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1920년대 연애소설인 듯, 연애소설 아닌

심훈 소설 <동방의 애인> 속 상하이 망명객들



작가 심훈의 20대 모습. 압록강 철교와 뗏목. 신문 연재소설 <동방의 애인> 제1회 삽화(안석주 그림). 임경석 제공

심훈의 글 중 <동방의 애인>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신문 연재소설이다. 일제강점기 1930년 10월29일부터 12월10일까지 <조선일보>에 실렸다. 그런데 연재소설치고 발표 기간이 이례적으로 짧은 점이 눈에 띈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단기간에 머물렀고, 연재 횟수도 39회에 불과했다. 까닭이 있었다. 내용이 불온하다고 판정한 식민지 통치기구 검열관에게 걸려서 연재가 중단됐다.

이 작품은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 서사 전개와 플롯(구성)이 불완전한 만큼 문학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그래서일까. 문학평론가들이 보기에 <동방의 애인>이 예술적 성취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일찍이 팔봉 김기진이 이 작품을 가리켜 새로운 통속소설, 혹은 마르크스주의 통속소설이라고 평가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학적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의미가 있다. 1920~21년 중국 상하이에 망명한 조선인 혁명가들의 삶을 형상화했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상하이는 반일 독립운동가에게 최선의 활동 근거지였다. 일본 경무국 관료들은 상하이를 ‘해외 반일 조선인들의 음모 책원지’라고 일렀다. 그뿐만이 아니다. 상하이는 동아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다. 조선과 중국의 사회주의 단체가 그곳에서 싹을 틔웠다.


<조선일보> 1930년 10월29일치. 임경석 제공

검열에 걸려 두 달 만에 연재 중단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상하이에 머무른 조선인 수는 100명 정도였다. 대체로 상업이나 노동에 종사하는 평범한 교민이었다. 1919년부터 달라졌다. 망명객이 몰려들었다. 1919년 5월에 조선인 교민 수가 1천 명을 넘었다. 그 수는 이듬해까지 계속 늘어났다. 심훈은 상하이에 몰려든 망명객들의 삶에 돋보기를 갖다 댔다.

제목이 말하듯 <동방의 애인>은 사랑에 관해 얘기한다. 개인의 사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작자의 말’에서 심훈은 자기가 묘사하려는 것은 ‘남녀 간에 맺어지는 연애’가 아니라고 썼다. ‘어버이와 자녀 간의 사랑’도 아니었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더 크고 깊고 변함이 없는 사랑’이었다. 민족과 계급에 대한, 공적인 사랑이었다. ‘그 사랑에 겨워 껴안고 몸부림칠 만한’ 애인을 그리려 한다고 썼다. 일제의 검열을 고려해 모호하게 말하지만, 피억압 민족과 계급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구상했음이 틀림없다.


소설 속 주인공 ‘동렬’이 현실 세계의 박헌영을 모델로 삼았다는 견해는 연구자들에게 널리 수용된다. 소설 속에서 동렬은 “뜨거운 정열의 주인공이면서도 좀체 자기의 감정을 표면에 나타내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급한 사정이 있더라도 계획했던 일이 삐뚤어진 코스를 밟게 될 경우를 미리 점쳐보고, 그다음에는 이러저러해야겠다는 제2, 제3의 방침을 세워놓고서야” 그때 비로소 행동에 착수했다고 한다. “침착하고 두뇌가 면밀하여” 혁명단체의 ‘책임비서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헌영의 실제 성격도 그랬다. 경성고등보통학교 동급생 최기룡의 증언에 따르면, 학창 시절 박헌영은 말이 없고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으나, 침착했고 사려가 깊었다고 한다. 학적부에 기재된 4학년 담임선생의 평가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성질’을 “온순 과묵하고 착실”하다고 표현했다.1

작가 심훈이 박헌영의 성격과 개인적 면모를 잘 아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심훈은 1915년 경성고보에 입학한, 박헌영의 동창생이었다.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사이였다. 두 사람은 학창 시절을 같이 겪었을 뿐 아니라, 상하이 시절에 함께 혁명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훈은 뒷날 쓴 시에서 자신과 박헌영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하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사이였다고 표현했다.2


박헌영은 동렬, 주세죽은 세정


동렬의 연인 ‘세정’이는 주세죽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눈이 맑고 살빛이 흰 여성으로 묘사됐다. “총명, 바로 그것인 듯한 맑은 눈”을 가졌으며, “살갗은 희나 좀 강팔라서 성미는 깔끔할 법하여도 그야말로 대리석으로 아로새긴 듯한 똑똑한 얼굴의 윤곽”을 지닌 인물이다. 3·1운동 때는 여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운동을 주도했고, 상하이 망명을 결행할 정도로 용기 있는 여성으로 그렸다.

현실에서 주세죽도 그랬다. 그녀는 용모가 빼어났다. ‘동양화 속에서 고요히 빠져나온 듯한 수려한 미인’이라는 일컬음을 받았다. 3·1운동에도 참가했다.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서 시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1개월 동안 유치장에 수감돼야 했다. 머잖아 주세죽은 상하이에 망명했으며, 사회주의를 수용해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당 조직에 가담했다. 소설 속에서 세정과 동렬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주세죽과 박헌영은 결혼식을 올렸다. 뒷날 제1차 공산당 사건 때 작성된 박헌영의 피고인 조서에 따르면, 둘은 1921년 봄에 부부가 됐다고 한다.

또 한 사람, 중요한 등장인물이 있다. 동렬의 절친한 벗 ‘박진’이다. 그는 성격이 동렬이와는 대조적이었다. “걱실걱실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덤벙대는 듯하나, 의롭지 못한 일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정의감이 굳센 용감한 청년”이었다. 3·1운동 당시 ‘××공보’라는 지하신문 발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체포됐으며, 상하이에 망명한 뒤로는 ‘○○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걷는 것으로 묘사됐다. 부인이 있었다. 일찌감치 부모 뜻에 따라 구식 결혼식을 올려서 “시골집에 마음에 맞지 않는 아내가 있”다고 서술됐다.

‘박진’의 모델은 곧 김단야였다고 판단된다. 소설 속 박진과 마찬가지로 김단야도 기혼이었다.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에는 아내 윤재분(?∼1974)이 살고 있었다. 어린 아들 하나, 딸 하나를 키우면서 평생 시골집을 지키고 살았다. 김단야는 3·1운동에도 참여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반도의 목탁’이라는 이름의 지하신문 발간에 가담했고, 고향에 내려가서 농민시위를 조직했다. 관헌에 체포돼 태형 90대라는 야만적인 형벌을 받았다.

상하이 망명 뒤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한 것도 사실이었다. 뒷날 김단야가 쓴 자서전 기록에 따르면, “나는 1920년 1월 중순 상하이를 떠나 그때 조선인 혁명가들을 위한 군사학교가 있던 광둥으로 갔다”고 한다. “이 군사학교는 친일파 돤치루이의 북양(북경) 정부에 대적하는, 쑨원 지도하의 광둥 정부에 의해 설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학 생활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해 4월에 되돌아와야 했다. 쑨원파가 광시 군벌 루룽팅의 군사행동에 밀려서 광둥에서 추방된 탓이었다.3

김단야가 광둥에 있는 군관학교에 한때 입학한 정황은 심산 김창숙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유림을 대표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창숙은 그즈음 조선인 청년 간부 교육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광둥 정부의 지원을 받아 청년 망명객들을 군사와 정치 분야 간부로 양성하는 사업이었다. 첫 번째 성과가 나타났다. 청년 50명을 뽑아 광저우에 있는 군관학교와 고등교육기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시켰다. 청년 명단 일부가 알려졌는데, 그 속에 김주(金柱)가 있었다. 김단야가 상하이 망명 시절에 썼던 가명이다.4


중국 상하이에 머물 때의 박헌영과 김단야, 주세죽(왼쪽부터). 임경석 제공

실존 인물의 행적과 다른 부분도


소설 속 주인공들은 공통점이 있다. 3·1운동에 참여했고,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사회주의를 수용했다. 귀착점은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었다. 동렬, 세정, 박진 등은 3·1운동 직후 망명지 상하이에서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한 초창기 마르크스주의자를 표상하는 캐릭터(인물)였다. 심훈은 조선 사회에서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출현하는지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소설 속 캐릭터의 행적을 현실의 특정인과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등장인물의 행적이 곧바로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소설 속 동렬의 행적을 모두 박헌영의 그것과 같다고 여기면 안 된다.

예를 들어보자. 소설 속에서 동렬은 1921년 7월 다른 두 동지와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로 출발했다.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자동차로 고비사막을 넘는 노정을 택했다. 몽골을 지나 러시아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일정이라든가 세부 묘사가 생생한 까닭에, 독자는 진짜 박헌영이 모스크바로 향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박헌영은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단지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 자격으로 대표자를 선정·파견했을 뿐이다.5

또 있다. 소설 첫머리에 박진이 열차 편으로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잠입하는 드라마틱한(극적인)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미 국내에서 잡지사 기자라는 합법 신분을 확보한 동렬과 접선하는 장면이 뒤를 잇는다. 이 장면들도 실제와는 다르다. 1922년 4월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인 박헌영과 김단야, 임원근 세 사람이 국내 공작을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려다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게 사실이다.

그 외에 박진이 군관학교를 졸업하고서 장교로 임관했다거나, 동렬과 박진이 고등보통학교 동창생이라는 언급 등이 있다. 모두 실제와는 다르다. 심훈이 고안한 픽션(허구)이었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요컨대 소설 속 주인공들을 실재하는 특정인을 모델로 그려낸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역사적 사실로 구성된 것은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등장인물들은 실제 인물의 한 측면이 반영됐을 뿐이다. 게다가 픽션의 요소, 지어낸 얘기가 뒤섞여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심훈 자신도 상하이 망명객


심훈은 1920~21년 상하이에 머무른 적이 있다. 자신이 상하이 망명객이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녹여서 소설을 썼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서술이 역사학자의 눈길을 끈다. 어떤 사료보다 생생하게 역사적 진실을 전달해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상하이 거리 풍경을 묘사한 것이나, 그 도시에서 막 싹튼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단체 활동 모습을 서술한 것이 그 예다. 국경도시 신의주를 통해 열차 편으로 잠입하는 비밀 활동 참가자의 행동과 심리 묘사도 압권이다. 그를 색출·체포하려는 경찰, 헌병, 세관 관리 등의 언행도 흥미롭다. 역사학자들은 <동방의 애인>에 주목한다. 1920년 상하이 한인 망명자 사회의 내면을 묘사하고, 특히 사회주의가 처음 수용되는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1.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56~57쪽, 2004.

2. 심훈, ‘박군의 얼굴’, <沈熏文學全集> 61쪽, 1927년 12월2일.

3.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전),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1937년 2월7일.

4. 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 <국역 심산유고>, 723쪽, 1979년.

5. 임경석, ‘극동민족대회와 조선대표단’, <역사와 현실> 제32호, 한국역사연구회, 1999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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