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의 발견

모스크바 기록관에서 90년 만에 모습 드러내
누가 작성했나… 서울상하이파 또는 김단야 추정


‘12월테제’ 러시아어 정본. ‘조선문제에 관한 결정’이라는 제목 옆에 ‘최종본’이라는 펜글씨 메모가 쓰여 있다. 

1928년 12월10일 코민테른 정치비서부가 채택할 때 사용한 문서다. 임경석 제공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이 발견됐다. 모스크바의 한 기록관에서 근 9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 기록을 소장한 것으로 유명한 러시아사회정치사기록관의 한 서류 파일에서 잠자고 있던 문서다.

이 문서는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됐다. 개성 있는 유려한 펜글씨로 쓰인 것으로 보아 작성자는 필시 중등 이상의 근대 교육을 이수한 사람으로 보인다. 군데군데 가감첨삭의 교정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때문에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종이는 밑줄이 인쇄된 21줄짜리 편지지로 보이는데, 혹여 노트 속지일 수도 있겠다. 페이지마다 글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모두 합쳐 19쪽이다. 200자 원고지로 환산했더니 62장에 해당한다.


통일 교과서에 실릴 역사적 문서


12월테제란 1928년 12월10일 코민테른 정치비서부가 채택한 조선문제결정서를 가리킨다. 조선 혁명운동의 기본 방침을 논하는 강령적 문서이기에 ‘테제’라고 했다. 이 테제는 일제하 조선 사회주의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기념비적인 문헌이다. ‘기미독립선언서’(1919)와 ‘조선혁명선언’(1923)이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위상이 있다면,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은 사회주의운동사 속에서 그런 구실을 하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뒷날 남북한이 통일되면 국어 교과서에 실릴 개연성이 큰, 역사적인 텍스트다.

12월테제를 기점으로 사회주의운동 내부에 ‘테제 정치’라고 해도 좋을 행동양식이 출현했다. 새로운 현상이었다. 1928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코민테른 조선문제결정서가 채택된 바 있다. 그러나 내용이 길지 않았다. 꼭 필요한 사항만 짧은 문장으로 명시했다. 그런데 12월테제 이후 달라졌다. ‘테제’라고 부르는 긴 정치적 문서가 채택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혁명운동의 주·객관적 정세, 전략과 전술, 조직 문제 등 체계를 세운 일종의 논문이었다. 이후 ‘9월테제’ ‘10월서신’ 등으로 불리는 긴 문서가 줄을 이었다. 이 현상은 해방 직후까지 계속됐다. 1945년 조선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이 작성한 8월테제는 이 행동양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테제 정치’가 20년 가까이 지속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929년 이후 통일된 전위당(노동자계급의 전위대로서 사회주의혁명 투쟁을 선도하는 정당)의 중앙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외에 산재한 여러 층위의 비밀결사 구성원들의 생각을 일치시키는 데 테제와 같은, 논리적으로 잘 짜인 장문이 유용했다. 어느 비밀결사에 속했든지 상관없이 그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통합하는 데 적합했다. 그뿐인가. 테제는 정치·사상적으로 비밀결사 구성원을 교육하는 구실도 했다. 국내외에 조성된 복잡한 정세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에 일목요연하게 해답을 제시했다. 그 때문에 비밀리에 활동하는 현장의 사회주의자들은 이 테제를 구하려 했고,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탐독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하지만 해방 이후 통합 공산당이 세워진 뒤로 ‘테제 정치’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구성원 사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훨씬 유용한 수단이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 첫 쪽.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서’라는 제목 아래 펜글씨로 적혀 있다. 전체 분량은 모두 합해 19쪽에 이른다. 임경석 제공

문서 발견 장소가 유일한 단서


도대체 누가 이 기록을 작성했는가? 유감스럽지만 문서의 어느 곳에도 작성자가 누군지 알려주는 구절이 없다. 부득이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 문서가 발견된 장소가 유력한 단서다. 조선어 필기본은 12월테제를 작성한 코민테른 조선위원회 파일에 켜켜이 쌓인 초안들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어 필기본의 작성자는 12월테제 채택 논의 과정에 참여한 조선인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코민테른 조선위원회의 구성은 쿠시넨(핀란드), 퍄트니츠키(러시아), 레멜레(독일) 3명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모두 코민테른의 최상급 집행기구인 정치비서부 위원이었다. 최고위직 인사 11명 가운데 3명으로 이뤄진, 권위 있는 기구였다.

조선인이 포함되지 않은 점에 눈길이 간다. 그렇다고 조선인이 문제 심의에 전혀 참여하지 않거나 배제됐던 것은 아니다.

조선위원회의 심의 과정에 참여한 조선인은 5명이었다. 이들은 분열된 조선공산당의 어느 한쪽을 대표했다. 이동휘와 김규열은 1927년 12월 당대회에서 성립한 조선공산당, 이른바 서상파(서울상하이파의 줄임말)를 대변했다. 그에 반해 양명과 한빈은 1928년 2월 당대회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이른바 엠엘(마르크스레닌주의)파를 대표했다. 또 한 사람은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레닌대학에 유학 중이던 김단야였다. 그는 분열되기 이전 조선공산당의 관점에서 독립적인 의견을 진술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이 5명은 조선공산당의 내부 상황에 대해 상세한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위원회가 요청하는 참고 자료를 작성했다. 주요 인물에 대한 평도 썼고, 직접 위원회 회의에 출석해 질의에 답변도 했다. 물론 어느 사안이든 자신의 관점에서 진술했다. 그 덕분에 조선위원회는 중요 사안마다 세 종류의 상이한, 때로는 서로 대립되는 정보를 볼 수 있었다.

조선인 대표단은 의사소통을 위해 통역을 둘 수 있었다. 서상파 공산당 대표단은 박진순의 도움을 받았다. 1920년 코민테른 제2회 대회에 한인사회당 대표로 참석했던 그 사람이다. 그는 러시아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고 모스크바대학 철학과를 졸업했기에 세련된 고급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엠엘파 공산당 대표단이 어떤 사람을 통역으로 내세웠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마 국제공산청년회 제5회 대회(1928년 8월20일~9월18일)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와 있던, 고려공청 대표 강진일 가능성이 높다. 강진은 러시아 연해주 포시예트에서 태어나 러시아 초·중등 교육을 이수하고 극동대학 공대에서 수학했던지라,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김단야는 통역을 세우지 않고 직접 자기 의사를 밝혔다. 그는 러시아어로 대화할 수 있는데다, 서면으로 문서를 제출할 때는 영어를 썼다.

12월테제 조선어 활자본 첫 쪽. 조선공산당 엠엘(NL)파 기관지 <계급투쟁> 창간호에 실렸다. ‘국제%癤愿瑛�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라는 제목으로 6쪽에 걸쳐 게재됐다. 제목에서 ‘공’에 해당하는 글자가 빠진 것이 이채롭다. 임경석 제공


공산그룹별로 다양한 번역본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의 작성자는 바로 조선인 대표와 통역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판단된다. 한 걸음 나아가 좀더 후보자군을 줄일 수 있다. 12월테제 조선어 판본들을 비교하는 방법을 통한다면 말이다.

12월테제가 채택된 지 불과 5개월 만에 조선어 활자본이 출간됐다. 중국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조선공산당 엠엘파의 기관지 <계급투쟁> 창간호에 그 전문이 게재됐다. ‘국제공산당의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라는 제목 아래 6쪽에 걸쳐 실려 있다.

두 가지가 놀랍다. 코민테른의 최고위급 결정 내용을 신속히 당원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점이 그렇고, 기관지 창간호의 권두 논설로 활자본을 실을 만큼 조직 역량이 우수하다는 점도 그렇다.

내용을 비교해봤다. ‘필기본’과 ‘계급투쟁본’ 사이에 내용상 차이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다만 선택된 용어나 문투, 표현 방식이 같지 않은 점이 눈에 띄었다. 예컨대 필기본의 첫머리는 “조선 경제의 모든 지배적 우월권은 일본 금융자본의 수중에 들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에 비해 계급투쟁본에는 “조선의 모든 경영의 지배권은 일본 금융자본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다”고 표현됐다. 한 군데 더 살펴보자. 조선혁명의 성격을 논하는 대목이다. 필기본에는 “조선혁명은 그 자체의 사회적 경제적 내용으로 보아서 다만 일본제국주의만 대항할 것이 아니라 역시 조선의 봉건주의도 대항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표현됐다. 계급투쟁본에는 “조선혁명은 그 사회적 경제적 내용에 있어서 다만 일본 제국주의뿐 아니라 조선의 봉건주의까지도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결국 양자 사이에 내용상 유의미한 차이는 없지만, 용어와 문투가 동일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음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필기본과 계급투쟁본은 서로 다른 사람이 작성했음을 뜻한다. <계급투쟁>이 엠엘파 공산당의 기관지임을 고려한다면, 그에 게재된 활자본은 모스크바에 파견된 양명과 한빈, 그들의 러시아어 통역을 맡은 강진 등이 작성했음이 분명하다. 둘째, 12월테제의 조선어 정본이 코민테른에 의해 독립적으로 채택된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코민테른이 채택한 12월테제 정본은 러시아어본 하나고, 조선어나 일본어 등 다른 언어로 쓰인 것은 모두 그 번역본이다. 조선어 판본의 다양성은 12월테제의 번역과 전파가 통일된 게 아니라 공산그룹별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필적 대조하고 개인 행적 추적을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은 누가 작성했는가. 두 부류의 인물들로 좁힐 수 있다. 서상파 공산당 대표로서 조선위원회 심의에 참가했던 이동휘, 김규열, 통역 박진순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3의 입장에서 심의에 참가했던 김단야일 것이다. 딱 여기까지다. 현재 확보한 단서로 추적할 수 있는 한계가 말이다. 만약 전자라면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은 서상파 계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참가자들이 숙독하던 문서일 것이다. 후자라면 김단야가 이끌던 국제선 공산주의 그룹이 사용하던 문서일 것이다.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추론의 단서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후보자들이 직접 쓴 문서의 필적을 대조하거나, 12월테제 채택 전후 각 개인의 행적을 정밀하게 추적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서’,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0 л.144~153.

2. 강호출, <코민테른 ‘조선문제결정서’를 통해 본 조선공산당운동(1925~1928)>,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141~142쪽, 2004년.

3. ‘국제공산당의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 <계급투쟁> 1호, 33~39쪽, 1929년 5월. 朴慶植 編, <朝鮮問題資料叢書> 7, 東京, アジア問題硏究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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