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공자와 레닌을 사랑한 조선청년 김규열

조선공산당 분열 상징하는 사상논쟁을 최익한과 벌이다


1933년 소련 정치보위부 경찰에게 체포된 뒤 찍은 김규열 사진. 초췌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임경석 제공


외국 유학을 마친 김규열(金圭烈)은 국내로 돌아왔다. 1926년 가을 무렵이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3년간의 정규 교육과정을 졸업한 뒤였다. 고국을 떠난 지 3년6개월 만이었다. 1890년생이므로 귀국할 때 조선 나이로 37살이었다. 어느덧 청년기가 저물고 있었다.

전조선청년당대회 대표로 모스크바 유학


모스크바 유학은 1923년 3월 열린 전조선청년당대회 덕분이었다. 3·1운동 이후 조선 청년의 의식을 사회주의 방향으로 바꾼 획기적인 집회로 손꼽히는 이 대회는, 코민테른과 연계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대표자를 파견했다. 김규열은 대표자 3명 가운데 하나였다. 대표 업무를 마친 뒤 공산대학 진학을 희망한 그는 다행히 입학 허가를 받았다. 공산대학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정치학, 유럽·동양 혁명사, 러시아공산당사, 세계노동조합운동사, 군사교육, 유물사관, 정치경제학, 레닌주의, 당조직론 등의 과목을 이수했다. 두터운 유교 고전학 소양에 더해 최첨단 사회주의 사상을 익힌 준비된 혁명가가 탄생했다.

귀국길에는 8살 연하의 젊은 아내 박아니시야가 동행했다. 연해주 동포 2세 출신인 아니시야는 공산대학에 함께 있던 학우이자 사상 동지였다. 사랑을 불태우던 두 젊은이는 혼인하기로 했고, 졸업 뒤 진로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둘은 두만강 하류 조선~중국~러시아 3국 접경지대를 몰래 넘었다. 연해주 연추에서 북간도 훈춘으로, 거기서 다시 함북 국경지대로 잠입해 들어왔다.1

김규열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회주의운동에 복귀했다. 당시 사회주의운동은 급격한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 두 차례 대규모 검거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집행부가 교체되고 있었다. 김재봉과 강달영이 이끌던 옛 집행부 구성원들은 투옥되거나 외국 망명길에 올랐고, 그를 계승한 김철수 집행부가 당의 면모를 새롭게 하던 때다. 새 집행부는 당외 사회주의 세력을 통합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에 호응해 당 밖의 사회주의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 구성원이 차례로 입당했다. 1차로 1926년 11월 140명이 입당했다. 이듬해 3월 2차로, 나머지 인사 100여 명이 조선공산당에 들어왔다. 이때 ‘서울파’인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이 해체됐고, 조선 사회주의운동 대통합이 실현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은밀히 회자되던 ‘통일공산당’이 출현했다.

1922~23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한 학생 명단 속의 김규열, 16번이다. 4번에 박아니시야도 보인다. 재학 중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 임경석 제공


반지하에 활동 범위 두고 필봉을 휘두르다


김규열은 이 흐름을 탔다. 자신을 파견했던 서울파 사람들과 보조를 같이해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활동 범위를 ‘반지하’ 상태에 두기로 결정했다. 반지하 상태란 합법 공개 영역의 사회운동단체에는 전혀 가입하지 않고 비밀 영역에서만 활동하되, 일상적인 경제·문화 영역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지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개 사회운동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는 필명 ‘김만규’를 내걸고 종횡무진 필봉을 휘둘렀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간신문과 저명한 진보 잡지 <조선지광>이 김규열의 문필 활동 무대였다. 그는 민족통일전선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기고문에서 민족통일전선단체 신간회 설립을 위해 조선의 모든 사상단체를 해체할 것을 주장했다. 신간회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전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라는 상설적인 합법 노동자정당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다. 1926년 하반기부터 1927년 상반기 조선공산당이 견지한 핵심 정책이었다. 김규열은 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날카로운 이론가였다.

아내 아니시야도 가만있지 않았다. 아니, 남편보다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박신우(朴信友)라는 조선식 이름으로 공개 사회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신우’는 러시아 이름 ‘아니시야’와 소리가 비슷해서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 무대는 근우회였다. 사회주의와 기독교계 여성이 주축으로, 여성계의 민족통일전선단체였다. 러시아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고등교육까지 이수한 박신우는 당시 조선 여성계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고학력 인텔리였다. 근우회 발기총회와 창립총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집행부로 선출됐다. 선전조직부 상무위원을 했다.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 맡는 직책이었다.

김규열에게 논적들이 생겼다. 그가 기고한 정치 논설에는 반론이 따라붙었다. 보기를 들면, 사상단체 해체를 주장한 그의 논설에 잡지 <이론투쟁> 1927년 4월호가 반론을 폈다. <이론투쟁>은 일본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펴내던 사회주의 매체다. 필명 좌목군(佐木君)을 쓰는 사람과 최익한(崔益翰)이라고 실명을 밝힌 두 논객이 김만규(김규열)의 견해를 공박했다. 이 중 최익한에게 눈길이 간다. 그는 김만규를 가리켜 ‘속학적 혼합형’의 절충주의라고 몰아세웠다. 논의 수준이 낮고 사상단체와 정당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흐릿한 견해라는 비판이었다. 한 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최익한은 1928년 1∼2월 일간신문에 기고한 연재 칼럼에서도 같은 비판을 되풀이했다.2

김규열과 최익한, 둘의 논쟁은 사적인 말다툼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진영의 내부 소용돌이를 반영했다. 당시 통일공산당 내에선 새로운 분열의 움직임이 있었다. 파벌 청산을 내세우는 신진 사회주의자들이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선공산당 내부에 만들었다. 당내 당이었다. 바윗덩이처럼 단단한 결속을 지향하는 비밀 혁명단체 내에선 허용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비밀단체는 영문 이니셜을 따서 ‘엘엘당’ 혹은 ‘엠엘당’으로 불렀다. 엠엘당은 당내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장했다. 구성원이 하나둘 당 중앙에 진출했다. 1927년 9월에는 기존 당 집행부를 해산하고 그들만으로 새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일종의 당내 쿠데타였다. 이 사건으로 통일공산당은 두 그룹, 엠엘당과 비엠엘당으로 분열됐다. 엠엘당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는 ‘서상파’라고 했다. 과거 서울파와 상하이파 공산그룹에 속했던 사람이 다수라는 뜻이었다.


김규열과 최익한, 친밀하면서도 이론적으론 대립


김규열과 최익한의 논쟁은 바로 조선공산당의 새로운 분열을 상징했다. 최익한은 엠엘당의 중요 인물이었다. 당의 분열을 야기한 9월 새 집행부의 한 사람이었다. 김규열은 엠엘당의 전횡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더 나아가 1927년 12월 서상파 사람들만으로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두 사람의 개인적 인연을 살펴보자. 둘은 1927년 시점에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이론가로서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사실은 친밀한 사이였다. 공통점도 많았다. 김규열이 나이로 7년 위였으나 그것이 둘의 우정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유교 지식인 출신의 사회주의자였다. 보기 드문 사례였다. 청소년기에 유교 고전학에 침잠한 경력을 공유했다. 전남 구례 출신인 김규열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김택주의 훈도 아래 전통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엄격한 성리학자였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농민군에 맞서 전통질서를 옹호하는 민보군을 조직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 3·1운동 때는 유학자 137명이 연서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3

김규열은 26살 되던 1915년, 아버지 지시를 받아 경남 거창군의 저명한 유학자 면우 곽종석 문하에 들어갔다.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김규열은 거기서 최익한을 처음 알게 됐다. 경북 울진 출신 최익한도 면우 문하에 들어온 젊은 유교 지식인이었다. 둘은 동문수학하는 사이였다.

그들은 교분이 두터웠다. 김규열은 1917년, 1919년 두 차례 최익한을 초청해 구례 화엄사를 유람하고 구례·남원 일대의 저명한 유학자 집을 함께 방문했다. 그뿐인가. 스승 곽종석이 파리장서 사건으로 체포돼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됐을 때도 행동을 같이했다. 대구감옥의 노스승을 수발하기 위해 대구 시내에서 함께 유숙했다. 스승이 감옥에서 병을 얻어 6월22일 출옥할 때까지 그랬던 것 같다.4

그해 여름, 두 사람은 함께 상경하기로 결심했다. 뒷날 작성한 경찰 신문기록에는 신학문을 연구하기 위해서라고 돼 있지만 목적은 다른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 다 그해 가을과 겨울에 경성에서 비밀결사에 가담한 것을 보면 말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경찰의 탄압을 받았다. 최익한은 독립군자금 모집 혐의로 체포돼,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옥중에 갇혔다. 김규열도 다르지 않았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겨울, 경성에서 비밀결사에 가담했음이 확인된다. 비밀결사는 임시정부 파견원과 은밀히 연계해, 불온 인쇄물을 제작·배포했다. 김규열은 그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받았다. 1919년 12월 체포돼, 1922년 3월 출옥했다.5

두 사람은 옥중 생활과 외국 유학을 거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점도 동일하다. 최익한은 도쿄 와세다대학을 통해, 김규열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통해 잘 준비된 혁명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일본 유학과 소련 유학의 차이는 둘의 이론적·정책적 입지에 편차를 가져왔다. 두터운 우정과 상호 이해가 있었음에도, 둘은 서로 다투는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이론적 대표자라는 상극의 자리에 서게 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오게페우 특별부 제1과장 전권대리 바산고프, ‘김규열 심문조서’ , 1933년 11월29일.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 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736쪽, 2019년.

2. 최익한, ‘사상단체해체론’ , <이론투쟁> 1927년 4월호, 32쪽(朴慶植 編, <朝鮮問題資料叢書> 第5卷, 東京, アジア問題硏究所, 1983). 최익한, ‘1927년 조선 사회운동의 빛(4)’ , <조선일보> 1928년 1월30일치.

3. 김봉곤, ‘호남 지역의 파리장서운동’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0, 24~30쪽, 2015년.

4. 송찬섭, ‘일제강점기 崔益翰(1897-?)의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활동’ , <역사학연구> 61, 2015년.

5. 경성복심법원, ‘판결, 大正9年刑控 제701호, 702호’ , 1920년 12월4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 1466~1469쪽, 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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