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字는 太白, 靑蓮居士 701-762)


중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인 이백의 시집이다.

고매한 이상과 원대한 정치포부, 이를 실천할 만한 탁월한 학문과 재질이 있음에도 현실에 의해 좌절되자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잊은 듯 홀연히  입선구도 한 이백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삶을 일상적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초월적 의지의 실현의 장으로 파악한다.

이에 따라 그의 시에는 이미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 인간사회 질서의 상당부분이

인간을 속박하는 실체로 지적되고 있으며, 이로부터의 초월만이 진실한 자유라는 주제가 제시된다.

그의 시는 기교 면에서도 중국 시의 한 전기를 이루고 있다.


 □ 생애와 작품


 술과 달 의 시인 이백, 그는 과연  천재 인가,  광인 인가? 이백은 중국 당나라 시인으로 두보와 함께  이두 로 일컬어진다.

이백은  시선 , 두보는  시성 , 왕유는  시불 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태백성을 보고 출산했기 때문에 자를 태백이라 했다.
조상들은 대대로 농서 성기에 살았으나 이백은 중앙아시아의 쇄엽에서 출생했다.


이백은 당의 현종과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현종은 전반기(개원연대)에는 측천무후의 횡포로 어지러운 나라를 중흥하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현명한 군주였다.

그러나 후반기(천보연대)에는 정사를 명문 구귀족 출신인 이임보에게 넘기고 양귀비와의 사랑놀음에 빠졌다.

이 시대에 바로  시선  이백과  시성  두보가 있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경전 및 제자백가의 학설을 배우고, 호방한 성품을 지닌 그는

일찌기 검술을 닦았으며 도교에 심취하여 선계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또 어려서부터 시문에 천재성을 발휘한다.


한편 26세 때  한 자루의 칼을 지닌 채 양친에게 하직하고 멀리 고향을 떠나 대장부의 뜻을 펴고자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재주를 떨쳐 임금을 보좌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겠다 는 정치를 포부를 펴고자 동정호를 거쳐

여산 금릉 양주 등 한바탕 각지를 돌고 안육에 와서는 재상을 지냈던 허어사의 손녀딸을 아내로 맞고 10년 정도 정착했다.

그후 산동에서 공소부 등 5명과 조래산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술과 시로 나날을 보냈는데, 이들을  죽계육일 이라 한다.


그후 다시 10년간을 방랑하다가 절강에서 도사 오균을 알게 되었는데,

오균이 먼저 현종의 부름을 받았고 이백은 그의 천거로 42세 때 현종의 부름을 받는다.


이백은 너무 기뻐 (남릉에서 애들과 이별하고 서울로 가노라(남릉별아동입경))라는 시에서 

양천대소하면서 문을 차고 나가노라. 이 장부가 아무렴 촌에 묻혀 살소냐? 라고 호기롭게 읊었다.


현종은 그를 정중히 맞이했으나 한림이라는 높지 않은 벼슬을 주었다.

그는 자기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자질, 그리고 고매한 이상을 가지고 나라에 공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당의 궁중은 타락하고 부패했으며 음흉하고 간악한 소인배들이 가득했으므로 청명하고 방탕한 이백은 적응할 수가 없었다.

결국 3년간의 궁중생활에서 이상을 펴지 못하고 오직 구토와 비분만을 느끼며 폭음을 일삼았다.

마침내는 궁중에서의 전권자인 환관 고력사에게 술취한 이백이 자기의 신발을 벗기게 하는 물의를 일으키고 궁중을 떠난다.

 

이백은 한 말의 술에 백 편의 시를 짓고 장안거리 술집에 쓰러져 자며

천자가 불러도 배 타고 갈 생각 않고 자기는  주정뱅이 시선 이라고 자칭한다. 


그의 생에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관직생활은 이렇게 2,3년 만에 끝난다.

3년간 한림생활을 하면서 봉건상류계층의 부패한 생활과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울분을 토로하는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장안을 만나 다시 방랑길에 오른 이백은 낙양에서 11살 아래의 두보를 만나 친교를 맺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짧았지만 불후의 우정의 금자탑을 세웠다.


한편 타락과 무능과 부패에 시들던 당은  안녹산의 난으로 내부의 모순과 파탄이 노출되고 무고한 백성들은 더욱 도탄에 빠졌다.
현종은 사천으로 도망가고 숙종이 즉위했다.


이에 그의 정치 참여 욕구는 더욱 강해져, 이때 숙종의 동생 영왕이 반란군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키고 이백을 부르자

애국적 정열로 충만했던 그는 쾌히 수락하고 참가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영왕이 형인 숙종의 임금자리를 노렸다는 반역죄로 몰리게 되자 한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뒤에 감형되었다.

벼락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낙관적이던 이백도 58세에 이러한 혹독한 벌이 떨어지자 귀양가던 도중 

한 평생 눈에 눈물 보인 적이 없건만 이곳에서 하염없이 흐니끼게 되누나 라고 슬퍼했다.


말년에는 강남을 주유하다가 친척집에서 죽었다.
이백의 일생을 결산하면 평생 술을 마셨고 방탕했으며 오직 시문만을 남긴 시선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게 그의 본의는 아니었다.

그의 이상과 포부는 충국애민경세제민을 위해 자기의 학식과 자질과 호방한 성품을 마음껏 펴고 은퇴하는 것이었다.


□ 이백의 사상


천재와 광인을 가름하는 선을 긋기는 어렵다고 한다. 

나는 본래 초나라의 미치광이라고 자칭한 이백은 너무나 비범한 천재라 하겠다.
따라서 그의 참모습을 한마디로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분방한 낭만주의와 격렬한 현실주의를 동시에 지녔으며 탈속적인  도가사상과 아울러 경세제민의  유가사상 에 투철했다.


고매한 이상과 원대한 정치포부를 품었으며 또 이를 실천할 만한 탁월한 학문과 재질을 지니고

열렬하게 현실참여를 희구했음에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잊은 듯 홀연히 입선구도하고자 은퇴한 이백이었다.


예술창작에서도 대답하게 초월하고 부정하고 기발한 창조세계를 펼친 그는 늘  나라를 편안케 하고(안사직)

백성을 구한다(제창생) 고 염원하면서도 항상 통음고가한 데카당스에 묻혔던 것이다.


그의 인간성과 같이 그의 시도 걷잡을 수 없이 다난하고 모순과 광기에 차 있다.

그의 말대로 세상이 온통 모순과 광기에 찼으니 자기도 광인으로 광가를 부를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백은 우리 나라 동요에도 있듯이 암흑의 밤하늘에서도 청명한 달에서 놀기를 사랑했고

온 세상에 청신한 기운이 소생하고 이에 따라 대아의 서풍이 넘치기를 갈구했으며,

자기가 바로 그 일을 성취해야 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백은 (고풍)에서  대아의 문학사상이 오래 진작되지 않았거늘 나마저 시들면 누가 펴리오 하고 읊기도 했다.
이백의 사상의 바탕은  유가와  도가였다.

한마디로  써주면 나가서 일하고 안 써주면 물러나 숨는다(용행사장) 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백의 본뜻이나 이상은  용행 인 유가적인 면에 있었다.

그의 시를 통해 그가 얼마나  입공보국   안사직 제창생(백성을 제도하고 나라를 안녕케 한다) 하고 싶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미혹한 군주와 혼탁한 사회는 그를 알아 써주지 않고 도리어 그를 몰아냈다.


그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일찍부터 정치에 포부를 가진 내가 특별나게 용안을 우러러 모시게 되었거늘 흰 구슬을 쉬파리가 더럽힘으로써

홀연 황제와 신하가 갈라서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몰아낸 타락한 간신배들을 쉬파리에 자기를 흰 구슬에 비유했다. 

흰 구슬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오로지 쉬파리가 원죄를 씌운 것이다.


충정과 정의가 간사와 사악에게 패배를 당했다.

이에 방탕하고 정열적인 이백은 도가 쪽으로 기울었다.


현실적으로 유가의 이상을 구현하지 못하고 오직 실의와 비분에 차 술로 수심을 달랬으므로 그의 시 속에는

도가적 또는 낭만적 일면이 더 잘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시 속에 있는 그의 유가적 이상을 잘 찾아야 한다.


이백의 예술은 사상감정이 탁월한 학식과 세련된 표현으로 승화된 주옥이라 하겠다.

그는 육조시, 특히 도연명사영운강엄포조 등의 시문학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그 위에 대담하고 기발한 자기 세계를 창조했다.


이백의 격앙된 낭만주의는 굴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겠으나,

단 그것을 굴원에게는 없는 도가적 탈속입경의 경지로 잘 다듬었으며 또 무위자연을 따라 청진한 시풍과 운치를 넘치게 했음이 특색이다.


속세와 소인배에 대해 실망한 그는 자연과 산천을, 특히  밤의 달 을 사랑했으며,

자질구레한 협잡과 간교에 진절머리를 낸 그의 표현에서도 호방하기 짝이 없었다.


현재 전하는 이백의 시문으로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청의 왕기가 여러가지 책을 모아서 집주한 (이태백문집주) 30권이 가장 널리 읽히고 있다.


□  이백의 작품 세계


문학이나 음악 미술 등 모든 예술은 내용과 형식이 잘 조화됨으로써 완성된다. 시도 마찬가지다.

내용인 사상만이 강하고 형식인 표현이 빈약해도 안되지만, 반대로 표현형식이 사상 내용을 위축시켜도 안된다.


건안 이후 중국의 시문학은 대체로 형식미에만 흘렀다.
시상이나 기골 있는 정신은 위축되고 겉으로만 화려하고 잔재주로 꾸며진 시가가 판을 쳤다.

그러나 당대에 들어서면서 점차로 기골 있는 문장정신과 사상을 담은 글을 되찾기 시작했다. 즉, 고문운동이다.


한유와 유종원이 산문에서 형식적인 큰 성과를 거두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시문단에서도 초당 이후 점차로 속이 빈 형식주의에 반대하는 기풍이 짙어졌으며,

그중에서도 진자양은 이론과 작품 면에서 시를 뜬 구름잡기에서 끌어내려 현실적인 바탕 위에 올려놓고자 진력했다.


이백의 문학관도 그와 같았다.  건안 이래의 기미염려한 시는 진중할 바 못된다. 

나의 뜻도 공자가 시 3백 편을 산출했듯이 대아 같은 정도의 시를 지어 천년 길게 빛을 남기고자 한다. 


이백이 말하는 대아 같은 정도의 시란 다름이 아니라 사상고 기골이 있고 현실적으로 국가와 민족에 이바지할 수 있는 시를 말한다.

즉,  안사직   제창생 하는 데 적극 참여하고 이바지하는 대도의 시문학을 말한다.


이백은 적어도 사내 대장부가 하는 문학활동이거늘 쓸데없는 허튼 소리나 자질구레한 말재주는 문학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기에 이백의 시는 위대한 사상이나 정치적 포부나 고매한 이상이 용솟음치는 정열을 담아내기 위해

대자연 원시림에다가 큰 도끼로 덤썩덤썩 찍어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스케일이 크고 다이내믹한 내용과 형식이 조화될 수가 있었으며,

거대하고 청신한 그의 사상과 생명이 때묻지 않고 영겁의 생명을 지닌 자연 속에 안심하고 깃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백은 시문학에 있어 획기적인 표현과 예술상의 혁신을 가져왔다.


혁신과 창작은 물론 올바른 전통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백의 적극적인 낭만주의에 가장 영향을 준 선배는 역시 굴원이었다.


굴원은 뛰어난 재능과 고매한 정치이상을 가지고 있었으면섣 현실적으로는 불운했고,

제 눈으로 자기의 조국이 간악한 무리들 손에 빠진 채 쇠망의 구렁으로 전락해가는 참상을 보고 분개하면서 시를 지었던 것이다.


이백은 굴원의 낭만정신, 조국애, 부패한 통치자들에 대한 반항정신과 불만에 공감했고,

따라서 그의 표현상의 수법도 많이 배우고 계승했다.


특히 굴원이 민간의 시가를 잘 따서 높이 쓴 태도나 신화전설 등을 활용하고 낭만의 환상적인 세계를 마냥 펼쳤던 수법을

이백은 착실히 배웠으며, 그의 기상천외한 도가적 상상력을 시에서 잘 살리는 데 성공했다.

즉, 현실과 이상을 자유자재로 내왕하는 수법은 굴원의 (초사)와 낭만주의의 특성이었던 것이다.


끝없이 크고 청신한 자연에서 자기에 맞는 표현의 자유를 얻은 이외에도 이백은

자연 속에서 간악하고 음흉하고 옹졸한 인간사회의 추악을 말끔히 씻고 해탈함으로써  참된 삶 을 간직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따라서 그는 조국의 웅장하고 수려한 명산대천을 찾아 사랑했고,
청진하고 소박한 자연의 풍물과 더불어 대화를 나눈 것이다.

즉 이백은 자연을 인격화하고 그 속에서 감정과 영기를 느낀다.


새들은 높이 날아 간 곳이 없고
조각구름은 홀로 사라질세
오로지 경정산 너만이 싫다 않고
마주 보아 주노나


경정산만이 자기의 고독과 적막을 이해해주고 또한 자기를 지켜보아주고 있었다.
이백에게 있어 청명한 달은 뗄 수 없는 존재였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우리 나라 아이들의 입에까지 오른 달과 이태백,

그는 달을 청진의 상징으로 믿었으리라.


날 저물어 푸른 산에서 내려오니
산의 달이 나를 따라 돌아오더라


암흑이 덮인 인간사회에 달이라도 있으니 구원을 받는다는 심정이 나타난 듯하다.

자연을 정관하고 섬세하게 느끼며 대화를 나누던 이백은 일면 산을 밀어젖히고 바다를 뒤엎는 듯한 과장된 표현수법을 잘 썼다.


백발 삼천장 씨름따라 이렇듯 길던가!
부귀공명이 길다면 한수의 물이 응당 서북으로 흐르리다!
촉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구나.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욱 험난하구나!


이러한 과장된 표현은 그의 자유분방한 낭만정신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러한 과장되고 격렬한 표현을 하지 않고서는 풀릴 수 없는 그의 강렬한 사상과 감정의 열도를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특히 선과 악을 얼버무리고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부패한 무리들에 대한 반항과,

몽롱한 인간들의 잠을 깨우고 제정신이 들게 하기 위한 기발한 수법이라고 이해해야 하겠다.


이백은 형식적인 구속을 싫어했다.

따라서 현존하는 약 1천여 수의 시 가운데서 형식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율시는 80여 수이고,

대부분은 고체시가행악부시같이 형식적 구속이 적은 것들이며 민간의 시가를 잘 흡수한 평이한 것들도 많았다.


특히 150여 수에 달하는 악부시는 평이하면서도 영묘하게 언어를 구사하여 참신한 뜻과 시정을 담아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한다.

현실과 이상, 전통과 독창, 고매한 낭만정신과 초탈한 선도사상으로 승화시킨다.
이백의 시 가운데 인구에 회자되는 몇 수를 들어본다.


  산중문답

어째서 푸른 산중에 사느냐 물어봐도
대답이 없어 빙그레 마음이 한가롭다
복숭화꽃 흘러 물 따라 묘연히 갈세
인간세상 아닌 별천지 있네

 

   자야오가

장안 하늘에는 허허 달빛이 마냥 퍼지고
거리 집집마다 밤새 다듬이소리 요란해
소슬한 가을바람 불어 멈추지 않으니
모두가 옥문관 넘나드는 애타는 정이리!
어느날 북쪽 오랑캐 평정하고
그리운 임 싸움터에서 돌아오리!

 

   월하독작 1수

꽃 속에 술단지 마주 놓고
짝없이 혼자 술잔 드네
밝은 달님 잔 속에 맞이하니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어라
달님은 본시 술 못하고
그림자 건성 떠돌지만
잠시나마 달과 그림자 동반하고
모름지기 봄철 한때나 즐기고서
내가 노래하면 달님은 서성대고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 흔들어대네
깨어서는 함께 어울려 놀고
취해서는 각자 흩어져 가네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리


□ 문학사적 위치와 영향


이백은 문학사상 앞선 시기의 낭만주의 시가의 성과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최고봉을 이룩했다.

그는 시가 발전사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민중들의 구비문학에 의해 창간된 신화전설에서 싹을 틔운 낭만주의 문학형태는 전국시대 굴원의 시가 창작에서 집대성되었다.

물론 장자의 산문에 나타난 환상적인 우화가 낭만주의 문학사조에 미친 영향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한대시기와 위진남북조 시기에 창작된 악부민요, 예를 들면 (목란의 노래) 등에서 낭만주의 시가는 거족적인 발걸음을 내디디게 되었다.

도연명과 같은 문인들과 남북조 시기 수이전체 소설은 낭만주의 문학의 내용을 풍부하게 했다.

이렇게 낭만주의 문학사조가 전승되어오다가 이백 때에 이르러 낭만주의 시가의 고조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은 문학발전의 내재적 법칙에 의해 나타난 필연적 결과로서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반항정신과 호방한 성격을 갖고 있는 이백의 시가는

당대 전성기의 낙관적 창조정신과 봉건질서에 불만스러워하는 민중들의 정서가 반영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잘 나타내기 위해 분투하는 가운데 이백은 낭만주의적 표현수법을 풍부하게 했으며

시가의 형상수준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성과는 이백이 굴원 이후 낭만주의 시가를 새로운 경지로 이끌어 올렸다는 훌륭한 증좌가 된다.


이백은 당시의 시가를 혁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진자앙의 시가혁신론을 계승하고 또한 실천을 통해 당대의 시가로 하여금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그는 옛사람의 글을 그대로 답습하는 형식주의적 문풍과 타협없는 투쟁을 전개했으며, 제량의 궁정체 시풍이 머리를 들지 못하게 했다.


이백이 후세사람들과 후기문학에 준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이름은 당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심지어 그의 시집이 거의 집집마다 있었다고 한다.


한유 등 시인들은 그의 시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시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흡수하여 독창적 시풍격을 창조했다.

이하의 낭만주의적 시풍은 이백의 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송대의 소식과 신기질을 중심으로 하는 호방과는 이백의 시 풍격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청대시인들을 놓고 말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자유를 열망하고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며 호방한 풍격을 이룩한 시인은 역사적으로 사랑을 받았다.

그에 관한 수많은 전설은 그에 대한 인민들의 애정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流夜郞贈辛判官(류야랑증신판관-야랑으로 유배가며 신판관에게 드림)


昔在長安醉花柳(석재장안취화류) : 지난날 장안에서 꽃과 버들에 취하여
五侯七貴同杯酒(오후칠귀동배주) : 고관 귀족들과 술잔을 같이 했었다
氣岸遙凌豪士前(기안요릉호사전) : 의기는 높아 멀리 호걸들을 넘었으니
風流肯落他人後(풍류긍락타인후) : 풍류인들 다른 사람에 떨어져 뒤질까
夫子紅?我少年(부자홍안아소년) : 그대는 홍안 소년 나도 젊은이
章臺走馬著金鞭(장대주마저금편) : 궁전 호화로운 거리 말 달려 금 채찍을 휘둘렀다
文章獻納麒麟殿(문장헌납기린전) : 글 지어 천자 계신 기린전에 바치고
歌舞淹留玳瑁筵(가무엄류대모연) : 노래와 춤 대모로 장식한 잔치에  머물렀소.
與君自謂長如此(여군자위장여차) : 그대와 길이 이러하리라 생각했는데
寧知草動風塵起(녕지초동풍진기) : 풀이 움직여서 풍진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을까
函谷忽驚胡馬來(함곡홀경호마래) : 함곡관에서  놀랍게도 오랑캐 반란군 쳐들어오니
秦宮桃李嚮明開(진궁도리향명개) : 장안의 오얏꽃, 복숭아꽃 누굴 위해 피겠는가.
我愁遠謫夜?去(아수원적야랑거) : 지금 근심 멀리 야랑 땅으로 귀양 떠나는 것이니
何日金?放赦回(하일금계방사회) : 어느 날에야 금 닭 아래서 사면되어 돌아올까


 주(註)

(1) 流夜郞贈辛判官(유야랑증신판관) : 야랑으로 유배가며 신판관에게 드림.
(2) 花柳(화류) : 호화로운 유흥가를 말한다.
(3) 五候(오후) : 漢나라 成帝가 봉한 5명의 諸候. 여기서는 높은 귀족을 가리킨다.
(4) 岸(안) : 언덕. 언덕처럼 높음을 의미한다.
(5) 夫子(부자) : 선생. 당신.
(6) 章臺(장대) : 본시는 전국시대 秦宮안에 있던 臺. 여기서는 궁전 앞 호화로운 거리.
(7) 著金鞭(착금편) : 금채찍으로 말을 치며 달리는 것.
(8) 麒麟殿(기린전) : 天子가 있던 궁전의 이름.
(9) 玳瑁筵(머모연) : 대모로 장식한 호화로운 잔치자리.
(10) 草動(초동) : 풀이 움직인다. 반란이 일어남을 뜻함.
(11) 風塵起(풍진기) : 전쟁이 벌어짐을 뜻함.
(12) 胡馬來(호마래) : 오랑캐 출신의 安祿山이 난을 일으켜 쳐들어 왔음을 의미.
(13) 向誰開(향수개) : 누구를 향하여 피는가 ? 임금이나 궁전에 살던 궁녀들이 모두 피난갔음을 의미.
(14) 金鷄(금계) : 중서령이 죄인을 방면하는 날 그 자리에 긴 장대위에 금빛 닭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
(15) 放赦回(방사회) : 죄를 용서받고 방면되어 돌아가는 것.



南陵別兒童入京(남릉별아동입경)


白酒新熟山中歸(백주신숙산중귀) : 막걸리 처음 익을 산으로 돌아오니
黃?啄黍秋正肥(황계탁서추정비) : 닭이 기장을 쪼아 먹는데 가을이라 살이 쪘다
呼童烹?酌白酒(호동팽계작백주) : 아이 불러 닭 삶아 안주하고 막걸리를 마시니
兒女嬉笑牽人衣(아녀희소견인의) : 아이들은 기뻐 웃으며 내 옷자락을 당긴다.
高歌取醉欲自慰(고가취취욕자위) : 소리 높여 노래 부르며 취하여 스스로 위안하려
起舞落日爭光輝(기무락일쟁광휘) : 일어나 춤추니 지는 해는 그 붉은 빛을 다툰다.
游說萬乘苦不早(유설만승고불조) : 천자에게 내 뜻 설득함이 늦은 것을 괴로워하여
著鞭跨馬涉遠道(저편과마섭원도) : 채찍 치며 말에 올라 먼 길을 떠난다.
會稽愚婦輕買臣(회계우부경매신) : 회계땅의 어리석은 여자 남편 주매신을 버렸으니
余亦辭家西入秦(여역사가서입진) : 나도 집을 버리고 서쪽으로 장안으로 가련다.
仰天大笑出門去(앙천대소출문거) : 하늘 우러러 크게 웃으며 문을 나서 떠나니
我輩豈是蓬蒿人(아배기시봉호인) : 우리들이 어찌 초야에 묻혀 살 사람이겠는가


 주(註)
 남릉(南陵) : 安徽城 宣城縣 서쪽에 있다. 李白이 玄宗의 부름을 받고 長安으로 들어갈 즈음 이곳에서 妻子와 작별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주(白酒) : 탁주를 일컬음.
만승(萬乘) : 天子를 가리킴.
회계우부경매신(會稽愚婦輕買臣) : 《漢書》에 나오는 이야기.
朱買臣은 會稽君의 吳 땅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나무를 해서 팔아 생계를 이어갔는데 나뭇짐을 지고 가면서도 글을 읽었다. 아내가 동행하면서 창피하게 생각하고 글 읽는 것을 말렸으나 朱買臣은 더욱 빠른 소리로 읽었다. 결국은 아내가 朱買臣을 버리고 가버렸는데, 수년 후에 朱買臣은 出世하였다고 한다.
봉호(蓬蒿) : 쑥. 草野에 묻혀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여산 폭포를 바라보며)


日照香爐生紫煙(일조향로생자연) : 향로봉에 해 비치니, 자색 안개 피어올라
遙看瀑布掛長川(요간폭포괘장천) : 아득히 폭포 바라보니, 긴 강이 걸려있구나
飛流直下三千尺(비유직하삼천척) : 날아 솟았다 바로 떨어진 물줄기 삼천 척
疑是銀河落九天(의시은하락구천) : 이것 혹 은하수 하늘에서 떨어 것 아닐까


《여산폭포를 바라보며》라는 시제(詩題)로 번역하기도 한다.

2수 연작의 제2수로 《당시선(唐詩選)》에 수록되어 전한다.

이 시는 여산폭포의 장엄한 위용을 호방한 기개로 노래한 낭만적 서정시로서, 이백의 시 중에서 가장 뛰어난 명편으로 알려졌다.

시의 형식은 칠언절구(七言絶句)로 분류되는 근체시이며, 1,2,4구의 마지막 글자 '연(煙)·천(川)·천(天)'이 운자(韻字)이다.


제1,2구는 눈에 보이는 실경을 시각적 이미지를 최대한 살려 햇빛과 물보라를 배합시키고,

직선으로 떨어져내리는 폭포를 흐르는 강물과 연결시켜 매우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의 후반부인 제3,4구는 엄청난 폭포의 높이와 곧바로 떨어지는 물줄기의 기세를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인의 호탕한 기개와 풍부한 상상력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

여산의 향로봉과 폭포가 어우러진 풍경을 노래한 이 시는 전편을 통해 폭포의 웅장한 스케일과 속도감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마치 선경(仙境)을 그린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시제(詩題)에 나오는 여산은 지금의 장시성[江西省]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중국의 명승지이자 유명한 피서지이다.

제1구의 '자연(紫煙)'은 향로봉 봉우리에 덮여 있는 안개구름이 햇빛에 비쳐 보라색 연기처럼 보이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제2구의 '장천(長川)'은 폭포가 흘러 이룬 내[川]를 뜻하는데, '전천(前川)'으로 표기된 책도 있다.

제3구의 '비류직하삼천척'은 폭포의 기세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오늘날 상투어가 되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명구이다.


자연에 동화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보임으로써, 탈속적이며 낭만적인 시정(詩情)을 담고 있는 이 시는,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이백의 면모를 잘 드러내주는 작품으로 노장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여산폭포의 거대하고 신비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이백은 원래 악부와 가행을 잘했는데, 이는 악부와 가행의 형식이 자유로워서 자유분방한 감정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형식이 다른 연작시였지만 이백의 자유자재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이후 시인들의 창작에도 큰 참고가 되었다.


이 작품은 725년 당 현종 13년 전후로 이백이 금릉 지역을 유람하면서 여산(廬山)을 들렀을 때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으로는 작품 속 두 수의 체제 이질성을 근거로 같은 시기에 창작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廬山 : 광산(匡山)이라고도 불리는 여산은 중국의 명산 중 한 곳이다.

주(周)나라 때 광(匡)씨 성을 가진 일곱 형제가 이곳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는데,

그들이 거처한 오두막집(廬)이 변하여 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지금의 장시[江西]성 지우장[九江]시 북쪽에 있다.

북쪽은 양쯔강, 동쪽과 남쪽은 보양호에 닿아 있으며, 서쪽만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

주봉은 피라미드 모양을 한 한양봉(漢陽峰, 1,474미터)이다. 작품에 나오는 향로봉은 여산 북쪽의 봉우리 이름이다.


운무가 자욱하게 낀 것이 마치 향을 피운 후에 올라가는 연기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여산은 예로부터 중국 문인들이 많이 다녀간 곳으로, 중국문학의 산실이라 할 만한 곳이다.

중국 역사상 이 산을 다녀간 문인들이 남긴 문학 작품은 4,000여 수를 헤아린다고 한다.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백거이(白居易, 766~826)의 〈비파행(琵琶行)〉,

소식(蘇軾, 1037~1101)의 〈제서림벽(題西林壁)〉 등이 유명한 작품이다.



정야사(靜夜思-고요한 밤에)

 

牀前看月光(상전간월광) : 침상 앞에서 달빛을 바라보니
疑是地上雪(의시지상설) : 땅에 내린 눈 내린 것 아닌가 생각했네.
擧頭望山月(거두망산월) : 고개 들어 산에 걸린 달 바라보니
低頭思故鄕(저두사고향) : 고향 생각에 머리가 숙여진다.


이 작품은 726년 당 현종 14년, 이백이 26세 때 양주객사()에서 <추석여회(怀)>와 더불어 지은 것이다.

이 작품에는 고요한 달밤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홀로 타지에서 바쁘게 생활하는 시인. 밤이 되니 문득 잊었던 고향 생각이 절로 난다.

게다가 하늘에는 밝은 달까지 떠오르니 고향 생각이 더욱더 간절해진다.

나그네에게 밤은 돌아갈 곳 없는 자신의 처지를 절실히 느끼게 해준다.

작품에 등장하는 달은 한없이 밝지만, 시인에게는 가을 달이고 서리처럼 차가운 존재다.

추석을 전후로 뜨는 가을 달은 다른 이들에겐 풍요롭고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타향을 떠도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시인에게 달은 차가운 서리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잠결에 깨어난 탓인지 침상 앞을 비추는 청량한 달빛을 지면에 내린 서리로 착각하였다.

서리는 달빛의 고결함, 가을의 차가움으로 형용된다. 이를 통해 타향을 떠돌아다니는 시인의 처지, 그 마음이 잘 드러났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고개를 드는 것과 숙이는 동작을 통하여 고향 생각이 깊어짐을 표현했다.

달빛이 서리처럼 보이는 모호함에서 깨어 나온 시인은 머리를 들어 달을 보면서 고향 생각을 참지 못한다.

이백의 작품은 주로 남성적이고 즉흥적인 것이 많다. 하지만 이 작품만큼은 여성적이고 감성적이고 섬세하다.


추포가(秋浦歌)


秋浦長似秋(추포장사추) : 추포는 언제나 가을 같아
蕭條使人愁(소조사인수) : 쓸쓸함에 사람들 서글퍼진다
客愁不可度(객수불가도) : 객수를 이기지 못해
行上東大樓(행상동대루) : 동쪽 큰 누각에 올라본다
正西望長安(정서망장안) : 정면 서쪽으로는 장안이 보이고
下見江水流(하견강수류) : 아래엔 강물이 말없이 흐른다.
寄言向江水(기언향강수) : 강물에게 말하노니,
汝意憶儂不(여의억농불) : 네 마음속에 나를 기억하는지
遙傳一掬淚(요전일국루) : 한 손 가득 내 눈물을 멀리 전하여
為我達揚州(위아달양주) : 양주로 보내주려무나
秋浦猿夜愁(추포원야수) : 추포에 원숭이 밤이 슬피 울어
黃山堪白頭(황산감백두) : 항산도 백발이 되리라
清溪非隴水(청계비롱수) : 청계는 농산의 물이 아니어도
翻作斷腸流(번작단장류) : 창자를 끊는 듯 흘러간다.
欲去不得去(욕거불득거) : 떠나려 해도 떠나지 못하니
薄游成久游(박유성구유) : 잠시의 여행이 영원한 여행이 되었구나.
何年是歸日(하년시귀일) : 그 어느 해가 돌아갈 날인가
雨淚下孤舟(우루하고주) : 눈물이 비 오듯 외로운 배에 떨어진다.
秋浦錦駝鳥(추포금타조) : 추포 금 타조
人間天上稀(인간천상희) : 세상엔 드물도다.
山雞羞淥水(산계수록수) : 물가의 산계도 부끄러워
不敢照毛衣(불감조모의) : 날개 한번 못 비추네.
兩鬢入秋浦(량빈입추포) : 추포에 와 내 귀밑머리
一朝颯已衰(일조삽이쇠) : 하루아침에 흩어져 늙었구나.
猿聲催白髮(원성최백발) : 원숭이 울음소리 백발을 재촉하니
長短盡成絲(장단진성사) : 긴 것도 짧은 것 도 실이 되어버렸네.
秋浦多白猿(추포다백원) : 추포에는 원숭이도 많아
超騰若飛雪(초등약비설) : 날리는 눈처럼 날뛰는구나.
牽引條上兒(견인조상아) : 나무 위의 새끼를 끌어당겨서
飲弄水中月(음롱수중월) : 물속의 달과 물마시며 논다
愁作秋浦客(수작추포객) : 시름 안은 추포의 나그네
強看秋浦花(강간추포화) : 기분전환으로 꽃구경한다.
山川如剡縣(산천여섬현) : 섬현 같은 산과 강
風日似長沙(풍일사장사) : 장사 같은 바람과 햇빛
醉上山公馬(취상산공마) : 술 취하면 모자 거꾸로 쓰고 말을 달린 진나라 관리 산간처럼 말에 오르고
寒歌甯戚牛(한가녕척우) : 날이 차면 노래하나로 제나라 대신 된 영적의 “반우가”를 노래했었다
空吟白石爛(공음백석란) : 헛되이 “백석란‘을 소리 내어 불러볼 뿐
淚滿黑貂裘(루만흑초구) : 눈물만 나의 검은 돈피가죽옷에 가득 떨어지는구나.

爐火照天地(로화조천지) : 화롯불은 천지를 비추고
紅星亂紫煙(홍성란자연) : 붉은 별빛 자색 안개 속에 어지럽다
??明月夜(난랑명월야) : 달 밝은 밤 낯 붉은 사나이
歌曲動寒川(가곡동한천) : 노랫소리 차가운 냇가로 울려 퍼진다.

秋浦千重嶺(추포천중령) : 추포의 천만 봉우리
水車嶺最奇(수거령최기) : 수거령이 가장 절묘하다
天傾欲墮石(천경욕타석) : 하늘이 기울어 돌이 떨어질 듯하고
水拂寄生枝(수불기생지) : 강물은 기생하는 나뭇가지를 스치고 흘러간다.

江祖一片石(강조일편석) : 강조의 한조각 돌

?天掃??(청천소화병) : 푸른 하늘에서 병풍을 쓸어낸다

題詩留萬古(제시류만고) : 병풍에 시를 지어서 마고에 남기려니
綠字錦苔生(록자금태생) : 푸른 글자에 비단 이끼 돋아나리라

千千石楠樹(천천석남수) : 천 그루, 또 천 그루, 많고 많은 석남수요
萬萬女貞林(만만녀정림) : 만 그루, 또 만 그루, 많고 많은 여정 림이라
山山白鷺滿(산산백로만) : 산마다 백로가 가득 날고
澗澗白猿吟(간간백원음) : 골짜기마다 흰 원숭이 우는구나.
君莫向秋浦(군막향추포) : 그대는 추포로 오지 말아요.
猿聲碎客心(원성쇄객심) : 원숭이 울음소리에 나그네 마음 부서진다오.

邏人橫鳥道(라인횡조도) : 나인에는 새 날아다니는 높은 길 비껴있고
江祖出魚梁(강조출어량) : 강조에는 물고기 통발 솟아있구나
水急客舟疾(수급객주질) : 물살이 빨라 나그네 배는 빠르고
山花拂面香(산화불면향) : 산의 꽃들 얼굴을 스치니 향기로워라

水如一匹練(수여일필련) : 물은 한 필의 비단
此地?平天(차지즉평천) : 땅은 넓은 하늘같구나.
耐可乘明月(내가승명월) : 차라리 밝은 달 타고
看花上酒船(간화상주선) : 꽃구경하러 술 실은 배에 올랐으면

?水淨素月(록수정소월) : 푸른 물에 깨끗하고 흰 달
月明白鷺飛(월명백로비) : 달빛은 밝은데 흰 백로가 날아드네.
?聽採菱女(랑청채릉녀) : 총각이 듣고 있네, 마름 따는 처녀가
一道夜歌歸(일도야가귀) : 밤 길 집으로 돌아가며 부르는 소래소리를

秋浦田舍翁(추포전사옹) : 추포의 시골 늙은이
採魚水中宿(채어수중숙) : 물고기 잡고 물가에 잠이 드네.
妻子張白?(처자장백한) : 아내와 아들은 백한새를 잡으려
結?映深竹(결저영심죽) : 그물 친 것이 깊은 대숲 속에 어리네.

?波一步地(조파일보지) : 여기서 도파 땅은 한 걸음 남짓
了了語聲聞(료료어성문) : 말하는 소리 똑똑히 들려오는구나.
闇與山僧別(암여산승별) : 몰래 산 속 스님과 이별하고
低頭禮白雲(저두례백운) : 머리 숙여 흰 구름에도 인사하며 떠난다.


어구(語句)
秋浦 : 池州府 秋浦縣(지주부 추포현, 安徽省 池州地區貴池市안휘성 지주지구 귀지시)으로 양자강 남쪽 연안임.
蕭條 : 분위기가 아주 쓸쓸함. 蕭索(소삭).
客愁 : 나그네의 시름. 객지에서 느끼는 수심. 旅愁(여수).
儂 : 나.
一掬淚 : 한 움큼의 눈물.
揚州 : 지금의 江蘇省 揚州市(강소성 양주시). 이백이 유랑하던 곳 중의 하나임.


감상(鑑賞)
지은이가 추포에서 만년을 보내며 지은 連作詩(연작시). 제2수 이후의 몇 수를 보면,

‘추포 원숭이들의 밤 시름에 남쪽 黃山(황산)도 민둥산이 되고, 여기 청계는 隴(농) 땅의 강물 같지 않지만 그래도 애끊는 소리 내며 흐르네.

고향 가고 싶으나 못 가 잠깐 여행한다는 게 오래되고 말아, 언제 가려는가 외로운 배에서 비오듯 하는 눈물.’은 제2수이고,

제3수는 ‘추포의 고운 錦駝鳥(금타조)는 천하에 드물어, 산꿩은 물가에 나와서도 감히 제 모습을 물에 비춰 보지 못하네.’이다.

 ‘추포에 들어가자 양쪽 귀밑털이 하루아침에 세나니, 원숭이 울음이 백발을 재촉해 머리털이 모두 흰 실이 되는구나.’는 제4수이고,

제5수는 ‘추포에는 흰 원숭이가 많아 마구 날뛰는 게 흰 눈이 날리는 듯한데,

가지 위의 새끼들을 끌고 내려와 물 속의 달을 마시며 희롱하는구나.’이다.

이렇게 추포의 풍물을 읊어 나갔다.


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 不知明鏡裏 何處得秋霜.〈제15수〉
(백발삼천장 연수사개장 부지명경리 하처득추상)
백발은 삼천 자 길이, 수심 따라 하나하나 자라났구나.
거울 보니 알지 못괘라, 어디서 가을 서리를 저리도 맞았던고.


어구(語句)
白髮三千丈 : 백발이 삼천 길이 되도록 길게 자랐음. 誇張法(과장법)의 예로 많이 인용되는 구절임.
緣愁 : 수심에 인연하여. 시름 따라.
似箇長 : 이렇게 하나하나 자람. 似箇를 ‘이와 같이’로 보아 ‘이처럼 자랐구나’로 풀이하기도 함.
明鏡 : 거울. ‘맑은 水面(수면)’으로 풀이하기도 함.
秋霜 : 가을의 찬 서리. 백발.


감상(鑑賞)
머리칼은 내 시름 하나에 한 올이 세고 또 하나에 다른 올이 세고 하면서,

시름을 따라 세어가서 드디어 백발이 되고 그 길이가 사람의 키로 3천 길이나 된다.

문득 거울이나 물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고는 알게 된 것인데, 내 언제 어디서 된 가을 서리 맞듯 저리도 백발이 되고 말았나.

깨달을 사이 없이 늙어가는 인생을 한탄한 명시이다.

참고로 제16수를 보면 “秋浦田舍翁 採魚水中宿 妻子張白鷳 結罝映深竹

(추포의 노인은 고기 잡으려고 강물 위에서 자고, 아내와 아들은 황새 붙들려고 대숲 깊숙이 그물을 쳐 놓았네)”이고

끝 수[17수]는 ‘桃波(도파)는 좁은 곳이라 말소리가 분명하게 들리나니,

산의 스님과 몰래 헤어지는데 고개 숙여 흰 구름에 절하는구나.’이다.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경정산에 혼자 앉아)


衆鳥高飛盡(중조고비진) : 새들은 높이 날아가고
孤雲獨去閑(고운독거한) : 외로운 구름만 한가히 떠간다.
相看兩不厭(상간양불염) : 바라보아도 싫지 않은 건
只有敬亭山(지유경정산) : 다만 경정산이 있기 때문


어구(語句)
敬亭山 : 安徽省 宣城地區(안휘성 선성 지구)에 있는 산.
孤雲 : 외로이 떠도는 구름.
相看 : 서로 봄. 바라봄.
不厭 : 싫지 않음.


감상(鑑賞)
경정산에 혼자 앉은 감상을 읊었다.

온갖 새들이 산에서 지저귀며 놀다가 저녁녘이 되어 높이 날아가 버렸고, 하늘에는 외로이 떠가는 구름만 한가롭게 보인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때가 되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자리에 그냥 버티고 있으면서 싫지 않은 것은 오직 저 경정 산뿐이로구나 했다.

衆鳥를 ‘名利(명리)를 좇아 흩어져 가는 俗人(속인)’으로, 孤雲을 ‘세속을 벗어나 隱居(은거)하는 고고한 인사’로 비유하여 풀기도 한다.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는 말과 같이 묵묵히 마주해 주는 경정산을 찬미했다 하리라.


 

자견(自遣-스스로 위안함)


對酒不覺暝(대주불각명) : 술잔을 마주하니 어두워지는 줄도 몰라
花落盈我衣(화락영아의) : 꽃잎은 떨어져 옷에 가득 찬다.
醉起步溪月(취기보계월) : 취하여 일어나 개울에 비친 달을 따라 걸으니
鳥還人亦稀(조환인역희) : 새는 둥지로 돌아오고 사람도 드물다


어구(語句)
自遣 : 스스로 자기 마음을 위로함.
暝 : ① 〈평성 靑(청) 운〉 어둡다. 캄캄하다. ② 〈거성 徑(경) 운〉 저물다. 쓸쓸하다. 여기서는 ②임.
盈 : 차다. 가득차다.


감상(鑑賞)
혼자서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 사이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내 옷자락에는 떨어지는 꽃잎이 가득하다.

일어나 취한 걸음으로 달빛 비추는 냇가를 거니노라니,

새들도 제 보금자리로 돌아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사람들 또한 모두 집으로 들어가 버려 적적하다.

외로움 속에 내 벗이란 하늘의 달과 떨어지는 꽃잎과 술, 이 세 가지뿐이로구나.

이것들이야말로 내 진실한 친구가 되어 주니 고독을 느낄 까닭이 없다.


 

월중람고(越中古-월나라에서 옛 일을 회고하다)


越王句踐破吳歸(월왕구천파오귀) :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이기고 돌아오고
義士還家盡錦衣(의사환가진금의) : 충신의사들 모두 돌아와 비단 옷을 입었다
宮女如花滿春殿(궁녀여화만춘전) : 궁녀들 꽃 같이 예쁘고 궁궐엔 봄이 가득했지만
只今惟有??飛(지금유유자고비) : 지금은 오직 자고새만 울고 있구나.


註(주)

(1) 越中(월중) : 越(월)나라의 首都인 會稽(회계)를 가리킨다.
(2) 覽古(람고) : 고적을 찾아 감상함을 뜻한다.
(3) 句踐(구천) ; 오왕 夫差(부차)에게 패했으나 20년의 忍苦(인고)끝에 부차를 격파하고 복수를 이룸.
(4) 義士(의사) : 월왕 구천과 함께 싸운 전사들.
(5) 錦衣(금의) : 싸움에 승리하고 상으로 받은 비단옷.
(6) 자고 : 꿩과에 속하는 새. 가슴 부분에 흰 반점이 있다.


[해설]
蘇臺覽古(소대람고)가 오왕을 노래했다면 이 詩는 越王 句踐(구천)을 소재로 하고 있다.

두 편의 시에서 공통되는 점은 인간 세상에 대한 영화의 덧없음을 노래한 것이다.


소대람고(蘇臺覽古-소대에서 옛날을 생각하다)


舊怨荒臺楊柳新(구원황대양류신) : 옛 동산 낡은 누대에 버들잎 새로 돋아나고
菱歌淸唱不勝春(릉가청창불승춘) : 연밥 따는 맑은 노랫소리 봄의 흥취 못 견딘다.
只今惟有西江月(지금유유서강월) : 지금은 강서의 저 달만 남아 있으니
曾照吳王宮裏人(증조오왕궁리인) : 저 달은 오나라 궁궐 속의 사람도 비추었겠지


語句 解釋

蘇臺(소대) : 고소대(姑蘇臺), 현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 서쪽에 있다. 춘추(春秋)시대의 오(吳)나라 임금 부차(夫差)가 지은 궁전의 터전.
覽古(람고) : 옛 고적을 둘러본다.
舊苑(구원) : 옛날의 정원.
荒臺(황대) : 황폐한 고대(高臺)
菱歌(능가) : 연못에서 느름 따는 아가씨들이 부르는 노래.
不勝春(불승춘) : 봄을 이기지 못한다. 춘정(春情)에 노근하다.
西江(서강) : 서쪽에 흐르는 강물.
吳王(오왕) : 오나라 임금 부차(夫差).
宮裏人(궁리인) : 궁중의 사람, 즉 오왕 부차가 사랑했던 서시(西施)란 미인.


補充 說明
 계원(桂苑)의 낡은 정원과 황폐한 고소대(姑蘇臺) 언덕에는 버들잎들이 봄을 맞아 산뜻하고,

천지(天池) 연못에서 느름 따는 아가씨들의 맑은 노래 소리가 더욱 봄의 노근함을 못 견디게 하는구나.
 옛날 이곳에는 오나라 임금 부차(夫差)가 미인 서시(西施)와 더부러 놀던 곳,

지금은 오직 서쪽 강물위에 달이 비칠 뿐이지만, 옛날에는 오나라 대궐 안의 서시를 비춰주었으리라.


 궁정에서 쫓겨난 이백은 천보(天寶) 五년(七四九)에 남쪽 오월(吳越) 일대를 유람했다.

옛날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오나라와 월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절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기원전 四九四년 오나라 임금 부차(夫差)는 명신 오자서(伍子胥)의 도움을 받아 회계산(會稽山)에서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굴복시켰고

아버지의 원한을 풀었다.

그리고 나자 부차는 풍광명미(風光明媚)한 소주(蘇州)에서 마냥 영화를 누렸다.

도성에서는 계원(桂苑)이란 정원과, 곳대(姑蘇臺)란 고대를 만들어 궁전 누각을 세웠고, 또 천지(天池)란 연못을 파고 배를 띄우기도 했다.

더욱이 부차는 패자(敗者) 구천이 보내준 미인 서시(西施)에 빠져 나날이 유연(遊宴)만을 일삼았고,

마침내는 二十년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던 구천에게 패하고 망하게 되었다.

이 시는 고소대와 오나라를 중심한 것이다.


贈汪倫(증왕윤 : 왕윤에게 )


李白乘舟將欲行(이백승주장욕행) : 나 이백이 배 타고 떠나려는데
忽聞岸上踏歌聲(홀문안상답가성) : 언덕 위에서 문득 답가성이 들리어온다
桃花潭水深千尺(도화담수심천척) : 도화담의 물 깊이 천 자나 되어도
不及汪倫送我情(불급왕윤송아정) : 왕윤이 나를 떠나보내는 정에 미치지 못 하리라

 

註(주) 
(1) 汪倫(왕윤) : 李白의 친구. 桃花潭에서 李白에게 술을 권한 일이 있다. 
(2) 忽(홀) ; 문득 
(3) 踏歌(답가) : 발로 땅을 밟으며 노래하는 것. 
(4) 桃花潭(도화담) : 연못의 이름. 

 

[해설] 
詩의 첫머리에 작자 자신이 '李白'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시 전체를 객관적 으로 느끼게 하려는 의도이다.

떠나가는 李白의 배와 강 기슭에서 노래로 李白을 전송하는 汪倫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마치 그림처럼 표현하고 있다.

 

山中與幽人對酌(산중여유인대작-산속에서 은자와 대작하다)


兩人對酌山花開(양인대작산화개) : 산에는 꽃이 피고 두 사람 술을 나눈다.
一杯一杯復一杯(일배일배부일배) : 한 잔, 한 잔 또 한 잔
我醉欲眠君且去(아취욕면군차거) : 내가 취하여 잠이 오니 그대는 돌아가서
明日有意抱琴來(명일유의포금래) : 내일 아침 생각나면 거문고 안고 오시게

 

어구(語句)
幽人 : 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피하여 그윽한 곳에 숨어 사는 사람.
對酌 : 마주하여 술을 마심. 對飮(대음).
有意 : 뜻 또는 생각이 있음.

 

감상(鑑賞)
제목을 ‘山中對酌’이라고 하는 작품. 유인이 속세에서 찾아온 사람과 술잔을 나누며 술에 취한 후 찾아온 사람에게 말하는 형식이다.

‘一杯一杯復一杯’는 지금까지도 술자리에서 자주 말해지는 유명한 구절이다.

셋째 구 ‘나는 취해 졸리니 그대는 돌아가라’는 말은 陶潛(도잠, 陶淵明도연명)이 술이 먼저 취하면 손더러 말하기를

“내 취해서 자고자 하니 그대는 먼저 돌아가시오.” 했다는 것을 인용한 말로,

손님을 쫓아내려는 뜻이 아니라 속세의 예의범절에 구애받을 게 없고 그만큼 서로 무간한 사이임을 나타낸다.

‘山中答俗人(산중답속인)’ 시와 같은 사상과 풍류가 담긴 시이다.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

-황학루에서 맹호연이 광릉가는 것을 전송하다)


故人西辭黃鶴樓(고인서사황학루) : 친구는 서쪽으로 황학루를 떠나
煙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 : 춘 삼월 꽃피는 시절에 양주로 간다.
孤帆遠影碧空盡(고범원영벽공진) : 외로운 돛단배 먼 그림자 하늘 먼 곳 사라지고
唯見長江天際流(유견장강천제류) : 오직 장강만 하늘과 맞닿아 흘러간다.

 

어구(語句)


黃鶴樓 : 湖北省 武漢市(호북성 무한시)에 있는 누각.1)
孟浩然 : 盛唐(성당)의 자연파 시인, 처사.2)
廣陵 : 江蘇省 揚州市(강소성 양주시)의 옛 이름.
故人 : 오랜 친구.
煙花 : 안개나 아지랑이 속의 꽃.
孤帆 : 외롭게 떠 있는 작은 배. 孤舟(고주).
碧空 : 푸른 하늘. 碧天(벽천).
長江 : 揚子江(양자강)의 중국식 명칭.
天際 : 하늘의 끝. 天末(천말).

 

감상(鑑賞)
오래 사귀어 온 친구인 맹호연을 전망 좋은 황학루에서 송별하며 지은 시.

맹호연은 양자강 따라 외롭게 배를 타고 동쪽 양주로 가게 된다.

때는 이지랑이 낀 속의 꽃을 볼 수 있는 음력 3월 봄철이다.

친구는 배를 타고 강물 따라 동쪽으로 동쪽으로 떠간다.

드디어 그 배의 모습은 푸른 하늘 끝까지 가서 아물아물 보이지 않게 되고,

오직 보이는 것은 동쪽 하늘 끝까지 유유히 흐르는 양자강 강물만 보일 뿐이다.

이별의 아쉬운 정은 표면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끝 두 구 ‘遠影碧空盡’과 ‘長江天際流’ 같은 시어 속에 스미어 있다.

제목은 '황학루에서 광릉으로 떠나는 맹호연을 보내며'라는 뜻으로, 칠언절구(七言絶句)의 송별시(送別詩)이다.

황학루는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우창[武昌] 서남쪽 양쯔강[揚子江] 강가에 있는 누각으로,

선인(仙人)이 노란 귤 껍질로 만든 학이 진짜 학이 되어 선인을 태우고 날아갔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이백(701~762)은 쓰촨을 떠나 중원을 주유하다가 20대 후반에 12세 연상인 맹호연(689~740)과 교분을 맺었다.

이때 맹호연은 이미 시명(詩名)을 날리고 있었고 이백은 그를 위하여 〈증맹호연(贈孟浩然)〉이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다시 세월이 흘러 739년, 이백은 황학루에서 우연히 맹호연을 만났다.

당시 맹호연은 광릉, 곧 지금의 양저우[揚州]로 가려던 참이었으므로 이백은 이 시를 지어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황학이 날아가버린 것처럼 옛친구도 작별을 고하여 떠나는데, 꽃 피는 계절을 함께 즐기지 못하여 더욱 아쉽다.

옛친구를 실은 배는 점점 멀어져 마침내 수평선에 닿은 푸른 하늘로 사라져버리고,

눈앞에는 짧은 인생의 이별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장강(양쯔강)이 무심하게 흐르고 있다.

단 4구절로 석별의 정을 심원하게 드러낸 천고(千古)의 절창(絶唱)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황학이 선인을 태우고 날아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맹호연은 이백과 헤어진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횡강사(橫江詞)


橫江館前津吏迎(횡강관전진리영) : 횡강의 관사 앞에서 나루터 관리가 맞으며
向余東指海雲生(향여동지해운생) : 바다에 피어오르는 구름 나를 향해 가리킨다.
?今欲渡緣何事(랑금욕도연하사) : 당신은 무슨 일로 강을 건너려 하는가?
如此風波不可行(여차풍파불가행) : 풍파가 이와 같이 심하니 건너지 못 한다


友人會宿(우인회숙)


滌蕩千古愁(척탕천고수) : 천고의 시름 씻어보자고
留連百壺?(류련백호음) : 연달아 백병의 술을 마신다.
良宵宜?談(량소의청담) : 이 좋은 밤, 이야기나 나누세
皓月未能寢(호월미능침) : 휘영청 밝은 달, 잠 잘 순 없어
醉來臥空山(취래와공산) : 취하여 빈산에 누우니
天地?衾枕(천지즉금침) : 하늘과 땅이 바로 내 이불, 내 베개로세


새하곡(塞下曲-변방 병사의 노래)


塞虜乘秋下(새로승추하) : 변방의 오량캐 가을 타고 내려오니
天兵出漢家(천병출한가) : 천자의 병사는 도성을 떠난다.
將軍分虎竹(장군분호죽) : 장군들은 호죽의 병부를 나누어 가지고
戰士臥龍沙(전사와룡사) : 병사들은 사막에 자리 잡는다.
邊月隨弓影(변월수궁영) : 변방의 달은 활 그림자를 따라 움직이고
胡霜拂劍花(호상불검화) : 오랑캐 땅의 서리 칼에 스쳐 꽃처럼 흩어진다.
玉關殊未入(옥관수미입) : 특별히 옥문관에 아직 들지 않았지만
少婦莫長嗟(소부막장차) : 젊은 부인들이여 길게 탄식하지 마시오.


추사(秋思)


燕支黃葉落(연지황엽락) : 멀고 먼 연지 땅엔 누런 낙엽 지겠지
妾望自登臺(첩망자등대) : 저도 먼 곳을 바라보려 스스로 높은 곳 올라갑니다.
海上碧雲斷(해상벽운단) : 바다 위는 구름 걷혀 푸른데
單于秋色多(선우추색다) : 오랑캐들 가을에 쳐들어온다.
胡兵沙塞合(호병사새합) : 오량캐들 사막에 모여들고
漢使玉關山(한사옥관산) : 천자의 사신은 옥관정에서 돌아오네.
世客無歸日(세객무귀일) : 우리 낭군 돌아올 기약 없으니
空悲蕙草催(공비혜초최) : 헤초가 시들어가는 것을 나는 공연히 슬퍼하노라


송우인입촉(送友人入蜀)


見說蠶叢路(견설잠총노) : 듣자니, 잠총으로 가는 길이
崎嶇不易行(기구불이행) : 험난하여 쉽게 갈 수 없다네.
山從人面起(산종인면기) : 산은 사람의 얼굴 앞에 우뚝 다가오고
雲傍馬頭生(운방마두생) : 구름은 타고 가는 말 옆으로 솟아오른다.
芳樹籠秦棧(방수롱진잔) : 풀과 나무는 높은 사다리 길을 가리고
春流?蜀城(춘유요촉성) : 봄물은 흘러 촉성을 돌아 흘러간다.
升沈應已定(승침응이정) : 승패는 응당 정해져 있거니
不必問君平(불필문군평) : 반드시 유명한 점장이 군평에게 물을 필요는 없다네.


강상음(江上吟)


木蘭之?沙棠舟(목란지설사당주) : 목란나무 상앗대를 걸친 사당나무배에
玉簫金管坐兩頭(옥소김관좌양두) : 옥퉁소, 황금피리 들고 양쪽에 앉아있네.
美酒樽中置千斛(미주준중치천곡) : 맛있는 술 술통에 가득 채우고
載妓隨波任去留(재기수파임거류) : 기생을 태워 물결에 맡겨 마음대로 오고간다.
仙人有待乘黃鶴(선인유대승황학) : 신선은 기다리다 황학을 타고 가고
海客無心隨白鷗(해객무심수백구) : 뱃놀이 나그네 무심히 백구 따라 논다.
屈平詞賦懸日月(굴평사부현일월) : 굴평의 사부는 일월처럼 빛나나
楚王臺?空山丘(초왕대사공산구) : 초왕의 누대는 허물어지고 빈산만 남아있다
興?落筆搖五嶽(흥감락필요오악) : 흥에 겨워 글을 쓰면 오악도 흔들리고
詩成笑傲凌滄洲(시성소오릉창주) : 시를 지어 거만하게 웃으며 창주도 능멸한다
功名富貴若長在(공명부귀약장재) : 부귀와 공명이 영원하다면
漢水亦應西北流(한수역응서북류) : 한수도 또한 북쪽으로 흘러내리라


숙청계주인(宿?溪主人)


夜到?溪宿(야도청계숙) : 청계에 이르러 묵으니
主人碧岩裡(주인벽암리) : 주인은 푸른 바위 아래 살더라.
?楹掛星斗(첨영괘성두) : 처마에는 별들이 달려있고
枕蓆響風水(침석향풍수) : 잠자리에는 바람소리 물소리 들려온다.
月落西山時(월락서산시) : 서산에 달이 지니
??夜猿起(추추야원기) : 밤에 웅얼웅얼 원숭이 소리 들린다.


宮中行樂詞2(궁중행락사)


柳色黃金嫩(류색황금눈) : 버들 빛 황금빛으로 부드럽고
梨花白雲香(이화백운향) : 배꽃 흰 구름처럼 향기롭다
玉階巢翡翠(옥계소비취) : 옥계에는 비취새의 둥지가 있고
珠殿鎖鴛鴦(주전쇄원앙) : 주옥 궁전에는 원앙시를 가두었구나.
選妓隨雕輦(선기수조련) : 아름다운 궁녀 뽑아 임금 수레 따르게 하고
徵歌出洞房(징가출동방) : 노래를 청하여 깊숙한 궁방에서 나오게 하네.
宮中有第一(궁중유제일) : 궁중에서 제일 예쁜이는 누군가
飛燕在昭陽(비연재소양) : 소양궁에 조연비가 있다네.


戴老酒店(대로주점)


戴老黃泉下(대로황천하) : 대노인 죽어 황천에서도
還應釀大春(환응양대춘) : 반드시 대춘주를 빚으리라
夜臺無李白(야대무이백) : 저 세상 누각에는 이백이 없으리니
沽酒與何人(고주여하인) : 누구에게 술을 팔까, 너무 궁금하구나.


宮中行樂詞(궁중행락사)


小小生金玉(소소생금옥) : 나 어릴 적엔 대장간 집에서 자라났고
盈盈在紫薇(영영재자미) : 한참 때에 자미궁 궁궐로 갔었지요.
山花揷寶?(산화삽보계) : 산꽃은 아름다운 꼭지머리에 꽂고
石竹繡羅衣(석죽수나의) : 석죽화는 비단 저고리에 수놓았지요.
每出深宮裏(매출심궁리) : 깊은 궁궐 나올 적마다
常隨步輦歸(상수보련귀) : 임금님 손수레 따라 돌아왔었어요.
只愁歌舞散(지수가무산) : 다만 근심스러워요, 노래와 춤 다 끝낸 뒤
化作彩雲飛(화작채운비) : 오색구름으로 변하여 날아가 버릴 것 같아요


楊叛兒(양반아)


君歌陽叛兒(군가양반아) : 당신은 양반아 노래를 부르고
妾勸新豊酒(첩권신풍주) : 저는 유명한 신풍주를 권하지요
何許最關人(하허최관인) : 어디가 가장 저의 마음에 꺼리는지 아세요?
烏啼白門柳(오제백문류) : 까마귀는 백문의 버드나루 사이에서 운다.
烏啼隱楊花(오제은양화) : 까마귀 버드나무에 숨어버리 듯
君醉留妾家(군취류첩가) : 당신은 우리 집에 머무세요.
博山爐中沈香火(박산로중침향화) : 박산향로 속 침향에 불 붙여
雙煙一氣凌紫霞(쌍연일기릉자하) : 피어오른 두 줄기 연기 하나로 자하궁 올라가리.


越女詞(월녀사)


耶溪採蓮女(야계채연녀) : 아계의 연꽃 따는 아가씨
見客棹歌回(견객도가회) : 길손을 보고 뱃노래 부르며 가네.
笑入荷花去(소입하화거) : 웃으며 연꽃 속으로 들어가
佯羞不肯來(양수불긍래) : 부끄러운 듯 나오려하지 않네.

長干吳兒女(장간오아녀) : 강간의 오나라 아가씨
眉目艶星月(미목염성월) : 눈과 눈썹  별과 달처럼 예쁘다
?上足如霜(극상족여상) : 나막신 위의 발은 눈처럼 흰데
不著鴉頭襪(부저아두말) : 아두의 버선은 신지도 않았구나.


贈黃山胡公求白?(증황산호공구백한-황산의 호공에게 백구를 구하면서 지어주다)


請以雙白璧(청이쌍백벽) : 한 쌍의 흰 구슬로
買君雙白?(매군쌍백한) : 그대의 두 마리 흰 꿩을 사고 싶소.
白?白如錦(백한백여금) : 그 흰 꿩은 비단처럼 희어서
白雪恥容顔(백설치용안) : 흰 눈이 그 용모로는 부끄럽다네.
照影玉潭裏(조영옥담리) : 그림자를 옥담 속에 드리우고
刷毛琪樹間(쇄모기수간) : 깃털은 기수 사이에서 다듬는다.
夜樓寒月靜(야루한월정) : 한밤 서식처는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하고
朝步落花閑(조보낙화한) : 아침 산보에 떨어진 꽃이 한가롭구나.
我願得此鳥(아원득차조) : 나는 이 새를 얻어
翫之坐碧山(완지좌벽산) : 청산에 앉아 이들을 데리고 놀고 싶다.


哭晁卿衡(곡조경형)


日本晁卿辭帝都(일본조경사제도) :일본 사람 조형이 서울을 떠나
征帆一片?蓬壺(정범일편요봉호) :한조각 범선 타고 동해의 봉래와 방호 섬 돌았네.
明月不歸沈碧海(명월불귀침벽해) :달 같은 사람 푸른 바다에 빠져 돌아오지 못하니
白雲愁色滿蒼梧(백운수색만창오) :구름은 수심 띠고 남쪽 해안 창오 땅에 가득하네.


贈錢徵君少陽(증전징군소양-미군 전소양에게)


白玉一杯酒(백옥일배주) : 백옥 한 잔 술에
綠楊三月時(녹양삼월시) : 푸른 버드나무 춘삼월이라
春風余幾日(춘풍여기일) : 봄바람 며칠이나 남았는고.
兩?各成絲(량빈각성사) : 두 귀밑털 흰 실이 다 되었네. 
秉燭唯須飮(병촉유수음) : 촛불을 잡고 술을 마셔야 하니
投竿也未遲(투간야미지) : 이직도 낚싯대 드리우긴 늦지 않다네.
如逢渭川獵(여봉위천렵) : 만일 위천의 사냥꾼을 만난다면
猶可帝王師(유가제왕사) : 오히려 가히 제왕의 스승도 되겠네.


기동로이치자(寄東魯二稚子-동로의 두 자식에게)


吳地桑葉綠(오지상엽록) : 오나라 땅의 뽕잎은 푸르고
吳蠶已三眠(오잠이삼면) : 오나라  누에는 벌써 석 잠을 잤다.
我家寄東魯(아가기동로) : 우리 집 동로에 부치노니
誰種龜陰田(수종구음전) : 누가 구음의 밭에 파종을 하고 있을까
春事已不及(춘사이불급) : 봄철 일은 아직 다하지 못했는데
江行復茫然(강행부망연) : 강을 떠도는 일 아직도 망연하다
南風吹歸心(남풍취귀심) : 남풍에 고향 가고 싶은 마음 불어와
飛墮酒樓前(비타주루전) : 술집 다락 앞에 날아 떨어지는구나.
樓東一株桃(루동일주도) : 다락 동쪽엔 한 그루 복사꽃
枝葉拂?煙(지엽불청연) : 나뭇잎 파란 연기 떨치는구나.
此樹我所種(차수아소종) : 이 나무는 내가 직접 심은 나무
別來向三年(별래향삼년) : 떠나온 지 이미 삼년이 다 되어간다
桃今與樓齊(도금여루제) : 복사꽃나무 이제는 다락 높이만큼 자라났으나
我行?未旋(아행상미선) : 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하는구나.
嬌女字平陽(교녀자평양) : 내 딸 이름은 평양인데
折花倚桃邊(절화의도변) : 복사꽃 나무에 기대어 꽃을 꺾고 있으리라
折花不見我(절화불견아) : 꽃을 꺾어도 애비인 나를 보지 못하니
淚下如流泉(루하여류천) : 흐르는 샘처럼 눈물을 흘리리라
小兒名伯禽(소아명백금) : 작은 아들 이름은 백금인데
與?亦齊肩(여자역제견) : 누이와 키가 비슷하게 자랐을 것이다
雙行桃樹下(쌍행도수하) : 둘이서 나란히 복사꽃나무를 걸으면
撫背復誰憐(무배부수련) : 누가 등을 어루만지고 다시 누가 아껴주리
念此失次第(념차실차제) : 이런 생각 하면 마음이 산란하고
肝腸日憂煎(간장일우전) : 날마다 내 간장이 탄단다
裂素寫遠意(렬소사원의) : 흰 천을 찢어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을 적어
因之汶陽川(인지문양천) : 이로 인하여 양천을 눈물로 얼룩지게 하는구나.


월야강행기최원외종지(月夜江行寄崔員外宗之-달밤에 강을 걷다가 원외랑 최종지에게 부치다)


飄飄江風起(표표강풍기) : 상랑 살랑 강물에 산들바람 일고
蕭颯海樹秋(소삽해수추) : 바닷가 나무에는 소슬히 바람 부네
登?美?夜(등로미청야) : 뱃전에 오르니 맑은 밤이 좋고
掛席移輕舟(괘석이경주) : 돛을 달아 빠른 배 지나가네.
月隨碧山轉(월수벽산전) : 달은 푸른 산을 따라 옮겨가고
水合?天流(수합청천류) : 물은 푸른 하늘과 맞닿아 흘러가네.
杳如星河上(묘여성하상) : 아득한 은하 위에
但覺雲林幽(단각운림유) : 다만 숲 구름 가득한 것을 알겠네.
歸路方浩浩(귀로방호호) : 돌아가는 길은 넓고도 넓어라
?川去悠悠(조천거유유) : 흘러가는 물은 아득히 멀리 떠나가고
徒悲蕙草歇(도비혜초헐) : 한갓 서글프게 향 풀이 시들어가고
復聽菱歌愁(부청릉가수) : 다시 마름 캐는 노래 들으니 서글퍼지네.
岸曲迷後浦(안곡미후포) : 언덕은 굽어져 뒤 개펄은 보이지 않고
沙明瞰前洲(사명감전주) : 모래가 맑아 앞 물가 모래섬이 훤히 보이네.
懷君不可見(회군불가견) : 그대가 그리워도 보지 못하니
望遠增離?(망원증리우) : 멀리 곳 바라보니 떠나온 그리움만 짙어지네.


송양산인귀숭산(送楊山人歸嵩山)


我有萬古宅(아유만고댁) : 나에게 만고의 집 있으니
嵩陽玉女峰(숭양옥녀봉) : 고양의 옥녀봉이라네.
長留一片月(장류일편월) : 한 조각달이 오래 머물러
掛在東溪松(괘재동계송) : 동쪽 개울 소나무에 걸려있네
爾去?仙草(이거철선초) : 네가 가서 신선초 채면
菖蒲花紫茸(창포화자용) : 창포는 자줏빛 꽃 피어있으리
歲?或相訪(세만혹상방) : 해 늦어 혹 서로 만나면
?天騎白龍(청천기백룡) : 푸른 하늘로 흰 용타고 오르리라


금향송위팔지서경(金?送韋八之西京-금향에서 위 팔이 서경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


客自長安來(객자장안래) : 객이 서울 장안에서 와서
還歸長安去(환귀장안거) : 다시 장안으로 돌아가는구나.
狂風吹我心(광풍취아심) : 미친 듯이 부는 바람 내 마음을 불어날려
西掛咸陽樹(서괘함양수) : 서쪽으로 함양의 나무에 걸어놓았네
此情不可道(차정불가도) : 이 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
此別何時遇(차별하시우) : 지금 이별하면 언제 다시 만날까
望望不見君(망망불견군) : 아득히 바라보고 바라보아도 그대는 보이지 않고
連山起煙霧(련산기연무) : 산이 맞닿은 곳에 안개와 연기만 인다.

 

파릉행송별(?陵行送別)


送君?陵亭(송군파릉정) : 그대를 보내는 파릉정
?水流浩浩(파수류호호) : 파릉의 물의 길은 넓고도 넓어라
上有無花之古樹(상유무화지고수) : 위에는 꽃 피지 않는 늙은 나무
下有傷心之春草(하유상심지춘초) : 아래에는 상심케 하는 봄풀이 우거졌구나.
我向秦人問路?(아향진인문로기) : 내가 진나라 사람에게 갈림길을 물으니
云是王粲南登之古道(운시왕찬남등지고도) : 이곳은 왕찬이 남쪽으로 오른 길이라
古道連綿走西京(고도련면주서경) : 옛 길은 뻗고 뻗어 서경으로 달리고
紫闕落日浮雲生(자궐락일부운생) : 궁궐에 해 저물고 뜬구름 이는구나.
正當今夕斷腸處(정당금석단장처) : 바로 오늘 밤이 애간장 끊어지는 이곳
驪歌愁?不忍聽(려가수절불인청) : 이가 소리 수심 겨워 차마 들을 수 없구나. 


송배십팔도남귀숭산1(送裴十八圖南歸嵩山-배 십팔이 남으로 숭산에 가려는 것을 전송하다)


何處可?別(하처가위별) : 어느 곳이 이별할 만한 곳인가
長安?綺門(장안청기문) : 서울 장안의 동쪽 문이라네.
胡姬招素手(호희초소수) : 오랑캐 여인은 흰 손으로 나를 잡아끌어
延客醉金樽(연객취금준) : 손님을 부러 술에 취하게 하네.
臨當上馬時(림당상마시) : 말에 올라 떠나려니
我獨與君言(아독여군언) : 내가 홀로 그대와 이야기하네.
風吹芳蘭折(풍취방란절) : 바람 불어 꽃다운 난초 꺾어지고
日沒鳥雀喧(일몰조작훤) : 해가 지니 새소리 시끄러워지네.
?手指飛鴻(거수지비홍) : 손들어 날아가는 기러기 가리키니
此情難具論(차정난구론) : 이 마음 다 말하기 어렵네.
同歸無早?(동귀무조만) : 머지않아 함께 내려가련다.
潁水有?源(영수유청원) : 영수에는 맑은 샘이 있다네.

君思潁水綠(군사영수록) : 그대가 영수가 푸른 것을 생각하고
忽復歸嵩岑(홀부귀숭잠) : 홀연히 다시 숭산 봉우리로 돌아오네.
歸時莫洗耳(귀시막세이) : 돌아갈 때 귀는 씻지 마라
?我洗其心(위아세기심) : 날 위해 그 마음을 씻어주게나
洗心得?情(세심득진정) : 마음을 씻음은 진정을 얻는 것
洗耳徒買名(세이도매명) : 귀를 씻음은 한갓 이름만 사는 것이네
謝公終一起(사공종일기) : 사공이여 끝내는 한번 일어나
相與濟蒼生(상여제창생) : 서로 같이 창생을 구제해보자꾸나


望夫山(망부산)


仰望臨碧空(앙망임벽공) : 올려 바라보니 푸른 하늘 보이고
怨情感別離(원정감별리) : 원망하는 정은 이별을 느끼는구나.
江草不知愁(강초불지수) : 강가의 풀은 근심을 알지 못하고
岩花但爭發(암화단쟁발) : 바위 위의 꽃은 다만 다투어 피었구나.
雲山萬里隔(운산만리격) : 구름 산은 만 리를 격하고
音信千里絶(음신천리절) : 소식은 천리만리 끊어졌구나.
春去秋復來(춘거추복래) : 봄이 가고 가을이 다시 오니
相思幾時歇(상사기시헐) : 그리운 정은 언제나 그칠까


相逢行(상봉행)


相逢紅塵內(상봉홍진내) : 붉은 먼지 낀 길에서 만나
高揖黃金鞭(고읍황금편) : 황금 채찍 높이 들었도다.
萬戶垂楊裏(만호수양리) : 수양버들 속 수많은 집들 중에
君家阿那邊(군가아나변) : 그대 집은 어느 언덕 가에 있는가?


贈內(증내-아내에게)


漠漠闇苔新雨地(막막암태신우지) : 새로 비 내린 땅, 막막히 이끼 짙어지고
微微凉露欲秋天(미미량로욕추천) : 차갑고 잔잔한 이슬이 가을을 재촉한다오.
莫對月明思往事(막대월명사왕사) : 밝은 달 바라보며, 지나간 일 생각하면
損君顔色減君年(손군안색감군년) : 당신 얼굴 축나고, 당신의 목숨만 단축된다오.


勞勞亭(노로정)


天下傷心處(천하상심처) : 천하에서 마음 상하는 곳
勞勞送客亭(노로송객정) : 그곳은 노로라 부르는 나그네 떠나보내는 정자라네
春風知別苦(춘풍지별고) : 봄바람도 이별의 괴로움 알아
不遣柳條靑(불견유조청) : 버드나무 가지를 푸르게 하지 않는구나.


魯中都東樓醉起作(노중도동루취기작-노 중도의 동루에서 취하여 일어나 짓다)


昨日東樓醉(작일동루취) : 어제는 동루에서 취했으니
還應倒接?(환응도접리) : 분명히 두건을 거꾸로 서고 쓸어졌을 것이다
阿誰扶馬上(아수부마상) : 누사 나를 부축하여 말에 태웠나
不省下樓時(불성하루시) : 동루를 내려온 때가 생각나지 않는구나. 


遊洞庭(유동정)


洞庭西望楚江分(동정서망초강분) : 동정호 서방을 바라보니 초강이 분명하고
水盡南天不見雲(수진남천불견운) : 물 다한 남쪽 하늘에 구름 하나 없네.
日落長沙秋色遠(일락장사추색원) : 해 지자 긴 모래벌판에 가을빛 멀어져
不知何處弔湘君(부지하처조상군) : 남편 따라 죽은 상수의 여신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


憶東山(억동산)


不向東山久(불향동산구) : 동산으로 가지 못한지가 오래되었네.
薔薇幾度花(장미기도화) : 장미는 몇 번이나 꽃을 피우고
白雲他自散(백운타자산) : 흰 구름 그것은 저절로 흩어지고
明月落誰家(명월락수가) : 밝은 달은 누구의 집에 떨어졌을까


秋下荊門 (추하형문-가을에 형문을 내려가며)


霜落荊門江樹空(상락형문강수공) : 형문에 이슬이 지고 강가에 나무 나떨어지고
布帆無恙掛秋風(포범무양괘추풍) : 일없이 가을바람에 돛대를 올린다네.
此行不??魚?(차행불위로어회) : 이 여행은 농어회 때문이 아니라
自愛名山入剡中(자애명산입섬중) : 명산이 좋아서 산중에 들어가는 것이라네. 


擬古(의고)


今日風日好(금일풍일호) : 오늘은 날씨가 좋아
明日恐不如(명일공불여) : 내일은 그렇지 않을까 염려되누나.
春風笑于人(춘풍소우인) : 봄바람은 사람을 향해 웃으니
何乃愁自居(하내수자거) : 어찌 근심하면서 혼자 있겠는가?
吹簫舞彩鳳(취소무채봉) : 피리 불어 채색 봉황을 춤추게 하고
酌醴?神魚(작례회신어) : 단술을 거르고 희귀한 생선 회치게 한다.
千金買一醉(천금매일취) : 천금으로 술을 사서 한 바탕 취하여
取樂不求余(취악불구여) : 즐거움을 얻었으면 다른 것은 구하지도 않는다네.
達士遺天地(달사유천지) : 현명한 사람은 천지를 버리나니
東門有二疏(동문유이소) : 동문에 소구와 소광 두 소씨가 있었도다.
愚夫同瓦石(우부동와석) : 어리석은 남자 돌기와 같이 굳어있지
有才知卷舒(유재지권서) : 재능이 있어야 말고 펴는 법을 아는 법이라네
無事坐悲苦(무사좌비고) : 일없이 앉아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塊然?轍?(괴연학철부) : 바큇자국에 괸 작은 물의 붕어처럼 부끄럽게 굴지말자


夏日山中(하일산중)


懶搖白羽扇(라요백우선) : 깃털 부채도 권태로워
裸體?林中(라체청림중) : 푸른 숲에서 윗도리 벗는다.
脫巾掛石壁(탈건괘석벽) : 두건 벗어 바위에 걸고
露頂?松風(로정쇄송풍) : 맨머리로 솔바람 맞아본다


月下獨酌(월하독작)


三月咸陽城(삼월함양성) : 삼월의 함양성
千花晝如錦(천화주여금) : 낮이라 온갖 꽃들이 비단처럼 화려하다
誰能春獨愁(수능춘독수) : 그 누가 봄을 수심 겹다 말했나?
對此徑須?(대차경수음) : 이 꽃길을 보고 모름지기 술을 마실지어다.
窮通與修短(궁통여수단) : 궁하고 통하는 것과 길고 짧은 것
造化夙所稟(조화숙소품) : 모두 조화옹이 준 것이라네
一樽齊死生(일준제사생) : 한 동이 술이 죽음과 삶을 같게 만들고
萬事固難審(만사고난심) : 만사는 진실로 살피기 어렵다
醉後失天地(취후실천지) : 거나하게 취한 뒤로는 세상을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 올연히 베개 높이고 잠자러가노라
不知有吾身(불지유오신) : 내 몸이 있는 줄도 모르니
此樂最?甚(차악최위심) : 이런 즐거움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네.


訪戴天山道士不遇(방대천산도사불우)


犬吠水聲中(견폐수성중) : 물소리 들리는데 개는 짖어대고
桃花帶雨濃(도화대우농) : 복사꽃은 비에 젖어 곱기도 하다
樹深時見鹿(수심시견록) : 숲이 깊은 곳에서 사슴을 보고
溪午不聞鐘(계오불문종) : 계곡에는 낮이 되어도 종소리 들리지 않는구나.
野竹分?靄(야죽분청애) : 대나무는 푸른 이내를 나누고
飛泉?碧峰(비천괘벽봉) : 나는 듯한 샘물은 푸른 봉우리에 결려있도다
無人知所去(무인지소거) : 그가 간 곳을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
愁倚兩三松(수의량삼송) : 소나무 두세 그루에 근심스레 기대어본다


尋雍尊師隱居(심옹존사은거)


群?碧摩天(군초벽마천) : 여러 가파른 산봉우리 파랗게 하늘에 솟아
逍遙不記年(소요불기년) : 이곳을 소요한 햇수를 기억하지 못하겠다.
撥雲尋古道(발운심고도) : 구름을 헤치고 오래된 길을 찾아
倚石聽流泉(의석청류천) : 바다에 기대어 흐르는 물소리 듣는다.
花暖?牛臥(화난청우와) : 꽃들은 피어 따뜻한데 푸른 소가 누웠고
松高白鶴眠(송고백학면) : 소나무는 높고 그 위의 흰 학은 잠들었네.
語來江色暮(어래강색모) : 강 빛은 어두운데 사람의 말소리 들려와
獨自下寒煙(독자하한연) : 홀로 쓸쓸히 차가운 안개를 내려온다.


九日龍山歌(구일룡산가)


九日龍山?(구일룡산음) : 구일 날 용산에서 마시노니
黃花笑逐臣(황화소축신) : 누른 국화꽃 쫓겨난 신하를 비웃는구나.
醉看風落帽(취간풍락모) : 취하여 바라보니 바람에 모자가 떨어지고
舞愛月留人(무애월류인) : 춤을 추니, 아끼는 달이 사람을 머물게 하는구나.


夜下征虜亭(야하정로정)


船下廣陵去(선하광릉거) : 배는 광릉으로 내려가고
月明征虜亭(월명정로정) : 달은 정로정에 밝기만하다
山花如繡頰(산화여수협) : 산꽃은 비단옷 입은 여인의 뺨 같고
江火似流螢(강화사류형) : 강가의 고깃배 불빛은 날아다니는 반딧불 같다


客中行(객중행)


蘭陵美酒鬱金香(난릉미주울금향) : 난릉의 맛있는 술은 울금향
玉碗盛來琥珀光(옥완성래호박광) : 옥술잔에 가득 부으면 호박 빛이 나네.
但使主人能醉客(단사주인능취객) : 다만 주인이 손님을 취하게 하면
不知何處是他?(불지하처시타향) : 어느 곳이 타향인지 알 수 없게 하노라


太原早秋(태원조추)


歲落?芳歇(세락중방헐) : 한 해가 다 가니 온갖 꽃이 다 지고
時當大火流(시당대화류) : 철은 큰 불이 흐르는 때이라
霜威出塞早(상위출새조) : 일찍 변방을 나서면 서릿발이 엄하고
雲色渡河秋(운색도하추) : 구름색은 강 건너 벌써 가을이로구나.
夢繞邊城月(몽요변성월) : 꿈은 변방의 성 달을 두르고
心飛故國樓(심비고국루) : 마음은 고향의 누대로 달려간다.
思歸若汾水(사귀약분수) : 돌아가고픈 마음은 분수의 물 같아
無日不悠悠(무일불유유) : 돌아갈 날이 없어 편안하지가 않도다.


上三峽(상삼협)


巫山夾?天(무산협청천) : 무산이 푸른 하늘을 끼고
巴水流若?(파수류약자) : 파수가 이렇게 흘러가네.
巴水忽可盡(파수홀가진) : 파수가 홀연히 다할 것 같아도
?天無到時(청천무도시) : 푸른 하늘에는 이를 때가 없으리.
三朝上黃牛(삼조상황우) : 사흘 아침을 황우산으로 오르고
三暮行太遲(삼모행태지) : 사흘 저녁은 가는 것이 너무 더디구나.
三朝又三暮(삼조우삼모) : 사흘 아침 또 사흘 저녁 때
不覺?成絲(불각빈성사) : 귀밑머리가 실처럼 희어진 것도 모르겠구나.


망여산폭포수(望廬山瀑布水)

 

西登香爐峰(서등향로봉) : 서쪽으로 향로봉에 올라
南見瀑布水(남견폭포수) : 남쪽으로 폭포수를 바라본다.
掛流三百丈(괘류삼백장) : 삼백 높은 곳에 걸려 흘러
噴壑數十里(분학수십리) : 수 십리 골짜기로 뿜어져 내린다.
?如飛電來(훌여비전래) : 문득 나는 번개 같이 내리고
隱若白虹起(은약백홍기) : 숨은 것이 흰 무지개 같이 일어난다.
初驚河漢落(초경하한락) : 처음에는 은하수가 떨어지는 듯 놀라
半?雲天裡(반쇄운천리) : 반쯤은 구름 낀 하늘 속에서 떨어진다.
仰觀勢轉雄(앙관세전웅) : 올려다볼수록 그 형세 웅장하니
壯哉造化功(장재조화공) : 장쾌하다, 조화옹의 공이여
海風吹不斷(해풍취불단) : 바닷바람은 끝없이 불어오고
江月照還空(강월조환공) : 강의 달이 비춰 도리어 고요하다
空中亂?射(공중란종사) : 공중에서 어지럽게 물살이 쏟아져
左右洗?壁(좌우세청벽) : 좌우로 푸른 벽을 씻는구나.
飛珠散輕霞(비주산경하) : 구슬이 날 듯 놀이 흩어지고
流沫沸穹石(류말비궁석) : 흘러내리는 물보라 큰 바위에 용솟음친다.
而我樂名山(이아악명산) : 내가 명산을 좋아하니
對之心益閑(대지심익한) : 명산을 대하자 내 마음 더욱 한가해진다.
無論漱瓊液(무론수경액) : 옥 같이 맑은 물에 이 닦는 일 말하지 말라
且得洗塵?(차득세진안) : 때 묻은 얼굴을 씻을 만하다
且諧宿所好(차해숙소호) : 내가 좋아하던 이곳에 살고 자면서
永願辭人間(영원사인간) : 영원히 인간 세상 떠나고 싶어라


등여산오로봉(登廬山五老峰)


廬山東南五老峰(여산동남오로봉) : 여산 동남쪽 오로봉
?天削出金芙蓉(청천삭출금부용) : 푸른 하늘로 금부용 솟았네.
九江秀色可攬結(구강수색가람결) : 구강의 좋은 경색 손에 잡힐 것 같아
吾將此地巢雲松(오장차지소운송) : 나는 이곳 구름 낀 솔 나무에 집을 지으려네. 


두릉절구(杜陵?句)


南登杜陵上(남등두릉상) : 남쪽으로 두릉 위에 오르며
北望五陵間(북망오릉간) : 북쪽으로 오릉 사이를 바라본다.
秋水明落日(추수명락일) : 가을 물에 지는 해는 밝고
流光滅遠山(류광멸원산) : 흐르는 빛에 먼 산이 사라진다.


앵무주(鸚鵡洲)


鸚鵡來過吳江水(앵무래과오강수) : 애무새가 날아와 오강의 물을 지나니
江上洲傳鸚鵡名(강상주전앵무명) : 강 위의 모래섬을 앰무주라 이름 전하네.
鸚鵡西飛?山去(앵무서비롱산거) : 앵무주 서쪽을 날아 농산으로 갔지만
芳洲之樹何??(방주지수하청청) : 무성한 모래섬의 수목은 어찌 이리도 푸른가.
煙開蘭葉香風暖(연개란엽향풍난) : 연기 걷히자 따뜻한 바람 난초 잎 향기 풍겨오고
岸夾桃花錦浪生(안협도화금랑생) : 양 언덕의 복사꽃 비단 물결 이는구나.
遷客此時徒極目(천객차시도극목) : 이러한 때, 떠도는 나그네 부질없이 눈을 치뜨니
長洲孤月向誰明(장주고월향수명) : 긴 모래섬에 외로운 달은 누구를 향하여 밝은가


망천문산(望天門山)


天門中斷楚江開(천문중단초강개) : 천문산을 가운데로 초강이 나누어지고
碧水東流至此回(벽수동류지차회) : 푸른 물은 동으로 흘러 이곳에서 돌아가네.
兩岸?山相對出(량안청산상대출) : 양 언덕 푸른 산이 마주보고 나와
孤帆一片日邊來(고범일편일변래) : 외로운 돛단배 하나 햇빛 쪽으로 다가오네. 

 

註(주)

(1) 천문산 : 중국 양자강 가에 있는 산. 박망산(博望山)과 양산(梁山)이 마주보고 문처럼 서 있기 때문에 함께 천문산이라고 부름.
(2)중단 : 가운데를 자름. 즉 박망산과 양산 사이로 양자강이 흐르고 있음을 말함.
(3)지차 : 여기에 이르러. 차는 천문산을 가리킴.
(4) 초강 : 양자강.
(5)일변 : 해 주변, 하늘 가. 박망산과 양산 사이로 멀리 아득히 보이는 양자강 상류쪽은 하늘과 맞닿아 있고,

그쪽에서 범선 한 척이 물따라 흘러 내려오고 있음.


사공정(謝公亭)


謝公離別處(사공리별처) : 사공이 떠난 곳
風景每生愁(풍경매생수) : 그 풍경이 매번 수심을 자아낸다.
客散?天月(객산청천월) : 객이 다 떠나고 푸른 하늘에 달만 남아
山空碧水流(산공벽수류) : 산은 비고 푸른 물은 흘러만 간다.
池花春映日(지화춘영일) : 못에 가득한 꽃들 따뜻한 봄볕에 빛나고
?竹夜鳴秋(창죽야명추) : 창 앞 대나무는 밤에 가을소리를 내는구나.
今古一相接(금고일상접) : 옛날과 오늘이 하나로 끝없이 이어지니
長歌懷舊游(장가회구유) : 길게 노래하며 옛 놀던 일 생각하노라


중억(重憶)


欲向江東去(욕향강동거) : 강동을 향해가고 싶으나
定將誰?杯(정장수거배) : 진정 누구와 술잔을 들리오.
稽山無賀老(계산무하로) : 계산에는 하노인 없으니
?棹酒船回(각도주선회) : 도리어 노 저어 술 배 돌아온다.


대설헌종형우성재(對雪獻從兄虞城宰-눈을 보면서 우성고을 수령으로 있는 사촌 형에게)


昨夜梁園裡(작야량원리) : 어젯밤 양원에서
弟寒兄不知(제한형불지) : 아우가 추웠음을 형은 몰랐지요.
庭前看玉樹(정전간옥수) : 뜰 앞에서 눈 덮인 나무를 보고
腸斷憶連枝(장단억련지) : 형님을 생각하니 애가 끊어져요


취후증종생고진(醉後贈從甥高?-취하여 종생질 고진에게 주다)


馬上相逢揖馬鞭(마상상봉읍마편) : 말위에서 서로 만나 말채찍으로 서로 인사하고
客中相見客中憐(객중상견객중련) : 서로보고 객중에서 서로를 애련하게 여기네.
欲邀擊筑悲歌?(욕요격축비가음) : 격축가에 맞춰 슬픈 노래 부르려 해도
正?傾家無酒錢(정치경가무주전) : 마침 집안 살림 기울어 술살 돈 한 푼도 없다네.
江東風光不借人(강동풍광불차인) : 강동의 풍광을 사람에게 빌려주지 않고
枉殺落花空自春(왕살락화공자춘) : 죽여 떨어진 꽃잎 공연히 스스로 봄을 알리네.
黃金逐手快意盡(황금축수쾌의진) : 황금은 손에 닿는 대로 마음껏 다써버려
昨日破?今朝貧(작일파산금조빈) : 어제는 파산하고 오늘은 가난해졌다네.
丈夫何事空嘯傲(장부하사공소오) : 대장부 무슨 일로 공연히 오기를 부리는가?
不如燒?頭上巾(불여소각두상건) : 차라리 머리 위의 모자 불태우는 것만 못하다네.
君?進士不得進(군위진사불득진) : 자네는 진사가 되었어도 벼슬 얻지 못하고
我被秋霜生旅?(아피추상생려빈) : 나는 가을 서리 맞아 흰 머리털만 남았다네.
時?不及英豪人(시청불급영호인) : 시대 맑아도 재주 있고 호방한 이 미치지 못하니
三尺童兒重廉藺(삼척동아중렴린) : 삼척동자 도 염파와 인상여를 중히 여긴다네.
匣中盤劍裝?魚(갑중반검장작어) : 칼집 곡에 든 상어가죽 반검 칼
閑在腰間未用渠(한재요간미용거) : 한가히 허리에 있어 한 번도 써보지 못하네.
且將換酒與君醉(차장환주여군취) : 정차 술과 바꿔 그대와 취하여
醉歸托宿吳專諸(취귀탁숙오전제) : 취한 뒤 오전제에게 부탁하려네.


贈漢陽輔錄事(증한양보녹사)


鸚鵡洲橫漢陽渡(앵무주횡한양도) : 앵무주는 한양 나루터에 비껴 있고
水引寒煙沒江樹(수인한연몰강수) : 물은 쓸쓸한 연기 끌어와 강가 나무에 자욱하네.
南浦登樓不見君(남포등누부견군) : 남포에서 누각에 올라도 그대가 보이지 않으니
君今罷官在何處(군금파관재하처) : 그대는 지금 벼슬에서 물러나 어느 곳에 있는가?
漢口雙魚白錦鱗(한구쌍어백금린) : 한구의 한 쌍 물고기 하얀 비단 비늘
令傳尺素報情人(령전척소보정인) : 편지를 전해 정든 사람에게 보내노라
其中字數無多少(기중자삭무다소) : 그 중에 글자 수는 많고 적음이 없으니
只是相思秋復春(지시상사추복춘) : 이 곧 그대를 그리워하는 가을과 또 봄이여 


贈盧司戶(증노사호)


秋色無遠近(추색무원근) :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천지가 가을빛
出門盡寒山(출문진한산) : 문을 나서면 모두 다 쓸쓸한 산이로구나.
白雲遙相識(백운요상식) : 흰 구름이 멀리서 알고서
待我蒼梧間(대아창오간) : 나를 창오 고을에서 기다리는구나.
借問盧耽鶴(차문노탐학) : 노탐학에게 묻노니
西飛幾歲還(서비궤세환) : 서쪽으로 날아가 어느 해에 돌아오려나?


別東林寺僧(별동림사승)


東林送客處(동림송객처) : 동림에서 객을 보내는 곳
月出白猿啼(월출백원제) : 달뜨고 흰 잔나비 우네.
笑別廬山遠(소별려산원) : 웃으며 떠남에 여산이 멀어지니
何煩過虎溪(하번과호계) : 어찌 호계를 지나는 걸 꺼려하리오.


流夜郎贈辛判官(류야낭증신판관-야랑에 유배되어 신판관에게)


昔在長安醉花柳(석재장안취화류) : 지난날 장안 있으며 꽃과 버들에 취해
五侯七貴同杯酒(오후칠귀동배주) : 오후칠귀 들과 술 마시며 놀았다네.
氣岸遙凌豪士前(기안요능호사전) : 기상은 호걸들을 훨씬 능가하였고
風流肯落他人後(풍류긍낙타인후) : 풍류야 남에게 뒤지려 했을까보냐
夫子紅顔我少年(부자홍안아소년) : 그대는 아직 홍안이었고 나도 소년
章台走馬著金鞭(장태주마저금편) : 장안 번화가 당대에 말 달려 금채찍도 드날렸네.
文章獻納麒麟殿(문장헌납기린전) : 문장을 써 기린전에 올리며 궁전 드나들고
歌舞淹留玳瑁筵(가무엄류대모연) : 춤과 노래 대모 깐 자리에도 앉아보았다네
與君自謂長如此(여군자위장여차) : 그대와 이렇게만 되자고 하였건만
寧知草動風塵起(녕지초동풍진기) : 풀잎 움직이고 바람에 풍진 일어날 줄 알았으랴
函谷忽驚胡馬來(함곡홀경호마내) : 함곡관에서 호마가 온 것에 홀연히 놀라
秦宮桃李向明開(진궁도리향명개) : 진궁에 복사꽃 오얏꽃은 해를 향하여 피었네.
我愁遠謫夜郎去(아수원적야낭거) : 나는 지금 멀리 야랑으로 유배되어 가니


송륙판관왕비파협(送陸判官往琵琶峽-육판관을 보내어 비파협을 다녀오게 하다)


水國秋風夜(수국추풍야) : 가을바람 불어오는 섬의 밤
殊非遠別時(수비원별시) : 특히 멀리 떠나는 때는 아니어라
長安如夢裡(장안여몽리) : 장안의 일은 꿈속 같은데
何日是歸期(하일시귀기) : 어느 때가 곧 돌아갈 때인가


부득백로사송송소부입삼협(賦得白鷺?送宋少府入三峽-백로사를 얻어 송소부에게 주어 삼협에 든 것을 젓다)


白鷺拳一足(백로권일족) : 백로가 한 쪽 발을 들고 서있고
月明秋水寒(월명추수한) : 달은 밝고 가을 물은 차기만 하다
人驚遠飛去(인경원비거) : 사람에게 놀란 백로 멀리 날아가다가
直向使君灘(직향사군탄) : 바로 사군탄 여울을 향하는구나.


송저옹지무창(送儲邕之武昌-저옹이 무창 가는 것을 전송하다)


黃鶴西樓月(황학서루월) : 황학루 서쪽 누각의 달
長江萬里情(장강만리정) : 긴 강은 만리의 마음이라
春風三十度(춘풍삼십도) : 봄바람d; 서른 번을 불어
空憶武昌城(공억무창성) : 공연히 무창성만 생각나네.
送爾難?別(송이난위별) : 너를 보내려니 이별이 이리도 어려워
銜杯惜未傾(함배석미경) : 술잔을 들고 차마 기울이지 못하네.
湖連張樂地(호련장악지) : 호수는 장락지로 이어지고
山逐汎舟行(산축범주행) : 산을 쫓아 배를 띄워간다네
諾?楚人重(낙위초인중) : 한번 약속을 초인은 귀중히 여겨
詩傳謝??(시전사조청) : 시는 사조의 맑은 가락을 전하네.
滄浪吾有曲(창랑오유곡) : 창랑 맑은 물에 내 노래도 있으니
寄入棹歌聲(기입도가성) : 뱃노래 소리에 부쳐 보낸다네.


곡선성선양기수(哭宣城善釀紀?-선성 선양기 노인을 곡하다)


紀?黃泉裡(기수황천리) : 기가 늙은이가 죽어 황천에 가서도
還應釀老春(환응양로춘) : 그곳에서도 응당 노춘수를 빚을 것이네
夜臺無曉日(야대무효일) : 밤 누대에 밝은 해, 곧 나 이백이 없으니
沽酒與何人(고주여하인) : 어느 누구에게 술을 팔 것인가


고의(古意)


君?女蘿草(군위녀라초) : 그대는 여라초가 되고
妾作?絲花(첩작토사화) : 저는 토사화가 되었습니다.
輕條不自引(경조불자인) : 가벼운 줄기 스스로 가누지 못하여
?逐春風斜(위축춘풍사) : 봄바람에 쫓겨 기울어지는구나.
百丈托遠松(백장탁원송) : 백 길이나 높은 소나무에 걸려
纏綿成一家(전면성일가) : 얽히고 얽혀서 한 가족이 되었구나.
誰言會面易(수언회면역) : 누가 서로 만남이 쉽다고 말하나
各在?山崖(각재청산애) : 각각 청산의 절벽에 있다가
女蘿發馨香(녀라발형향) : 여라는 그윽한 향기 내 뿜고
?絲斷人腸(토사단인장) : 토사는 남의 애간장만 녹이는 것을
枝枝相糾結(지지상규결) : 가지마다 서로 얽혀있고
葉葉競飄揚(엽엽경표양) : 잎마다 다투어 떨어져 나부낀다.
生子不知根(생자불지근) : 새끼를 쳐도 그 뿌리는 알지 못하니
因誰共芬芳(인수공분방) : 누구와 함께 번영을 같이하리오.
中巢雙翡翠(중소쌍비취) : 가운데는 한 쌍의 비취새 둥지를 틀고
上宿紫鴛鴦(상숙자원앙) : 위에는 자색 원앙새가 잠들어있네
若識二草心(약식이초심) : 만약 두 풀의 마음을 알 수 있다면
海潮亦可量(해조역가량) : 넓은 바다의 조수 물도 알 수가 있을 텐데


장문원(長門怨)


天回北斗掛西樓(천회북두괘서루) : 하늘에는 북두칠성 돌아 서편에 걸리고
金屋無人螢火流(금옥무인형화류) : 황금 집안에는 사람은 없고 반딧불 빛만 흐른다.
月光欲到長門殿(월광욕도장문전) : 달빛은 장문전에 비춰들고
別作深宮一段愁(별작심궁일단수) : 특별히 깊은 궁궐에는 일단의 수심이 깊어진다.

桂殿長愁不記春(계전장수불기춘) : 계수나무 궁궐에선 긴 수심에 봄도 모르고
黃金四屋起秋塵(황금사옥기추진) : 황금빛 네 집에서 가을 티끌 일어나는구나.
夜懸明鏡?天上(야현명경청천상) : 밤 되어 푸른 하늘에 밝은 거울 걸리어
獨照長門宮裡人(독조장문궁리인) : 홀로 길게 장문궁궐 속사람을 비추는구나.


맥상증미인(陌上贈美人)


駿馬驕行踏落花(준마교행답락화) : 준마는 아장걸음 걸어서 떨어진 꽃 밟고
垂鞭直拂五雲車(수편직불오운차) : 소년은 채찍 내려 오운거를 스쳐보네.
美人一笑?珠箔(미인일소건주박) : 주렴을 걷고서 미인이 한 번 웃으며
遙指紅樓是妾家(요지홍루시첩가) : 붉은 다락 저곳이 저의 집이라 멀리 손짓하네.


춘원(春怨))


白馬金羈遼海東(백마금기료해동) : 황금 굴레 갖춘 백마 타고 임은 요동 가버려
羅?繡被臥春風(라유수피와춘풍) : 비단 휘장 수놓은 이불에 봄바람이 드러눕는다.
落月低軒窺燭盡(낙월저헌규촉진) : 처마 아래 지는 달은 꺼져가는 촛불 엿보는데
飛花入戶笑床空(비화입호소상공) : 꽃잎도 안방에 날아들어 빈 잠자리 비웃는다.


월녀사(越女詞)


吳兒多白?(오아다백석) : 오나라 여인은 살결이 희고
好?蕩舟劇(호위탕주극) : 배 젓는 놀이를 좋아한다네.
賣眼擲春心(매안척춘심) : 추파를 던져 유혹을 하니
折花調行客(절화조행객) : 꽃을 꺾어 손님을 조롱하네.

鏡湖水如月(경호수여월) : 달빛처럼 맑은 경호의 물
耶溪女似雪(야계녀사설) : 눈빛처럼 흰 피부 야계의 여인
新?蕩新波(신장탕신파) : 단장한 새 모습 물결에 흔들리어
光景兩奇?(광경량기절) : 그 모습 모두가 너무나도 어울리네.


파녀사(巴女詞)


巴水急如箭(파수급여전) : 파수는 화살처럼 급하고
巴船去若飛(파선거약비) : 파선은 날아가듯 떠간다.
十月三千里(십월삼천리) : 시월에는 삼천리나 내겨가는데
?行幾歲歸(랑행기세귀) : 낭군님은 어느 해나 돌아오시려나.


조노유(嘲魯儒)


魯?談五經(노수담오경) : 노나라 노인이 오경을 이야기하며
白髮死章句(백발사장구) : 백발이 되도록 글 구절만 논하다가 죽었다네.
問以經濟策(문이경제책) : 나라와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물으면
茫如墜煙霧(망여추연무) : 안개와 연기 속에 떨어진 듯 멍한 표정이네
足著遠游履(족저원유리) : 발에는 먼 길 가는 나그네 신발을 신고
首戴方山巾(수대방산건) : 머리에는 상산건을 두르고 있다네.
緩步從直道(완보종직도) : 느긋하게 걸으며 곧은길을 따른다하고
未行先起塵(미행선기진) : 걷기도 전에 먼지부터 일으킨다네.
秦家丞相府(진가승상부) : 진나라 승상부에서는
不重褒衣人(불중포의인) : 선비들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네.
君非叔孫通(군비숙손통) : 그대는 숙손통을 옳지 않다하는가
與我本殊倫(여아본수륜) : 나와는 본래 다른 무리라네.
時事且未達(시사차미달) : 세상일에 아직도 통달하지 못하니
歸耕汶水濱(귀경문수빈) : 문수 물가에 돌아가 농사나 짓게나그려.


초출금문심왕시어불우영벽상앵무(初出金門尋王侍御不遇詠壁上鸚鵡

-금문에 처음 나와 왕시어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벽위의 앵무를 읊다)


落羽辭金殿(낙우사금전) : 떨어진 깃이 금전을 떠나
孤鳴?繡衣(고명타수의) : 외로운 학이 울며 어사에게 의탁했었소.
能言終見棄(능언종견기) : 능히 말할 수 있으되 끝내 버림을 당하여
還向?西飛(환향롱서비) : 도리어 농서를 향해 달아난다오.


관방백응(觀放白鷹)


八月邊風高(팔월변풍고) : 팔월이라 변방의 바람은 높고
胡鷹白錦毛(호응백금모) : 오랑캐 매는 하얀 비단 빛 털이어라
孤飛一片雪(고비일편설) : 한 조각 눈처럼 외로이 날아
百里見秋毫(백리견추호) : 백리나 떨어져도 털이 다 보이는구나.

寒冬十二月(한동십이월) : 십이월 차가운 겨울에
蒼鷹八九毛(창응팔구모) : 여덟아홉 털을 가진 메기 푸른 하늘을 난다
寄言燕雀莫相?(기언연작막상탁) : 말 전하노니, 제비와 참새여 서로 쪼아대지 말라
自有雲?萬里高(자유운소만리고) : 저 먼 구름 낀 하늘까지 말리나 높이 난 새 있다


백로사(白鷺?)


白鷺下秋水(백로하추수) : 흰 해오라기 맑은 가을 물에 내려
孤飛如墜霜(고비여추상) : 서리 떨어지듯 외롭게 나는구나.
心閑且未去(심한차미거) : 마음이 편안하여 떠나려 하지 않고
獨立沙洲旁(독립사주방) : 모래섬 곁에서 홀서 서있구나

 

淸平調詞 (청평조사 :청평조의 노래)

 

雲想衣裳花想容 (운상의상화상용) : 구름에서는 의상을 연상하고 꽃에서는 그 모습을 연상한다.
春風拂檻露華濃 (춘풍불함노화농) : 봄바람은 난간을 스치고 모란을 적시는 이슬이 빛난다. 
若非群玉山頭見 (약비군옥산두견) : 만약 이런 미인을 군옥산에서 만나 뵙지 못한다면,
會向瑤臺月下逢 (회향요대월하봉) : 선녀의 세상인 요대에서나 만나 뵈오리다.

 

註(주) 

(1) 淸平調(청평조) : 청조와 평조 두 가지를 합친 이름. 
(2) 檻(함) : 궁전의 난간. 
(3) 露華(노화) : 아름다운 이슬. 
(4) 濃(농) : 요염하고 아름답다. 
(5) 군옥산 : 옥산이라고도 하는데 전설상의 이름. 아름다운 서왕모가

사는 곳. 
(6) 會(회) : 반드시.... 할 것이다.  
(7) 瑤臺(요대) : 전설상의 신선이 사는 곳. 

 

[해설] 
당나라 때 현종의 명에 의해서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3수의 연작시 가운데 첫번째 詩.

그때 李白은 술에 잔뜩 취한 상태였으나 즉시에 주옥같은 시를 지어 올려 현종을 놀라게 했다.

이 詩를 노래한 이는 당시의 명창 이구년(李龜年)이었고, 그 노래의 곡에 맞추어 현종 자신이 직접 피리를 불었다고 한다.   

 
客中作 (객중작 : 나그네 길에

 

蘭陵美酒鬱金香 (난릉미주울금향) : 난릉의 좋은 술은 울금향같은 향기를 풍기고 
玉椀盛來琥珀光 (옥완성래호박광) : 아름다운 잔에 부으면 호박색으로 빛난다. 
但使主人能醉客 (단사주인능취객) : 오직 주인이 길손인 나를 취하게만 해 준다면 
不知何處是他鄕 (부지하처시타향) : 대체 어디가 타향이랴, 내 고향이나 다름없다. 

 

註(주) 
(1) 客中(객중) : 여행 도중에 
(2) 蘭陵(난릉) : 산동성의 지명. 술의 주산지. 
(3) 鬱金香(울금향) : 향료가 되는 풀의 이름. 여기서는 향기로운 술. 
(4) 玉椀(옥완) : 아름다운 잔. 
(5) 琥珀(호박) : 송진이 화석화한 황색의 광물. 
(6) 但使(단사) : 오직....하기만 한다면

 

宣州 謝眺樓 餞別 校書 叔雲 (선주 사조루 전별 교서 숙운 : '선주'땅 '사조루' 樓閣에서 '교서 숙운'과 헤어지며)
- 당(唐)나라 시선(詩仙) '李白(이백)'이 '宣州(선주)에 있는 '謝眺樓(사조루)'에서 校書(교서)벼슬의 '叔雲(숙운)'을 전별(餞別)하고 쓴 시(詩) -

棄我去者(기아거자) 昨日之日不可留(작일지일불가류)
나를 두고 떠나가는 것, 어제처럼 지나간 시간은 붙잡아 둘 수 없으니
亂我心者(난아심자) 今日之日多煩憂(금일지일다번우)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 오늘 하루도 온통 번민과 걱정 뿐이로세.

長風萬里送秋雁(장풍만리송추안)
만리 먼길 가을 바람결에 기러기 날아가니
對此可以감高樓(대차가이감고루)
이럴 땐 높은 누각에 올라 마음껏 취해보리라.

蓬萊文章建安骨(봉래문장건안골)
'봉래' 같이 뛰어난 문장력, '건안'과 같은 풍모(의 숙운叔雲)
中間小謝又淸發(중간소사우청발)
그 가운데 '소사'(의 詩)처럼 또 뚜렷이 빛을 발하네.
俱懷逸興壯思飛(구회일흥장사비)
뜨거운 열정 함께 품고 원대한 포부 비약하니
欲上靑天攬日月(욕상청천람일월)
푸른 하늘에 올라 해와 달을 잡고 싶구나.

抽刀斷水水更流(추도단수수갱류)
칼을 뽑아 물을 베어본들 강물은 계속 흐르듯이
擧杯消愁愁更愁(거배소수수갱수)
술잔을 들어 근심을 잊으려해도 시름은 더해만 가네.

人生在世不稱意(인생재세불칭의)
사람의 세상살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明朝散髮弄扁舟(명조산발롱편주)
내일 아침엔 머리 풀고 조각배나 띄우리라.

[참고]

1) 宣州(선주): 지명, 지금의 '안후이(安徽)성 쉔청(宣城)현'.  
2) 謝眺樓(사조루): 누각(樓閣) 이름, '육조(六朝)시기' 선주(宣州)의 태수(太守)로 있던 '謝眺(사조)'가 세움.
3) 육조(六朝) AD 229~589년: 삼국시대의 '吳(오), 東晉(동진)'과 남조(南朝)의 '宋(송), 齊(제), 梁(양), 陳(진)'을 통틀어 이르는 말.
4) 謝眺(사조:AD 464~499년): '대사(大謝)'라 불리는 '사령운(謝靈雲:AD 385~433년)'과 함께 '소사(小謝)'라 불린 '위진 남북조시기'의 '사씨(謝氏)' 성을 가진 두 명의 저명한 시인 중 한 사람.
5) 校書(교서): 서책(書冊)을 검열하는 직책의 벼슬 이름, 정식 관직 명칭은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郞)'임.
6) 叔雲(숙운): 이름은 '이운(李雲)', '李白(이백)'이 '숙운(叔雲)'이라 부름은 같은 집안의 아재비뻘 되는 사람, 즉 족척(族戚)이기 때문.
7) 餞別(전별):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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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촌(呈坎村 청칸춘 Chengkan)


안후이성(安徽省) 황산시(黄山市) 후이저우구(徽州区, 휘주구) 북부에 위치한

청칸진(呈坎镇, 정감진)의 촌급 행정구로 2008년 중국역사문화명촌(4차)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휘파문화(徽派文化) 예술이 결합된 전범(典范)인 이 촌락은

산과 물에 의지하여 건립되었으며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주희(朱熹)가 “정감쌍현리(呈坎双贤里), 강남제일촌(江南第一村)”이라고 칭한 이 촌락은

후이저우구(徽州区) 북부, 205국도로부터 불과 5㎞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칸향(呈坎乡, 정감향) 정부 소재지이다.

 

청칸촌(呈坎村)은 동한(东汉) 삼국시기에 건립되었다.

역경(易经)의 음양팔괘(阴阳八卦) 이론에 따른 배치로 양(阳)은 정(呈)이며 음(阴)은 감(坎)으로

당 말에 청칸(呈坎, 정감)으로 개명되었다.

 

송대에는 나천질(罗天轶)과 나천칭(罗天秤) 형제가 예장(豫章)으로부터 이곳으로 와 정착하며 나씨 가문의 선조가 되었고

명대 중엽 나씨 문중은 촌락과 중천하(众川河)에 대해 대규모의 공사를 단행하여

산과 물에 둘러싸인 이상적 공간 환경을 갖춘 촌락의 구조를 형성하였다.

 

1,8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이 촌락은 현재 2,7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며

휘파(徽派) 고건축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촌락의 하나이다.

 

청칸촌(呈坎村)은 보존이 잘 되어 있고

풍격이 각기 다른 정(亭), 대(台), 루(楼), 각(阁), 교(桥), 정(井), 사(祠), 사(社) 및 민거(民居)로 이루어져 있다.

 

이 촌락은 3가 99항(三街九十九巷, 3개 거리 99개 골목)이라는 칭호를 지니며 현재 청대 민거 200여 동,

명대 민거 30여 동이 있고 골목과 큰 거리는 대체적으로 수직으로 나 있으며 화강암으로 포장되어 있다.

이 중 나동서사(罗东舒祠)와 청칸촌(呈坎村) 고건축군(古建筑群)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경내의 장춘사(长春社)는 청칸나씨(呈坎罗氏, 정감나씨) 및 부근 촌락의 오(吴), 호(胡) 등 여러 성씨가

토지신, 오곡신(五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장소로 봄에는 일 년 동안 적기에 바람이 불고 때맞추어 비가 내리기를 빌었으며 가을에는 오신(娱神), 주신(酬神)에게 수확의 감사함을 제사지내던 장소였다.

 

이 사당의 규모는 매우 크고 정문(正门), 정당(正堂), 침전(寝殿) 및 좌우 무랑(庑廊)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축공예가 장중하고 경건하여 고대 조상과 신령을 숭앙하고 공경하던 옛 사람들의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다.

 

청칸(呈坎, 정감)은 역사상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송대 용도각(龙图阁) 대학사(大学士), 이부상서(吏部尚书) 나여즙(罗汝楫)과 그 아들인 나원(罗愿) 및 양저우팔성(扬州八怪)의 하나인 나양봉(罗两峰)이 이곳 출신이다.

 

 

 

 

 

 영흥호(永兴湖)


동한(東漢)부터 남송(南宋)시기 정감촌의 수구(水口)이고 풍수지리학에 지호(地戶, 물이 모이는 곳)로 불리우며,

물이 모여 재물이 쌓인다는 의미로 옛날부터 천문이 열려야 재물이 마을로 들어오고

지호에 물이 모여야 재물이 수구로 모인다고 천여 년 동안 정감촌의 흥성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송영길 전 인천시장과 함께. 


2014년 전국지방자치제 선거에서 인천시장 재선에 출마 후 낙선하자마자 곧바로 연구활동을 위해서

중국 칭화대학교(淸華大學)에 머물러 왔다고 한다.


우리 일행과는 황산 공항에서 합류했다.

학교 후배로 송 시장이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을 적부터 인연을 맺어 온 사이여서 각별하게 반가웠다.

 

 

 평안감(平安坎) 정감팔괘마을 ㅡ 천신만고를 이겨내어 생겨진 마을이라는 뜻으로 중국풍수에 관한 건축교재이기도 하다.

 

 

 팔괘도(八卦圖) 정감 팔괘촌의 자연환경은 천연 팔괘도를 형성한다.


정감촌 주위는 8개의 산봉우리로 둘러쌓여 선천팔괘로 불리운다.

촌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S"자 모양의 하천이 마을을 질러 흐름으로 팔괘음양의 흑백 분계선을 형성한다.

 

주택 집은 대부분 목조 건물 2층으로 되어 있다. 중국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천정(天井) 이것이 바로 천정의 전형이다.


햇빛은 물론이거니와 비가 오면 빗물이 마당으로 들어와 물을 받아 쓰도록 설계되어 있다.

옛 휘주인들은 집을 지을 때 색채의 조화에 특히 신경을 써서 흰 벽체에 검은 기와가 청산녹수 속에 있으면 안온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건물마다 지붕에 구멍을 뚫고 집안에 마당을 만들었는데

이런 건물들에서는 밖에 나가지 않고도 낮에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고 밤에는 달과 별 또한 볼 수 있다.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두 마당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옛날 휘주인들은 비는 금을 의미하고 눈은 은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붕에 뚤린 구멍을 통해서 비와 눈이 마당에 떨어지는 것은 부(富)가 집에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실내의 기온조절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습도를 높여주는 역할도 한다.

 

 

ㅁ자형의 2층 가옥.


이 집들은 밖에서 보면 아래층에는 창문이 없고 2층과 3층에 조그만 창이 나 있다.

옛 휘주의 여성들은 절개를 소중히 여겨서 외간 남자를 함부로 집에 들이지 않았다.

바깥에서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2층이나 3층 조그만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아는 사람인지 확인 후 문을 열어 주었다.


특이한 점은 이미 명 청대에 2층 3층의 목조 가옥을 짓고 오늘날까지 남아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

한옥과는 달리 온돌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당시 중국의 건축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발용 의자?

가이드의 설명으로 100 여 년 전 외국에서 들여온 이발용 의자라는데...

1층에는 방이 없고 손님을 맞이하는 거실이 있다.

 

 

 

 

천정에서 빗물이 떨어지면 이곳으로 모여든다. 여름에는 에어콘 역할도 한다고.

 

 

 정정나동서선생사(貞靖羅東舒先生祠)

 고건축학자 나철문(羅哲文, 1924~2012) 서.

 

나동서(羅東舒)는 송나라 말기와 원나라 초기의 학자로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가난한 친척들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세심한 고증을 거쳐 족보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완하는 등 가문에 기여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3대 70년에 걸친 대공정 끝에 1617년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때 사당을 완공하였는데,

이는 민간 사당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경우이다.


개인 이름의 사당이지만 나동서뿐 아니라 나씨 후대의 제사도 함께 지내며 여자들을 위한 사당, 곧 여사(女祠)도 축조된 것이 특징이다.

부지면적은 약 3000㎡이고, 건축면적은 약 2000㎡이다.


주요 건축물은 조벽(照壁)·영성문(欞星門)·좌우비정(左右碑亭)·의문(儀門)·곁채·배대(拜臺)·향당(享堂)·후침(後寢) 등이다.

중축선(中軸線)이 분명하고 건물의 분포가 좌우로 대칭되어 치밀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영성문은 나무 울타리로 된 패방식(牌坊式) 대문으로, 조벽과 더불어 하나의 전정(前庭)을 이룬다.

의문은 영성문 안 쪽에 있으며, 정면 폭이 7칸 26.5m, 안 길이 10m, 높이 9.5m로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의문을 지난 정원을 거쳐 향당에 이른다.

정원의 동서 양쪽에 있는 곁채에는 약 1000개의 고대 편액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시기에 대부분 파손되고 지금은 30여 개만 보존되어 있다.


주 건물인 향당은 정면 폭이 5칸에 25.6m이고, 안 길이는 7칸에 22.5m, 용마루까지 높이는 13.6m이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일 뿐 아니라 가문의 일을 의논하고 공신과 명족을 접대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보륜각(寶綸閣)


보륜각(宝纶阁)은 정감촌에서 가장 큰 건물로 명나라 가정(嘉靖) 21년(1542)에 건립되었고

침전(寝殿)의 대들보상의 채색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민간 채색의 진품이며 명대 고건축의 정수이다.

금사난목 기둥 1주의 가격이 3억 위안이라는 가이드의 설명.


후침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11칸으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트러스(truss)와 지붕받침, 도리, 기둥머리 등에 보존된 명나라 때의 채색화로 더 유명하다.

향당 남쪽에 있는 여사는 면적이 160㎡으로 남사(男祠) 규모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여 남존여비의 관념을 드러낸다.

 

 

보륜각(寶綸閣) 명말 서예가 오사홍(吳士鴻) 서.

 

 

 

 이륜유서(彛倫攸叙)

 동기창(童其昌 1555~1636) 서. 윤리가 일정하게 베풀어진다.

 

 

 

 마을을 빠져 나오자 S자 모양으로 흐르는 큰개울이 있다.

 

 

 

 

 

 

 개울가에는 빨래터가 있어 빨래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자기의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해서 관광객이 사진 찍는 것을 무척 싫어한단다. 주의해야 할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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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주고성경구(徽州古城景区)는 중국역사문화도시 흡현의 핵심이며 휘주부 소재지로서 산수가 아름다워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경구내 고민가 촌락은 구조가 아름답고 고대의 다리, 탑, 거리, 골목길, 제방, 패방들이 잘 어울려서 소박한 풍채을 보여주며 마치 호장한 박물관과 같다.

휘주고성경구 6개 관광지: 동방개선문—허국석방,   휘주고성표지—휘주부,   강남제일거리—두산가.   휘상의근원 – 어량고항,   휘주대관원- 휘원,   전국애국주의교육기지 –토싱즈기념관.   http://blog.daum.net/choemh/16140891

 

 

  

 

 

 

 

 

 휘주고성경구(徽州古城景区)관람도     http://www.guhuizhouta.com/


 

 휘주부서(徽州府署) 휘주부 관아

 

 

 


명경고현(明鏡高懸) 높게 매달려 있는 맑은 거울 - 오장육부가 훤히 비춰보이는 거울이라는 뜻

 

시비(是非)를 분명하게 따져 판단하는 공정무사(公正無私 : 사심없이 공평하게 처리함)한 법관을 비유함.

한(漢)나라 때의 괴담이나 전설, 일화 등을 수록한 서경잡기(西京雜記) 3권에는 진(秦)나라 때의 신기한 거울(鏡 경)

이야기가 실려있다.

진(秦)나라의 함양(咸陽)궁(宮)에 소장된 진귀한 보물 가운데, 너비가 4(四尺 : 1m 20Cm), 높이가 59

(五尺九寸 : 1m 77Cm) 앞뒷면이 모두 밝게 빛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그 앞에 서면 거울에는 그 모습이

거꾸로 선 모습이 나타나고, (- 옛날의 사진기는 파인더를 들여다 보면 피사체가 거꾸로 보였다는~)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비춰보면 그 사람의 오장(五腸 : 폐. 심장. 비장. 간장. 신장)이 나타나는 거울이었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이 비추면 몸의 환부(患部)가 나타나 병을 알아보아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신기한 거울이었고

심지어는, 사람이 품고 있는 흉중(胸中 : 가슴 속)에 있는 심보(心褓)까지 알 수 있어 함부로 나설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인 거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진시황(秦始皇)은 이 거울을 이용하여 궁궐 안의 모든 사람들의 충성심을 비춰 확인하였는데 특히 면전

(面前)에서 심장이나 쓸개가 급히 뛰는 사람을 발견하면 진시황은 즉각 그를 체포하여 심문(尋聞)하고 처벌했더란다.

그러나, 이 거울은 진나라 말기(末期)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을 공격하던 혼란 와중에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大學士 허국(許國)  1527~1596

휘주부() 흡현() 사람으로 자는 유정()이다. 명()나라 때의 대신()이다.

가정() 44년(1565)에 진사() 출신으로 벼슬은 검토(), 국자감제주(), 태상시경(), 첨사(), 예부시랑(), 이부시랑(), 예부상서(), 동각대학사(), 태자태보(), 무영전대학사(殿) 등을 역임했다. 일찍이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시호는 문목()이다. 저서로 《허문목공집()》이 있다.

허국석방(許國石坊)은 흡현시내에 위치하며 중국내에서 보기드문 전형적인 명대 석방형식의 건물이다. 1584년도에 처음 지어졌으며 8개의 기둥이 口자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八脚牌楼(팔각패루)"라고 명명 되기도 한다. 남북으로 길이 11.54m, 동서로 넓이 6.77m, 높이 11.4m, 면적은 78.13㎡이다.

 

동기창(童其昌)  1555~1636  패방의 글씨는 중국 명대 후기의 서예가이자 화가인 동기창이 썼다.

동기창의 자는 현상(). 호는 사백(), 향광() 화정( 상하이시 송강 ) 사람. 만력 17년(1589) 수석으로 진사가 되고 한림원서길사, 황태자의 강관()이 된다. 그후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다시 관직에 들어가기도 함을 수차 반복하였다. 태창 원년 (1620) 태상소경, 천경2년(1622) 태상사경겸 시독학사, 『신종실록()』 편집에 참가하여 동 3년 예유시랑, 이어서 좌시랑, 동 5년에는 남경 예부상서를 지내고 다음해 은퇴. 숭정 4년(1631) 옛 관직에 복직, 동 8년에 예부상서겸 태자태보로 끝난다. 시호는 문민(), 서화에 능하고 고금의 명필을 연구하였으며 또 선리()를 시문서화()의 이론을 응용하여 설하였다. 서는 처음에 미불()을 종()으로 하였고, 진나라 사람의 평담 자연의 경을 이상으로 일가를 형성하였다. 형동() 미만종() 장서도()와 함께 ‘형장미동()’이라고 불리었으며, 또한 ‘남동 북미’라고도 칭하였음. 감식, 수장한 법서를 모아 『희홍당법첩()』을 만들었고 서 작품으로서는 『행초서권』(동경 국립 박물관), 『경원변묘지명고』, 『일월시권』등 많이 남아 있다. 호는 오파 문인화의 정계()를 이어 받아 원말 4대가 특히 황공망()에서 동원()에 올라갔으나, 구도법, 필묵법은 명말의 개성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졌으며, 특히 장년기 까지의 작품에는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날카로운 감각이 나타남. 대표작은 『형계초은도권()』(1613뉴욕 개인 소장), 『청변산도()』(1617 클리브랜드 미술관). 또 화론가()로 남북 양종으로 나눠 그 계보를 만들고, 상남폄북론()을 전개하여, 그 화풍 ᆞ 화법과 함께 명말 청초 이후 남종화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 『용태집()』, 『화선실() 수필』 등이 있다.

 

 

 

 

 

 도행지(知) 1891 ~ 1946

안휘성(省) 출생. 1914년 진링[]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대학에서 J.듀이에게 교육학을 배우고 1916년 귀국하여 후스[] 등과 그 교육론 보급에 힘썼다. 난징[]고등사범학교(후에 국립 ) 교수로 근무하였고, 1923년 이후로는 민족자본을 기금으로 한 민간교육운동에 헌신하며 강단에 서지 않았다. 장제스[] 정부하에서 창조적인 형태의 학교를 개설하고, 노동존중과 사상의 자유에 철저하여 공산당원을 옹호하였으며, 많은 혁명청년을 양성하였다. 난징의 사오좡[]사범학교, 상하이[]의 산하이공학단(), 충칭[]의 육재()학교 ·사회대학 등을 경영하였다.

1935년 이후 항일 민족통일전선 운동에 참가하여, 교육은 어린이와 대중의 생활해방을 위해 민족해방에 봉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상하이에서 내전반대 ·정치민주화를 주장하다가 1946년 7월 뇌일혈로 갑자기 죽었다. 전생애를 통해 반식민지인 중국 사회에 근대교육의 원칙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추구하여 오늘날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기의 애국주의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의 교육이론은 중국의 교육이론에 계승되고 있다.

 

흡현(셔시엔, 歙县, Shexian) 

휘(徽) 지역의 중심지이자 수도이다. 아마 와 보면 '중국 전체의 상업을 휩쓴 집단이 이 작은 시골에서 시작되었다니' 하고 의아할 것이다. 당연하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고향을 떠나 다른 대도시에서 성공하고, 이곳에는 자기 원래 집터에 큰 집을 짓는 순서였으니까. 그래서 흡현은 고상(삐딱해서 Sorry)하게 서당/사당의 역할을 한다. 그래도 상인들이라 재고를 관리할 수 있는 곳도 있고. 그곳이 어량(위량, 渔梁, Yuliang)이다. 그래서 같은 유적이라고 해도, 흡현은 먹물 냄새가 많이 나고 엄숙한 느낌이 강하다. 반면에 어량은 돈 냄새가 꽤 많이 나는 편, 그리고 활발했던 느낌이 많이 난다.

흡현의 옛 이름이 휘주(徽州), 즉, 이 지역의 수도 역할을 했었다. 송대부터 중국 역사상 유명인사를 기록한 사전에 등록된 사람만 200여명에 달하고 사당, 서당, 서원이 120여개에 달했다고 하나, 그 정도에 비하면 너무 남아 있는게 없다. 중국 정부가 2006년 정도부터 야심차게 수도 복원 사업을 했다는데, 한 결과가 운치라고는 찾을 수가 없는 성곽의 붉은 벽과 위에서 얘기한 요란스러운 (브랜드 옷 가게로 즐비한) 상가 거리였다.

하지만, 양화문(양허먼, 阳和门, Yanghemen)을 들어서 허국석방(许国石坊)을 지나면 나타나는 요란무쌍한 흡현 시내는 2008년인가에 새로 칠한 화장일 뿐, 두산가(더우샨지에, 斗山街, Doushanjie) 들어 서면, 높고 큰 오래된 저택들이 즐비한 좁은 길을 걷게 된다.

 

휘상()

명청() 시기 안후이성() 휘주부() 지역에 적을 둔 상인() 혹은 상인집단()의 총칭으로 신안상인()이라고도 하며 속칭 휘방()이라고도 한다. 당시의 휘주부()는 안휘의 서현(, 섭현), 슈닝현(, 휴녕현), 우위안현(, 무원현), 치먼현(, 기문현) 이현(), 지시현(, 적계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휘상()은 동진() 시기에 태동되어 당송() 대에 성장하였고 명대()에 전성하였으며 청말()에 쇠퇴하였다.
휘상()은 모두 빈한한 산지 지역 출신으로 농업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조건하에서 상업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상업을 통해 부를 창출하였으며 이를 통해 문화적 소질을 갖추었고 또한 인적자본을 축적하며 경영활동에 한층 더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 이들의 성공 과정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전국에 퍼져 있었으며 취급하는 물품이 소금, 면포(), 양식(), 차(), 문구필묵() 등이었으며 고통을 감내하고 근검절약하며 소자본 경영을 위주로 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부츨 축적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사회의 공익을 위한 사업과 자선활동을 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휘상은 돈을 버는 것을 일종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영예롭게 여겨 청 건륭에서 가경제에 이르는 70여 년간 265명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으나 당시의 진상() 자제는 단지 22명에 불과하였다.

 

문방사우(文房四友)

서예작품은 서화가들이 (붓 필), (먹 묵), (종이 지), (벼루 연)이라는 문방사우를 이용하여 글씨를 써서 만든 것이다.

’은 짐승의 털을 대나무 막대에 넣어서 만든 붓을 한 손으로 들고 있는 형상을 본뜬 것이다.
붓은 늦어도 상나라 때에 이미 있었다. 어떤 갑골에는 붓으로 써넣은 붉은색 부호가 보존되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붓은 1954년 중국 호남성 장사()의 좌가공산()의 전국시대 분묘에서 출토된 것인데, 붓이 작은 대나무 통 안에 함께 들어있었다. 대나무로 된 붓자루는 길이가 18.5㎝, 지름이 0.4㎝이고 붓의 털이 토끼털이며 털의 길이가 2.5㎝이다.
중국에서 가장 좋은 붓은 선필()과 호필()이다. 안후이성() 선주()의 경현()에서 생산되는 붓은 송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구양수()에 의해 “, .”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이 말은, 붓이 너무 부드럽거나 딱딱하지 않아 사람이 손으로 잡기에 매우 적합하고 백 개의 붓 중에 질이 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당시 이 붓은 “천금을 주고 사려해도 시장에는 없었다.(.)”고 한다. 저쟝성() 호주시()에서 생산되는 호필은 외국에서 더욱 유명하다.

’(먹)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쓰는 검은색 안료이다. ‘’은 회의자로, ‘’과 ‘’로 구성된다. 빛깔과 광택이 밝고 윤기가 흐르며, 재질이 부드러우며, 고색이 창연한 먹은 서예가들의 필수품이다. 현재 안후이성 흡현() 등의 지역에서 만든 ‘휘묵()’이 이름을 떨치고 있다.
제지술은 고대 중국의 사대 발명 중의 하나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글씨를 쓰는 재료로 갑골이나 청동기, 죽간, 견직물, 비단 등이 있었다. ‘’(종이 지)자의 편방은 ‘’인데, 이것은 종이가 실과 관련이 있음을 설명해준다. ‘’는 본래 실을 빨 때 도구의 밑바닥에 남는 솜 모양의 물질인데, 한나라 때 사람들이 삼, 어망, 나무껍질, 헤진 천조각 등을 원료로 하여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채륜

동한(25~220년) 때 채륜()이 제지술을 개선하여 만들어낸 종이는 가볍고 얇으며 깨끗해서 ‘채후의 종이()’라고 불렸다. 저렴한 종이가 나오면서 글씨를 쓰는 것이 더욱 편리해졌다. 종이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선지()로, 중국 안후이성 선주의 경현에서 생산된다. 선지의 품질은 순백색으로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기고 견고하며, 광채가 나지만 미끄럽지 않고, 빛이 통하면서도 빛깔과 광택이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래 보관해도 부패하지 않고 여러 번 접어도 손상되지 않으며 노화에 강하고 벌레나 좀을 방지해준다. 이 때문에 ‘천년의 수명을 가진 종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다.
’자는 ‘’을 편방으로 하며 출현시기가 늦은 편이다. 이것은 돌로 된 먹을 가는 도구이다.
붓, 먹, 종이, 벼루는 ‘문방사우’라고 불린다. 사람들이 이것으로 아름다운 한자를 써내고 독특한 풍격의 서예 예술을 창조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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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씨지사(鮑氏支祠) 

1561년에 세우고 1791년에 중수한 당월포씨사당(棠樾鮑氏祠堂). 패방군 바로 옆에 있다.

지사(支祠)는 가사(家祠), 종사(宗祠) 등과 함께 사당의 한 종류.

 

 

포씨지사(鮑氏支祠)  포현륜(鮑賢倫, 1955?~ ) 서 


포가남사(鲍家男祠)

 속담에:”황실에는 태표가 있고 백성에게는 사당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고휘주백성들은 한가문끼리 집거해서 살았다.


조상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또 같은 가문들을 한데 집결하기 위해서 매 백성들에게는 규모가 같지 않는 사당이 있었다.

사당은 종사,기사,가사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 중 종사가 규모가 제일 크다.

 

세효사(世孝祠)  청 가경(淸 嘉慶) 6년(1801)에 세운 남사(男祠)

글씨는 청대 서예가 등석여(鄧石如, 1743~1805)가 썼다.

 

등석여(鄧石如) 


1742년 건륭(乾隆) 8년, 안휘성(安徽省) 회녕(懷寧)의 집현관(集賢關)에서 출생, 초명(初名)은 염(琰), 자는 석여(石如)였는데
1796년 가경(嘉慶) 원년에 즉위한 청나라 인종(仁宗)의 이름이 전염(芮琰)이어서 ‘염’자를 피해 ‘석여’라 이름지었다.
자는 완백(頑白), 호는 완백산인(完白山人)이며 흔히 호를 취해서 완백(完白)이라 부른다.


완백의 부친은 이름이 일지(一枝)이며 목재(木齋)라 호를 쓴 박학한 분으로 사체서(四體書)를 잘 모각(摹刻)했으며,
성품이 우뚝 두드러진 분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집안 살림이 넉넉지 못해 완백은 어려서 마을 아이들을 따라 산에 나무를 해다 팔아
양식을 바꾸어 먹는 간구한 생활이었으나 틈만 있으면 마을의 유식한 어른을 찾아 경서를 배우고,
부친 목재 선생의 전각과 예서 및 각 체를 본떠 흉내를 내었다 한다.


그의 서가(書家)로서의 출발은 이렇게 부친을 사사(師事)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완백은 63세 때 이승을 하직하기까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글씨와 전각을 팔아서 전각과 서예에 전념하였다.


영국(寧國, 절강성에 가까운 안휘의 동쪽 끝)에서 구강(九江, 양자강을 거슬러 강서성으로 들어간 곳)으로 전전하면서
글씨를 팔면서 여행을 하던 중 20대의 어느 날 환산산맥을 넘어 수주(壽州)에 이른 완백은
그곳 수춘서원(壽春書院)의 강의 책임자였던 양문산(梁聞山)을 만나게 된다.


수춘서원 원생을 위해 새긴 전각과, 부채에 써준 소전(小篆)이 양문산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이 자그마한 우연이 등완백의 일생을 크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문산은 완백을 강녕의 거인(擧人, 과거에 鄕試를 합격하여 중앙의 會試를 볼 자격을 얻은 사람) 매류(梅熊)에게 소개한다.
그는 북송(北宋) 이래의 명문가로 진한(秦漢) 이래의 금석(金石)의 명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부친 곡성(捻成)은
역술(曆術)과 산학(算學)의 대가로 강희제(康熙帝)의 수우(殊遇)를 받아 궁중에 비장한 보배를 많이 하사 받은 사람이다.


매류는 완백을 신임하여 그에게 의식(衣食)과 지묵(紙墨)의 비용을 아낌없이 주었으며, 원 없이 공부하게 해주었다.
완백은 환산산맥 최고봉의 기상이 있었으며 이것이 매류를 매혹했던 것이다.


매류의 비호 아래 8년의 세월을 그는 무섭게 면학에 몰두했으며,
그가 공부하던 열광의 모습은 포세신(包世臣)의 『완백산인전(完白山人傳)』에 자세하다.


그는 먼저 전서(篆書)로부터 시작하였다.
<석고문(石鼓文)>,  <역산각석(辣山刻石)>, <태산각석(泰山刻石)>, <개모묘석궐(開母廟石闕)>,
<배잠기공비(裵岑紀功碑)>, <선국산비(禪國山碑)>,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 및
이양빙(李陽啣)의 <성황묘비(城隍廟碑)>, <삼분기(三墳記)> 등을 각각 백 번 임서(臨書)하였다.


또한 전서가 갖추어지지 않음을 고심한 끝에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스무 번 수사(手寫)하였다.
그밖에도 삼대(三代)의 종정(鐘鼎), 진한의 와당(瓦當), 또한 비액(碑額)까지 샅샅이 더듬었다.


공부에 임해서는 매일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먹을 갈아 큰그릇에 가득 채우고서
밤늦게까지 그 먹을 다 쓸 때까지는 자지 않았다.


추위와 더위에도 계속 멈추지 않고 정진하여 5년만에 전서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한다.
그는 이처럼 체력 또한 비범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그는 예서에 착수하여 3년이 걸려 예서를 습득한다.
완백이 매류와 작별하면서 새겨준 <청소당(淸素堂)>이란 전각과 <의여고회(意與古會)>란 인장은
건륭 45년(1780) 작이라 한다.


이로 보아 그가 매류의 비호를 받기 시작했을 때는 건륭 37년 30세로 역산(逆算)된다.
그 뒤 완백은 폐의파모(弊衣破帽)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하면서 매예(賣藝)생활로 돌아간다.


때마침 양주(揚州)에서 『통예록(通藝錄)』이란 대저(大著)로 유명한 석학 정요전(程瑤田)의 지우를 얻는다.
요전과는 마음 깊이 허여하는 사이가 되며, 요전은 양주에서 김방(金姪), 장혜언(張惠言) 등을 소개한다.


『완백산인전』에 의하면 김방의 집에서 교수를 하던 장혜언이 시내에서 완백의 서를 보고 돌아와 김방에게
“오늘 이사(李斯)의 진적(眞蹟)을 보았다.”고 하면서 놀라는 김방에게 자상한 내용을 얘기하니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같이 가자고 졸라, 둘이서 시내의 폐허가 된 절간에 유숙하던 완백을 찾아간 이야기가 전한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서도사(書道史)에 희귀한 걸작들을 함께 남기게 된다.


완백의 『사마온공가의예서책(司馬溫公家儀隸書冊)』에 장혜언이 쓴 발(跋)에는 완백을 만난 것이
1786년, 건륭 51년이라 쓰여 있으므로 이때 완백의 나이는 44세였음을 알 수 있다.


김방은 이미 완성된 자기 집의 장려(壯麗)한 가묘(家廟)의 현액(懸額)을 모두 완백에게 의뢰했으며,
또한 장혜언은 1년간 완백을 따라 전서를 배웠다 하니 이들이 완백에게 얼마나 경도되었나를 알만 하다.


완백은 이 무렵 김방을 통해 향리에 돌아온 태자태부(太子太傅)이자 호조상서(戶曹尙書, 현 재무부장관)
조문식(曹文埴)과 친교를 맺었다.


그의 청으로 완백은 『사체천자문(四體千字文)』의 횡권(橫卷)을 휘호하여 하루 안에 완성하니
조상서는 그의 필력에 경탄하여 사람들에게 완백의 사체서는 온 나라에서 제일이라고 칭송했다 한다.


유석암(劉石庵)이 72세 때에 완백의 서를 보고 크게 놀라서
“천수백년(千數百年) 내에 이런 걸작은 없다.”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한다.


1805년 가경(嘉慶) 10년 10월, 63세로 고향 환공산 아래에서 죽기까지 12년간은 제국을 방랑하면서
매예생활 중 1802년 가경 7년 강소성(江蘇省)의 진강(鎭江)에서 일생의 지기(知己) 포세신을 만난다.


포세신이 완백을 만난 것은 장혜언의 아우 장기(張琦)에 의해서였다 한다.
뒤에 포세신은 『예주쌍즙(藝舟雙楫)』을 간행했는데 이 책은 완원(阮元)의 유명한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과 함께 청조의 서법을 첩학(帖學)에서 비학(碑學)에로 전환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포세신은 그 자신 뛰어난 서가이면서도 자신의 서론(書論)의 중심에,
이를테면 자설(自說)의 심볼로서 놓은 것이 완백의 서, 그 중에서도 전서·예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8세 때 만난 완백에의 존경심이 그에게 서론(書論)을 쓰게 했다 함이 옳을런지도 모르겠다.


『예주쌍즙』 중 청대(淸代) 101인의 작품을 품평(品評)한 「국조서품(國朝書品)」은 서론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그 중 최고의 신품(神品)으로 단 한 사람인 등석여의 예서와 전서를 들고 있다.


세상에 전하는 여러 『완백전(完白傳)』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완백산인전』이며 완백이 죽은지 한해 뒤
1806년의 것으로서 아쉬운 정에 찬 이 글은 현대의 우리들이 읽어도 깊은 감명을 받는다


흡현 당월촌에 있는 돈본당은 당월포씨의 남자사당이다. 포씨가문의 각세 조상들을 모시고 있다.



사당은 목석으로 구조되었고 조각은 비록 복잡하게 많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정밀하고 대범함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사당은 건립 당시에 종인이 가문에서 장유의 순위와 덕망이 높은 조상들을 존경한다는것을 표현하는 곳이다.


동시에 또한 외지에 나가 있는 상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그 기파와 재능을 현시하는 곳이이기도 했다.

사당의 건축 특색은 각양각색이었다.


예를 들어서 돈본당의 구조는 들보가 천정을 받들고 빛겨서 기둥도 받쳐주는 식으로 되었고, 
량타 ,작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그때 당시 통용된 건축수단을 반영하고 있다.


구조재의 장식은 또 농후한 지방특색을 구비하여 동곽량의 머리 끝부부은
코끼리머리 형태로 되었는데 아주 생동감이 있고 조각은 또한 다양하다.


침당처마밑에는 단풍나무가 접혀져 있는 것같고
두공은 순전히 장식으고 천정에 무게를 부담하지 않게 설계하였다. 


삼진 다섯개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규모가 웅장하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향당구조는  넓고 훤하며 큰 재료들을 사용하여 그 기세가 아주 웅장하다.


사당 안에 의전규례비석과 가경황제상유비 등17개 패각이 있다.
위에는 “공의돈본호규례”가 새겨져 있다. 
사당은 한 가문에 있어서 정신적 핵심이고 그 가문의 위엄을 보여주는 성전이다.

낙선호시(樂善好施)  조문식(曹文埴, 1735-1798) 서

돈본당(敦本堂)  왕문치(王文治, 1730~1802) 서.

 

왕문치(王文治)

청나라 강소() 단도() 사람. 자는 우경()이고, 호는 몽루()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12살 때 시를 지을 수 있었으며, 서법에도 뛰어났다.


자라서 경사()를 내왕하며 한림원() 시독()이던 전괴()를 따라

유구()에 사절로 가면서 마침내 문장이 해외에 알려졌다.


건륭() 25년(1760) 전시(殿)에서 일갑삼명(, 즉 )으로 진사 급제하고

편수()에 임명되고 시독()에 발탁되었다.


나중에 운남() 임안지부()로 임명받았는데,

사건이 있어 직급이 낮아지자 병을 핑계로 휴가를 청해 귀향했다.


오월() 지방을 왕래하며 주로 항주()와 진강()의 서원에서 강의했다.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풍운()이 뛰어났다.


희곡을 즐겨 집안에 악기를 쌓아놓고 노비를 사들여 그들에게 작곡을 가르쳤다.

연출할 때는 거리를 따지지 않고 몸소 따라다녔다.


고종()이 남방을 순행하자 명을 받들어 9곡의 희곡을 지었는데,

이들을 아울러서 『영란신곡()』이라 일컬었다.


나이 오십이 되기 전에 불학()에 전념했다.

저서에 『몽루시집()』과 『쾌우당제발()』이 있다.

 

 

 


충효염절(忠孝廉節)  주희(朱熹, 1130~1200) 서.

 

주희(朱熹, 1130~1200) 주자.


중국 남송의 유학자. 이름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주자는 존칭이다.
신안(안휘성) 사람.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19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관계(官界)에 들어갔으며 그 전후에 도학 외에 불교, 도교도 공부하였다.
24세에 이연평(李延平)과 만나 그의 영향 하에서 정씨학(程氏學)에 몰두하고 다음에
주염계, 장횡거(張橫渠), 이정자(二程子)의 설을 종합 정리하여 주자학으로 집대성하였다.


주자의 학문은 이기설(理氣說 : 존재론), 성즉리(性卽理)의 설(윤리학), 격물규리(格物窺理)와
거경(居敬)의 설(방법론), 경전의 주석이나 역사서의 저술, 구체적인 정책론으로 되어 있고,
그 모두에 중세 봉건사회의 근간인 신분혈연적 계급질서의 관점이 관철되고 있다.


그의 업적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의 도'(三綱)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 오상 五常)을
영원불변의 '인리천리(人理天理)의 지'(至)로 보는 입장에 서서 그것을 초월적 또는 내재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주자의 학문과 그 실제 정책은 모두 봉건 사회의 질서원리가 관철되고 있으며
철학적으로 강고하게 체계화시켰던 것으로 주자학은 봉건 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 오랫동안 군림하였다.


주요저서 : 四書集註, 周易本義, 資治通鑑綱目, 朱子語類


포씨오륜술(鮑氏五倫述)  등석여(鄧石如)의 예서.



포가여사(鲍家女祠)


포가여사당은 청이당이라고 부른다.
포씨가문에 역대정부열녀들을 찬양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남자사당하고 반대로 남쪽에 자리잡고 북쪽을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벽 측문으로 들어간다.
구시대 여성들은 남자사당을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청이당은 전국에 유일한 여자사당이며 세계부녀대회에서 네 번째로 지정한 참관점이다.
이는 휘주종법제도와 휘주의 상업역사 연구에 생동하는 교재이며
중국에서 "여자는 사당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전례를 타파한 보기드문 여사당이다.


휘주문화특색에서 건축에는 패방,민가,사당 3절이 있다.
이들은 휘쥐여성들의 운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불효유삼,무후위대>라는 유가신조 하에서 휘주남자들은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 후
짐을 싸서 차자식을 버리고 부모들을 남겨둔 채, 집을 떠나서 멀리로 돈벌이하러 나간다. 


그 이후 일부는 사방을 떠돌며 소식도 없이 결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일부는 성공한 다음 외로움을 못참아 술집을 들락거리면서 소탈한 생활을 누리고 
집에 조강지처는 완전히 잊어버린다. 


일부는 부자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때는 벌써 삼처사첩을 가진 몸이다. 
신첩 웃음이 이뻐보이고 구인의 눈물은 보이지도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남편이 멀리 나가 사업하는 휘주여자들은 결코 방촌누각에서 자폐하고
천정으로만 들어오는 일편의 빛으로 온갖 힘을 다해서 애들을 키우고 시부모를 모시며
어쩔수 없이 꽃다운 청춘을 흘러버리고  생명은 시들어가고  독수공방으로 세월을 보낸다. 


이것은 그들이 뛰어 넘을수없는 운명이었다.

정부열녀의 패방은 정신상 그녀들을 억제하고 가문에 사당은 가문의 규정으로
행동상 속박해 버리고 마두벽의 봉쇄는 신체상 그녀들을 묶어버린다.


지붕보다 높은 계단식 마두벽은 벽돌로 만들어졌고 방풍방화할 수 있다.
높게 싸아진 마두벽 바로 위에만 작은 창문이 만들어져 있는데 도둑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독방 여자들의 외부 출입을 막을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끊어 그녀들의 바람행위를 막기 위해서이다.

“높은 벽안에는 고독하여 휘주는 침묵한다” 
길고 긴 휘상들이 남긴 발자국에는 수많은 휘주여자들의 피눈물이 뿌려져 있고
패방, 사당 마두벽 수묵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휘주식 건축 뒤에는
수많은 부녀들의 암담하고 씁쓸하고 처량한 처지가 숨겨져 있다.

청의당(淸懿堂) 


중국에서 유일한 여사(女祠)로 포씨비사(鮑氏妣祠).

'청의(淸懿)'라는 이름은 '淸白貞烈 德行美好(청백정렬 덕행미호)'의 뜻을 취한 것이다.

우리나라 창덕궁에도 '청의정(淸懿亭)'이 있다. * 懿 : 아름답다, 훌륭하다 (의)

 

 

입구 옆 안내판에 한글이 씌여 있다.

 

 

정효양전(貞孝兩全)  증국번(曾國藩, 1811~1872) 서. 청의당(淸懿堂)  포엽(鮑鉩, ?~?) 서 

 

증국번(曾國藩)


호남() 장사부() 상향현() 사람

본명은 자성()이고, 자는 백함(), 호는 척생()이다.

청()나라 때의 대신()이자 군사가, 문학가이다.


증자(; 증삼)의 70세손으로 도광() 18년(1838)에 진사() 출신이다.

벼슬은 한림원서길사(), 한림원검토(), 문연각교리(), 시강학사(),

내각학사(), 예부시랑(), 예부우시랑(), 병부우시랑(), 양강총독(),

직례총독(), 무영전대학사(殿) 등을 역임했고, 의용후()로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
중국 청나라 말 태평천국의 혁명을 막기 위해 호남성을 중심으로 편성한 반혁명 군대인 상군()을 창립하고,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다. 


홍장(), 좌종당(), 장지동()과 더불어 만청사대명신()으로 일컬어진다.

산문()에 능통하여 상향파()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저서로 《치학논도지경()》, 《지가교자지술()》, 《빙감()》,

《증국번가서()》 등이 있다.


 






 

참고   http://www.paifangqun.com/   http://blog.daum.net/zeroko2000/7847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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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06월 15일 12:40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14:00 중국 항주국제공항에 도착.

(2시간 20분 소요, 시차 -1시간) 


▲ 항주국제공항에서 대학교 후배이기도 한 송영길 전 인천시장이 우리 인문기행 일행에 합류했다.

공항에서 숙소 크라운플라자 호텔로 이동 중.

  

▲ 황산 크라운플라자 호텔로 이동(3시간 30분 소요)





안휘성 지도  ⓒ《중국인문기행》p224.


안휘성은 중국 중앙부 양자강(揚子江) 하류 유역에 있다.

성수기에는 안휘성의 최남단인 황산까지 가는 인천발 직항이 있는데, 이번에는 비수기라 항주(抗州)를 거쳐서 갔다.


인천공항에서 항주공항까지는 1시간 45분, 항주공항에서 황산시내까지는 버스로 3시간 30분이 걸렸다.

* 항주공항 : 예전의 소산(蕭山)공항.


▲ 이번 인문기행에 참가한 분들이 함께한 기념 촬영.


부부로 오신 6쌍 12분, 부자 1쌍 2분, 중국에서 거주하고 있다가 항주공항에서 합류한 2분,

서울대, 서강대 등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신 분들과 교장 선생님을 마치고 정년 퇴임하신 분들,

다산 인문학 강좌 등을 통해서 참여하게 된 분 등 34분과 송재소 교수 등 스텝 4분

그리고 조선족 현지 안내원을 더하여 총 39분이 이번 기행에 함께하고 있다.


 당월패방군(棠樾牌坊群) / 포가화원(鮑家花園)  


올해 국가급 여행 풍경구 AAAAA로 승격된 당월패방군은 총 7개의 패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패방은 명·청대에 이르는  400여 년 동안 당월촌의 포(鮑)씨 가문에서 배출한

충신, 효자, 열녀들의 공덕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황산시(黃山市) 시정부 소재지인 둔계구(屯溪區)에서 27km, 흡현고성(歙縣古城)에서 10km 정도 가면 된다.

여기에는 송,원나라부터 명청시기에 이르기까지 800여 년된 고촌락-당월촌이 있으며

장엄한 7개 패방, 듬직하고 우렁찬 남사당, 청아하고 유일한 여사당,

포씨가문의 효도를 요해할 수 있는 효도사당과 각종 종법, 공익, 문회, 서원, 의창 등 기념 건축물이 있다.


  패방군과 연결되어 있는 포가화원은 역사를 전제로 하여 휘상저택원림을 배경으로 하였으며,

분재를 주제로 국내외 각종 유명한 분재가 있으며 정자 등 원림 건축물이 있다.


휘주문화의 대표로 손색이 없는 웅대한 규모를 보여주고 있고 정원의 중심에 위치하며

호수, 나무 ,가산, 꽃들이 잘 어우려져 황홀한 경관을 만들었다.


풍경구는 2005년도 국가여유국으로부터 4A급 여유경구로 평선되였으며 황산시 <10가> 여유명소로 되어 있다.

당월패방군에는 고대의 패방, 사당, 민가는 <휘주고건축 3절>로서 걸작들이 모여 있으며

한폭의 아름다운 휘상고리도를 그리고 있다.


* 위치 : 안휘성 황산시 흡현. www.paifangqun.com

* 당월(棠樾) : 팥배나무 그늘.《시경》<감당(甘棠)>편에 '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이라 함.

棠은 '팥배나무, 아가위나무', 樾은 '나무 그늘'의 뜻.


고휘주문화여유구전경도(古徽州文化旅游區全景圖)  http://www.guhuizhouta.com


棠樾牌坊群(당월패방군) 강택민(江澤民, 1926~ ) 서


풍경구 개요


 황산 흡현 패방군 포가화원 풍경구는 산수가 아름다운 흡현 당월촌 내에 위치해 있다 .

고패방,고사당,고민가,포가화원으로 조성되었다.


여기는 고성흡현과 10 떨어져 있고 시정부가 위치해 있는 둔계하고는 27 떨어져 있다.

당월은 포씨 가문이 집거하고 있는 지역이다.


가문은 남송시 건연 년간에 자리를 옮겨 여기에 와서 정착하기 시작해서 거의 800여 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 핵심으로 석패방은 양쪽에서 중간으로 순서대로 차례로 배렬되어 반호형으로 펼쳐져 있다.


서에서 동으로 순서가 포찬효행방,자효리방,포문령처왕씨결효방,락선호시방,

포문연처결효방,포봉창효자방,포상현상서방으로 되어 있다.


일곱개 패방은 엄숙하고 정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조용하고 품이 있게 서 있는 돈본당 남자사당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있다.


세 개 문, 다섯 개 방이고 오풍루문정으로 전체 구조는 간결하고 훤하게 지여졌다.

은행나무를 기둥으로 하고 장목은 들보로 쓰고 벽돌, 나무, 돌조각들을 사용하여

곳곳마다 유가인생철리와 문화수양을 드러낸다.


중합지미 뚜렷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사당안에는 종족관리제도를 새긴 비각들과 <가경상유삼도비>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는 종법제도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실례들이다.

 둘도 없는 청이당 즉 여자사당은 남쪽에 앉아 있고 북쪽을 마주하고 있다.


다섯 개 문 삼진 마두벽으로 전체 사당의 구주는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고

그 조형은 유창하고 안은 수려하고 밖은 소박하여  단정한 느낌을 준다 .


사당의 벽은 전부 벽돌조각으로 되어 있어 그 모습 또한 아기자기한 느낌을 줄 뿐만아니라 화채롭다.

그리하여 휘주지방에서 사당돌 조각의 으뜸으로 불리운다.


 패방군과 인접되어 있는 포가화원은 휘상개인 정원을 배경으로 하여 휘파분재를 주제로 삼아

휘파분재 예술의 정화들이  모여 있고 동시에 국내에서도 각지방파 분재들의

대표작품들이 집결되어 있어 이는 하나의 비교적 고품격의 분재 관광기지이다. 


이 정원 면적이 21.73 헥타르이고 그 중에 인공호수와 분재정원이 각각 5.33 헥타르 차지한다.

분재의 만발을 전시하고 정원에 여러가지 분재 품종이 모두 갖춰져 있다.


형태가 다양하고 아기자기하며 서로 아름다움 모습을 다투며 자랑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하나의 대형산수조합이라고 할수 있다.


풍경구는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이고 세계문화유산신보지,국가4A급 여행풍경구이며

또한 "황산시십가여행 풍경구이다.



역사적 기원


 당월은 흡현시내에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북쪽 소나무 우거진 능선의 용산을 가까이 하고 있고  남쪽 분지-평원옥야을 인접하고 있다.


근원 황산의 풍낙하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멀리로는 부정산을 평벽으로 풍수설에서

산을 베고 물을 안고 평원을 마주하고 있다라고 선택할수 있는 이상적 위치다.


지금까지 여전히 마을 입구에 역대에 흥건된 일곱 높고 거대한 석패방군이 우뚝 솟아 있어

휘주에 둘도 없는 장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동시에 마을안에 현재 보존하고 있는 사당 민가 화원도 휘주특색의 대표성을 반영하고 있다.

당월촌의 형성은 남송건연년간 ( 1130)까지 추적할 다.


부읍 (지금의 흡현현 시내) 서쪽문은 으로 유명한 포용이 높은 관직은 못했어도

평생 서향마을에서 산업을 넓혀 차츰 부자가 되었다.


그는 지금의 당월을 이상적인   휴한지소를 만들수 있는 곳임을 욕심내고 여기에 별장을 지었다.

후에 당월포씨는 그를 시조공으로 존칭했다.


포용이후 당월은 단지 한 곳의 포씨가문의 또 다른 원림업이었고 따로 건설을 하지 않았다.

사세종손 포거미는 산천이 아름답고 원전이 넓어 자자손손 백세대업을 일을수 있겠노라해서

부읍서문에 집식구들을 데리고 당월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팔백여년간 당월촌은 포씨씨족들만이 사는 곳으로 되었고 

성쇠기부를 거쳐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패방은 황산에 부여한 역사 훈장이다.

역사상에 매세대마다 황산(휘주)에서는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나왔다.


이팅구이, 주희, 호개문, 왕모음, 대진, 호정, 도행지, 황빈홍 등 걸출한 인물들이  태어났다.

흡현에서만 해도 명청 두 조대에 524명의 진사 ,1531명의 거인, ”부자상서”, ”동포한림들로 마을의 명성을 높였고

연과삼전선,십리사한림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다.


더우기 이 주리학의 고향에서는 부녀들은 봉건주의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관념 때문에 깊은 해를 받았고

유림외사에서 나오는 왕삼구와 같은 절부열녀들이 아주 많이 나왔다.


 구시대에 충효결의우수했던이런 사람들을 표창하기 위해서 황산시 각 지방에는 대량의 패방들이 세워졌다

그 역사 흔적들은 여러번 파손을 당했지만 지금까지도 100여 좌의 패방들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당월패방군이 바로 그 중에 대표작이다.

 당월패방군은 7 패방이 명나라 3 청나라 4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봉건사회 충효결의론리도덕의 개요를 묘사해 냈다


그 중에 명나라 패방의 횡편에는 어제자효리라는 대자가 새겨져 있다

황제가 휘상 포수손부자를 표창하기위해서 세워준 거다


역사책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원나라 때 흡현의 수장이 달이 부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서 백성들을 노략하고 살해했다.

그때 당월포씨 부자는 반란군에게 잡히게 되었는데 한사람만 살려준다구 누가 죽고 누가 살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그런 부자는 서로 자기가 죽기를 다투고 대방을 살려 달라고 하는데

그 행동이 하늘도 감동시킬 정도로 심지어 반란군도 감동되어 차마 죽일수가 없어서 사람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후에 조정에서 이 일을 알고 그들을 표창하기 위해서 이 패방을 하사하였다.

청나라 건융황제도 포씨종사를 위해 제련하기를 : ”자효천하무쌍리,금수강남제일향.” 

그리고 전해지기를 당월포씨 가문은 그 때 벌써 ””””패방이 있었고 패방만 없었다고 한다.


그 마을 포씨세가 에서 포숙방시기에 양회소금운송관리로 강남염업 명맥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황제에게 자 패방을 세울 수 있게끔 청하여 가문을 더욱 빛내기 위해서

양식 십만단과 은3만 냥을 받쳐 제방을 팔백리나 재보수했고  세 개 성의 군사들의 양식을 부여하였다.  


그 공로로 결국 조정에서는 허락을 해 주었다.

그리하여 당월촌 마을 입구에는 또 하나의 호선락사라는 의자패방이 세워졌다

흡현에서 많은 패방들 중에서 이같은 이상입사,이사보상정치적 경제적 상호 일관성의 긴밀한 관계는 종종 볼수 있다.

 

일곱개 패방


패방(牌坊)은 문짝이 없는 대문 모양을 가진 중국 특유의 건축물이다.

본래 집의 출입문이나 마을의 입구에 마을을 드나드는 문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그리고 궁정, 능, 사당, 관청을 비롯하여 절의 어귀에도 세운다.

 패방은 훌륭한 인물을 기리는 기념물인 경우가 많다.


인물과 관련된 기념물로써의 패방은 국가에 공을 세웠거나 부모에 효도를 하거나

또는 남편을 위해 정절을 지킨 인물들, 즉 남에게 모범이 되만한 공로가 있는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그의 공을 인정하여 황제의 명으로 세워진 것들이다.


공덕(功徳)패방 정절(貞節)패방 등이 있다.

따라서 패방이 많다는 것은 그 지역에 인물이 많이 났다는 것을 말하며

이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매우 큰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다. 


패방의 기둥은 2~6개이며 낮게는 수 미터에서 높게는 10여 미터에 달한다.

지붕을 여러 층으로 얹은 것도 있다.


나무로 만든 것을 목패방이라 하고, 돌로 만든 것을 석패방 또는 석루(石樓) 그리고 패루(牌樓)라고도 부른다.

인재를 많이 배출한 후이저우에는 패방이 넘쳐난다.  


 이곳 패방은 모두 7개인데 명대(明代)의 것이 3개, 청대(淸代)의 것이 4개이다.

흡현 주변에서는 어디로 가든지 패방이 보이는데 이곳이 가장 아름답다.


드넓은 논 속에 7기의 패방이 일렬로 늘어선 모습은 음악적인 조화마저 느끼게 한다.

이것들은 소금장수를 하면서 부를 이룬 포씨(鮑氏)가 일족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포찬효행방

 

자효리방

포문령처왕씨 결효방


락선호시방


포문연처오씨결효방


포상헌상서방

 




Baojia 포가화원


포가화원은 청나라 건융, 가경년간에 저명한 휘상 염법도원춘추시기
이름있는 승상 “관포지교”에 나오는 포숙아의 후대 포기원의 개인화원이었다. 


현재 중국에서 제일 큰 개인 정원과 분재 관람지이다.
이는 세계에서도 둘도 없는 당월 패방군에 위치해 있다.



주로 휘파분경이 주제이고 동시에 국내에서도 유명한 분재들을 모은 정화라고 볼수 있다.
패방군풍경구와 한일체로 용합되어 있어 완벽한 휘상고려를 구성하고 있다.


이는 전영적인 고휘파정원과 휘파포가화원분재가 서로 결합된 중국 개인정원 정화이다 .
소주에 졸정원, 유원, 사자림과 무석에 려원, 매원기명,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전쟁시기에 파괴되었다.


현재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이는 중국에서 제일 큰 개인정원과 분재풍경구이다.
지금 정식으로 비물질세계 문화유산과 세계기네스기록에 신청한 상태이고 “동방원림지모”라고 불리고 있다.


분재애호자들의 “매가”이다.
패방군풍경구와 한일체로 용합되어 있어 완벽한 휘상고려를 구성하고 있다.


이는 전영적인 고휘파정원과 휘파포가화원분재가 서로 결합된 중국 개인정원 정화이다 .
소주에 졸정원, 유원, 사자림과 무석에 려원, 매원기명,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전쟁시기에 파괴되었다.


현재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이는 중국에서 제일 큰 개인정원과 분재풍경구이다.
지금 정식으로 비물질세계 문화유산과 세계기네스기록에 신청한 상태이고 “동방원림지모”라고 불리고 있다.


주요 관광 프로젝트의 분재 정원 : 포가화원에는 정품원, 유파원, 산석원이 있다.

분재정원은 산석분재를 주요로 하고 화초나무분재를 보조로 하고 있다.


휘주사람, 황산스타일, 천상인간 등을 주제로 했다.

제일 큰것은 정원에 제일 안쪽에 있는 강산유지다교이다.


정원내에 분재들은 대다수가 가지가 휘여든 목본식물로 주로 재배상대로 하고 있다,

모습들은 다양하여 줄기고 굵고 커서 신기한 것도 있고 형태가 구블구블하여 고풍스러운 것도 있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도 있고 아기자기하게 귀여운 것도 있어 미감을 장식할수 있는것들로 있다.

그 중에는 분재예술인이 수년간 열심히 재배해낸 휘파특색이 농후한 남국풍정 있다.


 주로 넓은 풀밭, 입구광장, 광장합, 사계절화원(식물풍경구,춘하추과각색식물관광구),

향토화원(황산포가화원지구특색식물), 휘주문화 전시관(유명한 서예나 화가가 모은 진적들,문방사보 등), 다원파, 송림파,

유락호, 수조호, 관어지, 경제수생식물원(), 산수폭포, 유람선 부두, 분재재배기지, 도바, 다루, 주작방 산수폭포가 있다.

 

공원의 보물

 


"남국풍정"는 가지높이가 1.28 m,넓이는 2.8 미터이다. 
현재 중국에서 제일 으뜸으로 가는 대형고용분재 중의 하나로 이백여 년의 역사가 된다.


제일먼저 포씨화원의 수집품이었다. 후에 광동으로 유전되었다. 
포가화원에서 제일 비싼 가격으로 회수한 정품이다.


찐하게 그린 눈섭마냥 빽빽하게 자란 나무잎은 땅과 하늘을 덮었고 
엉켜서 자란 가지와 끝없이 자라는 뿌리는  평화롭고 국태민안을 빈다는 뜻을 품고 있다.
세계에서도 보기드문 이 분재는 곤명엑스포, 곤명 국제 원예 박람회에 나타난 적이 있다.





송재소 교수의 중국인문기행

 

1. 우리나라 한문학의 대가인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직접 유적지 안내와 해설을 위해 동행합니다.
2. 일반 여행사를 통해서는 갈 수 없는 특별하고 의미있는 중국 유적지(아름다운 한시의 배경이 된)를 방문하게 됩니다.
3. 여행내내 명실상부 최고의 호텔과 음식은 물론, 여행지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 전통 차와 술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시간이 마련됩니다.
4. 더불어 역사, 문화에 관심있고 품격있는 참가자들과의 소중한 인연, 좋은 만남을 약속합니다.

* 일정 : 2015년 6월 15일(월)~ 20일(토) 5박 6일

 

일 정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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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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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12:40

14:00

 

 

 

 

 

 

 

 

 

인천국제공항 3M카운터 집결

인천국제공항 출발

항주국제공항 도착 (2시간 20분 소요)

황산으로 이동 (3시간 30분 소요)

청대옛거리 : 송나라때 형성되어 명과 청에

가장 발전한 건물과 거리 모습을 재현한 곳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크라운플라자

(TEL: 0559-259-1888)

:XXX :현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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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산

정감촌

 

 

흡 현

 

 

이 현

기 문

 

 

황 산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정감촌으로 이동(50분 소요)

정감촌 : 명나라때의 건축물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곳

흡현으로 이동(35분 소요)

흡현고성 : 중국의 4대고성 중 하나

허국석방 : 전형적인 명나라 석방건축물

당월패방군 : 포씨가 일족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

이현으로 이동(30분 소요)

서체촌, 굉촌 :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대민

가 건축군

황산으로 이동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헌원국제대주점

(TEL: 0559-850-8828)

:호텔식 중:현지식 석:한식

 

 

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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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편

시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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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산

경 현

 

 

 

신 성

 

 

마안산

 

화 현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경현으로 이동(2시간 소요)

도화담 : 이백이 이곳에서 필묵을 적시며 시편

을 많이 남김

신성으로 이동(1시간 소요)

사조루 : 강남의 4대명루중 하나이며, 중국

고대의 유명한 시인들이 와서 시를 짓던 곳

경정산 : 이백의 시로 인해 강남시산이 되었다

마안산으로 이동(1시간 30분 소요)

누실공원 - 17:00 입장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마안산 해외해 황관홀리데이

(TEL: 0555-238-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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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안산

 

 

 

저 주

 

 

 

남 경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청산 이백묘 : 당대의 시인 이백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곳

채석기(태백루) : 이백이 여러번 올라 시를 남긴 곳

저주로 이동(2시간 소요)

취옹정 : 취옹정기로 유명한 구양수가 있던 곳

남경으로 이동(1시간 30분 소요)

명효릉 : 명 태조 주원장의 능원

중산릉 : 중국 근대화의 혁명정치가 손중산 선생의 묘가 안치됨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은하소피텔

(TEL: 025-8371-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일 자

지 역

교통편

시 간

일 정

6/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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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경

버스

전 일

호텔 조식 후

석두성 : 손권이 남경으로 도읍을 옮겨 왕궁을

세울때 전초기지

연자기 : 청대 초기 시단의 영수 왕사진

시에서 언급되며, 남경의 북쪽 관음산에 위치하

여 장강을 바라보기 좋은 공원

중화문 : 명대에 있었던 13개의 성벽중에서

가장규모가크고 웅대했던 명나라 도성의 정남문

문묘 : 공자에 제사를 지내는 곳

왕사고거 : 육조 명문귀족 왕씨와 사씨의 병칭 고거

미향루, 진회하선유

오의항 : 동진의 지배귀족이던 왕씨와 사씨가 거주하던 지역

호텔 투숙 및 휴식

HOTEL : 은하소피텔

(TEL: 025-8371-8888)

:호텔식 중:현지식 석:무궁화식당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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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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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

18:20

 

호텔 조식 후

포구로 이동(1시간 20분 소요)

봉황각

남경 대학살기념관 :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일

본인들의 잔인한 만행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공항으로 이동

남경국제공항 출발

인천국제공항 도착 (2시간 25분 소요)

:호텔식 중:현지식



** 중국인문기행이 기대되는 이유!!**


송재소 교수님의 말씀.
“이들 유적을 기행하면서 역사의 흥망성쇠를 체감하고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중화문명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번 여행은  중국의 ‘인문학적 유산'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아울러 중국 문화의 불가결의 요소인 중국술과 중국차에 대해서도 가능한 많이 소개하려고 한다. 술과 차를 빼놓고 중국문화를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번 여행의 행선지는 일반인들이 쉽게 가기 어려우면서도 인문학적 유적이 풍부한 안휘성의 황산에서 강소성의 남경까지 이어지는 기행이 될 것이다“
“안휘성에는 도처에 이백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백이 달을 잡으려 강으로 투신 했다는 채석강과 이백의 무덤 등을 둘러보며 그의 자취를 더듬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여기에는 구양수의 취옹정과 풍락정이 있고, 풍자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유림외사'의 작가 오경재의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안휘성의 남쪽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체촌과 굉촌이 명청시대 민간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안휘성은 또한 흡연, 휘묵, 선지 등 문방사우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여기에다 덤으로 황산의 빼어난 경관도 즐길 수 있는 곳이 안휘성이다.”
"강소성의 남경은 육조고도라는 별칭에 걸맞게 수많은 고적을 보유하고 있다. 두목의 시로 유명한 진외하, 유우석의 시로 유명한 오의항과 석두성, 이백이 시를 읊었던 봉황대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인 주원장의 무덤 명효릉의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태평천국의 유적도 눈길을 끈다. 그뿐만 아니라 손문의 무덤인 중산릉의 위용도 볼만하다. 중국 현대사의 아픈 상처인 남경 대학살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념관도 이곳에 있다. “

 

< 중국인문기행(송재소 교수 저) 관련 기사>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08/2015030801338.html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artid=201503062111205&code=960205
*머니투데이
http://www.mt.co.kr/view/mtview.php type=1&no=2015032515010864992&outlink=1

 

<이 글을 연재하는데 참고한 사진과 글 등 자료의 출처>

1. 중국인문기행에 함께 동반한 사진전문가 고형남 님이 사진작품을 공유할 수 있도록 보내 주셔서 연재하는데 전적으로 참고하였습니다. 사진 자료 중 거의 90% 이상을 고형남 님 작품 사진에 의존한만큼 일일이 사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2. 함께 동반한 고영표 시인 님의 블로그 ㅡ 고산지(高山芝) 블로그 http://blog.daum.net/zeroko2000 에서 기행 장소와 시간 공간, 사진 자료 등 자세한 해설을 참고하였습니다.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연세동문회보 / 이달의 여동문

박정희 (신학 72입) 대전 변동중학교 교장

 

도자기를 빚는 마음으로 교육 한 길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 양분이 필요하듯이 한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한 학생 한 학생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는 그런 교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신학과를 졸업하고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한 뒤 1981년 고등학교 윤리교사로 처음 교단에 섰을 때 박정희 동문의 각오는 남달랐다. 특히 학교에서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힌 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1984년 12월 시골의 한 병원에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의 인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산 끝에 산모는 정신을 잃었고 아이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이후 아들은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젖을 삼키지 못해 애를 태우더니 목을 가누는 것도, 뒤집는 것도, 일어서는 것도 유난히 더뎠다.
세 살 무렵 의사로부터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커갈수록 점점 더 뒤처지는 아들에게 조바심을 내며 “똑바로 걷지 너는 왜 자꾸 넘어지니”, “침 좀 흘리지 마라”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한동안 직장을 그만둘까 고민했으나 일을 포기하고 아이에게 매달린다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장애가 있는 아들과 사는 것을 힘겨워하던 남편은 아들이 일곱 살 무렵 영영 떠나버렸다. 그는 위자료나 양육비 대신 친권을 챙겼다.
“아이가 밤에 잠을 안 자고 설치는 경우가 많아서 밤새 시달리다 아침 7시30분에 집을 나서 아이를 스쿨버스에 태워주고 출근했죠. 친정어머니께서 아이를 돌봐주셨지만 그래도 그 무렵 하루가 48시간이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를 만큼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쉼, 여유, 위안, 안식, 평안 이런 단어들이었어요.”
한동안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에 우울증에 빠졌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도자기를 접하고 활력을 되찾았다. 주말마다 흙을 주무르고 두드리고 빚다 보면 현실 세계의 절망감과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성취감도 컸다. 대전교원미술전 공예부문 1등급 상과 전국백제토기물레경연대회 은상을 수상했고, ‘정신지체 학생의 작업기능 신장을 위한 생활도자기 만들기 지도자료’로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을 받았다. 다시 공부를 시작해 침례신학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도예 활동을 통한 집단상담이 장애아 어머니의 양육 스트레스 및 자기 효능감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도 썼다.
“특수학교에 근무할 때 장애아들에게 도자기 수업을 했는데, 평소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아이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동안에는 가만히 앉아서 흙을 만지더군요. 부드럽고 촉촉한 흙을 만지며 원하는 모양을 만들고 불에 구워 작품이 완성될 때 아이들은 성취감을 느끼죠. 작년부터 자폐아와 가족들에게 도자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자폐아들이 도자기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대인관계와 사회적응력을 키우고, 부모들도 자녀를 더 이해하게 되고 양육 스트레스도 풀 수 있지요.”
박정희 동문은 2013년 7월 도자기를 시작한 지 14년 만에 첫 개인전을 열었고 올 11월에 두 번째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지난 해에는 교장으로 승진해 교육자로서 도예가로서 모두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다. 한때 눈물과 한숨이 서렸던 그의 도자기에 지금은 사랑과 기쁨이 넘친다.
“여전히 일상생활을 스스로 하지 못해 옷을 입히고 양치질을 해줘야 하지만 아들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아들의 순수하고 천진한 미소가 나를 정화시키고 아름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글·김현미(신방 86입) 동아일보사 주간동아 팀장


원본 http://www.yonsein.net/ebook/dong/1505/201505.pdf    13 of 24

인용 http://blog.daum.net/choemh/16140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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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라는 초등학교 여교사가 있었다 .
개학 날 담임을 맡은 5학년 반 아이들 앞에 선 그녀는

아이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였다 .

 

그 것은 아이들을 둘러보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


그러나 바로 첫 줄에 구부정하니 앉아 있는 작은 남자 아이 ,

철수가 있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


K 선생은 그 전부터 철수를 지켜보며
철수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옷도 단정치 못하며 , 잘 씻지도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
때로는 철수를 보면 기분이 불쾌할 때도 있었다 .

 

결국은 철수가 낸 시험지에 큰 X 표시를 하고

위에 커다란 ㅇ 빵점을 써넣는 것이 즐겁기까지 한 지경에 이르렀다 .

 

그런데 K 선생님이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의 지난 학년의 생활기록부를 다 보도록 되어 있었다 .

그러나 그녀는 철수것을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다 .
그러다 마지막으로 철수의 생활기록부를 보고는 깜짝 놀랄수 밖에 없었다 .

 

철수의 1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렇게 써 있었다 .
“ 잘 웃고 밝은 아이임 .

깔끔하게 잘 마무리하고 예절이 바름 .
함께 있으면 즐거운 아이임 . ”


2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렇게 써 있었다 .

“ 반 친구들이 좋아하는 훌륭한 학생으로 ,

어머니가 불치병을 앓고 있음 .
가정생활이 어려울 것으로 보임 . ”

 

3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러 하였다 .
“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함 .
최선을 다하지만 아버지가 별로 관심이 없음 .

어떤 조치가 없으면 곧 가정생활이 학교 생활에 까지 영향을 미칠 것임 . ”


철수의 4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썼다 .

“ 내성적이고 학교에 관심이 없음 .
친구가 많지 않고 , 수업시간에 잠을 자기도 함 . ”


여기까지 읽은 K 선생은 비로소 철수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뒤 늦게 깨달아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
반 아이들이 화려한 종이와 예쁜 리본으로 포장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왔는데 ,

철수의 선물만 식료품 봉투의 두꺼운 갈색 종이로 어설프게 포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

 

K 선생은 애써 다른 선물을 제쳐두고 철수의 선물부터 포장을 뜯었다 .

알이 몇 개 빠진 가짜 다이아몬드 팔찌와 사분의 일만 차 있는 향수병이 나오자 ,

아이들 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러나 그녀가 팔찌를 손목에 차며

와아!! 정말 예쁘구나~ 감탄하고 ,
향수를 손목에 조금 뿌리자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


철수는 그날 방과 후에 남아서 이렇게 말했다 .

“ 선생님 , 오늘은 선생님에게서 꼭 우리 엄마에게서 나던 향기가 났어요 . ”

 

그녀는 아이들이 돌아간 후 한 시간 넘게 울었다 .
바로 그날부터 그녀는 읽기 , 쓰기 , 국어 , 산수 가르치기를 그만두었다 .

그리고 아이들을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


K 선생은 철수를 특별히 대했다 .

철수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때면 철수의 눈빛이 살아나는 듯했다 .
그녀가 격려하면 할수록 철수는 더 빨리 반응하였다 .

 

그 해 말이 되자 철수는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겠다는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가장 귀여워 하는 학생이 되었다 .


1 년 후에 그녀는 교무실 문 아래에서 철수가 쓴 쪽지를 발견 했다 .

거기에는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교사였다고 쓰여져 있었다 .


그로부터 6 년이 흘러 그녀는 철수에게서 또 쪽지를 받았다 .

고교를 반에서 2등으로 졸업했다고 쓰여 있었고 ,

아직도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선생님인 것은 변함이 없다고 쓰여 있었다 .

 

4 년이 더 흘러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
이번에는 대학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쓰여져 있었다 .

이번에도 그녀가 철수에겐평생 최고의 선생님이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

하지만 이번에는 철수를 나타내는 이름이 조금 더 길었다 .
편지에는 ‘ Dr. 박철수 박사 ’ 라고 사인 Sign 되어 있었다 .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그해 봄에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
철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으며 ,

K 선생님에게 신랑의 어머니가 앉는 자리에 앉아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

그녀는 기꺼이 좋다고 화답했다 .


그런 다음 어찌 되었을까 ?

그녀는 가짜 다이아몬드가 몇 개 빠진 그 팔찌를 차고 ,
어머니와 함께 보낸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어머니가 뿌렸었다는 그 향수를 뿌렸다 .

 

이들이 서로 포옹하고 난 뒤 이제 어엿한 의사가 된 박철수는 K 선생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

" 선생님 ,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

그리고 제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

 

K 선생은 또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다 .
“ 철수 너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구나 !
내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너란다 .

내가 널 만나기전 까지는 제대로 가르치는 법을 전혀 몰랐거든 .”
-------------------------------

이 말이 , 아니 이 이야기가 꼭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

누군가를 믿어주고 칭찬해준다면 어른일지라도 분명 큰 일을 해내리라 믿습니다 .

 

내 입술이라고 상대방을 내 잣대로 판단해 배우자를 , 자녀들을 ,

또는 주변의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하지는 않았는지 ?

K 선생님을 보며 ,다시 한번 나를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

 

" 격려는 귀로 먹는 보약이다 ! "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 "

 

우리 모두 이 시간이후부터는 남의 말을 좋게 하십시다 .
상대를 좀 더 이해하고 격려하고 북돋우고 칭찬해 주십시요

아울러.. K. 선생님께선 저히 초등학교 선생님이 셧 습니다.

올해 70순을 바라보고 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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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동지'를 꿈꾸며...(김진숙지도위원 편지글)

http://bsnodong.tistory.com/m/post/30

 

 

집회도 없고 수련회도 없는 휴일은 외려 잠이 일찍 깨요.
아무 일도 없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언제부터 저는 평화가 실감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걸까요.

아무 일도 없는 이상한 토요일.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화면에 뉴스속보가 뜨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 뇌출혈로 입원”


검찰조사가 시작되면 입원으로 시작해서

휠체어나 마스크가 구명보트처럼 등장하는 꼴을 늘 봐오긴 했습니다만
당신은 그런 쇼를 할 사람은 아닌지라 스트레스가 어지간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10 여분 후 “노무현 전대통령 사망한 듯”이라는 자막이 뜨고

그제서야 뒹굴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날이 일구 우일구하기 여념없는 시시껍절한 방송이 중단되고 속보가 이어지더군요.
경호원, 사저뒤편, 부엉이 바위, 세영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심폐소생술, 열상 따위의

일상과 밀접하지 않은 단어들이 바퀴벌레처럼 툭툭 튀어나와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정신적 공황상태까진 아니었지만 불면 탓으로 약간 멍한 채로 이틀을 보냈고

월요일 아침 부산역까지 가긴 했으나 조문은 못하고 역 광장을 몇 바퀴 빙빙 돌다 왔습니다.

선뜻 신발을 벗고 절을 하는 문상객들의 거리낌없는 몸놀림이 참 부럽다고 생각하며.
잠이 안오대요.


다음 날 다시 부산역엘 갔습니다.
역 광장을 또 빙빙 돌다가 그냥 돌아가면 다시 닥칠 불면의 밤이 성가셔
문상객들의 뒤에 얼른 붙어 섰습니다.
방명록에 몇 줄 쓰기도 했습니다. 잠을 자야하니까.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습니다.
90년 변호사 접견 오셨을 때처럼
봉하마을 어딘가에 앉아 각자의 위치가 만들어 낸
그동안의 원망과 미움들을 두런두런 털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곧..
고맙고 죄송합니다.“
 
90년. 제가 첫 징역을 살 때였습니다.
접견을 오셨었지요.
보통 변호사 접견은 재판 전날 와서(사실 재판 전날도 안 오는 변호사도 많습디다만)
재판절차를 일러주고 이빨도 맞추고 하는데 재판날짜와는 아무 상관없는 시기였던지라
많이 의아했던 만큼 20년 전인데도 이리 생생하네요.


접견실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더군요.
보통은 재소자들이 한 시간 이상씩 주리를 틀면서 기다리는데.
요샌 교도소 반찬이 뭐가 나오냔 얘기, 여사에선 뭐하고 노냐는 얘기,

변호사가 해주던 징역살이 얘기, 남사에선 뭐하고 논다는 얘기,
법무부 시계도 가니까 재밌는 놀이를 많이 개발해서 징역을 잘 깨라는 얘기.
변호사가 접견을 와선 재판이야긴 한마디도 없이 노닥거리기만 하다

그 더디기로 유명한 법무부시계가 세상에 한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가야겠네” 일어서시길래 하도 황당해서 물었습니다.
“왜 오셨어요?”
“진숙씨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 줄라고 왔지요”

 

그리고 당신은 정치권으로 갔고,
정치권으로 갔다는 건 권력을 탐하는 변절로 규정하는데 한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니
변호사 비용을 거침없이 떼먹고도 사기꾼의 돈을 떼먹은 것 마냥 일말의 부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직하면 갚으마. 유전 발견하면 갚으마.

보물선 찾는대로 갚으마. 막연한 약속이 선임비였던 시절이었으니.
그게 인권변호사의 당연한 책무였으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상실감이었어요.

 

그 시절 당신은 우리들의 유일한 빽이었는데.
공돌이 공순이 편을 들어주는 가장 직책 높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있어 우린 수갑을 차고도 당당할 수 있었는데.


그때 직감적으로 생각했어요.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겠구나.
재판장 앞에서 수갑을 찬 채 잔뜩 주눅 든 우리를 향해, “피고인은 무죕니다.”
외쳐 줄 사람이 이젠 없겠구나.
이제 재판에서 지더라도 찾아가 울 데도 없겠구나.
노동자들이 그들의 부엉이바위인 크레인 위에 올라갈 때 따라 올라가지도 않겠구나.

 

그리고 당신을 잊었습니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어서 혼자 진행했던 1심 재판에서 당연히 지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왜 항소를 안했어요?” 라는 질문에 “항소가 뭔데요?” 라고 되묻던 저에게
“노동자가 항소를 알면 그건 노동자가 아니지.” 하던 말도 잊었고,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함께 했던 소모임도 잊었고,
군사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의 그 막막한 눈빛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유일하게 내 얘기를 그대로 들어주던 무료법률 상담소도 잊었고,
어느 날은 밤에 오라 길래 밤에 찾아갔더니 그날이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기일이라고
변호사 사무실 구석에 조촐한 제상을 차려놓고 아무 말도 없이 유령들처럼 절을 하던
그 뭉클하던 밤도 잊었고,
함께 같은 거리를 달리던 6월 항쟁도 잊었고,
최루탄 가루가 싸락눈처럼 내린 범냇골 국민운동본부 옥상에서 막걸리를 나누던 걸판지던 뒤풀이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침례병원이 초량에 있을 때였습니다.

노동조합 조합원 교육에 초청을 받았는데 앞 시간 강사가 당신이었더군요.
당신은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던 계단에서 마주쳤습니다.
난 참 어색하기가 짝이 없습디다.
그냥 모른 척 할라고 했습니다만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지요?”
굳이 손까지 내미시더군요.
그때 대답을 했거나 웃기라도 좀 했으면 지금 잠을 이루기가 좀 쉬웠을까요.
 
그리고 당신이 출마한 대선에서 전 4번을 찍었습니다.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외포리를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생 1번을 벗어난 적이 없는
큰언니가 전화를 했더군요.


“이 노무헤니가 그 노무헤니지? 니 벤호사. 그 사람 찍었다.

너 인쟈 깜빵 안가지? 복직두 되갓지?”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제가 왜 “내 변호사”를 놔두고 4번을 찍었는지 우리 큰언닌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거예요.
2번과 4번의 극심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도 이리 막막한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그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은 저의 재주로는 난망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습디다만

이회차이가 당선된 거보다 노무혀이가 당선된 게 노동자들에게는 더 힘들 거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립은 깊어졌고 고착화되었습니다.


김영삼이가 당선되었을 때 운동권이 1/3이 떨어져 나갔고,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재야가 사라졌고,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서는 그야말로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았습니다.


한 사업장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해고될 때 그 무지막지한 자본을 향해 호통쳐주는 어른 하나 없습디다.
노동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거리로 나설 때 역성들어주기는커녕 죄 우리만 나무랍디다.


그거 아세요.

당신은 조중동이랑 열심히 싸우셨습니다만 우리에겐 조중동이랑 한편처럼 보인 거.

 

 “야~ 기분좋다!” 시며 봉하로 가셨을 때 오리농법보다 더 중요한 일은 농민들의 삶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왜 목숨 걸고 한미 FTA를 반대했는지.
그리고 전용철, 홍덕표 그들의 죽음에 당신이 늦게나마 사과를 하면 참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봉하마을을 갔을까요. 아마 갔겠지요.
그리고.. 김 주익 얘기도 했을까요. 아마 그 얘긴 못했을 거예요.
말로 꺼내긴 크나큰 상처였으니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 말씀.


유난히 노동자들에겐 가혹하셨습니다.
2003년도 한진중공업에서 저는 한꺼번에 두 명의 지기이자 동지를 잃었습니다.
김 주익은 600여명 조합원의 명퇴에 맞서 2년을 싸웠고 노사가 합의를 했고
그 합의를 회사가 번복을 했고 그래서 크레인에 올라갔고 그 크레인 위에 129일을 매달려 있다가
아시다시피 목을 맸습니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런 시대는 정말 지났을까요.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에게 종종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조각인 것을..

 

저는 당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당신을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배가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대에 그 꿈은 가장 허황되고 지리멸렬해졌습니다.
때론 우리가 품은 꿈이 너무 초라했고 궁색했습니다.


당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짤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으로 격상됐고 그들은 언론과 자본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조차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기주의를 꾸짖으십디다만 동료가 수백 명씩 짤리는 걸 목격한 노동자가

비정규직에게 내밀 손이 남아 있겠습니까.
저 살아남는데 써야지.

 

징역을 살 때 만난 사형수가 있었어요.

이 여잔 영치금이 한 푼도 없는 개털이었는데
새로 신입이 들어오면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샴푸나 속옷을 사달라는 거예요.
출소한 사람들이 쓰다만 물건들도 다 그 여자 차지였죠.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는 게 도덕의 눈으로 보자면 참 추접스럽습디다.
그 여자 집행되고 보니 샴푸나 속옷 나부랭이가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옵디다.
백분의 일도 못쓰고 죽었죠. 생에 대한 나름의 집착이었던 거죠.
샴푸 생길 때마다 빌었겠죠. 이거 다 쓰고 죽자.


정규직 노동자들은 삶의 벼랑에서 그런 심정으로 잔업하고 철야를 합니다.
얼마가 남았을지 모를 정규직의 삶을 그딴 식으로 저축하면서.


그 무렵쯤이었을 거예요.
변호사비용을 이제 그만 갚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당신의 시혜나 은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적이 될 거라면 호적수이고 싶었습니다.
실력도 한참 모자라고 열정도 전만 못하고 진정성마저 잃어 그리 되진 못했습니다.
그게 참 부끄러워요.


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나 우리를 속속들이 아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고

남은 자들은 동네북이 되어 초딩들마저 두들겨대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크레인엘 올라가고 굴뚝엘 기어 올라가도 언놈 하나 눈길주는 놈이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밖에 못나온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입 달린 사람은 죄다 침이 마릅디다만
고등학교도 못나온 저 같은 노동자들은 당신의 시대에 대부분 절감해야 할 원가가 되어
구조조정 당했고 효율화를 위해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차라리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짤렸으나 당신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짤렸습니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24년의 세월 동안

전 아직 복직도 못한 해고노동자로 찌질한 50대가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 동지였고 오랜 세월 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뜨겁고 바른.
만고 씰데없는 소립디다만 그래서 대통령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참 좋았겠단 생각
지금도 해요.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떠돌던 예감이 당신의 죽음으로 확연해집니다.
한 시대가 갔다는..

이제 상고출신이 변호사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양양한 가도가 보이고 그 길을 편하게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의 있습니다!”
외칠 때, 그 외침에 뒤돌아보는 사람도 이제 더는 없을지도 몰라요.

 

만 명이 울어주면 천국에 간다했던가요.
천국에 가셨을 거라 믿어요. 진심으로.


김주익 곽재규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당신의 시대에, 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서러움으로 억울함으로 목 놓아 울었던
죽음들입니다.

당신처럼 벼랑 끝에 내몰렸던..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죽음을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란 적이 있었어요.
하도 야속해서. 노동자의 삶을 안다는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나 너무 미워서.
아무리 야속하고 미워도 그런 바람은 품지 말걸 그랬다 싶어요.
애증도 부질없어 졌습니다.

언젠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말들이 기형도의 시처럼
떠돌다 때때로 부딪히겠지요.


이제 변호사비용은 영원히 안 갚아도 되게 생겼습니다.
다음 생에 오실 땐, 너무 똑똑하게 오지 마시구려.
사법시험 같은 것도 합격하지 마시구요.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저는 당신에게 변절이라 손가락질 할 일 없이,

당신은 절더러 경직되었다거니 세상을 모른다거니 한심해 할 일 없이.

떠날 일도 보낼 일도 없이 그냥 내내 동지로.
그래서 언젠가 하셨던 말씀대로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다.
그 멋진 말씀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남다른 정의감 그대로 만날 수 있길.
다시는 미워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이렇게 미어질 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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