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스카야 탑 (Spasskaya Tower)


스파스카야 타워(Spasskaya Tower) 번역하며 구세주(Savior)탑이다.

크레믈린성벽에는 20개의 첨탑형 망루가 있다.

가장 높은 지상 80m 높이의 삼위일체탑(Troitskaya Tower)까지 크기와 형태가 다양하나

초기 크레믈 성채에 있어서 타워는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콘스탄틴과 헬렌 타워, 나바트나야 타워, 스파스카야 타워


늘어선 성벽 타워의 맨 앞이 1490년 이탈리아 건축가 솔라리가 설계한 37m 콘스탄틴과 헬렌 타워,

그 뒤가 1495년 세운 38m 나바트나야 타워이고 맨 뒤에 71m 스파스카야 타워가 서 있다


스파스카야 타워(Spasskaya Tower)와 성 바실리 성당


스파스카야 타워는 붉은광장을 굽어보는 크레믈린 동쪽 성벽의 주 출입구로

1491년 이탈리아 피에트로 안토니오 솔라리(Pietro Antonio Solari)에 의해 축조되었다.


스파스카야 타워(Spasskaya Tower)와 황제의 탑


과거에는 크레믈린의 3대 문 중 스파스카야는 황제가 출입하는데 이용하였고 

가장 높은 트로이츠카야(Troitskaya)는 대주교가 

그리고 보로비츠카야(Borovitskaya)는 일반서민이 이용하였으나 

현대에는 스파스카야는 대통령과 국빈, 고위공무원, 주요인사가 나머지는 일반 관광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왼쪽에​ 높이 16m로 스무 개 성벽 타워 가운데 가장 낮은 '황제의 탑'이 있다.  

가장 늦은 1680년에 세운 탑이기도 하다.  

목조 탑이던 시절, 이반 뇌제가 자주 올라 바로 앞 붉은광장을 내려다보기를 즐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기둥만 세우고 사방이 트여 있어 엄밀히 말하면 탑이라기 보다 전망대라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나바트나야 타워, 황제의 탑, 스파스카야 타워


소비에트연방체제하에서 원래 있던 두머리 독수리상 대신에 달아 놓은 

꼭대기의 별을 포함 전체 높이가 약 71m나 되고

1491년에서 1585년 사이에 설치된 시계는 문자판의 크기가 직경 약 6.12m나 될 만큼 크다.

좌측 하단 원형 모양의 제단이 로브노예 메스토 (лоБноемеСто)이다.


스파스카야 탑 (Spasskaya Tower)


시계탑을 겸한 스파스카야(구세주) 타워는 ​1491년 이탈리아 건축가피에트로 솔라리가 세웠다.

타워 아래에 난 동쪽 성벽 문은 크렘린의 주 출입구였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어야 했다고 한다. 

소비에트 시절엔 당 서기장을 비롯한 최고 정치 지도자들만 드나들었다고 한다.


시계는 15세기 말~16세기 중반에 단 것으로 짐작한다.  

시계에 맞춰 종이 울려 '크렘린 차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루비 스타


첨탑 꼭대기엔 원래 러시아 국가 문장의 핵심인 쌍두 독수리상이 올라 앉아 있었지만 

1935년 소련 정부가 끌어내리고 대신 소비에트의 상징 왕별을 세웠다.   

붉은 빛 나는 '루비 유리'로 만든 별이어서 '루비 스타'라고 부른다.


1917년 스파스까야 탑 부근의 노천시장 (By Boris Kustodiev, 1917)


19세기 초 스파스카야 다리의 서점상들 (By Apollinary Vasnetsov)


이 벽에는 3개의 문들이 뚫려 있었으며, 나머지 2개의 문은 붉은 광장의 반대편에 뚫려 있었다. 

19세기 초에 문들 중 하나가 벽돌로 아름답게 장식되었으나, 여전히 '스파스키 문'이 궁궐의 공식 정문으로 기능했다. 

스파스카야 문 앞 해자에는 돌로 된 다리가 있었으며, 이 다리에서는 책을 파는 노점상들이 들어서 있었다.


로브노예 메스토 (лоБноемеСто)


바실리 성당 앞에 우물 모양의 단이 있는데 이 조형물은 모스크바의 역사와 함께 해온 

유서 깊은 로브노예 메스토(лоБноемеСто)이다.

붉은 광장은 나라의 중심 광장으로 오랫동안 역사적 사건들을 지켜봤다.

‘로브노예 메스토’는 1549년 이반 뇌제가 카잔 한국에 승리를 한 후

바로 이곳에서 공식적으로 승전 사실을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의 기록에 언급됐다.

그 이후 이곳은 차르가 연설을 하거나 칙령을 선포하는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 때 주요 무대로 활용되었다. 

소련 시절에는 레닌 묘의 연단이 이 기능을 담당했다. 


이 ‘로브노예몌스따“는 ’단두대‘라고도 부른다.

단어가 단두대라는 의미도 있고, 이곳에서 농민반란 지도자 푸가초푸를 처형하기도 했다니 

단두대라고 하는 게 틀린 것은 아니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대규모 처형이 집행됐을 때가 있기는 했는데 

1698년 반란에 참가한 ‘스트렐치’(황실 친위대) 대원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스트렐치 처형 날 아침’이라는 바실리 수리코프의 그림도 있다.


로브노예 메스토에서 공개 처형이 있기는 했지만 자주 그런 용도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개 연설을 하는 장소에 가까웠다.


1801년 로브노예 메스토와 스파스카야 탑, 성 바실리 성당 장면


15세기 말부터 크렘린 정면이 광장으로 되었으며, 차르 (tsar,군주)의 선언이나 판결, 포고가 내려지던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팔던 장소로 상업광장 · 화재광장 등으로 불렸다. 

또 전쟁을 떠나는 군사들이 행진을 하던 곳이자 때때로 정치범이나 흉악범을 시민들 앞에서 처형하던 곳이기도 하다.

17세기 말부터 ‘아름다운(크라스나야,Krasnaya)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로브노예 메스토 (лоБноемеСто)


로브노예 메스토 (лоБноемеСто)


로브노예 메스토 (лоБноемеСто)


크렘린 벽 묘지 (Kremlin Wall Necropolis, Некрополь у Кремлёвской стены)


붉은 광장 굼 백화점에서 바라봤을 때 정면에 보이는, 레닌 영묘 바로 뒷편 쪽 성벽에 해당한다. 

레닌은 국부니까 특별히 개인 건물을 받았고 그 뒤엔 나머지 위인들이 묻힌 것. 

붉은 광장 가운데에 있어 참배객의 접근성이 굉장히 좋다.


국립묘지라고 해서 한국의 현충원이나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와 같이 

드넓은 풀밭에 비석이 가지런히 늘어선 모습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말 그대로 크렘린의 붉은 성벽 아래에 묻힌 것. 

국가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에만 수여되는 최고의 영예였다.


크렘린 벽 묘지


크렘린 묘지를 돌면 소련의 모든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장관들, 소련의 모든 군원수, 유리 가가린, 막심 고리키를 비롯한 많은 이가 이 곳에 묻히는 영광을 누렸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안치된 지도자는 콘스탄틴 체르넨코(1985)다.


스타 시티에서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로 떠나기 직전 소유즈에 탈 우주인들이 

평소 비행복 입고 언론에 나오던 것과 달리 정장, 군복을 말쑥이 차려입고 참배한다. 

이 때는 특히 유리 가가린을 비롯한 순직 우주인들과 

세르게이 코롤료프 등 우주 도전자의 레전드들에게 헌화한다.


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이나 세묜 부됸니 등 몇몇 인물들은 흉상이 따로 세워져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기 묘에 누워 있는 반면, 

소련 관료와 영웅 대부분은 크렘린 벽에 묻혔다. 

여기에 이오시프 스탈린도 묻혀있는데, 그는 1961년까지 레닌 옆에 누워있다가 쫓겨나 이곳으로 옮겨졌다


크렘린 벽 묘지


크렘린 벽 묘지


[영상] 2015 세계 군악대 축제, 스파스카야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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