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마지막 고문 - 열 번째 고문

9월 20일 저녁 8시경에서 10시 반경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김수현, 김영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과 또 한사람이 고문에 가담했습니다.

 

직접 전기고문도구를 든 것은 김수현이었습니다.

그동안 강제해온 것들, 특히 문용식의 N.D.R.과 C.D.R., P.D.R.에 대해서 고문으로 확인해 나갔습니다.

이을호의 C.D.R., N.D.R., P.D.R. 역시 마찬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확인하고요.

 

박문식과 관계가 있었음을 자백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고문대 위에서 수없이 인정하고 암기하였음에도 또다시 반복됐습니다.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아마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고, 이것을 검찰이나 법정에서 부인할 경우의 심각한 두려움,

즉 강제당할 때의 그 고문을 기억시켜 당혹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고도의 심리적, 정신분석적 접근에 기초한 고문행위였다고 믿어집니다.

사실 지금도 고문 당시의 상세한 상황, 김수현이나 백남은의 말과 거동을 거스르는 경우에는 상당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필경 나중에 또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에 어떤 부분은 그냥 넘어간 부분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전과는 달리 20일에야 비로소 이른바 반국가단체결성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해왔습니다.

아니, 고문대 위에 있는 본인에게 지시, 명령을 해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요구선에서 한 단계 더 비약해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완성된 것을 갖고 한번 더 왕창 고문하여 그것을 암기시키고,

손도장 찍게 하는 것이 능률적이고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는 것은 고문자들 나름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각 부분에 그럴 듯한 근거를 마련하고 관련된 사람들의 범위를 그어 나가며,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적 필요성, 활동성에 대응하는 신축성 여지를 유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체결성 인정명령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점은 김수현 당신이 스스로 얘기했다.

 

이른바 1월말의 최민화, 박우섭, 김희택, 천영초, 본인이 있었다고 만들어진 - 본인이 여러가지 필요성에서 만든 것인데 -

민청련 사무실의 모임을 얘기하면서

"이것은 당신이 배척받은 것이 분명한데 왜 자꾸 본인이 N.D.R.을 얘기했느냐고 했지 않은가.

그래놓고 이제와서 그것을 민청련의 공식지도이념으로 결정했었다고 자백하라니 아무래도 이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당신 스스로 얘기했던 것을 정면으로 뒤엎는 것이 아닌가" 라며 항변했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애당초 합리화, 논리화라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요.

고문대 위에서 버티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어서 결국에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 단체결성명령의 항복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본인을 처형하겠다는 노골적인 정치군부의 선언입니다.

공포와 고통을 못 견뎌 울부짖는 거야 고문대 위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정말 슬퍼서 운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아, 내가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이구나.

그동안 고문대 위에서의 죽음은 죽은 것이 아니었구나.

내 나이 마흔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구나.'

고문대에서 내려와 자리에 앉으니 그냥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멍하니 내버려 두었습니다.

 

바깥사회와 완전히 차단되었던 나는 정치적 사정이,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본인의 생명말살을 절대로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각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고 단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끔찍한 고문, 말도 안되는 각본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그래, 죽을 수도 있다. 40년을 살아왔다.

유관순도, 윤동주도, 그리고 김주열도, 80년 광주의 숱한 선랑한 시민들도 그렇게 살해당하지 않았는가.

추하게 정치군부, 너희들에게 굽신거리지는 않겠다.

절대로 휘청거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니 본인도 '이것은 지나친 생각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사실 그때 정치군부의 방향은 이쪽으로 몰고 나가려는 유혹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탄압, 가혹한 탄압에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려 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1월말 민청련 사무실에서 열린 회의내용이 바뀌어지게 됩니다.

김희택씨가 얘기했다고 한 부분에서 처음에는 "일단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하라"는 것으로 본인이 기술하였는데,

여기를 "일단 민청련의 지도이념으로 하되 총선이 끝날 때까지 덮어두는 것으로 하자"고 바꿀 것에 본인은 항복했으며,

3월말 이른바 '작은 자리'의 교육내용 중에서 처음에는 본인이 N.D.R.을 단순히 설명한 것으로만 돼 있었는데,

이것이 민청련 지도이념으로서 확정되는 것으로 수정하도록 강요했고, 속절없이 그렇게 했으며,

8월 10일 5차 총회에서 그 N.D.R.에 기초한 선언문을 작성하여 채택했다고 자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들의 요구대로 되었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른바 1월말 민청련 사무실에서 열린 회의에 대해 약간 덧붙이면 이렇습니다.

이을호씨의 자백에는 2월 중순경 민청련 사무실에 15,6명 정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여기서 본인이 N.D.R.을 설명했다고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수정하고자 했습니다.

평회원의 참석도 문제고 너무 여러사람과 관계되어 다치는 범위가 넓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월말 민청련 사무실에서 했다는 5명의 회의를 즉석에서 만들어 냈습니다.

또한 신뢰를 얻기 위해서 본인이 N.D.R.에 대한 설명을 마친 다음, 여덟 사람의 발언까지 제법 그럴 듯하게 기술했습니다.

고문자 특히 김수현은 이를 좋아하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을호씨에게 강제하여 얻어 냈던 2월 민청련사무실에서 N.D.R. 설명이라는 것은 전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월 민청련 사무실, 2월 민청련 사무실, 3월 작은 자리, 그리고 또 고문자들이 요구하여 기독교회관 내 기독학생총연맹사무실과

카톨릭 정의평화위원회 사무실까지 총 다섯 번의 설명 내지 발표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남영동에서는 작성되었습니다.

검찰에서 2월과 기독교회관, 카톨릭 정의평화위원회 사무실에서의 자리가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본인이 1월 말을 만들어 낸 것은 위에서 얘기한 것, 그리고 공판에서 얘기한 이유 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최민화, 김회택, 박우섭, 천영초 씨는 이런 조작된 사실을 충분히 반증해 낼 수 있을 것이며,

본인이 당했던 고문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해줄 것이다'는

내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수현은 처음에는 별 주의를 하지 않다가 왜 N.D.R.이라는 주장을 1월말 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와 이유를 말하라고 윽박질러 댔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하라고요.

 

며칠을 쩔쩔매다가 "공판정에서 진술한 바 있는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 공천추천 의향과 그에 대한 고사에 대하여,

그리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눈치 채인 것에 대해 해명할 필요에서 그렇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적 처세의 교만함 때문이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민주화운동 대열에서 그렇게 자신없는 태도로 활동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출세주의자로 비치지 않을까 조바심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국회의원으로 발돋움하는 것으로 민청련 의장 자리를 이용할 의사가 없었고, 또 그렇게 비칠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김영삼 총재와 만난 것, 고사한 것에 대해 신의를 갖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또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를 해명할 필요는 물론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느 의미에서는 민청련 활동에 대한 인정으로, 대중적 인식이 넓어져 가는 것으로

본인을 비롯한 민청련 회원이 자부심조차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N.D.R.발상의 배경과 계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남영동은 20일에 N.D.R.을 민청련 지도이념으로, 반국가단체 결성으로 완결지었던 것입니다.

 

20일 이후는 이에 대한 서류정리, 진술서, 진술조서 작성 때문에 고문 받은 20일은 물론 거의 25일까지 내내 한잠도 못 잤습니다.

26일 새벽 3시 20분 용산경찰서 유치장에 이르러 눈을 붙일 때까지.

25일 새벽 5시 30분, 본인이 자그만 반란을 일으켜 김수현으로부터 10여 차례 한 20분간 집중폭행을 당했습니다.

참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끔찍스런 고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되었습니다.

 

팔꿈치로 가슴을 가격 당했는데, 다른 경우 같았으면 크게 항의했을 그런 일이지만,

백 번을 그렇게 해도 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문용식과의 관계, N.D.R.에 대해 다시 내가 부정하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나는 문용식씨가 무서웠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그 심정은 이해되지만

마치 물귀신처럼 아무나 무엇이거나 잡고 같이 익사하자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본인 말고는 반증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본인은 필사적이었습니다.

김수현은 "이 새끼, 벌써부터 법정투쟁을 준비하는 거야? 이런 새끼는 가만 둘 수 없어" 하면서

당시 본인이 입고 있던 겨울 모직점퍼를 벗긴 다음에 에어컨에 기대어 세운 채 가슴을 가격했습니다.

 

결국에는 이들에게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나는 자포자기하여 혼란에 빠져들지는 않았습니다.

가능한 경우 나는 다시 저항했던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자존심의 불씨, 굴욕을 거부하는 불꽃이 완전히 꺼져 버렸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한국경제 미래가 백척간두에 섰습니다.

'G20' 이라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호의 저 객실 한 구석에선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미FTA 밀실협상이 진행 중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서울행 목적이 G20 정상회의가 아니라 한미 FTA타결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게 부담을 주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정부는 밀실협상으로 이에 화답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협상에서 지난번 쇠고기협상에서처럼 덜컥 무리수를 놓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하필 한미 쇠고기 협상의 주역이었던 민동석씨가 이 시점에 외교부 차관으로 컴백했다는 사실이 단지 우연일까요?

 

민동석 그가 누구입니까?

자신의 영달과 윗사람 눈치 보기 때문에 우리국민의 건강권과 우리나라의 검역주권을 포기했던 사람입니다.

그러고서도 “미국이 준 선물”이라고 뻔뻔스럽게 적반하장으로 나왔던 사람 아닙니까?


민주당 지도부와 당원동지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길은 외통수입니다.

이대로 두면 이명박 정부는 한미FTA를 쇠고기 협상처럼 처리하려고 할 것입니다.

전면적 재협상을 당론으로 채택해야합니다.

투자자-국가 제소 조항, 네거티브 리스트 조항, 이른바 역진방지조항, 서비스․의약품 조항 등

각종 독소불평등 조항에 대해 전면적 재협상을 요구해야 합니다.

전면적 재협상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에게 G20의장국답게 당당하게 미국과 협상하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만일 합의가 안 되면 이런 내용으로는 중단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에게 전면적 재협상을 하라고 하는 것은 마치 고양이 앞에 생선을 바치는 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미FTA를 지금대로 하라고 한대서 민동석 차관을 새롭게 등용한 이명박 정부가 이른바

“미국이 준 선물”과는 다르게 협상할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저들에게 맡기고 뒷북칠 일이 아닙니다.

민주당이 앞장서서 행동해야 합니다.

결연한 마음으로 국민과 함께 일어나서 반대하지 않으면 미국의 교만한 요구 앞에 속수무책이 될 것입니다.

물론 지난 참여정부시절 집권당으로서 추진했던 한미FTA를 이제와서 부정하는 것에 부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치인의 자기부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지난 과오를 알고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은 물론 국민과 역사 앞에 더 부끄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지난 97년 IMF 체제를 돌이켜 봅시다.
OECD 가입을 허락하는 대신 자본자유화, 외환자유화, 이른바 환율시장화라는 미국과 IMF의 강요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경제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이 우리가 이뤄놓은 성과, 특히 경쟁력 있는 제조업과 “금모으기운동”에 나섰던 국민의 단합정신이 있었기에

파국의 길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경제와 서민생활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IMF 위기를 통해서 우리 경제는 급속히 미국화 되었고, 미국의 금융자본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경제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으로의 제도화가 개혁의 이름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던 한국경제의 다이나믹스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성장의 함정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부유층과 서민의 양극화를 격화시켰습니다.

한국사회를 결정적으로 분열시켜 버렸습니다. 일자리를 없앴고, 있는 일자리의 절반은 비정규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불안과 공포의 사회, 패자부활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은 우리의 길이 아님이 분명해 졌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미 FTA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시기에 지지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집권시절 국내외 신자유의주의 세력의 압력과 영향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휘둘렸습니다.

미국식 양극화라는 덫에 걸려 정권을 교체당하고 말았습니다.

양극화 앞에서 좌절하고 분노한 서민과 중산층의 “민주화가 밥 먹여 주냐”라는 비난 앞에서 우리는 초라해졌던 것 아닙니까.

진정한 반성은 진정한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말로만 반성한들 그 어떤 국민이 믿겠습니까.

우리 민주당이 민주· 개혁·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는 세력이라면 반드시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와 한미FTA, 그것은 우리가 갈 길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고백해야 합니다.


이제 ‘진실의 순간’이 우리 앞에 왔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시간도 없습니다.

국민과 역사의 요구에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2010년 11월 2일
민주당 상임고문 김근태

9월 13일 밤 10시, 김수현, 백남은, 고문기술자 김영두 등이 왈칵 몰려 들어왔습니다.

차가운 분노를 내뱉으면서 김수현은 본인을 고문대에 올려 묶으라고 지시했습니다.

 

11, 12, 13일 오후까지는 순풍의 돛단배처럼 평화를 향하여 순조롭게 나아갔습니다.

협박과 공갈은 끊임없이 들었지만 몸서리쳐지는 고문이 사라져 가고 잇는 나날들이었습니다.

 

13일 저녁 식사가 15호실 방문턱을 넘어 본인 앞의 책상 위에 놓여졌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두번인가 먹었습니다.

그 때 복도에 있는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자 정현규가 받고 오더니 '미안 하지만 안 되겠다'면서 밥그릇을 들고 나가버렸습니다.

이 암담함이라니, 이것은 고문을 가하겠다는 선전 포고입니다.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여 혼란에 빠졌습니다.

오그라든 채로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이 5시 반경이었으리라고 가늠되는데, 밤 9시가 넘도록 고문할 기척은 없었습니다.

'아, 이것은 저들의 심리전술인 모양이다. 그들의 말대로 내가 해이하게 되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일 뿐이구나.'

그런데 10시에 고문은 또 다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김수현은 본인을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는 말했습니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13일이다. 무슨 날인지 알겠느냐?"
"악마의 날이다."
"서양에서는 오늘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한다. 너에게도 최후의 만찬 날이다. 각오하라."

고문 기술자는 8일 이후 본인의 사건에 이렇게 깊이 개입해 오지는 않았었는데 13일, 이 날은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새벽 2시 반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계속하여 가했습니다.

마음은 물론 몸도 도무지 견뎌낼 수가 없게 됐습니다.

고문기술자는 기승을 부리며 고문을 하고, 김수현은 퍼렇게 핏대를 세우며 끊임없이 모욕했습니다.

고문기술자가 피로하여 주춤하니 김수현이 직접 나서서 장치를 들고 전기고문을 꽤 오랫동안 했습니다.

이렇게 김수현이 전기고문을 하는 동안 고문을 하는 고문대 옆 욕조에서, 고문대 위에서, 샤워를 하고 몸을 닦는 기척이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키득거리고, 왜 그런지 이것이 그렇게 마음에 슬픔과 상처를 안겨주더군요.

나는 아주 초라한 존재로서 미물처럼 짓밟히고 있는데, 그자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백남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머리가 컴퓨터일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중지에 못 당한다. 여러 사람이 의논해서 대처하는 데는 못 이겨.

당신이 왜 이렇게 고초를 당하고 미움을 받는 지 알아? 묻는 말에만 대답하기 때문이야. 그것도 아주 부분적으로....

그러니 고문당할 수 밖에 없어."

그러자 김수현은 "당신은 무슨 당신이야? 개새끼지, 나쁜 개새끼야!? 하고 잔인한 고문을 쉴 새 없이 가했습니다.

본인의 기력이 워낙 탈진해서인지 한번에 오래 고문을 가하지 않고 자주 쉬면서 했습니다.

워낙 꽁꽁 묶어서 고문을 안하고 고문대에 눕혀만 두어도 그 자체가 고통이었으며, 팔, 다리가 금방 저리고 시큰거렸습니다.

본인이 "손, 발에 피가 통하지 않아 저려서 못 견디겠다. 풀어 달라" 는 뜻의 말을 하자,

고문기술자는 "그래, 걱정 말아!" 하면서 전기고문을 왕창 세게 하기도 했습니다.

남영동 고문에서 본인은 한 번도 의식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3일, 이 날은 이미 기력이 다해선지 전기고문, 물고문을 가해도 발버둥질을 치지 못했습니다.

그때마다 고문은 중지되고 찬물을 머리에 붓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쳐댔습니다.

점차 아슴프레 해지는 의식 속에서 '아, 이제 내가 정신을 잃겠구나' 하는 순간이 되면 고문은 중지되었습니다.

고문기술자들은 아는 일이었습니다.

13일 고문 이후, 남영동에서는 물론 구치소에서 생활해 나가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몸이 참으로 나빠졌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밥을 먹고 소화해 낼 수 없었으며, 보행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두통이 걷잡을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다다른 것은 물론이구요.

어떤 한계점, 분수령이었습니다.

일단 13일 고문은 14일 새벽 2시 반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김수현은 남아서 박명선과 또 한사람을 데리고 14일 새벽 3시경 부터 3시반경까지 또 고문을 해댔습니다.

이 새벽녘 고문에서 김수현은 또 다시 문용식의 N.D.R.과 학생운동의 배후로서 민추위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자백을 요구했습니다.

사실 고문을 받지 않을 때는 이 부분에 대해서 완강하게 저항을 하고 고문대 위에서 인정했던 것을 엎어버리곤 했습니다.

점차로 슬그머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민추위라는 단체에 대해서는 9월 8일 문용식의 N.D.R.강제 인정 요구시,

민추협은 알지만 민추위는 모르는 것으로 이미 고문자들도 인정해 주고 넘어갔던 것인데 새삼스럽게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이 의도가 무엇인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학생운동의 배후로서 구체적인 관계 설정을 얻어내도록 상부로부터 지시받았을 것입니다.

김수현도 약간은 면구스러웠던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한테는 하나도 손해가 아니고, 그냥 그런 단체가 있었다는 것을 듣고 알고 있었다"는 것 뿐이라고.

이것은 본인이 문용식에게 N.D.R.을 설명했다는 강제자백을 요구한 그날 그 자리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며,

학생운동의 명백한 배후로 더욱 확대시키고 키워 가려는 의도임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고문대 위에서는 언제나 항복과 인정, 그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9월 13일에 가장 중요하게 강제해 온 주제는 민청련의 재정이었습니다.

남은 시간에 다시 배후의 문제가 등장하였고, 마무리 즈음에서는 9월 4일 이래의 총복습이 이루어졌고요.

밤 10시에 김수현과 백남은은 재정 문제에 대해 크게 화를 내면서 소리쳤습니다.

"우리 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제 김근태에 관해서는 모두 다 밝혀졌고 얘기도 잘 하고 있다. 재정문제도 그렇다고 보고했고,

회의석상에서도 그렇게 말했는데 이제 도대체 무슨 꼴이냐. 상부로부터 호통을 당하고 개망신을 당했다. 각오하라"는 공갈이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미국 워싱턴 소재 동포 신문사 기자인 심기섭씨로부터 송금되어 온 45만원,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를 통해서 민청련에 전달되었습니다.

얘기 못할 것은 하나도 없지만 이미 확정된 결론을 갖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짜 맞춰 나가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얘기한다는 것은

피해의 확산을 광범위하게 만들 뿐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 돈에 대해서 다른 정보수사기관인 안전기획부에서 치안본부와 남영동에 물어왔다는 것입니다.

본인에 대한 조사에서 이 점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을 본 안기부쪽은 남영동조사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고,

그것이 치안본부쪽과 남영동을 당황시켰을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에 대한 격노와 재차의 고문을 가하도록 남영동 상부가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나는 고문 앞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권호경 목사를 통해서 돈을 받았다고 인정했습니다.

선의와 민주화에 대한 염원에서 민청련을 지휘하고 그 전달통로가 되신 분들을 지켜낼 수가 없었습니다.

고문 앞에 무언의 약속을 저버린 배신자가 되어 갔습니다.

이 점 때문에 권호경 목사는 본인의 배후로서 위치가 좀 더 탄탄해졌습니다.

재정문제에 관해서 위에 말한 것 이외에도 대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이 고문자들은 자기들 상부에 보고해야 할 처지였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미 고문자들이나 본인에게 무엇이 사실인가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몰리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서 있는 현재의 처지가 본인과 이 고문자들은 극도로 대립적임에도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몰리고 있는 이 고문자들, 그 상부에 본인이 무엇인가를 주어아하는 시혜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고문대 위에서는 이것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한편 자포자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치명적인 부담이 몇 사람에게만 몰리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이들이 상부 또는 타 기관에 보고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각본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몰론 고문자들이 묻고 수정하고 하는 협력 속에서 각본은 점차 완성된 모습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회원들의 월회비 160만~180만원과 지도위원 40여명의 월 2만원 이상씩 60~80만원이 민청련 재정의 골격이며,

이는 이미 얘기한 것이라 이외의 것이 필요했습니다.

종교계, 재야, 언론계, 법조계 인사등 모두를 포함시켰습니다.

범위를 아주 넓혀 버리면서도 돈의 액수는 되도록 작게 했습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몇 분에게는 부담을 지웠습니다.

고문자들은 좋아하면서 "여기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어. 진작 얘기했으면 고문도 받지 않았을텐데..."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인간에 대한 고문을 주저하지 않고 사용하면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필요한 무엇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슨 중대한 것을 발굴해 낸 것처럼,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화색이 도는 낯빛을 했습니다.

며칠 후 고문자들은 네 개 은행의 구좌를 갖고 와서 또다시 재정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 때는 고문을 당하지 않았으며 심한 추궁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네개의 통장들은 민성돈이라는 가명으로 똑같이 만든 것입니다.

회비를 내는 직장 생활인들에게 부담과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개의 통장을 만들었고 가명을 사용했던 것이었습니다.

13일, 이날은 김수현의 말대로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그 고문의 강도는 8일의 경우보다 못하지 않았나 싶지만, 이 13일 이후 본인은 결정적으로 균형상태를 잃어버렸습니다.

 

이튿날인 14일부터 남영동을 떠나는 26일 점심때까지 본인은 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국물과 두어 숟가락 정도의 밥을 그것도 오래오래 씹어서 겨우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요기는 주고 햄버거빵을 우유에 녹여서 채웠고, 즉석라면에 물을 부어서 그 국물과 약간의 라면발로 허기를 메웠습니다.

 

김수현은 이러한 본인을 보고 "단식투쟁을 하는 것이냐"고 묻더군요.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의사가 약간이라도 통할 수 있는 사람들로 내가 자신들을 생각하리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목은 붓고 쉬어서 말을 제대로 못하고, 머리는 깨어져 나갈 것 같고, 온 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기 직전 같았습니다.

말하면 쓰고, 베끼고, 손도장 찍고, 또 찍고 하면서 26일까지 갔습니다.

14일부터 19일까지는 평균 4시간 정도 재워 주었습니다.

그 이후는 거의 잠을 못잤습니다.

4일부터 9일까지처럼 앉아서 약간씩 졸았던 것이 전부였습니다.

 

식사를 주지 않아 고문이 박두했음을 경고하는 심리적 고문, 조건반사에 기초한 압박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밥의 제공은 고문이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여부의 알림역할이었습니다.

당시 밥은 요기수단이 아니었으니까요.

 

평균 이틀에 한번 정도씩, 이른바 고문자들이 말하는 본인의 해이함을 방지하기 위해 이처럼 심리적 고문을 해왔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인 5시반부터 대략 10시까지 초죽음이 된 상태로 지내게 되고,

밤 10시가 지나면 이 고문자들은 본인을 위로하면서 라면을 끓여주었습니다.

고문 없이 하루가 지난 것을 고마워하면서, 주는 라면에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본인은 남영동에서 살았습니다.

미묘한 감정의 혼란상태로 들어가게 됐던 것입니다.

당시 김수현은 정말 표독하게 굴었습니다.

고문도 잔인하게 할 뿐 아니라 직접 자신이 도구를 들고 고문을 했고, 끊임없는 모욕과 학대를 가했습니다.

가톨릭신자이며 최기식 신부를 조사했다는 이 사람은 초기에는 소극적이었으며 무척 난감해 했습니다.

그러다가 8일 이후, 특히 13일 이후부터 본인을 악마같이 학대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러한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안보와 관련된 사건을 주로 맡아오고 있어서 고문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 사건들에서는 고문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필수적이다.

고문을 가한 것 때문에 자신에게 상처로 남은 것은 없다.

오히려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해 찜찜한 것으로 남은 사건들이 자꾸 떠오른다.

고문을 가하는 것은 상대에게 일찌감치 체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자백의 결단을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나름대로 합리적이고자 하며 절제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무슨 악마의 화신이나 그 아들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잠깐씩 하는 생활 얘기속에서, 그 모습에서 검소하고자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탐욕과 그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국가변란과 폭력적 행위를 한 것은 정치군부지만 생활을 위해서 자신들은 결국 그 힘에 굴복한 것이다.

그러나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다.

광주사태를 민중항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잘 모르겠다.

그것이 아닌 근거도, 또 그렇다고 할 논리도 제대로 갖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절벽은 아니고, 어느 면에서 치안본부 대공과장 신 모씨의 말처럼 약간 대화의 논쟁 비슷한 것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9월 4일부터 8일까지 백남은이 지독하게 고문을 가하도록 지시를 내렸는데 그 역할이 김수현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구성요건 해당성을 충분히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짐에 따라 상부의 요구와 질책이 심하게 가해져 왔을 것이고,

그에 따라 김수현은 자신의 역할을 악독하게 전환시켜 나갔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김수현이 무서울 뿐만 아니라 징그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비위가 역해지는 그런 사람으로 느껴져 갔습니다.

고문을 자주 가하면서 본인을 고문대 위에 올려 묶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고문받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이런 저주받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문 받는 것, 그것이 어떻게 습관이 되고 어떻게 면역이 될 수 있겠습니까.

초기의 김수현이 상대적인 합리성을 갖고자 했던 것, 그것은 상부의 지시와 요구, 즉 정치적 필요성에 입각한 명령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김수현의 역할이 바로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도봉구에 “가인(佳人)”초등학교라는 곳이 있다.
지역 주민 대부분께서도 이게 무슨 말인지, 왜 그렇게 이름 지었는지 잘 모른다.
또 너무 어려운 말이어서 알고 싶은 호기심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지난 15여 년 동안 이 곳 도봉구에는 학교가 많이 지어졌다.
나는 사명감을 갖고 여기 창동에 사셨던 독립운동가들의 성함을 학교 이름으로 짓도록 노력했지만

성공한 것은 단 하나 “가인” 초등학교뿐이었다.

그것도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본명도 아닌 ‘호’를 따서 지은 누구도 잘 알 수 없는 이름일 뿐이었다.

우선 이곳을 관할하는 교육장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일제 치하 1930년대 중후반기 군국주의가 노골화되고, 민족독립운동을 하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의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의 눈초리를 벗어나고자 이사해 온 곳이 여기 창동이었다.

경원선 출발역인 청량리에서 한 정거장인 이곳은 경성이 아니면서도 정보를 곧 전해들을 수 있는 안성맞춤 지역이었다.

한때는 도산 안창호, 위당 정인보, 임꺽정의 홍명희, 조선 무용가 최승희, 김병로 선생 등이 이곳에 모여 사셨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이곳 노인 어르신 일부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미국이나 서양처럼 사람 이름을 따서 학교, 거리, 건물 이름을 짓는 것에 익숙한 문화가 아닌데다

서양처럼 사람이름을 따서 기념하는 북한이 의식되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안창호” 고등학교, “정인보”중학교라고 하면 전국의 많은 사람들의 귀에 쏘옥 들어갈 것이고,

재학생들에게도 그런 이름 자체만으로도 큰 가르침이 될 것이고, 경쟁력도 그만큼 높아지지 않겠느냐고 권고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이 말한 학생인권조례(안)과 그에 대한 교육부, 교육관료, 일부교사

그리고 오늘 한국의 특권적 지배계층의 반응을 보면서 지난 일이 떠오른다.

우선 나는 전혀 놀라지 않고 있다. 교육도 ‘시장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공교육, 사교육에 있어서의 우월적 위치를 계속 대를 이어 유지하려고 한다.

이들로서는 기본적으로 학생은 교육의 ‘대상’이고 ‘훈육’되어야 할 ‘객체’로 규정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체벌을 금지하고 두발자유를 보장받는 교육의 주체로서 학생들이 인정받는 순간

혹시 권위주의적 시장주의 교육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이기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욕망 충족과 더불어 소통, 협력, 연대 없이는 심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살아갈 수 없다.

교육과정은 이 상호 충돌할 수 있는 근원적 욕구를 어떻게 이해하고 조정하고 상승시킬 수 있는지,

적어도 최악의 대립과 불행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인지 협동교육을 통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학생들은 교육과정에서 사회와 국가의 도움을 받고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도움을 받는다해서 학생 개개인의 주체성이 훼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이 이렇다면 어떻게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체벌을 이른바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허용할 수 있겠는가.

또 의존적인 계층의 표시로 두발 규격화에 복종해야 한다고 우길 수 있겠는가.

시행령을 고쳐서 학생인권조례를 사실상 무력화 시키고자 하는 교육부는 더 이상 어깃장을 놓지 말아야한다.

그것은 교육의 선진화, 사회의 진정한 선진화를 방해하는 잘못된 권위주의적 선택이다.

2010년 10월

김근태

 

9월 10일 밤 7시경부터 10시경까지 고문을 당했는데, 그것은 처음 당하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전기봉 고문인데 양쪽 발등에 무슨 장치를 하고 진동을 일으켜 고문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 고문을 직접 지휘한 것은 김영두이고, 그 뒤에서 김수현이 조정했습니다.

박병선, 최상남, 정현규, 경상북도 출신의 또 한 사람의 경찰관이 고문을 했습니다.

 

9월 8일을 고비로 백남은은 고문 지휘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맡아 김수현이 더욱 분명하게 주동적 임무를 맡아갔습니다.

9월 8일 밤 고문에서, 나중에 가서는 김수현이 직접 고문장치를 들고 전기고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9월 10일, 이날의 고문은 여러가지 계산 하에 뒤에서 지시하고도 자신은 잘 몰랐던 것으로

예상치 못했던 바라고 얘기하며 마치 위로자인 것처럼 행세하기도 했습니다.

전기봉고문은 이렇습니다.

대단히 빠른 진동때문에 발등에는 심한 통증이 옵니다.

상처가 생기고 깊이 파이는 것 같은 느낌조차 옵니다.

피가 흐르는 기분도 듭니다.

그래도 이 전기봉고문은 받을 만하다고 할까, 상쾌하다고나 할까, 아니 양념 고문이었다고 할까요.

원체 심한 고문을 당해서 그런지 이 날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조차 했습니다.

더구나 물고문도 이날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또 발뒤꿈치의 상처가 깊어지지 않도록 반창고를 붙여 주고 발 밑에 수건을 접어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한편 고마움조차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벼락 맞아 속이 다 타버린 고목처럼 깊이깊이 내상을 입히는 그런 전기고문이 아니고,

시커멓게 몰려오는 저 무서운 공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발등 정도 좀 찢어지고 으깨진들 그것은 별 대수로운 것은 아니니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인간적인 그런 고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문을 시작하기 전에 심리적인 압박을 받기는 했지만 '괜찮게 고문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기조차 합니다.

고문 도구, 즉 눈가리개, 물주전자 등을 책상에 나열하면서 겁을 주더군요.

마음에 부담을 주려고 그렇게 했겠지요.

 

이것을 박병선이 했는데 의도를 알겠더군요.

쫄아 들게 하려는 것이지만 이것은 실제로 고문하지 않을 조짐일 수도 있고,

하더라도 심하게 가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징조임이 읽혀졌습니다.

대충 그런 성격의 고문이기도 했구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은 결코 하닙니다.

이 고문도 역시 괴로운 것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10일 전에는 잘 몰랐었고 또 당초 식사할 수 있는 마음도 아니었기 때문에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고문자들은 9일부터 식사를 제대로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밥을 언제 주었는지, 준 적이 있었는지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겠구요, 10일, 저녁 식사를 주지 않았습니다.

 

9일 아침부터 쭉 주던 것을 안 주니 이상할 수 밖에요.

고문을 가할 경우에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날 알게 되었습니다.

가혹한 고문을 가하기 때문에 - 속이 뒤집히게 하는 것은 전기고문이 아니라 물고문인데 -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문시 거의 틀림없이 속이 뒤집혀 토할 것이고, 토하는 경우 고문자들을 난처하게 만들 것이며

고문의 진행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토할 때 기도가 막힌다든지, 그로 인한 불상사를 생각해서 안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밥을 안주면 고문이 임박한 것임은 아주 분명해졌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반복된 고문의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9월 13일 이후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데, 밥을 안 주는 것과 고문을 가하는 것을 연관시켜 매우 잘 사용했습니다.

즉 고문자들이 뭔가 불만이 있으면 밥을 안 주고, 그러면 본인은 고문이 박두했음을,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파랗게 질리곤 했습니다.

이때 고문자들은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나는 덜덜 떨면서 시키는 대로 하구요.

고문, 그것은 마음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과학적이고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정리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의 시점, 방법 등에 대해서는 정말 사장급 이상의 회의에서

여러 가지로 검토하고 결정하는 것이 틀림없을 분위기로 전달되었습니다.

이날의 주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강제해 온 것의 암기 확인, 복습, 다음에 본인이 60년대 중, 후반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어느 정도로 관여해 왔는지에 대한 확인,

그리고 군대 제대 후부터 복학하였을 때의 동료 친구관계를 집중해서 캐물었고, 끝으로 73년도인가 74년도에 크리스찬 아카데미

-강원용목사가 원장인-에서 시행한 중간 집단교육-노동조합 간부들을 중심으로 하고 몇 명의 봉급생활자들이 교육생으로 참여-에

참여했던 것과 그 교육과정에 대해 물었습니다.

복습암기에서는 욕을 먹고 나중에는 칭찬도 받았습니다.

학생운동에 대한 것은 워낙 먼 옛날인 20여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70년 9월 복학해서 72년 2월에 졸업할 때까지 교우관계에 대해서 처음에는 지나가는 것처럼 묻더니

나중에는 매우 심각하게 따지고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것은 13일의 고문으로 연장되기도 한 주제였습니다.

본인이 복학했을 때 상과대학 대학원에 제일교포 유학생으로 온 사람이 있었다면서 이 사람과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의 출신교인 경기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한 해 늦게 상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며

지금은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가 되어 있는 누구인지를 통해서 이 제일교포 유학생 간첩과 연관 지으려는 공작이었습니다.

빛바랜 사진을 고문대 위에 묶어져 있는 본인의 얼굴에 들이대면서 인정하라고 아우성 쳤습니다.

물론 이 사진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서울대 교수로 있다는 그 동창이 누구인지, 또 진짜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

만일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로 있다는 본인의 고교동기가 실제로 있고, 그 친구와 교분이 있거나 깊어서 고문자들이 평범하게 물을 때

그 이름을 얘기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13일의 고문에서도 이것은 꽤 오랫동안 집요하게 추궁받았고, 이 10일은 고문자들이 깊이 꾀를 내어 살살 접근해 왔던 것입니다.

남영동고문자들은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중간 집단 교육의 한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분개하였고,

이는 본인을 급진적인 분자로 단정하는 하나의 자극이 되었습니다.

73~74년 당시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노동조합총연맹에 교육생을 보내줄 것을 공식으로 요청하고,

이에 노총은 각 산별에 의뢰하여 노조 간부들을 중간 집단 교육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약간명의 중간 계층인 봉급생활자등도 참여했으며, 본인은 그런 자격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교육의 강사는 강원용 목사, 이문영 교수, 박재봉 교수 등 여러 분이 있었습니다.

강의도 있고 토론, 사례발표, 노래 연극 등 여러가지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앞으로 연도별 자기 일생 계획과 죽음을 맞이하게 될 시점,

그리고 무덤에 묻혔을 때 희망하는 묘비명에 대해서 써 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의 진행과 안내는 박재봉 교수가 맡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일단 작성이 완료된 후 노조간부들은 그것을 발표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당시 교육학생들은 일생계획수립에 대해 막연했으며, 더욱이 죽음과 죽을 때를 희망하는 시기와 묘비명에 대해서는

일정한 당혹과 동요, 부담감조차 없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에 대해서 박재봉 교수는 '여러분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고 다른 나라 교육프로그램에서 따와 시도해 보는 것'

이라며 나름대로 의미있음을 설득했습니다.

본인도 이에 따라 시기(연도)별 일생계획표와 세상을 떠날 연도, 묘비명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대부분의 것은 보지 않고, 또 전체의 흐름과 당시 교육에 참여했던 것이 노동조합 간부 중심이었던 점 등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 비위에 거슬리는 부분만 문제 삼아 화를 냈습니다.

물론 이 고문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지시하고 보고를 받고 자기들의 정치적 이익, 반사적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짓도 감행하는 정치군부에게는 이것도 본인을 불온한 불순분자로 몰아버리는 하나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희망하는 결혼 연도 등을 - 당시 본인은 아직 미혼이기에 당연히 결혼에 관하여 관심이 있었지요 - 빼 버리고 오직 세가지를 문제 삼았습니다.

첫째는 몇 년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동자, 농민의 정당 설립, 두 번째는 1988년에 남북민족통일,

세 번째는 2016년인가에 본인이 세상을 떠나고 희망하는 묘비명으로 '여기에 사람 사랑하던 사람이 잠들다' 라는 것을 작성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기층 민중의 정당이고, 계급정당의 구상으로 당연히 불순한 것이 아닌가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렇게 보기로 결심한 사람들 눈에는 아주 훌륭한 몇 개의 문자로 된 증거겠지요.

당시 교육은 대부분 노동조합운동과 그를 통한 사회발전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조합 간부들이 거의 전부이고, 이들이 교육 분위기를 잡아 나갔습니다.

 

조합원과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개선 뿐만 아니라,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에도 노동자들에게도 반드시 정치활동이 필요하다는 토의도 있었고, 조합 간부등의 토의, 종합결론도 있었습니다.

또 여러 교수님들 강의에서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는, 정치활동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되었습니다.

미국의 경우처럼 대통령 선거시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천명하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방법,

영국의 경우처럼 집권하는 방법 등 여러가지 소개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신 치하에서 유정회에 직능대표로 노동조합 간부를 보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가 비판적이었으며,

노동조합의 정치참여 금지규정, 법률에 대해서는 특히 격한 이의 제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조합 간부들이 노동자들의 정당 설립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같은 생각을 표시했습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가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되었습니다.

본인은 대학 출신, 그 중에서도 좋은 학벌 등으로 그 교육에서는 뭔가 미안한, 부채의식도 없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동일화가 되지 못하는 것, 즉 소외감도 있었구요.

그런 분위기에서 노동자, 농민의 정당 설립이라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조합간부 대다수 사람들의 일생계획표에도 등장했고 발표낭독도 되었다고 기억합니다.

이것을 앞뒤 다 자르고 이 몇 개의 문자를 들어 늘 그렇듯이 문제를 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남북통일이 왜 하필 88년도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내가 신통력이 있어 시점을 맞춘 것처럼 분개하고 괘씸해하며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73, 74년 당시 88년이 정권 임기와 관련 있을 것이라든지

하계 올림픽 연도가 될 것임을 이미 예측하고 고약한 장애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불순한 의도를 엿보게 할 수 있는 자의 음모라는 말인지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88년도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며 민족통일은 모든 민족의 염원으로 어울려 짝짓기 참 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1988년의 민족통일, 그것을 70년대 초에 기대하고 희망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고문자들도 추궁했지만 본인의 면전에서는 논리적으로는 심하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너무나 뻔한 일이어서 그랬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세상을 떠나는 시기와 묘비명 이름마저 유서에 써놓고 민주화 투쟁을 하는 악질 분자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희망한 것은 70살이 되어서 삶을 마치는 것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이는 장수고 어느 면에서는 천수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가장 중요한 양식인 인간에 대한 사랑, 그것을 실천하다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 무슨 비장한 결의인 것처럼,

음산하고도 어두운 음모인 것처럼 매도 당했습니다.

 

고문자들은 이를 무슨 대단한 일처럼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소위 남영동은 본인에 대한 불순한 배경의 중요한 기둥 중 하나로 의견서를 택한 것입니다.

최민화씨의 법정 증언에 의하면 본인은 이미 유서까지 써놓고 운동을 하는 것으로 고문자들은 말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포복졸도할 희극이 그렇게 무거운 부담으로 왔습니다.

이것이 범죄적 고문을 감행한 남영동 그곳에서 본인이 처했던 멍에였습니다.

이미 기정사실이 된 불순한 올가미에 온갖 것을 들어다 꿰어 맞추는, 남영동 제조공장이었지요.

6월 10일 고문은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고, 끝난 뒤에는 김수현으로부터 위로도 받았습니다.

고통이 심하고 고생이 되는 줄 잘 안다면서 고문대에서 내려오도록 부하 고문자들을 채근했습니다.

눈물이 핑 돌고 콧등이 시큰해졌습니다.

조금만 더 역성을 들어 주었으면 그 김수현 가슴에 기대어 엉엉 울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버렸을 것입니다.

 

나치 수용소에 감금되어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종전과 더불어 풀려나온 어느 유태인 정신과 의사의 피맺힌 기록이 생각납니다.

원수, 악마였던 S.S고문 친위대가 나중에는 병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경매의 존엄한 자로 군림하게 되는 절망적인 인간의 고백을 읽고 몸서리를 쳤었습니다.

 

인격의 와해, 인간의 허약함을 송두리째 폭로하는 것으로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분노하고 저주해야할 그 고문자들을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첫 날 혹은 둘째 날부터는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이 박탈되었던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열쇠를 갖고 있는 그 고문자들에게 모든 힘을 다하여 아양을 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고문자들의 현장 지휘자인 김수현에게 10일날 위로를 받은 것, 그것은 당시 본인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따뜻한 라면을 대접 받고, 밤 12시가 되어 잠도 재워 주고, 이제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문성근씨의 100만송이  국민의 명령 프로젝트 출범을 접하며

우선 축하합니다.

배우 문성근씨가 드디어 ‘100만송이 국민의 명령 프로젝트’, 즉 제3지대 야권단일정당운동을 가동했습니다.

스스로 야권 단일정당이라는 시대적 명령을 내리는 첫 번째 국민을 자처한 문성근 씨는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100만 민란의 주동자요 대장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문 대장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할 때 염화미소요, 이심전심이라 했습니다.

정말 마음이 찡해서 이렇게 김근태의 미소를 보냅니다.

 

문 대장의 제안서를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저의 첫 느낌은 “아.......!!”였습니다.

야권단일정당이라는 시대적 대의를 느끼거나 확신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대의를 추진할 방법을 이토록 구체적이고 민주적으로 제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민주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우리 국민에 대한 강고한 믿음 위에 지어진 이 멋진 대중운동에 거듭 찬사를 보냅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힘들고 험난할지도 모를 길을 문 대장이 먼저 나섰습니다.

솔직히 범야권단일정당이 정당의 문제이고 그래서 정치의 문제임에도 우리 정치권에서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저 김근태 약속합니다.

범야권단일정당이라는 큰 흐름에 조응할 수 있는 정치의 길을 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 둘 다 성공해 대한민국을 전혀 새롭게 창조할 수 있도록 분발하겠습니다.

 

아무리 미소일지라도 길면 민폐이므로 이만 짧게 미소 짓겠습니다.

사이버 촛불인 마우스 클릭으로 이루어지는 야권단일정당을 위한 100만 민란에서

문대장과 국민여러분이 반드시 승리하리라 믿습니다.

 

이 글을 읽는 국민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야권단일정당운동 사이버 촛불 들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참으로 좋은 배우를 가진 것 같습니다.

 

 2010년 8월 28일

김근태

9월 8일 일요일 오전 10시경. 지옥에서 온 나찰 같은 얼굴을 한 윤재호가 방에 들어섰습니다.

잠시 후 김수현, 빅남은, 김영두, 고문기술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 그리고 또 한 사람 허만조 등이 방을 꽉 메웠습니다.

윤재호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본인 맞은 편에서 앉자마자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너 이 새끼, 배후를 안대?

콧구멍에 고추가루를 처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 버리겠다.

안 댈 거지?

그거(고문대) 들여와,

이 새끼 내가 직접 고문할게."

다른 사람들은 조금 당황한 듯 하면서 모두 서 있었고

김수현, 백남은, 고문기술자들이 굽신거리며 "저희들이 하겠으니 나가시라"고 애원 겸 정중하게 말하더군요.

그 사이 정현규와 최상남이 고문대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이 때 그 고문대 구조를 명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윤재호는 분기탱천해서 나가고, 김수현과 백남은은 '상급자가 저러니 자기들로서는 도리가 없다' 히고,

고문기술자는 여러가지 협박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고문은 또 시작되었습니다.

주제는, 아니 메뉴라고 할까요.

배후, 정치적으로 아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불순한 모종의 배후,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나이 사십인데 누가 배후가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당신들이 말하듯이 민주화운동에서 책임있는 사람들 중 하나이고 오늘의 이 결과를 가져오게 한 역할을 해 냈는데,

내가 누구에게 조정을 당하겠느냐."

고문자들에게는 논리가 통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귀를 기울이려 하지도 않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얘기했습니다.

이들은 상부의 상부인 정치군부가 정해 준 방향대로 결과를 얻어내도록 움직일 수도,

변경할 수도 없는 명령을 받고 그 임무를 완수해 내야했던 것입니다.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 그늘진 곳에 숨어 있는 배후, 공개운동 선상에 나와 있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요구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미 당신들은 잘 알고 있다. 오랫동안 사무실, 집 전화를 도청했고 나를 미행해 오지 않았느나,

그러고도 이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며 항의했습니다.

 

고문기술자는 "이 새끼 항복했다더니 아직 입이 살아서 움직이는구먼. 진짜 맛을 보여 주겠다.

남민전, 이재문이 어떻게 죽은 지 알아? 전노련 이태복 얘기 너도 들었을 거다.

이재문이는 여기서 당해서 이미 속이 부서져 감옥에서 병사한 거야, 너도 각오해" 하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이 날은 남영동에서 받았던 고문 중 최악의 고통스런 날이었습니다.

가장 혹독하고 긴 고문을 받았습니다.

진부하고 희극적인 추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본인의 월북여부에 대한 추궁, 행적에 대한 추궁이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짓거리입니다.

하지만 고문자들에게는 반드시 빼놓지 않는 과정이며 고문을 가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꺼리'가 됩니다.

정상 상태에서는 그 누가 이렇게 협박을 한다 해도 그것에 대해 인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허나 고문대 위에서 이는 참으로 심각한 위험으로 다가옵니다.

결국 나는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고문자들은 좋아서 히히덕거리기조차 했습니다.

고문기술자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으며 백남은이 추궁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월북했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는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갔다고 했습니다.

백남은, 김수현 등은 폭소를 터뜨리면서 "그것은 여기서 취급했어, 우리가 잘 알아서 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궁이 멈칫해졌습니다.

삼천포는 80년 광주사태 이후 몇 년도인가,

박계동씨가 정치군부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했던 항구였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서 얘기했던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그럴 듯하게 말할 것조차도 없었지만,

다음은 본인의 형들 셋이 월북을 했고,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을 만났다는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결국 인정하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간첩과 접선 인정은 본인에게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덮쳐 누르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의 고통을 우선 모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만일 고문을 당해보면

왜 죽음을 가져올 지 알면서도 인정하고 손도장을 찍을 수 밖에 없는가를 적절하게 알게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를 요구하면서 증거를 강요하더군요.

돈을 받았느냐고 해서 1백만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74년도 쌍문동 집 근처에서 한번 만났고, 84년도에 역곡에서 한 번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 고문자들 참 좋아하더군요.

좋아서 미쳐 날뛰기 일보직전인 것 같았습니다.

김수현은 합리적 근거를 대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분위기는 달밤에 먹이를 앞에 놓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털 빠진 승냥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만들어서 얘기를 하니까 고문자들이 거들어 주고 수정을 해 주었습니다.

고문대 위에 놓여진 본인과 고문자 사이에 협력과 토의 수정이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이렇게 하며 각본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백남은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평양이 부산이지?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반복해서 백남은이 얘기할 때 비로소 알아들었습니다.

백남은은 이어서 "그런 일 없지?" 라고 확인을 했고 "그런 일 없는 것은 우리가 알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이 날 지경으로 고마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틈에 용기를 내어서 "정말 그런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마움과 안도에 떨리는 목소리로 서둘러서 반복하여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확인했습니다.

고문기술자가 나서더군요. "그러면 왜 만났다고 했는가, 고문에 못 이겨서 그랬다고 했는가" 라고 추궁하며

다시 강하게 전기고문을 시작하면서, "아냐, 간첩을 만났지?" 라고 요구해 댔습니다.

 

부정했지만 결국은 또 인정하게 되고요.

도대체 몇 번을 이렇게 왔다 갔다 하도록 고문하고 강요했는지 모릅니다.

거기다 또 '말이 왔다 갔다 한다' 고 고문을 해대고 말입니다.

아, 이처럼 눈물나는 희극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구나. 희극의 시대구나. 이 저주받을 희극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하여튼 월북과 간첩과 접선 얘기는 대충 이렇게 끝났습니다.

이후 필요할 때는 위협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어떤 진지함을 고문자들은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실 고문자들에게 처음부터 느낀 것은 본인의 사건에 어떤 열성이나 뚜렷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무리를 하고 있다는 표정이나 몸짓이 전해져 왔습니다.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과정에서 '시기가 너무 빨랐다',

'아직 사건으로 만들 때가 아니었는데' 하면서 고문자의 누구누구는 '흥미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그들이, 그들의 지휘자인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물러설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보듯이 무리와 무모함을 더욱 강제하고, 그를 은폐하기 위해서 별별짓을 다하게 되는 것이지요.

8일 오후 1시 반경, 일단 오전 고문은 끝났습니다.

저녁 7시경에 또 전기고문이 시작되었으며 밤 12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악을 써 대고 고문기술자는 맞고함을 치고 김수현 등은 킥킥거리듯이

몸부림치는 나를 묶인 채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고문은 계속되었습니다.

역시 배후의 문제였습니다.

그늘에 가려진 사람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무척 곤경에 빠져 버렸습니다.

둘러댈 이름도 없는 것이니까요.

배후란 것은 없다고 해 봐야 아무 소용없는 헛일이었고요.

 

결국 재야 운동권과 종교 운동권의 인사가 모두 배후라고 불면서 인정해 달라고 애걸복걸하였지만 고문자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것은 물고 들어가는 일일 뿐이라고 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은 재야인사로 초점을 옮기더군요.

그 중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이름을 계속 대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줄줄이 대고 거절당하고, 또 대고.... 이렇게 반복하기를 십여차례 하다가 함세웅 신부와 권호경 목사, 두 사람으로 좁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본인과 고문자들의 협력과 타협, 그리고 조작 위에 세워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지요.

함 신부는 완전한 배후로서 결정됩니다.

함 신부는 해방신학의 대가이며 본인이 83년 9월 민청년 창립 이후 매달 한 번씩 한강 성당, 구의동 성당으로 찾아가

민주화운동을 의논했다는, 고문자들 말에 의한 한 권의 소설에 본인의 철저한 배후로 등장하게 됩니다.

권호경 목사는 반쯤 배후가 되어 두 달에 한 번 정도 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여러가지 얘기를 나눈 것으로 되고,

이것과 관련해서는 반 권 분량의 소설이 만들어집니다.

 

이 두분에 대해서는 참으로 미안하고, 부담이 되는 줄 알면서도 그것 이외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이을호 씨와 문용식 씨의 배후로 찍혀서 지금 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본인은 이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고문에 못 이겨서 강제자백을 한 것이겠지만, 그래서 이해를 충분히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 이을호씨와 문용식씨를 미워했었고 참으로 서운해 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도 거기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현실적 위험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일단 본인의 배후로 찍혀서 작성된 그 소설이 써먹힐 가능성은 있는 것이고,

아마 지금도 함 신부와 권 목사 두 분에게 부담과 위험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이날 고문이 마무리될 즈음해서 이범영씨가 다시 거론되고 "민한당사, 미문화원 사건 조종을 했지?" 라고 강박하여

" 각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범영씨로부터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코미디이며, 나는 이 코미디에 등장하는 꼭두각시였던 것입니다.

이 날부터 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4, 5, 6일 있었던 이을호, 문용식의 N.D.R.과 C.D.R., P.D.R.에 대해 완전학습, 총정리가 고문대에 눕혀진 채 요구되었습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잘 해내서 칭찬을 받고 고문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8일에 있었던 물고문, 그것은 4,5,6일에 자행한 것보다 지독했습니다.

그것은 세수 수건 대신 코와 입 위에 가제를 덮고 물을 쏟아 부었습니다.

세수수건을 덮고 고문할 때에도 호흡은 완전 차단이었습니다.

공기가 끼어들 여지를 배제해 버리지요.

그래서 그런지 이 날 물고문의 중간, 한 번 입을 벌려서 고춧가루를 처넣었습니다.

곧 뱉어 버리긴 했지만, 입 속이 얼얼하고,

고문대 위 담요에 고여 있는 땀과 물 속에 떨어진 고춧가루 때문에 등 전체가 따갑기도 했습니다.

무슨 화학 약품이라고 겁주면서 가제 위에 한 웅큼을 집어다 놓고 물로 녹여서 입, 귀, 콧속으로 녹아들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세 번 했는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간 집찔한 것으로 보아서 소금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이는 심리적 압박으로 고문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기고문의 전류가 더 잘 통하도록

핏속의 전리도를 높이려는 이중적 계산이 내포된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날의 고문은 잔인무도의 정점이었습니다.

목이 완전히 붓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목이 쉬고....

연거푸 비명을 질러댔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팔꿈치와 발뒤꿈치는 이미 헤어져 상처가 어느 정도 깊어지기도 하고요.

 

이날 이후 고문자들은 팔과 발뒤꿈치 상처에 많은 신경을 쓰며 약을 사다가 먹이고, 바르고, 열심히 치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발뒤꿈치 상처가 특히 오래간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외용 살포제로 니라민산이라는 하얀 가루약, 수많은 항생제 복용, 옥시풀과 머큐로크롬 등으로 치료했습니다.

한편 목 아픈 데에도 무슨 약인가를 주어서 먹고 가라앉혔으나 쉰 목은 잘 낫지 않았습니다.

이 8일의 고문 이후에 나는 '저80년 5월의 광주사태가, 광주시민 대학살 같은 것이 85년 9월에 또다시 일어나고 있거나

반드시 정치군부에 의해서 감행될 예정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이럴 수는 없는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예정된 정치적 사변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며

불순한 내란 소동의 주범 또는 배후로서 낙인 찍혀 공공연하게 선전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멍멍해지고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되기도 하고 나사가 풀려버려 드디어는 착란 상태,

광기를 보이게 될 운명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 당시, 그래도 현실성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두통이었습니다.

이것은 전기고문을 받을 때마다 더욱 심해졌고 그 견딜 수 없는 두통만이 현실적이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구원이라는 것은 없었고 구원의 빛깔 비슷한 것 조차도 없었지요.

모든 것이 이미 고문 지옥으로부터, 나로부터, 멀리 저 멀리 사라져 가버렸습니다.

2010년 8월 6일 민주연대 주최 토론회

인사말씀

 

 

솔직히 충격이 컸다.

6.2 지자제 선거승리와 7.28 재․보궐 선거 패배 사이엔 간극이 정말로 컸다.

진짜 “너무한” 찜통더위 때문인지 심각한 느낌은 약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민주진보세력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결단할 것은 결단하고, 양보, 타협할 것은 그렇게 해야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국민과 함께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파악하는 오늘의 상황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명박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강부자’, ‘고소영’ 등 기득권 세력의 오만과 독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민심이반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둘째, 진실한 야권연대가 이뤄지면 국민은 적극 참여한다.

지자제 선거에서 그것은 입증 되었다.

선거 공학적으로 이뤄진 후보단일화는 모조리 실패했다.

은평과 충주가 그랬다.

또 지난 경기도지사 선거도 역시 그랬다.


나는 ‘범야권 단일연합정당’으로 가야한다고 확신한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시장만능주의’를 제외한 모든 세력은 여기에 대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협력하고, 경쟁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이뤄 내야할 우리의 과업이다.

대타협이 있어야 한다. 가능할 것이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진보적 ‘범야권 단일연합 정당 건설’이 중심의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그것을 실현해 낼 동력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그것을 실현시킬 의지와 능력이 있는 세력은 누구인가?’ 등이 활발하게 토의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확실한 복지국가로 갈 수 있어야 한다.

진보교육감 등에 대한 기대, 무상급식, 무상보육, 사교육 없는 세상 등 보편적 복지에 대한 전면적 도입과 내실화,

양극화 문제의 극복방향 제시에 과감해야한다.

또한 유능할 수 있어야 한다.


요사이 동아시아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참으로 고통스럽다.

마치 20세기 초에 발생했던 청일전쟁, 러일전쟁 전야처럼 느껴진다.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중국 사이의 잠재적, 전략적 갈등이 노골화 되고 있다.

그와 더불어 남북 간의 갈등도 더욱 격화되고 있다.


그런데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는 민주당 전당대회는 이와 별 관계가 없는 듯한 분위기다.


우선,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구조적으로 그렇고 또 요구가 넘쳐 난다.

그것을 외면하면 당선될 수가 없다.

정치자금, 즉 ‘돈’을 대줄 수 있는 사람을 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적나라한 권력정치, 패거리정치가 관철되고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과 일부 지역위원장들의 영향력이 크다.

일부로부터 받는 돈으로 대의원들이 서울로 오는 비용과 식사대접비용 등을 부담한다.

그리고 누구를 찍으라고 이른바 ‘오더’가 거기서 내려진다.


이것을 밝히고 여기에 개입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모처럼 어쩌다 한 번씩 하는 "우리끼리 잔치"인데 거기에 재를 뿌리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른바 ‘자강론’을 좋아한다.


특단의 조처가 있어야 한다.

서울에 1만여 명이 모여서 큰 집회를 열어야할 필요가 지금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폐해가 너무 크다.

현역 국회의원, 지역위원장 등이 후보캠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역위원장이 누구를 찍으라는 이른바 ‘오더’를 내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선관위의 역할이 국민선거 수준에 이르도록 강화하는 것도 검토해 볼 일이다.

이런 일로 정치적 손해를 본적이 몇 번 된다.

그런데도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이대로 전당대회가 치러지면 말과 주장은 뭐라고 해도, 진보적 ‘범야권단일연합정당’ 건설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지도부 권력이 자신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절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 ‘깨어있는 시민’의 가슴 속 열정에, ‘행동하는 양심’들의 결단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인가?

길을 만들어야 한다.

그걸 시작하고 싶다.

 

2010년 8월 6일

김근태

 

4일 오전 남영동에 강제로 끌려 온 이래 단 한숨의 잠도, 한 끼니의 식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별로 자고 싶지도 먹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9월 6일, 점심식사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다 먹지는 못했지만 하여간 고마운 첫 식사였습니다.

나는 이것으로써 저 지옥 같은 고문의 폭풍우가 혹시 지나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물론 자기들 마음대로 국보위인가 하는 곳에서 만들고 뜯어고치고 한 그 법률이라는 이름의 것조차도 지키지 않고,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고문을 은폐된 곳에서 감행하는 자들이지만

겉으로는 법이라는 것을 지키는 체하려고 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연행한 지 만 48시간 이내에 구속조치 결정여부를 판단하려 한다고 느꼈으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고문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점심을 주고 난 이후 바삐 서두르던 분위기와 서류 준비가 미뤄졌습니다.

자기들끼리 수군대고, 밖으로 서로 불러내서 뭐라고 속삭이고, 분위기도 누그러질 듯하고요.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를 지경이었습니다.

 

'바깥에서 무슨 양의 움직임이 있는 것이 명백하고 이에 밀려서 주춤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구속방침이 확정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디 추이를 보자'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더니 미국 워싱턴에서 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심기섭 씨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사진도 가지고 와서 확인하고요.

하지만 이것은 그 무슨 신문 같은 것은 아니고, 혹은 상담 같기도 했습니다.

처음 이 심기섭씨를 물을 때는 사실 매우 긴장했습니다.

 

'심 선생을 간첩으로 몰고 이 간첩이 민청련 사무실을 방문했고 그 때 본인과 접선했다.

그리고 이 심 선생은 85년 2월 초 김대중 선생이 귀국할 때 미국에서부터 동행한 자다'는 내용 등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속으로 참 캄캄해지더군요.

결국 고문을 통해서 강요하면 또 굴복하게 될 것이고, 묘한 것은 험상궂게 추궁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선일 수도 있을 것이다'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본인의 연행이 미국에도 알려져 동포사회에서 물의가 발생하고 항의가 제기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생겨났습니다.

저녁 7시쯤 되었을 것입니다.

김수현과 백남은은 얼굴에 웃음기를 띠면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본인 앞의 고정된 철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김수현이, 왼쪽 옆에 백남은이 앉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대화나 논쟁자리 같기조차 했습니다.

주로 백남은이 문제를 제기하면 김수현은 듣다가 중간중간에 끼어들어 공박을 했습니다.

논쟁, 특히 민주화의 문제, 정치문제에 관한 논쟁에서 본인이 이 사람들에게 밀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고문을 당한 후라도 얘기할 수만 있게 되면 내 얘기가 보다 타당성이 있을 것임은 명확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국민적 열망이고 시대적 대의인 민주화에 관해서 이들이 갖고 있는 견해는 극도의 편견과 편협함에 기초되어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극도로 조잡하다고 얘기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견해와 주장을 강력하게 밀고 나아가 국민을 경멸하고 민주화운동을 탄압할 때 오는 반사적 이익,

정치군부의 권력이익을 조잡하게 반영할 뿐입니다.

 

백남은이 주장하고 요구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80년 이후 민주화운동이 과격해지고 급진적이 되었다. 특히 학생운동이 그렇다.

이른바 레벌루션(Revolution)의 R을 지시하고 조정하는 사람이 명백히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얘기를 해 달라.

아직 자신들이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요구에 응한다면 정부는 어떤 고위층이든지 내가 지정하는 사람을 오게 해서 명백히 약속을 하고 지키도록 주선을 하겠다.

당신을 내보내줄 수도 있다. 만약 내보내준다면 우리들에게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라고 기억됩니다.

논쟁적 성격과 윽박지름이 혼합된 채 1시간여 이상 걸렸습니다.

안 들어봐도 뻔한 얘기이고 신문지상에서, 텔레비전에서, 정치군부가 국민에게 행한 협박에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상투적인 논리지요.

사실 속은 뒤틀렸습니다. 그러나 좀 힘을 회복해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심각한 갈등이 있고 대결 의식조차 없지 않다.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정치군부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고 정권교체가 국민 의사에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중요한 고비에 다다랐다.

이 고비를 올바른 방향으로 극복해서 국민 내부에 광범위한 합의를 이루고, 이것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경제 문제, 민생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80년대 민주화를 좌절시키고 광주사태를 감행한 정치군부의 폭력성이 오늘 이 불행의 직접적 계기다.

민주화가 실현되면 지금 대부분의 문제는 완전히 해소될 것이다.

그리고 R이니 뭐니 하는 것은 본래 없었던 것인데 그런 것을 지시하는 개인들이나 그룹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오늘의 상황, 이것이 민주화운동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나는 지금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 민청련 의장을 그만두고 몇 개월 충분히 휴식을 하려고 했다.

만일 나를 내보내준다면 민주화운동 대열에서 후퇴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이에 대해 백남은은 "보답이 겨우 그 뿐인가"하며 소리를 높였고

김수현은 "지금 우리와 논쟁을 하려는 것이냐,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냐. 필요 없어. 이 새끼,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거야" 하면서

버럭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9월 7일 본인의 처, 인재근 씨가 치안본부 대공과장 신모 씨를 만나서 항의했을 때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 김근태의 사상을 뜯어고쳐 놓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가혹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항의에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지금 평화적으로 비교 논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논쟁 비슷한 것이 9월 6일, 김수현과 백남은 함께 한 이 자리였습니다.

대공과장 신 모씨의 얘기가 이것을 지칭한 것이라면 혹시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직후 돌아온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전기고문 그것이었습니다.

전기고문 기술자가 들어오고 고문대가 들여지고 이날은 앞에서 기술한 윤재호를 제외한 모든 고문자들이 총 출동되었습니다.

노기등등한 이들은 푸른 빛마저 감도는 듯 했습니다.

논쟁 비슷한 것을 한 것에 대해 화내는 것 같기도 했고, 말에 밀린 것에 역정을 내는 듯도 싶었습니다.

아니면 약간 방심했다가 급습고문을 하여 고문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교묘한 기술적 대치이기도 했습니다.

5일에도 그랬고 6일에도 그런 리듬을 타는 것 같았습니다.

이날의 고문은 포악하고 격렬했습니다.

이 고문담당 기술자는 망나니였습니다.

숨통을 막아 버리고 목줄을 끊어 버리는 인간 백정의 진면복을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파르스름한 요기 어린 달빛이 감도는 황야에서 작두칼을 휘둘러 대는 미쳐 버린 인간 백정이었습니다.

김수현과 백남은, 김영두 등은 이러한 망나니를 찬양하고 거들어 주고 축하하는 귀신들린 자들이었습니다.

 

격렬한 전기고문을 길게, 아주 길게 가하여 온몸이 고문대 위에서 오그라들어 버리는 것 같았고,

핏줄은 물론 모든 살이 마침내 다 타 버려 누리끼리한 살가죽과 뼈만 남아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쉬지 않고, 조금도 쉬지 않고 이튿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소리소리 질러 목 안에서는 피 냄새가 역하게 올라오고, 콧속에서는 댠내가 계속 피어올랐습니다.

물고문으로 인해 속이 빈 위는 계속 헛구역질을 해대고.....

처음에 나는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예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고문자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 그것 뿐입니다.

 

이들에게 살해당할 것을 각오하고 저항을 하지만,

고통과 공포에 짓눌리게 되면 곧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라는 내면의 외침에

-이것은 고문자들의 또 다른 협박이며 유혹이 내면화된 것이지만- 부딪치게 됩니다.

'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원통해서 이렇게 개죽음 당할 수는 없다.

내가 저항을 하면 이들은 정말 죽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저 70년대 서울대 법과대학 최종길교수의 경우가 그렇지 않은가.

이 고문자들이 시종 뇌까리는, 심장마비라는 의사의 진단서를 붙이면 자신들은 완전히 발뺌할 수 있다.'

'어디 외상이 남아 있는가'라는 협박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다가올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그때의 얘기를 회상해 보더라도 두려움으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이런 경우를 닥쳐 보지 않은 사람은, 또 나도 고문을 당하기 전에는 그냥 지나쳐 버리거나 무시해 버렸던 것인데,

그 불행한 일이 이번에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하는 허약함이 머리를 들기도 했고요.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 두려움보다 전기고문과 물고문, 그것으로 인한 고통

그 자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사실에 가깝습니다.

 

이 고문자들의 강제 요구를 인정하는 일이 나 자신을 죽음으로 한 발짝 나아가게 하는 길이더라도

지금의 이 고통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무엇이라도 받아들이겠다,

이런 잔인한 고문만 아니라면 정말 죽음에 처넣어지는 것, 고문없이 살해되는 것조차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게 됐고요.

 

아마 누구라도 그 길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입니다.

무협지를 보면 싸움에서 패배하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들이 곱게 죽여 달라고,

고통을 주지 말고 빨리 죽여 달라고 말하는 대목이 정말 이해되는 것입니다.

 

고통, 고문, 이런 고자 돌림은 죽음의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고 죽음의 핵심, 정수인 것입니다.

저 칠흑처럼 어두웠던 일제 치하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불구가 되고, 목숨을 잃고,

윤동주 시인이나 이육사처럼 옥사했던 그 이유가 바로 이런 참혹한 고문이었습니다.

 

저 지독히도 암울했던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갇히고, 줄을 이어서 갇히고, 가슴엔 한이 맺히고 슬픔이 쌓이고,

눈물의 강이 되고 분노의 파도가 되었던 그것이 이러한 끔직한 고문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날도 또 굴복하였습니다.

주제는 문용식씨의 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민족민주혁명론)과 C.D.R.(Civil Democratic Revolution:시민민주혁명론),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민중민주혁명론)의 인정이었습니다.

 

초저녁에는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더욱 위험하다고 느꼈던, 학생운동과 연결시켜 몰아 때려 버리고자 할 것이 뻔히 예상되는데다가

정말 내가 부담해야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 짐을 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거기다가 이것은 도대체 반증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요.

 

분명히 고문에 못 이겨 문용식씨가 이렇게 강제 인정한 것이더라도,

물에 빠진 사람이 무엇이라도 붙잡아 같이 물귀신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 그 이상은 전혀 아닌 것임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항할수록 고문은 더욱 흉폭해지는 것이지요.

 

답은 예스, 그것 하나입니다. 떠듬거리면서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암기하고 또 암기하기를 요구하더군요.

 

고문대 위에서는 정말 1초에 수많은 말을 외울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고문대 위에서 문용식씨가 말했다고 하는 N.D.R. 이른바 민족민주혁명론을 공부한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공부였습니다. 잘 외웠다고 칭찬도 받았습니다.

바로 이 날 고문담당 기술자가 고문 도중에 지쳐서 잠시 쉴 때가 있었는데, 그때 본인의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야 이렇게 작은 것도 X라고 달고 다니냐, 너희 민주화운동하는 놈들은 다 그러냐"라는 성적인 모욕도 하더군요.

그 당시 약간 열등감이 자극되기도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난 그 때 '그게 무슨 문제냐, X이 없더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 고통과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너한테 그 이상의 모욕과 폭언을 들은들 아무 일 없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이 자가 사내다움을 뽐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가학적 분위기에서 눈에 띄는 대로 상처를 주는 일련의 행위 중 하나였습니다.

고문이 끝난 것은 이튿날 밤 1시였습니다.

고문자들이 지쳐서 물러난 것이었지요.


 

 

 7.28 선거결과를 보고 국민들께 드리는 글


민주당은 참패했습니다.

높은 투표율 속에서도 참패했기에 그 어떤 변명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솔직히 쓰라립니다.

무엇보다 4대강의 유령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해석할 것 같아 당혹스럽습니다.

하지만 국민들께서 타당한 이유로 저희 민주당을 벌한 것을 받아들입니다.

바로 민주당의 기득권 안주와 오만입니다.

2012년 총선에서가 아니라 이번에 벌한 것을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국민 여러분들께선

“지금의 민주당과 야권구도로는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받아낼 수 없다.”

“쇄신 정도가 아니라 대변혁을 이뤄라.”

한마디로 진정한 시대정신과 새로운 정치구도를 찾아내라고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민주당에 전당대회가 있습니다.

전당대회가 지금까지의 흐름처럼 가서는 안 됩니다.

전당대회가 결국 국회의원의 공천권을 휘두르고, 그것을 기반으로 대권가도에 기득권을 쌓으려는 유력인사들 간의

경쟁과 이합집산으로 흘러간다면 국민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곳엔 탐욕만 있을 뿐 희망과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당대회는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일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새로운 정치구도, “범야권단일정당” 건설을 위한 대토론과 대합의의 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역사를 꿈꾸는 모든 분들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4대강의 통곡, 민주주의의 통곡을 그냥 지나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

고맙습니다.

2010년 7월 29일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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