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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내며 / 김근태: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이름으로 공개된 DJ 대통령의 어느 날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71년 국회의원 선거 시 박 정권의 .. http://t.co/EwUGgd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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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 남영동 5층 15호실 / 5. 고문자 명단: 지금까지 본인에게 직접 고문을 가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용모, 언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적절한 기회가 .. http://t.co/n8fMSQ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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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본인에게 직접 고문을 가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용모, 언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적절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아직도 이 고문자들에게 갖고 있는 두려움, 그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겠지요.

그리고 고문에 가담했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이 보낸 준 약간의 따스함.

본인에게 너무가 가혹한 고문을 하면서 흘렸던 그 눈물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적 구원의 가냘픈 빛이기조차 했습니다.

이것도 여러가지를 밝히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습니다.

본인이 이 고문자들을 이제는 미워하지 않거나 용서를 했거나 해서는 물론 아닙니다.

아니 용서를 거론하는 것은 명백히 거짓되며, 또 그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항의하고 규탄하고 고발합니다.

이 참혹한 고문행위를 결정하고 지시한 그 사람들, 사실 초점이 여기에 모아지도록하기 위해,

그러고도 철면피하게 감행하는 은폐행위를 조장하는 자들을 규탄하기 위해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시점에 다다른 거 같습니다.

85년 9월 4일 오전 9시경 본인은 남영동 5층 15호실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고문을 지휘하고 감행한 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과  과장(일명 사장)  총경        윤재호
1과     전무               경정        김수현
1과     전무               경정        백남은
1과       ?                  경감(?)   고문담당전문가
1과     상무               경위        김영두
1과     부장               경장        정현규
1과     부장               경장        최상남
1과     부장               경장        박병선

1과     부장               경장           ?

고문의 직접적 지휘는 전무 김수현과 전무 백남은이 담당했으며 앞 사람이 주 신문관이며 뒤 사람이 부 신문관이었습니다.

김수현에게는 구성요건, 특히 국가보안법 구성요건의 그물망 내로 몰아넣고

구속의 근거와 공소제기 및 유지의 증거를 획득해 내는 임무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백남은에게는 민주화운동, 특히 재야운동권에 대한 정보를 고문을 통해서 한꺼번에 손쉽게 뽑아내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값싸게 말입니다.

앞에서 장의사집 둘째 주인이라고 언급한 자가 바로 고문기술자로서 건장하고 불량배 냄새가 나는데,

대부분 이 사람이 고문을 직접 감행했습니다.

 

김영두는 대표적으로 고문보조를 했으며 진술조서 작성, 집시법 관계조사 등을 담당했습니다.

나머지는 하수인들로서 고문 보조역할을 담당했고 자술서에 쓸 문장을 본인에게 불러 주는 일, 그리고 방을 지켰던 것입니다.


머리를 쳐박히고서 끌려가다

비가 내리는 새벽 5시 반, 그 날은 유난히 껌껌했습니다.

본인은 잠이 덜 깬 채로 혼란에 빠져 끌려갔습니다.

대략 남영동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긴 했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아무리 꼽아봐도 가슴 속만 저려올 뿐이었습니다.

머리는 혼란스러워지기만 하고.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어떤 의경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내보내주는구나.....,

고마움조차 느끼며 옷을 주섬주섬 꿰어입고 유치장을 나섰습니다.

 

지긋지긋했던 일곱차례의 유치장신세 또 체포, 연금, 이 모든 것으로부터 얼마간은 남남이 될 수 있겠구나.

지금 2년 동안 민청련 의장으로서, 민주화운동 대열의 책임을 짊어진 사람으로서 가져야만 했던 외로움과 중압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오늘이다.

무엇보아 잠은 실컷 잘 수 있겠지.

하늘을 올려다보고 바람소리에 마음을 실어서 흘려보낼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유치장 문을 나섰습니다.

몇 번 유치장 문을 뒤돌아보기도 하구요,

서부경찰서 유치장은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수사과 사무실을 지나 복도로 나서는 순간 스산한 어둠이 확 덮쳐 왔습니다.

7~8명의 정사복이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아찔하더군요. 다리도 후들후들거리고, 여러 번 체포당했었지만 이번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허를 찔린 것입니다.

마음도 몸도 모두 쭈글쭈글해지더군요.

이미 꿈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김근태 씨죠? 같이 가봐야겠소."

경상도 사투리의 거한이 내 앞을 막고 나섰습니다.

순간. '이건 구속이구나' 그쯤은 판단했습니다.

 

이 동행 요구에 강력하게 저항할까도 생각했지만 거기서의 저항은 결코 앙탈에 지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초라해지거나 추하게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소, 어딘지 가봅시다."

보호실 쪽으로 뚫린 좁은 복도를 지나 마당으로 나서니 거기 포니 자동차가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유행가 곡조가 입속을 맴 돌다 사라지더군요.

 

사방은 껌껌한데 경찰 10명이 둘러싸고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목을 곧추세우고 그래도 하늘 한 번 쳐다보았지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오기를 세워야 했습니다.

잠과 휴식, 그 어떤 것에 대한 그리움은 모두 꿈이 되어 버렸습니다.

뿌옇게 탈색된 꿈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뒷자서 가운데 올라탔습니다.

왼쪽에서 최상남이, 오른쪽에는 김영두가 앉았습니다.

 

최상남이 점퍼를 벗어 내 머리를 감싸고 눈이 보이지 않도록 한 채 머리를 짓누르더군요.

김영두는 키 188cm, 몸무게 95kg쯤 나가는 거한한데 그 체격이 나를 짓눌러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왜소해지고 허망해지던지, 나는 저항을 할까도 행각해 봤지만 허둥지둥 해질뿐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경우에는 반드시 저항을 했고 싸움이 붙었습니다.

늘 그랬거든요. 한번도 맥없이 강제로 끌려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안되더군요.

분위기가 얼마간 다른 것도 있었지만 일단 구류를 살고 나가는 날이어서 그저 멍하니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간 기가 꺾였습니다.

반쯤 거리를 둔 채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에 대해서 바쁘게 머리를 굴리기도 했구요.

 

도착하기 전까지 마음을 세우고 대응 태세를 갖추겠다고 행각하면서 저항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몹시 씁쓰름했습니다.

이것은 패퇴의 보호, 허약함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을텐데...하고 말입니다.

이리저리 굴려도 오리무중이었습니다.

'그래 부딪치는 거다. 정치군부가 늘 벌여 오던 것이니까 온몸으로 부딪치자.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짐을 하고 또다시 다짐했습니다.

30~40여분쯤으로 느껴지더군요.

차에서 내려 점퍼를 덮어쓴 채 건물 입구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비좁게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누군가 사방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환히 들여다보이는 엘리베이터일 것으로도 생각되었습니다.


박살나 버리는 진술거부권-칠성대 위에 올라가기까지

5층 15호실. 건물 왼쪽 맨 끝방으로 끌려갔습니다.

겉으로는 주저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습니다.

 

방안에 들어서니까 덮어씌운 점퍼를 치우더군요.

사방을 둘러보니 짐작할 만했습니다.

이렇게 낯설고 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뿌연 사방이 점차 빛바랜 황갈색으로 변해가더군요.

생기도 없고 시들어버리는 듯하면서도 이 모두가 비현실적으로, 그냥 일정한 거리 밖에 널려져 있는 듯했습니다.

 

협박자들, 아직은 고문자가 아니었던 이 사람들은 그냥 어떤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듯하더군요.

무슨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모습도 아니고 눈빛에도 오직 회색빛의 냉담함,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더군요.

백남은은 김영두, 정현규, 최상남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 옷을 벗기라고요.

처음에는 약간 저항을 했으나, 몰려서이기도 했지만 아직 살아남은 오기가 발동하여 스스로 옷을 벗었습니다.

팬티만 남기고 모두 벗었습니다.

 

초라함, 빈약함이 덮쳐오더군요. 추워지기도 하구요.

아직 한창 더운 여름이고 더구나 골방에 갇혀있어 절대로 추울 수가 없느데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가는데도 가슴의 한기가 온몸에 퍼져버렸습니다.

발가벗었을 때 오는 당황함과 이 한기가 뒤섞여 몸을 오그라들게 하더군요.

이 사람들 분주하게 들락날락했습니다.

6시 반쯤, 정리된 것처럼 조용해지면서 위험이 닥쳐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김수현이 들어와서 "진술거부를 잘한다지, 여기서도 할거야? 경찰과는 달라."

이어 본인에게 "당신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가 아픈가?"라고 물었습니다.

"피로의 누적이다. 또 방금 구류살고 나오는 길이어서 더욱 그렇다. 민청련 대표직을 그만두어서 어디 휴양지로 가서

몇 달 쉬려고 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몸으로 견딜 수 있겠는가. 당신 많이 깨져야겠구먼" 했습니다.

"내 의지가 살아 있는 한 진술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이 사람들이 씹어뱉는 반말 짓거리, 그것이 역시 속을 뒤집어 놨습니다.

지난 2년간 못 들어보다 경멸조 인사에 부아가 솟았습니다.

늘 이 반말 짓거리로부터 왜소해지게 되고 졸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김수현이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명령하더군요. 거절했습니다.

주춤주춤 밀려서 얼결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비통한 심정이 되더군요.

 

뒤이어 백남은이 날카롭게 소리쳤습니다.

"정말 버틸 거야" 여기서도 진술거부가 통할 줄 알고? 어림도 없어."

이에 대해 "끝까지 버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갈라져 나더군요.

그것은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이면서도 한편 더욱 공허해지기도 했구요.

하지만 '설마 너희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안돼지'라는 무너져가는 듯한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세우려는 안간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백남은은 "좋다, 해보자. 우리는 너를 까부술 것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논리적으로 앞뒤 아귀가 맞춰져서 사고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여러 생각이, 장면이 떠오르고 또 중복된 채 다가왔습니다.

필름 한 커트에 여러 장면이 겹쳐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짧은 순간에 정말 수많은 영상이 닥쳐오고 사라지고, 또 다가오고 쉴 새 없이 돌아갔습니다.

늦가을 초겨울 문턱에서 바싹 마른 낙엽들이 바람에 휘날려 올라가다가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발자국에 밟혀서 바스러지는 것이 자주 어른거리기도 했고요,

 

피카소의 청색지대, 비쩍 마른 악사 그림이 가물거리기도 하더군요.

헐벗고 굶주린 어느 병자일 것 같은 물골로 어정쩡하게 서서 말입니다.

사실 나는 평상시 미사에서 자주 읊조리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구절에

은밀한 거부감을 가지고 무시해 버렸었는데 이 순간에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때 이 협박자들은 넓은 밴드 - 신축성 있는 -로 눈을 가려 버렸습니다.

 

짙은 회색빛으로 앞이 차단당했습니다.

외부의 지시와 명령에 굴종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아득함.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부산 미문화원 사건'으로 고문을 받았다고 널리 알려진 그 학생들의 절망감과 외로음이 찌르르 핏줄을 울리더군요.

아우슈비츠 나치수용소에 갇혀 있던 그 유태인의 얼굴이 내 형제처럼, 아주 잘 아는 얼굴처럼 클로스 업 되었습니다.

사진에서 볼 때,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 느꼈던 그런 연민이나 동정심이 아니라,

심장을 쿡 찌르는 동통과 더불어 그 유태인들의 눈물이, 아우성이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던 그 소경이 바로 나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 협박자들의 손에 이끌려 방 한 가운데를 어기적어기적 거리고 나아갔습니다.

방바닥이 쑥 꺼졌다가 다시 올라오고, 또 꺼지고 올라오고 했지요.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면서도 '아주 작은 물방울이 되어 쓰러져 어릴 수는 없을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하는 심정이 되었구요.

그러나 아직 나는 답답했습니다.

이렇게 거꾸러질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고문을 정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너희들의 협박일 뿐이다.

그런 빈 협박에 내가 굴복할 줄 아느냐,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속셈을 다시 확인하면서

고문대, 칠성대에 마침내 다다랐습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이름으로 공개된 DJ 대통령의 어느 날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71년 국회의원 선거 시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어 다친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서 김성윤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가슴이 칼로 베인 것처럼 아팠다.

지팡이, 절룩거리는 DJ에 대한 무서운 조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증오와 적개심에 번득이는 야유가 몸서리치게 몸을 덮치는 느낌이었다.

 

지금 그 ‘지팡이’는 오히려 그리움과 어떤 의지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정치인이었을 때, 특히 90년대 대선 후보로 나섰을 때, 상당수의 언론은 절룩거리는 김대중 선생을 비웃었다.

그렇게 절룩거리기 때문에 대통령 될 자격이 없다고 궤변을 늘어 놨다.

 

다리를 절게 된 것은, 대선후보 유세기간 도중, 무안에서 덤프 트럭의 기습에 의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직접 실행했거나, 아니면 기획·지시하고 다른 팀이 실행했을 거라는 건 모두가 짐작하는 일이다.

 

무안사건이 있은 지 2년여 후에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선생은 납치당했다.

꽁꽁 묶어서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박정희-이후락-중정 책임자, 주일 한국대사·공사들이 주모자, 주동자, 공범들이었다.

 

1996년 가을 쯤 이었다.

연말에 미국 존스·홉킨스 의과대학 병원에 가서 수술 받기로 일정이 잡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직감으로 다가왔다.

 

먼저 지금 이대로 일상생활에 큰 불편은 없지 않으시냐고 직접 질문을 드렸다.

“그렇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반대한다.”고 분명하고 강력하게 말씀을 드렸다.

 

이유는 3가지였다.

 

첫째, 조병옥 박사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병 고치러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지만 그때 국민의 절망과 통곡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시대가 달라져서 그런 일이 없겠지만, 그러나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둘째, 다리가 불편하신 것은 교통사고를 빙자하여, 살해하려고 했던 추악한 음모 때문입니다.

그래놓고 저들은 선생님 절룩거리는 것을 비웃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도덕하고, 적반하장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못 견뎌서 수술하시는 것은 저들에게, 저들의 말도 안 되는 선동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안됩니다. 가시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장애인들이 생각납니다.

장애인들의 90%가 후천성이랍니다.

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태반은 산업재해와 교통사고 때문에 장애가 발생한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수술 받아서 나아지실 수 있겠지만, 다른 장애인들이 느끼게 될 모종의 ‘거리감’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결국 가시지 않았다.

물론 당신 스스로 결정하신 거지만, 내가 드린 말씀도 경청하신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남겨진 일기에서 본 ‘아프다’고 하신 허벅지 관절, 그 구절이 내 가슴을 친다.

혹시 나 때문에 평생 그 허벅지 아픔을 짊어지시고 사신 것은 아닌가?

 

아니 이제 영면하셨기 때문에 그 허벅지의 아픔도 사라졌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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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소리

인간도살장, 이것은 지나친 표현일지 모릅니다.

누군가가 이를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수긍할 수도 있습니다.

또 누가 지나치게 소녀적이고 감상적인 용어표현이라고 비난한다면 맞서서 핏대를 올리면서 그렇지 않다고 나설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85년 9월 남영동 거기는, 적어도 나에게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비록 설득력 없고 상투적인 표현일지라도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물론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면 누구나 쉽게 알아듣겠지만 그야말로 가슴으로,

아니 온몸으로 그 고통과 공포에 발가벗긴 채 내던져졌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본인이 이렇게 얘기를 해도 저 '은하철도 999'에 등장하는 어느 별의 우주해적단 악당들의 짓거리와 비슷하구만

하고 지나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남영동, 거기서 비명을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명을 듣고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직접 고문을 당할 때는 극도로 혼란되어 있어 앞뒤가 뒤바뀌고 중복되어 버려서

어떤 면에서는 제대로 판별을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견디지 못해 헛구역질을 해댔습니다.

9월 9일, 그러니까 내가 고문을 받았던 8일과 10일 사이, 그날 나는 하루종일 밤새워 대답하며 쓰고 베끼고 하였는데,

그 날 밤 내내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비명, 그 끔찍한 비명,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그 비명을 들었습니다.

그 비명들은, 사람들이 바뀌면서 계속되는 비명들은 절대로 송곳같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번쩍거리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돼지기름처럼 끈적끈적하고 비계처럼 미끄덩미끄덩한 것이었습니다.

살가죽에 달아붙은 그 비명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멱이 따진, 흐느껴 대는 낮고 음산한 울려 퍼짐이었습니다.

무슨 슬픔이나 비장한 느낌이 들기는 커녕 속이 완전히 뒤집히고 귓구멍을 틀어막아도 파고 들어오는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본인은 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비명 소리의 임자같은 운명이거나 더 지독한 처지에 빠져 있었음에도,

솔직히 얘기해서 어떤 종류의 연대의식이나 동정의 마음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이 학생들일 것이라는 것을, 더구나 나이가 아직 어린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마음속으로나마 위로와 격려의 말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야 한다고, 너무나 편한, 당연한 결론을 내렸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로 그게 안 되었습니다.

혹시 그 비명의 주인공들에게 동정하는 기색이나 비명, 지워질 수 없는 그 비명소리에 괴로워하는 것을

고문자나 신문자들이 발견하고 몰아치지나 않을까 싶어 태연한 척하려고 부단히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들켜서 이를 핑계 삼아 고문하지 않을까 싶어 전전긍긍했습니다.  

이런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이젠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거의 잃어버렸구나 하면서 허탈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렇고, 할 수 없는 일이고, 오늘밤에는 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할 텐데, 아직 차례가 남은 사람이 많을까

어떨까에 대해 속을 태우면서 조바심을 쳤고 그러다가 날이 훤히 밝았을 때 '후~'하고 숨을 몰아쉬기까지 했습니다.

늠름하게 버티지 못하는 저 비명소리가 듣기싫기도 했고, 울면서 애걸복걸하는 것이 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미웠던 것은 이 구걸하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라디오 소리였습니다.

고문당하는 비명소리를 덮어쒸우기 위해,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크게 틀어놓은 그 라디오 소리,

그 라디오 속에서 천하태평으로 지껄이고 있는 남자, 여자 아나운서들의 그 수다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파괴가 감행되는 이 밤중에 오늘 저 시적이고자 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라디오 소리 사이사이에 들리는 고문 기술자 - 장의사집 둘째 주인 - 의 고함과 심문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오고

비명소리, 라디오 소리는 어쩐지 비현실적이고 무게라고는 하나도 나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반면에 저 심문자, 고문자의 고함소리는 위엄 그 자체였으며 천근만근의 무게가 나갔습니다.

현실적이며 살아서 펄펄 뛰는 것이라곤 오직 이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이날 고문을 받지 않고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날이 희미하게 밝아옴을 확인하자 나는 버스나 택시운전기사 옆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소녀의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처럼

앞으로도 매일 '오늘도 무사히'가 되기를 빌면서 허리를 곧추세웠습니다.

 

그러면서 '25'시인가, 예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전개되었습니다.

인간들에 대한 집단적 파괴. 복수.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조그만 어느 시골에 하늘을 뒤덮으면서 나타난 폭격기는 민가에 새까맣게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그 동네는 초토화되고 어린이를 비롯한 남녀노소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 가버렸는데, 그때 영화는 한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집 내부를 비추면서 죽어 넘어진 시체를, 어지럽게 파괴된 가재 도구를 보여주다가 갑자기 그곳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가지,

그것도 화려하고도 때깔 나는 왈츠연주곡을 틀어대는 라디오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때의 분노.절망.허무감이란...,

남영동에서 이날 밤을 새우고 새벽녘이 되었을 때까지 아주 생생하게 그 장면이 되살아났습니다.

분노, 아니 분노할 힘, 그것은 머리를 세우지 못하는, 오직 절망감과 허무함을 동반한 채였던 것입니다.

고문담당 기술자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두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 고문을 가했던 사람들, 고문담당 기술자를 혹시 무슨 귀신, 악마나 도깨비처럼 연상할 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또 남영동을 본인이 인간도살장이라고 했다 해서 복마전으로 떠올릴 필요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고문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저주받은 무슨 표지가 얼굴에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증오심이나 적개심으로 표정이 일그러졌다거나

눈에 살기가 감도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약간 스스로 큰 체하고 가식적이고 위협적인 목소리를 짓고자 하지만 이것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고,

별 뚜렷한 구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느 면에서는 똑똑하고 야무지며 또 겸손한 척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미소, 장난기 어린 미소조차 짓기도 하며 한숨도 쉬는, 어디서나 부딪칠것 같은 그저 그런 경찰관들 중의 한 사람 한사람이었습니다.

결혼한 딸의 생활 걱정, 그 사위가 학생운동 출신 전과자여서 걱정이 된다고 얘기하는 사람조차 있었습니다.

군대 나간 아들에 대한 걱정, 대학진학을 눈앞에 둔 자제를 가진 어버이로서 당연히 부딪치는 조바심,

서민이면 누구나 안게 되는 살림살이 걱정, 박봉에 대한 불평등 종로나 명동의 어느 길거리에서도 부딪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저 끔직하고도 무서운 고문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 동료에게 고문을 가하고도 혼란에 빠지지 않을 지 모릅니다.

 

나는 이 사람들의 저 태연함, 고문을 가하면서 짓는 야릇하고도 냉담한 미소에 질려버렸습니다.

그 철판같은 배짱과 강심장에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러고도 이 사람들이 견딜 수 있을까, 무슨 대단한 비밀이 감춰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만, 자기기만과 강제되는 타인기만의 조작된 제도위에 서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구속 또는 고문을 결정하고 방향을 결정짓고 대상을 선정하여 증오심을 키우고 확대시켜 나가면서

선전을 감행하는 사람이나 그룹은 저 어디 다른 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남영동 사람들은 제시되고 결정된 방향으로 자기들의 직무를, 아니 작업을 추진해 나가면 그뿐입니다.

이들은 예정되고 설정된 모종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단정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불온하고도 불순함,

그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획득해 내야 합니다.

만들어 내는 것조차 충동질 당하는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미리 증오와 타도의 대상으로 본인은 설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미소, 때로 보이는 그 미소 그 자체야 나쁠리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오직 표면적인 것일 뿐이고 사실 별 의미가 없으며,

자신들이 기정사실화 해버린 목표를 성취해 나가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밥 먹듯이 인간파괴행위를 저지르고도 '또라이'가 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 동료에게 적대하고 가혹한 고문과 능욕을 가하는 훌륭한 부업제도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인들이 떼를 지어 나치 국가였던 독일을 방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글은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처럼 맹목적이고 잔인했다고 들었고 또 그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였던 독일인들이 자신들과 하등 다름이 없는 인간적 이상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더구나 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묻혀 있는 병사들의 공동묘지를 방문했을 때의 충격은 참으로 컸다고 했습니다.

그 병사들의 묘비명에 쓰여있는 "여기 그 가족을 사랑했던 누구가 묻혀 있습니다"는 표현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오직 증오와 경멸 외에는 인간 상호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상상했던 이 독일인들이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발견한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도화되고 조직된 인간파괴행위, 자기기만과 강제된 타인기만의 사회제도화는 인류를 언제나 맹목적 충동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저 나치나 파시스트 국가의 지나간 옛날 얘기가 아니고, 오늘 개명한 20세기 후반 이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노골적으로 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나 또 몇사람 개인들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닌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공권력의 자의적 지배, 야만적 고문으로부터의 자유보호는 지난 수 백 년간 인류의 불요불굴한 노력과 투쟁의 결과였으며,

전 세계 모든 국가 헌법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85년 9월 남영동에서 겪은 저 끔찍한 사건, 그것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빛바랜 어떤 사진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어렸던 시절, 대청마루 윗벽에 걸려있던 사진틀 속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진 같이 누렇게 변색되어 버린 것입니다.

몇 개월 전의 이 사건으로 아직 신체적 휴우증과 흉터가 남아 있는데도

기억이 이렇게 아사무사하게 되는 것이 이상스럽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식의 표면이 이렇게 되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어찌보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조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버렸던 그 고통과 공포를 생생하게 머리에,

의식의 표면에 떠올려놓고서는 오늘의 내 생활을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는 것이니까요.

이 상처를 우선 의식의 표면에서 지우려고 안간힘을 써왔던 것이고, 그래서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이겠지요.

만일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아마 이을호씨처럼 본인도 지금쯤은 정신병원 어느 구석방에 쳐박혀져서

혼란의 수렁에 빠져 버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적 혼란을 그냥 심리적으로 허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쉽게 몰아세워서는 안됩니다.

감당할 수 없었던 그 고통과 상처, 그로 인한 깊은 심리적 상처 - 어쩌면 죽음의 일부분이거나 그 그림자일지도 모릅니다 - 로부터

탈출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지상명령이니까요.

 

고통, 공포, 강제에 굴복한 자아가 그것을 거부하는 자아의 이 절망적 분열의 타개책은 우선 현실로부터 전면적인 후퇴를 하든지

- 정신착란 속으로 - 아니면 그것을 지워서 중압의 무게를 완화하는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하나 뿐인 것입니다.

 

본인에게 후자 선택이 가능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이을호씨와 같이 혼란,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지금도 늘 머리를 옭죄는 두통이 심하고 때로 균형감각에 이상이 오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의식의 심층 저 아래에서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상처의 깊어감입니다.

맥을 놓고 멍하니 않아 있는 경우에 그리고 살포시 잠이 들거나 또는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에 있을 때 바로 그 때마다

느글느글한,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남영동의 아픔이 덮쳐 오는 것입니다.

남영동의 그 고통과 공포, 상처는 수많은 필름에 찍혀서 본인의 심층 거기에 간직되어 있고,

조금만 방심하면 활동사진으로 핑핑 돌아가면서 나를 거꾸러뜨리려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정말로 지워질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발버둥쳤습니다.

고통과 공포의 무게를 줄이려고 말입니다.

 

밤이 늦으면 기차바퀴 소리가 들리고 기적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습니다.

이건 당시 본인에게 큰 위안이었습니다.

 

바깥 세계를 그 기적소리에서, 기차바퀴 소리에서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절망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나를 밖의 세계와 연결시키는 끈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 기적소리는 나를 실어서, 내 영혼을 담아서 어린 시절 행복했던 그 시절로 되돌려 보내주곤 했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뿐이었습니다.

잠시의 회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구멍이 숭숭 뚫린 방음벽 네모진 흰 벽이 그때마다 내 이마를 '탁!' 치면서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소스라쳐 놀라면서 나는 더욱 왜소해져갔습니다.

 

이 남영동에 끌려온 이래 쉴 새 없이 작고 왜소해져서, 그곳 시멘트 바닥에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았던 나는

짓밟히는 검불처럼 볼품도 무게도 없어져 갔던 것입니다.

어떻게 당해도 좋은, 그래도 마땅한, 마침내 공중으로 사라져 버릴 왜소함 그 자체였습니다.

 


민주주의와 평화의 길, 꿋꿋이 가겠습니다.


이제 분노한다는 표현도 더 이상 할 수가 없습니다.
가슴 아픈 눈물도 흘릴 수가 없습니다.

 

시청 앞 분향소에서 슬픔에 겨운 시민들을 만나는 일이 이렇게 죄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당신에게 빚을 졌습니다.

 

말씀하실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민주주의!

죽음으로 다시 시작되는 민족화해의 길!

 

온 힘을 다해,
거꾸로 가는 역사를 막아내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이루었던 민주세력의 대연합, 정권교체의 역사를 다시 이루어 내겠습니다.

그 길을 변함없이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김대중 대통령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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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2월 12일 총선거에서 정치군부는 국민의 민주화열망에 의해 일대 타격을 받았고,

이후 이른바 유화국면이 전면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치군부의 대응은 바로 이중적 대처였습니다.

얼굴마담의 위치에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을 배치하여 대화와 화합을 외치면서

노동자, 청년학생등 민중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탄압을 강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기도로 나타났습니다.

'학원안정법' 제정기도는 단지 학생운동만이 아니라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을 겨냥한 정치군부의 민중운동탄압음모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신민당 등 제도정치권은 물론 재야 등 모든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단결하여

민중민주화운동 탄압 저지를 위해 공동대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정치군부는 '학원안정법' 제정기도에 대한 범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그것을 철회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군부의 탄압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탄압이 시작된 것입니다.

민주운동단체의 핵심적 간부들을 구속하여 모든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연계를 막아내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군부는 민청련과 본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본인이 구류를 받고 있을 때라고 기억되는 7월 초,

민청련 상임위원회 김병곤씨와 기독교청년협의회(E.Y.C) 총무부장 황인하씨가 구속되었습니다.

이들은 남영동에서 조사를 받고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족과 면회를 하게 되자마자 이구동성으로 "근태형 괜찮으냐"고 물었으며

본인을 걱정했다는 말을 가족으로부터 들었습니다.

특히 황인하씨는 기독교 민중운동인사들에게 민청련과 본인을 지원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인의 구속, 민청련에 대한 탄압, 그것도 아마 대대적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인과 민청련에 대한 조치는 이미 정치적으로 결정된 것이었으며 다만 그 계기, 아니 어떤 꼬투리를 모으고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사실 이때 한편 두렵기도 했지만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고,

또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약간의 마음준비를 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좀 비켜서 나갈 수는 없을 것인가' 그렇게 되면 참 좋겠는데....'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본인은 남영동을 하수인으로 하는 추측수사. 예견수사의 명백한 대상으로서, 목표로서 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본인의 구속은 시간문제였던 것입니다.

공개 지명수배

이로써 본인에 대한 구속집행이 카운트다운된 것은 공지의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어떻게 할까 망설였습니다.

여하튼 85년 8월 10일 제5차 민청련 총회를 당시 삼엄한 조건 아래에서 무사히 치르고

대표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으며,

무엇보다 당시 전 국민을 긴장상태로 몰아넣었던 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 기도의 유보 내지 철회,

즉 새로운 유신시대로 복귀기도 중지를 천만다행으로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학원안정법 제정강행을 밀고나가는 정치군부 앞에 본인은 자신의 안전문제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으며, 그

래서는 안 된다고 채찍질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류조치는 모든 국민에게 일종의 선물, 은혜처럼 다가왔습니다.

사실 이른바 학원안정법은 국민모두에 대한 노골적인 협박이었으며, 국민과 대결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벌써 숨막히는 갑갑함과 긴장, 불안이 몰아쳐 오고 있었는데, 그것을 중지한다니 이건 정말 다행한 일이고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정치군부는 대단히 유리한 정치적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런 유리한 분위기를 구속 선풍을 일으켜 깨뜨리고 오리혀 자신들에게 부담이 되는 짓을 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본인은 비교적 느긋할 수 있었고, 더구나 신문에 공공연히 수배를 해 놓고도 사실상 수사기관이 없었기에

'이제 괜찮은 것이다'는 결론조차 내렸던 것입니다.

피신하지 않은 이유

외적 분위기가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고 민주화운동 선상에서 공인으로서의 역할이 이제 어느 정도 축소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속되거나 노골적인 탄압대상으로부터 이제 멀어져 가기 시작할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했고,

주변에 있는 동료들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이하게 생각한다'는 충고를 여러 사람한테 들었고,

특히 여러 통로를 통해 '다치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끊이지 않게 들려 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피신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민주운동단체의 대표였던 사람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당당하지 못한 태도는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당시는 피신으로 인한 긴장과 불안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며 정말 내키지도 않았습니다.

어려움은 오지 않을 것이며, 설사 온다 하더라도 김병곤씨나 황인하씨 경우처럼 된다면 최악의 경우

감옥에서 휴식을 취하고 오히려 마음을 깊게 하는 시기로 삼자는 은밀하면서도 야무진 계획조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당할 끔찍한 일이 앞에 있는 줄 알았다면, 선택은 너무나 분명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우리 모두를 위해서 아니 정치군부 자신을 위해서도 피신했어야 했습니다.

 

저들은 본인을 핀으로 과녁에 고정시켜놓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소리없이 칼날을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언제나 무엇이든지 감행할 채비를 갖추고 노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약간의 냄새가 나는 것으로 단정하고 평상시 키워왔던,

반드시 불온, 불손하고 거대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열망을 확인하는 작업에 돌입한 것입니다.

이 확인 작업을 위해서는 그 무엇을 해도 좋고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전태일 재단》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합니다.

 세상에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태일과 그 어머니 이소선 어머니에 해당하는 얘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 전태일이 ‘전태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했던 절규를 이 사회를 향해,

우리의 양심을 향해 다시 또 다시 끊임없이 주장해 온 이소선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왜 회의와 흔들림이 없었겠습니까.

두려움도 고통도 작지 않았을 거구요.

 

그러나 정말로 이 소선 어머니는 아들 아니 참된 사람으로서 전태일의 외침,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그 말을 놓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태일 재단은 사실상 전태일-이소선 재단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이소선 어머니가 ( ) 괄호 속에 이미 들어가 있다고 봐야겠지요.

 

전태일은 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의 비전이고, 우리의 희망인 것입니다.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법 소동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미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입니다.


직장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 정상적인 정치·경제의 도리입니다.

또 이른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도 거꾸로 나갑니다.

100만 명 해고대란설이라든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의 유연성이라느니 하면서 말입니다.


비정규직 기간 제한은 사실상 폐지하자는 얘기입니다.
모든 노동자를 비정규직화하자는 말입니다.
그것이 최대의 노동유연성을 보장할테니까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전태일이 역사 속에 갇혀져서는 안되는 상황입니다.


노동하는 사람의 자부심.

노동하는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모르는 사람은 이 사회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것을 큰 소리로 강조하고 싶다.

이소선 어머니 그리고 장기표 이사장과 함께 외치고 싶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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