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이름처럼 살아간 미륵

지주 가문의 3대 독자에 의사 되려던 청년 이미륵, 3·1운동에 모든 것을 내놓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이미륵은 1917년 학교에 처음 도착한 날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입구에 서 있었다. 그것은 도시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여러 채의 유럽풍 건물들로 이뤄져 있었다. 대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기도 하고, 또 한꺼번에 몰려 들어오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의학’이라는 글자가 박힌 황금색 배지를 단 감청색 교복을 입고 있었다.” 임경석 제공
압록강 하구는 넓었다. 키보다 높게 솟은 갈대밭을 한참 헤치고 나아간 끝에 마침내 강가에 이르렀을 때, 이미륵은 놀랐다. 그것은 강처럼 보이지 않았다. 바다 같았다. 강 건너 아득히 먼 곳을 눈으로 짚었으나, 뭍인 듯 환영인 듯 거무스름한 얇은 띠 그림자를 그만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쪽배로 압록강을 건너는데


달밤이었다. 사방이 훤해서 쉽게 사람들 눈에 띌 것 같아 불안했다. 늙은 어부가 빙그레 웃었다. 오히려 달빛이 밝을 때 국경 감시가 소홀하다고 말했다. 강물에 띄운 것은 작은 통나무배였다. 그 쪽배는 너무 작아서 두 사람만 간신히 탈 수 있었다. 쪽배는 세 척이었고, 사공도 세 사람이었다. 강 건너기를 바라는 이들은 미륵과 그보다는 좀 어려 보이는 두 학생이었다. 둘 중 하얗게 겁에 질린 한 명은 17살도 채 안 돼 보였다. 미륵도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어서 셋 다 학생인 셈이었다.

쪽배는 충분히 간격을 두고 차례차례 강가를 떠났다. 큰 강물 위로 소리 없이 노를 저어가는 동안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마치 영원의 시간을 지나가는 듯했다고 이미륵은 뒷날 회고했다.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다. 멀리서 몇 발 총소리가 들렸다. 어부가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얼마쯤 지나, 어부가 속삭였다. 이따금 압록강 철교 위에서 쏘아대는 경고의 총소리라고 했다. 하지만 반짝이는 수면 한가운데 뜬 쪽배인지라 일본군은 결코 우리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1919년 11월, 이미륵은 이렇게 국경을 넘었다. 이 체험을 미륵은 평생 잊지 못했다. 자기 삶의 역정을 글로 옮겨서 단행본으로 출판했을 때, 그 책 이름을 <압록강은 흐른다>라고 지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왜 위험을 무릅쓴 채 험난한 경로로 월경해야 했을까?

바로 3·1운동 때문이었다. 3·1운동은 이미륵의 인생 행로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저 영향을 끼친 정도가 아니었다. 삶의 궤적이 판이하게 달라질 만큼 급격한 변화였다. 이미륵뿐이랴. 따져보면 3·1운동을 계기로 운명의 전환을 겪은 조선인이 적지 않았다. 국경을 넘어 망명길에 오른 젊은이가 어디 한둘이었는가.


경찰에게 쫓기기 전 미륵은 의사가 되는 길을 걷던 엘리트 학생이었다. 그가 다니던 경성의전은 191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손꼽히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3대 전문학교 가운데 하나였다. 보기를 들면 <매일신보> 1917년 신년호에 ‘신년을 맞이하는 세 전문학교’라는 제목을 달고 경성전수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사진과 관련 기사를 싣고 있다. 법학·의학·공학 분야 중하급 기술 관료와 그에 상응하는 실무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들이었다. 모두 관립이었고, 학비는 면제였다. 총독부가 관할하던 공공기관들처럼 학교 운영도 군대식이었다. 학생들은 강의와 실습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었다. 누구든지 특별한 이유 없이 무더운 7월까지 계속되는 강의를 단 한 시간도 빼먹어서는 안 되었다.

입학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이유는 무엇보다 정원이 적었기 때문이다. 미륵이 응시했던 1917년도 입학 요강을 보면, 신입생 모집은 조선인 50명, 일본인 25명으로 모두 합쳐 75명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인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적게 부여하되, 실무 기술자 양성 분야에 한정한다는 총독부의 식민지 통치 정책 탓이었다. 조선인 입학 정원이 일본인보다 두 배나 되지 않는가, 이렇게 의문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에 거주하는 민족별 인구와 비교하면, 얼마나 심각한 민족차별 정책을 썼는지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 학생 정원 비율은 인구 10만 명당 0.3명인 데 비해, 일본인 비율은 8.3명이었다. 무려 28배의 특혜를 일본인 쪽에 부여했다.


생명의 탄생 연구하는 의사 되려고


이미륵은 극심한 경쟁을 뚫고 경성의전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하마터면 구술시험에서 탈락할 뻔한 위기도 겪었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려는 개인적 동기를 물었을 때, 미륵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근원을 연구하고 싶다는 소견을 피력했다. 그뿐인가. ‘우리나라’라는 용어를 무의식적으로 조선을 지칭하는 말로 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식민지 조선의 전문학교는 학문 연구 기관이 아니라, 실무 분야 기술자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식민지 원주민이 넘봐서는 안 되는 고상한 목표를 토로했던 것이다. 면접관은 오래 망설였다. 다행히 그는 관대한 성품을 지녔던 것 같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량권을 유연한 방식으로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차분히 설명했다. 전문학교 교육의 목표는 실전에 능한 의사들을 양성하는 데 있다고 일러주었고, 앞으로 우리나라라고 말할 때는 단지 조선이 아니라 일본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맥락으로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경성의전의 조선인 학생들은 엄격한 경쟁 관문을 통과한 수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다행스럽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 당국이 자신을 수준 높은 학문 영역으로 이끌어주면서도 특별히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교육비를 전액 국비로 지원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여겼다고 이미륵은 회고했다. 그래서일까. 3·1운동이 다가왔을 때, 거사 참여를 요청받은 의전 학생들은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혔다. ‘우리가 가담한 것이 당국에 발각되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며, ‘총독부에 속한 관립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더 심하게 처벌받을 것’이라는 우려에 번민했다.

그럼에도 사전 논의에 가담해달라고 권유받은 의전 학생 10여 명은 시위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시위를 위한 준비 사항이나 국기, 전단, 시위 방법에 대한 논의를 거듭하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그 속에 이미륵도 있었다. 사전 모의에 가담한 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경성의전 조선인 학생들의 용기와 정의감은 다른 고등교육기관의 평균적인 조선인 학생들보다 월등히 높았다. 경성의전 조선인 학생 수는 208명이었는데, 그중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이는 32명이었다. 15%에 이르렀다. 당시 서울에 있는 관립 3개 전문학교, 사립 4개 전문학교를 통틀어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 체포를 모면했거나,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훈방이나 기소유예, 태형 처분 등을 받은 학생들까지 포함한다면 그 비율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이미륵은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보았고, 자신도 직접 참여했던 만세시위운동과 군경의 탄압 모습을 유려한 필치로 실감 나게 묘사했다. 그중에서 그날 일본 군경의 대응 태도가 저물녘에야 비로소 적극 탄압 방식으로 변했다는 증언이 주목된다. “경찰들은 처음에는 간섭하지 않고 우리가 시내를 완전히 통과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중무장한 채 관청 건물을 경비하면서 학생들이 폭력 행위로 넘어가는지를 주시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압박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제 시위 대열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는 말이었다. 현장에서만 관찰할 수 있는 생생한 증언이다.

이미륵은 시위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서울에 있는 대학생들은 네 번째 독립 시위를 벌인 후 공식 활동에서 물러났다”고 했다. 3월1일과 5일 시위가 학생층이 사전 준비해서 벌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뒤 계획 시위가 두 차례 더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언이라고 평가된다. 그는 시위 참가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리는 비밀운동에 전념했다”고 썼다. 이미륵은 선전문을 쓰는 부서에 소속됐다. 비밀결사에 참여했다는 언급이 주목을 끈다. 그가 경찰 추적을 받은 계기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35살의 이미륵, 1933년 독일 뮌헨에서. 정규화·박균 제공

비밀결사의 간부가 되기도


이미륵은 비밀결사 참여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축적된 연구 성과에 의하면, 그 비밀결사는 ‘청년외교단’이었다. 이 비밀결사는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5월 결성됐다. 결사체의 이름에서 그해 10월 개막 예정이던 국제연맹 회의에서 조선의 국제적 지위 변경 문제를 상정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미륵은 이 단체에서 중앙간부 일원으로 활동했다. 편집부장에 취임했다. 이 단체는 기관지 <외교시보>를 펴냈고, 반일시위 참여를 호소하는 선전문과 전단을 살포했다. 이 업무들은 아마 편집부장 손을 거쳐 했을 것이다. 당사자가 뒷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즈음 몇 달 동안 거의 매일 밤을 편히 잠들지 못했다.

그해 11월 비밀결사가 있다는 사실이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주무 기관은 경상북도 경무국이었다. 전국적으로 비밀결사 청년외교단 구성원들의 일제 검거가 이뤄졌다. 이미륵이 서울을 떠나 고향인 황해도 해주로 되돌아온 때는 아마 그 직전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알게 됐다. 자기 아들이 고문과 투옥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38살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천석꾼 지주 가문의 대를 이을 3대독자였다. 딸 셋을 내리 낳은 뒤, 미륵불에 치성을 드린 덕분에 얻은 외아들이었다. 그래서 이의경(李儀景)이라는 본명 대신 ‘미륵’이라는 애칭으로 즐겨 불렀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슬픔을 억누르고서 아들에게 권했다, 망명하라고. 압록강을 건너 안전한 땅으로 도망가라고 거듭 말했다. 집을 떠나던 날 안개가 끼고 어두웠지만 어머니는 동구 밖 멀리까지 배웅 나왔다. 이별의 시간이 닥쳐왔을 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혹시 우리가 다시 못 만나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라. 넌 내 생애에 너무도 많은 기쁨을 주었단다. 자, 내 아들. 이젠 너 혼자 가렴. 멈추지 말고.”


“혼자 멈추지 말고 가라”던 어머니


이미륵은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이듬해에는 바라는 대로 유럽 유학길에 올라, 독일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도 끝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미륵은 1950년 3월, 향년 52 중년의 나이에 병사할 때까지 디아스포라(이산)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일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공동체의 정의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었다. 대지주의 후손이자 의사라는 전문직이 예정돼 있음에도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한 싸움에 투신한 사람이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한국인은 그의 희생과 헌신에 빚지고 있다. 공공선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귀한 것을 내놓았던 그 사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1. 이미륵 지음, 박균 옮김, <압록강은 흐른다>, 살림, 213~ 215쪽, 2016.

2. 경성의학전문학교, ‘생도모집’ 대정6년 1월17일, <조선총독부관보> 2337호, 1917년 1월22일.

3. 김상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의 3·1운동 참여 양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0, 152쪽, 2019.

4. 장석흥,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1988. 조은경, ‘연병호와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8, 2019.

5. 정규화·박균, <이미륵 평전>, 범우, 2010.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