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 만주대탐사 1부

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만주는 이제 우리에게 잃어버린 땅입니다. 하지만 만주는 잃어버린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우리와 함께 했던 땅이기도 하죠. 이 만주 벌판 한가운데에를 흐르는 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요동과 요서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요하입니다. 최근 들어 이 요하 일대에서 고대유적들이 발견되면서 세계적으로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세계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이른 시기에 유적과 유물들이 나오고 있는 것인데요. 주목할 만한 것은 이곳에서 우리민족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간 수수께끼 같았던 우리민족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이곳에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린 자동차로만 장장 4000km를 달려서 만주벌판 요하 대장정에 나섰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아직 국가도 국경도 없던 시기, 우리 민족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까? 드넓은 땅 만주. 지금은 중국의 영토가 됐지만 그곳엔 우리 선조들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내몽고 자치구 적봉 시에 있는 홍산. 붉은 산이란 뜻이다. 이 붉은 바위와 황토 속엔 수천 년 전 고대 문명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1984년 중국 고고학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오천 년 전의 여신상이 발견된 것이다. 여신은 단호한 시선으로 후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 세계로 타전된 이 발굴 소식은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신점산 / 前 요녕성 문물고고학연구소장

“이곳은 중국 고대 문명 중에서 가장 이르고 선진적인 곳입니다. 시대가 아주 이르죠. 중국 고대문명은 세계적인 인도문명, 이집트 문명과 같습니다. 매우 이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홍산 문화를 정점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던 문명은 요하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어 일명 요하문명이라 불린다. 세계 4대 문명 중 탄생이 가장 늦었던 중국 문명은 이로써 단숨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발상지로 발돋움 하고 있다. 30여 년 동안 요하 문명을 연구해 온 이형구 교수는 이곳이 중화 민족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3주일의 준비 작업을 거쳐 2주일 동안 이루어지는 이번 탐사는 요하문명의 발굴 현장을 샅샅이 뒤지는 4000km의 대장정이었다.

 

 

 

만주벌판 서쪽을 달리는 요하. 지금은 수량이 많이 줄었지만 이 강은 요하문명을 잉태한 문명의 젖줄이었다. 여신상이 발견된 우하량은 요하 문명지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소다. 신전을 비롯해 기원전 3500년 시기에 홍산 문화 유적이 집중된 곳이다. 2006년에 새로 만든 이 여신묘의 표지석은 중국에선 이례적으로 영문표기까지 하고 있어 국제적인 위상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정작 여신묘의 입장은 강한 제재를 받았다.

 

보호시설을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일정 방문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신묘은 우하량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여신상이 발굴된 것은 홍산 문화 발굴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이형구 교수 / 선문대학교

“예, 그런 당시 홍산인들의 얼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엄청난 수확이었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 지금으로부터 5500년에 이런 여신을 모신 신전(神殿)이 발견됐다는 것은 대단히 큰 사건이면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런 곳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신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십 개의 조각이 함께 발견됐는데 이는 예닐곱 개의 몸통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조각은 사람 크기이거나 두, 세배 큰 경우도 있었다.

 

 

 

5500년 전 반 지하식 건물이었던 여신 묘엔 각 방마다 크기가 다른 여신상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통제를 받긴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한 시간을 설득한 뒤에야 어렵게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원형 및 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돌무지, 이 수수께끼 같은 유적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 변이 20미터에 이르는 이 건축물은 3단으로 쌓아 올린 돌무지무덤, 적석총이다.

 

“지금 3단이 보입니다. 3단으로 쌓아올리고 또 쌓아 올린 이번 방법.”

 

 

 

 

이런 계단식 적석총은 중원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묘제다. 바로 옆에선 27기의 석관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돼 중국학계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이런 석관묘를 쓰는 묘제가 한반도나 요동반도, 시베리아와 같은 이런 북방벨트를 따라서 분포하고 있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묘제가 함경도로부터 제주도까지 심지어 일본까지 이런 석관묘가 발견되고 있는데 요기에서 보는 석관묘는 시베리아보다 2천년 정도 앞선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동안 적석총의 기원이 시베리아란 학설을 뒤집어 버릴 만한 엄청난 발견이었다. 무덤은 4각형, 제단은 원형으로 만들었다. 거의 허물어지고 윤곽만 남은 제단의 둘레에선 대량으로 토기 편이 발견됐다. 이곳은 무슨 용도로 사용되던 것일까?

 

 

 

흙으로 다지고 돌을 쌓아올려 만든 3단의 원형 제단을 위아래가 모두 튀인 토기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은 하늘과 소통하고 싶었던 홍산 인들의 종교의식이었다. 기원전 3500년 거대한 적석총과 신전, 제단을 만들어 냈던 홍산 문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실하 교수 / 항공대 교양학부

“그 우하량 지역은 홍산 문화 전체에서 가장 중심적인 성소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신 묘와 천제 재단 터와 거대 적석총을 갖추고 있는 삼위일체의 구조라는 것은 이미 우하량을 짓는 이 시기에는 최소한 ‘초기국가단계’나 혹은 ‘초기문명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굉장히 중요한 유적입니다.”

 

황하문명보다 천년 이상 앞선 홍산 문화는 오천 년 전 이미 초기국가단계로의 진입을 알리고 있다.

 

-----------------------------------------------------------------------------------------------

 

우하량은 어쩌면 홍산인들의 성지였을지도 모릅니다. 우하량 전역에서 주거지는 전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무덤과 제단과 신전들만 발굴이 됐기 때문이죠. 대체로 학자들은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성지가 건설되려면 ‘강력한 권력자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홍산인들이 기원전 3500년에 이미 초기국가단계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중국인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었습니다. 만주지역에 중원의 영향을 받아 발전해 왔다는 전통적인 중화사상이 도전을 받았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새로운 문명의 출현 앞에서 그러면 중국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요하 문명의 출현은 중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부터 황하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더 발달된 문화가 만리장성 이북지역에서 발굴됐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 이곳에서 시작하는 만리장성은 총 길이 2700km에 이르는 거대한 경계성이다. 예로부터 중국은 만리장성을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북방한계선으로 인식시켜왔다.

 

이형구 교수

“중국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에 만리장성을 쌓아 놓고 만리장성 이남은 중화문화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만리장성 이북을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 만리장성 북쪽에서 많은 고대문명의 유적지, 유물이 쏟아져 나오니까 중국 사람들은 이제 와서 이것을 중화문명의 시원으로 끌어들이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모순이고 견강부회죠.”

 

 

 

만리장성 이북 오랑캐 땅이라고 여겨왔던 지역에서 중원보다 훨씬 더 선진적인 문명이 발견되자, 중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 중국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중화문명의 기원이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이라는 이른바 다기원론을 들고 나왔다. 중국은 오랫동안 황하문명을 중하문명의 기원지로 보았지만 1970년 들어서는 장강문명, 그리고 최근엔 요하문명을 시원지로 삼고 있다. 이렇게 되면 중화문명사는 천년이나 앞당겨 진다.

 

 

 

중국 고고학계 대부 쑤빙치(1909~1997)는 한 발 더 나아가 전설 속의 인물을 끌어들여 고고학적 성과와 연결시켰다. 중국의 건국신화와 나오는 전설의 제왕이 유하문명의 꽃 홍산 문화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 전설의 제왕이 바로 황제다. 황제는 중국의 신화적 인물이지만 이젠 역사적 인물로 완전히 탈바꿈해 있다. 북경인근 황제의 성이라 불리는 곳에 중국인들의 시조를 모시는 사원이 있다.

 

 

1997년에 건립된 중화삼조당. 이름 그대로 세 명의 시조를 모신 곳이다. 그 한 가운데가 바로 황제.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황제와 염제를 자신들의 시조로 모셨는데 최근 여기에 슬며시 치우가 끼어들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왕인첸 / 중화삼조당 안내원

"염제와 황제는 우리 한족의 조상을 대표합니다. 치우는 중국 내 소수 민족의 조상을 대표합니다. 염제, 황제, 치우를 한 곳에 놓은 것은 중화 56개 민족의 대단결을 도모한 것입니다. 문화의 융합은 56개 민족의 통합을 말합니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치우는 황제와 맞서 싸웠던 인물로 그 성격이 포악하다며 부정적으로 묘사돼 왔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자신들의 시조로 편입해 놓은 것이다. 삼조당 내부의 벽화, 자신들의 조상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치우를 또 한 명의 조상이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현재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이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란 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실하 교수 / 항공대 교양학부

"예전의 황제의 영역은 만리장성을 넘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만리장성 너머에서 요하 문명 전체 지역을 신화시절부터 여기가 바로 황제의 땅이였다는 논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황제의 땅이었던 요하 지역에서 중국문명이 최초로 꽃피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 이어서 황하와 장강에서 문명이 꽃피기 시작했다. 다기원론으로 가는데 실질적인 기원을 요하로 삼고 있는 게 현재 재편 작업에 가장 핵심적인 논리 중에 하나입니다."

 

중국으로선 요하문명을 중국 역사로 끌어 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다.

 

 

 

심양의 요녕성 박물관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가장 분비는 곳은 박물관 3층, 이곳에선 4년째 요하 문명전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는 중국 문명의 시원을 요하문명으로 정하고 이를 황제가 주도했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전설과 고고학적 성과를 끼어 맞춰 황제를 홍산문화의 대표로 등록하므로 북방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넣어버리는 소위 동북공정의 핵심이다.

 

우실하 교수

“동북공정은 고구려만의 문제가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동북아시아 전체 역사에 대한 재편 작업에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가 명백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장성이북 만주 지역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을까?

 

===============================================================================================

 

중국은 이제 그들의 자부심이었던 황하 문명과 만리장성을 넘어 요하문명을 그들 문화의 원형으로 탈바꿈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구에 우리나라의 참여가 극히 제한돼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중국 측의 주장을 마냥 수긍할 수만은 없는 부분들이 참 많습니다. 또 우리 국내의 언론과 학계가 접촉할 수 있는 방법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또 무엇보다 앞서 보셨던 것처럼 요하문화와 중원의 문화는 이질적인 면들이 대단히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요하문명을 주도했던 세력, 그 진정한 주인공들은 누구였을까요?

 

 

 

요하문명의 서광은 홍산문화보다 수천 년 더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6천년에 탄생한 사해유적이 바로 요하문명의 시작이다. 중화제인촌이라고 불리는 사해 유적은 중국 영토 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유적을 빛나게 하는 요소는 바로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이 형상물이다.

 

리징옌 / 사해박물관

"이것은 용(龍) 모양의 돌무더기입니다. 크고 작은 돌들을 용의 형태로 늘어놓은 것입니다. 용의 전체 길이는 19.7m입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고고학적으로 발견한 연도가 가장 이르고 형태가 가장 큰 용입니다. 현재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기존의 발견된 용 형상보다 무려 2천년이 앞서는 것이다. 중국 용 신앙의 원형마저 이곳 요하 지역에서 나타나자 중국 학계엔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었다. 마을은 57개의 주거지가 용(龍)형상 주변을 감싸는 형태로 배치돼 있었다. 돌로 만든 각종 농기구가 출토 돼 이미 농경생활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주목할 점은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형구 교수 / 선문대 역사학과

“중국인으로서는 그러니까 중국의 가장 이른 취락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취락에서 나온 토기들을 보면 빗살무늬, 우리가 쓰고 있는 빗살무늬가 나오고 있단 말이죠.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빗살무늬와 이 빗살무늬가 너무 유사합니다. 하는 방법(제작방법)이라든가 태토라든가 그런 것을 보면 야, 과연 우리 빗살무늬토기 쓰는 사람들과 이 사람들과의 관계가 뭔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빗살무늬토기는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북방루트를 통해 발견되는 유물이다. 한반도와 요하 유역에선 대부분 발견되지만 황하유역에선 보이지 않는다. 이는 기원전 6천년 당시부터 만주지역은 중원과 관계없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음 알려준다. 사해에서 100km 떨어진 내몽구 자치구의 흥륭와 유적(興隆窪, BC 6000)은 중국 최초의 마을 자리를 놓고 사해 유적과 다툼을 벌이는 곳이다.

 

“8000년 전 부락입니다.”

“(중국) 최초의 부락이군요.”

“예, 최초입니다.”

 

 

 

 

마치 계획도시처럼 조성된 이곳은 주거지가 일렬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돼 있었다. 사람과 돼지가 함께 묻힌 순장의 흔적도 발견됐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옥이였다. 인류가 사용한 그리고 가공한 최초의 옥이다. 저명한 옥기 전문가 북경대 조조홍 교수는 수년 동안의 조사 끝에 흥륭와 옥이 압록강 부근 수암산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색깔과 경도 모두가 정확히 일치했다.

 

조조홍 교수 / 북경대 고고학

“함께 비교해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옥 재료가 북방의 것이라는 겁니다. 모든 옥이 수암 옥은 아니겠지만 대부분 수암 옥이 분명합니다.”

 

 

 

수암은 흥륭와에서 450km 거리다. 더 놀라운 것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 거의 똑같은 옥 귀걸이가 나왔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이 지역들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최광식 /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중국에서는 보통 중국문명의 시대가 황하문명으로 보다가 요하에서 황하문명보다 더 빠른 시기의 문명이 나오니까 중국문명으로 자꾸 관련시키려고 하죠. 그런데 사실 여기서 나온 문명을 보면 우리 문명의 시원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암각화라고 할 수 있죠.”

 

국립중앙박물관에 최광식 전 관장은 두 차례에 걸친 요하문명지역 답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한국형 암각화를 요하 일대에서 다수 찾아냈다.

 

 

 

각노영자(閣老營子)의 암각화는 함안 도항리의 동심원 문양과 일치하고 상기방영자(上機房營子) 암각화는 포항 칠포리에 검파형과 비슷하며 지가영자(遲家營子)의 연속된 마름모는 천전리 암각화를 그대로 빼닮았다. 한반도를 제외하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한국형 암각화가 대륙 깊숙한 곳에서 고개를 내민 것이다.

 

최광식

“중국에는 이런 암각화가 없습니다. 검파형이라든지 방패형이라는게 이게 한반도에는 나타난단 말이죠. 그러니까 결국 상고시기의 어떤 정신세계의 신앙, 제의 같은 것들이 분명히 이쪽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기원전 6천년 문명의 서곡을 울렸던 요하 문명은 처음부터 중원과는 이질적인 문명이었던 반면 만주와 한반도는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

 

 

 

이른바 요하문명이란 요하가 둘러싸고 있는 지역에서 발생한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는 고대문명을 말합니다. 이 기간은 수천 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요. 기원전 6천년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소하서를 시작으로 사해와 흥륭와에서 요하문명의 새벽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4500년 무렵에는 요하문명의 꽃이라 불리는 홍산문화가 시작되고 기원전 3천년 이후에는 하가점 문하로 계승되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이 이어지게 되는데요. 이것이 바로 요하문명입니다.

 

우린 이번 탐사를 통해서 기원전 6천년 당시부터 만주지역은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반도와는 대단히 연관성이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해나 흥륭와는 서곡에 불과합니다. 수천 년간 가려져 있었던 역사의 베일이 벗겨질 때마다 역사적 상식들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사해와 흥륭와로 시작된 요하문명은 홍산문화기에 와서 화려한 꽃을 피운다. 우하량 적석총에서 발견된 유골. 머리 옆에 낯선 물건이 놓여 있었다. 바로 옥이었다. 옥은 형태와 용도에 따라 유골에 배치됐으며 사해, 흥륭와 시기에 비해 보다 세련되고 다양해졌다. 한 무덤에선 무려 20점의 옥기가 나오기도 했다.

 

조조홍

“고분 안에 부장된 것들은 주로 옥이었다. 일반적으로 도기는 보이지 않는다. 후에 곽대순 선생은 이런 현상을 ‘유옥위장(唯玉爲葬)’이라 했다. 우리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고대 홍산인들은 옥을 숭배했다. 옥을 매우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중요한 부장품이 된 것이다.”

 

홍산인들은 왜 옥을 숭배했을까? 조조홍 교수는 부장품으로 사용된 옥의 모양이나 위치로 보아 종교 혹은 권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주장을 한다. 홍산인들에게 옥은 영혼불멸의 상징, 하늘과 소통하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아직 철기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대, 홍산인들은 어떻게 옥기를 만들었을까? 지금은 현대화된 기계로 가공을 하지만 옥을 가공하기 위해선 여전히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래서 옥은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는데 한 직원의 목걸이는 우리 돈으로 1억 원을 훌쩍 넘는 고가품이라고 한다.

 

40년 경력의 장인 진량위씨는 홍산옥을 만들기 위해선 지금 기술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량위 옥 장인/경력40년

“최소한 3가지 제조 절차가 필요합니다. 쪼는 것이 첫 번째이고 가는 것이 두 번째이고 광택을 입히는 것이 세 번째 절차입니다. 이 절차를 밟는데 10여일 정도 걸립니다.”

 

그런다면 5천 년 전에는 얼마나 걸렸을까?

 

“문지를 수 밖에 없겠죠.”

“(홍산문화시대) 가공법으로 만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몇 년은 걸리지 않겠어요? 1, 2년은 걸리겠죠.”

 

 

 

홍산인들이 어떻게 옥을 만들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이지만 분명한 것은 매우 오랜 작업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우실하

“굉장히 중요한 의기라는 것이죠. 일반인들이 뭐, 석기처럼 이렇게 상용할 수 있고 항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의기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의기들이 굉장히 많이 발굴된다는 것은 결국 그 문명 단계에서는 옥기를 만드는 전문 장인집단이 기능적으로 분화돼 있다는 점입니다.”

 

세련된 옥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전문 장인. 또 그중 최고품을 소유하며 신께 제사지내는 권력자의 존재. 홍산문화 시기엔 권력과 신분이 이미 분화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조홍

“위치, 권력, 재산에 차이가 있었던 거죠. 명확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비교적 복잡한 사회’라고 합니다. 곧 문명에 진입할 단계에 있었던 거죠.”

 

 

 

문명 단계에 진입한 홍산문화는 후에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현지인들도 잘 가지 않는 곳, 적봉시 성자산에 홍산인들의 후예가 남기 흔적이 있다. 수천년에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성곽. 기원전 2천년 경으로 세워진 이 성은 홍산문화를 계승한 하가점 하층문화의 일부로 확인된 건물 터만 232개에 이른다.

 

“구조로 봤을 때 성자산성은 외성과 내성을 겸한 성입니다. 외성은 적을 방어하는 성이고 내성은 아마 신성시 하는 무슨 신전이나 제사하는 곳으로 보입니다.”

 

기원전 2천년 경이 되면 유하문명 지역엔 수많은 성들이 건축되기 시작한다.

 

복기대 교수 / 국제 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요서지역에서는 이미 70개 넘는 성들이 발견되었습니다. 70개 넘는 성들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람들이 살았을 때는 분명히 제도 즉 시스템이 갖춰졌을 것입니다. 그 시스템이 갖춰진 사회를 국가라고 부르는데 그 국가가 과연 어느 나라냐 그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죠(∴ 70개 이상의 성을 관리하던 국가 체제). 그런데 중국이나 한국이나 사서를 검토를 해봤을 때 그 지역은 고조선밖에 없습니다(∴ 한·중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요서지역의 유일한 국가는 고조선).”

 

 

 

기원전 2천년 경 요서 지역을 터전으로 국가란 체계를 갖출 수 있는 세력은 고조선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엔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신화가 나오는데 그 건국 연대를 기원전 2333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환웅이 웅녀를 만나 단군을 낳고 그 단군이 나라를 개국했다고 돼 있다. 이 신화를 적극적으로 해석해보면 고조선 개국 세력이 곰 토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하량의 여신녀에서는 흙으로 만든 동물상도 함께 발견됐는데 새를 형상화 한 소조상과 함께 곰발이 출토됐다. 남쪽 방에선 곰 턱뼈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형구 교수

“이와 같은 사실은 홍산인들이 여신뿐만 아니라 곰에게도 제사 지냈던 사실을 나타내는 겁니다. 바로 이것은 홍산인들이 곰을 숭배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이 묘에 안치된 인골은 다리를 교차하고 있어 하늘과 교류하는 제사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슴에 놓여 있는 옥은 곰을 형상화 한 것이다. 홍산문화의 옥기 가운데 가장 많이 발견되는 웅룡(熊龍). 곰을 숭배하던 홍산인들이 그들의 터전에서 세운 나라는 고조선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현재의 요하 지역 일대엔 개발이 지연되고 있어 비만 오면 침수되기 일쑤다. 교통의 중심지 조양(朝陽). 중국역사상 한족과 북방 민족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조양 일대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대거 출토돼 고조선 연구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십이대영자 유적에서 다양한 청동장식 유적들과 함께 고조선의 대표 유물 비파형 동검이 발굴됐다. 비파형 동검은 시기에 따라 크기와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비파형으로 이뤄진 검몸체와 손잡이 검자루맞추개 등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는 특징은 일정하게 유지된다. 검 손잡이 부분을 조립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기원전 10세기 무렵 동아시아에서의 종족과 문화를 구별 짓는 기준이 바로 청동검이었던 것이다.

 

복기대 교수

“고조선 지역에서는 비파형 동검이라고 하는 검이 발전을 하게 되고 고조선의 이웃지역에는 주나라 같은 경우에는 직인검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비파형 동검은 계속해서 한반도까지 그 고조선 전체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시종일간 끝까지 나타나는 그런 형태고 주나라 지역에서 나오는 직인검 있죠. 직인검은 꼭 시종일관 꼭 그 지역에서 계속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고 하면 고조선 지역에 나타난 비파형 동검은 지역적인 즉 고조선 특색을 끝까지 보유한 가장 특색 있는 청동기가 될 것이라 봅니다.”

 

 

 

요나라에서 수도였던 영성(榮成). 이곳에 위치한 초원 청동기 박물관은 이 일대에서 출토되는 청동기 유물을 전문적으로 수집, 전시하고 있다. 지금은 다른 유물로 대체돼 있지만 한 때 북한과 중국의 공동조사에서 출토된 청동기를 전시하고 있었다. 1963년부터 3년 동안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아서’란 주제로 이 일대에서 합동 발굴 조사를 벌인 것이다.

 

이형구 교수

"북한과 중국은 1963년부터 3년 동안이나 중국 동북 지방의 고조선 유적을 합동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중국이 고조선 영역에 대해서 일체 함구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 정부가 고조선의 영역을 요서지역까지 만리장성까지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북한과 중국의 합의 하에 3년에 걸쳐 이뤄진 조사 지역은 요하문명의 터전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어 당시 중국도 이 지역을 고조선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우리 민족의 선사 문명은 시베리아에서 전래된 것으로 그간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요하지역의 문명들이 발견되면서 시베리아보다 훨씬 더 빠르고 발전된 문명이 요하 서쪽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물론 우리 민족의 기원을 요하 한 지역에만 둘 수는 없겠죠. 하지만 최소한 요하문명을 주도했던 세력이 오늘날 우리 민족을 구성하는 한 원류가 됐다는 것은 매우 일리 있는 지적으로 들립니다.

 

 

 

성자산에서 100km 떨어진 곳엔 고대인들의 또 다른 신비로운 공간이 있다. 2007년 발굴이 완료된 삼좌점 산성(적봉시). 성벽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내부엔 돌을 둥글게 쌓아 올린 건물 터가 수십 군데 있다.

 

쉬즈펑 교수 / 적봉대 고고학

"둥근 제단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이고 사각 제단은 땅에 제사 지내는 것입니다. 땅 위로 지어진 것도 있고 땅 아래로 지어진 것도 있습니다. 하늘에 빌고 땅에 빌고 태양신, 달의 신에게 빌었습니다."

 

 

 

내부가 원형과 사각형 제단으로 가득 채워진 이 성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바로 이 부분 치다. 5미터 거리로 배열된 치는 어림잡아 13개나 된다.

 

 

 

치는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집안시의 고구려 성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벽 앞으로 돌출한 치는 고구려의 군사 작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국내성의 단면도는 치의 형태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최광식

“그 삼좌점 유적에 보면 치 같은 것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바로 청동기 시대, 하가점 하층문화단계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그 시기에 고구려 치와 같은 그런 시설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결국 치라는 것은 고구려 성의 특징인데 이미 이 시기부터 나타났다는 것은 고구려 성과도 이 지역 삼좌점에 이런 성 축조시설, 구조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고구려와 같은 축성 방식을 사용했던 사람들은 우리 민족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중국 길림대의 주홍 교수는 하가점 하층 문화에서 나온 134기 인골의 체질 인류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연구결과 크게 두 개 종족으로 나눠졌는데 요하문명 일대에 고(高) 동북형이 3분의 2이상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기대 교수

“중국 사람보다는 한국 사람이 더 훨씬 친연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 유적지들을 조사해 봤을 때 60%이상의 고대 주민들이 한국 사람들과 친연성이 있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본다고 하면 요서 지역의 고대 문화는 한국 선조들이 한국 계통들이 건설한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가점 하층 문화 시기 거대한 성을 세우고 대륙을 호령하던 국가는 고조선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광활한 대륙을 누비던 고조선의 영역은 어디까지 이르렀을까? 만리장성 바로 앞에 있는 건창현의 동대장자 마을에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왠지 낯익은 돌담이 눈길을 끄는 곳, 이곳에서 특이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됐다.

 

“제일 좋은 칼은 손잡이 앞뒤가 황금으로 되어 있었어요. 다른 무덤의 칼은 비교적 짧았어요.”

“주로 청동검이었나요?”

“다 청동검이었어요. 청동검은 굉장히 날카로웠어요.”

 

 

 

 

30여개의 묘가 한꺼번에 발견된 이곳에선 연나라의 청동기가 대거 출토됐다. 흥미로운 건 무덤이 적석총이라는 것과 황금으로 장식된 비파형 청동검이 출토됐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적석총과 청동검이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형구 교수는 이 무덤을 고조선의 영역을 침입한 연나라 장수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형구 교수

“연나라 장수가 고조선 땅을 쳐들어 와서 이곳에 정착하면서 고조선 문화를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중국 사서들에서 보이는 기록들하고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봐서 고조선의 강역이 이곳 연산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춘추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가 5만 병력으로 조선 땅 2000리를 진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형구 교수는 동대장자 유적의 수수께끼가 이 기록을 참고한다면 진개 공격 이전에 이 땅이 고조선의 영역이었음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강역은 이곳 만리장성 바로 앞 연산산맥까지 이르게 된다. 만리장성 앞에 있는 연산. 그것은 고조선과 중국을 나누는 경계선이었다.

 

 

이번 탐사의 마지막 일정은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거대 적석총. 아직 지표 조사만 이뤄져 흙에 덮여 있지만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적석총이다.

 

“이런 돌과 자갈과 흙을 같이 다진 것이죠. 석축 안에 내부에 그렇게 다져 올라가고 저쪽에선 2층 구조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적석총은 외벽은 석축을 쌓고 내벽은 흙으로 쌓아 올린 것인데 마치 유럽에서 보는 큰 피라미드와 같은 것입니다.”

 

 

 

가로 세로 6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적석총. 요하 문명 일대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적석총이면서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천년 앞서 세워진 것이다.

 

 

 

이 적석총은 장군총과 거의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집안시 일대는 이런 형태의 적석총이 수천기가 분포돼 있다. 적석총은 한반도와 요서 일대에 집중 분포하는 지역적 특색이 매우 강한 유적이다.

 

우실하 교수

“결국 그것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문화인데 그 문화는 한반도로 해서 일본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하문명은 동북아시아의 시원 문명임과 동시에 주요한 세력들은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문화 계통이 가장 중심적인 문화 유형이라는 것입니다.”

 

이형구 교수

“중국은 요하 일대의 고대 문명을 요하 문명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시원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우리 민족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고 그 지역 범위도 요하를 훨씬 벗어나서 요동반도와 한반도까지 이르는 이른바 발해연안벨트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을 요하문명이라고 한정해서 부르는 것보다는 발해연안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

 

만주는 이제 더 이상 우리 땅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역사마저 잊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장장 4천 킬로미터에 달했던 만주 대탐사. 우린 그곳에서 수천 년 전 우리 민족의 원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감춰졌던 역사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곳은 우리 민족의 고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 이미지와 내용의 저작권은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로는 사용을 금합니다.

출처 : 책을 벗 삼아
글쓴이 : 문화재지기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