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의 고통에 동참한 역사학자 정석종 선생 (1937〜2000) / 정지창


나는 1970년대의 대부분을 언론계에서 보냈다. 애당초 기자 노릇이 적성에 맞지 않고 박정희 유신체제가 언론의 입을 틀어막고 받아쓰기를 강요하던 때라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10•26 사건으로 독재자 박정희가 죽고 나서 국방부 출입기자로 김재규 재판 취재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1980년 2월 초순에 평소 가깝게 지내던 영남대 문화인류학과의 박현수 교수가 나에게 대학으로 자리를 옮길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영남대 국사과 정석종 교수의 친구가 부산의 모 대학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서울을 탈출하여 그해 3월부터 부산에서 새로운 인생 제2막을 시작했다. 총칼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정권이 갑자기 대학정원을 늘리고 학과를 증설해주는 바람에 석사 학위만 가지고도 운 좋게 대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이 무렵 현장 노동자 수기를 출판하고 피신생활을 하던 후배가 평소 아옹다옹하던 어머니와 아내가 자식과 남편 걱정을 같이 하면서 사이가 좋아졌다고 “고마운 전두환이”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부산에 내려가기 전에 박교수와 함께 서울역에선가 정석종 선생을 만나 처음으로 인사를 드렸는데, 악수를 하는 손이 따뜻하고 얼굴 가득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때 이 분이 황석영 작가에게 『장길산』의 원자료를 제공하고 조선 후기의 민중사에 관심이 많은 학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산에서 4년을 지낸 다음 나는 1984년 영남대로 자리를 옮겼고, 정석종 선생을 좀 더 가까이서 뵙게 되었다. 정 선생의 연구실은 문과대학의 인문관 4층이었는데, 특이한 것은 연구실에 군용 야전침대를 가져다 놓고 걸핏하면 연구실에서 기거하며 공부를 하고 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또 하나 놀라운 일은 연구실 창 밖 베란다에 벌통을 몇 개 가져다 놓고 양봉을 하는 것이었는데, 가끔은 벌에 쏘여 눈두덩이나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하였다. 한 두 차례 꿀 한 숟가락은 얻어먹은 것 같은데, 대체로 양봉의 소출은 신통치 않았다. 벌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벌의 주인이 다른 일로 바빠 바지런하게 벌을 돌보지 않은 탓이라는 것이 후배들의 중론이었다. 그후 정 선생이 연구년을 얻어 미국에 갔다 오느라 한동안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양봉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정 선생은 조선시대의 노비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어느 날 연구실에서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여자 노비의 매매문서를 뒤지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그 여자 노비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하더란다. 선생은 그 여자 노비를 연구의 대상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수 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정서적 감정이입을 통해 그녀에게 애틋한 인간적 유대감을 느꼈기에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기막힌 일을 체험한 것이리라.

1994년에 나온 선생의 역작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상』에는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체포된 오섬이라는 노비의 얘기가 나온다. 노비는 성이 없었으므로 오섬은 그녀의 이름이다. 보통 논문에서 개인사는 잘 다루지 않는 법인데 선생은 이런 관례를 무시하고 가엾은 여인의 하소연을 받아 적은 것처럼 세밀하게 그녀의 기구한 삶의 궤적을 소개한다. 그 이유를 선생의 육성으로 들어보자.


“민중사의 움직임 속에서의 개인사의 문제도 중요한 측면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전체적인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개인사는 잊혀지기 쉽고 소흘히 다루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모순과도 깊이 관련되는 문제이다. 개인의 고통스런 문제가 곧 당시의 사회적 모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와도 관련된다는 점 때문에도 개인사의 문제가 심각히 거론되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개인사의 극적인 일면을 홍경래란의 경우에서 제시하여 보기로 한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에 항복한 신도 첨사 류재하가 반란이 평정된 후 대역죄인으로 처벌을 받게 되었는데, 가족 친지는 물론이고 그가 잠시 데리고 살았던 관비 오섬도 네 살 난 딸과 함께 잡혀오게 된다. 그녀는 류재하가 용천에서 벼슬을 살 때 그와 살면서 딸을 낳았으나 그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버림을 받는다. 살 길이 막막한 그녀는 용천의 백정 이방섭에게 재가하였으나 가난에 못 이겨 남편이 의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다시 버림을 받는다. 그녀는 살 길이 없어 구도라는 섬에 사는 차전묵에게 출가하였으나 그도 역시 가난하여 함께 살 형편이 못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청천강 이남은 흉년에도 살기가 낫다고 하여 딸아이를 데리고 남쪽으로 가다가 뱃사람 한홍서를 만나 부부가 되었다. 그러다가 한홍서도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버리고 그녀는 취라도라는 섬에 남아 있다가 홍경래란의 뒤끝에 류재하의 엣 여자라고 하여 잡혀온다. 오섬은 전에 딸을 데리고 신도로 류재하를 찾아간 적이 있으나 ‘너는 이미 다른 남자에게 출가했으니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매정하게 내치는 바람에 그후로는 전혀 왕래가 없었다. 결국 오섬은 먹고 살기 위해 네 번이나 출가했으나 네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자기를 버린 남자 때문에 대역죄인의 일당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선생은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역사학자의 시점에서 벗어나 직정적으로 자기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당시 여종의 처지란 공•사노비를 막론하고 대개 오섬과 다를 바가 없어 한 지아비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생활의 방도로 다른 지아비를 얻을 수밖에 없으며 자연히 여러 남자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양반층은 이처럼 여종을 함부로 취급하였다. 조선시대 양반사회란 그같은 여성들의 고통과 희생 위에서 존재하였으며, 여종들은 더욱이 그들이 역사의 격랑 속에 던져졌을 때 그 소용돌이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이 비록 보잘것없고 하찮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고통과 애환이 반영되지 아니한 역사서술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들의 원망과 희원은 평등한 사회의 실현이다. 그 희원은 하나의 도도한 흐름이 되어 역사를 소용돌이치게 하고 변혁시켜 갔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정 선생이 강조하고 있는 이런 관점은 소설 『장길산』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조선시대 노비와 천민들의 비참한 삶과 그들의 피맺힌 원한, 그로 인한 숱한 저항과 반란, 그들이 바랐던 평등세상에 대한 희원이 소박한 미륵사상과 정감록 같은 민간신앙으로 면면이 이어져왔다는 사실을 정 선생은 작가 황석영에게 귀뜸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선생의 뜻을 내리받은 무당처럼 1974년부터 1984년까지 장장 10년에 걸쳐 조선시대 민초들의 얘기를 신들린 듯 써내려간 것이리라.

나는 『장길산』이 다른 역사소설에 비해 돋보이는 지점은 바로 노비들을 비롯한 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중기 이후 노비의 수는 전체 인구의 40∼60%였다고 하니, 사실상 노예제사회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도망 노비의 아들로 길가에서 태어난 주인공 장길산과 창기라는 밑바닥 신분으로 그와 연을 맺으면서도 다른 사내들에게 생계를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묘옥. 해주 감옥에서 벌어지는 지옥도의 생생한 장면들. 토호의 모함에 빠져 패가망신하여 결국 화적패에 투신한 선비 김기. 원수의 자식과 연분을 맺은 그 딸의 기막힌 이야기. 『장길산』은 오섬과 같은 조선시대 여성의 운명에 가슴 아린 통증을 느낀 젊은 역사학자 정석종으로부터 발원하어 황석영이라는 탁월한 이야기꾼의 입담과 상상력에 힘입어 장강대하의 대서사로 굽이쳐 흐르며 1970∼80년대의 암울한 군사독재시대에 독자들의 허기와 갈증을 달래주었으니, 시대와 역사와 문학의 절묘한 합작품이라 하겠다.


이런 노비제도는 조선조 말기까지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이 1894년 충북 옥천군 청산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거에 항거하여 2차 봉기에 나선 다음 그 딸인 최윤이 관가에 잡혀갔는데, 군수가 크게 선심을 써서 아전인 정주현과 결혼시켰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형제별’(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과 ‘짝짜꿍’, ‘졸업식 노래’ 등을 작곡한 음악가 정순철이다. ‘역적의 딸’이라는 멍에를 쓴 그의 어머니(최윤)는 그후 남편과 헤어져 계룡산 신도안을 거쳐 수운 최제우 선생의 고향인 경주 용담정을 지키며 만년을 ‘용담 할매’로 살았다고 한다. 권정생 선생의 『한티재 하늘』에도 안동지방의 양반가에서 도망친 노비 달옥이가 주막집 아들 이석과 함께 청송의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숨어 사는 대목이 나온다. 권정생 선생이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를 바탕으로 엮어낸 영남 북부지방의 민중사인 이 대하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걸쳐 있다.

조선시대의 민중사는 바로 노비의 역사임을 절감하고 마음으로부터 노비들의 고통에 공감한 역사학자 정석종 선생. 그의 따뜻한 손과 다정한 미소는 민초들의 고통에 대한 속깊은 연민의 정이 겉으로 스며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선후배 교수들과의 이런저런 회식이나 술자리에서 정 선생은 대체로 나이 많은 선배였지만 후배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고, 시국 선언의 서명이나 뒷풀이의 노래 권유에 망설이지 않고 언제나 흔쾌하게 응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도 언제나 깍듯이 존대를 하고 다정하게 웃는 얼굴로 대했다. 정 선생은 박사학위 논문과 역사문제연구소 일로 서울을 자주 왕래하면서 건강을 해친 것 같다. 특히 박사논문을 쓸 때는 워드프로세서나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지도교수가 수정, 보완을 지시하면 논문 전체를 다시 원고지에 고쳐 써야 하는 고역을 몇 번이나 반복하곤 하였다. 언젠가 내가 아는 한의원에 선생을 모시고 갔는데 젊은 여자 한의사가 진맥을 하더니 “외화내빈(外華內貧)이군요”라고 직설적으로 경고를 하는 바람에 우리 일행이 모두 뜨악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좀 더 철저하게 건강관리를 하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 같은 후배들도 좀 더 적극적으로 건강에 신경을 쓰도록 채근했으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울 뿐이다.


정석종 선생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은 어느 날 소문도 없이 운전면허를 따고 덩치에 아울리지 않은 소형차를 몰고 학교에 나타났을 때였다. 당시 정 선생 연배의 교수들 가운데 운전을 하는 분은 아무도 없었다. 이 무렵 정 선생은 대구 근교의 우록에 자그마한 농막을 마련하고 틈나는 대로 소형차를 몰고 드나들며 전원생활을 즐기셨다. 가창 골짜기를 지나 남지장사 못 미쳐 산허리에 붙은 농막의 당호는 ‘오수헌(五樹軒’이었다. 은사인 김용섭 선생이 지어주셨다면서 자랑스러워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서까래가 다 드러나게 개조한 오수헌에는 선생이 즐겨 보는 서책과 함께 바둑판도 비치돼 있었다. 선생의 바둑 실력은 크게 높지 않았으나 바둑 사랑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여기서 선생은 텃밭 농사도 짓고 화초도 가꾸면서 막걸리도 마시고, 낮잠도 자고, 바둑도 두며 유유자적 전원생활의 즐거움에 푹 빠져 지냈다. 불의의 병고로 쓰러지기 직전의 우록시대가 선생에게는 일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정석종 선생은 가고 오수헌이라는 당호만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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