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이름 없는 이들도 쇠갈고리에 찢겼다

강용흘의 체험적 소설 <초당>에 묘사된 3·1운동



1920년대 말 미국 하버드대학 교육대학원 졸업할 때쯤의 강용흘(왼쪽). 서재에서 책을 읽는 50대 강용흘의 모습. 김욱동 제공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시 펼쳐보고 싶은 문학작품들이 있다. 3·1운동 양상을 핍진하게 묘사했거나, 체험적 관찰 결과를 생생히 재현하는 작품들 말이다. 재미 작가 강용흘의 장편소설 <초당>이 그 두드러진 보기다.

강용흘은 ‘최초의 한국계 미국 작가’로 꼽힌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말에 북미로 건너가, 캐나다 댈하우지대학과 미국 보스턴대학, 하버드대학 교육대학원 등에서 수학했다. 1931년 뉴욕의 찰스스크립너스선스출판사에서 영문소설 <초당>(The Grass Roof)을 발간했는데, 그의 첫 장편소설이자 자전적 성장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성인 세계로 진입하는 한 소년의 성장 과정과 내면을 그린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대 조선의 현실이 잘 묘사됐으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차츰 이해해가는 소년의 시선이 담겼다.(<초당>, 강용흘 지음, 장문평 옮김, 종합출판범우, 2015)


작가 강용흘도 경찰에 체포돼 고초


<초당>은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작가는 이 소설 덕분에 2년 뒤 존 사이먼 구겐하임 재단에서 창작기금 펠로십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에서의 반향도 컸다. 이광수는 ‘강용흘씨의 초당(상·하)’이라는 제하에 소설 내용을 소개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평론가 홍효민도 ‘초당을 독(讀)하고’를 써서 관심을 나타냈다. 6년 뒤에는 프랑스어 번역판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간행됐는데, 우수한 번역 작품에 주는 ‘할퍼린 카민스키’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반향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 내 다른 소수민족 출신 작가들이 대다수 겪는 것처럼, 미국 문단과 학계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백인 남성 작가 위주의 미국 문단에서 그의 존재는 거의 잊혀졌다. 최근에야 비로소 <미국문학백과사전>(하퍼콜린스출판사, 2002)에 그의 작품이 소개됐을 뿐, 미국 문학사의 한 페이지에 오르기까지는 좀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 같다.(<강용흘 그의 삶과 문학>, 김욱동, 서울대학교출판부, 4~5쪽, 2004)

문학사적 평가가 어떻든 간에, 강용흘의 소설은 역사학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이 생생하게 묘사됐기 때문이다. <초당>은 3·1운동 전후 조선 사회의 내부에 대한, 잘 알려지지 않았던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3·1운동에 참가한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에 관한 서술이다. 그들이 겪은 격정과 고통을 생생히 형상화하고 있다.


강용흘 자신이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의 목격자이자 참가자였다. 1918년 함경남도 함흥 영생학교에서 중등교육과정을 졸업한 작가는, 이듬해 봄 서울에 있었다. 17살이었다. 어떻게든 미국에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그는, 북미 선교사들과 친교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태평양을 건너려면 일본 여권과 여행 경비가 필요했는데,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법을 그들만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올라간 강용흘은 호러스 G. 언더우드 여사가 영국 작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이 책은 지상에서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우화로서,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간주됐다.

소년 강용흘은 3·1운동에 휩쓸렸다. 서울 거리의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돼, 종로경찰서에 갇혀 심문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어렸기 때문에 사흘 만에 훈방됐다. 이 체험은 강용흘의 심리에 깊은 인상과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초당>에 그 정황이 상세히 묘사된 것을 보면 말이다.

길거리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되던 상황을 보자. 기마경찰이 시위 대열의 비무장 조선인들에게 쇠갈고리를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부상자가 속출했음을 증언한다. <초당>의 주인공 소년도 말 탄 일본인이 들고 있던 큰 쇠갈고리에 걸렸다. “갈고리는 내 목 안으로 파고들어 핏물을 옷에 뚝뚝 떨어뜨리고 뺨을 할퀴었으나, 다른 죄인들과 함께 줄지어 서라고 그가 말했을 때 나는 순순히 그의 말에 복종했다”고 한다. 그는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상처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경찰은 “툭하면 쇠갈고리를 우리의 머리와 어깨와 소매 위로 휘둘러 여러 차례 우리에게 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고 썼다.


<초당>, 미국 뉴욕 찰스스크립너스선스(Charles Scribner’s Sons)출판사, 1931년판 겉표지(왼쪽). <초당> 1931년판 속표지. 임경석 제공

사흘간 계속 된 몽둥이 고문


소년은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조그만 유치장 안에 다른 소년 13명이 함께 수감됐다. “모두들 중상을 입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귀가 찢어졌고, 또 어떤 사람은 팔이 찢어졌다.” 유치장은 좁고 불결했다. “통풍 장치가 전혀 없었는데, 창문도 없고 우리가 전부 앉을 만한 여유도 없었다.” 수감 시설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시설 부족은 갇힌 자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증언이 더 있다. 3·1운동 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작가 심훈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두 간도 못 되는 방 속에, 열아홉 명이나 비웃두름 엮이듯” 갇혀 지냈다. 여름에 더위가 시작되자 고통이 가중됐다. “날이 몹시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려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는” 조건에서, 수감자들은 다리도 뻗지 못하고 살을 맞댄 상태로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워야 했다.(‘어머님께’, 심훈, 1919년 8월29일.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다시 <초당>의 주인공에게로 돌아가자. 한밤중에 심문이 시작됐다. 새벽 1시에 호출된 소년은 “두 손을 앞으로 묶이고 수갑을 찬 채” 심문관 앞으로 불려갔다. 구타가 시작됐다. 너무 천천히 걸어도, 너무 빨리 걸어도 등허리를 차였다. 심문실에 들어갈 때도 구둣발에 차여 꼬꾸라졌다. 그는 조선어만 아는 척했다. 경관은 조선어를 할 줄 몰라 통역을 불렀는데, 통역은 천민 출신의 시골 사람이었다. 심문관은 이름, 나이, 직업, 종교, 그해 봄 서울에 오게 된 경위, 만세를 부르게 된 경위 등을 물었다. 질문과 답변이 오간 뒤, 심문관은 묘하게 웃으면서 “좋다, 매 좀 맞아봐라”라고 내뱉었다. 두 경관이 각목을 각각 집어들었다. 무자비한 매질이 시작됐다. 머잖아 소년은 기절해버렸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소년에게 물을 먹이더니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새벽 5시까지 심문이 계속됐다. 이게 첫 번째 심문이었다.

똑같은 몽둥이 고문이 심문 때마다 되풀이됐다. 일요일 새벽에 시작된 심문은 수요일에야 끝났다. 경관들은 판단을 내렸다. 소년을 가리켜 부화뇌동하여 단순 가담한 자라고 규정했다. “독립운동 기간 중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구경꾼인데 마음이 약해서 만세를 불렀다”라고. 결국 소년은 훈방 처분을 받았다.

우리는 훈방 처분을 받은 사람들조차 가혹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총독부 집계에 따르면, 3월1일부터 6월 말까지 검사 처분에 부친 3·1운동 피검자 수는 1만6908명이었다.(조선총독부, ‘소요사건검사처분인원표’, 1919년 7월8일.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其二>, 223~228쪽, 1978년)


소설엔 최팔용 언급도


그 숫자가 방대한 점이 놀랍다. 여기에는 검사국에 송치되기 이전에 경찰과 헌병이 즉결처분을 하거나 훈방한, 훨씬 더 많은 피검자가 배제됐음을 유의해야 한다. <초당>에는 공식 집계 과정에서 누락된, 이름 없는 참여자들의 수난이 생생히 묘사됐다.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경찰에게 고문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상습 행위였다. 피의자로부터 범죄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으레 채택하는 심문 방법으로 간주됐다. 일제강점기 일간신문에는 고문 피해 기사가 계속 실렸다. 은폐, 검열 등으로 보도되지 않도록 막는데도 그랬다. 고문이 반체제 정치범에게만 가해졌던 것은 아니다. 민사·형사상 통상적인 범죄 사건의 피의자도 피해가지 않았다.

<초당>에는 주인공의 숙부가 겪은 고문 체험이 상세히 기술됐다. 105인 사건에 연루돼 7년 징역형을 받은 숙부는, 출감 뒤 완전히 변해버리고 말았다. 끔찍한 고문을 겪은 탓이었다. 숙부는 열하루 동안 고문당했다. “양쪽 엄지손가락을 묶어 매달아놓았는데, 두 발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매달려 있었지. …마구 때리더구나. 자기들이 묻는 건 무엇이든 다 자백하라는 거야. 그러니 내가 자백한 것은 사실이 아니었어. 그저 네, 네 할 수밖에 없었지. 아이구 그 고문이라니. 얼마나 지긋지긋하던지! 열두 번도 더 당했어. 놈들한테 당한 것은 체면상 차마 다 말하지 못하겠다. 세 번은 기절을 했는데, 깨어나보니 나는 지저분한 마룻바닥에 눕혀져 있고, 한 경관이 내 입에 물을 먹이고 있더구나. …그들에게 채찍질당한 것이 모두 몇 번이었는지 일일이 다 기억나지도 않아. 그들은 나를 발가벗겨 양손을 뒤로 결박시켜놓고 매질을 해댔는데, 그 중간중간에 경관이 내 몸의 가장 부드러운 곳에다 담뱃불을 가져다 대더구나.”

강용흘은 <초당> 곳곳에서 고문의 실상과 폐해를 설명한다. 일본 식민지 통치가 저들의 선전과 달리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지를 폭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초당>에는 3·1운동 지도자들을 묘사한 부분도 있다. 그중 단연 주목되는 것은, 2·8 독립운동의 지도자이자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개척자인 최팔용에 대한 것이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16년, 최팔용은 25살가량의 키가 크고 매우 창백한 청년이었다. 키는 컸으나 비쩍 말랐던 것 같다. 명주옷을 입은 그가 마치 잠자리같이 보였다고 한다. 최팔용은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을 근거로 하는 집회를 여럿 주도할 만큼 활동적이었다. 그곳에는 조선인 유학생 대부분이 모였다. 기독교인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도 있었다. 그는 유학생들 내에서 비밀결사를 만들었고, 먼저 귀국한 유학생들이 국내에서 결성한 비밀결사와 지속적으로 연계했다고 한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기록


강용흘이 최팔용에 대해 그처럼 잘 알았던 이유가 있다. 동향이었다. 함경남도 홍원이다. 최팔용은 홍원군 홍원면 남당리에서 태어났고, 강용흘은 인접한 운학면 산양리에서 출생했다. 두 집안은 겹으로 혼맥을 맺고 있었다. 최팔용의 누이는 강용흘의 당숙 장손과 결혼했고, 그의 아내는 강용흘 조모의 조카였다. 달리 말하면 최팔용은 강용흘의 진외가 사위였고, 최팔용의 누이동생은 강용흘의 당숙 집안 손자며느리였다. 두 집안 사이에 긴밀한 왕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초당>에는 3·1운동 전후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에 관한 흥미로운 관찰 기록이 담겨 있다. 소설이니만큼 그 속에 적힌 얘기가 모두 사실은 아니겠지만, 그 시절 조선인들 삶의 모습을 반영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해서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볼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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