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독립운동가의 마음에 어린 딸이 떠올랐다

상하이 황푸탄 의거 주도한 독립투사들의 유언…
딸아 아우야 나처럼 살길 바란다



군복을 입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사진 임경석 제공

중국 상하이 황푸탄에는 배를 접안할 수 있는 부두 시설이 즐비했다. 오늘날 와이탄이라 하는 그 번화한 곳 말이다. 접안 시설을 중국어로는 ‘마두’(碼頭)라고 했다. ‘세관 마두’도 그중 하나였다. 화물과 여객의 입출항을 관리하는 세관이 담당하는 것이니만큼 규모가 컸다. 위치도 번듯했다. 다채로운 유럽식 건축물이 늘어선 황푸탄 지구의 정중앙이라 해도 좋을 곳이었다.

1922년 3월28일 화요일이었다. 세관 마두를 향해 호화로운 여객선 ‘파인 트리 스테이트’호가 서서히 들어왔다. 필리핀 마닐라를 출발해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입항하는 중이었다. 오후 3시30분, 여객선과 육지를 연결하는 부속선이 승객들을 싣고서 마두에 접안했다. 배에는 여러 나라 사람이 섞여 타고 있었다. 세계 여행을 즐기는 미국인 여행자 그룹도 있었고, 일본인 고관과 그 수행원들도 있었다.

주목을 끄는 이는 일본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58) 남작이었다. 1918∼21년 일본 육군대신으로 재임했던, 군벌 수뇌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3·1운동에 대한 일본군의 유혈 탄압에 책임이 있는 자였다. 또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북간도에서 자행된 독립군 토벌 작전인 경신참변에도 책임이 있는 자였다. 한국인의 해방운동을 총칼로 압살하도록 명령한 자였다. 그가 상하이를 방문한 때는 육군대신 직을 내려놓고 잠시 한가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의 필리핀 총독 레너드 우드의 초청으로 마닐라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는 상하이에 들러 현지 일본인 유지들과 환담할 예정이었다. 그의 상하이 방문 일정은 일간신문에도 소개됐다.

마두에 상륙한 다나카 남작은 출영객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뒤 세관 검사소를 지나 큰길로 막 나오려던 때였다. 다갈색 중국옷을 입은 괴한이 불쑥 뛰어나오더니 권총을 꺼내 쏘았다. 탕탕탕! 세 발이었다.


3·1운동 탄압의 원흉을 겨누다


그뿐인가. 검은색 양복과 갈색 코트를 갖춰 입은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나카 남작 앞으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이 아스팔트 위로 떼구르르 굴렀다. 그에 더해 남자는 권총을 빼들고서 표적을 향해 두 발을 쐈다.¹

사실은 세 사람이었다. 다나카 육군대장 저격 사건에 가담한 의열 투사들 말이다. 세 사람이 거사 현장에 도착한 것은 그날 아침 6시였다. 춘분이 지나고 며칠 안 되는 때라서 어둑어둑했다. 해 뜰 무렵이었다. 그처럼 아침 일찍 현장에 도착한 까닭은 혹여 언론 보도와 달리 기선 도착 시간이 예정보다 몇 시간 앞당겨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오후 3시 남짓까지, 일행은 무려 9시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다. 언제나 배가 도착할까, 세 사람의 신경은 온통 그것에만 쏠렸다.


다갈색 중국옷을 입은 오성륜(23)은 첫 번째 행위자였다. 표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권총을 쏘기로 돼 있었다. 그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냈다. 한구로 입구에서 강변 쪽을 향해 9~10m쯤 떨어진 길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세관 마두의 검사소 출입구가 환히 보이는 곳이었다. 제2선은 김익상(28)이 맡았다. 불행히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가 나설 터였다. 두 번째 거사를 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그는 한 손엔 폭탄을, 다른 한 손엔 권총을 들었다. 갈색 코트가 도구를 감추는 데 제격이었다. 그는 부두 한쪽 전화 부스 뒤에 자리를 잡았다. 제3선 행위자도 있었다. 바로 이종암(27)이었다. 이도 저도 실패한다면 그가 나설 참이었다.

세 사람은 동지들이었다. 비밀결사 의열단의 구성원이었다.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고, “조선의 독립과 세계 만인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희생하기로” 약속한 이들이었다.


한 명의 타깃, 세 명의 희생



푸탄 저격 사건에서 뜻밖의 희생자가 된 미국인 여성 스나이더. 사진 임경석 제공

다나카 남작은 운이 좋았다. 오성륜이 처음 쏜 총알 세 발은 표적을 맞추지 못했다. 그 대신 다나카 남작과 나란히 걷던 미국인 여성 관광객 W. J. 스나이더가 거꾸러지고 말았다. 여성은 최초 사격이 있을 때 막 세관 검사소 건물을 나왔다. 오른쪽 가슴에 세 발의 관통상을 입은 여성은 급히 병원에 옮겨졌지만, 도착 10분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40살 정도인데, 남편과 함께 5개월 전에 세계 여행을 위해 미국 뉴욕을 떠난 8명의 관광단 일원이었다. 상하이에서 이틀간 체류한 뒤 베이징, 한국, 일본을 거쳐 고향인 미국 인디애나주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이 부부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은 슬픔을 잊으려고 여행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듣는 이를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김익상이 던진 폭탄도 불운했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폭탄은 도로를 가로질러 강둑 가장자리까지 굴러갔는데, 마침 영국 전함 카라일호의 승무원이 발로 차서 강물 속에 넣어버렸다. 왜 불발했을까? 그 소식을 들은 상하이 한국인 망명객들은 하나같이 장탄식을 내뱉었다. 상하이에서 간행되는 <독립신문> 가십난에 다음과 같은 한탄이 실렸다.

“폭발탄아 폭발탄아 황포탄의 폭발탄아. 다나카 적(賊)을 만나거든 소리치며 터지라고, 천번만번 부탁하고 정성들여 던졌거늘, 네가 무슨 까닭으로 침묵하고 있었더냐. 좋은 기회 다 놓치고 어느 때에 터지려고.”²

운 좋게도 저격을 모면한 다나카 일행은 신속히 몸을 피했다. 그 탓에 제3선에 대기 중이던 이종암의 사격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목표를 맞추지 못했다. 사건 현장검증을 맡은 상하이 공동조계 경무청의 리브 형사는 그 기미를 알아챘다. 제3의 가담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몇 발의 탄흔을 발견했는데, 김익상과 오성륜이 서 있던 위치와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황푸탄의 폭발탄아 왜 침묵하였느냐


김익상과 그의 부인. 사진 임경석 제공


황푸탄 의거 현장(붉은 별). 주인공들의 도주 경로와 체포된 장소(위 김익상, 아래 오성륜). 사진 임경석 제공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 연거푸 터지는 총소리와 군중의 비명 때문에 패닉 상태가 됐다. 오성륜은 뛰었다. 몸을 뒤로 돌려 전찻길 건너 항구로 방향으로 달렸다. 평소에도 통행인이 많아 혼잡한 길이었다. 권총을 쥐고서 내달리는 위험해 보이는 괴한 앞을 행인들이 가로막았다. 그는 길을 가로막는 군중에게 위협사격을 했다. 중국인 순경과 인력거꾼 2명이 총상을 입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한 블록을 지나,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천로였다. 그 길을 따라 다시 한 블록을 달렸다. 그러나 복주로와 만나는 십자로에서 현지 순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김익상도 뛰었다. 그는 전찻길을 따라 북쪽으로 내달렸다. 현장을 본 몇몇 사람이 추격했다. 그들을 따돌리려면 도주 방향을 지그재그로 변화시키는 것이 유리했다. 추격자들이 뒤쫓아왔다. 도망자는 위협사격을 했다. 중국인 손수레 상인이 총상을 입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천로였다. 창고가 보였다. 문이 열려 있어 숨어들었다. 그러나 막다른 곳이었다. 되돌아 나왔으나 군중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한 서양 청년이 그를 덮쳤다. <파이낸스 앤드 코머스> 기자 영국인 H. E. 톰슨이었다. 김익상은 그에게 총상을 입혔다. 하지만 곁에서 달려드는 미국인 증권 중개인 호레이스 귤릭을 제압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거사 이틀 전이었다. 1922년 3월26일 밤 10시, 상하이 프랑스 조계 백이로 정운리 18호에 젊은이 8명이 둘러앉았다.³

세 사람을 송별하는 자리였다. 황푸탄 의거의 세 주인공을 둘러싸고 다섯 청년이 합석했다. 김원봉(25)을 비롯해 권준, 강세우, 서상락, 송호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비밀결사 의열단의 구성원이었다. 그중 네 사람은 1919년 11월 이래 창립 멤버였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은 까닭은 죽기를 각오한 동지들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대의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한 동지들의 소회를 들으려 했다. 생전 마지막 육성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유언을 듣는 자리였다.


딸을 혁명가로 키워달라는 유언


김익상(왼쪽)과 오성륜. 사진 임경석 제공


김익상과 오성륜의 유언을 적은 메모지 일부. 사진 임경석 제공
김익상은 남은 동지들이 서로 사랑하며 화합하라고 주문했다. 또 “우리 정신을 관철”하기 위해 생사를 넘어서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욕된 운명에 속박돼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말라고 권했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특히 단장 김원봉에게 당부했다. “딸을 공부시켜 여성 혁명가가 되도록 교도하기를 부탁한다.” 그에게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아내와 3살 딸이 있었다. 서울 남산 너머 이태원리 288번지에 그의 가족이 살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을 결심하는 순간 독립운동가의 마음속에 어린 딸이 떠올랐다. 아버지 없이 자랄 딸의 장래가 눈에 밟혔던 것 같다.

오성륜도 죽음을 결단하는 소회를 밝혔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죽음의 길도 같이 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지하에서 다들 한자리에 모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도 가족의 장래를 동지들에게 부탁했다. 미혼인 그에게는 나이 어린 두 동생의 장래가 걱정이었다. 17살 오성룡과 6살 오성봉의 교육을 부탁했다. “약산(김원봉)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것은 두 아우를 우리의 뜻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주기 바란다”고 했다.⁴

이 유언은 죽기를 각오한 투쟁에 나서는 독립운동가들의 내면을 보여준다. 결단의 순간에 그들 마음속에서 어떤 상념이 오갔는지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가족을 떠올렸다. 특히 아버지나 형의 보살핌 없이 서럽게 자라게 될 어린 자녀와 동생의 삶을 생각했다. 그 장래에 대한 걱정이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었던 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각주

1 ‘일본 다나카 장군 폭탄 세례, 광신자들의 표적’, <더 차이나 프레스> 1922년 3월29일치.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0, 임정편Ⅴ>, 국사편찬위원회 편, 240쪽, 1991.

2 ‘폭발탄’, <독립신문> 1922년 4월15일치.

3 Shanghai Municipal Police, Special Branch, “D.4460, D.4463”, 같은 자료집, 442쪽.

4 ‘프랑스 조계 白爾路 停雲里 18호의 한국인 집에서 3월29일 발견된 한국어 서류’, 같은 자료집, 448~450쪽.



‘101인 사건’ 중 옥사한 34살 좌파 독립운동가 박길양


뒤늦게 병보석 결정을 내린 야모토 재판장, 박길양의 필적, 박길양(왼쪽부터). 임경석 제공


박길양(朴吉陽)은 옥중에서 죽었다. 34살, 한창나이였다. 1928년 1월19일 겨울날 새벽 6시 서대문형무소 차디찬 철창 속에서 숨을 거뒀다. 사인은 폐병이라 알려졌다. 두 달 전부터 병세가 악화됐던 것 같다. 재판 중인데도 재판정에 출석하지 못했다. 그는 1927년 12월7일 이후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담당 변호사 김병로와 이인이 12월16일 자로 병보석을 신청했다. 질병 치료를 위해 구속 중인 피고인을 석방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조선총독부 판사들은 좀체 보석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사상범인 경우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웬걸, 얼마나 위급했을까. 1월18일 오후 3시께 급기야 보석이 허용됐다. 야모토 재판장도 피고인 상태가 위중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나보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박길양은 출옥 예정일 새벽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젊은 아내의 분명한 뜻 “화장은 안 된다”


남편 박길양을 잃은 슬픔에 망연자실한 김씨 부인. 임경석 제공


박길양은 ‘조선공산당 재판’의 피고인이었다. 재판은 1927년 9월13일부터 이듬해 2월13일까지 5개월간 계속된, 조선총독부 경성지방법원이 담당한 형사재판이었다. 피고인 수가 101명이라 ‘101인 사건’이라고도 한다. 일본 강점 초기에 벌어진 ‘105인 사건’과 더불어 일제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항일 비밀결사 사건이었다.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피의자와 피고인이 속속 죽어나갔다. <시대일보> 기자 박순병이 1926년 8월25일 사망했다. <조선일보> 동래지국장이자 조선노동공제회 상무간사이던 백광흠은 1927년 12월13일 숨을 거뒀다. 박길양에 뒤이어 연희전문학교 학생 권오상이 1928년 6월3일 죽었다.


이들의 사인은 질병 탓이라고 발표됐다. 맹장염, 건성늑막염, 결핵성복막염, 폐병 따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건강하고 원기 넘치던 청년들이 경찰에 체포된 뒤 얼마 안 돼 죽을병에 걸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야만적 고문’ 탓이었다. 못 견딜 가혹행위에 ‘학살’된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박순병 동무는 경찰서에서 학살당하고 백광흠·박길양 동무는 감옥에서 참사됐다”고 인식했다. 희생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슬픔과 분노가 일었다. 희생자들을 잊지 않으리라.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리라. “혁명가 한 사람이 희생한 터에는 그 위에 새로이 열렬한 혁명가 열 사람 이상이 솟아나느니라”고 속다짐했다.


장례식은 그렇게 마음속 결의를 다지는 자리였다. 박길양이 숨을 거둔 이튿날, 합법적 공개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회운동가 40여 명이 모였다.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30개 단체가 참여했다. 노동총동맹·농민총동맹·청년총동맹 등 전국 규모의 대중단체를 비롯해 신간회·근우회 등 민족통일전선 단체가 포함됐다. 대표자들은 장례식을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치르기로 결의하고, ‘장의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재정부·장례의식부·서무부 등 집행부서가 만들어져 장례 준비를 착착 해나갔다.


경찰은 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박길양 장례식이 반일운동의 상징이 되도록 방관하지 않았다. 사회단체연합장을 금지하고 오직 가족장으로 치르는 것만 허용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례식 세부 절차에 하나하나 개입했다. 경찰은 매장이 아니라 화장을 종용했다. 그의 죽음이 사회적 추모와 저항의 표상이 될 가능성을 애초부터 제거하려 했다. 하마터면 그렇게 될 뻔했다. 그러나 젊은 아내 김씨 부인이 맞섰다. 화장이 아니라 매장을 원한다고 분명히 했다. 그는 삼엄한 경찰의 심리적 압박에 굴하지 않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식민지 국가 폭력은 30살 전후의 젊은 여성에게서 배우자를 빼앗아갔다. 그에게는 어린 남매가 있었다. 아비 없이 자라야 할 어린 승문과 승희를 키우는 것은 온전히 그 혼자만의 몫이 됐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김씨 부인은 기자에게 말했다. “그저 한 많은 일생이었지요. 살아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보았더라면 할 뿐이외다.” 그는 목이 메어 말끝을 맺지 못했다.


1월22일 장례식 날, 발인 장소는 서대문에 있는 노동총동맹 회관이었다. 정사복 경관 30여 명이 식장을 에워쌌다. 종로경찰서 오모리 순사부장이 현장을 지휘했다. 경찰은 장지로 향하는 상여 뒤로 오직 가족만이 뒤따르게 했다. 장례식에 참여하려 모여든 조문객 200여 명은 해산을 종용받았다. 가족이라야 오직 한 사람이었다. 고인의 아내만이 “애끓는 눈물로 얼굴을 적시면서” 상여를 뒤따랐다. 그 곁에는 친정 남동생 김근호만이 동행할 수 있었다. 명정이나 조기, 만장 등도 들지 못했다. 동지를 영결하려던 조문객들은 삼삼오오 짝지어 100m 혹은 200m 멀찌감치 떨어진 채 말없이 상여를 뒤따랐다.


서울 능가한 강화도 3·18 시위운동


장지는 수철리 공동묘지였다. 광희문 밖 4㎞ 지점에 있는데 오늘날 행정구역으로는 성동구 금호동에 해당한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장의 행렬은 종로, 동대문, 광희문, 신당리를 거쳐 수철리에 이르렀다. 장지까지 따라온 조문객은 28명이었다고 한다.


박길양은 피부가 하얗고 눈이 큰 청년이었다. 곱상한 외모였다. 키는 164㎝, 당시 기준으로 성인 남성 평균쯤 되는 몸집이었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행동거지는 과감하고 단호했다. 정신도 열렬했다. 그는 저 유명한 강화도 3·1운동의 능동적인 참가자였다. 1919년 3월13일 부내면 장날에 시작된 강화도 3·1운동은 4월12일까지 한 달 내내 계속됐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3월18일 강화 읍내 시위였다. 이날 시위에 무려 2만여 명이 참가했다. 놀라운 수였다. 당시 강화군 인구는 7만2천여 명이었다. 시위 참가자는 군내 전체 인구의 28%에 이르렀다. 부속 섬에 사는 수를 제외하면 3명 중 1명꼴로 시위에 가담한 셈이다. 3·1운동기에 일어난 전국 모든 시위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한 시위였다. 경찰 집계를 보면 참가자가 가장 많은 최대 시위는 강화도 3·18 시위(2만 명)이고, 그다음이 경남 합천 3·23 시위(1만 명)와 서울 3·1 시위(1만 명)였다.

박길양이 강화도 3·1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구체적인 정보는 발견되지 않았다. 강화도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45명이고, 그중에서 35명이 징역 또는 태형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박길양이란 이름은 거기에 없다. 그는 요행히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던 것이다.


만세시위운동이 퇴조하자 박길양은 새 방향을 모색했다. 시위운동이 불가능한 조건에선 무장투쟁을 벌이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독립군자금 모금에 뛰어든 것은 그 까닭이었다. 그는 경기도와 삼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군자금 모금에 헌신했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1년6개월간 징역살이를 했다. 그는 ‘열렬한 독립운동자’였다.


옥살이를 마치고 출감한 박길양은 해방투쟁을 위한 새로운 이론과 방법에 눈떴다. 사회주의 사상이 그것이다.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민중을 조직화·의식화해 스스로 혁명운동 주체로 나서게 돕는 것이 지름길이라 인식했다. 거족적인 혁명을 일으켜 식민지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대중운동 속으로 뛰어들었다. 합법적 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함과 동시에 공산주의 비밀결사에도 가담했다.


박길양은 청년운동에서 미래 비전을 보았다. 청년을 조직하고 계몽하는 일에 열성을 보였다. 먼저 강화군 부내면의 양대 청년단체를 통합해 강력한 단일 청년단체를 만들었다. 1924년 3월 창립한 강화중앙청년회가 그것이다. 그는 이 단체의 간부로 선출돼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강화군 내 웅변대회를 열고, 강화청년단체 연합 육상경기대회를 주관하며, 경성에 유학 중인 강화 출신 학생들의 여름 순회 강연을 주최하고, 교육 기회를 놓친 청년층을 위해 야학을 만들었다.


비밀결사에도 가담했다. 합법 공개단체의 역량은 한계가 있었다. 실정법 안에서만 활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박길양은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갔다. 강화도 내에 공청 세포단체를 조직하고 그 비서가 되었다. 중앙 상층부 논의 테이블에도 진출했다. 1925년 4월18일 경성 시내에서 비밀리에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러나 비밀결사는 탄로 나기 쉬운 위험한 운동이었다. 1925년 12월 초였다. 박길양은 일본 경찰에 비밀결사 가담 혐의로 체포됐다. 경성 종로경찰서에서 파견된 경찰대에 포박당했다. 자신의 과오 때문이 아니었다. 멀리 신의주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우연적인 사건 때문에 공청의 비밀이 누설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박길양의 생애 두 번째이자 마지막 감옥살이의 막이 올랐다.


미완의 꿈, 강화도로


1993년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박길양 부부의 합장 무덤 묘비. 임경석 제공


봄이 왔다. 언 땅이 녹고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1928년 4월9일, 박길양이 죽은 지 석 달쯤 지난 때였다. 아침 일찍부터 그의 고향 친구와 동지 10명이 수철리 묘역을 찾았다.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벗의 주검을 고향에 묻으려 했다. 가족의 뜻이기도 했다. 수철리 묘지에서 한강변 용산나루까지는 옛 친구 10명이 직접 상여를 메고서 운구했다. 상여를 멘 채 보조를 맞춰 8㎞쯤 떨어진 용산까지 이동했다. 거기에 배를 한 척 정박해놓았다. 강화도까지 한강 수로를 이용해 관을 옮길 터였다.

주검을 담은 목관에는 ‘고백평박길양지영구’(故白萍朴吉陽之靈柩)라고 쓰인 명정을 둘렀다. ‘백평’은 박길양의 아호였다. 상여 실은 배는 한강 물길을 따라 서서히 움직였다. 그리하여 4월10일 오후 1시 강화도 월곶 나루에 닿았다. 가족, 친구, 친척, 동지들이 그를 맞았다. 강화도는 물론이고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경찰도 있었다. 조문객보다 정사복 경찰이 더 많아 보였다. 행여 분노에 찬 군중이 불온한 움직임이라도 보일까봐 강화경찰서 병력이 총동원됐던 것이다. 장지는 갑곶리 공동묘지였다. 그날 저녁 늦게야 하관이 이뤄졌다. 저녁 8시였다. 묘역 한쪽에 새로 꾸민 봉분이 들어섰다. 고문에 희생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박길양의 유택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태백아 나 간다고 슬퍼 마라” <소년> 잡지 권두시의 비밀…
독립운동가들이 의병투쟁·애국계몽운동 다음으로 선택한 ‘망명’을 은유해


잡지 <소년> 1910년 4월호(왼쪽)에 실린 망명길 떠나는 이들을 노래한 권두시, ‘나라를 떠나는 슬픔’과 ‘태백의 님을 이별함’. 임경석 제공


태백아 우리 님아


나 간다고 슬퍼 마라


나는 간다


가기는 간다마는


나의 가슴에 품긴 이상의 광명은 영겁무궁까지도 네가 그의 표상이로다.


이별을 노래한 시다. 우리 님 ‘태백’에게 석별의 정을 전하고 있다. 부득이 헤어져야 하지만 님을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러기는커녕 더욱 타오른다고 말한다. 최상급 수사를 써서 속마음을 표현했다. 끝없이 영원토록 당신은 나의 님이라고 토로한다.


신민회 “죽음을 결심하고 자백하지 않을…”


잡지 <소년> 1910년 4월호에 실린 권두시의 한 구절이다. 1908년 11월부터 1911년 5월까지 통권 23호를 발행했던, 한국 최초의 근대적 종합잡지로 이름 높은 바로 그 언론매체다. <소년>은 만 18살에 불과하던 최남선이 거의 혼자 발행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일본 유학을 그만두고 중도에 귀국한 최남선은 큰 목표를 세웠다. 한국의 시대정신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아, 그 수단으로 잡지 발행을 꾀했다. 그는 근대 지식에 관한 교과서를 젊은이에게 공급하는 방법으로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서구 문학을 비롯해 세계의 지리와 역사, 철학과 과학에 관한 기사, 번역·번안 작품이 <소년>에 실린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1909년 9월호부터 <소년>이 바뀌었다. 청년학우회 결성에 참가한 최남선은 잡지 지면에서 그 단체의 동향을 선전했다. <소년>이 청년학우회의 기관지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청년학우회 참가를 권유한 사람은 안창호였다. 그때 최남선은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에게 여러 군데서 입회하기를 청하는 단체가 많았으나 도무지 응낙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내 이 청년학우회에는 희생적으로 일하겠노라”면서 쾌히 승낙했다.①


청년학우회는 비밀결사 신민회의 표면단체였다. 표면단체란 실정법이 허용하는 테두리 내에서 합법적·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단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대한제국 말기에 보안법, 신문지법 등과 같이 기본권을 제약하는 악법이 횡행하던 때였다. 외교권·경찰권·사법권을 박탈당하고 허울만 남은 대한제국이었다. 일본의 침략기관 통감부가 지휘하는 경찰의 압제와 감시를 수용해야만 하는 시대였다. 피억압 예속 상태에 빠진 한국을 구하려면 비밀결사가 필요했다. 합법 상태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동지적 결합이 요청됐다.


신민회는 그에 부응하는 비밀결사였다. 이 단체에 가입하려는 사람에게는 엄중한 결단을 요구했다. “입회의 첫째 조건으로 만일 경찰에게 발각됐을 때는 죽음을 결심하고 자백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②​ 언제 성립됐는지, 조직 규모는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란이 있다. 하지만 대한제국 말기에 애국계몽운동을 추동하던 비밀결사였다는 점에선 다른 의견이 없다. 신민회의 활동 반경은 넓었다. 서우학회, 한북흥학회, 기호흥학회 같은 학교설립기관 속에 신민회 구성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평양 대성학교를 비롯한 각지의 초·중등 사립학교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상동청년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같은 수도 서울의 기독교 청년단체 속에도,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기관 속에도 신민회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망명가들의 잘 짜인 정교한 독립운동


1910년에 이르렀다. 망국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일본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양상이 뚜렷했다. 그것을 저지하려던 비장한 시도들은 유혈 탄압 속에 시들어갔다. 한때 전국을 내란 상태로 몰고 갔던 의병 투쟁은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애국계몽운동도 총칼의 탄압 앞에서 무력했다. 일본군 헌병대는 항일운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특히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사건 이후에 더욱 그러했다. 무차별적인 체포, 구금, 구속이 자행됐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해 3월께였다. 신민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사들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망명이었다. 집단적으로 외국에 나가서 후일을 도모하기로 합의했다. 어떻게 강력한 일본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망명을 결심한 사람들은 잘 짜인 정교한 독립운동 계획안을 고안했다.


먼저 일본을 적대하는 서구 열강의 외교적 후원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염두에 둔 강국은 바로 러시아와 독일이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패배 이후 절치부심 복수를 염원하고 있었다. 또 남서 태평양의 마셜제도와 중국 교주만(산둥성 자오저우완)에 교두보를 마련한 독일은 아시아·태평양 일대에서 세력권 확장을 위해 일본과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다. 시운이 맞아 굴러간다면 이들이 한국 독립의 우방이 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했다. 만주 밀산현에 농경지를 사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 한편, 무장투쟁 간부를 양성할 사관학교를 설립하려 했다. 일본이 러시아나 독일과 전쟁하게 되면 국내에 진격할 무장부대의 군사 간부를 양성한다는 복안이었다. 또 있었다.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조직화하기로 했다. 북간도, 연해주, 미국 등지에 사는 한인 이주민 수십만 명을 ‘대한인국민회’라는 단일한 조직으로 결속하는 일이었다. 그뿐인가. 독립운동을 선도하는 언론매체도 발행하기로 했다. 제대로 된 항일 언론은 국내에서는 경영하기 어려웠다. 망명을 결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이 계획안을 실행에 옮기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 문제도 해결됐다. 큰 부자인 이종호·이종만 형제가 대농장의 경영 자금을 출자하기로 약속했다.


망명자들은 중국 산둥반도 칭다오에서 집결하기로 했다. 독일의 조차지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망명 이후의 일을 도모하기로 약속했다. 그리하여 그해 3~4월 국내에서 활동하던 반일 운동가들이 하나둘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사관학교 운영을 책임지기로 한 이갑·유동열·김희선 등 대한제국의 장교들, 언론매체 발간과 사관학교 정신 교육을 담당할 저명한 저널리스트 신채호, 거액의 운동자금을 출자할 이종호 형제, 농경지 구매와 농장 경영을 맡을 김지간, 외국 국민회 운동의 지도자 안창호와 이강 등이 그들이었다.③ 이 명단은 이강이 뒷날 저술한 회고록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출발 앞두고 자금책이 붙잡히는 바람에


이외에 망명자는 더 있었다. 보기를 들면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김립이 그러했다. 행적을 추적해보면 김립도 신민회 망명 간부들과 보조를 같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립은 1910년 3월9일 서울에서 열린 보성전문학교 제3회 졸업생 다과회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졸업생을 대표해 개회 취지를 설명했다고 한다.④ 그런데 불과 한 달 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집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4월4일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학교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추도회에 참석해 통분에 찬 연설을 했다.⑤ 요컨대 김립도 신민회 요인들의 집단 망명 행렬에 참가한 한 사람이었다. 이로부터 미뤄보면 당시 망명자 대열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다수의 인물이 더 가담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신민회 인사들의 집단 망명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나라가 망한 뒤인 1910년 12월, 신민회 인사들의 국외 망명이 또 한 차례 집단적으로 조직됐다. 이번에는 근거지가 압록강 건너 서간도로 상정됐다. 농경지 구입과 사관학교 설립을 위해서 75만원을 모금할 계획을 세웠다. 정부 기관 장예원의 주사 월급이 15원이고, 사립학교 교원 월급이 25원 하던 때였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1천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이 논의에 참가한 사람들로는 양기탁, 이동녕, 이시영, 안태국, 이승훈, 김구, 김도희, 주진수 등이 밝혀져 있다. 언론과 교육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던 유력한 반일 인사들이었다. 망명 계획은 극비밀리에 이뤄졌다. 심지어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양기탁의 경우 자신의 망명 의도를 친동생 양인탁에게도 비밀에 부쳤다. 국외로 출발하기 직전에야 귀띔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발을 앞두고 사고가 터졌다. 독립군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잠행하던 안명근이 불행히 체포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국외 망명을 기도하던 신민회 인사들이 속속 검거됐다. 사안이 급박했다. 검거 선풍 속에서 망명을 결행해야만 했다. 이회영·이시영 6형제와 이동녕이 건너갔다. 뒤따라 이상룡, 김동삼, 김대락·김형식 부자 등도 망명에 성공했다. 집안 재산을 처분해 온 가족을 이끌고 나선 비장한 망명길이었다. 서간도에 살던 토착 중국인들이 그 행렬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짐을 실은 수레가 줄지어 오는 것을 보고서는 한국의 황실 인사가 망명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다.⑥


동군은 때만 되면 오느니라


<소년> 권두시는 바로 신민회 망명자들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었다. 망명 계획이야 극비밀리에 이뤄졌지만, 잡지 편집자는 그 내막을 전해 듣게 됐음이 틀림없다. 기약 없이 망명길에 오르는 동지들을 바라보는 젊은 최남선의 가슴에서는 격정과 비애감이 끓어올랐다. 그는 망명자들을 축복하는 시 두 편을 썼다. ‘나라를 떠나는 슬픔’과 ‘태백의 님을 이별함’이 그것이다. 의도가 노출되면 위험할 수도 있는 행위였지만, 망명자들의 용기를 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태백’이란 조국을 가리키는 메타포(은유)였다. 지금은 비록 이지러진 달처럼 쇠락하고 있지만, 시운이 닿으면 다시 둥근 보름달로 떠오르게 될 조국이었다. 피억압 민족에게 그것은 평화와 정의의 표상이었다. “세계 평화의 옹호자, 우리 강토의 정수, 우리 역사의 체화, 우리 민족 이상의 결정, 모든 옳음의 활동력의 원천”으로 간주됐다.⑦ 권두시는 미래의 낙관으로 끝맺고 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봄은 오느니라


제왕의 권력과 재화의 세력 밖에 있는 동군(東君·태양신)은 때만 되면 오느니라

무궁화 다시 피건 또 다시나 만나자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90여 년 만에 드러난 ‘101인 사건’ 재판…
박헌영 뜨거운 항의 연설의 전모


경성지방법원 건물,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임경석 제공


새 사료가 발굴됐다. 베일 속에 감춰진 역사 속 진실을 전해주는 진기한 기록이다. 러시아 모스크바 도심에 있는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서 오래 잠자고 있던 이 기록에는 방청이 금지된 한 비밀재판의 진행 상황이 담겨 있다. 1927년 9월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개정된 ‘101인 사건’ 재판정에서 한 피고인이 행한, 목숨을 건 과감한 법정투쟁의 실상이 적혀 있다(‘제목 없는 문서: 9월15일 공판 제2일에 박헌영이 발언하기를…’).


101인 사건이란 식민지시대에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3대 독립운동 탄압 재판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그중 첫 번째는 ‘105인 사건’이었다. 식민지시대 초기를 대표하는 비밀결사 신민회 탄압 재판이었다. 두 번째는 ‘48인 사건’이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를 비롯해 독립선언 사전 모의에 가담한 인사들을 탄압한 재판이 그것이다. 이어서 항일운동 재판의 바통을 넘겨받은 것이 바로 ‘101인 사건’이었다. 3·1운동 이후 들불처럼 타오르던 사회주의운동의 대표 단체,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재판이었다. 세 재판은 피고인 수가 각각 105명, 48명, 101명이었다고 해서 그런 명칭을 갖게 됐다. 언론매체들은 세 재판을 가리켜, “식민지 조선 통치 20년래의 대표적 중대 사건”이라고 지목했다(‘반도 근대사상 3대 사건의 조선공산당 공판 금일 개정’, <동아일보> 1927년 9월13일치). 항일운동 역사를 대표하는 사건으로서 신민회, 3·1운동, 조선공산당이 나란히 손꼽히고 있음이 눈길을 끈다.


사코·반제티 사건에 비견되는 세계적 대사건


경성지방법원 제3호 법정 내부 풍경을 전하는 스케치. 임경석 제공


신문들뿐이랴. 일본 사법 관료들도 동일한 인식을 보였다. 취조를 직접 했던 사토미 간지 검사는 셋 중에서도 조선공산당이 더욱 위험하고 교묘하다고 평가했다. 더 나아가 101인 사건은 ‘조선의 대사건’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 대사건’이라고 논평했다. 실제로 그랬다. 조선공산당 사건은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것은 미국에서 자행된 사코·반제티 사형 사건과 더불어 1927년 한 해 동안 “전세계 무산계급의 격동을 일으킨” 양대 사건으로 일컬었다(‘사설, 개인과 결사- 공산당사건 공판 개정에 임하여’, <조선일보> 1927년 9월14일치). 사코와 반제티는 무정부주의 신념을 가졌다는 이유로, 상충되는 증거가 있는데도 미국 법정에서 무장강도 사건의 범인으로 처형된 이탈리아계 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101인 사건의 재판이 시작된 것은 1927년 9월13일이었다. 취조 기록만도 4만여 쪽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담당한 일본인 재판장이 기록을 보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피고인들은 두 차례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체포된 20~30대 청년이었다. 그중 20명은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 때 체포됐고, 81명은 1926년 6월부터 8월까지 전국에 걸쳐 계속된 제2차 검거 사건의 희생자였다.


경성 거리는 새벽부터 삼엄했다. 시내 도로에는 길목마다 정복 경관들이 늘어섰고, 재판소 앞길과 종로 큰길에는 기마경찰대가 말굽 소리를 높게 울리며 순찰에 나섰다. 경성역과 용산역에는 경찰과 헌병이 늘어서서 승객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재판소 구내에는 정복 경관대가 밀집한 채 경계했고, 건물 주위에는 사복 경관대가 이중 삼중으로 배치됐다. 온 시내에 긴장된 분위기가 가득 찼다.


박헌영 “비공개 재판 인정하지 않겠다”


조선공산당 재판 첫날 재판소 앞에 모인 군중. 임경석 제공


일간지들은 재판 동향을 대서특필했다. 경찰의 경계 태세, 재판 진행 경과, 거리 풍경, 변호사 동향, 피고인들의 혐의 사실 등을 자세히 보도했다. 이런 양상은 확정판결이 내려진 이듬해 2월까지 계속됐다.


방청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피고인의 가족과 친지만으로도 수백 명인데다 각지의 사회운동 단체 회원들이 모여들었다. 경찰 추산에 따르면,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만도 개정 이틀 전에 이미 500명이 넘었다. 재판소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해가 뜨기 전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방청권을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나 방청은 개정 직후 두 차례만 허용됐다. 제2회 공판일인 9월15일, 재판부는 방청 금지를 선언했다. 공개재판이 공공의 안전을 방해할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비밀재판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변호인단이 집단으로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때였다. 피고인석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발언권을 요청했다. 박헌영이었다. 그는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재임 중에 체포됐다. 박헌영은 식민지 법정의 공용어인 일본어로 유창하게 발언했다.


“우리는 무산계급의 전위가 되어 일하는 터인데, 방청을 금지하고 엄중한 경계를 행하는 것은 곧 무산계급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는 이 재판을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재판장 마음대로 우리에게 징역형을 판결하시오.”


그러나 방청 금지는 풀리지 않았다. 비밀재판을 하겠다는 것이 식민지 통치 당국의 확고한 의지였다. 그뿐인가. 방청 금지와 더불어 법정 내부 동향을 보도하는 것도 금지했다. 언론매체들은 고작 재판소 주변 동정을 전하는 게 전부였다.


제4회 공판일인 9월20일, 박헌영은 다시 과감한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목숨을 건, 비장한 행동이었다. 재판장이 정숙하라고 고함치고 위협하는데도, 박헌영은 진술을 멈추지 않았다. 취조 중에 고문으로 사망한 동료의 죽음을 항의하는 발언이었다고만 알려졌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신문 지면에는 법정 바깥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모습만 보도됐을 뿐이다. 그에 따르면 오전 9시 개정 직후 재판정 내부에서 뭔가 사고가 일어났다. 개정 20분 만에 피고인 박헌영이 간수 서너 명에게 붙잡힌 채 끌려나왔고, 뒤이어 염창렬도 그랬다. 그 후 1시간30분 휴식 뒤 재판이 속개됐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20분도 채 못 돼 재차 재판이 중단됐다. 재판은 오후 1시40분에야 다시 열렸다. 이 동향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해 이 사실을 보도했다.


일제 경찰의 고문치사 폭로


(왼쪽부터) 비밀재판의 진행 상황을 설명하는 러시아어 발굴 자료 첫 페이지.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기 이전의 젊은 박헌영. 방청 금지를 알리는 법원 앞 공지문.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공판은 방청이 금지됐으므로 재판정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경성지방법원” 임경석 제공


도대체 재판정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리는 새 발굴 자료 덕분에 그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게 됐다. 아침 9시 개정이 되자마자 박헌영은 격렬한 발언을 시작했다. 일본 관헌의 야수적인 고문 행위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당신네는 법률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거짓입니다. 법률에 의거하고 있다 하면서도, 당신네는 심리 중에 온갖 고문을 가해서 우리를 불구자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법정에 서 있는 것은 아직 우리가 어떻게든 살아 있는 덕분일 뿐입니다. 우리 박순병 동무를 왜 죽였습니까? 우리는 그가 죽었음을 바로 여기서 알았습니다. 그 사람을 회상하니 분노를 참을 수 없습니다.”


박헌영은 말을 미처 끝마치지 못한 채 통곡했다. 박순병은 <시대일보사>의 젊은 기자로서 박헌영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 비밀활동을 하던 가까운 동지였다. 그는 1926년 7월19일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대에 체포돼 취조를 받다가, 8월25일 장파열로 사망했다(‘박순병씨 요절’, <동아일보> 1926년 8월27일치).


고문으로 인한 사망이 명백했다. 박헌영의 비분에 찬 발언은 좌중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피고인 100명이 모두 목 놓아 울었다. 박헌영은 시선을 돌려 피고인 동지들을 향해 말했다. 당부의 말이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입니다. 우리는 징벌이 두렵지 않습니다. 끝까지 당당한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를 자임하는 김약수가 이 법정에서 그처럼 부끄럽게 처신할 거라고는 나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자는 그처럼 부끄럽게 행동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 됩니다.”


김약수의 부끄러운 처신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법정에서 이뤄진 문답을 가리켰다. 일본인 재판장이 피고인 김약수에게 장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누가 통치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약수는 “그때도 천황 폐하가 다스립니다”라고 답했다 한다. 이런 문답이 있었음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과연 부끄러운 처신인지는 관점에 따라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김약수의 진술 전략은 박헌영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적법한 테두리 내에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라는 신흥 사상을 연구하는 것 자체는 합법적으로 허용됐다. 천황 운운하는 발언도 바로 그런 고려에서 나온 진술이었다. 게다가 김약수는 조선공산당 사건에 말려들 이유가 없었다. 비록 1925년 4월 창당대회에는 참가했지만, 그해 10월 의견 다툼으로 탈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1925년 10월 이후에는 더 이상 조선공산당원이 아니었다. 여전히 ‘까엔당’(조선인민당)이라는 비밀결사의 지도자였지만.


11시 재판이 속개된 뒤에도 박헌영은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고문을 언급했다. “박순병 동무는 우리의 적, 바로 당신들에게 살해됐습니다. 정말로 우리 동무를 추도해서는 안 되는 겁니까?”라고 압박했다. 그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경찰과 검찰의 신문 중에 자행된 모든 고문을 폭로했다. 더 나아가 공개재판과 재판부의 재구성을 요구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자긍심


박헌영이 자기 요구를 강청했으므로 재판은 두 번째로 중단됐다. 변호사들은 박헌영을 설득했다. 고문 건과 박순병 살해 건에 관해서는 새로이 소송을 제기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다시 오후 1시40분에 재판이 열렸다.

 

박헌영의 법정투쟁은 시종 당당했다. 고문과 억압 속에서 심리적으로 짓눌려 있던 피고인들의 자긍심을 회복해주었다. 이후 그는 신뢰할 수 있는 믿음직한 지도자감으로 동지들 사이에 회자됐다. 그러나 가혹한 보복이 뒤따랐다. 박헌영은 공판이 끝난 뒤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했다. 1928년 11월20일 쓴 박헌영의 자필 영문이력서에 따르면 “나는 법정에서 일본 재판관에 반대해 투쟁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감옥에 돌아와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 결과 나는 1927년 9월 말까지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자살을 기도하고, 자기 똥을 퍼먹는 등 박헌영의 ‘정신이상’ 현상은 이 폭행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양반 의병장 이범윤의 텃세에 쇠잔해진 홍범도 의병부대


1908년 2월20일 홍범도 부대가 점령한 갑산읍성의 정남문 진북루. 장세윤 제공


의병 봉기를 단행한 이듬해 1908년 상반기는 홍범도 부대의 전성기였다. 승전에 승전을 거듭했다. 함경도 해안 지대와 개마고원을 가르는 후치령 고개에서 일본군 1400명 병력과 맞붙어 대승리를 거뒀고, 그 기세를 몰아 산악지대 거점 도시들을 연거푸 해방시켰다. 1월17일에는 삼수성을 점령하고, 2월20일에는 갑산읍성을 함락시켰다. 지방의 거점 도시를 공략하는 것은 비정규전에 종사하는 의병부대로서는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다. 두 도시는 국경 방어의 요충지로서 성곽으로 둘러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곳에는 지방 행정기구, 순사 주재소, 우편 전신 취급소 등 통치기관이 자리잡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그들을 돕는 일진회 민병대가 주둔했다.


난공불락 요새 연거푸 공략


홍범도 부대가 삼수성 전투에서 빼앗은 베르던 소총. 옛 한국군 진위대가 쓴 개인 화기로, 홍범도가 애지중지하던 무기였다(위). 일본군 30식 소총. 홍범도 부대가 삼수성 전투에서 빼앗은 일본군의 개인 화기.


지방 거점 도시 공략은 정치적 의미가 컸다. 의병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민중의 지지와 신망을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강력한 대규모 무장 부대만이 행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하나의 성곽도시를 점령하려면 수비군보다 몇 배나 더 우월한 병력과 화력이 필요했다.

단발령에 반발해 봉기한 1896년 의병운동 때 그랬다. 충청도·경기도·강원도 접경지대에서 활동하던 유인석 부대는 충주성을 공략해 보름간이나 점거했다. 을사강제조약 폐기를 요구한 1906년 의병 때는 민종식 부대가 충청도 홍주성을 12일간 점령하기도 했다. 어느 경우나 다 의병운동의 영향력을 한 단계 고조한 거창한 군사행동이었다. 홍범도 의병부대가 삼수와 갑산을 점거한 일도 그랬다. 심지어 요새화한 두 도시를 거푸 공략한 것은 의병운동 전투 역사상 특기할 만했다. 처음 있는 일이고 가장 혁혁한 전과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거점 도시의 점령은 의병부대의 전력을 강화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의병은 삼수성에서 놀라운 물자를 노획했다. 일본군 개인 화기 30식 소총 284자루, 탄환 160상자, 옛 한국군 진위대가 사용한 베르던 소총 260자루와 탄환 15상자가 그것이다. 의병의 전투 역량을 한번에 강화할 수 있는 쾌거였다.


홍범도 부대원 중에는 사냥업에 종사하던 포수가 많았는데, 그들은 이때부터 화승총을 버리고 새 개인 화기로 무장했다. 홍범도도 이때 얻은 베르던 소총을 애지중지했다. 이후 전투는 물론이고 외국으로 망명할 때도 갖고 갈 정도였다. 총신(총 몸통) 길이가 130cm, 사정거리가 280m인 이 총은 정확도가 우수해서 장거리 저격용으로 적합했다. 홍범도는 이 총기로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했다.


홍범도 부대의 전투력이 강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단지 병사들이 포수 출신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의병장의 리더십과 인간적 매력이 비범한 것도 한 이유였다. 참모장을 지낸 김호의 증언에 따르면, 홍범도는 특이할 정도로 정직하고 겸손했다. 동료를 사랑했는데, 특히 나이 어린 사람들을 극진히 여겼다. 사격 솜씨가 출중했고, 체력이 좋았다. 쉬지 않고 전투를 했고, 행군하다 좀 위험한 곳에서는 자기가 항상 선봉에 섰다. 예기치 않게 적군에 포위되면 기묘한 방법으로 포위망을 빠져나왔는데, 부하를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데리고 나왔다.


홍범도의 리더십과 인간적 매력


하지만 그해 여름부터 홍범도 부대는 밀리기 시작했다. 보급 때문이었다. 고난은 대부분 ‘약’ 탓에 일어났다. 약은 ‘약철’의 줄임말로, 탄약을 가리키는 홍범도 부대의 내부 용어였다. 의병에게 추위와 식량난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참고 견디다보면 우여곡절 끝에 요행히 극복되곤 했다. 탄약은 달랐다. 그것이 다 떨어지면 정말 대책이 없었다. 일본군 소부대라도 마주치면 도망 외에 방법이 없었다. 뒷날 홍범도는 이때 상황을 떠올리며, 매를 본 꿩이 숨듯이 정신없이 달아나야 했다고 말했다.


의병장 홍범도는 탄약을 얻으려 갖은 노력을 했다. 전투로 일본군에게서 노획하는 방법을 써왔지만 의병 쪽 희생이 컸다. 실패 확률도 높았다. 좀더 안전하게 많은 탄약을 얻는 길을 열어야 했다.


외국에 밀사를 파견해, 탄약을 사기로 결정했다. 1908년 6월23일, 장진 여애리 평풍바위에서 열린 의병총회에서 조화여와 김충렬이 선발됐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두만강 건너 러시아 영토인 노보키옙스크에 가서 돈을 주고 탄약을 사는 것이었다. 한인들이 ‘연추’(煙秋)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대한제국의 전직 고위 관료이자 군사령관이던 이범윤이 수백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린 채 웅거하고 있었다. 탄약을 구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홍범도는 밀사들에게 일본돈 2만원을 주어 보냈다. 거금이었다. 전투로 빼앗은 군자금이었다. 이범윤에게 제시할 의병장 홍범도의 편지도 비밀리에 지니게 했다. 밀사들의 신원을 보장하고, 임무 수행을 도와달라는 정중한 요청을 담은 글이었다.

웬일일까? 파견원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충분히 되돌아올 시일이 지났는데도 그랬다.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어렵사리 통신문이 도착했다. 놀랍게도 이범윤 부대의 감옥에 수감됐다는 소식이었다.


다시 사절을 보냈다. 의병 가운데 말도 잘하고 사리 분별도 뛰어난 김수현이 선발됐다. 급히 현장에 가서 오해를 풀고 수감된 자들을 구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이번에도 소용없었다. 그도 돌아오지 않았다.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비상한 수단을 취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기로 했다. 홍범도 부대는 그해 11월 초 압록강변에 있는 신갈파진 일본군 요새를 공격했다. 무리한 작전이었다. 의병들은 요새에 웅거한 중무장 일본군 150명을 이길 수 없었다. 전투는 실패로 끝났다. 일본군의 추격까지 당하게 됐다.


탄약 보급 끊긴 맨손 부대


그날 밤 홍범도 부대는 쫓기듯 압록강을 건넜다. 망명이었다. 11월2일 국경을 넘을 때였다. 홍범도는 눈물을 뿌렸다. 뒷날 회상기에 이렇게 말하며 울었다고 한다. “이 물줄기가 수천리 장강인데, 우리가 무사히 건너왔다. 부디 잘 있거라. 다시 볼 날이 있으리라.”


홍범도를 따라 국경을 넘은 의병은 40여 명이었다. 절정기에는 2800명에 이르던 대부대였으나, 이제는 달랐다. 역전의 용사들이지만 탄약이 없었다. 맨손 부대였다. 탄약 보급 없이는 대오를 증원할 수도 없었다. 홍범도는 용단을 내렸다. 의병부대원의 일시적 해산을 결심했다.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서간도 통화를 거점으로 연락망을 유지한 채 삼삼오오 흩어지게 했다.


홍범도 곁에는 셋이 남았다. 의병 참모 권감찰, 러시아어에 능통한 김창옥, 유일한 혈육인 둘째 아들 홍용환(12)이다. 네 사람은 러시아령 연추로 가기로 결정했다. 밀사들을 파견했던 곳이다. 끊긴 연락망을 복원하고 보급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곳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가까운 길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 추격대와 주둔지를 피하려면 멀리 에둘러 가야만 했다. 목적지는 동쪽에 있지만 가는 길을 북쪽으로 잡았다.


걷고 또 걸었다. 때는 겨울철이었다. 만주 벌판의 매서운 바람이 일행을 괴롭혔다. 지린과 위수현 등을 지났고, 아스허에서 중동철도 철길에 마주쳤다. 거기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철길을 따라 또 걸었다. 헝다오허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인 마을을 만나 노자를 구할 수 있었다. 그게 12월28일의 일이었다. 57일 동안 쉼없이 걸었던 것이다. 12살 소년 용환도 예외 없이 가혹한 행군을 해야 했다.


그다음부터는 기차와 배를 이용했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소왕영), 블라디보스토크(해삼)를 거쳐 목적지에 도착했다. 두만강 너머 한인 이주민들이 밀집한 곳, 마침내 연추였다. 1909년 2월10일께였다. 조국을 떠난 지 석 달 10일 만에야 그곳에 이르렀다.


홍범도는 알게 됐다. 왜 보급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으며, 파견한 대표들은 하나같이 연락이 두절됐는지를. 첫 번째 두 밀사는 이범윤 부대에 군자금 2만원을 빼앗기고 감옥에 수감됐다. 두 번째 밀사는 자신의 사명을 잊은 채 이범윤 부대의 일원이 돼 있었다.


홍범도는 이범윤을 만났다. 냉랭하고 긴장된 공기가 감돌았다. 홍범도(41)가 정중하게 물었다. 자신이 파견한 두 사절을 왜 체포했습니까? 왜 감옥에 가뒀습니까? 그들을 일본 밀정이라고 의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범윤(53)의 답변은 명쾌하지 않았다. 파견원들의 체포에 대해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투옥된 이유도 아마 신원 증명서가 없거나 부실했기 때문일 거라고 답했다. 책임을 회피하는 무성의한 답변이었다.


평민 의병장과 양반 의병장의 모순


이범윤의 1910년 5월 위임장. 이범윤의 직위가 ‘관리사(管理使) 겸 각군산포사장(各郡山砲社長)’이라고 쓰여 있다. 대한제국 황제에게서 받은 마패 직인이 선명히 찍힌 게 이채롭다. 박환 제공


두 지도자의 갈등은 의병운동 지도부의 출신 차이를 반영했다. 평민 의병장과 양반 의병장 사이의 모순이었다. 이범윤이 1910년 5월에 쓴, 창의소 사무원 임명에 관한 ‘위임장’이 남아 있다. 거기에 적힌 그의 직위는 ‘관리사(管理使) 겸 각군산포사장(各郡山砲社長)’이었다. 대한제국 황제가 임명한 종3품 고위 관료이자 북부 산악지방의 포수 동업조합을 대표하는 최고위 수장이라고 자임했다. 홍범도 같은 평민 의병장은 마땅히 자신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뿐인가. 홍범도 부대는 포수들로 이뤄져 있었다. 포수는 동업조합 수장인 자신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홍범도 부대의 파견원들은 자신의 명령을 받아야 하며, 그들이 지닌 거액에 대해 상급자인 자신이 마땅히 관할권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홍범도 의병부대가 쇠잔해진 이유가 양반 의병장의 독단 탓임이 명백했다. 의병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전투력을 가졌던 함경도 부대를 패퇴시킨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양반 출신 의병장이었다. 오히려 적군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홍범도는 잘 참았다. 지도자 사이의 분쟁은 민족해방운동을 약화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연추 주민들의 여론이 그에게 위안을 줬다. 사람들은 다 ‘이범윤 죽일 놈’이라고 욕했다.


뭐든 고조기가 있으면 퇴조기도 있는 법이었다. 홍범도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군자금 2만원은 이미 없어졌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노선을 바꿨다. 단기간에 국내로 진공하는 계획은 폐기했다.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러시아 한인 사회 내부에서 탄약 자금을 모금한 뒤, 국내 진공 작전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의 러시아 체류 기간은 예정보다 더 길어지게 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독립투사로 남은 ‘나는 홍장군’의 아내

홍범도 귀순 공작에 맞서 싸운 이씨 부인…
일제의 참혹한 고문에 저항하다 비명횡사


1909년 즈음 러시아 연해주 망명 직후 42살의 홍범도(왼쪽 사진). 1912년 즈음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광산·철도 노동자로 생활하던 44살의 홍범도.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한국 주둔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관 야마모토 대좌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폭도’들의 귀순 공작을 강화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 군사작전만으로는 그들을 진압하기 어려웠다. ‘폭도’들이 사냥꾼이었기 때문이다. 개마고원의 넓고 험준한 산악지대를 제집 안마당처럼 휘젓고 다니던 이들이었다. 사냥꾼 출신 한국인 의병들의 전투력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홍범도 폭도 무리’ 귀순 공작


사령관은 1908년 4월30일 자로 예하 ‘제3순사대’ 대장 임재덕(林在德)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함경남도 삼수·갑산에서 출몰하는 ‘홍범도 폭도 무리’를 유인하라는 내용이었다. “귀관은 순사대를 인솔하고 5월1일 북청을 출발, 갑산 부근에 이르러 적당한 지점에 위치하여 폭도 귀순 권유에 노력”하라고 지시했다. 방법도 제시했다. “홍범도의 가족을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사용할 것”을 명시했다.

임재덕과 김원흥(金元興)은 일본군 103명과 한국인 순사보조원 8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이끌고, 갑산군 창평리 산간 마을에 주둔했다. 총기와 탄약을 넉넉히 지녔고, ‘속사포’라는 기관총 공용화기까지 갖춘 막강한 토벌대였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주둔지인 용문동 더뎅이 산골짜기가 지척이었다.

제3순사대장 임재덕은 일진회 간부이기도 했다. 1907년 7월 일진회 간부 송병준이 고종 폐위를 주도한 것과 관련해,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일진회를 타도 대상으로 간주했다.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11개월간 의병에게 처단된 일진회원은 무려 9260명을 헤아렸다. 마치 내전 양상과 같았다. 의병과 일진회는 총을 맞대고 겨누는 적대세력이었다.

또 한 사람 지휘관 김원흥은 대한제국의 고급 장교 출신이었다. 옛 한국군 참령 계급장을 달았던 고위 군사간부로서 북청진위대 대장까지 지냈다. 그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기꺼이 일본군 휘하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통감부 예하 경찰 조직에서 경시 계급을 부여받고 반일 의병운동을 탄압하는 최일선에 서게 됐다.


‘가족을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끔찍한 짓이었다.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의병 지도자를 전향시키려는 술책이었다. 해방운동의 투사를 정신적·정치적으로 파멸시키려는 행위였다. 홍범도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함경남도 북청군 인필골, 깊은 산중 마을이었다. 처가 동네였다. 늙은 장인 장모와 함께, 아내와 두 아들이 살고 있었다. 일본군은 그 마을을 급습했다. 그리하여 홍범도의 아내와 17살 맏아들 홍양순을 토벌대 주둔지로 압송해 왔다. 홍범도의 귀순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인질이었다. 홍범도여, 가족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이와 같이 위협하는 데 쓸모 있는, 인질들이었다.

홍범도의 아내 이씨 부인은 거센 강압을 받았다. 산중에 웅거한 남편 앞으로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거였다. 임재덕 순사대장은 아예 문안까지 일러줬다.

“일본 천황에게 귀순하면, 당신에게 공작 작위를 하사한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에게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 자식들도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쓰라고 했다. 공작은 일본제국의 귀족 시스템 속에서 1등급에 해당하는 작위였다. 최상층 귀족이었다. 망국 이후 일본 귀족으로 편입된 조선인 고관대작 중에서 어느 누구도 공작 작위까지 오르지 못했다. 회유에다 협박도 덧붙였다. 임재덕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희 모자를 어육 내겠다고 위협했다.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서


1929년 재혼한 아내 이인복과 함께, 62살의 홍범도. 임경석 제공


이럴 때는 차라리 글을 쓸 줄 모른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씨 부인이 글을 깨쳤다는 사실을 저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응할까, 거절할까. 두 길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쩌랴. 고초를 각오해야만 했다. 이씨 부인은 결심했다. 거절의 뜻을 단호히 표명했다. 그날 아내가 입에 담았던 말을 홍범도는 누군가에게서 전해들었던 것 같다. 평생토록 그 말을 잊지 않았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이렇게 말했노라고, 노년의 홍범도는 또박또박 기억해냈다.

이씨 부인은 혹독한 보복을 당했다. 고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만적인 폭행이 쏟아졌다. 발가락 사이에 불붙인 심지를 끼워놓는 등,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됐다. 거듭되는 악행은 이씨 부인을 반죽음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그녀는 끝내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한 회상기에 따르면, 그때 이씨 부인은 스스로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섰다고 한다. 처참했다. 그녀는 벙어리가 된 채 갑산 읍내로 이송돼 옥에 갇혔다. 하지만 머잖아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출생연도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향년을 정확히 댈 수는 없지만, 아마 30대 후반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일부 학자는 이씨 부인의 이름이 옥녀였다고 전한다. 북간도 조선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라 하니 전혀 불신할 것은 아니지만, 뚜렷한 증빙이 발견되기까지는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이씨 부인이 홍범도와 부부가 된 것은 기이한 인연 덕분이었다. 처녀 때 그녀는 비구니였다. 동기는 뚜렷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찍부터 북청 산골의 친정집을 떠나 금강산 깊은 산속에 위치한 비구니 사찰에서 승려의 길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금강산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24살 홍범도도 승려였다. 금강산 유명한 사찰 신계사 지담 스님의 상좌승으로 있었다. 평양 주둔 조선군 친군서영 제1대대 군인 출신으로, 제지 수공업자로 일하던 그는 산중 사찰에서 은신 중이었다. 부당한 대우와 체불임금에 항의해 공장주를 죽인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금강산 깊은 산속에서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어떤 가슴 설레는 과정을 거쳐 연인이 됐는지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머잖아 젊은 여승은 임신했음을 알게 됐다. 바로 큰아들 홍양순을 잉태한 것이다. 두 사람은 승복을 벗고 하산하기로 했다. 가정을 이루기로 합의한 것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두 사람이 정착한 곳은 여인의 친정이 있는 함경남도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 인필골 마을이었다. 북청에서 갑산 쪽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인 후치령 고개 바로 아래였다. 그곳에서 부부는 짧으나마 단란한 가정생활을 맛보았다. 아들 둘을 얻었다. 큰아들 양순과 작은아들 용환이다.

40살에 아내를 잃은 홍범도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혼자 살았다. 새 아내를 얻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와 성화에 힘입어 새 아내 이인복을 맞아들인 것은 20년이 지나 노년기의 일이었다.


홍범도의 아들, 소년 의병 홍양순


이씨 부인의 협력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대로 물러설 인간들이 아니었다. 토벌대는 가짜 편지를 만들어냈다. 이씨 부인이 남편에게 직접 쓴 글인 듯 꾸민 편지였다. 그 편지를 몸에 지닌 채 심부름꾼이 의병부대 주둔지 용문동 더뎅이로 파견됐다. 하지만 산속으로 올라간 사자들은 돌아올 줄 몰랐다. 이틀 동안 여덟 차례나 사람을 들여보냈는데, 아무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토벌대 집행부는 홍범도의 맏아들 홍양순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홉 번째 사자였다. 귀순을 권유하는 가짜 편지를 지니게 한 채 산속으로 올려 보냈다.

홍양순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의병 지휘부로 쓰는 집의 문 앞에 섰다. 홍범도는 격분했다. 아버지를 망치는 일에 아들이 가담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놈아! 네가 전 달에는 내 자식이었지마는, 네가 일본 감옥에 서너 달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놈이 됐구나. 너부터 쏘아 죽여야겠다!”

홍범도는 방아쇠를 당겼다. 비명 소리가 났다. 부관이 급히 뛰어나갔다. 천만다행이었다. 총알은 귓바퀴를 맞히고 지나갔다. 한쪽 귀가 떨어져나갔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백발백중의 명사수 아니었던가. 500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그만 동전을 맞히는 귀신같은 사격술을 익힌 홍범도였다. 격발 순간에 손가락이 떨렸음이 틀림없다. 결정적 순간에 아버지의 고뇌가 작동했던 것 같다. 총알은 미세한 각도로 빗나갔다.

상처를 회복한 홍양순은 아버지의 의병 대열에 합세했다. 17살짜리 소년 의병이 됐다.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함흥 신성리 전투, 통패장골 쇠점거리 전투, 하남 안장터 전투, 갑산 간평 전투, 구름을령 전투, 괴통병 어구 전투, 동사 다랏치 금광 전투 등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홍양순은 1908년 6월16일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노년이 되어서도 홍범도는 그 전투를 잊지 못했다.

“정평 바맥이에서 500명 일본군과 싸움하여 107명 살상하고, 내 아들 양순이 죽고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자가 8명이 되었다. 그때 양순이는 중대장이었다. 5월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이씨 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은 그 뒤 어떻게 살았는가? 그들의 운명은 길지 않았다. 임재덕과 김원흥이 이끄는 토벌대 200여 명은 용문동 더덩 장거리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가 짜놓은 매복에 노출되고 말았다. 그 결과 토벌대 지휘부를 포함해 군경 209명이 포로로 잡혔다.


임재덕과 김원흥의 최후


용문동 의병 주둔지 지휘소 앞에 임재덕과 김원흥이 결박된 채 무릎이 꿇렸다. 홍범도가 나섰다.

“너희 두 놈은 내 말을 들어라. 김원홍 이놈! 네가 수년을 진위대 참령으로 국록을 수만원을 받아먹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시골에서 감자 농사하며 먹고사는 것이 그 나라 국민의 도리이거든. 도리어 나라의 역적이 되니, 너 같은 놈은 죽어도 몹시 죽어야 할 것이다. 임재덕도 너와 같이 사형에 다 청한다.”

두 사람은 깎아 세운 두 나무 기둥에 각각 묶였다. 홍범도는 지시했다. “석유통의 위 딱지를 떼어 저놈들 목욕시키고, 불 달아놓아라”라고. 지시는 즉각 실행됐다. 일본군 토벌대를 지휘하던 전직 한국군 고급 장교와 일진회 간부는 그렇게 생애를 마쳤다.


참고 문헌

① ‘폭도토벌경황 제83호’ 1908년 5월12일,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1 (의병편 4), 국사편찬위원회, 174~175쪽, 1982년

② 김종준, <일진회의 문명화론과 친일활동> 신구문화사, 219쪽, 2010년

③ 이인섭, ‘조선 인민의 전설적 영웅 홍범도 장군을 추억하면서’, 1959년, <이인섭과 독립운동자료집> 3,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11년

④ <홍범도 장군>, 강용권·김택, 장산, 75쪽, 1996년

⑤<홍범도의 생애와 항일의병투쟁>, 장세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81쪽, 1992년

⑥ 장세윤, 위의 책, 146쪽

⑦ ‘탈초 홍범도 일지’, 반병률, <홍범도 장군>, 한울, 70쪽, 2014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923.html




시운이 없으면 영웅도 소용없다

제2 러일전쟁 대신 제1차 세계대전 터지며
 실패로 끝난 망국 이후 첫 독립운동 전략


<권업신문> 최초 발간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카야 거리 10번지. 권업회 신문부장 신채호가 창간호부터 30호까지 이곳에서 발행했다. 지금은 5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임경석 제공


도대체 어떻게 독립을 쟁취한다는 말인가? 일본이 저토록 강대한데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과연 이길 수 있겠는가? 망명자들을 바라보는 속마음이 이랬다. 연해주로 몰려드는 망명자들을 보는 현지 동포들의 속마음 말이다. 러시아에 이주한 지 오래된 한인 동포들, 당시 말로 원호(元戶)들의 정서는 망명자들과 똑같지 않았다. 조국이 독립하고 잘살면 그거야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강약이 부동인데 어쩌자는 건가. 매일 삼삼오오 모여앉아 독립! 애국! 목소리 높인다고 저 강력한 일본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차마 드러내놓고는 말하지 못했지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말로만 애국 외친 망명자들


원호 출신 인텔리 청년 김만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해 28살인 그는 재러동포 2세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초·중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원 자격증을 취득해 소학교 교사로 일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문학청년이었다. 러시아문학 작품은 물론이고 여러 서유럽 국가의 유명한 저술들도 독파했다. 한인 이주민 사회에서 문학적 소양으로는 손꼽히는 이였다. 그는 언론인이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러시아어 신문 <달료카야 오크라이나>(변경)의 특파원으로서, 식민지 수도가 된 경성에 파견돼 1년여 일했다.

그는 사석에서 본심을 드러냈다. 망명자들의 행동에 대해서였다. 망명자들은 열심히 애국을 부르짖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에 흥분하고 있을 뿐이다. 의병을 일으켜서 두만강을 건너자, 일본인을 한국에서 몰아내자, 고국을 부흥하자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 무기도 없고, 병사도 없고, 돈도 없이 어떻게 일본군에 맞설 것인가. 신한촌 한인 동포 수천 명은 아주 가난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생업을 갖지 않은 ‘다수의 자칭 애국자 무리’를 급양하고 있다. 한인들의 곤궁함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나, 김만겸은 굳게 믿는다. 오늘날 우리 한인이 취해야 할 급무는 식산흥업과 교육 진흥에 있을 뿐이라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도대체 1914년 전후에 망명자들은 어떤 심산으로 행동했기에, 동포 청년 김만겸이 저토록 탄식했을까.

문제의 핵심은 권업회에 있었다. 권업회란 연해주 한인들이 러시아 지방정부의 승인하에 설립한 합법적 공개 사회단체였다.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근로를 권면하고 실업을 장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정치적 결사였다.


이 단체에는 망명자가 적극 가담했다. 주도했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다. 특히 이종호를 필두로 망명자 그룹이 권업회의 설립을 이끌었다. 함경도 출신 인사가 많아 이들을 ‘북파’라고 일렀다. 권업회를 처음 발기한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1년 6월이었다. 바로 개척리의 두 차례 살인사건으로 한인 사회가 갈등을 겪던 시기였다. 갈등이 정점에 이르던 때였다. 정순만의 피살에 분노한 이상설 그룹이 러시아 관청에 우월한 교섭력을 이용해 안창호 그룹을 핍박하던 때였다. 신한촌 한인 사회에는 적대감이 가득 찼고, 뭐든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군정부


❶독립전쟁론은 실현 불가능한 공상일 뿐이라고 과소평가한 재러동포 2세 인텔리 청년, 김만겸. ❷대한광복군정부의 존재를 증언한 역사가이자 망명자, 계봉우. ❸권업회 결성의 주모자, 이종호. ❹저명한 독립전쟁론자이자 대한광복군정부 제2대 정도령, 이동휘. ❺권업회 활동을 지원한 러시아 연흑룡주 총독, 곤다티 / 임경석 제공


이종호 그룹은 이 상황이 더는 방치돼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러시아 한인 사회의 폭넓은 단결을 꾀했다. 먼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원호들을 끌어들이는 데 노력했다. 최재형·김학만 등의 장년층은 물론이고, 신한촌 청년 30여 명의 동의를 받아냈다. 다른 망명자 세력도 합류시켰다. 이상설을 필두로 ‘경파’ 세력이 그해 가을부터 가담했다. 가장 늦게 참여한 망명자 세력은 ‘서파’였다. 단체 결성 이듬해 봄에 이 그룹을 대표해 정재관이 합류했다. 1912년 4월, 저 멀리 자바이칼 지방의 치타로 피신한 그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되돌아와 권업회 집행부에 이름을 올렸다. 그 의의가 적지 않았다. ‘북파’ ‘경파’ ‘서파’라는 망명자 중심 소규모 비공식 정치세력들이 행동을 통일했던 것이다. 마침내 연해주 한인 사회가 하나로 뭉쳤음을 뜻했다.

대동단결의 힘은 컸다. 하는 일마다 성과가 컸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일자리 소개 사업, 기관지 <권업신문> 발간, 한인 학교의 설립과 후원 등이 활발히 이뤄졌다. 규모가 큰 야심 찬 사업도 기획됐다. 연해주 내륙 ‘라블류’에 대규모 농지를 불하받아 인구 1만 명 규모의 대농장을 만드는 사업을 발족했다. 러시아 지방정부는 권업회에 공신력을 부여했다. 러시아 국적 취득 업무를 권업회에 위탁했다. 거주 등록증도 권업회의 보증이 있어야만 발급할 수 있게끔 제도를 바꾸었다. 권업회의 위신이 나날이 높아졌다. 각지에서 지회 설립 움직임이 나타났다. 연해주의 크고 작은 도시와 농촌 지구에서 지회를 설립하고 싶다는 청원이 잇따랐다.

그러나 권업회의 가장 큰 역할은 눈에 보이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한광복군정부 발족의 모태이자 활동 근거지 역할을 한 것이다. 대한광복군정부란 권업회에 참가한 망명자들이 반일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단체 이름에서 드러나듯, 광복군을 결성해 운용하기 위한 참모본부를 조직했던 것이다.

이 비밀단체에 가담했던 계봉우의 회고에 따르면, 단체의 발족은 신한촌에서 이뤄졌다. 러시아령·중국령 연합대표자 모임이 은밀하게 열렸고, 거기서 집행부가 선출됐다. 최고 책임자의 직위는 정도령(正都領)이라고 명명됐으며, 초대 정도령에는 이상설이, 제2대 정동령에는 이동휘가 선임됐다. 또 3대 군관구가 설정됐다. 한인 이주민 사회가 형성된 연해주(제1), 북간도(제2), 서간도(제3)가 각각의 군관구로 설정돼 각각 ‘동로, 북로, 서로’라고 불렀다. 또 군사 간부 양성 사관학교를 만들기로 했다. 그 소재지는 중국령 ‘나자구’였다. 나자구는 왕청현 소재지를 출발해 험산과 무인지경을 지나 깊은 산속 궁벽진 오지에 있었다. 당장 군대를 편성한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 시기가 되면 언제라도 대규모 무장력을 갖출 수 있는 합리적인 준비기 전략이었다.


연해주와 간도에 출현한 정도령


강대한 일본을 격퇴할 수 있는가? 김만겸 같은 원호 동포들이 회의적으로 여기던 문제였다. 대한광복군정부 참가자들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어떻게? 망명자들은 두 조건이 갖춰진다면 실현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하나는 독립전쟁 근거지의 존재였다. 간도와 연해주가 바로 그곳이었다. 100만 동포 사회가 형성됐고, 일본의 국가권력이 못 미치는 곳이었다. 양쪽을 합해 해도(海島)라고 했다. 연해주에서 ‘해’를, 간도에서 ‘도’를 땄다. 해도는 도탄에 빠진 민중의 희망이었다. 조선왕조 후기에 널리 유포되던 예언서 <정감록>에 의하면, 도탄에 처한 민중을 구원하는 영웅 정도령이 해도에서 나온다고 했다. 바로 ‘해도진인설’이었다. 망명자들은 <정감록>의 아우라를 활용했다. 대한광복군정부 수반을 대통령 대신 정도령으로 명명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해도에서 정도령이 출현한 셈이다.

다른 한 조건은,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것이었다. 망명자들이 생각하기에, 일본은 줄곧 식민지 확장 정책을 펼쳤으므로 다른 열강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일본을 적대하는, 더 강력한 강대국이 나타난다고 예측했다. 예측은 1913년 들어 점차 현실화했다.

바로 러시아였다. 러일전쟁 10주년이 다가오자 러시아 조야에서는 배일 분위기가 고조됐다. 일본처럼 작은 아시아의 신흥 산업국에 패배하다니, 러시아인들은 치욕스럽게 생각했다. 패배의 원인을 성찰해, 좌절된 동방 확장 정책을 다시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다.

동방 정책을 맡은 러시아 관료들은 한인 반일운동을 지원하는 쪽이었다. 연흑룡주 총독 곤다티는 권업회 활동에 편의를 제공하고, 권업회 명예회원으로 이름 올리는 것을 승낙했다. 연해주 일원의 정치 사찰과 방첩 업무를 맡은 우수리철도 헌병대장 셰르바코프 대령도 한인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는 심지어 권업회 설립을 촉진하기 위해 한인 사회에서 지도적 영향력을 가진 이종호와 이상설의 합석도 주선했다.

1913년 말에는 구체적인 전쟁 준비 조짐마저 감지됐다. 예를 들어 제정 러시아 군대에는 해마다 11월1일 만기 사병을 제대시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해에는 이듬해 1월1일로 연기했다. 이례적이었다. 그 기일은 또 연기됐다. 연말이 되자 다시 5월 1일로 미뤄졌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러일전쟁의 재발 가능성으로 받아들였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널리 퍼졌다. 갑(甲)자 들어간 해에는 어김없이 전쟁이 터졌지 않았는가. 갑오년(1894년 청일전쟁), 갑진년(1904년 러일전쟁)에 병란이 있었는데, 갑인년(1914년)에도 그를 면치 못하리라는 풍문이었다.


일본에 적대할 강대국은 누군가?


갑인년에 전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전쟁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1914년 8월1일 독일과 개전한 러시아는 전쟁 승리를 위해 모든 수단을 한데 집중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연합국 일원이 됐다.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이 된 것이다. 정세가 달라졌다. 러시아는 일본 요구를 받아들여, 연해주가 반일운동 기지가 되는 것을 차단했다. 러시아 영토 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나 단체는 탄압 대상이 됐다. 권업회가 해산되고, <권업신문>도 정간됐다. 이종호와 이동휘 등 망명자 36명은 러시아 영토 추방 명령을 받았다. 비밀결사 대한광복군정부의 독립전쟁 계획은 넘을 수 없는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망국 이후 처음 수립된 독립운동 전략은 실패로 끝났다. 어쩌랴, 시운이 따르지 않으면 영웅도 어찌할 수 없는 법이었다. 동학농민전쟁 지도자 전봉준이 사형을 앞두고 읊조린 말이다. 망명자들은 제2의 러일전쟁을 예상할 수는 있었지만, 세계대전이 일어나리라고는 미처 예측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일본에 적대하는 강대국이 누군가? 독일이었다. 망명자들은 독일을 파트너로 삼는 새로운 운동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참고 문헌

① ‘朝憲機 제2호, 浦潮地方鮮人狀況’, <不逞團關係雜件-在西比利亞(4)>, 국사편찬위원회, 1914년 1월7일

② 임경석, ‘권업회 설립 전후 재노령 한인정치세력과 안창호’, <도산사상연구> 5, 도산사상연구회, 1998년

③ 뒤바보, ‘아령실기(9)’, <독립신문> 1920년 3월30일

④ 윤병석, ‘이동휘의 망명생활과 대한광복군정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1, 독립기념관, 105~107쪽, 1997년

⑤ <권업신문> 제36호, 2쪽, 1912년 12월22일

⑥ ‘朝憲機 제42호, 昨冬12月下旬 浦潮朝鮮人에 關한 諜報’, <不逞團關係雜件-在西比利亞(3)>, 국사편찬위원회, 1912년 1월12일

⑦ ‘朝憲機 제84호, 2월1일 浦潮發情報’, <不逞團關係雜件-在西比利亞(4)>, 국사편찬위원회, 1914년 2월13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863.html




독립운동 예봉 꺾은 개척리의 비극


양성춘 살해 연루 정순만의 보복 피살
동지가 적이 되며 해방운동에 치명상


개척리(아래 빨간 선)와 신한촌(위 빨간 선)의 위치.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 지도 임경석 제공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에는 냉기류가 흘렀다. 정순만이 석방됐을 때 그랬다. 양성춘 살인사건(제1219호 ‘개척리 살인사건’ 참조)의 피고인인 그는 불과 1년 만에 모든 죄과를 씻고 보란 듯이 밝은 세상에 나왔다. 그의 출옥을 보고서 두 개의 상반된 여론이 조성됐다. 잘됐다고 반기는 사람들과, 과실 사고이므로 그만하면 충분히 죗값을 치렀다고 보는 사람들이었다. 분개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을 죽였는데도 가벼운 형벌을 받은 것은 재판이 불공정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었다. 두 여론은 팽팽히 맞섰다. 차갑고 긴장된 분위기가 한인 거류지에 감돌았다.

당시 분위기를 전하는 현지 인사의 말을 들어보자. 개척리에 오래 산 여성이었다. 사료에 ‘박산석의 모친’으로 기록된 이 여성은 여성단체 자혜부인회 회장이자, 한인 기독교회 확장을 위해 그때 화폐로 ‘5루블’을 기부할 만큼 재력이 있었다.


순식간에 꺼진 ‘애국 동포의 희망’


“상년 겨울에 본항 한인 남자 사회에서 한 풍진이 일어 각각 한 모퉁이를 웅거하고 일장 승부를 결함에, …대동공보가 폐간되므로, 애국 동포의 희망이 거의 단절하고 외양 사회의 기관이 거의 파괴되니, 어찌 통곡유체할 일이 아니리오.”(<대동공보> 1910년 5월15일)

지난겨울 한 풍진이 일었다는 표현은 1910년 1월 발발한 양성춘 살인사건을 가리켰다. 그 때문에 ‘한인 남자 사회’가 둘로 나눠 각각 한 모퉁이를 웅거하고 한바탕 승부를 겨뤘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의 분열이 심각했고, 국권 회복의 희망이 물거품이 됐음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부정적 영향이 너무나 심각해 눈물 흘리며 통곡하는 것 외에 달리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애국 동포의 희망’이 꺼진 데는 또 다른 원인도 작용했다. 양성춘 살인사건 뒤 불운한 두 사건이 덮쳤던 것이다. 그중 하나는 조국의 운명이었다. 1910년 8월29일 이른바 ‘일한병합’ 조약이 체결돼, 허수아비처럼 껍데기만 남았던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말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은 관내 한인들 관할권을 가진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흉사는 한인 거류지를 교외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1909년 가을 개척리에서 콜레라가 유행해 한인 남녀 100여 명이 죽었다. 도시 거주민 8만 명에서 유독 개척리 한인만 그런 화를 입었다. 현지 조사한 러시아인 지방 관료는 전염병의 원인을 불결한 주거 환경에서 찾았다.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한인 거류지는 극도로 좁고 더러우며 위생 상태가 중국인 거류지와 마찬가지다. 결벽성이 있는 저 한인들로 볼 때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 적었다.①

1911년 3월 연해주 행정 당국은 한인 거류지를 시외 외딴곳으로 이전할 것을 결정했다. 그즈음 국경 너머 중국 길림성에서 다시 전염병이 생기자 나온 대응책이었다. 개척리는 시유지에 당국의 양해를 얻어 건립된 집단 주거지였다. 그 때문에 소정의 임대료를 내면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었다. 거류지 이전을 위한 대체 부지가 제공됐다. 옛 개척리 북쪽 고개 너머 산비탈에 위치한, 아무르만을 바라보는 경사진 곳이었다. 지금이야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에서 멀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도시 외곽 경계선을 벗어난 궁벽진 곳이었다. 그곳을 한인들은 ‘신개척리’ 또는 ‘신한촌’이라고 불렀다. 이주는 그해 5월부터 이듬해까지 서서히 이뤄졌다.

정순만의 출옥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의 분위기를 더욱 차갑게 했다. 양성춘의 죽음을 동정하는 이들은 원통해했다. 아무 죄 없이 목숨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관청 교섭력의 우열로 재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못내 분했다. 피살자의 아내 전소사가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현지 발행 한글 신문 <대동공보>(1910년 9월1일치)에 기고문을 실어, 가해자 비호 그룹이 있음을 폭로했다.

고의적 살인 행위가 분명하지만, 이를 부인하는 조직적 움직임이 있다는 말이었다. 공공연히 과실치사설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슨 협잡을 꾸미려는 짓인가? 아무런 잘못도 없다 하니, 죄 없는 사람을 또 죽이려는 책동인가?” 젊은 아내는 이렇게 힐난했다. 특정인을 지목하기까지 했다. ‘이민복’이란 자가 과실치사설을 퍼뜨리는데, 그 이유를 밝히라고 했다.


또 다른 비극의 잉태, 정순만의 출옥


정순만 살인사건의 경과를 기록한 일본총영사관의 정보문서 표지.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이민복도 망명자였다. 대한제국의 전직 경찰 관료의 자제로, ‘일한병합’에 반대하는 성명회 선언서 작성에 참여했고, 반일단체인 국민회와 권업회에도 참가한 반일 운동자였다. 일본 헌병대의 정보 기록에 따르면, 이민복은 정순만 그룹의 일원이고 그 그룹의 리더인 이상설과 거취를 같이한다고 했다.②

양성춘을 동정하는 이들은 정순만이 풀려나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 또 다른 비극이 잉태됐다.

1911년 6월21일이었다. 정순만이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지 넉 달이 지났다. 아침 8시, 이른 시간이었다. 연중 해가 가장 길 때라 날이 밝은 지 꽤 지났다. 정순만은 장 보기 위해 가게를 찾았다. 우연히 양덕춘을 만났다. 고인이 된 양성춘의 친형이었다. 껄끄러운 상대였다. 뜻밖에도 그가 부드럽게 다가왔다. 과거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 잊어야 할 터이고, 산 사람들은 한마디 얘기라도 나눠야 하지 않겠느냐며 자기 집으로 가자고 이끌었다.

양덕춘의 집에서 세 사람이 대면했다. 고인의 아내 전소사까지 합석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정보 문서에 따르면, 분위기는 험악했다. 젊은 여인은 거세게 압박했다. “무슨 이유로 너는 내 남편을 살해했느냐, 내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정순만이 선선히 응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순간, 여인은 어딘가에서 도끼를 꺼내들었다. 여인은 정순만에게 거듭 타격했다. 머리 외에 여러 곳을 맞은 정순만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사이 양덕춘은 계속 정순만을 붙들고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뒤 양덕춘은 결심했다. 경찰 당국에 자수하겠다고 나서는 제수씨를 말렸다. 희생자의 형인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관할 경찰서 제4분서에 자진 출두해 자신이 흉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③

보복 살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쇼킹한 뉴스였다. 현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순만의 가까운 동료인 이상설도 한달음에 왔다. 현장엔 경찰이 배치됐다. 경찰은 이상설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피살자가 자신의 동생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참혹한 사건 현장을 확인한 이상설은 망연자실했다. 또 분노했다. 참혹한 현장 모습에도 그랬지만,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가는 사람들이 미웠다. 때마침 사건 현장에 황공도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미운 마음이 치솟았다. 알은체를 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양성춘 지지 그룹의 유력한 일원이었던 것이다.


이상설과 안창호의 대립


신한촌 기념비 임경석 제공


정순만 피살 사건도 사적 범죄로 간주되지 않았다. 한인 사회의 내분과 관련된 음모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이제 상황이 뒤집어졌다. 정순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분노를 터뜨렸다. 이상설이 지도자인 이 그룹은 러시아 관청의 힘을 빌렸다. 러시아 관청 교섭력에서는 이 그룹이 월등했다. 이는 역사가 계봉우가 논평한 바 있다. “기호파의 수령인 이상설이 러시아 헌병대 하바롭스크 정탐부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자기의 파를 거기에 많이 배속한 것은 그의 평생 역사로 보아 결점”이라고 평했다.④


재러시아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대동공보>. 독립기념관 제공


정순만 사건은 민족해방운동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계기가 됐다. 살인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네 한인이 러시아 관청에 고발당했다. 안창호, 정재관, 이강, 김성무가 그들이었다. 면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밀결사 신민회를 주도해 애국계몽운동의 주역이 됐던 안창호가 첫자리에 보인다. 그는 1910년 국외로 망명한 이래 연해주를 거점으로 국권회복운동의 중·장기적 전개를 도모했다. 정재관과 이강, 김성무는 외국 한인들의 광범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국민회 운동의 지도자였다. 정순만 지지자들은 이 네 사람이 살인사건을 교사했다고 의심했다.

러시아 헌병대는 네 사람에 대한 구인장을 발부했다. 살인교사 혐의였다. 체포 위기에 직면한, 국민회 운동의 지도자들은 일단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안창호는 페테르부르그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기로 작정했고, 이강과 정재관도 연해주 밖 자바이칼주로 피신했다.

결국 개척리의 두 살인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 치명상을 입혔다. 운동권의 두 중진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바로 독립운동의 예기를 꺾어버린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에 걸쳐 해외 한인들의 폭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려던 거창한 노력이 좌절됐다. 각지에 국민회를 결성하고, 그를 통해 반일 역량의 통일을 도모하던 움직임이 분열되고 위축됐다. 국민회 기관지로 발간되던 <대동공보>도 폐간됐다.


국권회복운동의 끝 모를 추락

국권회복운동의 두 영웅이 서로 등을 졌다.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인공 이상설과 신민회의 리더 안창호는 더는 협력하기를 꺼렸다. 그들은 고작 ‘기호파’ ‘서도파’라는 소규모 비공식 추종자 그룹의 대표일 뿐, 국권 회복의 중·장기적 전망을 제시하는 큰 지도자로 여겨지지 못했다. 가까운 동지였던 사람들이 이제 편을 갈라 서로 적대했다. 민족해방운동은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개척리의 두 살인사건은 망국 전후 국권회복운동의 끝 모를 추락을 상징하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대립물로 전화하지 않는 사물은 없는 법이다. 비록 자신의 과오로 실패와 좌절을 겪었음에도, 인간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해방 의지 말이다. 해가 바뀌는 1912년, 정초부터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는 침체를 딛고서 국권회복운동의 활발한 기지로 되살아났다.


참고 문헌

① В.Граве. Китайцы, Корейцы и Японцы в Приамурье, Хабаровск, 1912; 南滿洲鐵道株式會社庶務部調査課 日譯, <極東露領に於ける黃色人種問題>, 大阪每日新聞社, 147쪽, 1929년

② 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秘)明治45年 6月調, 露領沿海州移住鮮人ノ狀態> 1913년 3월3일; 정태수, ‘국치 전후의 신한촌과 한민학교 연구’,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189쪽, 1992년

③ 在浦潮斯德 總領事代理 二甁兵二, ‘機密鮮 제43호, 鄭淳萬 殺害에 관한 報告’ 1911년 6월27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

④ 계봉우, ‘꿈속의 꿈’, <북우 계봉우 자료집 (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73쪽, 1996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730.html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유력자 양성춘의 피살
당파싸움 끝 고의살해인가? 단순사고인가?


1910년 즈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거리 풍경(위쪽). 2018년에 촬영한 옛 개척리 자리인 포그라 니츠나야 거리.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있는 한 가정집에서였다. 1910년 1월23일 늦은 저녁이었다. 추위가 절정에 달한, 겨울이 깊은 때였다. 이른바 ‘일한병합’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바로 그해였다. 나라가 망하기 불과 7개월 전이었다. 국제 정세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대한제국의 망국이 임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던 때였다. 또 그때는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무대로 하여 동분서주하던 안중근이었던 만큼, 개척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그 충격과 감격이 가시지 않았다.

개척리란 한인들의 밀집 주거지 ‘코레이스카야 슬로보드카’를 지칭하는 한국어 명칭이었다. 바로 코리아타운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910년쯤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1만400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다.①


아랫배에 총 맞고 4일 만에 숨져


아들 얼굴을 토대로, 상상으로 그린 정순만 초상화(이재갑 작)(왼쪽). 정순만의 가장 가까운 동지 이상설. 상동청년회가 있었던 상동교회 1900년. 독립기념관 제공


이 중에서 약 70%에 해당하는 7500명이 개척리에 모여 있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인구가 약 8만 명이었음을 참작하면,② 개척리에 사는 한국 사람들의 수는 전체 도시 인구 가운데 근 10%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피살자는 한인이었다. 집주인 양성춘(楊成春)이라는 사람이었다. 아랫배에 총을 맞은 그는 다량의 출혈 끝에 4일 만에 숨을 거뒀다. 그는 십수 년 전에 이주한 덕분에 러시아 국적까지 취득한 고참 이주민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한국말로 ‘원호’(元戶)라고 했다. 자산도 넉넉했고, 러시아어도 불편하지 않게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개척리 한인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유력자였다. 2년 전에는 한인 거류민회 ‘민장’까지 지낼 정도였다. 러시아 행정 당국의 승인을 받아서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한인 자치단체의 대표였다. 개척리의 자치단체 대표로 선출될 만큼 한인들 사이에서 신망과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언론기관의 보도에 따르면, “마음이 공평 정직하여 동포 사회에 공익을 극력 도모하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③

도대체 누가, 왜 양성춘을 살해했는가? 범인은 금방 밝혀졌다. 그도 한국 사람이었다. 살인 혐의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된 범인은 37살의 정순만(鄭淳萬)이었다. 그는 피살자와는 달리 러시아로 이주한 지 겨우 3년도 안 된 신참 이주민이었다. 아니, 이주민이라기보다는 망명자였다.


정순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애국지사’라고 일컬을 만큼 항일투쟁 경력이 혁혁한 이였다.④ 본래 충청도 청주의 유생 출신이었다. 청소년기에는 재야의 큰 유학자로 전국에 명성이 자자하던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 나아갔다. 그 문하에서 유교 고전학 연구와 시문 제술에 전념했다. 뒷날 언론인으로서 필봉을 휘두르던 기본 소양은 이 시절에 갖춰졌을 것으로 보인다.

20대 청년기에 들어서 정순만은 급진적인 서구화 개혁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반정부 비밀결사 유신당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고, 독립협회의 후신이라는 평을 듣던 상동청년회에 참가해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나아가 한국 최초의 적십자사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 때문에 보수적인 대한제국 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니, 민심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곤장 80대를 선고받은 것도 바로 이때였다. 곤장형 집행장에서는 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고난 속에서도 얻은 게 있었다. 신뢰였다. 유신당 사건으로 함께 투옥된 정순만, 이승만, 박용만 세 사람은 뒷날 ‘독립운동계의 3만’이라는 이름을 얻은 데서 보듯이 사람들의 큰 신망을 얻었다.

러일전쟁(1904~05년) 시기에 일본의 식민지 침략이 노골화되자, 정순만은 그에 맞서 항일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황무지 개간을 표방하며 한국 토지 침탈에 나선 일본 상업자본과 군대에 목숨을 내걸고 감연히 맞섰고, 일본인 중개상이 주도하는 한국 노동자 멕시코 송출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1905년 을사강제조약이 공포되자, 그에 맞서 서울에서 대중적인 시위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범인은 항일투쟁 망명자 정순만


정순만은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1906년 4월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조국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국경 너머 근 100만 명의 이주민 사회가 형성된 북간도와 연해주가 곧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 사람들은 두 지역을 합쳐서 ‘해도’(海島)라고 했다. 연해주의 ‘해’자와 북간도의 ‘도’자를 합쳐 만든 이름이었다. 해도는 망명자들에게는 희망의 땅이자, 약속의 땅이었다.

망명 동지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상설(李相卨)은 언제나 믿고 의지하는 평생 동지였다.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했다. 같은 충청도 출신인데다 기질과 성향이 맞았다. 두 사람은 형제간이라고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됐다. 이상설은 정순만보다 세 살이 더 많고 고위 관료 출신이었다. 이상설이 앞서고 정순만이 뒤를 따랐다. 일본 정보 문서에는 정순만이 이상설의 ‘심복’이라고 표현돼 있었다.⑤

기울어가는 국운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망명자들은 과연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갖고 있을까? 그랬다. 이상설과 정순만을 비롯한 망명자들이 갖고 있던 복안은 말하자면 ‘해도 거점 임시정부 수립론’이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 황제를 연해주로 망명케 하고, 그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구상이었다. 1910년 화서학파의 저명한 유학자 유인석과 이상설이 앞장서서 ‘13도의군’을 편성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 복안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상설이 러시아 당국과 교섭을 중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망명자들은 러시아의 협력을 낙관했다. 왜냐하면 러일전쟁에 패배한 뒤 러시아인들은 조야를 막론하고 일본을 향한 복수심이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상설과 정순만을 중심으로 비공식적이지만 강력한 세력이 조직됐다.

이 그룹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양반과 고위 관료 출신자가 중심을 차지했다. 이상설 자신이 ‘종2품 가선대부 의정부 참찬’ 자격으로 활동했고, 대한제국 정부에서 관료를 지냈던 망명자들은 대부분 이 그룹에 합류했다. 둘째, 러시아 행정 당국과 교섭력을 강화하는 데 역점을 뒀다. 특히 연해주 관내의 정치활동 단속을 책임진 러시아 헌병대와 협력에 능동적이었다.

이런 특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양반이나 관료적 전통과 거리가 먼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자들 속에 그런 사람이 많았다. 양반·관료 주도의 행동 양상은 낡은 것으로 간주됐다. 평민적 지향성이 강할수록 그랬다. 또 러시아 헌병대와 협력하는 것은 스파이 활동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 헌병대에서 급료를 받고 정기적으로 한인 사회의 내막을 전하는 행위를 비루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피살을 둘러싼 두 견해


도대체 정순만은 왜 양성춘을 살해했는가? 개인적 원한이나 이해관계 탓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두 사람 사이에 금전 거래가 있었다거나, 여성을 둘러싼 알력이 있었다는 정황은 어느 기록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는 정보도 찾을 수 없다. 살인 사건의 동기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양성춘의 피살 이유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견해가 제기됐다. 그중 하나는 피해자 쪽에서 바라본 것이다. 당파적 분노와 적개심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고의로 살해했다는 의견이었다. 사건이 있던 그날 낮에 거류민회에서 중대한 회의가 있었다. 한인 사회의 내부 알력을 평화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회의였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지 않았다. 도리어 갈등이 격화되고 말았다. 참석자들은 재정 문제를 둘러싸고 두 그룹으로 나뉘어 적대적으로 충돌했다. 그날 저녁 정순만이 양성춘의 집을 방문한 동기는 분노 때문이었다. 자신의 견해가 무시되고 백안시된 데 대한 모멸감 때문이었다. 그가 이례적으로 권총을 갖고 방문한 것은 처음부터 살해할 뜻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행위다. 방문 첫마디에, “오늘 거류민회 회의에서 일방적으로 공격받은 일이 너무 분하다. 너를 죽이러 왔다!”고 큰소리친 행위도 그것을 뒷받침한다는 견해였다.

양성춘의 피살 이유에 관한 또 하나의 견해는 과실치사설이었다. 가해자 정순만이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받는 과정에서 견지했던 견해가 바로 이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순만이 양성춘의 집을 방문한 이유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양성춘은 정순만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정순만은 분노와 절망에 빠졌다. 휴대한 권총을 빼든 그는 “이렇게 탁한 세상에 생존할 바에야 지금 자살하겠다”고 부르짖었다. 깜짝 놀란 양성춘이 자살을 막으려고 권총을 뺏으려다가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와중에 권총이 오발됐으며, 불행하게도 총알이 양성춘의 아랫배를 맞히고 말았다. 이것이 정순만이 묘사한, 사건의 진상이었다.⑥

이 견해에 따르면, 양성춘은 숨을 거두기 전 가족 앞에서 유언을 남겼다. 이 사건이 사고로 난 것임을 설명하고 자신의 사후에 복수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한인 거류지를 감도는 긴장감


러시아 사법기관에서 재판이 벌어졌다. 정순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변호사를 고용해 적극적 방어에 나섰다. 마침내 판결이 이뤄졌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그해 11월 초였다. 피고 정순만은 3개월 금고형과 정교 사원에서 참회를 명받았다. 피고인 쪽의 승리였다. 고의 살해가 아니라 과실치사를 인정한 것이다.

1911년 2월8일, 마침내 형기를 마친 정순만이 출옥했다. 양성춘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불과 1년 남짓 만에 가해자가 돌아왔다. 모든 형사처벌을 마친 상태에서 한인 사회의 일상생활에 복귀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거류지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참고 문헌

① 현규환, <한국유이민사> 상, 어문각, 1953판. 814-815쪽

② <해조신문> 제61호 1908년 5월6일치

③ ‘양씨피살상보’, <대동공보> 1910년 4월24일치

④ ‘정순만씨의 역사’, <대동공보> 1909년 5월5일치

⑤ 박걸순, ‘연해주 한인사회의 갈등과 정순만의 피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4, 독립기념관, 2009년판

⑥ 박민영,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충북인의 활동’, <정순만의 생애와 민족운동> 학술회의 발표문, 2011년판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591.html



블라디보스토크의 일제 비밀경찰 기토 통역관
밀정 부리는 데 탁월해 식민 통치 걸림돌 해결사로


기토 가쓰미 통역관의 활동 거점,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 건물. 1919년(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 건물의 오늘날 모습. 2018년 현재 러시아 연해주 지방법원 건물로 쓴다.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오호, 너 악마 기토(木藤)여, 오호, 너 악인 기토여! 왜 너는 우리 아버지를 죽였는가. 왜 너는 죄 없는 한인을 파멸시키는가. 어떤 경우에도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영원히 기념하리라. 나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원수 갚는 것을 잊지 않으리라.”①


신분 가리는 위장 직함, 통역관


20살 처녀 최 소피아 페트로브나의 노트에 적힌 메모였다. 아버지를 빼앗아간 일본 관헌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드러나 있다. 처녀의 아버지는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였다. 사망 당시 61살. 러시아에 사는 한인 동포 사회의 유지였다. 한국식 이름 최재형으로 잘 알려진 그는 1920년 4월 일본군의 연해주 정변 당시 일본군에게 학살된 4인의 한인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증오의 표적이 된 기토는 도대체 누구인가? 기토 가쓰미(木藤克己)라는 이름의 그는 ‘일본 외무성 촉탁 조선총독부 통역관’이었다. 다시 말하면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에서 파견 근무하는 조선총독부 중견 관료였다. ‘통역관’이라는 용어 때문에 그가 마치 외교 기관에서 통역에 종사하는 외국어 전문가인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신분을 가리기 위해 고안한 위장 용어였다. 임무와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대외적으로 내세운 직함일 뿐이었다.

그의 본래 소속은 1910년 현재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1920년 이후 경무국) 고등경찰과 기밀계였다.② 고등경찰이란 일제강점기에 비밀결사, 혁명운동, 반체제 사상 등 식민지 통치 체제에 위협이 되는 행위를 사찰하고 탄압하던 비밀경찰을 가리킨다. 그의 소관 업무는 영락없이 고등경찰의 그것이었다.

경찰 내부 문서에 명시된 바에 따르면, 그의 임무는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관내에서 ‘무뢰 한인’의 동정을 조사하고 그를 단속”하는 것이었다. ‘무뢰 한인’이란 곧 반일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한인 혁명가들을 멸시하는 용어였다. 말하자면 독립운동가들의 동정을 조사하고 그들을 체포하는 것이 기토 가쓰미 통역관의 본분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통역관 자리는 4대 요직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국외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운용하는 핵심 보직이 넷 있었다.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지목받는 북간도, 만주의 중심도시 봉천에 더해 블라디보스토크가 4대 통역관 파견지로 손꼽혔다. 어느 곳이나 다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였다. 조선총독부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할 만한 곳이라면 외국 어디든지 유능한 고등경찰을 상주시켰던 것이다.

기토 가쓰미는 그중에서도 블라디보스토크 통역관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부터 12년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장기근속한 고등경찰이었다. 연해주,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에 근거를 둔 한국 독립운동 세력에 관한 한 일본 관료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실정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방법을 아는 자였다.


여관 운영하다 전쟁 통에 인생 역전


처음부터 주목받는 관료였던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 그가 처음 부임한 1910년에는 직속상관인 오토리 후지타로 총영사에게서 박대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심각한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리 총영사가 작성한 내부 문서에 따르면, 기토 통역관에게는 두 개의 결점이 있었다. 뭣보다도 외국어 능력이 시원찮았다.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구사한다고는 하지만 ‘견습’ 수준이었다. 그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수준이지, 책임 있는 대화를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외교관으로서는 허용되기 어려운 결함이었다.③

관료가 되기 전 기토는 생업에 종사했다. 그는 여관업자였다. 일본 내지에서 고등교육도 받지 못하고 별다른 재산도 없었기에, 신흥 도회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새 인생을 개척하고자 도항해온 모험심 가득한 젊은이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인 거류 구역을 무대로 생업을 모색하던 그는 자그만 여관을 차렸다. 숙박업에 진출한 것이다. 그가 견습 수준의 초급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익힌 것은 바로 여관을 운영하면서였다.

그가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계기는 전쟁이었다. 1904~05년 벌어진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통역 자격이었다. 어설펐겠지만 통역이 그의 인생에서는 역전의 교두보가 됐다. 그는 이전에 쓰던 기토 기스케(木藤喜助)란 이름도 관직에 진출하면서 기토 가쓰미로 바꿨다. 1908년에는 통감부 통역관 수행원이 됐고, 마침내 2년 뒤에는 정식 통역관으로 임명됐다.

또 하나의 결함은 그의 범죄 연루 전력이었다. 여관을 경영하던 중에 그는 러시아 쪽 관헌에게서 위조지폐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았다. 여관에 오래 묵었던 일본인들이 위조지폐를 제작한 사실이 발각됐는데, 그때 장소를 제공한 여관 주인 기토도 조사를 받았다. 오토리 총영사의 판단으로는, 러시아 관헌에게 범죄자 혐의를 받는 사람을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 배치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었다. 총영사는 러시아 관헌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싶었다. 기토를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니라 연해주 다른 도시나 농촌 지역에 배치하는 것을 한때 심각히 고려하기도 했다.


목적 위해서라면 살인 계획도


기토 가쓰미 통역관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앞으로 제출한 비밀 정보 보고서 <블라디보스토크 지방 조선인 소학교 유지비 보조 청원에 관한 건>(1921년 8월15일) 표지.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요컨대 기토 가쓰미의 관직 진출은 독특한 데가 있었다. 고등교육기관을 마치고 문관시험을 거쳐서 중견 관료직에 오른 다른 엘리트 관료층과는 질이 달랐다. 그는 현장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한 사람이었다. 기민한 눈치와 순발력으로 무장한, 온갖 실무에 단련된 닳고 닳은 인간형이었다. 상급자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공손하고 하급자에게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일본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관료였다.

기토는 일단 통역관에 부임하자 비밀경찰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무엇보다도 비밀 정보 보고서의 수량이 늘었고, 수준도 높아졌다. 한인 집단 거류지 신한촌을 무대로 ‘암약’하는 반일 독립운동가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능력이 현저히 증대됐다. 무장투쟁의 지도자인 홍범도·이범윤의 동향을 비롯해, 반일 비밀결사의 핵심 인물인 안창호·이동휘·김립·이종호 등의 언행을 정기적으로 보고할 수 있었다. 러시아 국적을 가진 귀화 한인들의 동향도 주시했다. 권업회, 거류민회를 비롯한 한인 자치단체, 한민학교, 삼일여학교 등과 같은 교육기관, <대양보> <권업신문> 등 언론기관의 내막을 상세히 탐지했다. 거류민회 회장 양성춘, 거상이자 대동공보 사장을 지낸 차석보, <해조신문> 사장 최만학, 상업 자본가 최봉준 등 한인 사회 주요 인물들의 거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뿐인가. 식민지 통치에 위협을 주는 현안들도 거뜬히 해결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벽두에 전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담한 독립운동 사건, 15만원 사건의 ‘범인들’을 일망타진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기토 통역관의 공로였다. 일본제국 입장에선 하마터면 북로군정서 규모의 독립군 부대를 9개나 만들도록 허용할 뻔한 위험한 사건이었다. 핵심 범인 3인을 검거했을 뿐 아니라, 탈취된 돈의 87%에 해당하는 13만원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불온’ 언론 <대양보>를 문 닫게 만든 공로도 기토에게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정부의 승인 아래 합법적으로 간행되는 신문인지라 일본총영사관도 강제로 제어할 수는 없었다. 망명 언론인 신채호가 주필이었다. 격렬한 항일 논조로 가득 찬 신문 지면은 일본에 눈엣가시였다. 이 신문을 사실상 폐간에 이르게 한 것도 기토 통역관이었다. 그는 비밀공작을 꾸몄다. 한밤중에 신문사 건물 내부에 하수인을 침투시켜서, 활자 1만5천 개를 훔쳐 나오게 했다. 신문사 소유 활자 총수의 3분의 2에 이르는, 무게 90~94㎏의 방대한 양이었다. 결국 활자가 없어 신문을 발행할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④


1년 만에 한인 밀정 다섯 고용


기토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유인, 살인 계획도 꺼리지 않았다. 그는 통역관 취임 이듬해인 1911년에 무장투쟁 지도자 홍범도를 체포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군자금 모금을 미끼로 홍범도를 중국 하얼빈으로 유인한 뒤 그곳에서 급습한다는 복안이었다. 여의치 않으면 살해도 마다하지 않는 계획안이었다.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지만 기토의 음모 기획능력이 얼마나 대담한지 잘 보여준다.

기토가 탁월한 비밀경찰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남다른 비결이 있었다. 바로 밀정 덕분이었다. 그는 밀정들을 선발하고 활용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밀정 네트워크를 짜는, 음습한 업무를 하는 데 천품이 있었다.

그가 통역관으로 부임할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이 고용한 한인 밀정은 둘이었다. 매우 유능한 자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수를 늘렸다. 기토는 갖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불과 1년 내에 한인 밀정 다섯을 고용할 수 있었다. 명단이 남아 있다. 김인순·김연정·김학문·김정우·김생려가 그들이다. 그들에게는 정기적으로 급료가 제공됐다. 매월 30루블이었다. 철도 부설 공사장에서 노역하는 노동자들이 한 달에 45루블을 받던 시절이었다.⑤ 격렬한 노동이라 다른 부문 노동자들보다 노임이 후했음을 고려한다면, 밀정들이 받는 급료는 대체로 여느 노동자들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토 통역관이 부리는 밀정은 더 있었다. 고정급이 아니라 사안별로 사례금을 주는 밀정 유형도 만들었다. 어느 유형에 속하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허양승도 밀정 노릇을 했다. 그는 놀랍게도 독립운동 지도자 안창호가 세 들어 살던 가옥의 건물주였다. 그는 기토와 비밀리에 만나서 안창호의 일거수일투족을 고해바쳤다. 그뿐인가. 안창호가 만나는 인물들도 탐지했다. 안중근의 친동생 안공근의 동정, 블라디보스토크 기독교회 목사 최관흘의 언행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외 성명이 판명된 밀정으로는 김익지·이동환·서영선·허호·김경선·양기현·김기양·엄인섭 등이 있다. 이중에서 엄인섭은 특출난 자였다. 그는 민족혁명운동의 중진이었다. 연해주 반일 의병의 지도자로서 1908년 국내 진공작전 당시 안중근과 함께 좌우 선봉장을 맡은 이였다. 그는 심지어 안중근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권업회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그랬던 그가 영사관의 비밀경찰 기토와 은밀히 내통하면서 운동권의 비밀을 팔아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여전히 독립운동 진영에 속해 있으면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 1920년 15만원 사건으로 그의 정체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독립운동계의 누구도 그를 밀정이라고 의심하지 못했다. 무려 10년이 넘도록 밀정으로 암약한, 그 분야의 전설 같은 존재였다.

이들이 다가 아니었다. 기토가 작성한 비밀 정보 보고서에는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익명의 밀정들도 등장한다. 기토가 이 숱한 밀정들을 움직이는 데 유력한 수단이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그는 기밀비를 운용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총영사관 내부 문서철 속에 기밀비의 지출과 증액을 요청하는 기토의 공문서들을 쉬이 찾아볼 수 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다. 기토의 존재와 역할은 점차 연해주 한인 사회에 알려지게 됐다. 그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21년 하반기부터 심해졌다. 그동안 자행했던 악행의 희생자 쪽에서 보복의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조짐과 첩보가 잇따라 입수됐다. 곳곳에 심어놓은 밀정들이 다각적으로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왔다.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했던 최 소피아의 메모도 그런 움직임 가운데 하나로 해석됐다. 기토는 움츠러들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총영사관 건물을 나설 때부터 조심해야만 했다. 거리를 지날 때, 영사관 임직원들이 함께 지내는 외교관 사택 단지를 들고 나설 때, 각별히 경계를 강화했다.

경성의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위 간부들도 블라디보스토크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처럼 유능한 경찰 관료를 잃고 싶지 않았다. 위험이 현실화되기 전에 뭔가 조처를 해야 했다. 그해 늦가을이었다. 마침내 고위 간부들은 결정을 내렸다. 연해주에 다소 정보 공백이 있더라도, 기토를 다른 곳으로 전근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내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다른 지역에서 활용한다는 복안이었다.


베이징의 일본공사관으로 전근

1921년 11월 초였다. 기토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중국 베이징 주재 일본공사관으로 전근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새 임지로 가는 도중에 일본 쓰루가 항에 잠깐 들른 그는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연해주는 어떠한 곳인가? 기토는 말했다.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 수효는 약 17만 명인데, 그중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자는 약 1만 명이라고 판단해도 좋다고 단언했다. 놀라운 비율이었다. 그러므로 어설픈 회유 정책은 불필요하며 단호한 억압 정책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기토 가쓰미에게 연해주는 그처럼 삼엄하고 위험한 곳이었다.⑥


참고 문헌

① 菊池義郞(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機密 제49호, ‘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 1921년 7월13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2

② <조선총독부 급 소속관서 직원록> 1911년판

③ 블라디보스톡 총영사 大鳥富士太郞, 機密金 交付 件, 1910년 7월12일, <한국근대사자료집성, 間島·沿海州 關係 2>, 국사편찬위원회

④ 在浦潮斯德총영사, ‘機密鮮제55호 배일신문 大洋報 활자 절취의 건’, 1911년 9월22일,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⑤ 鳥居(블라디보스토크 通譯官), ‘憲機第1042號 第277號, 5월22일 木藤通譯官이 嚴仁燮으로부터 얻은 情報’, 1911년 6월1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2

⑥ ‘연해주의 독립단체’, <동아일보> 1921년 12월7일치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4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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