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보호자에게 맡겨진 생명



 나는 어느새 생존 가능성 15 퍼센트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 정도면 우리 혜숙이 넉넉하게 극복해 낼 꺼라고
 거듭거듭 자위하고 있었다.

 

 " ... 아무래도 제 집사람에게 지금의 상태를
 사실대로 알렸으면 싶은데요... 어떨런지요?......"

 

 그렇겠지요?
 그래야 되겠지요???

 

 그러면 내 사랑 혜숙은  비록 잠시...
 충격과 고통... 절망과 공포를 겪게 되겠지만
 아마도 다시금 용기와 의지를 다지게 될 껍니다.

 

 혜숙은 최선을 다 해서 극복해 갈 껍니다.
 나와 우리 가족 모두도
 다 함께 최선을 다해 나갈 꺼구요.....


 "...그 방법은 나라마다 일정치 않습니다.
 조상과 가족과 개개인에 대한 가치와 풍습이
 나라마다 혹은 민족과 지역마다 서로 다른 것과 같습니다.
 역사와 문화...전통적 환경 등등에서 볼 수 있는
 차별성하고도 관계가 있다는 보고도 있고요...


 미국에서는 의사가 환자 자신을 상대로
 모든 상태를 직접 다 이야기합니다.
 피치 못 할 사정이 없는 한...
 아주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호자나 다른 가족에게는 절대 말 안 해요.


 보호자든 가족이든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환자의 권리입니다.
 인간의 생명, 생명의 존엄성. 존엄성의 프라이버시는
 자기 자신, 즉 환자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겠죠......


 치료를 할 지, 말 지... 어떻게 할 지...
 이 모든 판단과 선택을 환자가 의사의 조언을 직접 듣고
 스스로 결정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그것이 반반입니다.
 병원에 따라서, 의사에 따라서 환자에게만 알리는 경우가 있고
 보호자에게만 알리는 경우가 있고 그렇습니다.
 전체적인 통계로 보면 50 대 50 으로 반반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환자에게 직접 이야기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제로 퍼센트예요...
 보호자를 불러서 보호자에게만 알리고
 환자에게 알릴지 말지 하는 선택은 보호자에게 맡깁니다. "


 김용일 박사는 내 의도와는 달리
 교과서적으로만 말씀하신다.

 

 수많은 임상 경험과
 그에 따라 의학적으로 정리된 결과만 가지고


 인간미 없이... 인정사정 없이
 객관적인 이야기만 했다.


 나는 다시금 인간적으로 매달리고 싶었다.

 개개인 환자마다 구체적인 형편과 사정이 제각기 다를텐데...


 그렇게 인정사정 없이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방법으로 구분해서
 획일적으로 정리된 결과로만 말씀하신다면.....

 

 그것 역시 환자에 대한 예단...
 생명에 대한 예단 아니겠느냐고
 매달려 호 소 하 고 싶 었 다 . . . . .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혜숙의 생명에 대한 희망...
 15 퍼센트의 가망성을 위해서

 나와 혜숙이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다 하기로
 엄숙히 다짐하면서 맹세코자 하오니......

 

 김용일 박사님 께서도 인간적인 애정과 관심을
 최대한으로 가져 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나는 그토록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초조하고 애절한 심경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간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김용일 박사를 바라 보았다.


 " 그럼... 혹시...
 제가 보호자로서 부탁을 드리면...
 환자에게 상태를 직접 말씀해 주실 수는 있으시지요?... "


 김용일 박사는 어이없고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 뜸을 드렸다.


 " ... 글쎄요... "


 엉뚱하게도 나는
 다짐하고 맹세하고 매달리고 싶은 말 대신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그 잔인한 판결문을
 주치의인 김용일 박사에게 낭독해 달라고
 은근히 미루려 드는 것이었다.

 

 뒤죽박죽 되어 버린 머리 속과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말마디가 따로따로인 채로
 서로 전혀 연결이 안 된다.



 

23. 들통난 감옥살이

 


 " 주치의 선생님 만나 봤어?...
 어디에 가 있다 이제사 나타나느냐고 혼나지 않았어??? "

 

 혜숙은 밝게 웃으면서 나를 반긴다.
 자기 자신의 몸 상태야 별로 궁금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다는 표정이다.

 

 주치의 선생님은 내가 감옥에 있다 나온 줄 모르고 계실텐데
 도대체 뭐라고 해명했느냐는 것이 오로지 궁금한 거다.


 혜숙을 어떤 낯으로 바라보고
 혜숙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 지...
 갈피 잡을 수 없던 나로서는
 분위기를 받아 넘기기가 차라리 편했다.

 

 "... 으~~~응. 들통나 버렸어....."

 

 "... 에~~~엥??? "

 

 거두절미하고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대답하면서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문병 겸 출소 마중 겸 와 있던 사람들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듯한 내 모습에서
 느닷없는 말이 튀어나오자
 분위기를 바꾸는데 한몫 거들어 주려는 듯
 모두들 소리내어 함께 웃었다.

 

 혜숙이만 혼자서
 무슨 농담을 그리 하느냐는 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 때 혜숙의 친구 천영초가 나섰다.

 

 " 아 글쎄 요 녀니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완조니 초칠해 버렸어야 ~ ...
 내 친구 혜숙이 신랑... 우리 선배가 어떤 분인데
 아직도 모르고 계신 거냐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얼릉 나서서 말 해 버렸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민주화 운동 하다가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나오는 길이라고...
 뭐 어떠니? !!!... "


 주치의 선생도 당연히 알고 계시리라 여겼던 탓에
 그만 본의아닌 실수를 저지르고 만 천영초는
 계속 당당하다.

 

 " 에구~~~ 잘했다 자~알 했어...
 아무리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그렇지.....
 신랑이란 작자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여태 안 나타나나...
 혜숙이 남편한테 버림받은 여자 아닌가...
 제대로 말도 안 해 줘서 궁금해 주~욱 껐었을텐데.....
 어물어물 했다가는 신랑 몰골하며
 우리 혜숙이 체면만 더 깎일 뻔했자나? "

 

 나와 같은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살인적인 고문을 당하고
 계속 감옥 안에서 고생하고 있던
 김근태 선배의 부인이자 혜숙의 친구인 인재근이

 달덩이같은 얼굴에 함지박만한 웃음끼로
 입심좋게 너스레를 떨어 댔다.

 

 그제서야 혜숙은
 이리 된 바에야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듯
 나를 보고 눈을 사~알짝 흘기더니
 웃음을 머금는다.


 주위에 많은 분들이
 혜숙의 생명을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때로는 죽음의 사신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못하도록


 혜숙을 유일한 관객으로 삼아서

 주위에 많은 이들이
 배역과 역할을 나누어 맡아
 세련되게 종합 연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다.

 

 이미 연기하고 연출하는 이들은
 줄거리를... 혜숙의 운명을 다 알고 있는데

 정작 스토리의 주인공이자
 유일한 관객인 혜숙이만
 그 내용을 모르는 듯 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데
 정작
 아내와 우리 가족만
 전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24. 오랜만에 느끼는 숨결과 체온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서
 방문객의 발길도 멈추어 갔다.


 한양대학교 병원 20 층 병동 로비에서
 머얼리 한강과 금호동, 신당동 산 언덕을 바라본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이 보이고
 그 사이에
 사과를 한 입 깨물어 베어 먹은 듯
 허옇게 드러난 산허리 중턱 공터에서는
 재개발 아파트를 세우느라
 한 밤에도 여념없다. 

 

 남산 꼭대기에
 불쑥 솟아 오른 타워는
 밤이 깊을수록
 휘황한 불빛아래
 모습이 더욱 선명하다.


 아~~~!
 시시각각 바뀌는 대자연의 변화
 인간의 놀라운 과학과 기술의 변화
 이런 모든 것을 놔 두고
 내 사랑하는 혜숙이
 죽어 땅 속에 묻혀
 한 줌 흙으로
 썩어 가야 한단 말인가?......


 인기척이 있어
 번뜩 제정신을 찾으니
 어느새 혜숙이
 옆으로 다가와
 내게 팔짱을 껴 온다.

 

 오랜 만에
 꼬~~~옥
 껴안 듯
 힘 주어
 온다.

 

 그러고 보니
 1 년 6 개월 여 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면서도
 우리는
 아직
 한번 뜨겁게

 뜨겁게 뜨겁게
 안아 보지도
 못 했 다.

 

 나도
 온 힘을
 팔뚝에 모아

 혜숙의
 팔을
 꼬~~~욱
 눌렀다.

 

 혜숙은
 왼손으로

 내 오른손 손바닥에
 자기 왼손바닥을
 밀착시켜 부비고는

 다시 힘 주어서
 손깍지를 낀다.

 

 그리고.....
 오른손을 돌려서
 내 오른쪽 겨드랑이
 안 쪽에 넣고
 쪼물럭 쪼물럭 한다.....

 

 머리를 기울여
 살며시
 내 어깨에
 올려 놓는다.....

 
 이만큼이나마
 혜숙의 숨결과
 체온을 느껴 보기도
 얼마만인가?.....
  
 그런 모습으로
 몸을 약간씩 좌우로 움직이면서

 

 서로의 숨결과 체온을
 맘껏 포근하게

 뜨겁게 뜨겁게
 느끼면서

 

 우리는 말없이

 하~~~안참
 서 있었다.

 

 혜숙은 정말로
 자기 병을 모르고 있는 걸까?.....
 눈치는 채고 있는 게 아닐까?.....

 

 혜숙에게 말을 해야 하나
 어쩌나.....

 

 어차피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치료받는 과정에서 알 게
 될 텐 데.....



'▷ 사랑과 희망으로 > 1. 네 번째 석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 보호자에게 맡겨진 생명  (0) 2008.01.22
23. 들통난 감옥살이  (0) 2008.01.22
25. 생일 선물  (0) 2008.01.22
26. 잠 못 이룬 첫날 밤  (0) 2008.01.22
27. 회 진 / 28. 저 환자 암이야  (0) 2008.01.22

 

 25. 생일 선물



 밤이 깊어 지면서
 세상은 점점 고요해 지고
 병실의 불빛도 하나 둘 꺼져 간다.

 

 " 오늘이 중수 생일인거 알지?
 내가 중수한테 귀가 닳토록 얘기했어.
 우리 맏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해서 첫 번째 생일 맞는 날
 아빠가 외국에서 맛있는 거 많이 사 가지고 돌아오실 꺼라고.....
 중수하고 고운이가 아빠 많이 기다릴 꺼야.
 이제 빨리 집에 가 봐.
 학용품이랑 초콜릿이랑 준비해 놓았으니까
 외국에서 사 왔다구 선물로 주고..... "

 

 그랬던가.....
 내가 출소하는 날이 공교롭게도
 초등학교 입학한 둘째애 생일과 한 날이라는 것은
 징역형이 확정될 때부터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 하루종일
 그 일을 생각조차 못 한 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첫째 딸 고운이와 둘째 아들 중수는 연년생이지만
 생월이 2 월과 4 월이어서
 3 월을 입학 기준으로 삼는 교육 연령으로는 2 년 차이다.

 그 당시 고운이는 3 학년, 중수는 1 학년이었다.

 

 혜숙은 내가 구속될 때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 밝히기를 꺼려 했다.

 

 아빠의 행동과 처신이
 부끄럽거나 명예롭지 못해서가 아니다.
 
 가까운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을 비롯한
 어른들 세계에서도
 각자가 처한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따라서는
 민주화 운동을 하고
 감옥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복잡미묘하고 다양할 터인데

 

 한창 철없이 뛰어 놀고
 자유롭게 활개치며 자라날 아이들에게
 시국이라든가 역사적 상황
 구속과 재판 등등 유별난 어른들 세계를
 굳이 드러내서 밝히는 것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겠다고 여겼던 탓이다.

 

 갓난 아기 적에는
 혜숙이 내게 자랑삼아
 아이를 가끔 품에 안고 면회 오기도 했지만
 그것도 조심스러워 했다.

 

 나는 혜숙이 아이들을 위해
 정성스레 마련한 선물을 받아 안고
 그만 눈시울이 시큼해 왔다.

 

 아직 철모를 아이들이 바라는
 아빠에 대한 기대가
 혹시라도 흠 잡히거나
 상처받지 않을까 염려하는
 아내의 마음이 가슴 속 깊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혹시라도
 이처럼 정성스런 엄마의 선물을 받아 보는 것도
 이번으로 마지막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절망어린 생각이
 내 가슴을 더욱 미어 왔다.

 

 차라리 엄마가 수술을 받고
 엄마의 생명이 어찌 될 지 알 수 없는 지경에서도
 너희들을 위하고 사랑해서
 마련해 준 선물이었다고
 아이들에게 말 해야 옳지 않겠는가?......

 

 어찌 내가 이 지경에서
 아이들에 대한 엄마의 애틋한 사랑을...
 남편에 대한 아내의 배려를...


 혼자서 몽땅 가로채야 한단

 말 인 가 ! ! ! . . . . . .



 

26. 잠 못 이룬 첫날 밤


 병실 복도의 불빛도 비상등만 남긴 채
 모두 꺼져 있다.

 

 병실마다 환자들이 꽈~악 차 있지만
 아무런 인적없이 사방이 고요하다.

 

 어느새 준비했는지 혜숙은
 그러지 않아도 식은땀 흘리고 잠을 설쳐댈
 나를 염려해서 챙겨 둔 신경안정제를 건네 준다.

 

 그리고는 배웅하겠다며
 병원 1 층 로비를 지나 택시 정류장으로
 나를 안내한다.

 

 늦은 밤이어선지
 한참을 기다려도 택시가 안 온다.

 

 나는 찬바람 쏘이지 말라면서
 혜숙을 다시 병실로 데려 간다.

 

 혜숙은 운동을 해야
 잠도 편하게 들 수 있다면서
 다시 택시 정류장으로
 나를 배웅한다.

 

 그러기를 한 번 더.....


 혜숙을 뒤로 하고
 나는 교문 밖 큰 도로를 향해
 언덕길을 터벅터벅 내려간다.

 

 다시 오랜만에 보는 서울의 야경.....
 을지로와 시청앞을 지나
 서소문 이대 입구에 닿기까지
 나는 필름이 끊긴 것처럼
 그저 까맣기만 할 뿐
 아무런 생각도 없다.


 기억도 전혀 없다.

 그저 온몸으로 식은땀만 끈적끈적
 흘러 내릴 뿐이었다.

 

 어머니께선 근심어린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시고...
 아이들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다.

 

 아이들 머리맏에 선물을 챙겨 놓고
 집에서 첫 밤을 지낸다.

 

 아~~~!!!
 지금처럼...
 지금 혜숙이 내 곁에 없는 것처럼...
 혜숙이 내 곁에 영원히 없게 될지도 모른다니......

 

 밤새도록
 지옥같은 현실...
 악몽같은 현실에
 몸서리치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나는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27. 회 진

다음 날
잣죽과 밑반찬거리를 싸들고 병원으로 달려 갔다.

병실 전체가 아침부터 각종 진료와 검사... 투약과 주사...
간호사 회진... 담당 의사 회진... 등등으로
어수선하고 분주하다.

어제 만나 뵈었던 주치의 김용일 박사가
휘하에 수련의 7 ~ 8 명 이끌고 우르르 들어 선다.

마치 군대에서 감옥에서 순시하고 점호할 때마냥
혜숙은 사물함과 침대를 깔끔하게 정리 정돈하고
침대 위에 차렷 자세로 앉아 있다.

나도 덩달아 벌떡 일어 나긴 했지만
차렷 자세는 좀 어색하고
뒷짐짓고 삐딱하니 서 있기도 그렇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는다.

혜숙은 주치의에 대하여.....
정중하게 인사...
한다.

소변은 보았느냐.....
몇 번 보았냐...
대변은...

밥은 먹었냐.....
얼만큼 먹었냐...

이 절체절명 중차대한 순간에
아무 의미도 없을
일상적인 말

밥 먹었냐... ( 많이 묵어라... )
오줌 똥 눴냐... ( 마니마니 싸라... )

주치의 김용일 박사는 혜숙에게 몇 마디 묻더니
수련의들 향해 전문 용어로 소곤소곤거리고는
다시 우르르 몰려 나간다.

" 잠깐만요 ! ! ! "

차렷 자세로 앉아 있던 혜숙이
오른손 번쩍들어 치흔들면서 의사들을 불러 세운다.

" 저..... 김용일 박사님은 어제 뵈었지요?.....
여기 이 사람이 제 신랑이예요.....
여보 인사드려.....
어디 좀 머얼리 가 있다가 어제 나왔어요....."

혜숙은 기왕에 들통난 것
별로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당당하고 밝은 표정으로 익살을 섞어 가며
의사들에게 나를 소개한다.

" 선생님... 나 우리 신랑이랑
1 년 반두 넘게 떨어져 있다가 만난 건데.....
퇴원 좀 빨리 시켜 줄 수 없어요?....."

진심인지 농담인지...
부탁하는 건지 사정하는 건지 떼를 쓰는 건지...
갈피잡을 수 없는 묘한 뉘앙스로
혜숙은 의사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 어..... 같이 노력해 봅시다.....
상태가 좋아지면 굳이 오래 입원해 있을 필요가 없을테고...
좀 지켜 보지요....."

김용일 박사 역시
딱히 이럴 건지 저럴 건지
알듯말듯한 말로 맞장구를 쳐 준다.

상태가 좋아지면이라니...
그럼... 금방 좋아질 수 있다는 말인가?
금방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무려 5 년을 지켜 보아야 한다고 했으면서.....

좀 지켜 보고 노력해서 상태가 좋아지면
정말로 굳이 입원해 있을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나는 그 순간

또다시 김용일 박사의 말꼬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 진다.

 



 28. 저 환자 암이야

 


 의사들의 회진이 끝나자
 병실은 소란하고 어수선한 분위가
 단숨에 멈춰 버린 듯 조용하다.

 

 혜숙은 나에게 가까이 좀 와 보라더니    
 귓속말로 속삭인다.


 " 있잖아~~~ 저 맞은편에 있는 환자 있지???
 저 환자 암이야 암......
 내가 보니까 항암제를 맞고 있는데 너무 안 됐어...
 머리카락두 다 빠지구...
 근데... 본인은 자기가 암인 줄 전혀 모르구 있어...
 아마 며칠 있으면 병원에서두 포기하구 퇴원할 거 같애......" 
  

 아~~~!
 혜숙은 정말로
 자기 자신이 암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구나......

 

 그렇게 큰 수술을 받고도
 자기 가슴에 크게 난
 수술 자국을 보고도
 낌새조차 전혀
 못 느끼고 있구나......

 

 그렇다면 내가
 주치의를 처음 만났을 때
 김용일 박사에게는
 징역 살다 나온 사람과
 평생에 처음으로 마주했던 것처럼

 

 나 또한
 평생에 처음으로
 암 환자라는 사람을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나와 혜숙이
 민주화 운동 하다가 감옥에 들락거리는 이들을
 주변에서 수없이 만나고 함께 생활해 왔듯이

 

 김용일 박사는 암 환자들과 수없이 만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해 온 것 아닌가.....

 
 나는 암이란 병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들어서 알고 있다.

 

 친척이랄지 친지랄지 알 만한 사람들 중에
 암으로 고생하다 운명했다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하지만 혜숙이 말대로라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암 환자를
 직접 마주 보기는 처음이다.


 아마도 내 사랑 혜숙이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러니까
 경이로운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내게 가까이 좀 와 보라면서
 귓속말로
 귓속말로 속삭이는 게 아닌가?.....

 

 " 어저께도 암 환자가 한 명 퇴원했어.
 아마 못 살꺼 같으니까 집으로 데려 간 모양이야."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자기 자신도
 바로 그 병을 앓고 있는데......

 

 혜숙이 주변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데......

 

 혜숙의 말대로
 저 맞은편에 있는 환자 본인은

 자기 자신이 암인 줄 전혀 모르겠지만


 건너편에 있는 혜숙이 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환자는 혜숙을 보면서

 젊은 나이에 갓 난 것부터 애들두 셋이나 있다는데

 

 너무 불쌍하고 안 됐다고

 너무 안타깝고 비참하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찌해야 하나......
  
 혜숙은 자신이 암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다.

 

 절대로 암일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 사랑과 희망으로 > 1. 네 번째 석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 생일 선물  (0) 2008.01.22
26. 잠 못 이룬 첫날 밤  (0) 2008.01.22
29. 예쁜 내 삼겹살  (0) 2008.01.22
30. 남들은 다 하는 도리  (0) 2008.01.22
31. 손가락질 당하는 일  (0) 2008.01.22

 

29. 예쁜 내 삼겹살
  


 그즈음 병원에서는
 의사들 사이에
 간호사들과 직원들 사이에

 혜숙이 수술받고 난 직후의 일화가
 한토막 에피소드로 소문 나 퍼져 있었다.

 
 혜숙은 무려 8 시간 동안

대수술을 받았다.

 

 배꼽 바로 위쪽에서 직선 2 cm
 아랫쪽으로 살을 베어 내려 가다가
 오른쪽으로 15 cm, 왼쪽으로 15 cm
 시옷(ㅅ)자 모양으로
 아랫배 전체를 다 열어 볼 수 있도록
 갈라 놓았다.

 

 위를 몽땅 잘라 내고
 비장과 췌장도 일부 잘라 내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암세포를 모두 찾아 제거하고

 갈라진 배를 다시 봉합했다.
 
 배와 가슴
 온 몸통을 붕대로 칭칭 싸감고
 회복실에 들렀다가 일반병실로 올라 왔단다.


 며칠 후
 주치의와 담당 수련의들이
 온 몸통 칭칭 싸감은 붕대 풀고 환부 소독하려는데

 

 그 때 혜숙이 자기 아랫배에 생긴 상처 보더니
 고개들고 눈을 똥그랗게 치세우면서
 
 " 오머나... 이게 뭐야!
 예쁘게 생긴 내 삼겹살 누가 이래 놨어!
 누가 이렇게 엉망진창으루 썰어 놨어!
 선생님이 그랬지? "

 

 담당 수련의에게
 익살맞은 뽄새로
 항의하더라는 것이다.


 대개의 환자들은 일반적으로
 암인 줄 전혀 모른 채 수술받고 나서
 환부 소독할 때 흉칙스런 상처보고
 그만 놀래버린단다.

 

 그러고부터 혹시 위중한 병 아닐까
 의심하고 불안해 한단다.

 

 여성일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단다.

 때로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단다.

 

 혜숙이 역시
 그랬을 것 아니겠는가?

 

 그런 경황에서 익살맞은 뽄새로
 담당 의사에게 농을 걸다니.....


 그 당시 두 개층 아래 병동에
 백기완 선생이 입원해 계셨다.

 

 백 선생과 나와 혜숙은
 1974 년 민청학련 사건 때부터
 잘 알고 지내 온 사이다.

 

 1979 년 계엄포고령으로 나와 함께 공범이 되어 구속된 백 선생은
 그때 당한 모진 고문으로 정신착란증과 협심증에 시달리다가
 그 후유증으로 입원한 것이다.

 

 선생은 혜숙의 걱정을
 문병 오는 이에게마다 쏟아 놓으셨단다.

 

 " 신랑은 아직 감옥에 있는데...
 우리 혜숙이가 암 수술 받고 요 위층에 입원해 있어~~~
 참 큰 일이야....."

 

 나는 석방 인사겸 문병겸 백 선생을 찾아 뵈었다.

 오랜 만에 해후하고 안부를 나눈 다음 백 선생이 내게 말한다.

 

 " 그 참... 대단하다 대단해...
 덩치는 자그마한 여인네가 그리 큰 수술을 받고 나서...
 아~니 담당 의사한테 예쁜 내 삼겹살
 누가 이리 엉망으로 썰어 놓았냐고 농을 걸었다니...
 그랬다는 말 나도 내 주치의 김광일 박사한테 직접 들었어...
 병원 의사들 사이에 소문이 쫘~~~악 났다고.....
 김광일이 알지?
 우리 민족 전통문화와 한국인의 정신분석학이란 주제로
 대단한 책 쓴 누마.
 그누마 고등학생 적부터 가까운 친구로 지내왔는데
 어렸을 적부터 배짱좋고 인물 좋고 머리 좋고 했던 넘이었지...
 아~니 그런 상황에서 그런 농이 나올 수 있는가 말이야 글쎄...
 여걸이야 여걸... 박혜숙이 같으면 극복해 내고 말꺼야...
 그런 성격에 그까짓 암이 무섭겠어???
 고금동서 고사에서도 여인네로는 찾아 보기 드문 뱃짱일꺼야...
 대단한 여자야....."



 

30. 남들은 다 하는 도리


 
 내가 출소한 뒤 나흘 후에는
 어머니 칠순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평소
 무슨 날 무슨무슨 날이라 하여
 특별한 음식을 차리고 행사하고 기념하는 것을
 그리 달가와 하지 않으셨다.

 

 세상 일에 쫓겨 살아 가기도 바쁜 터에
 절기다 뭐다 일일이 따지고 챙기고 하는 것을
 허례허식이라 여기셨고 부질없어 하셨다.

 

 우리 가족의 생일도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생일을 함께 기억하는 정도로
 상징적인 의미로   
 아침 상에 미역국을 올려 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머니의 회갑 때도 역시 그랬다.
 어머니는 늘 눈코뜰새없이 분주하셨고
 나는 긴급조치 9 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고
 나의 누이는 오랜 세월 독일에 거주하면서
 돌아 오기 어려운 아니 돌아 올 수 없는 형편이었다.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회갑연을 마다하셨다.

 딱히 경제적 형편과 사정이 어려워서도 아니었을 텐데.....

 

 그때 나는 더 이상 어머니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와 혜숙은 인근 가까이 있는 용인 에버랜드 공원으로
 어머니 아버님을 모시고 나들이하는 것으로

 회갑연을 대신해야 했다.

 

 그 후 아버님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고
 내가 세 번째 구속되어 계엄사령부에서 고문당하고 취조받는 와중에
 칠순을 맞으시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집안 사정도 그러려니와
 주변 분위기도 아버님 칠순을 기리고 축하할만큼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결국 남들은 거의 모두가 다 하는 부모님에 대한 도리를
 나는 그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하고 지나쳤다.

 

 더우기 아버님은 73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남들 누구나가 다 하는 자식된 도리를
 다시는 아버님께 해 드릴 기회조차 영영 놓쳐버리는
 불효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이제 아버님을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시고
 6 년 여 동안 홀로 지내시던 어머니께서 칠순을 맞이하실 차례다.

 

 나는 여러 달 전부터 교도소 접견실에서 아내와 의논해 왔다.

 이번에 어머니 고희연마저 못 하고 지나쳐 버리면
 나와 혜숙이 가슴에 두고두고 씻지 못할 한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남들이 다 하는 자식된 도리를 시늉이라도 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이런 뜻과 주장은 감옥 안에 있는 나보다
 밖에 있는 혜숙이 더 강경했다.

 

 천만다행이게도 어머니 칠순이
 내가 만기 출소하는 날 나흘 후다.

 

 혜숙은 식구들이 입을 한복을 맞추고
 내 몸둘레 사이즈를 재어 갔다.

 

 장소를 예약하고 음식상을 맞췄다.
 초청장을 만들어 주위 분들에게 띄웠다.

 

 민청련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 등 단체에서도
 나의 석방 환영을 겸해서 축하하기 위해
 어머니의 칠순 행사 준비를 조직적으로  도왔다.



 

31. 손가락질 당하는 일


 그러다가 보름 앞두고 혜숙이 쓰러졌다.

 혜숙의 갑작스런 상태는 나의 출소와 어머니 고희연과 더불어
 삽시에 민주화 운동 진영으로 번져 나갔다.

 

 주위 많은 분들에게 알려졌고 염려와 걱정을 넘어
 충격적인 소식으로 전해졌다.

 

 이제 나의 출소랄지 어머니 고희연이랄지보다는
 암으로 쓰러진 혜숙의 생사여부가 주위 모든 분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혜숙은 입원해 있으면서도 자기 몸 상태는 아랑곳없다는 듯
 오로지 어머니 고희연 준비에 몰두했단다.

 

 친지 동료들에게 일일이 전화하고 당일 행사 진행 순서를 짜고
 차질없도록 역할을 맡기고 풍물패를 수배하고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부탁하고
 하다못해 입구에서 안내하고 접수 보는 이들까지 일일이 챙기고 있더란다.


 절친한 여고 동창 중 어떤이는 혜숙이가 미쳤는가보다고
 지가 죽을지 살지도 모르고 시어머니 칠순 잔치만 생각하고 있다고 혀를 찼단다.

 이런 와중에 칠순 잔치가 뭐냐고 지부터 살고 봐야 되지 않겠냐고 했단다.


 하지만 혜숙은 막무가내였단다.

 결혼 전이지만 시어머니 회갑도 그 후 시아버지 칠순도 못 해드리고 지나쳤는데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이번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막무가내 우기더란다.

 

 그래서 결국은 여고 동창들도 죽어 가는 혜숙이 마지막 소원 일지도
 맺힌 한 일지도 모를 일이니 저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들어 줘야 되지 않겠느냐면서 진행을 도왔단다.


 한편 어머니께서는 여러 달 전 고희연 말이 오가기 시작할 때부터
 크게 노여워하시면서 반대하셨다.

 

 어머님은 오랜 세월 공무원 생활하시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우리 나라에서 만연하는 부질없는 허례허식과 풍습을 삼가하도록
 계몽하고 설득하러 다니셨다.

 

▲ 어머니 공무원 신분증 사진


▲ 화성군보건소에서 상근책임자로 근무하시던 어머니 (가운데)

    

 분에 넘치고 분수에 맞지 않는 예식을 간소화하도록 교육하고 다니셨다.

 그러니만큼 당신이 먼저 솔선수범하는 데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며느리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뒤에는
 더욱더 당신의 고희연을 중단하도록 요구하셨다.

 

 출소하고 처음 뵈었을 때도 어머니는 나에게 무엇보다 먼저
 이런 지경에 고희연이 다 뭐냐고 그만두라 하셨다.

 

 아들은 감옥에 있고
 며느리는 입원해 있고
 딸과 사위는 외국에 나가 있는데

 고희연이랍시고 잔치할 마음이 생기겠느냐고 하셨다.

 

 부질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자신을 크게 욕보이는 일이라고 나무라셨다.

 

 세상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당하는 일이라고
 크게 노여워하셨다.


▲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반송리 출장 중인 어머니


▲ 가정 방문 중인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혜숙은
 어머니 고희연을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중단하기에는 너무 늦기도 했거니와
 주위 많은 분들의 의견도 있었다.


 그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도 고려했다.

 1987 년은 새해 벽두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임기 만료가 되는 해로 자리를 물러 나야 했고
 재야 민주화 운동 진영과 야당에서는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직선제 개헌 논쟁에 불을 붙였다.

 

 2 월에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수사단에서 고문으로 숨진 사실이 폭로되고
 국가 공권력의 정당성과 도덕성이 크게 실추되었다.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분위기가 기승을 더 해가자
 전두환 대통령은 개헌 절대 불가를 천명하며
 "4.13 호헌 조치"를 내세워 마지막 안간힘으로
 정국을 제압하려는 듯 발버둥치는 형국이었다.


   ▲ 1987. 4월 13일자 경향신문.

 

 1979년 10.26 박정희 시해사건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처럼

 1980년 5월 17일 광주민중항쟁을 앞두고 전국 계엄령으로 확대되었을 때처럼

 정국은 일순간 차디찬 냉기에 휩싸였다.

 

1980 년 3 ~ 4 월 민주화의 봄 적에

 견디다 못한 어둠의 세력이 마각을 드러내고

 5.17 계엄 확대 조치를 무기로 총질하고 칼춤추며 판세를 뒤엎으려 난리치듯

 도도한 광주 시민의 민주화 물결을 난도질하고 박살내듯
 
 무언가 거대하게 휘몰아 쳐올 것같은 태풍 전야처럼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고요했다.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선포된 바로 다음 날

4 월 14 일 내가 감옥에서 출소했다.

 

 그리고 나흘 후에
 어머니의 고희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민주화 운동 진영을 대표하던 민청련과 민통련 민가협 등 단체에서는
 갑자기 얼어붙은 정국을 돌파해 내기 위해서라도

 재야 민주화 운동 진영에 있는 분들이 모두 망라해서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자리가 가뜩이나 필요한 터이니만큼

 어머니의 고희연을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나와 혜숙은 주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고희연은 이미 자연인 어머니 개인이나
 우리 가족의 잔치를 넘어 선 행사라 했다.

 

 우리 가족이 처해 있는 형편과 사정도
 이미 우리 가족만의 걱정과 염려가 아니라고 했다.

 

 그때까지 20 여 년 동안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나와 함께 노력해 온 모든 선후배 동지들의 뜻이라고 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행사라고 했다.

 그제서야 어머니께서는 더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당신의 뜻을 거두신 건지.....
 말씀하셔봤자 내 고집 꺾을 수 없어 마지못해 포기하신 건지.....

 

 그 후 무겁게 흐르는 침묵을 깨고
 무섭도록 고요한 연못에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조짐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그동안 조용하게 살아 오고, 하고 싶은 말 아껴가며 내색없이 침묵해 온

 살만한 이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대학 교수를 필두로 의사 약사 한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신부 목사 교사...
 

 밀양 안동 마산 기장 동래...
 여수 완산 남원 목포 광주서구...
 유성 옥천 천안 제천 공주...
 강릉 원주 춘천...
 

 중산층으로, 소지역 단위로 모여서 의논하고 입장을 발표하고
 목소리를 내고 함께 행동하고.....

 

 마침내는 도도한 물결이 되고
 거대한 파도가 되고
 6 월 민주 대 항쟁이 되었다.




32. 눈물의 칠순 잔치

 

 

 4 월 18 일 혜숙은 주치의로부터 3 시간 특별 외출을 허락 받았다.

 혜숙은 평소에 얼굴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남자인 나도 세면하고 나서 찍어 바르는 스킨 로션조차 혜숙은 바르지 않았다.

 경기여고 시절 학교의 전통있는 행사로 널리 알려진

 세계 민속놀이 대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분장했던 일과 우리 결혼식 때 신부 화장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날 내가 근무하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여직원이 혜숙에게 옅은 화장을 해 주었다.

 그래선지 환자같지 않고 해말간 얼굴이 참 곱게 보였다.

 

 고희연에 앞서 교회 담임 조승혁 목사님 주재로

 교인들과 일가 친척들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함경북도 함흥에서 우리나라 초대 교회 고명하신 목사님 가정에

위로 오빠 언니를 두고 아래로 남동생 여동생 사이에 셋째로 태어나신 어머니

방이 18 개 거실 화장실 합하면 21 개나 되는 함흥중앙교회 사택에서 자라

어렸을 적부터 청소하기가 너무 힘들고 지긋지긋했다던 어머니...

 

영생여고보와 함경남도립병원 간호부 조산부 과정을 졸업하고

결혼 전까지 원산도립병원 기숙사에서만 생활했던 경험으로

남들처럼 작고 아담한 집에서 단란하게 살아 보는 것이 소원이셨다던 어머니

 

그래서 나까지도 팔자에 없을 큰 집을 그리 자주 드나들어 온 건가?

나 역시 어머니와 외가의 영향 아래 모태 신앙으로 자라 왔다.

오랜만에 해후하게 된 친인척 교인들은 우리 가정의 파란만장한 역경과

혜숙에게 드리운 병마를 익히 알고 있어선지 기쁨에 넘치거나 축하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 착잡한 속내를 애써 감추시는 어머니

 

주재하시는 조승혁 목사님과 참석한 이들 모두

특별히 혜숙의 건강과 우리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합심해서 다함께 하나된 마음으로 감동어린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끝나자 따사로운 봄날 성북동 그윽한 골짜기에 위치한 '녹음정'으로 하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든다.

계훈제 송건호 선생님 등 재야 원로

성내운 김찬국 이영희 정윤형 등 당시 해직 교수협의회 교수님들

현기영 임헌영 정희성 조태일 박용수 안종관 채광석 유시춘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인들

임채정 정동익 등 해직 언론인

이길재 최종진 등 전국농민회총연맹 대표

임진택 장선우 유인택 등 문화예술인

윤순녀 김명식 등 가톨릭 수녀 수사님

성해용 이상윤 임흥기 이근복 등 개신교 목사님

최 열 김승균 신철영 신대균 등 시민사회단체 분들

민통련과 민청련 식구들 구속자가족협의회 민주열사유가족협의회 분들

초 중고등 대학 동기 선후배들.....

전두환 씨가 개헌불가 4 . 13 호헌조치를 강압적으로 발표한 직후여서인지

5 . 16 군사 쿠데타 이후부터 연대해 온 재야 민주인사들 가운데

구속되거나 수배된 이들을 빼고는 거의 망라되어서 참석한 자리가 되었다.

 

 

 

 

우리 결혼식 주례를 서신 김찬국 교수님은 혜숙의 등을 두드리며 손을 꼭 잡고 봉투를 쥐어 주셨다.

"이 돈은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말고 우리 박 선생 혼자서 맛 있는 거 사먹어야 돼요....."

따뜻하신 말씀이시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 때 돈으로 거금 30 만 원이 담겨 있었다.

당신께서도 무려 13 년 여 동안 해직되어 계실때인데.....

나는 혜숙이 입원해 있는 동안 교회 집사님 집에 가 있던 막내를 처음으로 보고 품에 안아 보았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스트레스를 말로 표현 못 해선지 마악 첫돌이 지난 막내는 머리칼이 곤두서듯 위로 뻗혀 있다.

 

 

 

잔칫상과 사람들 사이를 천진난만하게 휘젓고 다니는 딸과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나 뿐만이 아니었다. 혜숙의 친구들 또한 그 모습을 지켜 보면서 손수건을 눈에서 뗄 줄 몰라 했다.

참석한 이들 모두가 혜숙이 예쁘게 화장한 얼굴로 고운 한복을 입고

갓 돌 지난 막내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누구랄 것없이 눈시울을 삼켰다.

 

오랜 세월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 왔던 동지이자 후배 이해찬(전 국무총리)의 사회로 식순이 진행되었다.

나는 인사말을 통해서 우리 가정에 드리운 안위에 대해 염려와 걱정을 끼쳐드리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을

우리 가족과 혜숙이 알아 듣지 못하도록 완곡하게 표현했다.

 

더불어 오늘의 자리가 우리 가족을 위한 행사로 그치지 않고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를 돌파해 내는 데 조그마한 교두보가 되어

허심탄회하게 만나고 서로 의견 나누는 자리로 삼아 달라고 부탁했다.

 

한국문화연구소 연성수 소장이 이끄는 풍물문화패의 공연과 함께

우리 가족을 시작으로 선후배 동료들이 어머니께 예를 올렸다.

참석한 이들 대부분이 혜숙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혜숙이 절하고, 친구들과 같이 "어머니 은혜"를 노래하고 오랜만에 보는 막내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눈시울을 삼키게 했다.

 

▲ 어머니 칠순 행사 동영상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