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7장] 함석헌의 야인혼과 저항정신

2013/03/05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씨알을 하늘처럼 모셨다. 씨알이 하느님이고 붓다이고 절대선이었다. 그래서 나라를 일으키는 일, 세계평화를 가져오는 길이 씨알 곧 민중의 힘을 키우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씨알을 지구생명 45억년 진화과정의 마지막 옹근 열매이면서, 아직 미완성의 과정 속에 있는 생명의 실체라고 생각하면서, 씨알의 인격, 대접, 성장을 위해 온 몸을 던졌다. 때로는 정신분열증환자가 되고, 바보가 되고, 대안없는 반대론자, 비폭력의 투항주의자란 폄훼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를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었다.

어느 논자가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의 세례를 받고, 간디의 지팡이를 짚고,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와 있는 사람”(안병욱)이라 평했지만, 이것은 함석헌의 반쪽 그림에 불과하다.

그는 삼교(三敎)에 출입하고 구류(九流)에 통달하였으며 언변이나 문장에 있어서는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다. 그는 한국의 고유사상과 중국의 노장사상과, 서양의 기독교사상과 인도 철학, 그리고 이슬람 경전을 하나로 조화시켜 독특한 야인사상, 씨알철학을 정립하였다. 민주주의를 믿고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실천하였다.

맹자가 말한 “권력과 명예에 관계하더라도 그곳에 말려들어 헤어나지 못한 일이 없고 가난하고 미천한 처지를 당하면서도 마음이 흔들림이 없고 권위와 힘으로 압력을 가해와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그런 사람, 즉 대장부다. 함석헌은 조선이 낳은 20세기의 대장부였다.

흰머리, 흰수염, 흰 두루마기, 흰 고무신 차림의 그는 전통적인 한국 선비의 모습 그대로였다. 선풍도인같은 기골이나 당당한 걸음걸이는 한국의 이상적인 선비상이고 헌헌장부의 모습이었다.

사람이 늙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늙어서 죽는 것”보다 “늙어서 낡아지는 것” (정수일)일 터인데, 함석헌은 청년시절보다 중년이, 중년시절보다 장년이, 장년시절보다 노년이 더 활기차고 헌헌한 모습이었다. 그는 늙지 않고 낡아지지 않고 영원한 청년으로 살았다.

중국의 학자 왕부지(王夫之)의 책 <독통감론(讀通鑑論)>에 이런 내용이 있다. 마치 먼 뒷날의 함석헌을 내다보고 쓴 것 같다.

시국의 안위, 백성의 질고에 대하여 그것을 염려하였으나 대책을 강구하지는 않았다. 문장의 명망은 후대의 평가에 맡기고 조급하게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행동거지는 산과 같이 무겁고, 그의 수양은 물과 같이 깊으며, 고금에 통달하고 만 가지 변화 속에서도 스스로 순수함을 잃지 않았으니, 무엇이 그를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주석 12)

창간호(1970년 4월호)

함석헌의 글을 읽으면 30대의 <성서조선>에 쓴 글로부터 70~80대의 <씨알의 소리>에 기고한 글에 이르기까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사유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내용의 신선함과 초시간적 현재성을 살피게 된다. ‘높은 산, 깊은 골’에서만 생성이 가능한 일이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 함석헌을 사회진화론자라고 평가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것은 장님의 코끼리 만지기보다 더 단면적이다. 떼이야르 샤르뎅의 ‘우주적 사유’를 넘나들고, 웰즈의 <세계사>를 질주하고, <바가바드 기타>를 번역하고, 노자, 장자, 간디와 벗을 삼고, 기독교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함석헌에게 사회진화론자나 진화주의자란 팻말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1870년 이후 열강의 조선 침략과 때를 같이하여 도입되었던 진화론은 당시 개명 지식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며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이것이 우승열패, 양육강식의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려는 지배권력과 결합하면서 신채호 등 조선의 열린 지식인 사회에서 배척되었다. 카토 히로유키(加藤弘之)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대표적 사회진화론자들은 사회진화론을 국가유기체설과 결합시키고, 이것은 천황제 이론의 핵심이 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일본 군국체제 강화의 배경이 되고, 한국의 친일파들은 “사회진화론을 빌어서 당시의 국제환경을 황인종과 백인종의 인종싸움의 시기라고 단언하고, 황인종 사이의 반목은 백인종의 아시아 침탈과 그 지배구조를 초래하게 된다는 명목 아래 인종적인 싸움의 긴급성을 강요하였다.” (주석 13)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지배하는 것을 자연의 법칙으로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조선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한 사회진화론을, 일제강점기에 <성서조선>에 글을 쓰고 탄압을 받았던 함석헌이 수용했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함석헌과 같이 국제평화주의자,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부한 독립주의자, “하느님의 발길에 채어 다니는” 사람, 씨알 존중의 평민사상을 가진 야인이 ‘국가유기체설’과 결합한 사회진화론을 신봉하거나 수용했을 리는 만무하다.

함석헌은 진화론자가 아닌 저항아, 비판자, 반항주의자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의 그 ‘말씀’은 곧 저항이며, 이 세상의 모든 단어가 사라져도 ‘저항’- 프로테스트라는 말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한 저항인이다. 그 저항의 목표가 사익추구가 아닌 씨알이 사람대접 받도록 하는데 주어졌다.

그는 유약한 선비나 초월적인 종교인, 진화론적 양육강식주의자, 관념론적인 사상가가 아니고, ‘정신의 순례자’는 더욱 아니었다. 그는 투사이고 전사이고 도전자이고 저항인이다. 그는 독립자존이되, 고립하지는 않았다. “싸우는 평화주의자”이고, 분노하는 푸로메테우스였다. 들사람이고 자유언론의 주창자이다.
그는 펜이 요구될 때 글로써 저항하고, 지면이 봉쇄되면 직접 행동으로 나서고, ‘언론의 게릴라전’을 주창하면서 실행하였다. 군사독재의 폭압에 세상이 침묵할 때 분연히 일어나 ‘할 말’을 하고, 독재자에게 ‘드리대고’, 감옥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야인으로써 들사람의 언어 즉 지배언어나 외래언어를 피하고 순수 씨알의 구어체로 말을 하고 글을 썼다.

민중의 뜻을 저버리는 거대신문 몇 개가 문을 닫아야 한다고 족벌신문을 비판하고, 씨알에게 언론의 감시자가 되라고 촉구했다. 그는 자본에 종속된 대학, 교회를 비판하고, 사주에 예속된 언론인을 질타하면서도 누구보다도 대학, 교회, 언론을 아꼈다.

인류사의 거대한 진보의 발자취는 압제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었다. 공자는 ‘상갓집 개’ 소리를 들어가면서 지배층에 맞서 ‘여민(與民)’을 추구하고, 석가모니는 부왕의 왕관을 거부하면서 ‘중생제도’에 나섰고, 소크라테스는 기득세력의 독배에 맞서면서 ‘아테네의 등애’가 되고, 예수는 바리세인들의 십자가에 못박히면서 구조악과 싸웠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압제에 맞서 화형, 참형, 팽형, 징역, 유배 등 온갖 고통을 당하면서 자유와 정의를 지키고자 하였다. 함석헌도 그랬다. 그는 위대한 저항인이다.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 속의 야인, 그가 추구해온 가치와 이상은 한국인은 물론 21세기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이상이고 가치관이다.
(주석 14)


주석
12> 유절(劉節), <중국사학사>, 신서원, 2000.
13> 전복희, <사회진화론과 국가사상>,189쪽, 한울아카데미, 1996.
14> 이 장은 필자가 2010년 6월 9일 함석헌기념사업회 주최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ㆍ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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