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주기 강우일 주교 강론

 

오늘 우리는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았다.
 
세월호는 출항해서는 안 될 배였다.
1년 전 그날 인천항은 악천후였고, 가시거리는 800미터밖에 안 되었다.
그 때 출항한 배는 세월호 단 한 척뿐이었다.
그리고 출항 당시 세월호는 규정된 물량의 약 2배를 과적했고, 엄청난 화물들을 고정하지도 않고 적재했다.
그리고 화물을 더 싣기 위해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배 밑바닥의 평형수를 절반 이상 빼버렸다. 출항 전에 인천항 운항관리자는 배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않고 안전점검 보고서에 ‘양호’라고 기재하고 출항허가를 내주었다.
심각한 기상악화가 풀리지 않아 단원고 아이들은 세월호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아이들을 다시 태우고 돌아올 버스가 인천항으로 출발했었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세월호는 왜 무리한 출항을 했을까?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아무것도 밝혀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왜 갑자기 세월호가 침몰했는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검찰은 침몰 원인으로 급변침을 지목하며 ‘조타미숙으로 선체가 크게 기울었으며, 과적 및 고정 불량과 평형수 부족으로 복원력을 상실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급변침은 사고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라고 한다.
세월호가 왜 급하게 방향을 틀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7천 톤이나 되는 세월호가 100여분 만에 완전 침몰했고 선체가 1초에 14도나 기울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급격한 침몰과 변침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월호에서 자기 발로 나온 사람 말고는 해경이 들어가서 구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세월호는 사고 후 1시간 동안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라고 하는 안내방송 외에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침몰 당시 아이들은 유리창을 두드리며 구조 요청을 했지만, 해경은 선실 유리창을 깰 생각도 안 했고, 탈출 안내도 하지 않다가 10시17분, 해경 함정 123정이 도착한 후 47분 만에 현장에 있던 해경 헬기와 선박, 잠수부는 돌연 일시에 철수했다.
후에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잠수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경이 “언딘”의 작업을 위해 철수를 요구했다.’ 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다.
사고 해역 근처에 있었던 4만톤 급의 미 함정의 지원도 거부했다.
해군참모총장이 두 번이나 통영함 출동을 명했는데도 해경이 해군함정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리고 일본 해상보안청의 구조협력 제안도 거절했다.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사고의 원인과 경과를 분석해 줄 전문가들이 침묵하기 시작했다.
어떤 언론사에 따르면 세월호 문제를 제기해 온 전문가들이 4월21일부터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 시작했다고 한다.
익명의 대학교수는 인터뷰에서 ‘압력이 들어온다. 주로 정보 부처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4월22일 방송통신위원회는 ‘세월호 관련 재난상황반 운영계획’이라는 문건을 통해 방송사 조정 통제 및 대응 임무를 하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세월호는 국내 여객선 중 유일하게 해양 사고 발생 시 국정원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국정원은 4월16일 오전 9시10분, 청해진해운 사장 등으로부터 사고 문자 메시지를 받았고, 9시28분에 해경상황실에 전화해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월호 내부에서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국정원은 세월호에 99가지의 상세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왜 민간 여객선이 배의 시설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그리고 선원들의 수당이나 휴가까지 국정원 지시를 받아야 했는지 아무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한국 주교단이 함께 로마를 방문하고 프란치스코 교종을 뵈었다.
5년마다 한 번 하도록 되어 있는 정기 행사다.
그 때 교종께서 우리에게 제일 처음 던지신 질문이 ‘세월호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였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정부가 세월호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조사위원회 조직은 구성했는데 실제로 조사는 전혀 한 발자국도 진척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밖에 답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교종께서는 아직 세월호 가족들의 비통함이 잊을 수가 없고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다고 하셨다.
 
세월호 참사 한 달 후인 5월16일 대통령은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분명히 ‘특별법은 만들어야 하고, 검경수사 외에 특검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낱낱이 조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씀까지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위원회는 한 발자국도 못 내딛고 있고,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의 독립적 진실규명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시행령을 발표했다.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사고를 유발한 원인 제공 기관들인 한국해운조합, 지방항만청, 한국선급, 선박안전기술공단과 직접 연결된 상부 기관이다.
간단히 말하면 직접 사건의 피고가 되거나 피고와 아주 가까운 부서다.
피고 신분의 공무원이 세월호 진상 규명의 실무 전체를 책임 조정하는 역할을 맡도록 하는 시행령은 진실 규명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피고의 한 가족에게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정부는 희생자 가족에게 보상비는 몇 억 원씩 줄 것이라고 흘리며 돈다발을 자꾸 펄럭이며 마치 유가족들이 돈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처럼 국민 여론을 오도한다.
이것은 유가족들에 대한 인격모독이다.
대통령이 눈물 흘리며 한 약속을 이런 식으로 변형하고 왜곡하면 국민은 국가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 한다.
어떤 이들은 광화문 광장에 기한도 없이 농성하고 노숙하고 있는 가족들, 시민단체 사람들의 존재가 불편하고 피곤하고 혐오스럽게 느낀다.
언제까지 세월호 문제에 붙잡혀 있을 것인가, 나라 경제도 불황이고 민생 문제도 산적한데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강도 만나서 얻어맞아 초죽음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웃을 보고도 내 갈 길이 바쁘다며 길 건너편으로 돌아서 지나가버리는 레위인이나 사제와 다를 바 없다.
이웃 형제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질 수 없는 오늘의 메마른 우리 영혼이 서글프다.
형제의 신음 소리가 전혀 우리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콩크리트 벽 같은 불통의 우리 마음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304명이나 되는 이웃 형제와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린 사건의 충격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오늘의 개인주의적 문화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국민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기관이 외면하고 밝히려 하지 않는 의혹 가득한 사건을 그냥 잊고 덮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우리 몸에 돋아난 종기의 뿌리를 도려내지 않고 겉에 붕대만 감고 말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종기는 속에서 더 곪아서 뼈 속까지 썩어 들어가고 나중에는 세월호보다 더 큰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의 비극을 잊으려하기보다는 도리어 거듭 상기해야 한다.
희생자들의 고통과 참담한 최후를 기억해야 다시는 그런 참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와 회심을 열매 맺을 수 있다.
세월호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자꾸 상기하여 질문하고 밝히려고 해야 진실한 원인에 접근할 수 있고 그 사악한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고 거기 머물고 있는 가족들과 연대하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나누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걸린 몹쓸 개인주의의 염병에서 치유될 수 있다.
상처는 회피하고 어설프게 봉합해서는 속에서 갈수록 더 곪아간다.
 
우리는 오늘 성체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해내야 하겠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가족들의 상처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기를 청하도록 하자.
그리고 동시에 이런 참혹한 비극을 직접 초래한 사람들이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유가족들과 국민에게 용서를 청할 용기를 내도록 기도하자.
 
예수님은 진리의 증언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 치셨다.
우리는 오늘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불의와 의혹과 고통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살아있는 증언을 하도록 초대 받고 있다.

 

Helene Fischer / Ave Maria


독일인이 자랑하는 미녀가수 Helene Fischer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떨려온다.
헬레네 피셔는1984년 8월 5일에 러시아시베리아에서 출생,
1988년에 독일로 이주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프랑크프루트에 있는 예술대학교에서 뮤지컬배우를 전공,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도 Rocky Horror Show(록키 호러 쇼)나
Fifty-Fifty같이 여러 뮤지컬에 참여했고.
그동안 헬레네의 어머니가 녹음한 데모씨디를 유명한 프로듀서한테 보냈는데
그의 주선으로 음반계약을 하면서 유명해지게 된다.


Ave Maria! Jungfrau mild,
er hore einer Jungfrau Flehen,
aus die sem Felsenstarrund wild
soll mein Gebet zu dirhin wehen.
Wir schlafen sicherbis zum Morgen,
ob Menschen noch so grausamsind.
O Jungfrau sichder Jungfrau Sorgen,
O Mutter, hor ein bittend Kind!


Ave Maria!

Ave Maria!  Unbefleck!
Wenn wir auf diesen Fels hinsinken
Zum Schlaf, und uns dein Schtz bedeckt
Wird weich der hancte Fels uns dunken.
Du lachelst, Rosendufle wehen
In dieser dumpfen Felsenkluft,
O Mutler, hore kindes Flehen,
O Junfrau, eine Jungfrau ruft!


Ave Maria!

Ave Maria!  Reine Magd!
Der Erde und der Luft Damonen,
Von deines Auges Huld verjagt,
Sie konnen hier nicht bei Schicksal beugen,
Da uns dein heil`ger Trost anweht;
Der Jungfrau wolle hold dich neigen,
Dem Kind das furden  Vater fleht.
Ave Maria!


아베마리아!  자비로우신 동정녀여,
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은 이 험한 세상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구해주십니다
쫒겨나고 버림받고 욕받을지라도
당신의 보살핌으로 우리는 편히 잠듭니다
동정녀여. 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성모여, 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베 마리아!


아베 마리아!  순결하신 동정녀여! 
지금 우리는 곤고한 잠자리에 들어야하나
당신이 우리 위에서 돌보아 주신다면
솜털이나 새털 잠자리처럼 편안합니다.
암울한 이 동굴 속 공기도
당신의 미소가 함께 한다면 향유와 같습니다
하오니 성모여, 이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성모여, 이 어린아이의 간구를 들어주소서!
아베 마리아!


아베 마리아!  정결하신 동정녀여!
땅과 하늘의 사악한 마귀들이
지금 여기 이렇게 나타나지만
당신께서 임하시기 전에 사라질겁니다
당신의 보살핌에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버지가 아이의 바램을 들어주듯이.
아베마리아!


아베 마리아'는 가톨릭교회의 기도문 중 하나인 '성모송'을
많은 작곡가들이 노래로 만든 것이다.
라틴어로서 Ave는 "안녕하십니까?"  혹은 "문안드립니다."라는 뜻이고
Maria는 예수를 낳으신 여인을 말한다.
그래서 이 부분만 직역한다면 "마리아님, 안녕하십니까?"라는 뜻이 될 것이다.
‘마리아를 찬양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때론 천사의 기도(Angelic salutation)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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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7장] 함석헌의 야인혼과 저항정신

2013/03/06 08:00 김삼웅

 

 

 

큰 사상가가 나지 않은 오늘의 한국에서 함석헌은 20세기 우리 민족이 배출한 대사상가다.
<교수신문>의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성과이다. 그이의 신앙ㆍ철학ㆍ평화ㆍ비폭력 ㆍ인권ㆍ역사ㆍ저항ㆍ교육ㆍ언론ㆍ시ㆍ예술ㆍ아나키즘과 이것의 통섭은 한 세기 우리 민족을 상징하고도 남는다. 또한 그의 문체ㆍ시론(時論)ㆍ서체ㆍ독서ㆍ연설ㆍ꽃가꾸기 등 연구과제는 산적해 있다.

함석헌의 생애는 곧 한국현대사요, 그의 철학은 곧 한국철학사요, 그의 저항운동은 곧 반독재 민권운동사다. 그런가하면 주저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단재와 백암의 민족사관에 비견하여 독특한 씨알사관이고, 그가 만든 <씨알의 소리> 잡지는 한국민중언론의 통사다. 뜻 있는 젊은이들이 외국 학문(인)에 매달리기보다 함석헌의 광맥을 탐구하여 학위를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올수록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사상적으로 그만큼 풍요로워 질 것이다.

한민족은 고려시대 100년, 일제식민지 36년과 미군정 3년,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3인의 30년 무인정권을 빼면 수 천년을 문민통치의 전통을 지켜왔다. 수많은 학자를 키우고, 학맥을 이루었다. 그래서 조선왕조 때만 해도 퇴계학, 율곡학, 남명학, 다산학 등 학문의 큰 산맥이 이루어지고 현대로 이어진다.

우리 나라에서 정부수립 60여 년 만에 개인의 학맥을 형성한다면 누가 가능할까.
우선 학문의 넓음과 깊음, 전문성, 일관성, 대중성, 독자성, 국제성 등을 종합한다면 ‘함석헌학’ 즉 ‘씨알학’이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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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7장] 함석헌의 야인혼과 저항정신

2013/03/04 08:00 김삼웅

 

 

‘가슴에 화살 꽂힌 사나이’가 함석헌이다.
양극성과 이율배반과 모순율과 동양 대 서양과 옛날과 오늘을, 들사람의 실타래로 교직하여 가이없는 한 필의 비단을 짠 사람이다. 생각은 천의무봉, 활동은 원융무애, 생활은 손방이였다. 그런 속에서 “깊은 사색의 골을 건너고 생각의 용광로에서 정련된 글이요 말이”(김경재) 쏟아졌다.

나는 함석헌의 수백 수천 편의 글 가운데 <들사람 얼>을 특히 좋아한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가 자전적 기록이라면 이 글은 함석헌의 자화상이다. 자신의 내면과 자신의 이상을 웅혼한 필치로 그린 자화상이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중국 전설상의 성군 요(堯) 임금이 젊은 시절의 친구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에게 나와서 벼슬을 하자고 권하니까, 그들이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면서 영천수 흐르는 물에 귀를 씻었다는 이야기.

장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 왕이 벼슬을 권하자, 제사 돼지나 사당 안에 점치는 죽은 거북이보다 진창속의 돼지, 바다 감탕속의 거북이가 되고자 한다는 이야기.

천하의 권력자 알렉산더가 찾아와 버티고 서 있자, 해 드는데 그림자 지니 비키라고 호통친 디오게네스의 이야기.

한 개 선비로서 권부에 나선 후한(後漢) 광무제가 항상 마음에 걸린 동향의 벗 엄자릉을 궁궐로 불러 진수성찬으로 대접하고 함께 잠을 잘 때 그가 거침없이 황제의 배위에다 다리를 턱 올려놓고 자더라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러므로 소부, 허유가 사실로 있었거나 없었거나, 자릉이 정말 광무 배때기를 눌렀거나 안 눌렀거나, 디오게네스가 과연 알렉산더를 사선으로 보았거나 말았거나 그건 문제가 아니다. 그것과는 별 문제로 이 이야기들은 참이다. 따지고 들어가면 다른 것 아니요, 두 편이 있다는 말이다. 요, 초왕, 알렉산더, 한광무 등등으로 대표되는 소위 문명인과 소부, 허유, 장자, 디오게네스, 엄자릉 등으로 대표되는 ‘들사람’과 그리고 이 세상이 보기에는 문명인의 세상같지만 사실은 들사람이 있으므로 되어간다는 말이다. (주석 9)

함석헌의 야인정신은 조선시대 김시습에 이르러 피날레를 이룬다. 김시습의 이야기지만 자신의 모습이다.

김시습이 미친 모양을 하고 다니며 길가에서 오줌을 쌌다. 그것이 누구냐? 그가 길을 기다가는 주저앉아 “이 백성이 무슨 죄 있소?”하고 통곡하던 바로 그 민중 그 자신이 아닌가? 오줌을 쌌다니 어디다 싼 것일가? 세조의 정치에 대해, 바로 세조의 얼굴에 싼 것이지 뭐냐? 칼을 갈아 물을 잘라도 물은 오히려 흐른다고, 사람의 모가지는 자를 수 있어도 민중의 오줌인 신화, 전설, 여론은 못 자를 것이다. (주석 10)

이것은 함석헌 자신이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이 거처했던 경무대와 청와대에 오줌을 갈긴 정신을 뜻한다.
함석헌을 야인, 들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90평생에 한번도 관직에 들지 않았다는 단순한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생각, 사고, 행동패턴에 있어서 야성이기 때문이다. 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문천상의 천지정기(天地正氣)를 좋아하며, 소부와 허유의 ‘세이(洗耳)정신’을 사랑하는 야인이다. 어김없는 자신의 모습이다.

함석헌은 소크라테스의 독백, 세례요한의 석청, 모세의 시나이 산, 디오게네스의 통나무, 간디의 아힘사와 진리파악, 휘트먼의 <풀잎>, 소로의 윌든 호숫가의 통나무집, 매월당 김시습의 ‘미친오줌’, 토머스 페인의 <상식>, 성삼문의 의기를 높이 사고 좋아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권력보다는 야인, 지배보다는 자유를 택한 들사람들이다. 시대의 아웃사이더이다. 당대의 패배자이지만 영원한 승자이다. 이들은 속박이나 규제의 생활이 아니라 자유로운, 해방된 삶을 추구하며, 이것을 신념과 생활에 일치시킨 사람들이다. 함석헌도 이들처럼 자유분방하게, 천의무봉하게 살았다. 일제에 필봉을 들이대고, 소련군대에 달려들고, 이승만의 처를 ‘경무대 여우’라고 질타했다. 박정희 쿠데타의 새벽에 모두 침묵할 때 5.16을 세차게 비판하고, 전두환을 줄기차게 질타했다. 그리고 바벨탑으로 둘러쌓인 기독교계에 맹타를 날렸다. 어용 지식인, 곡필 언론인들에게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국민을 일깨웠다.

함석헌은 권력(자) 비판에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말과 글을 쓸 때는 민중의 말과 글을 구어체로 사용하고, 말과 글이 통하지 않을 때는 서슴없이 행동에 나섰다. 단식투쟁, 삭발투쟁, 거리시위를 감행하고, 재판정에 설 때는 “민주주의가 죽었다”고 베옷을 입고 출정했다. “자유는 감옥에서 새끼를 치고 나온다”고, 젊은이들에게 감옥가는 것을 두려워말라고 가르치고 몸소 실행했다. 투옥, 연금, 수배, 도청이 일상사가 되었다. 권력과 제도언론이 언로와 지면을 봉쇄할 때는 70노령을 돌보지 아니하고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광야의 계명성이 되었다.

함석헌은 야인, 들사람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들사람이란 제 몸을 찢는 사람이다. 그는 문화를 모른다. 기교를 모른다. 수단을 모른다. 체면을 아니 돌아본다. 그는 자연의 사람이요. 기운의 사람이요. 직관의 사람, 시의 사람, 독립독행의 사람이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듣지 않는 사람,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않는 사람이다. 다만 한 가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들으려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주석 11)

바로 함석헌의 자화상이다. 아니 씨알, 이단자, 아나키스트, 아웃사이더, 유목민, 풍류가의 진정한 모습이다. 함석헌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듣고자 하고, 이것을 씨알에게 알리는 언론인이었다. 그는 이 일을 “하느님의 발길에 채여서”한다고 말하였다.



주석
9> 함석헌, <들사람 얼>, 41~42쪽, 한길사, 1985.
10> 앞의 책, 44쪽.
11> 함석헌, <인간혁명>, 일우사,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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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7장] 함석헌의 야인혼과 저항정신

2013/03/03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출생을 들사람으로 시작했다.
옛적부터 푸대접 받고 소외된 땅 평안도 상놈(평민)의 후예로 태어났다. 바탕이 들사람이고 자라나기를 상민들과 함께하였다. 민중정신을 기르는 ‘청산맹호(靑山猛虎)’라는 오산(五山)의 교육이념은 함석헌의 혼과 얼을 키우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서 참스승을 만나 저항정신이 길러지고 민중과 대화하는 말길(言路)을 배웠다. 청년기에 3.1운동에 직접 나서고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을 겪었다. 그리고 외면하지 않고 저항하였다.

이후 식민지배, 공산주의, 백색독재, 군사독재와 싸우면서 숱한 필화를 겪고, 옥고를 치르고, 온갖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명저의 저술가가 되었지만 돈을 모으지 못하고, 종교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장로ㆍ신부 ․ 목사가 되지 못하고, 교사 생활을 했지만 교장, 총장을 하지 못하고, 반생을 언론과 함께 하면서도 거대 신문, 잡지의 사주가 되지 아니했다.

80여 년을 살아 온 오늘까지 그는 한번도 벼슬을 한 적이 없다. 권력계층이나 부유층에 끼어 본 적이 없다. 다스리는 자리에 앉아본 적도 없고 ‘가진 자’의 부류에 끼어 든 적이 없다. 그런가 하면 어떤 성직에 있어 본적도 없다. 흔히 그를 ‘종교인’이라고 부른다. 이건 그에 대한 편이상의 호칭일 뿐,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명칭이다. ‘씨알’에게 명칭이 붙을수록 씨알스럽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겉으로라도 그는 ‘씨알’의 한 상징임에 틀림없다. (주석 5)

함석헌은 ‘겉으로라도’가 아니라 속내가 알짬 씨알이고 들사람이다. 권력은 탐하고 부를 추구하고 종교나 교육계의 자리를 원했다면, 그의 능력이나 성실성과 치열함으로써 얼마든지 성취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들사람이고 씨알정신이기 때문에 세속의 감투나 관직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반면에 그는 어리숙하고 바보스럽고 타산적이지 못하고 처세에 약하고 세상의 물정을 잘 몰랐다. 그는 자신을 우리 말로 바보새, 한자로 신천옹(信天翁), 영어로 알바트로스(allbatros)라고 부르는 ‘바보새’가 되었다. 바보새를 닮았고, 휘호에도 신천을 낙관으로 썼다. 프랑스 <악의꽃>의 시인 보들레르는 가난한 민중, 소외된 자, 고아, 창녀들을 노래하며 그들의 벗이 된 ‘저주받은’ 시인이다.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을 자신의 자화상으로 그렸다.

뱃 사람들은 자주 장난거리로
항해의 벗인 양
뱃길따라 미끄러지는 선박을 뒤쫒는
아주 커다란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간판 위에 막 던져진 순간,
이 창공의 임금님은 힘들게 노를 젓듯
조롱을 받으면서
그 큼직한 흰 날개를 질질 끌어댄다.(후략)
(주석 6)

함석헌이야말로 20세기 알바트로스다.
장자, 노자, 제논, 디오게네스, 플로티노스, 두보, 비용, 원효, 양녕대군, 임제, 무학대사, 김시습, 이지함, 김삿갓, 이달, 허균, 이탁오, 브르노, 스피노자, 소로, 셀리, 하이네, 조르주 상드, 애드가 앨런 포우, 보들레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혼과 얼과 행동이 전해지고 합해진 바보새이고 신천옹이고 알바트로스다.

20세기가 첫 시작되는 해에 고난의 한국에서 바보새가 태어난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었다.
20세기 전반기는 일제의 압박에, 후반기는 분단, 전쟁, 독재, 민주화의 고된 전장터의 씨알에게 그는 항상 벗이고 동지이고 교사이고 스승이었다. 고난의 시대에 씨알은 그가 곁에 있었기에, 다른 민족이 1천 년에 겪을까 말까한 일을 1세기 동안에 모두 겪으면서도 미치거나 망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었다.

독재 권력자들이 미쳐날뛰고, 외세가 국토를 동강내고, 재벌이 미다스의 손이 되고, 언론이 권력과 재벌의 나팔수가 되고, 교수들이 지식난쟁이를 대량생산하고, 종교인들이 물신주의의 바벨탑을 쌓을 때, 그래도 함석헌의 야인 혼이 있어 씨알은 위로 받고, 숨통을 트고, 저항정신을 길러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인 중에서 아주 드물게 세계사적 사상과 철학을 가진 인물이다. 반도에서 태어나 일본 섬나라에서 공부했지만, 그의 사유의 넓이와 깊이는 대륙적이고 국제적이었다.

“함석헌의 씨알사상 속에 아시아의 정신적 유산의 알짬과 성서적 신앙의 핵심이 융합되어 새로운 21세기의 종교사상의 씨앗으로 열매 맺고 있다.”
(주석 7)

함석헌만큼 사상사, 정신사, 철학사, 종교사, 민주주의 역사를 꿰뚫는 이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가히 사상의 통섭자이고 철학의 실천자이다. 바보와 노마드는 ‘궁합’이 맞지 않는 관계이지만, 그는 모순의 창과 방패를 바보라는 보자기로 싸서 이것을 융합하고 실행하는 야인이 되었다.

나는 그이와 수개월 이국땅에서 지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어떤 때는 한 가지 일을 되씹고 고쳐 생각할 뿐 아무런 결단도 못하는 햄릿, 어떤 때는 손에 아무런 방도도 없으면서 세계에 저항할 듯 흥분하는 돈키호테, 조용히 정좌해서 끝없는 명상에 잠긴 모습은 수도승의 모습인데, 시속 120킬로 달리는 차를 더 속력내라고 하며 쉬지 말고 일생이라도 달렸으면 할 때는 돈환, 세계지도를 내놓고 관광할 계획에 심취할 때는 고향 없는 집시, 그러나 한국에서 온 신문을 손에 들었다가 드시던 식사를 그만두고 목이 메어 울면서 귀국길을 위해 짐을 쌀 때보면 이 땅에 뿌리를 박은 애국자, 글을 쓴 것을 보면 사고에 골똘한 분인데 왜 그렇게 안절부절할까? 가슴에 화살을 맞은 이처럼! 그렇다. 그는 가슴에 화살을 맞아서 안절부절이다. 그 안의 양극성, 그 안의 이율배반 그것이 바로 그의 가슴에 꽂힌 화살이다. (주석 8)


주석
5> 송기득, <함석헌의 저항론>, <씨알․인간․역사 - 함석헌 선생 80순기념문집>, 한길사, 1982.
6> 이치석, <씨올함석헌 평전>, 35~36쪽, 재인용, 시대의 창, 2005.
7> 김경재, <함석헌의 씨올사상연구>, <신학연구>, 30 (1989년).
8> 안병무, <선생님께 드리는 글>, <함석헌선생 80순기념문집>,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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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7장] 함석헌의 야인혼과 저항정신

2013/03/02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누구냐? 그의 사상은 무엇이냐?" 물었을 때 압축이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호메르스의 <일리아드>를 한 마디로 줄이거나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열 마디로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2010년 4월 교수신문은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의 대표적 인물로 함석헌을 뽑았다.
그가 역사 분야의 대표 인물로 뽑히고, 전체로도 수위를 차지했다. 망국과 식민지, 독립운동과 친일, 해방과 분단, 독재와 민주의 굴곡진 현대사에서 속출한 수많은 학자,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을 제치고 함석헌이 1위로 뽑힌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함석헌은 종교인, 역사가, 언론인, 민주화운동가, 시인, 교육자, 저술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고, 각 분야에서 대표적 위치에 오를 만큼 사유와 활동의 폭이 넓고 깊고 다양했다. 많은 업적도 남겼다. 정신과 철학, 사상면에서 100년에 한번 날까 말까한 ‘세기난우(世紀難遇)’의 인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함석헌은 역사책을 썼지만 역사학자가 아니고, 시집을 냈지만 시인이 아니고,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농부도 교사도 못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목사, 신부가 되지 아니하고,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지만 정치를 하지 않았다. 당대에 언론인 누구보다 날카로운 시론, 평론을 많이 썼지만 직업 언론인이 되지 않았다.

그럼 함석헌은 누구냐, 무엇이냐.
한마디로 야인(野人)이고 들사람이다. 여당, 야당 할 때의 권력을 잡지 못한 정당을 뜻하는 것이나 관직에 나가지 않은 야가 아닌, 그야말로 순수한 들사람을 말하는 야인이다. 우리 조상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살던 만주족을 야인이라 불렀다. 야만족이란 비하가 따랐다. 하지만 함석헌을 일컬을 때의 야인은 그런 의미와는 격이 다른 맨사람, 씨알을 말한다.

야(野), 곧 들은 도(都), 읍(邑)에 대해 쓰는 말이다.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 읍, 그 읍 중에서도 나라 임금 있는 곳이 도다. 야는 그 도읍 밖에 나와 있는 들, 교외다. 시골, 농촌이다. 야인, 들사람은 시골사람, 두메 사람이다. (주석 1)

함석헌은 “문명의 병이 들어 정신이 약해지면 반드시 소수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썩어가는 백성을 책망하여 그 마음속에 잃어버린 야성(野性)을 도로 찾도록 부르짖는다.” (주석 2)고 했다. 중국의 노자와 장자,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미국의 휘트맨과 소로를 대표적 야인으로 꼽았고, 그는 또 새시대의 문을 연 예언가를 야인으로 보았다. 예레미아, 엘리야, 아모스, 호세아, 세례 요한, 예수를 순수한 들사람이라고 지목했다.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도 들사람이라고 하였다. 함석헌 자신도 이들과 한 줄에 꿰이는 들사람이다.

 



함석헌은 누구인가?

첫째, 아나키스트다.
세계평화주의, 자연론적 사회관, 개인의 자주성과 부당한 권위에 대해 저항한 아나키스트이다. 일본인 케무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가 의도적으로 오역한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 크로포토킨에 의해 체계화된 반봉건ㆍ반전제ㆍ반강권주의, 개인의 자율과 자치를 존중하는 아나키스트다.

둘째, 소로주의자다.
자연주의, 물질과 과학 위에 서야 한다는 초절주의, 부당한 조세와 침략전쟁을 거부하는 높은 정신운동, 기계 문명의 거부, 단순한 생활을 지향하는 소로주의자이다.

셋째, 간디주의자다.
비폭력저항, 불복종 ․ 비협력주의, 불가촉민(不可觸民, 씨알)의 지위향상운동, 민중교육운동, 인도 고유의 전통사상인 사티아그라하(眞理把握)운동, 절제된 생활원칙인 브라아마차리아(brahmacharya) 등 종교적 행위와 정치적 행위를 결합하여 ‘국가의 도덕성’을 실천한 간디의 사상과 철학을 실천한 간디주의자다.

넷째, 유목주의(nomadism)자다.
그의 사유와 철학은 고정되지 않고, 장소와 상황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동성과 도전성을 보여주는 노마디즘의 실천자이다. 고금동서를 종횡하면서 세계사의 정신과 사상을 육화(肉化)한 도전가이고, 머물면서는 민주화운동과 씨알의 세상을 위한 언로(言路)를 개척한 뉴노마니스티다.

다섯째, 퀘이커교도이다.
기록된 교리도, 교회와 성당과 같은 지정된 예배장소도, ‘선교’라는 말 대신 ‘봉사’라는 말을 선호하는, “진리를 믿는다고 스스로 내놓고 말하는” 퀘이커다. 무교회주의와도 가깝지만 보다 근원적인 종교관은 톨스토이, 간디, 우찌무라 간조, 유영모와 종교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같이 있는 퀘이커도 내 영혼의 주는 아닙니다.”  (주석 3)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기독교의 형식주의와 세속화를 거부하는 퀘이커 교도이다.

여섯째, 풍류사상가(風流思想家)다.
근래에 술 잘마시고 여성편력이 마치 ‘풍류’인 것처럼 타락했지만, 우리 민족사상의 원형인 풍류는 생각이나 생활에서 속(俗)되거나 삿(邪) 됨이 없는 생활철학을 말한다. 함석헌의 선풍도골의 헌헌한 모습이나 무애(無碍)의 사유와 활동은 한국의 마지막 풍류사상가이다.

일곱째, 평화사상가이다.
그의 모든 탐구ㆍ실천ㆍ도전ㆍ저항의 궁극적 목표는 평화에 있었다. 국가주의와 국수적민족주의를 거부하고, 제국주의와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일체의 권위주의를 배격하였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전적 평화정신에서부터 현대 ‘무장된 평화체제’를 반대하였다. 일국의 평화가 아닌 지구촌의 평화를 추구하였다.

함석헌은 사상적으로는 간디주의, 사회적으로는 아나키즘, 철학적으로는 소로주의, 정신적으로는 노마니즘, 퀘이커신앙, 풍류정신을 융합하고 통섭한 대사상가이다. ‘야인’, ‘씨알 사상’은 바로 이렇게 하여 생성되고 발육되고 실천되었다.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은 2012년 42회 째 대회에서 <대전환 : 새로운 모델의 형성>이라는 주제로 과거 자본주의는 틀렸고,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현실사회주의는 이미 망했고, 자본주의의 낡은 기차는 종착역에 이르렀다. 클라우스 슈바프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를 기반으로 한 경제학은 위기에 도달했다. 우리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줄 수 있는 사람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 (주석 4)고 다보스포럼에서 말하였다.

21세기 인류의 미래상이 간디주의, 아나키즘, 소로철학, 노마디즘, 퀘이커주의, 풍류정신을 융합하고 통섭하는 ‘야인주의’라면 함석헌은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이르러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기계적 합리주의자들의 눈에는 ‘바보’로 보이고, ‘배부른 돼지’들의 눈에는 ‘가난뱅이’, 세속적 권력주의자들에게는 ‘정신분열증 환자’로 비쳤겠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런 음해와 비난이 따랐다. 함석헌도 마찬가지였다.

주석
1> 함석헌, <인간혁명>, 일우사, 1962년.
2> 앞과 같음.
3> 함석헌, <벤들힐의 명상>, <함석헌 전집>, 제3권.
4> <다보스포럼, 자본주의를 버리다>, 매일경제신문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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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3/01 08:00 김삼웅

 

 

 

필자는 2001년 3월 <대한매일> 주필로 재직할 때 ‘김삼웅 칼럼’에서 <진짜 언론인 함석헌 100주년>을 기고한 바 있다

오늘 (13일)은 함석헌 선생 탄생 100주년이다. 함석헌은 역사연구가ㆍ사상가ㆍ민권운동가ㆍ잡지발행인 등 여러가지로 분류되지만 ‘진짜 언론인’도 한 범주라 하겠다.

언론인이면 언론인이지 진짜는 뭐고 가짜는 뭐냐고 할지 모르지만 상품에 진짜와 가짜가 있고 진실한 사람과 위선자가 있듯이 언론인도 마찬가지다. 특히 오랜 독재와 냉전시대에 사이비언론(인)이 득세하고 판칠 때 함석헌이야말로 진짜 언론인의 역할을 했다. 제도언론에 지면이 허용될 때는 할 말을 하고, 지면이 봉쇄당할 때는 ‘언론게릴라전’을 펴면서 독재와 냉전세력과 싸웠다.

최근 어떤 신문이 ‘할 말은 하는 신문’을 구호로 내걸었지만, 그런 신문이 독재에 침묵하거나 곡필을 서슴지 않을 때 함석헌은 진짜 할 말을 했다. 억압시대에는 비굴하고 민주시대에는 방종하는 사이비 비판이 아니라 남들이 입을 다물 때, 천지가 암흑에 덮일 때 그는 할 말을 했다.


 


 

친일언론이 식민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갈 때 함석헌은 동지들과 <성서조선>을 만들며 어둠에 묻힌 조선역사를 쓰다가 투옥되고,자유당 천하에서 대부분의 언론이 어용족 또는 만송족(晩松族)일 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을 썼다가 감옥엘 갔다. 5·16쿠데타로 온 세상이 공포에 싸일 때는 <5ㆍ16을 어떻게 볼까>란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군사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정치군인들에게 할 말을 다한 것이다. 당시 족벌언론이 쓴 쿠데타 지지 사설과 기사,논평은 한국언론사의 치부를 드러낸다.

독재권력이 강화되면서 지식인은 두 갈래 부류로 나타났다. 저항과 타협의 길이었다. 저항자는 설 땅을 잃고 타협자는 풍요가 따랐다. 고려무인정권 때도 그랬고 일제식민시대도 그랬다. 그리고 비굴하게 타협하면서 무인정권과 식민통치를 찬양한 세력이 당대의 주류가 되었다.

군사독재 시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석헌 등 진짜 비판자는 도태되고 사이비들이 득세하여 사세를 키우고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전두환 정권에서 이런 현상은 절정을 이루었다.

언론통제가 심해지자 함석헌은 제도언론인들에게 ‘언론게릴라전’을 제창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언론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게릴라전술로 언론투쟁을 하자는 주장이었다. 게릴라전은 정규군이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특수임무가 요구될 때 전개된다. 신문사주와 간부들이 군사독재와 유착된 상태에서 언론의 정상적 기능(정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게릴라전을 제창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목마른 외침은 빈 산의 메아리에 그쳤다. 독재의 짓누름도 심했지만 그들이 던져준 이권과 고깃덩이도 만만찮았다. 또 긴 세월 길들여진 보신주의 언론인들이 게릴라로 활동하기에는 너무 배부르고 비대해졌다. 특히 일부 양심적 기자들이 자유언론의 횃불을 들었다가 쫓겨나면서부터 진짜 저항언론의 맥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직접 게릴라전에 나섰다.

함석헌은 사이비들처럼 사주의 지침이나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무조건 지지 또는 반대하는 따위의 언론인과는 격이 달랐다. 군사독재를 준엄하게 비판하다가도 통일문제에는 지극히 전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되어야 합니다. 갈라진 이대로는 살 수 없고 산다고 해도 사람이 아닙니다. 남은 북을 믿고 북은 남을 믿고 일어섭시다.” <북한동포에게 보내는 편지>

30여 년 전에 쓴 글이 지금 읽어도 감동을 준다. 참 글은 이렇게 이념과 시공을 뛰어넘는다.
그 자신 진짜 언론인이었던 송건호 씨는 함석헌을 타고난 언론인으로 평가한다. 신문기자나 논설위원의 경력은 없지만 타고난 언론인이란 두가지 논거를 들었다.

첫째, 문장이 보통 언론인 이상으로 유려하고 평이하다. 언론인과 비언론인의 구분은 문장이 쉬운가 난삽한가라면 함 선생의 문장은 간결하고 쉽다.

둘째, 시대를 보는 눈이 예리하다. 나날의 시사문제에 날카롭다는 것이 아니라 시대 이면에 흐르는 사조를 꿰뚫는 눈이 날카롭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 함석헌은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는 용기 있는 언론인이었고 용기의 원천은 역사의식이었다. 역사의식이 없는 용기는 풍차에 칼질하는 만용이거나 멧돼지의 저돌성이다. 타락한 언론의 저돌성이 ‘비판’의 이름으로 설치는 시대에 함석헌의 참언론정신이 그립다.
(주석 7)

함석헌은 일제의 패악이 천지를 뒤덮을 때 1930년 <성서조선> 제22호에 <의인은 멸절하였는가>에서 “구원 하옵소서, 여호와여, 경건한 자가 없어지고, 신실한 자가 인자(仁者) 중에서 끊어졌나이다” 라고 기구하였다.

그리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마무리에서 절규한다.

“ 그러면 젊은 혼들아, 일어나라, 이 고난의 짐을 지자, 위대한 사명을 믿으면서 거룩한 사랑에 불타면서 죄악에 더럽힌 이 지구를 메고 순교자의 걸음으로 고난의 연옥을 걷자, 그 불길에 이 살이 다 타고 이 뼈가 녹아서 다 하는 날 생명은 새로운 성장을 할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광명을 더할 것이다.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오를 것이다.”


주석
7> <대한매일>, 2001년 3월 13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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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8 08:00 김삼웅

 

 

제100호(1989년 4월호)

함석헌이 생전에 그토록 기대했던 <씨알의 소리> 통권 100호는 그가 세상을 뜬 뒤에 나왔다. ‘통권100호 기념호’로 나온 “함석헌 추모특집” 형태의 4월호였다. 새 발행인이 된 김용준은 <선생님의 ‘글쎄’가 그리워집니다>에서 “편집위원들이 모여 <씨알의 소리>를 계속 펴나가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전했다.

통권 100호의 특집 ① “함석헌 선생의 인간과 사상”에는 노명식의 <함석헌의 고난사관>, 송건호의 <언론인으로서의 함석헌>, 김경재의 <함석헌의 종교사상>, 송현의 <시인 함석헌 연구>, 김영호의 <함석헌과 동양사상>, 이윤구의 <하늘만 믿은 님과 퀘이커 신앙>, 송기득의 <함석헌의 대듦, 그 삶과 얼과 생각>이 실렸다.

특집② “함석헌 선생과 나” 에는 장기려ㆍ김대중ㆍ김영삼ㆍ최태사ㆍ이태영ㆍ법정ㆍ서영훈ㆍ김상근ㆍ원경선ㆍ다나까ㆍ한승헌ㆍ강기철ㆍ장기홍ㆍ김숭경ㆍ배영기ㆍ문대골이 쓴 각각의 사연이 담겼다. 박두진의 시 <함석헌 선생>, 박재순의 <씨알의 소리와 씨알의 사상>, <씨알의 소리 총목차>, <사진으로 보는 함석헌 선생> 등 내용면에서 ‘함석헌 추모특집’에 모자라지 않았다.

박두진의 시 <함석헌 선생>

이 시대, 이 세기,
우리들의 이 시대의 한 의인 가셨느니.
참 사람 사랑의 사람
자유의 사람 가셨느니.

그 암담하고 처절한
악의 시대 횡포의 시대의 상처투성이의
그 하늘의 사람 빛의 사람의
형형한 정기,
질풍노도로 한 시대를 깨우쳤느니.

불의ㆍ무도ㆍ악을 쳐
번개처럼 번뜩이고,
사랑에는 촉촉한 봄비로 스며,
빛의 길 참의 길을
밝혀 가셨느니.

아, 불의 자유, 불의 사랑, 불의 의지 그 활력,
스스로 안에 삭혀 눈물 머금던
겨레사랑, 인간사랑, 인류사랑 끝없이
불멸의 넋 활활 태운
이 시대의 의인,
불의 사람 참의사람 가시었느니.
(주석 6)

인물은 두 가지 형태로 역사에 남는다. 생전에 세상을 요란하게 했던 인물 중에는 갈수록 세월의 더께에 묻혀 망각되는 경우, 세찬 풍상과 인위의 작용에도 씻기지 안고 샛별처럼 반짝이는 경우다. 함석헌의 경우는 기념사업과 연구사업이 활발하고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인상’으로 조명된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그동안 이사장이 장기려 ⟶ 이문영 ⟶ 김경재 ⟶ 문대골 ⟶ 김조년으로 이어지고, <씨알의 소리>도 격월간으로 최근 (2013년 봄)까지 김조년 교수가 발행 겸 주간을 맡아 통권 226호를 발간하였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함석헌 탄신 100주년인 2001년 3월 13일 한국언론재단(프레스센터)에서 추념 및 후원의 밤 행사를 가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추념 메시지에서 “함석헌 선생이야말로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 사상가요 문필가였으며, 행동하는 지성이었고,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던 어두웠던 시절, 선생은 태산처럼 우뚝 서서 저와 민주화 동지들을 지탱해주고, 지도하시고 이끌어 오신 큰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는 3월 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 충신교회에서도 열리고, 3월 13일 오산학교에서도 학생, 교사, 동문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오산학교 동창회는 1994년 2월 <함석헌선생추모문집>을 편찬했다.
고인의 희귀한 사진 화보와 부록으로 저술, 연설의 목록을 연대별로 정리하여 연구에 도움을 준다. 문집에는 육필 원고가 실리고, 오산학교 후배로서 함석헌이 3.8선을 넘어 서울에 정착할 때 도움을 준 최태사의 글, 50년 동안 지켜보았다는 최진삼의 기록 등 값진 내용이 많다. 60여 년 전 오산학교 제자였던 안이현ㆍ김극진ㆍ이동순ㆍ임상흠ㆍ김창화ㆍ윤창흠ㆍ이용서ㆍ왕지균ㆍ이기백ㆍ김경옥ㆍ선우양국 등의 회고담에서 ‘교사 함석헌’의 모습과 비화, 일화를 듣게된다.

오산학교 30회 졸업생인 역사학자 이기백은 <함 선생의 속마음>에서 일제가 학교에서 일본어를 상용토록 했는데도 여전히 우리말로 강의하다가 갑자기 장학관과 교장이 교실로 들이닥치자 유창한 일본어로 강의를 한 ‘현장’을 소개했다. 함석헌이 얼마 뒤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 이와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이기백은 적었다.

‘씨알사상’을 되살리는 <함석헌연구>지가 2010년 봄부터 씨알사상연구원에서 반년간으로 발행되고, 제22차 세계철학대회가 2008년 8월 서울대학교에서 ‘유영모ㆍ함석헌사상연구’를 주제로 열렸다.

2009년 7월에는 ‘제1차 한ㆍ일 철학포럼이 일본에서 열렸다. 한ㆍ일 두 나라 철학자 30여명이 모인 철학포럼은 함석헌과 유영모, 다나카 쇼조, 아라이 오스이의 사상을 탐구하면서 “씨알사상은 생태계를 구할 대안”이라는 데 뜻을 모았다. 2010년에 함석헌 사상을 본격 연구하는 ‘씨알학회’(회장 이규성)가 창립되었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해마다 ‘씨알모임’ 의 행사를 갖고, 씨알학술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씨알정신 승계와 확장에 노력한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소재 함석헌기념사업회관에는 고인의 각종 저서와 자료, 기록물을 전시하고 있다.


주석
6> <씨알의 소리>, 1989년 4월호,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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