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콘 전시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본관에 있는 이콘 전시실에서는 수준 높은 이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수많은 회화 작품 가운데서 주목할 것은 러시아에서 제작한 이콘이다.

별도의 이콘 전시실에는 12세기에 제작한 블라지미르의 성모를 비롯해 빼어난 이콘이 잘 전시돼 있다. 

이콘 전시실에 있는 수십 점의 이콘 하나하나는 모두 수준이 높아, 보는 사람들을 감탄시키면서 

신앙의 세계에 한걸음 더 가까이 나가도록 도와준다.

 

이콘 전시실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360~1430년경) ‘구약성경의 삼위일체’

 

여러 이콘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360~1430년경) 수도자가 그린 

‘구약성경의 삼위일체’(1411년경, 112x141cm)다. 

비슷한 형상을 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께서 식탁 주변에 앉아 고요한 가운데 사랑과 친교를 나누는 모습이다.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하나를 이루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우면서 거룩하게 표현됐다. 

식탁 앞의 빈 공간은 이 성화를 보는 사람들을 위해 미리 마련해 둔 자리처럼 보인다.

 

이 이콘은 우리가 이미 작은 상본을 통해 많이 보았기 때문에 친숙하지만

실제로 미술관에서 원작품을 보면 생각했던 것 보다는 훨씬 커서 감동도 더욱 깊어진다.

‘구약성경의 삼위일체’에 계시는 하느님과 눈을 마주치면 우리의 혼탁한 마음은

다시 정화되어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향하게 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루블료프가 표현한 ‘구약성경의 삼위일체’는 다른 이콘 화가들이 그린

‘신약성경의 삼위일체’와는 차이가 많다.

신약 이후에 화가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표현할 때 대부분 성부를 노인으로,

성자를 젊은이로 그리고 성령을 비둘기로 표현했다.

 

트레티야코프가 기증한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 박물관은 그 후에도 꾸준히

러시아 작품들을 수집하고 부속 건물을 지으며 큰 박물관으로 성장했다.

1985년에는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고리키 공원 내에 현대식으로 신관을 건립했다.

신관 외부에는 러시아의 많은 조각상을 전시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20세기의 회화 작품이 잘 전시돼 있다.

종교성를 지닌 작품 보다는 러시아의 근 현대사를 담은 작품들과 사회성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작품이 많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예술을 사랑한 개인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트레티야코프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러시아 고유의 미술관에 대한 꿈을 꾸었고

평생동안 수집한 작품을 모스크바 시에 기증했다.

또한 시 정부도 힘을 보태 아름다운 미술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한 사람이 가진 소박한 꿈과 기증을 통해 이루어진 이 미술관은

오늘날 많은 사람을 내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요즈음 우리나라에도 여러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새롭게 개관하고 있다.

이런 문화기관 중에는 예술을 아끼고 사랑한 사람의 꿈을 바탕으로 해서 건립된 경우가 적지 않다.

한 사람이 가진 꿈을 여러 사람이 함께 꾸면 그 꿈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문화와 예술에 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이제 이런 관심을 하나로 모아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회의 문화기관을

운영하고 만들 수 있을 지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

교구나 주교회의에서 문화 기관을 건립해 주길 바라는 자세 만으로

교회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탄생되는 것은 아니다.

전체 교회가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나 단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인이면서 예술을 사랑했던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관한 꿈을 갖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평생 작품을 구입하고

그것을 모두 기증한 그의 숭고한 삶을 살펴보고 본받을 필요가 있다.

 

글 : 정웅모 신부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 유물 담당)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1987년 사제품을 받았다.

홍익대와 영국 뉴캐슬대에서 미술사·박물관학을 전공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장과 성미술 감독, 종로본당 주임, 장안동본당 주임 등을 역임한 바 있다.

 

Andrei Rublev, Christ the Redeemer ca. 1410. 158 x 106cm, 목판에 템페라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나무판에 아교를 바르고 달걀, 고무나무 수액, 벌꿀 등을 물감 삼아 그리스도 상을 그렸다.

당대 최고의 이콘(Icon) 화가  루블레프는 러시아의 르네상스를 상징한다.

그림의 여러 부분이 손상되었음에도 그리스도의 깊은 눈은 살아 있다.

가을 우수 같은 눈, 인간의 죄와 구원을 담고 있는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내 영혼이 부끄러워진다.

 

주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아주 태고의 언어를 말하는 것 같다.

인간과 세계의 구원을 갈망했던 러시아의 타르코프시키는

끔찍하게 아름다운 흑백 영화 ‘안드레이 루블레프’를 통해 오늘 우리의 구원을 물었다.

 

콘스탄티노플 화파 <블라디미르의 성모>. 12세기 초반. 목판에 템페라. 104 x 69cm.

이콘화는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기조의 대상이며 숭배의 대상이다. 
러시아인들은 집안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인 집안의 동쪽 크라스느이 우골(아름다운 모서리란 뜻)에 
이콘을 모시고 초를 켜 놓고 항상 기도를 한다. 
자신의 일신부터 국가의 큰 일까지 기도하고 그렇게 하면 신의 보호를 받는다 믿는다. 
보통 전쟁이 나도 이콘을 행렬 밴 앞에 두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한다. 
<블라디미르 성모>는 12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키예프로 전해진 이콘이다. 
1395년 모스크바는 몽고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그 해 모스크바 대공국의 
유리 돌고루키 대공이 블라디미르에 있던 이 이콘을 모스크바로 가져온다.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몽고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이 <블라디미르 성모>를 가장 성스러운 러시아 이콘이라 칭송한다. 
블라디미르 성모는 트레차코프 미술관 소장이지만 
현재 트레차코프 미술관 교회에 전시되어 있다. 
<블라디미르 성모>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어 
한 번이라도 보게 되면 이 이콘의 아우라에 경배심마저 가지게 된다.

 

노보고로트 화파. <손으로 그리지 않은 구세주>. 12세기 후반. 목판에 템페라. 77 x 71cm.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의 예수, 세계에서 가장 미남이라 할 만큼 잘 생긴 예수의 모슴이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하지만 러시아 이콘 속에 예수는 모습이 다르다. 
뭔가 고통이 엿보이고 결의에 찬 듯, 아니면 분노를 느끼는 듯 평범한 느낌은 아니다. 
세상사 모든 고통을 대변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이콘의 스토리는 이러하다.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가 중병에 걸려 예수께 병을 낫게 해달라 신하를 보내 간청한다. 
그러자 예수는 천을 꺼내 얼굴을 닦더니
이것을 왕에게 전하라 말하는데, 천을 펼쳐보니 예수의 얼굴이 이콘의 모습처럼 찍혀 있었다 한다. 
이것을 받은 왕은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로마 병사들이 무서워 가까이 하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한 여인이 예수 앞에 나서 
예수의 피와 땀을 닦아주었는데 그때 그 수건에 이 모습의 예수 얼굴이 새겨졌다 한다. 
그래서인지 러시아인들은 이 이콘화 앞에서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염원한다.

 

야로슬라브화파. <위대한 파나기아의 성모>. 12세기 초반, 목판에 템페라. 193.2 x 120.5cm.

야로슬라블에서 나온 패널 이콘 <파나기아의 성모>는 블라디미르의 화가들이 

키예프파의 이콘 화법을 계승해서 제작했다. 
커다란 판에 엄격한 정면 구도를 따르고 정확한 소묘와 

금빛 바탕의 배경을 사용한 것은 키예프 이콘의 전통이다. 
선명하게 그려진 옷의 주름은 정확하고 정연한 선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마리아의 얼굴에는 단정함과 조각적 아름다운이 있다.
파나기아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하는 수도원의 의식으로 

접시의 빵을 수도사에게 나누기 전에  높이 받든다.

 

페오만 그렉. <그리스도의 변용>. 14세기. 목판에 템페라. 

페오판 그렉은 비잔틴의 유명한 이콘 화가였는데 
러시아로 와서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여러 작품을 러시아에 남긴다. 
이 <그리스도의 변용>은 타보르 산에서 제자들과 기도를 하던 예수가 
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나타난다는 신약을 바탕으로 한다. 
서 있는 사람들과 구부리고 있는 사람, 이렇게 2단 구도로 그려진 이콘이다. 
예수의 광채에 눈이 부셔 엎드린 사람들 
그리고 경배하며 찬양하는 제자들을 그린 표현이 역동적이다. 
빛의 색인 흰색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옆으로 왼쪽에 모세, 오른 쪽은 엘리야다. 
아래로 예수를 향해 몸을 구부린 자는 왼쪽부터 베드로, 요한, 야고보이다. 
그림에서 보면 베드로 만이 예수를 보고 있으며 다른 제자들은 
그 빛이 너무 강렬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지만 
모두 예수 몸에서 뿜어 나오는 빛을 받은 영광의 제자임을 이콘이 나타내고 있다.

 

[영상] 처음 만나는 러시아 미술관 - 트레차코프 편

 

Andrei Rublev, 승천. 1408 (Tretyakov Gallery, 모스크바)

 

Andrei Rublev, 사도 바울, 1410년대 (Tretyakov Gallery, 모스크바)

 

[영상]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이콘화 모음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5세기, 타타르 제국의 침략을 받은 격동기의 러시아. 

수도사 안드레이, 다닐, 키릴은 일을 찾아 수도원을 떠나는데, 떠돌아다니던 그들은 

전쟁과 약탈, 강간과 살인 등 참혹한 현실과 만난다. 

그들은 마침내 성상화의 대가 테오판을 만나게 되고, 테오판은 우직한 안드레이를 제자로 선택한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수도원 밖의 현실, 용서와 구원에 대한 내적 갈등으로 더 이상 벽화를 그릴 수가 없다.

 

격정의 15세기 미술계의 아이콘이었던 안드레이 루블로프의 삶을 그린 영화. 

역사의 기록에만 몰두하며 순수 예술가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정치와 시류의 흐름을 쫓아 갈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는 종교화가의 안드레이 루블로프의 고뇌를 통해 예술의 본질 탐구와 동시에 당시의 사회상을 꼬집은 수작. 

침략 전쟁, 기아, 질병에 고통받는 러시아 민중의 삶을 배경으로 '예술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의 작품 중 가장 '역사'에 가깝게 다가서고 있다.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프레스코'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마치 거대한 프레스코 벽화를 보는 듯한 웅장한 느낌을 준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폭주 기관차>의 감독 콘찰로프스키와 사석에서 대화하던 중에 

신비의 베일에 싸여있던 15세기의 성상 화가 루블레프에 매력을 느껴 영화화할 것을 결심했다고 전한다. 

 

‘삼위일체’로 유명한 15세기의 성상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인생과 고뇌를 그린

타르코프스키의 두 번째 장편으로, 9개의 에피소드가 연결된 프레스코 구조를 지닌다.

공개 당시 당국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Tretyakovskaya Gallery) 조감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Третьяковская Галерея)은 1856년에 개관하여 

1892년 모스크바로 이전, 1918년에 국유화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민족예술 미술관이다. 

모스크바의 상인,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98, Pavel Mikhailovich Tretyakov)가 

예술가들을 후원하면서 수집한 작품들로 시작되어 이후 미술품을 수집하는 일련의 움직임들을 통해 

현재 11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작업된 13만점 이상의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세 가지 주요 목표를 가지고 있다.

1) 러시아의 예술을 탐험, 보존, 대표 및 대중화

2) 예술 자체의 중요한 역할과 특히 우리의 수집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며 러시아의 문화적 동일성을 형성. 

러시아 시민들에게 러시아의 문화예산을 소개해 나가면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창설자인 트레티야코프 귀하의 사업을 계속하는 것

3) 러시아와 세계 예술의 걸작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더 좋게 만든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본관 지역에는 상설 전시관, 
특별 전시관 그리고 부속 정교회 성당이 있다. 
그리고 본관에서 도보로 십 여분 떨어진 곳에 신관이 자리 잡고 있다. 
본관이나 신관에 있는 모든 작품은 한결같이 러시아인의 삶과 역사, 문화와 정신을 잘 보여준다.
 
본관의 수많은 회화 작품 가운데서 주목할 것은 러시아에서 제작한 이콘이다.
별도의 이콘 전시실에는 12세기에 제작한 블라지미르의 성모를 비롯해 빼어난 이콘이 잘 전시돼 있다. 
이콘 전시실에 있는 수십 점의 이콘 하나하나는 모두 수준이 높아, 보는 사람들을 감탄시키면서 
신앙의 세계에 한걸음 더 가까이 나가도록 도와준다.
 
여러 이콘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360~1430년경) 
수도자가 그린 ‘구약성경의 삼위일체’(1411년경, 112x141cm)다. 
비슷한 형상을 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께서 식탁 주변에 앉아 고요한 가운데 사랑과 친교를 나누는 모습이다.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하나를 이루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우면서 거룩하게 표현됐다. 
식탁 앞의 빈 공간은 이 성화를 보는 사람들을 위해 미리 마련해 둔 자리처럼 보인다.
 

 

오전 10시에 개관을 하는데 관람객이 너무 많아서 우리 일행은 오전 8시 30분에 도착하여 제일 앞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람객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

 

 

 

[영상] 트레티야코프 미술관(Tretyakovskaya Gallery) 입구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98, Pavel Mikhailovich Tretyakov) 동상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98, Pavel Mikhailovich Tretyakov) 동상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98, Pavel Mikhailovich Tretyakov) 동상

 

[영상] 트레치아코프 미술관/Moscow/Tretyakov Gallery

 

[영상] Gallery within 10 minutes

 

[영상] Russian Art at Tretyakov Gallery - Moscow

 

[영상] Present! - A Tour of the Tretyakov Gallery in Moscow, Russia

 

 


임경석의 역사극장

공자와 레닌을 사랑한 조선청년 김규열

조선공산당 분열 상징하는 사상논쟁을 최익한과 벌이다


1933년 소련 정치보위부 경찰에게 체포된 뒤 찍은 김규열 사진. 초췌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임경석 제공


외국 유학을 마친 김규열(金圭烈)은 국내로 돌아왔다. 1926년 가을 무렵이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3년간의 정규 교육과정을 졸업한 뒤였다. 고국을 떠난 지 3년6개월 만이었다. 1890년생이므로 귀국할 때 조선 나이로 37살이었다. 어느덧 청년기가 저물고 있었다.

전조선청년당대회 대표로 모스크바 유학


모스크바 유학은 1923년 3월 열린 전조선청년당대회 덕분이었다. 3·1운동 이후 조선 청년의 의식을 사회주의 방향으로 바꾼 획기적인 집회로 손꼽히는 이 대회는, 코민테른과 연계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대표자를 파견했다. 김규열은 대표자 3명 가운데 하나였다. 대표 업무를 마친 뒤 공산대학 진학을 희망한 그는 다행히 입학 허가를 받았다. 공산대학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정치학, 유럽·동양 혁명사, 러시아공산당사, 세계노동조합운동사, 군사교육, 유물사관, 정치경제학, 레닌주의, 당조직론 등의 과목을 이수했다. 두터운 유교 고전학 소양에 더해 최첨단 사회주의 사상을 익힌 준비된 혁명가가 탄생했다.

귀국길에는 8살 연하의 젊은 아내 박아니시야가 동행했다. 연해주 동포 2세 출신인 아니시야는 공산대학에 함께 있던 학우이자 사상 동지였다. 사랑을 불태우던 두 젊은이는 혼인하기로 했고, 졸업 뒤 진로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둘은 두만강 하류 조선~중국~러시아 3국 접경지대를 몰래 넘었다. 연해주 연추에서 북간도 훈춘으로, 거기서 다시 함북 국경지대로 잠입해 들어왔다.1

김규열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회주의운동에 복귀했다. 당시 사회주의운동은 급격한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 두 차례 대규모 검거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집행부가 교체되고 있었다. 김재봉과 강달영이 이끌던 옛 집행부 구성원들은 투옥되거나 외국 망명길에 올랐고, 그를 계승한 김철수 집행부가 당의 면모를 새롭게 하던 때다. 새 집행부는 당외 사회주의 세력을 통합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에 호응해 당 밖의 사회주의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 구성원이 차례로 입당했다. 1차로 1926년 11월 140명이 입당했다. 이듬해 3월 2차로, 나머지 인사 100여 명이 조선공산당에 들어왔다. 이때 ‘서울파’인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이 해체됐고, 조선 사회주의운동 대통합이 실현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은밀히 회자되던 ‘통일공산당’이 출현했다.

1922~23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한 학생 명단 속의 김규열, 16번이다. 4번에 박아니시야도 보인다. 재학 중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 임경석 제공


반지하에 활동 범위 두고 필봉을 휘두르다


김규열은 이 흐름을 탔다. 자신을 파견했던 서울파 사람들과 보조를 같이해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활동 범위를 ‘반지하’ 상태에 두기로 결정했다. 반지하 상태란 합법 공개 영역의 사회운동단체에는 전혀 가입하지 않고 비밀 영역에서만 활동하되, 일상적인 경제·문화 영역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지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개 사회운동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는 필명 ‘김만규’를 내걸고 종횡무진 필봉을 휘둘렀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간신문과 저명한 진보 잡지 <조선지광>이 김규열의 문필 활동 무대였다. 그는 민족통일전선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기고문에서 민족통일전선단체 신간회 설립을 위해 조선의 모든 사상단체를 해체할 것을 주장했다. 신간회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전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라는 상설적인 합법 노동자정당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다. 1926년 하반기부터 1927년 상반기 조선공산당이 견지한 핵심 정책이었다. 김규열은 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날카로운 이론가였다.

아내 아니시야도 가만있지 않았다. 아니, 남편보다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박신우(朴信友)라는 조선식 이름으로 공개 사회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신우’는 러시아 이름 ‘아니시야’와 소리가 비슷해서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 무대는 근우회였다. 사회주의와 기독교계 여성이 주축으로, 여성계의 민족통일전선단체였다. 러시아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고등교육까지 이수한 박신우는 당시 조선 여성계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고학력 인텔리였다. 근우회 발기총회와 창립총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집행부로 선출됐다. 선전조직부 상무위원을 했다.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 맡는 직책이었다.

김규열에게 논적들이 생겼다. 그가 기고한 정치 논설에는 반론이 따라붙었다. 보기를 들면, 사상단체 해체를 주장한 그의 논설에 잡지 <이론투쟁> 1927년 4월호가 반론을 폈다. <이론투쟁>은 일본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펴내던 사회주의 매체다. 필명 좌목군(佐木君)을 쓰는 사람과 최익한(崔益翰)이라고 실명을 밝힌 두 논객이 김만규(김규열)의 견해를 공박했다. 이 중 최익한에게 눈길이 간다. 그는 김만규를 가리켜 ‘속학적 혼합형’의 절충주의라고 몰아세웠다. 논의 수준이 낮고 사상단체와 정당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흐릿한 견해라는 비판이었다. 한 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최익한은 1928년 1∼2월 일간신문에 기고한 연재 칼럼에서도 같은 비판을 되풀이했다.2

김규열과 최익한, 둘의 논쟁은 사적인 말다툼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진영의 내부 소용돌이를 반영했다. 당시 통일공산당 내에선 새로운 분열의 움직임이 있었다. 파벌 청산을 내세우는 신진 사회주의자들이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선공산당 내부에 만들었다. 당내 당이었다. 바윗덩이처럼 단단한 결속을 지향하는 비밀 혁명단체 내에선 허용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비밀단체는 영문 이니셜을 따서 ‘엘엘당’ 혹은 ‘엠엘당’으로 불렀다. 엠엘당은 당내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장했다. 구성원이 하나둘 당 중앙에 진출했다. 1927년 9월에는 기존 당 집행부를 해산하고 그들만으로 새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일종의 당내 쿠데타였다. 이 사건으로 통일공산당은 두 그룹, 엠엘당과 비엠엘당으로 분열됐다. 엠엘당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는 ‘서상파’라고 했다. 과거 서울파와 상하이파 공산그룹에 속했던 사람이 다수라는 뜻이었다.


김규열과 최익한, 친밀하면서도 이론적으론 대립


김규열과 최익한의 논쟁은 바로 조선공산당의 새로운 분열을 상징했다. 최익한은 엠엘당의 중요 인물이었다. 당의 분열을 야기한 9월 새 집행부의 한 사람이었다. 김규열은 엠엘당의 전횡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더 나아가 1927년 12월 서상파 사람들만으로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두 사람의 개인적 인연을 살펴보자. 둘은 1927년 시점에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이론가로서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사실은 친밀한 사이였다. 공통점도 많았다. 김규열이 나이로 7년 위였으나 그것이 둘의 우정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유교 지식인 출신의 사회주의자였다. 보기 드문 사례였다. 청소년기에 유교 고전학에 침잠한 경력을 공유했다. 전남 구례 출신인 김규열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김택주의 훈도 아래 전통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엄격한 성리학자였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농민군에 맞서 전통질서를 옹호하는 민보군을 조직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 3·1운동 때는 유학자 137명이 연서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3

김규열은 26살 되던 1915년, 아버지 지시를 받아 경남 거창군의 저명한 유학자 면우 곽종석 문하에 들어갔다.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김규열은 거기서 최익한을 처음 알게 됐다. 경북 울진 출신 최익한도 면우 문하에 들어온 젊은 유교 지식인이었다. 둘은 동문수학하는 사이였다.

그들은 교분이 두터웠다. 김규열은 1917년, 1919년 두 차례 최익한을 초청해 구례 화엄사를 유람하고 구례·남원 일대의 저명한 유학자 집을 함께 방문했다. 그뿐인가. 스승 곽종석이 파리장서 사건으로 체포돼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됐을 때도 행동을 같이했다. 대구감옥의 노스승을 수발하기 위해 대구 시내에서 함께 유숙했다. 스승이 감옥에서 병을 얻어 6월22일 출옥할 때까지 그랬던 것 같다.4

그해 여름, 두 사람은 함께 상경하기로 결심했다. 뒷날 작성한 경찰 신문기록에는 신학문을 연구하기 위해서라고 돼 있지만 목적은 다른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 다 그해 가을과 겨울에 경성에서 비밀결사에 가담한 것을 보면 말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경찰의 탄압을 받았다. 최익한은 독립군자금 모집 혐의로 체포돼,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옥중에 갇혔다. 김규열도 다르지 않았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겨울, 경성에서 비밀결사에 가담했음이 확인된다. 비밀결사는 임시정부 파견원과 은밀히 연계해, 불온 인쇄물을 제작·배포했다. 김규열은 그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받았다. 1919년 12월 체포돼, 1922년 3월 출옥했다.5

두 사람은 옥중 생활과 외국 유학을 거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점도 동일하다. 최익한은 도쿄 와세다대학을 통해, 김규열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통해 잘 준비된 혁명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일본 유학과 소련 유학의 차이는 둘의 이론적·정책적 입지에 편차를 가져왔다. 두터운 우정과 상호 이해가 있었음에도, 둘은 서로 다투는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이론적 대표자라는 상극의 자리에 서게 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오게페우 특별부 제1과장 전권대리 바산고프, ‘김규열 심문조서’ , 1933년 11월29일.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자료 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736쪽, 2019년.

2. 최익한, ‘사상단체해체론’ , <이론투쟁> 1927년 4월호, 32쪽(朴慶植 編, <朝鮮問題資料叢書> 第5卷, 東京, アジア問題硏究所, 1983). 최익한, ‘1927년 조선 사회운동의 빛(4)’ , <조선일보> 1928년 1월30일치.

3. 김봉곤, ‘호남 지역의 파리장서운동’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0, 24~30쪽, 2015년.

4. 송찬섭, ‘일제강점기 崔益翰(1897-?)의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활동’ , <역사학연구> 61, 2015년.

5. 경성복심법원, ‘판결, 大正9年刑控 제701호, 702호’ , 1920년 12월4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 1466~1469쪽, 1977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일제 경찰이 발견한 ‘암호 일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이 목숨 걸고 쓴 기록 ‘비서부일기’



(왼쪽부터) 평상시 강달영. 옥중의 강달영. 일본 관헌이 해독한 ‘비서부일기’ 1926년 3월17일자 기록. 임경석 제공

강달영(40)은 수요일이 되어서야 느지막이 신문사에 출근했다. 1926년 3월17일이었다. 오전 10시, 출근 시간으로는 좀 지난 때였다. 수표정 43번지, 오늘날 서울 청계2가 교차로에서 3가 방향으로 남쪽 천변에 있는 조선일보사 건물에 들어섰다. 그는 조선일보사 영업국 촉탁으로 일했다. 촉탁이란 정식 사원이 아니라 일정 기간 임시로 업무를 맡는 직책이었다.

왜 무단결근했을까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연이틀이나 결근한 뒤였다. 촉탁이라 해도 근무 규율과 내용은 정식 사원과 별 차이가 없었다. 거듭된 결근은 이채로운 일이었다. 왜 무단결근했습니까? 혹여 누가 물었다면, 적당히 둘러대야 했을 것이다. 감기 몸살에 걸렸다거나, 긴급한 가정사가 있었노라고 변명했으리라. 실은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는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다. 경찰에 체포된 전임자 김재봉 뒤를 이어 1925년 12월 하순부터 그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너무 바빠서 지난 이틀 동안 도저히 직장에 나올 수 없었다.

신문사 영업국 촉탁 직책은 경성 생활을 가능케 해주는 합법적인 신분이었다. 경찰의 의심을 사지 않고서 경성 시내를 활보하거나 지방을 오가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직업이었다. 불과 4개월 전만 해도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선일보 지국장 일을 하던 그가 어떻게 이런 직장을 얻었을까. 아마도 신문사 간부사원인 공산당원 홍덕유(45)가 힘썼을 것이다. 그는 조선일보사 지방부장이었다. 각 지방에 설립된 지국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기사와 자금의 출납, 신문지 배급 등의 업무를 관리하는 책임자였다. 지방도시에 거주하던 신임 책임비서의 경성 체류 명분을 만드는 일은 그에겐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출근도 못할 지경이었을까? 일반적으로 비밀결사의 수뇌가 무슨 일에 종사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강달영 책임비서는 달랐다. 그는 국제당(코민테른) 연락과 후임자 업무 인계를 위해 기록을 남겼다. 암호로 쓰인 ‘비서부일기’가 그것이다.1

3월12일부터 5월14일까지 약 두 달 동안의 책임비서 활동상을 적었다. 강달영은 독자적인 암호 시스템을 고안했다. 자신만이 해독할 수 있는 비밀 알고리즘이었다. 만일 불행한 사태를 당해 발각된다면 목숨을 걸고서 지킬 결심이었다. 자기 하나 입 다물면 천하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기록이었다.

책임비서가 몰입했던 업무 가운데 하나는 국제당과 교신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식민지 수도 경성 한복판에서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당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쉽사리 수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신의주를 통해 국경을 넘어서 외국으로 보냈을까. 아니면 함경북도 너머 블라디보스토크로 밀사를 보냈을까. 둘 다 아니었다. 강달영은 그보다 훨씬 더 손쉬운 통로를 갖고 있었다. 바로 경성에 있는 소련총영사관이었다. 재경성 소련총영사관은 1925년 9월 개관했다. 그해 2월25일 비준된 소련-일본 기본조약에 따라 합법적으로 설립된 외교기관이었다. 경성 하늘에 적기를 휘날리는 이 기관의 위험성에 일본 경찰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총영사관 주변에 삼엄한 감시망을 펼쳐놓았다. 그 때문인지 감시를 두려워해 그곳에 공공연히 출입하는 사람은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고 경찰 기록에 쓰여 있다.2


출근날 새벽까지 극비 문서 옮기는 데 매달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감시망을 뚫는 데 성공했다. 경성 주재 총영사관의 정보 담당자 ‘윌리’가 모스크바의 외무성과 국제공산당 앞으로 보낸 첫 번째 정보 보고서는 1925년 9월19일자로 작성됐다. 거기에는 조선공산당 중앙과 접선한 결과가 기재돼 있다.3

김재봉 책임비서 시절에 이미 총영사관 쪽과 비밀 접촉 경로를 열었다. 강달영은 전임자에게서 그 접촉 시스템을 넘겨받았을 것이다. 책임비서가 직접 움직이지는 않았다. 접촉 실무자는 박민영(25)이었다. ‘박 니키포르 알렉산드로비치’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가진 그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신진 활동가였다.

느지막이 신문사에 출근한 바로 그날, 책임비서는 박민영을 만났다. 근 일주일째 그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다. 접촉이 쉽지 않았던 까닭은 박민영이 국내에 잠입한 지 얼마 안 돼 비밀활동 거점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책임비서는 열네 종류의 문서를 건넸다. 지난 며칠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작성한 극비 문서였다. 국제당의 조선담당관들만이 읽어야 할 문서였다. 당 현황과 간부진 변동, 상하이·만주·연해주 등 국외에 설치한 당 기관의 활동, 합법 공개 영역의 사상단체와 대중운동 정책에 관한 것이 포함됐다. ‘예산안’과 ‘예산안 설명서’도 있었다. 어느 문서에나 맨 끝에는 날짜를 적고 서명을 남겼다. 1926년 3월17일자였다. 출근하던 날 첫새벽까지 이 일에 매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날 오후 강달영은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화요회란 합법 공개 영역의 사상단체 이름이고, 프락치야란 그 내부에 설치한 당원 조직을 가리켰다. 당 규약에 따르면, 합법 공개 단체에 3명 이상 당원이 있을 때 그 내부에 프락치야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며, 그 임무는 당의 정책과 영향력을 대중에게 실현하는 것이었다.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를 서둘러 소집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바로 네 개 합법단체(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를 통합해 하나의 단체로 개편하는 과제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3월5일자 당 중앙집행위원회 석상에서 결정한 사안이었다.4

화요회는 가장 영향력이 큰 합법 단체였으므로, 그 속에는 두 개의 야체이카(세포)가 설치돼 있었다. 야체이카란 당의 ‘기본회’였다. 산업 현장을 중심으로 한 장소에 3명 이상 당원이 있을 때 조직했다. 구성원은 3~7명을 두도록 했고 그 이상 당원이 있을 때는 제2, 제3의 기본회를 조직하게 했다.


쉼 없이 열린 중앙집행위 회의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에는 그 내부에 있는 두 야체이카 구성원이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워낙 긴급히 소집된 탓에 성원이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 6명밖에 출석하지 않아서 개회할 수 없었다. 참가자들은 프락치야 회의를 다음날로 연기하고, 차후에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회의를 유력 분자의 집합으로 간단히 줄인다는 건의안을 상급 기구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강달영이 화요회 프락치야 회의에 직접 참석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사안을 그날 저녁에 열린 당중앙 비서부 모임에서 비서부 차석인 이준태(35)에게서 보고받았다. 비서부는 당중앙 직속 핵심 부서로서 자신이 직접 이끌고 있었다. 이 회의가 하루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집행부를 체계화하고 효과적으로 가동하는 일은 강달영의 핵심 관심사였다. 책임비서직을 승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기에 그로서는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과제였다. 당의 최고 집행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를 굳건히 세우는 것이 선차적이었다. 중앙집행위원 정원은 7명이었다. 강달영은 그들을 결속해 그해 2월부터 3월 초까지 7회에 걸쳐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제3∼5회 회의는 2월26일부터 사흘간 날마다 쉼 없이 계속 열렸다.

중앙집행위원회 내부에 상설집행기구를 가동하는 것도 중요했다. 비서부·조직부·선전부 3개 부서를 두었으며, 비서부는 자신이 직접 이끌었다. 이날 비서부 회의에선 화요회 프락치야의 건의를 임시로 받아들이되, 최종 결정은 중앙 조직부에서 하도록 위임했다. 이어서 민족통일전선 결성 문제도 협의했다. 충분히 논의했지만 결정은 미뤘다. 당대회에서 결정할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1년에 1회씩 열기로 약속한 당대회 개최를 준비하는 것도 강달영 중앙이 해결해야 할 현안이었다. 당대회는 5월 중순 경복궁에서 떠들썩하게 열릴 조선박람회를 이용할 예정이었다. 당대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회 의안을 짜며, 대의원을 선출하는 등의 일정이 앞에 놓여 있었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당중앙 비서부 회의는 밤 12시에 폐회됐다. 강달영의 길었던 하루는 이렇게 저물어갔다.


쓸쓸한 마감


우리가 강달영의 어느 날 동선을 이처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비서부일기’ 덕분이다. 뒷날 불행히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을 때 그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암호 기록을 자신만이 해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문경관 요시노 도조 경부보는 “뼈가 돌이 되어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아니하겠다”는 결심이 그의 몸에서 풍겼다고 회고했다. 결국 강달영은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감시의 눈을 피해 자살을 시도했다. 머리를 힘껏 철제 책상에 부딪쳤다.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 주도면밀한 감시 때문에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는 그 시도를 몇 차례 되풀이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암호 해독 기술이 그의 알고리즘을 뚫었을 때,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키겠다는 그의 결심은 무너져내렸다. 강달영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미쳐버렸다. 정신이상자가 되고 말았다. 옥중에 있을 때도 그랬고, 출옥 뒤에도 회복하지 못했다.

그렇게 쓸쓸히 지내다가 1940년 7월12일, 향년 54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진주 3·1운동의 유공자, 조선 노동운동의 지도자, 인생을 기울여 헌신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혁명가, 그의 명복을 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비서부일기’, 1926년 3월12일~5월14일,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 제1집,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1932년.

2. 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の治安狀況(昭和2年版)>, 不二出版, 1984(復刻板).

3. Билль(윌리), Дорогие товарищи(경애하는 여러 동무들),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06 л.19-24, 1925년 9월19일.

4.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회록(제6회)’, 1926년 3월5일,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 제1집,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7쪽, 1932년.

















1960년대 제임스 브라운과 더불어 흑인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칭송되는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흑인 팝소울 음악의 전설 모타운 레코드(Motown)사에 소속되어 음악활동을 시작, 
1970년대부터 셀프 프로듀싱(Self-producing)을 선언하고 앨범 제작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며 
'아티스트'의 천재라 일컷게 되는 팝 스타이다.  


천부적인 작곡 감각과 각종 키보드를 비롯, 앨범 녹음시 대부분의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해 낼 정도의 
다재다능한 그는 도무지 시각 장애인이라고 믿을 수 없는 독창성을 자신에 음악에 담아 낸다. 
또한 마빈 게이(Marvin Gaye)와 함께 1970년대 미국 사회 내 흑인들의 비참한 삶과 애환을 표현한 
'게토 리얼리티'를 얘기한 음악인으로 기억되면서 흑인 인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이끌었던 사회 운동가이기도 하다. 


스티비 원더는 자신의 노래를 통해 지금껏 인종과 이념의 벽을 넘어선 
절대불변의 숭고한 가치인 '사랑의 전도사'임을 전 세계에 알려 왔다. 
그의 음악만큼이나 이런 그의 행적은 전 세계 음악인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으로 그를 기억하게 했다. 


No New Year's Day
to celebrate
No chocolate
covered candy hearts
to give away

No first of spring
No song to sing
In fact here's
just another ordinary day

No April rain
No flower bloom
No wedding Saturday
within the month of June

But what it is,
is something true
Made up of these three words
That I must say to you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I just called
to say how much I care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And I mean it
from the bottom of my heart

No summer's high
No warm July
No harvest moon
to light
one tender August night

No autumn breeze
No falling leaves
Not even time
for birds to fly
to southen skies

No Libra sun
No Halloween
No giving thanks
to all the Christmas joy
you bring

But what it is
though old so new
To fill your heart
like no three words
could ever do

* repeat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I just called
to say how much I care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And I mean it
from the bottom of my heart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I just called
to say how much I care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And I mean it
from the bottom of my heart

of my heart
of my heart
bayby you're my heart

축제 기분을 낼
새해가 온것도 아니고
나누어 줄
사탕 덮힌 발렌타인
쵸콜렛도 없어요..

새로운 봄도 아니고,
부를만한 노래도 없고
사실은 그저 여느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일 뿐이에요.

4월에 내리는 비도,
꽃도 피어나지 않아요.
6월달에 들어 있는
토요일엔 결혼식도 없네요.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이 세마디로 이루어진
말은 진실이에요.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아끼는지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이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에요.

여름이 무르익은것도 아니고
따사로운 7월도 아니에요.
부드러운 8월의 밤을
비추어 줄
보름달도 없네요.

가을 산들바람도
떨어지는 낙엽도 없어요.
심지어는 새들이
남쪽 하늘로 날아갈
때도 아니에요.

천칭자리가 있는것도
즐거운 할로윈도 없네요.
당신이 가져다 준
크리스마스의 모든 기쁨에도
감사할 수 없네요.

구식이지만 신선한 말,
어느 것도
이 세 마디 말처럼
당신의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어요.

*repaeat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아끼는지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이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에요.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아끼는지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이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에요.

내 마음 깊은 곳,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대는 내 마음이에요.








민족문제연구소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중국의 동북 3성(옛 만주)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체포돼 

시베리아의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1950년 7월 중국에 인도돼 푸순전범관리소에 수감된 이들이 있었다


뼛속까지 황국신민 정신과 군국주의 교육에 물들었던 이들은 신중국의 전범 개조정책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침략 정책의 충실한 입안자와 집행자였던 이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중국의 일관된 정책과 처우에 감복해 

엄청난 고뇌를 거쳐 서서히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다


일본으로 귀환해서는 자신이 저지른 죄행을 반성하고 침략전쟁의 진실을 증언하며 반전평화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푸순전범관리소에 있지 않았다면 전장에서 저질렀던 행위를 기억에서 지운 채 입을 닫고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60여 년 전 푸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푸순의 기적'이란 무엇인가?


저자_김효순

1974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왔다. 

'동양통신' '경향신문'을 거쳐 '한겨레' 창간에 간여해 도쿄 특파원, 편집국장, 편집인을 지냈다.

2007년부터 취재 현장에서 대기자로 활동하다가 퇴직했고, ‘포럼 진실과 정의’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다.

한일 관계, 동아시아의 평화, 화해, 시민운동 등을 테마로 글을 쓰고 있으며, 역사에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다.





2020년 4월12일 코로나19 발생으로 전세계 도시가 봉쇄되다시피 한 상황에 부활절을 맞아 

밀라노 대성당 앞에서 이탈리아와 세계에 대한 사랑, 치유 및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Andrea Boc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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