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일제 경찰이 발견한 ‘암호 일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이 목숨 걸고 쓴 기록 ‘비서부일기’



(왼쪽부터) 평상시 강달영. 옥중의 강달영. 일본 관헌이 해독한 ‘비서부일기’ 1926년 3월17일자 기록. 임경석 제공

강달영(40)은 수요일이 되어서야 느지막이 신문사에 출근했다. 1926년 3월17일이었다. 오전 10시, 출근 시간으로는 좀 지난 때였다. 수표정 43번지, 오늘날 서울 청계2가 교차로에서 3가 방향으로 남쪽 천변에 있는 조선일보사 건물에 들어섰다. 그는 조선일보사 영업국 촉탁으로 일했다. 촉탁이란 정식 사원이 아니라 일정 기간 임시로 업무를 맡는 직책이었다.

왜 무단결근했을까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연이틀이나 결근한 뒤였다. 촉탁이라 해도 근무 규율과 내용은 정식 사원과 별 차이가 없었다. 거듭된 결근은 이채로운 일이었다. 왜 무단결근했습니까? 혹여 누가 물었다면, 적당히 둘러대야 했을 것이다. 감기 몸살에 걸렸다거나, 긴급한 가정사가 있었노라고 변명했으리라. 실은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는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다. 경찰에 체포된 전임자 김재봉 뒤를 이어 1925년 12월 하순부터 그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너무 바빠서 지난 이틀 동안 도저히 직장에 나올 수 없었다.

신문사 영업국 촉탁 직책은 경성 생활을 가능케 해주는 합법적인 신분이었다. 경찰의 의심을 사지 않고서 경성 시내를 활보하거나 지방을 오가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직업이었다. 불과 4개월 전만 해도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선일보 지국장 일을 하던 그가 어떻게 이런 직장을 얻었을까. 아마도 신문사 간부사원인 공산당원 홍덕유(45)가 힘썼을 것이다. 그는 조선일보사 지방부장이었다. 각 지방에 설립된 지국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기사와 자금의 출납, 신문지 배급 등의 업무를 관리하는 책임자였다. 지방도시에 거주하던 신임 책임비서의 경성 체류 명분을 만드는 일은 그에겐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출근도 못할 지경이었을까? 일반적으로 비밀결사의 수뇌가 무슨 일에 종사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강달영 책임비서는 달랐다. 그는 국제당(코민테른) 연락과 후임자 업무 인계를 위해 기록을 남겼다. 암호로 쓰인 ‘비서부일기’가 그것이다.1

3월12일부터 5월14일까지 약 두 달 동안의 책임비서 활동상을 적었다. 강달영은 독자적인 암호 시스템을 고안했다. 자신만이 해독할 수 있는 비밀 알고리즘이었다. 만일 불행한 사태를 당해 발각된다면 목숨을 걸고서 지킬 결심이었다. 자기 하나 입 다물면 천하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기록이었다.

책임비서가 몰입했던 업무 가운데 하나는 국제당과 교신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식민지 수도 경성 한복판에서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당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쉽사리 수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신의주를 통해 국경을 넘어서 외국으로 보냈을까. 아니면 함경북도 너머 블라디보스토크로 밀사를 보냈을까. 둘 다 아니었다. 강달영은 그보다 훨씬 더 손쉬운 통로를 갖고 있었다. 바로 경성에 있는 소련총영사관이었다. 재경성 소련총영사관은 1925년 9월 개관했다. 그해 2월25일 비준된 소련-일본 기본조약에 따라 합법적으로 설립된 외교기관이었다. 경성 하늘에 적기를 휘날리는 이 기관의 위험성에 일본 경찰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총영사관 주변에 삼엄한 감시망을 펼쳐놓았다. 그 때문인지 감시를 두려워해 그곳에 공공연히 출입하는 사람은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고 경찰 기록에 쓰여 있다.2


출근날 새벽까지 극비 문서 옮기는 데 매달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감시망을 뚫는 데 성공했다. 경성 주재 총영사관의 정보 담당자 ‘윌리’가 모스크바의 외무성과 국제공산당 앞으로 보낸 첫 번째 정보 보고서는 1925년 9월19일자로 작성됐다. 거기에는 조선공산당 중앙과 접선한 결과가 기재돼 있다.3

김재봉 책임비서 시절에 이미 총영사관 쪽과 비밀 접촉 경로를 열었다. 강달영은 전임자에게서 그 접촉 시스템을 넘겨받았을 것이다. 책임비서가 직접 움직이지는 않았다. 접촉 실무자는 박민영(25)이었다. ‘박 니키포르 알렉산드로비치’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가진 그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신진 활동가였다.

느지막이 신문사에 출근한 바로 그날, 책임비서는 박민영을 만났다. 근 일주일째 그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다. 접촉이 쉽지 않았던 까닭은 박민영이 국내에 잠입한 지 얼마 안 돼 비밀활동 거점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책임비서는 열네 종류의 문서를 건넸다. 지난 며칠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작성한 극비 문서였다. 국제당의 조선담당관들만이 읽어야 할 문서였다. 당 현황과 간부진 변동, 상하이·만주·연해주 등 국외에 설치한 당 기관의 활동, 합법 공개 영역의 사상단체와 대중운동 정책에 관한 것이 포함됐다. ‘예산안’과 ‘예산안 설명서’도 있었다. 어느 문서에나 맨 끝에는 날짜를 적고 서명을 남겼다. 1926년 3월17일자였다. 출근하던 날 첫새벽까지 이 일에 매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날 오후 강달영은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화요회란 합법 공개 영역의 사상단체 이름이고, 프락치야란 그 내부에 설치한 당원 조직을 가리켰다. 당 규약에 따르면, 합법 공개 단체에 3명 이상 당원이 있을 때 그 내부에 프락치야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며, 그 임무는 당의 정책과 영향력을 대중에게 실현하는 것이었다.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를 서둘러 소집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바로 네 개 합법단체(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를 통합해 하나의 단체로 개편하는 과제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3월5일자 당 중앙집행위원회 석상에서 결정한 사안이었다.4

화요회는 가장 영향력이 큰 합법 단체였으므로, 그 속에는 두 개의 야체이카(세포)가 설치돼 있었다. 야체이카란 당의 ‘기본회’였다. 산업 현장을 중심으로 한 장소에 3명 이상 당원이 있을 때 조직했다. 구성원은 3~7명을 두도록 했고 그 이상 당원이 있을 때는 제2, 제3의 기본회를 조직하게 했다.


쉼 없이 열린 중앙집행위 회의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에는 그 내부에 있는 두 야체이카 구성원이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워낙 긴급히 소집된 탓에 성원이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 6명밖에 출석하지 않아서 개회할 수 없었다. 참가자들은 프락치야 회의를 다음날로 연기하고, 차후에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회의를 유력 분자의 집합으로 간단히 줄인다는 건의안을 상급 기구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강달영이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에 직접 참석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사안을 그날 저녁에 열린 당중앙 비서부 모임에서 비서부 차석인 이준태(35)에게서 보고받았다. 비서부는 당중앙 직속 핵심 부서로서 자신이 직접 이끌고 있었다. 이 회의가 하루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집행부를 체계화하고 효과적으로 가동하는 일은 강달영의 핵심 관심사였다. 책임비서직을 승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기에 그로서는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과제였다. 당의 최고 집행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를 굳건히 세우는 것이 선차적이었다. 중앙집행위원 정원은 7명이었다. 강달영은 그들을 결속해 그해 2월부터 3월 초까지 7회에 걸쳐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제3∼5회 회의는 2월26일부터 사흘간 날마다 쉼 없이 계속 열렸다.

중앙집행위원회 내부에 상설집행기구를 가동하는 것도 중요했다. 비서부·조직부·선전부 3개 부서를 두었으며, 비서부는 자신이 직접 이끌었다. 이날 비서부 회의에선 화요회 프락치야의 건의를 임시로 받아들이되, 최종 결정은 중앙 조직부에서 하도록 위임했다. 이어서 민족통일전선 결성 문제도 협의했다. 충분히 논의했지만 결정은 미뤘다. 당대회에서 결정할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1년에 1회씩 열기로 약속한 당대회 개최를 준비하는 것도 강달영 중앙이 해결해야 할 현안이었다. 당대회는 5월 중순 경복궁에서 떠들썩하게 열릴 조선박람회를 이용할 예정이었다. 당대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회 의안을 짜며, 대의원을 선출하는 등의 일정이 앞에 놓여 있었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당중앙 비서부 회의는 밤 12시에 폐회됐다. 강달영의 길었던 하루는 이렇게 저물어갔다.


쓸쓸한 마감


우리가 강달영의 어느 날 동선을 이처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비서부일기’ 덕분이다. 뒷날 불행히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을 때 그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암호 기록을 자신만이 해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문경관 요시노 도조 경부보는 “뼈가 돌이 되어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아니하겠다”는 결심이 그의 몸에서 풍겼다고 회고했다. 결국 강달영은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감시의 눈을 피해 자살을 시도했다. 머리를 힘껏 철제 책상에 부딪쳤다.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 주도면밀한 감시 때문에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는 그 시도를 몇 차례 되풀이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암호 해독 기술이 그의 알고리즘을 뚫었을 때,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키겠다는 그의 결심은 무너져내렸다. 강달영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미쳐버렸다. 정신이상자가 되고 말았다. 옥중에 있을 때도 그랬고, 출옥 뒤에도 회복하지 못했다.

그렇게 쓸쓸히 지내다가 1940년 7월12일, 향년 54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진주 3·1운동의 유공자, 조선 노동운동의 지도자, 인생을 기울여 헌신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혁명가, 그의 명복을 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비서부일기’, 1926년 3월12일~5월14일,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 제1집,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1932년.

2. 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の治安狀況(昭和2年版)>, 不二出版, 1984(復刻板).

3. Билль(윌리), Дорогие товарищи(경애하는 여러 동무들),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06 л.19-24, 1925년 9월19일.

4.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회록(제6회)’, 1926년 3월5일,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 제1집,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7쪽, 1932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