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이름 없는 이들도 쇠갈고리에 찢겼다

강용흘의 체험적 소설 <초당>에 묘사된 3·1운동



1920년대 말 미국 하버드대학 교육대학원 졸업할 때쯤의 강용흘(왼쪽). 서재에서 책을 읽는 50대 강용흘의 모습. 김욱동 제공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시 펼쳐보고 싶은 문학작품들이 있다. 3·1운동 양상을 핍진하게 묘사했거나, 체험적 관찰 결과를 생생히 재현하는 작품들 말이다. 재미 작가 강용흘의 장편소설 <초당>이 그 두드러진 보기다.

강용흘은 ‘최초의 한국계 미국 작가’로 꼽힌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말에 북미로 건너가, 캐나다 댈하우지대학과 미국 보스턴대학, 하버드대학 교육대학원 등에서 수학했다. 1931년 뉴욕의 찰스스크립너스선스출판사에서 영문소설 <초당>(The Grass Roof)을 발간했는데, 그의 첫 장편소설이자 자전적 성장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성인 세계로 진입하는 한 소년의 성장 과정과 내면을 그린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대 조선의 현실이 잘 묘사됐으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차츰 이해해가는 소년의 시선이 담겼다.(<초당>, 강용흘 지음, 장문평 옮김, 종합출판범우, 2015)


작가 강용흘도 경찰에 체포돼 고초


<초당>은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작가는 이 소설 덕분에 2년 뒤 존 사이먼 구겐하임 재단에서 창작기금 펠로십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에서의 반향도 컸다. 이광수는 ‘강용흘씨의 초당(상·하)’이라는 제하에 소설 내용을 소개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평론가 홍효민도 ‘초당을 독(讀)하고’를 써서 관심을 나타냈다. 6년 뒤에는 프랑스어 번역판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간행됐는데, 우수한 번역 작품에 주는 ‘할퍼린 카민스키’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반향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 내 다른 소수민족 출신 작가들이 대다수 겪는 것처럼, 미국 문단과 학계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백인 남성 작가 위주의 미국 문단에서 그의 존재는 거의 잊혀졌다. 최근에야 비로소 <미국문학백과사전>(하퍼콜린스출판사, 2002)에 그의 작품이 소개됐을 뿐, 미국 문학사의 한 페이지에 오르기까지는 좀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 같다.(<강용흘 그의 삶과 문학>, 김욱동, 서울대학교출판부, 4~5쪽, 2004)

문학사적 평가가 어떻든 간에, 강용흘의 소설은 역사학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이 생생하게 묘사됐기 때문이다. <초당>은 3·1운동 전후 조선 사회의 내부에 대한, 잘 알려지지 않았던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3·1운동에 참가한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에 관한 서술이다. 그들이 겪은 격정과 고통을 생생히 형상화하고 있다.


강용흘 자신이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의 목격자이자 참가자였다. 1918년 함경남도 함흥 영생학교에서 중등교육과정을 졸업한 작가는, 이듬해 봄 서울에 있었다. 17살이었다. 어떻게든 미국에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그는, 북미 선교사들과 친교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태평양을 건너려면 일본 여권과 여행 경비가 필요했는데,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법을 그들만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올라간 강용흘은 호러스 G. 언더우드 여사가 영국 작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이 책은 지상에서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우화로서,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간주됐다.

소년 강용흘은 3·1운동에 휩쓸렸다. 서울 거리의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돼, 종로경찰서에 갇혀 심문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어렸기 때문에 사흘 만에 훈방됐다. 이 체험은 강용흘의 심리에 깊은 인상과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초당>에 그 정황이 상세히 묘사된 것을 보면 말이다.

길거리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되던 상황을 보자. 기마경찰이 시위 대열의 비무장 조선인들에게 쇠갈고리를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부상자가 속출했음을 증언한다. <초당>의 주인공 소년도 말 탄 일본인이 들고 있던 큰 쇠갈고리에 걸렸다. “갈고리는 내 목 안으로 파고들어 핏물을 옷에 뚝뚝 떨어뜨리고 뺨을 할퀴었으나, 다른 죄인들과 함께 줄지어 서라고 그가 말했을 때 나는 순순히 그의 말에 복종했다”고 한다. 그는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상처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경찰은 “툭하면 쇠갈고리를 우리의 머리와 어깨와 소매 위로 휘둘러 여러 차례 우리에게 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고 썼다.


<초당>, 미국 뉴욕 찰스스크립너스선스(Charles Scribner’s Sons)출판사, 1931년판 겉표지(왼쪽). <초당> 1931년판 속표지. 임경석 제공

사흘간 계속 된 몽둥이 고문


소년은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조그만 유치장 안에 다른 소년 13명이 함께 수감됐다. “모두들 중상을 입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귀가 찢어졌고, 또 어떤 사람은 팔이 찢어졌다.” 유치장은 좁고 불결했다. “통풍 장치가 전혀 없었는데, 창문도 없고 우리가 전부 앉을 만한 여유도 없었다.” 수감 시설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시설 부족은 갇힌 자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증언이 더 있다. 3·1운동 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작가 심훈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두 간도 못 되는 방 속에, 열아홉 명이나 비웃두름 엮이듯” 갇혀 지냈다. 여름에 더위가 시작되자 고통이 가중됐다. “날이 몹시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려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는” 조건에서, 수감자들은 다리도 뻗지 못하고 살을 맞댄 상태로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워야 했다.(‘어머님께’, 심훈, 1919년 8월29일.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다시 <초당>의 주인공에게로 돌아가자. 한밤중에 심문이 시작됐다. 새벽 1시에 호출된 소년은 “두 손을 앞으로 묶이고 수갑을 찬 채” 심문관 앞으로 불려갔다. 구타가 시작됐다. 너무 천천히 걸어도, 너무 빨리 걸어도 등허리를 차였다. 심문실에 들어갈 때도 구둣발에 차여 꼬꾸라졌다. 그는 조선어만 아는 척했다. 경관은 조선어를 할 줄 몰라 통역을 불렀는데, 통역은 천민 출신의 시골 사람이었다. 심문관은 이름, 나이, 직업, 종교, 그해 봄 서울에 오게 된 경위, 만세를 부르게 된 경위 등을 물었다. 질문과 답변이 오간 뒤, 심문관은 묘하게 웃으면서 “좋다, 매 좀 맞아봐라”라고 내뱉었다. 두 경관이 각목을 각각 집어들었다. 무자비한 매질이 시작됐다. 머잖아 소년은 기절해버렸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소년에게 물을 먹이더니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새벽 5시까지 심문이 계속됐다. 이게 첫 번째 심문이었다.

똑같은 몽둥이 고문이 심문 때마다 되풀이됐다. 일요일 새벽에 시작된 심문은 수요일에야 끝났다. 경관들은 판단을 내렸다. 소년을 가리켜 부화뇌동하여 단순 가담한 자라고 규정했다. “독립운동 기간 중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구경꾼인데 마음이 약해서 만세를 불렀다”라고. 결국 소년은 훈방 처분을 받았다.

우리는 훈방 처분을 받은 사람들조차 가혹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총독부 집계에 따르면, 3월1일부터 6월 말까지 검사 처분에 부친 3·1운동 피검자 수는 1만6908명이었다.(조선총독부, ‘소요사건검사처분인원표’, 1919년 7월8일.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其二>, 223~228쪽, 1978년)


소설엔 최팔용 언급도


그 숫자가 방대한 점이 놀랍다. 여기에는 검사국에 송치되기 이전에 경찰과 헌병이 즉결처분을 하거나 훈방한, 훨씬 더 많은 피검자가 배제됐음을 유의해야 한다. <초당>에는 공식 집계 과정에서 누락된, 이름 없는 참여자들의 수난이 생생히 묘사됐다.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경찰에게 고문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상습 행위였다. 피의자로부터 범죄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으레 채택하는 심문 방법으로 간주됐다. 일제강점기 일간신문에는 고문 피해 기사가 계속 실렸다. 은폐, 검열 등으로 보도되지 않도록 막는데도 그랬다. 고문이 반체제 정치범에게만 가해졌던 것은 아니다. 민사·형사상 통상적인 범죄 사건의 피의자도 피해가지 않았다.

<초당>에는 주인공의 숙부가 겪은 고문 체험이 상세히 기술됐다. 105인 사건에 연루돼 7년 징역형을 받은 숙부는, 출감 뒤 완전히 변해버리고 말았다. 끔찍한 고문을 겪은 탓이었다. 숙부는 열하루 동안 고문당했다. “양쪽 엄지손가락을 묶어 매달아놓았는데, 두 발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매달려 있었지. …마구 때리더구나. 자기들이 묻는 건 무엇이든 다 자백하라는 거야. 그러니 내가 자백한 것은 사실이 아니었어. 그저 네, 네 할 수밖에 없었지. 아이구 그 고문이라니. 얼마나 지긋지긋하던지! 열두 번도 더 당했어. 놈들한테 당한 것은 체면상 차마 다 말하지 못하겠다. 세 번은 기절을 했는데, 깨어나보니 나는 지저분한 마룻바닥에 눕혀져 있고, 한 경관이 내 입에 물을 먹이고 있더구나. …그들에게 채찍질당한 것이 모두 몇 번이었는지 일일이 다 기억나지도 않아. 그들은 나를 발가벗겨 양손을 뒤로 결박시켜놓고 매질을 해댔는데, 그 중간중간에 경관이 내 몸의 가장 부드러운 곳에다 담뱃불을 가져다 대더구나.”

강용흘은 <초당> 곳곳에서 고문의 실상과 폐해를 설명한다. 일본 식민지 통치가 저들의 선전과 달리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지를 폭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초당>에는 3·1운동 지도자들을 묘사한 부분도 있다. 그중 단연 주목되는 것은, 2·8 독립운동의 지도자이자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개척자인 최팔용에 대한 것이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16년, 최팔용은 25살가량의 키가 크고 매우 창백한 청년이었다. 키는 컸으나 비쩍 말랐던 것 같다. 명주옷을 입은 그가 마치 잠자리같이 보였다고 한다. 최팔용은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을 근거로 하는 집회를 여럿 주도할 만큼 활동적이었다. 그곳에는 조선인 유학생 대부분이 모였다. 기독교인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도 있었다. 그는 유학생들 내에서 비밀결사를 만들었고, 먼저 귀국한 유학생들이 국내에서 결성한 비밀결사와 지속적으로 연계했다고 한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기록


강용흘이 최팔용에 대해 그처럼 잘 알았던 이유가 있다. 동향이었다. 함경남도 홍원이다. 최팔용은 홍원군 홍원면 남당리에서 태어났고, 강용흘은 인접한 운학면 산양리에서 출생했다. 두 집안은 겹으로 혼맥을 맺고 있었다. 최팔용의 누이는 강용흘의 당숙 장손과 결혼했고, 그의 아내는 강용흘 조모의 조카였다. 달리 말하면 최팔용은 강용흘의 진외가 사위였고, 최팔용의 누이동생은 강용흘의 당숙 집안 손자며느리였다. 두 집안 사이에 긴밀한 왕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초당>에는 3·1운동 전후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에 관한 흥미로운 관찰 기록이 담겨 있다. 소설이니만큼 그 속에 적힌 얘기가 모두 사실은 아니겠지만, 그 시절 조선인들 삶의 모습을 반영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해서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볼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1920년대 연애소설인 듯, 연애소설 아닌

심훈 소설 <동방의 애인> 속 상하이 망명객들



작가 심훈의 20대 모습. 압록강 철교와 뗏목. 신문 연재소설 <동방의 애인> 제1회 삽화(안석주 그림). 임경석 제공

심훈의 글 중 <동방의 애인>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신문 연재소설이다. 일제강점기 1930년 10월29일부터 12월10일까지 <조선일보>에 실렸다. 그런데 연재소설치고 발표 기간이 이례적으로 짧은 점이 눈에 띈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단기간에 머물렀고, 연재 횟수도 39회에 불과했다. 까닭이 있었다. 내용이 불온하다고 판정한 식민지 통치기구 검열관에게 걸려서 연재가 중단됐다.

이 작품은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 서사 전개와 플롯(구성)이 불완전한 만큼 문학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그래서일까. 문학평론가들이 보기에 <동방의 애인>이 예술적 성취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일찍이 팔봉 김기진이 이 작품을 가리켜 새로운 통속소설, 혹은 마르크스주의 통속소설이라고 평가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학적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의미가 있다. 1920~21년 중국 상하이에 망명한 조선인 혁명가들의 삶을 형상화했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상하이는 반일 독립운동가에게 최선의 활동 근거지였다. 일본 경무국 관료들은 상하이를 ‘해외 반일 조선인들의 음모 책원지’라고 일렀다. 그뿐만이 아니다. 상하이는 동아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다. 조선과 중국의 사회주의 단체가 그곳에서 싹을 틔웠다.


<조선일보> 1930년 10월29일치. 임경석 제공

검열에 걸려 두 달 만에 연재 중단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상하이에 머무른 조선인 수는 100명 정도였다. 대체로 상업이나 노동에 종사하는 평범한 교민이었다. 1919년부터 달라졌다. 망명객이 몰려들었다. 1919년 5월에 조선인 교민 수가 1천 명을 넘었다. 그 수는 이듬해까지 계속 늘어났다. 심훈은 상하이에 몰려든 망명객들의 삶에 돋보기를 갖다 댔다.

제목이 말하듯 <동방의 애인>은 사랑에 관해 얘기한다. 개인의 사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작자의 말’에서 심훈은 자기가 묘사하려는 것은 ‘남녀 간에 맺어지는 연애’가 아니라고 썼다. ‘어버이와 자녀 간의 사랑’도 아니었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더 크고 깊고 변함이 없는 사랑’이었다. 민족과 계급에 대한, 공적인 사랑이었다. ‘그 사랑에 겨워 껴안고 몸부림칠 만한’ 애인을 그리려 한다고 썼다. 일제의 검열을 고려해 모호하게 말하지만, 피억압 민족과 계급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구상했음이 틀림없다.


소설 속 주인공 ‘동렬’이 현실 세계의 박헌영을 모델로 삼았다는 견해는 연구자들에게 널리 수용된다. 소설 속에서 동렬은 “뜨거운 정열의 주인공이면서도 좀체 자기의 감정을 표면에 나타내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급한 사정이 있더라도 계획했던 일이 삐뚤어진 코스를 밟게 될 경우를 미리 점쳐보고, 그다음에는 이러저러해야겠다는 제2, 제3의 방침을 세워놓고서야” 그때 비로소 행동에 착수했다고 한다. “침착하고 두뇌가 면밀하여” 혁명단체의 ‘책임비서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헌영의 실제 성격도 그랬다. 경성고등보통학교 동급생 최기룡의 증언에 따르면, 학창 시절 박헌영은 말이 없고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으나, 침착했고 사려가 깊었다고 한다. 학적부에 기재된 4학년 담임선생의 평가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성질’을 “온순 과묵하고 착실”하다고 표현했다.1

작가 심훈이 박헌영의 성격과 개인적 면모를 잘 아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심훈은 1915년 경성고보에 입학한, 박헌영의 동창생이었다.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사이였다. 두 사람은 학창 시절을 같이 겪었을 뿐 아니라, 상하이 시절에 함께 혁명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훈은 뒷날 쓴 시에서 자신과 박헌영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하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사이였다고 표현했다.2


박헌영은 동렬, 주세죽은 세정


동렬의 연인 ‘세정’이는 주세죽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눈이 맑고 살빛이 흰 여성으로 묘사됐다. “총명, 바로 그것인 듯한 맑은 눈”을 가졌으며, “살갗은 희나 좀 강팔라서 성미는 깔끔할 법하여도 그야말로 대리석으로 아로새긴 듯한 똑똑한 얼굴의 윤곽”을 지닌 인물이다. 3·1운동 때는 여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운동을 주도했고, 상하이 망명을 결행할 정도로 용기 있는 여성으로 그렸다.

현실에서 주세죽도 그랬다. 그녀는 용모가 빼어났다. ‘동양화 속에서 고요히 빠져나온 듯한 수려한 미인’이라는 일컬음을 받았다. 3·1운동에도 참가했다.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서 시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1개월 동안 유치장에 수감돼야 했다. 머잖아 주세죽은 상하이에 망명했으며, 사회주의를 수용해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당 조직에 가담했다. 소설 속에서 세정과 동렬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주세죽과 박헌영은 결혼식을 올렸다. 뒷날 제1차 공산당 사건 때 작성된 박헌영의 피고인 조서에 따르면, 둘은 1921년 봄에 부부가 됐다고 한다.

또 한 사람, 중요한 등장인물이 있다. 동렬의 절친한 벗 ‘박진’이다. 그는 성격이 동렬이와는 대조적이었다. “걱실걱실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덤벙대는 듯하나, 의롭지 못한 일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정의감이 굳센 용감한 청년”이었다. 3·1운동 당시 ‘××공보’라는 지하신문 발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체포됐으며, 상하이에 망명한 뒤로는 ‘○○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걷는 것으로 묘사됐다. 부인이 있었다. 일찌감치 부모 뜻에 따라 구식 결혼식을 올려서 “시골집에 마음에 맞지 않는 아내가 있”다고 서술됐다.

‘박진’의 모델은 곧 김단야였다고 판단된다. 소설 속 박진과 마찬가지로 김단야도 기혼이었다.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에는 아내 윤재분(?∼1974)이 살고 있었다. 어린 아들 하나, 딸 하나를 키우면서 평생 시골집을 지키고 살았다. 김단야는 3·1운동에도 참여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반도의 목탁’이라는 이름의 지하신문 발간에 가담했고, 고향에 내려가서 농민시위를 조직했다. 관헌에 체포돼 태형 90대라는 야만적인 형벌을 받았다.

상하이 망명 뒤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한 것도 사실이었다. 뒷날 김단야가 쓴 자서전 기록에 따르면, “나는 1920년 1월 중순 상하이를 떠나 그때 조선인 혁명가들을 위한 군사학교가 있던 광둥으로 갔다”고 한다. “이 군사학교는 친일파 돤치루이의 북양(북경) 정부에 대적하는, 쑨원 지도하의 광둥 정부에 의해 설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학 생활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해 4월에 되돌아와야 했다. 쑨원파가 광시 군벌 루룽팅의 군사행동에 밀려서 광둥에서 추방된 탓이었다.3

김단야가 광둥에 있는 군관학교에 한때 입학한 정황은 심산 김창숙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유림을 대표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창숙은 그즈음 조선인 청년 간부 교육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광둥 정부의 지원을 받아 청년 망명객들을 군사와 정치 분야 간부로 양성하는 사업이었다. 첫 번째 성과가 나타났다. 청년 50명을 뽑아 광저우에 있는 군관학교와 고등교육기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시켰다. 청년 명단 일부가 알려졌는데, 그 속에 김주(金柱)가 있었다. 김단야가 상하이 망명 시절에 썼던 가명이다.4


중국 상하이에 머물 때의 박헌영과 김단야, 주세죽(왼쪽부터). 임경석 제공

실존 인물의 행적과 다른 부분도


소설 속 주인공들은 공통점이 있다. 3·1운동에 참여했고,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사회주의를 수용했다. 귀착점은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었다. 동렬, 세정, 박진 등은 3·1운동 직후 망명지 상하이에서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한 초창기 마르크스주의자를 표상하는 캐릭터(인물)였다. 심훈은 조선 사회에서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출현하는지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소설 속 캐릭터의 행적을 현실의 특정인과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등장인물의 행적이 곧바로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소설 속 동렬의 행적을 모두 박헌영의 그것과 같다고 여기면 안 된다.

예를 들어보자. 소설 속에서 동렬은 1921년 7월 다른 두 동지와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로 출발했다.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자동차로 고비사막을 넘는 노정을 택했다. 몽골을 지나 러시아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일정이라든가 세부 묘사가 생생한 까닭에, 독자는 진짜 박헌영이 모스크바로 향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박헌영은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단지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 자격으로 대표자를 선정·파견했을 뿐이다.5

또 있다. 소설 첫머리에 박진이 열차 편으로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잠입하는 드라마틱한(극적인)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미 국내에서 잡지사 기자라는 합법 신분을 확보한 동렬과 접선하는 장면이 뒤를 잇는다. 이 장면들도 실제와는 다르다. 1922년 4월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인 박헌영과 김단야, 임원근 세 사람이 국내 공작을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려다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게 사실이다.

그 외에 박진이 군관학교를 졸업하고서 장교로 임관했다거나, 동렬과 박진이 고등보통학교 동창생이라는 언급 등이 있다. 모두 실제와는 다르다. 심훈이 고안한 픽션(허구)이었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요컨대 소설 속 주인공들을 실재하는 특정인을 모델로 그려낸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역사적 사실로 구성된 것은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등장인물들은 실제 인물의 한 측면이 반영됐을 뿐이다. 게다가 픽션의 요소, 지어낸 얘기가 뒤섞여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심훈 자신도 상하이 망명객


심훈은 1920~21년 상하이에 머무른 적이 있다. 자신이 상하이 망명객이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녹여서 소설을 썼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서술이 역사학자의 눈길을 끈다. 어떤 사료보다 생생하게 역사적 진실을 전달해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상하이 거리 풍경을 묘사한 것이나, 그 도시에서 막 싹튼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단체 활동 모습을 서술한 것이 그 예다. 국경도시 신의주를 통해 열차 편으로 잠입하는 비밀 활동 참가자의 행동과 심리 묘사도 압권이다. 그를 색출·체포하려는 경찰, 헌병, 세관 관리 등의 언행도 흥미롭다. 역사학자들은 <동방의 애인>에 주목한다. 1920년 상하이 한인 망명자 사회의 내면을 묘사하고, 특히 사회주의가 처음 수용되는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1.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56~57쪽, 2004.

2. 심훈, ‘박군의 얼굴’, <沈熏文學全集> 61쪽, 1927년 12월2일.

3.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전),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1937년 2월7일.

4. 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 <국역 심산유고>, 723쪽, 1979년.

5. 임경석, ‘극동민족대회와 조선대표단’, <역사와 현실> 제32호, 한국역사연구회, 1999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혁명가의 첫 페이지에 기록된 3·1운동

김단야가 말년에 쓴 ‘자전’ 통해 3·1운동에서 한 역할 확인할 수 있어


1919년 3월24일 경북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 시위사건 판결문에 김단야의 본명 ‘김태연’이 쓰여 있다. 임경석 제공

김단야는 생애 말년에 자신의 혁명운동 참여 내력에 관해 글을 썼다. ‘자전’(自傳)이라는 제목의 10여 쪽짜리 원고였다. 이 글에서 그는 언제 처음 혁명운동에 참여했는지를 밝혔다. 바로 3·1운동 때였다. 19살 나던 해, 배재고등보통학교 3학년이던 시절에 혁명적 삶을 시작했노라고 썼다.

명단에 누락된 배재고보 학생 대표


“나는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의 선언문 사본을 입수하여 그것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서 많은 복본을 만든 후 그것들을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경성에 있는 모든 고등보통학교의 대표들로 구성된 지하 학생위원회의 조직자로 활동했다. 이 위원회는 3월 봉기를 준비하는 센터와 연락을 취하면서 시위에 학생 대중을 동원하고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위원회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역할을 분담하여 선언서를 외국 영사관과 선교단에 전달했고, 나도 그것을 영국 영사 및 프랑스 선교사에게 직접 전해주었다.”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의 선언문’이란 바로 2·8독립선언서를 가리킨다.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이 고보 재학생 김단야에게 큰 감화와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필사로 많은 복본을 만들었다. 동료 학생들에게 배포하기 위해서였다. 김단야는 여러 차례 필사로 내용을 숙지했을 것이다. 2·8독립선언서의 정세관과 정책론 등이 그의 내면에서 큰 공명을 얻었으리라고 판단된다.

김단야가 경성 시내 고보생 대표들로 이뤄진 학생위원회에 참여했다는 문장이 주목된다. 그는 배재고보 대표 자격으로 그 일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전야에 이러한 비밀결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진다. 종래에도 학생단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다. 1919년 1월 초순과 하순에 중국음식점 대관원에서 경성 시내 각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이 몰래 모임을 열어 학생 지도부를 구성했다는 사실 말이다. 이른바 ‘대관원 회합’이었다. 하지만 지도부는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로 이뤄졌을 뿐, 고보생 대표들은 포함하진 않았다. 고보별 학생 대표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2월 초쯤 전문학교 학생단 대표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해 고보생 대표자 조직을 만들었다. 이때 망라된 고보와 그 대표자들은 다음과 같다.

경성고보: 박쾌인, 김백평, 박노영. 중앙학교: 장기욱. 보성고보: 장채극, 전옥결. 경신학교: 강우열, 신창준. 선린상업: 이규송, 정세현.


이 명단은 완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 경성에는 8개 고등보통학교가 있었는데 그중 배재고보·휘문고보·양정고보 세 곳이 누락돼 있다. 이 명단 외에 숨겨진 사람이 더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김단야의 진술은 이런 역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게 해준다. 누락된 세 학교 가운데 배재고보 학생 대표가 누구였는지는 이제 짐작할 수 있다.


미성년자여서 매 90대 맞고 석방


김단야에 따르면, 고보생 대표들로 이뤄진 비밀 학생위원회는 ‘3월 봉기를 준비하는 센터’와 유기적인 연락을 했다. 바로 민족대표 33인을 가리킨다. 이 진술에서 우리는 민족대표와 연계하면서도 그와 독립적으로 비밀결사 2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전문학교 학생 대표 조직과 고보생 대표 조직이다. 이 중 고보생 대표 조직, 곧 김단야가 말하는 비합법 학생위원회는 3·1운동에 즈음해 세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첫째, 만세 시위 현장에 학생 대중을 동원한다. 둘째, 독립선언서를 경성 시내 곳곳에 살포한다. 셋째, 독립선언서를 경성 주재 외국 영사관과 선교단에 전달한다.

경성의 외국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는 대목에 유의하자. 기존 연구에 의하면 이 역할은 배재고보 교사 김진호가 맡았다고 한다. 그의 지시에 따라 배재고보 학생 대표들이 3월1일 정오에 각자 맡은 외국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실명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중국영사관에 전달한 장용하뿐이었다. 그는 김진호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2월27일 중국영사관의 위치와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 사전 답사를 했다. 이튿날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았고, 3월1일 정오 중국영사관에 가서 이를 전달했다고 한다.

기존 연구 성과와 김단야의 진술 사이에 역할 책임자가 누구였는지에는 불일치하는 점이 있지만 공통점도 있음에 유의할 만하다. 배재고보 학생 대표들이 선언서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김단야와 장용하 등이 영국영사관과 프랑스 선교사, 중국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준비 과정에만 멈추지 않았다. 김단야는 3월1일 이후에도 쉼 없이 반일운동에 참여했다. 그의 진술을 들어보자.

“3월1일 후에 나는 학교 동무들과 함께 ‘반도의 목탁’이라는 이름의 지하 인쇄물을 만들었다. 3월 중순에 고향 쪽으로 내려가 시위를 두 곳에서 성공적으로 조직했으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로부터 석 달 후, 징역 3개월 대신에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는데, 그 이유가 판사의 말로는 내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3일에 걸쳐 매 90대를 맞고 난 후 석방되었다.”


김단야 등이 소속된 비밀결사가 간행한 ‘반도의 목탁’ 제2호 필사본. 임경석 제공

시위로 체포돼, 검거되지 않은 김기진


지하 인쇄물 ‘반도의 목탁’ 제작에 참여했다는 정보에 눈길이 간다. 만세시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19년 3~4월에는 수많은 지하 인쇄물이 조선 전역에 유포됐다. 경성에서 발간된 정기간행물만 해도 <조선독립신문> <자유민보> <진민보> <국민신보> <경성단신문> <자유신종보>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 ‘경고문’ ‘격문’이라는 제목 아래 숱한 반일 인쇄물이 나왔다. ‘반도의 목탁’은 경찰에게 적발된 탓에 관련자들이 누군지 이미 알려져 있다.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배재고보 3학년 학생 장용하·이봉순·염형우와 경성고보생 이춘봉, 중앙학교 학생 서정기 등 고보생 5명이 주역이었다. 이들은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각각 1∼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반도의 목탁’ 팀의 전부가 아니었다. 체포되지 않은 구성원들이 있었다. 김단야 외에 김기진이 있었다. 뒷날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을 개척한 팔봉 김기진도 구성원이었다. 배재고보 3학년이던 김기진은 같은 반 반장이던 장용하와 함께 비합법 유인물을 만드는 작업에 참가했다고 회고했다. 3월1일 밤부터 장용하의 하숙집에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새우잠을 자면서 인쇄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구는 등사판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서울 관훈동에서 소격동으로 이르는 골목을 걸으면서 집집마다 대문 안으로 인쇄물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김기진은 3월5일 남대문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까닭에 이 비밀단체 검거 사건에서 벗어났고, 김단야는 3월 중순 귀향함으로써 그렇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경북 김천 개령면 동부동이 김단야의 고향이었다. 귀향한 이후에도 그는 쉬지 않았다. 고향에 내려간 3월 중하순은 3·1운동이 ‘개시 국면’을 넘어 시위 군중과 탄압 군경 사이에 일진일퇴를 되풀이하는 ‘파상 국면’에 있었던 때다. 김단야는 김천의 청년들을 결속해 만세시위를 꾀했다. 그 결과 두 차례 만세시위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그중 한 번은 3월24일 고향 마을 뒷산에서 벌어진 산상 만세시위운동이었다. 이 만세시위는 일본 관헌의 탄압에 노출되고 말았다. 만세시위를 벌였다고 의심받는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체포됐는데 그중 네 사람이 재판에 회부됐다. 20~38살 청년들이었다. 그 속에는 학생 김태연(金泰淵)이 포함됐다. 김태연은 바로 김단야의 본명이었다. 피고인들은 그해 4월1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징역 3개월에 처해야 하지만 나이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태형 90대에 처한다고 선고했다.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사실은 3·1운동 수감자가 급격히 늘어나서 수형 시설이 부족했기에 그런 결정을 했던 것이다.

태형이란 엉덩이를 나무 막대로 내려치는 형벌을 말한다. 조선 강점 직후 1912년 ‘조선태형령’으로 법제화된, 일본 제국주의의 무단통치를 상징하는 제도였다. 식민지 토착민인 조선인에게만 적용하는 차별적이자 모욕적인 징벌이었고, 인간 몸에 직접 고통을 가하는 야만적인 형벌이었다. 김단야와 그 동료들은 하루 30대씩 사흘에 걸쳐 모두 90대의 매질을 당했다.


3·1운동 이듬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을 무렵의 김단야. 임경석 제공

혁명가로서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


김단야는 3·1운동의 숨은 공로자였다. 숱한 무명의 유공자와 희생자들처럼 그의 3·1운동 참가 사실도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김단야의 3·1운동 행적이 밝은 햇빛 아래 드러났다. 그는 3·1운동 발발 이전에 이미 비밀 학생위원회 일원이었고, 시위가 일어난 뒤에도 비밀결사 ‘반도의 목탁’ 팀의 구성원으로서 반일 유인물의 제작과 배포에 헌신했다. 3월 중순에는 농촌 만세시위운동 조직화에 참여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야만적인 형벌을 감내해야 했다. 3·1운동은 김단야에게는 혁명가로서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이었다. 비밀결사 참여, 외국 망명, 사회주의 수용, 귀국 도중 체포와 형무소 수감,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 결성 등으로 숨 가쁘게 이어지는 김단야 혁명운동사의 첫 페이지에는 3·1운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참고 문헌

1.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전),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1937년 2월7일.

2. ‘3·1항쟁기의 한국학생운동-국내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 <논문집> 8, 숙명여자대학교, 5쪽, 1968년.

3.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2>, 탐구당, 166쪽, 1966년.

4. ‘배재고등보통학교 3년생도 장용하 등 판결’, , <독립운동사자료집 5: 삼일운동 재판기록>, 229쪽, 1971년.

5. 김팔봉, ‘片片夜話 71, 배재와 3·1운동’, , <동아일보> 1974년 5월23일치.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1925년 9월24일 경성에 ‘적기’가 나부꼈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 다면적 영향력 행사한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초대 소련총영사 바실리 샤르마노프(왼쪽).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임경석 제공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이 개관하던 날, 일본 경찰들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혹여 은밀하게 접근하는 자가 있지 않은가? 영사관 건물 안팎에 배치된 정사복 경찰들은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날은 1925년 9월24일이었다. 낮 12시 세 발의 폭죽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그것을 신호로 소련의 붉은 깃발이 게양됐다. 하객으로 참석한 총독부 몇몇 관리와 영국·프랑스·중국 영사관 소속 외교관들이 박수를 쳤다. 경성 하늘에서 적기가 힘차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이 경성 하늘에 내걸린 모습은 대단히 이채로웠다.

일소기본조약으로 소련총영사관 개관


경성에 소련 외교기관이 들어설 수 있었던 근거는 일소기본조약이었다. 1925년 1월20일 소련과 일본 사이에 체결되고 2월25일에 비준된 조약이었다. 정식 명칭은 ‘일본국 및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간의 관계에 관한 기본적 법칙에 관한 조약’이었다. 이는 소련과 일본의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기본 원칙을 정한 것으로 양국 간 첫 번째 조약이었다.

소련 외교관이 하나둘 입국했다. 경성총영사관의 초대 총영사 바실리 샤르마노프는 일본 도쿄에서 부임했고, 부영사 드미트리 무르친은 중국 하얼빈에서 전근했다. 이들은 가족과 행정 실무 요원 몇 명을 인솔했다. 총영사관에 딸린 러시아인은 12명이었다. 이 중 6명은 가족이고, 6명은 구체적인 소임을 맡은 외교부 임직원이었다. 총영사, 부영사, 통역, 사무원, 타이피스트, 고용인이 한 팀이었다. 이외에 조선인 조력자 서너 명이 고용됐다. 통역하고 신문기사를 스크랩, 번역하는 이들이었다.

총영사관 건물로 경성 시내 정동에 있는 대한제국 시절의 옛 러시아대사관이 제공됐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 8년간 비어 있던 건물이었다. 소련 쪽은 수만엔의 수리비를 들여 영사관 구내의 정원과 길을 단장했고 출입문도 새로 만들었다.


일 경찰, 조선인 사회주의자 움직임 주시


경찰은 소련총영사관 안팎을 면밀히 주시했다. 영사관 존재 자체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게 심리적 자극과 충동을 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소련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를 비치해 일반인 출입을 허용하는 총영사관 도서실이 치안 교란의 원천이 될 우려가 있었다. 매년 11월7일 열리는 러시아혁명 기념일 행사도 그랬다. 축하차 총영사관을 방문하거나 축전을 보내는 조선인들이 있었다. 어느 경우나 다 엄중한 경계 대상이었다.

경찰이 감시한다는 사실을 웬만한 조선인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총영사관을 공공연히 출입하는 자는 적었다. 총영사관 쪽도 조심했다. 일본 관헌과 마찰을 피하고 싶어 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조선인들의 총영사관 출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총영사관 출입문을 폐쇄해 조선인 출입을 막기도 했다. 1926년 6월 망국의 군주 순종 황제가 운명했을 때 그랬다. 3·1운동 같은 독립운동의 일대 고조 현상이 재현될지도 모른다고 예측되자 일시적으로 출입문을 폐쇄하기도 했다.

경찰이 보기에, 소련총영사관이 조선인 사회주의자를 지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조선 내외의 비밀 연락 거점이 되거나, 불온사상의 선전 기지가 될 가능성도 매우 적었다. 그곳에서 비밀결사 운동자금이 유출되거나 전달될 우려도 없었다. 일본 경찰은 그처럼 판단했다.


조선어 신문, 조선-소련 관계 증진 기대감


소련총영사관 관련 기사는 일간신문의 뜨거운 소재였다. 경성 하늘에 적기가 펄럭이게 됐으니, 매우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붉은색만 봤다 하면 탄압하기 위해 죽을 둥 살 둥 덤벼드는 경찰 당국도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됐다고 풍자하는 신문도 있었다. 영사관 주변에 경찰을 겹겹이 배치할 터이니 순사들로 이뤄진 ‘순사성’을 쌓을 게 틀림없다고 비꼬는 만평도 실렸다.

이제 막 부임한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샤르마노프’ 총영사의 일거수일투족은 관심의 초점이 됐다. 40살, 모스크바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직업 외교관이었다. 그가 경성역에 도착한 것은 1925년 9월5일 저녁 7시였다. 직전 근무지인 도쿄 소련대사관을 떠나서 기차편으로 새 근무지에 왔다. 일행은 둘이었다. 통역 겸 수행원인 ‘게오르기 키바르친’이 동행했다. 그는 레닌그라드동양어학전문학교 학생으로 20대 젊은이였다. 두 사람은 경성역 인근에 있는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마땅히 영사관에 짐을 풀어야 하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총독부와 교섭해 영사관 부지를 받고, 돈을 들여 수리하며, 영사·대민 업무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그가 새로 해야 할 일이었다.

호텔 방에 든 지 얼마 안 돼 <조선일보> 기자가 찾아왔다. 인터뷰 요청이었다. 기민함 덕분에 <조선일보>는 다른 신문들보다 먼저, 9월6일치 지면에 신임 소련 총영사의 동정과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신문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소련 총영사 기사를 쏟아냈다.

일간신문들 지면에는 감지할 수 있는 공통성이 있었다. 기대감이었다. 총영사관이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를 증진하는 데 공헌하기를 바라는 심리였다. 신문 지면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심리 현상은 감격이었다. 한 예로 <조선일보> 1925년 9월7일치 사설을 보자. ‘소련영사 부임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으로 논설부 기자 신일용이 쓴 사설은 조선 사람들의 격정을 토로한 명문장으로 손꼽힌다. 소슬한 경성의 가을 하늘에 적기가 나부끼는 현실에 무한한 감격을 느낀다고 썼다. 적기는 정의를 위해 헌신한 많은 의사의 피로 물들인 깃발이며, 그것은 인류 역사의 투쟁 시기를 표상하는 상징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튿날인 9월8일치 <조선일보> 사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또 신일용이 펜을 들었다. ‘조선과 러시아와의 정치적 관계’라는 제목이었다. 조선의 민족적·계급적 해방운동은 소비에트러시아의 세계혁신운동과 보조를 일치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경찰은 이 사설을 문제 삼았다.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고 일본제국의 국체를 타파하는 선동적인 기사라고 간주했다. 중벌을 가하려 했다. 9월8일치 신문에 압수 처분을 내리고 그다음 날에는 <조선일보> 무기 정간 처분을 내렸다. ‘정간’은 신문 발행을 중단시키는 행정처분으로 신문 경영에 치명적인 조처였다. 신문사 존폐와 관련된 심각한 억압이었다. 집필자도 무사하지 못했다. 신일용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됐다.


고려공청 책임비서가 발급한 김단야의 위임장. 임경석 제공

총영사 인터뷰한 기자는 조선공산당 4인방


샤르마노프 총영사는 본국 외무성으로 보내는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경성에 도착한 직후 상황이었다.

“현지 신문기자들을 만났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모스크바에서 남만춘으로부터 신문사에서 일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 15명의 성명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Gr. 동무에게서 얼마 전 그 명단 속에서 가장 믿을 만한 4명의 이름을 보충적으로 받았습니다. 내가 도착한 지 20분 뒤에 경성역 호텔에 그 명단 속에 있는 한 사람이 신문기자 자격으로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처럼 빠른 접근에 깜짝 놀랐고 의혹을 품었습니다. 얼마 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조선일보사에서 근무하는 김단야인데, 그의 기자 신분을 이용하여 곧바로 나를 만났던 것입니다.”

경성에 도착한 직후, 호텔방에 들어간 지 불과 20분 만에 신문기자가 방문했다고 한다. 그 기자는 <조선일보> 소속의 김단야 기자였다. 샤르마노프 총영사는 그를 선뜻 믿을 수 없었다. 너무나 빨랐기 때문이다. 경찰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소재 정보를 그처럼 실시간으로 탐지할 수 있을까? 경찰 지시를 받고서 일하는 사람 같았다.

다행히 샤르마노프에게는 믿을 만한 동지들의 명단이 있었다. 두 종류였다. 그중 하나는 15명의 이름이 적혔는데, 모스크바에 있을 때 남만춘에게서 받았다. 남만춘은 조선공산당의 국제당 가입 외교를 지원하려 맹활약 중인 유명한 혁명가였다. 다른 하나는 가장 믿을 만한 4명의 이름이 쓰인 명단이었다. ‘Gr. 동무’라는 이가 제공했다고 한다. 아마 ‘그리고리 보이틴스키’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대회 개최와 그 당의 국제당 가입을 맨 앞에서 지휘한 국제당의 동아시아 전문가였다.

샤르마노프 총영사가 김단야를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Gr. 동무의 리스트’ 덕분이었다. 4명의 동지란 누군가. 조선공산당에서는 김재봉과 김찬이고, 고려공산청년회에서는 박헌영과 김단야였다. 이 네 사람이 보이틴스키가 지목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터였다. 하지만 김단야는 신뢰 구축을 위해 위임장까지 제출했다. 고려공청 책임비서 박헌영이 발행한 1925년 9월10일치 위임장이었다. 수신자는 샤르마노프 총영사였다. 이 조그만 증빙 문건에는 김단야가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이라는 점, 현안에 관한 상호 협의를 위해 파견한다는 점 등이 명시돼 있었다.


국내 사회주의-국제기구 연락체계 구축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의 설립은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다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언론 역사에 부침을 초래했고, 사회주의 운동사의 진행 과정에도 족적을 남겼다. 특히 국내 사회주의 운동과 국외 국제기구 사이에 또 하나 은밀한 연락체계가 구축됐음이 주목된다. 이 체계를 개척한 사람은 <조선일보> 기자 김단야였다. 비밀결사 고려공청 간부이기도 한 그는 그 뒤로도 국제공산당과 밀접한 연계를 설정하는 데 남다른 성과를 올렸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の治安狀況(昭和2年版)>, 神戶, 不二出版, (復刻板), 444~448쪽, 1984년.

2. ‘동아만화, 이 주위에 순사성이나 쌓을는지?’, <동아일보> 1925년 9월7일치.

3. ‘사설, 赤露 영사 부임에 際하여’, <조선일보> 1925년 9월7일치.

4. Билль(빌리), Дорогие товарищи(친애하는 동무들),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06 л.19-24, 1925년 9월19일.

5. Secretary of C.E.C. YOUNG COMMUNIST LEAGUE of KOREA PARK Hun Young, Mandate of Comrade Kim Dan Ya: To Comrade Sharmanoff, p.1,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257 л.8, 1925년 9월10일.






임경석의 역사극장

‘김단야 기자’가 상하이에 특파된 까닭은

1924년부터 2년간 기자였던 김단야,
기자 신분증은 비밀결사의 중앙 간부 역할에도 유용하게 쓰였으니…


김단야. 임경석 제공

김단야도 합법 신분을 가진 때가 있었다. 1924~25년 두 해가 그랬다. 24~25살 젊은 때였다. 그땐 공공연하게 식민지 수도 경성의 대로를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다. 한평생 혁명운동에 몸담은 까닭에 비합법 영역에서 남의 이목을 피해 다니거나 외국 여러 나라로 망명했던 그로서는 예외적인 시절이었다.

국경도 넘고 철도 여행도 하는 신분증


1924년 1월 신의주 감옥에서 출옥한 뒤 그러한 자유를 얻었다. 수감된 이유는 사회주의를 선전했다는 혐의였다.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잠입하려다 국경에서 그만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1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실제로는 1년10개월이나 갇혔다. 경찰 신문과 검사국 예심 기간이 터무니없이 길었던 탓이다.

김단야는 출옥 후 곧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그해 3월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공청)에 복귀해 중앙총국 위원에 선임됐다. 체포될 때 재임했던 자리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단야는 합법 공개 영역에서도 활동의 거점을 마련했다. 그해 4월에 설립된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합법·비합법 양 영역에서 조선 청년운동의 진행 과정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합법 신분이 공고하게 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신문사 덕분이다. 김단야는 그해 8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신문기자 직은 비밀결사의 중앙 간부 역할을 하는 데 유용했다. 기자가 되면 여러 활동의 편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철도를 이용한 지방 출장이 가능했다. 식민지 시대 철도 여행은 비합법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기차역 개찰구와 열차 속에는 어느 때건 경찰이 상주했다. 그들은 의심스러운 자가 있으면 불시에 검문했고, 소지품 검사를 했으며,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연행하기를 능사로 했다. 그러나 기자 신분증만 있으면 무사통과였다. 심지어 국경도 쉽게 넘을 수 있었다. 신의주를 지나 중국 영토로 나가거나, 부산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도항하는 데에 별다른 장애가 없었다.

김단야는 합법 신분을 활용하여 각 지방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표면상으로 취재 활동에 종사함과 동시에 이면으로는 비밀결사 세포단체들과 연락·통신하는 업무에 임했다. 경찰이 막아서는 곳이라면 어디든 신문사 명함만 제시하면 그만이었다.


기자가 되면 선전도 손쉬웠다. 해방 이념과 자유 서사를 전파하는 데에는 신문 지면 이상으로 큰 영향력을 갖는 게 더 없었다. 비록 총독부의 검열과 정간의 위협 때문에 표현을 적실하게 하는 데에는 제한이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대중의 마음을 획득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었다. 김단야는 그 여지를 잘 활용했다. 그가 자기 명의로 <조선일보> 지면에 기고한 글들이 있다. 그중에서 특히 사람들의 주목을 모은 것은 ‘레닌 회견 인상기’라는 제목의 11회 연속 기사였다. 레닌 사후 1주년을 기념하여 1925년 1월22일부터 2월3일까지 연재한 글이었다.


레닌 회견 내용을 녹인 놀라운 기사


이 글은 레닌 사망 1주년을 맞아 각 신문사가 기획한 특집 기사들 가운데 가장 돋보였다. 김단야는 레닌과 회견한 경험이 있었다. 1921년 말 1922년 초 극동민족대회 참석차 모스크바에 갔을 때 조선대표단 일원으로서 레닌과 회견했던 경험을 기사 속에 녹여넣었다. 이 연속 기사는 독자를 놀라게 했다. 극동민족대회 조선대표단의 활동상을 합법적인 신문 지면에서 공공연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세계사적 영향력을 지닌 레닌과 직접 면대한 조선인의 기록이라는 점, 조선일보사 현직 기자가 직접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점 등도 눈길을 끌었다.

김단야는 민완한 신문기자였다. 국내외 정세에 밝고 문장력이 좋았다. 외국어 능력도 출중했다. 중등학교 이상 교육을 이수한 조선인이라면 다들 할 줄 아는 조선어와 일본어 외에도 두 개의 외국어를 더 구사했다. 중국어와 영어로 외국인과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김단야의 기명 기사 가운데 상하이에 관한 것이 있다. ‘제주도를 조망하면서, 상해 가는 길에’와 ‘두 번째 상해를 밟고, 신년을 맞으면서’가 그것이다. 이 글들은 상하이에 가는 노정에서 겪은 일과, 상하이라는 공간이 조선인의 삶과 역사에 비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묘사하고 있다. 그중 한 소절을 읽어보자. 김단야의 내면 의식과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조금씩 흔들리던 선체는 아주 자는 듯이 침착하여졌다. 둥그런 유리창을 통하여 멀리 푸른 물결 저편에 뫼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것이 겨우 곤한 잠을 채 깨지 못한 나의 시선을 물들인다. 나는 정신을 차려 한참 주목했다. (중략) 과연 큰 섬이었다. 그러나 크고 높은 산이었다. 그 섬이 즉 산이오, 그 산이 즉 섬이었다. 그것이 곧 제주도인 한라산이오, 한라산인 제주도이었다.”

김단야는 남해 먼바다를 항해하는 여객선 로쿠칸마루 선상에서 멀리 제주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객실 유리창을 통해서였다. 일본 모지항에서 출발하여 49시간 항해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항로였다. 1924년 12월30일 오후 2시에 출항했으므로, 상하이 도착 예정 시간은 해가 바뀌는 1925년 1월1일 오후 3시였다.

그는 제주도를 바라보면서 고국 사랑을 느꼈다고 썼다. “아! 저것이 과연 제주도이다. 나의 고국의 산천이다”라는 탄성이 마음속에서 솟아났다. “저 땅에서 발을 옮겨놓은 지가 불과 3일이 못 되는”데도 그랬다. 경성을 떠난 것이 3일 전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땅이 새삼스럽게 그립고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본 식민지 통치하에서 발간되는 신문에 싣는 글이었음을 고려하면, 매우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표현이었다.


상하이 특파원 김단야가 송고한 첫 번째 기사 ‘제주도를 조망하면서, 상해 가는 길에’. <조선일보> 1925년 1월26일치

따로 특파원을 파견해야 했을까


그는 갑판에 올라갔다. 혹여 흰옷 입은 사람이라도 보이겠나 싶어서였다. 마침 망원경을 지닌 중국인 승객이 곁에 있었다. 김단야는 말을 걸었다. 망원경을 좀 빌려달라고 중국어로 청했다. 하지만 그 중국인은 잘 못 알아들겠다고 답했는데, 광둥어였다. 김단야는 그제야 그 사람이 광둥 사람인 줄 알고서 다시 광둥어로 청했다고 한다.

김단야가 중국어에 더하여 광둥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상하이·광저우 체류 경험이 놓여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1919년 12월에 망명을 단행한 김단야는 1922년 4월 입국을 시도할 때까지 주로 상하이에서 체류했다. 1920년에는 사관학교에서 수학할 목적으로 광저우에서 4개월간 머물기도 했다.

김단야가 상하이로 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저 땅을 떠난 지 불과 3일도 못 됐다”는 문장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조선일보사의 사명을 받고서 중국 특파원 자격으로 상하이로 가는 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취재하려고 했는가. 상하이에서 기고한 두 기사만으로는 김단야 특파원의 소임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상하이로 가는 노정기라든가 상하이 조선인 사회에 관한 스케치 기사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따로 특파원을 파견할 것까지는 없는 평범한 테마였다. 도대체 김단야는 왜 상하이에 출장을 갔을까?

필자는 최근에야 이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김단야가 1937년 2월에 작성한 <자서전>을 보았는데, 그 기록에 1924년 말~1925년 초 그의 상하이 출장의 비밀이 담담하게 적혀 있었다.

“1924년 말 상해 소재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원동국은 ‘상해로 한 동무를 보내 당과 공청의 사업 활동에 관해 보고하도록 하라’고 내게 알려왔다. 내가 보고자로 지목되었다. 나는 <조선일보>에서의 나의 위치를 이용하여, 전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상해로 임시 특파원을 보내야 한다고 신문사 사장을 설득했다. 그때 마침 쑨촨팡(孫傳芳) 장군(장쑤성장)과 루융샹(盧永祥) 장군(저장성장)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결국 상해와 중국어를 아는 사람으로서 내가 꼭 가야 한다는 동의를 받아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단야가 상하이로 여행하는 내면의 이유는 비밀결사 운동의 필요에서 나왔다. 상하이에 소재하는 국제당 원동국과 경성에 존재하는 공산주의 비밀결사 집행부 사이에 업무 연락의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김단야는 당과 공청의 내막을 잘 아는 핵심 간부인데다 합법 신분이 튼튼했다. 국경을 넘어서 오가는 데 그만큼 적임자가 없었다. 그뿐인가. 그는 중국어와 영어 구사 능력을 갖고 있었다. 당과 공청의 집행부를 대표하여 국제당 원동국과 책임 있는 업무를 협의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외부로는 군벌 취재, 내부로는 비밀결사 운동


상하이로 특파되기 위해서는 신문사 경영진을 설득해야 했다. 당시 조선일보사 사장은 사회적으로 신망이 높은 이상재가 추대되어 있었고, 상무이사에는 신석우가 재임하고 있었다.

김단야가 설득했다는 경영진은 아마도 신석우였을 것이다. 김단야는 중국 군벌전쟁의 취재 필요성을 제기했다. 1924년 8월에 발발한, 장쑤성의 쑨촨팡과 저장성의 루융샹 두 군벌 사이의 전쟁 양상을 보도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특파원으로는 자신이 적임자라고 스스로 추천했다. 2년여 상하이 체류 경험이 있고,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했다.

결국 김단야는 1924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1월 하순까지 상하이 출장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의 상대역은 국제당 원동국 책임자 보이틴스키였다. 두 사람은 국제당 지부로서 조선공산당 창립 문제가 최대 현안이라는 점에 동의했고, 이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두 사람은 행동의 골자를 입안하는 데에 성공했다. 4개 대회를 한꺼번에 준비한다는 복잡하고도 거창한 복안이었다. 비밀 영역에서 당과 공청의 창립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 합법 공개 영역에서 전국 규모의 두 종류 대중 집회를 소집한다는 계획안이었다. 김단야가 상하이 출장에서 되돌아온 직후,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준비하는 대규모 조직 계획이 은밀하게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참고 문헌

1. 김단야, ‘레닌 회견 인상기, 그의 서거 1주년에 (1-11)’, , <조선일보> 1925년 1월22일~2월3일.

2. 김단야, ‘제주도를 眺望하면서, 상해 가는 길에’, , <조선일보> 1925년 1월26일.

3.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서전), 1937년 2월7일, с.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4. 이혜인, ‘혁신의 동요와 굴절: 1924-25년 조선일보의 혁신과 사원해직사건’, , <역사연구> 32, 184쪽, 2017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수배자는 ‘비밀결사’ 재건에 주저하지 않았다

박헌영 등 중앙집행위원 체포로 고려공산청년회 위기 처하자
권오설, 1~4선 후보 집행위 구성해 대행 체제 만들고 안정화


1928년 2월17일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찍은 권오설의 초췌한 모습(왼쪽). 권오설과 김동명이 이면지에 급하게 휘갈겨 쓴 1925년 12월3일 자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 사건 보고서 첫 페이지. 당시 급박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임경석 제공

권오설(29)이 체포됐다. 1925년 11월30일 이른 아침이었다. 종묘 외대문 밖 훈정동에 있는 박헌영 부부의 살림집을 찾아갔다가, 공교롭게도 현장에서 가택수색 중이던 종로경찰서 형사대와 마주쳤다. 형사는 셋이었다. 합법 공개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2년째 일하던 터라 낯이 익었다. “곧 돌아오겠다”며 현장을 벗어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만 그 자리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체포 당일 석방되자 잠적을 택했다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은 그제야 알았다. 공청 책임비서 박헌영이 전날 밤 8시30분에 긴급체포됐다는 사실을. 심각한 상황이었다. 일주일 전에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외국 연락기관 책임자들이 검거됐으나, 다행히 단순 폭행 사건에 연루된 탓이라고만 알았다. 비밀결사 존재가 노출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도 만일 상황을 염려해 선제적으로 보안 조처를 강화한 게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체포 30분 전에 중요 서류 전부를 책임비서의 처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보관했다. 옮긴 시각은 밤 8시고, 박헌영 부부가 체포된 시각은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때였다. 위기일발이었다.

고등경찰계에서 유능하기로 첫째·둘째 손가락을 다투는 요시노 도조 형사가 취조에 나섰다. 초점은 두 가지였다. 이른 아침에 무슨 일로 박헌영 집을 찾아갔느냐? 네 동생 권오직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형사는 덧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너를 불러들이려고 했는데 마침 잘 걸렸다.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그렇게 말했다.

다행이었다. 비밀결사 조직원 명단이 노출된 것 같지는 않았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파견된 동생의 거취를 묻는 걸 보니, 명단의 일부는 드러난 것 같았다. 권오설은 요령껏 대답했다. 자신이 간부로 있는 합법단체 노농총동맹 업무를 전면에 내세워서 진술했다. 동생이야 조선에 있지 않으니, 그의 소재에 관해서는 뭐라 답해도 좋았다.

웬일인지 그날 밤 권오설은 석방됐다. 같은 날 연행된 다른 혐의자 2명과 함께였다. 구체적인 혐의가 드러나지 않은 까닭이었을 것이다. 경찰도 예기치 않은 상태에서 그를 연행한 때문인지 수사 초점을 잡기 어려웠던 것 같다. 공개단체의 중요 간부이므로 신분이 확실하고 도주할 우려가 적다고 보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권오설은 종로경찰서에서 풀려났다.


어떻게 할 것인가? 권오설은 깊이 생각했다. 무사히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들의 하는 행세가 붙잡은 자들을 영 내보내지 않을 눈치를 보”였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뒤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행이 따라붙은 게 틀림없었다. 답은 자명했다. 자신의 안위는 물론이고 비밀결사 동지들을 보호하려면 신속히 잠적하는 것이 옳았다.

잠적이란 경찰 수배망을 피하기 위해 일상활동 공간을 벗어나 낯선 환경에서 지내는 행동양식을 말한다. 가정, 직장, 사회활동과 절연하는 것을 의미했다. 혈연·학연·지연 관계가 있는 사람과 연락하거나 물품을 주고받는 것은 금물이었다. 어떤 사람과도 접촉하지 않는 절대적 잠적과 비밀 활동 지속에 필요한 최소한의 연계를 유지하는 상대적 잠적이 있었다. 권오설은 후자를 택했다. 공청의 운명이 자신의 어깨에 달렸기 때문이다. 당시 공청 집행부는 7명으로 구성됐지만 그중 3명(박헌영·임원근·신철수)은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다른 2명(김단야·홍증식)은 때마침 지방에 출장 중이었는데, 검거 사건이 일어났음을 통지받고서 긴급히 피신했다. 서울에 남은 중앙집행위원은 자신과 김동명 둘뿐이었다. 투쟁 일선을 지켜야 할 소임이 자신에게 있었다.


종로경찰서, 권오설 수배망 넓혀


그의 예측이 적중했다. 이틀 뒤인 12월2일 종로경찰서 형사대는 다시 권오설 체포에 나섰다. 이날 형사들은 노농총 회관을 전격적으로 수색했다. 견지동 88번지에 있는 노농총 회관은 상임위원 권오설이 줄곧 있었던 숙소였다. 경찰은 그의 사진까지 2장 휴대했다. 회관 내에 머물거나 출입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일일이 대조하기 위해서였다. 형사들의 추적은 집요했다. 그의 친척 아우이자 고향 후배인, 청년운동계의 신진 활동가 권태동이 희생양이 됐다. 경찰은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간부로 있는 그가 권오설의 거처를 알고 있으리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를 붙잡아 가혹하게 고문했다.

검거가 확산됐다. 경성 시내는 물론이고 전 조선에서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졌다. ‘전시 상태’와 같았다. 경남 마산에서 김상주가 검거되고, 경기도 강화에서 박길양이 체포됐다. 평북 신의주에서는 조리환이 붙잡혔다. 급기야 12월3일에는 잠적 중이던 공산당 중앙간부 김재봉과 김찬의 비밀 숙소마저 노출됐다. 12월11일에는 피신 중이던 공청 중앙집행위원 홍증식이 체포됐고, 평양에서 최윤옥이 검거됐다.

검거 사건은 한 달간 계속됐다. 이듬해 1월 말의 집계에 따르면, 경찰에 체포된 비밀결사 구성원은 모두 22명이었다. 이 중에서 공청 회원은 12명, 공산당원은 9명이었다. 1명은 비당원이었다. 당시 공청 정회원은 212명이었는데, 그중 6%에 해당하는 사람이 수감된 셈이었다. 체포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 비중은 컸다. 공청 중앙집행위원 4명(박헌영·홍증식·신철수·임원근), 중앙검열위원(최윤옥·조리환) 2명이 체포됐다. 공산당도 형편이 비슷했다. 수감된 공산당원 9명은 전체 당원 178명에 비하면 5%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중앙집행위원 4명(김재봉·유진희·주종건·김약수)과 중앙검열위원 1명(윤덕병)이 포함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당과 공청의 최고 지도자인 책임비서가 둘 다 체포됐다는 점이다. 두 비밀결사의 중앙기관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음이 뚜렷했다. 그뿐인가. 코민테른과 연계를 맡던 국경연락부서도 파괴됐다. 신의주에 거점을 둔 국경연락 책임자들이 수감되고 말았다.


당과 공청 핵심들 줄줄이 잡혀가


권오설은 대담한 성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검거 사건에 부딪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혁명운동에 처음 참여할 때부터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각오했다고 결기를 표명했다. 그는 검거 사건을 냉철히 분석했다. 비밀결사에 곤란을 주는 측면이 있음은 틀림없지만, 그와 동시에 전 조선의 운동선 초점이 조선공산당과 공청에 향하게 하는 이익도 있다고 해석했다. 그는 흥망성쇠가 검거 사건 대응에 달렸다고 보았다. 이 난국을 잘 극복하면 조선혁명운동 뿌리는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을 것이지만, 우물쭈물하면 혁명운동은 적어도 3~4년 정체할 것이라고 보았다.

권오설은 위기에 처한 비밀결사를 다시 일으키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수배자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랬다. 첫째, 공청 집행부를 재건했다. 남아 있는 두 사람의 중앙집행위원을 중심으로 후계 집행부를 구성했다. 7명의 중앙집행위원 후보 그룹을 4중으로 조직했다. 제1선이 무너지면 제2선 조직이 그를 대행하고, 제2선이 체포되면 제3선이, 제3선이 무너지면 제4선 조직이 대신하는 방식이었다. 모두 청년 사회주의자 28명이 명단에 올랐다. 조두원, 정달헌, 김형선, 장순명, 이걸소, 고광수, 이승엽 등 훗날 사회주의운동의 중진으로 성장하는 인물들이 포함됐다.


1선 무너지면 2선이, 2선 무너지면 3선이


둘째, 동요하는 각지의 세포 단체를 안정시키려 했다. 전에 없던 대규모 검거 사건을 보고서 ‘지방 동지들’은 놀람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권오설은 이 국면을 수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머잖아 겨울방학이 시작될 터인데, 그를 활용해 ‘학생 동지’를 지방 운동에 투입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 도 단위 간부 조직이 없는 곳에 공세적으로 도위원회 선출을 서두르기로 했다. 지방운동 활성화를 전담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12월27일 자로 경기도위원회와 경북도위원회가 설립됐다. 각각 5명으로 이뤄진 간부진이 구성됐다. 마땅히 도지방대회를 소집해 선출해야겠지만, 검거 사건이 진행 중인 비상 시기이기 때문에 부득이 중앙집행위원회가 임명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셋째, ‘표면운동’의 현상 유지 정책을 시행했다. 표면운동이란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공개적으로 존재하는 사회단체의 활동상을 가리킨다. 비밀결사 구성원은 대중과의 접촉면을 넓히기 위해 표면운동을 활용했다. 공청도 그랬다. 그러나 검거 사건으로 여러 공청 회원이 체포되거나 잠적했기 때문에 표면운동은 위축 양상을 보였다. 권오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위축과 좌절을 방어하기 위해 종전보다 더 기세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12월 중에 한양청년연맹이 연구반 정례회를 열고, 재경성 노동단체가 경인지역 노동운동자간친회를 소집하며, 학생과학연구회 주최로 강연회를 여는 등의 방침을 세웠다.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이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던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건물. 한국전쟁 때 건물이 파괴돼 현재는 종탑만 남아 있다(왼쪽). 1925년 9월24일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적기 게양식. 당시 신문에 “푸른 하늘에 물들인 러시아 국기, 우렁찬 혁명곡에 뱃심 좋게 번득”인다고 대서특필됐다. 한국근대외교사전, 동아일보

검거 확산에도 코민테른과 연락선 복구


권오설은 파괴된 외국 연락선도 복원했다. 국경에 설치한 연락 시스템은 붕괴됐지만, 다른 대안을 생각해냈다. 바로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이었다. 1925년 1월 일본과 소련 사이 국교 정상화를 위해 체결된 일소기본조약에 의거해, 그해 9월 경성에 소련총영사관이 설치됐다. 일본 고등경찰은 총영사관의 안팎을 주의 깊게 감시했다. 그 결과 “소련총영사관 측은 일본 관헌의 주목을 피하고자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출입을 표면상 환영하지 않는다”는 소견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 소견은 틀렸다. 실제와 달랐다. 권오설은 검거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나흘 만에 코민테른과의 연락 경로를 뚫는 데 성공했다. 총영사관 내에서 가명 ‘밀러’를 쓰는 외교관 신분의 정보요원이 파트너였다.

동료의 논평에 의하면 권오설의 생김새는 광대뼈가 두 뺨 위에 두드러지게 솟아난 투사적 타입이었다. 말투는 열정과 정성이 가득 찬, 힘있는 어조였다. 그의 과감하고 단호한 지도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밀결사 공청은 구성원 12명이 투옥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별다른 위축 없이 신속하게 역량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참고 문헌


1.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幹部 被捉 사건에 대한 보고’, 1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222-224, 1925년 12월3일.

2.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第特号二 금번 돌발사건에 대한 대책’, 1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214-6об, 1925년 12월3일.

3. Член ЦК Коркомсолола Квон-о-сель·Ким-тон-мен(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Испоолкому КИМа(국제공청 집행위 앞), с.3, РГАСПИ ф.533 оп.10 д.1894 л.1-12, 1926년 1월31일.

4.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第特号三 금후 事業案’, 1-2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217-219об, 1925년 12월3일.

5.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第特号二 금번 돌발사건에 대한 대책’, 5-6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214-6об, 1925년 12월3일.

6.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權五卨·金東明, ‘고공청 제10호, 道幹部 선정에 관한 건’, 2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2 лл.72-74, 1925년 12월 31일.

7. 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の治安狀況(昭和2年版)>, 神戶, 不二出版, (復刻板), 1984년.

8. 임원근, ‘亡友追憶, 1년 전에 간 權五卨에게’, <삼천리> 13, 60쪽, 1931년 3월1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책임비서의 비밀편지

조선공산당 최고책임자 김재봉, 체포 12일 전 육필 문서
반대파인 ‘북풍파’ 제명 등 당 내막 담겨 ‘사료 가치’ 높아


(왼쪽부터) 김재봉의 1925년 12월7일치 비밀편지 첫 페이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재봉의 친필 서명. 수감 중인 김재봉, 1928년 1월2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임경석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김재봉이 1925년 12월7일치로 작성한 비밀편지가 있다. 35살 때였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었던 시기다. ‘당 내부에 대한 정리 문제’라는 제목이 달린 24쪽 분량의 육필 문서였다.1 제목이 말해주듯이 조선공산당의 내부 사정을 상세히 전하는 극비 문서였다. 비밀결사의 긴급한 현안을 다루고 있었다.

잉크를 찍어서 펜으로 썼다. 어쩌면 만년필 글씨일 수도 있겠다. 국한문 혼용체의 달필이다. 잘 교육받은 사람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유려한 글씨체였다. 향리(태어나서 자란 곳)인 경북 안동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보통학교와 중등과정의 중동학교를 마쳤으며, 고등교육기관인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사람다웠다. 근대교육 시스템이 채 갖춰지지 않았던 식민지 초기 1910년대였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이수할 수 있는 최상급 교육을 받은 셈이었다.

수신처가 적혀 있지는 않지만, 누구에게 보냈는지를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코민테른 동양부 앞으로 보낸 것이었다. 옛 코민테른 문서관에서 발굴된 이 문서는 사료 가치가 매우 높다. 1925년 창립 이후 조선공산당의 내막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의 내부 기록은 꽤 많이 남아 있는 것에 비하면, 당 문서는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이 문서는 그러한 사료의 갈증을 해소해주고 있다. 비밀결사의 최고 책임자가 쓴 것이니만큼 최상급 비밀정보를 다루고 있다. 어떤 자료에서도 볼 수 없는 내밀한 정보가 담겼다. 그뿐인가. 이 문서는 공산당 최고 지도자의 긴장된 내면 의식과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조선공산당 1차 검거 사건 와중에 작성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본 경찰이 비밀결사의 존재를 탐지했기 때문이다. 발단은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일어난 한 집단 폭행 사건에서 비롯됐다. 폭행 피의자로 지목된 청년들의 집을 수색하던 신의주 경찰이 뜻밖에도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의 비밀문건 뭉치를 발견했다. 국외 통신을 맡던 비밀 연락 기구가 우연한 사건으로 적발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공산당 1차 검거 사건이 터졌다.

첫 검거는 일주일 전인 그해 11월29일 밤에 일어났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이 자택에서 체포됐다. 이튿날 새벽 7시에는 주종건, 유진희, 임원근, 권오설이 피검됐다. 다행히 그날 오후 주종건과 권오설이 일시적으로 석방됐다. 두 사람은 바로 잠적했다. 이튿날 12월1일에는 합법 공개단체인 조선노동총동맹, 한양청년연맹, 신흥청년동맹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했다. 검거는 지방 도시로 확대됐다. 경기도 강화에서 박길양이, 경상남도 마산에서 김상주가 체포됐다. 12월3일에는 조리환이 체포됐다. 이날 체포망이 공산당 핵심부까지 치고 들어왔다. 책임비서 김재봉과 중앙집행위원 김찬의 거처에 가택수색이 들어왔다.2


김재봉은 긴장했다. 다행히 가택수색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경찰 체포망에 포함된 게 틀림없었다. 비밀편지에 쓴 것처럼 “모든 것이 위기일발에 걸렸다”고 봐야 했다. 즉시 잠적했다. 일상생활을 중단하고 평소의 활동 공간에서 벗어나야 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10여 명이 검거된 것으로 파악됐다. 그중에는 당 중앙간부(유진희)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공산청년회 구성원에게 위험이 집중되고 있었다. 검거망이 어느 방향으로 어느 정도까지 확대될지 알 수 없었다. 사태의 진전을 날카롭게 주시해야만 했다.

여차하면 외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현안이 쌓여 있었고, 유사시에 대비해 당무를 이어갈 후계 간부진도 구성해야 했다. 잠적하거나 망명하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먹고 자는 것은 물론이고 원활한 장소 이동을 위해서는 돈이 들었다. 한 푼 준비도 없이 무작정 잠적한, 형편이 어려운 동지들에게는 긴급히 자금을 제공해야 했다.

김재봉이 경찰에게 쫓기는 위험 속에서도 비밀편지를 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돈 때문이었다. 그는 편지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물질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 긴급히 도망쳐야 하는 동지들에게 여비를 주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당 규율 위반 반대파에 초강경 제명 조처


잠적 중에도 일은 해야 했다. 처리해야 할 가장 긴급한 당무 가운데 하나는 당내 분파에 관한 것이었다. ‘김약수 그룹’이 말썽이었다. 김약수 그룹이란 공개 사상단체 북풍회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밀 공산주의 단체로 ‘북풍파’라고도 했다.

되돌아보건대, 1925년 4월17일 조선공산당이 창립되기 전에도 조선 사회주의운동은 활발히 전개됐다. 그 주역은 국내외에 걸쳐 존재하는 공산주의 그룹들이었다. 국외에는 상해파·이시파·국민의회파가 있었고, 국내에는 화요파·서울파·북풍파·상해파가 포진했다. 각 공산주의 그룹은 조직·정치적 공통성에 입각해서 형성된 비밀결사였다. 자체의 중앙기관과 세포단체가 있고, 독자의 조직적 규율을 갖춘 조직체였다. 또 독자의 정치사상과 정책을 갖춘 정치세력이었다.

단순화해 말하면 조선공산당 창립은 두 개의 공산그룹이 연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재봉이 속한 화요파와 김약수를 위시한 북풍파가 연합한 게 곧 조선공산당이었다. 하지만 화학적 결합이 아니었다. 두 그룹은 따로 놀았다. 공산당이 창립된 뒤에도 그랬다. 혼연일체의 동지적 연대감이 아니라 경쟁심과 호승심이 두 그룹 구성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북풍파 공산그룹은 자파의 이익을 늘리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합법 공개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의 임원진을 구성할 때 자파의 구성원인 서정희가 반드시 상임 총무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내에서 자파 인원이 화요파보다 한 사람 적은 것을 수정하기 위해 임시 당대회를 열 것을 요구했다. 김재봉이 보기에 이 요구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위 혁명당이어야 할 공산당을 마치 연립내각 같은 느슨한 연대기구로 만들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었다.

당 규율을 해치는 행위도 용서할 수 없었다. 공개 대중단체의 집회에서 비당원이 여럿 섞인 자리인데도 당내 기밀 사항을 입 밖에 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뿐인가. 당내 논의에 앞서 자파에 속하는 사람들끼리만 사전 논의를 하곤 했다. 당보다 자파의 이익을 앞세우는 규율 위반 행위였다.

김재봉은 북풍파와의 결별을 각오했다. 당에 가입한 북풍파 인사는 3개 야체이카(세포단체)에 속한 15명뿐이었다. 그들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조선공산당의 조직 기반이 와해될지도 모르는 강경한 대책이었다.


코민테른 지부 승인 뒤 자신감 반영


강경한 카드를 꺼낸 데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코민테른의 1925년 9월 결정서가 조선공산당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해 4월17일 설립된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 지부로서 사실상 승인한다는 결정이었다.3 모스크바에 파견한 대표자 조봉암이 코민테른 동양부의 보이틴스키의 협력을 받아서 이뤄낸 외교적 성과 였다.

경성 주재 소련영사관에서 작성한 정보 보고서에는 9월 결정서를 접수한 이후 조선공산당의 자신감이 묘사돼 있다. 조선인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불신은 사라지고, 노동자적인 분위기가 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유쾌해졌고, 어떤 분쟁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라고 썼다.4 또 하나는 공산당의 조직 역량에 대한 자긍심이었다. 김재봉은 조선공산당의 세포단체가 전국에 33개 있고, 그에 망라된 당원 수는 133명이라고 집계했다. 그에 더해 후보 당원 49명이 있었다.5

김재봉은 자신했다. 당원 대다수가 노동자단체, 청년단체, 사상단체와 신문사·잡지사 등 언론기관에 소속돼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전국 각지의 사회단체 600여 개를 동원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당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 역량도 있었다. 이들의 수는 더 많았다. 1926년 2월 현재 공청의 세포단체는 63개였고, 그에 망라된 공청 회원은 284명, 후보 회원은 229명이 었다.6


체포 전 조직한 후계자는 강달영


김재봉을 필두로 하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부의 결심은 단호했다. 이 사안으로 혹여 코민테른에서 불리한 조처가 내려지더라도 감내하기로 했다. 만약 코민테른이 15명 제명을 문제 삼아서 코민테른 지부 승인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김재봉은 이왕 결성된 조직을 잘 발전시켜서 조선 혁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성심껏 전진할 뿐이라고 썼다.

이 비밀편지를 쓴 뒤 얼마 안 돼 김재봉에게 불행이 닥쳤다. 1925년 12월19일 밤이었다. 비밀편지를 쓴 지 12일이 지나서였다. 경성 돈의동에 잠복 가옥을 정한 채 당무에 여념이 없던 김재봉은 어딘가에 전화하기 위해 종로에 나왔다가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누구에게 무슨 전화를 하려고 위험을 무릅썼던 것일까.

그래도 천만다행인 게 있었다. 체포되기 며칠 전, 후계 집행부 조직에 성공했다. 체포와 망명 탓에 결원이 된 중앙집행위원을 보선했던 것이다. 후계 책임비서로는 경남 진주의 열렬한 혁명가이자 사회주의자인 강달영을 선정했다. 의외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게 강점이었다. 경찰의 주목을 비교적 적게 받는 점, 당 내외 반대파 공산그룹의 반감을 적게 사는 점, 의지가 강하고 업무 능력이 탁월한 점 등을 고려했다. 책임비서 김재봉은 붙잡혔지만, 후계자 강달영의 진두지휘 아래 비밀결사의 혁명 사업은 중단 없이 계속될 수 있 었다.


참고 문헌


1.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 책임비서 金在鳳, ‘黨 內部에 대한 整理問題’, ,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7 л.20-43, 1925년 12월7일.

2. 고공청중앙집행위원 權五卨·金東明, ‘고공청 제13호, 본회 및 조공당 관계자 被逮사건 顚末’, , 3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2 л.80-84, 1925년 12월31일.

3. The last resolution of the presidium of the ECCI on the Korean question,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04 л.53-56, 1925년 9월.

4. Мильнер(밀러), тов.Серегину(세레긴 동무에게),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0 л.151-154, 1925년 11월13일.

5. 김재봉, 앞의 글, 20~21쪽.

6. Ответств.ген.секретарь Коркомсомола(고려공청 책임비서), В ИКИ КИМ no.17 Общее положение ячеек комсомола, 28/Ⅱ-26 г.(제17호, 국제공청 집행위원회에 보내는 공청 야체이카 일반 상황)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140.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주저 없이 꿈꾸고 사랑하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 그리고 의사 이덕요
남편 한위건 만나러 중국 망명했다 병에 걸려 세상 떠나



이덕요
그 사람 이름이 처음 신문에 난 것은 17살 때였다. 1914년 식민지 조선에서 유일하게 발행되던 조선어 신문 <매일신보> 지방판에서였다. 함흥자혜의원 간호원 이덕요(李德耀)를 칭찬하는, 함흥지국에서 보낸 기사였다. 그에 따르면 이덕요는 함흥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진학한 함흥자혜의원 간호부과도 우등으로 마쳤다. 인성이 어질고 얌전하며 행동이 단아하고, 일본어에 능숙하며 환자 간호에 헌신한 까닭에 칭찬 여론이 자자하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신문지국을 찾아와 이 갸륵한 미담을 보도해달라는 퇴원 환자들도 있었다. 병든 사람을 지극히 돌보는 간호원에게 감복한 이들이었다.

의학 공부하러 일본 유학 떠난 간호원


자혜의원은 일제강점기 각 도에 하나씩 만든 총독부 직영 병원이었다. 환자를 치료하는 진료기관이자 지방의 일반 개업의를 관리하는 감독기관이었고, 간호원을 양성하는 의학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그즈음 함흥자혜의원 간호부과의 교육 기간은 1년6개월로, 한 해 간호원 20명을 양성했다.

미담의 주인공 이덕요가 평생 간호원의 길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더 많은 교육을 받는 길을 택했다. 경성으로 가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진학한 곳은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였다. 1900년 설립된 이 학교는 11년간의 선행 수업 연한을 요구하는 3년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소학교 6년, 고등여학교 5년을 이수한 여학생만이 응시할 수 있었다. 식민지 조선 출신의 이덕요는 입학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제국주의 본국의 학제와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수업 연한은 보통학교 4년, 여자고등보통학교 4년으로 모두 합해 8년에 지나지 않았다. 부족한 수업 연한을 어떻게든 채워야 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 예비학교에 다니거나 예과 과정을 이수했을 것이다.

그 학교에는 조선인 여성 유학생이 여럿 있었다. 조선 최초의 여성 개업의이자 이광수의 부인으로 유명한 허영숙은 그의 7년 선배였다. 개인병원을 개업한 여자 의사 정자영, 현덕신 등도 이 학교 출신이다. 2년 선배로 송복신·박정 등이 있었고, 1년 선배로는 한소제·길정희, 여성운동 지도자로 유명한 유영준 등이 있었다.

이덕요는 학업에 성심성의껏 임했다. 뒷날에 쓴 회상기를 보면, “학교 시대에 어떻게나 공부에만 명심을 했던지 도쿄 생활 6년간에 우에노공원, 히비야공원을 졸업할 때야 비로소 처음 구경했다”고 한다. 그처럼 열심히 공부한 것은 내면의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후부터는 여자도 경제적으로 꼭 독립하여야 하겠다는 각성으로” 그러했다고 한다.

유학 중에 공부만 했던 것은 아니다. 3·1혁명 이듬해인 1920년에는 도쿄 여자유학생 단체인 조선여자학흥회에 참여해 집행부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애도 했다. 고향이 자기와 같은 함흥이고, 큰 키에 너털웃음을 잘 치는 도쿄제국대학 졸업생 주종건과 한때 연인 사이였다. 주종건은 명철하고, 좌담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말 잘하는 사회주의자였는데, 그 재능이 이덕요의 마음을 끌었는지도 모 른다.


1924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이덕요는 조선으로 돌아와 의사의 길을 걸었다. 식민지 조선의 최대 병원인 총독부의원에서 내과·소아과·산부인과 진료를 맡았고, 나중에 개인병원도 열었다. 1928년 인천에서 성실병원을, 1930년에는 경성 낙원동에서 동양부인병원을 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여의사로서 확고한 사회적 명성을 쌓았다. 일간신문 지면에는 ‘여의사 이덕요’ 명의로 질병 예방과 치료에 대한 기고문이 빈번히 실렸다. 홍역, 종두, 백일해, 자궁병, 신경병, 소아감기, 성홍열 등의 질병을 다뤘다. 그뿐인가. 새해가 될 때마다 신문사들이 앞다퉈 여는 ‘여류 명사 초청 가정문제 좌담회’에 초대돼 여성문제와 가정문제에 대해 발언했다.


여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함께


그는 열렬한 페미니스트였다. 문필과 단체활동으로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했다. 남녀평등과 여성 인권 존중이 이뤄져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했고, 남존여비와 조혼을 반대했으며, 여성을 억압하는 재래의 인습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혼의 자유를 강조했다. 의가 맞지 않는 부부라면 이혼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이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설파했다. 행위의 주체는 여성이어야 한다. “우리 여성은 이 불합리한 인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굳게 모이라!”고 외쳤다.

이덕요는 미모가 출중했다. 언론인이자 극작가인 이서구는 그와 대면했던 일을 이렇게 떠올렸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최서해가 입원했을 때, 병원으로 문병을 갔다가 이덕요를 만났다고 한다. “호박색 윤이 흐르는 그 흰 살결, 불그레 타오르는 입술, 어디까지든지 정열적인 그 눈, 먹장 같은 머리” 등 어디로 보아도 참 ‘절색’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자기 가슴이 꽉 막히더라고 한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교양과 이지와 총명이 은은하게 내비치는, 그리스의 비너스 여신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문기자이자 작가인 윤백남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덕요를 가리켜 대표적인 조선 미인이라고 평했다.

일본 경찰은 그를 감시 대상자로 지목했다. 경찰의 비밀 정보문서를 보면, 이덕요는 ‘공산주의자’로 쓰여 있었다. 이 관찰은 실제에 부합했다. 그가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한 형적이 뚜렷하다. 두루 알다시피 근우회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계열 여성들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통일전선 단체였다. 이덕요는 1927년 4월 발기인 모임을 할 때부터 사회주의 몫으로 거기에 참여했다. 그해 5월27일 창립총회에도 참가했으며, 그 자리에서 회의장의 정숙과 질서를 유지하는 ‘사찰’ 역할을 했다. 주세죽, 강정희 등 유명한 여성 사회주의자들과 함께였다. 그는 집행부에도 진출했다.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 2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집행부에서 그의 역할은 ‘정치부’ 책임자였다. 한 달에 한 번씩 근우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정치연구반을 열었다.

근우회에 대한 헌신은 오래 계속됐다. 창립 4년차인 1930년에도 근우회 경성지회에 참여했음이 확인된다. 그해 2월에 이덕요는 집행위원 1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담당 부서는 정치문화부였다. 근우회 여성 회원들의 정치적 각성과 의식 수준을 높이는 일을 줄곧 해온 것이다.

이덕요는 여성운동의 의의를 프롤레타리아트(무산계급)의 역사적 사명과 연관지어 이해했다. 일간신문에 실은 한 기고문을 들여다보자. 그에 따르면 오늘날 조선이 요구하는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에게 유린되어온 조선 여성의 해방운동”을 실행함과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사명을 다하려는 대중운동과 악수”해야 한다. 합법 언론매체 지면의 표현상 제약을 고려하더라도,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연관지어서 포착하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난다.


일본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의 후신인 도쿄여자의과대학 정문(위). 이덕요가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근우회 경성지회 제3회 정기대회 회의장. 단상에 의장과 서기 2명이 있다. 참석 회원이 80명, 남녀 방청객이 300명이었다.

사랑하며 비로소 참다운 삶을 맛봤지만


그의 배우자도 사회주의자였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의 최고 이론가라고 일컫는 유명한 한위건이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1925년 가을에 결혼했다. 아내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 총독부의원 의사로, 남편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할 때였다. 한위건은 합법적으로는 언론인 신분이었지만,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에도 깊숙이 관련돼 있었다. 결혼한 지 두 해 뒤인 1927년에는 합법·비합법 양쪽에서 공히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 <동아일보> 정치부장으로 정치면 기사 작성을 책임졌으며, 비합법 공간에서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전부를 이끌었다.

두 사람의 금실은 매우 좋았다. 조그만 셋집에서 살림을 시작했지만, 부부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덕요는 결혼생활에 대해 짤막한 수필을 남겼다. 그는 이성의 전적인 사랑을 받는 연후에야 사람은 비로소 참다운 삶을 맛볼 수 있다고 썼다. 한위건과의 결혼생활이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그는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남녀에게 권했다. 주저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하라고.

그러나 부부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8년 3월 남편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조선공산당 제3차 검거 사건’이라는 대대적인 탄압에서 벗어나야 했다. 한위건은 상하이와 베이징을 오가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지휘했다. 당 기관지 <계급투쟁>의 발간을 주도하면서 맹렬히 필봉을 휘날렸다.

이덕요는 외로웠다. 의사가 직업이니 여자 혼자 살면서도 생계를 걱정하지는 않지만, 마음의 평화를 잃었노라고 고백했다. “H를 멀리 바다 밖으로 보내고 벌써 3년째나 고독한 생활을 해오는” 중인데, “나에게는 그분을 사모하는 생각이 점점 강렬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별 3년차 되던 1931년 1월, 신문에 실린 신년 소감문에서 뭔가를 결단했음을 암시했다. 거친 파도를 헤쳐서 저 앞에 가로놓인 큰 바다를 건너가고 싶다고 했다. 작은 배라도 한 척 얻어서 건너가고 싶다고 썼다. 설혹 그 배가 모진 파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져도 헤엄쳐서 저 바다를 건너가고야 말겠다는 용기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해 5월이었다. 이덕요는 마침내 망명을 결행했다. 행선지는 중국 베이징이었다. 국외로 탈출한 남편을 찾아서 출국한 것이었다. 일본 경찰의 정보문서를 보면, 베이징에 있는 그의 주소는 “북평(北平) 신문내(新門內) 순성가(順城街) 여명보공(黎明補公)중학교 내”였다. 남편을 따라간 것만은 아니었다. 국내 동지들의 견해로는 “이덕요는 그곳에 가서도 일을 하려던 사람”이었다. 한위건과 나란히 반일 혁명운동에 참여하려고 이덕요가 망명했다고 이해했다.


남편과 반일 혁명운동은 해보지도 못하고


그러나 이덕요의 망명 생활은 길지 못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그는 얼마 안 돼 몸져눕고 말았다. 몹쓸 병에 걸린 것이었다. 그는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베이징에서 귀국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박문희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덕요의 마지막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 부군 한위건은 지금까지도 사별한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고.


참고 문헌

1. ‘지방매일, 함경남도 함흥’, , <매일신보> 1914년 5월9일치.

2. 최은경, ‘일제강점기 조선 여자 의사들의 활동’, , <코기토> 80, 291쪽, 2016년 8월.

3. 이덕요, ‘인습 타파가 목전의 문제’, , <동아일보> 1927년 7월 2일치.

4. ‘현대 장안호걸 찾는 좌담회’, , <삼천리> 1935년 11월호 87~88쪽.

5. 경성종로경찰서장, ‘京鍾警高秘第11312号, 槿友會執行委員會ノ件’,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27년 10월 5일.

6. 한위건씨 부인 李素山, ‘결혼하기 전과 결혼한 후, 생활상 일대 轉機’, , <별건곤> 4, 89쪽, 1927년 2월.

7. ‘어떠한 결심과 어떠한 희망으로써 그들은 새해를 맞이하나?’, , <매일신보> 1931년 1월3일치.

8. 觀相者, ‘사랑이 잡아간 여인상’, , <별건곤> 57, 40쪽, 1932년 11월.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상하이파 공산당 쇠락엔 그의 죽음이 있었다

일제 식민지 유학생이 연대한 혁명단체들 이끈 최팔용
조선 사회주의운동 궤적 그리고 요절한 혁명가



조선 사회주의운동 개척자인 최팔용. 임경석 제공

최팔용(崔八鏞)은 2·8 독립선언의 지도자였다. 3·1 혁명의 도화선이라 평가받는, 재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1919년 2월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유학생학우회 총회의 단상에 올라 유학생 수백 명을 지휘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2·8 독립선언서의 첫머리에 서명


현장 모습을 전하는 한 기록에 의하면, 그는 복받치는 감격과 눈물 섞인 목소리로 집회를 이끌었다. 그는 독립선언서의 수석 서명자이기도 했다. 그날 배포된 선언서에는 ‘조선청년독립단 대표자’ 11명의 이름이 적혔는데, 맨 첫자리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해 1월6일께부터 시작된 준비 과정도 최팔용이 총괄했다. 보기를 들어, 선언서 집필을 담당한 이광수에게 중국 상하이 망명을 지시한 이도 그였다. 이광수의 증언을 들어보자.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은 선언서를 짓는 것이었는데, 정성과 재주를 다해 밤새워 그 일을 했다고 한다. “2월 초하룻날 잔설은 아직 간다구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 뜰 앞을 가린 채로, 무서운 간토 폭풍이 시가지를 훑고 지나가던 밤”이었다.

바람 소리에 유리창이 덜컹거릴 때마다 순사 옆구리에 차는 패검 소리가 아닌가 하여 몇 번이나 작업을 중단했다. 마침내 원고를 완성했을 때, 최팔용이 찾아와서 상하이로 피신할 것을 제안했다. 내부도 중요하지만 외부도 중요하니, 선언서를 가지고 외국으로 나가라고 종용했다는 것이다. 선언서 서명자들의 역할 배분 같은 중요하고도 은밀한 일을 최팔용이 관장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 관헌들이 보기에도 그는 죄가 컸다. 그는 재판정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았다. 2·8 독립선언으로 공판에 회부된 사람은 9명인데, 그중 최팔용은 서춘과 함께 나란히 징역 9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최팔용이 큰 영향력을 가졌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독립선언이 있기 몇 년 전부터 그는 도쿄 조선유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했다. 1917년 2월부터 편집부 부원으로 일했고, 그해 9월 책임이 더욱 무거워져서 편집부장으로 선임됐다. 편집부 소임은 유학생회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펴내는 일이었다. 1914년 4월 창간된 이 잡지는 격월간으로 기획됐지만 실제로는 연 2∼4회 발간됐다. 최팔용이 편집부에 있는 동안에는 제12호(1917년 4월)부터 제17호(1918년 8월)까지 모두 6개호가 나왔다. 직접 글도 썼다. 자신의 본명이나 ‘당남인’(塘南人)이라는 필명으로 다섯 꼭지의 기사를 썼다. 당남은 그의 아호였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 ‘함경남도 홍원군 주익면 남당리’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그의 외모와 재능도 한몫했다. 최팔용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 유학을 했던 최승만은 최팔용을 가리켜 “키가 크고 큰 몸집을 가진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함경도 출신으로 허우대가 좋고 유학생들의 리더 격이었다고 회고한 글도 있다. 게다가 그는 웅변도 잘했다. 1918년 4월13일, ‘각 대학 동창회 연합 현상(懸賞) 웅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최팔용이 1등상을 받을 정도였다.

이날 그는 ‘대세와 각오’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이 설령 망했더라도 영구히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설혹 융성한다 하더라도 역시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세계 역사를 보라고 환기했다. 망국 폴란드는 오늘날 독립했고, 러시아 제국은 쇠망 상태에 처했음을 지적했다. 끝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종결될지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즈음 청년은 마땅히 자신의 의무를 다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의미심장하게 마무리했다.


팔용이 수감됐던 일본 도쿄 스가모감옥의 구조. 임경석 제공

일본 형무소 출소 뒤 조선 명사로


합법 공개 집회였기에 에둘러서 표현했지만, 조선 멸망은 영구적인 게 아니므로 전쟁 종결을 맞아서 청년은 마땅히 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2·8 독립선언을 예감케 하는 격렬한 연설이었다.

유학생들을 이끄는 지도적 역량은 무엇보다 그의 비밀결사 경력에서 나왔다. 최팔용은 신아동맹당이라는 비밀결사에 가담했다. 이 단체는 1916년 결성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단체였다. 조선, 중국, 대만 출신 유학생들이 각각 자국의 혁명을 도모하기 위해 연합해서 만든 기구였다. 이 중 조선인 구성원은 18명이었다. 의지가 굳고 조국을 위해 한번 죽음도 불사할 만한 사람만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2·8 독립선언의 동지인 김도연도 같은 멤버였다. 구성원 가운데 절반쯤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여서 뒷날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중핵을 이루기도 했다. 장덕수, 김철수, 김명식, 홍진의 등이 그 보기였다.

2·8 독립선언 이듬해인 1920년 3월26일, 최팔용은 형기를 마치고 출감했다. 도쿄 스가모감옥 문을 나섰다. 뒷날 사상범을 주로 수용하던 형무소로 유명해졌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A급 일본인 전범들을 처형한 장소로 이름난 곳이었다. 최팔용은 귀국길에 올랐다. 2·8 독립선언의 지도자였던 만큼 그의 동정은 언론 매체의 관심 대상이 됐다. 열차 편으로 경성에 도착해 닷새간 체류했다가, 다시 경성발 열차로 귀향하는 일정을 일간신문들은 낱낱이 보도했다. 그는 조선 사회의 명사가 되어 있었다. 고향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열차가 함흥역에 도착했을 때 환영객 50~60명이 역까지 나왔을 정도다. 그날 저녁에는 만찬에 초대하려는 지인들의 권유 때문에 귀향 일정을 하루 미뤄야 했다. 그뿐인가. 다음날 4월25일, 버스 편으로 고향 홍원으로 출발할 때도 전송객 수십 명이 그를 둘러쌌다.

최팔용은 출옥하자마자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이제는 학생운동이 아니라 민중운동이었다. 맨 먼저 착수한 조직 대상은 청년층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청년운동을 시작했다. 1920년 5월15일에는 홍원청년구락부 결성에 참여했다. 홍원군 내 11개 면의 청년들에게 웅변회, 운동회, 강연회를 여는 일을 본분으로 삼는 단체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청년단체를 결성한 게 귀향한 지 불과 20일 만의 일이었다. 옥중에서부터 이미 출감 이후 진로를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외국 망명지의 사회주의자들과 결합


그가 염두에 둔 향후 진로는 바로 사회주의운동이었다. 1920년 가을 경성에서 사회혁명당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 조직에 참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사회주의국가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혁명단체였다. 그 멤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가자 김철수의 회고에 따르면 설립 당시 구성원은 약 30명이었는데, 중심인물들은 일찍이 도쿄 유학생 시절에 조직했던 비밀단체 신아동맹당의 당원이었다. 최팔용을 비롯해 장덕수, 김철수, 홍진의, 김명식, 정노식 등이 그러했다. 이 비밀단체는 이듬해 더욱 확대됐다. 외국 망명지의 사회주의자들과 결합해 고려공산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 단체는 본부를 상하이에 뒀기 때문에 통칭 ‘상하이파 공산당’이라 했다.

최팔용과 그 동지들은 합법·비합법 운동을 결합하는 방침을 굳게 지켰다. 3·1 혁명 이후 총독부가 허용한 이른바 문화정치 공간을 활용하는 정책이었다. 그 공간 속에서 각계각층의 전국 규모 합법 대중단체를 조직하는 데 노력했다. 전조선청년회연합회, 조선노동공제회 등의 단체는 그 소산이었다. 그뿐인가. 합법적인 사회주의 선전 기관을 세우는 일에도 진출했다. 최팔용은 잡지 <학생계>의 주간을 맡아, <학생계>를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매체로 활용하려 했다. 이 노력은 큰 성과를 올렸다. 사회주의 확산 속도와 범위가 해가 다르게 늘어났다. 요컨대 최팔용의 출옥 뒤 행보는 3·1 혁명 직후 조선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이 확대되는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표상과 같았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다. 어느 날 일간신문에 최팔용의 사망을 알리는 기사가 떴다. 1922년 11월4일치 신문이었다.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최팔용씨는 그제 2일 오후 10시경에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면 남당리 자택에서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씨는 성질이 중후 순직한 인격자로 사회의 촉망이 많았으며, 향년이 32세인데, 일반 유지들은 그의 부음을 듣고 사회의 유망한 청년 하나를 잃어버렸다 하여 매우 애석히 생각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으며, 시내 종로 6정목에 유숙하고 있는 그의 자녀 삼 남매는 이 놀라운 부음을 듣고 어제 아침에 홍원으로 급행하였다.” 


32살 청년 떠나니 비밀결사도 힘 잃어


사망 일시와 장소, 원인이 밝혀져 있다. 1922년 11월2일 오후 10시께 함경남도 홍원 자택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요절이었다. 1891년생이므로 향년 32살에 지나지 않았다. 가족에 관한 단편적 정보가 눈에 띈다. 경성 종로 6정목에는 어린 자녀 삼 남매가 머물렀다고 한다. 최팔용은 홍원과 경성을 오가기 위해, 또 어린 세 자녀의 교육을 위해 아마도 경성 시내에 살림집을 하나 사두었거나 임대했던 것 같다.

가장 눈에 띄는 정보는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것이었다. 유망한 청년을 잃었다는 애석함과 애도의 심리가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의 부재는 상하이파 공산당 세력이 부진해진 한 원인이 됐다. 그의 돌연한 죽음이 없었다면 그가 몸담은 비밀결사가 약화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이광수, ‘상해의 2년간’, <삼천리> 4-1, 29쪽, 1932년 1월.

2. ‘소식’, <학지광> 17, 78쪽, 1918년 8월.

3.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 26, 東京, みすず書房, 9쪽, 1967.

4. ‘中第274號, 新亞同盟黨組織ニ關スル件’, 大正6年(1917)3月14日, 1~12쪽. <不逞団関係雑件-朝鮮人の部在内地(2)>

5. ‘최팔용씨 迎送’, <동아일보> 1920년 5월2일치 4면.

6. ‘崔八鏞氏’, <동아일보> 1922년 11월4일치 3면.



임경석의 역사극장

다나카 저격수의 탈옥

‘황포탄 의거’ 오성륜…
맹수 우리 같던 감옥을 어떻게 탈출했나



히고노카미 주머니칼의 크기. 임경석 제공

1922년 3월28일 다나카 일본군대장 저격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황포탄 의거’라고 한다. 사건 직후 이 의거의 주역 가운데 두 사람이 체포됐다. 김익상(28)과 오성륜(23)이었다. 이들을 체포한 사람들은 일본군이나 경찰이 아니었다. 권총을 소지한 ‘괴한’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상하이 거주 시민들과 교통순경이었다. 한낮에 총을 쏘면서 대로를 뛰어다니지 않았는가. 그들 눈에는 갑작스러운 총격과 위험천만한 난동으로 보였을 뿐이다. 제국주의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피억압 민족의 해방투쟁이라고는 미처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일본총영사관이 아니라 상하이 공동조계 경무청에 인계됐다. 사건 장소도 그렇고, 두 사람이 체포된 곳도 공동조계 관할 구역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인 경찰이 취조했다. 범인들의 태도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들이 누구이며 왜 그런 일을 했는지 거침없이 진술했다. 그리하여 두 명 모두 한국인이고, 한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단체 소속이란 것이 밝혀졌다. 그들은 자기 행위를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김익상은 “나는 단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할 뿐”이라고 했다. 오성륜도 “우리 조국이 고통받는 현실을 우리 손으로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다나카 대장을 저격했노라고 토로했다.1


감옥에 가둔 것은 맹수였다


중국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건물. 현재 중국 해군 군사시설로 쓰이고 있다. 임경석 제공

이틀 뒤, 두 사람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에 인계됐다. 사건 수사 기록과 증거물도 함께였다. 바로 그날부터 일본인 경찰의 문초가 시작됐다. 범죄 동기, 범행 경로, 공범자 관계 등을 집요하게 신문했다.

두 사람이 갇힌 곳은 높은 담을 둘러친 총영사관 구내의 부속 감옥이었다. 총영사관은 상하이 일본인 지구를 관할하는 일종의 정부와 같았다. 자체 경찰기관이 있을 뿐 아니라 검찰, 재판부, 감옥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감옥은 정식 재판에 회부되기 이전의 미결수들을 주로 수용했다. 예심을 마치고 공판에 넘겨진 죄수는 본국 나가사키 감옥으로 송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두 사람은 분리 수용됐다. 김익상은 1번 방, 오성륜은 5번 방에 갇혔다. 마땅히 독방에 가둬야 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감방 수는 6개에 불과한데 수감 중인 범죄자가 이미 25명이나 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잡범’들과 같은 방에 수용됐다. 각각 3명의 다른 죄수와 함께 혼거방에서 지내게 됐다.2


오성륜이 갇힌 5번 방은 감금 설비가 이중으로 돼 있었다. 실내 한쪽에 철봉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박아, 따로 철제 우리를 설치한 특수 감방이었다. 맹수를 수용하는 동물원의 철제 우리와 다름이 없었다. 철제 우리 출입문에는 빗장이 걸렸고, 거기에는 다시 쇠자물쇠가 채워졌다. 오성륜은 5번 방 속에서도 철제 우리 안에 갇혔다. 그뿐인가. 팔목에는 수갑이,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졌다. 중범죄자인지라 엄중하게 다루었다.

수감 열흘쯤 되던 때 작은 변화가 있었다. 감방 내부에 철제 우리를 따로 둔 구조는 간수들에겐 무척 성가신 시스템이었다. 무엇보다 용변이 문제였다. 변기는 철제 우리 밖에 있었다. 수감자가 용변을 요청할 때마다 간수들은 똑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했다. 5번 방 문을 따고 들어와서, 다시 철제 우리 차단문에 달린 빗장과 쇠자물쇠를 열어줘야 했다. 수갑과 족쇄도 풀어줘야 했다. 그러고는 얼마쯤 용변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으며, 용변이 끝난 뒤에는 이제 역순이었다. 다시 수갑과 족쇄를 채워 철제 우리 속에 집어넣고 빗장과 자물쇠를 닫아야 했다. 이렇게 열흘이 지났다. 경찰과 검사의 신문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피의자가 범죄행위를 감추지 않고 진술했기 때문에 혐의 사실은 모두 판명된 상태였다. 머잖아 사건은 예심으로 넘어갈 터였다. 중죄인에 대한 긴장감이 조금씩 옅어졌다. 간수들은 철제 우리 차단문에 걸린 빗장과 잠금장치를 일일이 열고 닫던 행위를 생략했다. 용변 처리를 범죄인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덕분에 오성륜은 철제 우리 안팎으로 넘나들 수 있게 됐다. 손발에 수갑과 족쇄는 달렸지만. 4월7일부터였다.3


히고노카미 주머니칼이 어떻게


탈옥을 허용한 원인을 설명하는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의 보고서. 히고노카미 주머니칼을 언급한 게 보인다. 임경석 제공

오성륜은 다른 수감자들과 잘 지냈다. 모두 일본인이었다. 다무라 추이치는 사기 범죄로 징역 1년6개월형을 선고받은, 전과 2범의 누범자였다. 다른 두 수감자는 고가의 밀수품을 밀매하는 암시장 상인들이었다. 고미야 시카조는 권총 밀매와 공갈죄로 징역 3개월을 받았고, 후지타 가메노스케도 총기 밀매 혐의로 구류 25일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오성륜은 이 수감자들에게서 따뜻한 대우를 받았다. 왜 그랬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고문으로 고통받는 이에 대한 연민이 그들 마음속에 일었던 것 같다. 사형이 예정된 중죄인에 대한 동정일 수도 있었다. 또 오성륜의 개인적인 성품과 태도에 수감자들의 호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월15일 경찰과 검사 신문이 끝났다. 사건은 총영사관 판사의 예심에 회부됐다. 10여 일이 지났다. 김익상에 관한 예심 사무는 종료됐고, 오성륜 심리도 완결을 앞두고 있었다. 며칠 뒤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이 예정된 상황이었다.

오성륜은 ‘소도’(작은 칼)를 손에 넣었다. 뒷날 경찰 조사에 따르면, ‘히고노카미’(肥後守) 브랜드가 새겨진 접이식 주머니칼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경찰도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감옥 외부에서 조력자들이 암약했거나, 경계 소홀을 틈타 어디선가 훔쳤을 거라고 추정할 뿐이었다.

4월27일이었다. 오성륜은 식기 뚜껑의 작은 금속 부위를 주머니칼로 잘라냈다. 창문 틈에서 뽑아낸 철사 한 줄을 그것에 감았다. 수갑과 족쇄를 풀 열쇠로 쓰기 위해서였다. 실패를 거듭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했다. 4월28일, 수갑과 족쇄가 열렸다. 이날부터 오성륜은 병에 걸렸다고 가장하며 세수와 목욕 등 감방 밖 출입을 중단했다.

사기범 다무라는 오성륜과 행동을 같이하기로 했다. 동반 탈옥을 결심했다. 다른 두 수감자는 형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같은 편이었다. 탈옥 계획을 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탈옥이 성공한 뒤에는, 살해 위협 때문에 부득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노라고 진술하기로 입을 맞췄다.

5번 방은 건물 2층에 있었다. 원래 영사관 직원 숙소로 쓰던 곳을 감옥으로 개조한 시설이었다. 한쪽 벽면에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도로에 접한 창이었다. 창문 밖으로 거리 풍경이 엿보였다. 당연히 거기에는 탈주 방지 시설이 굳게 세워져 있었다. 철망이 둘러쳐지고, 철봉 4개가 조밀하게 박혀 있었다. 하지만 철망을 뜯어내고 철봉을 한두 개 제거하면 몸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성륜과 다무라는 시간 날 때마다 철망 절단 작업에 매달렸다. 오랜 시간을 들인 끝에 겨우 가로세로 10㎝씩 절단할 수 있었다.4


탈옥을 위한 한일 연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이 있던 위치, 현재 황푸로 106번지. 아래 붉은 별 찍힌 곳. 임경석 제공

좀더 시간을 들이면 철망은 뜯어낼 수 있겠지만, 철봉 제거는 가능할까 의심스러웠다. 밀수품 밀매범 고미야는 목수 경험이 있었다. 차라리 감방 출입문을 공략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감방 출입문 아래쪽 일부는 나무로 돼 있으므로, 그것을 깎아내자는 제안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5월1일 아침이었다. 세면 시간에 누군가가 간수 사무실에서 조그만 숫돌 하나를 몰래 갖고 나오는 데 성공했다. 주머니칼은 다시 날카롭게 벼려졌다. 수감자들은 출입문 널판을 교대로 베어냈다. 숙직 순사의 이목과 간수들의 순시를 피해 소리 없이 해야 했다. 한 사람은 망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교대로 나무를 깎았다. 온종일 그렇게 했다. 마침내 가로 48㎝, 세로 30㎝ 직사각형 구멍이 뚫렸다. 성인 남성 한 사람이 충분히 빠져나갈 만한 크기였다.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 떼낸 자국이 드러나지 않게 원래 상태처럼 꾸몄다.5

밖으로 나가자면 옷과 신발을 갖춰야 했다. 오성륜은 체포될 때처럼 다갈색 혼방 모직으로 된 중국 옷을 입고 있었다. 다무라가 문제였다. 그는 수의에 맨발 차림이었다. 그를 위해 낡은 양복을 입고 있던 후지타가 자기 옷을 내놨다. 바닥에 깔고 자던 이부자리를 뜯어서 신발 비슷하게 만들었다. 또 준비할 게 있었다. 남은 사람들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나갈 사람들은 남은 두 사람의 수족을 감방 속 철봉에 묶고, 수건으로 입에 재갈을 물렸다.

새벽 1시30분이었다. 숙직 순사들의 순시가 끝난 지 30분이 지났다. 오성륜과 다무라는 행동에 들어갔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뒷날 <독립신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자른 문짝으로 감방을 빠져나왔고, 층계로 1층에 내려가는 데 성공했다. 영사관 마당을 가로질러 담장으로 갔고, 출입자가 드문 영사관 뒷문을 타고 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들은 깊은 밤중이었지만 영사관 건물 앞 황푸로 거리에서 두 대의 인력거를 불러 탈 수 있었다. 인력거는 프랑스 조계로 향했다. 탈옥자들의 피신을 돕는 동지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6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탈옥수


오성륜 탈옥 소식을 전하는 <독립신문> 1922년 12월13일치 기사. 임경석 제공

두 사람이 옥문을 뚫고 나간 지 30분쯤 지나, 옥중에 남은 이들이 비로소 고함을 질렀다. 간수와 숙직 순사들이 달려왔다. 그제야 총영사관 쪽은 탈옥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상이 걸렸다. 탈옥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그 행위자가 다나카 대장 저격범이지 않은가. 총영사관은 수배령을 내렸다. 모든 경찰력과 밀정 조직을 가동해 탈출범들의 동선을 추적했다. 범인들의 이동이나 잠복 장소로 쓰일 가능성이 있는 정거장, 부두, 여관 등은 특별 감시 대상이 됐다. 또 상하이 여러 구역을 관장하는 다른 경찰 조직에도 협조를 구했다. 공동조계 공부국 경찰, 프랑스 조계 경찰, 중국 경찰기관에 통첩을 보내 비상경계를 요청했다. 효과는 없었다. 오성륜이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다. 총영사관은 다나카 대장을 저격한 또 하나의 저격범 김익상을 부랴부랴 일본으로 이송했다. 오성륜이 탈옥한 바로 이튿날, 5월3일 자로 김익상은 산조마루 여객선 편으로 나가사키 지방재판소로 압송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일본 다나카 장군 폭탄 세례, 광신자들의 표적’, <더 차이나 프레스> 1922년 3월29일치.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0, 임정편Ⅴ>, 국사편찬위원회 편, 241쪽, 1991.

2. 在上海船津總領事, 「田中大將狙擊犯人吳成崙逃走ニ關スル件」, 大正11年 5月3日. 日本外務省 編, 『外務省警察史 - 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 2, 高麗書林影印, 678~679쪽, 1991.

3. 在上海船津總領事, 「田中大將狙擊犯人吳成崙逃走ニ關スル件」, 大正11年 7月12日. 日本外務省 編, 앞의 책, 698쪽.

4. 在上海船津總領事, 앞의 글, 大正11年 5月3日. 日本外務省 編, 앞의 책, 683쪽.

5. ‘吳壯士脫獄顚末’, <독립신문> 1922년 12월13일치.

6. 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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