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박열 동지 김중한, ‘모욕적 죽음, 비극적 망각’

1927년 2월24일 경성에서 언론 인터뷰 때의 김중한(왼쪽).

1934년 1월9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정치보위부 심문을 받을 당시 초췌한 모습을 찍은 사진. 임경석 제공

 

스탈린 집정 시기 소련 국가폭력의 희생자 가운데 ‘유동식’이란 조선 사람이 있다. 일본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이주한 지 5년째 되는 망명자였다. 그는 1933년 5월14일 체포당해 1년간이나 엄중한 취조를 받았다. 그는 끝내 자유를 얻지 못했다. 유죄로 간주된 그에게 극형이 선고됐다. 그리하여 1934년 5월21일 결국 총살되고 말았다. 향년 33살이었다.

 

유동식의 혐의는 ‘일본 제국주의의 스파이’ 행위를 범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근거가 있는 것일까? 소련 오게페우(통합국가정치보위부) 심문관들은 유동식이 적성국가인 일본 영토를 빈번하게 왕래한 점을 문제 삼았다. 소련 정부나 코민테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 일본제국 영토의 일부분인 조선으로 오갔다는 것이다. 그뿐이랴.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들을 안내하여 불법 월경을 방조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조선·소련·중국 국경 지대에 직업을 구해 장기간 체재한 사실도 문제였다. 그는 국경에서 불과 25㎞ 떨어진, 연해주 포시예트 지구의 얀치헤라는 곳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는데, 그 행위는 스파이 활동의 편의를 얻기 위한 위장일 뿐이라고 의심을 샀다.

 

1923년 ‘박열 사건’ 공범인 아나키스트

 

단지 혼자만 혐의를 받은 게 아니었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 오랫동안 교제한 사람들도 속속 체포됐다. 그들도 유동식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스파이이거나, 스파이 활동에 편의를 제공했으리라는 의심을 받았다. 이처럼 자신은 물론이고 가까운 친지, 동료들까지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탄압 사건’의 발단이 됐던 그 사람, 유동식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의 본명이 밝혀졌다. 놀랍게도 김중한(金重漢)이었다. 세칭 ‘박열(朴烈)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된 아나키스트, 1923년 도쿄 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의 소용돌이 속에 천지를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일왕 암살 모의 사건의 연루자 김중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김중한은 일왕 암살을 음모한 박열로부터 폭탄 구매를 요청받고 그를 위해 노력했다는 혐의로, 일본 사법부의 재판을 받았다. ‘대역 범죄’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법관의 판단에 따라 ‘폭발물취체규칙 위반죄’로 분리 재판을 받은 그는, 사형 언도를 받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보다는 훨씬 가벼운 형을 받았다.

 

김중한의 주검이 묻힌 모스크바 서북쪽 교외 바간코보 묘지 정문. 임경석 제공.

 

출옥 뒤 사회주의 강연 연사로

 

1927년 2월5일 김중한이 출옥했다. 체포된 지 3년5개월 만이었다. 도쿄 서북부 외곽에 위치한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는 예기치 않은 위험에 노출됐다. 그의 동정이 신문지상에 널리 보도됐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 국수주의자들은 분노했다. ‘천황 폐하’의 신변을 위협한 흉악한 범죄자를 고작 몇 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내보내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현행 법률이 범죄자를 응징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고 호언했다. 긴장감이 흘렀다. 출옥 뒤 요코하마 지인 집에서 머물던 김중한도 이 소문을 접했다. 그를 살해하려고 자객을 밀파했다는 정보를 들은 그는 이틀 만에 서둘러 길을 나서야 했다. 귀국길에 올랐다.

 

경성에 도착해보니 분위기가 달랐다. 비록 일본의 식민지이긴 하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진 않았다. 언론 인터뷰 요청도 있었다. 조선어로 간행되는 신문사 두 곳의 기자들이 그가 머무는 시내 중심지 한 여관을 찾았다. 분위기는 우호적이었다. 보도 기사에 따르면 그는 검정 모직 양복을 입고 안경을 낀 모습이었고, 매우 이지적인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 오랜 철창생활을 겪은 뒤인데도 조금도 초췌한 빛이 없이 도리어 씩씩한 기운이 넘치는 태도였다고 한다.1

 

옥중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이 질문을 듣고서 그는 자신의 독서와 사유 체험에 관해서 얘기했다. 심리·윤리·문학·생물학 등에 관한 책을 즐겨 읽었는데, 특히 ‘원시 인류의 생활 상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아마 그때를 억압과 차별, 계급, 착취가 존재하지 않은 이상향의 시기로 상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에도 주목할 만하다. 인생의 본질, 해방, 삶의 가치, 자기 파멸, 비애, 전투 등의 어휘가 그의 내면의식을 구성하는 주요 개념이었다.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답했다. 인생이란 영원히 계속되는 해방을 위한 투쟁이되 승리를 기약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비애감에 굴복되지 않고 계속 전투해나가겠다고 말했다.2 이어서 “좀더 사색하고 좀더 연구하여, 이제부터는 좀더 가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끝맺었다.

 

평안남도 용강군 지운면 두륵리가 그의 고향이었다. 대동강 입구의 항구도시 진남포에 이웃한 비옥한 농촌지대였다. 자택에서의 정양 기간은 길지 않았다. 김중한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6개월 만에 신문 지면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진남포를 무대로 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진우청년회라는 청년단체가 그의 거점이었다. 이 청년단체는 마르크스 사후 41주년을 맞이해 사회주의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4명의 연사 가운데 김중한의 이름이 있었다. 수년 전 무정부주의를 수용했던 김중한이 아나키스트 진영을 떠나 마르크스주의 진영으로 몸을 옮기는 중이었다. ‘좀더 가치 있는 일’이란 곧 그에게는 사회주의운동을 뜻했던 것 같다. 뒷날 김중한이 직접 작성한 진술조서를 보면, “나는 이병화, 양명 등 그곳에 있던 조선공산당 엠엘파와 연결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3 출옥 이후 머지않아 김중한은 공산주의 비밀결사에 가담했다.

 

김중한은 합법 공개 영역의 대중운동에 헌신했다. 특히 청년운동 확장과 사회단체 연대 운동에 힘을 쏟았다. 보기를 들면 진남포 일원의 각종 청년단체를 결속해 진남포시 단일청년동맹 결성을 이끌었다. 또 재만동포옹호 동맹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것은 22개 사회단체를 결속한 연합 단체였다. 평안도 일대 사회운동단체들의 연대활동에도 뛰어들었다. 평남 안주에서 열린 관서민중운동자대회에 참석했고, 그 대회의 단상에 올라 축사를 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신간회 활동이었다. 1927년 12월 신간회 진남포 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간부의 반열에 올랐다. 정치연구부 총무간사가 그의 직함이었다. 지회를 이끌고 가는 4인 집행부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이다.

 

2년 동안 여섯 번이나 구금·가택수색

 

김중한의 활동 반경과 내용은 아나키스트들과는 달랐다. 아나키스트들은 민족통일전선 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적대시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김중한은 이때 옛 동료 아나키스트들과 절연했던 것 같다. 동향 출신의 아나키스트 최갑룡은 김중한이 관서민중운동자대회에 참석해 축사한 사실에 비애를 느꼈다고 회고했다.4

 

김중한은 신간회 중앙기관에도 진출했다. 1929년 6월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 진남포구 대표위원으로 참석했다. ‘복대표’란 소수의 참석 인원만으로도 전국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끔, 각 지회에서 선출된 대표 가운데서 다시 대표위원을 선발하는 제도였다. 복대표는 전국에 걸쳐 34명이었는데, 그중에는 허헌(경성구), 황상규(양산구), 이주연(단천구) 등과 같이 집행부를 담당하게 될 저명 인사가 포진해 있었다. 진남포구를 대표하는 김중한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일본 경찰에게는 김중한의 활발한 사회운동 행위가 눈엣가시였다. ‘대역사건’ 연루자가 근신하기는커녕 대중 선동에 열성을 보이다니, 가만둘 수 없었다. 사소한 꼬투리라도 있으면 서슴없이 검속·구금했다. 그 탓에 김중한은 체포와 훈방을 뻔질나게 되풀이해야만 했다. 낱낱이 꼽아보자.

 

1927년 8월 현지 관련 유력자와의 알력으로 인한 가택침입죄 사건으로 진남포경찰서에서 10일간 구금됐고, 그해 10월 관서민중운동자대회에서 불온한 내용의 축사를 했다는 혐의로 안주경찰서에서 6일간 구금당했으며, 1928년 5월에는 진남포경찰서의 갑작스러운 가택수색을 겪었고, 11월에는 신간회 지회 활동의 불온 혐의로 진남포경찰서에 9일간 구금당했다. 1929년 6월에는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 참가하던 중 경성종로경찰서에 며칠 구금됐고, 마지막으로 그해 8월 공산주의비밀결사 연루 혐의로 평양경찰서에 이틀간 구금당했다. 2년 남짓한 기간에 무려 6회에 걸쳐 태클을 당했다.

 

‘박열 사건 공범 김중한씨 탈출’, 그의 해외 탈출을 보도하는 1929년 9월9일치 신문기사의 제목이다. 진남포 사회운동의 맹장으로 고투 중이던 김중한이 최근에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기사였다. 밤낮으로 그를 감시하던 진남포를 비롯한 인근의 경찰서가 발칵 뒤집혔고, 그의 거취를 엄중하게 뒤쫓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기자는 국경을 넘은 김중한이 만주 길림 방면으로 사라졌는데, 독립운동단체 국민부에 가담한 것 같다는 추측 기사를 썼다.5

 

아직도 모스크바 묘지에 외로이

 

기자의 추측은 절반만 맞았다. 국경을 넘은 김중한이 길림 방면으로 잠입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국민부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뒷날 김중한이 작성한 진술조서에 따르면, 그곳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의 비밀 공산주의그룹에 가담했다. 이른바 ‘서상파’라고 부르는,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던 강력한 단체였다. 서상파에 가담한 계기는 그 지도자 윤자영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선사회주의운동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그의 식견과 삶에 대해 내면의 공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다시 말하면 28살부터 33살까지 김중한의 생애 마지막 삶은 망명지에서 이뤄졌다. 북간도와 연해주를 주된 근거지로 하여 피억압 민족의 해방과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해 노력했다. 파란이 중첩한 그 구체적인 행적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달리 추적할 필요가 있다.

 

김중한의 죽음은 이중의 의미에서 비극적이다. 인간의 해방을 위한 노력이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고 일본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이름으로 단죄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 하나는, 그 비틀림과 망각이 무려 85년이나 계속됐다는 점이다. 정의를 위한 헌신이 그처럼 오랫동안 잊힌 채 방치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역시 슬프다.

 

처형된 김중한의 주검은 모스크바 서북쪽 외곽지대에 있는 바간코보 묘지에 묻혔다. 청년 시절에 그가 꿈꿨던 언어로 표현하자면, 해방을 위한 전투를 쉼 없이 계속했으나 도중에 스러지고 만 외로운 영혼이 거기에 지금도 묻혀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박열 사건 공범 김중한씨 입경’, <조선일보> 1927. 2.25.

2. ‘박열 공범자 金重漢씨 입경’, <동아일보> 1927. 2.25.

3. 오게페우 특별부 제1과장 전권대리 바산고프, ‘유동식(김중한) 심문조서’, 1934. 1.13.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편)>, 독립기념관, 765쪽, 2019년.

4. 박환, <식민지시대 한인아나키즘운동사>, 선인, 317쪽, 2005년.

5. ‘박열 사건 공범 金重漢씨 탈주’, <동아일보> 1929. 9.9.

 

 

 

임경석의 역사극장

[역사극장] 종로 네거리가 좁았던 여성운동가 박신우

1927년 혜성처럼 등장한 근우회 책사이자 맹렬한 실행가, 갑자기 흔적 없이 사라져

 

 

1933년 11월28일 소련 국가정치보위부에 체포된 이튿날 찍은 박신우 사진. 표정에서 당혹감과 공포감이 느껴진다. 임경석 제공

 

박신우(朴新友)는 여성운동계에 혜성같이 나타났다. 1927년 초부터 사회주의 성향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에 출입하더니, 3월8일 국제여성의날을 기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국제무산부인데이’라고 불렀다. 이날을 기념해 여성동우회는 서울 종로2가 YMCA회관에서 대규모 강연회를 열기로 했는데, 여성운동계 유력자로 구성된 강사 명단 7명 속에 박신우도 포함돼 있었다. 그가 맡은 강연 제목은 ‘3월8일과 조선 여성’이었다.
 
조직 활동 계획 세우고 전국 돌며 강연회
 
박신우는 지방 강연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단지 여성 의식을 계몽할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여성단체 조직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지 <부녀세계>가 주관하는 지방 순회강연에도 선뜻 참가했다. 1927년 4월 창간한 <부녀세계>는 3·1운동 이후 발간된 <여자시론>(1920), <부인>(1922), <신여성>(1923), <부녀지광>(1924) 뒤를 잇는 대표 여성지였다. 잡지사는 창간호 발행을 기념해 남부조선 순회강연 사업을 벌였다. 4월17일 기자 2명이 출발하고 같은 달 23일에는 박신우를 포함해 후발대 4명이 경성을 떠났다. 순회 기일은 약 보름 예정이었고, 첫 강연지는 전북 이리(현재 익산)였다.1
 
박신우가 여성운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근우회 때부터였다. 그는 근우회 발기인 명단 40명에 이름을 올렸고, 그해 5월27일 창립총회에서는 집행위원 2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식민지 조선의 민족통일전선 기구이자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단체의 간부가 됐다. 창립 직후 처음 열린 집행위원회에선 7명으로 이뤄진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됐다. 핵심 간부가 된 것이다. 상무집행위원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매일 상근하는 집행위원이었다. 날마다 출근해 직업적으로 단체 일에 종사하는 직무이니만큼 업무도 많고 권한도 큰 자리였다.
 
박신우가 맡은 분야는 ‘선전·조직부’였다. 이 분야는 단체활동의 꽃이라 할 만큼 중요했다. 당시 사회주의 비밀결사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트로이카’라고 부르는 최소 인원 3명으로 집행부를 구성하곤 했는데, 이들의 직무는 으레 총무·선전·조직으로 나뉘었다. 그만큼 중책이었다. 박신우는 그 직무를 능히 감당했다. 취임 뒤 20일 만에 선전·조직 분야의 장단기 사업 계획안을 만들었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정보 보고서에 의하면, 6월15일치 근우회 집행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박신우는 10개 조목으로 구성된 조직 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여학생부’와 ‘노동부인부’ 두 기구를 만들어 지식계급과 노동계급의 여성들을 조직화하며, 조선 각지에 근우회 지부를 설치해 여성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쌓는다는 복안이었다. 조직 계획은 선전 계획과 밀접히 연결돼 있었다. 선전 계획을 들여다보면, 전국을 4개 권역으로 나눠 순회강연대를 파견한다, 각 권역의 요충지에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한 강좌를 3주간 개설한다, 연극단을 조직해 전국을 돌게 한다, 근우회 선언문과 선전 전단을 만들어 배포한다, 기관지 <근우>를 발행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2
 
1928년 초 남편 김규열과 소련 국경을 넘다
 
박신우가 작성한 선전·조직 사업 계획 초안은 하나하나 축조 심의 대상이 됐는데, 그 결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는 근우회의 책사였다. 사실상 근우회의 활동 계획 전반을 설계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런 비범한 안목과 수완을 어디서 익혔을까. 나이 서른 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여성이 말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기획력뿐이랴, 실행력도 출중했다. 박신우는 지방 강연을 위해 빈번한 출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근우회 결성 이후만 보더라도 평남 평양(6월6일), 경기 개성(6월27일), 경기 수원(8월8일), 전북 전주(8월24일), 경성 용산(8월26일), 전남 목포(12월3일), 전남 담양(12월23일)에서 여성 문제 강연회를 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년 내내 조선 전역을 누비고 다닌 셈이다. 신문에 아직 보도되지 않은 사례도 있었을 터이므로, 실제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이 노력은 그대로 조직 확대로 귀결됐다. 창립 첫해인 1927년에 근우회 지회가 설립된 지방은 4곳(전주·목포·담양·김천)인데, 이 중 3개 지회가 상무집행위원 박신우의 출장과 관련됐다. 지부 조직의 75%가 그의 활동 결과였다.
 
근우회 첫 1년은 활기찼다. 선전·조직부 동료이던 정칠성이 회고한 것처럼 “한참 당년, 근우회의 집행위원들의 멤버는 쟁쟁”했고, 종로 네거리를 좁다고 치고 다니는 그들로 인해 유쾌하고 씩씩한 기상이 넘치던 때였다.3 박신우는 그 활기찬 첫해의 선전·조직 담당 상무집행위원이었다. 근우회의 활력이 그의 헌신과 재능에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박신우의 신상 정보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박신우란 어떤 사람인가? 더욱이 그의 행적은 이듬해 1928년부터는 어떤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박신우의 동향은 뜻밖에 1929~30년 전국학생운동 사건에 연루된 함경북도 현지의 한 사회주의자 재판기록에서 발견된다. 그에 따르면, 1928년 1월 중순 매서운 추위가 몰아칠 때였다. 함경북도 최북단의 항구도시 웅기에 박신우가 나타났다. 남편 김규열과 함께 비밀리에 국경을 넘으려 애쓰고 있었다. 부부에게는 월경을 돕는 협력자들이 있었다. 두만강 하구 일대의 지리와 교통에 밝은 현지 비밀결사 동료들이 길안내를 맡았다. 그리하여 청진에서 웅기까지 배로 움직이고, 웅기에선 중국인이 경영하는 마차 한 대를 빌려서 얼어붙은 두만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소련 연해주로 월경하는 데 성공했다.4
 
박신우의 예기치 않은 월경은 남편과 관련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내부 사정 때문이었다. 1927년 12월10일 은밀히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김규열이 모스크바 파견 대표로 선출됐다. 소련을 근거지 삼아 코민테른과 관계를 맺고 조선·북간도와 통신 연락을 주관하는 것, 이것이 그에게 부과된 새 임무였다. 박신우·김규열 부부는 임무를 수행하는 데 적합한 경력과 재능이 있었다. 아내 박신우는 러시아 교민 2세 출신이었다. 박아니시야 다닐로브나, 이것이 그의 본명이었다. 그뿐인가. 두 사람은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동기생이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3년간 코민테른이 제공하는 고등교육 과정을 이수한 사회주의 엘리트였다. 러시아어 구사 능력도 높은 수준이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소양도 깊었다. 두 사람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근거지로 하여 조선공산당의 국외 부문 사업을 맡았다.
 
박신우·김규열 부부가 체포된 소련 모스크바 마르흘렙스키 거리 18동. 이 건물 한쪽에 그들의 거처가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밀류틴스키 소로’로 개칭됐다. 임경석 제공

 

소련 당국에 간첩 혐의 체포… 55년 뒤 복권
 
1933년 11월27일 모스크바 도심 동북쪽 마르흘렙스키 거리 18동 49호에 소련 국가정치보위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그곳에 사는 박신우·김규열 부부를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사유는 ‘일본 제국주의의 스파이 혐의’였다. 이튿날 찍은 36살 박신우의 초췌한 사진에는 중범죄자로 지목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한 당혹감과 공포감이 드러나 있다.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연루자가 더 있었다. 사건 번호 ‘P-37359’에 연루된 사람들로는 윤자영, 김영만, 김중한 등도 있었다. 누구 할 것 없이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간부이거나 열성 활동가였다. 1927년 말 당이 분열된 뒤 서상파로 지목된 사람들로, 일본의 탄압을 피해 소련에 망명한 사회주의자였다. 연루자가 더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체포된 이는 1933년 5월14일 김중한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6개월 먼저 구금돼 오랫동안 취조를 받았다. 다른 연루자들의 체포 일시는 거의 같았다. 박신우·김규열 부부는 11월27일, 윤자영과 김영만은 그다음 날이었다.
 
정치보위부 취조관들은 김중한이 스파이임이 틀림없고 그와 친교를 맺은 모든 조선인 망명자도 그렇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증거는 진술뿐이었다. 김규열의 심문기록을 보면, 그에게 들씌워진 혐의는 이미 밀정으로 판명됐다고 간주하는 김중한과 연락을 주고받은 점, 코민테른의 지휘나 승인 없이 조선과 만주로 사람을 파견하거나 직접 왕래한 점 등이었다. 소련 비밀경찰의 안목으로 보면 코민테른의 지도도 받지 않은 채 일본 영토와 세력권으로 왕래하거나 통신을 주고받은 행위는 스파이 행위나 다름없었다.
 
No.P-37359 사건은 바로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망명자그룹 탄압 사건’이었다. 소련 정치보위부는 피억압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혁명가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낙인을 찍었다. 그로부터 다시 6개월 뒤 사건 관련자 가운데 김규열, 김영만, 김중한에게 총살형이 집행됐다. 1934년 5월21일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한두 등급 아래 처분을 받았다. 윤자영은 노동수용소 8년 징역형, 박신우는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5
 
너무 뒤늦게 찾아온 정의
 
노동수용소 이후 박신우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관심 갖고 주시한다면 언젠가 드러날 것이다. 이 탄압 사건의 피해자들은 뒷날 소련의 국운이 저물어가던 1989년에야 비로소 소련 정부로부터 복권됐다. 55년이 지난 뒤였다. 너무나 뒤늦게 찾아온 정의였다. 그것을 정의라고 부를 수 있 을까.

범죄의 낙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기나긴 망각의 세월이 지금도 계속된다는 점이다. 박신우·김규열 부부를 비롯해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탄압 사건 희생자들은 조선혁명에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그 무명의 헌신을 계속 잊고 살아도 좋은 것인가.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婦女世界 巡廻隊 강연>, <조선일보> 1927년 4월25일치.2. 경성 종로경찰서장, ‘근우회 집행위원회의 건’, 1927년 6월17일. ‘사상 문제에 관한 조사자료’ 2,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3. 장원아, ‘근우회와 조선여성해방통일전선’, <역사문제연구> 42, 392쪽, 2019년.
4. 조선총독부 도순사 細上玖市, ‘金河龍 신문조서’, 1930년 7월2일.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0 (동맹휴교사건 재판기록 2), 2002년.
5.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48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715쪽, 734쪽, 740쪽, 745쪽, 764쪽, 2019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공자와 레닌을 사랑한 조선청년 김규열

조선공산당 분열 상징하는 사상논쟁을 최익한과 벌이다


1933년 소련 정치보위부 경찰에게 체포된 뒤 찍은 김규열 사진. 초췌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임경석 제공


외국 유학을 마친 김규열(金圭烈)은 국내로 돌아왔다. 1926년 가을 무렵이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3년간의 정규 교육과정을 졸업한 뒤였다. 고국을 떠난 지 3년6개월 만이었다. 1890년생이므로 귀국할 때 조선 나이로 37살이었다. 어느덧 청년기가 저물고 있었다.

전조선청년당대회 대표로 모스크바 유학


모스크바 유학은 1923년 3월 열린 전조선청년당대회 덕분이었다. 3·1운동 이후 조선 청년의 의식을 사회주의 방향으로 바꾼 획기적인 집회로 손꼽히는 이 대회는, 코민테른과 연계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대표자를 파견했다. 김규열은 대표자 3명 가운데 하나였다. 대표 업무를 마친 뒤 공산대학 진학을 희망한 그는 다행히 입학 허가를 받았다. 공산대학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정치학, 유럽·동양 혁명사, 러시아공산당사, 세계노동조합운동사, 군사교육, 유물사관, 정치경제학, 레닌주의, 당조직론 등의 과목을 이수했다. 두터운 유교 고전학 소양에 더해 최첨단 사회주의 사상을 익힌 준비된 혁명가가 탄생했다.

귀국길에는 8살 연하의 젊은 아내 박아니시야가 동행했다. 연해주 동포 2세 출신인 아니시야는 공산대학에 함께 있던 학우이자 사상 동지였다. 사랑을 불태우던 두 젊은이는 혼인하기로 했고, 졸업 뒤 진로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둘은 두만강 하류 조선~중국~러시아 3국 접경지대를 몰래 넘었다. 연해주 연추에서 북간도 훈춘으로, 거기서 다시 함북 국경지대로 잠입해 들어왔다.1

김규열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회주의운동에 복귀했다. 당시 사회주의운동은 급격한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 두 차례 대규모 검거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집행부가 교체되고 있었다. 김재봉과 강달영이 이끌던 옛 집행부 구성원들은 투옥되거나 외국 망명길에 올랐고, 그를 계승한 김철수 집행부가 당의 면모를 새롭게 하던 때다. 새 집행부는 당외 사회주의 세력을 통합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에 호응해 당 밖의 사회주의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 구성원이 차례로 입당했다. 1차로 1926년 11월 140명이 입당했다. 이듬해 3월 2차로, 나머지 인사 100여 명이 조선공산당에 들어왔다. 이때 ‘서울파’인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이 해체됐고, 조선 사회주의운동 대통합이 실현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은밀히 회자되던 ‘통일공산당’이 출현했다.

1922~23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한 학생 명단 속의 김규열, 16번이다. 4번에 박아니시야도 보인다. 재학 중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 임경석 제공


반지하에 활동 범위 두고 필봉을 휘두르다


김규열은 이 흐름을 탔다. 자신을 파견했던 서울파 사람들과 보조를 같이해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활동 범위를 ‘반지하’ 상태에 두기로 결정했다. 반지하 상태란 합법 공개 영역의 사회운동단체에는 전혀 가입하지 않고 비밀 영역에서만 활동하되, 일상적인 경제·문화 영역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지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개 사회운동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는 필명 ‘김만규’를 내걸고 종횡무진 필봉을 휘둘렀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간신문과 저명한 진보 잡지 <조선지광>이 김규열의 문필 활동 무대였다. 그는 민족통일전선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기고문에서 민족통일전선단체 신간회 설립을 위해 조선의 모든 사상단체를 해체할 것을 주장했다. 신간회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전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라는 상설적인 합법 노동자정당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다. 1926년 하반기부터 1927년 상반기 조선공산당이 견지한 핵심 정책이었다. 김규열은 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날카로운 이론가였다.

아내 아니시야도 가만있지 않았다. 아니, 남편보다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박신우(朴信友)라는 조선식 이름으로 공개 사회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신우’는 러시아 이름 ‘아니시야’와 소리가 비슷해서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 무대는 근우회였다. 사회주의와 기독교계 여성이 주축으로, 여성계의 민족통일전선단체였다. 러시아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고등교육까지 이수한 박신우는 당시 조선 여성계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고학력 인텔리였다. 근우회 발기총회와 창립총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집행부로 선출됐다. 선전조직부 상무위원을 했다.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 맡는 직책이었다.

김규열에게 논적들이 생겼다. 그가 기고한 정치 논설에는 반론이 따라붙었다. 보기를 들면, 사상단체 해체를 주장한 그의 논설에 잡지 <이론투쟁> 1927년 4월호가 반론을 폈다. <이론투쟁>은 일본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펴내던 사회주의 매체다. 필명 좌목군(佐木君)을 쓰는 사람과 최익한(崔益翰)이라고 실명을 밝힌 두 논객이 김만규(김규열)의 견해를 공박했다. 이 중 최익한에게 눈길이 간다. 그는 김만규를 가리켜 ‘속학적 혼합형’의 절충주의라고 몰아세웠다. 논의 수준이 낮고 사상단체와 정당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흐릿한 견해라는 비판이었다. 한 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최익한은 1928년 1∼2월 일간신문에 기고한 연재 칼럼에서도 같은 비판을 되풀이했다.2

김규열과 최익한, 둘의 논쟁은 사적인 말다툼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진영의 내부 소용돌이를 반영했다. 당시 통일공산당 내에선 새로운 분열의 움직임이 있었다. 파벌 청산을 내세우는 신진 사회주의자들이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선공산당 내부에 만들었다. 당내 당이었다. 바윗덩이처럼 단단한 결속을 지향하는 비밀 혁명단체 내에선 허용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비밀단체는 영문 이니셜을 따서 ‘엘엘당’ 혹은 ‘엠엘당’으로 불렀다. 엠엘당은 당내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장했다. 구성원이 하나둘 당 중앙에 진출했다. 1927년 9월에는 기존 당 집행부를 해산하고 그들만으로 새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일종의 당내 쿠데타였다. 이 사건으로 통일공산당은 두 그룹, 엠엘당과 비엠엘당으로 분열됐다. 엠엘당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는 ‘서상파’라고 했다. 과거 서울파와 상하이파 공산그룹에 속했던 사람이 다수라는 뜻이었다.


김규열과 최익한, 친밀하면서도 이론적으론 대립


김규열과 최익한의 논쟁은 바로 조선공산당의 새로운 분열을 상징했다. 최익한은 엠엘당의 중요 인물이었다. 당의 분열을 야기한 9월 새 집행부의 한 사람이었다. 김규열은 엠엘당의 전횡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더 나아가 1927년 12월 서상파 사람들만으로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두 사람의 개인적 인연을 살펴보자. 둘은 1927년 시점에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이론가로서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사실은 친밀한 사이였다. 공통점도 많았다. 김규열이 나이로 7년 위였으나 그것이 둘의 우정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유교 지식인 출신의 사회주의자였다. 보기 드문 사례였다. 청소년기에 유교 고전학에 침잠한 경력을 공유했다. 전남 구례 출신인 김규열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김택주의 훈도 아래 전통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엄격한 성리학자였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농민군에 맞서 전통질서를 옹호하는 민보군을 조직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 3·1운동 때는 유학자 137명이 연서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3

김규열은 26살 되던 1915년, 아버지 지시를 받아 경남 거창군의 저명한 유학자 면우 곽종석 문하에 들어갔다.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김규열은 거기서 최익한을 처음 알게 됐다. 경북 울진 출신 최익한도 면우 문하에 들어온 젊은 유교 지식인이었다. 둘은 동문수학하는 사이였다.

그들은 교분이 두터웠다. 김규열은 1917년, 1919년 두 차례 최익한을 초청해 구례 화엄사를 유람하고 구례·남원 일대의 저명한 유학자 집을 함께 방문했다. 그뿐인가. 스승 곽종석이 파리장서 사건으로 체포돼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됐을 때도 행동을 같이했다. 대구감옥의 노스승을 수발하기 위해 대구 시내에서 함께 유숙했다. 스승이 감옥에서 병을 얻어 6월22일 출옥할 때까지 그랬던 것 같다.4

그해 여름, 두 사람은 함께 상경하기로 결심했다. 뒷날 작성한 경찰 신문기록에는 신학문을 연구하기 위해서라고 돼 있지만 목적은 다른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 다 그해 가을과 겨울에 경성에서 비밀결사에 가담한 것을 보면 말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경찰의 탄압을 받았다. 최익한은 독립군자금 모집 혐의로 체포돼,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옥중에 갇혔다. 김규열도 다르지 않았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겨울, 경성에서 비밀결사에 가담했음이 확인된다. 비밀결사는 임시정부 파견원과 은밀히 연계해, 불온 인쇄물을 제작·배포했다. 김규열은 그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받았다. 1919년 12월 체포돼, 1922년 3월 출옥했다.5

두 사람은 옥중 생활과 외국 유학을 거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점도 동일하다. 최익한은 도쿄 와세다대학을 통해, 김규열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통해 잘 준비된 혁명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일본 유학과 소련 유학의 차이는 둘의 이론적·정책적 입지에 편차를 가져왔다. 두터운 우정과 상호 이해가 있었음에도, 둘은 서로 다투는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이론적 대표자라는 상극의 자리에 서게 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오게페우 특별부 제1과장 전권대리 바산고프, ‘김규열 심문조서’ , 1933년 11월29일.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 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736쪽, 2019년.

2. 최익한, ‘사상단체해체론’ , <이론투쟁> 1927년 4월호, 32쪽(朴慶植 編, <朝鮮問題資料叢書> 第5卷, 東京, アジア問題硏究所, 1983). 최익한, ‘1927년 조선 사회운동의 빛(4)’ , <조선일보> 1928년 1월30일치.

3. 김봉곤, ‘호남 지역의 파리장서운동’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0, 24~30쪽, 2015년.

4. 송찬섭, ‘일제강점기 崔益翰(1897-?)의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활동’ , <역사학연구> 61, 2015년.

5. 경성복심법원, ‘판결, 大正9年刑控 제701호, 702호’ , 1920년 12월4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 1466~1469쪽, 1977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일제 경찰이 발견한 ‘암호 일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이 목숨 걸고 쓴 기록 ‘비서부일기’



(왼쪽부터) 평상시 강달영. 옥중의 강달영. 일본 관헌이 해독한 ‘비서부일기’ 1926년 3월17일자 기록. 임경석 제공

강달영(40)은 수요일이 되어서야 느지막이 신문사에 출근했다. 1926년 3월17일이었다. 오전 10시, 출근 시간으로는 좀 지난 때였다. 수표정 43번지, 오늘날 서울 청계2가 교차로에서 3가 방향으로 남쪽 천변에 있는 조선일보사 건물에 들어섰다. 그는 조선일보사 영업국 촉탁으로 일했다. 촉탁이란 정식 사원이 아니라 일정 기간 임시로 업무를 맡는 직책이었다.

왜 무단결근했을까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연이틀이나 결근한 뒤였다. 촉탁이라 해도 근무 규율과 내용은 정식 사원과 별 차이가 없었다. 거듭된 결근은 이채로운 일이었다. 왜 무단결근했습니까? 혹여 누가 물었다면, 적당히 둘러대야 했을 것이다. 감기 몸살에 걸렸다거나, 긴급한 가정사가 있었노라고 변명했으리라. 실은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는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다. 경찰에 체포된 전임자 김재봉 뒤를 이어 1925년 12월 하순부터 그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너무 바빠서 지난 이틀 동안 도저히 직장에 나올 수 없었다.

신문사 영업국 촉탁 직책은 경성 생활을 가능케 해주는 합법적인 신분이었다. 경찰의 의심을 사지 않고서 경성 시내를 활보하거나 지방을 오가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직업이었다. 불과 4개월 전만 해도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선일보 지국장 일을 하던 그가 어떻게 이런 직장을 얻었을까. 아마도 신문사 간부사원인 공산당원 홍덕유(45)가 힘썼을 것이다. 그는 조선일보사 지방부장이었다. 각 지방에 설립된 지국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기사와 자금의 출납, 신문지 배급 등의 업무를 관리하는 책임자였다. 지방도시에 거주하던 신임 책임비서의 경성 체류 명분을 만드는 일은 그에겐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출근도 못할 지경이었을까? 일반적으로 비밀결사의 수뇌가 무슨 일에 종사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강달영 책임비서는 달랐다. 그는 국제당(코민테른) 연락과 후임자 업무 인계를 위해 기록을 남겼다. 암호로 쓰인 ‘비서부일기’가 그것이다.1

3월12일부터 5월14일까지 약 두 달 동안의 책임비서 활동상을 적었다. 강달영은 독자적인 암호 시스템을 고안했다. 자신만이 해독할 수 있는 비밀 알고리즘이었다. 만일 불행한 사태를 당해 발각된다면 목숨을 걸고서 지킬 결심이었다. 자기 하나 입 다물면 천하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기록이었다.

책임비서가 몰입했던 업무 가운데 하나는 국제당과 교신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식민지 수도 경성 한복판에서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당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쉽사리 수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신의주를 통해 국경을 넘어서 외국으로 보냈을까. 아니면 함경북도 너머 블라디보스토크로 밀사를 보냈을까. 둘 다 아니었다. 강달영은 그보다 훨씬 더 손쉬운 통로를 갖고 있었다. 바로 경성에 있는 소련총영사관이었다. 재경성 소련총영사관은 1925년 9월 개관했다. 그해 2월25일 비준된 소련-일본 기본조약에 따라 합법적으로 설립된 외교기관이었다. 경성 하늘에 적기를 휘날리는 이 기관의 위험성에 일본 경찰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총영사관 주변에 삼엄한 감시망을 펼쳐놓았다. 그 때문인지 감시를 두려워해 그곳에 공공연히 출입하는 사람은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고 경찰 기록에 쓰여 있다.2


출근날 새벽까지 극비 문서 옮기는 데 매달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감시망을 뚫는 데 성공했다. 경성 주재 총영사관의 정보 담당자 ‘윌리’가 모스크바의 외무성과 국제공산당 앞으로 보낸 첫 번째 정보 보고서는 1925년 9월19일자로 작성됐다. 거기에는 조선공산당 중앙과 접선한 결과가 기재돼 있다.3

김재봉 책임비서 시절에 이미 총영사관 쪽과 비밀 접촉 경로를 열었다. 강달영은 전임자에게서 그 접촉 시스템을 넘겨받았을 것이다. 책임비서가 직접 움직이지는 않았다. 접촉 실무자는 박민영(25)이었다. ‘박 니키포르 알렉산드로비치’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가진 그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신진 활동가였다.

느지막이 신문사에 출근한 바로 그날, 책임비서는 박민영을 만났다. 근 일주일째 그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다. 접촉이 쉽지 않았던 까닭은 박민영이 국내에 잠입한 지 얼마 안 돼 비밀활동 거점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책임비서는 열네 종류의 문서를 건넸다. 지난 며칠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작성한 극비 문서였다. 국제당의 조선담당관들만이 읽어야 할 문서였다. 당 현황과 간부진 변동, 상하이·만주·연해주 등 국외에 설치한 당 기관의 활동, 합법 공개 영역의 사상단체와 대중운동 정책에 관한 것이 포함됐다. ‘예산안’과 ‘예산안 설명서’도 있었다. 어느 문서에나 맨 끝에는 날짜를 적고 서명을 남겼다. 1926년 3월17일자였다. 출근하던 날 첫새벽까지 이 일에 매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날 오후 강달영은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화요회란 합법 공개 영역의 사상단체 이름이고, 프락치야란 그 내부에 설치한 당원 조직을 가리켰다. 당 규약에 따르면, 합법 공개 단체에 3명 이상 당원이 있을 때 그 내부에 프락치야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며, 그 임무는 당의 정책과 영향력을 대중에게 실현하는 것이었다.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를 서둘러 소집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바로 네 개 합법단체(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를 통합해 하나의 단체로 개편하는 과제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3월5일자 당 중앙집행위원회 석상에서 결정한 사안이었다.4

화요회는 가장 영향력이 큰 합법 단체였으므로, 그 속에는 두 개의 야체이카(세포)가 설치돼 있었다. 야체이카란 당의 ‘기본회’였다. 산업 현장을 중심으로 한 장소에 3명 이상 당원이 있을 때 조직했다. 구성원은 3~7명을 두도록 했고 그 이상 당원이 있을 때는 제2, 제3의 기본회를 조직하게 했다.


쉼 없이 열린 중앙집행위 회의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에는 그 내부에 있는 두 야체이카 구성원이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워낙 긴급히 소집된 탓에 성원이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 6명밖에 출석하지 않아서 개회할 수 없었다. 참가자들은 프락치야 회의를 다음날로 연기하고, 차후에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회의를 유력 분자의 집합으로 간단히 줄인다는 건의안을 상급 기구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강달영이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에 직접 참석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사안을 그날 저녁에 열린 당중앙 비서부 모임에서 비서부 차석인 이준태(35)에게서 보고받았다. 비서부는 당중앙 직속 핵심 부서로서 자신이 직접 이끌고 있었다. 이 회의가 하루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집행부를 체계화하고 효과적으로 가동하는 일은 강달영의 핵심 관심사였다. 책임비서직을 승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기에 그로서는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과제였다. 당의 최고 집행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를 굳건히 세우는 것이 선차적이었다. 중앙집행위원 정원은 7명이었다. 강달영은 그들을 결속해 그해 2월부터 3월 초까지 7회에 걸쳐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제3∼5회 회의는 2월26일부터 사흘간 날마다 쉼 없이 계속 열렸다.

중앙집행위원회 내부에 상설집행기구를 가동하는 것도 중요했다. 비서부·조직부·선전부 3개 부서를 두었으며, 비서부는 자신이 직접 이끌었다. 이날 비서부 회의에선 화요회 프락치야의 건의를 임시로 받아들이되, 최종 결정은 중앙 조직부에서 하도록 위임했다. 이어서 민족통일전선 결성 문제도 협의했다. 충분히 논의했지만 결정은 미뤘다. 당대회에서 결정할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1년에 1회씩 열기로 약속한 당대회 개최를 준비하는 것도 강달영 중앙이 해결해야 할 현안이었다. 당대회는 5월 중순 경복궁에서 떠들썩하게 열릴 조선박람회를 이용할 예정이었다. 당대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회 의안을 짜며, 대의원을 선출하는 등의 일정이 앞에 놓여 있었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당중앙 비서부 회의는 밤 12시에 폐회됐다. 강달영의 길었던 하루는 이렇게 저물어갔다.


쓸쓸한 마감


우리가 강달영의 어느 날 동선을 이처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비서부일기’ 덕분이다. 뒷날 불행히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을 때 그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암호 기록을 자신만이 해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문경관 요시노 도조 경부보는 “뼈가 돌이 되어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아니하겠다”는 결심이 그의 몸에서 풍겼다고 회고했다. 결국 강달영은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감시의 눈을 피해 자살을 시도했다. 머리를 힘껏 철제 책상에 부딪쳤다.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 주도면밀한 감시 때문에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는 그 시도를 몇 차례 되풀이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암호 해독 기술이 그의 알고리즘을 뚫었을 때,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키겠다는 그의 결심은 무너져내렸다. 강달영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미쳐버렸다. 정신이상자가 되고 말았다. 옥중에 있을 때도 그랬고, 출옥 뒤에도 회복하지 못했다.

그렇게 쓸쓸히 지내다가 1940년 7월12일, 향년 54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진주 3·1운동의 유공자, 조선 노동운동의 지도자, 인생을 기울여 헌신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혁명가, 그의 명복을 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비서부일기’, 1926년 3월12일~5월14일,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 제1집,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1932년.

2. 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の治安狀況(昭和2年版)>, 不二出版, 1984(復刻板).

3. Билль(윌리), Дорогие товарищи(경애하는 여러 동무들),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06 л.19-24, 1925년 9월19일.

4.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회록(제6회)’, 1926년 3월5일,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 제1집,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7쪽, 1932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사진 한장 안남은 조선 사회주의운동사 지도자

조선공산당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안광천은 혁명가인가 배신자인가


조선공산당의 역대 책임비서. (왼쪽부터)초대 김재봉, 제2대 강달영, 제3대 김철수와 제4대 안광천의 펜글씨 필적. 고등교육을 이수한 지식인답게 세련된 필치를 보인다. 그의 인물 사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임경석 제공

안광천(安光泉)은 비밀결사의 최고 지도자였다. 일제강점기의 가장 강력한 항일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다. 1926년 12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재임 기간이 10개월인 점이 눈에 띈다. 짧아 보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고등경찰과 밀정의 삼엄한 감시망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하단체의 수뇌로서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선임자들의 재임 기간에 비하면 오히려 긴 편이었다.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은 8개월, 제2대 책임비서 강달영은 5개월, 제3대 책임비서 김철수는 5개월간 재임했다.

제4대 안광천 책임비서의 당내 입지는 강력하고 안정돼 있었다. 당권 승계 과정이 적법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내 최고 의결기구에서 선출됐다. 1926년 12월6일 경성에서 비밀리에 열린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서 그의 책임비서 취임이 결정됐다. 창당대회에서 선출된 제1대 김재봉 책임비서에 뒤이어 두 번째였다. 제2대, 제3대는 달랐다. 그들은 일제 탄압으로 책임비서 자리가 비게 된 급박한 조건에서 보선(補選)으로 취임했다. 보선이란 당규약에 명시된 중앙위원회의 권한으로서, 중앙위원 가운데 결원이 생겼을 때 당대회 결정을 거치지 않고 자체 결의로 후임자를 충원하는 제도였다. 강달영과 김철수는 선임자가 경찰에 체포된 뒤 잔존 중앙위원들의 합의에 따라 책임비서에 올랐다. 그에 비하면 안광천의 취임 과정은 훨씬 더 적법할 뿐만 아니라 당당했다.


사회주의 진영의 통합을 이루다


안광천은 문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항일 비밀결사의 요직에 오르기 전부터 언론 지면에 그의 이름이 빈번히 오르내렸다. 일본에 유학 중일 때는 물론이고 국내에 귀국한 이후에도 신문과 잡지 지면에 곧잘 그의 글이 실렸다.

그는 이름 높은 논객이었다. 기고 활동을 통해 사회운동의 진로와 정책에 관해 다채로운 담론을 생산해냈다. 그의 문필 능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보기를 들어 조선어 종합잡지 <동광>의 흥미로운 한 앙케트 기사를 보자. 잡지사는 경성에서 간행되던 4대 조선어 신문사(<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보>)의 언론인 44명에게 물었다. 여러 신문을 통폐합해 단일한 거대 신문사를 세운다고 가정하면, 과연 어떤 인물들이 그 신문사를 이끌어가는 적임자가 될 것인가? 놀랍게도 안광천이 편집국장 직위에 올랐다. 다수의 언론인이 안광천을 가리켜 거대 통합 신문사의 지면 배치와 논조를 좌우하는 넘버 3위의 요직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꼽았다.1

정연한 이론 능력과 뛰어난 문장이 그를 공산당 책임비서 물망에 오르게 한 요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안광천은 신진 세대의 대표자로 간주됐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서울파와 화요파 사이에 전개됐던 이전 시기 사회주의운동 내부 대립에서 자유로운 위치에 서 있었다. 새로운 간부 인선에는 전임 책임비서 김철수의 의중이 실려 있었다. 김철수는 당대회를 열기에 앞서 옛 중앙위원들과 함께 신임 중앙위원회 윤곽을 미리 협의했다.2


특히 책임비서 인선이 중요했다. 김철수의 판단에 따르면, 안광천은 재능이 뛰어난데다 분파투쟁에 가담한 경력이 없으므로 각파를 망라한 통일된 공산당을 이끌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제 안광천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책임비서 취임 이후 조직, 대중, 정책 각 영역에서 눈에 띄는 약진이 있었다. 첫째, 양분된 국내 사회주의 진영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전임 김철수 책임비서 시기인 1926년 11월 당외 서울파 공산그룹의 구성원 140명이 입당한 데 뒤이어, 안광천 취임 이후인 1927년 3월 나머지 서울파 구성원 100여 명이 최종적으로 공산당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던 두 공산그룹 화요파와 서울파가 조선공산당 이름 아래 통합하게 됐다. 대단결을 바라는 사회주의자들의 숙원이 해결된 셈이었다.


당 사조직에 가담


둘째, 합법 공개 영역의 대중운동에 대한 장악력이 급격히 높아졌다. 보기를 들면 1927년 5월 전국 923개 가맹단체를 망라하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가 열렸을 때 그 진로를 안광천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의사대로 좌우할 수 있었다. 공산당 집행부는 그 협의회 설립을 저지하기로 결정했고, 대회 석상에서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정책을 관철할 수 있었다.

셋째, 민족통일전선 기관인 신간회가 설립된 것도 안광천 책임비서 재임 시기의 업적이다. 1927년 2월 신간회와 민흥회 두 갈래로 나뉘어 추진된 민족통일전선 설립 운동이 결국 신간회라는 이름 아래 단일화될 수 있었던 것도 비합법 영역의 사회주의운동이 통합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안광천의 공로이자 통일된 조선공산당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립물로 전화하지 않는 사물은 없는가보다. 달도 차면 기운다. 1927년 9월 즈음, 안광천의 리더십이 위기에 빠졌다. 위기의 진원지는 둘이었다. 하나는 당내 조직 문제고, 다른 하나는 정책 문제였다. 조직 문제란 공산당 내부에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이라는 비밀단체가 은밀히 만들어져 1년 이상 암약해왔음이 동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사건을 말한다. 일부 간부가 ‘당 중 당’을 만든 것이다. 이 단체는 ‘엘(L)단’ ‘엘엘(LL)단’ ‘엠엘(ML)단’ ‘엠엘당’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당원들 사이에 쉬쉬하면서 널리 회자됐다.

당 중 당을 몰래 만드는 것은 당의 규범에 반하는 범죄행위였다. 바윗덩이같이 강고한 단결을 지향하는 전위당 조직론에 배치되는 행위였다. 이전에도 분파투쟁은 있었지만 그것은 조직체를 달리하는 공산그룹 사이의 분쟁이었다. 당 내부에 은밀히 분파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충격적인 것은 책임비서 안광천이 그 일원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당원이 책임비서가 당의 규범을 해치고 사조직을 운용했음을 알게 됐다. 책임비서가 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내 비밀분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당원들은 배신과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안광천 등 중앙위원 연서명. 임경석 제공


‘친일파·자치파’와 협동 사업 주창

정책 문제도 리더십 위기를 낳은 또 하나의 진원이었다. 당내에서만이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그의 명성이 실추되는 사건이 터졌다. 영남친목회 사건이다. 영남친목회란 경성에 거주하는 경상남북도 출신자들의 친목단체였다. 이 단체가 창립된 1927년 9월 즈음에는 동향 출신자들의 친목단체가 경성에 여럿 존재했다. 호남 출신자들의 친목단체인 호남동우회, 서북 5도 출신자들이 결성한 오성구락부, 일부 영남 출신자들이 따로 만든 상우회 등이 있었다. 지방에서 태어나 경성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출신지 동일성을 식별 기준으로 하여 이 단체들을 조직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인간집단이 참여했다. 출신지가 같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입회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관리, 부유한 지주와 상공업자도 있고 노동운동 참가자와 사회주의 문필가도 포함돼 있었다.

문제는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안광천이 영남친목회에 가담했다는 사실이었다. 단지 참여만 했을 뿐 아니라 깊숙이 주도적으로 개입했음이 드러났다. 그는 단체 설립의 이유와 논리를 적은 ‘영남친목회 취지서’를 작성했다.3

그 단체의 이론가 역할을 자담한 것이다. 취지서에는 눈길을 끄는 곳이 있었다. “용기를 고취하여 전 민족적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 분투”하겠노라고 천명했다. ‘전 민족적 사업’이란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을 뜻할 수도 있고, 일본제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자치제를 실시하거나, 제국의회나 지방의회의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끔 참정권을 획득하자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총독부 관료, 대지주들과 같이하는 ‘전 민족적 사업’이란 적어도 조선 독립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향 각지에서 영남친목회 반대운동이 터져나왔다. ‘영남친목회반대책강구회’라는 단체가 결성되고, ‘영남친목회 반대 성명서’가 발표됐다. 머지않아 운동의 외연이 확장됐다. 단지 영남친목회 한 단체만이 아니라 그와 성격을 같이하는 모든 지방열단체를 반대하는 사회적 캠페인으로 확장됐다. 그것을 ‘지방열단체 반대운동’이라고 불렀다. 지방열단체는 ‘반동단체’로, 그에 참여한 사회운동자들은 ‘반동분자’로 간주됐다. 반대운동은 광범한 호응을 받았다. 전국 규모의 3대 대중단체로 촉망받던 노총(조선노동총동맹), 농총(조선농민총동맹), 청총(조선청년총동맹)이 지방열단체를 반대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그뿐인가. 전 조선의 ‘민족유일당’으로 존중받는 신간회도 지방열단체 배척을 결의했다. 막중한 무게를 갖는 결정이었다. 여론의 향배는 이미 결정된 거나 진배없었다.

조선공산당 내부 동향도 심각했다. 안광천의 책임을 묻는 당내 흐름이 나타났다. 책임비서가 ‘친일파·자치파’와 협동 사업을 주창하는 것은 심각한 과오였다. 누가 혁명의 적이고 누가 벗인지를 가르는, 혁명운동의 근본 문제를 혼란하게 하는 행위였다. 안광천을 책임비서 직책에서 면직시킴과 아울러 당에서 제명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됐다. 이 때문에 조선공산당은 다시 둘로 나뉘었다. 안광천을 옹호하는 그룹과 그의 면직을 요구하는 당원들로 분열됐다. 전자에는 엠엘당 그룹이 섰고, 후자에는 엠엘당을 비난하는 그룹이 섰다.

결국 1927년 10월 안광천은 책임비서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영남친목회에 참여하여 사회적 분란을 야기한 책임을 진 셈이다. 조선공산당이 출범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의 최고 지도자가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책임비서 직위에서 물러나는 현상 말이다. 그러나 엠엘당 그룹이 반대파의 요구를 백퍼센트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책임비서 직위만 벗을 뿐이지 중앙위원 자격은 그대로 유지됐다. 당내 갈등은 계속됐다.


사진 한 장 안 남아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는 조선 사회주의운동사의 한 전성기였다. 그의 재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운동 진영이 하나로 통일될 수 있었고, 그의 사임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이 새롭게 분열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안광천은 조선공산당 성쇠의 바로미터였다. 또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는 전환기이기도 했다. 이전의 내부 다양성이 화요파와 서울파의 갈등으로 대표된 데 반해, 안광천 이후에는 엠엘파와 비엠엘파의 대립으로 표출됐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래저래 안광천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 속 인물이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용모를 전하는 사진 한 장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용모에 관한 묘사가 남아 있다. “머리를 길러 뒤로 젖혔으나 지나치게 길지는 않았다. 얼굴은 빼빼 말라 골격이 훤히 드러났으며, 좌우 뺨은 두드러지고 턱은 뾰족했다. 과묵한 편이고, 말을 하고 나면 해죽해죽 웃는 습관이 있어서, 다정스럽고 친절한 기분이 느껴졌다. 키가 호리호리하고 약질이었다. 체격만을 놓고 보면 투사 같은 느낌은 없었다.”4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新聞戰線總動員, ‘大合同日報’의 幹部 公選’, <동광> 29호, 1931.12, 63쪽.

2. <김철수 외 20인 조서(2)> 419~420쪽,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3>, 청계연구소, 1986, 197쪽.

3. ‘영남친목회 취지서’ 1927.9. (김철수, <福本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중요 재료> 1928.4.1, 4~5쪽 수록),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5 л.43~45об.

4. ‘名士諸氏 맛나기 前 생각과 맛난 後의 印像’, <별건곤> 11호, 1928.2, 68쪽.




임경석의 역사극장

레닌에게 면박당했다는 소문의 정체

1930년대 사회주의 잡지 <이러타>에서 비난당한 이동휘 사회주의 내부 불화 과정에서 이득 얻은 세력은 누구일까


1921년 11월28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 접견실에서 만난 왼쪽부터 레닌, 박진순(캐리커처), 이동휘. 임경석 제공

잡지 <이러타> 1931년 8월호에는 이동휘(1873~1935)에 관한 흥미롭지만 자못 기이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이동휘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회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봉변당했다는 얘기다. 조선 실정에 관한 무지로 레닌에게서 책망받았다는 거였다.

회견 석상에서 레닌이 물었다. 현재 조선에 부설된 철도 길이가 얼마인지, 또 해안선이 몇 마일이며, 최근 1년간 산물이 얼마인지를 질의했다. 이동휘는 쩔쩔맸다. 거듭되는 질문에 한 번도 제대로 답을 못했다. 레닌이 책망하듯 말했다. “동무여, 그렇게 조선 실정을 모르고 어떻게 조선 일을 하시렵니까?”

과연 사실일까? 일국의 혁명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그처럼 면박을 주었다는 게, 아무리 세계를 뒤흔든 러시아혁명의 지도자 레닌이라 할지라도 있을 법한 일인지 의심스럽다. <이러타>는 1931년 6월 창간해 <비판> <시대공론> <신계단> <대중> 등과 더불어 여론에 영향력을 미치던 합법 사회주의 잡지였다.1)


유학생 출신 2030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비난


이동휘 에피소드의 집필자는 필명 ‘지양’(止揚)을 썼다. 그는 ‘레닌과 우리 선구 이동휘군’이라는 기사를 써서 이동휘에 관한 무지와 책망의 서사를 소개했다. 혁명운동 노선배를 ‘군’이라고 일컫는 것을 보면 일본식 풍습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일본 유학생 출신 젊은이였을 것이다. <이러타> 관련자들은 사회주의 실천 운동과는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비밀운동을 이끌던 이재유는 <이러타> 같은 합법 사회주의 잡지를 ‘프롤레타리아트혁명운동과 유리된 유동분자들의 무책임한 언론’으로 지목했다. 이로 미뤄보면 <이러타> 관련자들은 비밀결사와 연계하지 않은 채 합법 영역에서만 활동하던, 유학생 출신 20~30대 사회주의 지식인 그룹인 것으로 판단된다.

아니나 다를까, <이러타> 기사는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당시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종합지 <삼천리> 1931년 11월호 지면에 ‘시베리아의 회상, 잡지 <이러타> 소론에 대하여’라는 비판 기사가 떴다. 이 글을 쓴 필명 ‘창해거사’는 러시아 조선인 사회에 오랫동안 체류했음을 밝히고, 자신이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음을 피력했다. 이어서 그는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앞뒤 맥락을 잘 모르는 일개 서생의 무책임한 발언에 분노가 솟구친다고 통박했다. 그는 레닌과 이동휘의 회견에 관해서 자신이 아는 내용을 소개한 뒤, 필명 ‘지양’을 향해 혁명운동의 오랜 선배에게 존경을 표할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이동휘에게 들씌운 불명예는 그 뒤로도 계속 사람들 입에 회자됐다. 레닌 회견 때 무지로 인해 면박당했다는 소문은 수그러들지 않고 꾸준히 유포됐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1905~38)도 그 일화를 들었다고 한다. 1937년 중국 연안에서 미국의 진보적 언론인 님 웨일스에게 조선혁명 역사를 술회하던 김산은 이렇게 말했다.


“1918년에 이동휘가 맨 처음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갔을 당시 그는 이론이라고는 전혀 갖고 있지 못했으며, 오로지 대중운동과 소련에 대한 믿음밖에 없었다. 조선에- 공장, 철도, 농촌에- 얼마만큼의 노동자가 있느냐고 레닌이 물었을 때, 그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은 하나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레닌은 웃으면서 지노비예프를 불러서 말했다. ‘우리는 여기 있는 이동휘 동지를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이동휘 동지는 조선 독립에 대한 뜨거운 피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방법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동양의 자연적인 상태입니다. 그들은 혁명적 기지를 전혀 갖지 못하고 다만 테러리즘과 군사행동의 배경만을 갖고 있을 따름입니다.’”2)

김산이 노혁명가 이동휘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려던 것은 아니리라. 그는 아마 들은 대로 가감 없이 얘기를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산의 진술 내용은 근거 없이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 회견 연도도 틀렸고, 배석자 정보도 근거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후대로 내려갈수록 이동휘 불명예 서사는 덧붙여지고 윤색까지 됐음을 알 수 있다.


이동휘 불명예 서사를 퍼뜨린 잡지 <이러타> 창간호(1931년 6월호) 속표지. 임경석 제공

한인사회당 vs 고려공산당

악의적인 풍문은 왜 오랫동안 지속됐을까? 앞뒤 맥락을 잘 아는 이동휘 쪽 인사들이 백방으로 나서서 변호했는데도 말이다. 혹시 그 풍문이 사실이기 때문일까. 사실의 힘이 그처럼 오랫동안 소문에 생명력을 줬던 게 아닐까. 또 다른 추정도 가능하다. 이동휘 불명예 서사로 이득을 얻는 세력이 있다면, 게다가 그 세력이 복수였다면 그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의문에 답하려면 이동휘와 레닌의 회견이 어떤 맥락에서 언제 어떻게 이뤄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동휘는 한국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든 인물이다. 그가 45살이던 1918년 4월, 망명지이던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란 이름의 혁명정당을 결성해,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에 올랐다. 식민지 조선의 해방 투쟁에 헌신하기 위해 망명길에 오른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망명길에 함께 나섰던 비밀결사 신민회의 젊은 동료들이 행보를 같이했다. 이 단체에는 재러동포 출신의 저명한 여성 혁명가 김알렉산드라도 합류했다. 그녀는 하바롭스크를 임시 수도로 하는 극동소비에트 정부의 외교부 장관이자, 러시아 볼셰비키 지방당의 임원이었다.

한인사회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적백 내전에 휩싸인 러시아의 혼란한 정세 속에 볼셰비키와 보조를 같이했다.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창설되자, 지체 없이 당대표단 3명(박진순·박애·이한영)을 파견한 데서도 이 당의 성격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당대표단은 한인사회당을 국제당 지부로 가입시키고, 러시아 레닌 정부에서 거액 지원을 약속받는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이동휘 자신이 직접 국제당에 대표로 나간 것은 3년 뒤였다. 1921년이었다. 국제당 조직 원칙에 따라 고려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 이동휘는 당면한 당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했다. ‘위기’란 무엇을 말하는가? 국제당 동아시아담당관들과의 불화가 그것이다. 국제당의 동방부와 극동비서부의 요직에 취임한 보리스 슈먀츠키, 그리고리 보이틴스키 등이 이동휘 그룹을 배제하고, 이르쿠츠크에 기반을 둔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을 내세워 조선혁명을 주도하려고 나섰다. 이에 호응한 조선인 그룹이 있었다. 이른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다.


이동휘 불명예 서사를 퍼뜨린 <아리랑> 1941년 영문판 초판 표지. 임경석 제공

민족해방혁명 vs 사회주의혁명

당시에는 조선혁명의 성격에 관해 민족해방혁명이냐, 사회주의혁명이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심각하게 벌어졌다. 이동휘 그룹은 전자를 지지했고, 이르쿠츠크파 세력은 러시아혁명과 마찬가지로 조선혁명도 사회주의혁명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양쪽 대립은 심각했다. 화해할 수 없는 적대성마저 나타났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동휘가 직접 모스크바로 간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21년 11월28일 이동휘 일행은 레닌과 만났다. 고려공산당 대표단 자격으로 러시아공산당과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의 지도자인 레닌과 공식 면담을 했다. 약속 시간은 오후 5시, 장소는 크렘린 내부 접견실이었다. 회견에 초대된 조선 대표단은 4명이었다. 고려공산당 대표단 이동휘·박진순·홍도 3명과 러시아어 통역 김성우(러시아 이름 ‘김아파나시’)였다. 박진순과 김성우는 러시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재러동포 2세였다.

예정된 회견 시간은 30분이었다. 통역 김성우의 기록에 따르면, 접견실로 들어서는 레닌은 활달했다. 일제히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조선 대표단에 가깝게 다가와 한 사람씩 악수했다. 그의 첫 발언은 “고려공산당과 만나니 참으로 기쁩니다”였다. 그는 안락의자에 앉으면서 손님 일행에게도 앉으라고 권했다. 이동휘가 조선어로 먼저 말을 꺼냈다.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혁명운동의 여러 문제를 솔직하게 묻겠다고 했고, 레닌도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양쪽 사이에 조선의 정치·경제 상황, 일제의 식민정책, 고려공산당의 내부 상황, 3·1혁명 운동의 특성, 조선혁명 투쟁 조건 등의 얘기가 오갔다. 레닌은 특히 조선에 부설된 철도선과 산업화에 관심을 표명했다. 조선인들은 책상 앞에 놓인 지도를 가리키면서 레닌의 질의에 답했다.

담화 중에 비서관이 들어왔다. 회견 시간이 다 지났다고 통보하기 위해서였다. 레닌은 여유 시간이 25분 있으니 좀더 얘기해도 괜찮다고 했다. 회견 시간은 1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회견 말미에 양쪽은 작별 인사를 했다. 레닌은 대표단장 이동휘의 손을 굳게 쥐고 오랫동안 석별의 정을 표했다.3) 그때 레닌은 51살, 이동휘는 48살이었다.


이동휘·레닌 회견기를 남긴 러시아어 통역 김성우(김아파나시). 임경석 제공


레닌의 지지가 불러온 악의적 풍문

이동휘는 레닌과의 담화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뒷날 국내 신문에 기고한 회상기에서 말하기를, 그날 레닌은 다섯 개 요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첫째, 테러 정책을 사용하지 말 것. 둘째, 일본 노동계급과 연대할 것. 셋째, 대중에 대한 선전과 조직에 노력할 것. 넷째,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철도가 큰 역할을 했음에 주목할 것 등이었다. 끝으로 가장 깊은 감화를 줬던 것은 조선혁명의 성격에 관한 견해였다. 레닌은 조선혁명의 첫 계단이 민족혁명운동이라고 지적했다.4) 레닌은 초창기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혁명 성격에 대한 논쟁에서 이동휘 그룹의 견해를 지지했던 것이다.

이동휘에게 들씌운 불명예가 어떤 맥락 속에 형성됐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것은 이동휘 그룹이 성취한 조선 사회주의운동 주도권을 자파의 수중으로 옮기기를 바랐던 경쟁자들, 국제당 동아시아담당관들과 이르쿠츠크파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였다. 이동휘에 대한 악의적 풍문은 그들에게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줬다. 그 풍문이 지속해서 유포된 배경에는 바로 이런 사정이 가로놓여 있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1930년대 초 사회주의 잡지 <이러타>의 성격과 지향’, 전명혁, <역사연구> 34, 2018.
2. <아리랑>, 님 웨일스 지음, 조우화 옮김, 동녘, (개정4판), 96~97쪽, 1992.
3. ‘레닌과의 회견기’, <태평양의 별>, 김아파나시, 1929년 1월22일. <재소 한인의 항일투쟁과 수난사>, 김블라지미르 지음, 조영환 옮김, 국학자료원, 177~180쪽, 1997.
4. ‘동아일보를 통하여 사랑하는 내지 동포에게 (5)’, 이동휘, <동아일보> 1925년 1월22일치.





임경석의 역사극장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의 발견

모스크바 기록관에서 90년 만에 모습 드러내
누가 작성했나… 서울상하이파 또는 김단야 추정


‘12월테제’ 러시아어 정본. ‘조선문제에 관한 결정’이라는 제목 옆에 ‘최종본’이라는 펜글씨 메모가 쓰여 있다. 

1928년 12월10일 코민테른 정치비서부가 채택할 때 사용한 문서다. 임경석 제공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이 발견됐다. 모스크바의 한 기록관에서 근 9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 기록을 소장한 것으로 유명한 러시아사회정치사기록관의 한 서류 파일에서 잠자고 있던 문서다.

이 문서는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됐다. 개성 있는 유려한 펜글씨로 쓰인 것으로 보아 작성자는 필시 중등 이상의 근대 교육을 이수한 사람으로 보인다. 군데군데 가감첨삭의 교정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때문에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종이는 밑줄이 인쇄된 21줄짜리 편지지로 보이는데, 혹여 노트 속지일 수도 있겠다. 페이지마다 글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모두 합쳐 19쪽이다. 200자 원고지로 환산했더니 62장에 해당한다.


통일 교과서에 실릴 역사적 문서


12월테제란 1928년 12월10일 코민테른 정치비서부가 채택한 조선문제결정서를 가리킨다. 조선 혁명운동의 기본 방침을 논하는 강령적 문서이기에 ‘테제’라고 했다. 이 테제는 일제하 조선 사회주의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기념비적인 문헌이다. ‘기미독립선언서’(1919)와 ‘조선혁명선언’(1923)이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위상이 있다면,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은 사회주의운동사 속에서 그런 구실을 하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뒷날 남북한이 통일되면 국어 교과서에 실릴 개연성이 큰, 역사적인 텍스트다.

12월테제를 기점으로 사회주의운동 내부에 ‘테제 정치’라고 해도 좋을 행동양식이 출현했다. 새로운 현상이었다. 1928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코민테른 조선문제결정서가 채택된 바 있다. 그러나 내용이 길지 않았다. 꼭 필요한 사항만 짧은 문장으로 명시했다. 그런데 12월테제 이후 달라졌다. ‘테제’라고 부르는 긴 정치적 문서가 채택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혁명운동의 주·객관적 정세, 전략과 전술, 조직 문제 등 체계를 세운 일종의 논문이었다. 이후 ‘9월테제’ ‘10월서신’ 등으로 불리는 긴 문서가 줄을 이었다. 이 현상은 해방 직후까지 계속됐다. 1945년 조선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이 작성한 8월테제는 이 행동양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테제 정치’가 20년 가까이 지속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929년 이후 통일된 전위당(노동자계급의 전위대로서 사회주의혁명 투쟁을 선도하는 정당)의 중앙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외에 산재한 여러 층위의 비밀결사 구성원들의 생각을 일치시키는 데 테제와 같은, 논리적으로 잘 짜인 장문이 유용했다. 어느 비밀결사에 속했든지 상관없이 그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통합하는 데 적합했다. 그뿐인가. 테제는 정치·사상적으로 비밀결사 구성원을 교육하는 구실도 했다. 국내외에 조성된 복잡한 정세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에 일목요연하게 해답을 제시했다. 그 때문에 비밀리에 활동하는 현장의 사회주의자들은 이 테제를 구하려 했고,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탐독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하지만 해방 이후 통합 공산당이 세워진 뒤로 ‘테제 정치’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구성원 사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훨씬 유용한 수단이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 첫 쪽.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서’라는 제목 아래 펜글씨로 적혀 있다. 전체 분량은 모두 합해 19쪽에 이른다. 임경석 제공

문서 발견 장소가 유일한 단서


도대체 누가 이 기록을 작성했는가? 유감스럽지만 문서의 어느 곳에도 작성자가 누군지 알려주는 구절이 없다. 부득이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 문서가 발견된 장소가 유력한 단서다. 조선어 필기본은 12월테제를 작성한 코민테른 조선위원회 파일에 켜켜이 쌓인 초안들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어 필기본의 작성자는 12월테제 채택 논의 과정에 참여한 조선인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코민테른 조선위원회의 구성은 쿠시넨(핀란드), 퍄트니츠키(러시아), 레멜레(독일) 3명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모두 코민테른의 최상급 집행기구인 정치비서부 위원이었다. 최고위직 인사 11명 가운데 3명으로 이뤄진, 권위 있는 기구였다.

조선인이 포함되지 않은 점에 눈길이 간다. 그렇다고 조선인이 문제 심의에 전혀 참여하지 않거나 배제됐던 것은 아니다.

조선위원회의 심의 과정에 참여한 조선인은 5명이었다. 이들은 분열된 조선공산당의 어느 한쪽을 대표했다. 이동휘와 김규열은 1927년 12월 당대회에서 성립한 조선공산당, 이른바 서상파(서울상하이파의 줄임말)를 대변했다. 그에 반해 양명과 한빈은 1928년 2월 당대회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이른바 엠엘(마르크스레닌주의)파를 대표했다. 또 한 사람은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레닌대학에 유학 중이던 김단야였다. 그는 분열되기 이전 조선공산당의 관점에서 독립적인 의견을 진술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이 5명은 조선공산당의 내부 상황에 대해 상세한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위원회가 요청하는 참고 자료를 작성했다. 주요 인물에 대한 평도 썼고, 직접 위원회 회의에 출석해 질의에 답변도 했다. 물론 어느 사안이든 자신의 관점에서 진술했다. 그 덕분에 조선위원회는 중요 사안마다 세 종류의 상이한, 때로는 서로 대립되는 정보를 볼 수 있었다.

조선인 대표단은 의사소통을 위해 통역을 둘 수 있었다. 서상파 공산당 대표단은 박진순의 도움을 받았다. 1920년 코민테른 제2회 대회에 한인사회당 대표로 참석했던 그 사람이다. 그는 러시아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고 모스크바대학 철학과를 졸업했기에 세련된 고급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엠엘파 공산당 대표단이 어떤 사람을 통역으로 내세웠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마 국제공산청년회 제5회 대회(1928년 8월20일~9월18일)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와 있던, 고려공청 대표 강진일 가능성이 높다. 강진은 러시아 연해주 포시예트에서 태어나 러시아 초·중등 교육을 이수하고 극동대학 공대에서 수학했던지라,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김단야는 통역을 세우지 않고 직접 자기 의사를 밝혔다. 그는 러시아어로 대화할 수 있는데다, 서면으로 문서를 제출할 때는 영어를 썼다.

12월테제 조선어 활자본 첫 쪽. 조선공산당 엠엘(NL)파 기관지 <계급투쟁> 창간호에 실렸다. ‘국제%癤愿瑛�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라는 제목으로 6쪽에 걸쳐 게재됐다. 제목에서 ‘공’에 해당하는 글자가 빠진 것이 이채롭다. 임경석 제공


공산그룹별로 다양한 번역본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의 작성자는 바로 조선인 대표와 통역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판단된다. 한 걸음 나아가 좀더 후보자군을 줄일 수 있다. 12월테제 조선어 판본들을 비교하는 방법을 통한다면 말이다.

12월테제가 채택된 지 불과 5개월 만에 조선어 활자본이 출간됐다. 중국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조선공산당 엠엘파의 기관지 <계급투쟁> 창간호에 그 전문이 게재됐다. ‘국제공산당의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라는 제목 아래 6쪽에 걸쳐 실려 있다.

두 가지가 놀랍다. 코민테른의 최고위급 결정 내용을 신속히 당원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점이 그렇고, 기관지 창간호의 권두 논설로 활자본을 실을 만큼 조직 역량이 우수하다는 점도 그렇다.

내용을 비교해봤다. ‘필기본’과 ‘계급투쟁본’ 사이에 내용상 차이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다만 선택된 용어나 문투, 표현 방식이 같지 않은 점이 눈에 띄었다. 예컨대 필기본의 첫머리는 “조선 경제의 모든 지배적 우월권은 일본 금융자본의 수중에 들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에 비해 계급투쟁본에는 “조선의 모든 경영의 지배권은 일본 금융자본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다”고 표현됐다. 한 군데 더 살펴보자. 조선혁명의 성격을 논하는 대목이다. 필기본에는 “조선혁명은 그 자체의 사회적 경제적 내용으로 보아서 다만 일본제국주의만 대항할 것이 아니라 역시 조선의 봉건주의도 대항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표현됐다. 계급투쟁본에는 “조선혁명은 그 사회적 경제적 내용에 있어서 다만 일본 제국주의뿐 아니라 조선의 봉건주의까지도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결국 양자 사이에 내용상 유의미한 차이는 없지만, 용어와 문투가 동일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음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필기본과 계급투쟁본은 서로 다른 사람이 작성했음을 뜻한다. <계급투쟁>이 엠엘파 공산당의 기관지임을 고려한다면, 그에 게재된 활자본은 모스크바에 파견된 양명과 한빈, 그들의 러시아어 통역을 맡은 강진 등이 작성했음이 분명하다. 둘째, 12월테제의 조선어 정본이 코민테른에 의해 독립적으로 채택된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코민테른이 채택한 12월테제 정본은 러시아어본 하나고, 조선어나 일본어 등 다른 언어로 쓰인 것은 모두 그 번역본이다. 조선어 판본의 다양성은 12월테제의 번역과 전파가 통일된 게 아니라 공산그룹별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필적 대조하고 개인 행적 추적을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은 누가 작성했는가. 두 부류의 인물들로 좁힐 수 있다. 서상파 공산당 대표로서 조선위원회 심의에 참가했던 이동휘, 김규열, 통역 박진순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3의 입장에서 심의에 참가했던 김단야일 것이다. 딱 여기까지다. 현재 확보한 단서로 추적할 수 있는 한계가 말이다. 만약 전자라면 12월테제 조선어 필기본은 서상파 계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참가자들이 숙독하던 문서일 것이다. 후자라면 김단야가 이끌던 국제선 공산주의 그룹이 사용하던 문서일 것이다.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추론의 단서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후보자들이 직접 쓴 문서의 필적을 대조하거나, 12월테제 채택 전후 각 개인의 행적을 정밀하게 추적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서’,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0 л.144~153.

2. 강호출, <코민테른 ‘조선문제결정서’를 통해 본 조선공산당운동(1925~1928)>,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141~142쪽, 2004년.

3. ‘국제공산당의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 <계급투쟁> 1호, 33~39쪽, 1929년 5월. 朴慶植 編, <朝鮮問題資料叢書> 7, 東京, アジア問題硏究所, 1982.





임경석의 역사극장

저명한 반민족 행위자 김대우의 탄생

3·1운동 학생 대표로 참석했지만, 신문 도중 내용을 온통 뒤집으며 시작된 ‘변절’





일본 규슈제국대학 재학 당시의 김대우. 임경석 제공
김대우(金大羽)는 1919년 3월6일 이른 아침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서울 종로5가에 있는 하숙집에서였다. 반일 학생시위를 주도한 혐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닷새 되는 날, 조선 천지에서 독립운동 열기가 서서히 고조되던 때였다. 자신이 지핀 혁명 불길이 타올랐지만, 그는 투옥되고 말았다.

3·1운동을 기획한 비밀결사 학생단 지도부


김대우는 경성공업전문학교(이하 경성공전) 광산과 2학년이었다. 경성공전은 1916년 설립된 식민지 조선의 최상급 고등교육기관으로서, 경성전수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와 더불어 3대 관립 전문학교로 병칭됐다.

김대우는 3·1운동 학생단 지도부의 일원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1월 하순, 중국음식점 대관원 모임에서 발족한 이 비공식 조직에 처음부터 그가 가담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건 2월20일 승동예배당에서 열린 ‘제1회 학생단 간부회의’ 때부터다. 김대우는 경성공전 대표자 자격으로 참여했다.

이 모임은 경성 시내에 있는 6개 관립·사립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로 이뤄졌다. 학생단 지도부는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1운동을 기획한 양대 비밀결사 가운데 하나였다. 학생 대표들은 비밀 회동을 거듭했다. 2월25일, 26일, 28일에 모여 시위운동에 필요한 것을 협의했다.

비밀결사는 신뢰감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법이다. 탄압이 예견되는 반일 독립운동 단체라면 더욱 그랬다. 학생단 지도부 구성원에게는 신뢰감이 형성돼 있었다. 그 감정은 오랜 시일에 걸쳐 상대방의 사람됨을 함께 겪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종교단체와 출신 지역별 향우회가 매개하는 역할을 했다. 서북학생친목회, 교남학생친목회, 학교별 학생YMCA 등이 그것이다. 1910년대 무단통치 아래에서도 합법적이고 공개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단체들이다.


그중 서북학생친목회는 주목할 만하다. 김대우가 학생단 지도부 일원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매개체다. 이 단체는 함경남북도·평안남북도·황해도 서북 5개도 출신 경성 유학생들의 친목회였다. 김대우는 평안남도 강동군 출신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나, 1913년 중등학교 진학을 위해 경성에 오기 전까지 자랐다. 김대우는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공전에서 수학하기까지 6년간 경성에서 낯선 객지 생활을 했다. 그동안 자신과 비슷한 말씨와 생활 관습을 가진 친목회 학생들에게서 편의와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서북학생친목회에는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학생들이 즐비했다. 학생단 최초 회합인 대관원 모임 참석자 10명 가운데 서북 출신이 8명이나 되었다. 그중에는 한위건(함남 홍원), 강기덕(함남 덕원), 김원벽(황해 안악) 등 학생단을 이끈 3인 지도자를 비롯해, 모교인 경성공전의 1년 선배 주종의(함남 함흥)도 있었다.

김대우는 용모가 단정하고 키가 컸다. 180cm에 가까워 풍채가 당당했다. 잘생겼을 뿐 아니라 말도 잘했다. 관찰자 의견에 따르면, “회의 같은 데서 말할 때이든가 또는 집회의 의사 진행 같은 것을 할 때에 보면, 명민한 두뇌와 그 달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논리가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이런 재능과 활달한 성격이 그가 경성공전 대표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독립 가망이 없으므로 독립 희망하지 않는다”


김대우는 경찰에게 체포된 직후에도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 야마자와 사이치로 검사와 주고받은 3월13일치 신문 기록을 보면, 김대우가 어떤 진술 전략을 구사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는 혐의 사실을 시인했다. 시위에 참여한 것과 경성공전 대표임을 인정했다.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공감해 경성에서도 ‘소요’를 일으키기로 사전에 협의했노라고 시인했다. 설사 유죄판결을 받을지언정 조선 독립을 요구한 행위는 정당하다는 생각을 계속 견지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가담 시점과 인지 범위는 되도록 줄이려 노력했다. 자신의 혐의 내용을 가볍게 할 수 있고 동료들의 행위에 관한 발언 범위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호리 나오키 총독부 예심판사의 4월9일치 신문조서에서 진술 기조가 바뀌었다. 모든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경성공전 학생 대표자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고, 사전에 동료 학생들과 시위를 모의하지도 않았으며, 경성공전 학생들을 시위 현장에 동원한 것도 부인했다. 3월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작한 시위에 우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 외에는 검사 신문조서 내용을 온통 뒤집었다. 조선 독립을 희망하냐는 예심판사의 질의에는 “독립이 될 가망이 없으므로 지금은 독립을 희망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궁금하다. 도대체 김대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의 급격한 심경 변화는 왜 일어났고, 진술 기조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진술 번복의 의미는 자기 신념을 버리고 그에 배치되는 이념을 받아들인 점에 있었다. 1930년대 후반 유행한 사회현상에 빗대어 말하면 일종의 사상전향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 수감 중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단순 시위 가담자조차 날마다 밤새 계속되는 구타와 고문에 실신했다. 김대우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수감자들처럼 좁고 불결한 시설에 갇혀 옆 사람과 살을 맞대고 다리도 뻗지 못한 채 쪼그린 자세로 날밤을 지새우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방법만 있다면 이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그뿐인가. 미래에 대한 불안도 그를 압박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보기 드물게 공학 분야 전문교육을 이수한 그에게 안락한 직업과 세속적 출세가 보장된 터였다. 그 가능성을 송두리째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심경이 변화한 결정적 계기는 가족이었다. 뒷날 전향 정책이 본격화되던 1933년 즈음 경성형무소 수감자 사상전향 동기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부모나 기타 친족에 대한 정서적 반성’이 38%였다.


참사가 된 대지주 아버지


김대우의 아버지 김상준이 사상전향의 촉매가 됐다. 김상준은 강동군의 손꼽히는 큰 부자였다. 소유 농지 규모가 150정보(1정보는 약 9917.4㎡)를 헤아리는 천석꾼이었다. 김상준에게서 땅을 빌려 경작하는 소작인만도 80여 명이나 됐다.

단지 부유할 뿐만이 아니었다. 식민지 통치기구에도 다방면으로 연결된 관변 유력자였다. 일본의 한국 병합 직후인 1911년 군 참사(參事)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때, 김상준은 강동군 초대 참사로 임명됐다. ‘참사’란 관내에 거주하는 ‘학식과 명망이 있는 자’로서 도장관(도지사)이 임명하는 명예직 지방관이었다. 군수의 자문에 응하며, 수당을 받았다. 지방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인 유력자 상층부를 포섭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제도였다.

김상준은 일본인 관료들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기민하게 역량을 발휘했다. 군내 각지를 찾아다니며 민심 안정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부했다. “이번의 지방 소요에 있어서는 본인은 몸소 향당을 설복하여 민중의 향방을 밝혀 경거망동의 억제에 전력을 경주”했노라고. 그 결과 강동군에는 시위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노라고 주장했다. “사방 인근에서는 다 소요자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본군에서만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과장된 주장이었다. 3월5일 강동군 만달면 승호리 시위, 3월7일 고읍면 시위, 같은 날 원탄면 송오리 시위가 일어났다. 다만 주위 여러 지역에 비해 시위 규모도 작고, 시위 횟수가 적었다.

김상준의 관변 네트워크는 그에 머물지 않았다. 총독부가 출자한 각종 공공기관에도 임원으로 진출했다. 강동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강동군 지주회 부회장, 강동군 금융조합 조합장, 강동군 잠사업조합 부조합장 등이 그가 겸하던 직책이었다.



김대우의 아버지 김상준이 상신한 탄원서(위).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식에서 우등졸업장을 받은 학생들. 
맨 오른쪽이 김대우. 1921년 3월. 임경석 제공

체포된 지 11일 만에 작성한 공문


바로 그 아버지가 아들의 사상전향에 나섰다. 김대우는 5형제 가운데 맏이로서, 자신이 누리는 재산과 지위를 상속할 아들이었다. 아들의 경솔한 행동 탓에 자신의 성공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질지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김상준은 여러 방면으로 줄을 댔다. 식민지 통치기구의 각급 관료들에게 접근했다.

김상준의 대응은 주효했다. 가장 먼저 강동군수가 움직였다. 유진혁 군수는 강동군 관내 치안을 맡은 책임자 헌병분견소장에게 ‘특별한 배려’를 요청하는 3월17일치 공문을 작성했다. 김대우가 체포된 지 11일 만의 일이었다. 아버지 김상준이 얼마나 신속하게 움직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강동군 헌병분견소장도 김상준의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강동군수의 공문을 받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김대우를 구금한 경성종로경찰서 앞으로 공문을 보냈다. “가급적으로 선처 계시옵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뿐인가. 구금된 학생의 아버지를 파견할 테니, 회답을 주기 바란다는 청탁도 덧붙였다. 아들의 석방을 위해 김상준이 직접 경성으로 갔음을 알 수 있다.

김상준의 로비는 지방관료만이 아니라 경성의 중앙관료들에게도 통했다. 종로경찰서장은 3월27일치로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오늘날 검사장)에게 보내는 공문을 발송했다. 김상준이 강동군에서 통치체제 안정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의 일족이 지방사회에서 얼마나 명문인지, 붙잡힌 김대우가 얼마나 품행이 바르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는지를 밝히는 별지를 첨부했다. 별지 중에는 강동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 다카시마 요시오의 확인서도 있었다.

피고인 김대우의 진술 태도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해졌다. 독립운동에 참여하던 자아를 버리고 관변 유력자인 아버지의 삶과 사고방식을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앞으로 조선 독립이나 만세시위 등과 같은 행위는 하지 않고, 권력관계에 순응해 오직 사적 이익 증진에만 노력하겠다는 맹세나 다름없었다.

김대우의 변신은 효과가 있었다. 1919년 11월16일 3·1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에 게 판결이 내려졌다. 대부분 징역 7개월∼1년에 해당하는 유죄판결을 받은 데 비해, 김대우는 징역 7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그는 즉시 석방됐다. 집행유예는 김대우의 변절에 대한 보상이었다.

이후 김대우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경성공전에 복학해 1921년 3월 졸업했다. 졸업식 때는 우등생으로 선정돼 표창장까지 받았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해 규슈제국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했다. 총독부 관료사회에 진출한 그는 군수, 도 과장, 총독부 본청 과장, 도 부장 직을 거쳐, 마침내 도지사(경북·전북) 자리에까지 올랐다.


규슈제국대 거쳐 도지사까지


저명한 반민족 행위자 김대우의 탄생은 바로 3·1운동이 한창이던 4월9일 예심판사와의 신문 중에 이뤄졌다. 조선 독립을 더는 희망하지 않는다는 고백 속에, 현존 권력관계에 순응해 공동체의 안위와는 관계없이 일신의 이익만을 도모하겠다는 결심 속에 태어났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문헌

1. 豫審掛職務代理 朝鮮總督府判事 堀直喜, ‘金大羽 신문조서’, 대정 8년 4월9일,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5 (삼일운동 V), 국사편찬위원회, 1991.

2. 장규식, ‘학생단 독립운동과 3월5일 시위’, <3.1운동 100년: 2. 사건과 목격자들>, 휴머니스트, 141쪽, 2019.

3. 松花學人, ‘總督府 及 各道 高官 人物評’, <삼천리>, 59쪽, 1938년 5월호.

4. 朝鮮總督府 검사 山澤佐一郞, ‘金大羽 신문조서’, , 大正 8년 3월13일.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4, (삼일운동 IV), 국사편찬위원회, 1991.

5. 장신, ‘1930~40년대 조선총독부의 사상전향 정책 연구’, 미발표 논문, 32쪽, 2019.

6. 宮嶋博史, ‘植民地下朝鮮人大地主の存在形態に關する試論’, <朝鮮史叢> 5·6合倂號, 1982.

7. ‘조선총독부지방관 관제’, 제23조, 제24조, <조선총독부관보> 1910년 9월30일.

8.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임경석의 역사극장

이름처럼 살아간 미륵

지주 가문의 3대 독자에 의사 되려던 청년 이미륵, 3·1운동에 모든 것을 내놓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이미륵은 1917년 학교에 처음 도착한 날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입구에 서 있었다. 그것은 도시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여러 채의 유럽풍 건물들로 이뤄져 있었다. 대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기도 하고, 또 한꺼번에 몰려 들어오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의학’이라는 글자가 박힌 황금색 배지를 단 감청색 교복을 입고 있었다.” 임경석 제공
압록강 하구는 넓었다. 키보다 높게 솟은 갈대밭을 한참 헤치고 나아간 끝에 마침내 강가에 이르렀을 때, 이미륵은 놀랐다. 그것은 강처럼 보이지 않았다. 바다 같았다. 강 건너 아득히 먼 곳을 눈으로 짚었으나, 뭍인 듯 환영인 듯 거무스름한 얇은 띠 그림자를 그만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쪽배로 압록강을 건너는데


달밤이었다. 사방이 훤해서 쉽게 사람들 눈에 띌 것 같아 불안했다. 늙은 어부가 빙그레 웃었다. 오히려 달빛이 밝을 때 국경 감시가 소홀하다고 말했다. 강물에 띄운 것은 작은 통나무배였다. 그 쪽배는 너무 작아서 두 사람만 간신히 탈 수 있었다. 쪽배는 세 척이었고, 사공도 세 사람이었다. 강 건너기를 바라는 이들은 미륵과 그보다는 좀 어려 보이는 두 학생이었다. 둘 중 하얗게 겁에 질린 한 명은 17살도 채 안 돼 보였다. 미륵도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어서 셋 다 학생인 셈이었다.

쪽배는 충분히 간격을 두고 차례차례 강가를 떠났다. 큰 강물 위로 소리 없이 노를 저어가는 동안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마치 영원의 시간을 지나가는 듯했다고 이미륵은 뒷날 회고했다.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다. 멀리서 몇 발 총소리가 들렸다. 어부가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얼마쯤 지나, 어부가 속삭였다. 이따금 압록강 철교 위에서 쏘아대는 경고의 총소리라고 했다. 하지만 반짝이는 수면 한가운데 뜬 쪽배인지라 일본군은 결코 우리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1919년 11월, 이미륵은 이렇게 국경을 넘었다. 이 체험을 미륵은 평생 잊지 못했다. 자기 삶의 역정을 글로 옮겨서 단행본으로 출판했을 때, 그 책 이름을 <압록강은 흐른다>라고 지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왜 위험을 무릅쓴 채 험난한 경로로 월경해야 했을까?

바로 3·1운동 때문이었다. 3·1운동은 이미륵의 인생 행로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저 영향을 끼친 정도가 아니었다. 삶의 궤적이 판이하게 달라질 만큼 급격한 변화였다. 이미륵뿐이랴. 따져보면 3·1운동을 계기로 운명의 전환을 겪은 조선인이 적지 않았다. 국경을 넘어 망명길에 오른 젊은이가 어디 한둘이었는가.


경찰에게 쫓기기 전 미륵은 의사가 되는 길을 걷던 엘리트 학생이었다. 그가 다니던 경성의전은 191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손꼽히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3대 전문학교 가운데 하나였다. 보기를 들면 <매일신보> 1917년 신년호에 ‘신년을 맞이하는 세 전문학교’라는 제목을 달고 경성전수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사진과 관련 기사를 싣고 있다. 법학·의학·공학 분야 중하급 기술 관료와 그에 상응하는 실무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들이었다. 모두 관립이었고, 학비는 면제였다. 총독부가 관할하던 공공기관들처럼 학교 운영도 군대식이었다. 학생들은 강의와 실습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었다. 누구든지 특별한 이유 없이 무더운 7월까지 계속되는 강의를 단 한 시간도 빼먹어서는 안 되었다.

입학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이유는 무엇보다 정원이 적었기 때문이다. 미륵이 응시했던 1917년도 입학 요강을 보면, 신입생 모집은 조선인 50명, 일본인 25명으로 모두 합쳐 75명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인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적게 부여하되, 실무 기술자 양성 분야에 한정한다는 총독부의 식민지 통치 정책 탓이었다. 조선인 입학 정원이 일본인보다 두 배나 되지 않는가, 이렇게 의문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에 거주하는 민족별 인구와 비교하면, 얼마나 심각한 민족차별 정책을 썼는지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 학생 정원 비율은 인구 10만 명당 0.3명인 데 비해, 일본인 비율은 8.3명이었다. 무려 28배의 특혜를 일본인 쪽에 부여했다.


생명의 탄생 연구하는 의사 되려고


이미륵은 극심한 경쟁을 뚫고 경성의전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하마터면 구술시험에서 탈락할 뻔한 위기도 겪었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려는 개인적 동기를 물었을 때, 미륵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근원을 연구하고 싶다는 소견을 피력했다. 그뿐인가. ‘우리나라’라는 용어를 무의식적으로 조선을 지칭하는 말로 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식민지 조선의 전문학교는 학문 연구 기관이 아니라, 실무 분야 기술자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식민지 원주민이 넘봐서는 안 되는 고상한 목표를 토로했던 것이다. 면접관은 오래 망설였다. 다행히 그는 관대한 성품을 지녔던 것 같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량권을 유연한 방식으로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차분히 설명했다. 전문학교 교육의 목표는 실전에 능한 의사들을 양성하는 데 있다고 일러주었고, 앞으로 우리나라라고 말할 때는 단지 조선이 아니라 일본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맥락으로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경성의전의 조선인 학생들은 엄격한 경쟁 관문을 통과한 수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다행스럽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 당국이 자신을 수준 높은 학문 영역으로 이끌어주면서도 특별히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교육비를 전액 국비로 지원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여겼다고 이미륵은 회고했다. 그래서일까. 3·1운동이 다가왔을 때, 거사 참여를 요청받은 의전 학생들은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혔다. ‘우리가 가담한 것이 당국에 발각되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며, ‘총독부에 속한 관립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더 심하게 처벌받을 것’이라는 우려에 번민했다.

그럼에도 사전 논의에 가담해달라고 권유받은 의전 학생 10여 명은 시위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시위를 위한 준비 사항이나 국기, 전단, 시위 방법에 대한 논의를 거듭하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그 속에 이미륵도 있었다. 사전 모의에 가담한 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경성의전 조선인 학생들의 용기와 정의감은 다른 고등교육기관의 평균적인 조선인 학생들보다 월등히 높았다. 경성의전 조선인 학생 수는 208명이었는데, 그중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이는 32명이었다. 15%에 이르렀다. 당시 서울에 있는 관립 3개 전문학교, 사립 4개 전문학교를 통틀어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 체포를 모면했거나,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훈방이나 기소유예, 태형 처분 등을 받은 학생들까지 포함한다면 그 비율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이미륵은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보았고, 자신도 직접 참여했던 만세시위운동과 군경의 탄압 모습을 유려한 필치로 실감 나게 묘사했다. 그중에서 그날 일본 군경의 대응 태도가 저물녘에야 비로소 적극 탄압 방식으로 변했다는 증언이 주목된다. “경찰들은 처음에는 간섭하지 않고 우리가 시내를 완전히 통과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중무장한 채 관청 건물을 경비하면서 학생들이 폭력 행위로 넘어가는지를 주시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압박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제 시위 대열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는 말이었다. 현장에서만 관찰할 수 있는 생생한 증언이다.

이미륵은 시위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서울에 있는 대학생들은 네 번째 독립 시위를 벌인 후 공식 활동에서 물러났다”고 했다. 3월1일과 5일 시위가 학생층이 사전 준비해서 벌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뒤 계획 시위가 두 차례 더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언이라고 평가된다. 그는 시위 참가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리는 비밀운동에 전념했다”고 썼다. 이미륵은 선전문을 쓰는 부서에 소속됐다. 비밀결사에 참여했다는 언급이 주목을 끈다. 그가 경찰 추적을 받은 계기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35살의 이미륵, 1933년 독일 뮌헨에서. 정규화·박균 제공

비밀결사의 간부가 되기도


이미륵은 비밀결사 참여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축적된 연구 성과에 의하면, 그 비밀결사는 ‘청년외교단’이었다. 이 비밀결사는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5월 결성됐다. 결사체의 이름에서 그해 10월 개막 예정이던 국제연맹 회의에서 조선의 국제적 지위 변경 문제를 상정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미륵은 이 단체에서 중앙간부 일원으로 활동했다. 편집부장에 취임했다. 이 단체는 기관지 <외교시보>를 펴냈고, 반일시위 참여를 호소하는 선전문과 전단을 살포했다. 이 업무들은 아마 편집부장 손을 거쳐 했을 것이다. 당사자가 뒷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즈음 몇 달 동안 거의 매일 밤을 편히 잠들지 못했다.

그해 11월 비밀결사가 있다는 사실이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주무 기관은 경상북도 경무국이었다. 전국적으로 비밀결사 청년외교단 구성원들의 일제 검거가 이뤄졌다. 이미륵이 서울을 떠나 고향인 황해도 해주로 되돌아온 때는 아마 그 직전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알게 됐다. 자기 아들이 고문과 투옥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38살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천석꾼 지주 가문의 대를 이을 3대독자였다. 딸 셋을 내리 낳은 뒤, 미륵불에 치성을 드린 덕분에 얻은 외아들이었다. 그래서 이의경(李儀景)이라는 본명 대신 ‘미륵’이라는 애칭으로 즐겨 불렀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슬픔을 억누르고서 아들에게 권했다, 망명하라고. 압록강을 건너 안전한 땅으로 도망가라고 거듭 말했다. 집을 떠나던 날 안개가 끼고 어두웠지만 어머니는 동구 밖 멀리까지 배웅 나왔다. 이별의 시간이 닥쳐왔을 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혹시 우리가 다시 못 만나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라. 넌 내 생애에 너무도 많은 기쁨을 주었단다. 자, 내 아들. 이젠 너 혼자 가렴. 멈추지 말고.”


“혼자 멈추지 말고 가라”던 어머니


이미륵은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이듬해에는 바라는 대로 유럽 유학길에 올라, 독일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도 끝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미륵은 1950년 3월, 향년 52 중년의 나이에 병사할 때까지 디아스포라(이산)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일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공동체의 정의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었다. 대지주의 후손이자 의사라는 전문직이 예정돼 있음에도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한 싸움에 투신한 사람이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한국인은 그의 희생과 헌신에 빚지고 있다. 공공선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귀한 것을 내놓았던 그 사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1. 이미륵 지음, 박균 옮김, <압록강은 흐른다>, 살림, 213~ 215쪽, 2016.

2. 경성의학전문학교, ‘생도모집’ 대정6년 1월17일, <조선총독부관보> 2337호, 1917년 1월22일.

3. 김상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의 3·1운동 참여 양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0, 152쪽, 2019.

4. 장석흥,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1988. 조은경, ‘연병호와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8, 2019.

5. 정규화·박균, <이미륵 평전>, 범우, 2010.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그는 누명 쓰고 죽은 것일까

중국 베이징 주택가에서 밀정 혐의로 살해당한 김달하, 증거는 김창숙 발언밖에 없었는데…


1909년께 김달하와 김애란의 약혼 사진. 가운데 소녀는 신부의 여동생 김활란(11살). 임경석 제공

김달하(金達河) 사건이란 1925년 3월30일 중국 수도 베이징의 북쪽 안정문 인근 한 주택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가리킨다. 반일 조선인 사회의 유력자로 알려진 57살 초로의 남자가 일본 밀정 혐의를 받고서 한때 동지였던 사람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도대체 김달하가 어떤 사람이길래 그러한 화를 입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권세가 후원을 업고 벼슬길로


김창숙이 처음 김달하를 알게 된 것은 베이징에 정착한 1921~22년께 일이다. 유교 지식인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국외로 망명한 김창숙이었다. 그는 중국의 어떤 도시보다도 베이징을 선호했다. 조선 국내로 몰래 연락을 주고받는 데에는 그 도시가 편리했기 때문이다. 상하이와 광저우를 무대로 하여 동분서주하던 망명 초창기 2~3년을 보낸 뒤에는 베이징에 자리를 잡았다.

김창숙은 그를 처음 만났는데도 마음에 들었다. 김달하가 한문학과 유학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고 신망도 두터웠기 때문이다. 평안북도 의주에서 나고 자란 김달하는 관서지방 출신의 이승훈이나 안창호와 같은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사이가 좋았다. 유학 고전과 역사를 토론하다보면 그 해박한 지식이 돋보였다. 말이 통하고 뜻이 맞아서 마음이 흡족했다. 김달하는 이미 50대 중반이고 김창숙은 그보다 10년 연하였지만, 두 사람이 교분을 나누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김달하가 유학에 깊은 소양을 갖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한학을 익혔을 뿐 아니라, 15살 되던 1883년에 의주의 저명한 유학자 백회순(1827~88) 문하에 나아가서 유학 고전과 한문학을 수학한 것이다. 이러한 전통 학문 경력은 관직 진출의 기반이 됐다. 27살 되던 해에 평안도 관찰사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고, 29살 되던 1897년부터 관직에 나아갔다. 첫 벼슬은 의령원 참봉직이었다. 의령원이란 사도세자와 세자빈 혜빈 홍씨의 적장자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무덤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왕실의 유택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뒤이어 31살 되던 1899년부터 영향력 있는 관직에 취임했다. 내부 주사로 약 6개월 재직한 데 이어 1900년에 대한제국 시절 유일한 관립중등학교인 한성중학교 교관에 취임했다. ‘교관’이란 중등학교 교사를 가리키는 당시 명칭인데, 그 자리에 6년간 재임했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는 중추원 부찬의를 지냈다. 실권은 없지만 품계가 정3품인 고위 관직이었다.

일본 관헌이 작성한 정보문서에 따르면, 그가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권세가의 후원이 있었다. 민씨 집권 그룹의 일원인 민병석(1858~1940)이 그의 상전이었다. 민병석은 1889년부터 평안도 관찰사에 5년간이나 재임했는데, 이 기간에 김달하는 그의 참서관 자격으로 수행했으며, 여러 가지 부정한 행위로 큰 재산을 얻었다고 한다.


김달하가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일궜는데도 관서지방 사람들의 신망을 얻은 것은 또 다른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그는 1906년 10월 서우학회 설립을 주도한 12명의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창립회의 개최 장소가 김달하의 저택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초창기부터 깊숙이 관여했음이 분명하다.


독립운동 지도자와 허물없이 지내


서우학회는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출신 관료·신지식층 집단이 설립한 애국계몽운동단체다. 을사조약 이후 이른바 일본 보호국 체제하에 합법·공개적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학교 설립과 잡지 발행 등 비정치적 영역 활동만 허용됐지만, 관서지방을 무대로 애국주의 열기를 고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달하는 서우학회 임원진이었다. 재정 총괄 직책인 ‘회계원’으로 선임됐고, 일반 회무의 의사결정 과정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단체 설립 이듬해에는 모든 업무를 지휘하는 ‘총무원’이자 부회장에 선출됐다. 서열 2위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관지 발행에도 주도적이었다. 월간지 <서우>를 냈는데, 전체 15개 호 가운데 6회분 글을 썼다. 기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빈번하게 투고했음을 알 수 있다.

1906~07년 두 해 동안 서우학회에서 발휘한 김달하의 눈부신 활동상은 1908~09년 서북학회에도 계승됐다. 서북학회는 관서지방을 관할하는 서우학회와 관북지방을 무대로 하는 한북흥학회, 두 단체를 통합한 것이다. 가장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운동단체라 해도 좋았다. 여기서도 김달하는 ‘총무’직을 수행했다. 기관지 편집원 등의 직위도 갖고 있었다.

김달하가 관서 사람들의 신망을 얻은 이유를 알 만하다. 이승훈이나 안창호와 같은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정도 수긍이 간다. 김창숙이 그와 허물없이 지낸 것도 자연스럽다 하겠다. 김달하는 베이징의 조선인 망명자 사회에서 반일 유력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보기를 들면 1921년 3월1일 저녁에 베이징 조선인 14명이 3·1운동 기념연회를 은밀히 열었는데, 그 속에 김달하가 있었다. 신채호, 김좌진, 서왈보, 한진산 등 이름 높은 반일 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였다.4 또 일본공사관 경찰은 비밀리에 ‘베이징 거주 요시찰 조선인 리스트’를 작성했는데, 28명 명단에 어김없이 김달하 이름도 있었다.

그런데 김창숙은 언제부턴가 김달하에 관한 추문이 돌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일본 경찰 간부와 은밀히 만난다는 소문이었다. 일본 밀정인 것 같다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일축했다. 김창숙은 그를 믿었다. 김달하의 교제 범위가 넓다보니 남들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다. 김달하가 베이징으로 망명한 때는 1913년이다. 10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게다가 서울에 있던 가족까지 모두 불러들여 10여 명의 대가족 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그동안 중국 정부기관에 취직도 했다. 북양 군벌정권의 거두 돤치루이의 부관으로도 일했다. 교제 범위가 신진 망명자보다 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창숙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1925년 초였다. 김달하의 초청으로 둘만의 은밀한 대화 자리가 만들어졌다. 김달하는 독립운동이 성공할 가망이 없다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은 끝에 마침내 폭탄 발언을 했다. 조선으로 귀국하라는 권유였다. 당신같이 학덕 높은 유학자는 경학원에 들어가서 유교를 진흥하는 일에 종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경학원의 제2인자 자리인 부제학으로 취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조선총독부에 교섭해 이미 승낙까지 받아놓았다는 말도 했다. 요컨대 독립운동을 청산하고 식민지 통치체제에 투항하라는 권고였다. 김창숙은 격노했다. 말리는 손을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김활란의 언니와 ‘치우친’ 결혼


김창숙은 동지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겪은 일을 폭로했다. 김달하의 정체가 뭔지 증언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회유 공작에 임하고 있으며 일본을 위해 일하는 밀정임이 틀림없다고 단언했다. 독립운동을 와해하려는 범죄자이므로 마땅히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5년 3월30일 김달하가 자택에서 피살됐다. 그 정황을 전하는 여러 문서가 있는데, 그중 두 기록이 주목된다. 하나는 사건 두 달 만에 게재된 <동아일보>의 상세한 보도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 뒤 간행된 <약산과 의열단> 기록이다. 양자는 같은 점도 있지만 세부적으로 차이가 크다. 양자의 공통성을 기반으로 사건 골격을 재구성해보자.

밀정 처형 집행자는 둘이다. 반일 비밀결사 구성원인 이인홍과 이기환이다. 어떤 비밀결사인가. 자료에 따라서 의열단이라고도 하고 다물단 소속이라고도 한다. 김창숙이나 이은숙(이회영 부인) 등과 같이 당시 베이징에 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다물단’이라고 지목하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물단은 베이징을 주요 활동 공간으로 삼아 아나키스트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의열투쟁 단체였다.

처형 장소는 김달하의 자택이다. 베이징 북쪽 안정문 차련호동 서구내로 북문패 23호다. 식구 10여 명이 사는 규모가 큰 집이었다. 두 집행자는 권총으로 가족 구성원을 위협해 결박했고, 김달하를 외떨어진 공간으로 이끌고 갔다고 한다. 처형 방법은 교살이다. 권총을 사용하면 총소리가 집 밖으로 울려퍼질 것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검 목에는 한 오라기 새끼줄이 감겨 있음이 발견됐다.

망명자임에도 가족이 많은 점이 눈에 띈다. 김달하는 1909년 이화학당에 재학 중인 19살 김애란과 결혼했다. 당시 42살이던 신랑과 나이 차이가 23년이나 지는, 몹시 치우친 혼사였다. 김달하는 두 번 상처했으며 아들 오형제를 둔 홀아비였다.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김달하는 가난한 처가를 위해 집을 한 채 사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김달하·김애란 부부는 결혼 뒤 5년 만에 베이징으로 이민 갔으며, 그곳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처갓집 식구를 불러들였다. 1921년 가을 장인, 장모, 처남 식구가 대거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사건이 일어날 때 그 집에는 김달하·김애란 부부가 낳은 두 딸 외에 전처 소생의 다섯 아들과 처갓집 식구까지 모두 12명이 살았다. 뒷날 미국 유학 이후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은 바로 김애란의 여동생이다.



1924년 중국 베이징의 조선인 망명자들. 앞줄 왼쪽부터 이회영, 미상, 김창숙. 뒷줄 오른쪽 김달하. 임경석 제공

김복의 편지가 발굴된 뒤


김달하 처형이 과연 적절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자도 있다. 김달하가 일본 밀정이라는 증거가 김창숙의 발언 외에 더 없지 않은가. 애국계몽운동의 지도자이자 베이징 조선인 망명자 사회의 유력자인 그에게 훼절할 만한 동기가 무엇인지 뚜렷하지 않다. 만에 하나라도 억울한 죽음일 가능성은 없는가. 김달하 사건을 조사하다보면 뇌리 한구석에 이런 의문이 남는다.

최근 김달하가 독립운동가의 귀순을 위해 노력해왔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발견됐다.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김복이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에게 보낸 편지가 발굴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상해임시정부는 200명이었으나 대부분 귀국하고, 현재 남은 사람은 60명입니다. 이 중 극렬분자는 40명에 이릅니다.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선 20만~30만엔이 필요합니다. …김달하와 함께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북경에 모아서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계책을 갖고 있습니다. 활동비로 김달하에게는 3만엔, 저에게도 2만엔을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이 편지에서 김달하가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훼절과 조선 귀환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 그 대가로 거액을 청구했다는 점이 뚜렷이 드러났다. 뇌리 한구석에 남아 있던, 억울한 죽음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말끔히 가시는 것을 느낀다.


참고 문헌

1.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제국관헌 이력서> 33책, 774쪽, 1972년.

2. 臨時統監府總務長官事務取扱 統監府參與官 石塚英藏, ‘機密統發第536號, 金東億의 身分取調 照會에 대한 回答’, 1909년 4월8일.

3. ‘회록’, <서우> 제1호, 45쪽, 1906년 12월1일.

4. 支那特命全權公使 小幡酉吉, ‘公제92호, 獨立紀念日에서의 鮮人의 行動 報告의 件’,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支那各地> 1, 1921년 3월5일.

5. ‘尋訪왔던 괴청년, 一去후에 流血慘屍’, <동아일보> 1925년 8월6일치 2면.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초판, 174~179쪽, 1947년 9월.

6. <시사기획 창: 밀정 2부-임시정부를 파괴하라> KBS, 2019년 8월20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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