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두꺼비의 탄생

 1983년 10월 29일, 사무실 입주식에서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이 현판을 달고 있다.
 1983년 10월 29일, 사무실 입주식에서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이 현판을 달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민청련은 경찰병력이 둘러싼 살벌한 상황 속에서 창립총회를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총회 직후 안기부로 연행됐던 김근태 의장과 집행부원들도 우여곡절 끝에 일주일여 만에 전원 무사히 풀려났다. 이로써 민청련은 일단 전두환 독재정권의 유화조치 틈새 속에서 공개청년운동의 활동공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 신군부의 철권통치 속에서 절치부심하며 숨죽이고 있던 민주청년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이범영의 말처럼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는데 그 비빌 언덕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어렵게 확보한 그 활동공간은 24시간 기관원들의 감시 아래 놓여있는 불안정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민청련 집행부는 민청련을 설화 속의 독사와 두꺼비에 비유했다. 두꺼비는 힘으로는 언제든지 독사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꺼비는 비록 독사에게 잡아먹히지만 두꺼비를 잡아먹은 독사도 두꺼비의 독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잡아먹힌 두꺼비는 독사의 몸을 자양분으로 삼아 품고 있는 알을 부화시켜 새끼들을 탄생시킨다.

 사회부장 연성수와 부인 이기연이 제작한 두꺼비 판화.
 사회부장 연성수와 부인 이기연이 제작한 두꺼비 판화.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말하자면 민청련은 언제든지 독재정권의 탄압에 희생될 각오를 하면서 출범했다. 그러나 그 희생을 바탕으로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민중들의 세상을 탄생시킬 것이라는 당찬 희망을 가졌다. 이 희망은 민청련 초기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민청련 집행부와 회원들을 지탱해 주고 당당하게 했던 원동력이었다.

ad

이 두꺼비의 비유는 사회부장 연성수가 전래 민담에 나오는 두꺼비 설화에서 따온 것인데, 이후 민청련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연성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요. 하나는 어렸을 때, 손에 흙을 덮고 두드리며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하며 놀던 생각이 났어요. 우리가 지금 처한 현실이 헌집이고, 우리가 원하는 새 세상은 새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또 하나는 두꺼비는 대개 알을 품으면 독사한테 가요. 일부러 독사 앞에 가서 약을 올려서 자기를 잡아먹게 만들어요. 잡아먹히면 자신은 죽지만 독사를 영양분으로 해서 새끼가 부화하거든요. 그게 우리 공개운동의 취지와 딱 맞는다고 생각한 거지요.

우리가 앞에 나서서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면 탄압을 받겠죠.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의 본질이 폭로되고 그로 말미암아서 전두환 정권이 끝장이 날 거다, 그런 걸 상징한 거였죠."

이 두꺼비 이야기는 연성수의 부인 이기연이 판화로 새겨 민청련의 공식 로고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초부터 발간되는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도 이 두꺼비 판화가 표지를 장식했다.

 민청련 두꺼비를 제작한 이기연. 1985년 민가협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모습. 현재 '질경이 우리옷'을 경영하고 있다.
 민청련 두꺼비를 제작한 이기연. 1985년 민가협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모습. 현재 '질경이 우리옷'을 경영하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사무실 확보를 위한 투쟁

김근태 의장과 집행부는 안기부에서 풀려나자 우선 활동근거지가 될 사무실부터 물색했다. 10월 하순 드디어 종로2가에 적당한 사무실이 임대로 나와 있는 것을 찾아냈다.

종로 2가 사거리에서 낙원상가로 가는 대로 왼편에 있는 파고다빌딩 5층 514호실이었다. 10평쯤 되는 사무실인데, 도심 한복판이라 우선 교통이 편리한 장점이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이라 임대료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김근태 의장이 박우섭 총무와 함께 직접 가서 부인 인재근의 명의로 사무실을 계약했다.

사무실 보증금은 예춘호 선생 등 재야 원로들이 마련해 준 찬조금에 회원들이 낸 회비를 보태 마련했다. 계약할 때 민청련이 대정부투쟁을 하는 재야단체라는 걸 알면 계약해 주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출판사 사무실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관리인은 별생각 없이 순순히 1년 기한의 임대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사무실 집기는 중고가구점에서 일부 사고, 회원들이 경영하는 출판사들에서 남는 집기를 보내 주었다. 전동타자기 한 대와 수동식 먹지 인쇄기 1대를 장만하고, 전화도 놓았다.

10월 29일 2시에는 회원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입주식을 갖고 현판식도 했다. 내빈들과 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란 글자가 선명한 현판을 출입문 위에 달았다.

 민청련 창립 당시 재정에 큰 도움을 준 1. 장하구 종로서적 사장과 2. 한글 타자기 개발자이자 국내 최초 안과의사인 공병우 박사
 민청련 창립 당시 재정에 큰 도움을 준 1. 장하구 종로서적 사장과 2. 한글 타자기 개발자이자 국내 최초 안과의사인 공병우 박사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민청련 초기 운영자금 마련에는 김지하의 수묵화가 큰 도움을 주었다. 재정부장 홍성엽이 김지하 시인에게서 난초 그림 10점을 받아 왔다. 이 '김지하 난'을 마침 일본을 방문하는 성래운 교수에게 부탁해 일본교포들에게 5점을 팔고, 나머지 5점은 국내 지인들에게 판매해 500여만 원을 만들었다. 공병우식 타자기로 유명한 공병우 선생은 타자기 수십 대를 협찬해 주었다. 문익환 목사와 친분이 있었던 종로서적 장하구 회장도 후원금을 내놓았다.

10월 30일 9시, 새로 마련한 사무실에 첫 출근하는 집행부원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러나 곧 사단이 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파고다빌딩은 비리사학의 상징으로 세상에 알려진 상지대학의 설립자 겸 이사장에 민정당 국회의원을 3번이나 지낸 김문기의 소유였다. 입주자가 민청련이라는 걸 안 김문기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입주한 지 1주일쯤 지났을 때 관리인이 찾아와서 보증금을 돌려줄 테니 방을 비워달라고 통고했다. 민청련이 입주식을 하자마자 빌딩 관리실로 안기부, 치안본부, 서울시경, 종로서 정보과 등 온갖 기관에서 민청련 담당자라는 사람들이 찾아와 동향을 캐물었던 것이다. 출판사로 알고 별 생각 없이 계약해준 빌딩 측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야단이 났고 그 소식은 김문기에게도 보고됐을 것이다.

총무 박우섭은 관리실로 내려가서 계약서를 꺼내놓고 계약서에 명시돼 있는 계약만료 기간이 되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고 항변했다. 쉽게 나갈 사람들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관리인은 자기들이 받은 보증금에 이사비조로 상당액을 얹어 주겠다고 회유하는 한편, 만일 나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여 강제 퇴거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이 보기에 민청련은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는 범죄단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계약서에 무슨 일을 한다는 내용이 있을 리 없고, 범죄단체도 아닌 민청련이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쫓겨날 수는 없었다. 박우섭은 마음대로 해 보시라고 완곡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튿날 사무실에 출근한 민청련 집행부원들은 빌딩 앞 길거리에 책상, 소파 등 사무실 집기들이 쌓여 있는 걸 보았다. 지난밤에 관리실에서 인부를 시켜 사무실 집기를 모두 들어내 놓은 것이다. 5층 사무실에는 큼직한 자물통을 채워 출입을 막아 놓았다. 그들이 말한 대로 강제퇴거를 집행한 것이다.

 민청련 사무실이 있던 파고다빌딩의 현재 모습. 리모델링을 했으나 자세히 보면 옛 건물 흔적이 꽤 남아 있다.
 민청련 사무실이 있던 파고다빌딩의 현재 모습. 리모델링을 했으나 자세히 보면 옛 건물 흔적이 꽤 남아 있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여기에 굴할 민청련이 아니었다. 민청련 간부들은 즉시 사무실에 항의하고, 열쇠공을 불러 자물통을 열었다. 그리고 책상과 집기들을 모두 원래대로 다시 5층 사무실로 올려놓았다.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이런 사태는 계속되었다. 밤중에 밖에 내려놓으면 아침에 올려놓고, 다시 내려놓으면 다시 올려놓았다. 이런 실랑이가 5일간이나 계속됐다.

종로경찰서는 수수방관했다. 관리인 측에서 신고를 했다 하더라도, 쫓아낼 법적 근거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개입해서 유리할 일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1주일 만에 빌딩 측이 손을 들었다. 민청련이 공개단체로 자리 잡는 또 한 번의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기별대표모임과 계반

민청련은 창립총회를 마치고 사무실 마련 등 집행부 근무환경을 조성하는 한편으로 내부에서는 기반조직의 건설에 주력했다. 중심 역할은 집행부와 함께 이범영, 김도연이 맡았다.

민청련의 기반조직은 이미 기존에 형성돼 있던 출신학교 및 학번별 모임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각 단위 모임에서 대표가 한 명씩 나와 대표모임을 구성했는데, 처음에는 이것을 기별 대표조직이라는 뜻으로 '기대'라고 불렀다. 그러다 1984년 들어 조직이 확대되면서부터는 그 단위모임을 '계반'이라 하고, 계반대표를 '계주', 계반대표 모임을 '계주모임'이라 불렀다. 이것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민청련 조직원들끼리만 통하는 일종의 은어를 쓴 것이다.

사실 이 기반조직은 창립총회 이전부터 창립준비모임 형식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각 단위의 공식 대표성을 온전히 갖추지는 않았다. 창립총회 때까지만 해도 서울대 정도가 단위모임 대표성을 갖추었고, 여타 대학들은 대개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창립총회 이후 조직을 정비하면서 각 단위의 대표성을 갖춘, 말하자면 대의원회 성격의 기반조직으로 정비해나갔다.





IE002219319_STD.jpg
0.68MB
IE002219318_STD.jpg
0.15MB
IE002219325_STD.jpg
0.39MB
IE002219316_STD.jpg
0.05MB



위장결혼식의 '신랑', 또다시 감옥 가기를 자청하다



소사 모임

김근태가 민청련 의장으로 내정된 1983년 8월 이후, 창립준비모임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모임에서는 우선 조직을 집행위원회와 상임위원회로 이원화하기로 결정했다. 집행위원회는 처음부터 공개 활동 전면에 나서는 조직이다. 반면에 상임위원회는 2진 개념으로, 처음에는 공개되지 않고 집행위가 탄압을 받아 전원 구속이 되어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다시 집행부를 구성할 책임을 지는 조직이었다. 집행부 전원 구속은 당시 상황에서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 아래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비공개 상임위가 불가피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ad

우선 당면과제는 집행위 구성이었다. 누가 1순위로 감옥에 갈 것인가?

9월 초, 소사(현재의 부천시)에서 창립 준비 모임이 열렸다. 집행위를 구성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구월동에서 김근태 의장과 함께 뒹굴었던 박우섭이 맨 먼저 나섰다. 박우섭은 김근태가 의장으로 나서는 순간 자신은 김 의장과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망설임 없이 집행위에 자원했다. 김근태, 박우섭 외에 나머지 3~4명의 집행위원이 필요한데 누가 맡을 것인가?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정적을 깨고, 홍성엽이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집행위에 참여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1970년대에 민청협 총무를 맡아 온갖 궂은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고,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던 홍성엽의 집행위 지원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고 나서 11월 10일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가 유신헌법에 의해 새 대통령을 뽑겠다고 발표했을 때, 이 통대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민주청년들이 계획한 것이 바로 YWCA 위장결혼식이었다. 계엄 하에서 원천적으로 정치집회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를 돌파하기 위해 명동 YWCA 강당에서 결혼식을 위장하여 통대선거반대 국민대회를 개최하려고 한 것이다.

위장결혼식이지만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청첩장에 박힐 신랑 이름은 최소한 실제 인물이어야 했다. 최규하 발표가 있던 날 열린 민청협 8인 운영위원회에서 홍성엽이 신랑역을 자청했다. 홍성엽은 이후 현실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살며 운동에 헌신하다가 2005년 10월 7일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계엄 하에서 위장결혼식의 신랑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참혹한 고문을 당했고,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도 감옥 갈 것이 뻔한 길을 담담하게 선택한 것이다.

이어 박계동과 연성수가 참여 의사를 밝혔다.

박계동은 고려대 정외과 3학년이던 1975년 5월, 이른바 '명동성당 전국대학생연맹사건'으로 첫 징역을 살았다. 당시 과 선배이자 서클 선배였던 한경남과의 인연으로 험난한 인생행로에 들어선 박계동은 출소 이후에도 늘 민주화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했다. 1977년부터는 같은 학교 출신 조성우가 회장으로 있던 민청협의 간부로 활동했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에는 광주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배후로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채 전국에 지명수배되기도 했었다. 수배 상태에서 구월동에 살던 명동사건 공범 이명준의 집을 드나들면서 구월동 수배자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당시부터 김근태와도 안면이 있었다. 일찍부터 공개운동으로 감옥과 경찰서를 드나들어 수사기관의 요주의 인물로 알려졌던 그였기에 고대 쪽에서 민청련 집행부에 참여할 사람으로는 그가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소사 모임에 참석한 그는 역전의 용사답게 망설임 없이 집행위 참여를 선언했다.

 제1선인 집행위원회를 자원한 1. 장영달 2. 박우섭 3. 연성수 4. 박계동 5. 이범영 6. 홍성엽
 제1선인 집행위원회를 자원한 1. 장영달 2. 박우섭 3. 연성수 4. 박계동 5. 이범영 6. 홍성엽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연성수의 참여는 회의 전에 이미 예정돼 있었다. 연성수는 1975년 5월 서울대 식물학과 2학년에 재학 중 이른바 '오둘둘 사건'(5월 22일 서울대에서 긴급조치9호에 반대하여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학생시위)에 주동자로 참여해 징역을 살았다.

학생 때부터 반유신 문화운동패인 '가면극회'의 일원이었던 연성수는 징역을 살고 나와서도 민중문화운동판을 떠나지 않고, 김민기, 채희완, 홍석화, 황선진 등과 함께 현장극단운동을 계속했다. 이들은 '한두레'라는 이름으로 아현동에 애오개소극장을 열고 '진오귀굿', '예수전' 등 저항성 강한 마당극을 무대에 올리고,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터 등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그가 민청련 집행부 참여를 결심하게 된 것은 민중극단 한두레 모임에서였던 것 같다. 당시 학교, 학번별로 이루어졌던 민청련 기반조직 모임과 달리 별도의 논의 단위를 형성하고 있던 문화운동 쪽은 황선진과 김도연이 대표로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 집행부 참여를 권유받은 연성수는 큰 고민 없이 집행부 참여를 결정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내 자신이 민중 출신이다. 그리고 문화판에서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작업하다 보니 이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생각으로 참여를 결정했다고 한다. 아내 이기연과도 의논하여 동의를 얻었고, 연로한 어머니가 반대할 것을 염려했으나 아들의 단호한 결심에 어머니도 따라주었다.

이범영도 집행위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이 기반 조직을 오랫동안 조직하고 관리해 온 이범영에게 뒤에 남아서 계속해서 기반 조직을 관리해주도록 부탁했다.

모임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무슨 일이든 맡겨주면 기꺼이 하겠노라고 김근태 의장에게 일임했던 장영달도 집행위에 포함시켰다. 집행위원들 간에 부서도 정했다. 총무와 재정을 나누어 총무부장에 박우섭, 재정부장에 홍성엽, 그리고 홍보부장 박계동, 사회부장 연성수로 정했다. 사회부장 연성수는 노동현장과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하는 점을 고려하여 일단 창립총회에서는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 장영달은 연배를 고려하여 부의장으로 내정했다.

 왼쪽부터 상임위원회 의장 최민화, 부의장 이해찬, 부의장 이을호.
 왼쪽부터 상임위원회 의장 최민화, 부의장 이해찬, 부의장 이을호.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이어서 상임위 구성을 논의했다. 상임위 의장에 최민화가 내정되었다. 김근태를 의장으로 추대하는 데 앞장섰던 최민화는 직장이 있어 준비 모임에는 자주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에게 약속한 대로 자신의 거취는 전적으로 김근태 의장에게 일임해놓고 있었다.

준비 모임에서는 최민화에게 1진 집행위 유고 시 후속 집행위를 재조직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향후 재정문제가 중요한데 재정 조달을 위해서도 OB모임의 물주였던 최민화가 2선에 남을 필요가 있었다.

상임위 부의장에는 이해찬과 이을호가 내정되었다. 이해찬의 냉철하고 정확한 정세판단 능력을 평가한 것이었지만, 향후 상임위가 담당하게 될 기관지 출판을 위해서도 출판사를 운영하는 이해찬이 상임위에서 역할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이을호도 탁월한 이론적 능력을 인정하여 상임위 부의장으로 배정되었다.

이것으로 집행부 구성은 대체로 마무리되었다.

창립총회 준비

한편으로 창립총회를 열기 위한 실무 준비도 집행부 중심으로 착착 진행되었다. 우선 단체의 명칭은 준비모임에서 민주화운동청년(전국)연합, 약칭 민청련으로 결정되었다. 전국을 괄호로 넣은 것은 아직 지역 조직이 건설되기 전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서울에서 하향식으로 조직해 가는 것이 아니라 지역으로부터 상향식으로 전국 조직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원칙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것은 지역 운동의 자발성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적절했던 것이었지만, 창립 이후 전국에서 지역 운동 조직이 자생적으로 생겨나면서 '전국' 호칭은 사라진다.

 문건준비팀으로 활동한, 왼쪽부터 김도연, 황선진, 권형택.
 문건준비팀으로 활동한, 왼쪽부터 김도연, 황선진, 권형택.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창립총회에서 발표할 문건으로 창립선언문과 발기문을 준비했다. 이 두 문건을 준비하기 위해 김도연을 중심으로 문건준비팀이 따로 꾸려졌다. 이 팀에는 황선진과 권형택이 함께 했다. 이 문건팀은 김도연의 집과 사무실에서 3~4차례 만나서 회의를 하고 문건의 내용을 논의, 검토했다.

처음에 창립선언문은 황선진, 발기문은 권형택이 초안을 써와서 함께 검토했는데, 김도연이 의견을 많이 내고 문장도 다듬었다. 이렇게 수정보완된 두 문건은 창립준비모임에 넘겨졌는데, 발기문은 대체로 문건팀에서 작성한 대로 통과되었으나 창립선언문은 논란이 되었다. 그래서 김근태 의장이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해서 다시 만들었다.

이 두 문건은 보안을 생각해서 인쇄소에 넘기지 않고, 원지에 타자를 쳐서 드럼에 원지를 올려 돌려 찍는 수동식 인쇄기로 직접 찍었다. 이 문건 인쇄는 홍보부장 박계동이 당시 EYC 간사로 일하는 후배와 함께 기독교회관에 있는 EYC 등사기를 이용하여 밤 시간에 비밀리에 수행했다. 각각 300부 정도씩 준비했다.

창립총회를 어디서 할 것인지 대회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과제였다. 200명쯤 들어가는 곳이면서 대회 전에 수사기관에 포착되지 않을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은 난제 중의 난제였다.

일반적으로 많이 집회 장소로 사용하는 곳으로 YWCA회관이나 흥사단 강당 등이 있었지만, 수사기관이 항상 주목하고 있는 곳이라 사전에 발각되기 십상이었다.

오랫동안 가톨릭 쪽과 함께 운동을 해왔던 박계동이 여기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박계동이 당시 한강성당 주임신부로 있던 함세웅 신부에게 부탁하여 수녀들의 수양기관으로 쓰이고 있던 돈암동 상지회관 예배실을 쓰기로 예약한 것이다.

상지회관은 성북구 돈암동의 아리랑 고개에 있는 가톨릭 수녀들의 수양기관인데, 지금은 '상지 피정의 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은 재개발 사업으로 주변에 산뜻한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1983년 당시에는 상지회관으로 올라가는 길이 차 한 대가 겨우 비켜 갈 수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이었고, 골목 양쪽에 낡은 주택들이 죽 늘어서 있는 전형적인 서울의 서민층 주택가였다.

 왼쪽은 상지회관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은 '상지 피정의 집' 전경.
 왼쪽은 상지회관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은 '상지 피정의 집' 전경.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마지막 난제를 해결한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마지막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어떻게 하면 무사히 창립총회를 치를 수 있을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대회 장소가 수사기관에 알려지면 대회를 봉쇄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라 무엇보다도 대회 장소에 대한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대회 날짜는 대회 1주일 전쯤, 조직을 통해 확인된 회원들에게만 구두로 전달했다. 고문·지도위원들에게도 가급적 직접 만나서 전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전화가 도청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대회 장소를 각 대학 기별 대표들에게만 알려주고 그 대표가 회원들을 일정 장소에 모이게 하여 함께 데려오는 방식을 취했다. 집행부원들은 정보가 새서 사전 구금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대회 3~4일 전부터는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IE002216064_STD.jpg
0.19MB
IE002216065_STD.jpg
0.05MB
IE002216061_STD.jpg
0.15MB
IE002216070_STD.jpg
0.65MB

김근태가 의장을 수락하다



최민화의 삼고초려

1983년 6월 말경, 정문화의 제안을 받은 최민화는 부천 역곡에 사는 김근태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간 OB모임에서의 논의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새로 건설할 청년단체의 의장이 되어줄 것을 간청했다.

김근태는 최민화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더니 자신으로서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이고, 아직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최민화 당신이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역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최민화는 그냥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공개정치운동과 현장민중운동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은 형님밖에 없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최민화의 진정어린 뚝심에 결국 김근태가 졌다. 한 시간이 넘는 옥신각신 실갱이 끝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있고, 의논할 사람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지 말고 시간을 달라'고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만날 약속을 했다.

ad

최민화는 첫 만남에서 김근태가 딱 잘라 거절하지 않는 걸 보고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래서 2주 뒤 김근태를 다시 만나러 가면서는 김근태의 수락을 받아내기 위한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 예상대로 이번에도 역시 김근태는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최민화가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형님이 만일 의장을 맡아주신다면 내가 3가지 약속을 하겠습니다. 첫째, 새 단체의 재정문제는 전적으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집을 팔아서라도 운영비를 대겠습니다. 둘째, 감옥 갈 일이 있으면 제가 첫 번째로 가게 해주십시오. 몸으로 때우는 일은 자신 있습니다. 셋째, 형님이 의장을 맡아주신다면 앞으로 저는 형님을 저의 정치적 얼터너티브(Alternative)로 모시고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말하자면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3차원의 충성 맹세를 한 것이다. 최민화의 강력한 대시에 김근태의 마음이 움직인 듯 보였다.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김근태는 신중했다. 바로 수락 의사를 밝히지 않고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1984년 8월, 흥사단에서 열린 ‘전두환 방일 반대’를 겸한 민청련 8·15 집회에서 나란히 자리한 최민화와 김근태. 김근태 바로 뒷자리는 부인  인재근.
 1984년 8월, 흥사단에서 열린 ‘전두환 방일 반대’를 겸한 민청련 8·15 집회에서 나란히 자리한 최민화와 김근태. 김근태 바로 뒷자리는 부인 인재근.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7월 중순쯤 최민화가 근무하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으로 박우섭이 찾아왔다. 박우섭은 다짜고짜 따졌다.

"형이 우리 운동권을 말아먹을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우?"

최민화가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은 누군가를 새 청년단체 의장으로 추대하려는 모종의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다. 최민화는 적당히 달래서 보내려고 했다.

"잘하면 이상적인 모양새가 될 것 같으니, 조금만 참아라. 2주 후에 다시 와라."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는 김근태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냥 순순히 물러날 박우섭이 아니었다. 박우섭의 집요한 물음에 최민화는 지금 김근태와 교섭 중이라고 전말을 고백하고 말았다.

박우섭은 원래 구월동 시절부터 김근태와 자주 만났던 사이라서 김근태의 인품과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김근태가 민청련 의장으로 적임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다만, 잘못되면 1회용 소모품이 될지도 모르는 민청련 의장에, 김근태를 써먹는 것은 좀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김근태를 자주 만나면서도 그에게 그런 권유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장 문제가 잘 안 풀리고 있는 이때 최민화의 노력이 성사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7월 말, 최민화가 세 번째 김근태를 만나는 날, 김근태는 결국 새로운 청년단체의 의장을 맡을 것을 수락한다. 최민화의 삼고초려를 방불케 하는 눈물 어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김근태의 결단

김근태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장영달, 조성우, 이해찬, 박계동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청년운동을 새로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됐고, 지금 이 상황에서 이걸 만들어서 활동하는 게 맞는 거냐, 또 어떻게 만들 거냐, 누가 책임을 질 거냐, 이런 논의가 있었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복잡한 문제였죠. 탄압은 엄혹하고, 또 그걸 뚫고 만든다고 해도 역할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예측이 안 되고, 또 일부는 책임자를 누구로 할 거냐를 둘러싸고 좀 갈등도 있고, 다른 한편에 무섭기도 하고, 이런 게 다 겹쳐 있었습니다... (중략)... 최민화가 나한테 와서 설득을 하더군요.

그는 내가 선배 그룹이라는 것, 학생운동을 떠난 뒤 노동운동을 해왔는데 사람들이 그런 내가 대표가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일단 '지금은 공개 정치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인정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이란 게 대체로 '그게 옳다, 해야 된다'고 주장하면 그 주장한 사람보고 '당신이 해봐라'라고 하는 게 상례였습니다. 최민화가 와서 권유한 것도 있지만, 그런 상례에 따라서, 말하자면 뒤집어 쓴 거죠."

사실 김근태는 구월동 사람들과의 논의과정에서 이미 공개투쟁단체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중심에 서야 한다는 생각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최민화가 찾아와서 그를 의장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김근태는 같은 인터뷰에서 민청련 결성을 필요로 한 당시의 정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때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는, 공개적으로 국민에 다가가지 않고는 정권과 싸우는 깃발이 있다, 싸우는 리더십이 있다는 걸 국민에게 알릴 수 없다는 거였죠. 그런데 당시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잡은 지 한 3년 가까이 되고, 물가를 잡고 경제도 안정돼 있었어요.

전두환의 헤게모니가 확립됐다, 세상도 그렇게 느꼈고, 또 전두환 그룹도 그렇게 느껴서 자신감을 가지면서 좀 풀어주기 시작했어요. 학생시위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아주 혼내고 그랬는데 덜 혼내는 분위기였어요. 그 기회, 틈을 밀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 운동하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거죠.

그런데다가 학교에서 데모하다가 구속돼서 복역하고 나온 청년들이 많이 쌓였어요. 그들은 사회과학서적 출판사를 만들고 그랬는데 그런 거 가지고는 정권과 맞설 수 없는 거죠. 그렇게 사람들이 있고, 또 국민들 속에서 유화 국면이 되고, 분위기가 다시 솟는 시점에서 거기에 돌파구를 내는 거는 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책무다. 그래서 민청련이 결성된 거죠."

김근태가 술회한 대로 그는 최민화의 집요한 노력에 '엮인' 것이었다. 그러나 위 진술로 볼 때 어느 정도는 '자발적으로' 엮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근태는 7월 말 세 번째로 최민화가 찾아왔을 때 의장직을 수락했다. 그리고 8월 중순경부터는 OB, YB가 함께 모이는 민청련 결성 준비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김근태 의장이 준비론자?

 공개정치투쟁과 노동현장운동의 한 단면. 1984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정치투쟁을 벌이는 민청련(위 사진)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파업 현장 모습(아래 사진).
 공개정치투쟁과 노동현장운동의 한 단면. 1984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정치투쟁을 벌이는 민청련(위 사진)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파업 현장 모습(아래 사진).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김근태의 의장직 수락으로 공개청년단체의 건설 작업은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하고, 아연 활기를 띠게 됐다. 당시 OB, YB를 막론하고 김근태를 의장으로 하는 것은 극히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환영했다. 노동현장 쪽의 일부 사람만이 김근태의 공개운동으로의 진출을 소영웅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을 했다. 이들은 당면 정치투쟁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협소한 시각 즉, '준비론'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 출신자들 사이에는 공개정치투쟁과 노동현장운동에 대해서 많은 토론이 있었다. 그러나 논쟁의 결과 대체로 이것은 운동 영역의 문제일 뿐,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노동현장운동을 강조하는 것을, 장기적인 투쟁을 위해 현재는 투쟁을 자제하는 준비론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김근태가 '준비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김근태는 오랫동안 노동운동에 몸담고 있었고 현장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준비론은 철저히 배격하는 입장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김근태 의장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것은 오래전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부터 논쟁이 되어왔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전략이나 원칙에 있어서의 준비론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전술적으로 준비를 하고 잘 갖춰야 한다, 이런 얘기는 맞지만, 원칙이나 근본에 있어서 준비론, 이런 것은 인간의 약한 면을 반영한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개정치투쟁이냐 노동현장운동이냐 구분하는 것은 형태적인 것일 뿐, 그 근본적인 마음가짐과 태도와 원칙에서 보면 군사독재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는 것이다."

창립준비모임과 기반 조직 건설

 기별대표를 역임한 1. 박성규(72) 2. 이범영(73) 3. 이우재(75) 4. 연성만(75) 5. 진영효(78) 6. 김성환(78). 괄호 숫자는 학번. 작고한 이범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래 사진
 기별대표를 역임한 1. 박성규(72) 2. 이범영(73) 3. 이우재(75) 4. 연성만(75) 5. 진영효(78) 6. 김성환(78). 괄호 숫자는 학번. 작고한 이범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래 사진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김근태가 전면에 나서면서 8월 중순부터는 기존의 OB, YB 논의구조 대신 김근태를 중심으로 준비모임이 새로 꾸려졌다. 여기에는 실제로 향후 건설될 공개청년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할 사람들이 참여했다. 최민화, 박계동, 김도연, 이해찬, 박우섭, 이범영, 홍성엽, 연성수, 이을호, 연성만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각 학교별, 학번별 모임을 활성화하여 광범한 기반 조직을 건설하는 일에 착수했다. 준비모임에서는 무엇보다 이 기반조직 건설에 힘을 기울였는데, 새 단체가 일회성 조직이 아닌 지속 가능한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인적, 물적 재생산 기능을 할 수 있는 이런 기반조직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과거 민청협 조직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했다.

우선 서울대는 72학번 이상 선배그룹은 처음에는 박우섭이 조직을 담당했다. 그리고 박우섭이 집행부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김도연, 황선진, 박성규 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73학번은 이범영, 74학번은 권형택, 75학번은 이우재, 연성만, 77학번은 유기홍, 78학번은 김성환, 진영효 등이 모임을 이끌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범영이 이들 기별 대표를 만나 정보를 전달하고 조직 작업을 독려했다.

고려대는 처음에는 조성우와 박계동, 설훈(74학번)이 내부 조직 작업에 나섰고, 나중에는 한경남(68학번), 천영초(72학번), 서원기(75학번) 등이 합류했다. 연세대는 최민화(68학번)와 김학민(68학번), 홍성엽(73학번) 등 선배그룹 중심으로 참여했다. 74학번 이하 후배그룹은 노동현장 지향성이 강했고, 그래서 민청련 참여가 상대적으로 늦었다.

문화패는 나름의 독자적인 논의구조가 있었는데, 채광석(68학번), 채희완(68학번), 김도연(72학번), 연성수 등이 논의구조를 이끌었고, 이 논의 결과 연성수가 나중에 집행부에 참여하게 된다. 그밖에 이화여대는 최정순(75학번)이 대표로 참여하여 이대 출신들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다.

 민청련 창립 논의부터 참여한 각 대학 대표들. 1. 조성우(1990년) 2. 설훈(1987년) 3. 서원기(1991년) 4. 한경남(1988년) 5. 김학민(1987년) 6, 최정순(1981년). 괄호 숫자는 촬영 당시 연도
 민청련 창립 논의부터 참여한 각 대학 대표들. 1. 조성우(1990년) 2. 설훈(1987년) 3. 서원기(1991년) 4. 한경남(1988년) 5. 김학민(1987년) 6, 최정순(1981년). 괄호 숫자는 촬영 당시 연도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IE002212424_STD.jpg
0.55MB
IE002212423_STD.jpg
0.4MB
IE002212426_STD.jpg
0.35MB
IE002212427_STD.jpg
0.39MB



'영초 언니'의 아이디어, "김근태를 만나봐라"


김영삼의 단식

1983년 초부터 전두환 정권의 유화적 조치들이 발표되고, 수배자들이 수배에서 풀리는 등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먼저 1983년 2월 정치활동 피규제자 중 452명을 2차에 걸쳐 해금했다. 그러나 김대중, 김영삼 등 야당 핵심인사 99명은 여전히 정치활동 금지를 풀어주지 않았다.

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 광주항쟁 3주년을 맞이하여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1980년 5.17 쿠데타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서 전두환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최초의 행동이었다. 김영삼은 성명에서 구속인사 석방과 전면 해금, 해직교수와 근로자 및 제적학생의 복직∙복교∙복권, 언론의 자유, 개헌 및 국보위 제정법률의 개폐 등을 요구했다. 이 소식은 정권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으나 AP통신 등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고, 국내신문에서도 차츰 1단으로 '정치현안' 등의 표현을 쓰면서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3년 5월 24일 동아일보 1면. 김영삼의 단식을 애매모호한 '정치관심사'로 표현하고 있다.
 1983년 5월 24일 동아일보 1면. 김영삼의 단식을 애매모호한 '정치관심사'로 표현하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김영삼의 단식은 운동권 청년들에게도 즉시 알려졌고, 공개정치투쟁단체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에 활력소가 됐다. 1970년대에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거나 학교에서 제적된 청년들 사이에는 출신 대학교별로 모임이 있었다. 인원이 많았던 서울대는 학번별로 모였다. 이 모임들은 고난을 같이하는 동지애로 뭉쳐져 있었다. 느슨하지만 끈끈하고 응집력이 있었다.

이들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사회 속에 흩어져 자기 갈 길을 모색했지만 정기적으로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시국담을 나누었다. 여기에 김영삼의 목숨을 건 단식 소식은 청년들의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이제 우리도 모여서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청년들의 마음속에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었다. 누군가 이것을 조직할 사람이 필요했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이범영과 박우섭

 1976년 서울대 농법회 수련회에 참여한 회원들 모습. 맨 왼쪽이 이범영이다.
 1976년 서울대 농법회 수련회에 참여한 회원들 모습. 맨 왼쪽이 이범영이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이때 가장 먼저 발 빠르게 움직인 사람이 이범영과 박우섭이었다.

ad

이범영은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이념서클 농법회 회장을 지내 서울대 운동권 선후배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76년 12월 학내 시위로 2년여 징역을 살고 나와 1979년부터 학생운동으로 징역을 산 사람들의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병역대책위를 조직하여 투쟁하면서 지방대학 출신자들과도 폭넓게 유대관계들이 있었다. 이범영은 오랫동안 구월동 수배자들 모임에서 함께 지내면서 선도적 정치투쟁이 시급하고, 그를 위한 공개 청년운동단체 건설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박우섭은 대학 시절 연극반, 극단 연우무대 활동 등을 통해 문화패들과 광범하게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당모임'이라는 이해찬, 황선진, 김도연, 이석원, 박성규 등 서울대 72학번들 모임의 연락 담당 역할을 했었고, 문익환, 백기완 등 재야 원로들과 장기표, 이신범, 조영래 등 중견 재야인사들과도 광범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동수, 김근태 등을 통해 청계노조 등 현장 노동운동권과도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광범하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공개운동단체 설립에 관한 의견을 수렴했다.
OB그룹에서는 최민화와 이해찬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렇지만 최민화는 기사연 출판부장으로 직장에 다녔고, 이해찬도 당시 돌베개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어서 박우섭, 이범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이범영은 서울대 후배 권형택(74학번), 이우재(75학번), 연성만(75학번) 등과도 자주 만나 논의했다. 또 고려대 출신 조성우, 설훈, 연대 출신 홍성엽도 열심히 움직였다.

 1979년 창립한 돌베개 출판사는 장준하 선생의 항일 수기집에서 따온 이름이다. 파주 출판단지에 위치한 현재 전경.
 1979년 창립한 돌베개 출판사는 장준하 선생의 항일 수기집에서 따온 이름이다. 파주 출판단지에 위치한 현재 전경.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양수리 모임

6월 말 경, 양수리 북한강가 한 민박집에 30-40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수사기관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민주동지들이 오랜만에 서로 얼굴들이나 보자는 취지로 각 학교별, 학번별로 몇 사람씩 연락했다. 아직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인지라 은밀히 조심스럽게 연락을 취했다.

신동수, 안양로(서울대 68학번), 조성우, 최민화 등 OB그룹들과 이해찬, 김도연, 박성규, 이범영, 설훈, 권형택, 이우재, 최정순(이대 75학번) 등 YB그룹으로 논의를 진행하던 사람들이 거의 모두 모였다. 박우섭은 참석하지 못했다. 박우섭은 4월에 수배가 풀려 5월 22일에 뒤늦게 결혼식을 올리고 당진 고향집에 갓난아이와 새댁을 데리고 들어가 있었다.

이 양수리 모임이 그동안 진행해온 공개단체 논의에 대해 한 매듭을 짓는 자리가 되었다. 사실상 이 자리에서 공개 청년단체가 필요하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안양로가 이날 논의를 끌어가는 데 상당히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공개 청년단체를 띄우자는 데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구체적인 조직 결성작업은 쉽지 않았다. 전두환 정부가 일련의 유화 제스처를 보이긴 했지만 사실 공개적인 반정부단체의 활동을 용인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사실 전두환 정권은 1983년 초까지도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탄압 기조를 유지했고, 학생운동 출신 군복무사병에 대한 학원프락치사업, 이른바 녹화사업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희생이 따르더라도 공개정치투쟁 단체는 필요하다는 것이 당시 양수리에 모인 청년운동가들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결국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가 문제였다.

 왼쪽부터 안양로, 장영달, 조성우. 1990년대에 활동하던 모습들이다.
 왼쪽부터 안양로, 장영달, 조성우. 1990년대에 활동하던 모습들이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동막 한 과수원에서 다시 모인 20명의 청년들

7월 중순, 포도철에 인천 동막에 있는 한 과수원에서 이해찬, 박우섭, 이범영, 연성수, 연성만, 최정순 등 20명쯤 되는 청년들이 다시 모였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공개단체가 출범하면 구속을 각오하고 참여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직을 앞장서서 이끌 지도자를 누구로 세울 것인가였다. 손학규(서울대 65학번), 장명국(서울대 66학번), 안양로, 조성우 등 1960년대 학번 중에서 대표급 인물들이 모두 거론되었다. 이때만 해도 김근태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아마도 김근태는 노동현장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을 일부러 끌어내 세우는 것은 쉽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헤어졌다.

5월 말부터 OB모임 물주 역할을 하던 최민화 역시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다. OB모임에서도 의장 후보를 놓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OB멤버 중에는 안양로, 조성우, 장영달 등이 추천되었다. 안양로는 성격이 두루 원만하고, 선도투쟁파나 현장파에게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는 장점이 있었으나 본인이 고사를 했다. 일선에서 투쟁한 경험이 적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본인이 내세운 이유였다. 조성우는 본인이 의지는 있는 듯 보였으나(사실 본인은 일본 유학 계획 때문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이 반대했다.

조성우의 경력으로 볼 때 지나치게 선도정치투쟁으로 기울 우려가 있고, 그래서 현장파의 참여를 끌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장영달은 오랜 투옥생활로 운동권 청년들과의 인간관계가 넓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당시 장영달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7년간이나 징역을 살고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다시 구속 1순위 자리에 세운다는 것도 동료들의 마음에 흔쾌하지 않았다.

의장 세우기

6월 말쯤 최민화에게 정문화가 중요한 제안을 했다.

"형님이 김근태 선배를 한번 만나 보쇼."

김근태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최민화는 이것이 아마도 정문화 부인 천영초(고대 72학번)의 아이디어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당시 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 실무간사를 했던 천영초가 당시 인천산업선교회 실무간사를 하던 김근태의 근황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천산선의 내부사정이 김근태가 조만간 실무간사 일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는 것이다. 최민화는 무릎을 쳤다.

'그래, 그거야!'

김근태는 서울상대 65학번으로 손학규, 조영래, 신동수와 경기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 데모하러 나갈 때 교실을 지킨 모범생이었던 그가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대학 1학년 때 한일회담반대 데모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1967년 6∙8부정선거반대투쟁 때 서울상대 대의원 의장으로 데모를 주도하다 제적되면서 학생운동의 중심인물로 부각된다.

군대를 갔다 와서 1970년 복학을 하는데 이후 1971년 위수령, 1972년 유신쿠테타 등 박정희 군사정권이 장기집권체제를 굳혀가는 과정에서 그는 항상 배후에서 학내시위를 지도했다. 그러나 심재권, 장기표, 조영래, 이신범 등이 체포되어 언론에 오르내릴 때 그만은 늘 잡히지 않고 지명수배된 상태로 남았다. 체포된 동료들의 법정에서는 항상 '공소외 김근태'로 불렸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공소외'였다.

그는 유신쿠테타가 있은 1972년부터는 학생운동만으로 독재정권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중앙정보부의 추적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냉동학원 강사, 보일러 기사 등으로 노동현장에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부인 인재근을 만나 동거하다가 애기도 낳고 살았다. 그러다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수배가 풀려 1980년 4월 26일 뒤늦은 결혼식을 올린다. 1980년 5.17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실무간사로 노동조합 교육과 노동자 의식화 사업에 주력했다. 그리고 공개청년운동이 한참 논의되던 1983년 초에는 구월동에서 역곡으로 이사해서 살고 있었다.

 오른쪽이 인재근. 이화여대 재학 시절의 모습이다. 인재근은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던 중 수배자 김근태와 만나 결혼했다.
 오른쪽이 인재근. 이화여대 재학 시절의 모습이다. 인재근은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던 중 수배자 김근태와 만나 결혼했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최민화는 정문화의 제안을 듣는 순간 김근태가 이 문제를 풀 열쇠라는 걸 직감했다. 김근태야말로 공개청년단체를 이끌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최민화는 학생운동 선배로서 김근태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김근태를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잘 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운동의 뿌리가 기독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근태를 처음 만난 것도 1971년 강원룡 목사가 시작한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에서였다.

최민화는 집안이 원래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데다 기독교 학교인 연세대학에 다녔기 때문에 학생 때부터 함석헌, 박형규, 김찬국 등 기독교계 민주 인사들과 가까웠다. 산선 설립자 조승혁 목사와는 일찍부터 한 교회를 다녀 친했고, 나중에는 조 목사가 시무하는 회현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그래서 인천산선 실무자로 일하는 김근태의 근황을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최민화가 생각할 때 김근태는 학생운동 출신 청년들의 선배로서 1960~1970년대 학생운동 출신들을 두루 아우를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장지향적인 성향이 강한 1970년대 중후반 학번 후배들 세대에도 어필할 수 있는 강점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민주화운동권의 가장 영향력 있는 거점인 '종로5가'(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 기독교 운동단체가 모여 있어 기독교 민주화운동권을 이렇게 불렀다)와 연결하고, 그 도움을 받는 데도 적임으로 보였다. 문제는 대표적인 현장파로 알려진 김근태가 과연 그 제안을 수락할 것인가였다.


IE002209318_STD.jpg
0.16MB
IE002209315_STD.jpg
0.05MB
IE002209317_STD.jpg
0.32MB
IE002209329_STD.jpg
0.15MB
IE002209313_STD.jpg
0.19MB


'감히' 전두환 정권에서 '공개 투쟁'을 꿈꾸던 사람들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 기자 말

구월동 사람들과 공개청년운동

ad

민청련의 창립은 구월동에 은거하던 수배자들이 공개청년운동단체의 필요성을 논의하면서 촉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팸플릿 [전망] 작성에 참여했던 소준섭은 그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전망]의 논리가 운동권 전반에서 확실하게 득세하면서 구월동의 '논의 구조'에서는 자연스럽게 공개적 청년운동 건설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범영 선배가 벽에 기댄 채 큰 눈을 굴리며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라고 공개 청년조직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대화와 논의에 있어 김근태 선배를 좌장으로 모신 것은 물론이다. 특히 70년대에 있었던 민청협 활동을 평가하면서 그 단점을 극복하는 새로운 청년 운동을 어떻게 건설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가 많았다."

이 구월동에서의 논의가 팸플릿 [전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면 70년대 말 정문화(서울대 70학번. 1998년 작고), 조성우 등을 중심으로 재야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민주청년협의회(약칭 민청협)에 대해서 "70년대 청년 재야운동이 커다란 '상징성'을 가졌으며 대중에 대한 공개적 '스피커'의 역할을 담당하고 정권에 대하여 대외적 압력을 행사하는" 긍정적 역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불분명한 민중지향적 성격과 잡다한 구성층으로 인한 결속력의 약화, 진정한 대중적 기반이 없는 입만의 운동"이라고 매서운 비판을 가한다. 그래서 새로이 건설되는 청년운동은 진정한 대중적 기반을 갖는 조직운동이 되어야한다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민청협에서 발행한 회보 표지들. 창간호는 표지 없이 6페이지로 단출하게 발행했으나, 2,3,4호는 각각 16, 26, 28페이지로 늘어나면서 점차 내용이 다채로워졌다.
 민청협에서 발행한 회보 표지들. 창간호는 표지 없이 6페이지로 단출하게 발행했으나, 2,3,4호는 각각 16, 26, 28페이지로 늘어나면서 점차 내용이 다채로워졌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전망]에서 주장하는 학생운동의 선도적 정치투쟁은 사회운동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었다. 82년 말부터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던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는 정부당국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신문과 방송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광주학살의 실상도 국민들에게는 철저히 은폐되었고, 그에 대한 정보와 자료들은 일부 운동권 사람들 사이에서만 은밀히 유통될 뿐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빈민 등 민중운동도 그 생존권 주장을 대변하고 엄호할 세력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사회에서 이러한 공개정치투쟁을 담당할 세력은 역시 학생운동에서 단련된 청년들일 수밖에 없었다. 80년 5.17 쿠데타로 다시 제적되어 사회에 나온 복학생 청년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인적 자원은 충분했다. 문제는 유신체제에 버금가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 아래에서 과연 공개정치투쟁단체가 생존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누가 그 일을 맡을 것인가에 있었다.

구월동 사람들은 1983년 초부터는 공개투쟁의 가능성에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모두가 수배상태였기 때문에 수사기관의 동태에 특히 민감했다. 그런데 1983년 들어서면서 변화가 감지됐다. 많은 수배자들의 수배가 해제되었고, 수배자들에 대한 수사기관의 추적도 완화된 듯 보였다. 이러한 변화가 이들로 하여금 공개투쟁단체의 활동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던 것이다.

이때 박우섭이 자신에 대한 수배가 해제된 것으로 판단하고, 4월에 경찰에 자수한다. 박우섭은 예상대로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났다. 대신 구월동 수배자 방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고, 나머지 사람들은 연고를 찾아 떠났다. 그러나 구월동 그룹 사람들은 공개투쟁단체가 필요하다는 강한 확신과 의지를 품고 있었고, 언젠가 그 단체가 출범하면 그 단체에서 자기도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박우섭이 자수하여 수배를 푼 것도 그것이 앞으로의 공개단체 활동을 위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민청협 그룹

또 한 갈래 공개적 청년운동 건설 논의가 태동한 곳은 민청협 그룹이었다. 나중에 이들을 OB그룹이라고 불렀다.

민청협은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이 중심이 되어 1978년 5월에 출범한 단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청년들 67명이 그해 1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아직 풀려나지 못한 이강철, 유인태 등 6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그중 일부의 사람들이 유신체제 아래에서의 이른바 요시찰 인물들에 대한 탄압에 대해 공동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민청협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회장은 정문화가 맡았다. 이후 2대 회장은 조성우(고려대 68학번)가 이어받았는데, 1979년 명칭을 '민주청년협의회'로 바꾸고, 상설적인 민주화투쟁 단체를 표방했다.

 1978년 1월 발표한 이현배·유인태·김효순·이강철·김지하·장영달 등 6인에 대한 석방 요구 성명서. 뒷면은 성명 주최자 67명의 명단이다.
 1978년 1월 발표한 이현배·유인태·김효순·이강철·김지하·장영달 등 6인에 대한 석방 요구 성명서. 뒷면은 성명 주최자 67명의 명단이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민청협은 1979년 3월 1일 출범한 재야단체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약칭 민주통일국민연합, 의장: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과 더불어 유신 말기 재야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명맥을 이어나갔고, '동일방직사건', 'YH사건' 등의 노동운동에 깊숙이 개입하며 유신정권에 대항했다.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난 직후에는 유신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한 '통대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기획하는 데 주도적으로 나섰다. 이들이 기획한 YWCA에서의 국민대회는 계엄군의 진압으로 쑥대밭이 되고, 민청협 간부 이우회, 최열, 최민화, 강구철, 홍성엽 등이 구속되었다. 이 사건 이후 민청협은 사실상 해체되고, 구속을 면한 회원들은 1980년 3월 '서울의 봄' 시기에 복학하여 학생운동에 복귀했다.

그러다 5.17쿠테타로 전두환정권에 또 한 번 철퇴를 맞아 조성우, 이해찬, 홍성엽 등 상당수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 구속되지 않은 회원들은 사회 각 곳에 흩어져 재기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 역시 1980년 이후에 과거 70년대 민청협 같은 공개청년운동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른바 ‘YWCA 위장결혼사건’으로 알려진 ‘통대선출 저지 국민대회’ 사건으로 구속된 주요 인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직책은 당시 기준)으로 함석헌 씨알의 소리 대표, 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 소장, 이우회 민청협 회장, 당시 결혼식 신랑 역을 한 홍성엽 민청협 운영위 부위원장, 최열 민청협 부회장, 최민화 밀물출판사 대표
 이른바 ‘YWCA 위장결혼사건’으로 알려진 ‘통대선출 저지 국민대회’ 사건으로 구속된 주요 인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직책은 당시 기준)으로 함석헌 씨알의 소리 대표, 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 소장, 이우회 민청협 회장, 당시 결혼식 신랑 역을 한 홍성엽 민청협 운영위 부위원장, 최열 민청협 부회장, 최민화 밀물출판사 대표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2대 민청협 회장으로 YWCA 국민대회를 주도했던 조성우는 대회 당일 날 요행으로 현장에서 체포되는 것을 면했다. 그러나 계엄사에 수배되어 공개활동을 할 수는 없었다. 조성우는 수배상태로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고려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리고 5.17 이후 다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중심인물로 계엄사의 집중 추적을 받고 결국 6월에 체포됐다. 조성우는 계엄사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군법회의 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2년여 수형생활을 하다가 1982년 12월에 형집행정지로 문익환 목사, 이해찬 등과 함께 석방된다. 

계엄사에서 워낙 혹독한 고문을 받았던 조성우는 감옥 생활 내내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석방되자마자 민청협을 재건하여 군사정권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래서 조성우는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83년 1월 김근태를 찾아가 민청협을 재건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이 재건작업에 김근태가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한다.

민청협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당시 양대 세력인 정치투쟁파와 현장파가 모두 함께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양파에서 모두 수긍할 수 있는 김근태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당시 김근태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성우는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편으로 조성우는 민청협 재건을 공론화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일본에 유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전면에 나설 처지는 아니었다.

조성우의 석방으로 구 민청협 멤버들의 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이 모임을 만드는 데에는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하면서 재야 선후배 사이에 두루 관계가 원만했던 최민화가 중심 역할을 했다. 최민화는 통대선출저지국민대회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구속되었다가 징역 10월의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고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그리고 1년 만에 1980년 11월 30일 석방되었다. 1981년 4월부터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취직하여 출판부장으로 근무했다.

최민화는 1982년 12월, 조성우가 석방되자 1983년 새해 벽두부터 조성우, 문국주, 이우회 등과 함께 원로들에게 세배를 다니면서 공개 청년단체를 다시 꾸리는 논의에 바람을 잡았다. 처음에는 조성우가 주선한 장소에서 부정기적으로 몇 번 모이다가 점차 신촌 부근 대흥동에 있던 최민화 집을 자주 모임 장소로 이용했다. 다들 실업자 신세인데 최민화는 부인 박혜숙이 약국을 운영하는 데다 최민화 본인도 기사연에서 괜찮은 월급을 받는 처지였기 때문에 자연히 물주가 되었다.

 최민화의 부인 박혜숙이 대흥동에서 운영하던 세민약국. 이 약국은 훗날 민청련 시절에도 비밀아지트로 자주 애용됐다. 박혜숙 씨는 암투병 끝에 2004년 작고했다.
 최민화의 부인 박혜숙이 대흥동에서 운영하던 세민약국. 이 약국은 훗날 민청련 시절에도 비밀아지트로 자주 애용됐다. 박혜숙 씨는 암투병 끝에 2004년 작고했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혜화동 공해문제연구소 사무실

1982년 5월 최열과 정문화가 중심이 되어 공해문제연구소를 창립하고 혜화동에 조그만 사무소를 열었다. 이곳이 또 운동권 청년들의 모임장소가 되었다. 당시 모임 장소가 마땅치 않았던 청년들로서는 이곳에 자주 들러 모임도 하고 시국담도 나누었다. 정문화, 최열이 민청협 간부였기 때문에 자연히 민청협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이범영이 소개한 서울법대 출신 김태현(서울대 75학번)이 실무간사로 근무하고 있어서 박우섭, 이범영 등 YB그룹에서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래서 혹자는 이 공문연 사무실에서 민청련 조직이 싹텄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최열과 더불어 공문연의 주도 멤버였던 정문화와 김태현.
 최열과 더불어 공문연의 주도 멤버였던 정문화와 김태현.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민청협 그룹과 공해문제연구소 사람이 주축이 된 OB모임이 1983년 5월부터는 정례화되어 매주 한 번씩 최민화 집에서 모였다. 이때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기독교 쪽으로 김경남, 황인성, 송진섭. 가톨릭의 이명준, 문국주, 민청협의 조성우, 장영달, 정문화, 이해찬 등이 참여했고, 그 밖에 경북의 정화영(경북대 68학번), 광주의 이강(전남대 68학번), 부산의 김재규(부산대 68학번)등과도 연락을 취했다. 이 모임 사람들은 대체로 공개정치투쟁단체의 필요성에 공감했고,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놓고 설왕설래했다. 그러나 누가 구심이 되어 이 조직을 이끌 것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IE002205956_STD.jpg
0.07MB
IE002205957_STD.jpg
0.04MB
IE002205953_STD.jpg
0.31MB
IE002205954_STD.jpg
0.58MB
IE002205955_STD.jpg
0.42MB



'위대한 도망자'들은 왜 인천 구월동에서 모여 살았을까?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 기자 말

[야비]와 [전망]

ad

1980년에서 1983년 사이 학생운동이 전두환 정권의 살벌한 탄압 속에서도 조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70년대 유신독재 하에서 헌신적으로 투쟁했던 이른바 '빵잽이'(감옥살이 한 사람) 선배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들 선배그룹은 1980년 5월 '서울의 봄' 당시에 복학생으로서 민주화투쟁의 한 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5.17 쿠데타 이후 이들은 안기부 등 정보기관의 24시간 감시대상이 되어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그중 상당수는 구속, 강제징집, 취직 등으로 운동 일선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부 활동가들은 대학 서클 후배들과 연결해 학생운동의 흐름을 관찰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학생운동을 지원했다. 그중 하나가 당시 대학가에 은밀히 회람되었던 지하 팸플릿이었다.

 1980년대 전반기 학생운동가들 사이에 떠돌던 지하 '팜', [전망]과 [야비]. 모두 타자자기로 친 뒤 등사기로 인쇄했다.
 1980년대 전반기 학생운동가들 사이에 떠돌던 지하 '팜', [전망]과 [야비]. 모두 타자자기로 친 뒤 등사기로 인쇄했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1982년 맨 처음 학생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며 영향을 주었던 팸플릿이 [야학비판(약칭 야비)]이었다. 당시 운동권에 널리 퍼져 있던 노동현장론에 근거해서 쓴 [야비]는 학생운동의 한계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학생운동이 무모하게 시위만을 강조하면서 학생대중으로부터 고립되고, 연이은 구속으로 운동역량의 손실을 초래했으며, 그러면서도 독재정권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학생운동만으로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으므로 노동현장에서 노동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는 작업을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이 주장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을 강조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학생시위를 자제하고 노동현장에 투신하여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준비론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었다.

이 팸플릿에 이어 [학생운동의 전망(약칭 전망)]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이 대학가에 돌아 의식있는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전망]은 [야비]에 대한 비판의 성격이 강했다. [전망]에서 필자는 학생운동의 가장 큰 임무는 선도적 정치투쟁을 통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당시 학생운동의 반독재 시위투쟁을 적극적으로 엄호했다. 이것은 당시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 사이에서 퍼져 있던 이른바 '준비론'을 경계하고, 학생운동의 전투적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이 당시에는 [전망]의 집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중에 유기홍(서울대 77학번), 오세중(서울대 77학번), 소준섭(외대 78학번) 등이 쓴 것으로 밝혀진다. 이들은 이후에 모두 민청련 창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 팸플릿도 민청련 창립을 준비하는 이범영(서울대 73학번, 1994년 작고) 등과 일정한 교감 하에서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망] 필자들의 최근 모습. 왼쪽부터 오세중, 유기홍, 소준섭.
 [전망] 필자들의 최근 모습. 왼쪽부터 오세중, 유기홍, 소준섭.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새로운 운동의 싹

1970년대에 학생운동으로 학교에서 제적되거나 옥고를 치른 학생이 1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 대다수가 '민중지향적' 사회변혁을 꿈꾸는 지식청년들이었다. 이들은 민중들, 즉 억압받는 가난한 노동 대중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고, 언젠가 '각성된' 민중들과 함께 불의한 권력을 타파하여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 변혁을 이루어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대개 중산층 출신이었던 지식 청년들이 노동 대중들 속에 들어가 일생을 함께하는 결단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이들 중 일부만이 노동자, 농민의 생활 현장에 투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청년들이 생계를 위해 직장을 구했는데, 감옥에 갔다 온 전력 때문에 공직이나 대기업 취직은 어려웠다.

그들은 대부분 일반 중소기업에 취직하거나 영세한 출판사에 다녔고, 아니면 번역 같은 자유업에 종사했다. 소규모 사회과학 출판사를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이들은 박정희가 죽고 나서 1980년 3월에 대부분 복학하였고, 5월에 '서울의 봄'을 겪었고, 5.17 이후 다시 제적되어 학교에서 쫓겨났다. 1980년대 초 이들 중 일부는 노동 현장으로 들어갔고, 많은 사람들은 다시 직장을 구했고, 일부는 거리에 실업자로 남았다.

그들 중에는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에 대한 투쟁과정에서 독재정권의 수배령이 떨어져 도피생활을 해야 하는 도망자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해 신분을 숨기고 사는 긴장된 생활 속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신념을 잃지 않고 군사정권의 타도를 위한 모색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이야말로 어쩌면 직업적 운동가에 가장 근접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속에서 새로운 청년운동의 싹이 텄다.

 민청련 창립을 논의한 주요 인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문국주, 심재권, 이명준, 박우섭, 박계동.
 민청련 창립을 논의한 주요 인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문국주, 심재권, 이명준, 박우섭, 박계동.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민청련 건설 논의의 진원지 - YB그룹과 OB그룹

민청련 같은 공개정치투쟁 단체의 필요성은 학생운동 출신자들 속에 상당히 광범하게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구체적인 조직 건설 논의에는 대략 두 갈래가 있었다.

하나는 이범영, 박우섭(서울대 73학번, 현 인천 남구청장)을 중심으로 한 70년대 초중반 학번, 상대적으로 젊은 그룹이고, 또 하나는 조성우(고려대 68학번, 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최민화(연세대 69학번) 등 60년대 후반 학번들로 상대적으로 나이가 든 그룹이었는데, 당시 전자를 YB그룹, 후자를 OB그룹이라 불렀다.

YB쪽 논의의 시발은 광주항쟁 이후 수배 상태에 있던 도망자 그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1년 가을부터 인천 구월동 한 주공아파트에 일군의 도망자들이 모여 살았다. 여기에는 1980년 5.17 계엄확대조치 때부터 전두환 정권에 의해 내려진 포고령으로 수배 중이던 박우섭, 문국주(서울대 73학번), 소준섭과 청계노조 위원장으로 노동운동 관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민종덕이 있었고, 여기에 공식수배는 아니었지만 정보기관의 요시찰 대상이었던 이범영, 박승옥(서울대 73학번) 등이 합류하여 함께 모여 살았다.

구월동 아파트 단지는 연탄을 때는 5층짜리 서민아파트였다. 그들이 살던 집은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5만 원을 내는 방 2개짜리 아파트였다. 이 작은 아파트는 이집 저집 동가숙서가식하며 불안한 도피생활을 하던 도망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보금자리였다. 이들이 이렇게 모여 살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민주화운동의 전설적 인물 신동수였다. 신동수는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있던 이들 수배자들을 한 명씩 이 아파트로 데려왔다. 신동수는 구월동 아파트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생활비 조달까지 세심하게 돌봐주었다.

 광주항쟁 이후 전국에 배포된 수배자 벽보 중 민청련 관련자들. 왼쪽부터 문국주, 심재권, 이명준, 박우섭, 소준섭, 박계동.
 광주항쟁 이후 전국에 배포된 수배자 벽보 중 민청련 관련자들. 왼쪽부터 문국주, 심재권, 이명준, 박우섭, 소준섭, 박계동.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같은 구월동 주공아파트 단지 안에 김근태가 살고 있었다. 당시 김근태는 수배상태에서 부인 인재근과 혼례를 올리지 않은 상태로 동거하면서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비공식 실무자로 일할 때였다. 수배자 중 제일 나이가 어렸던 소준섭은 신동수의 소개로 김근태의 집에서 살다가 구월동 아파트 수배자들과 합류하였다. 신동수는 김근태의 경기고 동기동창이면서 오랜 민주화운동 동지였다. 그리고 주공아파트 단지 옆 한신아파트 단지에는 이명준(중앙대 68학번)이 살았고, 여기에는 또 수배상태의 심재권(서울대 66학번, 현 국회의원), 박계동(고려대 71학번)이 드나들었다.

김근태를 포함한 구월동 일곱 사람은 자주 만나 어울려 놀았고, 밤새 열띤 토론도 벌였다. 때로는 옆 단지의 이명준과 박계동이 함께 어울렸다. 이들은 틈나는 대로 정세를 논하고 군부독재에 맞서 저항운동을 조직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논의했다. 생활비는 각자 아르바이트 등을 해서 조금씩 보탰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선배로부터 번역 일거리를 맡아서 하기도 하고, 풀무원의 무공해 두부와 콩나물 배달 일도 했다.

당시 원혜영(서울대 71학번, 현 국회의원)이 무공해 식품을 공급하는 풀무원이라는 회사를 막 창립하였는데 신동수가 이 회사에 관여하면서 도망자들의 일거리를 물어왔다. 수배자들은 모두 가난했지만 내 것 네 것 없이 공동체 생활을 했다.

1981년 말에 이곳에 드나들던 박계동이 마산에서 밀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그 여파로 구월동 수배자들도 몇 주간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해프닝이 있었다.

1982년 3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을 추적하던 경찰이 수배자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수배자 9명을 공개 수배했다. 이때 박계동, 박우섭, 문국주, 소준섭의 얼굴이 한동안 TV 화면에 대문짝만하게 공개됐다. 결국 이때 강화된 경찰의 추적으로 박계동, 문국주는 체포되었다. 박계동은 마을 반상회에서 수배자의 얼굴을 확인한 집주인의 신고로 검거됐다. 그리고 비슷한 때 문국주도 신호등을 보지 않고 무심코 길을 건너다 어이없게도 교통경찰의 단속에 걸려 체포됐다.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구월동 아파트 합숙생활은 1983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비록 불안정하고 어둡던 시절이었지만, 모두들 미래를 낙관하였고 뜨거운 투지와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 휴일에는 근처 공원에서 농구도 했다. 나중에 김근태는 이 농구가 김근태와 구월동 식구들의 연대감을 높여주었고 이런 유대감이 나중에 민청련 창립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농구는 날렵한 김근태와 키가 큰 이범영이 잘했고, 박우섭은 몸은 날쌨지만 골 넣는 실력은 젬병이었다.

박우섭은 골은 잘 못 넣었지만 연애는 잘했다. 수배생활 중에도 대학 연극반 때부터 닦은 탈춤을 반도상사 노동조합 노동자들에게 가르쳤는데, 제자 중에서 눈망울이 초롱하고 수더분한 여성조합원 이미영이 마음에 들었다. 둘은 몰래 사귀기 시작했고, 급속히 가까워졌다. 박우섭은 1982년 어느 날 이미영을 구월동으로 데려와 방 두 개 중 한 개를 차지하고 동거를 시작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나머지 방 한 개로 밀려났다. 이 수배자들과 생활하는 속에서 부인 이미영은 1983년 1월에 첫 아이 기모를 출산한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50842



IE002202889_STD.jpg
0.1MB
IE002202861_STD.jpg
0.78MB
IE002202881_STD.jpg
0.37MB
IE002202868_STD.jpg
0.38MB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민청련을 탄생시켰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 기자 말

1983년 9월 30일에 민청련이 창립된 단초는 사실상 1980년 광주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가 살해된 1979년 10.26정변 이후 12.12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으로써 불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하였다. 5.17쿠데타였다.

이런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찬탈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에 대해 이들은 공수부대와 탱크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대응했고,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5.18 광주민중항쟁이었다. 광주항쟁은 이후 80년대 민주화운동의 마르지 않는 진원지가 되었고, 민청련 운동 역시 그 속에서 나왔다.

전두환 정권의 철권 통치

전두환은 5.17쿠데타와 5.18 광주항쟁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를 설치하고 유신체제에 버금가는 강력한 공포정치를 시행하였다. 이들은 김대중을 체포하고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여 김대중, 문익환 등 수많은 민주인사를 체포, 고문, 투옥하였다.

 군사법정에서 진행된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에 피고로 참석한 문익환 목사, 김대중 씨 모습.
 군사법정에서 진행된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에 피고로 참석한 문익환 목사, 김대중 씨 모습.
ⓒ 오마이뉴스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구미에 맞게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기 위해 민주 성향의 언론인들을 언론사에서 완전히 제거하려 하였다. '언론정화'라는 명목으로 933명의 언론인을 직장에서 해직시켰다. '언론대학살'이라 불리는 대참사였다.

또한 신군부는 사회정화라는 미명하에 야만적인 인권유린을 자행했는데, 삼청교육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각종 범죄 전과자 등 불만세력이라 판단되는 6만여 명을 검거해 그 중 4만여 명을 군부대에 수용해 순화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구금, 강제노역, 구타, 기합 등 가혹행위를 가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때 범죄 전과자 이외에 상당수의 민주노조 간부들까지도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군, 검, 경을 동원한 무단통치로 권력기반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전두환은 허수아비나 다름없던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형식적인 간접선거를 거쳐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 자리에 앉은 전두환은 박정희 유신헌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5공화국 헌법을 국민투표를 거쳐 제정하였다. 이 개정헌법에 따라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것을 설치하여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거수기나 다름없는 국가보위입법회의를 통해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안'을 가결하여 835명의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고, 개악된 언론기본법, 노동관계법 및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반공법을 폐지하고 더욱 강화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이나 저항세력을 철저히 탄압하면서 장기집권의 토대를 굳혀갔다.

전두환 정권의 공작정치와 3S정책

전두환 정권의 철권통치는 1983년까지는 큰 도전을 받지 않았다.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의 거의 모든 세력들이 군부독재에 협력하거나 침묵했다. 야당의 창당에도 정권이 직접 개입했다. 즉 중앙정보부가 민한당과 국민당 두 야당의 창당을 배후에서 주도함으로써 그들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는 전두환 정권을 미화하고 추종하는 어용 신문으로 전락했다.

중앙정보부에서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만 바꾼 정보기관은 대법원을 통해 관할 법원에 시국사건에 대한 안기부의 방침을 시달했다. 학내시위주동자에 대해서는 형량까지 지침을 내려 '직접 조정'을 시도하기도 했다. 노동 통제도 유신체제 때보다 더욱 강화했다. 그들은 노동관계법을 개정하여 산별노조를 폐지하고 기업별 노조체제를 강요하여 국가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한편 전두환 정권은 강압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회문화정책을 진행했다. 일명 '3S정책'(스포츠, 스크린, 섹스)이었다. 광주학살의 만행 위에 집권한 정권의 이미지에 부드러운 가면을 씌우고 국민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개최된 것이 1981년 5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국풍81'이라는 대규모 관제 놀이행사였다.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여의도에서 열린 '국풍81' 행사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여의도에서 열린 '국풍81' 행사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전두환 정권은 1981년 9월,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성사시키고, 이어 11월에는 1986년 아시안게임 유치까지 성사시켜 전국적으로 스포츠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1982년 3월에는 전두환의 강력한 지원 속에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프로야구 출범은 국민적 프로야구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또 이 당시 학생 교복 폐지, 두발 자유화, 야간통행금지 해제, 영화검열 완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물질주의적이고 향락적인 오락문화 확산을 통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비판의식을 마비시키려 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혹독한 탄압 – 녹화사업과 조작간첩사건

전두환 정권은 한편으로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더욱 치밀하고 혹독한 탄압을 자행했다. 녹화사업이 그 대표적 사례다. 녹화사업은 1981년부터 1983년 사이에 진행됐는데, 군대에 강제 입영시킨 학생운동가들을 보안사로 불러 감금하고, 고문과 위협으로 학생운동 경력을 자백하게 한 다음 학원프락치로 활용하는 사업이었다.

녹화사업은 처음에는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학내시위를 이끌었던 운동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점차 대상을 넓혀 나가 재학생 중에서 시위를 주도할 문제 학생으로 지목되거나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학생들을 강제 입영시켜 녹화사업의 대상으로 삼았다.

녹화사업의 대상이 된 학생들은 갖은 고문과 협박 등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동료를 배신하도록 강요받는 엄청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래서 강제 징집된 병사들 중에서 정성희(연대 81학번), 이윤성(성대 81학번), 김두황(고대 80학번), 한영현(한양대 81학번), 최온순(동국대 81학번), 한희철(서울대 79학번) 등 6명이 녹화사업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녹화사업' 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6명에 대해 진상규명을 요구한 민청련이 만든 전단지와 성명서.
 '녹화사업' 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6명에 대해 진상규명을 요구한 민청련이 만든 전단지와 성명서.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그 밖에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가들을 대거 검거 구속한 무림·학림사건이라든지, 부산지역 민주인사들의 학습모임을 정부전복집단으로 용공조작한 '부림사건', 아람이라는 아이의 돌잔치에 모인 사람들에게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를 씌운 '아람회 사건' 등도 공작에 의한 민주화운동 탄압의 예이다. 이 사건들은 2000년대 들어 재심을 통해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1980년대 초 발표한 수십 건의 간첩단 사건 중에도 상당수가 이런 탄압의 일환으로 조작된 사건임이 나중에 밝혀졌다.

대학생들의 저항

전두환 집권 3년 동안 정권에 대한 거의 유일한 저항세력은 대학생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5.17쿠데타로 문을 닫은 전국의 대학들은 1980년 9월 3일부터 오랜 휴교를 끝내고 2학기를 시작했지만 대학가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70년대 긴급조치 9호 시절의 감시체제가 다시 되살아났고, 사복경찰이 대학 안에 상주했다. 유신 시대 말기에 시행되었던 문제 학생에 대한 교수책임제도 부활했다.

 당시 서울대학교에서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내려다보는 도서관 난관에서 기습적으로 시위를 벌이곤 했다. 관계기관의 압력으로 학생들이 모이는 광장 잔디는 가시가 있는 장미로 대체됐다.
 당시 서울대학교에서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내려다보는 도서관 난관에서 기습적으로 시위를 벌이곤 했다. 관계기관의 압력으로 학생들이 모이는 광장 잔디는 가시가 있는 장미로 대체됐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이러한 감시체제와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1980년 9월 2학기 벽두부터 학생들의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사복경찰들이 학교 도처에 상주하는 상황에서 대규모 시위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기습적으로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배포하거나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체포, 구속, 제적당했다. 그러나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투쟁은 줄기차게 이어졌다. 그리고 1980년 김의기(서강대), 1981년 김태훈(서울대) 학생처럼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투신자살하는 극한투쟁으로 이어졌다.

5월 광주항쟁은 비록 일시적으로 패배했지만 이후 민주화투쟁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됐다. 학생들은 학내 서클들이 중심이 되어 전투적인 학생운동 세력을 양성하고 단련했다. 이렇게 성장한 학생운동가들은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 과정에 대한 반성 속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했다. 전통적인 우방으로 여겼던 미국이 독재정권을 후원하고 학살을 방조하였다는 사실을 목격하면서 학생운동 안에 반미의 기운이 싹텄다. 1982년 3월에 일어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그러한 학생운동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면서 국내외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성장한 학생운동은 1982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대규모 연합시위를 시도하고, 교내 시위와 더불어 도심에서 기습적인 가두시위도 벌일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서울의 몇 개 대학에 국한되었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여자대학에서도 교내 시위를 벌였다. 1983년도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학생들의 투쟁은 더욱 확대되고, 전투적으로 변화해갔다.

1980년 5월 17일부터 1983년 말까지 3년 반 동안 반정부시위로 제적된 학생이 1363명에 달했다. 학교 밖으로 쫓겨난 이들 학생운동가들이 바로 민청련 창립의 주역이 됐던 것이다.




IE002199306_STD.jpg
0.36MB
IE002199292_STD.jpg
0.22MB
IE002199297_STD.jpg
0.71MB
IE002199294_STD.jpg
0.61MB



각서 거부한 김근태의 '당당함', 안기부가 물러서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기자 말. 

긴박했던 상지회관

ad

1983년 9월 30일 저녁, 서울 성북구 돈암동 상지회관은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저녁 8시쯤 되자, 밖에서 웅성대는 사람이 1백 명 가까이 늘어났고, 항의도 거세어졌다. 경찰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연행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경찰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문 앞에서 항의하는 사람부터 강제 연행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30~40명이 붙들렸고 경찰차에 실려서 성북경찰서로 이동됐다.

한편 연행을 피해 상지회관 진입에 성공한 사람도 있었다. 남편 박강희와 함께 광화문에서 논장서적이라는 서점을 운영하고 있던 백완승씨가 그런 경우였다. 그해 3월에 결혼해 임신 6개월이었는데, 남다르게 배가 많이 부른 상태였다. 경찰이 "어디에 가느냐?"고 묻자 태연하게 "저기 친구 만나러 간다"고 둘러대자 경찰도 설마 만삭의 부인이 집회에 참석하러 간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통과시켜주었다. 그녀는 진을 치고 있던 경찰 기동대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걸어서 회관 안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정작 회관 안으로 들어온 백완승은 거기에 남편이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깜작 놀랐다. 집행부는 집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철저하게 점조직을 통해 장소를 전달하고 절대 비밀을 엄수할 것을 당부했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서도 이날에 관해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또 서울대 학생운동 출신이면서 '능력개발'이라는 회사에 같이 다니던 동료 박성규, 이을호, 남명수, 전국진, 장종진 등도 서로 알리지 않고 각자 집회에 참석해 얼굴을 맞대고는 머쓱해 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상지회관 밖에서 진입을 위해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집행부 박우섭, 박계동과 회원 오세중이 연행되었다. 성북서에 잡혀간 박계동은 "야! 친정집에 왔는데 대접이 왜 이래!"라고 큰소리를 쳤다. 고대 출신이라 학생운동 과정에서 성북서를 제집 드나들 듯했던 것이다.

밖에 있던 회원들이 연행되고 나자 상지회관 안에 있던 50여 명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언제 경찰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예정된 총회 순서를 진행할 수도 없었다. 경찰 측에서는 상지회관 수녀님들에게 압력을 넣어 해산할 것을 종용했다.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 1988년 김근태 의장이 김천교도소에서 출소할 때의 모습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 1988년 김근태 의장이 김천교도소에서 출소할 때의 모습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김근태를 중심으로 집행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대책을 의논하는 한편, 다른 방편으로 이해찬, 장영달 등 집회 경험이 많은 간부들로 하여금 경찰 측과 교섭하도록 했다. 경찰은 계속 해산을 요구하면서 모두 연행하겠다고 위협했고, 안에서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보장된 평화적인 옥내집회이니 해산할 수 없다고 버텼다. 이런 팽팽한 대치 상태가 한 시간 넘게 계속되었다. 이렇게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 이어지자 회원들 대부분은 학생운동 경험이 있는 역전의 용사였지만 그래도 불안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9시가 넘어 드디어 타협책이 나왔다. 총회가 끝나고 집행부가 자진 출두하는 조건으로 총회 진행을 보장하고, 사전 연행된 회원들을 즉시 석방하기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가까스로 총회를 열 수 있게 되었으나 연행된 회원들은 총회가 마친 뒤에야 겨우 석방되었다. 9시 반 무렵, 어수선한 장내를 정리하고 연성수의 사회로 드디어 총회가 시작되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발기문. 발기인 대표는 장영달로 되어 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발기문. 발기인 대표는 장영달로 되어 있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심야의 창립총회

먼저 장영달이 발기문을 낭독했다.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지 않은가?" 장영달이 발기문을 힘차게 읽어내려가자 장내는 일순 숙연해졌다.

발기문에서 장영달은 발기인을 대표하여 우리 청년운동이 "동학농민전쟁, 항일민족해방투쟁, 4.19민주혁명의 맥을 이어받"고 있으며, 유신독재체제의 암울한 '긴급조치 시대' 아래에서 줄기차게 투쟁해 왔다고 밝혔다. 아울러 80년 5월 광주학살 이후 3년간 우리 청년들이 "한편으로 소시민적 감상과 패배주의 늪에서 헤매어 왔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이제 더는 '운동'을 지체할 수 없으며, 절박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민주화운동 청년단체의 결성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이어서 의장으로 내정된 김근태가 창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김근태는 차분한 음성으로 창립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민주, 민중, 민족통일을 우리 모두에게"라는 제목의 창립선언문 서두에서 "우리 민주청년은 민주, 민권의 승리를 위한 지금까지의 반독재투쟁 경험과 운동의 성과를 계승하면서 운동 이론을 체계화하고, 운동 주체를 조직화해야 한다는 역사적 요구에 좇아 민주화운동(전국)청년연합 결성을 선언한다"고 창립 취지를 밝혔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외세에 편승한 소수 권력집단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민족분단상황과 핵전쟁 위기에 처해 있으며, 우리 민중은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지배권력집단의 지배 하에 고통받고 있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민주⋅통일을 위한 민주정치 확립, 민족자주경제의 확립, 자생적이고 창조적인 문화 교육체계의 형성, 냉전체제 해소와 핵전쟁 방지' 등을 민청련의 과제로 제시했다.

참석자 모두가 이 선언문을 박수로 만장일치 통과시켰다. 이어서 전문 21조의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규약을 역시 박수로 통과시켰다. 이 규약에 의해 임원 선출에 들어가 이미 사전 논의과정에서 내정했던 집행부 6명을 임원으로 선출했다. 드디어 군사독재와 맞서 싸울 선봉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창립한 것이다.

 앞뒤 한 장으로 구성된 창립선언문. 타자기로 쳐서 등사기로 인쇄했다
 앞뒤 한 장으로 구성된 창립선언문. 타자기로 쳐서 등사기로 인쇄했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김근태 의장은 누구인가

의장으로 선출된 김근태 의장이 등단하여 인사말을 하였다. 김근태 의장은 워낙 오랫동안 수배생활을 한 탓에 이날 처음으로 김 의장을 본 회원들도 많았다.

지하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노련한 민중운동가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김 의장은 하얀 피부에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운동가라기보다는 대학교수처럼 보였다. 김 의장은 특유의 온화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당면 정세를 설명하고, 민청련이 수행해야 할 당면 과제를 차근차근 설명해갔다. 김근태 의장은 또 예견되는 시련과 박해에 맞서 모두 힘을 합쳐 싸워나갈 것을 부탁하였다. 회원들은 경찰에 포위되어 있는 삼엄한 상황도 잊은 듯, 김 의장의 연설에 빠져들었다.

장영달 부의장도 힘찬 취임인사를 간결하게 끝냈다. 그리고 회원들 모두 한 사람씩 자기 소개와 함께 집행부에 대한 격려와 당부의 말이 이어졌다.

밤 11시가 훨씬 넘은 시간에 창립대회는 만세삼창을 끝으로 무사히 끝났다. 어떻게든 총회를 성사시키겠다는 일념하에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이 행사를 준비했던 집행부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험난한 앞길이 놓여 있었지만 일단 민청련이라는 배를 바다에 띄어놓는 데에는 성공한 셈이었다.

행사가 끝나자 경찰과의 약속대로 김근태 의장을 비롯하여 장영달, 연성만 등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경찰차를 타고 남산 안기부로 향했다. 배웅하는 회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걱정말라고 웃으며 떠났지만 보내는 회원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경찰들도 원래 약속대로 다른 회원들은 연행하지 않고 골목 양쪽에 도열한 채 총총히 골목길을 내려가는 회원들을 지켜보았다. 창립과 동시에 집행부를 경찰의 손에 넘겨준 회원들은 돈암동 근처 술집들로 흩어져 소줏잔을 기울이며 울분을 달랬다.

 안기부 5국이 사용하던 남산 기슭에 있는 4층 건물. 지하에 민주인사들을 취조하던 조사실이 있었다. 지금은 서울시청 별관으로 쓰이고 있다.
 안기부 5국이 사용하던 남산 기슭에 있는 4층 건물. 지하에 민주인사들을 취조하던 조사실이 있었다. 지금은 서울시청 별관으로 쓰이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집행부 전원이 안기부로 끌려가다

상지회관에서 연행된 김근태 의장, 장영달 부의장, 연성만 사회부 차장은 곧바로 남산에 있는 안기부 5국 지하 조사실로 이송되었다. 성북경찰서로 연행되었던 박계동 홍보부장, 박우섭 총무부장도 이송되어 왔다. 이들은 각 조사실로 한 명씩 분산수용되어 강도 높은 밤샘 조사를 받았다. 민청련의 창립 경위와 목적, 배후에 누가 있는지, 그리고 관련자가 누군지에 대해 집중조사를 받았다.

대회 전에 집행부 내정자들은 김근태 의장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전원 구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래서 피해를 최소화하고 조직을 살리기 위해서 경찰 조사과정에서는 모든 일의 기획과 문건 작성 등 책임을 김근태 의장이 떠맡는 것으로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 설사 김 의장이 구속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이 나와서 조직을 끌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연행된 간부들은 조사과정에서 원래 각본대로 김 의장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한 것으로 진술했다.

장영달이 구타당한 이유

그런데 장영달 부의장이 한 가지를 자신이 했다고 진술해서 파란이 일었다. 발기문을 자신이 썼다고 주장한 것이다. 발기문 말미에 '발기인 대표 장영달'이라고 명기되어 있는데,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문건을 김 의장이 썼다고 차마 미룰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조사관들 사이에 혼선이 일어났다. 김근태 담당조사관은 김근태가 썼다고 하고, 장영달 담당조사관은 장영달이 썼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두 사람이 대질하여 해결되었다.

대질하는 자리에서 김 의장이 본인이 쓴 것으로 장 부의장을 '설득'하여 김 의장이 쓴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바람에 장영달 부의장은 체면이 크게 깎인 담당조사관으로부터 주먹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안기부에는 현장에서 연행된 집행부 이외에 이미 붙잡혀온 연행자들도 있었다. 이날 오전 11시 무렵,  낌새를 챈 안기부는 운동권 인사들의 출입이 잦은, 종로 5가에 있던 공해문제연구소를 급습했다. 이때 소장 최열과 정문화 그리고 우연히 그곳에 들렸던 중앙대 출신 학생운동가 이석표까지 연행되어 와 있었다.

그리고 사회부장으로 내정했으나 총회 당일 날은 발표하지 않고 2선으로 남겨 두었던 연성수도 연행되어 왔다. 당일 날은 연행을 면했으나 이틀 뒤에 피신해 있던 아내 이기연의 화실에서 안기부 수사관에게 체포된 것이다.

 1984년 시위현장에서 경찰에게 둘러싸여 끌려가는 연성수 사회부장
 1984년 시위현장에서 경찰에게 둘러싸여 끌려가는 연성수 사회부장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김근태 의장, 각서를 거부하고 석방되다

집행부의 작전이 적중했는지, 아니면 애초 구속할 방침이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연행한 지 3일째 되는 날, 김근태 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간부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석방되기 직전에 간부들은 민청련 활동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 부분에 대해 사전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원래 김 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간부들은 일단 나와서 활동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기 때문에 각서를 써주고 나왔다.

안기부 측은 김근태 의장에게도 똑같은 요구를 했다. 나가면 민청련을 해체하고 활동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김 의장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여기에 도장을 찍고 나가서 민주화운동 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 우리가 눈감아 주겠다. 그러나 거부하면 구속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성 제안을 했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은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민청련을 해체하라는 건데, 해체는 의장이 할 수 없는 거다. 회원들이 해체해야지, 말이 안 되는 걸 내가 어떻게 하냐"고 하면서 버텼다.

조직 원칙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공개단체의 장으로서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고 보고 끝까지 거부한 것이다. 결국 일주일 남짓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이 계속되다가 안기부는 결국 김 의장을 석방한다.

이 일주일 여의 기간 동안 김근태를 구속할지 여부는 전두환 정권 상층부까지 보고되었고, 결국 석방시키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

김근태 의장의 석방에 민청련 회원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서슬이 시퍼런 전두환 정권 아래서 공개정치투쟁 조직이 가능할 것인가 반신반의하던 회원들이 많았는데, 김 의장의 석방으로 그 가능성이 확인된 것이다. 더구나 김 의장은 각서를 끝까지 거부하고 당당히 걸어 나옴으로써 민청련의 위신을 높였다.

 가슴을 쓸어내린 최민화 상임위 의장의 그 무렵 사진
 가슴을 쓸어내린 최민화 상임위 의장의 그 무렵 사진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최민화 상임위 의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민청련 창립을 뒤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도우면서 노심초사했던 최민화로서는 너무나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김근태 의장에게 만일 당신이 구속되면 제2진으로 자신이 나서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이제 그 짐을 벗게 된 것이다.

김 의장이 석방되던 날 최민화는 회원 30여 명과 서소문 검찰청사로 김 의장을 맞이하러 갔다. 모두들 공개운동을 쟁취했다는 승리감에 들떴다. 최민화가 크게 한턱을 냈다. 회원들 모두에게 저녁을 사고,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밤늦게까지 춤을 추며 기분을 냈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47107



IE002196334_STD.jpg
0.71MB
IE002196301_STD.jpg
0.23MB
IE002196302_STD.jpg
0.66MB
IE002196304_STD.jpg
0.74MB
IE002196298_STD.jpg
0.72MB
IE002196306_STD.jpg
0.45MB



정권이 막으려 한 '83년 9월 30일 행사'



연재를 시작하며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민청련이 창립되던 날 - 민주의 봄을 기다리며

adad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에서 만찬 도중 박정희를 저격하여 숨지게 함으로써 길었던 18년 유신체제가 무너졌다. 우리가 맞이한 1980년 봄은 바로 무너진 그 자리에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를 놓고 부푼 기대와 젊음의 열정이 들끓었던 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1980년 봄을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냉혹한 군사독재로 얼어붙었던 동토에 민주주의의 새잎이 돋아나 온통 푸른 봄의 세상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신의 심장에 총을 쏘았던 김재규는 곧바로 반란 수괴로 감옥에 갇혔고, 박정희의 후예 신군부 소장파 장교들이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다. 앞서 11월 24일에 민주화운동 세력은 유신체제에서와 같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통대선출저지국민대회'를 열었다가 계엄사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대회는 무산됐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서울의 봄'이 오는 것은 자연순환의 이치처럼 자명한 것으로 믿었다.

1980년 3월 6일, 잔설이 남아 있는 초봄, 육군형무소에서 김재규의 비서실장 박흥주 대령이 총살로 처형됐다. 그래도 우리는 봄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5월 15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온 대학생 5만여 명이 서울역 광장에서 계엄해제를 외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을 때 "봄은 바로 옆, 문밖까지 와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와 재야 지도자들도, 정치의 봄이 오고 있다고, 그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각 학교마다 교문을 뚫고 서울역으로 집결했다. 총집결한 그 날 ‘서울의 봄’ 시위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계엄해제를 외치며 각 학교마다 교문을 뚫고 서울역으로 집결했다. 총집결한 그 날 ‘서울의 봄’ 시위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우리가 바라던 봄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신군부의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민주주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서울의 봄'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신군부의 독재에 저항한 광주 시민 수백 명이 광주항쟁 과정에서 계엄군의 총칼에 희생되었고, 그 기간 중에 김재규와 그의 부하 4명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시 이 땅은 유신독재의 후예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긴 독재의 겨울이 왔다.

그러나 기나긴 유신독재가 막을 내린 후에 우리 앞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던 '서울의 봄'은 단지 한바탕 꿈은 아니었다. 지리산 철쭉꽃이 피어나는 5월이 다시 돌아올 때마다 우리 가슴 속에 '서울의 봄'은 다시 생생한 모습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꿈이었고, 만주에서 굶주림 속에 조국해방의 일념으로 일제와 싸웠던 독립용사들의 꿈이었다.

무명 순국열사묘역에서 결의를 다지다

광주항쟁이 좌절된 지 3년여의 세월이 지난 1983년 9월 29일 아침. 수유리 4·19묘지 뒷산 순국열사묘역에 있는 독립군 무명용사묘 앞에 일군의 청년들이 모였다. 바로 다음 날인 30일에 있을 민청련 창립대회를 앞두고 민청련 집행부가 될 내정자들이었다.

 수유리 4·19묘지 부근 북한산 둘레길에 위치한 무명순국열사묘역 안내판
 수유리 4·19묘지 부근 북한산 둘레길에 위치한 무명순국열사묘역 안내판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곱상한 학자풍 얼굴의 김근태 의장 내정자를 비롯해, 뿔테 안경에 장발의 투사형 장영달 부의장 내정자, 이마가 넓은 미남형 박계동 홍보부장 내정자, 다부진 체구에 걸음이 빠른 박우섭 총무부장 내정자, 준수한 외모에 귀공자 타입의 홍성엽 재정부장 내정자, 순발력 있고 재치가 많은 연성수 사회부장 내정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 묘는 연성수가 아침 운동으로 백련사 길을 올라다니면서 발견한 장소인데, 창립 전날 결의를 다지기 좋은 장소라 생각하여 제안했던 것이다. 맨몸으로 군사정권에 대항할 민청련의 출범을 앞두고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들 앞에서 출정 의지를 다지는 자리였다. 창립대회를 무사히 치르게 해주십사 기원을 담은 고천(告天) 의식이기도 했다.

연성수가 사회를 봤다. 먼저 독립운동에 몸 바친 순국열사들에 대한 묵념을 했다. 이어서 김근태 의장 내정자가 술을 한잔 올리고 제문을 읽었다.

"유세차 1983년 9월 29일에 천지신명과 독립용사들의 영전에 고하나니..."

김근태 의장 내정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북한산의 맑은 가을 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 천지신명과 무명 독립용사들의 영혼이 출범하는 민청련을 돌봐주시길 간절히 기원하는 제문이었다.

모두 함께 두 번 절하고, 김근태 의장 내정자부터 한 사람씩 돌아가며 추모와 다짐의 말을 했다. 그리고 둘러앉아 제주(祭酒)를 돌려 마셨다. 조촐하지만 비장한 출정식이었다.

 4·19묘지 부근 북한산 둘레길에 위치한 무명순국열사묘역 현재 모습.
 4·19묘지 부근 북한산 둘레길에 위치한 무명순국열사묘역 현재 모습.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창립총회 날

드디어 9월 30일 창립총회 날이 밝았다. 며칠 후면 추석이라, 선선한 날씨에다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약간 끼어 있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이날 서울시경에는 다음 날 있을 세계의원총회(IPU)에 맞춰 대학생들이 연합시위를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서울 모든 경찰서에 비상령이 통보됐다. 광화문, 종로, 명동 등 시내 요소요소 경찰 닭장차(당시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하는 경찰버스에는 시위대의 돌멩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창문에 철망을 씌워 놓았는데 그 모양이 닭장 같다 하여 닭장차로 불렸다)가 대기하여 젊은이로 보이는 사람들을 검문하였다. 시위 예정 시간으로 알려진 6시쯤 되자 대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은 무조건 연행하여 차에 태워 경찰서로 실어 날랐다.

 80년대에는 반정부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내 요소요소서 불심검문을 자주 행했다. 사진은 80년대 서울시청 길에서의 검문 모습.
 80년대에는 반정부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내 요소요소서 불심검문을 자주 행했다. 사진은 80년대 서울시청 길에서의 검문 모습.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시내 일원에서 계획했던 대학생들의 연합시위는 경찰의 철통같은 경계와 무차별 연행 작전으로 별 성과없이 무산되었다. 종로, 방산시장, 신촌로터리 등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 고대를 중퇴하고 학원에서 다시 입시 준비를 하고 있던 한영수는 애꿎게 걸려들어 구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한영수는 경찰들의 '무분별한' 과잉검속에 항의하다가 괘씸죄로 며칠간 유치장 신세까지 졌다. 이런 인연이 나중에 한영수가 민청련의 열성회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시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이런 어수선한 상황이 민청련 창립총회를 성사시키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며칠 전부터 국가안전기획부(약칭 안기부. 중앙정보부의 후신이며 현재의 국가정보원)에서는 재야 청년들이 뭔가 일을 벌이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듯했다. 그래서 요주의 인물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촉각을 세우고 예의주시하던 차였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학생들의 연합시위 정보가 저들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데 일조했으리라.

"예비검속을 피하라!"

대회를 준비하는 민청련 집행부는 창립총회를 성사시키는 것만으로도 공개운동단체를 띄우려는 원래 목적을 반은 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회 시간과 장소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보안을 철저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는 30일 이날, 뭔가 새로운 단체를 띄운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 같았다. 김근태의 집에 이날 오전에 안기부 요원이 다녀갔던 것이다. 당시에는 예비검속이라 하여 수사기관에서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요주의 인물을 사전에 집이나 특정 장소에 붙들어두는 일이 흔했다. 물론 불법이고, 인권침해였지만 누구도 항의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 김근태 의장 내정자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집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방문은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게 했다. 아마도 고문이나 지도위원으로 모실 분들에게 연락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았을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예춘호 선생, 김승훈 신부, 권호경 목사 등 재야인사 30여 명이 이날 오후부터 연금되어 창립대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왼쪽부터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예춘호 선생, 김승훈 신부, 권호경 목사.
 왼쪽부터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예춘호 선생, 김승훈 신부, 권호경 목사.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그리고 청년그룹 중에서도 조성우 등 중량급 인사들에게도 연금령이 떨어졌다. 새로 띄우려는 단체의 대표를 맡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는지 조성우에게는 특별조치가 내려졌다.

이날 아침 조성우의 홍제동 집 앞에는 새벽부터 안기부, 보안사, 치안본부 합동팀 5명이 차를 대기시켜놓고 조성우를 모셔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조성우가 집에서 나오자마자 다짜고짜 차에 태워 교외로 몰았다. 강제연행이었다. 결국 이날 조성우는 이 정보기관원들과 서울 교외 일영 유원지에 가서 하릴없이 하루를 보내야 했다.

창립총회 장소는 상지회관

창립총회는 7시 30분에 시작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6시가 좀 지나자 점퍼 같은 간편복 차림의 민청련 회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삼삼오오 성북구 돈암동 상지회관 골목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상지회관은 가톨릭 베네딕트회 수도원으로 일반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였다.

집행부는 대부분 일찍 상지회관에 들어와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우섭, 박계동은 들어오는 사람들을 안내하느라 건물 밖에 남아 있었고, 김근태, 장영달, 이해찬, 이범영 등 주요 간부로 내정된 사람들은 일찍부터 회관에 들어와 긴장 속에서 들어오는 회원들을 맞고 있었다.

 현재는 '상지 피정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당시 상지회관의 현재 전경.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가톨릭 베네딕트회 소유의 수도원이다.
 현재는 '상지 피정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당시 상지회관의 현재 전경.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가톨릭 베네딕트회 소유의 수도원이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상임위 의장으로 내정된 최민화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집행부가 전원 연행되어 구속되는 사태라도 벌어진다면 최민화가 2진으로 재건 집행부를 꾸릴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최민화는 당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던 구창완 목사를 창립집회에 참석하게 하고, 자신은 나중에 현장의 진행 상황을 전달받기로 했다.

임상택, 김도연, 김정환, 박성규, 이을호, 최정순, 권형택, 이우재 등 40~50명의 회원들과 지도위원 임채정, 김종철 선생이 회관 안으로 속속 들어왔다.

7시가 지나자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7시 30분으로 예정된 총회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제동이 걸렸다. 뒤늦게 이곳에서 민청련 창립총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아챈 정보기관에서 경찰 병력을 급파하여 집회를 막으려고 한 것이다. 일순 상지회관 일대는 정사복 경찰 수백 명에 둘러싸였다. 경찰은 회관 입구를 차단하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회관 입구에는 들어가려는 회원들과 막는 경찰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몇 사람은 막는 경찰을 밀치고 들어왔지만 대부분 들어오지 못하고 골목 여기저기 웅성거리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안에 있던 집행부 몇 사람이 나가서 항의했지만 별무신통이었다.

 상지회관으로 들어가는 골목. 당시 경찰이 막고 있어 많은 회원들이 이 골목에서 서성거리다가 연행되었다. 지금은 창립식을 열던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상지회관으로 들어가는 골목. 당시 경찰이 막고 있어 많은 회원들이 이 골목에서 서성거리다가 연행되었다. 지금은 창립식을 열던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IE002192515_STD.jpg
0.5MB
IE002192516_STD.jpg
0.23MB
IE002192519_STD.jpg
0.43MB
IE002192517_STD.jpg
1.11MB
IE002192522_STD.jpg
0.02MB
IE002192518_STD.jpg
0.77MB
IE002192524_STD.jpg
0.39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