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한 ‘간도 15만원 사건’ 주역들
 무기 계약 뒤 인수 전날 일본 헌병이 급습하는데…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인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왼쪽부터). 임경석 제공


(앞의 글 일제의 돈을 갖고 튀어라 에서 계속) 배는 8시간을 달렸다. 1920년 1월9일 밤 9시 포시에트 항구를 떠난 기선은 이튿날 새벽 5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닿았다. 어둠 속에 도시가 빛났다. 일곱 가지 색깔로 꾸민 조명이 높은 산을 꾸미고 있었다. 찬란했다. 밤하늘의 별인지 전깃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을 정도다. 최봉설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감탄했다. 항만시설이 잘 갖춰진 금각만(金角灣)에 접어들면서 배는 길게 뱃고동을 울렸다.

일행은 어둠이 깔린 항구에 발을 내디뎠다.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등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이 마침내 목적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들은 안도감을 느꼈다. 일본 간도총영사관과 중국 지방관청 경찰대의 급박한 추격을 벗어났으니 말이다. 사지를 벗어난 셈이었다. 그러나 이곳도 100% 안전하지는 않았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한촌서 열린 철혈광복단 비밀회의


1년4개월 전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이 연해주에 간섭군을 파견했다. 러시아혁명의 파급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1918년 8월이었다. 일본·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이 제각기 연해주로 군대를 보냈다. 그들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내전에 결코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 백위파 장군들을 일방적으로 지원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가장 많은 군대를 가장 오랫동안 러시아 극동 지역에 주둔시켰다. 출병 3개월 만에 러시아 극동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수는 7만3천 명을 헤아렸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일본 파견군의 중심지였다. 파견군 총사령부와 헌병대가 주둔해 있었다. 그뿐인가. 일본 총영사관이 있었다. 이 기관은 반일 조선인의 동향을 추적하는 비밀경찰 역할을 했다. 그 때문에 스파이가 많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 밀집 거주지에는 일본 총영사관에 고용된 밀정들이 은밀히 활동하고 있었다.

일행은 신한촌에 숨어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 7개 조선인 거주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거류 조선인의 80%가 모여 살고 인구는 6500명이었다. 네 사람은 제각기 다른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위험을 분산하려는 취지였다. 불행히 누군가 발각된다 하더라도, 남은 이들이 사명을 다하려는 의도였다. 최봉설은 채성하(40·蔡成河)가 경영하는 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주인 채씨는 반일 의식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마음이 놓였다.


이튿날 밤, 비밀리에 철혈광복단 간부회의가 열렸다. 단장 전일(31·全一)이 소집한 회의였다. 1914년 북간도 용정에서 창립될 때부터 비밀결사를 이끌던 믿음직한 맏형이었다. 이 자리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 중인 주요 단원들이 모였다. 새로 획득한 군자금 15만원의 사용처와 책임자를 정하는 것이 주요 의안이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자금 사용처를 셋으로 정했다. 첫째 무기를 구매하고, 둘째 연해주 동부 산악지대인 수청에 사관학교를 건립하며, 셋째 신한촌 내부에 신문 발간과 도서 출판을 위한 사무소 건물을 구매하기로 했다.

결정 사항은 즉시 행동에 옮겨졌다. 장기영(40 전후·張基永)과 채영(29·蔡英) 등이 사관학교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수청으로 길을 떠났다. 5만루블을 휴대했다. 일본돈으로 치면 1만원이었다.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약 10억원이다. 서류상 거래 당사자로는 합법적 신분의 사람을 내세웠다. 대동상회 대표 유찬희(柳讚熙)의 명의를 사용했다.

신한촌에 사무소 건물을 구입하는 문제도 실행에 옮겨졌다. 하바롭스카야 거리 9번지 건물이 물망에 올랐다.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백산학교 자리였다. 교사 4명에 학생 70명인 작은 학교였다. 그 건물이 일본돈 5천엔에 매물로 나왔다. 요즘 화폐 구매력으로 5억원에 상당한 돈이었다. 그것을 샀다. 신한촌 유력자이자 반일 민족주의자인 강양오(45·姜良五)와 조장원(36·趙璋元) 두 사람의 공동 명의로 매입 계약서를 작성했다.


1천 명 규모 독립군 편성할 무기 계약


무기 구입은 전적으로 ‘15만원 사건’ 주역들에게 위임됐다. 네 사람은 업무를 나눴다. 윤준희가 자금과 서류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나이가 가장 많고 ‘15만원 사건’의 입안과 집행을 이끌어왔던 터라 당연한 귀결이었다. 구매는 몸집이 크고 체력이 강대한 임국정이 맡았다. 그는 1년 전 권총 구입차 신한촌에 출입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5년 전 독립군 나자구(羅子溝)사관학교 경비 조달을 위해 그 학교 사관생도 40여 명과 함께 저 머나먼 우랄산맥 삼림지대에서 벌목노동에 종사했다.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즈음 분산 유숙 대신 단체로 합숙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김하석(40·金河錫)이 제안했다. 중책을 원활히 수행하려면 자주 회의를 열어야 하기 때문에 한집에 모여 지내자는 뜻이었다.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김하석은 일찍이 간도 광성중학교 교사를 지냈기 때문에 철혈광복단 단원들에게서 선생님 소리를 듣는 이였다. 또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장으로 재임 중인지라 그의 발언은 존중됐다. 유사시에 일망타진될 위험이 상존했지만, 네 사람은 그 말을 좇기로 했다.

새로 옮긴 합숙소에서 무기 구매를 위한 논의가 급진전됐다. 임국정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무기 밀거래 파트너는 블라디보스토크 요새사령부 포병부 무기고 책임자 몰린 대위였다. 백위파 연해주 지방정부 포병 장교였다. 그를 통해 개인 화기는 물론이고 공용 화기도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은밀한 거래를 주선한 중개인이 있었다. 엄인섭(44·嚴仁燮)이었다.

그를 믿을 수 있느냐는 반문이 나왔다. 임국정은 주저 없이 신뢰한다고 답했다. 엄인섭은 1908년 여름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한 연해주 의병의 중견 지도자였다. 우영장 안중근과 함께 좌영장으로서 의병부대를 지휘한 이였다. 임국정 자신과 개인적 인연도 남달랐다. 우랄산맥에서 벌목노동을 마치고 돌아올 때 그와 함께 의형제 결의까지 한 사이였다. 외국어 능력이 출중했다. 연해주에서 성장한 만큼 러시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했다. 무기 밀매 같은 은밀한 일을 추진하려면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임국정은 아무 걱정 말라고 동료들을 안심시켰다.

다행히 무기 구매 계약은 잘 진행됐다. 비밀 담판에 나갔던 임국정이 사흘 만에 되돌아와 밝은 얼굴로 보고했다. 소총 1천 자루, 탄약 100상자, 기관총 10문을 좋은 시세에 거래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도합 3만2천여원에 해당하는 무기였다. 오늘날로 치면 32억원어치였다. 1월30일 착수금 5만루블(일본돈 1만엔)을 건네고, 이튿날 31일 밤 러시아 군용 자동차에 약속된 분량의 무기를 적재하며, 곧바로 얼어붙은 아무르만을 건너 바라바시 북쪽에 위치한 이도구(二道溝) 방향으로 수송하겠다고 약속했다. 청년들은 기쁨과 함께 긴장감을 느꼈다. 얼마나 간절히 바라던 무기인가. 단숨에 1천 명 규모의 대단위 독립군을 편성할 수 있는 장비였다.

그날 저녁, 김하석 군무부장이 찾아왔다. 뜻밖의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권총과 수류탄을 빌려달라고 했다. 현지 청년들이 일본군 병영 내부에 철병을 촉구하는 선전 삐라를 살포할 예정인데, 거사 당일에 호신용 무기를 갖기 희망한다고 했다. 달리 구할 곳이 없으니 하루이틀만 빌려달라는 말이었다. 반발이 있었지만 임국정이 승낙했다. 동료들은 그 판단을 존중했다. 책임자 윤준희를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의 권총과 수류탄은 김하석에게 인계됐다.


밀정 통해 동향 파악하던 일본 경찰


적은 항상 우리 안에 있었다. 영화 <밀정>처럼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도 거사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일본 경찰이 심어둔 밀정 때문에 좌절을 겪는다. <밀정>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제공


합숙소 위치는 하바롭스카야 거리 5번지였다. 집주인 임씨는 조선시대 종9품 말단 관리인 ‘참봉’이라고 불리는 이였다. 부엌과 안방 사이에 벽을 두지 않고 부뚜막에 방바닥을 잇달아 꾸민 함경도식 가옥이었다. 그 공간을 정주간이라고 불렀다. 안쪽으로 방이 여럿 있는데, 한가운데 방을 청년들이 사용했다. 그 방에는 윤준희가 관리하는, 거액의 지폐와 기밀문서를 넣은 철제 상자도 보관돼 있었다.

1월30일 밤이었다. 내일 저녁에 있을 대규모 무기 인수를 앞두고 청년들은 들떠 있었다. 최봉설과 한상호는 알고 지내는 사이인 지영감네 집을 방문해 즐겁게 놀았다. 술도 마시고 국수도 먹으며 밤이 깊도록 놀았다. 자고 가라는 주인의 친절한 권유를 사양하고 합숙소에 돌아왔다. 밤 11시쯤이었다. 북간도 용정 청년 나일(羅一)이 와 있었다. 반일 혁명 의식이 강렬하지만 ‘15만원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무람없이 신뢰하는 사이였으므로 그날 밤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밤 12시쯤 다섯 청년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이 들었다.

새벽 3시였다. 일본군 헌병대 1개 소대 병력이 임 참봉 집을 에워쌌다. 밀정의 길 안내를 받았기 때문에 명확히 표적할 수 있었다. 러시아인 경찰관 2명도 대동했다. 외교 문제를 고려해 사전에 연해주 경찰 당국과 교섭한 결과였다. ‘살인강도범’이 신한촌에 잠복해 있음을 탐지했으므로 범인 체포 과정에 입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게 받아들여졌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비로소 헌병대 병력을 출동시켰다.

고등경찰 기토 가쓰미가 이 과정을 지휘했다. 그는 ‘외무성 촉탁 조선총독부 통역관’ 직함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 파견된 경찰 간부였다. 조선 강점 뒤 10여 년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붙박이로 근무 중이었다. 밀정을 통해 ‘범인’ 동향을 낱낱이 들여다보던 그는 마침내 디데이를 잡았다.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많은 예산을 들여 오랜 기간 스파이를 양성해온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출입문에서 네 번째 자리에 누웠던 최봉설은 잠결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정주간에서 임 참봉이 누구냐고 물었다. 조선말로 답하는 게 들렸다. “일본 헌병대에서 왔으니 문을 벗기시오!” 화들짝 잠이 깬 최봉설은 동료들을 서둘러 깨웠다. 그새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방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총부리와 손전등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 사람당 헌병 3명이 달라붙었다. 하나는 총을 겨누고 다른 둘은 오랏줄을 들고서 결박하기 시작했다. 둘째 열에 누운 윤준희만이 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완강히 저항하며 권총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자던 중에 예기치 않은 기습으로 당황해서인지 금방 제압되고 말았다.

최봉설에게도 세 사람이 달려들었다. 그는 결심했다. 나 혼자서라도 마지막 힘을 다 써야 하겠다고. 그새 헌병들은 상황이 종료됐다는 듯 긴장감이 다소 풀려 있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오는 두 헌병의 콧등을 주먹으로 가격하고 그 옆에 선 군인의 급소를 발길질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총 든 군인은 박치기로 넘어뜨렸다. 빠르기가 비호같았다.


홀로 가까스로 탈출해 도주한 최봉설


복도로 나갔다. 정주간에 대기하던 헌병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팔을 잡은 놈, 목덜미를 붙잡은 놈, 등짝 옷 덜미를 쥔 놈 등 제각각이었다. 최봉설은 뛰어나가던 기세에 더욱 힘을 가해 몸을 내뺐다. 그바람에 어설프게 신체 한 부분씩을 쥐고 있던 군인들이 구들 위로 나자빠졌다.

그는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좋아했다. 학생 시절 간도 연합운동회 때 달리기 경주에서 매번 1등을 독차지했다. 그래서 ‘날아다니는 최봉설’이라고 일컬었을 정도다.

정주문을 나섰다. 총을 짚고서 무심히 서 있는 헌병 하나가 보였다. 그쪽 위치가 한두 계단 낮았다. 최봉설은 뛰면서 공중으로 몸을 날려 그자의 가슴팍을 찼다. 얼음판 위로 나자빠지는 헌병 모습이 보였다.

이제 마당이었다. 헌병이 여럿 모여 있었다. 마당 너머 큰길에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여러 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반대편 담장 쪽으로 몸을 날렸다. 판자를 잇대서 짠 나무담장이었다. 함경도 방언으로 ‘장재’라고 불렀다. 여러 집이 잇달아 자리잡은 탓에 반대편 골목으로 나가려면 여러 장재를 뛰어넘어야 했다. 얼추 헤아려도 열 개는 넘었다.

헌병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장재를 뛰어넘는 최봉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는 이집 저집 장재를 무사히 뛰어넘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재를 넘을 때 오른쪽 팔에 총을 맞았다. 솜 넣은 내복을 입고 있었다. 총 맞은 곳에 불길이 일었다. 그는 눈 쌓인 밭에 드러누워 불을 껐다. 불은 껐지만 피가 흘렀고, 통증이 몰려왔다. 오른팔을 전혀 쓸 수 없었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었다. 이제는 추격을 따돌려야 했다. 산등성이에 비스듬히 자리잡은 신한촌 지형을 고려해 산 아래쪽으로 뛰었다. 아무르스카야 거리, 멜리니콥스카야 거리, 젤레즈노다로즈나야 거리를 차례로 횡단했다. 그 끝은 바다였다. 한겨울이라 바다가 얼어 있었다. 얼어붙은 아무르만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건너편 육지까지 거리는 16km였다. 40리 길이었다. 최봉설은 바다를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아무르만을 향해 뛰었다. 아무르만은 한겨울에 얼어붙기 때문에 으레 교통로로 사용되곤 했다. 사람과 말은 물론이고 자동차까지 건널 수 있었다.

1월 말 블라디보스토크의 겨울 온도는 영하 20∼30℃를 오르내렸다. 한밤중인데다 강한 바닷바람이 거침없이 불었다. 체감 온도는 더 낮았다. 잠자던 중 느닷없이 습격당했기 때문에 최봉설은 옷을 충분히 갖춰입을 수 없었다. 양말과 내복을 입었을 뿐이다.

그는 얼어붙은 바다 위를 뛰었다. 왼팔로 총 맞은 오른팔을 쥐고서 달렸다. 절반쯤 건넜을 때다. 아무르만 한가운데였다. 거기에 또 하나의 난관이 버티고 있었다. 바닷물이 얼지 않은 채 흘렀다. 절망감이 몰려왔다. 얼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퇴양난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다시 육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한촌에서 3km 떨어진 브타라야 레츠카 철도역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역전 큰 바위 밑에 도착했다. 어느덧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총상 입고 온몸이 얼어붙었는데 과연 어디로 가야 살 수 있을까?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는 신한촌에 되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해 분산 유숙할 때 머물렀던 채성하의 여관을 떠올렸다. 더욱이 그 집에는 딸 채계복(蔡啓福)이 머물고 있었다. 서울 경신여학교에 유학하는 중 3·1운동에 참여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선 애국부인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채성하의 집은 아무르스카야 거리 22번지에 있었다. 피습당한 합숙소 임 참봉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최봉설은 살금살금 여관에 접근해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최봉설의 기대는 적중했다. 그는 채씨네 가족의 진심 어린 보호를 받았다. 운도 좋았다. 때마침 여관에 투숙 중이던 여의사 이혜근의 집도로 오른팔에 박힌 탄환을 빼냈다. 적절한 응급조치도 받았다. 여자들은 최봉설의 피 묻은 옷을 벗기고 얼어붙은 양말을 가위로 뜯어냈다. 온몸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칭칭 감았다. 하지만 최봉설의 상태는 심각했다. 눈과 입을 빼고 온몸이 얼어 있었다. 몸이 녹으면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신음하는 환자를 간호하며 채계복은 안타까워 흐느꼈다.

채성하는 지혜로운 이였다. 여관은 위험했다. 환자를 안전하고 믿을 만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는 가까운 곳에 개점한 아들 채창도의 가게를 선택했다. 가게 한쪽에 비밀 공간을 만들었다. 새로 벽지를 발라 밖에선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곳에 환자를 은밀히 수용했다. 가족 중에선 오직 채계복만 드나들게 했다.

병상에 누운 최봉설은 자나 깨나 끌려간 동료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악행에 얼마나 고생할지, 고문을 이겨낼 수 있을지, 말 못할 불행을 겪지나 않을지 근심이었다. 게다가 끝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무엇이 잘못됐기에 헌병대의 습격을 받았을까? 도대체 누가 밀정이란 말인가? (다음회에 계속)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206.html 




1920년 일본 현금 호송대 습격해 탈취한 자금으로 독립군 무장 계획한 ‘철혈광복단’
좁혀오는 검거망 피해 150억원 상당 현금 들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데…



1920년 1월4일 북간도의 비밀결사인 ‘철혈광복단’이 일본은행의 현금 수송 행렬을 습격했다. 탈취한 자금으로 조선독립군을 무장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들은 성공했을까.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마적떼가 만주의 열차를 습격하는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48km였다. 두만강변 국경도시 회령에서 북간도 용정에 이르는 거리다. 조선의 전통적 거리 측정 단위로는 120리 길이다. 사람의 평균 걸음으로 1시간에 10리쯤 걸을 수 있으니 새벽 일찍 출발해 부지런히 걸으면 저녁 무렵 도착한다. 아직 철도나 자동차 도로가 없던 때다. 두 곳을 오가려면 걷거나 말을 이용한다.

1920년 1월4일은 월요일이었다. 무장 경관들의 호위를 받는 현금 수송 행렬이 아침 8시30분 회령을 출발했다. 호송대는 모두 6명으로 호위 경관 2명과 은행원, 우편물 호송인 등이다. 이들의 임무는 일본 식민지 금융기관인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거액의 현금 행낭을 인수해 용정지점에 안전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 돈은 청국 연길과 조선 회령을 잇는 길회선 철도 부설 자금이었다. 철도 부설권은 1909년 간도협약 때 청국이 일본에 양도했다.


현금 수송 행렬 습격한 조선인 마적


현금 수송은 긴장되는 업무지만 호송대에 낯선 일은 아니었다. 최근 3개월 동안 두 차례나 같은 일을 했다. 첫 번째는 1919년 10월 중순 35만원을 옮겼고, 두 번째는 11월 중순 28만원을 운반했다.①

현금을 담은 철제 궤와 우편물 행낭을 실은 말 두 마리를 앞세우고, 무장 경관들이 말에 올라탄 채 뒤따랐다. 마상에 올라앉은 두 경관은 위풍당당했다. 경관 정복을 입고 허리에 군도를 차고, 어깨에 장총을 멘 채 옆구리에는 육혈포까지 장착했다. 다른 대원들도 권총을 휴대했지만 말고삐를 쥐거나 직접 걸어야 했다. 일행은 도중에 점심 식사를 하려고 신흥평이라는 마을에 머문 것을 제외하고 쉼없이 이동했다.

호송대는 해가 진 뒤 용정에 닿을 수 있었다. 저녁 6시 무렵이었다. 해가 짧은 겨울철이라 일몰 뒤 40분쯤 지난 때였다. 음력 보름날이라서 달이 밝았다. 6km만 더 가면 목적지였다. ‘동량(東良) 어구’라 부르는 골짜기에 접어들 무렵 멀리 용정 시내의 불빛이 보였다. 앞서가던 선임 경관 나가토모(長友嘉相次) 순사가 말했다. “저 아래 보이는 전기불빛은 용정 일본영사관 지붕 위에 비치는 것이다. 이제는 다 온 것이나 다름없다.”② 그 말에 일행은 긴장을 풀었다. 약속이나 한 듯 담배를 빼어 물었다.


그때였다. ‘사격!’ 신호와 함께 한 무리의 검은 그림자가 총을 쏘며 달려들었다. 이들은 중국인 마적처럼 모자와 의복, 신발을 갖춰 입었다. 달빛 아래 교교하던 골짜기가 총소리와 고함으로 뒤덮였다. 맨 앞에서 호송대를 이끌던 나가토모 순사가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 옆에 동행하던 회령 거주 조선인 상인 진길풍(陳吉豊)도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던 다른 대원들은 요행히 탄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맞서 싸우는 대신 안전을 택했다. 느닷없이 닥친 일이라 어찌할 줄 몰랐고, 습격자 수도 호송대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같았다.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사건 발생 다음날 일본군 회령 헌병대가 작성한 정보 보고서가 남아 있다.③ 이 문서에 ‘조난’ 경위와 피해 상황이 기록돼 있다. 문서를 보면 습격자는 ‘총기를 휴대한 조선인 마적 십수 명’이었다. 범인을 ‘조선인 마적’이라 지목한 점이 눈에 띈다. 마적 복장을 한 것이 신분을 은폐하는 데 보탬이 됐지만, 끝내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감추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습격자 수가 10명이 넘는다고 기재한 점이 이채롭다. 수를 과대하게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살아남은 호송대원들의 심리가 반영됐다.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피신 행위가 불가항력이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 같다. 사망한 호송대원은 2명이었다. 복부 관통상을 입은 중상자는 인근 병원에 후송됐으나 이튿날 절명했다. 수송마 두 마리는 탈취당했고, 말 등에 실었던 철제 궤와 우편물 행낭도 빼앗기고 말았다.


150억원에 해당하는 현금 탈취


15만원 탈취 사건의 주역들인 최봉설과 임국정. 1919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촬영. 독립기념관 제공


짐을 실은 수송마도 중요했다. 총소리에 놀라 허둥대는 사이 윤준희(26·尹俊熙)가 말에 올랐다. 또 다른 말은 최봉설(23·崔鳳卨)이 낚아챘다. 두 사람은 골짜기 서쪽 산등성이로 말을 몰았다. 내심의 목표 지점과 반대 방향이었다. 눈 위에 찍힐 말 발자국을 서쪽 화룡(和龍)현 방면으로 유도하려는 행동이었다.

그 뒤를 두 사람이 따라붙었다. 타고 갈 말이 없어 부득이 뛰어야 했다. 임국정(25·林國禎)과 한상호(21·韓相浩)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따라갔다.

습격자는 도합 6명이었다. 남은 두 사람은 사전에 약정한 대로 대열에서 벗어났다. 박웅세(朴雄世)와 김준(金俊)은 습격 작전에만 가담하고 이후에는 독립적으로 행동하자고 약속했다. 뒷날 두 사람은 각자의 행로를 걸었다. 박웅세는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고 박건(朴健)으로 개명했으며, 사회주의 항일단체 ‘적기단’의 유명한 구성원이 되었다. 문필이 뛰어났던 김준은 재러시아 고려인 사회에서 언론인이자 작가로 활동했다.

습격대는 비밀결사 ‘철혈광복단’ 단원이었다. 이들은 1910년대 북간도의 3대 항일 중학교로 이름 높던 명동(明東)중학, 창동(昌東)학원, 광성중학 졸업생 가운데 선발됐다. 민족의식이 높고 반일 혁명운동에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철혈광복단은 북간도 3·1혁명을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19년 3·13 용정 만세시위를 이끌고, 그해 7월 북간도 민족운동 방향을 평화시위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 단체였다.④

산속으로 4km쯤 들어갔을까. 습격자들은 말을 멈춰 세웠다. 전리품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보름달이 밝게 비치는 공간에서 짐을 부렸다. 철제 궤에는 고액권 지폐가 띠지로 묶인 채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5원짜리 지폐 200장을 묶은 1천원 다발이 100개, 10원짜리 지폐 100장을 묶은 1천원 다발이 50개였다. 도합 15만원이었다.

놀랄 만한 거금이었다. 1919년 당시 경기도 수원에 사는 4인 가족이 가장 월급 25원으로 근근이 생활하던 시절이다.⑤ 전리품 15만원은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150억원에 해당한다.

탈취금 전액을 무기 구입에 쓰면 조선독립군의 전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그즈음 블라디보스토크에 은밀히 거래되는 무기시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소총 1자루와 탄환 100발’ 한 세트를 30원 정도면 살 수 있었다. 개인 화기만이 아니다. 공용 화기인 기관총 1문을 구매하는 데 200원이면 족했다.


500명 부대 9개 무장할 수 있는 돈


‘15만원 탈취 사건’ 현장 기념비. 독립기념관 제공


독립군 부대의 실제 무장 상태를 보자. 1920년 7월 임시정부 간도 특파원 왕삼덕이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부대의 군인은 500명, 소총 500자루, 공용 화기인 기관총 3문이 있었다.⑥ 말하자면 15만원이란 돈은 북로군정서 규모의 독립군 부대를 9개나 더 편성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다음 목표는 거액의 현금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자면 말 발자국을 따라 뒤쫓아올 추격대도 따돌려야 했다. 네 사람은 역할을 분담했다. 한 사람은 추격대를 유인하기로 했다. 임국정이 그 임무를 맡았다. 그는 말을 타고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기로 했다. 백두산 방향 서쪽 산악지대 깊숙이 들어가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말 두 마리를 몰고 즉각 길을 떠났다.

다른 세 사람은 현금 다발 150개를 나누어 배낭에 넣고 짊어졌다. 밤을 새워서라도 속히 안전지대로 이동해야 했다. 염두에 둔 목표지는 용정 동북쪽에 위치한 왕청(汪淸)현의 산악지대 의란구(依蘭溝)였다. 거기에는 철혈광복단 동지이자 사냥을 업으로 하는 김포수가 아내와 단둘이 거주하는 외딴 가옥이 있었다. 그곳에 집결하기로 약속했다.

세 사람은 지체 없이 길을 떠났다. 그들은 도회지인 용정을 우회하여 국자가(局子街·오늘날 연길) 교외에 위치한 와룡동까지 약 80리 길을 걸었다. 32km나 되는 눈 쌓인 산길을 밤새 걸었다.

와룡동에는 최봉설의 집이 있었다. 새벽닭이 울 즈음 도착했다. 머지않아 날이 밝을 터이므로 의심받지 않게 옷을 갈아입고, 운송 수단도 바꿔야 했다. 청년들은 한복 두루마기로 갈아입었다. 두루마기는 품이 넉넉해 돈다발을 감추기에 적합했다. 운송 수단도 얻었다. 최봉설의 아우 최봉준의 도움을 받아 소달구지를 동원해 값비싼 화물을 수송했다. 와룡동에서 의란구 김포수의 집까지 40리 길, 16km였다.

의란구 김포수의 집은 외딴 산속에 있는데다 향후 행로의 출발점으로 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북쪽으로 향하면 무장투쟁의 한 거점인 하마탕(哈蟆塘), 동쪽으로 향하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갈 수 있었다. 청년들은 이곳에서 뜻밖의 인물과 조우했다. 연해주 조선인들의 자치단체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장으로 재임 중인 김하석(金河錫)이 그곳에 있었다. 우연이라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김하석은 네 청년들에게 블라디보스토크행을 권했다. 그곳에서는 손쉽게 무기를 구매하고, 일본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윤준희와 임국정이 동의했다. 그러나 다른 두 청년은 이견을 보였다. 전설의 의병장 홍범도가 본부로 삼은 하마탕을 찾아 북행하자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양쪽에서 심각한 토론이 벌어졌다. 거금을 가지고 어디로 갈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마침내 발각된 범인의 윤곽


용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서는 발칵 뒤집혔다. 현금 호송대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경관대 11명을 현장으로 급파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사건 현장과 주변을 세밀하게 수색했다. 범인이 누군지, 어디로 도주했는지 추론할 단서가 필요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사건 현장에서 60m 떨어진 농경지에서는 구식 엽총의 총신이 발견됐고, 서북쪽 100m 지점 산기슭에 버려진 우편물 행낭을 발견했다. 재암골, 남양동, 동량 같은 사건 현장 부근 조선인 마을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이틀에 걸친 노력이 헛수고였다.

일본 관헌들은 무차별적으로 수사를 확대했다. 평소 반일 성향을 보이던 조선인 마을과 인물에 대해 아무 근거 없이 야만적인 압박을 가했다. 북간도 주요 도로와 고개에서는 오가는 사람들을 검문했다. 반일 성향의 명문 중학교 소재지는 가혹한 구타와 수색의 대상이 됐다. 명동학교 소재지 장재촌, 창동학원 소재지 와룡동이 곤욕을 겪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별 증거 없이 구타하고 수색해 한동안 청국과 러시아 국경지대의 교통이 두절되기도 했다.

그뿐인가. 일본은 청국 정부의 북간도 행정 책임자인 연길도윤에게 범인 체포에 협력해줄 것을 요구했다. 연길도윤은 요구에 따랐다. ‘포고 제2호’를 발표하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일본돈 5원 지폐와 10원 지폐를 사용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청국 관청에 보고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일본 관헌의 범인 추적이 급진전을 보인 것은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사무원 전홍섭(31·全洪燮)을 체포하면서다. 경찰은 내부자를 의심했다. 현금 수송은 소수만 아는 극비 사항인데 어떻게 범인이 알았을까? 내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조선인 은행원들이 경찰에 불려갔다. 그 결과 평소 반일 조선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전홍섭이 표적이 됐다.

마침내 전홍섭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궁금해하던 정보들이 입수됐다. 범인의 윤곽이 떠올랐다. 조선은행권 15만원 탈취 사건에 가담한 범인의 이름과 신상이 경찰에 발각되고 말았다. 1월10일 와룡동을 일제 수색한 것은 일본 관헌이 범인 신상을 정확히 파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날 일본 경찰 37명과 청국 관헌 53명은 와룡동을 포위하고 100여 민가를 전부 수색했다. 급기야 최봉설의 아버지와 동생 등 가족을 체포하고 범인 소재지를 밝히라며 가혹한 고문을 했다.


불가능해 보이던 계획이 성공?


15만원 탈취 사건의 네 주역이 김하석과 더불어 중국~러시아 국경을 넘은 것은 사건 발생 3일째 되던 날이다. 그들은 하마탕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를 행선지로 삼기로 결정했다. 하마탕 노선을 주장하던 최봉설과 한상호가 다수결을 존중해 자신의 의사를 철회한 것이다. 그들이 포시에트 항구에서 블라디보스토크행 기선에 탑승한 것은 사건 발생 4일째 되던 날이다. 밤 9시 기선이 출발하며 뱃고동 소리를 길게 울렸다. 기선에 탑승한 네 청년은 안도감을 느꼈다. 일본 은행을 습격하여 얻은 자금으로 조선독립군을 무장시킨다는 무모하고 불가능해 보이던 계획이 성공한 것만 같았다.⑦(다음회에 계속)


참고 문헌

① 高等法院刑事部, ‘大正10年刑上第42,43號 判決(全洪燮 등 4인) ’, 1921. 4.4. <독립군의 수기> 국가보훈처, 1995, 334쪽

② 崔溪立, ‘간도 15만원 사건에 대한 40주년을 맞으면서, ’ 1959. 1, 위의 책, 289~290쪽

③ ‘會憲機第1號,於間島公金及郵便物遭難ノ件’ 1920. 1.5. <한국독립운동사자료 38> 국사편찬위원회, 2002, 321~322쪽

④ ‘간도 십오만원 사건, 최계립 회상기 ’, 1958. 6.15. <이인섭과 독립운동자료집 Ⅳ> 독립기념관, 2011, 171쪽

⑤ ‘절약의 實例, 25원으로 네 식구가 살아가오’ <매일신보> 1919. 8.3

⑥ <조선민족운동연감>, 金正明 편, <조선독립운동 2> 東京, 原書房, 258쪽

⑦ 최계립, 앞의 글, 295쪽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100.html 




폭탄 반입 기도해 검거된 중립공산당 핵심 김한
 조선 자유와 해방 당위 설파한 최후진술로 보복



법정에서조차 부당한 제국주의 권력에 저항한 아나키스트 박열처럼, 김한은 피고인 최후진술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정면 비판하다 판사의 보복 선고를 받았다.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제공


검거 선풍이 불었다. 1923년 1월17일 서울 삼판통(후암동)과 1월22일 효제동 총격전이 발발한 뒤 일본 경찰은 연루자 체포에 혈안이 됐다. 총격전의 주인공 김상옥이 이미 사망했는데도 그랬다. 현직 경관 4명이 사살당하고 총상을 입은 것에 경찰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을 품었다. 김상옥과 조금이라도 접촉했거나 관련된 사람이라면 옥석을 가릴 것 없이 마구 잡아들였다.

김한(金翰)도 그 속에 있었다. 한때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법무부 비서국장을 지냈고, 합법적 사상단체인 무산자동맹회 상임위원으로 재임 중이던 그는 37살의 팔팔한 장년이었다. 그가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된 것은 1월28일이었다.① 효제동 총격전이 일어난 지 열흘 되던 때였다. 그날 체포된 사람은 김한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두 사람이 김상옥 사건 연루 혐의로 경찰에게 붙잡혔다.② 연루자들을 낱낱이 적발하기 위해 경찰이 큰 힘을 들이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고문으로 병상에 누운 채 재판받아


되돌아보면 김상옥의 효제동 은신처가 발각된 것도 한 연루자의 자백 탓이었다. 경성우편국 소속 우편배달부로 일하는 전우진(全宇鎭)이 고문에 못 이겨 비밀을 토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3·1혁명 시기에 비밀결사 ‘혁신단’ 활동을 함께한 김상옥의 오랜 동지였다. 이번에도 비밀리에 잠입한 김상옥을 변함없이 도와주었다. 보기를 들면 경성역 수화물 취급소에 배달된 김상옥의 화물을 대신 수령했고, 비밀 편지를 여러 관련자에게 전달했으며, ‘불온 문서’ 제작을 거들었고, 회합 장소와 숙식 등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신뢰할 만한 동료임에도 그는 고문에 꺾이고 말았다. 효제동 은신처를 발설한 데 이어 경찰대를 이끌어 현장까지 안내하는 일마저 해야 했다.③

전우진의 배신은 김상옥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이 은밀한 내막은 가족도 알고 있었다. 김상옥의 부인 정진주 여사는 해방 이후 신문 기자 인터뷰에서 그 사실을 밝혔다. ‘동지였던 전모씨의 배신’ 탓에 남편이 죽었노라고.④ 그럼에도 전우진은 김상옥 사건에 연루돼 2년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가 됐다. 1990년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애국장을 서훈받았다.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함없다.⑤

체포된 사람들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경찰들은 독이 올랐다. 시국사건이든 일반 형사사건이든 가리지 않고 피의자를 인간 이하로 대하는 것이 그들의 평소 습성이었다. 하물며 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된데다 현직 경관들이 살해되고 부상을 입지 않았는가. 취조 경찰들은 분노와 복수심에 휩싸여 있었다. 체포된 사람들에게 심각한 폭행과 가혹행위가 이뤄졌다.

28살 미혼 여성 이혜수를 보기로 들 수 있다. 김상옥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그녀는 경찰 취조 중에 얼마나 참혹한 고문을 당했는지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의 상태는 위중했다. 심지어 사건 발생 11개월이 지난 뒤 열린 재판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했다. 이혜수는 병상에 누운 채 재판정에 나와야 했고, 침대에 누워 신음 소리로 가족의 말을 거쳐 겨우 문답에 응할 수 있었다. 그녀는 3·1혁명 때도 비밀결사 애국부인단에 가담한 경력이 있었다. 신문 기사의 표현에 따르면, ‘혁명 부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⑥


경찰 취조가 끝난 뒤 ‘죄질’이 무겁다는 이유로 검찰에 송치된 이는 도합 19명이었다. 이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김상옥과 같이 비밀결사 활동을 해온 동료들이었다. 1919년 ‘혁신단’에 함께 소속된 신화수(27), 윤익중(28), 정설교(27), 전우진(41), 이혜수가 그들이다. 이 중 앞자리에 거론한 세 사람은 1920년 김상옥과 함께 암살단 사건에도 연루됐다. 상하이에서 국내로 잠입할 때 동행한 안홍한(21)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이들은 범죄의 형적이 뚜렷하고 증거가 충분하다는 이유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의해 기소됐다. ‘불온’ 인쇄물을 제작한 혐의를 받은 서병두(44)도 같은 처분을 받았다.


김상옥 사건 연루자 가운데 가장 중형



1929년 42살 때 경찰서에서 사진 찍은 김한(왼쪽)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필적(1928년 1월1일 김재봉에게 쓴 연하장). ‘마포구 224, 김한’이라고 쓰여 있다. 김윤 제공


다른 한 부류는 김상옥에게 숙식과 활동의 편의를 제공한 사람들이었다. 연락과 통신의 편의를 제공한 여관업자 이수영(37)과 승려 이종욱(40), 지방도시인 함경남도 원산에서 숙소를 제공해준 주광보(19)가 그들이었다. 효제동 은신처를 제공한 이태성(63) 집안의 경우 일가족 6명이 모두 고초를 겪었다. 이 집은 ‘딸 부잣집’이었다. 아내 고성녀(61)와 맏딸 이혜수를 비롯한 네 딸이 모두 경찰 취조를 감당해야 했다. 김상옥의 가족도 핍박을 받았다. 친동생 김춘원(32)과 매제 고봉근(28)이 곤욕을 치렀다.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경찰서에 갇혀 두 달 동안 끔찍한 취조를 받은 뒤에야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증거 부족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김한은 이채로운 존재였다.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김상옥과 비밀결사 활동을 함께한 적이 없었다. 이렇다 할 네트워크도 맺고 있지 않았다. 혈연이나 출신 지역의 공통성 같은 생래적 연줄도 없었다. 뭔가 편의를 제공한 적도 없었다. 김한은 다른 피의자들과 아무런 공통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김상옥과 가장 깊숙하고도 위험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김한의 피의 사실은 가장 엄중했다. 그는 적어도 5회에 걸쳐 대리인을 통해 재상하이 의열단장 김원봉과 비밀 교신을 했고, 그 결과 대규모 음모를 계획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국내에 다량의 폭탄을 몰래 반입해 조선 내부를 일거에 동란에 빠트린다는 계획이었다. 김한은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김원봉에게서 2천원의 자금까지 수령했다고 한다.⑦ 적은 돈이 아니었다. 당시 일간 신문사 기자 월급이 40원이고, 총독부 서기관의 월급이 50원이었다. 또 일용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원 또는 1원10전 하던 때였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2억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취조 결과에 따르면 폭탄은 미처 반입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한은 의열투쟁을 감행하려 국내에 잠입한 김상옥에게 그것을 넘겨줄 수 없었다. 일본 사법 관료들이 보기에, 범죄행위는 실행되지 않았지만 죄질이 심각했다. 김한은 김상옥 사건 연루자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형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1년6개월에서 3년에 이르는 징역형을 구형받았는데, 김한의 구형량은 징역 5년이었다. 대략 곱절이었다.

김한이 체포되자 그가 몸담은 비밀결사 구성원들은 잔뜩 긴장했다. 비밀결사의 존재가 탄로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김한이 가담한 조직은 3·1혁명 이후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비밀결사였다.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고, 노동자를 비롯한 무산자 대중을 위해 일하며, 조선혁명의 대의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혁명가들의 결사였다.

이 비밀결사의 명칭은 ‘조선공산당’이었다. 이름이 같다고 혼동해서는 안 된다. 뒷날 1925년 전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단일한 공산당을 표방하며 결성된 ‘조선공산당’과 다른 것이었다. 둘을 구분하기 위해 김한이 가담한 1922년의 비밀결사를 ‘중립 조선공산당’이라고 부르는 게 적당하겠다. 줄여서 ‘중립당’이라고 불러도 좋다. 실제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그 단체를 가리켜 ‘중립공산당’이라거나 ‘중립당’이라는 호칭으로 즐겨 불렀다.


일 꾸미고 작전 짜는 데 탁월


왜 ‘중립’인가? 3·1운동 이후 조선 내부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이 도도히 흘러들었는데, 이 흐름을 주도한 단체는 해외에 기반을 둔 두 개의 ‘고려공산당’이었다. 그러나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불리는 두 공산당은 조선 국내의 신진 사회주의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서로 다투는 게 옳지 않고 둘 다 정책이 부적절하다는 것이 김한을 비롯한 국내 신진 사회주의자들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제3의 공산당을 세우려 했다.

이 비밀결사가 언제 만들어졌는지에는 다소 논란이 있다. 가장 이른 것으로 1921년 메이데이(5월1일)에 설립했다는 정재달의 주장이 있지만,⑧ 자기 단체의 역사가 오래된 것임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소급한 것으로 판단된다. 1922년 1월 즈음 성립됐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그해 1월19일 ‘무산자동지회’ 명칭의 합법적 사상단체가 등장한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합법 영역의 공개 단체와 비밀결사를 거의 같은 시기에 조직하는 것이 상례였다.

중립당에는 3·1혁명 투사들이 속속 가담했다. 감옥에 갇혔다가 이제 막 출옥한 청년들이 사회주의운동 대열에 들어왔다. 조봉암의 회고에 의하면 1922년 경성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이끈 두 지도자가 있었다. 바로 김한과 김사국이었다. 조봉암은 이들을 가리켜 ‘양웅’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스타일과 개성이 달랐다. 김한은 책사(策士)형이고, 김사국은 투사(鬪士)형이었다.⑨ 김한은 일을 꾸미고 작전을 짜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에 비해 김사국은 뜻이 굳세고 강직해 자기가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끝까지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나아갔다고 한다.⑩

시인 황석우가 남긴 인물평도 비슷했다. 그가 보기에 김한은 일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업을 추진할 때 자신의 모든 정열과 재략을 넘치도록 발휘했다고 한다. 꾀가 많고 신출귀몰하는 재주꾼이었다. 만약 혁명가로서 사명감과 정열이 없었더라면, 김한은 천성으로 미뤄볼 때 전율할 만한 악당의 괴수가 됐을 것이라고 평했다.⑪

두 사람은 중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나란히 선임됐다. 둘이 악수하니 조선의 사상계가 크게 요동쳤다. 두 사람은 신진 사회주의자들을 이끌고 기존 양대 고려공산당을 배격하는 일련의 캠페인을 전개했다.

그중 첫 번째는 그해 1~2월에 추진된 김윤식 사회장 반대운동이었다. 구 한국의 개화파 대신이던 김윤식의 장례식을 조선 최초의 사회장으로 성대하게 치르려 했던 상하이파 공산당과 민족주의 그룹의 의도를 저지했던 것이다. 4월에는 청년운동 내에서 상하이파 공산당의 영향력을 약화했다.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회 총회 석상에서 서울청년회를 비롯한 5개 회원 단체의 탈퇴를 단행케 한 일이 그것을 의미했다. 6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상하이파 공산당에 소속된 임원 6명을 제명했다. 또 서울청년회 제5회 총회 석상에서 상하이파 출신 임원 5명을 축출했다. 9월에는 노동대회라는 단체에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소속의 기존 간부들을 배제하고 노동자적 성격을 강화했다.


노동운동 헤게모니 장악한 중립당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1922년은 노동자가 비로소 직접 노동운동을 개시한 해라거나, 민중에게 혁명의 씨앗을 뿌리고 해방의 길을 제시한 첫해였다는 경찰 쪽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⑫ 국내 민중운동의 헤게모니는 신진 사회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갔다. 김한과 김사국이 공동으로 이끌던 중립당이 해낸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협력이 항구적으로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둘은 그해 말쯤 갈라섰다. 달리 말하면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분열 과정에서 중심인물이 됐다. 김한은 뒷날 ‘화요파’라는 공산그룹의 수장이 됐고, 김사국은 ‘서울파’라고 불리는 비밀결사를 대표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불일치한 지점은 여러 가지였다. 그중 큰 것 하나가 바로 의열투쟁 전술에 대한 태도였다. 김한은 의열투쟁을 가리켜 3·1혁명 이후 가라앉고 있는 대중의 투쟁 의욕을 북돋는 수단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 때문에 해외의 의열단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대규모 폭탄 반입 공작을 지휘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김사국은 의열투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것은 광범한 대중을 투쟁으로 발동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며, 대중과 운동단체의 괴리를 심화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각각 제 길을 걸었다. 김상옥 사건은 이처럼 초창기 국내 사회주의운동이 분열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23년 5월17일, 경성지방법원 재판정이었다. 김상옥 사건 연루자들에 대한 제2회 공판이 열렸다. 피고인 최후진술이 허용되자 김한은 작심한 듯 발언을 토해냈다. 그는 얼굴에 세상을 비웃는 듯한 빛을 띠고 일어서서, 약 1시간 동안 흐르는 물같이 유창한 일본어로 말했다.

그의 발언 요지는 총독부의 식민지 통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총독 정치가 얼마나 조선인의 삶을 파괴하는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교육과 산업은 물론이요, 어느 방면을 보더라도 조선 사람은 ‘불평’과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인에게 남겨진 것은 총독부 법령을 위반하거나, 죽는 길밖에 없다. 김상옥 사건은 다름 아니라 총독 정치가 만든 것이라고 발언했다. 김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혁명을 언급했다. 혁명을 위험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우주 만물이 살아가는 자연법칙이라고 설명했다. 헤겔과 다윈을 인용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조선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김한의 진술은 감동적이었다. 신문기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찬 방청석을 비롯해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조리 있는 말을 숙연히 경청했다.

그러나 김한은 재판부에 보복을 당했다. 그로부터 10일 뒤 열린 선고 공판에서 재판장 미쓰야(三矢) 판사는 그에게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순간 방청석이 술렁거렸다. 검사 구형보다 2년이나 더 무거운 형량이었기 때문이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방청객들은 법정을 나서면서 울분을 토했다. 불평을 부르짖고 판사를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다.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의 외조부


김한의 최후진술은 피억압자에게는 감동을 주고, 억압자에게는 보복의 칼날을 갈게 했다. 진실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의 진술은 당대인에게만 영향을 주는 데 머물지 않았다. 60년이 지난 뒤,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투쟁하다 투옥된 그의 외손자 우원식(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그 진술로부터 감동을 받았다. 자긍심과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⑬

김한의 진술에서 주목할 요소가 또 하나 있다. 끝내 비밀결사 중립공산당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외 망명자들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폭탄 반입을 모의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개인의 판단과 책임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시종일관 이렇게 진술했다. 그리하여 김한은 일본 관헌들의 야수적인 취조 속에서도 비밀결사의 동료들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진술 전략은 주효했다. 중립당은 삼엄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노출되지 않았다. 체포된 혁명가는 어떻게 진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 문헌

① ‘무산자회 간부의 검거’, <조선일보> 1923년 1월30일치

② ‘李遂榮씨도 검거’, <조선일보> 1923년 1월30일치

③ 宋相燾, <騎驢隨筆>(한국사료총서 제2집), 국사편찬위원회, 320쪽, 1955

④ ‘열사의 후예들 6: 김상옥 의사의 미망인 鄭여사’, <동아일보> 1959년 11월28일치

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http://e-gonghun.mpva.go.kr

⑥ ‘병상에 누운 대로 이혜수양 공판’, <동아일보> 1923년 12월26일치

⑦ ‘폭탄과 권총의 대음모 김상옥 사건의 공판’, <동아일보> 1923년 5월13일치

⑧ История и деятельность нейтральной коркомпартии: Доклад делегата Тену(중립공산당의 역사와 활동, 대표자 전우의 보고), с.7,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64, л.51-57

⑨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죽산 조봉암 전집> 1, 344∼345쪽, 1999

⑩ 金思國氏 永眠, <동아일보> 1926년 5월10일

⑪ 황석우, ‘나의 8인관’, <삼천리> 4-4, 29쪽, 1932년 4월

⑫ <고등경찰보> 4, 281쪽, 283쪽

⑬ 우원식, <어머니의 강>, 아침이슬, 253쪽, 2011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039.html 





남편 김영화 <밀정> 총격전 실제 모델인 암살단원 김상옥
 총독 암살 기도 후 경찰과 벌인 3시간 총격전 전모


750만 명이 관람한 영화 <밀정>의 초반부에 의열단원의 격렬한 총격전이 나온다. 인상적이다. 박진감 넘치는 액션 장면이다. 그 총격전은 역사상 실제 모델을 재현했다고 한다. 1923년 1월 김상옥의 ‘경성 천지를 진동시킨 총격전’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 속 총격전은 실제와 허구가 뒤섞여 있다. 이를 감안해 허구적 측면을 버리고 실제만으로 구성된 신뢰할 수 있는 역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글을 작성했다.

김상옥에 관한 기존 연구 성과들도 이 사건을 상세히 묘사한 바 있다. 하지만 사료상 뒷받침되지 않는 주관적 설명을 포함하거나, 대사를 넣거나, 전투 양상을 과장하는 등의 폐단이 없지 않았다. 임경석 교수는 아무 과장 없이, 사료에 뒷받침된 객관적 사실만으로 당시 상황을 구성했다. _편집자


영화 <밀정>의 초반부에 나오는 총격전. 1923년 1월 암살단원 김상옥이 조선총독부 경찰과 벌인 총격전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혹독하게 추운 날이었다. 그날 해 뜨기 직전 경성 기온은 영하 18.8℃였다. 1년 중 가장 추운 때라 할 만했다. 이틀 전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차 다니는 큰길이나 구불구불 골목길 할 것 없이 꽁꽁 얼었다.

새벽 5시였다. 그날 일출 시각이 7시49분이었으므로 동트기에는 이른 때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무리 장정들이 남산 서남쪽 기슭에 위치한 삼판통(三坂通·오늘날 후암동)의 한 민가를 은밀하게 에워쌌다. 모두 21명이었다. 종로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 소속 경관들로 이뤄진 형사대였다.


경성 천지가 물 끓듯 펄펄 끓어


그들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범인을 추적하고 있었다. 닷새 전인 1월12일 초저녁 누군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경찰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정문 앞을 지나던 행인 7명이 다쳤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의미는 중대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수사가 개시됐다. 다수의 혐의자가 붙잡혔고, 시내 요소요소에 경계망이 펼쳐졌다. 계엄령을 내린 듯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성 천지가 물 끓듯 펄펄 끓었다. 그러던 차에 동대문경찰서에 첩보가 들어왔다.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삼판통 304번지에 은신해 있다는 것이었다. 믿을 만한 정보였다.

음력 12월 초하루인지라 달이 뜨지 않았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고 추위도 매서웠다. 매우 어두웠지만 경관들은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혐의자 체포에 즉각 착수했다. 형사대는 돌격조와 매복조로 나뉘었다. 돌격조 4명의 민완 경관들이 널빤지를 잇대 만든 허술한 담장을 뛰어넘었다. 남은 경관들은 집을 에워싼 채 매복했다.


유도 2단에 날래기로 유명한 종로서의 다무라 조시치 형사부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선두에 섰다. 그 뒤를 종로서 경부 이마세 긴타로 사법계 주임과 동대문서 경부보 우메다 신타로 고등계 주임이 바짝 따랐다. 동대문서의 조선사람 장(張) 형사가 뒤를 이었다. 다무라는 혐의자가 은신한 건넌방 문을 세차게 잡아당겼다. 잠겨 있었다. 다시 한번 힘껏 잡아챘다. 그 바람에 문고리가 빠지며 왈칵 문이 열렸다.

그때 총성이 울렸다. 쉴 새 없이 연이어 울렸다. 방 안에서 권총 탄환이 쏟아져나왔다. 다무라는 심장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즉사였다.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최후를 마쳤다. 방 안에서는 하얀 눈이 깔린 바깥쪽이 잘 보였지만, 밖에서는 어두운 방 안이 보이지 않았다. 뒷걸음치던 이마세 경부는 오른쪽 손목과 왼쪽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도망치던 우메다 경부보는 등에서 어깨로 관통상을 입고 거꾸러졌다. 열어젖힌 문짝 뒤에 숨었던 장 형사만 무사할 수 있었다.

집 밖에서 매복하던 형사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종잡을 수 없었다. 요란한 총소리가 경찰이 쏘는 것인지 반대편이 쏘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총성이 그친 뒤 집 안으로 들어간 형사들은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다. 토방의 위아래와 좁은 마당에는 붉은 피가 낭자했고,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범인은 집 뒤쪽 담을 넘어 산속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를 추격하려 했으나 어둠이 가로막았다. 도망자의 행방을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권총과 폭탄으로 조선 독립에 헌신


중국 상하이 망명 중 사진관에서 찍은 김상옥의 전신 사진.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제공

 
남산에 수색망이 펼쳐졌다. 날이 밝자마자 온 산에 경찰이 쫙 깔렸다. 경기도 경찰부 지휘 아래 경성 시내 각 경찰서는 물론 인근 지방 경찰서들까지 병력을 냈다. 정복 순사 1천여 명이 동원됐다. 남산을 중심으로 광역 포위망이 구축됐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각처에 비상선을 늘어놓고, 쥐새끼 하나 도망하여 나갈 틈이 없이 엄밀히 경계”가 이뤄졌다.

그뿐만 아니었다. 경찰은 이중으로 비상선을 깔았다. 포위망이 뚤릴 것에 대비해 남산 자락의 모든 거주지를 검문하기 시작했다. 삼판통, 광희정, 동대문, 왕십리, 고양군 뚝섬 일대가 주요 수색 대상지로 꼽혔다. 가택수색을 했다. 심지어 굴뚝까지 모조리 뒤졌다. 인접 고을로 넘어가는 고갯길도 차단했다. 행여 양주 방면으로 도주할까봐 망우리고개를 경관 수십 명이 지켰다. 기마대도 출현했다. 기마 순사가 총검을 번쩍이며 요소요소 경계했다. 돌연히 경성 시내 풍경이 바뀌었다. 전시 상태나 다름없었다.

남산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이틀 전 내린 눈이 등성이와 골짜기마다 가득했다. 경찰은 눈 위 발자국에 주목했다. 추격대를 조직해 범인 발자국을 뒤쫓았다. 끊길 듯 이어지는 발자국은 삼판통에서 시작해 산을 넘어 왕십리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왕십리 방면으로 달아난 형적은 희미하게 찾을 수 있었지만 범인의 소재는 끝내 판명할 수 없었다.

쫓기는 이는 김상옥이었다. 나이는 34살. 동대문 인근에서 태어나고 자란 경성 토박이였다. 직업은 자영업자였다. 동대문 밖 남쪽 도로변에 ‘영덕(永德)철물상’이라는 상호의 번듯한 2층 가게를 지녔다. 결혼해 두 자녀가 있었다.

김상옥 삶의 행로에 전환을 가져다준 사건이 30살 때 발발했다. 바로 1919년 3·1혁명이었다. 그는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고, <혁신공보>라는 지하신문을 발간했다.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돼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김상옥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조선 독립에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10월에 석방된 그는 주저 없이 비밀결사 ‘암살단’ 결성에 참가했고 결국 경찰의 추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가 망명지 상하이를 떠나 비밀리에 조선에 입국한 것은 한 달 반 전이었다. 1922년 12월1일 경성 잠입에 성공했다. 목적은 식민통치의 최고 책임자 조선총독 암살이었다. 권총과 폭탄을 의열투쟁의 방법으로 사용하여 식민지 지배자들을 응징하고 대중의식의 혁명화를 꾀하려 했다. 제 한 몸 희생해 공동체의 대의를 실현하려 했다.

김상옥이 피습당한 1월17일은 거사 당일이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도쿄에서 개최되는 제국의회에 출석하려고 남대문역에서 경성을 떠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은신처를 남대문역에서 가까운 삼판통으로 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막내 여동생 ‘김아기’와 매부 고봉근의 살림집이 마침 그곳에 있었다. 남대문역 거사를 준비하는 데 그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었다.


맨발로 눈 덮인 산길 넘어 도주


김상옥의 계획은 그날 새벽의 피습 탓에 어그러지고 말았다. 종로서 폭탄 투척은 계획과 상충되는 사건이었다. 거사를 앞두고 절대적인 은신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폭탄 투척 범인을 잡으려는 경찰의 압박 수사가 그의 일신에까지 미친 것이다.

추적자가 뒤쫓아올 게 명백했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경관들을 멀리 떼어놓으려면 신속히 이동해야 했다. 빠른 속도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었다. 추적자를 따돌리려면 눈 위에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눈이 덜 쌓인 돌이나 마른 풀을 골라 내디뎠다. 포위망도 벗어나야 했다. 남산 일원을 에워싼 대대적인 수색망이 펼쳐질 게 틀림없었다. 남산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 했다. 그는 쉼없이 내달렸다. 머뭇거리다 수색망에 갇히면 더 이상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뿐인가. 김상옥은 급하게 뛰쳐나오느라 신발 신을 틈이 없었다. 맨발로 눈 쌓인 산길을 내달려야 했다. 겨우내 내린 눈이 온 산을 뒤덮었다. 눈에 발을 내디디면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길도 없었다.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였다. 과연 눈과 얼음 위를 맨발로 몇 시간씩 달릴 수 있는가? 김상옥은 그것을 해냈다. 발이 만신창이가 됐다. 동상과 상처로 인해 피투성이가 됐다.

그는 남산 능선을 따라 달리다 수철리 공동묘지가 있는 응봉산 자락으로 옮겨 탔다. 북동쪽 산기슭에 있는 왕십리의 불교 사원 안정사(安靜寺)로 향했다. 김상옥은 안정사 승려의 보호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뜨거운 물과 음식을 제공받았고, 양말과 짚신 한 켤레, 복면 모자를 얻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안심하고 잘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상옥이 동대문 일원에서 오랫동안 거주했기 때문에 아마 두 사람은 안면 있는 사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뒷날 경찰 조사 과정에서는 실제와 달리 얘기해야 했다. 안정사 승려는 낯선 자의 기만과 강압 때문에 부득이하게 소극적으로 편의를 봐주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저녁 김상옥은 다시 길을 나섰다.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옷을 바꿔 입어 위장했다. 그는 짚신을 거꾸로 신고 눈길을 걸었다. 아직 풀리지 않은 경찰의 수사망을 고려한 행위였다.

1월22일은 겨울답지 않게 날씨가 포근했다. 최저기온이 고작 영하 0.6℃였고, 낮에는 기온이 2.2℃까지 올랐다. 절기가 대한인데도 따스했다. 심지어 전날 큰비까지 내렸다. 비 온 뒤라 골목길이 질퍽질퍽했다.


“자결할지언정 포로가 될 순 없다”


총격전이 벌어진 서울 효제동 현장 지도. 재래식 변소에 숨은 김상옥은 3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였다.


새벽 3시였다. 종로5가에서 혜화동 방면으로 올라가는 도로 오른쪽에 효제동이 있는데, 그곳으로 경찰들이 은밀히 모여들었다. 효제동 73번지가 목표였다. 그곳에 김상옥이 잠복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삼판통 사건 이후 엿새 동안 잠적했던 그가 여기에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첩보는 고문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3·1혁명 때 김상옥의 동료였고 이번에 국내 잠입 뒤 줄곧 그를 돕던 전우진(全宇鎭)이 악형에 못 이겨 비밀을 발설한 것이다.

경찰은 삼판통의 실패를 거울 삼았다. 지휘부 위계와 병력 수가 달랐다. 우마노 세이이치 경기도경찰부장이 지휘했고, 후지모토 겐이치 경기도경 보안과장과 모리 로쿠지 종로경찰서장이 그를 보좌했다. 이들이 현장 지휘부를 구성했다. 경성 시내 각 경찰서에 비상소집령을 내렸다. 비번 순사들까지 동원됐다. 보도에 따르면 ‘수백 명’의 무장 경관이 효제동 일대를 수십 겹 포위했다.

진압도 서두르지 않았다. 포위망을 짜놓은 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시야를 확보한 상태에서 작전을 전개하려 했다. 동천이 밝아오는 7시쯤 경찰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완전무장한 저격병 30명이 담을 넘고 지붕을 기어올라 화선을 짰다. 동대문서 고등계 주임 구리타 세이조 경부가 이끄는 결사대 5명이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김상옥이 거처하는 방으로 한 걸음씩 접근했다.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마침내 방문을 열어 벼락같이 돌진해 들어갔다. 뜻밖에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방 안에는 병풍이 둘러쳐 있을 뿐,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왠지 벽장문이 수상했다. 구리타 경부는 벽장문을 열어젖히며 들입다 사격을 가했다. 벽장 속에는 옛 한적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뒤에 김상옥이 숨어 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조준사격으로 대응했다. 구리타 경부는 오른쪽 어깨에 총을 맞고 거꾸러졌고 다른 결사대원들은 대응사격을 하며 구리타를 부축한 채 철수했다.

벽장 뒷벽은 흙담이었다. 김상옥은 필사적으로 벽을 뚫었다. 다른 도구가 없었다. 맨손으로 벽을 파느라 손톱이 온통 까졌다. 발을 굴러 벽을 차 발가락이 부러졌다. 다행히 뒷벽 한 귀퉁이가 헐렸다. 김상옥은 73번지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옆집 74번지 담을 타고 넘어 대각선에 위치한 76번지 집으로 잠입했다. 공포에 떨던 집주인은 김상옥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둘은 승강이하며 서로 기를 썼다. 그 소란 탓에 김상옥의 위치가 다시 경찰에게 드러나고 말았다.

76번지와 이웃집 72번지 사이에 빈 공간이 있었고, 그 깊숙한 곳에 재래식 변소가 있었다. 사각이 형성돼 탄환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좋았다. 김상옥은 그곳으로 숨어들었다. 경찰은 회유를 시도했다. 목숨을 살려줄 테니 항복하라고 했다. 김상옥은 잠자코 대응사격으로 답했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상하이를 떠나면서 동료들에게 남긴 말이었다. 김상옥은 그 말을 굳게 지켰다. 결국 콩 볶듯 사격이 개시됐다. 경찰들의 일제사격이 오래 계속됐다. 아침 7시에 시작된 총격전은 3시간이나 경과한 뒤 종료됐다.


죽는 순간까지 총을 놓지 않다


김상옥의 주검은 참혹했다. 발은 물론 무릎까지 동상에 걸렸다. 총알 맞은 곳과 동상 걸린 곳에서는 죽은 뒤에도 계속 피가 흘러 땅을 붉게 만들었다. 검시관의 관찰에 따르면, 사체의 머리와 가슴, 왼쪽 발가락에 총상이 있었다. 그중 머리와 가슴의 총상이 치명적이었다. 김상옥은 죽는 순간까지 권총을 놓지 않았다. 두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검시관은 김상옥이 오른손 둘째 손가락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건 채 힘있게 쥐고 있었다고 썼다.


참고 문헌

① ‘천기예보’ , <동아일보> 1923. 1.18.

② ‘종로서 타령 9, 신년벽두에 大變, 최초의 폭탄세례’ , <동아일보> 1929. 9.14.

③ ‘남산을 徒步로 安靜寺에 은신’ , <매일신보> 1923. 3.16.

④ ‘설중의 남산 포위’ , <동아일보> 호외 1923. 3.15.

⑤ <김상옥·나석주 열사 항일실록>, 김상옥·나석주열사기념사업회, 1986.

<서울 한복판 항일 시가전의 용장 김상옥 의사>, 윤우, 백산서당, 2003.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김동진, 서해문집, 2010.

<경성을 쏘다>, 이성아, 도서출판 북멘토, 2014.

<김상옥 평전>, 이정은, 민속원, 2014.

⑥ ‘僧庵의 生米飯으로’ , <동아일보> 호외 1923. 3.15.

⑦ ‘천기예보’ ‘휴지통’ , <동아일보> 1923. 1.23.

⑧ 宋相燾, <騎驢隨筆>(한국사료총서 제2집), 국사편찬위원회, 1955. 320쪽

⑨ ‘令人酸鼻의 血流屍體’ , <조선일보> 1923. 3.16.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888.html 




사국과 조선 독립운동 근거지인 북간도에 사회주의 기지 건설한 혁명가 박원희…
프롤레타리아혁명 위해 명멸한 삶


이번호 역사극장의 주인공인 박원희의 남편 김사국과 그 동생 김사민의 사연은 제1165호(2017년 6월12일치) 역사극장 
‘혁명으로 살다간 붉은 형제’에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_편집자

김사국·박원희 부부는 사상적 동지였다. 사회주의적 신념을 지녔음은 물론 그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점에서 동일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그린 영화 <암살>의 스틸컷. (주)쇼박스 제공


박원희(朴元熙)는 두만강변의 국경도시 회령의 한 여관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26살 나던 1923년 7월4일 아침 8시의 일이었다. 더운 때였다. 전날 최고 기온이 섭씨 31.5℃까지 올랐다. 아침나절이라 선선했지만 그런 기분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회령경찰서로 압송됐다. 국경 너머로 잠입해 들어오는 반일 독립군과 사회주의자를 적발해내는 데 귀신같은 능력을 발휘한다는 그 경찰서였다.


북간도 최초 사회주의 탄압 사건


혼자가 아니었다. 셋이 함께 붙들렸다. 젊은 여성이 둘이고, 남성이 하나였다. 모두 북간도의 중심 도시 용정에 소재하는 중등학교 동양학원 관계자였다. 박원희는 그 학교의 영어 교사였고, 32살의 건장한 남성 김정기(金正琪)는 그 학교의 설립자이자 서무주임이었다. 그는 북간도를 기반으로 조선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의 아들로도 유명했다. 그간 경영해오던 <동아일보> 용정 지국 경영을 접고 동양학원 설립과 운영에 전념하고 있었다. 일행 중 가장 나이 어린 진규(陳奎)는 그 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었다. 세 사람은 동양학원이 파견한 강연단 멤버였다. 군중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능란하게 연설할 수 있는, 말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날은 강연이 예정된 날이었다. 동양학원이 기획한 여름방학맞이 조선 내지 순회강연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회령을 필두로 청진·함흥·원산 등 함경남북도의 큰 도시들을 돌아 서울에서 마지막을 장식할 참이었다. 7월 한 달 내내 12개 도시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강연회 수입을 모아서 학교 확장에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해 4월 설립된 신생 학교 동양학원은 북간도 조선인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1학년 204명, 2학년 54명이 등록해 학생 총수가 258명에 달했다. 설립 첫해 첫 학기가 지났을 뿐인데도 이미 학생들이 차고 넘쳤다. 학교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돈이 들었다. 북간도 동포들의 기부에 힘입어 새 학교 부지 4천 평을 마련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건축비가 모자랐다. 이 난관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학교 관계자들은 순회강연을 고안해냈다. 자금 마련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동양학원의 존재를 선전하는 기회가 되리라고 믿었다.

경찰은 무슨 혐의로 강연단을 체포했는가? 사람들은 강연 내용이 불온할까봐 미리 검속하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예측은 빗나갔다. 경찰의 목표는 강연회를 봉쇄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박원희 일행은 체포된 이튿날 첫 열차편으로 용정의 간도총영사관 경찰서로 이송됐다. 이른바 ‘동양학원 사건’이라고 하는 북간도 최초의 사회주의 탄압이 시작된 것이었다.


동양학원은 김사국·박원희 부부에게 북간도 망명 생활의 한 결실이었다. 부부가 해외로 뛰쳐나간 것은 1922년 11월 서울에서 발발한 자유노동조합 사건 때였다. 임박한 체포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여기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더욱 적극적인 목표를 수립했다. 조선 독립운동의 전통적 근거지인 ‘해도’(연해주와 북간도)에 사회주의운동 기지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3·1운동 출소자와 인텔리 여성의 결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박원희. 전명혁 제공

 
부부는 용정 시내에 은밀하게 거처를 마련했다. 행정구역상으로 ‘중국 간도 용정촌 제4구’였다. 용정은 북간도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수도라고 불러도 좋은 곳이었다. 사회주의운동 기지를 구축하는 데는 안성맞춤인 도시였다. 부부는 서울에서 조직한 것과 동일한 유형의 두 가지 사회주의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하나는 공산당 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청년회 조직이었다. 전자는 조선공산당(중립당) 지부에 해당했다. 달리 말하면 서울파 공산그룹의 북간도 지방조직이었다. 후자는 1923년 4월 결실을 맺었다. ‘간도공산청년회’라는 명칭의 비밀결사를 창립 멤버 13인으로 처음 출범시켰다.

부부는 합법적 공개 영역 활동도 중시했다. 용정에 설립한 동양학원과 영고탑(寧古塔)에 세운 대동학원이 대표적 보기였다. 이 학교들은 서울파 공산그룹이 사실상 주도하는 합법 교육기관이었다. 특히 동양학원은 급진적 학생운동을 일으키는 진원지 역할을 했다. 1923년 5월 이 학교 학생회의 주최로 강연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현대의 모순을 어이할까’ ‘현대와 종교’ ‘지상천국’이라는 제하의 강연을 맡은 세 학생이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뒷날 이 강연회는 북간도 사회운동의 효시라고 평가받았다.

용정 생활은 김사국·박원희 부부에게 바쁘고 긴장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신혼기에서 벗어나지 않은 젊은 부부에겐 두 사람만의 달콤한 생활이기도 했다. 결혼 뒤 둘만의 오붓한 공간이 주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둘이 결혼한 때는 1921년 7월이었다. 3·1혁명에 참가했다가 출옥한 지 얼마 안 되는 신랑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마치고 교사로 재직 중인 인텔리 여성의 결혼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신문에까지 보도됐다. <매일신보>는 ‘김사국씨 결혼식, 금 30일에 거행’이라는 제하에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알렸다. 결혼 뒤 두 사람이 신접살림을 차린 곳은 신부의 친정집이었다. 당시 행정구역 명칭에 따르면 ‘경성부 계동 125번지’였다. 말하자면 신랑이 처갓집에 얹혀살았던 것이다. 서울 북촌에 위치한 번듯한 기와집이었다. 신부의 아버지는 일찍 사망했으므로 그 집의 호주는 신부의 큰오빠 박광희(朴廣熙)의 몫이었다. 입학난구제기성회, 조선노농총동맹 창립,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 등의 활동에 참여한 것을 보면 큰오빠도 사회주의자이거나 그 운동에 공감하는 동조자였다.

김사국·박원희 부부는 사상적 동지였다. 사회주의적 신념을 지녔음은 물론 그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점에서 동일했다. 사상적 유대가 둘 사이를 더욱 가깝게 했을 것이다.

용정 시절은 젊은 부부에게 자유롭고 오붓한 둘만의 사적 생활을 가능하게 했다. 두 사람이 아이를 가진 것도 바로 이 시절이었다. 젊은 새댁 박원희는 용정 시절에 첫아이를 잉태했다.


박헌영 부인 주세죽과 조직 결성


동양학원 사건은 김사국·박원희 부부가 북간도에서 쌓아올린 공든 탑을 허물어뜨렸다. 합법과 비합법 공간을 교차하면서 양성했던 젊은 혁명가들이 대거 투옥됐다. 30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간도총영사관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고 그중 16명이 예심에 회부됐다. 박원희도 그 속에 포함됐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용정 감옥에 투옥됐다. 임신 중이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옥고가 더 심했다고 한다. 그래도 박원희의 적극성과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옥중에서 미국인 여성 사회주의자이자 시청각 장애인 헬렌 켈러의 자서전을 번역했다. 영어 교사를 해내고, 영문 저술을 번역할 만큼 그녀의 영어 능력이 출중했음을 엿볼 수 있다.

다행히 박원희의 투옥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해 10월 중순, 그녀는 예심 종결과 더불어 방면 처분을 받았다. 수감자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고, 게다가 임신 중이었음이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석방된 박원희는 귀국길에 올랐다. 남편은 경찰 수배망을 피해 지하로 잠행 중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용정, 영고탑을 오가며 비밀결사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에 합류할 수도 있었겠지만 출산을 앞둔 임신부임을 감안했을 것이다.

서울로 되돌아온 박원희는 친정집에서 기거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4년 4월29일 아이를 출산했다. 다행히 순산이었다. 산모와 아이, 둘 다 건강을 잃지 않았다. 아이는 딸이었다. 이름은 ‘사건’이라고 지었다. 역사 사(史)에, 세울 건(建)자를 썼다. 아마 출산 전에 작명을 해두었던 것 같다. 성별과 상관없이 그 이름을 부여하자고 부부가 논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가 자라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역할을 수행하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염원이 엿보인다. 자식의 이름을 ‘조국을 생각하는 사람’(김사국), ‘민중을 생각하는 사람’(김사국의 동생 김사민)이라고 지었던 할아버지의 뜻이 다음 세대에도 꿋꿋이 계승됐음을 알 수 있다.


“생각 깊고 성적 좋고 연설 재주”


1928년 1월10일 거행된 박원희 장례식 행렬(위).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묘원 안국당 무덤 옆 박원희 묘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임경석 제공


박원희는 혁명가의 아내이자 그 자신이 견결한 혁명가였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돼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그해 5월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 창립에 참여했다. 14인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고, 창립 집행위원 3인 가운데 1인이었다. 창립 집행위원의 면면을 보면 흥미롭다. 박원희, 허정숙(許貞淑), 주세죽(朱世竹)이 그들이다. 셋 다 배우자가 사회주의자였다. 당시 허정숙의 남편은 임원근(林元根)이었고, 주세죽의 남편은 박헌영(朴憲永)이었다. 다시 말해, 여성동우회 창립 집행부는 커플 사회주의자들로 이뤄져 있었다.

박원희는 여성운동의 조직자였다. 각종 여성단체와 사회단체의 설립에 참여했고, 그 임원진에 취임하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1925년에만 서울청년회 집행위원, 노동교육회 대회준비위원, 경성여자청년회 집행위원, 경성청년연합회 집행위원, 국제청년데이 기념식 준비위원을 역임했다. 이듬해에는 중앙여자청년연맹 집행위원에 취임했고, 그 이듬해에는 여성계의 민족통일전선단체인 근우회 설립에 참여해 집행위원에 선임됐다.

박원희는 강연회의 단골 연사였다. 강연 요청이 있으면 기꺼이 응했다. 몇 가지 보기를 들면, 1924년 러시아혁명 7주년 기념 사상단체 연합강연회에서 ‘러시아혁명과 무산계급’이란 제목으로 연단에 섰다. 이듬해에는 서울청년회 춘계 강연회, 국제무산부인데이(여성의 날) 기념 강연회에 출연했다. 특히 여성문제가 중점 분야였다. 그녀의 강연 제목을 보면 ‘현대사회와 부인의 사명’ ‘국제무산데이의 유래’ ‘자유결혼 문제에 대하여’ ‘각국 부인운동과 조선 부인운동’ 등이었다. 서울과 지방도 가리지 않았다. 요청이 있으면 지방 출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북 이리, 평남 진남포, 평양, 안주, 함남 원산 등이 그녀가 다녀온 출장지였다.

일찍이 오빠 박광희가 젊은 시절 여동생의 인물됨을 평하되, “생각이 제법 깊고, 공부 성적도 좋으며, 연설 재주가 있다”고 했음이 인상적이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언변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회단체 임원진 내에서 역할을 분담할 적에는 으레 교양부를 맡았다. 회원과 일반 대중을 상대로 교육·선전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어린 딸의 육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린 사건이는 몸이 약했다. 고열이 나고 앓는 경우가 많았다. 박원희가 딸을 업고 서둘러 병원에 가는 모습을 목도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목격자에 따르면 “흰 저고리 흰 치마에 어린 아기를 절구통같이 들쳐 업고, 부스스한 트레머리로 더풀더풀하며 재동 네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박원희도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 김사국과 마찬가지로 건강을 잃었다. 1927년 12월 초에 시작된 몸살감기가 그녀를 중병으로 몰아갔다. 전혀 예기치 않게 급속히 병세가 악화됐다. 이듬해 1월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31살이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에 사람들은 몹시 놀랐다. 그뿐이랴. 그 가족에게 거듭 몰려오는 불운을 안타까워했다. 특히 홀로 남은 어린 딸이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철모르는 사건이는 엄마의 갑작스러운 부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문밖에서 나는 조문객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엄마 온다고 부르며 울었다. “이 애를 보는 사람 누군들 눈물을 참을 수 있겠는가?” 비극이 꼬리를 무는 이 집안의 가족사를 취재하던 신문기자는 이렇게 썼다.


혁명가 부모 죽음 뒤 ‘사건’이의 삶


박원희의 장례식은 1928년 1월10일 거행됐다. 근우회를 비롯한 34개 사회단체가 합동으로 장례식을 주관했다. 영구에는 ‘조선 여성운동 선구자 고 박원희’라는 명정이 덮였다. 그녀는 2년 전에 먼저 간 남편 김사국의 수철리 묘지에 함께 안장됐다.

사건이의 운명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부모 없이 자라야 할 아이의 미래가 안쓰러웠다. 북간도 용정에서 박원희와 함께 일했던 옛 동지들이 그녀의 1주기가 되던 날 추도회를 열었다. 용정의 여자청년회 주최로 열린 추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어린 사건이에게 위로금 10원과 저고리 하나를 만들어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조선일보> 1928년 4월8일치 지면에 고 박원희의 어린 딸에게 전달할 돈과 물건이 도착했다는 보도 기사가 자그맣게 실렸다.

사건이는 잘 자랐다. 다행히 외할머니가 양육을 맡았다. 박원희의 친정어머니가 일찍 가버린 딸을 대신하여 어린 피붙이를 길렀다. 박원희가 사망한 지 5년 뒤에, 한 신문기자는 9살로 성장한 사건이가 서울 북촌의 재동보통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다고 보도했다. 

 

참고 문헌

① ‘동양학원 巡講, 의외의 禍로 중지’, <동아일보> 1923년 7월15일치

② 재간도총영사 鈴木要太郞, ‘기밀 제271호, 동양학원 학생 조사에 관한 건’ 1923년 8월27일/ <불령단관계잡건-재만주의 부> 3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③ ‘간도 동양학원, 내지 巡講 계획’ <동아일보> 1923년 7월5일치

④ Ким-Хобан(김호반), Доклад(보고), 1923년 10월30일, с.6,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83 л.108-114

⑤ 새밝, ‘고 박원희 여사 회상’ <삼천리> 3-12, 18쪽, 1931년 12월

⑥ <매일신보> 1921년 7월30일치

⑦ 김사건, 장묘시설사용허가신청서, 1993년 12월18일

⑧ ‘여성동우 창립’ <동아일보> 1924년 5월11일치

⑨ 車相瓚, ‘想像과 印象記, 만나보기 前과 만나본 後: 朴元熙氏’ <별건곤> 3, 43쪽, 1927년 1월

⑩ ‘路上의 人’ <별건곤> 4, 39쪽, 1927년 2월1일

⑪ ‘비극 接踵하는 고 김사국씨 가정 (3)’, <동아일보> 1928년 1월9일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778.html 



 비합법과 합법 운동 병행하며 초기 사회주의운동에 큰 족적 남긴 김사국·김사민 형제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 활동 주도하다 폐결핵으로 숨지고 정신이상 비극적 생애



아일랜드 해방투쟁에 참여한 한 형제의 비극적 삶을 그린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한겨레 자료


김사국씨의 출생지인 충남 연산(連山)에서 씨가 다섯 살 때에 씨의 진 아우 사민군과 24세 된 어머니를 남겨두고 가장 사랑해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로부터 씨의 가정에는 눈물의 바다를 이루기 시작이다. 어머니 안국당씨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눈물겨운 상청 앞에서 3년간이나 보냈다.” 

두 형제의 불행한 어린 시절에 대해 뒷날 한 신문 기사는 이렇게 전했다. 아버지가 예기치 않게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형은 5살이고 동생은 이제 막 갓난아기 때였다. 두 사람은 인생의 첫 출발점부터 커다란 결핍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오래 살 운명이 아니라는 예언


아버지 김경수(金慶秀)가 어린 아들들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주였다. 떵떵거리는 대지주는 아닐지라도 한 해에 수백 석의 소작료를 거두는 유족한 집안이었다. 거주지인 충남 연산에는 물론이고 강원도에도 땅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두 아들에게 범상치 않은 이름을 남겨주었다. 큰아이에게는 생각 사(思)에 나라 국(國)자를 붙였고, 작은아이에게는 백성 민(民)자를 지어줬다. 국가와 민중을 생각하면서 살라는 뜻이었으리라. 가운데에 위치한 생각 사(思)자는 항렬이었다. 그의 본관은 연안 김씨였는데, 그 22세손의 항렬자는 ‘○수(秀)’이고 23세손은 ‘사(思)○’였다. 젊은 아버지는 문중의 항렬에 따라 자식들의 이름을 짓되, 그 속에 바람직한 삶의 규범을 담고 싶었던 것 같다.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속에 약소국 조선의 운명이 위태롭던 시절이었다. 어린 아들들이 공동체의 선과 정의를 위해 살기 바랐던 아버지의 강렬한 내면의식이 느껴진다. 그는 의병 봉기에 공감하는 위정척사파 유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근대화 정책을 지지하는 소장 개화파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젊어서 요절한 김경수의 인물됨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의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기가 막힌 이는 젊은 아내였다. 20대 중반 새파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청상과부가 된 안씨 부인의 처지는 참으로 딱했다. 평생을 남편 없이 홀로 지내야 할 뿐 아니라 어린 두 자식을 키워야 했다. 그녀는 당대의 일반화된 규범을 따랐다. 어린 자식들을 거두는 한편, 남편 삼년상을 치렀다. 사후 2주년에 지내는 제사인 대상(大祥)까지 마쳤다.


삼년상을 마친 안씨 부인은 시댁을 떠나 친정에 의지하기로 결심했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붙이가 사는 충북 충주로 이사했다. 친정 부모와 오라비, 자매에게 의지하면서 두 아이를 잘 키우고 싶었다. 두 아이는 이제 그녀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 되었다.

두 아이는 병치레가 잦았던 것 같다. 진맥을 위해 한의원들이 자주 출입했다고 한다. 더러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들도 다녀갔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안씨 부인은 불길한 말을 듣곤 했다. 형제가 둘 다 오래 살 운명이 아니라는 예언이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요절한다는 말도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안씨 부인은 이 예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두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실행에 옮긴 것을 보면 말이다. 그녀는 절대자에게 귀의해 그 가호를 빌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멀리 떨어진 금강산의 유명한 사찰 유점사(楡岾寺)를 택했다.

안씨 부인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입산했다. 자신은 머리를 깎고 장삼을 몸에 둘렀으며, 아이들에게는 독선생을 붙여서 한학 교육을 했다. 그녀는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드렸다. 호적부에 기재된 ‘안국당’이란 그녀의 이름은 아마 유점사 시절에 불리던 당호인 듯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영특했다. 부처님의 도움이 있었던지, 두 아이는 몇 번만 일러주면 곧 돌아앉아서 줄줄 외울 만큼 공부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뿐인가. 아픈 데 없이 건강히 잘 자라주었다.


아비의 뜻대로 3·1혁명 참가한 형제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 열린 신생활사 사건 재판 사진. 앞줄 왼쪽 흰옷 입은 사람이 김사민으로 추정된다. 임경석 제공


어머니 안국당은 분별 있는 여성이었다. 산중에서 한학만 배우다가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려운 시대가 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단을 내려서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점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신교육을 이수시켜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사국은 보성학교에서 수학했다. 보성학교란 1906년에 신입생 240명을 모집해 개교한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수송동 44번지 오늘날 조계사 자리에 있었다. 그는 학업을 마친 뒤 한때 함경도 덕원소학교에서 교사로 재임했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요동반도에 위치한 관동도독부 육영학교에 들어가 고등교육을 이수했다. 중국어를 배운 것도 이때였다.

김사민은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아마 소학교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조선보병대란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 이후 조선조 왕가 경비를 위해 잔존시켰던 조선인 군대의 명칭이었다. 1931년까지 존속했는데, 해산 당시 병력은 200명이었다. 무기와 탄약, 인사관리 등을 조선 주둔 일본군이 관장했다. 그는 기질적으로 무관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 부대에서 3년간 근무했다.

두 형제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 망해버린 조국의 해방을 위한 길에 기꺼이 나섰다. 두 사람은 1919년 3·1혁명의 참가자였다.

3·1혁명 당시 학생대표를 지낸 강기덕(康基德)의 회고에 따르면,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사국이 입국해 학생층의 독립선언문을 따로 기초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3·1혁명의 한 전환점인 한성정부 수립의 계기를 만든 이도 김사국이었다. 그는 1919년 4월 13도 대표자들로 조직된 국민대회를 개최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이 사건을 가리켜 ‘국민대회 사건’이라고 한다. 김사국은 이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됐고, 1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형이 투옥 중일 때 아우가 새로운 투쟁을 조직했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조선을 내방했을 때, 그에 호응해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일대 시위운동을 기획했다. 김사민은 이 사건으로 동료 15인과 함께 체포됐다. 그 결과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외딴섬 덕적도에 1년간 거주 제한 명령을 받았다.

두 형제는 민족독립운동 투사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운동의 개척자라는 점에서도 공통성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걸었다. 비합법 영역에선 공산주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합법 공개 영역에선 노동·청년·사상단체 운동의 확장을 꾀했다. 두 사람이 참여한 비밀결사는 조선공산당(약칭 중립당)과 고려공산청년회였다. 특히 김사국은 중립당의 손꼽히는 지도자였다. 김한(金翰)과 더불어 양대 지도자로 지목받았다. 김한이 사회주의운동의 ‘책사형’ 지도자라고 한다면, 김사국은 ‘투사형’ 지도자라고 평가받았다.

김사국·김사민 형제는 1922년 8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의 5인 간부진에 나란히 취임했다. 국제공산청년회 가입 단체로서 조선의 공산주의 청년운동을 지휘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최초 사회주의 재판, 신생활사 사건


합법 공개 영역에서 두 사람의 활동 거점이 된 단체들이 있었다. 청년운동에선 서울청년회가, 노동운동에선 노동대회가 그 역할을 맡았다. 두 형제는 이 단체들을 거점으로 하여 사회주의의 대중적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거점 역할을 한 사회단체 가운데 서울청년회가 두드러진 활동성을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일군의 사회주의자를 ‘서울파’라고 불렀다. 김사국과 김사민은 바로 서울파 공산그룹의 유력한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그중에서도 김사국은 동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두뇌가 명석하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군의 머리는 천하에 가장 밝아서,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비평은 듣는 자로 하여금 경탄케 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김사국은 1922년 말부터 2년 동안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이른바 ‘자유노동조합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경찰의 추적을 받은 그는 좁혀오는 체포망을 피해 해외 망명길을 택했다. 망명지는 북간도와 연해주였다. 한 글자씩 따서 ‘해도’라고 묶어 부르던 곳이다. 일찍이 <정감록>에서 ‘해도’로부터 진인이 출현해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당시 사람들은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을 구원할 근거지가 바로 북간도와 연해주라고 생각했다.

김사국과 김사민은 초창기 한국 사회주의운동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들은 한국 사회주의운동이 피억압 민족의 해방운동 속에 배태된 것임을 잘 보여준다. 서구에서처럼 노동운동의 한 갈래로 사회주의가 발전돼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 특징은 식민지를 경유해 근대사회로 진입한 광범한 비서구의 각 민족과 국가의 사회주의운동 속에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마는, 사람들은 일단 불행에 빠지면 과거의 불길한 예언을 곧잘 상기하는 법이다. 우연일지언정 외견상 어쩜 그렇게 잘 들어맞는지 놀라울 때가 있다. 두 형제의 운명이 그랬다. 마치 예언이 적중한 것만 같았다.

아우 김사민이 먼저 화를 입었다. 그의 나이 26살 되던 1923년 2월1일이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다.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라는 지목을 받던 ‘신생활사(新生活社) 사건’에 연루돼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은 터였다. 죄목은 “자유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그 취지서를 기초했으며, 그 취지서를 <신생활> 잡지에 게재”한 혐의였다. 자유노동조합이란 1922년 10월29일 창립한 노동단체로서, 서울의 지게꾼과 막벌이꾼 200여 명을 회원으로 한 직업별 노동조합이었다. 그즈음 다른 노동단체들이 주로 지식인 출신자로 구성된 데 비하면, 이채롭고 본격적인 노동자 단체였다. 일제하 노동운동 역사 속에 획기적 의의를 갖는 조직이었다. 그 단체의 설립을 김사민이 주도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단체를 불온하게 여겼다. 김사민을 비롯한 간부들을 체포해 재판에 부쳤다. 간신히 체포를 피한 다른 간부들은 해외로 망명해야만 했다.


장발홍염(長髮紅髥)의 코뮤니스트


1926년 5월12일 40개 사회운동단체연합장으로 치른 김사국 영결식 때 배포된 사진(왼쪽). 김사국 영결식. 만장이 수십 개 늘어서 있고, 그중 몇 개는 글자가 보인다. ‘애도 고 김사국 동무’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임경석 제공


김사민은 재판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불법 감금을 하느냐”고 항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옥중 규칙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2월1일 그날도 그랬다. 유죄판결을 받은 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는 옥중 규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간수장에게서 ‘단단히 설유(말로 타이름)’를 받아야 했다. 아마 가혹한 징벌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 뒤 간수 두 사람의 감시가 붙은 상태에서 구치감 문을 들어설 때였다. “김사민은 용맹하게 간수의 칼을 빼어 문턱에 섰던 간수 요코오 마사이치(橫尾政一)의 머리를 찍었”다고 한다. 간수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호송됐다. 이 사건은 김사민의 꺾이지 않는 기개와 거센 기질을 잘 보여준다.

이 센세이셔널한 사건은 조선인 사회에서 큰 주목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반항심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총독부 쪽의 판단과 보도 통제로 인해 다시는 신문 지상에 거론되지 못했다. 가혹한 보복을 당하지 않았을까, 몸은 무사한가,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무려 석 달이 지난 뒤에야 겨우 가족 면회가 허용됐다. 그해 5월3일 둘째아들을 면회하고 나온 어머니 안국당은 터져나오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면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김사민은 홀로 걷지 못하는 상태였다. 앞뒤로 간수 3명의 부축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뿐인가. 어머니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서도 겨우 눈을 한 번 들어보았을 뿐 아무 소리도 없이 멍하게 허공만 쳐다봐다고 한다. 정신이상 증상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가혹한 보복과 폭력을 가했기에, 그처럼 자긍심 높던 정신이 끝내 파괴되고 말았을까. 사람들은 다시 수군거렸다.

김사민은 이후 온전한 정신상태를 회복하지 못했다. 1924년 7월 만기 출옥했지만, 노동운동 일선에 복귀하지도 못했고 정상적인 사생활도 영위하지 못했다. 물론 결혼도 할 수 없었다. 그를 가엾게 여기는 옛 동료들의 호의로 청년총동맹 회관 한쪽에 자그마한 숙소를 마련했지만, 종신토록 어머니 안국당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그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수염을 깎지 않은 채 서울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곤 했다. 그 때문에 ‘장발홍염(長髮紅髥)의 사회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신체는 살아 있었지만 영혼은 26살 때 죽고 말았던 것이다.

아우의 삶을 파괴한 것이 식민지 통치 기관의 폭력인 데 반해, 형 김사국의 삶을 파괴한 것은 질병이었다. 1924년 5월 해외 망명지에서 서울로 되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폐결핵에 걸려 있었다. 중증이었다. 폐결핵이란 몸 안에 잠복해 있던 결핵균이 신체의 면역력이 약해졌을 때 발병하는 질환이었다. 그는 해외 망명지에서 이 병을 얻었다. 불규칙적인 식사와 불안정한 숙소, 끊임없는 업무 스트레스와 피로 누적이 그의 면역력을 약화했던 것이다.

김사국은 귀국 뒤 가족의 보살핌을 받았다. 아내이자 동지인 사회주의자 박원희(朴元熙)의 병구완을 받았다. 병세가 오르락내리락 변동이 있었다. 증상이 혹은 더하고 혹은 덜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 시절 폐결핵은 치사율이 높은 위험한 질병이었다. 게다가 김사국은 투병 중에도 일손을 놓는 일이 없었다. 그때에는 단일한 전국적 전위 정당인 조선공산당을 창립하기 위해 여러 비밀 공산주의 그룹이 밀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 내지 중심론을 표방하며 이 논의를 주도했다.


35살 폐결핵으로 사망한 김사국


이러한 긴장과 과로가 그의 병세를 악화했음이 틀림없다. 급기야 귀국 2년째 되던 때 걷잡을 수 없이 병이 깊어졌다. 1926년 5월 초 입원 치료를 위해 관립 총독부병원을 비롯해 여러 사립병원의 문을 두드렸으나 어디서도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병이 너무 깊어서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김사국은 1926년 5월8일 사망했다. 향년 35살이었다.

어머니 안국당은 오래 살았다. 71살까지 살았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섭섭한 나이지만, 그때만 해도 환갑을 넘기면 장수했노라고 축복받던 시절이었다. 그녀의 만년은 궁핍했다. 수중의 재산은 다 흩어지고 없었다. 생활의 방도는 탁발이었다. 머리 깎고 장삼을 갖춰 입은 그녀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경문을 읽어주고 얻는 탁발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그녀는 맏아들 김사국을 보낸 이후 한 번도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그날그날 밥때를 챙기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제사상을 차리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맏아들의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노모의 마음은 무거웠다. 사국이 제사나 한번 지냈으면…. 노인의 탄식은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노라고, 인터뷰를 위해 찾아갔던 신문기자는 그렇게 썼다.


참고 문헌

① ‘비극 接踵하는 고 김사국씨 가정 (2)’, <동아일보> 1928년 1월8일치

② ‘고 김사국씨 母堂 斷腸의 탄식’<조선일보> 1933년 5월4일치

③ ‘3·1절을 앞두고 떠오르는 피의 기록, 당시의 전국학생대표 康基德氏談’<경향신문> 1950년 2월26일치

④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희망> 1957년 2·3·5월호. <죽산 조봉암 전집 1>, 세명서관, 344∼345쪽, 1999년

⑤ ‘소식’, <청년조선 1>, 1922년 2월15일

⑥ ‘인쇄기 1대도 몰수’<동아일보> 1923년 1월17일치

⑦ ‘재옥 중의 金思民, 看守의 검으로 看守를 斫傷’, <조선일보> 1923년 2월2일치

⑧ ‘김사민의 위독설’<조선일보> 1923년 5월9일치

⑨ ‘고 김사국씨 母堂 斷腸의 탄식’<조선일보> 1933년 5월4일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650.html



역사는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 연출되는 극장이다. 강자의 입장에서 한국 근현대사는 희극이었지만 대다수 약자의 시선으로 보면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 비극은 어쩌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 삼아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교직하는 이유다. 우리가 잊고 있던 한국 근현대사의 진실을 드러낼 임경석의 역사극장은 3주마다 개봉한다. _편집자
 


영화 <밀정>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제공


<한겨레21> 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성균관대 사학과의 임경석 교수입니다. 이 지면을 통해 앞으로 3주에 한 번씩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근대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입니다. 사료를 들여다보는 게 직업이지요. 오래된 옛날 기록을 뒤져서 유용한 정보를 캐내는 일을 합니다. 수집한 정보가 많아지면 적절히 분류도 하고요, 그것을 분석해 역사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냅니다. 지루하기도 하지만, 맛을 들이면 꽤 재밌습니다. 작으나마 새 지견을 얻을 때는 보람도 느낍니다.

제가 관심을 가진 주제는 우리 공동체가 걸어온 길입니다. 특히 가까운 과거의 궤적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 최근의 궤적에 주목하냐고요? 우리가 어디쯤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좌표를 알아야 항로를 설정할 수 있는 법입니다.


역사 본질 꿰뚫는 뛰어난 레토릭


콜럼버스 이래 세계는 하나로 통합돼왔습니다. 지구의 여기저기에 분산돼 있던 여러 문명과 민족이 연계를 맺게 되었지요. 그 과정은 평화롭거나 수평적이지 않았습니다. 서구는 우월한 힘을 이용해 비서구 지역을 수직적이고 위계적으로 통합해나갔습니다. 세계 어느 지역, 어느 민족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속에서 한국은 유감스럽게도 약소국 위치에 놓였습니다. 자립적으로 근대를 맞이하지 못하고 식민 시기를 경과해야 했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망국, 식민지, 전쟁, 분단, 독재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또한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영웅적 분투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쯤 전에 역사가 박은식은 한국 역사를 ‘고통’과 ‘피’의 역사로 형상화했습니다. 그는 <한국통사(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血史)>를 썼습니다. 우리 역사의 본질을 꿰뚫는 뛰어난 레토릭을 구사했던 거죠.

저는 박은식의 문제의식을 배우려 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고난과 분투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구 주도의 위계적인 세계 체제는 지금도 계속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체제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더욱 강력하고 안정화돼 있는 듯 보입니다.

이 현실을 감안해 저는 두 종류의 사료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하나는 억압자들의 기록입니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식민지 통치 기록, 옛 일본제국 외무성이 생산한 해외 한국인에 대한 자료가 그것이죠. 다른 하나는 저항자들의 기록입니다. 옛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의 한국 관련 문서가 대표적 보기입니다. 사회주의운동과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작성한 기록이 풍부하게 보관돼 있습니다.

정반대쪽에 선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비교하면서 읽어왔습니다. 양자를 교차시키면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불꽃이 튑니다. 두 개의 시선이 충돌하는 것이죠. 관찰자의 시선이 어떠한가에 따라 동일한 사건이 완전히 상이한 이미지를 띠고 나타납니다. 이 불꽃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실 추구의 사명을 지닌 역사학자는 모순에 찬 기록을 비교하고, 엄정한 사료 비판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신뢰할 만한 역사적 지식이 생산될 가능성이 주어지는 거죠.

이제 제가 어떤 일에 종사해왔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오랫동안 근대사를 연구해왔습니다. 이 연구 분야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료의 분량이 방대하다는 점입니다. 총독부 문서가 그러하고, 코민테른 문서가 그러합니다. 외무성 기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오래도록 이 분야 연구에 집중해왔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 사료들을 읽고 있습니다. 얼추 계산해도 벌써 30년이 넘었군요. 꾸준한 작업 덕분에 적잖은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맘먹고 한번 헤아려봤습니다. 그간 80여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고 4권의 단행본을 간행했더군요.


역사 대중화에 맞춤한 글쓰기


이 지면을 통해 ‘역사 에세이’를 연재하려 합니다. 에세이 장르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글쓴이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산문 양식입니다. 그 양식을 빌려 역사에 대해 쓰겠습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다채로운 글쓰기가 가능하리라고 기대합니다.

오늘날 역사학의 주된 글쓰기 장르는 논문입니다. 대다수 역사학자는 논문 작성에 전념합니다. 그 이유는 논문이 역사적 지식을 생산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논문은 형식과 규범이 고정화된 역사 글쓰기의 한 양식입니다. 문제 제기를 명백히 해야 하고, 기존 연구에 비춰 독창적인 입론을 세워야 하는 글입니다. 학술지에 기고할 때는 분량도 일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학계 내부의 소통에 최적화된 장르입니다.

역사학자들이 논문 집필에 몰입하는 이유에는 학문 외적인 것도 있습니다. 취업과 승진, 연구 프로젝트 수주 등이 연구논문 실적과 연계되기 때문입니다. 논문 실적을 두텁게 갖추지 않고서는 안정된 연구 여건을 보장하는 직장을 갖기 어렵습니다. 취업한 뒤에도 승진과 재임용의 문턱을 넘으려면 논문 실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논문은 시민사회와 폭넓은 소통을 목표로 하는 글쓰기 양식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전문가 내부의 소통에 목적을 둔 글이라서 역사 대중화에 필요한 덕목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역사학이 시민사회와 소통하려면 논문을 벗어나 다른 장르를 개척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의 역사의식 형성을 돕고 정체성 통합을 도모하는 데 적합한 글쓰기가 요구됩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자기 확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문명을 일굴 불을 가져다주었 다는 이유로 코카서스 산맥의 높은 바위산에 묶여 고통받는다. 그러나 자기해방의 확신으로 제우스와 타협하길 거부했다. 한겨레


역사 에세이가 그 요구에 부응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세이는 이야기를 담기에 적합한 글쓰기 양식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제가 전하려는 것은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들입니다. 사료를 대하다보면 더러 감정이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가슴 뭉클하고, 눈물겹고,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이야기를 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논문을 쓸 때는 이런 풍부한 이야기 소재를 활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논문은 논리적 짜임새를 중시해서 이런 이야기가 배제되기 일쑤입니다. 논문의 논리적 짜임새와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에세이 장르는 생생한 삶의 이야기와 개인의 사적인 정보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논문에는 담기 어려운 이야기를 에세이에는 쉬이 담을 수 있습니다.

역사 에세이를 통해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특히 비극과 희극을 형상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자 합니다. 한국 근현대사에는 비극적 서사와 희극적 서사가 가득 차 있습니다.

비극은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비극이 단순히 슬픈 얘기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 비극의 경우를 볼까요. 그리스 비극의 특성은 신이 부여한 객관적 질서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투쟁을 그리는 데 있습니다. 이 투쟁은 인간의 패배로 끝나기 십상입니다. 신의 질서는 엄연하고 객관적인 것이므로 그에 맞서는 인간의 행위는 실패하기 쉽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패배와 좌절의 원인은 항상 자기 내부에 있습니다.

위대한 비극은 단지 패배만을 그리는 데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비극적 서사의 클라이맥스는 인간이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해방을 향한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을 형상화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인간상을 형상화하는 것이 비극적 서사의 핵심이며, 또한 이 ‘역사 에세이’의 목표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신이 부여한 운명을 거역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그들의 좌절과 고뇌를 재현할 것입니다.

인간에게 문명을 일굴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유로 코카서스산맥의 높은 바위산에 묶여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를 한국 역사에서 형상화하려 합니다.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는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했습니다. 13세대의 역사가 지난 뒤에는 제우스도 파멸에 부딪힐 것이며, 그때 자기는 해방될 것을 확신하노라고. 그러한 내면의 확신 덕분에 프로메테우스는 고통을 감내하며 제우스와 타협하기를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그 확신을 역사 에세이에 담고 싶습니다.


희극적 서사는 힘이 강하다



역사 속에서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공공선을 옹호하기 위해 사적 이익을 희생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들은 식민통치 권력에 맞서 감연히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반면 희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정의와 공공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유관순(왼쪽)과 이완용은 비극적 서사와 희극적 서사의 상징적 인물로 꼽을 만하다. 한겨레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선한 사람입니다. 도덕성과 정의감이 특별히 뛰어나지 않을지라도 보통 사람들보다 다소 더 선한 사람입니다. 평균 수준보다 높은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정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다릅니다. 그는 보편적 인류애를 실현하려 합니다. 공공선을 옹호하기 위해 사적 이익을 희생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식민지 통치 권력에 맞서 감연히 혁명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박해와 고난이 예견되는데도 그랬습니다. 합법적 공개 영역의 활동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을 때, 그들은 수배망을 피해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신분을 감추고 비밀리에 생활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여의치 않을 때는 감옥 가는 것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험준한 산속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불운하게도 혹독한 고문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후대의 공동체 구성원은 그렇게 스러져간 사람들을 기억할 의무가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뿐인가요.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자신의 삶을 통해 입증해야 하는 도덕적 책무가 있습니다.

희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비극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사회 구성원의 평균 수준보다 더 낮은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정의와 공공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희극은 도덕적으로 저열한 군상을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공공의 이익보다 사적 이익을 우선시한 사람, 대의를 저버린 사람, 식민통치에 협력한 사람, 외세를 추종해 민족적 이익을 훼손한 사람이 그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희극은 보통보다 못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인간의 온갖 악에 관련됐다고 묘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결함과 창피스러운 점을 드러내면 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의 특권적 지배계급의 뿌리는 식민지 시대 관변 유력자층에 잇닿아 있음을 드러내면 족합니다. 그들은 식민 체제가 종언된 뒤에도 몰락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외세 밑에서 지배 시스템을 갱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의 사회적 힘은 오늘날 거대하게 성장했지만, 그 본질이 우스꽝스러운 것임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습니다. 지배계급 역사는 희극의 역사로 그려야 합니다.

희극적 서사는 힘이 강합니다. 현실을 변혁하는 직접적 무기가 될 잠재력이 있습니다. 현존 지배질서를 전복할 가능성을 내포하므로, 희극은 위험하고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곤 합니다.


<장미의 이름> 속 역사적 통찰


움베르토 에코의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14세기 중세 이탈리아 어느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의 배후에는 바로 ‘희극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망실된 것으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그 수도원에 비밀리에 소장돼 있고, 그것이 세상에 유포되는 걸 막기 위해 살인이 저질러진다는 얘기이지요. 희극론이 세상에 나오면 교회와 기득권층이 누리는 기존 권력과 영향력이 위태로워질까 염려했던 거지요. 희극이 현존하는 권력과 지배질서에 대해 얼마나 강력한 전복의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희극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돋보입니다.

제 의도는 역사 에세이에서 비극과 희극 서사를 전하는 데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소재로 비극적 혹은 희극적 형상화를 도모하겠습니다. 더러 그에 못 미치는 이야기도 있겠지요. 그저 재미로 읽는 이야기에 머물지도 모릅니다. 설혹 그렇더라도 관대하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비극적 혹은 희극적 서사를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5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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