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도시락’ 문제가 많은 국민들을 허탈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하는 자괴감을 느낀 분들이 많았습니다.

 

책임을 통감합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문제의 발단은 ‘준비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작년 하반기, 방학 때 여러 가지 이유로 밥을 못 먹는 아이들이 많다는 점이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니까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일을 시작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실은, 정부 안에서도 준비가 부족하다는 문제제기가 있었고 논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밥 못 먹는 아이는 없게 하자’는 쪽으로 정책결정이 이뤄졌습니다.

 

‘학기 중에 학교에서 무료급식을 받는 아이들을 방학 때는 아무 대책 없이 방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판단과 주장 앞에 ‘준비가 덜 되어 있다’

‘5만 5천 명에서 25만 명으로 확대할 때 뒷받침이 가능한 인프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대가 있었지만 ‘그래도 해내자’ 하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이런 방침에 따라 실제로 이 일을 맡을 지방자치단체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정책결정 취지에 대해 일선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한게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마음’을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정책이라는 재료에 ‘사랑과 정성’을 보태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이들의 입장에서 한번만 더 생각했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질책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지행정은 정책이라는 그릇에 세심하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 전달하는 일입니다.

특히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서귀포에서 부실 도시락이 전달 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며칠 뒤 ‘밤골 공부방’이라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천주교 수녀님들이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공부도 가르치고 점심도 제공하는 곳입니다.

 

여기 아이들은 모두 명랑하고 활발했습니다.

그 다음에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초등학교 여학생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학생으로부터 ‘못산다고 친구들이 잘 놀아주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목이 메었습니다.

 

이 여자 아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양극화의 두려운 결과이고, 참으로 무서운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정말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뇌관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배고픔이나 외로움보다

주위에서 ‘낙인찍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의를 기울여 왔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번에 우리 사회 복지 시스템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특히 복지정책을 전달하는 시스템에 허점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어쩌면 불행 중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 해결할 방법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니까요.

그렇게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읽으시는 여러분께 ‘참여’도 함께 고려해 주실 것을 요청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공직사회가 자기 역할을 다하도록 각별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사회 구석구석에 빠짐없이 피가 돌게 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참여가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공직사회가 핏줄 구실을 제대로 하는 바탕 위에 지역사회가 모세혈관 역할을 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제도적 지원을 해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공감대를 이뤄나갈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널리 모아질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함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2005.1.24

김근태

하늘이 보내온 구원의 선물

 

지난 주에 남아시아에서 가슴 뭉클한 사연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인도네시아의 한 청년이 9일 동안 나무등걸 하나에 의지한 채 망망대해를 떠돌아다니다가

지나가는 화물선을 만나 극적으로 구조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진 속의 그 청년은 우리를 향해 두 팔을 크게 흔들고 있었습니다.

 

몰아치는 해일에 맞서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한 어머니의 이야기도 가슴을 뒤흔들었습니다.

 

어머니는 한 살배기 자식을 지키기 위해 다섯 살 아들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며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고백했습니다.

어머니의 그 마음이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 다섯 살짜리 아들이

다시 살아서 돌아왔다며 기뻐하는 어머니의 모습도 지켜보았습니다.

 

두 가지 뉴스를 들으며 저는 하늘이 세계인을 향해

‘구원은 이렇게 이뤄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늘의 구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많은 나라에서 민간과 정부가 힘을 합쳐 지진해일 피해자들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번 사태는 그 자체로 인류에 대한 엄청난 재앙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인류가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계기도 된 것 같습니다.

세계인이 서로 단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눈에 거슬리는 점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돕고 격려하면서 자신들의 주도권과 국가이익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향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번 기회를 활용해 은근슬쩍 자국 군대를 파견하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좀 과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과거에 외국의 원조를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도 어린시절에 미군들이 달리는 쓰리쿼터 안에서 껌을 던지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때는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솔직히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차마 그 껌을 줍지 못했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도와주는 사람들은 먼저 그 아픔을 가슴에 생생히 담아야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자존심이 다치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합니다.

모욕감이 들게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남을 도우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집니다.

남을 도울 때는 주도권이나 이익을 생각하기에 앞서

‘높아진 자부심’에 만족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정말 감상에 불과한 것일까요?

 

한밤중에 열린 군사분계선

 

한밤중에 군사분계선을 넘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말만 들어도 긴장되고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남북이 협력해서 안전하게 그것도 한밤중에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주목해서 본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북한 쌀 지원을 나갔던 무역협회 직원 한 분이 갑작스럽게 상을 당했습니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속만 태웠을 일입니다.

그런데 북한 당국이 적극 협조하고 아마도 북한 군 지휘부가 결단해서

이 분이 한밤중에 군사분계선을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여기까지 와있는 것입니다.

더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2005년에는 반드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으면 합니다.

남북 정상이 다시 만나는 것을 계기로 많은 분들이 개성공단과 금강산으로 가고,

원산과 신의주에서 서울로 와야 합니다.

 

그런 2005년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5.1.10

김근태

 

새해 아침 복 많이 받으셨는지요?


처음 ‘일요일에 쓰는 편지’를 시작할 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편지를 쓰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평소에는 할말이 많았는데 막상 편지를 쓸려고 하면 쉽게 써지지가 않습니다.

생각을 정리할 여유도 없고 이것저것 걸리는 것도 많아서 그런가 봅니다.

 

지난 한 주는 거의 날마다 국회로 출근을 했습니다.

새해 예산안과 보건복지부 관련 법안 여럿이 국회에 상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정부는 예산과 법률이 국회를 통과해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산안과 보건복지부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로 출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회의가 열린 시간보다 회의를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데도 아직 통과시켜야할 법률안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남아시아 지진해일 참사가 세계인을 슬프게 한 한주였습니다.

뜻밖의 참변을 당하신 모든 분들께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번 사태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분들께도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시아의 손꼽히는 아름다운 휴양지들이 해일에 휩쓸렸습니다.

스리랑카,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성탄연휴를 즐기던 분들과 현지 주민들이 다치고 생명을 잃었습니다.

 

사망자 수만 15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인류에 대한 엄청난 재난입니다.

게다가 전염병이 창궐할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한주동안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움직였습니다.

적십자사를 비롯해 의사협회, 병원협회와 같은 민간보건의료단체들이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긴급히 사고지역에 의료진을 파견하는 등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이런 민족성은 더욱 빛납니다.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말처럼 서로 돕는 아름다운 품성은 때론 마을, 지방, 나라를 넘어 발휘되기도 했습니다.

 

1999년 9월 대만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119 구조대가 대만 현지에서 벌인 활동은

단교 이래 대만 국민이 한국에 대해 가져온 거리감을 좁히는 계기가 될 정도로 정말로 분위기를 바꿨습니다.

 

작년 북한의 용천 폭발사고 때에도 우리 국민들은 성금을 모으고 기꺼이 북한 동포들을 지원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남북이 하나였고 동북아가 하나였습니다.

 

아시아도 하나입니다.

남아시아 피해 복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겠습니다.

 

제가 보건복지부에 부임한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장관 역할을 잘하려면 최소한 6개월은 지나야한다는 시중의 농담이 있습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요즘은 ‘장관 2기’를 맞는 기분입니다.

지난 6개월 동안 경험하고 파악한 내용을 바탕으로 새롭게 일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새해를 맞아 신년을 맞는 포부를 밝힌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합니다.

 

▼ ▼ ▼

 

2005년을 ‘국민통합 원년’으로 만듭시다.

 

여러분은 새해에 어떤 희망을 갖고 있습니까?

‘좋은 터를 잡아야 좋은 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굳은 마음을 먹고 계획을 세워야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새해 설계를 하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는 ‘국민통합의 튼튼한 밑받침을 놓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빈익빈 부익부라는 ‘양극화의 함정’을 넘어

‘새로운 성장을 위한 사회통합’이라는 큰 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국민통합의 길로 사회의 물줄기를 돌린 원년!

저는 세월이 흐른 다음에 우리 사회가 2005년을 그렇게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맡은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새해를 맞아 ‘국민과의 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이 ‘그 정도면 괜찮다’고 할만한 새해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국민 여러분에게 보고하고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계약’을 맺을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사회 각계 전문가들과 함께 구체적인 내용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준비가 되는대로 국민 여러분께 보고하겠습니다.

 

새해에는 성장과 복지가 선순환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뛰겠습니다.

 

무엇보다 보건복지부는 국민 속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을 잊지 않겠습니다.

한숨짓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행정을 혁신하겠습니다.

투명한 행정, 국민에게 다가가는 행정을 하겠습니다.

 

2005년에는 우리 사회가 서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따뜻한 사회,

인간적인 사회로 몇 발자국 전진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함께 웃을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고, 만사형통 하십시오.

 

2005.1.3
김근태


참담한 일주일이었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국민의 보건과 복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지난 18일, 대구에서 네 살짜리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우리 모두의 가슴을 때렸기 때문입니다.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는 말과 굶어죽었다는 말이 함께 기사화 되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대명천지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사람이 굶어죽을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죄책감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정민이와 청훈이 경철이 세 어린이가 엄마가

신문배달을 나간 사이에 화재로 숨져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 사건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다시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국민들이 충격과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경제대국을 꿈꾸는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국민적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나중에 ‘희귀질환을 앓고 있어 음식을 먹기 어려웠고,

그 결과로 영양실조가 되었다’는 보도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안전망이 이렇게 허망하게 뚫렸다’는 객관적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특히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아이를 많이 낳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의 생명조차 지켜내지 못했다는 참담함이 가슴을 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충격과 상처를 입은 국민들께 무슨 말로 사죄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멀리서 거친 파도가 쉴새없이 우리를 덮쳐오는 느낌입니다.

 

우리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이제 익숙한 것들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날로 심화돼 가는 빈익빈부익부 사회 양극화 현상을 뒤로 제쳐두고도

과연 우리 사회가 계속 전진할 수 있을까?

 

근저에서 분열되어 있고 낯설어 하고 대립,갈등하는 구조를 갖고서도

우리 사회가 정말 안전하게 운영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러고도 시장경제가 훌륭하게 작동할 수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런 시장경제는 억압적인 시장이 아닐까?

이제는 정말 ‘사회통합’을 위해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건 아닐까?

빈곤층은 물론 중산층까지 혜택을 받고 참여하는 진정한 복지사회를 시급히 이뤄내야 하는 것 아닐까?

보건복지부에 부임한 이후 이런 고민을 계속해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회안전망을 튼튼하게 새로 짜고,

우리 사회의 물길을 ‘사회통합’이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밀고 나갈 수 있을지

그리고 사회통합을 통해 새로운 성장, 새로운 발전으로 힘차게 밀고나갈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왔습니다.

 

지난 한 주를 보내면서 자꾸만 쫒기는 느낌입니다.

제 마음이 점점 다급해지는 듯합니다.

 

결국 2005년 내년에 새로운 국민적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새로운 결단을 할 수 있는 새해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준수하게 생긴 그러나 외로워하는 장년 에이즈 환자

 

지난 화요일에는 에이즈 환자를 만났습니다.

12월 1일이 ‘세계 에이즈의 날’이었습니다.

 

축사도 하고 현황도 살펴봤지만 뭔가 찜찜했습니다.

에이즈 환자를 만나 직접 얘기를 듣고 위로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탁했습니다.

뒤에서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허락도 받았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긴장했습니다.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의사가 미리 말해줬는데도 불구하고 손에 땀이 나는 듯했습니다.

 

악수를 하면서 마음을 들킬 것 같아 약간 초조해지기도 했습니다.

에이즈 환자를 만나고 나오면서 목이 말랐습니다.

 

자꾸 ‘소록도’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가 다시 ‘제2의 소록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에이즈를 ‘천형’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에이즈는 과거에 문둥병이라고 부르며

사회에서 격리하고 배척하던 ‘한센씨병’과 비슷한 처지로 규정받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만난 에이즈 환자는 정말 준수하게 생긴 남성이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저 역시 은연중 일그러진 모습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알게 모르게 편견과 공포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나 TV에서 보던 말기 에이즈 환자를 떠올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만난 그분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회에 대한 증오심도 없었고, 자제력도 충분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오직 에이즈 환자들의 모임을 인정하고 지원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분들의 인권을 위해서도 그렇고,

이미 치명적인 질병에서 만성적인 병으로 전환되고 있는 ‘에이즈’로부터

우리 사회를 효과적으로 지켜내기 위해서도

에이즈 환자에 대해 선의를 갖고 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이미 결심을 했기 때문에 약속을 했습니다.

 

앞으로 지켜나갈 생각입니다.

 

해군 방문 이야기

 

좀 가벼운 얘기를 하겠습니다.

수요일에는 동해에 있는 해군부대를 방문했습니다.

 

부대를 둘러보는 동안 군악대가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연주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노래는 제가 지난 4.15 총선에서

국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면서 도처에서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부대에서 사전에 저의 18번에 대해 알아보고

‘사랑으로’를 골랐다고 합니다.

 

그런 부분까지 신경 써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제가 실수를 좀 했습니다.

 

첫 번째는 ‘국군장병 아저씨’였습니다.

군부대를 방문하면서 어릴 때 위문편지를 쓰던 기분이 들어서 그랬는지

자꾸 그 말이 입안을 뱅뱅 돌면서 튀어나오려고 해 혼났습니다.

 

아들까지 군대를 갔다 온 제 처지를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두 번째는 장병들과 함께 ‘화이팅’을 외치는 순간에 터져 나왔습니다.

‘대한민국 해군 화이팅!’을 하자고 했는데

실제로는 그만 ‘육군 파이팅!’이라고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육군 병장 출신이라서 그렇다고 하면서

‘와’ 웃으면서 상황을 넘겼습니다.

다소 쑥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정겨운 느낌도 많았습니다.

우리 기술로 만든 자랑스러운 ‘광개토대왕함’을 둘러봤습니다.

 

그런데 내 눈길을 끈 것은

옛날에 영화를 통해 봤던 좁고 가파른 계단이었습니다.

 

그때는 계단을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는데

막상 현장을 보니 이해가 됐습니다.

 

좁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군복을 보니 그리웠던 지난날이 떠올랐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해군복 같은 디자인의 옷을 ‘세라복’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진명여고 학생들이 입고 다니던 세라복이 그렇게 예뻐 보였는데

그 세라복이 바로 해군복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아주 정겹게 다가왔습니다.

 

간부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세계화시대를 맞아

해군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합의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륙에 연결된 섬’의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휴전선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해군은 우리의 물동량을 지키고

세계와 우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해군 장병들에게 구호에 그치는 ‘세계속의 해군’이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대양 해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해군부대를 방문하는 동안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육해공군의 경계를 넘어서 동아시아에서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할 것인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군사전략을 어떻게 짜야 하며

결국은 그것을 담보할 정치 전략은 무엇이고 그것을 실현시킬 프로그램은 무엇인지

등등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해군 부대 방문은 그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2004.12.27

김근태

 

 

 

일요일, 편지쓰기를 시작하며―.

일요일 오후입니다.
며칠 전, 함께 일하는 후배로부터 

 ‘일요일에 쓰는 편지’에 대한 원고청탁을 받았습니다.

 

“일요일 오후에 그저 부담 없이 짧게 쓰시면 됩니다”

 

그 후배는 정말 부담 없이 부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만 주눅이 들어버렸습니다.


‘정말, 쓸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번씩??’


하지만 후배의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어

덜컥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돌아섰지만

그 순간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편지를 쓰겠다는 약속을

온전히 지킬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편하게 쓰겠습니다.
잘 정리된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냥 제가 일주일을 보내면서 품었던 ‘생각의 조각’을

여러분과 함께 나눈다는 마음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일주일을 보내고 제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추억이건 감상이건 눈물이건 분노건….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여러분과 나누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그리워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작은 ‘말’ 하나도 틀림없이 책임져야하는 장관으로서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구실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늘 아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많은 분들께

더없이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빚 갚는 심정’도 작용했습니다.

 

읽어주시고 제가 전하는 ‘생각조각’을

여러분이 ‘큰 생각’으로 키워 주셨으면 합니다.


울고 싶은 일이 많은 지난 한 주였습니다.

먼저, 어이없는 화재로 세상을 떠난

세 남매 때문에 울었습니다.

 

경찰인 아빠는 철야근무를 나갔고,

엄마는 신문배달을 하던 그 새벽에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엄마, 아빠가 너무나 열심히 일하던 분들이라

슬픔이 더 큽니다.

 

특히 “나를 용서하지 말라”고 절규하던

그 어머니 때문에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정민이와 청훈이 경철이….

세 친구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역할을 해야겠다고 두 주먹 꼭 쥐고 다짐합니다.

 

제가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여러분께서 절대 이 김근태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한 번 더 울었습니다.
노숙자들에게 밥 퍼주는 행사를 하면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특히

‘신이 우리에게 두 팔을 주신 것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보듬어 안기 위해서이다.

마음과 마음이 합쳐지면 기적을 이룬다’

는 영상물이 나를 목메게 했습니다.

사실, 밥퍼 행사 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12년 동안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봉사자들의 몸가짐과

마음 쓰는 모습이 성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다일공동체 봉사자들도 피하고 싶어 하던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친절한 공무원의 소임을 다한다는 이문행 경장님,

천사병원의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님들….

그곳은 정말 너무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이었습니다.

“밥을 많이 퍼야 합니다”라는 말이 가슴을 찡하게 했습니다.
세상은 웰빙이니 비만이니 하는 말과 함께 밥을 조금 먹으려는 추세인데

그곳에서는 밥을 많이 퍼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밥을 많이 퍼서 식판에 높이 쌓아 배식 했더니

또 너무 많이 펐다고 혼이 났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느낌이 많았습니다.

사실, 좋은 일을 계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몇 번하고 마는 밥퍼가 아니라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계속하는 밥퍼’라는 점이 특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사랑과 평화가 있는 이곳에 다시 오겠습니다-김근태”

이렇게 사인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언제 우리 모두 함께 앞치마를 두르고 그곳에서 밥을 펐으면 좋겠습니다.

정치 얘기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뜬금없는 간첩논쟁에 대해서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잘 대응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만

그래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용서하면 안 됩니다.

 

더 이상 이 땅에 냉전과 색깔논쟁의 망령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이런 야만이 준동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됩니다.

지난 봄 촛불로 대통령과 민주주의를 구했듯이

언제나 나라와 민주주의를 구하는 것은 국민이었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모든 일이 잘 되리라 확신합니다.

지난 주에는 의사당에서 단식하던 권영길 의원님을 위로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 나왔지만 가슴은 더없이 짠했습니다.

이런 이심전심이

여러분과 저를 연결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요일에 보내는 편지’가

여러분과 제가 더 깊이 이심전심을 나누는

‘따뜻한 악수’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덜 춥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겨울입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주에 또 뵙겠습니다.


 

2004.12.15

김근태

개혁적 현실주의자

 

성폭력 상담소에서 간부로 일하는 여의사 한 분이,

1995년 내가 민주당에 입당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그냥 재야에 남아서 사회 속의 등불이 되어 주셨으면 했는데.”

 

한두 번 들은 이야기도 아니지만,

매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습이 철렁철렁했습니다.

 

애정이 실려 있어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도 결국 출세를 위해서 발버둥치는 그런 존재에 지나지 않는군”

하는 실망감이 역력한데에다 이제부터는 관심을 거두겠다는 선언 같아서 당황하곤 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결국 나도 권력 의지에의 충동으로 코뚜레 낀 소가 되어 끌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되물음으로부터 완전히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솔직한 나의 내면 풍경입니다.

 

물론 처음 정계에 들어섰을 때 내 나름대로 명분과 뜻이 분명했고

또 단순한 권력욕의 유혹 따위에 지지 않을 의지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지만 말입니다.

지금도 나는 그 분의 애정어린 비판을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벤 킹슬러가 주연한 영화 “간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간디도 간디지만, 네루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간디의 뒤에는,

인도의 국민에게는 네루가 있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영혼 간디가 인도 독립을 위해 비폭력 저항 운동을 벌이며

전국을 순회하고 죽음을 각오한 단식 투쟁을 벌일 때,

위대한 현실주의자 네루는 간디의 그 숭고한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정치를 했던 것입니다.

 

간디에게는 간디의 길이,

네루에게는 네루의 길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해방 전후 상황과 비슷했던,

그러나 대처 방식은 크게 달랐던 프랑스의 역사가 생각납니다.

 

그들도 연합군의 도움으로 나치 점령에서 벗어났지만,

종전에 즈음하여, 드골 장군은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하기 전에

모든 레지스탕스가 궐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프랑스인 스스로

프랑스를 해방시켰다는 역사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덕분에 프랑스는 그러한 정당성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나치의 잔재를 청산할 수 있었고,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었습니다.

 

1995년, 민주당에 입당하던 그때,

나는 우리나라가 민주화로 인해 새로운 공간이 많이 늘어났다고 보았으며,

그 곳에서 “네루의 길”이,

도덕적 자부심에 기초한 “드골의 지혜”가 좀더 필요하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이제 올바른 역사 인식 위에서

지혜와 결단의 정치 능력을 보일 때입니다.

 

그래서 김근태의 정치, 김근태의 비전이

지금까지의 정치의 구태와 어떻게 다른지 보아 달라고 주문해 봅니다.

 

새로운 내일을 여는 새로운 사고와 방법으로 정치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우리 모두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실천할 용기와 신념으로 내가 서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1998년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 에서 발췌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나는 1985년 지옥의 남영동을 나선 다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구치감으로 향하는 자동차 속에서 따스한 오후의 햇빛을 온몸에 받았다.

아, 이 햇빛 속으로, 이 낮익은 거리로 나는 돌아온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회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날 헤아려 보니 스물대여섯 번 체포당했고,

십수년 동안 수배받아 피신해야 했으며,

5년 6개월 동안 형을 살았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맛보아야 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를 절감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때 그 길을 돌이켜 보면

적어도 이 두 가지는 얻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는 것이고,

또 조금이나마 역사의 방향을 긍정적인 쪽으로 돌렸다는 것입니다.


1985년에 고문 사실을 폭로하였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재야와 야당이 연대하여 고문 등 용공 조작 대책위를 만들고,

그것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대책위로,

다시 박종철 치사 사건의 대책위로 이어져서,

궁극적으로 뒤에 1987년의 6.10민주대항쟁을 이끈 “국민운동본부”결성에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으로 나는 족합니다.

나는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에 와서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폄하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서로 어깨를 결고

심장을 나누어 가지며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나라 안팎에서 과분한 평가를 받았고,

덕분에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오랜 친구 조영래, 후배 김병곤, 이범영,

지금 몹시 아픈 이을호를 비롯해서 이름 없이 역사의 책무에 충실했던,

소리없이 그들을 도왔던 이들에게 항상 미안한 심정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의 보상은 그 분들의 것입니다.


출처 : 1998년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 에서 발췌

 

상록수

 

 

대학에 들어가서야 비로서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학과 공부도 열심히 하는 한편,

경제복지회라는 서클에도 가입해서 진지하게 연구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독재 통치는 갈수록 도를 더해 갔습니다.

1967년에 나는 서울 상대 대의원회 회장이 되어,

결국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끌려가서 매맞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지를,

그 일로 강제 징집을 당했고,

1970년에 제대하여 학교에 복학하였습니다.

 

 

조용히 공부하여 교수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사회 상황은 철권 통치의 막다른 길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1971년 11월 13일 전태일이 죽었고,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목적으로

초헌법적 비상 조치인 유신헌법을 발표하였습니다.

 

나는 모른체할 수가 없었고,

그 현장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971년부터 어쩔 수 없이 피신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 뒤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앙정보부가 발표하는 많은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1980년 “서울의 봄”에 이르러서야 잠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여러 선생님의 도움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학장이시던 변형윤 선생님, 나중에 총리가 되신 교무과장 이현재 선생님,

그리고 학생과장 강명규 선생님 같은 분들이

곤경을 무릅쓰고 피신중이던 나를 졸업시켜 주셨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의 대학 졸업은 친구와 스승의 합작품인 셈입니다.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교수가 되리라는 꿈은 버리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출처: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에서 발췌


풋내기 자유인

 

고교시절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거세게 일었습니다.

경기고 전체가 들고 일어나서 가두 시위에 나서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나는 5·16 쿠테타로 인해 정년 단축이 되어

아버지가 퇴직하시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긴 했어도

박정희 권력을 지지하는 쪽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돈을 빌어라도 오겠다는 윤보선보다는

“자립 경제”를 외치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에 얼마쯤 동조했던 것입니다.

 

경기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면서

가정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2학년 때부터 입주 과외를 했고

학원사에서 6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의대나 법대를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적록 색약”이어서 의대는 포기했고

법대는 일거에 출세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나 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버트란드 러셀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경제가 참으로 중요하며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류의 구원이 없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 책은

한창 경제 발전을 부르짖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뭔가 내게 호소해 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결국, 서울대학교 상대 경제학과를 간 것은

경제학 교수가 되어 국민을 계몽하고 싶다는 순진한 생각에서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 때 나는, 참, 풋내기 자유인이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교정을 올라오면서 노랗고 빨갛고 한 꽃들이 새삼스럽게 아름답게 느꼈습니다.

잠시나마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교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애잔한 감정이 스며들기도하고, 또 짙은 상념에 잠기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나라와 사랑을 낭만적으로 꿈꾸던 시절이었습니다.

폭풍처럼 번졌던 데모 후의 휴교령으로 굳게 닫힌 교정을 바라보면서도

여유와 낭만을 잃지 않았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경제학 교수를 희망하던 한 평범한 학생이

민주화 운동의 대열에 서서 서른 해를 살았고,

어느 순간 정치인이 되어 또 몇 해를 보냈습니다.

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지만,

그래도 제가 진실과 일관성을 믿으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고 나서부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래는 좀더 나을 것이라는,

내가 미력한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한번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아마도 저를 이 자리에 서게 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

 

                                 2000년 5월 7일, 서울대 경제학과 강연중에서

 

출처: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에서 발췌

나를 키워준 그 강과 들

 

남한강

 

굳이 고향을 말하자면,

경기도가 온통 고향이라고,

특히 소년 시절을 보듬어 준 남한강 상류가

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교장 선생이시던 아버지의 잦은 전근 덕분에,

평택 청북초등학교와 진위초등학교를 다녔고,

양평군에서 원덕초등학교를 다니다

양수초등학교에서 졸업을 했습니다.

 

아마도 내가 겪은 첫 시련은

자주 전학을 다니면서

늘 새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강박감이었지 싶습니다.

 

그래도 고향은 어린 소년에게

더없이 넉넉하고 너그러웠습니다.

 

남한강에서 동무들과 멱을 감고,

밤 하늘의 별을 보았습니다.

 

들판에서 세찬 바람을 향해 달렸고,

풀이 자라나는 소리를 들으며 켰습니다.

 

지금도 양평 너른 평야나 남한강가를 가게 되면

차를 세우고 한참을 서서

나를 키워 준 그 들과 풀과 강과 하늘을 바라봅니다.

 

새침하던 여학생 “연봉”이는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하는 그리움과 함께.

 

그러다 정말로 첫 시련을 만났습니다.

경기중학교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 때 심정으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그 뒤 광신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 3년 동안이 내 평생에서 가장 열심히

모질게 공부하던 때였을 것입니다.

 

불 좀 끄고 잠을 자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부대끼면서도

밤 늦게까지 공부하곤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 겪은 좌절과 실패, 열등감이

결국은 나에게 불확실한 미래와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완행 열차를 타고

또 한참을 걸어 통학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출처: 김근태 의원 후원회 소식지 [푸른내일]호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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