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을 입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사진 임경석 제공
1922년 3월28일 화요일이었다. 세관 마두를 향해 호화로운 여객선 ‘파인 트리 스테이트’호가 서서히 들어왔다. 필리핀 마닐라를 출발해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입항하는 중이었다. 오후 3시30분, 여객선과 육지를 연결하는 부속선이 승객들을 싣고서 마두에 접안했다. 배에는 여러 나라 사람이 섞여 타고 있었다. 세계 여행을 즐기는 미국인 여행자 그룹도 있었고, 일본인 고관과 그 수행원들도 있었다.
주목을 끄는 이는 일본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58) 남작이었다. 1918∼21년 일본 육군대신으로 재임했던, 군벌 수뇌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3·1운동에 대한 일본군의 유혈 탄압에 책임이 있는 자였다. 또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북간도에서 자행된 독립군 토벌 작전인 경신참변에도 책임이 있는 자였다. 한국인의 해방운동을 총칼로 압살하도록 명령한 자였다. 그가 상하이를 방문한 때는 육군대신 직을 내려놓고 잠시 한가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의 필리핀 총독 레너드 우드의 초청으로 마닐라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는 상하이에 들러 현지 일본인 유지들과 환담할 예정이었다. 그의 상하이 방문 일정은 일간신문에도 소개됐다.
마두에 상륙한 다나카 남작은 출영객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뒤 세관 검사소를 지나 큰길로 막 나오려던 때였다. 다갈색 중국옷을 입은 괴한이 불쑥 뛰어나오더니 권총을 꺼내 쏘았다. 탕탕탕! 세 발이었다.
3·1운동 탄압의 원흉을 겨누다
그뿐인가. 검은색 양복과 갈색 코트를 갖춰 입은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나카 남작 앞으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이 아스팔트 위로 떼구르르 굴렀다. 그에 더해 남자는 권총을 빼들고서 표적을 향해 두 발을 쐈다.¹
사실은 세 사람이었다. 다나카 육군대장 저격 사건에 가담한 의열 투사들 말이다. 세 사람이 거사 현장에 도착한 것은 그날 아침 6시였다. 춘분이 지나고 며칠 안 되는 때라서 어둑어둑했다. 해 뜰 무렵이었다. 그처럼 아침 일찍 현장에 도착한 까닭은 혹여 언론 보도와 달리 기선 도착 시간이 예정보다 몇 시간 앞당겨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오후 3시 남짓까지, 일행은 무려 9시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다. 언제나 배가 도착할까, 세 사람의 신경은 온통 그것에만 쏠렸다.
다갈색 중국옷을 입은 오성륜(23)은 첫 번째 행위자였다. 표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권총을 쏘기로 돼 있었다. 그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냈다. 한구로 입구에서 강변 쪽을 향해 9~10m쯤 떨어진 길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세관 마두의 검사소 출입구가 환히 보이는 곳이었다. 제2선은 김익상(28)이 맡았다. 불행히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가 나설 터였다. 두 번째 거사를 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그는 한 손엔 폭탄을, 다른 한 손엔 권총을 들었다. 갈색 코트가 도구를 감추는 데 제격이었다. 그는 부두 한쪽 전화 부스 뒤에 자리를 잡았다. 제3선 행위자도 있었다. 바로 이종암(27)이었다. 이도 저도 실패한다면 그가 나설 참이었다.
세 사람은 동지들이었다. 비밀결사 의열단의 구성원이었다.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고, “조선의 독립과 세계 만인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희생하기로” 약속한 이들이었다.
한 명의 타깃, 세 명의 희생
푸탄 저격 사건에서 뜻밖의 희생자가 된 미국인 여성 스나이더. 사진 임경석 제공
김익상이 던진 폭탄도 불운했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폭탄은 도로를 가로질러 강둑 가장자리까지 굴러갔는데, 마침 영국 전함 카라일호의 승무원이 발로 차서 강물 속에 넣어버렸다. 왜 불발했을까? 그 소식을 들은 상하이 한국인 망명객들은 하나같이 장탄식을 내뱉었다. 상하이에서 간행되는 <독립신문> 가십난에 다음과 같은 한탄이 실렸다.
“폭발탄아 폭발탄아 황포탄의 폭발탄아. 다나카 적(賊)을 만나거든 소리치며 터지라고, 천번만번 부탁하고 정성들여 던졌거늘, 네가 무슨 까닭으로 침묵하고 있었더냐. 좋은 기회 다 놓치고 어느 때에 터지려고.”²
운 좋게도 저격을 모면한 다나카 일행은 신속히 몸을 피했다. 그 탓에 제3선에 대기 중이던 이종암의 사격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목표를 맞추지 못했다. 사건 현장검증을 맡은 상하이 공동조계 경무청의 리브 형사는 그 기미를 알아챘다. 제3의 가담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몇 발의 탄흔을 발견했는데, 김익상과 오성륜이 서 있던 위치와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황푸탄의 폭발탄아 왜 침묵하였느냐
김익상과 그의 부인. 사진 임경석 제공
황푸탄 의거 현장(붉은 별). 주인공들의 도주 경로와 체포된 장소(위 김익상, 아래 오성륜). 사진 임경석 제공
김익상도 뛰었다. 그는 전찻길을 따라 북쪽으로 내달렸다. 현장을 본 몇몇 사람이 추격했다. 그들을 따돌리려면 도주 방향을 지그재그로 변화시키는 것이 유리했다. 추격자들이 뒤쫓아왔다. 도망자는 위협사격을 했다. 중국인 손수레 상인이 총상을 입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천로였다. 창고가 보였다. 문이 열려 있어 숨어들었다. 그러나 막다른 곳이었다. 되돌아 나왔으나 군중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한 서양 청년이 그를 덮쳤다. <파이낸스 앤드 코머스> 기자 영국인 H. E. 톰슨이었다. 김익상은 그에게 총상을 입혔다. 하지만 곁에서 달려드는 미국인 증권 중개인 호레이스 귤릭을 제압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거사 이틀 전이었다. 1922년 3월26일 밤 10시, 상하이 프랑스 조계 백이로 정운리 18호에 젊은이 8명이 둘러앉았다.³
세 사람을 송별하는 자리였다. 황푸탄 의거의 세 주인공을 둘러싸고 다섯 청년이 합석했다. 김원봉(25)을 비롯해 권준, 강세우, 서상락, 송호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비밀결사 의열단의 구성원이었다. 그중 네 사람은 1919년 11월 이래 창립 멤버였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은 까닭은 죽기를 각오한 동지들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대의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한 동지들의 소회를 들으려 했다. 생전 마지막 육성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유언을 듣는 자리였다.
딸을 혁명가로 키워달라는 유언
김익상(왼쪽)과 오성륜. 사진 임경석 제공
오성륜도 죽음을 결단하는 소회를 밝혔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죽음의 길도 같이 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지하에서 다들 한자리에 모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도 가족의 장래를 동지들에게 부탁했다. 미혼인 그에게는 나이 어린 두 동생의 장래가 걱정이었다. 17살 오성룡과 6살 오성봉의 교육을 부탁했다. “약산(김원봉)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것은 두 아우를 우리의 뜻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주기 바란다”고 했다.⁴
이 유언은 죽기를 각오한 투쟁에 나서는 독립운동가들의 내면을 보여준다. 결단의 순간에 그들 마음속에서 어떤 상념이 오갔는지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가족을 떠올렸다. 특히 아버지나 형의 보살핌 없이 서럽게 자라게 될 어린 자녀와 동생의 삶을 생각했다. 그 장래에 대한 걱정이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었던 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1 ‘일본 다나카 장군 폭탄 세례, 광신자들의 표적’, <더 차이나 프레스> 1922년 3월29일치.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0, 임정편Ⅴ>, 국사편찬위원회 편, 240쪽, 1991.
2 ‘폭발탄’, <독립신문> 1922년 4월15일치.
3 Shanghai Municipal Police, Special Branch, “D.4460, D.4463”, 같은 자료집, 442쪽.
4 ‘프랑스 조계 白爾路 停雲里 18호의 한국인 집에서 3월29일 발견된 한국어 서류’, 같은 자료집, 448~4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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