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의 발견

모스크바 기록관에서 90년 만에 모습 드러내
누가 작성했나… 서울상하이파 또는 김단야 추정


‘12월테제’ 러시아어 정본. ‘조선문제에 관한 결정’이라는 제목 옆에 ‘최종본’이라는 펜글씨 메모가 쓰여 있다. 

1928년 12월10일 코민테른 정치비서부가 채택할 때 사용한 문서다. 임경석 제공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이 발견됐다. 모스크바의 한 기록관에서 근 9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 기록을 소장한 것으로 유명한 러시아사회정치사기록관의 한 서류 파일에서 잠자고 있던 문서다.

이 문서는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됐다. 개성 있는 유려한 펜글씨로 쓰인 것으로 보아 작성자는 필시 중등 이상의 근대 교육을 이수한 사람으로 보인다. 군데군데 가감첨삭의 교정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때문에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종이는 밑줄이 인쇄된 21줄짜리 편지지로 보이는데, 혹여 노트 속지일 수도 있겠다. 페이지마다 글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모두 합쳐 19쪽이다. 200자 원고지로 환산했더니 62장에 해당한다.


통일 교과서에 실릴 역사적 문서


12월테제란 1928년 12월10일 코민테른 정치비서부가 채택한 조선문제결정서를 가리킨다. 조선 혁명운동의 기본 방침을 논하는 강령적 문서이기에 ‘테제’라고 했다. 이 테제는 일제하 조선 사회주의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기념비적인 문헌이다. ‘기미독립선언서’(1919)와 ‘조선혁명선언’(1923)이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위상이 있다면,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은 사회주의운동사 속에서 그런 구실을 하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뒷날 남북한이 통일되면 국어 교과서에 실릴 개연성이 큰, 역사적인 텍스트다.

12월테제를 기점으로 사회주의운동 내부에 ‘테제 정치’라고 해도 좋을 행동양식이 출현했다. 새로운 현상이었다. 1928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코민테른 조선문제결정서가 채택된 바 있다. 그러나 내용이 길지 않았다. 꼭 필요한 사항만 짧은 문장으로 명시했다. 그런데 12월테제 이후 달라졌다. ‘테제’라고 부르는 긴 정치적 문서가 채택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혁명운동의 주·객관적 정세, 전략과 전술, 조직 문제 등 체계를 세운 일종의 논문이었다. 이후 ‘9월테제’ ‘10월서신’ 등으로 불리는 긴 문서가 줄을 이었다. 이 현상은 해방 직후까지 계속됐다. 1945년 조선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이 작성한 8월테제는 이 행동양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테제 정치’가 20년 가까이 지속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929년 이후 통일된 전위당(노동자계급의 전위대로서 사회주의혁명 투쟁을 선도하는 정당)의 중앙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외에 산재한 여러 층위의 비밀결사 구성원들의 생각을 일치시키는 데 테제와 같은, 논리적으로 잘 짜인 장문이 유용했다. 어느 비밀결사에 속했든지 상관없이 그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통합하는 데 적합했다. 그뿐인가. 테제는 정치·사상적으로 비밀결사 구성원을 교육하는 구실도 했다. 국내외에 조성된 복잡한 정세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에 일목요연하게 해답을 제시했다. 그 때문에 비밀리에 활동하는 현장의 사회주의자들은 이 테제를 구하려 했고,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탐독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하지만 해방 이후 통합 공산당이 세워진 뒤로 ‘테제 정치’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구성원 사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훨씬 유용한 수단이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 첫 쪽.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서’라는 제목 아래 펜글씨로 적혀 있다. 전체 분량은 모두 합해 19쪽에 이른다. 임경석 제공

문서 발견 장소가 유일한 단서


도대체 누가 이 기록을 작성했는가? 유감스럽지만 문서의 어느 곳에도 작성자가 누군지 알려주는 구절이 없다. 부득이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 문서가 발견된 장소가 유력한 단서다. 조선어 필기본은 12월테제를 작성한 코민테른 조선위원회 파일에 켜켜이 쌓인 초안들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어 필기본의 작성자는 12월테제 채택 논의 과정에 참여한 조선인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코민테른 조선위원회의 구성은 쿠시넨(핀란드), 퍄트니츠키(러시아), 레멜레(독일) 3명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모두 코민테른의 최상급 집행기구인 정치비서부 위원이었다. 최고위직 인사 11명 가운데 3명으로 이뤄진, 권위 있는 기구였다.

조선인이 포함되지 않은 점에 눈길이 간다. 그렇다고 조선인이 문제 심의에 전혀 참여하지 않거나 배제됐던 것은 아니다.

조선위원회의 심의 과정에 참여한 조선인은 5명이었다. 이들은 분열된 조선공산당의 어느 한쪽을 대표했다. 이동휘와 김규열은 1927년 12월 당대회에서 성립한 조선공산당, 이른바 서상파(서울상하이파의 줄임말)를 대변했다. 그에 반해 양명과 한빈은 1928년 2월 당대회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이른바 엠엘(마르크스레닌주의)파를 대표했다. 또 한 사람은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레닌대학에 유학 중이던 김단야였다. 그는 분열되기 이전 조선공산당의 관점에서 독립적인 의견을 진술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이 5명은 조선공산당의 내부 상황에 대해 상세한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위원회가 요청하는 참고 자료를 작성했다. 주요 인물에 대한 평도 썼고, 직접 위원회 회의에 출석해 질의에 답변도 했다. 물론 어느 사안이든 자신의 관점에서 진술했다. 그 덕분에 조선위원회는 중요 사안마다 세 종류의 상이한, 때로는 서로 대립되는 정보를 볼 수 있었다.

조선인 대표단은 의사소통을 위해 통역을 둘 수 있었다. 서상파 공산당 대표단은 박진순의 도움을 받았다. 1920년 코민테른 제2회 대회에 한인사회당 대표로 참석했던 그 사람이다. 그는 러시아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고 모스크바대학 철학과를 졸업했기에 세련된 고급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엠엘파 공산당 대표단이 어떤 사람을 통역으로 내세웠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마 국제공산청년회 제5회 대회(1928년 8월20일~9월18일)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와 있던, 고려공청 대표 강진일 가능성이 높다. 강진은 러시아 연해주 포시예트에서 태어나 러시아 초·중등 교육을 이수하고 극동대학 공대에서 수학했던지라,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김단야는 통역을 세우지 않고 직접 자기 의사를 밝혔다. 그는 러시아어로 대화할 수 있는데다, 서면으로 문서를 제출할 때는 영어를 썼다.

12월테제 조선어 활자본 첫 쪽. 조선공산당 엠엘(NL)파 기관지 <계급투쟁> 창간호에 실렸다. ‘국제%癤愿瑛�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라는 제목으로 6쪽에 걸쳐 게재됐다. 제목에서 ‘공’에 해당하는 글자가 빠진 것이 이채롭다. 임경석 제공


공산그룹별로 다양한 번역본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의 작성자는 바로 조선인 대표와 통역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판단된다. 한 걸음 나아가 좀더 후보자군을 줄일 수 있다. 12월테제 조선어 판본들을 비교하는 방법을 통한다면 말이다.

12월테제가 채택된 지 불과 5개월 만에 조선어 활자본이 출간됐다. 중국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조선공산당 엠엘파의 기관지 <계급투쟁> 창간호에 그 전문이 게재됐다. ‘국제공산당의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라는 제목 아래 6쪽에 걸쳐 실려 있다.

두 가지가 놀랍다. 코민테른의 최고위급 결정 내용을 신속히 당원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점이 그렇고, 기관지 창간호의 권두 논설로 활자본을 실을 만큼 조직 역량이 우수하다는 점도 그렇다.

내용을 비교해봤다. ‘필기본’과 ‘계급투쟁본’ 사이에 내용상 차이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다만 선택된 용어나 문투, 표현 방식이 같지 않은 점이 눈에 띄었다. 예컨대 필기본의 첫머리는 “조선 경제의 모든 지배적 우월권은 일본 금융자본의 수중에 들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에 비해 계급투쟁본에는 “조선의 모든 경영의 지배권은 일본 금융자본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다”고 표현됐다. 한 군데 더 살펴보자. 조선혁명의 성격을 논하는 대목이다. 필기본에는 “조선혁명은 그 자체의 사회적 경제적 내용으로 보아서 다만 일본제국주의만 대항할 것이 아니라 역시 조선의 봉건주의도 대항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표현됐다. 계급투쟁본에는 “조선혁명은 그 사회적 경제적 내용에 있어서 다만 일본 제국주의뿐 아니라 조선의 봉건주의까지도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결국 양자 사이에 내용상 유의미한 차이는 없지만, 용어와 문투가 동일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음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필기본과 계급투쟁본은 서로 다른 사람이 작성했음을 뜻한다. <계급투쟁>이 엠엘파 공산당의 기관지임을 고려한다면, 그에 게재된 활자본은 모스크바에 파견된 양명과 한빈, 그들의 러시아어 통역을 맡은 강진 등이 작성했음이 분명하다. 둘째, 12월테제의 조선어 정본이 코민테른에 의해 독립적으로 채택된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코민테른이 채택한 12월테제 정본은 러시아어본 하나고, 조선어나 일본어 등 다른 언어로 쓰인 것은 모두 그 번역본이다. 조선어 판본의 다양성은 12월테제의 번역과 전파가 통일된 게 아니라 공산그룹별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필적 대조하고 개인 행적 추적을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은 누가 작성했는가. 두 부류의 인물들로 좁힐 수 있다. 서상파 공산당 대표로서 조선위원회 심의에 참가했던 이동휘, 김규열, 통역 박진순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3의 입장에서 심의에 참가했던 김단야일 것이다. 딱 여기까지다. 현재 확보한 단서로 추적할 수 있는 한계가 말이다. 만약 전자라면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은 서상파 계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참가자들이 숙독하던 문서일 것이다. 후자라면 김단야가 이끌던 국제선 공산주의 그룹이 사용하던 문서일 것이다.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추론의 단서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후보자들이 직접 쓴 문서의 필적을 대조하거나, 12월테제 채택 전후 각 개인의 행적을 정밀하게 추적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서’,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0 л.144~153.

2. 강호출, <코민테른 ‘조선문제결정서’를 통해 본 조선공산당운동(1925~1928)>,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141~142쪽, 2004년.

3. ‘국제공산당의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 <계급투쟁> 1호, 33~39쪽, 1929년 5월. 朴慶植 編, <朝鮮問題資料叢書> 7, 東京, アジア問題硏究所, 1982.






출가하여 범능스님이 되기 전 민중가수 혹은 민중가요 작곡가로 이름이 높았던 시절. 

1980년대 대표적 운동권 가요 중의 하나였던 <광주출전가>의 작곡자

본명 문성인, 예명 강성재 정세현.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이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은 밭엔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 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는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 따라 꿈 속을 가 듯

정처 없이 걸어가네 걸어만 간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울린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 걸어 봄 신명이

가슴에도 지폈네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도 보고 싶네 보고만 싶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천 년을 굵어온 아름 등걸에

한 올로 엉켜 엉킨 우리의 한이

고달픈 잠 깨우고 사라져오면

그루터기 가슴엔 회한도 없다


하늘을 향해 벌린 푸른 가지와

쇳소리로 엉켜 붙은 우리의 피가

안타까운 열매를 붉게 익히면

푸르던 날 어느새 단풍 물든다


대지를 꿰뚫은 깊은 뿌리와

내일을 드리고 선 바쁜 의지로

초롱불 밝히는 이 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 어느 야학의 교가로 지어졌던 노래 






KBS2TV 1989 가요대상 - 1989년 12월(19891230)
한돌 - '터'

저 산맥은 말도 없이 5천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왓네
저 강물은 말도 없이 5천년을 흘렸네
온갖 슬픔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설악산을 휘휘돌아 동해로 접어드니
아름다운 이 강산은 동방의 하얀 나라
동해 바다 큰 태양은 우리의 희망이라
이 내 몸이 태어난 나라 온누리에 빛나라

자유와 평화는 우리 모두의 손으로
역사의 숨소리 그날은 오리라
그날이 오면은 모두 기뻐하리라
우리의 숨소리로 이 터를 지켜나가자

한라산에 올라서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머나먼 고향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구나
백두산에 호랑이야 지금도 살아있느냐
살아있으면 한번쯤은 어흥하고 소리쳐봐라

얼어붙은 압록강아 한강으로 흘러라
같이 만나서 큰 바다로 흘러가야 옳지 않겠나
태극기에 펄럭임과 민족의 커다란 꿈
통일이여 어서 오너라 모두가 기다리네

불러라 불러라 우리의 노래를 그날이 오도록
모두 함께 부르자 무궁화 꽃내음
삼천리에 퍼져라 그날은 오리라
그날은 꼭 오리라



노래를 찾는 사람들 -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 박혜정 작사, 송숙환 노래

- 1987년 10월 1회 정기공연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



누워 쉬는 서해의 섬들 사이로 해가질 때 
눈앞이 아득해 오는 밤 해 지는 풍경으론 상처받지 않으리

별빛에 눈이 부셔 기댈 곳 찾아 서성이다 
서성이다 떠나는 나의 그림자 음-

언제나 떠날 때가 아름다웠지
오늘도 비는 내리고 거리의 우산들처럼 말없이 돌아가지만

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노래를 찾는 사람들 첫 공연 / 김형민

1987년 10월 13일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앞은 때아닌 장사진이 쳐졌다. 대개 젊은 대학생들이었던 장사진의 면면에는 9할의 설렘과 1할의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공연을 보기 위해 모여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공연에서는 몇 달 전만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불리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노래들이 선보일 예정이었다. 물론 대학가 술집에서나 동아리방에서야 목 터지게 부른 노래들이긴 했지만 그 노래들을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같은 시내 한 복판에서 ‘공연’의 형태로 만나게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생소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통로까지 꽉꽉 들어차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관중들은 팜플렛을 보면서 또 한 번 마음이 일렁인다. 어느 야학의 교가로 지어졌던 ‘그루터기’ , 4.19로 죽어간 넋들을 위한 노래 ‘진달러, 밥 딜런의 클래식 ‘바람만이 아는 대답’ 김민기의 ‘친구’, 일본 제국주의자는 물론 그후 여러 집권자들을 성나게 했던 시에 노래를 붙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그리고 김지하의 시에 처절한 곡을 붙인 ‘녹두꽃’ 등등 제목만 보아도 “이 노래를 대놓고 부른단 말이지?” 라는 질문이 새어나올만한 노래들이 줄을 있고 있었는데다 피날레는 합창으로 장식되게 짜여져 있었다 한돌의 ‘터’, 그리고 요즘은 한나라당 연찬회에서도 부른다는 소문이 있는 ‘광야에서’ 그리고 87년 당시 부르기만 해도 목이 메어 꺽꺽거리는 사람이 많았던 노래 ‘그날이 오면’까지.

원래 "노래를 찾는 사람들" 즉 노찾사는 대학 노래패 출신들이 만든 노래모임 새벽을 모태로 했다. 지하 아닌 지하에서 유통되는 노래를 생산하고, 현실과 떨어진 사랑 타령만이 아닌 생생한 삶의 노래와 진실의 소리의 작은 새암이었던 그들이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드디어 지상으로 분출되어 나온 것이다. “합법적인 공간에서 콘서트 한 번 해 보자.”

하지만 아무리 6월 항쟁 뒤끝이라지만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노래모임 새벽의 이름을 대놓고 내걸기에도 찜찜했다. 그래서 당국이 봐도 무난하고 까탈 잡히지 않을만한 사람들로 공연 팀을 구성했다. 잠깐 ‘새벽’ 활동을 했었던 가수 김광석을 비롯하여 역시 새벽 출신이거나 노래운동을 했던 학교 선생님, 은행 직원 등이 합류했다. 단적인 예로 ‘노찾사’ 초대 대표로서 무대 인사를 했던 사람은 한국은행 대리였다.

공연이 시작됐다. 첫 곡부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라기보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대지를 꿰뚫은 깊은 뿌리와 내일을 드리고선 바쁜 의지로 호롱불 밝히는 이 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맷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한때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고 바로 거리에서 연행되어 머리 깎여서 군대로 끌려가기도 했고 학교 안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로 강당 밖에서 대공계 형사가 주먹을 부르쥐고 서 있기도 했었다.

공연 팜플렛에 등장하는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라는 노래의 작사자의 사연은 보다 특별했다. 그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서울대 국문과 83학번 박혜정이 그였다.

“누워 쉬는 서해의 섬들사이로 해가질 때 눈앞이 아득해 오는 밤

해 지는 풍경으론 상처받지 않으리

별빛에 눈이 부셔 기댈 곳 찾아

서성이다 서성이다 떠나는 나의 그림자 음음음음

언제나 떠날 때가 아름다웠지

오늘도 비는 내리고 거리의 우산들처럼 말없이 돌아가지만

아아아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시인 김수영을 좋아하던 국문학도, 엄한 아버지 탓에 MT 한 번 가지 못했던 모범적인 여대생. 휴학을 해서라도 끔찍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녀에게도 86년은 어김없이 송곳처럼 찾아왔다. 어느 날 집회 도중 서울대 원예과 1학년 이동수가 온몸이 불덩이가 된 채 아크로폴리스로 떨어져 내린다. 그 자리에 있던 문익환 목사는 평생 그 일을 가슴에서 지우지 못했거니와 그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그 광경은 머리 속에서 절대로 떼어내지 못할 충격이었다. 한 학생은 도서관에 뛰어들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사람 죽었다 이 개새끼들아. 나와서 싸우자 싸우지 않겠거든 나와서 구경이라도 해라.”

그날 박혜정도 울면서 돌을 들었다. 용기 없음을 스스로 질책하던 한 젊은이의 폭발이었고 참전할 수 밖에 없었던 전쟁의 발발이었다. 그날 그녀는 평생 처음 외박을 하고 며칠 뒤 한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절망과 무기력, 이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하게 빼앗김의 방관, 덧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더 이상 죄지음을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하지 못했던 빚 갚음일 뿐이다.” 그녀는 유서에서 이렇게 썼다. 그로부터 1년 뒤 그녀의 시는 노래로 살아나 객석을 메운 사람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게 된 것이다.

이런 모든 사연을 싣고 공연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원래 전태일 추모곡으로 만들어졌던 ‘그날이 오면’으로 공연은 끝났지만 관객들은 당연히 앵콜을 부르며 떠날 줄을 몰랐다. 그때 등장한 것이 공연 중 ‘녹두꽃’으로 사람들을 홀렸던 김광석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이 산하에’ 1절은 갑오농민 전쟁, 2절은 3.1운동 3절은 북만주 항일 무장 투쟁을 형상화한 이 장중한 노래는 김광석의 미성에 실려 새처럼 가볍게 사람들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노래는 승리를 노래하지 않았다.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 없는 통곡’이었고 ‘피에 물든 깃발’의 처참함이었고 ‘붉은 이 산하에 이 한 목숨 묻힐 수 있는’ 막막함이 그득했다. 하지만 관중들도 노래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바로 그런 과거가 어제까지의 일이었고, 박혜정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1987년 10월 13일 오늘 그들이 이 공연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자신들의 앞에서 펼쳐지는 노래 자락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했다. 그것은 자신들이 쟁취한 자유였고, 또 바로 그들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언뜻 오늘을 둘러 보면 그날 노찾사가 부른 노래들은 흘러간 옛 노래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삶이 바닥에서부터 무너지고, 고단하고 성마른 삶을 비빌 언덕이 필요할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입을 열 때, 그 노래들은 또 다른 생명력으로 우리 귓전을 때릴 지도 모른다. 1920년대 이상화가 노래한 ‘빼앗긴 봄’이 1980년대에도 슬프게 열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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