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사진 한장 안남은 조선 사회주의운동사 지도자

조선공산당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안광천은 혁명가인가 배신자인가


조선공산당의 역대 책임비서. (왼쪽부터)초대 김재봉, 제2대 강달영, 제3대 김철수와 제4대 안광천의 펜글씨 필적. 고등교육을 이수한 지식인답게 세련된 필치를 보인다. 그의 인물 사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임경석 제공

안광천(安光泉)은 비밀결사의 최고 지도자였다. 일제강점기의 가장 강력한 항일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다. 1926년 12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재임 기간이 10개월인 점이 눈에 띈다. 짧아 보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고등경찰과 밀정의 삼엄한 감시망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하단체의 수뇌로서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선임자들의 재임 기간에 비하면 오히려 긴 편이었다.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은 8개월, 제2대 책임비서 강달영은 5개월, 제3대 책임비서 김철수는 5개월간 재임했다.

제4대 안광천 책임비서의 당내 입지는 강력하고 안정돼 있었다. 당권 승계 과정이 적법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내 최고 의결기구에서 선출됐다. 1926년 12월6일 경성에서 비밀리에 열린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서 그의 책임비서 취임이 결정됐다. 창당대회에서 선출된 제1대 김재봉 책임비서에 뒤이어 두 번째였다. 제2대, 제3대는 달랐다. 그들은 일제 탄압으로 책임비서 자리가 비게 된 급박한 조건에서 보선(補選)으로 취임했다. 보선이란 당규약에 명시된 중앙위원회의 권한으로서, 중앙위원 가운데 결원이 생겼을 때 당대회 결정을 거치지 않고 자체 결의로 후임자를 충원하는 제도였다. 강달영과 김철수는 선임자가 경찰에 체포된 뒤 잔존 중앙위원들의 합의에 따라 책임비서에 올랐다. 그에 비하면 안광천의 취임 과정은 훨씬 더 적법할 뿐만 아니라 당당했다.


사회주의 진영의 통합을 이루다


안광천은 문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항일 비밀결사의 요직에 오르기 전부터 언론 지면에 그의 이름이 빈번히 오르내렸다. 일본에 유학 중일 때는 물론이고 국내에 귀국한 이후에도 신문과 잡지 지면에 곧잘 그의 글이 실렸다.

그는 이름 높은 논객이었다. 기고 활동을 통해 사회운동의 진로와 정책에 관해 다채로운 담론을 생산해냈다. 그의 문필 능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보기를 들어 조선어 종합잡지 <동광>의 흥미로운 한 앙케트 기사를 보자. 잡지사는 경성에서 간행되던 4대 조선어 신문사(<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보>)의 언론인 44명에게 물었다. 여러 신문을 통폐합해 단일한 거대 신문사를 세운다고 가정하면, 과연 어떤 인물들이 그 신문사를 이끌어가는 적임자가 될 것인가? 놀랍게도 안광천이 편집국장 직위에 올랐다. 다수의 언론인이 안광천을 가리켜 거대 통합 신문사의 지면 배치와 논조를 좌우하는 넘버 3위의 요직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꼽았다.1

정연한 이론 능력과 뛰어난 문장이 그를 공산당 책임비서 물망에 오르게 한 요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안광천은 신진 세대의 대표자로 간주됐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서울파와 화요파 사이에 전개됐던 이전 시기 사회주의운동 내부 대립에서 자유로운 위치에 서 있었다. 새로운 간부 인선에는 전임 책임비서 김철수의 의중이 실려 있었다. 김철수는 당대회를 열기에 앞서 옛 중앙위원들과 함께 신임 중앙위원회 윤곽을 미리 협의했다.2


특히 책임비서 인선이 중요했다. 김철수의 판단에 따르면, 안광천은 재능이 뛰어난데다 분파투쟁에 가담한 경력이 없으므로 각파를 망라한 통일된 공산당을 이끌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제 안광천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책임비서 취임 이후 조직, 대중, 정책 각 영역에서 눈에 띄는 약진이 있었다. 첫째, 양분된 국내 사회주의 진영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전임 김철수 책임비서 시기인 1926년 11월 당외 서울파 공산그룹의 구성원 140명이 입당한 데 뒤이어, 안광천 취임 이후인 1927년 3월 나머지 서울파 구성원 100여 명이 최종적으로 공산당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던 두 공산그룹 화요파와 서울파가 조선공산당 이름 아래 통합하게 됐다. 대단결을 바라는 사회주의자들의 숙원이 해결된 셈이었다.


당 사조직에 가담


둘째, 합법 공개 영역의 대중운동에 대한 장악력이 급격히 높아졌다. 보기를 들면 1927년 5월 전국 923개 가맹단체를 망라하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가 열렸을 때 그 진로를 안광천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의사대로 좌우할 수 있었다. 공산당 집행부는 그 협의회 설립을 저지하기로 결정했고, 대회 석상에서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정책을 관철할 수 있었다.

셋째, 민족통일전선 기관인 신간회가 설립된 것도 안광천 책임비서 재임 시기의 업적이다. 1927년 2월 신간회와 민흥회 두 갈래로 나뉘어 추진된 민족통일전선 설립 운동이 결국 신간회라는 이름 아래 단일화될 수 있었던 것도 비합법 영역의 사회주의운동이 통합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안광천의 공로이자 통일된 조선공산당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립물로 전화하지 않는 사물은 없는가보다. 달도 차면 기운다. 1927년 9월 즈음, 안광천의 리더십이 위기에 빠졌다. 위기의 진원지는 둘이었다. 하나는 당내 조직 문제고, 다른 하나는 정책 문제였다. 조직 문제란 공산당 내부에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이라는 비밀단체가 은밀히 만들어져 1년 이상 암약해왔음이 동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사건을 말한다. 일부 간부가 ‘당 중 당’을 만든 것이다. 이 단체는 ‘엘(L)단’ ‘엘엘(LL)단’ ‘엠엘(ML)단’ ‘엠엘당’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당원들 사이에 쉬쉬하면서 널리 회자됐다.

당 중 당을 몰래 만드는 것은 당의 규범에 반하는 범죄행위였다. 바윗덩이같이 강고한 단결을 지향하는 전위당 조직론에 배치되는 행위였다. 이전에도 분파투쟁은 있었지만 그것은 조직체를 달리하는 공산그룹 사이의 분쟁이었다. 당 내부에 은밀히 분파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충격적인 것은 책임비서 안광천이 그 일원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당원이 책임비서가 당의 규범을 해치고 사조직을 운용했음을 알게 됐다. 책임비서가 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내 비밀분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당원들은 배신과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안광천 등 중앙위원 연서명. 임경석 제공


‘친일파·자치파’와 협동 사업 주창

정책 문제도 리더십 위기를 낳은 또 하나의 진원이었다. 당내에서만이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그의 명성이 실추되는 사건이 터졌다. 영남친목회 사건이다. 영남친목회란 경성에 거주하는 경상남북도 출신자들의 친목단체였다. 이 단체가 창립된 1927년 9월 즈음에는 동향 출신자들의 친목단체가 경성에 여럿 존재했다. 호남 출신자들의 친목단체인 호남동우회, 서북 5도 출신자들이 결성한 오성구락부, 일부 영남 출신자들이 따로 만든 상우회 등이 있었다. 지방에서 태어나 경성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출신지 동일성을 식별 기준으로 하여 이 단체들을 조직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인간집단이 참여했다. 출신지가 같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입회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관리, 부유한 지주와 상공업자도 있고 노동운동 참가자와 사회주의 문필가도 포함돼 있었다.

문제는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안광천이 영남친목회에 가담했다는 사실이었다. 단지 참여만 했을 뿐 아니라 깊숙이 주도적으로 개입했음이 드러났다. 그는 단체 설립의 이유와 논리를 적은 ‘영남친목회 취지서’를 작성했다.3

그 단체의 이론가 역할을 자담한 것이다. 취지서에는 눈길을 끄는 곳이 있었다. “용기를 고취하여 전 민족적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 분투”하겠노라고 천명했다. ‘전 민족적 사업’이란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을 뜻할 수도 있고, 일본제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자치제를 실시하거나, 제국의회나 지방의회의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끔 참정권을 획득하자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총독부 관료, 대지주들과 같이하는 ‘전 민족적 사업’이란 적어도 조선 독립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향 각지에서 영남친목회 반대운동이 터져나왔다. ‘영남친목회반대책강구회’라는 단체가 결성되고, ‘영남친목회 반대 성명서’가 발표됐다. 머지않아 운동의 외연이 확장됐다. 단지 영남친목회 한 단체만이 아니라 그와 성격을 같이하는 모든 지방열단체를 반대하는 사회적 캠페인으로 확장됐다. 그것을 ‘지방열단체 반대운동’이라고 불렀다. 지방열단체는 ‘반동단체’로, 그에 참여한 사회운동자들은 ‘반동분자’로 간주됐다. 반대운동은 광범한 호응을 받았다. 전국 규모의 3대 대중단체로 촉망받던 노총(조선노동총동맹), 농총(조선농민총동맹), 청총(조선청년총동맹)이 지방열단체를 반대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그뿐인가. 전 조선의 ‘민족유일당’으로 존중받는 신간회도 지방열단체 배척을 결의했다. 막중한 무게를 갖는 결정이었다. 여론의 향배는 이미 결정된 거나 진배없었다.

조선공산당 내부 동향도 심각했다. 안광천의 책임을 묻는 당내 흐름이 나타났다. 책임비서가 ‘친일파·자치파’와 협동 사업을 주창하는 것은 심각한 과오였다. 누가 혁명의 적이고 누가 벗인지를 가르는, 혁명운동의 근본 문제를 혼란하게 하는 행위였다. 안광천을 책임비서 직책에서 면직시킴과 아울러 당에서 제명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됐다. 이 때문에 조선공산당은 다시 둘로 나뉘었다. 안광천을 옹호하는 그룹과 그의 면직을 요구하는 당원들로 분열됐다. 전자에는 엠엘당 그룹이 섰고, 후자에는 엠엘당을 비난하는 그룹이 섰다.

결국 1927년 10월 안광천은 책임비서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영남친목회에 참여하여 사회적 분란을 야기한 책임을 진 셈이다. 조선공산당이 출범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의 최고 지도자가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책임비서 직위에서 물러나는 현상 말이다. 그러나 엠엘당 그룹이 반대파의 요구를 백퍼센트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책임비서 직위만 벗을 뿐이지 중앙위원 자격은 그대로 유지됐다. 당내 갈등은 계속됐다.


사진 한 장 안 남아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는 조선 사회주의운동사의 한 전성기였다. 그의 재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운동 진영이 하나로 통일될 수 있었고, 그의 사임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이 새롭게 분열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안광천은 조선공산당 성쇠의 바로미터였다. 또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는 전환기이기도 했다. 이전의 내부 다양성이 화요파와 서울파의 갈등으로 대표된 데 반해, 안광천 이후에는 엠엘파와 비엠엘파의 대립으로 표출됐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래저래 안광천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 속 인물이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용모를 전하는 사진 한 장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용모에 관한 묘사가 남아 있다. “머리를 길러 뒤로 젖혔으나 지나치게 길지는 않았다. 얼굴은 빼빼 말라 골격이 훤히 드러났으며, 좌우 뺨은 두드러지고 턱은 뾰족했다. 과묵한 편이고, 말을 하고 나면 해죽해죽 웃는 습관이 있어서, 다정스럽고 친절한 기분이 느껴졌다. 키가 호리호리하고 약질이었다. 체격만을 놓고 보면 투사 같은 느낌은 없었다.”4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新聞戰線總動員, ‘大合同日報’의 幹部 公選’, <동광> 29호, 1931.12, 63쪽.

2. <김철수 외 20인 조서(2)> 419~420쪽,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3>, 청계연구소, 1986, 197쪽.

3. ‘영남친목회 취지서’ 1927.9. (김철수, <福本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중요 재료> 1928.4.1, 4~5쪽 수록),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5 л.43~45об.

4. ‘名士諸氏 맛나기 前 생각과 맛난 後의 印像’, <별건곤> 11호, 1928.2,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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