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신부의 1910년대 대한민국 사진◈  






차 한국방문 1925년 5월14일 ~ 10월2일

베버 신부는 한국에 대해
"내가 그렇게도 빨리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나라였다." 라고
고백 했습니다. 1925년 촬영된 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는
한국에 대한 한 독일인 선교사의 지극한 사랑과 연민의 기록입니다.

베버 신부는 직접 영화에 출연해 당시 영화를 보는 독일인 관객들을 위해
칠판에 지도를 그려가며 한국을 유럽의 이탈리아 반도와 비교해서 묘사
하기도 했습니다.
 

 1925년 수도 서울 시가지의 모습 



혜화문(동소문) 태조 1397년 건립, 일제강점기 전차공사 중 헐렸다.




1925년 북한산의 모습


1925년 북한산의 모습


1925년 서울 도성 성곽 모습

베버 신부는 서울이 오목한 분지이고 희고 단단한 성곽이 능선을 따라서
산으로 기어 올라가는 것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산을 구름속에 솟아 있는 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서울의 마을들이 주로 산 밑에 모여 있는 것을 주목 했습니다.
그리고 쌀을 좀 더 많이 재배하기 위해서 넓고 좋은 땅은 농토로 삼았고
집은 비좁은 산 비탈에 잡았다고 분석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인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며 하루 종일 자연과 함께하다가 석양을 뒤로 하고
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고, 자연을 정복하기 보다
그 찬란함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꾼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의 문화를 존경했습니다.
독일 민족이 아직 숲에서 뛰어 다닐 때 한국은 이미 고도의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 여겼습니다. 그에게 감동을 주었던 한국 '문화' 그 중에 하나는
'효도' 입니다. 천년 이상 지속된 유교전통에 따라 복종과 순종 그리고
권위에 대한 인정은 한국인들이 태어나면서 배워오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조상과 어른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삶의 일부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가족에 대한 책임과 사랑은
그를 사로 잡았습니다.





















 


베베 신부는 한국의 농경 문화에 주목하면서
특히 품앗이라는 노동 형태에 매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 어디어서도 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공동체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노동을 통해 성숙된 공동체문화'

이는 카톨릭 공동체에 거대한 뿌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베버 신부는 일본의 신민지 폭력성 앞에서 아름답고 고귀한
한국의 공동체 문화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1925년 금강산 장안사, 6•25 전쟁 때 완전히 불에 타 사라지고
지금은 축대, 비석 등만 남아 있다.


1925년 금강산 장안사 승려들의 모습


1925년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

베버 신부 일행은 1925년 6월초 약 열흔간의 일정으로 금강산을 여행합니다. 
그리고 금강산 장안사의 가람의 배치와 명칭에 대해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의 화려한 장식을 보고 마치 마법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제단을 덮고 있는 우아한 지붕, 그것은 수없이 많은 붉은 나무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력적으로 짜 맞춘 것입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의 사찰이야말로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록 한국이 유교 국가였지만 민중의 삶에는 불교 문화가
훨신 강력한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가 보기에 불교는 한국의 역사에서
역사와 민중의 편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을 떠나면서
그는 "1911년에는 내가 그리도 빨리 사랑에 빠졌던 한국과 이별할 때
작별의 아픈 마음으로 '대한만세'를 불렀다.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국과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함께 가져오게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예술가였고, 문학가였으며 겸손한 목자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
그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1956년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사랑과 연민의
기록은 먼 세월을 돌아 우리의 곁에 와 있습니다.


세월호 1주기 강우일 주교 강론

 

오늘 우리는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았다.
 
세월호는 출항해서는 안 될 배였다.
1년 전 그날 인천항은 악천후였고, 가시거리는 800미터밖에 안 되었다.
그 때 출항한 배는 세월호 단 한 척뿐이었다.
그리고 출항 당시 세월호는 규정된 물량의 약 2배를 과적했고, 엄청난 화물들을 고정하지도 않고 적재했다.
그리고 화물을 더 싣기 위해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배 밑바닥의 평형수를 절반 이상 빼버렸다. 출항 전에 인천항 운항관리자는 배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않고 안전점검 보고서에 ‘양호’라고 기재하고 출항허가를 내주었다.
심각한 기상악화가 풀리지 않아 단원고 아이들은 세월호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아이들을 다시 태우고 돌아올 버스가 인천항으로 출발했었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세월호는 왜 무리한 출항을 했을까?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아무것도 밝혀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왜 갑자기 세월호가 침몰했는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검찰은 침몰 원인으로 급변침을 지목하며 ‘조타미숙으로 선체가 크게 기울었으며, 과적 및 고정 불량과 평형수 부족으로 복원력을 상실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급변침은 사고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라고 한다.
세월호가 왜 급하게 방향을 틀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7천 톤이나 되는 세월호가 100여분 만에 완전 침몰했고 선체가 1초에 14도나 기울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급격한 침몰과 변침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월호에서 자기 발로 나온 사람 말고는 해경이 들어가서 구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세월호는 사고 후 1시간 동안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라고 하는 안내방송 외에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침몰 당시 아이들은 유리창을 두드리며 구조 요청을 했지만, 해경은 선실 유리창을 깰 생각도 안 했고, 탈출 안내도 하지 않다가 10시17분, 해경 함정 123정이 도착한 후 47분 만에 현장에 있던 해경 헬기와 선박, 잠수부는 돌연 일시에 철수했다.
후에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잠수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경이 “언딘”의 작업을 위해 철수를 요구했다.’ 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다.
사고 해역 근처에 있었던 4만톤 급의 미 함정의 지원도 거부했다.
해군참모총장이 두 번이나 통영함 출동을 명했는데도 해경이 해군함정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리고 일본 해상보안청의 구조협력 제안도 거절했다.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사고의 원인과 경과를 분석해 줄 전문가들이 침묵하기 시작했다.
어떤 언론사에 따르면 세월호 문제를 제기해 온 전문가들이 4월21일부터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 시작했다고 한다.
익명의 대학교수는 인터뷰에서 ‘압력이 들어온다. 주로 정보 부처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4월22일 방송통신위원회는 ‘세월호 관련 재난상황반 운영계획’이라는 문건을 통해 방송사 조정 통제 및 대응 임무를 하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세월호는 국내 여객선 중 유일하게 해양 사고 발생 시 국정원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국정원은 4월16일 오전 9시10분, 청해진해운 사장 등으로부터 사고 문자 메시지를 받았고, 9시28분에 해경상황실에 전화해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월호 내부에서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국정원은 세월호에 99가지의 상세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왜 민간 여객선이 배의 시설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그리고 선원들의 수당이나 휴가까지 국정원 지시를 받아야 했는지 아무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한국 주교단이 함께 로마를 방문하고 프란치스코 교종을 뵈었다.
5년마다 한 번 하도록 되어 있는 정기 행사다.
그 때 교종께서 우리에게 제일 처음 던지신 질문이 ‘세월호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였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정부가 세월호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조사위원회 조직은 구성했는데 실제로 조사는 전혀 한 발자국도 진척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밖에 답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교종께서는 아직 세월호 가족들의 비통함이 잊을 수가 없고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다고 하셨다.
 
세월호 참사 한 달 후인 5월16일 대통령은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분명히 ‘특별법은 만들어야 하고, 검경수사 외에 특검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낱낱이 조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씀까지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위원회는 한 발자국도 못 내딛고 있고,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의 독립적 진실규명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시행령을 발표했다.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사고를 유발한 원인 제공 기관들인 한국해운조합, 지방항만청, 한국선급, 선박안전기술공단과 직접 연결된 상부 기관이다.
간단히 말하면 직접 사건의 피고가 되거나 피고와 아주 가까운 부서다.
피고 신분의 공무원이 세월호 진상 규명의 실무 전체를 책임 조정하는 역할을 맡도록 하는 시행령은 진실 규명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피고의 한 가족에게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정부는 희생자 가족에게 보상비는 몇 억 원씩 줄 것이라고 흘리며 돈다발을 자꾸 펄럭이며 마치 유가족들이 돈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처럼 국민 여론을 오도한다.
이것은 유가족들에 대한 인격모독이다.
대통령이 눈물 흘리며 한 약속을 이런 식으로 변형하고 왜곡하면 국민은 국가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 한다.
어떤 이들은 광화문 광장에 기한도 없이 농성하고 노숙하고 있는 가족들, 시민단체 사람들의 존재가 불편하고 피곤하고 혐오스럽게 느낀다.
언제까지 세월호 문제에 붙잡혀 있을 것인가, 나라 경제도 불황이고 민생 문제도 산적한데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강도 만나서 얻어맞아 초죽음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웃을 보고도 내 갈 길이 바쁘다며 길 건너편으로 돌아서 지나가버리는 레위인이나 사제와 다를 바 없다.
이웃 형제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질 수 없는 오늘의 메마른 우리 영혼이 서글프다.
형제의 신음 소리가 전혀 우리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콩크리트 벽 같은 불통의 우리 마음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304명이나 되는 이웃 형제와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린 사건의 충격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오늘의 개인주의적 문화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국민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기관이 외면하고 밝히려 하지 않는 의혹 가득한 사건을 그냥 잊고 덮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우리 몸에 돋아난 종기의 뿌리를 도려내지 않고 겉에 붕대만 감고 말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종기는 속에서 더 곪아서 뼈 속까지 썩어 들어가고 나중에는 세월호보다 더 큰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의 비극을 잊으려하기보다는 도리어 거듭 상기해야 한다.
희생자들의 고통과 참담한 최후를 기억해야 다시는 그런 참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와 회심을 열매 맺을 수 있다.
세월호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자꾸 상기하여 질문하고 밝히려고 해야 진실한 원인에 접근할 수 있고 그 사악한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고 거기 머물고 있는 가족들과 연대하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나누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걸린 몹쓸 개인주의의 염병에서 치유될 수 있다.
상처는 회피하고 어설프게 봉합해서는 속에서 갈수록 더 곪아간다.
 
우리는 오늘 성체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해내야 하겠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가족들의 상처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기를 청하도록 하자.
그리고 동시에 이런 참혹한 비극을 직접 초래한 사람들이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유가족들과 국민에게 용서를 청할 용기를 내도록 기도하자.
 
예수님은 진리의 증언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 치셨다.
우리는 오늘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불의와 의혹과 고통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살아있는 증언을 하도록 초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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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7장] 함석헌의 야인혼과 저항정신

2013/03/06 08:00 김삼웅

 

 

 

큰 사상가가 나지 않은 오늘의 한국에서 함석헌은 20세기 우리 민족이 배출한 대사상가다.
<교수신문>의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성과이다. 그이의 신앙ㆍ철학ㆍ평화ㆍ비폭력 ㆍ인권ㆍ역사ㆍ저항ㆍ교육ㆍ언론ㆍ시ㆍ예술ㆍ아나키즘과 이것의 통섭은 한 세기 우리 민족을 상징하고도 남는다. 또한 그의 문체ㆍ시론(時論)ㆍ서체ㆍ독서ㆍ연설ㆍ꽃가꾸기 등 연구과제는 산적해 있다.

함석헌의 생애는 곧 한국현대사요, 그의 철학은 곧 한국철학사요, 그의 저항운동은 곧 반독재 민권운동사다. 그런가하면 주저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단재와 백암의 민족사관에 비견하여 독특한 씨알사관이고, 그가 만든 <씨알의 소리> 잡지는 한국민중언론의 통사다. 뜻 있는 젊은이들이 외국 학문(인)에 매달리기보다 함석헌의 광맥을 탐구하여 학위를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올수록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사상적으로 그만큼 풍요로워 질 것이다.

한민족은 고려시대 100년, 일제식민지 36년과 미군정 3년,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3인의 30년 무인정권을 빼면 수 천년을 문민통치의 전통을 지켜왔다. 수많은 학자를 키우고, 학맥을 이루었다. 그래서 조선왕조 때만 해도 퇴계학, 율곡학, 남명학, 다산학 등 학문의 큰 산맥이 이루어지고 현대로 이어진다.

우리 나라에서 정부수립 60여 년 만에 개인의 학맥을 형성한다면 누가 가능할까.
우선 학문의 넓음과 깊음, 전문성, 일관성, 대중성, 독자성, 국제성 등을 종합한다면 ‘함석헌학’ 즉 ‘씨알학’이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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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7장] 함석헌의 야인혼과 저항정신

2013/03/05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씨알을 하늘처럼 모셨다. 씨알이 하느님이고 붓다이고 절대선이었다. 그래서 나라를 일으키는 일, 세계평화를 가져오는 길이 씨알 곧 민중의 힘을 키우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씨알을 지구생명 45억년 진화과정의 마지막 옹근 열매이면서, 아직 미완성의 과정 속에 있는 생명의 실체라고 생각하면서, 씨알의 인격, 대접, 성장을 위해 온 몸을 던졌다. 때로는 정신분열증환자가 되고, 바보가 되고, 대안없는 반대론자, 비폭력의 투항주의자란 폄훼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를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었다.

어느 논자가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의 세례를 받고, 간디의 지팡이를 짚고,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와 있는 사람”(안병욱)이라 평했지만, 이것은 함석헌의 반쪽 그림에 불과하다.

그는 삼교(三敎)에 출입하고 구류(九流)에 통달하였으며 언변이나 문장에 있어서는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다. 그는 한국의 고유사상과 중국의 노장사상과, 서양의 기독교사상과 인도 철학, 그리고 이슬람 경전을 하나로 조화시켜 독특한 야인사상, 씨알철학을 정립하였다. 민주주의를 믿고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실천하였다.

맹자가 말한 “권력과 명예에 관계하더라도 그곳에 말려들어 헤어나지 못한 일이 없고 가난하고 미천한 처지를 당하면서도 마음이 흔들림이 없고 권위와 힘으로 압력을 가해와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그런 사람, 즉 대장부다. 함석헌은 조선이 낳은 20세기의 대장부였다.

흰머리, 흰수염, 흰 두루마기, 흰 고무신 차림의 그는 전통적인 한국 선비의 모습 그대로였다. 선풍도인같은 기골이나 당당한 걸음걸이는 한국의 이상적인 선비상이고 헌헌장부의 모습이었다.

사람이 늙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늙어서 죽는 것”보다 “늙어서 낡아지는 것” (정수일)일 터인데, 함석헌은 청년시절보다 중년이, 중년시절보다 장년이, 장년시절보다 노년이 더 활기차고 헌헌한 모습이었다. 그는 늙지 않고 낡아지지 않고 영원한 청년으로 살았다.

중국의 학자 왕부지(王夫之)의 책 <독통감론(讀通鑑論)>에 이런 내용이 있다. 마치 먼 뒷날의 함석헌을 내다보고 쓴 것 같다.

시국의 안위, 백성의 질고에 대하여 그것을 염려하였으나 대책을 강구하지는 않았다. 문장의 명망은 후대의 평가에 맡기고 조급하게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행동거지는 산과 같이 무겁고, 그의 수양은 물과 같이 깊으며, 고금에 통달하고 만 가지 변화 속에서도 스스로 순수함을 잃지 않았으니, 무엇이 그를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주석 12)

창간호(1970년 4월호)

함석헌의 글을 읽으면 30대의 <성서조선>에 쓴 글로부터 70~80대의 <씨알의 소리>에 기고한 글에 이르기까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사유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내용의 신선함과 초시간적 현재성을 살피게 된다. ‘높은 산, 깊은 골’에서만 생성이 가능한 일이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 함석헌을 사회진화론자라고 평가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것은 장님의 코끼리 만지기보다 더 단면적이다. 떼이야르 샤르뎅의 ‘우주적 사유’를 넘나들고, 웰즈의 <세계사>를 질주하고, <바가바드 기타>를 번역하고, 노자, 장자, 간디와 벗을 삼고, 기독교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함석헌에게 사회진화론자나 진화주의자란 팻말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1870년 이후 열강의 조선 침략과 때를 같이하여 도입되었던 진화론은 당시 개명 지식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며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이것이 우승열패, 양육강식의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려는 지배권력과 결합하면서 신채호 등 조선의 열린 지식인 사회에서 배척되었다. 카토 히로유키(加藤弘之)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대표적 사회진화론자들은 사회진화론을 국가유기체설과 결합시키고, 이것은 천황제 이론의 핵심이 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일본 군국체제 강화의 배경이 되고, 한국의 친일파들은 “사회진화론을 빌어서 당시의 국제환경을 황인종과 백인종의 인종싸움의 시기라고 단언하고, 황인종 사이의 반목은 백인종의 아시아 침탈과 그 지배구조를 초래하게 된다는 명목 아래 인종적인 싸움의 긴급성을 강요하였다.” (주석 13)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지배하는 것을 자연의 법칙으로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조선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한 사회진화론을, 일제강점기에 <성서조선>에 글을 쓰고 탄압을 받았던 함석헌이 수용했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함석헌과 같이 국제평화주의자,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부한 독립주의자, “하느님의 발길에 채어 다니는” 사람, 씨알 존중의 평민사상을 가진 야인이 ‘국가유기체설’과 결합한 사회진화론을 신봉하거나 수용했을 리는 만무하다.

함석헌은 진화론자가 아닌 저항아, 비판자, 반항주의자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의 그 ‘말씀’은 곧 저항이며, 이 세상의 모든 단어가 사라져도 ‘저항’- 프로테스트라는 말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한 저항인이다. 그 저항의 목표가 사익추구가 아닌 씨알이 사람대접 받도록 하는데 주어졌다.

그는 유약한 선비나 초월적인 종교인, 진화론적 양육강식주의자, 관념론적인 사상가가 아니고, ‘정신의 순례자’는 더욱 아니었다. 그는 투사이고 전사이고 도전자이고 저항인이다. 그는 독립자존이되, 고립하지는 않았다. “싸우는 평화주의자”이고, 분노하는 푸로메테우스였다. 들사람이고 자유언론의 주창자이다.
그는 펜이 요구될 때 글로써 저항하고, 지면이 봉쇄되면 직접 행동으로 나서고, ‘언론의 게릴라전’을 주창하면서 실행하였다. 군사독재의 폭압에 세상이 침묵할 때 분연히 일어나 ‘할 말’을 하고, 독재자에게 ‘드리대고’, 감옥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야인으로써 들사람의 언어 즉 지배언어나 외래언어를 피하고 순수 씨알의 구어체로 말을 하고 글을 썼다.

민중의 뜻을 저버리는 거대신문 몇 개가 문을 닫아야 한다고 족벌신문을 비판하고, 씨알에게 언론의 감시자가 되라고 촉구했다. 그는 자본에 종속된 대학, 교회를 비판하고, 사주에 예속된 언론인을 질타하면서도 누구보다도 대학, 교회, 언론을 아꼈다.

인류사의 거대한 진보의 발자취는 압제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었다. 공자는 ‘상갓집 개’ 소리를 들어가면서 지배층에 맞서 ‘여민(與民)’을 추구하고, 석가모니는 부왕의 왕관을 거부하면서 ‘중생제도’에 나섰고, 소크라테스는 기득세력의 독배에 맞서면서 ‘아테네의 등애’가 되고, 예수는 바리세인들의 십자가에 못박히면서 구조악과 싸웠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압제에 맞서 화형, 참형, 팽형, 징역, 유배 등 온갖 고통을 당하면서 자유와 정의를 지키고자 하였다. 함석헌도 그랬다. 그는 위대한 저항인이다.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 속의 야인, 그가 추구해온 가치와 이상은 한국인은 물론 21세기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이상이고 가치관이다.
(주석 14)


주석
12> 유절(劉節), <중국사학사>, 신서원, 2000.
13> 전복희, <사회진화론과 국가사상>,189쪽, 한울아카데미, 1996.
14> 이 장은 필자가 2010년 6월 9일 함석헌기념사업회 주최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ㆍ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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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7장] 함석헌의 야인혼과 저항정신

2013/03/04 08:00 김삼웅

 

 

‘가슴에 화살 꽂힌 사나이’가 함석헌이다.
양극성과 이율배반과 모순율과 동양 대 서양과 옛날과 오늘을, 들사람의 실타래로 교직하여 가이없는 한 필의 비단을 짠 사람이다. 생각은 천의무봉, 활동은 원융무애, 생활은 손방이였다. 그런 속에서 “깊은 사색의 골을 건너고 생각의 용광로에서 정련된 글이요 말이”(김경재) 쏟아졌다.

나는 함석헌의 수백 수천 편의 글 가운데 <들사람 얼>을 특히 좋아한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가 자전적 기록이라면 이 글은 함석헌의 자화상이다. 자신의 내면과 자신의 이상을 웅혼한 필치로 그린 자화상이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중국 전설상의 성군 요(堯) 임금이 젊은 시절의 친구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에게 나와서 벼슬을 하자고 권하니까, 그들이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면서 영천수 흐르는 물에 귀를 씻었다는 이야기.

장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 왕이 벼슬을 권하자, 제사 돼지나 사당 안에 점치는 죽은 거북이보다 진창속의 돼지, 바다 감탕속의 거북이가 되고자 한다는 이야기.

천하의 권력자 알렉산더가 찾아와 버티고 서 있자, 해 드는데 그림자 지니 비키라고 호통친 디오게네스의 이야기.

한 개 선비로서 권부에 나선 후한(後漢) 광무제가 항상 마음에 걸린 동향의 벗 엄자릉을 궁궐로 불러 진수성찬으로 대접하고 함께 잠을 잘 때 그가 거침없이 황제의 배위에다 다리를 턱 올려놓고 자더라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러므로 소부, 허유가 사실로 있었거나 없었거나, 자릉이 정말 광무 배때기를 눌렀거나 안 눌렀거나, 디오게네스가 과연 알렉산더를 사선으로 보았거나 말았거나 그건 문제가 아니다. 그것과는 별 문제로 이 이야기들은 참이다. 따지고 들어가면 다른 것 아니요, 두 편이 있다는 말이다. 요, 초왕, 알렉산더, 한광무 등등으로 대표되는 소위 문명인과 소부, 허유, 장자, 디오게네스, 엄자릉 등으로 대표되는 ‘들사람’과 그리고 이 세상이 보기에는 문명인의 세상같지만 사실은 들사람이 있으므로 되어간다는 말이다. (주석 9)

함석헌의 야인정신은 조선시대 김시습에 이르러 피날레를 이룬다. 김시습의 이야기지만 자신의 모습이다.

김시습이 미친 모양을 하고 다니며 길가에서 오줌을 쌌다. 그것이 누구냐? 그가 길을 기다가는 주저앉아 “이 백성이 무슨 죄 있소?”하고 통곡하던 바로 그 민중 그 자신이 아닌가? 오줌을 쌌다니 어디다 싼 것일가? 세조의 정치에 대해, 바로 세조의 얼굴에 싼 것이지 뭐냐? 칼을 갈아 물을 잘라도 물은 오히려 흐른다고, 사람의 모가지는 자를 수 있어도 민중의 오줌인 신화, 전설, 여론은 못 자를 것이다. (주석 10)

이것은 함석헌 자신이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이 거처했던 경무대와 청와대에 오줌을 갈긴 정신을 뜻한다.
함석헌을 야인, 들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90평생에 한번도 관직에 들지 않았다는 단순한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생각, 사고, 행동패턴에 있어서 야성이기 때문이다. 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문천상의 천지정기(天地正氣)를 좋아하며, 소부와 허유의 ‘세이(洗耳)정신’을 사랑하는 야인이다. 어김없는 자신의 모습이다.

함석헌은 소크라테스의 독백, 세례요한의 석청, 모세의 시나이 산, 디오게네스의 통나무, 간디의 아힘사와 진리파악, 휘트먼의 <풀잎>, 소로의 윌든 호숫가의 통나무집, 매월당 김시습의 ‘미친오줌’, 토머스 페인의 <상식>, 성삼문의 의기를 높이 사고 좋아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권력보다는 야인, 지배보다는 자유를 택한 들사람들이다. 시대의 아웃사이더이다. 당대의 패배자이지만 영원한 승자이다. 이들은 속박이나 규제의 생활이 아니라 자유로운, 해방된 삶을 추구하며, 이것을 신념과 생활에 일치시킨 사람들이다. 함석헌도 이들처럼 자유분방하게, 천의무봉하게 살았다. 일제에 필봉을 들이대고, 소련군대에 달려들고, 이승만의 처를 ‘경무대 여우’라고 질타했다. 박정희 쿠데타의 새벽에 모두 침묵할 때 5.16을 세차게 비판하고, 전두환을 줄기차게 질타했다. 그리고 바벨탑으로 둘러쌓인 기독교계에 맹타를 날렸다. 어용 지식인, 곡필 언론인들에게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국민을 일깨웠다.

함석헌은 권력(자) 비판에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말과 글을 쓸 때는 민중의 말과 글을 구어체로 사용하고, 말과 글이 통하지 않을 때는 서슴없이 행동에 나섰다. 단식투쟁, 삭발투쟁, 거리시위를 감행하고, 재판정에 설 때는 “민주주의가 죽었다”고 베옷을 입고 출정했다. “자유는 감옥에서 새끼를 치고 나온다”고, 젊은이들에게 감옥가는 것을 두려워말라고 가르치고 몸소 실행했다. 투옥, 연금, 수배, 도청이 일상사가 되었다. 권력과 제도언론이 언로와 지면을 봉쇄할 때는 70노령을 돌보지 아니하고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광야의 계명성이 되었다.

함석헌은 야인, 들사람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들사람이란 제 몸을 찢는 사람이다. 그는 문화를 모른다. 기교를 모른다. 수단을 모른다. 체면을 아니 돌아본다. 그는 자연의 사람이요. 기운의 사람이요. 직관의 사람, 시의 사람, 독립독행의 사람이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듣지 않는 사람,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않는 사람이다. 다만 한 가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들으려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주석 11)

바로 함석헌의 자화상이다. 아니 씨알, 이단자, 아나키스트, 아웃사이더, 유목민, 풍류가의 진정한 모습이다. 함석헌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듣고자 하고, 이것을 씨알에게 알리는 언론인이었다. 그는 이 일을 “하느님의 발길에 채여서”한다고 말하였다.



주석
9> 함석헌, <들사람 얼>, 41~42쪽, 한길사, 1985.
10> 앞의 책, 44쪽.
11> 함석헌, <인간혁명>, 일우사,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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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7장] 함석헌의 야인혼과 저항정신

2013/03/03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출생을 들사람으로 시작했다.
옛적부터 푸대접 받고 소외된 땅 평안도 상놈(평민)의 후예로 태어났다. 바탕이 들사람이고 자라나기를 상민들과 함께하였다. 민중정신을 기르는 ‘청산맹호(靑山猛虎)’라는 오산(五山)의 교육이념은 함석헌의 혼과 얼을 키우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서 참스승을 만나 저항정신이 길러지고 민중과 대화하는 말길(言路)을 배웠다. 청년기에 3.1운동에 직접 나서고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을 겪었다. 그리고 외면하지 않고 저항하였다.

이후 식민지배, 공산주의, 백색독재, 군사독재와 싸우면서 숱한 필화를 겪고, 옥고를 치르고, 온갖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명저의 저술가가 되었지만 돈을 모으지 못하고, 종교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장로ㆍ신부 ․ 목사가 되지 못하고, 교사 생활을 했지만 교장, 총장을 하지 못하고, 반생을 언론과 함께 하면서도 거대 신문, 잡지의 사주가 되지 아니했다.

80여 년을 살아 온 오늘까지 그는 한번도 벼슬을 한 적이 없다. 권력계층이나 부유층에 끼어 본 적이 없다. 다스리는 자리에 앉아본 적도 없고 ‘가진 자’의 부류에 끼어 든 적이 없다. 그런가 하면 어떤 성직에 있어 본적도 없다. 흔히 그를 ‘종교인’이라고 부른다. 이건 그에 대한 편이상의 호칭일 뿐,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명칭이다. ‘씨알’에게 명칭이 붙을수록 씨알스럽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겉으로라도 그는 ‘씨알’의 한 상징임에 틀림없다. (주석 5)

함석헌은 ‘겉으로라도’가 아니라 속내가 알짬 씨알이고 들사람이다. 권력은 탐하고 부를 추구하고 종교나 교육계의 자리를 원했다면, 그의 능력이나 성실성과 치열함으로써 얼마든지 성취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들사람이고 씨알정신이기 때문에 세속의 감투나 관직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반면에 그는 어리숙하고 바보스럽고 타산적이지 못하고 처세에 약하고 세상의 물정을 잘 몰랐다. 그는 자신을 우리 말로 바보새, 한자로 신천옹(信天翁), 영어로 알바트로스(allbatros)라고 부르는 ‘바보새’가 되었다. 바보새를 닮았고, 휘호에도 신천을 낙관으로 썼다. 프랑스 <악의꽃>의 시인 보들레르는 가난한 민중, 소외된 자, 고아, 창녀들을 노래하며 그들의 벗이 된 ‘저주받은’ 시인이다.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을 자신의 자화상으로 그렸다.

뱃 사람들은 자주 장난거리로
항해의 벗인 양
뱃길따라 미끄러지는 선박을 뒤쫒는
아주 커다란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간판 위에 막 던져진 순간,
이 창공의 임금님은 힘들게 노를 젓듯
조롱을 받으면서
그 큼직한 흰 날개를 질질 끌어댄다.(후략)
(주석 6)

함석헌이야말로 20세기 알바트로스다.
장자, 노자, 제논, 디오게네스, 플로티노스, 두보, 비용, 원효, 양녕대군, 임제, 무학대사, 김시습, 이지함, 김삿갓, 이달, 허균, 이탁오, 브르노, 스피노자, 소로, 셀리, 하이네, 조르주 상드, 애드가 앨런 포우, 보들레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혼과 얼과 행동이 전해지고 합해진 바보새이고 신천옹이고 알바트로스다.

20세기가 첫 시작되는 해에 고난의 한국에서 바보새가 태어난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었다.
20세기 전반기는 일제의 압박에, 후반기는 분단, 전쟁, 독재, 민주화의 고된 전장터의 씨알에게 그는 항상 벗이고 동지이고 교사이고 스승이었다. 고난의 시대에 씨알은 그가 곁에 있었기에, 다른 민족이 1천 년에 겪을까 말까한 일을 1세기 동안에 모두 겪으면서도 미치거나 망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었다.

독재 권력자들이 미쳐날뛰고, 외세가 국토를 동강내고, 재벌이 미다스의 손이 되고, 언론이 권력과 재벌의 나팔수가 되고, 교수들이 지식난쟁이를 대량생산하고, 종교인들이 물신주의의 바벨탑을 쌓을 때, 그래도 함석헌의 야인 혼이 있어 씨알은 위로 받고, 숨통을 트고, 저항정신을 길러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인 중에서 아주 드물게 세계사적 사상과 철학을 가진 인물이다. 반도에서 태어나 일본 섬나라에서 공부했지만, 그의 사유의 넓이와 깊이는 대륙적이고 국제적이었다.

“함석헌의 씨알사상 속에 아시아의 정신적 유산의 알짬과 성서적 신앙의 핵심이 융합되어 새로운 21세기의 종교사상의 씨앗으로 열매 맺고 있다.”
(주석 7)

함석헌만큼 사상사, 정신사, 철학사, 종교사, 민주주의 역사를 꿰뚫는 이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가히 사상의 통섭자이고 철학의 실천자이다. 바보와 노마드는 ‘궁합’이 맞지 않는 관계이지만, 그는 모순의 창과 방패를 바보라는 보자기로 싸서 이것을 융합하고 실행하는 야인이 되었다.

나는 그이와 수개월 이국땅에서 지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어떤 때는 한 가지 일을 되씹고 고쳐 생각할 뿐 아무런 결단도 못하는 햄릿, 어떤 때는 손에 아무런 방도도 없으면서 세계에 저항할 듯 흥분하는 돈키호테, 조용히 정좌해서 끝없는 명상에 잠긴 모습은 수도승의 모습인데, 시속 120킬로 달리는 차를 더 속력내라고 하며 쉬지 말고 일생이라도 달렸으면 할 때는 돈환, 세계지도를 내놓고 관광할 계획에 심취할 때는 고향 없는 집시, 그러나 한국에서 온 신문을 손에 들었다가 드시던 식사를 그만두고 목이 메어 울면서 귀국길을 위해 짐을 쌀 때보면 이 땅에 뿌리를 박은 애국자, 글을 쓴 것을 보면 사고에 골똘한 분인데 왜 그렇게 안절부절할까? 가슴에 화살을 맞은 이처럼! 그렇다. 그는 가슴에 화살을 맞아서 안절부절이다. 그 안의 양극성, 그 안의 이율배반 그것이 바로 그의 가슴에 꽂힌 화살이다. (주석 8)


주석
5> 송기득, <함석헌의 저항론>, <씨알․인간․역사 - 함석헌 선생 80순기념문집>, 한길사, 1982.
6> 이치석, <씨올함석헌 평전>, 35~36쪽, 재인용, 시대의 창, 2005.
7> 김경재, <함석헌의 씨올사상연구>, <신학연구>, 30 (1989년).
8> 안병무, <선생님께 드리는 글>, <함석헌선생 80순기념문집>,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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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7장] 함석헌의 야인혼과 저항정신

2013/03/02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누구냐? 그의 사상은 무엇이냐?" 물었을 때 압축이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호메르스의 <일리아드>를 한 마디로 줄이거나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열 마디로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2010년 4월 교수신문은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의 대표적 인물로 함석헌을 뽑았다.
그가 역사 분야의 대표 인물로 뽑히고, 전체로도 수위를 차지했다. 망국과 식민지, 독립운동과 친일, 해방과 분단, 독재와 민주의 굴곡진 현대사에서 속출한 수많은 학자,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을 제치고 함석헌이 1위로 뽑힌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함석헌은 종교인, 역사가, 언론인, 민주화운동가, 시인, 교육자, 저술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고, 각 분야에서 대표적 위치에 오를 만큼 사유와 활동의 폭이 넓고 깊고 다양했다. 많은 업적도 남겼다. 정신과 철학, 사상면에서 100년에 한번 날까 말까한 ‘세기난우(世紀難遇)’의 인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함석헌은 역사책을 썼지만 역사학자가 아니고, 시집을 냈지만 시인이 아니고,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농부도 교사도 못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목사, 신부가 되지 아니하고,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지만 정치를 하지 않았다. 당대에 언론인 누구보다 날카로운 시론, 평론을 많이 썼지만 직업 언론인이 되지 않았다.

그럼 함석헌은 누구냐, 무엇이냐.
한마디로 야인(野人)이고 들사람이다. 여당, 야당 할 때의 권력을 잡지 못한 정당을 뜻하는 것이나 관직에 나가지 않은 야가 아닌, 그야말로 순수한 들사람을 말하는 야인이다. 우리 조상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살던 만주족을 야인이라 불렀다. 야만족이란 비하가 따랐다. 하지만 함석헌을 일컬을 때의 야인은 그런 의미와는 격이 다른 맨사람, 씨알을 말한다.

야(野), 곧 들은 도(都), 읍(邑)에 대해 쓰는 말이다.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 읍, 그 읍 중에서도 나라 임금 있는 곳이 도다. 야는 그 도읍 밖에 나와 있는 들, 교외다. 시골, 농촌이다. 야인, 들사람은 시골사람, 두메 사람이다. (주석 1)

함석헌은 “문명의 병이 들어 정신이 약해지면 반드시 소수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썩어가는 백성을 책망하여 그 마음속에 잃어버린 야성(野性)을 도로 찾도록 부르짖는다.” (주석 2)고 했다. 중국의 노자와 장자,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미국의 휘트맨과 소로를 대표적 야인으로 꼽았고, 그는 또 새시대의 문을 연 예언가를 야인으로 보았다. 예레미아, 엘리야, 아모스, 호세아, 세례 요한, 예수를 순수한 들사람이라고 지목했다.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도 들사람이라고 하였다. 함석헌 자신도 이들과 한 줄에 꿰이는 들사람이다.

 



함석헌은 누구인가?

첫째, 아나키스트다.
세계평화주의, 자연론적 사회관, 개인의 자주성과 부당한 권위에 대해 저항한 아나키스트이다. 일본인 케무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가 의도적으로 오역한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 크로포토킨에 의해 체계화된 반봉건ㆍ반전제ㆍ반강권주의, 개인의 자율과 자치를 존중하는 아나키스트다.

둘째, 소로주의자다.
자연주의, 물질과 과학 위에 서야 한다는 초절주의, 부당한 조세와 침략전쟁을 거부하는 높은 정신운동, 기계 문명의 거부, 단순한 생활을 지향하는 소로주의자이다.

셋째, 간디주의자다.
비폭력저항, 불복종 ․ 비협력주의, 불가촉민(不可觸民, 씨알)의 지위향상운동, 민중교육운동, 인도 고유의 전통사상인 사티아그라하(眞理把握)운동, 절제된 생활원칙인 브라아마차리아(brahmacharya) 등 종교적 행위와 정치적 행위를 결합하여 ‘국가의 도덕성’을 실천한 간디의 사상과 철학을 실천한 간디주의자다.

넷째, 유목주의(nomadism)자다.
그의 사유와 철학은 고정되지 않고, 장소와 상황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동성과 도전성을 보여주는 노마디즘의 실천자이다. 고금동서를 종횡하면서 세계사의 정신과 사상을 육화(肉化)한 도전가이고, 머물면서는 민주화운동과 씨알의 세상을 위한 언로(言路)를 개척한 뉴노마니스티다.

다섯째, 퀘이커교도이다.
기록된 교리도, 교회와 성당과 같은 지정된 예배장소도, ‘선교’라는 말 대신 ‘봉사’라는 말을 선호하는, “진리를 믿는다고 스스로 내놓고 말하는” 퀘이커다. 무교회주의와도 가깝지만 보다 근원적인 종교관은 톨스토이, 간디, 우찌무라 간조, 유영모와 종교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같이 있는 퀘이커도 내 영혼의 주는 아닙니다.”  (주석 3)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기독교의 형식주의와 세속화를 거부하는 퀘이커 교도이다.

여섯째, 풍류사상가(風流思想家)다.
근래에 술 잘마시고 여성편력이 마치 ‘풍류’인 것처럼 타락했지만, 우리 민족사상의 원형인 풍류는 생각이나 생활에서 속(俗)되거나 삿(邪) 됨이 없는 생활철학을 말한다. 함석헌의 선풍도골의 헌헌한 모습이나 무애(無碍)의 사유와 활동은 한국의 마지막 풍류사상가이다.

일곱째, 평화사상가이다.
그의 모든 탐구ㆍ실천ㆍ도전ㆍ저항의 궁극적 목표는 평화에 있었다. 국가주의와 국수적민족주의를 거부하고, 제국주의와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일체의 권위주의를 배격하였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전적 평화정신에서부터 현대 ‘무장된 평화체제’를 반대하였다. 일국의 평화가 아닌 지구촌의 평화를 추구하였다.

함석헌은 사상적으로는 간디주의, 사회적으로는 아나키즘, 철학적으로는 소로주의, 정신적으로는 노마니즘, 퀘이커신앙, 풍류정신을 융합하고 통섭한 대사상가이다. ‘야인’, ‘씨알 사상’은 바로 이렇게 하여 생성되고 발육되고 실천되었다.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은 2012년 42회 째 대회에서 <대전환 : 새로운 모델의 형성>이라는 주제로 과거 자본주의는 틀렸고,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현실사회주의는 이미 망했고, 자본주의의 낡은 기차는 종착역에 이르렀다. 클라우스 슈바프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를 기반으로 한 경제학은 위기에 도달했다. 우리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줄 수 있는 사람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 (주석 4)고 다보스포럼에서 말하였다.

21세기 인류의 미래상이 간디주의, 아나키즘, 소로철학, 노마디즘, 퀘이커주의, 풍류정신을 융합하고 통섭하는 ‘야인주의’라면 함석헌은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이르러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기계적 합리주의자들의 눈에는 ‘바보’로 보이고, ‘배부른 돼지’들의 눈에는 ‘가난뱅이’, 세속적 권력주의자들에게는 ‘정신분열증 환자’로 비쳤겠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런 음해와 비난이 따랐다. 함석헌도 마찬가지였다.

주석
1> 함석헌, <인간혁명>, 일우사, 1962년.
2> 앞과 같음.
3> 함석헌, <벤들힐의 명상>, <함석헌 전집>, 제3권.
4> <다보스포럼, 자본주의를 버리다>, 매일경제신문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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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3/01 08:00 김삼웅

 

 

 

필자는 2001년 3월 <대한매일> 주필로 재직할 때 ‘김삼웅 칼럼’에서 <진짜 언론인 함석헌 100주년>을 기고한 바 있다

오늘 (13일)은 함석헌 선생 탄생 100주년이다. 함석헌은 역사연구가ㆍ사상가ㆍ민권운동가ㆍ잡지발행인 등 여러가지로 분류되지만 ‘진짜 언론인’도 한 범주라 하겠다.

언론인이면 언론인이지 진짜는 뭐고 가짜는 뭐냐고 할지 모르지만 상품에 진짜와 가짜가 있고 진실한 사람과 위선자가 있듯이 언론인도 마찬가지다. 특히 오랜 독재와 냉전시대에 사이비언론(인)이 득세하고 판칠 때 함석헌이야말로 진짜 언론인의 역할을 했다. 제도언론에 지면이 허용될 때는 할 말을 하고, 지면이 봉쇄당할 때는 ‘언론게릴라전’을 펴면서 독재와 냉전세력과 싸웠다.

최근 어떤 신문이 ‘할 말은 하는 신문’을 구호로 내걸었지만, 그런 신문이 독재에 침묵하거나 곡필을 서슴지 않을 때 함석헌은 진짜 할 말을 했다. 억압시대에는 비굴하고 민주시대에는 방종하는 사이비 비판이 아니라 남들이 입을 다물 때, 천지가 암흑에 덮일 때 그는 할 말을 했다.


 


 

친일언론이 식민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갈 때 함석헌은 동지들과 <성서조선>을 만들며 어둠에 묻힌 조선역사를 쓰다가 투옥되고,자유당 천하에서 대부분의 언론이 어용족 또는 만송족(晩松族)일 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을 썼다가 감옥엘 갔다. 5·16쿠데타로 온 세상이 공포에 싸일 때는 <5ㆍ16을 어떻게 볼까>란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군사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정치군인들에게 할 말을 다한 것이다. 당시 족벌언론이 쓴 쿠데타 지지 사설과 기사,논평은 한국언론사의 치부를 드러낸다.

독재권력이 강화되면서 지식인은 두 갈래 부류로 나타났다. 저항과 타협의 길이었다. 저항자는 설 땅을 잃고 타협자는 풍요가 따랐다. 고려무인정권 때도 그랬고 일제식민시대도 그랬다. 그리고 비굴하게 타협하면서 무인정권과 식민통치를 찬양한 세력이 당대의 주류가 되었다.

군사독재 시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석헌 등 진짜 비판자는 도태되고 사이비들이 득세하여 사세를 키우고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전두환 정권에서 이런 현상은 절정을 이루었다.

언론통제가 심해지자 함석헌은 제도언론인들에게 ‘언론게릴라전’을 제창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언론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게릴라전술로 언론투쟁을 하자는 주장이었다. 게릴라전은 정규군이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특수임무가 요구될 때 전개된다. 신문사주와 간부들이 군사독재와 유착된 상태에서 언론의 정상적 기능(정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게릴라전을 제창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목마른 외침은 빈 산의 메아리에 그쳤다. 독재의 짓누름도 심했지만 그들이 던져준 이권과 고깃덩이도 만만찮았다. 또 긴 세월 길들여진 보신주의 언론인들이 게릴라로 활동하기에는 너무 배부르고 비대해졌다. 특히 일부 양심적 기자들이 자유언론의 횃불을 들었다가 쫓겨나면서부터 진짜 저항언론의 맥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직접 게릴라전에 나섰다.

함석헌은 사이비들처럼 사주의 지침이나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무조건 지지 또는 반대하는 따위의 언론인과는 격이 달랐다. 군사독재를 준엄하게 비판하다가도 통일문제에는 지극히 전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되어야 합니다. 갈라진 이대로는 살 수 없고 산다고 해도 사람이 아닙니다. 남은 북을 믿고 북은 남을 믿고 일어섭시다.” <북한동포에게 보내는 편지>

30여 년 전에 쓴 글이 지금 읽어도 감동을 준다. 참 글은 이렇게 이념과 시공을 뛰어넘는다.
그 자신 진짜 언론인이었던 송건호 씨는 함석헌을 타고난 언론인으로 평가한다. 신문기자나 논설위원의 경력은 없지만 타고난 언론인이란 두가지 논거를 들었다.

첫째, 문장이 보통 언론인 이상으로 유려하고 평이하다. 언론인과 비언론인의 구분은 문장이 쉬운가 난삽한가라면 함 선생의 문장은 간결하고 쉽다.

둘째, 시대를 보는 눈이 예리하다. 나날의 시사문제에 날카롭다는 것이 아니라 시대 이면에 흐르는 사조를 꿰뚫는 눈이 날카롭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 함석헌은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는 용기 있는 언론인이었고 용기의 원천은 역사의식이었다. 역사의식이 없는 용기는 풍차에 칼질하는 만용이거나 멧돼지의 저돌성이다. 타락한 언론의 저돌성이 ‘비판’의 이름으로 설치는 시대에 함석헌의 참언론정신이 그립다.
(주석 7)

함석헌은 일제의 패악이 천지를 뒤덮을 때 1930년 <성서조선> 제22호에 <의인은 멸절하였는가>에서 “구원 하옵소서, 여호와여, 경건한 자가 없어지고, 신실한 자가 인자(仁者) 중에서 끊어졌나이다” 라고 기구하였다.

그리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마무리에서 절규한다.

“ 그러면 젊은 혼들아, 일어나라, 이 고난의 짐을 지자, 위대한 사명을 믿으면서 거룩한 사랑에 불타면서 죄악에 더럽힌 이 지구를 메고 순교자의 걸음으로 고난의 연옥을 걷자, 그 불길에 이 살이 다 타고 이 뼈가 녹아서 다 하는 날 생명은 새로운 성장을 할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광명을 더할 것이다.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오를 것이다.”


주석
7> <대한매일>, 2001년 3월 13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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