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of Vasily Polenov, by the Artist Ilya Repin. oil on canvas. 80 × 6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이 바실리 폴레노프 초상화는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 (Ilya Repin)의 작품이다.
러시아의 풍경화가 바실리 폴레노프(Vasiliy Polenov 1844-1927)는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아마추어 화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린시절부터 미술환경에서 자랐다. 
폴레노프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변호사 자격증도 땄지만 화가의 길을 선택한다.
8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폴레노프는 공화국 인민화가의 칭호를 받는다.

 

바실리 폴레노프는 러시아의 역사화가, 풍경화가, 풍속화가이며 교육자였다.  
폴레노프는 페테르부르크의 교양 있는 다자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고고학자였고, 어머니는 아동문학 작가이자 화가였다.  
1861∼1863년까지 폴레노프는 올로네츠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고  
1863년에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물리수학학부에 입학했다.  
저녁에는 청강생 자격으로 페테르부르크예술아카데미에 다니면서 회화뿐만 아니라  
해부학, 건축예술, 화법기하학, 예술사 등을 수강했다.  

또한 오페라 극장과 콘서트 극장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였으며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고,  
자신이 직접 예술아카데미 학생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음악곡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 후 대학교를 휴학하고 예술아카데미에서 미술에만 전념하다가  
1868년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부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1869년 〈욥과 그 친구들〉로 작은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1871년 〈야이로의 딸을 살려낸 그리스도〉로 레핀과 함께 금메달을 땄다.  
1872년 법학부와 예술아카데미를 동시에 졸업하고 아카데미 장학생으로  
빈, 뮌헨, 베니스, 플로렌스, 나폴리, 파리 등 해외를 여행하면서 많은 창작을 하게 된다.  

1876년 러시아로 귀국하여 무대장식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882∼1895년에는 모스크바회화조각건축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I. 레비탄, C. 코로빈, I. 오스트로우호프, A. 아르히포프, A. 골로빈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Portrait of the Artist Ilya Repin. by the Artist Vasily Polenov. 1879.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아 레핀 (Ilya Repin)의 초상화로 바실리 폴레노프 작품이다. 
바실리 폴레노프 역시 이동파의 멤버였다. 
그리고 프랑스의 외광파 기법을 러시아에 최초로 소개한 선구자였다. 
외광파는 실내 광선이 아닌 태양 광선에 비추어진 자연의 밝은 색채 효과를 재현하기 위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 화파를 총칭한다. 

1879년부터 ‘이동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887년 대표작 〈간음한 여인과 예수〉를 제15회 이동파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1910∼1918년에는 민중 계몽활동에 참여하여 민중극장 창립에도 참여하였으며 
1924년 탄생 80주년을 기념하여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27년 툴스카야 주의 자신의 영지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Portrait of Isaac Levitan by Vasily Polenov. 
이삭 레비탄(Isaac Levitan) 초상화. 바실리 폴레노프 작품.

 

초야권 primae noctus, 1874. oil on canvas. 120 X 17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폴레노프는 이태리, 프랑스의 역사적 주제를 담은 그림을 다수 그렸다.
'나리의 권리, 초야권'라는 작품은 나리에게 세 농노 처녀를 데리고 와서 선보이는 모습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유럽이지만 러시아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가는 그때까지도 농노 처녀들의 초야권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 귀족의 모습도 비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귀족들은 농노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사랑의 대상은 더더욱이 아니었다.

​러시아 감상주의는 진보적인 귀족 계급 문화의 한 현상으로, 
18세기 후반 문학 및 예술 속에서 계몽주의적인 이성 우월주의의 위기로 인해 형성된 흐름이었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분출과 완성, 개인의 ‘감수성’을 맹목적으로 숭배하였고, 
사회보다는 한 개인이 문학적인 지각의 중심에 들어서게 되었다. 
인간의 내면세계는 물론 인간 주위의 자연 세계도 파헤쳐 보이려는 특징을 가진다.

​감상주의의 특징적 대비로는, 순결한 자연, 비도덕적 문명, 전원의 한적한 생활, 
번잡한 도회지 생활, 꾸밈없는 자연 그대로의 시, 이성적인 시 등이다. 
또한 감상주의적 경향에서는 민중의 정신적인 특성, 민족적인 서사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된다.
계몽주의 시대에 발전했던 개방성, 사회적 기호와 자유로운 여론, 개성과 독립성을 존중하는 개별 인간의 
고양된 가치에 의존하였지만, 사회적인 인간의 구체적인 성격을 밝혀내지 못했고, 
인간을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묘사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소작농이 소작세를 갚지 못했나 보다. 
이제 갓 피어 난 듯 싱그러운 소녀들이 지주에게 제물로 바쳐진다. 
지주는 음흉한 표정으로 소녀들을 훑어 보고 있다. 
그런 주인의 마음을 대변이나 하듯 지주의 사냥개들조차도 거만함이 묻어난다. 
성문 입구에서 안타깝게 가로막힌 채 절망하는 아빠의 애틋함이 그림 한 쪽에서 강한 포인트가 되고 있다.

젊은 여자를 대동하고 노인이 영주를 보고자 찾아왔다. 
한눈에 봐도 고약한 인상을 가진 영주는 허리에 손을 척하니 올리고 
한 계단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불안한 눈으로 영주를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처녀의 눈빛은 겁에 질려 있다. 
곧 결혼을 앞둔 처녀가 초야권을 영주에게 바치러 온 것이다. 
중세 스위스에서는 남편이 아내 될 여자의 초야권을 갖기 위해서는 ‘초야세’라는 
세금을 내야 했다는 기록도 있다는데, 지금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성직자나 그 지방의 영주가 그 권리를 행사하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권력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하는 습성이 있다. 
어린 소녀의 가느다란 한숨소리, 음흉한 영주의 웃음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고 
하루를 마감하는 해는 건물의 흰 벽에 불안한 붉은 그림자를 남기고 넘어가는 중이다. 
그건 그렇고 눈에 거슬리는 개 두 마리. 
왜 권력자들은 개를 데리고 나타나는 모습이 많을까? 하는 짓이 개와 닮아서 그런가?

폴레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높은 계급의 장교였고 한편으로는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미술을 좋아하는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이런 부모의 재능은 
두 사람 사이의 아이들이 미술과 과학을 좋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Granny's Orchard. 할머니의 정원. 1878. oil on canvas. 54.7 x 65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그림 속 정원은 잡초가 무성히 자라 있고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어쩌면 버려진 듯한 느낌을 준다. 
할머니 혼자 사는 대저택 같은데 늙은 노인이 손보고 가꾸기는 너무 커 보인다. 
이미 연로한 할머니는 사실 누구의 도움 없이 산책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도시에 사는 손녀가 이렇게 찾아 와 따뜻한 햇빛을 선사해 주지 않는다면 할머니는 출입조차 힘들 것이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않는 저택의 정원처럼 할머니의 삶도 외롭고 또 외롭다. 
할머니의 남은 인생과 내버려진 정원. 이 또한 얼마나 절묘한 비유한가.

이제는 허리가 구부정해져 지팡이와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하는 할머니가 정원 산책을 나섰다. 
뒤로 보이는 건물도 할머니만큼의 나이를 먹었겠다. 
어쩌면 훨씬 그 이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원의 나무와 꽃들은 여름의 햇빛 아래 푸르름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 길을 걷는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무수한 상념이 떠오르겠다.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나만 늙어가는 것일까? 

분홍색 옷을 입은 젊은 여인에 비해 할머니가 입고 있는 검은색 옷은 
이제는 되돌아갈 시간이 없음을 알려주는 징표 같아서 마음이 언짢아진다.

열두 살부터 체계적으로 드로잉을 배운 폴레노프는 
3년 뒤 풍경화가인 치스타코프에게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다. 
1863년 열아홉의 폴레노프는 법률을 전공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하는데 왕립 아카데미에도 입학을 한다. 
법학과 미술을 같이 전공하기로 한 것이다. 
성격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분야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폴레노프는 해내고 만다.

폴레노프는 러시아-터키 전쟁의 (1877-1878) 종군 화가를 지내고 돌아온 후  
Peredvizhniki (이동파)에 참여했고, 파벨 트레치코는 그의 그림을 좋아하여 다수 구입했다.  
그는 사실적인 풍경화에 집중하며 사람의 일상과 관련된 러시아 자연의 시적 정적감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폴레노프는 외광파의 생생한 색채를 예술적 구성 처리와 결합시킨 러시아 최초의 화가 중 일인이다.  
그가 발전시킨 원칙은 훗날 소비에트의 풍경화 발달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폴레노프는 1893년 셍페테르스부그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고, 
1926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인민화가로 지명됐다.  
그는 모스크바 미술, 조각, 건축학교에서 가르쳤고, 아르히코프, 리비탄 등이 제자였다.  
폴레노프가 살던 집은 국립박물관으로 되었고, 

그가 살던 마을은 '폴레노포'라고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27년 83세로 사망.

 

Overgrown Pond, 숲이 무성한 연못. 1879.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어딘가 낯이 익은 풍경이다. 
수련이 떠 있는 연못, 작은 선착장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고 
우거진 숲의 품에 안긴 듯한 벤치가 보인다. 
숨은 듯 만 듯한 여인은 벤치에 앉아 책을 펼쳤다. 고요하고 싱그럽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한, 언젠가 본 듯한 풍경화를 ‘무드 풍경화’라고 한다. 
흰 들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는 길은 여인이 앉아 있는 곳으로 이어졌다. 
조명을 흐리게 하고 음악이 있다고 해서 ‘무드’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괜찮다면 연못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1871년 스물일곱의 폴레노프는 변호사 자격증을 따며 대학을 졸업한다. 
또한 왕립 아카데미에서는 ‘야이로 딸을 일으키심’이란 작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한다. 
이렇게 되자 폴레노프의 고민이 시작된다. 
금메달에 대한 부상은 유럽 여행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었다. 
몇 달을 고민한 폴레노프는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하느님도 편애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On the boat. Abramtsevo. 아브람체보에서 보트를 타고. 1880. oil on canvas. 

키예프 주립 러시아 미술관.

앞 작품 속 여인일까? 
녹색의 한가운데를 흘러가고 있는 여인에게 마치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듯하다. 
도드라져 보이지만 보트의 색과 주변의 수련으로 점차 엷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여름 한철 조금씩 흔들리는 배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다 싶다. 

아브람체보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철도왕’ 사바 마몬토프의 집이 있는 곳이다. 
당시 마몬토프는 러시아의 젊은 화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하던 사람이었다. 
때문에 화가들이 자주 모이던 곳이었다. 
그들 중 잠시 머문 화가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눌러앉기도 했다. 
‘아브람체보파’가 형성될 정도였다.

1년간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폴레노프는 수많은 스케치와 드로잉을 제작한다. 
그 후 파리에 정착, 4년간을 머무는데 이 기간 동안 폴레노프는 
역사화와 풍속화,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제작한다. 
그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가장 감명을 받았던 것은 야외에서 작업하는 프랑스 화가들의 모습이었다. 
특히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작품에 매료되었는데, 폴레노프가 풍경화에 마음이 기운 계기가 되었다.

 

Old Mill. 오래된 물방앗간. 1880. oil on canvas. 세르푸호프 역사미술관. 

숲속 물방앗간이 한여름을 나고 있다. 
방앗간 벽에는 군데군데 지나온 세월의 흔적들이 머물고 있다. 
한때는 힘차게 수레가 돌아갔고 사람들 소리로 소란했겠지만 
이제는 줄어든 물의 양으로 물레방아는 움직임을 멈췄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숲들이 조금씩 대신하고 있다. 
낚싯대를 물에 드리우고 있는 소년이 보인다. 
방앗간은 움직임의 상징이지만 낚시는 고요함이 우선되어야 한다. 
아이가 커서 세상으로 나가고 나면 물방앗간, 저만 혼자 외롭겠다.

이때부터 폴레노프의 작품 속에는 두 가지 요소가 나타난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받은 고전교육과 아카데미에서 배운 기법은 
그를 고상한 역사화를 그리는 길로 이끌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풍경화였다. 
결국 이 두 가지 요소가 오랜 기간 동안 그의 작품 속에 혼재되어 나타나는데, 
1880년대 후반 그러니까 30대 후반부터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The Burnt Forest. 불타버린 숲. 1881. oil on canvas. 89.7cm x 170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예전에는 화전을 일구던 사람들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계층이었다. 
그림 속 숲은 화전의 모습은 아니다. 자연 발화로 타버린 숲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화마가 훑었던 지역이었지만 자연은 다시 생명력을 회복했다. 
검게 그을렸던 땅에는 풀들이 자라기 시작했고 사이사이 나물들도 자리를 잡았다. 
무너지지 않는 생명력, 그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큰 가르침이다. 
나물을 향해 뻗은 여인의 손과 등에서 끝나지 않은 인간의 생명력을 보게 된다.

5년 간의 외국 여행을 끝내고 서른둘의 폴레노프는 러시아로 귀국한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터키에 대한 독립을 주장하고 나서자 
터키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는 
범슬라브족을 보호한다는 이름 아래 터키를 침공하는 러시아-터키 전쟁이 일어난다. 
폴레노프는 이 전쟁에 종군화가로 참여한다.

 

Moscow Backyard. 모스크바 뒷마당. 1878. oil on canvas. 80.1 x 64.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폴레노프의 유명한 1878년 그림 "러시아의 전형적인 안마당" 이다.
폴레노프는 상트 페테르스부르그 태생으로 1863-1871년 황립예술학교에서 공부했다.  
동급생으로 이동파 미술가이자 유명한 사진사였던 라파일 레비츠키와 막역지우였다.  
그들의 서간문은 폴레노프 저택 갤러리에 보관중으로 당대 미술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폴레노프와 레비츠키는 둘 다 독신일 때 처녀의 들판이란 뜻의 "Devich'e Pole" 
거리에 있는 집의 다락방에서 함께 살았는데, 훗날 레비츠키가 이 집의 여주인과 결혼하였다.  

밝은 햇살, 푸른 하늘, 깨끗한 공기, 세상에서 제일 환하고 
평온한 모습을 표현한 듯한 그림 속 지역은 19세기 말엽 모스크바의 모습이다. 
<모스크바의 정원>은 19세기 모스크바 스타르이 아르바트 정경을 그대로 담아 놓았다. 
지금도 모스크바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붉은 광장과 함께 꼭 들르는 관광 명소로 
현재는 빌딩 숲이 우거진 대도시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19세기에는 그림과 같았다고 한다.

찬란한 태양 아래 밝게 빛나는 모스크바 정원의 새파란 잔디 위에서 어린 아이들이 놀고 있다. 
그렇게 펼쳐지는 평온함과 건강한 생명력이 그림의 핵심이다. 
이 그림은 19세기 모스크바를 재현한 것이기 때문에 모스크바 도시 행사의 카탈로그 표지나 
국가적 차원에서 모스크바를 보여주어야 하는 책자같은 것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그림이기도 하다. 
모스크바 시 성립 850주년 기념행사 포스터에도 이 작품이 대표 그림으로 사용되었다. 

 

Moscow Courtyard. 

멀리 보이는 교회의 건물들도 말쑥한 모습이지만 
모스크바의 뒷마당에도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다. 
닭의 모이를 주러 나온 아주머니, 풀밭에서 혼자 우는 아이, 
놀기에 바빠 동생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는 신이 난 아이들, 모두 우리 사는 모습이다. 
근사하고 멋진 교회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지만 
세월을 이겨내고 있는 낡은 집은 땅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다. 
햇빛 가득한 마당 위로 폴레노프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부르는 찬가가 흐르고 있다.

다음 해 전쟁이 끝나고 귀국한 폴레노프는 왕립 아카데미 시절부터 
교류를 맺고 있던 화가들과 함께 이동파 전시회에 참가한다. 
이때 출품한 ‘모스크바 뒷마당’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풍경에 
서정을 듬뿍 담아 외광파 기법을 이용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외광파 기법이 러시아 최초로 소개되는 순간이었다.

 

On the Tiberiad Lake, 타이비어리드 호숫가. 1888. 

이스라엘 북부 골란 고원 아래에 있는, 요즘 이름으로는 타이비어리어스 호수이다. 
주변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의 모습이 많이 익숙하다. 
폴레노프가 예수님과 관련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림 속 인물은 예수님을 상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제우스의 모습에서 가져와 조금씩 변형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유대 지방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모습은 그림 속 남자의 모습과 많이 닮지 않았을까 싶다. 
길옆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있다. 
길은 그 사이로 이어지겠지만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도 돌이 많은 길인 것은 분명하다.

‘타이비어리어스’는 영어 Tiberias의 발음을 그대로 적은 것 같다. 
우리말 표기로는 ‘티베리아스’ 또는 ‘티베리우스’라 적어야 할 것 같다. 
히브리어로는 ‘티베랴’. 본래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갈릴리 호수 서안에 있던 마을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로마 2대 황제 티베리우스에서 따왔다. 
그러니까 타이비어리어스 호수는 곧 갈릴리 호수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때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폴레노프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깨끗하고 밝은 색, 색깔이 있는 그림자, 
자유로운 붓 터치와 같은 기법을 소개했고 이 무렵부터 러시아 회화의 전통에 따라 
사실적인 풍경화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풍경화를 통해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과 어우러진 러시아의 시적인 풍경들 전하고 싶어 했다. 
그의 기법은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풍경화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00년 경, oil on canvas.  20.8 x 31.3cm, 볼로그다 시립미술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러시아의 인민화가 바실리 폴레노프(Vasiliy Polenov, 1844-1927)는
러시아 장성이자 고고학자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변호사 자격증을 땄지만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스와 중동을 여행하며 다양한 화풍에 접했고,
역사화, 풍속화, 풍경화, 초상화 등 다양한 작품을 그렸으며,
유럽의 풍경미술이론을 러시아에 최초로 소개시킨 인물로,
훗날 모스크바 미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888-1909년에 팔레스타인을 두 번이나 방문한 그는 예수님의 생애 연작을 60여 점이나 그렸고,
이스라엘 성지의 평화로운 풍경과 성지의 건축물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그렸으며,
사실주의에 입각한 그의 표현기법은 독특하였고,
그의 작품구성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예술을 통한 민중 계몽에 역점을 두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생애 연작 중 하나로
마태복음 16,13-20; 마가복음 8,27-30; 누가복음 9,18-21이 그 배경이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지리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갈릴래아에서의 활동기이고,
후반부는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졌으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면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묻는 것이 분기점이 된다.
그리고 화가는 이스라엘 성지를 다녀온 사람처럼
시냇물이 흐르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의 풍경을 배경으로 이 작품을 그렸다.

예수님께서는 돌다리가 있고 시냇물이 흐르는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손짓으로 당신을 가리키며 제자들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가 8,27)
이것은 공생활을 마감하며 예루살렘으로 가서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듣기 위한 질문이었다.

예수님 앞에는 제자 세 명이 앉아 있다.
한 제자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고,
다른 제자는 “엘리야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으며,
또 어떤 제자는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과소평가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가 8,29)
아마도 세 제자 중에서 가운데에 앉아 있는 제자가 베드로일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눈이 마주쳤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고 있다.
예수님의 신성은 수난과 죽음을 겪은 후에야 들어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도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일 때에야 빛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마가 8,34-35)

 

Christ and the woman taken in adultery.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188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복음 8:1~11)

1881년부터 다음 해까지 폴레노프는 독일과 중동 여행길에 오른다. 
이미 러시아 최고의 풍경화가라는 이름을 얻은 그는 그가 좋아하는 풍경과 
신약성서의 내용을 합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특히 성경 속 풍경을 연구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지방을 두번이나 방문해서 
그곳의 풍경과 건축, 사람들을 연구했다. 
당대 러시아 화가 중 가장 많은 해외 여행을 한 화가라는 말이 붙었는데, 
현장을 중요시하는 사람에게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1861∼1863년까지 폴레노프는 올로네츠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고
1863년에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물리수학학부에 입학했다.
저녁에는 청강생 자격으로 페테르부르크예술아카데미에 다니면서
회화뿐만 아니라 해부학, 건축예술, 화법기하학, 예술사 등을 수강했다.

또한 오페라 극장과 콘서트 극장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였으며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했고,
자신이 직접 예술아카데미 학생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음악곡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 후 대학교를 휴학하고 예술아카데미에서 미술에만 전념하다가 
1868년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부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He that is Without Sin. 죄 없는 사람. 1908. oil on canvas. 118 x 239 cm. 
2011년 11월. 런던 본햄스(Bonhams)에서 $ 6,395,619 낙찰

2011년 11월 바실리 폴레노프의 희귀한 작품 '죄 없는 사람'과 '그는 죽을 죄를 지었다'  2점이 
런던 본햄스에 출품되었는데 문제의 그림 2점은 거의 100년 만에 햇볕을 보게 된 작품이다.
1912년 대서양 깊숙히 가라앉은 타이타닉에 실려 있던 그림. 
폴레노프가 20년 동안 예수의 생애를 그린 연작 그림 60점 시리즈에 속해 있던 작품이다.

'죄 없는 사람'은 성 요한의 복음 중 예수가 간통한 여인에게 내린 판결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너희 중 죄 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는 말을 한 순간을 담아 냈다.
'그는 죽을 죄를 지었다'는 예수가 고대 유대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에 입장하기 전 모습이 그려져 있다. 
비극적인 사건을 품은 걸작답게 두 작품의 낙찰 금액 합계는 100억을 훌쩍 뛰어 넘었다.

 

Autumn in Abramtsevo, 아브람체보의 가을. 1890. 

여름은 위대했다고 릴케는 노래했다. 
위대한 이유는 다가올 계절에 대비해 생명력을 극에 이를 때까지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가을은 그 생명력이 몸 깊숙이 숨는 계절이다. 
한여름 녹색 범벅이었던 숲에도 생명들이 깊은 곳으로 숨어들고 있다. 
더러는 붉게 더러는 노랗게 숨고, 떠난 흔적을 나타내고 있는데 
숲을 가득 안고 흐르는 물도 그만 숲을 닮아버렸다.

1882년 폴레노프는 모스크바 예술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제자로는 레비탄과 코로빈처럼 훗날 러시아 미술사의 큰 별이 되는 학생들이 있었다. 
폴레노프가 러시아에서는 화가이자 훌륭한 스승이었던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폴레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의 회원이 된다.

 

Dreams (On the hill) 언덕 위에서의 꿈. 1894. oil on canvas. 

꿈이 모이면 바람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理想)으로 자리를 잡는다. 
광야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 
약한 사람은 끝없이 약해지고 권력을 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권력을 잡는다. 
설사 영혼을 악마에게 판다고 해도 그 자리를 지키고자 한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그림 속 젊은이는 30대 초반의 나이로 사형을 당한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이 역사 속에 한둘이었겠는가? 
그래도 세상에 대한 그의 바람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시간은 지금까지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바위 위 젊은이는 오늘도 저렇게 앉아서 세상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다. 
언제쯤 훌훌 털어버리고 크게 웃으며 저잣거리로 내려올 수 있을까.

그림뿐만 아니라 극장의 장식에도 폴레노프는 재능을 발휘해서 
여러 극장의 개보수 작업에 참여하여 많은 성과를 이룬다. 
그의 여동생 폴레노바도 화가였는데, 오랜 기간 명성을 얻은 
최초의 러시아 여류화가였고 도자기, 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 진출해 
성과를 이루었다고 하니까 타고난 피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Early Snow. 철이른 눈. 189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아직 잎들이 다 지지도 않았는데 눈이 내렸다. 
지평선을 건너온 찬바람은 미처 떨어지지 못한 잎들을 흔들고 있고 
아스라한 지평선은 파란색으로 남아 다가올 겨울을 더욱 차갑게 만들고 있다. 
아직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다. 
크게 휘어 나가는 강 위로 쌓인 눈은 조만간 강물도 덮을 기세이다. 
겨울은 침묵해야 할 시간이다. 
우리에게 침묵해야 할 시간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침묵 뒤에 오는 고요함은 다시 그 뒤를 이을 생명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되기에.

8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해에 폴레노프는 공화국 인민화가의 칭호를 받는다. 
러시아의 풍경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그에게 어울리는 영예였겠다.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paziergangerin auf eneiem Waldweg, 숲길을 산책하는 여인. 1883. oil on canvas. 114.5 x 67.3 cm. 

가을 속에서 여인이 걸어 나오는 것일까, 여인의 뒤를 가을이 따라오는 것일까?
프랑스나 이탈리아 화가들이 보기에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변방의 화가들’이 파리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만의 문화가 섞이면서 
파리나 이탈리아 화가들과는 또 다른 맛을 주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Tretyakov Gallery Room 35

 

Downpour. 1874. oil on canvas. 120 x 17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ussian Village. 러시아의 마을. 1889. oil on canvas. 사라토프 미술관. 

 

Sick Girl. 아픈 소녀. 188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Golden Autumn. 1893. oil on canvas. Museum-Estate of V. Polenov. 

 

River Svinka near Aleksin. 1900s. oil on canvas. 

 

River Klyazma. Zhukovka. 클리즈마 강. 1888. oil on canvas.  니지니 노브고로드 주립미술관. 

 

He is Guilty of Death. 그는 죽을 죄를 지었다. 1906. oil on canvas. 113 x 220 cm.
2011년 11월. 런던 본햄스(Bonhams) $ 4,461,193 낙찰.

 

Egyptian Girl. 1876. oil on canvas. 88.5 x 118 cm. 
2008년 11월 런던 소더비(Sotheby's) $ 1,585,207 낙찰

 

First Snow. 1892. oil on canvas. 71 x 142 cm. 
2007년 11월 런던 소더비(Sotheby's) 1,480,129 낙찰.

 

The River Oyat. 1883. oil on canvas. 46 x 92 cm. 
2008년 4월 뉴욕 소더비(Sotheby's) $ 1,385,000 낙찰

 

The Lookout. 망보는 사람. 1876. oil on canvas. 127 x 91 cm. 
2012년 5월 런던 소더비(Sotheby's) GBP 481,250 ($ 754,552) 낙찰

 

Barge on the River Oka. 1897. oil on canvas. 40.5 x 65.5 cm. 
2009년 6월 런던 소더비(Sotheby's) GBP 169,250 ($ 273,170) 낙찰.

 

The River Oka in Flood. 1918. oil on canvas. 45.3 x 93.5 cm. 
2011년 6월 런던 크리스티(Christie's) £ 157,250 ($ 258,205) 낙찰

 

Forest Pathway. 1874. oil on canvas. 38 x 56 cm. 
2011년 11월 런던 크리스티(Christie's) £ 109,250 ($ 169,119) 낙찰.

 

Christ by the Sea of Galilee. oil on canvas. 31 x 64.5 cm. 

 

The River Oka in Golden Autumn. oil on canvas. 35.5 x 58.2 cm. 
2012년 11월 런던 소더비(Sotheby's) GBP 99,650 ($ 159,898) 낙찰.

 

Fountain In The Environs Of The Village Brestovets. 1870s. 보드에 유채, 34 x 24 cm. 
2008년 4월 뉴욕 소더비(Sotheby's) $ 121,000 낙찰.

 

From the window of the flat in Rome. 1895. oil on canvas. 22.3 x 12.5 cm. 
2011년 11월 런던 크리스티(Christie's) £ 46,850 ($ 72,524) 낙찰.

 

The Garden of Eski Saray in Constantinople. 1882. Oil on canvasboard. 31 x 35.5 cm. 
2011년 11월 런던 크리스티(Christie's)  £ 37,250 ($ 57,663) 낙찰.

 

Caesarian Fun. 시저 식 여흥. 1879.

 

꽃다발. 1880. 

 

The Birchwood Alley. 자작나무 숲길. 1880. 

 

Imochentsy. 이모첸치의 겨울. 1880. 

 

A yard. 뜰. 1881.

 

River Voria. 보리아 강. 1881. 

 

게세마네 언덕의 올리브 나무. 1882. 

 

Baalbek. Ruins Of Jupiter Cathedral And Cathedral Of Sun. 1882. 
발벡에서. 쥬피터 신전과 태양 신전의 폐허. 

 

Baalbek. Ruins Of Jupiter Cathedral And Cathedral Of Sun. 1882. 
발벡에서. 쥬피터 신전과 태양 신전의 폐허. 

 

Eski Sarayskiy Garden. 1882.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노플. 에스키 사라이스키 정원.  

 

Erechtheion. The Portico Of Caryatids. 에레크테이온 신전. 

 

Erechtheion. The Portico Of Caryatids. Detail.

 

Parthenon. Temple Of Athena. 아테나 판테온 신전. 1882.

 

Fountain Of The Virgin Mary In Nazareth. 나사렛 성마리아 샘물. 1882. 

 

Marienquelle in Nazaret. 

 

The Ruins Of The Palace In Palestine. 팔레스타인의 폐허가 된 궁전. 1882. 

 

Upper Pond In Abramtsevo. 아브람체포의 윗 쪽 연못. 1882. 

 

A Soldier With A Bundle Of Firewood. 나뭇단을 진 군인. 1883. 

 

Cordoba. 코르도바. 1883. 

 

Hall In The Magic Castle. 매직 캐슬의 홀. 1883. 

 

Killed Soldier. Near The Village Of Mechka. 메치카 인근에서 죽음을 당한 병사. 1883. 

 

성으로 가는 계단. 1883. 

 

The Head Of The Pharisee. 바리새인의 두상. 1884. 

 

팔레스타인 승려. 1886. 

 

오카강 둑의 교회. Chapel On The Banks Of The Oka. 1893. 

 

인디언 써머. 1893. 

 

Christ among the doctors. 의사들 사이에 계신 예수. 1896. 

 

베니스. 1896. 

 

로키산 협곡. The Gorge Of The Rocky Mountains. 1897. 

 

Monastery Over The River. 강 저 편의 수도원. 1898. 

 

Cheops And Chephren. 체옵스와 체프렌의 대 피라마드. 1899. 

 

And He Returned To Galilee In The Power Of The Spirit. 1900.
그리고, 예수는 성령의 힘으로 갈릴리로 돌아왔다.  

 

마르타가 예수를 영접하다. 1900.

 

Tarusa Station. 타루사 역 근처의 철로. 1903. 

 

The Mosque In Jenin. 제닌의 모스크. 1903. 

 

House Of Polenov In Behovo. 베호포의 폴레노프 집. 

 

Lord's Supper. 주님의 만찬. 

 

Pond at Wehle, 웰리의 연못. 1874. 

 

Ruschuksk. 파견대 사령관의 방. 1878. 

 

Volga village. 

 

Pond in Abramtsevo. 

 

The road near the village, 1877. 

 

In the village of Turgenev's 1885. 

 

Crossing the river Oyat. 

 

River Oyat. 

 

Pine Forest on the banks of the River. 

 

Oka Evening. 

 

Palestinian landscape. 

 

They brought a child. 

 

The mosque in Jenin. 

 

Haram Esh-Sherif - the area where the ancient Temple of Jerusalem. 

 

Fishing Boat, Etretat, Normandy. 

 

The epic storyteller Nikita Bogdanov. 

 

Went into the hill country. 

 

Оdalisque, 1875. 

 

[영상] Vasily Polenov: A collection of 271 works (HD)

 

 

 

Portrait of the Artist Konstantin Savitsky, 1871 by Ivan Nikolaevich Kramskoi
화가 콘스탄틴 사비츠키의 초상. 이반 크람스코이 (1837 - 1887) 그림.

콘스탄틴 사비츠키(1844–1905)는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다.
타간록 (Taganrog)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타간록 소년 짐내지엄 (Gymnasium) 빌딩을 집으로 삼고 자랐다.  
타간록은 오늘날 타그메트라는 철강회사가 있는 곳.  
그의 가족은 프랑코브카에 여름 별장을 세내었는데 
사비츠키는 아조브해 (Azov Sea 흑해 북쪽) 해변에서 스케치하기를 좋아했고, 
짐내지엄 (중등학교)에서도 미술과목을 좋아했다.

사비츠키는 5학년 때 갑자기 부모를 잃고 라트비아의 숙부 댁으로 간다.  
거기서 사립기숙학교를 마친 후 셍페테르스부르그로 와서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레핀(Ilya Repin), 쉬쉬킨( Ivan Shishkin), 스타소프(Viktor Vasnetsov) 등등 
당대 러시아 문화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며 지대한 영향 속에 청년 사비츠키는 크게 성장한다.  

 

Portrait of Savitsky by Nikolai Grandkovsky. 1902. Tretyakov Gallery
사비츠키의 초상화. Nikolai Grandkovsky 작.


왕립미술학교의 우수한 학생으로 장학금을 받아 유럽에 유학하고 "방랑자들"의 일원이 된다.  
"철도 복구작업"은 그가 노동자 계급을 그린 초기 작품이다.  
제국 예술 아카데미를 졸업 한 후 20 년 이상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펜자의 미술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데 헌신했다. 
그는 이후 왕립미술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1897년 사비츠키는 Imperial Academy of Arts의 회원이되었다.

 

House of Savitsky in Taganrog, built in the 1890s. 

사비츠키 식구는 타간록(Taganrog) 남자고등학교 건물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학교에 거주하는 의사였다. 혹시 관사 같은 곳 아니었을까?

 

Repairing the Railway. 철도 복구작업. 1874. oil on canvas. 100cm x 175cm. Tretyakov Gallery.
철도 복구작업. 1874. 캔버스에 유채. 175 x 100 cm. 트레차코프 국립미술관.

얼마 전 내린 비로 작은 산사태가 일어 났던 모양이다. 
철길을 다시 살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자세히 보니 대부분 나이 많은 사람이거나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들이다. 

장비도 변변치 않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지구 끝까지 연결되어 있는 철길들은 
대부분 이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 철길에 담긴 눈물은 얼마나 될까? 철길이 열리면서 부를 쌓은 계층은 따로 있다.

​이 작품은 사비츠키의 대표작이 된다.
사비츠키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항구 도시인 타칸로그에서 태어났다.
이 곳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는 안톤 체홉도 있다. 

 

Morning in a Pine Forest. 소나무 숲의 아침. 1886. oil on canvas. 139cm x 213cm. Tretyakov Gallery. 

소나무 숲의 곰 무리를 묘사한 이 작품은 ‘숲의 화가’라고 불리는 쉬스킨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처음 이 작품이 발표 되었을 때, 사람들은 쉬스킨이 숲을, 사비츠키가 곰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그림에 두 사람의 서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따로 그린 것이 아니라 전체를 함께 그렸다. 
그러나 훗날 사비츠키는 자신의 서명을 그림에서 지운다.
자신의 선배이자 러시아 풍경화의 전설이 된 쉬스킨에 대한 예의였다.
사비츠키는 민중의 삶의 실제를 그림에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동파 대부분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개인보다는 여러 사람의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많다.
이것도 이동파 풍속화가들의 특징이 되는데 바실리 막스모프나 
블라디미르 마코프스키의 작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Father. 아버지.

아이를 안고 있는 아버지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다. 
유아 세례를 받으러 온 것 같은데,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가슴에 안고 있는 아이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지키겠다는 각오 같은 것도 보인다.
굵은 손 마디를 통해서 아버지의 직업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이 순간 만큼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모습이다. 

아버지는 늘 그런 모습이리라.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사비츠키는 부모를 따라 해변가에서 스케치 하는 것을 좋아했고, 
드로잉 과목은 가장 좋아하는 학교 수업이었다. 그런 그에게 비극이 찾아온다. 
열 여섯 살이 되던 해, 갑자기 그의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겠다.

 

Welcoming the Ikon. 이콘 환영식. 1878. oil on canvas. 141cm x 228cm. 

마을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담긴 이콘화가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와 경배를 올리고 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도 보인다.
이 그림이 마을의 평화와 가족의 행복을 지켜 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이콘화는 그림이 아니라 상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라트비아에 살고 있던 삼촌이 사비츠키의 보호자가 된다. ​
삼촌은 그를 사립 기숙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상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이 곳에서 사비츠키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고 얼마 되지 않아 우등생 중 한 명이 된다. 

 

Bad People. 서툰 사람들. 1882. oil on canvas. 106.5cm x cm. 

갈대가 우거진 강변에 배를 대 놓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뒤에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고 행동도 몹시 조심스러워 보이는데, 
앞에 앉은 사람은 몸을 뒤로 기울이고 느긋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역시 눈동자가 커져 있다.
​애써 태연한 척 하는 것 아닐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왠지 믿음이 가지는 않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 여러번 은메달을 땄던 사비츠키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작품으로 마침내 금메달을 수상한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비츠키는 2년간 유럽 여행을 다녀 온다. 
이 시기에 많은 러시아의 젊은 화가들이 서부 유럽을 여행하면서
인상파 화풍을 접했지만 그 기법을 바로 수용한 화가는 거의 없었다.

 

The Funeral Service. 장례식. 1885

눈이 잔뜩 내린 날,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무덤으로 오는 길은 빗질이 되어 있다. 
슬픔에 고개를 떨군 가족들과 힘겹게 지팡이를 들고 행렬을 뒤따라 온 노인들도 보인다.
차갑고 슬픈 분위기인데 맨 앞의 어린 꼬마, 바로 옆 묘지에 내려 앉은 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슬픔은 앞으로 떠나갈 어른들의 몫이라는 것일까?

유럽 여행에서 돌아 온 사비츠키는 이동파의 멤버가 된다. 
민중 속으로 들어 가고자 했던 이동파에게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니라 주제였다. 
상대적으로 인상파는 주제보다는 기법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인상파 기법이 러시아 미술에 정착되는 데는 시간이 다소 필요했다.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귀국한 화가들에 의해 바로 인상주의가 자리를 잡은 미국과는 차이가 난다.

 

To the War. 전쟁터로. 1888. oil on canvas. 207.5cm x 303.5cm. 

역이 아주 혼란스럽다. 
전쟁에 징집되어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보여주는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터지는 울음을 조용히 닦아 내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지금의 이별을 영원한 이별로 받아 들이는 가족도 있다.

​이런 상황에 관계없이 기차 앞에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업무 인수 인계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앞 쪽에 서 있는 어린 소녀는 이 상황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전쟁은 여인과 아이들을 힘들게 할 것이다.
아이의 표정은 폭풍 전야처럼 무덤덤합니다.

사비츠키는 상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동파 멤버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차르 체제 아래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비평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끝없이 묘사한 중요 멤버이자 러시아 혁명 전에 가장 뛰어난 풍속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 받고 있다.

 

Fugitives in Siberia. 시베리아의 도피자들. 

한 밤중인데 사내 4명이 집 앞에 서 있다. 강제 노역장을 탈출한 것일까? 
뒤를 돌아 보는 사내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붉은 불빛이 흘러 나오는 창 옆에 몸을 붙이고 실내를 살피는 사내는 어둠에 잠겼다.
추위는 푸른색으로 세상을 덮고 있는데, 이 밤 이들은 주인의 하락을 받고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문 밖에 오늘 밤을 부탁하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봐야겠다.

사비츠키는 화가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모스크바, 펜자 그리고 
상페테르부르크 등지에서 20년 넘게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개인 삶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1897년, 쉰 셋의 나이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니까 화가로서 사회적인 지위도 확실했다. 
사비츠키는 예순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The Field. 들판. 

초록 들판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덩그렇게 수레들만 자리를 잡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풀잎들을 이리 저리 흔들고 있고 구름은 산 너머에서 초원들 기웃거리고 있다. 
머지 않아 우리가 만날 풍경들이다.

​이동파 화가들은 자신들의 조국인 러시아의 풍경에도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풍경화나 풍속화를 가장 낮게 평가했던 기존 화단의 기준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내가 태어난 땅만큼 사랑스러운 곳도 없겠다.

사비츠키가 세상을 떠나고 9개월 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다. 
그리고 12년 뒤, 러시아 혁명이 완성된다.
혹시 그가 그 때까지 살았다면 그가 평생 애정을 담고 
그림에 담았던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을까?
이동파는 1923년 마지막 전시회를 열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마녀, 1869.

 

오베르뉴의 여행자들, 1875. 

 

숲 속에 선 농가 처녀, 1876. 

 

아이들과 닭. 1872. 

 

사냥꾼. 1874. 

 

가정불화, 1890. 

 

사제. 1897. 

 

Dreams. 1879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4

 

 

 

Summer. 1896. oil on canvas.
Nizhny Tagil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y Tagil)

 

Summer. 1896. oil on canvas.
Nizhny Tagil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y Tagil)

 

A peasant Girl. 1897. oil on panel. Kostroma State Museum  (Russian Federation - Kostroma)

 

Arrival of a School Mistress in the Countryside. (Teacher Visiting a Village). 1896-1897. 
oil on canvas. 90 X 6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t Dominique's. 1897. 

 

At Volga. 189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The Choice of Wedding Presents. (Choosing the Dowry )1898. oil on canvas. 54 X 40.5 cm.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Fisher. Finland. 1899. oil on pan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At the doctor's. 1900. oil on panel. Private collection

 

Before explaining (Date). (Rendez-vous). 1898. oil on canvas. 118 X 83 cm.
Samar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mara)

 

Girls lightened by sun.(Sunlit Girls). 1901. oil on canvas.
Astrakhan State Picture Gallery  (Russian Federation - Astrakhan)

 

Ukrainian landscape with huts. 1901. oil on canvas. 
State Vladimir-Suzdal Historical Architecture and Art Museum-Reserve, Russia

 

AT Shepherds. 1903`1904. oil on canvas.
Ryazan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Ryazan)

 

Waiting for an Audience. 1904. oil on canvas.
Saratov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ratov Region).

 

In the Birch Forest. 1905 . oil on panel.
Muzeum Narodowe w Warszawie  (Poland - Warsaw)

 

Portrait of I. E. Tsvetkov. 1905. oil on canvas.
Saratov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ratov Region)

 

Musical Evening. (Musical Soiree). 1906. oil on canvas. 41 X 50.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Two mothers. Native mother and stepmother. 1905. oil on canvas. 158 X 120 cm.
Samar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mara)

 

Lover of painting. Portrait of a collector I. E. Tsvetkov. 1907. oil on canvas.
Vyatka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irov)

 

Portrait of academician Ivan Yanzhul. 1907.  oil on canvas. 
State Vladimir-Suzdal Historical Architecture and Art Museum-Reserve, Russia

 

Gastronome. 1909.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Tete-a-Tete. 1909. oil on canvas. 28 X 32.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y listen the gramophone. (Listening to Music). 1910.
Krasnodar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rasnodar)

 

At the Theatre. 극장에서. 1911. 48 X 35cm. Oil on canvas

 

Without a master. (When the Master is Absent). 1911. oil on canvas.
Yaroslavl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Yaroslavl)

 

Empress Maria Feodorovna. 1912. Oil on canvas. 267 x 192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Visiting the Cook. 1912​. oil on panel. Private collection

 

At the kitchen. 1912.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f Armenia  (Armenia - Yerevan, Armenia)

 

Portrait of I. E. Tsvetkov. 1912.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Old Lady Drinking Tea. 1914.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I. E. Tsvetkov. (Girl with a Mirror). 1916. oil on panel. 22.1 X 27.9 cm.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a man sitting on a park bench. 1917. oil on canvas. 19 X 24.5 cm. Private Collection 

 

Tobacco taster. (The Smoker). 1918.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A Glass of Ale. 1919. Watercolor. Private collection 

 

On the grand staircase. 1914. Watercolor. 패널에 유채. 19 X 24.5 cm. Private collection 
2005년 12월 런던 소더비에서 $ 323,556 낙찰. 출처 : Sotheby's 

 

On the Dnieper River. 1920. oil on canvas. 42 X 26.5 cm.
Kostroma State Museum  (Russian Federation - Kostroma)

 

The Apple Pickers.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 letter.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Boys in the field. Date unknown. oil on canvas.
Kostroma State Museum  (Russian Federation - Kostroma)

 

Contemplation.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Fair in Poltava. Date unknown. oil on canvas.
Art Museum of Dnepropetrovsk  (Ukraine - Dnepropetrovsk)

 

Evening company (A Party). Date unknown. oil on canvas. 144 X 108.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조명이 어두운 작은 방에 젊은이들이 모여 있다. 
광원은 갓 아래에서 상승하는 등유 램프다. 
학생들은 테이블 주위에 모여 사모바르가 끓을 때까지 모여 있다. 
테이블이 설정되어 있고 차를 마실 준비가되어 있지만 아무도 식사를 시작하지 않는다. 
캔버스의 영웅들은 열정적으로 연설을 하는 어린 소녀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모임은 지하 모임인 듯 하다.

중앙의 소녀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굳게 믿고 

그녀의 말에 대해 매우 진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중의 얼굴에는 서로 다른 감정이 있다. 
어떤 이들은 화자의 말을 열심히 듣고, 다른 사람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연설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녀를 인식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련을 극복 하고 
이 아늑한 방의 벽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어려움을 감수할 준비가되어 있기 때문에 
공통의 목표로 묶여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낄 수 있다. 
마코프스키의 작품은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알려준다. 
그의 각 그림은 특정 사건에 대한 일종의 이야기이다. 
마코프스키는 러시아 영혼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모두 알고 백성의 운명에 정통했다. 
그는 당시 사회의 문제를 반영하는 깊은 사회적 주제를 제기했다. 

 

In the hut of forester. Date unknown. oil on canvas. 
Serpukhov Historical and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rpukhov)

 

Rest on the way from Kiev. 1888. oil on canvas. 61 x 84 cm. 

 

Summer Day. Date unknown

 

The artist and the apprentice.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Malorossians in a Tavern. Date unknown. Watercolor. Private collection

 

An Old Town Square. Date unknown. Watercolor.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Elena Snegireva. Date unknown. oil on canvas.
National Arts Museum of the Sakha Republic (Russian Federation - Yakutsk)

 

Violinis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 Walk into Town. Date unknown. Watercolor. Private collection 

 

Sermon in Ukrainian Village Church. 1888. oil on canvas. 32 x 50 cm. 
2006년 4월 뉴욕 소더비에서 $ 419,200 낙찰. 출처 : Sotheby's 

 

Checkers Players. 1891. oil on canvas. 48 x 57 cm. 출처 : Sotheby's. 

 

Mushroom pickers in Finland. 1898. oil on canvas. 125.5 x 179 cm. 출처 : Sotheby's. 

 

Portrait Of A Noblewoman. 1906. 패널에 유채. 41.5 x 32.5 cm. 출처 : Sotheby's. 

 

The Sulk. 1901. 패널에 유채. 41.3 x 26.7 cm. 출처 : Sotheby's

 

Miser. 1891. oil on canvas. 71.1 x 71.1 cm. 출처 : Christie's

 

On the Volga. 1895. Oil on wooden panel. 26.5 x 41 cm. 
2007년 11월 런던 크리스티 $ 186,430 낙찰. 출처 : Christie's 

 

The Vodka Maker. 1871. oil on canvas. 53.5 x 35.5 cm. 출처 : Sotheby's.

 

Shura. 1907. 보드에 유채. 26.5 x 22 cm. 출처 : Sotheby's.

 

Peasant girls. 1877. oil on canvas. 29.2 x 19 cm. 
2007년 11월 런던 크리스티 $ 154,294 낙찰. 출처 : Christie's. 

 

Four Hands. 1889. oil on canvas. 40.5 x 32.6 cm. 출처 : Sotheby's.

 

Children at Play. 1890. 패널에 유채. 26 x 40.5 cm. 출처 : Sotheby's.

 

The Declaration. 1885. 패널에 유채. 24 x 17.5 cm. 출처 : Christie's

 

Early Autumn in the Village. 1884. 패널에 유채. 18 x 27 cm. 출처 : Sotheby's.

 

Herd by the river. 1895. 패널에 유채. 14 x 25 cm. 출처 : Christie's

 

A seated man smoking a pipe. Pencil, black ink and gouache on paper. 

31.1 x 24.2 cm.  출처 : Christie's

 

[영상] Vladimir Makovsky (Художник Владимир Маковский)

 

 

 

 

Self portrait. 1905. oil on cardboard. 38.6 X 34.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블라디미르 예고르비치 마코프스키는 러시아의 유명한 화가인 '콘스탄틴 예고르비치  마코프스키'와 
'니코라이 마코프스키'와 형제이고. 누이동생인 '알렉산드라 마코프스키'도 화가였다. 
러시아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기반이 되는 사실주의 양식에 영향를 끼쳤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마코프스키의 집안은 대단하다. 
아버지는 미술품 수집가였고 모스크바 예술 학교의 설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마코프스키의 아버지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타고난 자질에 
집안 환경이 더해진 탓인지 나중에 모두가 유명한 화가가 된다.

​15세가 되던 해, 마코프스키는 러시아 화가들을 소개할 때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6년간의 학교 성적도 좋았던지 졸업하기 바로 전 해와 졸업하던 해에는 은메달을 수상했다. 
그 뒤로 3년 정도 더 공부를 했는데 학교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당시 학생들의 진학 경로를 참고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것이 아닌가 싶다.

​1870년 공부를 끝낸 마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된 
방랑파(The Wanderers)의 창립 멤버로 참여한다. 
이후 그는 방랑파 소속으로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면서 나중에는 방랑파를 이끄는 위치에 이르게 된다.
방랑파는 그때까지 러시아 미술을 좌지우지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 
대항해서 만든 모임인데 그 멤버들 중 그 학교 출신이 많다는 것이 흥미롭다.

1870년대, 그러니까 서른 즈음에 마코프스키는 
두드러진 러시아 사회의 강자와 약자에 대해 관심이 깊어졌다. 
이것은 훗날까지 그의 작품 주제가 된다. 
압제 받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세계에 대한 그의 연민이 솔직하게 그림에 담겼다. 
서민들에 대한 황제 군대의 학대와 압박도 그의 눈을 피해 가지 못했다. 
마코프스키의 가슴에는 세상을 향한 불덩어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Self portrait. 1893.

​어찌 보면 ‘삐딱선’을 타고 있었던 마코프스키였지만 1878년, 
서른두 살의 나이에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다. 
1880년대 러시아 회화가 다양하게 발전되는 ‘민주화’ 시대가 오면서 그의 걸작들이 탄생한다. 
그림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그에게는 신나는 시절이었다.
서른여섯이 되던 해 모스크바 예술 학교의 교수로 임명된다. 
바실리 페로프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자리를 이어 받게 된 것이다.

​1880년대 말부터 마코프스키의 작품은 조금 더 ‘우울’해졌다. 
좀 더 그의 이야기 톤이 높아졌다고 봐야겠다. 
1894년 마흔 여덟의 나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학교의 교수로 임명되는데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일흔까지 학생들을 지도한다. 
또 예술아카데미 예비학교의 교장을 맡게 된다. 그는 화가이자 선생님이었다.

마코프스크의 작품은 끝없는 유머와 냉소 그리고 부조리에 대한 풍자가 특징이다. 
초기 작품은 비교적 점잖은 냉소를 깔고 당시의 관습과 도덕 기준을 묘사했는데 
작품 무대는 주로 작은 러시아의 도시들이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힘 있는 사람들의 잘못된 동정을 비판했다. 
그의 의식 속에 사회적인 문제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밑에 깔고 있는 러시아 작품들은 
나중에 정형화된 이념만 걷어내고 보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1870년대, 그러니까 서른 즈음에 마코프스키는 

두드러진 러시아 사회의 강자와 약자에 대해 관심이 깊어졌다. 


이것은 훗날까지 그의 작품 주제가 된다. 
압제 받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세계에 대한 그의 연민이 솔직하게 그림에 담겼다. 
서민들에 대한 황제 군대의 학대와 압박도 그의 눈을 피해가지 못했다. 
마코프스키의 가슴에는 세상을 향한 불덩어리가 있었던 것 아닐까?

1905년 1월 9일은 일요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왕궁을 향하여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하는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한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제1혁명이 시작된다.  
혁명을 지켜 본 마코프스키는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과 같은 약자 편에 선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다. 
마코프스키는 늘 마음에 두었던 힘없고 핍박 받는 사람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다.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완성되고 난 후 2년 뒤, 일흔 넷의 나이로 마코프스키는 세상을 떠난다.
그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가슴에 담고 그 때 떠났기 때문에 행복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뒤로 흘렀던 역사를 보면 혁명은 혁명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마코프스키는 사실주의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연결시켰다.  

 

어린 시절 마코브스키의 모습, 1854년, 화가였던 친형 콘스탄틴 마코브스키의 작품. 

그림은 황제와 귀족 등 지배계층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가난한 농민도, 노예도 그림을 감상하고 평가할 권리가 있다.
자신들이 그린 사실주의풍 그림을 들고 러시아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무료로 전시회를 개최했었던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미술운동 그룹 이른바 '이동파(移動派)'의 외침이다. 

이들은 짧게는 5~6시간, 길게는 보름 이상씩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래서 러시아어로 이동하는 사람들이란 뜻의 '이동파'란 이름이 붙여졌다.
블라디미르 마코브스키 역시 이동파의 일원이었다.

이동파의 목표는 예술을 관료행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예술을 통해 민중을 교화시키는 것에 있었다.
보수적인 아카데미 미술교육에 반발하여 창작의 자유와 예술을 통한 민중 계몽에 역점을 두었으며,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핵심 인물들이 참여했다.
따라서 미(美)에 대한 탐구보다 사회적, 윤리적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다.
시골과 도시의 일상생활 장면이 주요 테마가 되었고, 일상과 축제 속의 농민과 도시민들이 주인공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해방된 농노들은 도시로 몰려 들여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빈민층을 이루었다.
풍요로운 집에서 태어난 마코브스키는 따뜻한 시선으로 러시아 민중의 삶을 묘사했다. 
러시아 사회의 모순에 대한 유머와 냉소, 부조리에 대한 풍자를 통해 서럽고 고통 받는 사람들,
힘없고 핍박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비참한 생활을 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였다.

 

At the Boulevard. 가로수 길에서. 1887. oil on canvas. 68 X 5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겨울 초입, 벤치에 앉은 부부의 모습이 애처롭다. 
옆에 보따리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시골에서 도시로 일을 찾아 올라온 것 같다. 
그러나 생각처럼 일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얼굴에는 좌절이 어렸고 눈은 생기를 잃었다. 
남편은 풀리지 않는 삶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겠지. 
부부가 꿈꾸었던 세상은 벤치 뒤 철책 너머이다. 
손풍금을 꺼내 망향가를 불러 보지만 답답한 심사가사라질까? 
어떻게든 겨울을 넘겨야 한다. 부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 에서
"모든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
라고 소설의 처음을 연다.

<가로수길에서> 부부가 만들어내는 쓸쓸한 느낌의 아우라는
어떤 연유에서 만들어진 불행일까?
1861년 허울뿐인 농노해방 이후 러시아 현실은 척박하기 그지 없었다.
수많은 농노들은 토지를 잃고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의 최하층을 구성한다.
그리고 산업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값싼 노동력으로 전락한다.
다른 말로 하면 도시 이주 농노들은 춥고 헐벗고 굶주린 최악의 도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로수 길에서>는 이런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하루종일 보드카에 쩔어 사는 젊은 남자가 무릎에 아코디언을 끼고 벤치에 걸터 앉아 있다.
온몸에 적당히 퍼진 알코올의 힘과 두 손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적 감흥이 더해져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옆에는 시골서 갓 올라온 듯한 그의 앳된 아내가 갓난 아기를 품에 안고
일하지 않고 돈도 벌지 못하는 남편 곁에서 근심 어린 얼굴로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다.
곧 눈보라가 휘몰아 칠텐데 아내의 마음엔 이미 걱정이 폭풍우가 되어 내리친다.
남편의 대책없는 낙관과 아내의 현실 비관이 교차하는 그림의 느낌이
발밑에 구르는 가을 낙엽만큼이나 메마르고 우울하다.

이 그림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으로 새로운 틀을 가지기 전에
보여지는 체제 미성숙을 풍자적으로 꼬집은 장르화다.
당시 러시아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회화는 가치가 없다라는 예술적 풍토가 만연했다.
작가들은 붓필의 힘으로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스토리 텔러가 되어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정돈 되지 않은 사회, 불평등한 사회, 무엇을 해야 할지를 찾을 수 없는 사회.
어디에 서야 할지를 몰라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결국은 알콜에 의존하게 만드는 병든 사회.
19세기 말엽 제정 러시아의 모습이다.

<가로수 길에서>는 그림이 주는 메세지 또한 휼륭하지만 주제를 표현한 회화적 기법이 아주 뛰어나다.
유화지만 마치 맑고 투명한 수채화처럼 농도가 가볍고 산뜻하다.
배경의 초록빛과 노란빛의 자연스런 조화, 회색빛 하늘의 쓸쓸한 늦가을 정취,
오래된 명화의 한 장면처럼 그림이 주는 아우라가 강렬하다.
그림답다라는 말이 너무도 어울리는 작품이다.

 

‘못 들어가요!!’, 1892년.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현대의 수많은 마르멜라도프에게 술을 마셔 좋은 점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술이 지나쳐 생기는 나쁜 결과가 너무 많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는 술로 인해 인생을 망친 전형적인 인물 마르멜라도프가 나온다.
라스콜리니코프와의 첫 만남에서 마르멜라도프는 술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저도 한때는 공무원이었죠. 집에는 아픈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데, 
나는 아내의 양말마저 내다 팔아 술만 마시고, 이제는 부인이 무서워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이렇게 술 마시기 벌써 닷새째..
​나에게 하나뿐인 딸은 황색 감찰(매춘부) 일을 하러 나가고, 그
 애가 그렇게 벌어온 돈도 술값으로 다 써버렸지요. 
난 돼지 같은 인간이에요" (중략) 

라스콜리니코프가 몸도 가누지 못하는 그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자, 그의 부인이 울부짖는다.

​"몰래 갖고 나간 11루블 다 어쨌나요? 옷마저 달라졌어! 
입고 나간 옷은 도대체 어디 벗어놓고 온 거죠? 모두 굶주리고 있는데! 
굶주리고 있는데! 아아, 저주받는 게 낫다! 그러고서도 부끄럽지 않나요?"

​보드카는 맑고 깨끗하지만, 코를 빨갛게 만들고 평판을 검게 한다고 안톤 체호프는 말했다. 
러시아만큼 술이란 주제가 문학에 자주 등장하고 사회를 지배하고 역사를 뒤흔든 나라도 드물다. 
심지어 대통령이 금주령을 선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실 지나친 음주는 자신만 병들게 하는 게 아니다. 
함께 사는 가족과 주변 모두를 음울하게 만든다.

​마코프스키의 그림에서도 알코올 중독 말기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술집을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
온몸에서 알코올에 찌든 술 냄새가 막 풍기는 듯하다. 가족의 행색이 남루하다. 
필사적으로 남자를 막아서는 아내의 절망적이고 힘든 몸짓. 
엄마에게 딱 붙어 아빠를 바라보는 겁에 질린 딸아이. 
남자의 손엔 술값으로 맡겨버릴 가족 중 누군가의 외투가 쥐어져 있다. 

고골의 <외투>에서 알 수 있듯이 혹독한 날씨의 러시아에선 외투가 곧 생명이다. 
러시아에서 외투 없이 겨울을 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온몸으로 남편을 막아서는 아내의 눈빛이 슬프다 못해 공허하다. 
이 가족이 엮어내는 슬픈 아우라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알코올 중독으로 주위 가족을 힘들게 하는 건 인간이 만드는 가장 슬픈 범죄 중의 하나다. 
<탈무드>를 보면 아담이 처음으로 술을 빚을 때 
신기한 음료수에 호기심이 이끌린 악마가 다가와서 한 모금을 청한다. 
술 맛에 감동한 악마는 아담에게 감사의 선물을 하겠노라며 양, 사자, 원숭이, 돼지의 
4마리 짐승을 잡아 와 포도밭에 동물들의 피를 거름으로 부으니 포도는 풍성하게 자라났다고 한다. 

​하지만 동물의 피 탓에 부작용이 생기게 되고 그 때문에 사람이 술을 마시면 
처음엔 양처럼 순하다가 점차 사자처럼 사나워지고 좀 있으면 원숭이처럼 
춤추고 노래하다가 지나치면 돼지처럼 더러워지는 단계를 거친단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다.

​‘적당히’가 해답이겠지만 불가능한 경우가 너무 많아 안타까울 뿐이다.
마시는 당사자의 몸 또한 병들지만 그런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의 가슴엔 피멍이 든다.
이게 1800년대 러시아에서만의 현실일까?

 

Visit to the Poor, The Philanthropists or The Visit. 박애주의자들. 1874. oil on canvas. 69 x 96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아주 잘 차려 입은 부유한 사람들이 남루한 집을 찾아 왔다. 
그런데 그를 맞이 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둡다. 
맨 왼쪽 고개를 돌린 남자의 표정에는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이 역력하다. 
손을 뺨에 대고 있는 문 앞의 소녀도 불편한 내색을 보이고 있다. 
할머니와 아이만 손을 앞에 모으고 여인을 맞고 있지만 할머니도 마지 못한 얼굴이. 
집 주인이 밀린 집세라도 받으러 온 걸까?  


작품의 제목을 보면 부유한 두 사람은 밖에서는 박애 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불리고 있겠지만 
장작도 별로 없어 차갑게 식은 난로가 여인에게 묻고 싶다.  
박애주의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지? 
가장 낮은 자세로 힘없는 사람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눈 높이에 맞춰 나란히 앉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럼 옷부터 벗고 목과 어깨 힘부터 줄이야 하지 않을까?

 

Dinner (Farmer's Market in Moscow), 1875. oil on canvas. 108 X 71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식사 때가 되자 농산물을 팔러 온 농부들이 모였다. 
식사는 달랑 접시에 담긴 것 하나 뿐이다. 
나이든 남자들 사이에 여인들 모습도 보인다. 모두 힘든 얼굴들이다. 
1861년 러시아는 농노해방을 단행한다. 

근대화를 위한 발걸음을 시작했지만 극심한 경제공황과 계속되는 전쟁으로 
농민들과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양광이 내리는 시장, 죽 한 그릇이란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하다.   
화면 오른쪽 햇볕을 등지고 앉은 사내의 멍한 얼굴을 보니 그는 그나마 죽을 살 돈도 없는 모양이다.

 

The Village Children, 시골 아이들. 1880. oil on canvas.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동네 아이들이 다 모였다. 맨 오른쪽에는 싸움이 난 모양이다. 
모자를 쓴 아이가 맞았는지 울고 있고 제법 큰 아이가 때린 아이를 나무라고 있다. 
나름대로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이다. 
아주머니 앞에 앉은 아이는 발을 잡고 우는데 가만히 보니까 범인은 닭이다. 
고개를 숙이고 도망을 치는 중이다. 
두건을 쓰고 벽에 기댄 여자아이의 얼굴이 붉다. 뜨개질을 하는 중인가? 
가을 어느 날, 시골 양지바른 곳에 모인 아이들은 러시아 아이들의 모습보다는 
우리의 예전 추억으로 먼저 다가온다.

 

Date. 랑데부 (만남). 1883. oil on canvas. 40 × 31.5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24번방


부모로서는 자식이 배불리 먹는 모습을 지켜볼 때 아마도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께다.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하루 세끼를 배불리 먹는 것이 
삶의 가장 큰 행복이고 목표였던 시절에 자주 듣던 말이다.
물론 지금도 다른 형태의 무한 애정을 쏟으며 자식에게 헌신하는 것이 우리 부모들이다.
솔직히 자식을 통해 느껴지는 사랑만큼 벅차고 흐믓하며 행복한 느낌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짝사랑일지라도 말이다.

열살 남짓해 보이는 그림 속의 남자 아이는
어린 나이에 도시로 나와 팍팍한 노동자로서의 눈물겨운 삶을 시작했나 보다.
엄마의 품속에서 좀더 보호 받아야 할 나이로 보이는데 말이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농촌에서의 삶은 아주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굶기를 밥먹듯 했다고 한다.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모들은 어린 아이들을 

도시로 도시로 보내서 끼니라도 연명하게 했다고 한다 .

엄마는 그렇게 떠난 보낸 아들이 그리워 먼길을 찾아온다. .
얼마나 걸었을까? 엄마의 행색을 보아도 그리 쉬운 여정은 아니었을 거라 짐작이 간다.
걱정, 근심, 애틋함, 반가움... 수많은 감정이 엄마의 얼굴에서 교차한다.
얼른 " 엄마 잘 지냈어? 난 괜찮아" 하며 엄마의 하얀 손을 잡아주고 지친 어깨를 감싸주면 좋으련만
무심한 어린 아들은 엄마가 품고 온 빵 한덩이만을 허겁지겁 베어 물고 있다 .
섭섭함이 일기도 전에 엄마는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고단함은 잠시 잊어버린다.
분명 엄마도 배고픔을 참으며 달려왔을 텐데 말이다.
그리곤 가슴 한켠에 올라오는 뜨거움과 애틋함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아들을 쳐다본다 .
이들의 랑데뷰는 표현 못할 무엇이 되어 화폭 전체를 메우고 우리의 가슴도 어루만진다.

마코프스키는 이 가난한 모자의 만남을 보여주며 우리 가슴에 잠자고 있는
기본적이고 순수하지만 쉽게 외면해 버릴 수도 있는 절대적 사랑을 차분히 일깨워 준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
요샌 사랑의 척도를 물질로 가늠하는 몹쓸 풍토가 만연하지만
그래도 진정한 사랑은 관계 속에서 서로를 어루만지고 처지를 이해할 때 진정 느낄수 있다.

 

The Collapse of a Bank (study). 1880. oil on canvas. 71 X 46 cm.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Bankruptcy,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81. oil on canvas. 104.2 X 68.2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두 장의 그림이 거의 같은 내용이다. 
화면 속 많은 사람들이 은행의 파산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자기가 예금한 돈을 돌려 달라고 아우성이다. 
기가 막힌 소식에 정신을 놓고 의자에 쓰러지다시피 한 노인의 모습도 보인다.

​퇴역 군인들은 받아야 할 연금이 순식간에 날아갔다는 말에 울분을 토하고 있는데 
날아간 것은 돈뿐만 아니라, 목숨을 담보로 했던 시절도 날아간 것이겠다. 
창구에 매달려 하소연을 해보지만 직원이라고 뾰족한 수가 없다.

​이런 아수라 판에서도 자기 것을 확실히 챙기는 사람이 있다. 
속 호주머니에 뭔가를 넣고 화면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의 눈은 정직해 보이지 않다. 
어느 때고 힘 있는 사람은 계속 살아 남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던 사람은 계속 좌절해야 했다. 

 

Goodbye, Papa  (also known as The Farewell),  1894. oil on canvas.
Samar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mara)

눈물이 흐를까 봐 눈을 크게 뜨고 애써 아빠의 눈을 피해 보지만 입술까지 와 있는 슬픔은 어쩔 수가 없다. 
앙상하게 야윈 두 손으로 딸의 손을 감싸고 있는 아버지는 이제 떠나는 모습을 
가슴에 담으려고 눈길을 딸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또 다른 세상을 여는 딸이 대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담긴 눈빛이다. 
시집가는 딸을 보는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눈 빛 아닐까?

 

Study to "January 9, 1905 on Vasilyevsky island". 1907. sketch and study.

​<1905년 1월 9일 바실리에프스키 섬의 스케치>
바실리에프스키 섬은 상트페테르브르그 근처에 있는 섬이다. 
이 날 섬에서는 무장한 경찰이 비무장 상태의 사람들을 향해 발포한 일이 있었다. 
마코프스키가 현장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 장면을 그림으로 제작했다.

​뒤에 있는 남자는 겁에 질린 모습이지만 가슴을 열어 젖힌 남자의 표정은 비장하다. 
억울하고 분해서 금방 울 것 같다. 배경만큼이나 흰 가슴이 안타깝다.
내 가슴은 눈처럼 희고 착하다. 너희처럼 시꺼멓고 힘을 가져 본 적도 없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 하는가? 
내가 요구하는 인간으로서의 최소 권리에 대한 주장이 총을 맞아야 할 일인가? 
정말 그렇단 말인가? 좋다, 그렇다면 내 이 흰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라.
​목이 터질 것 같은 사내의 외침이 저에게 들려오고 있다. 
생각해보면 역사의 일정 부분은 힘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먹고 여기까지 흘러왔다.

​1905년 1월 9일은 일요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왕궁을 향하여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하는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한 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제1혁명이 시작된다. 
혁명을 지켜본 마코프스키는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과 같은 약자 편에 선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다. 
마코프스키는 늘 마음에 두었던 힘없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다.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완성되고 난 후 2년 뒤, 일흔넷의 나이로 마코프스키는 세상을 떠난다. 
그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가슴에 담고 그때 떠났기 때문에 행복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뒤로 흘렀던 역사를 보면 혁명은 혁명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A boy selling brew. 186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The artist, selling old stuff to Tatar (Artist's Studio). 186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Literary reading. 186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easant Boys Guarding Horses at Night. 1869​.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Lover of of antiquity. 1869.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Knuckles (Children Playing). 187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he Church Choir. 1870. oil on canvas.
Sevastopo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vastopol)

 

The Doctor's Waiting Room. 187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 deacon. 1871. oil on canvas. Omsk Museum of Fine Arts (Russian Federation - Omsk)

 

Fans of nightingales. 1872. oil on canvas. 76 X 5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 girl with geese. 1875. oil on canvas. 27.5 X 39 cm.
Nizhny Tagil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y Tagil)

 

A gypsy lady. 1875. oil on canvas.

 

A Party. 1875. sketch and study. panci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Anticipation,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75. 83 cm X 122 cm,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186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귀족의 토지에 매인 농노를 해방했다. 
전근대적인 농노 제도의 철폐는 역사적 당위였으나 해방된 농민의 
사회통합 방책이 미비한 상태에서 졸속으로 이루어진 개혁은 혼란을 가져왔다. 
땅 한 뙈기 없는 농민들은 전보다 더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농민의 참상을 목격한 진보적 지식인들은 농민 속으로 들어가 
이들을 교육하고 농촌을 개선하자는 브나로드운동을 일으켰다.

 

미술도 이에 반응했다. 
1871년 젊은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의 전통을 거부하며 이동파를 결성했다. 
이동파는 주제와 전시 방식 모두를 혁신했다. 
브나로드운동에 동조해 농민의 일상생활과 러시아의 자연을 주제로 삼았으며, 
이름 그대로 지방 도시를 돌아다니며 전시회를 열어 관객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마코프스키는 1872년 이동파에 가담했다. 
그는 뚜렷한 현실 인식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검열제도가 엄존했기 때문에 사회 비판은 조심스럽게 수위를 조절해야 했다. 
이 그림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춥다’. 
세상은 눈으로 덮여 있고, 누런 건물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옷을 덕지덕지 껴입고 숄, 모자 등을 뒤집어쓰고 있다. 
문기둥 위쪽 아치에 쓰인 글씨가 이곳이 감옥임을 말해 준다. 
이 사람들은 왜 감옥 앞에 모여 있을까?

 

이 부분에서 역사적 배경이 개입한다. 
이들은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죄수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기다리는 가족들이다. 
각자 죄수에게 전해 줄 보퉁이를 지니고 초조하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가운데 있는 세 사람(관객을 향하고 서 있는 남자와 그 옆의 두 여인)은 
말쑥한 차림새로 그 옆의 누추한 농민들과 구분된다. 
브나로드운동에 뛰어들었던 중산층 젊은이는 정치범으로 체포돼 
정당한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시베리아 유형을 갔다. 
이 가족의 아들도 아마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들이 기다리는 죄수들은 무슨 죄를 저질렀을까? 
불순분자일까? 테러리스트일까? 아니면 사법제도의 희생자일까? 
그림은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가가 이들에게 공감을 표시하고 관객에게도 동의를 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미술평론가 이미혜

 

Making Jam,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76. oil on canvas. 49.5 X 33.9 cm.
Samar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mara)

 

The Distribution of Pensions. 1876. oil on canvas.
Nizhny Novgorod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i Novgorod)

 

Old Lady's Promenade. 1877. oil on canvas.
Nizhny Novgorod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i Novgorod)

 

Two Peasant Girls. 1877 .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 Private Conversation. 1878. ink on paper. 20 x 25.5 cm. Private Collection

 

Buddies. 1878. oil on canvas.
Chelyabinsk State Museum of Fine Arts  (Russian Federation - Chelyabinsk)

 

Congratulations. 1878. oil on canvas. 35 X 29 cm.
Serpukhov Historical and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rpukhov)

 

At Noon, 1878. oil on canvas. 125.5 X 84.9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Brew seller. 1879.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Guitar player. 1879. oil on canvas.
Saratov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ratov Region)

 

Moscow types. 1879.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Organ grinder. 1879.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Condemned. 1879. oil on canvas. 113 X 76.5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A portrait of E. I. Makovsky. 188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easant boys. 188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Midday Sun. 1881. oil on canvas. 32 X 24 cm. 
Serpukhov Historical and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rpukhov

 

Old man with a pipe. 1881. oil on canvas.
Karelia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Petrozavodsk)

 

Fair. 1882. oil on canvas.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The Prisoner. 1882. oil on canvas.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Two ukrainians. 1882.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Not Guilty,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82 , oil on canvas, 105 X 79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Village Fair. 1882​.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 letter. 1883.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In a Country School,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83. oil on cadboard. 42.5 cm X 66 cm. 
Tul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the Artist Illarion Mikhailovich Pryanishikov. 1883. ​oil on canvas. 
70 X 8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eprimand. 1883. oil on canvas. Ivanovo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Ivanovo)

 

Fishing (The Angler). 1884.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Off to Get Medicine,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84. 64.6 cm X 47 cm.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In the Entrance. hall. 1884. oil on pan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oliticians.1884.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f Armenia (Armenia - Yerevan, Armenia)

 

The secret. 1884. oil on pan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Zaporizhzhya Cossack, 1884. 

 

Two pilgrims. 1885. oil on panel. 
The State Museum of Fine Arts of Tatarstan Republic  (Russian Federation - Kazan)

 

Fisherwomen. 1886. oil on cabvas.
Krasnodar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rasnodar)

 

Mother and daughter. 188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Prayer service at the farm in Ukraine. 188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Wandering fiddler. 1886.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From the rain. 1887. oil on canvas.
Ulyanovsk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Ulyanovsk)

 

Hunters at Rest. 1887. oil on canvas.
Serpukhov Historical and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rpukhov)

 

Miracle at Cana. 1887. oil on canvas. Vitebsk Art Museum (Belarus - Vitebsk)

 

Easter Te Deum,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87~1888. oil on canvas. 119 X 192 cm.
Serpukhov Historical and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erpukhov)

 

In the Tavern. 1887. Private collection

 

Crimean seashore. 1889. oil on canvas. State Literary Museum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Alexei Ivanovitch Strelkovsky. 1889. oil on canvas. 39 X 5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Doss House. 1889. oil on canvas. 143 X 9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I. E. Tsvetkov. 189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 portrait of E. S. Sorokin. 189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Declaration of Love. (The Explanation). 1889~1891. oil on canvas. 39.5 X 53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Hiring a servants. 1891. oil on canvas. Perm State Arts Gallery  (Russian Federation - Perm)

 

Hiring a servants. 1891. 

 

Morning tea. 1891. oil on panel.  Private collection.

 

Over the chips. 1892. oil on canvas.
Kursk Deineka Picture Gallery  (Russian Federation - Kursk)

 

His First Suit, Vladimir Yegorovich Makovsky, 1892. oil on canvas,
Arkhangelsk Regional Museum of Fine Arts  (Russian Federation - Arkhangelsk)

 

At the porter's room. 1893. oil on canvas.
Taganrog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Taganrog)

 

Two sisters. 1893.

 

 A portrait of Dmitry Rovinsky. 189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Jesus Christ. 189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mateur Artist Working en Plein Air. 1896. Watercolor. Private collection

 

[영상] Vladimir Makovsky (1846 - 1920) Realism Russian

 

 

 

 

 

 

일제 앞잡이가 영웅 되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

정희상 기자 / 2020.07.09. 09:51

 

맞아 죽더라도 잘못된 군 역사 하나는 바로잡겠다고 각오했다. 독립군과 조선인을 죽이고, 전공을 과장해 스스로 영웅이 된 백선엽이 국립현충원에 묻힌다면 역사의 후환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시사IN  조남진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박경석 예비역 준장은 나쁜 것까지 가지고 가는 보수는 참된 보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박경석 장군(88·예비역 육군 준장)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야전에서 두루 거친 노병이다. 한국전에서는 화랑무공훈장을, 베트남전에서는 최고 무공 수훈인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이른바 육사 생도 2출신이다. 195061일 첫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 생도로 입교했다가 20여 일 만에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임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전장에 투입됐다. 박경석과 함께 포천 전투에 참가한 동기생 330명 중 86명이 초기에 전사했다. 17세의 초급장교였던 박경석도 전투 중에 수류탄 파편에 맞아 몸의 왼편을 크게 다친 와중에 인민군 포로가 됐다. 그가 포로가 된 뒤 부대에서는 전사자로 처리한 다음 서울 동작동 국군묘지(국립현충원)에 가묘를 설치했다. 집에서는 장례식까지 치렀다. 지금도 동작동 국립현충원 15-2묘역에는 고 육군 소위 박경석의 묘가 그대로 남아 있다(박경석은 지금도 우울할 때면 자신의 묘지를 찾아가 상한 마음을 달랜다고 한다).

 

인민군 10사단에 포로로 잡힌 박경석은 심문을 받다가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석방됐다. 이후 원대 복귀한 그는 1950년 겨울 평창 전투에 참가해 큰 전공을 세우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베트남전에서는 맹호부대 초대 재구대대장(강재구 소령 추모 대대)’을 맡아 전공을 세웠다. 귀국해서 군 생활을 휴전선 등 야전에서만 보내던 그는 박정희 정권 아래 독버섯처럼 자라던 군내 정치 사조직에 맞서 입바른 말을 곧잘 했다. 이 일로 일찌감치 정치군인들 눈 밖에 난 박경석은 1975년 늦깎이 장군으로 진급한 뒤 1980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을 끝으로 군을 떠났다. 당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신군부가 그에게 진압 부대에 무공훈장을 수여하도록 심사를 맡아달라고 강요했다. 그는 단호히 거부하고 스스로 군복을 벗었다.

 

야전 군인 박경석은 초급장교 시절부터 숨은 문인이라는 특이한 이력도 갖고 있다. 그는 육군 대위 때 필명 한사랑(韓史郞)’으로 등단해 틈틈이 시와 소설을 썼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야전 경험을 토대로 지금까지 총 83권의 저서를 냈다. 이 가운데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시기 명장으로 꼽히는 김홍일과 채명신 등 원로 장성 15명에 대한 평전과 회고록도 포함돼 있다. 현재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등 전국의 군 시설 11곳에는 박경석의 시비가 들어서 있다.

 

군 예편 이후 문인이자 군사평론가, 군사연구자의 길로 들어선 박경석은 왜곡되고 굴절된 한국 군사(軍史)를 바로잡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6·25전쟁 과정의 가짜 영웅실태를 조사하고,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국군 창설 초기 친일파와 독립군 장교를 연구했다. 특히 6·25전쟁 영웅으로 알려진 백선엽이 일본군 간도 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서고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했던 숨은 행적을 추적하는 데 오랜 기간 매달렸다. 더 나아가 한국전쟁 과정에서 육탄 10용사’ ‘육탄 5용사라는 일본군과 비슷한 영웅담이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서도 꼼꼼한 사실조사를 벌였다. 그는 6·25 영웅담이 상당수 날조·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일본군 출신 지휘관들이 부하의 죽음을 자신의 공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2010년 무렵 이명박 정부는 백선엽을 한국군 최초 명예원수(5성 장군)로 추대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박경석은 자신이 필생의 과업으로 모아온 친일 행적 근거자료 등을 토대로 앞장서 반대했다. 외로운 그의 외침에 쟁쟁한 군 원로들이 동참했다. 이런 기세에 눌린 이명박 정부는 결국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 작전에 백기를 들었다.

 

민족사 최대 비극인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또다시 백선엽이 소환됐다. 이번에는 그의 사후 국립현충원 안장을 둘러싼 논란이다. 박경석은 이 논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대전 유성구에 사는 박경석 장군 자택을 찾았다. 80대 후반의 고령임에도 시종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인터뷰에 응한 그는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도록 백선엽 미화에 매달리는 보수 진영에 대해 가짜를 알면서도 신봉하면 참된 보수가 아니다라고 개탄했다.

 

일본군 출신 장교들을 연구해오셨는데.

 

일본 군대 출신 장교라고 무조건 척결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비록 일본군 출신이라 해도 독립운동을 직접적으로 탄압하지 않고 해방 뒤 잘못을 인정한 다음 대한민국에 기여한 장군들도 많다. 자칫 잘못하면 백선엽 때문에 그분들까지 한꺼번에 매도당할까 하는 걱정이 없진 않다.

 

일본군 출신 사이에도 차이점이 있다?

 

그렇다. 과거 잘못을 인정하고 안 하고는 천지 차이다. 이종찬, 이한림 장군은 일본군 출신이었지만 과거 잘못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김종오 장군도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그분들은 백선엽처럼 간도 특설대에 근무하거나 독립운동가를 혹독하게 다룬 적이 없다. 그러나 백선엽, 정일권 같은 일본군 출신은 끝까지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간도 특설대 근무가 문제인 이유는?

 

일제 만행을 담은 역사 화보에서 사람 목을 칼로 베는 장면이 바로 간도 특설대가 조선 사람 죽이는 모습이다. 오랑캐의 손으로 오랑캐를 잡는다는 이이제이 전법을 적용해 조선인 손으로 조선인을 잔인하게 제압하라고, 일본군이 만든 부대가 바로 간도 특설대다. 백선엽은 간도 특설대에 지원병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일본과 중국에서 관련 증거서류를 다 확보했다. 국내에 나도는 백선엽의 간도 특설대 활동 증거는 모두 내가 수집해온 것이다.

 

자료를 어떻게 입수했나?

 

일본에 건너가서 간도 특설대 연구 전문가인 다나카 히사이로 박사를 만났다. 그가 모든 관련 자료를 넘겨줬다. 보니까 기가 막혔다. 백선엽은 한국군 생활을 마친 박정희~전두환 정부 시절에 일본을 오가며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일본어판 회고록까지 냈더라. 일본 만주군관학교 동기생들 모임에 나가서 간도 특설대에서 근무한 게 영광이라는 연설도 했다. 독립군과 조선인을 죽인 것도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거라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했더라.

 

백선엽은 1993년 일본에서 간도 특설대의 비밀이란 회고록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전력을 다해 독립군을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일본을 배반하고, 오히려 항일 게릴라가 되어 싸웠다고 해도 대한민국 독립이 빨라졌으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는 소회를 밝혔다.

 

백선엽 같은 일본군 출신을 중용한 이승만 정부의 책임이 크지 않나?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군 출신을 활용했지만 나름 최소한도의 안전장치를 두었다. 국방부 장관을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인 이범석 장군으로 앉혔다. 일본군 출신들에 대해선 후보생으로 받아 한국군 소위에서부터 시작하는 코스를 밟게 했다. 건국과 창군 초기에 어쩔 수 없이 일본군 출신을 썼지만 원칙은 지켰다고 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야심차게 밀어붙이던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를 좌절시켰는데.

 

간도 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았던 사람이 초대 명예원수가 되고, 영웅으로 부각된다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원수 추대라면 그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크다. 6·25전쟁 참전 원로 장군들이 백선엽 영웅화를 이구동성으로 반대했던 이유도 그것이다.

 

백선엽이 저지른 친일행위보다 6·25전쟁의 공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6·25전쟁사를 모르는 일반인, 특히 정치인들은 마치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이 인민군을 다 막아서 대한민국이 구출된 것처럼 주장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낙동강 전선이 240였다. 그 전선에서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 8개 사단이 합심해서 방어해낸 것이다. 백선엽은 그중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낙동강 방어에서 미군도 큰 역할을 했다.

 

미국 공군 B29 폭격기가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미 연합군 8개 사단을 지휘하면서 불퇴전의 결의로 앞장섰던 미군 워커 장군의 공도 컸다. 워커 장군은 나중에 교통사고로 작고했지만 우리 정부도 낙동강 전선의 공로를 기려 그의 이름을 딴 워커힐 호텔까지 만들었다. 훗날 일각에서 백선엽이 낙동강 전선을 혼자 사수한 것처럼 과장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누가 과장했나?

 

6·25전쟁 공로를 과장해 스스로 영웅화한 주역은 백선엽 자신이었다. 그는 군복을 벗은 뒤 박정희 정부 때부터 30년간 전쟁기념관에 사무실을 두고 출근하면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을 자원해 맡았다. 참전하지 않고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이고, 백선엽 장군이 내신 6·25 관련 책이니까라며 덮어놓고 찬양했다. 그러나 참전 장군들은 다 안다. 그분들은 백선엽 장군을 영웅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6·25전쟁의 진짜 영웅이 있다면?

 

당시 전쟁기를 통틀어 김홍일 장군과 김종오 장군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 정규군 중장 출신으로 일제 말기 임시정부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다. 6·25전쟁 초기 김홍일 장군 아니었으면 대한민국글자가 없어질 뻔했다. 이 역사가 아직까지 너무 묻혔다. 일본군 출신 백선엽 때문에 묻혔다. 국민들이 거의 모른다.

 

연합뉴스  1955927일 제1군사령부 주최 전군사격대회에 참석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앞줄 가운데)과 각 군단장. 앞줄 맨 오른쪽이 당시 1군사령관이었던 백선엽 대장.

 

묻힌 이야기는?

 

6·25 개전 초기 국군이 무너져 내렸다. 개성의 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전날 서울 육군회관 파티에 외출 나갔다가 6·25가 터진 그날 오전까지 부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단장이 없는 동안 닥친 전쟁에서 1사단은 속수무책 후퇴했다. 임진강 남쪽의 일부 병사들이 고향 집으로 달아나버릴 정도로 부대는 엉망진창이 됐다. 백선엽에겐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다. 유재홍 준장의 의정부 7사단도 무너졌다. 춘천 지구를 방어하던 김종오 대령의 6사단만 제대로 싸우며 3일을 버텼다. 김종오 대령은 (전쟁 발발 전부터) 위기의식을 느끼며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대대장 이상 계급에 대해 전부 외박을 금지해두었다.

1사단과 7사단이 붕괴되자 김홍일 장군이 군 원로회의를 소집해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을 앞에 두고, (북한군에 쫓겨 내려오는) 부대를 수습해서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주장했다. 신성모와 채병덕은 반대했다. 대구·광주·대전의 후방 3개 사단을 서울 근방으로 불러올렸지만 올라오는 족족 인민군의 공세에 붕괴됐다.

 

당신은 어디에서 싸웠나?

 

그때 나는 육사 생도로서 포천 전투에 나갔다. 부대가 완전히 붕괴되어 86명이 계급·군번도 없이 전사했다. 후퇴해서 수원으로 내려와 특공대를 모집해 한강 방어선에 참가했다. 광복군 원로인 김홍일 장군이 신성모·채병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만든 방어선이었다. 김홍일 장군이 한강 방어선을 적극 주장하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그를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김홍일은 장교와 헌병을 진두지휘하면서, 1번 국도와 야산을 통해 썰물처럼 퇴각해 내려오는 국군 패잔병을 수습해 만든 임시 사단을 한강에 배치했다.

그해 628일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이틀을 주춤한 이유가 있다. 우선 북측은 한강 이북 서울 중심부를 점령한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을 다 차지한 거나 다름없다고 자만했다. 당시 북측은 인민군 2사단이 춘천에서 국군 6사단을 물리친 뒤 이천을 거쳐 수원 남방에 포위망을 구성해서 한국군을 궤멸시키는 작전을 세웠다. 그런데 춘천에서 (김종오의) 국군 6사단이 잘 버티며 그 작전을 무산시켰다.

아주 교묘하게 맞물렸다. 김홍일 장군이 한강 방어를 안 했거나 춘천에서 김종오 대령이 인민군을 막지 못했다면 나라가 무너지는 판국이었다. 두 사람의 작전이 맞아떨어지면서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르는 사흘을 얻은 것이다.

 

개전 직후 사흘이 중요했던 이유는?

 

미국 조야에서는 초기 전세로 판단할 때 참전 시점이 늦었다고 봤다. 오키나와로 이승만 정부를 망명시킨다는 말까지 돌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김홍일과 김종오가) 초반 3일을 벌면서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 결정에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대한민국 구출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김홍일 장군과 김종오 대령의 공로는 백선엽의 초기 행각에 대비해보면 철저히 과소평가되었다. 이런 구체적인 전쟁사를 요즘 군인이나 군사 전문가들은 잘 모른다. 백선엽 영웅 만들기에 가려져버렸다.

 

백선엽의 1사단 병사들이 개전 초기에 인민군 전차를 육탄 돌격으로 막았다는데.

 

일본군 출신 일부 장군들이 스스로를 전쟁 영웅으로 미화하기 위해 과장하고 날조했다. 적 전차를 육탄으로 부쉈다는 심일 소령과 육탄 5용사’, 적 토치카를 맨몸으로 파괴하고 장렬하게 산화했다는 육탄 10용사사건이 대표적인 해프닝이다. 육탄 10용사 중에서 한 병사가 북한 방송에 나와 귀순 월북을 종용한 사건은 (우리 군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이런 영웅들을 기리는 동상이 아직도 육사에 그대로 남아 있고, 교과서에도 실렸는가 하면 군가까지 만들어 불렸다. 그 뿌리는 일본 군국주의에 있다.

 

어떤 뿌리인가?

 

일제하 초등학교 교과서에 태평양전쟁에서 적의 전차를 파괴하고 목숨을 던진 육탄 3용사의 영웅담이 게재돼 있었다. 당시 조선 청소년들에게 그 글에 감동하라고, 혈서를 쓰라고 강요하면서 일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시켰다. 그 영웅담은 일본 패전 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백선엽 같은 일본군 출신 장군들이 똑같은 수법을 6·25전쟁사에서 되풀이한 것이다.

 

백선엽 장군이 6·25전쟁 가짜 영웅 만들기에 개입했다는 근거가 있나?

 

일본군 출신 장군들이 나에게 구체적으로 육탄 용사 영웅 만들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일본군 출신인 손 아무개 장군이 나에게 직접 그러더라. “월남전 영웅으로는 강재구 소령이 있지만, 일본군 출신 중엔 영웅이 하나도 없지 않으냐. 백선엽 장군이 직접 나서서 타당성을 주장하시는데 박경석 장군이 좀 도와달라.”

심일 소령에 대해서는, 내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당연직 공적심사위원장을 맡았던 1980년대 초반의 1차 조사 당시, ‘이미 허구가 드러났다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나를 백선엽 장군 방으로 데려가더라. 백선엽은 그 자리에서 나에게 심일 소령을 영웅으로 만들자고 이야기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거절하며 그 자리를 나와버렸다. 그런데 3년쯤 지나니까 육군사관학교에 심일 소령 동상을 세우고 심일상을 제정했다. 내가 손 장군한테 전화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손 장군은 백선엽 장군이 참모총장한테 특별히 부탁해서 성사시킨 거니까 그런 줄로만 알고 잠자코 있어달라고 했다.

역사의식 없는 역대 국방 수뇌부들이 만든 어이없는 해프닝이다. 육사, 삼사 등 군 간부 양성기관에서는 소위 백선엽 도서 코너를 따로 만들어 그를 칭송한다. 백선엽이 낙동강에서 싸워 혼자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으로 만들어지니까,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으로 3개 프로젝트를 밀어붙였다. 하나는 명예원수 추대, 하나는 백선엽상 제정, 그리고 정부가 공적으로 간행하는 백선엽 회고록. 3개 프로젝트가 이명박 정부에서 결정됐는데, 내가 앞장서서 막았다. 백선엽 영웅화 반대 선언문을 발표했다. 당시 살아 있던 6·25 참전자들이 울분을 토하며 합류했다.

 

백선엽 지지 세력의 방해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맞아 죽더라도 잘못된 군 역사 하나는 바로잡고 죽겠다고 각오했다. 독립군을 잔인하게 죽인 일제 앞잡이가 대한민국의 초대 명예원수가 된다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 대한민국 건국이념은 어떻게 되나. 자칫 북한의 6·25 남침이 일제 잔재 소탕 전쟁으로 정당화되면 어떻게 하나? 이걸 바로잡지 않으면 이 나라가 세계적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거다.

 

보수 진영 내에서는 백선엽을 이순신 장군이나 홍범도 장군에 빗대 칭송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청춘을 야전에서 바친 군인으로서 스스로 보수라 자처하지만 나쁜 것까지 가지고 가는 보수는 참된 보수가 아니다. 가짜와 거짓은 털고 가야지, 속이고 갈 순 없다.

 

백선엽 장군의 국립현충원 안장 논란을 어떻게 보나?

 

비록 현행법상으로 백선엽이 현충원에 묻힐 자격을 가졌다 하더라도 내가 후손이라면 극구 만류하겠다. 그가 만일 국립현충원에 안장되면 역사의 후환을 면치 못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묻힐 곳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백선엽 장군에게는 현충원 대신 인천에서 선인학원으로 형제애를 나눈 동생 백인엽씨가 묻혀 있는 가족묘가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한다.

 

 

 

Vassily Maximov. portrait by Ivan Kramskoi. 1878. 
막시모프의 초상화. 이반 크람스코이 작.


바실리 막시모프 (Vassily Maximovich Maximov. 1844-1911) 
막시모프는 농가에서 태어나 일찍 고아가 되어 이콘제작소에서 일하며 그림을 처음 배웠다.  
19살에 황립예술학교 입학, 1864년 "아픈 아이"를 그려 재학생 금메달 수상.  
3년의 학교를 마친 1865년, 크람스코이가 이끌었던 14명의 학생처럼, 
막시모프는 학교의 메이저 금메달 경연대회에 불참한다.  
막시모프는 이 금메달의 부상으로 가는 유럽 유학보다는 러시아 농촌에서 그림공부하는 쪽이 낫다 생각했다.  
그는 슈비노 마을로 이주하여 귀족 자제에게 그림지도를 하며, 농촌의 삶을 그렸다.

 

에칭화로만 남아 있는 "Sick Child." 1864.

이 그림은 막시모프가 그리기 전 해에 고향을 찾아 
누나의 10살짜리 딸이 병으로 급사한 개인사를 그린 것이다.  
아직 황립예술학교 학생일 때라, 농부의 침대를 마치 귀족의 휘장처럼 
담요로 둘러댄 것이 바로 아카데미의 미술 기준의 영향이다.  
그 결과 농촌의 실제 삶의 분위기가 흐려졌다는 것.  
이런 기득권의 미적가치 강요를 거부한 게 "Peredvizhniki 이동파" 운동이다.

 

Grandmother's tales.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1867. Tretyakov Gallery. 


우리에게도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 얘기를 
화롯가에서 듣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다. 
막시모프는 1867년 "이동파"의 전시에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Grandmother's tales)를 내어 
입상하고 파벨 트레치코프가 구입한다.  


1872년 "이동파" 회원이 된 후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주요 화가이다.  
일리아 레핀은 막시모프를 가리켜, "이동파' 모임에서 가장 부서지지 않을  기반석"이라 평하기도.
1900년 전후로 러시아 사실주의는 쇠퇴했는데도 막시노프는 여전히 농부의 삶만 그려서 
그림 구매자가 없었고, 따라서 그의 말년은 가난과 질병의 삶이었다.  
상트 페테르스부그에서 사망했다.

 

Everything is in the past. 모든게 지난 과거. 1889. oil on canvas. 72 × 93.5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겨울의 차가움을 끝내고 봄의 화사함을 즐기는 두 노인.
귀족과 하인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뒤로하고 함께 차를 마시는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을 피붙이처럼 보내며 세속의 어떤 구속도 뛰어넘는 삶을 견디고 있다. 

소파에 몸을 기댄 할머니의 표정이 아련하다. 
땅 바닥인데도 발 받침을 깔아 놓았고 테이블 위에는 고급 그릇들이 놓여 있다.
​한 때 아주 부유했던 모양이다. 
그 옆의 노인은 시중을 드는 역할인 것 같은데, 두 여인의 표정이 대조가 된다. ​
소파에 앉은 여인은 하늘을 보고 있고 계단에 앉은 여인은 땅을 보고 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바로 앞의 것을 볼 수가 없다.

​예전에는 꽤 근사했을 집이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으로 햇빛 아래 서 있는데, 
할머니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모든 과거는 소중한 것이지만 지금 내가 당당하게 땅을 밟고 있을 때 더 빛이 나는 법이다.

1872년, 막시모프는 이동파의 멤버가 되었고 

가입하자 마자 곧 이동파의 중요한 그리고 열성적인 멤버가 된다.  ​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이동파의 취지가 맞았으니 흥이 날 수밖에 없었겠다. 
막시모프의 작품에는 러시아 농민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이야기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처럼 다가 오기도 한다.

 

Everything is in the past. 부분.

허공을 바라보는 노파의 시선엔 그리움이 가득하다. 
찬란하게 빛나던 젊음의 시간 속에 인생의 굽이마다 널려 있던 아련한 사연을 떠올린다. 
그런 그녀를 위해 햇살은 아름다운 교향곡을 울려준다. 


나이 들고 병들어 육신의 계절은 차디찬 겨울이지만 
과거에 두고 온 젊음을 떠올리며 이렇게 또 하루를 견딘다.
노파는 보라색 라일락이 만개한 화려한 계절을 따라 타임머신을 타고 있다. 
과거를 아련히 떠올리는 표정엔 만감이 교차한다.

 

Everything is in the past. 부분.

묵묵히 바느질하고 있는 여인은 하녀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무채색으로 이뤄진 그녀. 
지금의 밝은 햇살이 고마울 따름이지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을 봄날은 없다. 
오히려 머리맡에 앉아 뜨개질 하던 지난 과거를 지우고 싶은 듯하다.

세월의 눈이 하얗게 내려 앉은 그들은 
하나의 사모바르 (러시아 차주전자)에서 차를 따라서 함께 마신다. 
신분의 고하를 떠나 두 노인은 이미 서로를 의지하는 친구가 되었다. 
험난했던 인생의 골짜기 굽이굽이 마다 함께 견뎠을 그들이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내려 앉는 것, 
평생을 함께 해온 인생의 동반자로서 이 순리에 순응하며 끝까지 생을 함께 할 것이다. 
반상의 차이는 물리치고 인간으로서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갈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조용히 가르친다.

이 한편의 그림에서 그들이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며 
현재를 읽으며 그리고 함께할 미래를 가늠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의 삶도 그들과 함께 그림 속에 투영된다.
“그렇게 우린 그림에서 인생을 배우고, 삶을 느낀다.”

 

The sick husband, 병든 남편. 1881. oil on canvas. 70.8 x 88.6cm.

그림 속 병상에 누워 있던 남자는 이제 더 이상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 남편을 보살피던 여인은 털썩 무릎을 꿇고 그녀가 섬기는 신에게 하소연한다. 
그를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최선을 다했는데 꼭 그를 데려가야 하는가에 대한 절규인지... 


그림에서 처럼 보통 러시아 가정은 집안의 가장 성스러운 곳에 이콘을 걸어놓고 기도를 올린다. 
그래서 러시아 일반 가정집에 초대 받았다면 집안 어디에 이콘이 걸려있는지 살펴보고 
기본적인 예를 갖추는 것이 좋다.

아내는 이콘화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바로 옆 침대에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고 병이 들어 누워 있는 남편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치마 밑으로 살짝 보이는 그녀의 맨발과 침대 아래 놓인 남편의 쓰러진 신발이 애처롭다.

​남편이 누워 있는 침대도 나무 위에 짚을 깔고 모포를 그 위에 깐 것이다. 
가난한 생활에 남편까지 병들었으니 이 부부의 앞날이 그을린 마루 바닥 같은 색일까? 
그런데 울어 본 사람은 알지만 눈물만큼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도 많지 않다.
눈물은 절망의 가장 밑 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빛을 막기 위해 창에 걸어 놓은 천도 이제 곧 내리게 될 게다.

막시모프는 상페테르부르크에서 140km 정도 떨어진 노바야 라도가 근처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농부였는데, 어려서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가 수도원에서 공부를 끝내고 이콘 화가의 견습생 일을 시작한 것이 열 한 살 때였으니까,
부모를 여읜 것은 그 이전이나 그 언저리쯤의 나이가 아닐까 싶다. ​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나는 부모의 마음만큼 절절한 것이 또 있을까?

 

A Sorcerer comes to a peasant wedding. 1875년. oil on canvas. 116 × 188cm.

농민의 결혼식에 나타난 주술사. 
장면은 겨울 해질 무렵 노브고로드의 한 농가의 방이다. 
결혼 축하연이 벌어지고, 성스런 이콘 아래 신랑 신부가 자리잡고 있다. 


돌연 눈을 잔뜩 뒤집어 쓴 주술사가 방으로 들어온다. 
초대받지 못한 것에 대해 심술이라도 난 듯 주술사의 이미지가 뾰로통하다. 
부모님은 빵과 소금을 들고 황급히 주술사를 맞이하고, 신랑 신부는 놀란 듯 일어선다. 
사람들은 소곤거리기도 걱정스런 눈 빛을 보내기도 한다. 


키가 아주 큰 주술사는 손에 목발을 짚고 마을 주민들을 쏘아본다. 
그러자 그들은 돈주머니로 손을 옮기고 있다. 
모두가 주술사가 어떤 말을 쏟아낼 지 긴장한 듯 보인다. 
마치 연극 무대의 한 장면처럼 마을 사람들에겐 빛을 주고 
주술사가 서 있는 쪽은 어둠에 묻어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농민의 결혼식에 나타난 주술사>에서 주술사 부분.

 

<농민의 결혼식에 나타난 주술사>에서 신랑 신부 가족들 부분.

 

 In the Rye Field. 호밀 밭에서. 1903. oil on canvas. 

호밀을 수확하는 노인 앞에 들꽃이 어지럽다. 
풍성하게 보여야 할 수확철의 호밀 밭이지만 하늘이 무겁게 내려 앉은 탓일까?
혼자 있는 노인이 외로워 보인다. 
마치 수 많은 난관을 헤치고 길을 만드는 모습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리 저리 제멋대로 서 있는 호밀 때문일 수도 있다. 


조금은 힘들어 보이는 노인의 표정에서 긴 인생의 길도 저렇게 뚫고 왔겠구나 싶다.
그래도 그렇게 거둬 들인 호밀로 한 해를 버틸 수 있으니까 보람되겠다. 
할아버지, 함내세요~!!

막시모프는 예순 일곱의 나이로 상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난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농촌의 슬픔’을 담고 싶었다던 그의 작품은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The Future Artist. 미래의 화가. 1899. The Future Artist. 

흰 벽에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보인다. 
한바탕 야단을 쳐야 할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아주 뛰어난 솜씨로 인물들이 묘사되고 있다. 
일단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잘하면 작은 벽화 한 점이 탄생할 것 같다.

​막시모프의 삶이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20년 전부터, 그는 가난과 건강 악화로 아주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러시아에서도 사실주의 작품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감소한다. 
때문에 그의 작품을 구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이 그리고자 했던 주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The Division of the Family Property, 가족 재산의 분할. 1876. Tretyakov Gallery.

뭔가 평화롭지 않고 심상치 않은 긴장이 비치는 그림이다.  
'재산분할'이라는 그림 제목처럼 가족끼리 재산 분배를 하는 장면인데.. 
테이블 쪽에 앉아 있는 노인들이 부부처럼 보이는 젊은이들과 언성을 높여 언쟁을 하고, 
젊은 남자는 자기 몫이 적다고 항의하는 듯한 그림이다.

 

A Little Mechanic. 어린 기술자. 1871. oil on canvas. 

톱니 바퀴를 만들어 끼운 다음 조심스럽게 돌려 보는 아들을 부모가 조용히 지켜 보고 있다. 
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그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는 방금 들어 온 모습이다. 
아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신이 만든 기계에 빠져 들었다. 
​대견하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도 좋지만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아버지의 눈빛도 재미있다.

​자신보다는 자식의 삶이 더 좋기를 바라는 것은 세상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일 거다. 
문제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아이의 삶을 보장한다고 부모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아이의 미래를 계획하곤 한다.

​지금 아버지의 머리 속이 복잡한 것 같다.
이콘 화가의 견습생이 된 막시모프는 처음으로 미술에 대해 배우게 된다. 
7년간 견습생으로 일하던 막시모프는 열 아홉이 되던 해, 상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일 때도 막시모프는 몇 개의 은메달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그의 재능이 동료들 사이에서도 탁월했다는 뜻이겠다.

 

Sad News from the Front. 전장에서 온 슬픈 소식. oil on canvas. 

전장에서 돌아온 지휘관은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았다.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린 그의 표정에서 가족들은
그가 가져온 소식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는 눈치다. 
어머니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맞잡아 보지만 체념한 표정이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돌처럼 굳었다. 
무표정한 그녀의 표정에서 극도의 절망감이 보인다.
생각해보면 총알만 없을 뿐이지 오늘도 우리는 매일 전장에 선다. 
살기 위해 전장에 나가야만 하는 아이러니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우리는 매일 집으로 살아 돌아가야 한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다음 해, 막시모프는 예술가 조합에 가입한다. 
조합은 화가도 농부처럼 ‘일과 삶의 결합’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했는데, 
1년만에 해산하게 되고 나중에 이 멤버들이 이동파의 주축이 된다.
평생 농민들의 삶에 집중하고자 했던 막시모프의 결심은 이 때부터 싹이 튼 것 아니었을까?

 

Who is there? 거기 누구세요? 1879. oil on canvas. 

아직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깊은 밤, 밖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룻바닥에 놓여 있는 것은 작은 몽둥이 같은데, 여인은 그것보다는 톱을 들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것이 좀 더 효과적이겠다.

​거기 누구세요?
​여인 옆에 선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두려움의 크기만큼 커졌다.
두려움의 원인은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거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두려움이라는 것마저 잊어 버린 것일까?

1864년에 아카데미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막시모프는 다음 해에는 경선 대회 참가를 포기하는데, 
이동파의 주창자였던 크람스코이의 운동에 동참한 것이었다. 
경선에서 우승하면 외국 유학이 보장되는 것이었지만, 그는 
‘나는 외국 유학보다는 러시아, 러시아 농촌을 더 공부해야 한다’라는 이유를 내걸고 경선에 나가지 않았다. 
그의 실력을 감안하면 대단한 각오였다.

 

The Blind Man. 장님. 1884. oil on canvas.

아이가 칭얼거리자 바구니를 짜던 아버지는 아이를 끌어 안고 음식을 먹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와 아버지의 시선은 엇갈려 있다. 아버지는 장님이다.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진 갈대 조각들처럼 아버지의 삶도 어지러웠겠다. 
이콘화 앞에 앉은 그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다.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 대한 헌사일까?
하긴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뜬 장님들이 많은 요즘이다.

3년만에 아카데미 과정을 끝낸 막시모프는 실제로 학교를 떠나 
슈비노라는 작은 시골 마을의 미술 교사로 일하기 위해 ‘도시’를 떠난다.
​젊어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막시모프를 보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람이 떠 오른다.
그는 화가가 아니었으면 ​어쩌면 혁명가가 될 수도 있었겠다 싶다.

 

The Dead Wife, 죽은 아내. 1896. oil on canvas.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비록 예고된 것이었지만 마지막 이별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일 게다.
깨끗하게 깐 짚 위에 평생을 함께 했던 아내를 눕히고 흰 천으로 그녀를 덮었다. 
물끄러미 흰 천으로 덮인 아내를 보는 남편의 눈이 가늘어졌다. 
굵은 두 손을 무릎에 나란히 올려 놓고 끝없이 밀려 올라오는 눈물을 온 몸으로 참고 있다.

시골 마을의 미술교사로 부임하던 해, 볼가강을 여행한 막시모프는 
생생하게 시골 사람들의 인상을 많은 작품을 통해 담는다.
​그리고 이즈음 도시의 삶을 버리고 시골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로 한 것 같다. 
이후 막시모프는 러시아 이 곳 저 곳을 여행한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풍속화가로, 풍경화가와 초상화가 그리고 목판화가와 에칭화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Girl. 1866. 

농민 출신인 바실리 막시모프 (Vasily Maximov)는 평범한 러시아 농사의 삶을 묘사하는 데 전 생애를 바쳤다. 
초상화는 작가의 아트 갤러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노인과 노인, 여성과 남성, 특히 마을 어린이의 이미지가 있다.

그림 “소녀”는 1866년에 예술 아카데미를 떠나 Shubino에 살 때 그렸다. 
여기에서 그는 농민의 삶을 관찰하고 손을 채우고 작가의 스타일을 완성한다. 
이때, "살아 있는"사람들을 끌어 들이기로 결정했다.

농민 소녀의 이미지를 만들 때 작가의 경험이 느껴지지 않는다. 
엄선 된 색상, 선, 디테일, 빛과 그림자의 위치 등 
모든 것이 작가의 이 이미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말해 준다.
우리는 지적이고 현명한 소녀의 얼굴, 나이가 없는 성인을 본다. 
사실, 그녀는 여전히 아이지만 얼굴을 표현할 때 유치하지 않다. 
반대로, 피로, 시련, 일과 일상 생활의 부담이 있다.

특히 소녀의 큰 눈이 부풀어 오른 표정이다. 
아이의 시선은 지능적이고 진지하며 사려 깊다. 
그림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있다. 


당신이 소녀를 볼 때, 당신은 그녀가 방에서 당신과 함께 앉아 있고 
당신이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듣고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당신보다 인생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말을 다소 교묘하게 인식한다.

진지함, 표정의 집중력, 통통한 입술에 미소가 없음은 십대의 염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우리는 소녀의 손을 보지 못하지만, 그녀가 노는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초상화에서 예술가는 소녀의 생생한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The reading lesson. 글공부. 1865.

 

Following Their Elders' Example, 어른들 따라하기. 1864. Irkutsk Regional Art Museum.

 

Peasant hut, 농부의 오두막. 1869.

 

Sewing of the Dowry, 혼수감 바느질. 1866. Tretyakov Gallery.

 

Dream of the future. 미래의 꿈. 1868.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Motherhood. 어머니. 1871. 

 

Interior view of the hut. 오두막 실내. 1869. State Fine Arts Museum of the Republic of Kazakhstan.

 

Preparing for Festivities. 잔치 준비. 1869. State Fine Arts Museum of the Republic of Kazakhstan

 

트레티야코프 집 정원. 1877. 

 

Poor Dinner 가난한 저녁식사. 1879. 

 

Auction for the arrears. 체납금에 대한 경매. 1880-1881.

 

Old man. 노인. 1881. Vasily Maksimov 작품이라 인정됨. Tretyakov Gallery

 

Une mireuse d'oeufs, 촛불에 비추어 달걀이 신선한가 살피는 사람. 1882.

 

Farm girl. 농촌 소녀. 1883.

 

The Diploma. 학위 증서.

 

Trying on a Robe, 옷 가봉하기. 1878. Vyatka Art Museum. 

 

Girl with a book. 책과 소녀. 

 

At the Monastery Gate. 수도원 문에서. 

 

Old Woman in the Field. 들판의 노파. 1891. 

 

Likha in-law. 1893.

 

The Forest Keeper, 삼림지기. 1893. 

 

Old woman in a snowstorm. 눈폭풍 속의 노파. 1896-7.

 

After Mass. 미사 후에. 

 

View of the City of Rybinsk. 리빈스크 시의 전경. 1886.

 

Portrait of an Old Man, Vassily Maximov. 

 

Russian peasant woman. 1896.

 

Outdoor Camping. 1869. 

 

Peasant girl. 1865.

 

Red corner in the hut. 1869. 

 

In the rooms. 

 

Portrait of a Pensive Girl. 

 

Portrait of a thoughtful girl. 1880. 

 

Heard. 1864.

 

Inside view of the cottage. 1869. 

 

Old peasant. 

 

The head of a peasant. 

 

Self-portrait and portraits of friends. 1864.

 

Man portrait. 

 

Male portrait. 1888. 

 

Jeune porteuse d'eau, 1878. oil on canvas. 29.5 x 20 cm. 

 

The only teacher. 

 

[영상] Vassily Maximov painter

 

 

 

 

겐리흐 세미라드스키 (Henryk Hektor Siemiradzki, 1843 – 1902) 

겐리흐 세미라드스키는 로마에 기반을 둔 폴란드 화가로, 
그의 기념비적인 학문 예술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고대 그리스 - 로마 세계와 유럽의 많은 국립 미술관이 소유한 신약의 장면 묘사로 유명했다. 

그의 그림 중 상당수는 고대의 장면, 종종 햇볕에 쬐는 목가적인 장면 
또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타내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는 또한 성서적, 역사적 장면, 풍경 및 초상화를 그렸다. 

 

겐리흐 세미라드스키 (Henryk Hektor Siemiradzki) 

겐리흐 세미라드스키는 17 세기 말 이래 리투아니아에 거주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겐리흐 세미라드스키의 아버지는 러시아 군대의 장교였으며 1871년 장군으로 경력을 끝냈다. 
그러나 가족 안에는 폴란드에 대한 애국심의 분위기가 존재했다. 
그는 예술적 성공을 거두었을 때 언론과 비평가가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에 무관심했다. 
그의 작품은 여전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일부 박물관의 국립 예술 부문에 전시되어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을 하르 키우에서 보냈다. 
세미라드스키는 나중에 그의 교사 덕분에 학업에 매우 잘 준비된 느낌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1864년에 그는 피터스버그 아카데미 예술대학에 처음에는 비등록 학생으로 입학했다. 
많은 노력 끝에 1866년에야 그는 정규 학생이 되었다. 
그는 유명한 전투 화가 Bogdan Willewalde와 Karl Wenig의 후원으로 배웠다. 
아카데미 학생인 세미라드스키는 은메달 5번, 황금 메달 2번을 받았다. 
그는 허미티지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극장을 자주 방문하여 무대 풍경, 장식 및 조명 효과에 주의를 기울였다. 
어린 시절부터 극장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매료되었다. 
1864년과 1865년에 그는 폴란드 지역을 여행했다. 그는 당시 루블린과 바르샤바를 방문했다. 
1871년에 그는 공부를 마치고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과 닥터 필립 (Philip) 박사의 그림으로 
대상 금메달을 받았고, 그 덕분에 해외 유학을 위한 6년 장학금을 받았다.

 

Unfinished Self-portrait. 1876. oil on canvas. National Museum, Kraków, Poland

1871년 가을 그는 크라쿠프에서 잠시 방문한 후 뮌헨으로 향했다. 
폴란드의 국회 의사당에서 그는 처음으로 폴란드의 위대함과 웅장한 기념물과 유물을 만났다. 
이 문화적 경험은 젊은 예술가에게 세련미를 불러 일으켰으다. 
세미라드스키가 뮌헨에 온 후, 그는 혼자 일하기로 결정하고 현지 미술 아카데미에 등록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때 아카데미 교수 중 한 명인 Carl Piloty의 조언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과 닥터 필립 (Philip)의 저자는 요제프 브란트 (Józef Brandt)와 
막시밀리안 기에림스키 (Maksymilian Gierymski)를 중심으로 폴란드 식민지와의 관계를 확립했다. 
그 당시 세미라드스키는 Stanisław Witkiewicz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서로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Witkiewicz는 세미라드스키의 작품에 대한 가장 가혹한 비평가 중 하나가 되었다. 

1872 년 봄 세미라드스키는 짧은 기간 동안 드레스덴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위대한 폴란드 작가 Józef Ignacy Kraszewski와 친구가 되었다. 
나중에 화가는 이탈리아로 갔다. 
그가 베니스와 베로나를 본 후에는 피렌체에서 더 오래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1872년 4월 베수비오 분화를 보고 싶었던 곳 나폴리에 가서 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1872 년 5 월에 영원한 도시에 정착하여 평생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처음에 그는 스페인 광장 근처에 아틀리에를 빌렸다. 
얼마 후, 그는 교외에 자신의 빌라를 지었다. 
그곳에서 예술가는 종종 그의 작품에 묘사된 로마와 알바니아 산맥의 멋진 전망이 있었다. 
세미라드스키의 집은 로마에서 활기찬 폴란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검무. Dance with Swords. 1881. oil on canvas. 120 × 22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검무 (Dance with Swords)는 여성 그룹이 음악을 연주하고 몇 명의 남자가 
시계를 보면서 칼 사이에서 춤을 추는 누드 여성을 묘사한다. 
설정은 이탈리아이며 그림이 정확히 무엇을 묘사하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세미라드스키는 4가지 버전의 그림을 만들었으며 각 구성과 색상 구성이 약간 다르다. 
원래 K. T. Soldatenkov가 의뢰한 버전 중 하나는 모스크바의 Tretyakov Gallery에 있다. 
또 다른 버전은 2011년 경매에서 2,098,500 달러에 판매되었으며, 
이는 세미라드스키 회화의 새로운 기록이었다. 

London Sothesby 경매장에서 세미라드스키의 
검무 (Dance with Swords)가 등장한 것은 꽤나 큰 사건이었다. 
결국, 재포장 된 것은 폴란드가 전쟁 중에 잃어버린 작품 중 하나 일뿐만 아니라 
Jan Matejko와 Józef Brandt와 함께 폴란드 그림의 '3 개 바드' 중 하나로 여겨지는 예술가의 작품이기도 하다.

세미라드스키는 귀족 리투아니아 가정에서 태어난 예술가 자신이 지역 역사에 뿌리를 둔 역사적인 그림에 
결코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폴란드 국민 화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되었다. 
세미라드스키는 역사가 매우 많았지만 폴란드의 역사는 아니었다. 
그는 지중해에 관심이 있었다.

이 작품은 위대한 학문적 주제에 대한 그의 그림 중 하나이며, 
이 경우 화가의 가장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인 기독교 초기 역사의 장면이다. 
그는 또한 목가적인 작곡을 좋아하여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상상의 삶을 묘사했다. 

1939년 여름 바르샤바에 본사를 둔 미술장려협회 (Zachęta)가 개최한 화가의 회고전에서 
런던 경매에서 끝났으며 폴란드 문화부 개입 후 철회 된 그림이 발표되었다. 
전시회는 9월 말까지 열리기로 되어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림은 국립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점령 당국의 허가를 받아 11월에 소유자가 제거했다. 
런던 경매에 등장한 이후의 역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록 1953년 3월 24일에 예술 등록소에 들어 갔지만, 그것을 외국으로 운송 할 수 있는 
허가가 부여되었다는 증거는 없기 때문에 불법으로 추정되었다. 
확인되면 그림이 폴란드로 돌아간다.

관람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세미라드스키는 종종 특정 주제를 반복하고 심지어 완전한 구성, 
가장 존경받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래서 4 가지 버전의 그림이 있다.

이 장면은 로마 칼이 땅에 똑바로 붙어 있는 가운데 춤을 추는 세 명의 여성과 함께 누드 소녀 춤을 묘사한다. 
그늘에 앉아 있는 귀족의 무리가 무용수들을 관찰한다. 
따라서 일화는 짧은 서사시보다 조금 더 복잡하며 일반적으로 분수대 옆의 휴식 장면이나 
야외에서 와인을 마시는 것만 묘사한다. 
세심하게 재현된 화려한 장신구, 폼페이우스 스타일의 그림 조각, 호랑이 피부가 석재 계단에 퍼져 있다. 
그림에는 많은 열린 공간이 있으며 전경은 태양 광선이 들어오는 무성한 지중해 식물군이 지배한다. 
배경에서만은 태양 목욕 언덕과 함께 뻗어 있다. 
예술가의 아들 Leon이 남긴 메모 덕분에 우리는 이 장면이 시칠리아의 Taormina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카프리섬의 티베리우스 축제. An Orgy on the Island of Capri.  1881. oil on canvas. 120 cm × 22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22

 

엘레우시스 포세이돈 축제의 프리네. Phryne at the Festival of Poseidon. 1889.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아리스토텔레스는 " 왜 외형적인 미를 갈망하는가 "라는 사람들의 물음에
"장님이 아니라면 그런 바보같은 질문을 할수 없는 거죠"라고 서슴없이 대답한다.
맞다!! 예쁜건 절대 불변의 진리며 선이다 .

동서 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미, 비너스에 비견되는 아름다운 여자 <프리네>...
사형의 죄를 지었음에도 미모 때문에 , 황홀한 몸매 때문에
죄를 면할 수 있었던 프리네 얘기를 해 보자.

 

Phryne on the Poseidon's celebration in Eleusis (detail). 1889. oil on canvas. 

프리네는 기원전 4세기 경 그리스 보에오티아의 테스피(Thespiae)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리스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로서 

일반 여성은 사회 생활 참여에 엄격한 제약을 받는다.
그리스 직업 여성들은 포주의 재산으로 취급되는 창부 포르네,
포주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호객 행위를 하는 페르피테티케,
그리고 조선시대의 황진이처럼 춤과 음악을 즐기고, 

지식인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며 연애 할 수 있는 헤타이라,
이 세 가지로 나뉘는데, 프리네는 헤타이라였다.
독신으로 살며, 직접 재산을 관리하고, 정치에도 관여한 당찬 헤타이라다.
즉, 이런 헤타이라만이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의 사회 생활이 가능했다는 얘기로 해석할 수 있다.

여인의 숭고함, 소녀의 청순함 , 여성의 관능미를 모두 지닌 프리네는 그리스인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지만 ,
소위 기득권을 가진 남성들에게 주저없이 도전하는 여성인지라 일부 남성들에겐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예쁜 여자는 적당히 나긋해서 자기들에게 기쁨을 주고 노리개의 역할만 하면 충분한데,
프리네는 사사건건 남성의 권력에 도전하는 것이다.

 

Phryne at the Poseidonia in Eleusis (detail). 1889. ​oil on canvas. 

엘레우시스에서 열린 포세이돈을 기리는 축제 때,
프리네는 아프로디테로 분장하고 옷을 하나 하나 벗어 던지며 황홀한 알몸으로 바다에 걸어 들어 간다. 
이것은 화가인 아펠레스(Apelles)에게 아프로디테에 대한 영감을 주기 위한 프리네의 퍼포먼스로,
이 사건을 계기로 프리네는 당대 최고 아프로디테 모델이 되며 비너스로 칭송 받기 시작한다.

참으로 당차고 화끈한 여인이다.
바로 이 드라마틱한 장면을 러시아 화가 세미라드스키는 화사한 빛과 색채로 찬란하게 표현한다.
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고 꽃을 던지며, 여신의 퍼포먼스에 걸맞게 
사랑의 신 에로스 또한 익살맞은 분장을 하고 프리네와 짝을 이뤄 축제 분위기를 한껏 돋구고 있다.
곧 프리네는 미끈한 몸매를 쭉 뻗어 바다로 뛰어들 것이다.
축제의 흥이 바로 앞에서 전해지는 것처럼 생생하다.
'동토의 땅' 러시아에서 이런 화려하고 찬란한 그림이 그려졌다는게 믿겨지지 않는다. 
바로 진정한 아름다움이 뭔가를 거침없이 보여주는 러시아 미술의 힘이다.

 

Roma. 1882. oil on canvas. 1882. oil on canvas.  16.75 X 21.5 cm.

다음 얘기는 어찌 됐을까?
찌질한 남자의 대명사 에우티아스,
프리네에게 구애 했다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이 사건을 복수의 기회를 삼는다.
신성 모독죄로 그녀를 법정에 세운다. 
어떻게 창녀 따위가 여신임을 자처하냐가 문제인 거다.

법정은 그녀에게 사형을 구형하려 하지만 그녀의 애인이었던 웅변가 히페리데스는
그녀의 무죄를 주장하며 그녀의 옷을 찢어 보였다.
배심원 앞에 누드로 선 프리네... 그녀의 완벽한 아름다움에 배심원들은 마른 침만 삼킨다.

‘저 아름다움은 신의 의지다. 신의 의지에 감히 인간의 법을 적용시킬 수 없다.”
그래서 법정은 그녀에게는 무죄를 선언한다.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은 신의 영역이며 또한 선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녀를 용서하는 것은 신의지로 선을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장면을 19세기 프랑스 화가 제롬이 <판사들 앞에선 프리네>를 생생히 그린다.
너무도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이다.
참고로 제롬의 그림 <판사 앞에 선 프리네>를 다음에 첨부한다.

 

Phryne before the Areopagus, 1861. Oil on canvas. 80.5 cm x 128 cm. 
Hamburger Kunsthalle, Hamburg, Germany.
장레옹 제롬 (Jean-Léon Gérôme, 1824년 5월 11일 ~ 1904년 1월 10일)
<판사 앞에 선 프리네>(1861), 쿤스트 할레 독일 미술관

세미라드스키와 제롬의 프리네는 쌍을 이뤄 흥미로운 스토리가 된다.
현대 사회 또한 아름다움에 대해 관용적이며 예쁜 여성은 아름다움 자체가 경쟁력이다.
하지만 반짝이는 모든것이 금이 아니 듯 얼굴만 이쁘다고 미인은 아닌거다. 
프리네처럼 시대를 앞서가고 현실을 통찰하고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주장할수 있는 여인. 
내면적 당당함을 지닌 여인이 진정 미인인거다.
그런면에서 외적 미를 가꾸기 이전에 내면의 아름다움을 돌아보는 현명함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판사 앞에 선 프리네>는 제롬의 작품 중에서 우리에게 많이 소개된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두 개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리이스의 아름다운 창녀였던 프리네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것이다.  
너무나 아름다워 당시 유명한 조각가 프락시틸레스(Praxitilles)가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신상을 제작할 때 모델로 선 여인이었던 고급창부 프뤼네(Phryne)는 
신에게 자신의 형상을 빌려주었다는 이유로 신성모독이란 죄명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녀를 변호하던 애인 히페르데스는 고지식하고 완고한 심판관들 앞에서 최후의 카드를 쓴다.
그는 프리네의 알몸 위에 천을 덮어 쒸운 뒤 법정에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는 동상 제막식을 하듯 그녀의 알몸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겼다. 
이때 "신상에 자기의 형상을 빌려줄 만큼 아름다운 이 여인을 꼭 죽여야 하는가" 라고 물었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란 배심원은 
"저 아름다움은 신의 의지로 받아들어야 할 정도로 완벽하다. 
따라서 그녀 앞에서 사람이 만들어낸 법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하고는 무죄 선언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원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리이스 신화에서 아레스는 군신 (軍神)이다.  
아레스와 아글라로스 사이에는 알시페라는 딸이 있었는데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가 알시페를 겁탈하고 만다. 
‘정신 나간’ 짓이었다.  
아레스는 군신답게 자신의 딸을 겁탈한 할리로티오스를 찾아내 죽인다.

바다의 신의 아들을 죽였으니 결국 고발을 당한 아레스는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의 아레오파고스에서 신들의 재판을 받는다. 
그러나 빛나는 육체를 가진 알시페를 겁탈했다는 것을 알고는 신들이 아레스의 무죄를 선고한다.

 

Portrait of a Lady. 1866.  oil on canvas.
Tver Regional Picture Gallery  (Russian Federation - Tver)

 

Nymph, 1869. Lviv Art Gallery. 

 

Alexander the Great and Physician Philip of Arcarnania. 1870. oil on canvas. 
Tver Regional Picture Gallery  (Russian Federation - Tver)

 

Prince Alexander Nevsky Receiving Papal Legates. 1870. oil on canvas.

 

A Roman Orgy. 1872.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The Road from Rome to Albano .1873. oil on canvas.
Tver Regional Picture Gallery  (Russian Federation - Tver)

 

Christ and Sinner. 1873-1875 .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Landscape. 1873. pencil on paper. National Museum, Kraków, Poland

 

Svislach Landscape. ​​1873. oil on canvas. National Museum, Kraków, Poland

 

Socrates finds his student Alcibiades with Hetaera. 1875. oil on canvas.

 

Socrates finds his student Alcibiades with Hetaera. (Detail)

 

Alexander Nevsky. 1876.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Alexander Nevsky Receiving Papal Legates. 1876.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The Baptism of Christ. 1876.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The Death of Alexander Nevsky. 1876.

 

The Funeral of Alexander Nevsky. 1876.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Jesus' Entry into Jerusalem. 1876.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The Last Supper. 1876.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Sketch for the "Torch of Nero". 1876. oil on canvas. National Museum, Warsaw, Poland

 

Nero's Torches (Leading Light of Christianity). 1876. oil on canvas.
National Museum, Kraków, Poland 

 

A Greek Lady. 1877. oil on canvas.

 

Gypsy. 1877. oil on canvas. 50 X 62 cm.

 

Fishing. A Scene from the Roman Life. 1879. oil on canvas. 75 X 55.5 cm.
National Museum, Warsaw, Poland

 

Pirates. 1880. oil on canvas.

 

Orpheus in the Underworld. 1880. oil on canvas.

 

Portrait of Ludwik Wodzicki. 1880. oil on canvas. National Museum, Kraków, Poland

 

Seller vases​. 1880.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The Naiads. 1880. oil on canvas. 

 

St. John's Eve.  1880. oil on canvas. 

 

Two Figures by a Statue of Sphinx (study). 1870~1880. oil on canvas.

 

Woman with Amours. 1880. pencil , Watercolor on paper.
National Museum, Kraków, Poland.

 

Idyll. 1881. oil on canvas.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The patrician's siesta. 1881.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Reclining Nude (Study). 1881. oil on board. 

 

The Pond Fauna. 1881. oil on canvas. 61.5 x 47 cm. National Museum, Warsaw, Poland

 

Sketch of Burning Corpses of Russes. 1882. sketch and study. pencil Watercolor on paper.

 

Funeral of a Nobleman. 1883. oil on canvas.

 

The Funeral of Ruz in Bulgar. 1883.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New Bracelet. 1883.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 Scene in Ancient Rome. 1883. oil on canvas. 

 

The Slave's Song. 1884. oil on canvas. 

 

Svyatoslav's Army after the Dorostol Battle in 971. 1884. oil on canvas. 

 

The Talisman 1884. oil on canvas.
The Art Museum of Nizhniy Novgorod, Nizhniy Novgorod, Russia

 

Night in Pompeii. 1883~1884. 

 

By a Pool. A Scene from Roman Life​. 1885. oil on canvas. 91 X 153 cm.
National Museum, Warsaw, Poland

 

Saints Timothy and Maura. 1885.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886.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The Country Idyll. 1886. oil on canvas. 

 

A Dangerous Lesson  1886. oil on canvas.

 

Plafon Jutrzenka. 1886.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The Temptation of St Jerome. 1886.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Dirce. 1887.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Chopin Performing in the Guest-Hall of Anton Radziville in Berlin in 1829​. 1887.

 

Portrait of a woman on a pallet. 1887. ​sketch and study. 

 

Portrait of a Lady. 1889. oil on canvas. 

 

Portrait of a Roman Lady. 1889.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t the well. 1889. 

 

At the Well. 1890. oil on canvas. 

 

A Bacchanal. 1890. oil on canvas. 

 

Christ and Samaritan. 1890. oil on canvas. 

 

Portrait of a Roman Lady. 1890. oil on canvas. 

 

Love and Beauty. 1894. oil on canvas. 

 

By the Pool. 1895. oil on canvas.
Saratov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ratov Region

 

The Rest. 1896. oil on canvas. 

 

The Circus of Nero. 1898. oil on canvas. 

 

세미라드스키는 로마 제국의 초기 사건과 고대 이탈리아 사람들의 
목가적인 일상 생활 장면을 묘사한 기념비적인 구성으로 유명했다.

Christian Dirce는 세미라드스키의 마지막 대규모 역사 그림이다. 
그것은 테베의 여왕 디르스 (Dirce)가 황소의 뿔에 묶여 바위에 부딪쳐 죽임을 당하는 
네로 황제의 명령으로 수행된 그리스 신화의 재연을 보여준다.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 (Suetonius)의 글에 따르면, 네로는 원형 극장에서 
게임을 하는 동안 아름다운 젊은 기독교 소녀가 같은 운명을 겪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세미라드스키는 무자비한 광경의 결론을 보여준다. 
기뻐하는 황제가 생명 없는 소녀와 쓰러진 짐승을 검사하는 순간. 
그림의 구성은 학문적 그림의 전형적인 연극과 장엄한 구성을 반영한다. 
거리에 뻗어 있는 갤러리와 배경의 아치는 군중과 중앙의 
주요 인물을 묘사하기 위한 효과적인 프레임을 만든다. 
학문 예술의 원칙에 따라 세미라드스키는 세부 사항에 대한 
거의 고고학적 관심에서 명백한 그의 기술적 미덕과 건전성을 보여준다. 
 관객을 즉시 치는 부정 할 수없는 에로티즘을 제외하고 희생된 아름다움의 상징은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기독교의 관념을 지칭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우리는 보편적인 것,
예술가의 미래에 대한 예술가의 관심과 관련이 있는 폴란드인이 독립을 되찾고 자하는 예술적 희망을 나타낸다.

세미라드스키의 작품은 때때로 그의 친구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소설 Quo Vadis의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The Example of Gods. 1899. oil on canvas. 

 

Playing Dice. 1899.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Christ Blessing the Children. 1900.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lexander Nevsky Receiving Papal Legates. Date unknown. oil on canvas.

 

Antique Landscape with Olive Trees. Date unknown. oil on canvas. 

 

At the Fountain.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t the Undertaker's. Date unknown. oil on canvas.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Chopin in a Berlin Salon (study). Date unknown. oil on canvas.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study). Date unknown. oil on canvas.
Tul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Tula)

 

The Example of Gods. Date unknown. oil on canvas. 

 

The Example of Gods. Date unknown. oil on canvas.

 

Girls on the Terrace. Date unknown. oil on canvas.
Tul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Tula)

 

Going to the Fair. Date unknown. oil on canvas. 

 

Head of a Girl. Date unknown. oil on canvas. 

 

The Holy Family. Date unknown. oil on canvas. 

 

An Italian Courtyard. Date unknown. oil on canvas. 

 

Italian Landscape. Date unknown. oil on canvas. 

 

A Mischievous Boy. Date unknown. oil on canvas. 

 

An Oriental Landscape.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a Lady. Date unknown. oil on board. 

 

The Prodigal Son (study). Date unknown. oil on canvas. 

 

A Roman Landscape. Date unknown. oil on canvas. 

 

A Shepherd Playing the Flute. Date unknown. oil on canvas. 

 

Study of a Plafond. Date unknown. oil on canvas.
The Pushkin State Museum of Fine Arts  (Russian Federation - Moscow)

 

Watercarriers in Rome. Watercarriers in Rome, Date unknown. oil on canvas. 

 

겐리흐 세미라드스키. Христос и самарянка. 1890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역사극장] 젊은 여성 동지를 팔아넘긴 배신자

김단야가 기관지 <콤무니스트>를 통해 폭로해 응징하려 한 ‘이자’

 

독고전, 1928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서울 서대문감옥에 수감 중 찍은 사진(왼쪽). 김명시, 1932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을 때 신문에 보도된 사진. 임경석 제공

 

러시아 모스크바의 옛 코민테른기록관에서 발굴된 어느 문서에 한 인물의 정보가 쓰여 있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의 전설이라고도 할 김단야가 1937년 자필로 작성한 기밀문서에 말이다. 누군가에 관해 발언하고 있다. 식민지시대 반일운동 역사에 관심 가진 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인물이다.

 

이자는 1921년 당원으로 1925년에 당중앙 검사위원, 국경연락원으로 있던 자로서 4년 징역을 살고 나온 자이다. 그는 진실한 공산주의자로 일반의 신임을 받는 자이다. 1931년부터 상해에서 발행한 우리 기관지 연락원으로 있었는데….1

 

4년 수감 생활한 공산주의자는 누구인가

 

‘이자’란 누굴까? 일찍부터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한 열렬한 투사였던 것 같다. ‘진실한 공산주의자로 일반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는다. 경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과연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된다. 3·1운동 직후 사회주의를 수용했고, 비밀결사의 중요 직책을 맡았다. 1925년에 주목해보자. 당 중앙간부로 국경연락원의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1925년이란 바로 그해 4월17일 경성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을 염두에 둔 표현임이 틀림없다. 그 단체의 국경연락 임무를 맡았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을 찾아보면 ‘이자’가 누군지 단서를 잡을 수 있다.

 

1925년 12월 제1차 검거 사건이 터졌을 때, 국경지대에서 체포된 비밀결사 참가자는 셋이었다. <조선일보> 신의주 지국장이며 현지 사상단체 신인회 집행위원인 독고전(38), 신의주의 공개 청년단체인 국경청년동맹 간부 김경서(24), 국경 너머 중국 안동(오늘날 단둥)에 거주하는 조동근(30)이 그들이다. 이 중 4년간 징역살이를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따져보자. 셋 다 검거 초창기인 1925년 12월 초에 체포됐는데, 그중 김경서와 조동근은 1927년 4월 초 면소 조처로 출감했다. 두 사람의 수감 기간은 1년5개월가량이다. 독고전은 어땠나? 그가 출옥한 때는 1929년 8월이었다. 요컨대 그의 수감 기간은 3년9개월이다.

 

그렇다. 앞 인용문에서 말하는 ‘이자’란 곧 독고전(獨孤佺)이었다. ‘독고’는 성이고 ‘전’이 이름이었다. 그는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국경연락을 총괄하는 책임자였고, 조동근은 그의 지휘 아래 압록강 너머 안동현에 체류하는 현지 담당자였다.2 “1921년 당원”이라는 구절에 눈길이 간다. 바로 그때부터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는 뜻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가 태동하던 초창기였다. ‘당’에 가입했다는데, 그 시기 과연 어떤 단체를 말하는 것일까? 고려공산당이었다. 1921년 5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와 호흡을 같이하면서 설립된, 초창기 한국 사회주의운동을 양분하던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바로 그것이었다. 뒷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는 김재봉이나, 대한민국 제2대, 제5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시현 등이 이때 독고전과 더불어 고려공산당에 입당한 동료였다.

 

말하자면 독고전은 조선 사회주의운동 초창기를 개척한 1세대 멤버였다. 그의 운동 경력은 화려하다.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조선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그해 10월 자바이칼주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도 이르쿠츠크파 대표로 참석했다. 그뿐이랴.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이 국내로 이전된 뒤에도 그의 활동은 계속됐다. 1925년 4월 경성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출석한 19명의 대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모스크바, 시베리아, 경성, 신의주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연구자 이준식의 평가에 따르면, “최초의 전위당 창립의 주역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3

 

김명시의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생 신상조사서. 러시아식 이름은 ‘스베틸로바’이고, 1907년 2월15일생이며, 일본어를 자유롭게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으며, ‘경남 마산 189’에서 출생했고, 아버지는 소상인이라고 적혀 있다. 임경석 제공

 

“최초의 전위당 창립의 주역”

 

긴 옥고를 치른 뒤에도 그의 정체성은 변함없었다. 머잖아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출옥 뒤 1년6개월쯤 지나 다시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앞 인용문에 따르면 “1931년부터 상해에서 발행한 우리 기관지 연락원”으로 일하게 됐다. 상해에서 발간한 기관지란 <콤무니스트>를 가리킨다. 이 잡지는 1928년 12월 조선공산당 지부 자격을 취소한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직접 지도하기 위해 설립한 ‘코민테른 조선위원회’의 기관지였다. 이른바 ‘국제선’이라고 하던, 1930년대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주류라고 칭해도 좋을 대표적인 공산주의 그룹이었다.4 이 그룹은 1932년 여름까지 국내에 20개 미만의 야체이카(세포단체)와 90여 명의 비밀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독고전이 국제선 공산그룹의 국경연락을 주관한 때는 1931년 5월부터였다.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압록강 하구의 삼엄한 국경 경비망을 뚫고, 사람과 물자를 은밀하게 이동시켰다. <콤무니스트> 창간호와 제2·3호 합병호, 제4호가 이 경로로 국내 각 야체이카에 전달됐다. 김형선, 김명시 등을 비롯한 국내 공작 책임자들이 오갔다. ‘이 거점의 노련한 비합법 연계자’라는 평을 들을 만큼 그의 활동상은 빈틈이 없었다.앞서 소개한 기밀문서를 다시 들여다보자. 독고전에 관한 소개에 뒤이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있다. 충격적인 내용이다.

 

1932년에 그자가 우리 동무를 잡아준 사실(그와 서울연락원 사이에 쓰는 비밀접선 암호를 형사에게 주어서 서울서 비밀접선 현장에서 동무가 잡혔다)을 들어, 밀정이란 것을 내가 우리 기관지 <콤무니스트>(Коммунист)에다가 폭로했다.

문장이 복문인데다 괄호 안에 보충 설명까지 하다보니 문맥이 복잡하다. 낱낱이 풀어보자. 1932년 독고전이 ‘우리 동무’를 경찰에 붙잡히게 했다. 비밀접선 암호를 형사에게 건네주었고, 그 탓에 비밀접선 현장에서 ‘동무’가 체포됐다. 김단야는 그가 밀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며, 그 사실을 기관지 <콤무니스트>에 폭로했다는 내용이다.

 

독고전이 동지들을 배신했다는 정보다. 그가 비밀접선 정보를 일본 형사에게 넘겨준 탓에 약속 장소에 나갔던 동지가 체포됐다고 한다. 이때 체포된 ‘동무’는 누구인가?

 

인쇄 거점이 털리고 동지들 하나둘 검거돼

 

김명시(金命時)였다.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뛰어든 25살 여성, 기나긴 옥고를 겪은 뒤에도 굴하지 않고 외국에 망명해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 거인이었다.

 

김명시가 국경연락 책임자 독고전의 배신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는 기록은 그의 동지이자 친오빠인 김형선의 활동 보고서에 쓰여 있다. 그에 따르면 독고전은 비밀접선 암호를 경찰에게 알려주는 방법으로 동료들을 팔아넘겼다고 한다. 두 번이나 그랬다. 한 번은 서울에서 김형선을 노렸고, 또 한 번은 압록강 건너편 안동에서 김명시를 노렸다는 것이다. 김형선은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으나, 김명시는 그만 그의 마수에 걸려들었다.5

 

1931~32년 김명시는 국제선 공산그룹의 국내 파견원으로서 인천을 거점 삼아 지하운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1932년 메이데이(5월1일) 기념투쟁 때 살포한 격문이 문제가 됐다. 국제선 공산그룹의 국내 거점이 경찰에 탐지되고 말았다. 인쇄 거점도 털리고, 동지들이 속속 검거되는 중이었다. 김명시는 국외 탈출을 결심했다. 신의주의 국경연락 거점을 경유해서 상해로 망명할 작정이었다.

 

뒷날 김명시가 남긴 회고담이 있다. “나는 인천으로 와서 동무들과 <콤무니스트> <태평양노조> 등 비밀 기관지를 발행하다가, 5월1일 노동절에 동지들이 체포당하는 판에 도보로 신의주까지 도망갔었는데, 동지 중에 배신자가 생겨서 체포”됐다고 말했다. 김명시는 이때 7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5살부터 32살까지 옥중에서 지내야 했다. 젊은 여성의 꽃다운 시절이었다. 회한에 찬 그의 표현을 들어보자. “나의 젊음이란 완전히 옥중에서 보낸 셈이죠.”

 

독고전의 배신은 동지들의 삶을 구렁텅이로 밀어넣었을 뿐 아니라, 국제선 공산그룹의 활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비밀조직 구성원이 대거 체포됐고, 국경을 통해 이뤄지던 국내외 연락이 더는 불가능하게 됐다. 코민테른이 직접 지도하던 당 재건 운동은 침체에 빠졌다. 독립운동이건 사회운동이건 할 것 없이 인간의 이념적·조직적 운동은 내부자의 배신과 변절로 쇠락하는 일이 많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동지가 적의 편으로 넘어갔을 때, 송두리째 몰락하는 위기에 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밀정 행위로 얻은 것은 무엇일까

 

독고전은 도대체 왜 배신했을까. 밀정 행위로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일신의 안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큰돈을 벌고 싶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독고전의 이후 행적도 암흑 속에 있다. 해방 이후까지 살았는지, 그의 범죄행위는 상응하는 업보를 받았는지 아직 알 수 없다.

 

김단야는 분노했다. 일제의 밀정으로 전락한 독고전의 배신 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기관지 <콤무니스트> 지면을 통해 독고전이 혁명의 대의를 배신하고서, 동지를 경찰에게 팔아넘기고 있음을 동지들 사이에 널리 폭로했다고 한다. <콤무니스트>는 창간호부터 제7호까지 발간됐다. 그중 제2호와 제3호는 합병호로 나왔기 때문에 실제로는 여섯 번 간행됐다. 이 중 코민테른기록관에 보존된 것은 네 개호다. 제5호와 제7호가 빠져 있다. 현존하는 텍스트 속에는 김단야가 말한, 독고전의 배신 행위를 폭로하는 기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 결락된 그 두 호 중 하나에 담겼을 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김단야, ‘1929년에 조선 가서 일하든 경로’, 13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1937년 2월23일2. Член ЦК Коркомсолола Квон-о-сель·Ким-тон-мен(고려공청 위원 권오설·김동명), Испоолкому КИМа(국제공청 집행부 앞), с.

2, РГАСПИ ф.533 оп.10 д.1894, 1926년 1월31일

3. 이준식, <조선공산당 성립과 활동>, 독립기념관, 72쪽, 2009년

4. 임경석, ‘잡지 ‘콤무니스트’와 국제선 공산주의그룹’, <한국사연구> 126, 2004년

5. Kimdanya, Report on the publication of journal “Communist” for Korea, pp.13-14,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94, 1934년 2월8일

 

 

Female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모스크바에서 출생한 마코프스키는 화가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 이고르 마코프스키는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화가로서 활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종합예술학교의 공동 설립자가 된다. 
맏이로 태어난 마코프스키 밑으로 동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나중에 모두들 다 유명한 화가가 되었으니까 대단한 가족이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훗날 마코프스키는 

‘아카데미나 교수가 아니라 오직 가족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회상하고 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마코프스키는 모스크바 예술학교에 입학하는데, 
당시 젊은이들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학교였다. 
그는 학교에서 최우수 학생이었다. 
대부분의 상을 쓸어 담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승의 지도로 그는 낭만주의 화풍을 익혔고 훗날 장식적인 것에 치중한 것도 
이때 스승들에게 배운 것이었다.

 

Female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마코프스키는 모스크바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세운 학교가 모태가 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종합예술학교로 진학한다. 
이 진학 코스는 러시아 화가들이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코스처럼 보인다. 
입학하고 난 2년 뒤부터는 아카데미에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아카데미 대상에 참여할 동료 13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

​‘반란’의 시작은 사소한 것이었다. 
아카데미가 그림의 주제로 내건 것이 스칸디나비아의 신화였다. 
아무래도 전통적인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는 적절한 주제였지만 
젊은 화가들은 이 결정에 반대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폐쇄적인 아카데미의 규범과 주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이다. 
당연히 조금만 더 있으면 받게 될 공식적인 학위도 포기한 것이 되었다. 
학교를 떠난 그들에게는 2급 화가의 호칭이 부여되었다. 

 

Female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학교를 떠난 마코프스키와 동료들은 크람스코이가 주도하던 예술가 조합의 멤버가 된다. 
이 조합이 훗날 러시아 미술에 큰 전환점이 되는 이동파가 된다. 
이제까지 그렸던 주제들을 버리고 전형적인 러시아의 일상과 풍경을 그림에 담기 시작한다. 
그의 초기 작품을 두고 러시아적인 주제에 관한 한 ‘챔피언’이라는 평가가 있다. 
마코프스키는 이동파 멤버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러나 평생 이동파로 활동할 것 같았던 마코프스키는 또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동파 전시회에도 참여하고 아카데미에도 출품을 한 것이다. 
작품의 주제만 확실하다면 어디에다 출품하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을까? 
이동파의 창립 멤버가 되기 1년 전인 1869년 마코프스키는 아카데미의 교수가 된다. 
아카데미의 폐쇄성이 싫어 아카데미를 떠났던 그가 교수로 돌아온 것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Female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비평가들의 평가와는 달리 마코프스키의 작품은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가 있었다. 
그의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화가들의 사실주의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준이 된다. 
또한 러시아의 중요한 사건을 묘사한 역사화는 그의 또 다른 관심사였다. 
그러나 1870년대 중반 이집트와 세르비아를 여행하고 난 후 작품에 변화가 온다. 
그때까지 그의 주된 관심이었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문제가 색과 모양의 예술적인 문제로 옮겨간 것이다.​

​결국 1883년, 마코프스키는 이동파와 결별한다. 
이 일로 많은 민주적인 비평가들은 이동파의 이상을 변절시킨 사람으로 그를 폄하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그를 러시아 인상파의 선두주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 사람에 대한 이런 극단적인 평가도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1891년 살롱을 지향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협회의 멤버가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는 고집이 보이는 부분이다. ​

 

Female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1880년대 초상화와 역사화의 선두주자가 된 마코프스키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3점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결과는 대상이었다. 
당대에 가장 칭송을 받은 러시아 화가이자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화가가 된 것이다. 
쉰두 살이 되던 해, 그는 아카데미의 회원이 된다. 
그가 이동파에서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온 것에 대한 그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화가로서만 그를 읽는다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

​1915년 9월 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교통사고가 있었다. 
전차가 마차를 들이받은 것이다.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는데 마코프스키였다. 
일흔 여섯의 나이였으니까 당시 사회를 생각하면 세상을 떠나기에 아주 억울한 나이는 아니었지만 
급작스러운 사고가 아니었다면 좀 더 많은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지는 않았까. 

 

Summer Afternoon. Date unknown. oil on canvas. 73 X 120 cm. Private Collection

햇빛 맑은 오후, 숲에서 나온 길 위에는 마차 바퀴 자국이 선명하다. 
집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모두가 그림을 보는 나를 바라 보는 듯하다. 
마치 배웅이라도 하는 모습인데, 그렇다면 길 위에 남겨진 마차 바퀴 자국은 내가 타고 있는 마차의 것이겠다.

"다음에 다시 돌아 올게요~"
하고 손을 높이 흔들고 인사를 해야겠다.

학교를 떠난 마코프스키와 동료들은 크람스코이가 주도하던 예술가 조합의 멤버가 된다.
이 조합은 훗날 러시아 미술에 큰 전환점이 되는 이동파가 된다. 
이제까지 그렸던 주제들을 버리고 전형적인 러시아의 일상과 풍경을 그림에 담기 시작한다. 
그의 초기 작품을 두고 러시아적인 주제에 관한 한 ‘챔피언’이라는 평가가 있다. 
마코프스티는 이동파 멤버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존재였다.

 

Genre Scene. Date unknown. oil on canvas​​​​.

 

Genre Scene. Date unknown. oil on canvas​​​​.

 

Genre Scene. Date unknown. oil on canvas​​​​.

 

Gipsy. Date unknown. oil on canvas​​​​.

 

Girl. Date unknown. oil on canvas​​​​.

 

Girl. Date unknown. oil on canvas​​​​.

 

Girl dressed as Flora. Date unknown. oil on canvas​​​​.

 

Girl in Bonnet. Date unknown. oil on canvas​​​​.

 

Girl wering a Crown. Date unknown. oil on canvas​​​​.

 

Girl with dog. Date unknown. oil on canvas​​​​.

 

Girl with flowers. Date unknown. oil on canvas​​​​.

 

Girl with Hat. Date unknown. oil on canvas​​​​.

 

Head of the Girl. Date unknown. oil on canvas​​​​.

 

Head of the Girl in a Kerchief. Date unknown. oil on canvas​​​​.

 

In the outskirts. Date unknown. oil on canvas​​​​.

 

Kissing Ceremony. Date unknown. oil on canvas​​​​.

 

Landscape. Date unknown. oil on canvas​​​​.

 

Landscape with Lake. Date unknown. oil on canvas​​​​.

 

Meal of pilgrims in the Trinity Lavra of St. Sergius. Date unknown. oil on canvas​​​​.

 

Miserly Knight. Date unknown. oil on canvas​​​​.

 

Model. Date unknown. oil on canvas​​​​.

 

Model. Date unknown. oil on canvas​​​​.

 

Model. Date unknown. oil on canvas​​​​.

 

Niko Dadiani Baby. Date unknown. oil on canvas​​​​.

 

Ophelia. Date unknown. oil. on canvas​​​​.​ 136 X 221 cm. 

 

Ophelia. Date unknown. oil on canvas​​​​.

 

Oriental Funeral in Cairo.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an Unknown in Red Dress. Date unknown. oil on canvas​​​​.

 

Peasant Children at rest. 46 x 37.5 cm.

 

Portrait of dark-haired beauty.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E. Gilechenko.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Empress Alexandra Feodorovna (Alix of Hesse).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M.Butina.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Margarita Savina.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Maria Feodorovna (Dagmar of Denmark).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P. Uvarova.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the Composer Aleksandr Sergeyvich Dargomyzhsky. Date unknown. 
oil on canvas. 70.9 x 57.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the composer Cesar A. Kyui. Date unknown. 75 X 50 cm. oil on canvas.

 

Portrait of the Count G. Bobrinsky.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the Girl.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the Girl.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the Girl in a Russian Dress.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the Girl in a Ukrainian Dress.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the Girl in Blue Dress.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the Italian Boy.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the Lady.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the Woman with Coral Beads.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the Wrighter D. Grigorovich.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the Young Lady with Pink Bow.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Tsarevna Sofia.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est and Boyarynia.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oclamation of Kuzma Minin in Nizhny Novgorod in 1611. Date unknown. oil on canvas.

 

Reading. Date unknown. oil on canvas.

 

Russian Beauty. Date unknown. oil on panel. 40 X 60 cm.

 

Russian Beauty in Summer Garland. Date unknown. oil on board. 27.5 X 35 cm. Private Collection

 

Sculpture. Date unknown. oil on canvas.

 

Still Life. Date unknown. oil on canvas.

 

The choice of a bride by Alexis of Russia. Date unknown. oil on canvas.

 

The Moscow Show Booths. Date unknown. oil on canvas

 

The Toilet of Venus. Date unknown. oil on canvas.

 

The transfer of the sacred carpet from Mecca to Cairo. Date unknown. oil on canvas.

 

Turk. Date unknown. oil on canvas.

 

Under the Green Trees (Summer Landscape). Date unknown. oil on canvas.

 

Woman in a national costume. Date unknown. oil on canvas.

 

Young Nun. Date unknown. oil on canvas.

 

Allegorical Composition.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Bandura Players.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Biarritz. Date unknown. watercolor. Private collection

 

Boyarina. Date unknown. oil on panel. 46.2 X 36.4 cm.  Private collection.

 

Boyarina. Date unknown. oil on canvas.

 

Children by the Lake. Date unknown. oil on canvas.​​

 

Female Portrait.  Date unknown. watercolor. Private collection

 

Flowers.  Date unknown. oil on canvas.

 

Forest Lake. Date unknown. oil on board. Private collection.

 

Garden in Bloom.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Girl Dressed as Flora. Date unknown. oil on canvas. 

 

Gurzuf.  Date unknown. watercolor. Private collection​

 

Lady in Pink (also known as Portrait of Marina Ionina). Date unknown. 

oil on canvas . Private collection.​​

 

La Parisienne. Date unknown. oil on canvas.

 

The Murder of False Dmitry.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easant Children.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a Bearded Man. Date unknown. oil on board.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a Boyarina,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a Girl. Date unknown.

 

Portrait of a Girl. Date unknown. oil on Leather.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a Girl with a Red Chrysanthemum.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a Lady.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a Lady.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a Lady.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a Pries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a Woman in White.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a Young Girl.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a Young Lady.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Lucien Guitry.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Maria Makovskaya.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utti from the Interior Décor of the Baron von Dervis Mansion. Date unknown.
paste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Roman Woman.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Roses. Date unknown. oil on panel. Private collection​

 

Russian Beauty. Date unknown. oil on cardboard.​

 

Russian Beauty. Date unknown. oil on canvas.​

 

Russian Beauty. Date unknown. oil on canvas. 36.2 X 29.9 cm. Private collection​

 

School in Cairo.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Study of a Boy for the "Shrovetide Festivities".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Tribal Dancers. Date unknown. Watercolor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Two Breton Women. Date unknown. oil on canvas.

 

The Young Boyarina.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 Young Boyarina. Date unknown. oil on canvas.​

 

The Young Bride. Date unknown. oil on canvas.

 

A Young Girl. Date unknown. oil on panel. Private collection​

 

A Young Girl. Date unknown. oil on canvas. ​

 

A Young Girl. Date unknown. oil on canvas.

 

Young Woman in a Red Bere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The Bulgarian Martyresses. 1877.

강간은 상대방과의 동의 없이 억지로 성관계를 맺는 일로 
피해자에게 엄청난 충격뿐만 아니라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주는 일이다. 
그 끔찍한 범죄의 현장을 그린 작품이 있으니 바로 마코브스키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한 여성이 아랫도리에 피를 흘린 채로 쓰러져 있다.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 진 것인지 우리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표정은 집단 강간이 남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가득하다. 처참하고, 또 잔혹하다.

그녀의 옆에는 또 한명의 여인이 남자들에게 둘러쌓여 젖가슴이 드러나도록 반항을 하고 있다. 
허리에 총검을 차고 잔혹한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들은 이미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짐승의 모습이다. 
그녀도 조금 있으면 누워 있는 저 여인처럼 처참한 모습으로 버려지게 될 것이다. 
그녀가 안고 있는 아이는 엄마의 상황을 예감이도 한듯이 절규하고 있다. 

 

The Boyars' Wedding Feast. 1883.

보야르는 러시아의 중세 귀족을 말한다. 
혹시 하객들이 요즘처럼 “뽀뽀해!”라고 외쳤을까? 
신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고, 그런 신부가 너무 사랑스러운 신랑은 
신부의 얼굴을 향해 얼굴을 가져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두 남녀에게 쏠려 있다.

 

Tamara and Demon. 1889.

타마라는 공주로 이웃 나라 왕자와 약혼을 했는데 

그 왕자가 결혼을 하기 위해 자기 나라로 돌아가다가 그만 강도를 만나 죽고 만다. 
슬픔에 빠진 그녀를 위로한 것은 그녀를 지켜보던,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던 데몬이었다. 
그러나 둘이 사랑의 밤을 보내고 난 뒤 그녀는 신의 노여움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슬픔 가득한 데몬의 눈빛이 안타깝다. 

 

Before the Wedding (The Russian Bride's Attire).  1889~1890. oil on canvas. 

결혼식을 앞둔 신부 치장이 한창이다. 
어린 동생은 곧 시집을 가면 한동안 못 볼 언니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는지 무릎에 고개를 기댔다. 
그런 동생이 안쓰러운지 언니는 손을 들어 동생을 쓰다듬고 있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즐겁고 호기심 많은 표정이다. 옷차림도 화려하다. 
17세기 러시아의 좋았던 시절을 그림에 담았던 마코프스키가 마음껏 그 시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평생 이동파로 활동할 것 같았던 마코프스키는 또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동파 전시회에도 참여하고 아카데미에도 출품을 한다. 
작품의 주제만 확실하다면 어디에다 출품하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을까? 
이동파의 창립 멤버가 되기 1년 전, 1869년 마코프스키는 아카데미의 교수가 된다. 
아카데미의 폐쇄성이 싫어 아카데미를 떠났던 그가 교수로 돌아 온 것이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The Russian Bride's Attire (Dertail).

 

Alexander II of Russia. 188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Emperor Alexander II on His Deathbed .1881. oil on canvas. 61 x 85.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Grandfather Stories. 1881.

 

In Artist's Workshop. 1881.

 

In the Park. 1881. 

 

Portrait of Y.Makovskaya. 1881.

 

African. 1882. 

 

Alexeyich. 1881~1882. 

 

An Arab in a turban. 1882.

 

Homestead. 1882.

 

Portrait of Artist's Children. 1882.

 

Portrait of Count Sergei Grigoriyevich Stroganov. 1882. oil on canvass. 125 X 179 cm.

 

Portrait of the Man in Red Velvt Suit, 1882.

 

Portrait of the Son in Workshop (Small Antique Dealer). 1882.

 

Praskovia Uvarova. 1882.

 

Cups. 1883. 

 

Difficult Negotiations. 1883. oil on canvas. 35.6 X 48.6 cm. Private Collection

 

Female Portrait. 1883. 

 

Illumination of Moscow on the occasion of the coronation in 1883. 

 

Portrait of Adleberg. 1883.

 

Mother and Daughter in an Interior.  1883

 

Portrait of a Seated Lady. 1883.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Boyaryshnya. 1884. 

 

Flowers 1. 1884. 

 

Flowers 2. 1884. 

 

Ophelia. 1884. 

 

Portrait of V. Morozova. 1884.

 

Ukrainian. 1884. 

 

Zaporizhzhya Cossack. 1884.

 

Boyar's Wife at the Window. 1885. oil on canvas. 174 X 117 cm.

 

Portrait of an Unknown, 1885.

 

Portrait of Hudenkova. 1885.

 

Portrait of Tradeswoman E.Rastorgueva. 1885.

 

The Boyarynia. 1885. oil on canvad. 26.3 X 37 cm. Private Collection

 

Landlady. 1886. 

 

The Muse of Poesie. 1886. oil on canvas. 116 X 250 cm.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the Artist Ivan Aivazovsky. 1887.

 

​Serezha (Portrait of Son in Sailor Suit). 1887.

 

Tsar Alexei Michaylovich choosing a bride. 1887. oil on canvas. 53.5 X 79.5 cm.

 

Campfire. Kachanovka. 1888.

 

Flirt. 1889. 

 

Head of the Girl. 1889. 

 

Portrait of Russian opera singer Nikolay Figner. 1889.

 

Portrait of Russian opera singer Sandra Panaeva. 1889.

 

Summerhouse. 1889. 

 

Boyar. 1890. 

 

Boyarynia. 1890. 

 

Boyaryshnya. 1890. 

 

Boyaryshnya( Russian Bride). 1890.

 

Boyaryshnya by the window. 1890.

 

Chevalier, arraying gloves. 1890.

 

Child Head. 1890.

 

Cup of honey. 1890. 

 

Fairy Tails. 1890. 

 

Female Portrait. 1890. 

 

Happy Arcadia. 1889~1890. oil on canvas. 364 x 220 cm. Private Collection.

 

Head (Portrait of Y.Makovskaya). 1890.

 

Head of Child (Portrait of the Son Konstantin). 1890.

 

Head of the Old Woman. 1890.

 

Hide and Seek. 1890. 

 

Italian. 1890. 

 

Landscape. 1890. 

 

Landscape (Sea and Flowers). 1890.

 

Old Man. 1890. 

 

On the square in Ivanovo Congress Nizhny Novgorod Kremlin. 1890.

 

Parisienne in pearl necklace. 1890.

 

Portrait of A.Kuzhetsov. 1890.

 

Portrait of Hudenkova. 1890.

 

Portrait of S.Hudenkov. 1890.

 

Portrait of the Girl with a Blue Ribbon in a Hair. 1890.

 

Portrait of the Young Lady. 1890.

 

Romeo and Juliet. 1890. 

 

Roses. 1890. 

 

Russian Beauty in Kokoshnik. 1890.

 

Still Life (Palace of Facets). 1890

 

The girl in pearl necklace. 1880~1890.

 

Volkov's Family. Group Portrait of M .S .Volkov, S.N.Volkova and S. M. Volkov-Manzei. 1890.

 

Woman Head. 1890. 

 

Appeal of Minin(Proclamation of Kuzima Minin). 1896.

​1610년 폴란드가 모스크바를 침략 점령한다. 
2년 뒤 모스크바를 다시 탈환하는데, 가장 공이 큰 사람이 바로 쿠지마 미닌이었다. 
그림에서는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쿠지마 미닌이 아닐까.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들고 그를 향해 모여 들고 있다. 
아마 무기를 사고 군인을 무장하기 위한 자금을 위한 것이다. 
그림 속에는 해보겠다는 사람들의 의지가 높은 성곽과 
그 위를 나는 새들까지 이어져 하늘에 닿는 느낌이다. 
자랑스러웠던 과거의 일을 그림에 담는 것이 19세기 러시아 화가들의 주요 주제였다

 

Spring Bacchanalia. 1891.

 

Woman Head (Portrait of E.Kovaliova). 1892.

 

Konstantin and Olga Makovsky. 1894.

 

Friends. 1895. 

 

Man Head. 1897. 

 

Boyaryshnya. 1900. 

 

Coachman. 1900. 

 

Girl in the Field. 1900. 

 

Head. 1900. 

 

Matchmaker. 1900. 

 

Monk - Tax Collector in the Temple. 1900.

 

Nude Woman in Black Stockins. 1890~1900.

 

Olenka and Kolya on the Steps. 1900.

 

Portrait of Artist's Daughter Olya. 1900.

 

Portrait of Blonde. 1900.

 

Portrait of Lady Vivien. 1900.

 

 Portrait of Maria Petipa. 1900.

 

Portrait of Princess Zinaida Yusupova. 1900.

 

Portrait of the Girl. 1900.

 

Portrait of V.Bahrushina. 1900.

 

Presser. 1900. 

 

Russian Beauty. 1900. 

 

Still Life in an Interior. 1880~1900.

 

Strolling Musicians. 1900.

 

The girl with the red ribbon. 1900.

 

Death of Petronius. 1900.

 

Models waiting for Artist (basking Italians). 1904.

 

Two Breton Women. 1904. oil on canvas. 82 X 65 cm.
Art museum of Samara, Samara, Russia 

 

Portrait of Countess Maria Mikhailovna Volkonskaya. 1905. oil on canvas. 137 X 177 cm.

 

Portrait of Grand Princess Maria Nikolayevna. 1905.

 

In from a Stroll. 1907. oil on canvas. 139.4 X 78.1 cm. Private Collection

 

By the open window. 1910.

 

Cup of Honey. 1910. 

 

Piper. 1900~1910. 

 

Portrait of the Girl. 1910.

 

Portrait of the Girl in a Russian Dress. 1910.

 

Venus Birth. 1900 ~1910.

 

Tea Drinking. 1914. 

 

A Young Boyarynia.  Dater unknown. oil on panel . 27 x 41 cm . Private Collection

 

Allegorical Scene. Dater unknown. oil on canvas. 161.5  x 239.5 cm. Private Collection

 

Allegorical Scene 

 

At the Spinning-Wheel. Date unknown. oil on canvas.140 x 8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Beauty preparing to bathe. Date unknown. oil. on canvas

 

Bedouin. Date unknown. oil. on canvas

 

Boris Morozov and Ivan the Terrible. Date unknown. oil on canvas. 

 

Boyar with the cup. Date unknown. oil on canvas. 

 

Boyar with the cup. Date unknown. oil on canvas. 

 

Boyaryshnya. Date unknown. oil on canvas​​. 

 

Boyaryshnya. Date unknown. oil on canvas​​. 

 

Boyaryshnya. Date unknown. oil on canvas​​. 

 

Boyaryshnya. Date unknown. oil on canvas​​. 

 

Boyaryshnya. Date unknown. oil on canvas​​. 

 

Boyaryshnya by the window. Date unknown. oil on canvas​​​

 

Boyaryshnya with a Tray. Date unknown. oil on canvas​​​​. 

 

Cairene. Date unknown. oil on canvas​​​​

 

Child on the Snow. Date unknown. oil on canvas​​​​. 

 

Children. Date unknown. oil on canvas​​​​. 

 

Christmas Fortune Telling. Date unknown. oil on canvas​​​​. 

 

Conversation near the Spring. Date unknown. oil on canvas​​​​. 

 

Cupid Gardeners. Date unknown. oil on canvas​​​​. 138 X 225 cm. Private Collection

 

Cupids with Flowers. Date unknown. oil on canvas​​​​.

 

Dervish. Date unknown. oil on canvas​​​​.

 

Desert. Date unknown. oil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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