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립 암살 사건은 임시정부의 국가 폭력

이젠 허위의 낙인 지우고 명예 되살려야


1920년경 상하이에서 촬영한 김립과 그의 동료들: 앞줄 오른쪽 끝이 비운의 주인공 김립. 시계 방향으로 모스크바 외교의 주역 박진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이자 한인사회당 당수 이동휘, 신원 미상, 뒷줄 모스크바 자금 결산을 책임진 김철수, 역사가 계봉우, 신원 미상. 독립기념관 제공


‘김립’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


‘김립’(金立)이라는 이름은 좀 낯설다. 한국식 작명으로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이름이 외자인데다가, ‘설 립(立)’이라는 글자가 이름에는 좀체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행적을 추적하던 일본 고등경찰들도 종종 오류를 범했다. 일본 측 정보 문서에는 ‘삿갓 립(笠)’ 자를 써서 ‘金笠’이라고 표기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 말기 방랑 시인으로 유명한 김삿갓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여러 가명 중 ‘김립’에 애착


대한민국임시정부 1920년 신년 축하 기념사진: 두 번째 줄 한가운데가 국무총리 이동휘. 그로부터 오른쪽 한 사람 건너 노동국 총판 안창호, 다시 한 사람 건너 국무원 비서장 김립이 앉아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쉬이 예측할 수 있듯이 그 이름은 가명이었다. 비밀결사에 가담하거나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통상 그랬던 것처럼 그는 가명을 썼다. 본명은 김익용(金翼容)으로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 나이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략 짐작할 수 있다. 1880년에 출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①, 그보다는 몇 년 뒤에 태어났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가 어려서부터 평생 교유했던 허헌(許憲, 1885년생)이나 이종호(李鍾浩, 1885년생) 등과 나이가 같거나 비슷한 연령층에 속한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혁명운동에 참가하다보니 그에게는 가명이 많았다. 왕진덕(王鎭德), 이세민(李世民), 양춘산(楊春山) 등을 사용했다. ‘일세’(一洗)라는 아호도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는 김립이라는 이름에 큰 애착을 가졌다. 그렇게 불리기를 희망했던 것 같다. 가까운 동료들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계의 온갖 다양한 인사가 그를 김립이라고 지칭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립이라는 이름은 혁명에 헌신을 결단하는, 마음속 깃발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청년기에 중대한 결심을 했다. 망국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원하는 데 한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동향인 맘 맞는 동료 허헌과 함께였다. 두 사람은 ‘입헌(立憲)’이라는 글자를 하나씩 나눠 갖기로 합의했다. 김익용은 ‘설 립’ 자를 취하고, 허헌은 자신의 본명에 포함된 ‘법 헌(憲)’ 자에 그 의미를 부여했다. 대한제국 시절이었다. 위기에 처한 공동체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전제군주제를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전제군주가 갖고 있는 국가주권을 국민의 품으로 옮겨오는 시민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김립의 막역한 친구 허헌은 뒷날 인권변호사가 된다. 일제시대에 3·1혁명 피고인들과 조선공산당 사건 피고인들을 변호했으며, 민족통일전선 단체 신간회의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른 이였다.

김립은 20대 초반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전제군주제에 반대하고 일본의 식민지 침략에 맞서는 혁명이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애국계몽운동이라 이르는 이 운동 속에서 김립은 두각을 나타냈다. 공개 사회단체로서 큰 영향력이 있던 서북학회의 주요 활동가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서북학회는 재야에 있는 일종의 정당 같은 존재였는데, 김립은 이갑, 안창호 등과 더불어 그 단체 내에서 “말 잘하고 지략이 종횡하는 청년 논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②.


달변에 지략 뛰어난 청년


북간도 3대 민족주의 명문학교 길동학당 터: 중국지린성 연길현 국자가 소영자 소재. 학교 터는 밭으로 변해 있고(삼각형), 인근에 민가가 들어서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공개 단체뿐만 아니었다. 그는 비공개 비밀결사 영역에도 깊이 참여했다. 그는 전국 규모의 강력한 비밀결사 신민회의 회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회원일 뿐만 아니라 중견 간부였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그가 신민회가 지향하는 사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신민회 간부급 구성원들이 망국 전후에 했던 전형적인 행동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국운이 거의 기울어가던 1910년 4월 그는 망명했다. 망국 4개월 전이었다. 일제 침략에 맞서 타오르던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불길이 점차 잦아들던 때였다. 신민회 간부들이 집단 망명을 단행한 시점이 바로 이때였다. 독일 조차지였던 중국 칭다오에서 전략 회의를 열었던 게 1910년 4월이었다. 이갑, 안창호 등을 비롯한 십수 명의 독립지사들이 동참했다. 김립이 이 회의에 참석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김립이 신민회 간부들의 집단 망명 대열에 일원으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최초의 잡지로 이름 높은 <소년> 1910년 4월호 첫머리에 ‘나라를 떠나는 슬픔’ ‘태백의 님을 이별함’이라는 권두시가 실려 있다. 바로 신민회 간부들의 망명을 읊은 노래였다③. 김립은 바로 ‘태백의 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립이 선택한 망명지는 ‘해도’였다. 연해주와 북간도를 합쳐 일컫는 말이었다. 두만강을 경계로 조국과 잇닿아 있는 곳이자, 수십만 명의 한인 이주민 사회가 형성돼 동포들의 후원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말 널리 유행했던 <정감록>에서 이르기를, 해도에서 진인이 출현하여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연해주와 북간도는 그 음가만으로도 국권을 상실한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곳이었다.

그는 해도를 기반으로 독립혁명의 주체 역량을 양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두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나는 수십만 한인 이주민들을 결속해 반일운동의 기지로 삼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북간도에서는 간민교육회(1910년)와 간민회(1913년)를, 연해주에서는 권업회(1911년) 결성을 이끌어냈다. 어느 것이나 다 이주민 자치단체였다. 1913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춘원 이광수는 권업회의 임원들을 관찰한 기록을 남겼다. 그중에 김립이 거론된다. 김립은 책사로서 권업회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독립혁명의 신진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특별한 학교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그가 역점을 기울인 학교는 길동(吉東)학당과 나자구사관학교였다. 길동학당은 북간도의 가장 큰 도회지 국자가(局子街) 근교 소영자(小營子)에 설립한 중등 과정의 사범학교였다. 길동기독학당, 광성중학 등으로도 알려진 이 학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지도자 양성기관으로써 기능했다. 이 학교는 장재촌의 명동(明東)학교, 와룡동의 창동(昌東)학원과 더불어 1910년대 북간도 한인 사회의 3대 명문 교육기관 중 하나로 지목받았다.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독립혁명에 헌신하는 청년들이 줄지어 배출됐기 때문에 그러한 명성을 얻었다. 1920년 1월에 일어난 유명한 15만원 사건 주인공들도 바로 이 세 학교 졸업생들로 이뤄진 비밀결사 철혈광복단의 구성원이었다. 어느 학교나 다 교명이 ‘동’(東) 자로 끝나는 점이 눈에 띈다.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은 ‘해동’, 즉 한국을 가리키는 은유였다. 한국에 빛을 가져오고, 한국을 융성시키며, 한국을 이롭게 하는 것이 이 학교들의 교육 목표였다.


신·구학 겸비한 행동하는 지식인 

 

김립의 기고문 ‘今日 吾人의 國家에 對한 義務 及權利’가 실려 있는 <서북학회월보> 창간호 표지. 독립기념관 제공


나자구사관학교도 김립과 그 동료들이 심혈을 기울여 설립한 교육기관이었다. 국자가 북쪽 150km 지점 깊은 산속에 넓은 분지가 있는데, 그곳에 자리한 이 학교는 무장부대의 지휘관을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길동학당이 정치 간부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면, 나자구사관학교는 군사 간부를 기르는 교육기관이었다. 이 두 학교는 망명객 김립이 구상한 독립운동 전략의 중요 소산이었다. 그의 오랜 동지였던 김규면이 뒷날 남긴 수기에 따르면, 김립은 ‘광성중학과 나자구사관학교의 창립자’라고 지목받았다.

그는 지식인이었다. 일본 첩보 문서의 평가에 따르면 “반일 조선인 가운데 재주와 학식이 제일류의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한문과 법률에 능했다고 한다. 전통적인 유교 교양은 물론이고 법학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 학문의 소양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신학과 구학을 겸비한 이였다.

학식이 뛰어났다고 해서 그저 공론만 일삼는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그는 유능한 행동인이었다. 김립의 가까운 동료이자 역사가인 계봉우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정치 수완이 민활”해 “상하이 망명자 사회에서 그를 능가할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김립은 주·객관 정세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에 입각해 독립운동의 장래를 구상했다. 강대한 일본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본을 포위할 수 있는 국제적 연대를 추구할 필요가 있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김립은 독일과의 국제적 연대가 한국 독립의 필요조건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 때문에 김립과 그 동료들은 러시아 정부에 위험인물로 지목됐다. 급기야 김립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적성국가 독일의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다. 1916년 4월 우수리스크에서 체포된 그는 러시아혁명이 터진 뒤인 이듬해 5월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④.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김립과 그 동료들은 러시아 혁명파가 한국 독립의 국제적 지원 역량이 된다고 판단했다. 김립은 그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해나갔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고, ‘한인사회당’이라는 명칭의 사회주의 정당을 창설하는 데 앞장섰다. 김규면의 수기를 보면, 김립은 ‘한인사회당 창립자의 한 사람’ ‘한인 적위군 조직자의 한 사람’ ‘한국공산주의 선전사업의 첫 사람’이라고 지목된다⑤.


내부의 적에게 빼앗긴 목숨


김립에게는 적이 많았다. 일본 제국주의와 그 협력자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인 사회 내에서 혹은 독립운동계 내부에 그에 맞서는 반대파가 항상 있었다는 의미다. 왜 그에게는 내부의 적이 많았는가? 교만했다거나 야심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다. 전적으로 그가 견지했던 독립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관련되어 있었다.

해도에서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할 때도 그랬다. 북간도에서는 전통 유학자들이 이끄는 보수적인 한인 농민단체 ‘농무계’로부터 배척당했고, 연해주에서는 러시아 국적을 가진 부유한 한인 이주민들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왜냐하면 그는 전제군주 제도를 폐지하고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혁명적 민주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간도 이주민 내부에 존재하는 보수적인 유생들, 농민들과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연해주에서 알력을 빚은 이유는 그가 연해주 한인 이주민들의 공통 이익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 국적을 갖지 못한, 가난한 비귀화 한인들의 이익과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점에 섰다. 부유한 이주민 상층부와 알력을 빚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상하이에서도 내부의 적과 맞섰다. 임시정부에서는 미국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두 세력, 이승만 집단과 안창호 집단과 자주 충돌했으며, 사회주의 운동권에서는 이시파(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과 갈등을 겪었다. 왜냐하면 김립은 미국과 연계한 외교독립론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신생 혁명국가 소비에트러시아와 연계한 무장독립투쟁 노선만이 임시정부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집단과 심각한 불화를 빚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시파 공산당과는 왜 싸웠나? 김립은 한국 혁명이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당면 목표로 삼는 민족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세력이라면 설혹 부르주아적 성격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연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시파 공산당 세력은 달랐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수행하는 것과 동일한 성격의 혁명을 한국에서도 실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김립은 내부의 적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그의 죽음은 독립운동계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왔다. 상하이 망명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동지적 유대감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정견과 조직이 다르면 한때 동료였던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위구심을 만연케 했다. 아주 좁은 범위의 동료들 외에는 누구도 신뢰하지 않게 됐다. 상하이 한국 독립운동자들 사이에 냉담한 기운이 휘돌았다.

그뿐인가. 한국 독립운동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김립의 죽음은 모스크바 자금의 추가 수령을 불가능하게 했다. 김립 암살 사건을 계기로 모스크바 자금 집행에 관한 의혹이 제기됐고, 이 의혹을 중시한 코민테른은 자체 감찰을 실시했다. 그 결과 약속된 총 지원금 가운데 잔여액 지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도합 금화 200만루블이 한국 독립운동계에 제공될 예정이었다. 그중에서 실제 지급된 금액은 2회에 걸쳐서 60만루블이었다. 잔여 자금 140만루블이 남아 있었지만, 그 지급이 취소되고 말았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한다면 2085억원에 이르는 거액의 혁명 자금이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그즈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은밀히 거래되던 무기시장 시세에 따르면, 소총 500정과 기관총 3문으로 무장한 북로군정서 규모의 비정규 무장부대를 무려 107개나 조직할 수 있는 자금이었다. 그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김립 암살 사건은 일종의 국가 폭력이었다. 임시정부 내각 결정에 의거해 경무국이 집행한 이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 큰 위해를 가져온 불행이었다. 임시정부는 두 가지 점에서 명백히 과오를 범했다. 첫째, 잘못된 정보와 판단을 따랐다. 모스크바 자금 금화 40만루블의 집행권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한인사회당에 속해 있었다. 둘째, 설혹 유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 형벌의 집행 과정이 적법하거나 적절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계의 폭넓은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졌어야 했다.


번번이 기각된 독립유공자 상신

지금이라도 과오가 교정돼야 한다. 마땅히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하며, 망자에게 국가적 차원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 또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기념사업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을 자임하는 한국 정부의 마땅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김립은 오늘날에도 ‘공금횡령범’이라는 불명예 속에 갇혀 있다. 사후 근 백 년이 지나가는데도 여전히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범한 정책적 과오의 그늘 속에 있다. 오늘날에도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심의 과정에서는 임시정부 공금횡령자라는 낙인 때문에 그의 서훈 상신이 번번이 기각되고 있다 한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를 억누르고 있는 허위의 낙인을 지우고, 그 자리에 그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는 꽃 한 다발을 놓아야 할 때다.


참고 문헌

① 반병률,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32집, 2005, 65쪽.

② 許憲, ‘交友錄’, <삼천리> 제7권 제7호, 1935. 8, 72쪽.

③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하)’, <한국학보> 9, 1977, 178쪽.

④ 반병률, 위의 글, 74쪽.

⑤ 김규면, ‘老兵 金規勉의 備忘錄’, 윤병석 편, <誠齋李東輝全書(下)>,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8, 121-245쪽.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380.html




한국 독립운동에 510억원어치 금괴 지원한 레닌
활발한 활동으로 지원 끌어낸 주체는 한인사회당


코민테른 제2차 대회 민족·식민지 분과에서 토의 중인 박진순과 레닌. 임경석 제공


모스크바 자금은 도대체 어떤 돈인가. 김립이 독립운동계 동료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비극적 사건의 한가운데에 이 문제가 놓여 있었다. 이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도 없다. 코민테른(국제공산당)과 소비에트러시아 정부가 이 자금을 제공했다. 이것에는 누구나 다 동의한다.

자금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 도대체 얼마이기에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했을까. 당연히 적은 돈이 아니었다. 자금 운송에 직접 참여했던 한형권의 증언에 따르면,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 레닌 정부가 한국 혁명 사업에 주기로 약속한 자금 규모는 200만루블이었다. 지폐가 아니라 금화였다. 순금 덩어리였다.


성인 5명 체중과 같은 327kg 금괴


왜 금화로 계량했을까. 당시 혁명과 내란에 휩쓸린 러시아 사회의 화폐제도가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통용되는 화폐가 여러 가지였다. 제정러시아 시절에 발행된 로마노프 루블, 1917년 2월 혁명 이후 발행된 케렌스키 루블,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가 발행한 소비에트 루블, 백위파 세묘노프 정부가 발행한 세묘노프 루블 등이 혼용됐다. 어느 것이나 다 안정성이 의심스러웠다. 순금 보유고에 의거한 태환을 보장하지 않은 채 마구 찍어낸 화폐들이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초래됐고, 화폐가치가 급락했다. 예컨대 세묘노프 루블은 미국 돈 1달러당 무려 25만루블 비율로 환전됐다. 지역에 따라서는 통용이 불가능한 돈도 있었다. 케렌스키 루블과 소비에트 루블은 아무르 강변의 블라고베셴스크 일대에서는 유통 자체가 되지 않았다.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지폐는 부적당했다. 국제 금융거래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유럽의 유력한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는 것이 당시엔 불가능했다. 신생 혁명 정부를 적대시하는 제국주의 열강은 소비에트러시아에 경제 봉쇄 정책을 취했다. 오직 실물 자산만이 유용했다. 제정러시아 때 발행한 금화만이 공신력을 갖춘 결제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한국 쪽의 필요에 따라 자금을 얼마씩 나눠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1차 지급액은 1920년 9월에 집행된 금화 40만루블이었다. 이 돈은 어느 정도의 금덩어리인가. 한형권의 회상에 따르면, 20푸드(러시아의 무게 단위로, 1푸드는 약 16.38kg)의 금괴를 궤짝 7개에 나눠 담았는데, 모두 합하면 성인 5명의 몸무게를 합한 것과 같았다.① 20푸드의 금괴는 약 327.6kg이다. 성인 5명의 몸무게와 같았다는 회고담이 사실에 부합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을 궤짝 7개에 나눠 담았으니, 한 궤짝의 무게는 약 47kg이다. 한 사람이 들기에는 너무 무겁고, 둘이서 양 끝을 맞잡는다면 무난히 운반할 수 있었다.


금화 40만루블은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얼마나 될까. 1920년 런던 현물시장 거래가에 따르면, 금 1온스(28.349g)당 가격이 20.68달러였다.②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금 1g당 약 0.729달러로, 금화 40만루블에 해당하는 순금 327.6kg은 23만8820달러였다. 1924년 1월 현재 1달러에 대한 일본 화폐의 교환가는 2원16∼2원17전이었다.③ 금화 40만루블은 미국 돈으로는 23만8820달러, 일본 돈으로는 51만5852엔이었다. 그즈음 식민지 조선 신문기자의 월급이 40~50엔이고, 일용노동자 하루 일당이 1엔쯤 했다. 금화 40만루블은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510억원쯤 되는 큰돈이었다.


흉작으로 수많은 민중 고통받던 때


소비에트러시아 정부가 한국의 독립혁명을 위해 무상 원조하기로 약속한 200만루블은 약 255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놀랄 만한 액수였다. 레닌 정부는 무상 원조 총액 가운데 5분의 1에 해당하는 510억원을 1차분으로 지급했다. 혁명과 내전으로 고통을 겪던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였다. 서구 열강에 의해 경제가 봉쇄되고, 도처에서 백위파 세력이 외국의 후원을 얻어 군사 반란을 일으키던 중이었다. 그뿐인가. 볼가강과 돈강 유역의 농업지대에서 흉작으로 기근이 생겨 수많은 민중이 고통받던 때였다. 그럼에도 러시아 정부는 멀리 떨어진 한국 혁명의 승리를 돕기 위해 거액의 지원금을 쾌척했다. 식민지 피억압민족의 해방을 지원하는 국제주의 정신의 발로였다. 코민테른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구호, ‘만국의 노동자와 피억압민족은 단결하라’는 정신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소비에트러시아 정부는 도대체 누구에게 자금을 주었는가. 표현을 달리해보자. ‘수령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모스크바 자금을 관할하는가’ ‘자금을 운용·배분하는 권한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것을 해명하려면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모스크바 외교를 성사시킨 행위 주체, 다른 하나는 자금 제공자인 코민테른과 러시아 정부의 견해를 확인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외교를 처음 실행에 옮긴 주체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이었다. 박진순·박애·이한영, 세 사람으로 이뤄진 대표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것은 3·1혁명이 일어난 1919년 7월이었다. 이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이용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평시라면 10여 일 만에 끝날 여정이 무려 120일이나 걸린 것은 러시아 내전 때문이었다. 적위군과 백위군이 엎치락뒤치락 번갈아 집권하는 탓에 교통과 통신이 평시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이 지나야 했던 경유지는 마치 적색과 백색이 어지럽게 뒤섞인 모자이크 같았다.

대표단은 코민테른과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맹렬한 외교전에 임했다. 특히 박진순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다. 그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한국 혁명운동을 설명하고, 한인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 의사를 밝혔다. 그의 연설은 국제공산당 기관지 <코민테른> 1919년 7~8호(11~12월 합병호)에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국외 정기간행물에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기고문이 실린 것은 처음이었다.

러시아 정부기관을 상대하는 외교활동도 활발했다. 그해 12월9일에 열린, 러시아 최상급 의결기관인 제7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 출석한 박진순에게 한국을 대표해 연설할 기회가 주어졌다. 한인사회당 대표단이 러시아 정부 당국에 얼마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지 잘 보여준다.


소련, 한형권 임정 대사 깍듯이 예우


모스크바에 파견된 한인사회당 대표단 3명(왼쪽부터 박진순, 박애, 이한영). 모스크바 자금의 수령자를 명시한 ‘얀손 보고서’(오른쪽).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동료인 박애와 이한영이 1920년 4월 극동으로 귀환한 뒤에도 박진순은 홀로 남아 계속 외교활동을 했다. 그의 활동은 7∼8월 절정에 이르렀다. 그 기간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의결권을 지닌 정식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는 레닌이나 마나벤드라 나트 로이처럼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이 즐비한 민족·식민지 분과에 소속돼 위원으로 활동했다. 식민지 해방운동 이론과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 머리를 맞대고 참여했던 것이다. 그 분과에서 박진순이 취했던 이론적 견해를 보여주는 글이 있다. ‘위대한 진보’라는 제목으로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그의 논리가 드러나 있다.④ 그뿐인가. 대회가 종료된 뒤에는 코민테른 최상급 집행기구인 집행위원회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코민테른 역사상 한국인으로 최고위직에 진출한 것이었다.

박진순의 외교활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또 다른 유력한 외교활동가가 모스크바에 모습을 나타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전권대사 한형권이었다. 그가 모스크바에 온 시점은 1920년 5월 말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원에서 모스크바 대사 선임을 논의할 때 애초에 거론된 사람은 한형권, 여운형, 안공근이었다. 이들은 러시아말에 능통하거나,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무총리 이동휘는 여러 대사를 파견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세 사람은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3대 정치세력의 입장을 각각 반영했기 때문이다. 1919년 10월 통합 임시정부 출범 이후 내각은 3대 정치세력의 연립정부라는 성격을 띠었다. 흥사단이 중심인 안창호 그룹, 임시정부 내 최대 지분을 가진 이승만 그룹, 국무총리 이동휘가 대표하는 한인사회당 그룹이다.

이동휘 국무총리는 외교관 파견이 정치적 안배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3인의 대사를 선임했다가는 외교활동의 단일성을 보장하지 못하고 혼선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이동휘 국무총리는 한 사람만 보내기로 했다. 한형권에게만 전권대사 신임장을 부여했다. 한형권이 한인사회당 당원이라는 사실도 판단의 기준이 됐을 것이다. 이미 파견된 한인사회당 대표단과 호흡을 맞춰 일하려면 한형권밖에 적임자가 없었다.

한형권은 러시아 정부의 깍듯한 예우를 받았다. 독립국 대사나 다름없는 대우였다. 러시아 국경을 넘어 들어가자마자 특별차량과 호위병을 제공받았다.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역두에서 외무차관 카라한을 필두로 하는 외무 담당 관료들의 영접을 받았다.


러시아공산당의 자금 특별감사


박진순과 한형권, 두 사람은 긴밀히 협력했다. 한 사람은 당 레벨에서 코민테른과 러시아 공산당의 요로를 뚫었고, 또 한 사람은 정부 레벨에서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의 관료들과 빈번히 접촉했다. 한인사회당 대표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의 ‘콤비 플레이’는 1920년 9월에 마침내 거대한 성과를 거뒀다. 모스크바 자금 1차분 금화 40만루블을 받은 것이다.

두 사람은 궤짝 7개에 나눠 담은 327.6kg의 황금을 갖고서 극동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제국주의 열강의 봉쇄를 뚫으려면 몽골을 거쳐 북중국 쪽으로 가는 것이 가장 유리했다. 몽골 국경까지 순금 궤짝을 운반한다면 그곳에서 순금 덩어리를 금융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두 사람이 모스크바를 떠날 때, 정거장에는 카라한을 비롯해 여러 외교관들이 배웅했다. 귀중품 수송을 위해 무장 호위병 4명이 배속된 특별차량을 보냈다.

그렇다면 김립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금화 40만루블의 관할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코민테른 기록에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문서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먼저, ‘얀손 보고서’를 보자. 김립 암살 사건으로 모스크바 자금을 둘러싼 분규가 더할 나위 없이 격화되자, 결국 코민테른이 나섰다. 코민테른은 실상을 조사하고 해결책을 입안할 수 있는 특별한 조처를 했다. 특별감사관을 임명한 것이다. 1922년 5월 초순 한국자금문제 감사관으로 선임된 이는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간부 ‘얀손’이었다.⑤ 그는 내전 시기에 극동 지역의 안정을 위해 일시적으로 설립됐던 극동공화국 외무부 장관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모스크바 자금에 대한 막강한 권한이 위임됐다. 자금을 받은 한국의 사회주의 단체들을 감찰하고, 잔여금이 있을 때는 몰수할 권한이 부여됐다.

얀손은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폭넓은 조사에 착수했다. 자금의 수령과 집행에 관련된 인사들에게 서면 결산보고서 제출을 요구했고, 필요하면 직접 대면 조사도 병행했다. 예를 들어 얀손은 동료 ‘유린’을 상하이에 파견해 한인사회당 재정 담당자 김철수를 대면 조사하게 했다. 다른 관련자들도 조사 범위에 넣었다. 자금 운용에 흑막이 있다고 의혹을 제기한 사람들도 만났다. 그들을 불러들여 청문회를 열었다. 모스크바의 옛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에는 당시 작성된 청문 기록 가운데 5종이 남아 있다. 그중에는 한인사회당 책임비서이자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를 비롯해 외교 대표단 일원이었던 박애의 진술도 있다.

마침내 얀손 보고서가 작성됐다. 얀손의 지휘하에 실무위원회가 3개월간 조사활동을 한 뒤 1922년 8월18일치로 작성한 감사보고서였다.⑥ 문서에는 모스크바 자금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의 견해가 담겼다. 그에 따르면 1920년 9월 금화 40만루블의 수령자는 ‘박진순’이었다. 다시 말하면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출석한 한인사회당 대표자이자,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된 박진순에게 자금이 갔던 것이다. 이는 모스크바 자금의 관할권이 한인사회당과 그 후계 조직인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에 있었음을 뜻한다.


자금 관할권 가졌던 한인사회당


금화 40만루블의 관리 책임자가 박진순이라는 정보는 또 다른 문서에도 실려 있다.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 공문서다. 외무차관 카라한이 작성한 한 전보를 보면, 1920년 9월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가 박진순에게 금화 40만루블을 인도했다는 기사가 쓰여 있다.⑦

이제 모스크바 자금 40만루블의 관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해졌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 없이 한인사회당과 그 후계 단체인 고려공산당에 있었다. 이는 논란 당사자들의 설왕설래에 의존하지 않고 객관적 기록으로 입증할 수 있다. 코민테른 쪽의 얀손 보고서,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의 공문서 등은 한 가지 사실을 지목한다. 바로 한인사회당이었다.


참고 문헌

① 한형권, ‘혁명가의 회상록: 레닌과 담판, 독립자금 20억원 획득’, <삼천리> 6, 10쪽, 1948년 10월

http://www.kitco.com/scripts/hist_charts/yearly_graphs.plx

③ ‘외국우편위체’, <동아일보> 1924년 1월22일치

④ Пак Диншунь(박진순), Великий Сдвиг(위대한 진보), 1920년 8월, с.1-4,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22 л.57-60

⑤ Секретарь ИККИ Куусинен(코민테른집행위 비서 쿠시넨), тов Янсону(얀손 동무에게), 1922년 5월11일, с.2,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57 л.13об

⑥ Доклад о результатах работ комиссии по выяснению финансовых расчетов Кор.Ком.Партии / Шанх.организации(고려공산당 상하이파 자금결산규명위원회 결과 보고서), 1922년 8월18일, с.9,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59 л.59-67

⑦ Телеграмма Чита Янсону из Москвы Карахана(모스크바에서 카라한이 치따의 얀손에게 보내는 전보), 1922년 6월2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59 л.33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244.html




임시정부 인사가 불명확한 의혹으로 김립 암살
정치세력 간 파벌 다툼이 부른 동족상잔의 비극


노종균. 1939년 일본경찰에 체포돼 심문을 받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 기사


독립운동가 김립을 죽인 범인은 누군가? 필시 일본일 것이다! 조선과 중국의 언론계는 대체로 그렇게 생각했다. 보기를 들면 중국 <항주보>와 경성에서 간행되는 <동아일보>는 명시적으로 그렇게 보도했다. 그러나 일본 국가기관은 범행 당사자가 아니었다. 김립의 소재를 집요하게 뒤쫓았지만, 그의 살해를 교사하거나 실행한 것 같지는 않다.


방아쇠 당긴 임시정부 경호원


오면직. 반일 독립운동에 가담한 죄로, 1938년 평양 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김립의 행방을 추적하는 일본 정보기관 종사자는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조선총독부 파견관 오다 미쓰루가 돋보였다. 재판소 통역관으로 재임하면서 조선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간부로 특채돼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부에 파견된 터였다. 그는 상하이 한인 사회 내부에 독자적인 스파이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거액의 기밀비를 운용하면서 많은 밀정을 관리했다. 그가 관리하는 밀정 가운데 이치열(26)이 있었다. 유능한 스파이였다. 경성의 친일단체 국민협회의 회원이기도 한 그는, 1921년 말~1922년 초 상하이 한인 망명자 사회 내부의 갈등 양상을 상세히 전해왔다. 그에 따르면 김립은 모스크바 자금 문제로 임시정부의 지탄을 받고 있었다.①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재상하이 일본 경찰은 김립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김립이 공공연한 자리에 얼굴을 비치지 않은 채 숨어 지내고, 망명객 현정건과 함께 살고 있다는 첩보였다. 비록 숨어 있지만 활동 양상은 활발했다. 조선에서 출장 나온 언론인 유진희와 회견하며 뭔가를 도모하는데, 아마 국내 비밀결사를 강화하는 일인 듯하다는 내용이었다.② 김립이 사는 주소를 특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실제 거의 다가간 첩보였다.

김립이 피살됐을 때 일본 정보기관 종사자들도 바삐 움직였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를 살해했는지 탐문하기 위해서였다. 외무성, 헌병사령부, 조선총독부 등 여러 경로로 작성된 정보 보고서들은 피살 정황이나 범인 추정 문제에서 상충됐다. 그중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부가 작성한 정보 보고서였다. 독자적 스파이망을 가졌을 뿐 아니라, 수사권이 있는 상하이 공동조계 경찰국의 정보 협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김립은 모스크바 자금 40만루블을 사사로이 횡령한 혐의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쪽에 피살됐다.③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불과 1년 반 전에 자기네 고위직으로 있던 독립운동가를 죽였다고? 이게 과연 있을 법한 일인가? 믿어도 좋은가? 이처럼 거듭 반문할 만큼 많은 의문점을 내포한 견해였다.


그랬다. 사실이었다. 김립에게 방아쇠를 당긴 사람들은 이미 밝혀져 있다. 바로 오면직(28)과 노종균(28)이었다. 그들은 임시정부에 소속된 ‘경호원’이었다. 경호원이란 말은 오늘날 요인의 신변 안전을 위해 위험을 예방·제거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시절 상하이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였다. 임시정부 내무부 소속 직원으로, 경무국장의 지휘를 받아 공공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오면직과 노종균은 황해도 안악군 출신의 동갑내기로, 1919년 3·1운동에도 열렬히 참가한 청년들이었다. 두 사람은 만세시위운동이 사그라진 뒤에도 반일 비밀결사에 가담해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군자금 모금을 돕다가 비밀이 누설돼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1년 11월이었다.④ 말하자면 두 사람이 상하이에 발을 처음 내디딘 때는 김립 암살 사건이 일어나기 두세 달 전이었다. 둘은 망명지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출신지 연고에 따라 황해도 출신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와 인연을 맺게 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금 40만루블 사적 유용 혐의


임시정부 경무국장 시절의 김구. 독립기념관 제공


임시정부 경찰관이 하는 일은 통상적인 국가의 경찰 행정과는 달랐다. 자체 영토가 없기에 치안과 질서 유지는 주임무가 될 수 없었다. 임시정부 경무국의 임무는 정치적·군사적 성격을 띠었다. 경무국장 김구의 진술에 따르면, “주요 임무는 왜적의 정탐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여,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스파이 방지 활동이었다. 경무국장 김구는 임시정부 경호원 20여 명을 지휘하며 이 임무를 수행했다.⑤ 임시정부 경무국의 맞상대가 있었다. 바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부였다. 상하이 동북방에 있는 일본총영사관과 서남방에 있는 프랑스조계에 은밀히 자리잡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은 스파이 활동 영역에서 서로 암투를 벌였노라고, 김구는 회고했다.

김립 암살 임무를 맡은 팀은 네 사람이었다. 이 중에서 오면직과 노종균은 전방 담당 조였다. 앞길을 차단해 목표를 사살하는 임무를 맡았다. 후방에도 두 사람이 배치돼 있었으나, 어떤 이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도 임시정부 경무국의 경호원이었음이 틀림없다. 요컨대 김립 암살 사건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 지휘하에 경찰관 4명이 조직적으로 수행한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경무국장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다. 모스크바 자금 40만루블은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준 것인데,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와 비서장 김립이 공모해 횡령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임시정부 ‘공금 횡령범’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립은 공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혐의도 있었다. 김구의 견해에 따르면, 김립은 비리를 저질렀다.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했고,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둥 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했다고 비난했다.

김구는 김립 암살 사건이 바람직한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다시 <백범일지>를 보자. 이렇게 쓰여 있다. “정부의 공금 횡령범 김립은 오면직, 노종균 등 청년들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은 잘했다고 칭찬하며 통쾌해하였다.”⑥

김립이 죽을죄를 지었다는 판단은 경무국장 김구 혼자서 내린 게 아니었다. 그것은 임시정부의 공식 견해였다. 1922년 1월26일 자로 ‘임시정부 포고 제1호’가 발령됐다. 국무총리대리 신규식을 필두로 내무총장 이동녕, 군무총장 노백린, 학무총장대리 김인전, 재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손정도 등 장관급 지도자 6명이 연명으로 서명한 공식 문서였다.

이 포고문은 준엄한 심판 문서였다. ‘독립당의 영수’로서 ‘신망 있는 자’들이 파렴치한 행동을 자행하고 있음을 규탄하는 엄중한 성격을 띠었다. 포고문은 이들을 응징하지 않으면 국기(國基)가 서기 어렵다고 규정했다. 죄를 낱낱이 밝혀 온 나라 사람들이 같이 그들을 토벌할 수 있도록 정의를 밝히겠다고 선언했다.


김립은 죽을죄를 졌는가


중국 상하이 시절의 김철수. 임경석 제공


특히 세 사람의 과거 지도자가 거명됐다. 첫째,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였다. 그는 러시아가 우리 정부에 증여한 거금을 김립으로 하여금 중도에 횡령케 하고, 도리어 임시정부 각원들에게 죄를 돌리며 정부를 파멸케 하려고 도모한 죄가 있다고 했다. 둘째, 군무차장을 지낸 김희선이었다. 그는 변심해 적에게 투항하는 죄를 범했다. 조선총독부와 비밀히 연락해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조선 내지로 도주해버렸던 것이다. 포고문은 그 죄를 용서하기 어렵다고 썼다.

셋째, 내각 비서장을 지낸 김립이었다. 그는 이동휘 국무총리와 결탁해 국가의 공금을 횡령하고, 자기 개인 주머니를 불리며, 같은 부류를 모아 간교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받았다. 포고문은 그 죄가 ‘극형’에 해당한다고 썼다.⑦

김립 암살 사건이 일어난 때는 포고문이 발령된 지 13일 만이었다. 김립 사건이 포고문과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경무국 경호원들이 포고문에 거론된 과거 지도자 세 명을 모두 징벌한 것은 아니다. ‘극형’을 실행에 옮긴 대상은 김립 혼자였다.

김립은 목숨을 잃었다.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한평생 헌신해온 그의 삶은 송두리째 부정당했다. 신체를 말살당했을 뿐 아니라, 명예와 정신마저 치욕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과연 김립은 죽을죄를 졌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살아남은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이 항변하기 시작했다. 암살 현장에 김립 혼자 있었던 게 아니라 네 사람이 함께 있었음에 주목하자. 유진희, 김하구, 김철수가 조난을 목격했다.⑧ 이들은 모두 고려공산당 중앙간부였다. 이르쿠츠크에서 결성된 같은 이름의 공산당을 ‘이시파’라고 하는 것에 대비해, 이 공산당을 ‘상하이파’라고 했다. 상하이에서 결성됐고, 중앙위원회의 소재지가 상하이였기에 생긴 별칭이었다. 이 공산당은 십수 년간 조선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이 만든 사회주의 단체였다. 1919년 10월 통합 임시정부가 성립됐을 때, 임시정부를 지탱한 3대 정치세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단체였다. 그뿐 아니라, 집권여당이었다. 국무총리와 비서장(차관연석회의 의장)을 이 공산당이 담당했다.

김철수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불길한 조짐을 느꼈다. 언제부턴가 자기에게 미행자가 붙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상하이 시내에서 인력거를 타고 움직이면, 또 하나의 인력거가 자신을 뒤쫓고 있었다. 그는 권총을 갖고 다니기로 했다. 한번은 큰 용기도 냈다. 뒤따르는 자들이 있음을 감지한 그는, 자신을 태우고 달리던 인력거꾼을 불러세웠다. 뒤따르던 인력거도 섰다. 인력거에서 내린 김철수는 미행자들을 태운 인력거에 다가갔다.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표적이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확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당황해하는 서투른 미행자들에게 따졌다. “어떤 놈이 뭐라고 했던지, 네가 네 정신으로 독립운동을 해야지. 왜 내 뒤에 따라다니냐?”고 호통쳤다.⑨ 김철수는 미행자들도 독립운동에 헌신하려고 망명한 청년이라는 것을 알았다. 타인의 잘못된 지시에 좌우되지 말고 자신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서 바르게 행동하라고 요구했다. 김립의 비밀 처소가 노출된 것은 바로 미행 탓이었다. 김철수는 그렇게 판단했다. 김립이 몰래 만나던 몇 안 되는 동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부주의하게도 미행자가 뒤따르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암살자들이 노린 거액의 자금


김립이 자신의 눈앞에서 피살되는 참혹한 현장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본 동료들은 망연자실했다. 그 경황없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김철수는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단박에 파악했다. 그는 사후 처리를 다른 동료들에게 맡기고 은행으로 뛰어갔다. ‘상하이상업저축은행’이었다. 김립이 거액의 모스크바 자금을 예치해놓은 은행이었다. 암살자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 자금이었다. 인출을 저지해야만 했다. 누군가 그럴듯하게 통장, 도장, 기타 문서를 갖고 와서 예금 인출을 요구하더라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은행 쪽에 설득해야 했다. 그뿐인가. 예금을 인출할 유일한 사람이 죽었으므로, 속히 그 인출권을 이양받아야만 했다.

민사상 제3자에 지나지 않는 김철수가 그 과제를 해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통상적인 경우라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다고나 할까. 김철수는 양대 과제를 거뜬히 해결했다. 은행장이 일본 유학생 출신인 천광푸였기 때문이다. 뒷날 대만 재무부장관까지 지낸 중국 금융계의 이 신진 기예는 신뢰를 중시했다. 김철수는 일본 유학 시절에 참여한 동아시아 각국 유학생들의 비밀결사 ‘신아동맹단’의 덕을 입었다. 그때 같은 단원으로서 의가 상통하던 중국인 유학생들이 때마침 상하이기독청년회관에 재직했는데, 그들은 김철수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였고, 천광푸는 그 신원 보증을 기꺼이 인정했다. 덕분에 김철수는 암살자들의 예금 인출 기도를 저지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잔여 예금의 인출권을 자기 명의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김립의 동료들은 통분해 마지않았다. 어떻게 독립운동계의 동지가 다른 동지에게 총을 겨눌 수 있는가. 아무리 조직과 정견이 다르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부 공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는 터무니없는 거짓이었다. 저희에게만 총이 있는가? 공산당 내 열혈 청년들은 보복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철수의 회고에 따르면, 최동욱·최계립·이호반·한광우 등이 그렇게 주장했고 기꺼이 행동에 옮길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흉행을 교사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임시정부 안팎에 피바람이 불어닥칠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김철수를 비롯한 당 간부들이 적극 만류했다. 우리의 투쟁 대상은 일본 제국주의이지 결코 동족이 아니라고, 거듭된 동족상잔은 허용할 수 없다고 말이다.


치욕스런 범죄 혐의 풀어야 

 

김립의 억울한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들씌워진 치욕스러운 범죄자 혐의는 풀어야 했다. 김립 개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그랬고, 상하이파 공산당의 활동의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도 그러했다. 잔여 자금의 순조로운 집행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모스크바 자금의 성격이었다. 그 자금의 처분권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고려공산당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임시정부인가? 다른 문제는 모스크바 자금 집행의 공정성이었다. 김립은 모스크바 자금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과연 사적으로 횡령하거나 유용한 적이 있는가, 없는가?


참고 문헌

① 憲兵司令官, 「中제30호, 大韓國民協會員 渡來에 관한 件」1922.1.6., 1-3쪽, 『不逞團關係雜件-鮮人의 部-在上海地方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② 조선총독부 경무국, 「高警 제29574호, 上海僭稱假政府의 運命과 共産黨」 1922.1.6.

③ 재상해총영사 船津辰一郞, 「기밀제49호, 共産黨首領金立殺害ニ關スル件」 1922.2.14., 1-2쪽.

④ 국가보훈처, 『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 제5권, 1988, 667~669쪽; 같은 책, 제12권, 1996, 550쪽.

⑤ 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돌베개, 1997, 302쪽

⑥ 위의 책, 313쪽.

⑦ 「大韓民國臨時政府 佈告 第1號」 1922.1.26.

⑧ 김철수, 「본대로 드른대로 생각난대로 지어 만든대로」, 『遲耘金錣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1999, 17쪽.

⑨ 「구술자료 김소중 소장본」, 『遲耘 金錣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1999, 50쪽.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출처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5120.html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출신의 김립 암살 사건
 범인 오리무중에 암살 둘러싼 네 가지 설만 분분


김립 암살 사건을 전하는 국내 신문 <동아일보> 1922년 2월14일치 지면. 오른쪽 아래는 암살되기 1년 전에 찍은 김립의 사진. 임경석 제공


1922년 2월8일은 수요일이었다. 중국인들이 위안샤오제(元宵節)라고 하는 정월 대보름을 사흘 앞둔 때였다. 상하이 시내는 음력 새해를 맞아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음력 설날 춘제(春節)부터 거리를 떠들썩하게 한 폭죽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설날부터 대보름날까지 밤낮없이 폭죽을 터뜨리는 것은 새해를 맞이하는 중국인들의 오랜 풍습이었다.


정초에 울려퍼진 12발의 총성


북쪽 외곽 중국인 밀집 구역인 자베이 바오퉁루(寶通路)도 그랬다. 자동차 2대가 조심스레 마주 다닐 수 있는, 넓지 않은 차로였다. 양쪽으로 2∼3층짜리 중국인 가옥이 늘어서고, 맨 아래층에는 상점과 수공업 작업장이 들어찬 평범한 길이었다. 상하이 육로 교통의 관문인 베이잔(북역)에서 300m쯤 떨어진 이 거리에서도 폭죽 소리가 울리곤 했다. 마치 총소리 같았다.①

오후 1시였다. 점심때인지라 바오퉁루에는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네 남자가 둘씩 짝지어 걷고 있었다. 중국옷과 양복을 나눠 입은, 지식인층으로 보이는 30∼40대 남성들이었다. 스쳐 지나가면서 이들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사람이라면 아마 네 사람이 이방인임을 곧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네 사람은 거리를 오가는 중국인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어였다.

바오퉁루와 추장루(虬江路)가 만나는 지점이 저기 보였다. 앞선 두 사람은 굽은 길을 돌아 추장루로 들었다. 뒤의 두 사람이 길모퉁이를 돌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잠복해 있던 양복 입은 청년 4명이 튀어나왔다. 둘은 앞을 가로막고, 둘은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멀찌감치 뒤를 가로막았다. 앞길을 가로막은 두 청년이 양복에 손을 집어넣었다. 시커먼 쇠뭉치를 꺼내 들었다. 권총이었다.

“탕, 탕, 탕….”


연이어 권총 격발음이 울렸다. 정초에 거리에 울리는 폭죽 소리에 섞여 둔탁한 총성이 바오퉁루 일대에 울려퍼졌다. 습격자들의 목표는 한 사람이었다. 40대 중반 남자가 쓰러졌다. 앞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국옷을 입은 중년 신사였다.

총성이 이어졌다. 습격자들은 권총에 장전된 탄환을 다 쓸 때까지 계속 총을 쏘았다. 마지막 탄환까지 쏜 뒤에야 두 습격자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신속히 현장을 벗어났다. 멀찌감치 후방을 차단했던 다른 두 청년도 유유히 사라졌다.

바오퉁루 암살 사건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중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일간지로 꼽히는 <신보>(申報)는 사건 직후 두 차례 이 사건을 보도했다. 그에 따르면 피습자는 바오퉁루에 거주하는 한국인 양춘산(楊春山)이었다.② 양춘산은 ‘한국 독립당의 중요 분자’인데, 애초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살다가 중국 관할 구역으로 이사한 지 불과 3~4일밖에 안 된 상태였다. 44살로, 여러 해 ‘정치관계 일’을 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었다.

신문은 피격 전후의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습격자들은 권총으로 양춘산을 사살했는데 “총탄이 비 오듯 했다”고 한다.③ 총을 맞고 땅에 넘어진 희생자는 바로 숨이 끊겨 죽었다. 사건 현장 좌우에 중국인 상점이 줄지어 있었다. 상가의 중국인들은 사건을 직접 보고 크게 놀랐으나, 범인들이 모두 권총을 들고 있어 감히 앞에 나가 간섭하지 못했다. 그래서 습격자들은 범행을 마치고 활개치며 현장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보란 듯이 현장 떠난 습격자들


신문기자는 현장 주변 상점을 돌며 목격자들에게 보고 들은 바를 물었다. 그에 따르면 “흉수(兇手)는 2인인데, 둘 다 양복을 입었고 신체는 왜소”했다. 그들은 범행을 마친 뒤 ‘철로 방면’으로 뛰어 달아났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로’란 바오퉁루와 추장루가 만나는 교차로를 축으로 북쪽과 남서쪽으로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며 부설된, 상하이 베이잔 역과 우쑹 역을 잇는 철도선을 가리킨다. 교차로는 길이 다섯 갈래로 나뉘는 오거리였다. 습격자들이 도주하는 데 매우 적합했을 것이다. 범인 수를 두 사람이라고 증언한 것은 실제와는 다르지만 정직한 진술임이 틀림없다. 목격자들은 후방 감시를 맡은 다른 두 명의 존재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머잖아 경찰이 출동했다. 관할 경찰관서인 5구(區) 2분서(分署) 소속 순경들이 사건 현장에 왔다. 물론 흉행을 저지른 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검찰청에서도 관계자들이 나왔다. 검찰관과 검시원이 현장 검증을 지휘했다. 그 결과 주검 가까이서 탄피를 발견하고, 주검에서 12발의 총상을 확인했다. 희생자의 사망 원인은 총상으로 말미암은 것임이 명백했다.

중국 쪽 치안 관계자만이 아니었다. 인접한 공동조계 경무처에서도 이 사건에 관심을 보였다. 공동조계란 중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재상하이 외국 조차 구역을 이른다. 이 구역의 행정과 경찰권은 영국이 주도하고 미국과 일본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행사되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이튿날 공동조계 경무처 관리가 중국 검찰청에 찾아와 사건의 시말과 정형을 조사했다.

이 사건에 상하이 이외 지역의 중국 언론 기관도 관심을 보였다. 사건 발생 열흘 뒤인 1922년 2월18일, 저장성 항저우에서 발행되는 <항저우바오>(杭州報)에 관련 기사가 실렸다. ‘재상하이 한인 양춘산의 암살 사건을 논함’이라는 논평 기사였다.


범인은 일본인인가


김립 암살 사건을 전하는 중국 상하이 <독립신문>1922년 2월20일치 지면(왼쪽). 상하이 공동조계 경찰국이 쓴 김립 암살 사건 보고서.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기자는 ‘한국 독립운동에 분주하게 헌신하던 사람’이 살해된 점에 주목했다. 그는 죽은 이에게 깊은 동정의 뜻을 표했다. 독립을 위해 희생됐으니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터이지만,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먼저 몸이 죽었으니 그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라고 적었다. 기자는 피살자의 죽음을 가리켜 ‘순국’이자 ‘희생’이라고 표현했다. 이어서 기자는 암살자의 정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의 독립지사를 암살하는 일은 아마 ‘모국인’의 행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문맥상 일본을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논평자는 그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도 암살 따위를 저지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통박했다.④

이 암살 사건은 일본 식민 지배 아래 있는 한국 국내 언론에도 보도됐다. <동아일보>는 사건 발생 엿새 만에, ‘조선인 양춘산’이 상하이에서 참혹하게 피살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신문은 피살자가 일찍이 북간도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하다 근래에 상하이로 온 사람이라는 정보도 제공했다.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으며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썼다. 보도 기사에는 ‘범인은 일본인인가’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중국 신문의 보도를 보면 범인은 일본인인 듯하다”고 적었다.⑤

피살자는 누구인가? 일본 경찰은 이 암살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대일본제국’을 적대시하는 한국 독립운동계의 거물이 피살됐으니 그럴 법도 했다.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재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부가 나섰다. 공동조계 경무처에 연락해 수사 결과를 입수했고, 상하이 한인 사회의 내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첩보망을 가동했다.

총영사관 경찰부가 탐지한 바에 따르면, 피살자 양춘산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었다. 양춘산은 중국인으로 행세하기 위해 사용한 가명이었다. 그의 한국식 이름은 김립(金立)이었다.

김립은 1919년 11월 재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취임해, 임시정부의 재정과 인사를 비롯한 모든 업무를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거물급 인사였다. 국무원 비서장이란 국무총리 직속 집행기구의 책임자로서, 산하에 서무국을 비롯한 실무 부서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국무원 각부 차관회의를 주재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운영 전반을 좌우하는 영향력 있는 직책이었다. 그는 1920년 9월15일까지 그 직위에 있었다.⑥

피살자가 누군지에는 어떤 관찰자도 이견이 없었다. 일본 경찰뿐만 아니라 공동조계 경찰의 판단도 동일했다. 상하이 공동조계의 최고행정관리기구인 공부국(工部局) 산하 경찰국장이 일본총영사관 앞으로 발송한 1922년 2월16일치 수사 결과 통지문에도 같은 정보가 쓰여 있었다.⑦

게다가 재상하이 한국인 망명자들도 그처럼 판단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한국 독립운동자들의 기관지 <독립신문>을 보자. 사건 발생 12일이 지난 뒤였다. 이 신문에 ‘양춘산의 피살’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거기에는 “양춘산이라 칭하는 나이 40여 세 된 우리 사람 하나가 지난 8일에 어떤 청년 4인에게 피살되었는데, 일설에는 그 피살된 이가 곧 김립이라고도 하더라”⑧고 적혔다.


청년 망명객이 보낸 의문의 편지


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뒤였다. 우편물 검열을 하던 일본총영사관 경찰이 우편물 더미에서 의심스러운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재상하이 청년 망명객이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였다. 편지에는 재상하이 독립운동가 사회에 대한 어둡고도 우울한 풍경이 묘사돼 있었다. 바오퉁루 암살 사건의 내막을 언급한 것도 있었다. “이동휘의 심복인 김립이라면 알겠는가? 어제 대낮에 대도에서 혹자로부터 12발이나 맞고서 길 위에서 즉사했다”고 쓰여 있었다.⑨

이동휘는 김립과 같은 시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재임했던, 독립운동계의 최상급 지도자였다. 김립을 가리켜 그의 심복이라고 지목했음에 눈길이 간다. 편지에서는 사건이 있었던 날을 ‘어제’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2월9일에 쓰였음을 알겠다. 김립이 살해된 다음날 이미 재상하이 한국인 망명자들 사이에 그 소식이 신속히 퍼져나갔음을 짐작게 한다. 게다가 사건 정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알고 있음이 주목된다. 피살자가 누구라는 것, 대낮에 큰길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총상 12발을 입었다는 것, 현장에서 김립이 즉사했다는 것 등 사실을 놀랄 만치 적중시켰다.

편지 발신인이 누군지 일본 경찰 문서에는 거명돼 있지 않기에 그 신상은 알 수 없지만, 상하이 망명자 사회의 내막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조차 누가 왜 김립을 죽였는지 쓰지 않았다. 알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워낙 기밀 사항이라 편지에 차마 적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과연 누가 김립을 암살했는가? 왜 그처럼 처참하게 죽여야 했는가? 피살자 신원에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는 각종 기록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정보를 전한다.


처절한 죽음의 진실을 찾아서


네 가지 설이 분분했다. 어떤 이는 일본 정보기관이 김립의 암살을 사주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어떤 이는 한국인 망명자들을 의심했다. 한국인 사회주의 진영의 반대파가 그를 죽였거나, 혹은 한국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은 자객이 그를 암살했을 것으로 보았다. 어떤 이는 암살자들이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일파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과연 어느 주장이 실제에 부합하는가? 혹시 네 가지 풍설 외에 달리 범인이 있을 가능성은 없는가? 도대체 범인들은 왜 김립을 그처럼 처참하게 죽였는가? 이제 이 의문들의 해답을 찾아나서자. (다음 연재에 계속)


참고 문헌

① ‘구술자료 정진석 소장본’, <遲耘 金錣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222쪽, 1999년 1월

② ‘閘北寶通路發生暗殺案’, <申報> 1922년 2월9일치 14면

③ ‘閘北寶通路暗殺案 續聞’, <申報> 1922년 2월10일치 14면

④ 在杭州領事代理 副領事 淸野長太郞, ‘朝鮮人楊春山ノ暗殺事件ニ關スル新聞論評ノ件’, 1922년 2월18일

⑤ ‘조선인 양춘산, 상해에서 피살’, <동아일보> 1922년 2월14일치

⑥ ‘叙任及辭令’, <독립신문> 1920년 12월25일치

⑦ ‘상해 공동조계 경찰국이 재상해 일본총영사관 앞으로 보낸 통지문’(영문), 1922년 2월16일

⑧ ‘楊春山의 피살’, <독립신문> 1922년 2월20일치

⑨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高警第686號, 在外不逞鮮人ノ落膽’, 1922년 3월1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3·1운동 가담자 지원하며 독립운동 앞장선 오현주
 독립 전망 불투명해지자 친일 전향 해방 후 천수


47살 오현주, 1938년. 임경석 제공


오현주(吳玄洲)는 신여성이었다. 서구식 근대 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 그가 태어난 1892년 무렵은 여자가 교육받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오현주가 교육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오인묵이 기독교를 믿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호서·호남 지방의 기독교 선교 기지라는 평판이 있는 전북 군산 구암교회의 첫 조선인 장로였다.

오현주는 13살 때 처음 구암교회의 미국인 목사 부위렴(윌리엄 F. 불l)의 부인에게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교회에 열성으로 다니는 조선인 신도들의 여느 딸들과 함께였다. 친언니 오현관(吳玄觀)도 같이 있었다. 소녀들은 주로 성경과 산수를 배웠다. 기독교 소양과 함께 가감승제의 기본 셈법을 익힌 것이다.


3·1운동이 뒤흔들어놓은 삶


안동교회 임원들과 찍은 사진, 1942년. 앞줄 왼쪽 다섯 번째가 오현주다. 임경석 제공


오현주의 오빠, 오긍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임경석 제공


오현주 자매가 신교육을 한 계기 가운데는 오빠 덕도 있었을 것이다. 오빠 오긍선(吳兢善)은 오현주보다 14살이나 위였다. 미국인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서울 배재학당을 마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유학 중에 켄터키주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 사람이 의학박사 학위를 받기로는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오긍선은 1908년 귀국해 의료선교 활동을 했다. 그는 나중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감·교장직을 21년간이나 했다.

소녀 오현주의 학업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1906년 집안에 초빙된 한문 교사에게서 약 1년간 한문을 배웠다. 근대적 교육기관에 정식으로 발을 디딘 것은 17살 되던 1908년이었다. 서울 연지동에 있는 정신여학교 제2학년에 들어갔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이 학교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기반으로 중등 교육과정 수준의 학교였다. 오현주는 교육과정을 마치고 1910년 6월 졸업했다. 그때 학교 문을 나선 제4회 졸업생은 22명인데 그중에는 오현주 자매를 포함해 김마리아, 유각경, 유영준, 우봉운 등 뒷날 여성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즐비했다.①


교육 기간이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약 6년이었다. 덕분에 오현주는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교육자가 될 수 있었다. 졸업한 그해 가을부터 군산 멜본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4년, 경남 진주 광림여학교에서 1년6개월, 서울 경신소학교에서 1년간 교사로 있었다.②

오현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각지에서 교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교회 출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삶과 기독교는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었다. 결혼도 교회의 인연에 따랐다. YMCA 지도자이자 신간회 회장을 한 이상재가 중매를 섰다.

상대방은 2살 아래의 강낙원(姜樂遠)이었다. 두 사람은 1915년 11월 결혼식을 올렸다. 오현주가 24살 되던 해였다. 남편은 체육인이었다. 유도와 검도가 전공 분야였다. 결혼 이듬해에 유도 수련을 위해 일본 유도의 총본산인 고도칸에 유학하러 도쿄에 건너갈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강낙원은 이후 서울에 무도관(武道館)이라는 유도 수련장을 세웠다. 1930년에는 동아일보사 창간 10주년 기념 각 방면 공로자 표창식에서 ‘체육계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도 선정됐다.③

3·1운동이 오현주의 삶의 궤적을 뒤흔들어놓았다. 1919년 3월1일 시작된 만세시위운동이 전 조선을 풍미했다. 3월과 4월 두 달 동안은 혁명적 시기였다. 수백만 군중이 일본 식민통치에 맞서 집단행동을 했다. 희생자가 나왔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진압으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속출했다. 무차별 검거로 유치장과 감옥이 차고 넘쳤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장 맡아


수감된 투사들을 도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경제 사정이 곤란한 수감자는 사식도 차입받지 못하는 것을 본 여성들이 나섰다. 오현주 자매도 그랬다. 은밀히 돈을 모으고 수감자를 돕는 활동에 나섰다. 정신여학교 졸업생들이 활동의 구심체가 됐다. 4회 졸업생 오현주·오현관·이정숙이 참가했고, 6회 졸업생 장선희·이순길, 3~4회 후배인 이성완·김정숙 등이 가세했다. 전·현직 교사, 간호부 등 전문직 직업의 신여성들이었다. 활동 범위도 확대됐다. 격문과 지하신문를 은밀히 배포하고, 자금을 모아서 외국으로 망명한 혁명가들에게 전달했다. 관련자와 활동 범위가 늘자 책임과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혈성단애국부인회’라는 여성 비밀결사가 탄생했다. 나이가 많은 오현관이 회장을 맡고 재무, 통신원, 지방 파견원 등의 직책을 두었다.

1919년 6월 조직이 확장됐다. 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가진 두 비밀결사가 통합됐기 때문이다. 다른 단체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라는, 중국 상하이 망명자들과 긴밀히 연계한 것이었다. 새 통합 단체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회장은 오현주, 언니 오현관은 고문 직책을 맡았다. 단체의 덩치가 커졌고, 지부 조직까지 결성됐다.

그해 6월은 3·1운동의 한 전환점이었다. 6월28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 재편을 논의하던 파리강화회의가 타결됐다.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다. 조선의 국제적 지위 변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누구 눈에도 조선의 독립 가능성이 옅어졌음이 명백해졌다. 그뿐인가. 4월 중순 이후 만세시위운동이 잦아들었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탄압에 눌린 탓이기도 했지만, 독립의 희망이 스러졌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혜성이 긴 꼬리를 남기듯이 간헐적 시위가 이어졌지만, 다시 혁명적 정세가 되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애국부인회 활동도 점차 위축됐다. 특히 오현주 회장의 활동력이 두드러지게 줄었다. 조직에 위기가 찾아왔다.

새 원동력이 나타났다. 오현주의 정신여학교 졸업 동기인 김마리아가 형무소에서 나온 것이다. 김마리아는 쉼없이 활동을 재개했다. 만세시위운동의 퇴조에 실망한 구성원들을 독려해 조직을 강화했다. 10월19일이었다. 16명의 여성이 은밀히 모여 애국부인회를 재결성했다.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하는 새 집행부가 들어섰다. 전임 회장인 오현주는 망명자들과 대외 연락을 맡는 교제부장 직위에 이름을 남겨두었다.

남편 강낙원이 돌아왔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국외로 나갔다가 9개월 만에 귀국한 것이다. 상하이, 만주, 연해주를 둘러보고서 되돌아왔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국외로 나갔다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비밀 활동 정보 넘기는 조건


강낙원은 비관적인 미래를 토로했다. 독립이 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즉각 비밀결사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언젠가 경찰에게 발각되면 중형을 면치 못할 터였다. 비밀결사의 회장직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형을 면제받을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남편은 한 남성을 집에 들여 며칠 묵게 했다. 유근수(劉根洙)였다. 그는 남편의 유도 사범이자 체육계 선배라고 했다. 또 진퇴양난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줄 권한을 가진 자라고 했다.

앞얘기는 사실이었다. 유근수는 1902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한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이었다.④ 1907년 군대가 해산된 뒤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했다. 대한학회 회원록에 그의 이름이 실렸고, 학교 설립 의연금 모금에도 동참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체육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설도 신문에 기고했다. 체육은 국가의 부강과 개인의 행복을 실현하는 근원이므로, 이를 급무로 생각하고 확장시키자는 주장이었다.⑤ 실제 1909~12년 서울 YMCA회관 내부에 유도·검도부를 운영했다. 유근수와 강낙원은 유도·검도계의 가까운 선후배였다. 강낙원은 유도와 검도를 그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유근수가 경영하다 포기한 YMCA 유도·검도부도 인계해 1921~23년 경영했다.

뒷얘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유근수는 “이런 어려운 시대에 하나도 상치 않고 다 살릴 도리가 있으니 아무 염려 마시고 안심”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럴 권한이 그에게 있을 리 없었다. 오현주의 배신을 유도하려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길로 나아갔다. 일본 경찰 조직에 들어간 것이다. 1919년 현재 그는 대구경찰서 소속 형사였다.

오현주는 결국 남편과 형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자기 부부와 언니 오현관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애국부인회의 비밀 문건을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최고위급 수준의 보장이 필요했다. 유근수는 수완이 좋았다. 어떻게 공작했는지, 아카이케 아쓰시(당시 41) 경무국장 면담을 성사시켰다.

유근수는 자동차를 대기시켰다. 자동차는 서울 남산 밑 왜성대 깊은 곳에 있는 경무국장 관사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경무국장은 일본 도쿄제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 일본의 전형적인 고위 관료였다. 그는 세 사람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오현주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후부터 애국부인회의 정신을 버리고 방침을 달리하여 명칭도 개칭하여 사회에 다른 사업을 하겠는가?” 오현주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짧은 회견이었지만 동료들의 비밀 활동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자신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었다.⑥


일제 검거시 유일하게 석방


불기소 처분을 결정한 검찰관 이의식의 도장, 1949년. 임경석 제공


1919년 11월28일이었다. 애국부인회 구성원의 일제 검거가 개시됐다. 회장 김마리아를 필두로 전국에서 애국부인회 회원 70명이 체포됐다. 정신여학교 교사를 비롯해 관련 여성이 11명이었다. 16%를 차지했다. 피검된 사람의 53%는 세브란스병원이나 동대문부인병원 등의 관계자였다. 그들은 대개 간호부였다.⑦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국부인회와 깊은 관련이 있던 비밀결사 청년외교단 구성원도 10여 명 체포됐다.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서는 유근수가 소속된 경상북도 경찰부였다.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대구경찰서로 압송됐다. 그들은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피의자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중병에 시달렸다. 특히 김마리아 회장이 위중했다. 그는 코와 귀의 화농 증상이 심했고, 고문으로 머리를 심하게 맞아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불에 달군 인두로 여성 생식기에 ‘화침질’을 놓는 야만적인 고문을 겪어야 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결사부장이자 부산지부장인 백신영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심각한 위장 손상을 입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뼈에 가죽만 남은 것처럼 삐쩍 말랐다. 거의 빈사 상태였다. 서울지부장 이정숙은 발에 동상을 입었다. 진물이 흐르고 통증이 심해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애국부인회 사건의 피고인들은 조선총독부 재판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김마리아 회장과 황애시덕 총무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의경 서기, 이정숙 적십자부장, 장선희 재무부장, 김영순 서기는 징역 2년형, 유인경 대구지부장, 이혜경 원산지부장, 신의경 경기도지부장, 백신영 부산지부장은 각각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오현주 부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구경찰서로 연행됐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오현주는 단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낸 뒤 석방됐다. 남편 강낙원도 조사를 받았지만, 일주일 뒤 풀려났다. 처벌받지 않고 풀려나기로는 언니 오현관도 마찬가지였다. 아카이케 경무국장의 약속은 차질 없이 이행됐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혹여 진술이 필요할지 몰랐다. 대구에 5개월간 체류해야만 했다. 하지만 숙식에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대구경찰서 형사 유근수의 가옥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숙박비는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

돈도 받았다. 3천원의 기밀비를 받았다는 소문이 쫘악 돌았다. 신문기자 월급이 40~50원, 일용노동자의 일당이 1원쯤 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3억원에 해당했다. 오현주 부부는 1922년 가을 이사를 갔다. 연지동 43번지 작은 가옥을 처분하고, 원서동 196번지 크고 넓은 집을 사서 옮겼다. 옛집의 판매대금은 1200원이었고, 새집의 구매대금은 4200원이었다. 새집이 만족스러웠는지 부부는 수십 년간 그 집에서 눌러살았다.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불기소


오현주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휘문고보와 연희전문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있으면서 ‘중류’의 생활수준을 뒷받침했고, 아내는 아들딸 낳고서 집안을 잘 건사했다. 기독교 신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에 적을 두고서 성실한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 교회 집사, 권사에 차례로 선임됐다. 중등부 여학생반을 지도하고, 교회 창립 50주년 기념위원회 재정부원으로서 소임을 다했다. 대리석 현판도 자비로 제작해 기증했다.⑧

해방 뒤에도 순탄했다. 남편은 한민당 창당 발기인에 참여한 것을 필두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정치 진영에 깊숙이 가담했다. 1948년에는 전국 규모의 극우 단일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들에게도 딱 한 번 위기가 있었다.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을 때다. 1949년 3월16일 오현주 부부는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러나 길지 않았다. 오현주는 그해 5월4일 “남편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며, 고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개월20일간의 짧은 구금과 조사를 거친 뒤 석방됐다. 남편은 약간 더 고생했을 뿐이다. 강낙원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기소됐지만, 머잖아 보석 조치로 석방됐다. 마침내 그해 8월11일 공소시효가 만료돼 모든 반민족행위자가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잠들 수 있게 됐다. 오현주는 1989년 병사했다. 향년 98살의 천수를 누렸다.


참고 문헌

① 여교졸업, <황성신문> 1910년 6월19일

②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申亨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5∼17쪽, 1949년 3월28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③ <동아일보> 1930년 4월2일치

④ ‘劉根洙’, <大韓帝國官員履歷書> 25책, 641쪽, 1972년

⑤ 劉根洙, ‘論體育說’,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5일치

⑥ 특별검찰관 李義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8∼23쪽, 1949년 4월14일

⑦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3쪽, 2003년

⑧ <안동교회 90년사>, 안동교회 역사편찬위원회, 159쪽, 217쪽, 2001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882.html




한평생 독립에 헌신한 3·1운동의 투사 김마리아
 고문 후유증 시달리다 해방 1년 앞두고 목숨 거둬


애국부인회 임원. 번호순으로 김영순 서기, 황에스더 총무, 이혜경 부회장, 신의경 서기, 장선희 재무부장, 이정숙 적십자부장, 백신영 결사대장, 김마리아 회장, 유인경 대구지부장. 독립기념관 제공


김철수 노인의 지갑에 한 여인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는 지갑을 늘 가슴에 품고 다녔다. 지인들은 궁금해했다. 부인도 아닌데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어떤 사연이 있기에 지금도 품고 다니나. 혹시 젊어서 맺었던 연인이 아닌가.’

노인은 혁명가였다. 일제의 감옥에서 십수 년을 보낸 투사고, 비밀결사인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으며, 탄압으로 와해된 조직을 일으켜세운 지하운동가였고, 러시아 모스크바와 중국 상하이를 넘나들며 코민테른 외교를 좌우하던 풍운아였다. 남북이 분단될 즈음 운동 일선에서 은퇴해, 고향인 전북 부안의 야산에 토담집을 짓고 지냈다. 이따금 화가 허백련 등과 어울려 글씨를 쓰며 지내는 게 낙이라면 낙이었다.


김철수가 가슴에 품은 사진


노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몇몇 지인에게 사진에 대해 얘기했다. 사진 속 여인은 3·1운동 때 비밀결사 애국부인회 회장이던 김마리아였다. 김철수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상하이에서였다. 1923년 1∼6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 회의장에서 처음 만났다. 한국 독립운동의 진로를 좌우하는 막중한 의의를 지닌 이 회의에는 중국, 러시아, 미국에 있는 반일 단체의 대표원이 125명이나 모였다. 김철수는 고려공산당 상하이파 대표원 자격으로, 김마리아는 애국부인회 대표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김철수는 31살이었고, 김마리아는 그보다 한 살 많았다.

김마리아의 존재는 이채로웠다. 대표원 총수 중에서 3.2%에 지나지 않는 여성이기도 했지만, 그의 특이한 행동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는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를 못했다. 30분을 못 넘겼다. 의자에 앉아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가만히 견디지를 못했다. 빈자리를 찾아 옮겨 앉아야 했다. 때로는 자리에 앉았다가 서 있기를 반복했다.①

그러나 회의장의 누구도 그의 산만한 행동을 질책하지 않았다. 그가 왜 그렇게 됐는지 다들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질책은커녕 연민의 시선으로 그를 대했다.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생이었다. 서울에서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24살 되던 1915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도쿄조시가쿠인(東京女子學院) 학교를 다녔다. 본과(중등교육과정)에서 1년, 고등과(전문학교 과정)에서 3년간 수학했다. 김마리아는 유학생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도쿄에 건너간 이듬해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이 되었다. 그때 도쿄의 여자 유학생 수는 40여 명이었다. 조선인 유학생 350명의 약 10%에 지나지 않았지만, 최상층의 여성 지식인 사회였기에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컸다. 김마리아 회장은 기관지 <여자계> 발간에 힘썼다. 이 잡지는 남녀 학생을 망라한 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 <학지광>과 나란히 유학생 사회의 여론을 이끌었다.

김마리아는 3·1운동의 투사였다. 1919년 2·8 도쿄 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했고, 그 선언문을 몰래 국내로 들여왔다. 3·1운동의 소용돌이에서 여학생 조직화에 노력했다. 도쿄여자유학생 그룹과 이화학당 그룹을 묶고, 서울 시내 각 여학교 대표자들의 연합 기구를 조직하려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비밀이 탄로나 체포됐다. 3월6일 체포된 그는 3·1운동 여성 수감자들이 일반적으로 겪은 폭력과 수모를 견뎌야 했다.

체포된 여성들이 받았던 학대에 대해서는 여러 증언이 있다. 무차별 구타가 기본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포악한 태도로 나를 의자로부터 넘어뜨렸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다시 달려든 그들은 얼굴과 손다리는 물론이고 몸까지 사정없이 구타하였다.” 성적 폭력도 일어났다. “그들은 나의 옷을 모두 벗기고 억센 밧줄로 결박하여 천장에 매달았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나에게 무수하게 내리쳐지는 참대 막대기의 뭇매에 나는 의식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거리낌 없는 모욕도 가해졌다. “우리는 그 추운 밤에 발가벗기어 일본인 남자의 앞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어떤 형사부의 순사가 나더러 ‘고양이 모양으로 네발로 기어서 저 거울 앞을 지나가거라, 허 네 모양이 예쁘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일제 모진 고문에 고질병 얻어


김마리아는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얼마나 폭행을 당했던지 신경이 아주 말할 수 없이 쇠약해졌다. 귀와 코에 고름이 들어차는 후유증도 앓았다.② 유양돌기염과 상악골 축농증이라는 고질병에 걸린 것이다. 이 질병은 마리아의 이후 삶을 줄곧 괴롭혔다.

그는 수감 4개월 뒤인 7월24일, 체포된 여성 46명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 처분을 받고 석방됐다. 김마리아는 출옥하자마자 활동을 재개했다. 그즈음 3·1운동의 혁명적 열기가 점차 식어가고 있었다. 6월28일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강화회의가 조선 독립에 대한 아무런 희망적 조치 없이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만세시위와 유인물 살포, 운동자금 모금과 수감자 지원에 종사하던 비밀단체들이 기력을 잃어갔다. 여성단체도 그랬다. 만세시위운동이 고조됐을 때 정신여학교 졸업 동기인 오현주를 중심으로 결성된 애국부인회가 침체에 빠져들고 있었다.

김마리아는 그 단체의 재조직에 나섰다. 10월19일 여성 16명이 은밀히 모였다. 정신여학교 부교장이자 미국인 선교사 천미례의 사택 2층에서였다. 김마리아는 선교사의 호의로 그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날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하는 애국부인회가 새로이 출범했다. 그를 필두로 하는 정신여학교 졸업생 그룹이 주가 되고, 황에스더 등 몇몇 이화학당 졸업생들이 가세했다. 전자는 기독교 장로교 계열이고, 후자는 감리교 계열이다.

애국부인회는 규모가 큰 비밀결사였다. 각 도에 하나씩 지부를 설립하기로 했고, 적십자부와 결사대 같은 특별 부서를 설치했다. 특별 부서를 둔 까닭은 만세시위운동이 종식된 뒤 무장투쟁으로 전환하려는 독립운동의 일반적인 흐름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김마리아의 안목이 정세 변화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직을 새로 추스른 지 불과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그해 11월28일 일제 검거가 시작됐다. 경북 경찰부가 주무기관이었다. 며칠 만에 서울과 원산, 북간도, 제주 등지에서 52명의 관련자가 체포됐다. 모두 여성이었다. 다들 대구경찰서로 압송됐다. 전격적인 체포가 이뤄진 까닭이 있었다. 밀고가 있었다. 내부 구성원 가운데 배신자가 있었다. 애국부인회 취지서와 규칙 등 비밀서류가 발각됐다. 지하실 땅속에 묻어둔 등사판과 회원 명부도 드러났다. 공문서 작성에 사용한 여러 도장도 빼앗겼다.

체포된 사람들은 폭력에 노출됐다. 특히 회장 김마리아는 저들의 표적이 됐다. 심문관들은 그의 두 무릎 사이에 굵은 장작개비를 넣고, 수갑을 채운 두 팔 사이에 쪼갠 대나무를 끼운 채 빨래 짜듯이 비틀었다. 코에 고무호스를 끼워 물을 집어넣었고, 굵은 나무토막을 끼고 앉은 가녀린 여성을 짓밟았다.③


병보석 상태서 홀연 망명길 올라


김마리아의 탈출을 전하는 <동아일보> 1921년 8월5일치 3면. <동아일보> 자료


김마리아는 차마 입으로 옮기기 어려운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 심문관들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그를 발가벗긴 채 손과 발을 묶었다. 곁엔 타오르는 화로가 있었고, 인두와 쇠꼬챙이가 그 속에서 벌겋게 타올랐다. 짐승 같은 자들은 끝내 그 도구를 사용하고 말았다. 화롯불에 달궈진 쇠꼬챙이로 여성 생식기에 화침질을 놓았다. “그렇게 하고서 문지르면 그곳이 벗겨질 것 아니여?” 진실을 전하는 김철수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김마리아는 공포와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주 그냥 머리를 때리고 터지고 소리를 지르고 그냥 욕을 하구” 그러다가 결국 혼절했다.④

김마리아는 육신과 정신이 파괴됐다. 정신이 혼미해 말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 곡기라고는 입에 대지도 못했다. 뼈만 남은 몸에 얼굴은 퉁퉁 부었다. 면회소에 나올 때는 제 발로 걷지를 못해 간수가 부축했다. 마치 송장을 떠메어 나오는 듯했다. 면회객은 그 모습을 보고서 끓어오르는 슬픔을 참기 어려웠다. 더운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아무래도 마리아가 살아나지 못할 것 같다고, 면회 소감을 얘기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노력이 주효했을까. 1920년 5월22일 대구지방법원은 김마리아의 병보석을 허가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주거지를 대구 거주 블레어 선교사의 사택과 주변 건물로 제한하고, 의료진 외에 어떤 조선인도 면회해서는 안 되었다. 치료가 급했다.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병증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중 가장 위급한 것은 귀와 코에 들어찬 화농이었다. 1921년 6월20일 고등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 김마리아는 세 차례 수술을 받았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두 번, 한양병원에서 한 번 수술했다. 고열과 신경쇠약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콧속과 양미간, 귓속에 가득 찬 고름을 긁어내는 수술이었다. 완치되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고름이 다시 고였다.

최종심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된 지 9일째 되던 날이었다. 김마리아는 병보석 때 지켜야 할 규범을 깨뜨렸다. 1921년 6월29일, 정양을 위해 머물던 서울 성북동의 한적한 농가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잠자던 이부자리만 남겨둔 채였다. 탈출이었다. 김마리아는 망명길에 올랐다.

병고에 신음하는 젊은 여성이, 경찰과 사법 당국의 감시를 받는 상태에서 어떻게 국외로 탈출할 수 있었을까? 협력자들이 있었다. 선교사 매큔은 김마리아의 망명 계획을 지지하고 재정을 지원했다. 망명과 정착 비용으로 4천원을 제공했다. 신문기자 월급이 40∼50원, 일용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원 정도 하던 때였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4억원쯤 하는 큰돈이었다.

교통편을 주선하고 길을 안내해준 이도 있었다. 임시정부 교통부 소속 요원으로 상하이와 국내를 넘나들며 비밀 임무를 하던 윤응념(28)이었다. 그는 김마리아뿐만 아니라 상하이 망명객 가족들의 밀항을 진두에서 지휘했다. 상하이 거류민단장 도인권의 부인과 두 아들, 흥사단 원동위원부 김붕준의 아내와 세 자녀(아들 1명, 딸 2명)도 밀항선을 탔다. 일행이 산둥반도 웨이하이 항구에 도착한 때는 7월21일이었다. 서해 넓은 바다에서 풍랑과 뱃멀미에 시달린 지 17일 만이었다.⑤

김마리아의 탈출 소식은 널리 알려졌다. 서울 안 신문 지면을 두루 장식했다. 국내의 친지와 동료들은 그의 망명을 기뻐했다. 건강과 앞날의 행운을 빌었다. 상하이의 망명자 사회에서도 김마리아의 도래를 환영했다. 상하이 거류민들은 김마리아의 건강이 회복되기 기다려 1921년 11월25일 환영회를 열었다. 그는 3·1운동기 여성의 투쟁과 수난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간주됐다.


잇따른 혼담, 찾지 못한 반려자 


(왼쪽부터)1927년 파크대학 졸업 때 김마리아./ 김마리아의 1932년 미국 재입국증 사진./ 1922년 중국 상하이에서 30살의 김철수./ 노년의 김철수. 박용옥 제공/ 박용옥 제공/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상하이 조선 사람들은 김마리아를 찬탄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따스하게 대했다. 특히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그가 홀로 지내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혼담이 오갔다. 혼인 상대로 거론되는 이는 일본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장진영이었다. 나이 지긋한 미혼남이었다.

중매에 나선 사람은 흥사단 지도자 안창호와 고려공산당 대표원 김철수였다. 안창호는 김마리아의 뜻을 확인하고, 김철수는 시베리아에서 함께 지낸 적 있는 장진영의 의사를 확인했다. 남자는 쾌히 승낙했다. 김마리아가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그랬다고 한다. 장진영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시집가면 병이 나을 것 같아” 승낙했던 것이라고 김철수는 해석했다. 하지만 혼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김마리아가 싫다고 거절했다. 안창호는 거듭 권했다. 제발 시집가라고, 그는 좋은 사람이라고 강력히 권유했다. 김마리아는 요지부동이었다. 첫 번째 중매는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째 혼담 상대는 김철수였다. 김마리아와 숙소를 같이 쓰던 양한라가 나섰다. 제주도 출신의 흥사단 단원이었다. 그의 연인이자 2·8독립선언운동에 참가했던 재일 유학생 정광호(29)도 거들었다. 양한라와 정광호가 중매를 섰다. 두 사람은 김마리아의 의중을 먼저 확인했다. 김마리아는 수줍게 승낙했다고 한다.

김철수의 뜻에 모든 것이 달렸다. 그는 오래 생각한 끝에 결심했다. “그 사람은 애국부인회 회장이다. 그런데 나한테 시집오면 첩이 된다. 아! 나에겐 아내가 있다. 내가 승낙하면 두 여성에게 죄를 짓는 일이 된다.” 그래서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양한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김마리아의 뜻을 다시 전했다. 혁명운동을 하는 동안 같이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만일 남자가 운동을 포기하고 조선 내지에 가서 편히 살려고 한다면 그때 갈라서도 좋은 일이다. 만일 독립이 된다면 그때는 내지에 있는 첫부인과 결합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의사였다.

양한라에게서 김마리아의 의지를 전해들은 김철수는 고민했다. 착잡했다. 자기도 싫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하면 어떻게 될까? 둘이 운동 일선에서 벗어나 어딘가 가서 ‘교원질’이나 하며 먹고살게 되지 않을까. “아! 안 될 말이다.” 이미 결혼한 여성도 떼내버리고 국외 망명과 지하운동으로 돌아다니는데 그래서야 되겠는가. 김철수는 다시 결심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욕을 얻어먹을 것이다. 김마리아도 첩 신분이 되니, 그를 모욕하는 일이다. 김마리아는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 호칭을 받는 사람이 아닌가.⑥ 그럴 수는 없다고 확고히 결정했다.

김마리아는 국민대표회 회기 중에 한때 앓았다. 김철수와 정광호는 문병을 갔다. 혼사 거절 뜻을 명백히 전한 뒤에 있었던 일이다. 머리를 풀고 드러누웠는데 김마리아의 얼굴이 창백했다. 병상에서 말하고 움직이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대단히 불쌍했다. 80대 노인이 된 뒤에도 김철수는 그 모습을 잊지 못했다. “그때부터 그 머리 푼 것이 지금도 눈에가 환해. 불쌍해.”⑦


“아이고! 1년만 더 살았더라면…”

김철수는 뒷날 김마리아의 소식을 들었다. 미국 유학을 떠난 그는 9년간 파크대학, 시카고대학원, 컬럼비아대학 교육대학원, 뉴욕신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1932년 귀국했고, 종교활동에만 종사한다는 입국 조건에 묶여서, 원산의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 교수, 장로교여전회 회장 등의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다 해방 1년 전에 원산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아이고! 1년만 더 살았으면 해방되는 것을 보았을 텐데.” 김철수는 책에 실린 김마리아의 사진을 사진사에게 옮겨 찍게 했다. 그러고는 그것을 평생 품에 지녔다. 영혼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늘 잊지 않고 가지고 다녔다 한다.


참고 문헌

① ‘구술자료 김소중 소장본’, <遲耘 金?洙> 한국정신문화연구

원 현대사연구소 편, 105쪽, 1999

② ‘병상에 누운 김마리아’(5), <동아일보> 1920년 6월6일치

③ 金永三, <김마리아>, 태극출판사, 중판, 236쪽, 1978

④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앞의 책, 104쪽

⑤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

사, 274∼286쪽, 2003

⑥ ‘김마리아양의 근황’, <신한민보>, 1932년 11월3일

⑦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앞의 책, 108쪽


출처 ;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4786.html 





조선공산당 최고위급 지도자로 손꼽히던 김단야
 스탈린 대숙청기 ‘일본 밀정’ 혐의 앞세워 총살돼



32살 김단야(1932년 소련 모스크바 추정). 임경석 제공


해방이 되자 혁명가들이 되돌아왔다. 국외로 망명한 항일운동가들이 속속 귀환했다. 중국 충칭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돌아왔고, 옌안에서 독립동맹 인사들이 귀국했다. 미국에서 살던 이승만도,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간부들도 입국했다. 국외뿐이랴. 국내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비합법 지하 운동자들도 얼굴을 드러냈다. 감옥에 갇힌 치안유지법 위반자들도 형무소 문을 열고 나왔다. 징병과 징용을 피해 깊은 산속에 은거하던 도망자들도 산에서 내려왔다.


“혁명 이끌 사회주의자 육성”


김단야가 한국학부장으로 근무하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건물. 임경석 제공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망명지에서 생을 마친 사람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죽었다는 풍문도 들리지 않았는데 되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모스크바에 망명한 혁명가들이었다. 소련은 국제관계상 오랫동안 일본과 적대적 위치에 있었고, 세계혁명을 이끄는 코민테른이 소재한 곳이었다. 그뿐인가. 수십만 고려사람의 이주민 사회가 형성된 땅이었다. 식민지 시대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모스크바로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많은 혁명가들이 소련으로 망명했다.

모스크바에 망명한 그 많은 혁명가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이역만리에서 행여 병이라도 얻어 세상을 떴기 때문일까? 아니야, 그곳에서 자리를 잡아 잘 살고 있기 때문이겠지. 이렇게들 짐작했다.

김단야(金丹冶)가 그 좋은 보기가 된다. 박헌영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최고위급 지도자로 손꼽히던 그였다. 해방 이듬해 아들 김단야의 소식을 찾아 서울에 올라온 김종원(70) 노인의 동향이 신문에 보도됐다. 소련에 망명한 아들이 해방되고 나서도 귀국하지 않으므로,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상경했던 것이다. “아들 생각이 나서 서울에 와보니, 자세한 것은 모르고 모스크바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만 들었습니다.” 늙은 아버지는 기자에게 이렇게 답했다.① 아들의 소식을 끝내 확인할 수 없었던 노인은 하릴없이 고향 경북 김천으로 낙향해야 했다.


김단야가 위기감을 느낀 것은 아마 1936년 8월부터였을 것이다. 그때 그는 직장을 잃었다. 실직이기보다 책임 있는 직무에서 배제됐다는 의미에서 숙청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그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한국학부장 직위에서 면직됐다. 1934년 2월 이래 2년6개월 동안 한국학부장으로 있으면서 한국혁명을 이끌 사회주의자를 육성해오던 차였다. 김단야는 이 직무를 중히 여겼다. 학부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전력을 다하여 간부 양성을 위해 일했노라”고 자부했다.②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한국 사회주의운동과 깊은 인연이 있는 기관이었다. 그것은 1921년 4월 식민지 민족들의 해방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코민테른이 설립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설립 초창기부터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이 이 대학과 관계를 맺었다. 최근 한 연구 성과에 따르면, 1924~25년 이 대학의 한국학부에 재학 중인 사람은 무려 120명이나 됐다.③ 이 대학은 식민지 한국의 사회주의 청년들이 몹시 선망하던 교육기관이었다. 통칭 ‘모스크바공산대학’이라 하던 학교였다. 교육 연한은 2년제였다. 러시아어 학습을 위한 예비학부 재학 기간 1년을 포함하면 좀더 오랫동안 학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단야가 학부장이던 1930년대 중반에는 학부 규모가 줄어들었다. 예컨대 1933학년도에는 한국학부 내에 3개 학급이 있었는데, 총 학생 수는 15명이었다.④ 한창 성황을 보이던 1920년대 전반기에 비하면 16%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혁명에 대한 코민테른의 관심과 지원이 예전만 같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대숙청기, 밀정으로 의심 받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괜찮았다. 상황이 점점 나빠졌다. 한국혁명의 중요성에 대한 고려가 코민테른에 과연 있는지 의심케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한국학부가 철폐된 것이다. 김단야가 학부장직에서 물러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1936년 8월에 한국학부가 폐지됨에 따라 나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떠났다”라고, 김단야는 자술서에 썼다.

코민테른 당국은 왜 한국학부를 폐지했을까? 해당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탈린 대숙청이 바야흐로 막을 올리던 때였다. 숙청은 소련의 당과 군대와 정부기관의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인사들을 겨냥했다. 이 시기에 숙청이란 말은 결함 있는 자의 면직과 새 인물의 등용을 뜻하는 통상적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인민의 적’으로 지목된 혐의자가 체포, 고문, 자백, 재판, 처형을 차례로 겪는 참혹하고 유혈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숙청의 절정기인 1937~38년 두 해 동안 내무인민위원부 비밀경찰에 체포된 사람은 경찰 기록에 의하면 158만 명에 이르렀다. 그중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134만 명, 사형당해 목숨을 잃은 이는 68만2천 명이었다.⑤ 일단 체포되면 절반 가까이 사형을 당하는 실정이었다. 무서운 공포의 시절이었다.

숙청의 칼날은 러시아 국민만이 아니라 러시아에 체재하는 코민테른과 외국 공산당 요인들에게도 향했다. 벨러 쿤을 비롯한 헝가리 공산당원, 렌스키 서기장을 필두로 하는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불가리아 공산당, 독일 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 그 외 외국 공산당의 지도부와 일반 당원들이 희생됐다. 독일의 예를 들어보자. 1938년 4월 현재 소련에 거주하는 독일 공산당원 842명이 내무인민위원부 비밀경찰에 체포됐다. 이 수는 실제보다 과소 집계된 것으로 평가된다.

소련에 체류 중인 한국인 사회주의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스탈린 대숙청에 휘말려들지 모르는 위기감 속에 지내야 했다. 1936년 8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가 폐지된 것은 이런 정황을 반영한 사건이었다. 한국인 혁명가들이 예외 없이 ‘인민의 적’일지 모른다는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에 노출됐음을 뜻했다.

김단야는 해직 뒤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첫째, 일본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동료들에게서 사적으로 그런 의심을 받더라도 보통 일이 아닐진대, 생사여탈권을 쥔 소련 국가기관으로부터 혐의를 받았으니 여간 위태로운 게 아니었다. 객관적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의심스러워 보였을 뿐이다. 1929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 활동할 때 다른 동지들은 모두 체포됐는데, 어찌하여 너는 무사히 국외로 탈출할 수 있었는가? 가까운 네 동료 김한이 이미 밀정임이 판명돼 1934년에 처형됐는데, 너는 과연 그의 정체를 몰랐는가? 김단야는 이러한 의심을 받았다.


자기를 변호하는 필사적인 노력


김단야의 한글 필적(해명서 첫 장, 1937년). 임경석 제공


또 하나는 일상생활의 곤궁함이었다. 그는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노보페레베덴스카야 거리 8번지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 아내 주세죽과 어린 두 아이가 있었다. ‘비딸리’라는 이름의 3살 아들과 이제 갓 낳은 딸이었다. 이들이 거주하는 주택의 소유권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있었다. 교직원에게 배분되는 관사였던 것이다. 어쩌랴. 김단야는 해직돼 그 주택도 비워줘야 했다. 해직 뒤 7개월 동안 두 차례나 가옥 양도 명령서가 날아왔다. 대학 행정 당국이 보낸 공문이었다. 더 이상 양도를 지체하면 재판에 회부하겠다는 냉정한 내용이 담겼다. 오갈 데도 없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그뿐이랴. 여권 문제도 있었다. 아내의 여권 기한이 만료돼 갱신을 신청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갱신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여권 발급 여부를 내무인민위원부가 심의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주소지 행정 기관도 인정사정없이 채근했다. 거주 기한을 넘겼다는 이유로 벌금을 내야 한다는 통보를 보내왔다.

많은 문제가 뒤엉켜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하나의 문제로 귀결됐다. 김단야는 만사가 “나 자신에 대한 근본 문제의 해결”에 달렸다고 이해했다. “내가 믿을 만한 혁명자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였다. 그는 자신이 안고 있는 혐의로부터 속히 벗어나야 했다.⑥

김단야는 자기를 변호하는 필사적인 노력에 착수했다. 자신의 결백함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논리를 제공하기 위해 장문의 글쓰기 작업에 임했다. 1937년 2∼3월 여러 편의 글을 썼다. 혁명운동 경력을 소개하는 ‘이력서’, 밀정 혐의가 근거 없음을 보여주는 상세한 ‘해명서’, 심문자가 제기한 자잘한 의문들에 대한 답변을 적은 글이었다.

그가 힘을 기울인 논점은 밀정 혐의에 대한 항변이었다. 1929년 7월부터 12월까지 국내에 잠입해 어떻게 비밀 활동을 했는지 상세히 묘사했다. 이때 김단야는 “흥분 중에 글을 썼다”고 한다. 아마 다음 대목일 것이다. 그는 조선의 경험 많은 공산주의자 가운데 1925년 이래 한 번도 체포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남들이 다 잡혀가는 상하이에서도 무사했고, 한국 내에 잠입해서도 임무를 마친 뒤 무사히 벗어나기를 두 차례나 거듭했노라고 말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분노를 터트렸다. 이게 과연 허물이냐고 말이다. 붙잡히지 않으려고 기민하게 행동하는 것이 의심받아야 하는 근거가 되느냐고 항변했다.

밀정 김한이 왜 자신을 경찰에게 밀고하지 않았는가? 심문관들이 집요하게 되묻는 질문이었다. 김단야는 답했다. 김한을 의심하지 않았노라고. 김한은 다년간 투옥 경력이 있는데다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개척자였으므로, “일반이 혁명자로 인증하는 자요, 나도 그를 믿었다”고 말했다. 김한이 밀정임을 인정하더라도, 그의 행동 동기를 자신은 알 수 없다고 썼다. 그것은 김한 자신이나 일본 경찰이 알 일이지, 내가 추측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는 모른다고 답했다.


숨 가쁜, 그러나 실패한 구명운동


김단야는 요청했다. 자신을 혁명 일선으로 파견해달라고. 조선에 가서 조선공산당 재건 사업과 혁명운동에 종사하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지 전선에 가서 일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표현했다. 혁명가의 진실성을 입증할 유일한 길이므로 부디 허용해달라고 청했다.

위기에 처한 김단야를 도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혁명을 관장하는 코민테른 동방부의 임직원들이 나섰다. 그의 오랜 동료들이었다. 김단야가 1937년 2~3월 장문의 이력서와 해명서 등을 집필한 것도 사실은 이 동료들의 제안에 따른 행동이었다.

동방부 임원 벨로프가 1937년 3월2일 구명의 손길을 뻗었다. 김단야가 ‘인민의 적’ 혐의를 받고서 취조를 받는 중이었다. 내무인민위원부 간부 폴랴체크에게 공문 제11013호를 보냈다. 조선공산당의 당면 사업을 위해 김단야를 현지 파견 대표로 선임했으니 그 집행 여부를 회신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힌 김단야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해 5월4일에도 구명의 움직임이 있었다. 코민테른 동방부의 또 다른 임원인 밀러와 최성우 두 사람이 연명으로 같은 요구를 했다. 이번에는 코민테른 간부국 알리하노프에게 보내는 공문이었다. 김단야를 조선공산당 방면의 실제 사업에 활용하려는데, 그의 정치적 경력에서 한 부분이 아직 해명되지 않았으므로 이 문제의 결론을 되도록 속히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6월7일에도 또 한 번 움직임이 있었다. 동방부 임원 벨로프가 다시 내무인민위원부 폴랴체크에게 회신을 독촉했다. 3월2일치 공문의 회신을 속히 부탁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 동방부 임원들의 거듭된 요청은 위기에 처한 김단야의 운명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한국혁명이 중요하다면 혁명운동을 진작할 만한 작은 가능성이라도 존중받지 않을까? 과연 운명의 추는 어디로 움직일 것인가?

마침내 8월2일 내무인민위원부가 회신을 보내왔다. 김단야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운명의 여신은 김단야에게 등을 돌렸다. 1937년 상반기 코민테른 동방부에 남아 있던 옛 동료들이 시도한 숨 가쁜 구명운동은 8월에 가서 결판이 났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벼랑 끝에 선 김단야의 등을 떠미는 동료도 있었다. 언론인 출신의 저명한 사회주의자이자 모스크바 망명객인 이성태는 그해 9월28일치로 코민테른 비서부 앞으로 의견서를 냈다. 의견서에 따르면, 김단야는 화요파 위주의 종파주의자이고 가까운 동료들 중에는 밀정으로 전락한 자가 많았다. 김찬, 조봉암, 박헌영, 김한, 고명자 등이 지목됐다. 이 의견서에는 김단야는 검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체포되지 않은 극소수에 속했고, 두세 차례 체포됐을 때도 다른 동료들보다 현저히 낮은 형량을 받고 풀려났다고 쓰여 있었다.⑦


선고한 날 바로 총살형 집행


김단야는 1937년 11월5일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의 손에 체포됐다. ‘반혁명 스파이, 테러단체 결성’ 혐의였다. 스탈린 대숙청의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고문, 자백, 재판, 처형의 길을 걸었다. 체포 3개월 만에 이 모든 과정이 종료됐다. 1938년 2월1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은 러시아 형법 제58조 1항, 동 2항, 8항, 9항, 11항 위반죄로 김단야에게 재산 몰수와 총살형을 선고했다. 형 집행은 신속히 이뤄졌다. 선고한 바로 그날 총살형이 집행됐다. 매장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⑧



① ‘아들 소식 들으러 서울까지?’, <조선인민보> 1946년 5월2일

②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서전), с.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1937년 2월7일

③ 김국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부 연구’, 성균관대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1쪽, 2013년

④ отчетный доклад 5-й секции(한국학부 보고서), с.1-3, РГАСПИ ф.532 оп.1 д.427

⑤ 김남섭, ‘스딸린 대 테러의 성격’, <러시아연구> 15-2, 49쪽, 2005년

⑥ 김단야, ‘나의 제출한 записка에 대한 보충 건’,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37-39, 1937년 3월16일

⑦ Бывш.члена КП Кореи Ким-Чун-Сен /Лп-Сен-Тай/ (전 조선공산당원 김춘성 곧 이성태), Заявление: В Секретную Часть ИККИ (의견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부 앞),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9-12, 1937년 9월28일

⑧ Ким Данъ Я(김단야), https://ru.wikipedia.org/wiki/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730.html 





조선인 사회주의 비밀결사 운동 핵심 지도부 김한
 스탈린 대숙청 시절 ‘일본 밀정’ 혐의 들씌워 처형



1920년 수감 중인 김한의 앞모습(왼쪽)과 옆모습. 임경석 제공


김한(金翰)이 출옥했다. 일본 도쿄 도요타마형무소에서 형기를 모두 마치고 옥문을 나섰다. 1927년 4월24일이었다.① 41살, 장년기에 접어드는 연령이었다. 이 형무소는 도쿄 서북쪽 교외에 있는 신설 형무소였다. 주로 사상범을 가두는 것으로 유명했다. 체포된 때가 1923년 1월28일이었고 이후 줄곧 갇혀 있었으므로 재감 기간은 꼬박 4년3개월이었다.


4년3개월 만에 가족과 해후


일본 도쿄 도요타마형무소 철거 전 모습, 도요타마형무소 정문. 임경석 제공


철창에서 되돌아온 김한은 동료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사회주의 비밀결사 운동을 개시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엄혹한 경찰의 취조 속에서도 조직의 비밀을 단 하나도 누설하지 않은 투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의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일명 중립당)의 창립 멤버이자 지도부 성원이었다. 하지만 경찰 기록과 공판 문서에는 그에 관한 단 하나의 정보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들씌워진 혐의를 폭탄 문제 하나로 귀일시키는 데 성공했다. 국외 반일 단체 의열단과 손잡고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려 했으며, 폭탄을 보관하고 있다가 김상옥이나 박열처럼 필요한 혁명가에게 분배하는 역할을 했다는 게 개요였다. 그 덕분에 중립당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으며, 이후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을 이끄는 중심 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김한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노모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살고 있는, 서울 마포 공덕리의 조그만 집이었다. 가난한 살림이었다. 아내가 10리 떨어진 용산의 대륙고무공장에 일을 나가서 한 달에 10여원 받아오는 수입으로 버티는 살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난다.” 뒷날 노년기에 접어든 둘째딸 김례정은 12살 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이분이 정말 내 아버지가 맞나 하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두 팔 벌린 아버지 품안에 안겼다.”② 다른 집과 달리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야속한 아버지, 한편으로는 천하사를 도모하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김한의 운신은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 대상이 됐다. 뭔가 의심스러운 사건이 터졌다 하면 으레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연례행사라 해도 좋을 만치 시달림을 받았다. 예컨대 출감한 그해 가을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1927년 10월21일 용산경찰서 고등계 형사대에게 가택수색을 당했다. 딱히 구체적인 혐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덕리 경찰 주재소 인근에서 폭탄과 유사한 폭발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사들은 두 차례 온 집 안을 샅샅이 뒤졌고, 여러 문서와 도서를 압수해갔다.


이듬해 가을에는 좀더 심각했다. 경기도경찰부 소속 형사대가 출동했다. 1928년 10월19일 새벽에 그는 긴급체포됐다. 잠자던 중이었다. 여러 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서 출동한 경관들이 그를 붙잡아갔다. 비밀결사 조직 혐의였다. 서울, 경기, 황해, 충북 등에서 십수 명의 용의자들이 체포됐다. 경찰은 기대감을 표명했다. 뭔가 거창한 불온단체를 적발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검거의 발단은 일본 경찰이 관리하는 ‘밀정배들의 밀고’였다고 한다. 그러나 취조 결과 아무런 증거도 없었고, 뭔가를 음모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검거 개시 4~5일 만에 하나둘 혐의자들이 풀려났다. 당시 언론 보도는 “그렇게 떠들던 사건이건만 결국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격으로 끝을” 맺었다고 논평했다.③


출감 이듬해 비밀결사 설립



김한이 알선한 국제선 간부의 은신처 서울 마포구 도화동 85번지 현 위치. 다음 지도

김한이 비밀결사 운동에 복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경찰의 날카로운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김한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동료의 안위마저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감옥에 있을 동안 조선 사회주의 운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가 설립했던 비밀결사는 이미 발전적으로 해체된 상태였다. 그새 전국적 통일 전위정당인 조선공산당이 창당됐고, 그 뒤로도 사회주의 운동의 내부 상황은 변화를 거듭했다. 초창기의 이론과 정책, 운동 방식으로는 더 이상 조선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김한은 운동에 기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출감하자마자 비밀결사 운동 복귀를 조심스레 모색했다. 그리하여 출감 이듬해인 1928년 8월 마침내 ‘고려공산청년회’ 위상을 갖는 비밀결사를 설립하게 되었다.④ 이 단체는 중립당 계열의 과거 동료들을 재결속한 것이었다. 수감 생활을 마치고 되돌아온 옛 동료들과 새로이 운동에 참여한 신진 인사들이 합류했다. 이 단체는 다른 계열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화요파’ 공산그룹의 부활로 간주됐다.

시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놀랍다. 조직 2개월 만에 경기도경이 이끄는 일제 검거에 휘말렸으나,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점이 말이다. 이 단체의 가담자들이 일본 경찰과 맞대응에 얼마나 숙련됐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듬해인 1929년이었다. 이 비밀결사는 경찰의 억압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판단에 의해 스스로 해산했다. 그리고 코민테른이 직접 지도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합류했다. “국제공산당의 지시와 노선을 실지에서 수행”하는 사회주의자들과 결합했던 것이다. ‘국제선’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었다.⑤ 이들은 각파 공산그룹이 운동 발전에 유해한 역할을 끼쳤다고 보았다. 기존 파벌 관계를 단절하고 국제당의 지도 아래 조선공산당을 재건한다는 노선을 천명했다.

국제선의 국내사업 지도부는 3인이었다. 김단야, 김정하, 조두원이 그들이다. 모스크바의 국제당 집행위원회가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비밀리에 비합법적으로 활동하는 환경 속에서 곧잘 채택되던 트로이카(삼두마차) 조직 형태를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그들은 1929년 8~9월 국내에 잠입했다. 이들에 더하여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모스크바 유학생들도 잇따라 입국했다. 권오직(權五稷)을 비롯한 공산대학 졸업생 9명이 국제선의 일원으로서 비밀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했다.


탄로난 비밀과 잇따른 체포


국제선 그룹은 유능했다.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2개월 만에 당과 공청 조직의 근간을 세웠다. 그해 11월 5인으로 구성된 ‘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발족했고, 10월에는 3인 지도부로 이뤄진 공청 트로이카를 결성했다. 하부조직도 바로바로 구축됐다. 서울을 비롯해 평양, 원산, 부산, 목포, 함흥, 마산, 청진, 웅기, 신의주 등 도시 지역에 지방 당기관을 설치했다.

김한은 이들의 리더십을 인정했다. 그들은 코민테른의 지원과 협력 속에서 활동하는 만큼 자금과 정보가 풍부했고, 비전이 뚜렷했다. 비록 10여 년 연하에 해당하는 후배들이지만 성심껏 협력했다. 그중 하나는 신뢰할 만한 은신처를 제공한 것이었다. 서울에 밀입국한 국제선 간부들에게는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숙소를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김한은 자기 가족이 살고 있는 마포에서 숙소를 알아봤다. 적당한 곳이 나왔다. 도화동 85번지, 늙은 부부 둘이 사는 집이었다. 남편은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서, 세상일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안주인이 안팎살림을 모두 감당하고 있었다. 그곳에 국제선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김단야가 입주했다. 그는 안주인의 시골 조카로 가장하고, 병을 고치려 서울에 왔다고 위장했다. 늘 한약을 달이며 약 냄새를 풍겼으므로, 이웃 사람들은 모두 그런 줄로만 알았다.⑥

김한은 직접 국제선 그룹에 가담했다. 그는 ‘모플’ 사업을 전담했다. 모플(МОПР)이란 혁명가후원회를 뜻하는 러시아 외래어였다. 옥중에 수감된 혁명가와 그 가족을 돌보는 구호 사업이었다. 당과 공청의 비밀 조직 사업을 20~30대 젊은 세대가 주로 맡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적절한 역할 분담이었다. 김한은 옥중 생활을 오래 했기에 그 방면의 실정을 꿰뚫고 있었고, 변호사들과 지면도 넓었다. 적임자였다. 그는 국제선 그룹에서 상당한 금액을 받아, 그 돈을 수감자 차입비, 출옥자 치료비, 피검자 가족 구호비 등으로 썼다. 약 6개월간 그가 집행한 돈은 970엔이었다. 초등학교 초임 교원의 월급이 50엔이고, 신문사 논설부 기자의 월급이 90엔 하던 때였다.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3천만원쯤 되는 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이듬해 모플 사업비로 8400엔이 필요하다고 국제당 앞으로 예산을 신청했다.

이듬해 2월경이었다. 경찰이 냄새를 맡았다. 급속히 조직을 확대해가던 국제선 그룹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이다. 체포가 시작됐다. 김한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조직의 비밀이 탄로났고, 관련자들이 연달아 체포됐다. 온갖 노력을 다해 몸을 숨기고 있지만, 언제까지 계속 숨을 수 있을지 낙관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서울 바닥에서는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고등경찰의 삼엄한 경계망과 곳곳에 깔린 밀정들의 눈초리를 벗어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사형으로 이어진 밀정 혐의



김한을 밀정이라고 지목한 이성태 의견서의 첫 페이지(위)와 해당 부분. 임경석 제공

자신이 제공했던 도화동 은신처가 수사의 초점이 되고 있었다. 경찰이 최상급 간부라고 지목한 김단야가 그곳을 근거지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이미 저들에게 탐지됐다. 그뿐인가. 공산당과 공청 지도부에 다 소속된, 김단야 탈출 이후 가장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던 권오직이 바로 그 집에서 체포됐다. 공청 3인 지도부의 한 사람인 김응기도 떡장수로 분장해 그 집을 방문했다가 잠복 중이던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도화동 은신처를 둘러싸고 중요 인물들이 거푸 검거된 만큼, 경찰은 그 집을 아지트로 알선한 김한을 기필코 잡아들여야 할 인물로 꼽았다.

김한은 국외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3월16일 김단야의 아내이자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여성 사회주의자 고명자가 경찰에게 체포됐다. 이 사실을 인지한 그는 곧바로 길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목적지는 소련이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930년 4월 초순경이었다.

그는 따뜻한 대우를 받았다. 핍박을 피해 망명한 혁명가답게 합당한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에서 근무했다. 1930~31년 조선의 적색노동조합운동을 후원하고 독려하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

망명 2년이 지난 1932년, 김한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 망명지 체류가 장기화할 것을 예상하고 좀더 장기적이고 유의미한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간부 재교육 기관에 입학한다든가, 국제공산당 본부와 직접 연결 가능성을 모색하는 등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현실은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렀다. 모스크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벅찬 미래가 아니라 참담한 현실이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국제선 검거 사건이 그처럼 대규모로 터진 이유가 김한에게 있지 않으냐는 혐의였다. 급기야 그는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에게 체포됐다. 이 기관은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스탈린 대숙청을 앞장서서 수행하던 비밀경찰이었다.

김한이 일본 밀정 혐의를 받은 데에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 내부에 존재하던 적대감이 일정한 몫을 했다. 좀더 뒷시기에 작성된 기록이지만, 언론계 출신의 저명한 사회주의자 이성태(李星泰)는 김한을 통렬히 비난하는 의견서를 썼다. 그것은 국제당 집행위원회 앞으로 제출됐다. 그에 따르면 김한은 오래전부터 밀정으로 알려져왔다고 한다.⑦ 이성태가 비단 김한만 겨냥했던 것은 아니다. 김단야, 박헌영, 김찬, 조봉암, 고명자 등도 일본의 밀정이라고 고발했다. 그는 자신이 속했던 공산당 분파와 다른 계열에 속했던 사람들을 모두 밀정이라고 지목한 셈이다. 객관적 증거를 제시했던 것도 아니다. 스탈린 대숙청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말살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밀정이라고 고발하는 일은 일종의 유행이었던 것 같다. 왜 이성태가 한때 이념적 동지였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증오의 화신이 됐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김한은 밀정 혐의를 끝내 벗지 못했다.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1932~34년 어느 때에 그는 내무인민위원부 관료들의 손에 사형당했다.


격문에서 촉발된 ‘국제선’ 검거 사건


국제선 그룹의 1930년 2~4월 검거는 어떻게 터졌는가. 무엇이 단서가 되어서 대규모 검거가 일어났는가? 우리는 이 의문에 답할 수 있다. 경찰 보고서를 열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거 사건을 마무리하던 1930년 5월 시점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작성한 긴 분량의 사건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수사의 단서는 1930년 2월22일 이른 새벽에 서울 시내 여러 곳에 배포된 격문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이 계기가 되어 전국으로 학생운동이 확산되던 때였다. 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이었지만, 이 격문은 지질과 인쇄 상태가 통례적인 것과는 달랐다. 대다수 격문은 등사판으로 제작한 값싸고 볼품없는 외양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격문은 활자로 인쇄된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경기도경찰부는 이 사안을 중히 여겼다. 서울 시내 각 경찰서 고등계 주임들을 소집해 연석회의를 열었다. 그리하여 대규모 불온단체가 잠재했음이 틀림없다는 판단 아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경찰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참고 문헌

① ‘金翰씨 출옥’, , <동아일보> 1927.4.24

②우원식, <어머니의 강>, 아침이슬, 2011, 97쪽

③‘경찰부검거사건 무증거로 속속 석방’, <조선일보> 1928.10.24

④朝鮮總督府 警務局長, ‘朝保秘第1025?,火曜派朝鮮共産黨再組織事件檢擧ニ關スル件’, 1930.7.25, <現代史資料> 29, 1972, 238-239쪽

⑤임경석, ‘잡지 콤무니스트와 국제선 공산주의그룹’, <한국사연구> 126, 2004, 186쪽

⑥김단야, ‘1929년에 조선 가서 일하든 개요’ 1937.2.23, 4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⑦Бывш.члена КП Кореи Ким-Чун-Сен /Лп-Сен-Тай/, Заявление: В Секретную Часть ИККИ (의견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부 앞), 1937.9.28, 2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9-12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533.html 







올 들어 잇따라 소설화된 사회주의 혁명가 주세죽
 최근 자필 기록 ‘이력서’ 발견돼 오류들 정정 기회


주세죽은 3·1운동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였다. 1921년 중국 상해, 1925년, 1928년 9월, 1929년 8월, 1938년 무렵, 1945년의 주세죽(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임경석 제공


주세죽(朱世竹)이라는 여성이 있다.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지났으니 역사 속 인물이라 할 만하다. 그는 잊힌 인물이었다.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했는데도 그랬다. 마땅히 남과 북 어디선가는 그의 삶을 되돌아보고 기억해왔을 법한데도, 그 존재는 잊혀져왔다.

남한에서는 이념적인 금제 탓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줄곧 국가 이념(이데올로기)으로 작동해온 반공 이념 때문이었다. 주세죽은 사회주의자였다. 3·1운동 참가자였고, 그 직후에 물밀듯이 몰려온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삶이 공론장에 떠오른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일이다. 민주주의적 권리와 언론 자유가 확장된 조건 속에서 역사에 복귀할 수 있었다. 비로소 활자로 그의 이름을 만날 수 있게 됐다.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1996년)에 ‘주세죽’ 항목이 수록됐고, 2004년에는 그의 굴곡진 삶의 편린이 기록된 <이정 박헌영 일대기>가 출간됐다. 2007년에는 정점을 찍었다. 한국 정부가 고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영화로도 만들어질 주세죽의 삶


최근 발견된 ‘이력서’라는 제목의 6쪽짜리 필기체 문서. 사료적 값어치가 높은 이 기록은 그동안 잘못 알려진 사실을 정정할 가능성을 준다. 아래 작은 사진은 ‘코레예바’라는 주세죽의 러시아어 서명.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올 들어 더욱 이채로운 일이 일어났다. 주세죽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 연이어 발간되더니, 그 작품들이 나란히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올봄에 <코레예바의 눈물>(동하출판)을 쓴 손석춘 작가가 제2회 이태준문학상을 받았다. 코레예바는 주세죽이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쓰던 이름이다. 가을에도 수상작이 나왔다. 주세죽과 그의 두 벗의 삶을 문학적 상상력에 의거해 형상화한 <세 여자>(한겨레출판사)가 발간됐다. 이 책을 지은 조선희 작가는 요산김정한문학상 제34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11월2일 부산일보사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놀랍다. 오랫동안 망각 속에 잠겨 있던 인물이 이처럼 급격히 떠오르다니 말이다. 주세죽의 삶이 문학의 매력적인 소재로 떠오르고 있는 양상이다. 따지고 보면 이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그는 문학작품의 소재가 된 바 있다. 1930년 신문 연재소설 형식으로 발표된 심훈의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이 있다. 주세죽을 모델로 한 문학작품으로는 아마 첫자리를 점할 것이다.


<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 생각난다. 16세기 프랑스 농촌의 한 가정에서 일어난, 가짜 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다양한 방식으로 유럽과 미국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이야기는 소설·희곡·오페레타·영화·뮤지컬 등의 형태로 수백년간 반추돼왔다. 1981년에는 프랑스 영화감독 다니엘 비뉴가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1983년에는 미국의 역사가 내털리 제이먼 데이비스가 같은 제목의 역사책을 출간했다. 미시사 연구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그 책은 역사 연구자들에게 지금도 마르지 않는 영감을 주고 있다.

머지않아 주세죽의 삶이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문학에 이어 영화가 뒤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의 삶이 문학과 예술의 여러 장르를 통해 다양하게 반추되는 현상을 보게 될 것만 같다. 그러기를 바란다. 비극적인 삶을 견뎌야 했던 그의 영혼에 따스한 위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주세죽의 자필 기록이 발견됐다.① ‘이력서’라는 제목의 6쪽짜리 필기체 문서다. 직접 펜을 들고 잉크를 찍어서 쓴 것이다. 일제강점기 옛 맞춤법에 따라 쓴 국한문 혼용의 글이다. 오자나 탈자가 눈에 띄지 않고 문장 구성이 문법에 합당하게 짜인, 교육받은 지식층이 작성했을 법한 글이다. 펜촉이 덜 길든 탓인지 잉크 흐름이 균일하지 않아서 더러 진하기가 들쭉날쭉하다. 그래서 더욱 생생한 느낌을 준다. 젊은 여성 특유의 아담하고 단정한 맛이 느껴지는 필적이다. 역사 속 그를 직접 만나는 느낌마저 든다.


박헌영·주세죽에 대한 코민테른 신망


이 문서는 연구자의 관심을 끈다. 왜냐하면 역사학자들이 여태까지 활용할 수 있었던 주세죽의 정보는 주로 타자가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자라기보다는 적대자라고 해야 더 적절하겠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나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심문관이 남긴 문답록 따위였다. 그에게서 ‘범죄’ 혐의를 이끌어내려는 목적의식을 가진 자들이 생산한 기록이었다. 따라서 거기에서는 주세죽 삶의 진면목을 드러낸다든가 내면세계의 진정성을 밝힌다는 등의 목표는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맥락이 단절된 단편적인 정보가 나열되어 있기 일쑤다. 이런 자료에만 의존한다면 아무리 주의 깊게 사료 비판을 하더라도, 메마르고 엉뚱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당사자가 자기 의지로 작성한 기록이 나타났다. 이 문서는 1930년 3월24일에 쓴 것이다. 주세죽이 모스크바에서 살던 때였다. 나이 30살, 젊고 활동적이며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1929년 2월에 입학했으니 이제 2학년이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남편 박헌영은 국제레닌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아이도 있었다. 세 살 난 어린 딸 박영(朴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성장하는 만큼 ‘비비안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불렀다.

젊은 부부가 다닌 두 대학교는 코민테른이 경영하는, 세계 여러 나라 혁명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주세죽이 다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식민지 약소민족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조선학부가 내부에 설치되어 있었다. 1929년 현재 조선인 재학생은 38명이었다.② 그에 비해 국제레닌대학은 코민테른 비서부가 직영하는 최상급 간부를 위한 학교였다. 입학 자격은 매우 엄격했다. 각국 공산당의 지도적 지위에 있는 간부들만 입학할 수 있었다. 또 일정한 이론 능력과 언어 구사 능력이 필요했다. 조선인으로서 이 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1920~30년대에 박헌영을 포함해 6명에 불과했다.

어느 대학이든 입학이 허용된 사람들에게는 재학 동안 기숙사, 장학금, 의복, 음식 등이 제공됐다. 박헌영과 주세죽이 코민테른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숙소와 생활비를 받고, 양질의 고등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다. 그뿐인가. 그들에 대한 코민테른의 신망도 두터웠다. 모스크바 시절이 두 사람에게는 황금기였다.

그런데 왜 자필 이력서를 썼을까. 부족함이 없을 것만 같은데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글을 썼을까? 이 의문은 문서 끝부분을 보면 풀린다. 조선공산당에서 소련공산당으로 당적을 이전하는 수속을 밟기 위해서였다. 그는 3주 전에 당적 이전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력서는 그것을 위한 서류였다.

당적을 옮기는 것은 모스크바에 살아야 하는 조선공산당원으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였다. ‘코민테른 규약’에 따르면, “거주지를 변경한 공산주의자는 이주한 나라의 지부에 가입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③ 그것은 국제주의자의 의무였을 뿐 아니라 모스크바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도 유리했다. 모든 공적 활동에서 객체가 아니라 한 주체로서 참여할 자격과 권한을 얻는 것을 의미했다.


눈물 많은 청순가련형 여인?


일본 경찰 기록에 따르면 주세죽은 수동적인 여성이었다. 1925년 11월 말에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됐을 때다. 신문 조서에 따르면 그는 사회주의를 깊이 연구한 적이 없고, 교육 수준이 낮아서 그 내용을 잘 모르며, 사상운동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여성이었다. 1925년 4월에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 참석한 이유는 자기 집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서울 훈정동에 있는 자기 살림집에서 십수 명의 장정들이 모여서 뭔가를 협의했지만, 주세죽은 논의 내용을 잘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 집의 안주인으로서 손님 대접을 위해 식사 준비를 했을 뿐이지 비밀결사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④ 피의자들은 엄격히 격리됐을 터였다.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을 텐데도 박헌영은 자기 아내와 같은 기조로 진술했다. 창립대회 장소로 사용된 자기네 거처는 단칸방이었음을 환기했다. 따라서 아내는 저녁밥을 준비하느라 회의장에 출입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여성동우회를 대표해 그 회합에 참여했다는 의심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언론에 보도되던 주세죽의 이미지는 청순가련형이었다. 박헌영이 1926년 7월21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될 때였다. 포승줄에 묶인 채 서울로 압송되는 박헌영의 동정은 언론기관의 주목을 받았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신촌역에서 내리는 공산당사건 피고인들을 잠시라도 만나보려고 7~8명의 지인들이 역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속에는 주세죽도 있었다. 그는 “눈물 머금은 얼굴로 그리운 남편과 말 한마디 못하고 섰는 정경”을 보였는데, “그야말로 비감한 무언극의 일 장면”과 같았다고 한다.⑤

1927년 9월20일 공산당 재판 제4회 공판 때였다. 고문에 항의하는 소란 행위로 피고 박헌영이 공판정 밖으로 끌려나왔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지방법원 구내에 와 서 있던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 여사가 이것을 보고, 어찌된 까닭인지 몰라 눈에 눈물을 머금고 이리저리 헤매”었다. 이 정경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밑도 모를 눈물을 재촉”했다고 한다.⑥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며 눈물을 잘 흘리는 청순가련한 여인! 타자의 기록에 보이는 주세죽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주세죽이 스스로 작성한 기록에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담겨 있다.


진보적 사회의식 지닌 독립적 여성


그는 혁명가였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3·1운동이 첫 경험이었다. 운동이 고조되던 때 함흥에서 비밀결사 ‘애국부인회’를 조직했고, 만세시위운동에도 참가했다. 그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돼 2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애국부인회가 주목된다.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도시에서도 비밀리에 조직됐으며, 만세 시위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는 증언이 흥미롭다.

이미 보았듯이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단체에 가입한 것은 1921년 망명지 상해에서였다. 그해 6월 상해 고려공산청년회(고려공청)에 입회했고, 11월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그는 열성적인 사회주의자가 됐다. 한시도 사회주의 단체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1923년 국내로 귀환한 뒤에는 함흥에서 비밀리에 공산청년회 세포 단체를 만들었고, 공개 사상단체인 ‘칠칠회’(七七會) 활동에도 관여했다. 1925년 4월에는 고려공청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여성동우회 내부의 비밀 세포 단체를 대표하는 자격이었다. 대회가 끝난 뒤에는 고려공청 서울지방간부 위원에 피선됐고, 제2선 지도부인 중앙후보위원 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그해 5월에는 인천 정미 여공들을 조직화할 목적으로 인천에 출장을 갔다. 거기서 비밀리에 공청 세포 단체를 결성했다.

그는 여성운동가였다. 3·1운동기에 이미 여성 비밀단체인 ‘애국부인회’에 참여한데다가, 1924년 5월 사회주의 계열 공개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 결성을 주도하고 그 7인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성동우회 내부에 은밀하게 공산주의 세포단체를 조직했다. 이듬해에는 서울 지역의 대중적인 여성단체를 만들기 위해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이처럼 주세죽의 글에는 진보적인 사회의식을 지닌 독립적인 젊은 여성의 삶이 묘사되어 있다.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이미지와는 양립할 수 없는 인간상이다. 눈물 머금은 청순가련한 이미지는 그의 겉모습에 취한 착시의 소산이었다. 그의 내면에는 억눌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정신이 활활 불타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문학·예술 방면에서 주세죽의 삶을 형상화하려는 이들은 마땅히 이 기록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진면목을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기록은 사료적 값어치가 높다. 그동안 곡해돼온 사실을 정정할 가능성을 준다.


이춘, 이정 그리고 이준


맺음말 삼아, 보기를 하나 들어보자. 박헌영이 러시아에서 사용한 가명이 있다. ‘Ли Чун’(리춘)이 그것이다. 영문으로는 ‘Lee Chun’으로 표기됐다. 박헌영은 모스크바 시절 줄곧 이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가명의 한글과 한자 표기가 무엇인지는 밝히기 어려웠다. 영문과 러시아어 표기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잠정적으로 ‘이춘’이라 읽기로 결정했다.⑦ 음가 그대로 옮겼던 것이다. 뒷날 상해에서 발간한 비합법 출판물 <콤무니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박헌영은 ‘이정’(爾丁)이라는 필명을 쓴 바 있다. 그 때문에 ‘Ли Чун (Lee Chun)’이란 ‘이정’과 동의어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는 연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시절 박헌영의 가명이 ‘이춘’이나 ‘이정’이라고 보는 견해는 모두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주세죽 이력서에 기재된 정보가 그를 정정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자신의 남편을 일관되게 ‘리준’으로 부르고 있다. ‘Ли Чун (Lee Chun)’이란 곧 ‘리준’이라는 이름의 음차 표기였던 것이다. 두음법칙을 적용한다면 박헌영이 모스크바에서 사용한 가명은 ‘이준’이었다고 확정해도 좋다.


참고 문헌

① Кореева, ‘이력서’ , 1930.3.24,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80 л.6-9об

②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특별과(спецсектор) 조선인 학생 명단’ , РГАСПИ ф.532 оп.1 д.424, л.22об

③ ‘공산주의인터내셔널 규약’ 1928.8.29, <코민테른 자료선집> 1, 동녘, 1989, 72쪽

④ 신의주경찰서 도경부보 茅根龍夫, ‘피의자신문조서(주세죽)’ , 1925.12.4: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편> 1

⑤ ‘캄캄한 밤중에 無言劇의 一場面’, <동아일보> 1926.7.23

⑥ ‘30여 경관 총출동’ , <동아일보> 1927.9.21

⑦ ‘주세죽 관계 자료’ <역사비평> 1997년 여름호, 145쪽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438.html 



사형으로 스러진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
 체포 작전 도운 밀정은 안중근의 의형제 엄인섭


엄인섭이 밀정으로 암약한 시기는 1908년부터 1922년까지 14년이나 된다. 이처럼 오랜 기간 스파이 노릇을 행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 <암살>에서 거물급 항일운동가인 염석진(이정재)은 밀정으로 전향한 뒤 고등계 형사 노릇까지 한다. (주)쇼박스 제공


(앞의 글 <도대체 누가 밀정이었나>에서 계속) 

체포 작전은 1920년 1월31일 새벽 3시부터 4시간 동안 계속됐다. 먼동이 밝아오는 7시가 되어서야 헌병대는 현장을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소득이 컸다. ‘살인강도’ 사건 혐의자를 4명이나 한꺼번에 붙잡았다.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셋은 간도 15만원 사건의 ‘범인’임이 틀림없었다. 나머지 한 사람 나일(羅一)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숙소에서 기거를 같이 하는 것으로 미뤄보아 범죄 가담 혐의가 두터웠다.


하루만 늦었어도 실패했을 체포


다만 유감스럽게도 범인 한 명을 놓쳤다. 그는 기민한 자였다. 권총을 빼들고 완강히 저항하는 윤준희를 제압하느라 혼잡한 틈을 타 문 두 짝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리 헌병’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도주하는 용의자에게 사격을 가했으며, 그자의 한편 어깨뼈 아래에 관통상을 입혔다. 피를 많이 흘린데다 매섭게 추운 북국의 겨울밤에 속옷 바람으로 내몰렸으므로 제대로 살아남기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빼앗긴 현금도 되찾았다. 철제 상자 안에 담긴 현금을 헤아리니 약 13만원이었다. 잃었던 돈 가운데 87%에 해당하는 현금을 회수했다. 상자 안에는 또 귀중한 게 있었다. 문서들이었다. 노트, 편지, 증서 등이 있었다. 총영사관의 경찰간부 기토 가쓰미 통역관이 이 압수 문서들을 분석했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일지였다. 범인들은 자신의 행동 양상을 날마다 일지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이들이 사건의 진범임을 의심할 여지 없이 보여주는 증거였다. 편지와 거래 서류도 있었다. 신한촌의 조선인 상인들과 자금 투자 방안을 논의하는 편지, 신한촌 하바롭스카야 거리 9번지 가옥 매도 증서 등이 그 궤짝에 들어 있었다. 어느 것이나 다 강탈 자금의 사용처로 의심되는 사안들이었다.

하마터면 범인들을 놓칠 뻔했다. 체포 작전을 마치고 불과 2시간 뒤에 연해주에서 정변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1월31일 9시를 기하여 무혈 쿠데타가 일어났다. 백위파 로자노프 지방정권이 전복되고 혁명파가 연해주 지방정부를 장악했다. 러시아 사회혁명당과 공산당이 연합한 연해주 자치위원회가 새 집권자가 됐다. 일본 총영사관에 매사 협조적이던 백위파 정부가 아니었다면 일본 헌병대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공공연하게 민간인을 체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루만 지체됐더라도 일은 틀어졌으리라.

경찰간부 기토 통역관은 제때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원인을 밀정 덕분으로 돌렸다. 보고서 내에서도 여러 차례 밀정을 언급했다. 그는 ‘우리 밀정’(我 密偵)이라고 은근하게 호칭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쩌면 현지 부임 이래 10년 동안 세심하게 밀정을 관리해온 자신의 공로를 은근히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체포된 사람들은 금각만 부두에 정박 중이던 일본 군함 지쿠젠마루(筑前丸)로 압송됐다. 군용 운송선으로 사용되는 이 배의 맨 밑창에는 특수 감금 시설이 있었다. 하루 종일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밤낮 전깃불이 켜져 있었다. 네 청년은 결박당했다. 발목, 손목, 허리에 삼중으로 쇠사슬을 채웠다. 그곳에서 청년들은 악형을 견뎌야 했다. 뒷날 청년들은 재판정에서 과감히 발언했다. 심문 과정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저질러졌음을 폭로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헌병대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반죽음 상태에 있었”고, “고통을 면하기 위하여 자기가 하지 않은 사실까지도 진술하였”다고 말했다.


사건 발발 1년7개월 만에 사형 집행


윤준희 등의 형이 집행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청년들은 순순히 불지 않았다. 자신들을 돕고 지원해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노력했다. 일주일간의 심문을 마치고 일본 본국으로 출항하던 날, 총영사관이 외무장관 앞으로 작성한 수사 보고서가 있다. 사실과 다른 정보가 도처에 눈에 띈다. 현금 수송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사건 이후 도주 경로가 어떠했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 그러했다. 시종일관 엉뚱한 답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밀 정보를 제공한 사람과 사건 이후 피신 과정을 도와준 사람, 그리고 비밀결사 구성원들의 이름이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였다. 수감자들이 얼마나 고심했는지 짐작된다.

군함 지쿠젠마루호는 2월7일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떠났다. 군함은 규슈 북단의 모지(門司)항을 거쳐, 요코하마(橫浜)항으로 항해했다. 그곳에 체포된 청년들을 하선시키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을 태운 배는 다시 부산항으로 출항했다. 이 사건의 재판 관할을 청진지방법원으로 지정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부산항에 내린 피의자들은 철도편으로 서울을 거쳐 원산까지 호송됐다. 철도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원산에서 청진까지는 다시 배편으로 이송됐다.

마침내 재판이 시작됐다. 1심은 청진지방법원에서 진행됐다. 숙소에서 같이 잠자다가 변을 당한 나일은 결국 무혐의로 인정되어 석방됐다. 그 대신 현금 수송 정보를 제공했던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사무원 전홍섭(全洪燮)이 피고인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사건 당일 밤 일찌감치 회령경찰서에 체포됐다. 그를 의심스럽게 본 회령지점장이 고발한 탓이었다. 그는 3주 동안 계속된 심문을 견뎌야 했다. 그 결과 1920년 1월28일자로 ‘강도종범 및 정치범’ 혐의로 청진 지청 검사국에 송치됐다.

재판은 빠르게 이뤄졌다. 2심은 서울의 경성복심법원에서, 3심은 서울의 고등법원에서 진행됐다. 최종심 선고는 1921년 4월4일에 있었다. 사건 발발 이후 1년3개월만의 일이었다. 와타나베 노부(渡邊暢) 재판장을 수위로 하는 고등법원 형사부 5인 합의부 판사들은 피고들에게 극형을 선고했다. 15만원 사건에 직접 가담한 윤준희·임국정·한상호 3인에게는 사형을, 현금 수송 정보를 제공한 조선은행 용정 출장소 사무원 전홍섭에게는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선고가 이뤄진 지 4개월20일이 지난 뒤였다. 사형이 집행됐다. 1921년 8월25일이었다. 낮 기온이 28도에 이른 더운 여름날이었다. 잠시 맑기도 했지만 종일 흐린 날씨였다. 서대문형무소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사형장에서 세 청년은 영영 눈을 감았다.

세 사람의 주검은 서대문형무소 사형수들이 으레 묻히는 홍제동 밖 신사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장례를 주관한 이는 여성들이었다. 윤준희의 젊은 부인 최씨와 임국정의 어머니 ‘임뵈뵈’였다. 임뵈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북간도 성녀’라는 별호로 알려진 여성이었다. 멀리 북간도에서 살다가 남편과 아들의 주검을 찾기 위해 낯설고 번잡한 객지에 온 두 여인이었다. 주검을 수습하고자 동분서주하던 여인들의 흐느낌 속에 세 무덤이 나란히 들어섰다.


“홍범도·엄인섭 두 장군 활약 보는 날”


엄인섭(왼쪽)과 홍범도 장군. 임경석 제공


엄인섭(嚴仁燮)이었다. 15만원 사건 주인공들의 거처를 일본 총영사관에 알려준 밀정 말이다. 이 사실은 일본 총영사관의 정보 보고서에 암시되어 있다. 기토 통역관은 자신이 관리하던 밀정의 활약상을 자세히 기술했다. 보기를 들면 ‘우리 밀정’이 저들의 무기 구매를 알선해줬다고 한다. 그 행위는 기만이었다. 구매 협상에 나선 사람들 가운데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우리 밀정’은 이 점을 이용하여 다른 이들을 교묘하게 속였다고 한다.

좀체 믿기 어려운 기록이다. 엄인섭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으리만큼 그는 민족혁명운동의 중견 인물이었다. 그는 1907년 개시된 연해주 반일 의병운동에 열렬히 참가했다. 1908년 여름 국내 진공작전 때에는 안중근과 함께 최선봉에 서서 두만강을 넘어 국내 진격을 영도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는 안중근의 가장 친한 동지였다. 여순감옥에서 심문받을 때 안중근은 말했다. “엄인섭은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고 속마음을 토로했다. 그뿐인가. 그들은 의형제까지 맺은 사이였다. 안중근과 엄인섭은 평양 출신의 반일 혁명가 김기룡(金起龍)과 함께 결의형제를 했다. 그들은 그럴 만큼 의기투합한 사이였다. 나이순으로 따진다면 김기룡(1876년생)이 큰형이고, 안중근(1879년생)이 둘째, 엄인섭(1885년생)이 막내였다.

세 사람은 목숨을 걸고 혁명에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일본군의 첩보에 따르면, 1908년 4월에 세 사람은 다른 두 사람(현학표, 이범석)을 더하여 5인 단지동맹을 맺었다. 안중근과 엄인섭은 이토 히로부미 살해를 맹세했고, 다른 세 사람은 친일 매국 행위자인 이완용·박제순·송병준을 각각 암살하기로 서약했다. 다섯 사람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증거로 각자 왼손 무명지의 첫 번째 관절부를 절단했다.

엄인섭은 힘이 세고 성격이 담대했다. 사람이 여럿 모인 곳에서는 힘자랑을 즐겨했다. 그는 좌중의 분위기를 제압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키는 164cm였다. 당시 기준으로 중간쯤 되는 키였다. 수염이 많고 다소 뚱뚱한 체격이었다.

엄인섭의 반일 행동은 일본의 한국 강점 이후에도 계속됐다. 1911년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권업회 설립에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권업회 지회 설립을 촉구하기 위해서 연해주 각 지방에 파견한 3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1913년 11월 이동휘와 홍범도를 비롯한 혁명가 6인 간담회가 열렸을 때다. 엄인섭도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이동휘는 “홍범도와 엄인섭 두 장군의 활약을 보는 날이 있으리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무장투쟁 시기가 다시 도래할 터이므로 그에 대비해달라는 당부였다. 엄인섭은 홍범도와 병칭되는 항일 무장투쟁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14년 동안 진행된 밀정 노릇


밀정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독립운동계 내에서 갈등 관계에 있는 혁명가들이 상대편을 밀정이라고 의심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암시적이고 간접적인 의혹 말고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그를 잘 몰랐다. 러시아 지역 한국독립운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조차 그랬다. 엄인섭은 최재형, 이범윤, 유인석, 안중근 등과 나란히 거론되는 의병장이었다. 주요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고, 향후 그에 관한 연구가 더 활성화되어야 할 인물로 지목받았다. 하지만 이제 국사편찬위원회가 해외 한국사 사료의 수집과 편찬에 노력한 성과에 힘입어, 우리는 엄인섭의 밀정 여부를 확증할 수 있게 됐다. 외무성 산하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에서 작성한 반일 단체 관련 공문서철(불령단관계잡건)에는 엄인섭의 밀정 행각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엄인섭은 1911년 반일 언론 <대양보>의 간행을 막기 위해서 한글 활자 1만5천 개를 훔쳤다. 93kg에 달하는 무게였다. 이 활자는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 기토 통역관에게 전달됐다. <대양보>는 발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일본 밀정임이 발각된 서영선(徐永善)이란 자를 한밤중에 몰래 탈출시켰다. 1912년에는 연해주의 조선인 농촌 지대인 연추에서 둔전영(屯田營)을 설립하려는 은밀한 논의를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 경찰에게 자초지종 밀고했다. 둔전영은 농장 경영과 함께 독립군 양성을 동시에 수행하는 무장투쟁 준비 단체였다. 이동휘, 홍범도, 이종호, 김립, 황병길 등과 같은 반일 인사들의 동향을 보고하는 것도 그의 직분이었다. 이외에도 엄인섭의 밀정 행위는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밀정을 했는가? 그의 밀정 행위 관련 기록은 1911년부터 남아 있으므로, 일본의 한국 강점 이후 그가 타락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실제는 그보다 훨씬 앞서 있다. 총영사관의 기밀문서를 보면 “엄인섭은 재작년(1908년) 11월경 본 영사관에 출두하여 첩보자로서 고용해달라고 청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총영사관에 접근한 시기에 눈길이 간다. 국내 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미뤄보면 그가 밀정으로 암약한 시기는 1908년부터 1922년까지 14년이나 된다. 이처럼 오랜 기간 스파이 노릇을 행한 사례는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무엇 때문에 밀정이 됐을까? 첩보자로 ‘고용’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대목에 눈길이 간다. 그가 바랐던 것은 돈이었다. 밀정이 되면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보기를 들면 용정 총영사관은 밀정에게 하루 1원 50전씩 지불했다. 1개월치는 45원이었다. 그 시기 회령경찰서 순사 나가토모가 받은 월급은 30원이었다. 오히려 일본 경찰관보다 월수입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엄인섭은 거물이었고, ‘공로’를 여러 번 세웠기 때문에 수령액이 훨씬 더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도박 즐기고 여성 관계 문란


그는 사회적 평판이 좋지 않았다. 러시아 지방관청의 기록 속에 엄인섭 인물평이 있다. “지방 거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엄인섭은 속이기와 카드놀이에 아주 능한 사람이며 방탕하다”고 한다. 도박을 즐기고 사람 속이기를 능사로 한다는 말이었다. 그뿐인가. 여성 관계도 문란했다. “그는 합법적인 아내 외에도 몇 명의 첩을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생활 습관은 그에게 많은 돈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병하던 1922년에 엄인섭의 밀정 생활도 끝났다. 그는 일본군을 따라 연해주를 떠났다. 처음에는 두만강 너머 함경북도 경흥에 정착했다. 그러나 일본 말도 모르고 글도 모르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거처를 옮겼다. 연해주에 가까운 북간도 훈춘을 찾았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제가 자라던 고향 연추와 연결되는 곳이었다. 엄인섭은 1936년 그곳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52살이었다. 그로 인해 15만원 사건 주역들이 30살 고개를 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음을 상기해보면, 과연 역사에 정의가 있는지 의심이 든다.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3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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