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고되고 계획된 구속
미행, 도청, 구류
수사기관원들의 불법적이고도 집요한 미행이 어느 때부터인가 감행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시점은 85년 2월 12일 총선거직전이거나 아니면 직후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전에도 여러 번 미행을 했으리라 추측되며, 민청련의 전화와 본인의 자택전화는 언제나 도청당하고 있었습니다.
85년 9월 4일 남영동으로 연행되었을 당시 본인은 그곳 사람들에 의해 미리 준비된 미행일지를 통해 신문을 당하고 추궁을 당했으며,
그 일지에는 본인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도청에 대한 일지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예컨데 미국 워싱턴 소재 동포가 운영하고 있는 신문사 기자인 심기섭씨와의 전화대화일지와 내용,
역시 미국에 있는 민주운동가 이신범씨와의 서류를 갖고 있었습니다.
통화일지와 그 내용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날짜는 물론 내용에 대해서도 거의 기억을 못하고 있는 본인의 통화내용에 대해서
정말 신통력을 가진 점쟁이 이상으로 맞춰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항상적인 도청에 의해서 작성된 것임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권력에 의한 불법행위로서 국민의 기본권을, 자유권적 기본권을 유린한 것입니다.
이러한 체계적인 도청과 미행에 의해서 본인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논의하였는가에 대해 정보수사기관은 뻔히 알면서도
자신들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 그 이상의 무엇을 찾아내고 하는 열망, 열광에 기초하여 서두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85년 5월, 6월, 8월에 강제당한 각 구류처분 시 본인에 대한 구속은 심각하게 검토되었으며,
결국 8월 구류처분 청구 직전에는 이미 구속은 정치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85년 5월 초순, 중부경찰서 정보과 직원 6명에 의해 출근길에 집 앞에서 불법적으로 체포, 연행되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민청련 명의로 발행된 모종의 유인물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 진정한 것은 긴장되고 있었던 5월 광주민중항쟁의 달에 전개될 활발한 민주화운동에 대해
제약을 가하는 예비검속적인 것임은 피차간 잘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정보기관원은 그에 대해서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이 첨예한 5월에 김 선생님을 바깥에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지요"라고 말입니다.
그 때 민청련 부의장 최민화씨와 본인은 서울시경 대공분실로 연행되었습니다.
눈을 가리고 머리 숙일 것을 강제당한 채 끌려갔습니다.
본인은 여기서 진술거부권을 고수하였으며 이는 관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인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고문은 주비되지 않았던 것이며,
오직 심리적인 부담과 압박감을 주고자 했던 것이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긴 복도, 고립되고 차단된, 구획된 개별적인 방, 건장한 사내들의 들락거림,
냉소적 태도 등은 충분히 위축감을 갖게 했으며 부분적으로는 이상 심리를 조성하기까지 했습니다.
복도의 발자국 소리는 공명되어 크게 그리고 길게 울리고, 방안의 소리는 코르크처럼 숭숭 뚫어져
방음장치가 되어 있어 그런지 작고 가냘프게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는 하룻밤 신문을 당하고 나왔으며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6월 중순, 또다시 5월 광주민중항쟁운동 기간의 일로 구류에 처해진 바 있습니다.
이 때 서울지검 공안부장은 본인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 특히 신문기자, 외국특파원들까지 모두를 불러서 조사하도록 지시를 한 바가 있었으며
이미 수사기관에서 통하고 있었던 본인의 진술거부권에 대단히 분노했던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이때 권력은 본인에 대한 구속결정에 거의 이르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5월 광주민중항쟁운동 문제로 인해 본인을 구속할 때 오는 정치적 부담을 무겁게 생각하여
일단 유예하기로 했음을 명백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8월 하순의 구류처분 시 본인에 대한 구속 결정은 이미 합의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을 일단 구류처분에 처하였습니다.
당시 본인은 서부경철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는데 이번에도 구류로 끝나고, 다시 구속은 미루어졌다고 생각했으며,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며 한편으로슨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구류를 살고 있는 서부경찰서로 본인을 찾아와서 몇 가지를 물었던 수 명의 정보기관원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납득이 잘 가지 않았던 것은 본인을 찾아 면회 온 친구들을 따돌려 보내려고 완강히 버티는 수사과(서무경찰서) 직원들의 태도였습니다.
나아가서 본인의 가족면회도 차단하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본인은 수사과 간부들에게 항의했습니다.
간부들은 불법을 시인하면서 "참 미안하다"하면서 "자신들의 목이 두개가 아니니까 이해해 달라"고 오히려 본인에게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석연치 않았지만 당시 본인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고
구류를 마치고 나가면 충분히 휴양을 요할 정도로 피로가 쌓여 있었기 때문에 몇차례 항의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구속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며
부족한 자료를 모으고 있던 기간에 본인을 구류처분으로 청구했던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추측수사(예견주사)의 전형으로서 명백히 헌법 11조 3항 영장주의를 위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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