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땅굴과 엘리베이터

법원 검찰청 밑으로 굴이, 침침한 땅굴이 뚫려 있는 줄은 나는 몰랐다.

감옥 출입이 잦았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얘기들은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건 얘깃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지 모른다.

쇠창살 사이사이에 맺히는 서러움만 얘기해도 끝이 없을 텐데, 이 땅굴까지 포함시키면 필경 지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땅굴 얘기를 좀 해야겠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기록해둘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구치감으로부터 검찰청 빌딩 5층 공안부 검사실까지 걸어가는데 꼭 30분이 걸렸다.

논스톱 엘리베이터를 탔는데도 말이다.

보행을 아주 느리게 할 수밖에 없었고, 계단은 부축해서야 오르내릴 수 있었다.

나는 이 땅굴에 들어서면 늘 환상적인 세계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갈래 길도 있으며 계단도 있다.

가끔씩 흐릿한 바깥 빛이 조금씩 새어드는 데도 있고.

 

그러나 무엇보다 굴 벽 여기저기 걸려있는 노란 불. 이것이 나를 어질어질하게 했다.

여기 들어서면 속이 느글느글해지고, 굴 전체가 왼쪽으로 기우뚱 오른쪽으로 기우뚱 끊임없이 흔들렸다.

이런 것을 롤링이라고 하는지 핏칭이라고 하는지 헷갈리지만, 멀미가 날 것 같아 멈춰서서 벽에 기댄 채 호흡을 조정해야만 했다.

눈을 감고 자꾸 속을 내리 누르면서.

 

어떻게 보면 자베르 경감에게 쫓겨 도망쳤던 장발장의 암담한 하수도 같이 생각되었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악당 무림인들을 쳐부수기 위해 당당하게 쳐들어갔을

무협지 속의 의협심 있는 청년 검술인의 지하통로일지도 모르겠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몸을 피하는 장발장은 분명 아니었고,

불의한 도배를 무찌르기 위해서 짓쳐 들어가는 경천동지할 힘을 가진 청년 검객도 아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장발장과 청년 검객이 짬뽕된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런 수백명 중의 하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 땅굴을 구역질내면서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9월말부터 11월말까지 두어 달 동안. 남영동에서 송치되던 날 말고는 맨 첫 번째로 가막소에서 검찰취조 호출을 받던 날,

나는 앰블런스인가 지프차인가를 타고 구치감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땅굴을 걸어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도관과 더불어 검찰서기의 에스코트를 구치감에서부터 받았다.

이 정중한 배려에 나는 감사하는 마음조차 가졌다.

내가 고문받아 엉망이 된 것을 알고 이런 배려를 해 주는 것인가.

어쩌면 VIP 대접을 하느라고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그런 중에도 기분 나쁘지 않아서 은근히 희희낙락하며 이 땅굴을 통해 검찰청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피의자, 피고인은 모두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데

유독 나는 엘리베이터를 지하층까지 끌어내려 손님으로는 오직 혼자 타고 5층까지 논스톱 직행했다.

어떻게 실수로 1층이나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서 문이 열리게 되면

검찰 서기와 교도관이 엄숙하게 입장금지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오는 짜릿한 그 기분을 누를 수 없어 높은 사람들은 별 희한한 짓도 다하는 것일 게다.

 

내 손에는 벨기에제 특별 수갑이 채워져 있고, 벌건 포승줄이 칭칭 동여매져 있지만 나는 여유있게 웃어 주었다.

혹시 내가 정치인 경력이 있었다면 손으로 V자를 그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조바심쳤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도 약간은 머리가 회전되는 편이어서 이런 특별 에스코트에 '홍이야 홍이야' 하며

잠에 취해 꿈에 취해 계속해서 헤맬 리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태는 분명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철저한 고문은폐 수단이었다.

아니 완전무결한 고문은폐의 예기치 못한 실패로 인해 책임추궁을 당한 검찰이 취한 그렇고 그런 것이었다.

 

이 지하 땅굴을 가끔씩 오가며 학생들, 오랏줄로 꽁꽁 묶여서 더욱 기가 사는 학생들의

아는 체하는 인사와 목소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을 차단하기 위한 권력의 방어조치였다.

고문받은 얘기를 주고받아 그것이 가막소에 퍼지고, 그리하여 바깥으로 흘러나가면 골치가 아프므로....,

 

다른 모든 기회는 완전 차단이 가능한데, 가족, 변호인, 다른 재소자와의 만남은 물론

담당교도관 이외에는 누구도 접근이 봉쇄되는데, 이 땅굴이 성가신 것이다.

 

사실 나는 거기서 많은 학생들과 부딪쳤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정어정 벽을 붙잡고 기어가는 나를 보고 대략 알아봤으며, 큰 소리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슬슬 고문 얘기도 하고 시간은 불과 3~4초 정도씩 밖에 안되었지만 꽤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검찰 서기의 에스코트는 대략 한 달 반 이상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약화되고 흐지부지되기까지 시간이 제법 흘렀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 편 사람들은 마음 놓고 만나서 서로 눈빛도 교환하고 서러운 가슴을 열어보이기까지는 세 달 여가 걸렸던 것이다.

 

그동안 검찰 서기의 에스코트 차단을 포함해서 정치군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던 것이다.

단 한 차례의 예기치 못한 실패를 제외하고 정치군부는 완전무결하게 성공했다.

그러나 단 한 차례의 실패, 그것은 대단히 치명적이었고 그들에게는 큰  정치적 부담이 지워졌다.

고문의 증거, 발뒤꿈치 상처 딱지 탈취사건

85넌 12월 31일. 고의적인 변호사 접견 봉쇄가 풀린 지 닷새가 되던 날, 나는 흥분하여 깊숙이 간직해 두었던,

양쪽 발뒤꿈치에서 아물어 떨어진 상처딱지를 이돈병 변호인과 목요상 의원에게 드리면서 재판의 증거로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이 통할 리 있겠는가.

행형법상 교도관 입회라는 것을 이용, 간섭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지당하고 결국은 강탈당하고 말았다.

그들로서는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고문의 증거가 내 가족이나 민주화운동가 손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해야했고,

그래서 나는 모든 주의를 다했던 것인데 정치군부의 뻔뻔스러움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임이 또다시 증명되었다.

 

그토록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고도 또 당했으나, 역시 나는 맹하고 순진한 경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여러 사람이 보았다 하더라도 뭐든지 필요하다면 언제나 깔아뭉개버리는 그들인데도....나는 또 설마 했던 것이다.

정치권력의 수작은 이렇게 성취되었다.

절취의 시도. 실패, 노골적 강탈, 말썽이 생길 소지가 있는 사람들의 사전 인사이동 조치, 그리고 거짓말로 진행되었다.

특권적 군부의 본질이 이 작은 사건에서도 축약되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폭력적 대처와 뻔뻔스런 은폐, 그리하여 끊임없이 불신과 증오를 조장하고 갈등과 대결적 분위기를 반복해서 불러 일으켰다.

절취의 시도는 이랬다.

변호사 접견을 끝내고 내 방으로 돌아와 대략 한 시간 쯤 지나자 면도를 하라며 면도사가 왔다.

보통 병사는 목요일에 면도를 하는데 금요일에 온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또 이상한 것은 다른 때와 달리 방 바깥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다른 방에 있는 재소자들에게 내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언제나 방안에 앉아서 면도를 하곤 했기에 묘하게 생각했었다.

 

문밖으로 나가 앉았더니 다시 내 감방 안을 볼 수 없는 거리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좀 이상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거절할 필요가 없어서 그대로 따랐다.

면도를 시작하자 곧 검방 담당 교도관이 내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옆모습을 보니 얼굴이 굳어진 표정이었다.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서 면도를 중단시키고 내 방으로 들어가니 역시였다.

나는 그동안 모은 상처 딱지를 이들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평범하게 휴지에 싸서

두루마리 화장지 가운데 틈새에 끼워 놓았었는데, 검방교도관은 이미 상차딱지를 싼 휴지를 훔친 다음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변호인 접견시 이들이 똑똑히 보았고. 이에 대해서 즉시 보고를 받은 가막소 간부들과 또 뭐시뭐시들은 절도를 지시받았을 것이고,

그 하수인으로 이 검방 담당관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변호인에게 전달하는 것을 방해받은 뒤 나는 줄곳 불안해 했지만 또 '설마'하고 화장지 틈새에 끼워 놓았으니,

이 교도관이 찾아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던 것이다.

이 배신감이라니, 이 저주받아 마땅한 가증스러움이라니!

얼굴이 확 달아오른 나는 "생사의 고비를 넘어 온 나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교도관은 쩔쩔매고 주저하다가 십 분 정도 지나자 마지못해서 모자를 벗어 자기 이름 써 놓은 곳,

거기에서 휴지를 꺼내어 놓았다.

나는 이번의 절취 시도, 도둑질은 이렇게 막았지만 또 다시 훔치러 올텐데,

특히 내가 없을 때는 어디다 두어야 하나 궁리하면서 막연해 하고 있었다.

이럴 즈음 권력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염치 따위는 벗어 짓뭉개 버리고,

주저하지 않고 강도의 본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서는 나의 상상력,

아니 우리의 양식범위를 간단하게 넘어버리는 본래의 흉측한 모습이 나타는 것이다.

검방 담담 교도관이 물러간지 십여 분이 되었을까, 최덕이라는 주임이 와서 내 방 창문을 열고

"상처 딱지는 불법소유이니 내 놓으라"고 협박을 했다.

 

"사람은 최소한도의 양심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윗자리에서 시킨다 해도 해야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지 않는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나는 외쳐댔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 있겠는가.

시비를 걸고 폭력으로 빼앗도록 지시를 받은 이들은 창백하게 질릴 것도 같고, 겁을 잔뜩 집어먹는 눈으로 그냥 돌진해 왔다.

가막소 간부들은 싸우는 소리가 시끄러워지자 다른 방 재소자들은 목욕을 보내서 텅 비게 해놓고 설쳐 대었다.

 

그들은 나에게 욕을 하고 공갈도 쳤지만 이것이 통하지 않자 나를 끌어낸 다음, 방을 샅샅이 뒤지고 엎어 놓았다.

그 상처 딱지는 내 허리춤에 있었으니 이제는 내 몸에 손을 댈 차례가 되었다.

부소장 권태정, 보안과장 송선홍, 보안계장 방을룡, 주임 최덕, 보안과 배치부장,

그리고 교도관 7~8명이 지옥사자 같은 얼굴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가 왔다.

이들이 내 방을 뒤지는 동안 나는 권태정과 의무관실에서 말싸움을 했으나 이미 사태는 너무나 명백하였다.

당시 화내지 않고 마주 앉은 권태정에게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이건 당신에 대한 배려이다. 결국 나는 빼앗길 것이고 그것으로 고문의 구체적 근거는 잃게될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당신 개인들에게도 반드시 피해가 갈 것이다. 난 꼭 그렇게 하겠다. 그러니 당신은 서둘러 내려가라."


최덕의 직접 지휘와 권태정, 송선홍, 방을룡이 치료실에서 지켜보는 사이에 병사 복도로 끌려나온 내게

이른바 검신을 한다며 옷을 벗기려 했다.

 

아! 몸을 부딪쳐 싸워야 할텐데 어떻게 하나.

남영동에서 고문받은 후 나는 공포심에 눌려 그야말로 기가 죽어 있었고, 몸도 제대로 움질일 수 없어서 저항할 수가 없었다.

지켜봐 주는 눈 하나 없이 양팔를 꽉 붙잡은 채 허리띠를 풀은 이 강도들은 허리춤에서 상처딱지를 발견하고 강탈해 갔다.

 

내 몸이 아마 지금만 같았어도 격렬하게 저항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분하고 원통했지만 울화병이 깊어지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안정시켜야 했다.

첫 공판 기일 85년 12월 19일.

남영동에서 고문당한 얘기 뒤에 이 파렴치한 강도행위를 짤막하게 얘기했다.

권태정은 빼놓고. 내 충고를 스스로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송선홍을 증인 신청 했다.

며칠 후 연말쯤, 갑작스럽게 송선홍과 접견과장이 각각 안양교도소와 대구교도소로 전보 발령나 버렸다.

접견과장은 나와 변호인의 접견을 봉쇄했기 때문에, 송선홍은 딱지사건으로 말썽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구치소에는 의아해 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나의 '공판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수군대는 것이 내 귀에도 들려왔다.


이 상처딱지에 대한 재판부의 조회에 대해 구치소측은 '빈 휴지를 압수해서 폐기처분했노라'는 회신을 했다.

고문, 은폐, 거짓말, 중첩적 범죄행위를 감행하고도 여전히 늠름하게 웃어대는 저 정치군부의 가면에

우리는 침을 빝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사건에서 내가 잊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 검방 교도관이 도둑질에 실패하고 간부들에게 몰려 나에게 닥치기 전까지 얼마나 닥달을 당하였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이 검방 교도관은 상처딱지를 손에 넣으면서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만일 이것이 재판부에 제출된다면 자신은 파면됐을 것이고, 나이 50세인데 식구들과 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당신을 평생 저주했을 것'이라면서 씩씩거렸다.

 

이 교도관 얘기대로 됐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용케 재판부에 증거로 현출되었다면

이 구치소 직원과 간부들에게 일정한 부담과 피해가 돌아갔음은 거의 틀림없었다.

나는 교도관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 슬프고 다른 한편으로 혼란이 일어났다.

피해와 부담은 늘 자신 혹은 나와 비슷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만 짊어져야 하는가.

민주화의 귀결은 우리에게만 돌아오는 것이 아닌데,

전제와 자의적 지배로부터 진정한 법 지배의 실현 채무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정치군부가 이런 나약함, 비열함의 틈을 뚫고 끊임없이 공포심을 조장, 확산시킴으로써,

자신들이 지배를 계속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하는 이 무서운 쇠사슬을 어떻게 끊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는가. 왜 우리에게 부담을 안기는가. 당신들의 뜻은 잘 알지만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구속되기 전에도 이런 얘기를 여러 번 들었지만, 구속 이후 그야말로 어디서나 귀가 따갑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도 위에서 시키는 일은 그것이 옳은지, 어떤지를 불문하고 행해지는 모습에서 참으로 깊은 외로움에 빠지곤 했다.

 

나는 이것을 고문 현장인 남영동에서, 이 구치소에서, 검찰에서, 그리고 공판정에서도 반복해서 들었다.

그 표현되는 방법과 분위기는 달랐지만 나는 모두에게서 분명히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는가, 자신들을 이해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들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직위가 낮은 사람은 '이 밥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얘기하는 데에 비해서 직위가 높은 사람은

에둘러서 완곡하게 말하거나 '자리를 유지하려면 별 수가 없다'는 씁쓸한 자조 속에서 그것을 표현했던 차이는 있다.

물론 아주 드물게 적대적인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뭔가 대단히 큰 존재인것처럼 어깨에 힘주는 사람이나

자리가 제법 높아 그에 걸맞게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눈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그 윗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

그런 지식인들을 왜 내가 모르겠는가. 정치 군부의 졸렬한 하수인들을......


나는 이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이 가막소 맨 땅바닥에 침 한번 뱉고 신발바닥으로 문질러 버린다.

 

 

 

 

이번 4.27선거는 국민 분노의 폭발이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었다.

 

물가대란을 비롯한 절박한 민생문제에 대해 해결할 수 있는 아무런 방편도, 실효성 있는 조치도 없었다.

그런 저들에 심각한 패배를 안긴 것이다.

 우리는 반사이득을 본 측면이 강하다.

야권연대가 상당한 정도로 이뤄져 국민이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심판론을 불붙게 만들었다.

민주당도 쉽지 않은 부담을 나눠진 것 사실이다.

순천에서 무공천한 것과 김해에서 야권단일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것,

분당에 위험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손학규 대표가 후보로 나선 것 모두 국민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후보가 직접 당선된 곳은 분당과 강원도지사 둘 뿐이다.

하지만 국민의 관심과 주목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가 민주당을 “지금 이대로”에 안주하게 만들 개연성이 있다.

그것은 민주당을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명박 세력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 “거짓 희망”에 대해 다시 주목하고 관심을 갖게 만들 수 있다.


이번 4월 27일에 동시에 치러진 지자체 장 · 의원 선거에서 양양 군수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둔 곳이 없다.

작년 6.2지방선거에서 그야말로 대승을 거두고서도 그 몇 개월 뒤 치러진 10월 재보선은 참패를 당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지나간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세력은 과반수를 넘어섰다.

 

첫 번째 당선자 워크숍에서 당시 당을 주도했던 이른바 “주류측”이 중도적 실용주의를 내걸었다.

과반수에 고무되어 오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간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른바 “중도 실용주의”를 주장했다.

 

이런 깃발이 국정운영기조에 큰 충격을 준 것은 물론이다.

참여정부는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데, 당시 여당이었던 정치세력은 그것을 반대하는 듯한 중도실용주의 깃발을 내걸었다.

그 결과는 말할 것 없이 혼선과 혼란이었다.

중간계층의 획득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확고한 철학에 기초한 정책과 대안의 제시, 그것의 실천을 통한 중간계층의 참여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번 4.27 분당선거에서 인물론을 강조한 것은 고심에 찬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집결시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있다.

출근 전, 점심시간 때, 퇴근시간 때 30~40대가 대거 투표장으로 나선 것은 아무래도 “심판론‘에 공감하고 동조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심판론이 적극적이고 강하게 제기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일부에서 위험천만한 이야기가 들려나온다.

이번 분당선거에서 인물론이 통했다.

중간층이 민주당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중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중도노선을, 중도주의를 내걸자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중도실용이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로 보이지만 곧 낭떠러지가 나타나는 길이다.


이번 4.27선거도, 작년 6.2 지방선거도, 작년10월 선거도 국민의 승리, 야권연대의 승리였다.

범야권 연대는 조건이 아니라 승리의 전제이다.

그것을 위해 진보적인 다른 야당들, 개혁적인 시민단체와 꾸준히 정책연합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총선과 대선에서 후보단일화를 하되, 감동적으로 이룰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논의해야한다.

원탁테이블을 서둘러서 만들어야한다.

시간이 충분치 않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주당을 개혁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국민이 바라는 절박한 민생문제 해결과 평화, 복지, 민주적 시장경제의 실현을 향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당조직 개혁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모든 인사와 세력에게 공정한 기회가 보장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이 독선적이고 오만한 특권 부자세력의 지배를 끝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전진기지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2011년 5월 2일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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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묵비권의 대가 - 보복구속과 접견 봉쇄

관례가 대충 그렇다고 듣기도 했지만 (한눈으로 봐도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몇 줄의 제1회 신문조서로 끝나고 나는 검사 방을 떠났다.

 

피의자 신문조서라 해봐야 내가 김근태임을 확인하는 것과

뉴욕 타임즈 동경지국장을 만나서 인터뷰한 사실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했으며, 질문과 답변을 합해서 댓 줄 정도였을 것이다.

손도장을 찍고 나는 떠났다.

구치소는 천국이었다.

야수들의 소굴인 남영동에 비하면, 나는 내일부터 처를 면회할 수 있는 곳으로 온 것이다.

 

그런데 기다리는 면회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되지 않았다.

끔직한 고문을 받으면서 나는 바깥 사회에서 정치적인 대 변란이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믿었다.

광주사태 몇 배 가는 대대적 학살이 발생하고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야 그런 용서할 수 없는 고문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79년 YMCA에서 감행한 유신잔당축출 궐기대회, 80년 5.17과 광주사태 때 잡혀 들어갔던 수많은 민주인사. 학생들이 당했던

참혹한 고문을 여러번 들었던 나로서는, 바로 그 역의 추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병걸 선생님이 당한 고문, 백기완 선생님이 반죽음이 되어 버린 고문, 네 번이나 의식을 잃어버렸다는 조성우 씨,

그리고 누구하나 예외없이 엉금엉금 기도록 짓밟혔다는 그 시절이 명백히 다시 시작된 것이다.

 

남영동 방구석에 찌그러든 나에게 그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에게 내 처, 최정순, 그리고 변호인이 나타나다니,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불일치, 혼란을 수습하려면 나도 들을 얘기가 많을 것 같았다.

할 얘기도 있고, 아니 수없이 많고, 분명히 내 처는 매일 빠지지 않고 구치소에 와 면회신청을 했을텐데,

그것을 우격다짐으로 막는 것이로구나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다 해도 더 이상 고문을 당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면회봉쇄는 고문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었다.

그러나 나는 면회봉쇄가 고문의 은폐기도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를 뚫고 나갈 방도, 대처 방안을 조금씩 궁리해 보곤했다.


9월 30일 검찰청으로 끌려 나갔다.

거기엔 김원치 검사와 김종남 검사, 검찰 서기 그리고 타이피스트 한 사람이 그렇게 있었다.

조그만 메모지에 몇 항목을 적어서 나에게 보이고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느냐. 종이에 쓸 수도 있느냐"고 김원치 검사는 물었다.

 

"둘 다 할 수 있다"고 하니까 김 검사는 그러면 "한번 써보라"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잘 기억해 낼 수 없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고 생각된다.

민족민주주의의 내용과 배경, 공급경로와 전파경위,

시민민주주의 혁명, 민족민주주의 혁명, 민중민주주의 혁명의 차이와 각각에 대한 평가 등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을 자술서를 쓰라는 얘기임이 분명했지만,

당시는 나에게 '참고하기 위한 것이니 한번 써봐라'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김검사에게 물었다.

"쓰기 전에 두가지를 묻겠다. 나는 변호사 접견을 하겠다. 또 가족 면회를 하겠다.

그런데 지금 이것이 봉쇄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것이냐? 설명해달라."


이에 대해 김검사는 "변호인 접견은 해야겠지요" 하면서 그러나 가족 면회는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재차 "가족 면회가 금지되었다는 뜻이냐" 묻자 "그렇다"는 것이었다.

검사가 금지한 것이고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이없어 하면서 "금지의 근거와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라"고 요구하자 "다음에 자세히 답변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면회금지는 증거인멸 우려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고문의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서, 인멸하기 위해서 내려진 조처"라고,

그러자 김 검사는 "나를 열 받게 만든다"고 말하며 정말 열을 받는지 얼굴이 붉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하얘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몇 번 되뇌었다.

'열받게 한다고, 한다고....' 이건 모욕적이고 도발적인 언사였다.

고문의 공포 속에 빠져 있는 것은 그때도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본래의 나 자신,

고문받기 전의 나로 조금씩 되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내 속을 건드렸다.

그건 아직 자존심은 아니었고 오기였던 것이다.

 

나는 선언했다.

"이런 조건에서는 말하지 않겠다." 진술거부를 분명하게 얘기했다.

두 사람의 김 검사는 조금 당황하는 듯하면서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나왔다.

능히 추측한 것이지만 협박적인 언사와 분위기가 튀어나오고 조성되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지금 진술거부를 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 협박하는 것이냐. 남영동에서도 진술거부하겠다고 했다가 참혹한 고문을 당했는데,

검찰에서도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것에 대해 협박하는 것이냐" 고 확인했다.

 

김 검사의 말은 '협박'이 아니라 '권유'라는 것이었다.

여하튼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옥신각신했지만, 이것으로서 나의 진술거부는 확고해져 버렸다.

심리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진술거부, 묵비권은 관철되었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권리로서 보장되어 있는 이 묵비권을 해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묵비권을 획득한 대신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니 또 다른 보복조치를 당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적당할지도 모른다.

이 보복조치를 통해서 고문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활동하였다, 정치권력은.


검찰이 공식적으로 말한 것뿐만이 아니다.

공소제기 단계에서 분리 결정하여 - 뉴욕 타임즈 동경지국장과의 인터뷰, '민주화의 길 등- 법적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논고에서 밝혔던 것처럼 묵비권 행사에 대한 보복적인 중형 구형 등이 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고문 상처에 대한 증거보전신청의 기각사유로도 묵비권행사가 핑계로 이용되고,

검찰에 의한 가족면회금지는 물론 서성판사에 의한 면회금지결정에도 마찬가지로 이용되었다.

변호인단에 의한 증거보전신청이 제기된 얼마 후 검찰은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면서

"앞으로도 쭈욱 진술거부할 것이지요?" 하고 다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고마워하는 마음이 되었었다.

그런 사실을 알려준 것도 그렇지만 묵비권을 공식적으로 기정사실화해준 것도 피차간에 좋은 일이었다.

지금 이를 생각해 보면 나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 대처 필요성에서 그러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정치권력은 묵비권행사 여부는 별 문제가 아니었고,

고문의 은폐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묵비권 여부를 현실적으로 확인하고,

이것을 증거보전신청을 받은 법관에게 제시하여 법관이 편하게 기각 결정할 핑계거리로 사용하도록 했을 것이다.

묵비권을 고문은폐의 유효한 수단으로 써먹는 한편 묵비권 고수로 인한 공소유지의 어려움을 다른 방편으로 정치권력은 해결했다.

10월 초순경, 아마 10월 5,6일경이었을 것이다.

최민화, 김희상, 김종복 씨가 구속되었다고 검찰이 통고했다.

 

나는 납득할 수가 없어서 "그 이유가 무엇이냐, 민주제 개헌운동 때문이냐?"고 다그쳐 물었지만, 명료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민청련 간부들에 대한 전면적 구속과 지명수배, 이것이야말로 나의 묵비권 행사에 대한 가장 철저하고 잔인한 보복이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이것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할까, 그런 혼란뿐이었다.

 

왜 이렇게 뒤늦게, 내가 체포, 구속된지 한 달 후에나 새삼스럽게 확대하는가,

특별한 일을 민청련 간부들이 했는가? 그렇지 않다면야....

남영동은 고문을 수단으로 하여 결국 민청련을 반국가단체로 몰아버렸지만

나는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 점에 있어서 남영동 아니 정치권력과 나 사이에는 타협이 이루어졌던 것인데, 즉 나에 대한 보복으로 국한하도록 말이다.

새삼스런 구속의 확대를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사건 내지 사태발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묵비권에 대한 비열한 보복조치였던 것이다.

나에 대한 공소증거확보를 위해서 구속을 대폭 확대해 버린 것이다.

검찰이 나에게 묵비권을 고수하면 오히려 불이익이 크게 돌아갈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참 분한 일이었다.

간 주고 쓸개도 주어 버리고 만 꼴이 되어버렸다.

묵비권 행사라는 말은 얻었지만 야비한 보복을 여러가지 형태로 받은데다가 묵비권 행사 그 자체도

사실상으로는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돼 버렸기 때문이다.

조서가 작성되거나 자술서를 쓰지는 않았지만 고소제기된 사실은 물론 그 주변적 사실을 포함하여

남영동에서 강제된 것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고문의 공포,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이야기했으며, 후에는 진술거부로 인해 관여 검사가 처해 있는 곤경,

상사로부터의 힐난과 질책받음 등이 예상되고 암시되어 그야말로 개인적 차원에서 미안해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또한 검찰에게 온건하게 보이고 싶은 심약한 마음도 작용했지만

변호인, 가족 등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당함으로써 생겨난 이상심리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에게 부담이 되고 불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을 공판정에서 말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검찰에서 내가 한 말에 분명히 구속되었으며, 동시에 그 말을 지켜야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성실성은 아무런 의미도 보답도 없었다.

오직 배신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함 뿐이었다, 돌아온 것은.

만 석달 이상이나, 공소제기되고도 한 달 반 이상 동안 나는 가족은 물론 변호인을 만나지 못했다.

뭐라 할까, 같은 편이라 할까 좋은 나라끼리라고 할까.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이상심리에 빠지게 된다.

극도의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가족을 만나게 된 것은 12월 20일이었으니 구속된 이후 3개월 반 만이었다.

남영동에 있을 때는 물론 검찰 심지어는 서성 판사에 의해서도 면회가 금지되었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죄증을 인멸할 상당한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술을 거부했기 때문에 상당한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고문은폐를 위한 것임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판, 검사들의 형식적인 이 결정은 논리 그 자체로도 위험한 것이다.

즉,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요인이라면

무조건 금지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9월 26일 송치된 이후 12월 9일 변호인 접견봉쇄가 사라질 때까지, 거의 일 주일에 두 번 또는 세 번 정도 검찰청에 소환당했다.

구치소 출발시각은 보통 3시 반 전후가 많았고, 이것이 변호인 접견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당시에도 알았지만,

그러나 사실 전모를 분명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한마디로 비열한 수작을 부렸던 것이다.

더러운 수법을 사용했다.

변호인이 와서 접견을 신청하면 그때야 부랴부랴 출정을 내보냈으니...

이렇게 맞춰서 하는 짓들인 줄은 정말 몰랐었다.

검찰에게 "나도 변호인 접견을 해야겠다"고 여러번 말했다.

그럴 때마다 우물쭈물하고 대답이 명백하지 않았다.

"접견해야겠지요. 검사장에서 하면 어떨까요?" 또는 "변호인이 선임계를 내지 않아서 아직 안 된다"고도 하고.


나는 당시 헌법의, 형사소송법의 변호인 접견권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검찰에게 감쪽같이 속아 버렸다.

여하튼 그때 변호인이 오면 나를 즉시 접견봉쇄하기 위해서 불러냈던 것이다.

검사가 없는 경우 구치감에서 그냥 돌아오기도 하고, 회의가 있다고 금방 검사가 나가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토록 비열할 줄은 몰랐고, 나도 사태를 분명히 파악하지는 못했었다.

언젠가 이을호 씨의 감정유치문제와 시립정신병원에서 국립정신병원으로 옮겨 달라는 얘기를 하러 왔다는 김상철 변호인을

검찰청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었다.

그때 변호인은 구치소로 매일 접견신청을 한다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다가 더욱 나를 확신케 만든 것은 당시 구치소 부소장 권태정의 여러 번에 걸친 확인이었다.

4~5번에 걸쳐 내 방 앞에 머물러서는 "매일 검취 나가지요?" 하고 묻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정해서 말해 줬다. "그렇지 않다. 일주일에 2~3번 간다"고.

그러나 그 다음에 또 와서는 역시 "매일 나가지요, 검취를?" 하고는 다짐했다.

 

이곳 어느 간부 말마따나 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고 있으며,

그것을 직접 확인하는 부소장이 이런 혼란을 일으킬리는 없는 것이고,

매일 검취 나가는 것으로 하여 변호인 접견봉쇄 핑계를 미리 확정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렇게 알고 있는 나는 검찰청에 불려 나가면 관여 검사에게 미안한 마음,

나의 진술거부로 받게 될 직장에서의 곤경에 대해 늘 부담스러워 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마음은 당시 철저히 우롱당하고 있었으니....

변호인 접견봉쇄가 풀린 뒤 구치소 간부 여럿이 이렇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변호인 만나게 되니까, 더 약이 오르지요?"


그러나 그 때는 가슴에 담아 두었던 고문당한 얘기를 하느라고 바빠서 이 뜻을 새겨듣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고의적으로 변호인을 따돌린 것이고,

그것이 검찰은 물론 구치소 간부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놓고도 재판부엔 두 명은 빼놓고 모두 출정을 나가서 변호인 접견을 못 했었다고 대답해 온

권력의 철판같은 뻔뻔스러움이라니...

법이니 법 위반이니 하는 얘기를 하고 싶은 의욕은 정말 없지만 기록을 위해 몇 가지만 더 짚어 보겠다.

우선 9월 26일 송치 당일, 관련 검사들에게 발뒤꿈치 상처와 발등의 전기고문 흔적을 보이면서 조사하여 처방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또 진술거부를 철회하도록 종용받았을 때 나는 "고문을 조사하여 처벌하다면 검찰요구대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두 개의 사건이기 때문에 고문도 조사해 처벌하겠지만

묵비를 중지하는 것이 나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었다.

여하튼 나는 구술을 통해 고소를 제기했던 것이다.

형사소송법 237조는 '구술에 의한 고소를 받은 검사는 고소조서를 작성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검사는 이것을 위반한 것이다.

 

하긴 고소장을 쓰기 위해서 집필하겠다고 요청했고, 그것의 봉쇄에 대해 네 차례나 공판정에서 항의를 해도 꿈쩍하지 않는

이 정치군부의 배짱을 보면 고소조서 따위는 한낱 농담에 지나지 않은 것일 게다.

대한 변협이 고발한 지는 거의 넉달, 본인의 처 등이 고소를 제기한 지 석달이 지나가도

고문에 대한 조사 제스처 그런 것조차도 있을 수 없는 이들인 것이다.

 

그것을 영원히 깔아뭉개버리기로 작당한 결심이 변할 리 있겠는가.

10월 26일 공소제기 이후에도 변호인 접견을 방해하려고 검찰청으로 불러내었는데,

이것도 순수하게 형식논리적으로만 봐도 위법인 것이다.

피고인인 나는 소송주체로서 검사의 주장인 '소인의 이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비판하는 활동'이 보장되어 있다.

따라서 피고인을 수사기관이 신문함으로써 증거수집 수단으로 삼는 것은 당사자 지위와 양립하지 않는다.

또한 신문 당함으로써 피고인은 공판활동에서 물리적, 심리적으로 제한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이 기간동안 나는 검사의 소인을 제시받아 제1회 공판기일 전까지 그에 대한 공격,

방어를 준비해야 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기회를 유린당한 것이다.

법 얘기, 이는 모두 쓰잘데 없는 노릇이어서 이 정도로 일단 마치기로 한다.

다만 끝으로 한 가지 분명하게 할 것이 있다.

검사를 공익의 대표자로 규정하고 있는 검찰청법 제5조를 개정할 시기가 무르익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 이상 주저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


'검사는 정치군부의 옹호자며 방위자이고 동시에 공익의 대표자'라고 하든지,

아니면 너절하고 들척지근한 것 모두 다 빼내 버리고 화끈하게 '오직 정치군부의 옹호와 방위를 그 직무로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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