공 견습으로부터 시작하여 6년 동안 기계공 노릇을 하면서 조선인쇄주식회사, 서적회사, 곡강인쇄소, 영등포 기린맥주공장, 용산철도공장 노동자 속에 공산주의 그룹 조직 활동을 했다.” 6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346번지, 방준표 생가의 현재 모습.

 

인쇄직공으로 서울 적색노조 운동

 

1934년 5월부터 1940년 4월까지 6년 동안 서울에서 적색노동조합 운동에 참가했다는 진술이다. 서울로 상경하기 전에는 일본에서 얼마간 사회주의운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도쿄에서 토목노동에 종사하면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일본공산당 활동을 했다고 한다. 아직 그에 관한 정보가 충분히 발굴되지 않았지만, 그런 활동 경험이 서울의 적색노동조합 운동에도 활용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활동 구역은 영등포와 용산이었다. 서울에서 노동자가 가장 밀집한 대표적인 공장지대였다. 방준표는 인쇄직공 일을 익혔다. 이 기술은 노동운동에 매우 유용했다. 합법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쇄소·서적회사 등에서 조직 활동을 하는 데 꼭 필요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맥주공장, 철도공장 등 타 분야 노동자 사회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특히 철도공장 노동자 내부 활동은 해방 이후에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다음 연재에 계속)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방준표, ‘간부리력서’, 1948. 8.10. 2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2~13об

2. ‘동래청년 12명, 검사가 석방’, <동아일보> 1929. 11.9.

3. ‘통영격문범 3명은 송국’, <동아일보> 1932.5.18.

4. 김준(방준표), <자서전>, 1948. 8.10.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4~16об

5. 안홍선, ‘경성사범학교의 교원양성교육 연구’, 서울대 교육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4, 154쪽

6. <자서전>, 1~2쪽

 

 

 


임경석의 역사극장

1954년 그를 죽인 건 빨치산일까 국군일까

 

일제 때 혹독한 고문으로 하반신 장애 입었지만 다시 비밀결사 조직한 박영발…
6·25전쟁 발발로 늦깎이 러시아 유학 중단하고 빨치산으로

 

경북 봉화군 내성면 화천리 176번지 박영발 생가. 임경석 제공

 

‘피살 51년 만에 발견된 빨치산 비밀 아지트의 주인공’에서 이어짐

 

박영발이 앉은뱅이가 될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당한 까닭은 무엇일까. 체포된 다른 동료들도 비슷한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그에게 혹독함이 부가된 이유가 있었다. 경찰 문서에 그 정황이 암시돼 있다. 동대문경찰서장이 작성한 검사국 앞 송치의견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박영발은… 소지하고 있던 서신을 삼키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뒤이어 정길성의 주소에 대해 취조를 받자, …파고다공원 5층탑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는 등 거짓말을 했다. 정길성이 잠복한 주소를 알면서도 그를 도망케 할 목적으로 사실을 공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 당시에는 정길성의 소재를 놓쳐서 체포할 수 없었다.”1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을 떠날 즈음에 촬영한 36살 박영발. 임경석 제공

 

비밀 서신 삼키려다 미수… 혹독한 고문

 

피의자의 허위 진술에 농락당한 일본 경찰의 분노가 선명히 떠오른다. 박영발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편지지를 씹어 삼키려 했다. 동료의 거처를 감추고자 거짓말도 했다. 서슬이 시퍼런 일본 경찰에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그의 거듭된 기만행위로 경찰은 주요 피의자를 놓치고 말았다. 경찰은 그를 용서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게 틀림없다.

 

박영발은 대가를 치렀다. 1932년 9월2일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피투성이가 되어 동료의 등에 업혀서 경찰서 문을 나와야 했다. 그뿐인가. 앉은뱅이가 된 채로 4년이나 고향에서 갇혀 지내야 했다. 이 참혹한 사건은 박영발이 20살 때 겪은 일이다.

 

1936년 5월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박영발은 생업의 길로 나아갔다. 당시 그는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16살 되던 1928년 이미 부모의 뜻을 좇아 2년 연상의 아내와 혼인식을 올렸다. 그는 어린 자녀 하나와 부친에게서 소박맞은 어머니를 부양해야 했다.

 

박영발은 봉화읍내 인쇄소에 취직해 2년간 문선공으로 일했다. 하지만 벌이가 시원찮았던 것 같다. 그는 대도시로 향했다. 만주를 거쳐서 중국 북경으로 갔다. 그곳에서 1년 8개월 간 동향 사람이 경영하는 양복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이어서 1940년 서울로 되돌아와 제화공장에서 4년 8개월 간 경리 사무직으로 근무했다.

 

“1944년 7월에 정재철, 신정균 등 동무와 함께 적은 크룹을 조직하였다. 처음에는 ‘무명 크룹’으로 그 후 혹은 ‘서울 크룹’이라고도 하였다. 책임자는 정재철 동무이며 나는 조직을 담당하였다. 영월탄광의 박항택, 영주의 김제욱, 대구의 김일식, 부평조병창 공사장의 한종일 등 동지를 통하여 조직을 키우기에 힘썼다.”2

 

박영발이 비밀결사에 다시 가담한 것은 32살 때인 1944년 7월이다. 해방되기 1년쯤 전이다. 조그마한 ‘크룹’이었다고 한다. 크룹이란 러시아어 클루프(клуб)에서 온 외래어로 영어의 클럽(club)에 해당한다. 클럽과 그 일본식 음역어인 구락부란 말이 주로 취미나 문화적 코드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데 반해, 크룹은 당조직이나 정치단체의 한 형태를 가리키는 뉘앙스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한 무리의 비밀운동 참가자들이 둘 이상의 소조직으로 나뉘어 일정한 연계를 갖는 조직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하나의 독립적인 비밀단체를 가리키는 크루조크(소조)와 구별됐고, 다수의 세포단체와 그를 총괄하는 집행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그루파(그룹)와도 달랐다.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생으로 추천하기 위해 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이 작성·서명한 박영발 평가서. 1948년 7월31일자. 임경석 제공

 

탄광과 무기공장에서 노동자 조직화

 

비밀결사 구성원들은 어떤 사람이었나. 박영발의 기록에는 구성원이 7명 나온다. 더 있겠지만 그중 역할이 뚜렷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 4명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30대 초중반이었다. 또 20대에 사회주의운동에 참가한 공통 경력이 있었다. 다들 적색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운동 참가자였다. 출신지의 공통성도 눈에 띈다. 각각 영주(1명), 봉화(2명), 대구(1명)였다. 다들 경북 출신자였다.

 

비밀단체 ‘서울 크룹’의 책임자는 정재철이었다. 그는 12년 전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박영발을 업고 나왔던 바로 그 사람이다. 박영발은 조직부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그가 역점을 둔 분야는 노동자 조직이었다. 특히 노력을 기울인 곳은 둘이었다. 하나는 영월탄광인데 이곳에는 수천 명의 탄광 노동자가 전시 에너지 공급을 위해 동원돼 있었다. 다른 한 곳은 부평조병창이었다. 이곳은 1939년 설립된 ‘인천육군조병창’이란 명칭의 대규모 무기공장으로서 일본의 대외 침략전쟁을 뒷받침하는 조선병참기지화 정책의 상징이었다. 그곳에는 1만 명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3

 

전쟁 말기에 접어들자 무기 생산 능력 확대를 위해 조병창 인근에는 토목·건설 공사가 쉼 없이 계속됐다. 그 공사장이 서울 크룹의 조직을 확대하는 무대가 됐다.

 

비밀결사 결성 이후 근 1년 만에 핵심 멤버들이 경찰에 붙잡히는 위기가 찾아왔다. 창립 멤버 신정균이 1945년 5월 체포된 데 이어, 책임자 정재철과 대구 조직을 담당했던 김일식이 검거됐다. 하지만 이내 8·15 해방이라는 천운이 따랐다. 체포된 이들은 풀려났고, 비밀결사 조직은 유지됐다.

 

해방 후 불과 10일 만에 박영발과 동료들은 조선공산당재건준비회와 연결됐다. 사회주의 진영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그룹과 합류한 것이다. 박헌영이 이끄는 이 대열과 결합한 것에 박영발은 진정으로 기뻐했다. 과거에는 소규모 경험주의적인 조직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이제 이론과 사상적 결핍을 극복하고 체계적으로 올바른 조직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노라고 자부했다. 그리하여 그해 9월20일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당증번호 1168번을 받았다.

 

모스크바 당학교에서 발급한 1950년 7월25일자 박영발 성적표. 임경석 제공

 

36살 모스크바 유학… 최상 레벨 성적

 

박영발은 합법 대중운동에도 진출했다. 해방 전부터 관계해오던 부평 지역 중심의 토건노동조합운동이 기반이 됐다. 해방되던 그해 9월 이미 경성토건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1월에는 전국 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결성에 참여하고 서울지방평의회 부위원장 겸 중앙위원으로 취임했다. 전평은 그의 주된 활동 거점이었다. 1947년 2월에는 중앙상임위원회 조직부 부책임자 직위에 올랐다.

 

비밀 당조직 활동도 열심히 했다. 입당과 동시에 토건세포 책임자가 됐고, 머지않아 서울시당 중구위원회 선전책, 서울시당 노동부 부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나중에는 중앙당 노동부 소속 실무 간부로까지 진출했다. 당내에서도 노동조합 관련 직책에서 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격렬한 대중투쟁을 지휘한 경력도 있었다. 그는 1946년 9월 총파업과 1947년 3·22 총파업 당시 두 차례에 걸쳐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 총무부 책임자를 지냈다. 전국적 총파업 투쟁을 중앙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진두지휘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박영발은 해방 이후 정국에서 당과 노동조합 양 부문에서, 그리고 총파업 투쟁의 지휘 방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위치를 점했다.

 

이 때문에 그는 장래 당조직을 이끌 중견 지도자로 지목받았다. 최고위 간부 교육을 이수할 자격이 있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1948년 7월 그는 러시아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36살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모스크바 조선노동당 간부학교 입학 대상자로 추천됐다. 부위원장 박헌영이 서명한 평가서가 남아 있다. 거기에는 박영발이 노동자들을 열성적으로 조직해왔고, 민주조선 건설 사업에 헌신했음을 인정한다는 문장이 쓰여 있다.4

 

6·25전쟁이 아니었다면 그의 유학 기간은 더 길었을 것이다. 그의 수학 기간은 1948년 9월15일부터 1950년 7월1일까지다. 2년 동안 그가 거둔 학업 성적표가 있다. 박영발은 도합 14개 과목을 수강했다. 시험 점수가 명시된 12개 과목 가운데 10개 과목에서 5점 만점을 받고, 2개 과목에서 4점을 받았다. 최상 레벨의 학업성적을 올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영발은 전쟁이 발발한 고국으로 급히 되돌아왔다. 러시아 유학에서 돌아온 박영발에게 주어진 보직은 전라남도당 위원장이었다. 그는 북한군 제6사단이 전남 광주를 점령한 뒤 1950년 8월 초 임지에 부임했다.

 

3월19일 vs 2월21일 두 개의 사망일은 왜?

 

박영발의 사망 일자에 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하나는 1954년 3월19일 국군 토벌대에게 교전 중 사살됐다는 기록이다. 사망 직후 신문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4인조로 이뤄진 국군 수색대가 반야봉 일대에서 작전하던 중 ‘무장공비’들이 은신한 동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에 박상옥 중사가 단독으로 동굴 속에 돌입해 공비 3명을 사살했는데 그중 하나가 재산(在山) 공비를 지휘하던 박영발이었다는 것이다. 박 중사는 이 전공으로 금성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5

 

또 하나의 견해는 박영발 사후 51년이 지난 뒤에야 나왔다. 빨치산 동료였던 박남진이 박영발 죽음의 진상을 언론에 공개적으로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박영발의 사망 일자는 1954년 2월21일이다. 전투 중 치명상을 입고 절망감에 빠진 한 동료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비밀 아지트 내에서 총기를 난사했고, 그로 인해 박영발을 포함해 대원 3명이 사망했다는 증언이다. 문제의 난사범은 다른 빨치산에게 사살됐다고 한다.6

 

두 가지 상이한 견해 가운데 박남진의 증언이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된다. 증언 내용이 구체적이고 피살 정황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박영발과 함께 전남도당 소속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생존자들도 이 날짜에 맞춰서 추모제를 지냈다고 한다. 더욱 신빙성이 느껴진다. 토벌대 쪽 3월19일 설도 모순 없이 해석할 수 있다. 주검이 발견된 날짜인 것 같다. 전공을 탐하는 수색대가 교전 후 사살했노라고 허위 보고를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사망 일자를 확인하는 문제는 망자의 제사를 지내는 입장에서 보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상이한 견해를 대비해본 까닭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京城東大門警察署 道警部 奈良坂性依, ‘意見書: 孔元檜 外 28名’, 70~71쪽, 1932.10.18,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85-국편-0262-0002

2. 박창일(본명 박영발), <자서전>, 2~3쪽, 1948.8.9,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2~14об

3. 이상의, ‘구술로 보는 일제하의 강제동원과 인천조병창’, <동방학지> 188, 108쪽, 2019

4. Зам.Председатель ЦК Трудовой партии Южной Корея Пак Хенен(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инструктора отдела труда ЦК Трудовой Паприи Южной Кореи, Пак Ен Бала (남조선노동당 중앙위 노동부원 박영발에 대한 평가서),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3 л.7 1948.7.31.

5. ‘從軍落穗 지리산’, <동아일보> 1954.4.12.

6. 김경대 기자, ‘박영발 위원장, 동지가 죽였다’, <시민의소리> 200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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