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은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궁전이다.


이스탄불 구시가지가 있는 반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 중이다. 총 면적은 70만 평이며, 벽 길이만도 5km나 된다.
톱카프 궁전은 유럽의 다른 궁전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면에서 관심을 두고 볼 것이 많고,

특히 자기, 무기, 직물, 보석 등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구글 지도


톱카프 궁전은 터키 이스탄불 구성곽 동쪽에 위치해 있다.
메흐메트 2세 시기인 1478년에 세워져 1856년, 술탄 압뒬메지트가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이궁하기까지
약 300여년간 오스만 제국의 정궁이자 디완 회의의 의사당이었으며
제국의 인재들을 길러내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톱카프 궁전 주변 모형도


또한 궁전 제1정원에는 조폐소(Darphane)가 있어서 제국의 화폐를 찍어내기도 했으며,
재무부 건물에는 보물관이 있어 황실의 보물과 기록을 보존했다.


이후 1922년에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수립된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케말 아타튀르크가 1924년 4월 3일에 톱카프 궁전을 박물관으로 공개해 오늘날에 이른다.

톱카프 궁전 주변 모형도


전체 부지면적은 약 70만㎡로 도중에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지만
오스만 제국시기에 세워진 각종 모스크, 학교, 목욕탕, 상가, 대상들의 숙소 등의 공공건축에 비하면
정말로 소박한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유럽 각국의 궁전들과 비교해 보아도
전성기 오스만 제국의 위용에 비해 터무니 없을 정도로 작고 단촐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톱카프 궁전 내 카페에 전시된 톱카프 궁전 전체 풍경 사진


이 작은 궁전 주인은 세계 수준의 보물 컬렉션을 보유하고 전 유럽을 짓밟았다는게 첫 번째 함정이라면
그 작은 궁전이 중국의 자금성이랑 비슷하다는 것이 두 번째 함정이다.


궁의 면적을 단순 비교하기 위해 사례를 들자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궁궐인
빈의 쇤브룬 궁의 전체 면적이 약 186 헥타르(186만 제곱미터)이다.


The Seraglio Point, 1838


군사상의 이유로 공터로 남아 있었으며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에 로마 제국이 비잔티움으로 천도하자 이곳에는 바실리카와 지하 저수조가 들어섰고
지금의 궁전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위치에 부콜레온 궁전(Βουκολέων)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톱카프 궁전 자리에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성 이리니 성당(Aya İrini)을 제외하고는
군사상의 이유로 공터로 남아 있었으며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Partial view of Seraglio Point with Topkapı Palace and Incirli Kiosk, 1559


원래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거주하던 정궁은 현재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부지에 존재하던
콘스탄티노플 대궁전(Μέγα Παλάτιον/Büyük Saray)으로 330년 콘스탄티노플 천도부터
1081년 콤니노스 왕조 설립까지 종종 다른 궁전을 이용한 기간을 제외하면 690년 넘게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콤니노스 왕조 이후 동로마 황제는 거처를 별궁으로 쓰던
블라헤르네 궁전(Βλαχέρναις Παλάτιον)으로 완전히 옮겼다.


그후 대궁전은 버려졌고 1204년 제 4차 십자군 이후 도시를 장악한 라틴 제국은
황제의 거처로 부콜레온 궁전을 쓰면서 블라헤르네 궁전도 버려지게 된다.


톱카프 궁전 모형도


1261년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면서 라틴 제국을 통치하던 십자군은 달아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 대궁전과 블라헤르네 궁전의 보물들을 털어가면서 크게 훼손되었지만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블라헤르네 궁전은 수리해 정궁으로 썼으나
대궁전은 여전히 버려져 감옥으로 쓰는 신세가 되었고
라틴 제국이 쓰던 부콜레온 궁전 또한 버려지면서 훼손 상태가 심해진다.

톱카프 궁전 내에 전시된 톱카프 궁전의 모형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 블라헤르네 궁전마저 전란과 약탈과 방화로 파괴되어버리자
도시를 장악한 메흐메트 2세는 지금의 이스탄불 대학 자리에 임시 거처로 목조 궁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거주했는데,
일화에 따르면 톱카프 궁전 자리를 둘러본 메흐메트 2세가 북쪽으로는 갈라타 탑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보스포로스 해협 건너 위스퀴다르가 보이고,
서북쪽으로는 금각만이 보이는 경치에 반해 이곳에 궁전을 세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동로마 제국 시절에는 공터였던 부지에 궁전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이전에 세운 목조궁전은 구 궁전(Eski Saray), 새로 세운 이 궁전은 신 궁전(Yeni Saray)이라고 부르다가,
궁전의 정문에 대포 두 문을 배치한 것을 보고 대포 문(Topkapı)이라는 이름을 창안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전한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바라보는 톱카프 궁전


톱카프 궁전은 크게 4개의 중정(Avlu)으로 구분되는데,
예니체리 마당(Yeniçeri Meydanı)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는 제1중정은 황제의 문(Bâb-ı Hümâyun)을 통해 입장하며,
내부에는 예니체리들의 주거지와 훈련장, 무기고, 제국 조폐소, 병원,
황실이 사용할 일상용구들을 제조하는 공방 매표소등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은 일반 백성들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는데,
특히 매주 금요일날 아야 소피아 사원으로 행진하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 군중들이 대기하곤 했다.
이때 백성들은 자유롭게 황제에게 청원할 수 있었으며,
황제는 백성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한편 이곳에 위치한 성 이리니 성당은 1846년 궁중 보물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기도 했다.
박물관이 다른 곳으로 이전된 1978년부터 각종 콘서트나 축제를 위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바라보는 톱카프 궁전


톱카프 궁전의 전체 규모는 원래 크기보다 상당히 축소된 상태이다.
본래의 규모는 오늘날의 시르케지 철도역과 귈하네 공원을 포함하면서 마르마라 해 방향의 아래쪽까지 분포했다.


비록 구조적으로는 메흐메트 2세 때의 기본 설계를 간직하고 있지만,
불규칙적으로 넓게 퍼져 있는 건축물의 집합한 형태라서 특별한 건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톱카프 궁전 황제의 문 - 임페리얼 게이트(The Imperial Gate) 첫 번째 입구.


톱카프 궁전은 새롭게 술탄이 될 때마다 모두 필요에 의해서 공을 들였고,
대화재 사건이 네 번이나 일어나면서 당시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건축적인 조화를 거의 보존하지 못했다.


톱카프 궁전 단지는 비룬(외정)과 엔데룬(내정) 그리고 하렘 세 곳으로 나뉘어 있다.
제각각 안마당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는데,
이 안마당을 연결하여 많은 문을 만들어 복잡하게 조성된 미로가 갖춰져 있다.



톱카프 궁전 임페리얼 게이트(The Imperial Gate) 첫 번째 문 앞에 있는 정자.


이 정자는 외국인들이 궁전에 들어갈 때 술탄의 승인을 받기 위해 대기하던 곳이라고 한다.
오스만제국의 국민이라면 여기 대기할 필요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고.


궁전의 정문 ‘황제의 문’(The Imperial Gate)


톱카프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네 개의 넓은 중정(中庭 Courtyards, 정원)을 가지고 있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은 ‘바브 휘마윤(아랍어: Bâb-ı Hümâyûn)’이라 불리는 황제의 문 또는 술탄의 문(Saltanat Kapısı)이다.


문의 바깥쪽에 새겨진 글은 메흐메트 2세가 이 궁전의 건축을 1478년에 완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의 문은 메흐메트 2세 이후의 군주들이 손을 많이 대는 바람에 원래의 모양으로부터 많이 변형되었다.


톱카프 궁전 임페리얼 게이트(The Imperial Gate) 첫 번째 문 앞에 캘리그라피가 있다.


이 궁전을 완공한 메흐메트 2세가 방문객을 환영한다는 의미의 싸인.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1453년 이후에 최초로 지은 궁전이 있던 곳은 현재의 바예지드 지역이다.


당시 군주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 현재의 이스탄불 대학교가 있는 자리를 황궁 터로 정하고 궁전을 지었다.
궁전은 세 번째 언덕에 세워졌다.


First Courtyards (제1 정원)


황제의 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마당인 제1중정(I. Avlu or Alay Meydanı)이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오스만 군주와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코트(Court of the Janissaries)
또는 퍼레이드 코트(Parade Court)라 불리던 안뜰이 나온다.


First Courtyards (제1 정원)


일반 백성은 이곳까지만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조정의 관리나 조정에서 일하는 시종들은 일반 백성들이 드나드는 제1중정을 궁전 마당으로 여기지 않았다.


제1중정에는 진료원, 장작 저장소, 제빵소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로마 제국 때 지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화폐 제작소 말고는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2006. 3. 13. 톱카프 궁전 첫 번째 정원을 지나며 방문 기념 인증샷.


뒤로 낯익은 첨탑이 살짝 보이는데 그곳은 바로 성 소피아 성당이다.
톱카프 궁전과 성 소피아 성당은 이처럼 가까이 있다.

왼쪽에는 아야 이리니(Aya İrini)라 불리는 하기아 에이레네(Hagia Eirene) 비잔틴 성당이 서 있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 (The Hagia Eirene church)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6세기경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건립되었다.
건축 재료와 구조 면에서 볼 때 전형적인 비잔틴 건축물이다.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후에도 모스크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축물의 원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 (The Hagia Eirene church)


오스만 제국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을 전리품과 무기 저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846년에 오스만 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 (The Hagia Eirene church) 내부 모습


동로마 제국 시절에는 성당으로 사용되다가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무기고, 박물관 등으로 쓰인 아야 이리니 성당의 내부 모습.
성상 파괴 운동 시절에 지어진 건물이라 안에는 십자가만 덜렁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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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박물관


이 지역에 지은 궁전은 이후에 지은 톱카프 궁전과 구별하고자 구 궁전(舊宮殿)이라는 뜻으로
‘에스키 사라이(Eski Sarayı)’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술탄이 사용하지 않은 구궁전은 빛이 바랜 하렘의 여인들이 여생을 마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톱카프 궁전 제1 정원에서 잔듸밭 사이로 "보스포루스"해협이 보인다.


톱카프 궁전 제1 정원에서 잔듸밭 사이로 "보스포루스"해협이 보인다.


두 번째 문. 경의의 문 (Gate of Salutation : Middle Gate ). '예절의 문'이라고도 한다.


제1중정을 지나면 ‘바뷔스 쎌람(Bâb-üs Selâm)’ 또는 디완 광장(Divan Meydanı)이라 불리는 두 번째 문인 경의의 문이 있다.
첫 번째 문과 중정은 일반 백성도 드나들 수 있는 곳이지만, 경의의 문부터는 일반 백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경의의 문(Middle Gate; Ortakapı)이나 바뷔스 셀람(Bab-üs Selâm)을 통해 국정 운영을 담당했던 제2 중정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술탄과 술탄의 어머니만 말을 타고 이 경의의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수상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경의의 문 (Gate of Salutation : Middle Gate )


경의의 문 양쪽으로 웅장한 원추형의 망루가 있다.
망루의 오른쪽에는 사형 집행자의 칼과 피 묻은 손을 씻는 우물이 있고

참수된 사형수의 시체를 놓던 대리석이 두 개 있었다고 한다.


경의의 문 (Gate of Salutation : Middle Gate )


감옥시설이 있다는 첨탑아래 문처럼 나 있는 공간은

처형된 죄수의 머리를 걸어 두던 곳이었다고.


경의의 문(Gate of Salutation : Middle Gate ) 캘리그라피


캘리그라피는 이슬람 신앙 고백인 '샤하다'이며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 분의 사도이다'라는 뜻이라고.
모스크 곳곳에 이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 보는 단두대가 신기하여 인증샷을 해 본다.


제2 정원 (Second Court)


제2 중정은 아름다운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하나의 큰 건물에 외딴 정원이 여러곳 들어서 있으며 전형적인 유럽 궁전과는 달리
톱카프에는 담장 주변으로 여러 건물과 부엌, 막사, 알현실, 숙소가 자리해 있다.


제2 정원 (Second Court)


제2 정원 (Second Court)



구 궁전을 세우고 몇 년이 지난 후, 동로마 제국의 성곽이 있었던 첫 번째 언덕 북쪽 끝에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이 궁전이 바로 톱카프 궁전이다. 톱카프 궁전이 자리한 지역에는 동로마 제국이 세운 건축물이 있었으나,
톱카프 궁전이 들어서면서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톱카프 궁전은 신 궁전(新宮殿)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예니 사라이(Yeni Sarayı)’라고 불렸으나,
궁전 입구 양쪽에 대포가 배치된 데 연유하여 톱카프 궁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톱’은 대포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다.
톱카프 궁전은 19세기 마흐무트 2세 때까지 약 380여 년간 오스만 제국 군주의 정궁이었다.
1475~1478년에 지어진 톱카프 궁전은 1850년대까지 계속 증축되기도 하고 보수되기도 하였다.




제2 정원 (Second Court)


제2 정원의 나무


제2 정원의 고목 사이로 새 나무가 자라 속에서 뚫고 나온 모습.​


부엌 궁전 (Saray Mutfakları)


경의의 문 뒤에 있는 넓은 마당은 제2중정(II. Avlu)으로 이곳에는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디완 건물과
거대한 황실 주방인 부엌 궁전(Saray Mutfakları)이 자리하고 있다.


부엌 궁전 (Saray Mutfakları)


마당 오른쪽에 있는 부엌 궁전은 군주를 비롯해 궁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직분에 따라 열 개의 별도 주방을 갖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 궁중음식이 준비되었고, 해가 긴 여름철에는 해지고 두 시간 후쯤 군주와 하렘의 황실 가족들에게 음식이 제공되었다.


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200여 명의 사람이 줄을 서서 접시를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식탁에 올려졌다.
궁전의 주방에서는 주로 양고기를 포함한 육류가 준비되었는데, 하루에 양 200마리가 소비되었다고 한다.
생선은 원하면 요리할 수도 있었으나, 거의 먹지 않았다.

주방이 있던 자리


주방으로 샤용되었던 곳으로 굴뚝의 규모를 보면 당시 톱카프 궁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지금은 도자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전시된 도자기가 무려 12,000여 점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정의의 탑 (Tower of Justice)


디완과 하렘 사이에 위치한 정의의 탑은 궁전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부정에 대항하는

술탄의 영원한 경계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높이 14m의 이 탑은 내부를 감시하는 망루로 쓰였다고 한다.


정의의 탑 (Tower of Justice)


이곳 제2 중정 마당에서는 처형된 죄인의 목을 걸기도 했으며,
이 문 안쪽에는 사형집행인이 칼에 묻은 피를 씻었다는 우물이 남아 있다.


오스만 제국의 대신들의 국정회의인 디완(Divan)을 주관하던 건물에 바로 붙어 있으며

궁궐 내에서 집행된 모든 처형, 처벌들은 이 사진이 찍힌 제2 중정 마당에서 이루어졌다.


황제는 저 탑 위에 올라가서 사형집행 윤허 여부를 전달하고 집행을 지켜보았는데,
터키 드라마 무흐테솀 유즈이을을 보면 꽤 자주 볼 수 있다.


디완(diwan)


경의의 문 뒤에 있는 넓은 마당은 제2중정(II. Avlu)으로 이곳에는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디완 건물과
거대한 황실 주방인 부엌 궁전(Saray Mutfakları)이 자리하고 있다.


제2 중정 왼쪽(서쪽)에 아름다운 제국 대회의실(Imperial Council Chamber; Dîvân-ı Hümâyûn)이 있다.
대신들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으로, 술탄이 이따금 벽 상부에 설치된 황금 창살을 통해 회의 내용을 엿들었다고 한다.


오른쪽 공간에는 궁전의 시계가 전시되어 있다.
북쪽의 외부 금고(Outer Treasury)에서는 오스만 제국 및 유럽의 무기와 갑옷을 볼 수 있다.


디완(diwan) 내부.


디완은 오늘날의 내각(內閣)을 말하는 것으로, 조정의 주요 업무가 이곳에서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디완 건물을 ‘쿱베알트’라고 부른다. 콥베는 ‘돔’이라는 뜻이고, 알트는 ‘아래’라는 뜻이다.


내각회의는 톱카프 궁전 초기에는 매일 열렸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줄어들다가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일주일에 하루만 열리게 되었다.


디완 회의 초기에는 군주가 직접 회의에 참여하였으나,

얼마 안 있다가 디완 회의는 총리대신이 주재하게 되었다.


긴 소파가 있다.


디완(diwan)은 터키어로 '소파'라는 뜻인데 여기에서

각료들이 소파에 앉아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신하들의 회의에 왕도 참관했는데 나중에는 동석하지 않고 벽 뒤에 숨어서 지켜봤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관료들이 디완 회의를 했던 건물 내부의 모습.


사진 우측 중앙을 보면 황금 창살로 막혀 있는 창문이 보이는데 이곳을 통해
황제가 직접 회의를 관찰하거나 대리인을 보내 관찰하게 했다.


한편 황제는 회의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디완 회의 이후 대재상(Vezir-i âzam)을 불러 접견을 통해 자신의 의중을 전달했다.


술탄이 가끔 이 뒤에 숨어서 지켜 봤다고 하는 창문.


왕이 이 뒤에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어서

신하들은 맘 편하게 회의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디완의 화려한 천장 장식.


외부 금고(Outer Treasury)에서는 오스만 제국 및 유럽의 무기와 갑옷을 볼 수 있다.


참조 ; https://ljhoi.blog.me/221363753799
https://blog.naver.com/fightclub/221380539496
https://blog.naver.com/ahnys0/22122958034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694&cid=43079&categoryId=4307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60465&cid=40942&categoryId=31600
https://ko.wikipedia.org/wiki/%ED%86%B1%EC%B9%B4%ED%94%84_%EA%B6%81%EC%A0%84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


메흐멧 2세가 1452년에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정복하기 위하여
당시 보급 물자의 항로였던 보스포루스 해협에 건설한 요새이다.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러스해협의 유럽 쪽에 지어진 요새.
1452년 당시 보스포루스 해협을 관할하던 비잔티움제국 함대가 북쪽 동맹국과 교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해협의 폭이 가장 좁은 700m 병목구간에 건설했다.


석공 1만 명과 인부 1만 명을 동원하여 139일 만에 지었다는 전설적인 성채로,
계단식 성곽으로 되어 있으며 5~15m에 이르는 거대한 첨탑 5개가 서로 연결되어
어느 탑에 오르더라도 전체를 다 돌아볼 수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 건너편의 아시아 쪽에 있는 아나돌루 히사리와 함께

서로 해협을 지나는 모든 선박들을 감시하고 대포로 공격하기도 했다.


1453년에는 양쪽 요새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타고 들어오는 비잔틴 제국의 함선을 협공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함락에 성공했다.


원래의 요새는 1509년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어 일부를 복구했으며,
1953년에 이스탄불 정복 500주년을 기념해 현재의 모습으로 완전히 복원하였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매년 여름 루멜리 페스티벌이 열리며,

요새 가운데 뜰에 있는 소규모 공연장에서는 음악회와 포크댄스 등 각종 공연이 열린다.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s)에서 보는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


보스포루스 해협은 이스탄불의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해협의 동쪽이 아시아, 서쪽이 유럽이다.
유럽 지역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출구인 골든 혼을 기준으로 다시 남쪽의 구시가와 북쪽의 신시가로 나뉜다.
이 해협은 예로부터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s)에서 보는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


보스포루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는 수로로서 지리적 가치가 높아
중세의 교통로와 무역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냉전 시대에는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해 남하하던 소련을 막는 마지막 보루였다.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s)에서 보는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


보스포루스 해협은 양쪽 기슭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치가 매우 인상적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루멜리 히사르 요새 등 이스탄불의 유서 깊은 건축물들과

고급 주택, 오래된 목조 별장이 늘어서 있다.


해변에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과 카페도 많다.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주변 풍광을 즐기기에 좋다.


2006. 3. 14. 보스포루스 해협 유람선에서 루멜리 히사리를 배경으로 인증샷.


마르마라해(Sea of Marmara)란 터키 북서부의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있는 바다를 말한다.
북동쪽은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흑해로 통하고, 남서쪽은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에게 해에 통한다.

동서 길이 1,150km. 남북 최대 길이 610km. 면적 41만 3,000km2. 최대수심 2,212m.
유럽 지중해(海)의 에게해와는 보스포루스 해협·마르마라해·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이어져 있다.

유라시아에서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의 위치


남쪽은 터키, 서쪽은 유럽의 터키·불가리아·루마니아,

북쪽과 동쪽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연방·조지아에 둘러싸여 있다.


북부는 크림 반도가 돌출해 있는 것을 제외하면 해안선이 비교적 단조로우며,
해저 지형은 북반부에 대륙붕의 발달이 현저하고 남반부는 비교적 깊다.


북쪽은 케르치 해협에서 아조프해에, 남서쪽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마르마라해에 이어지고
다시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지중해로 연결된다.


하천은 북부로부터 드네프르강(江)·드네스트르강이, 서부로부터 도나우강이 유입하여 유입량이 많은 데다가
비가 많아 표층은 18% 내외의 저염분(低鹽分)이다.


유라시아에서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의 위치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의 지명은 그리스 어로 '대리석'이라는 뜻이다.
고대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해전이 있었던 곳이다.


흑해(Black Sea)의 표층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유출하는데

저층수(低層水)는 에게해로부터 강한 조류가 되어 유입한다.


표면 수온은 겨울철 6℃, 여름철에는 23℃ 내외가 된다.
예전에는 카스피해와 이어져 있었으나 제3기(紀) 말의 지각운동에 의하여 분리, 지중해와 이어졌다.

유라시아에서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의 위치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기후가 온화하여 섬과 연안에는 휴양지가 발달하였다.
이 곳에 있는 마르마르 섬은 대리석 산지로 알려져 있다.


흑해(Black Sea)에서의 어업은 주로 얕은 북해안에서 행해지는데, 어족은 108종에 이르며
청어·고등어·철갑상어·정어리·넙치·꼬치고기·농어·도미 등이 잡힌다.


예로부터 수상교통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해외로 통하는 바다로서 몇 개 안 되는 부동항이 있기 때문에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남방 진출의 기지가 되었다.

러시아·루마니아·불가리아·우크라이나 등도 무역에서 흑해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주요항으로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니콜라예프·헤르손·세바스토폴, 러시아의 노보로시스크·소치,
조지아의 바투미, 루마니아의 콘스탄차, 불가리아의 부르가스·바르나, 터키의 삼순·시노프·트라브존 등이 있다.


참르자 언덕에서 보는 이스탄불과 보스포루스 해협

참르자는 터키의 이스탄블 전체를 볼 수 있는 높은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보스포루스 제1대교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 다리가 2개 뿐이다.
차량 이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두 지역을 통근하는 이스탄불 시민들은 주로 연락선(바푸르)을 이용한다.


2006. 3. 14.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에서 루멜리 히사리를 배경으로 인증샷.


보스포루스 해협의 푸른 물결을 가르며 이스탄불의 시가지를 둘러보는 보스포루스 크루즈 투어는 매우 인기 있다.
이스탄불의 일몰부터 야경까지 감상할 수 있는 저녁 시간에 맞춰 탑승하는 것이 좋다.


투어의 종류는 다양한데 에미노뉴(Eminonu) 선착장에서 출발해

보스포루스 제2교까지 올라갔다가 되돌아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 밖에 에미노뉴에서 흑해 입구로 향하는 크루즈, 오르타쾨이에서 출발하는 왕복 크루즈 등이 있다.


에미노뉴 선착장을 이용할 경우, 항구의 별미인 고등어 케밥(발륵 에크멕)을 꼭 맛보아야 한다고.
보스포루스 크루즈선이 드나드는 선착장 주변에 작은 배에서 고등어 케밥을 만들어 내는 가게들이 성업 중이다.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는 메흐메트 2세가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기에 앞서, 동맹국과 교류를 막기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의 가장 좁은 부분에 설치한 두 성채 중 하나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기준으로 왼쪽은 유럽, 오른쪽은 아시아라고 이야기하는데,

루멜리 히사리는 유럽 쪽에 지어진 성채이다.
반대쪽인 아시아에는 아나돌루 히사리(Anadolu hisarı)라는 이름의 성채가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보스포루스 제1대교에 가까이 붙어 있는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다소 복잡한 주차장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들어가는 길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매표소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매표소를 지나서 입구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입구


요새를 지키던 대포를 진열해 놓은 듯.


요새를 지키던 대포를 진열해 놓은 듯.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첨탑


 루멜리 히사리는 군사 목적으로 건설된, 특히 대함전을 주력으로 한 성채라서

해협을 따라 성벽과 첨탑이 줄지어 서 있다.
모든 첨탑이 연결되어 있어 전쟁시 유기적으로 응전할 수 있었다고.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하지만 아쉽게도 성벽이나 첨탑으로 오르는 길은 모두 막혀 있어서 접근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아시아쪽 해안이 보이는 풍경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쪽 방면에 있는 저택들은 터키 금수저들의 별장들이라고 한다.


루멜리 히사리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아시아쪽 해안이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 사이로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첨탑 사이로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첨탑 사이로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 사이로 보스포루스 제1대교와 유람선이 보이는 풍경.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루멜리 히사리  성벽 안에 있는 소공연장.
여기서는 매년 축제가 개최된다고 하니 때를 잘 맞추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루멜리 히사리  성벽에 붙어 있는 소공연장.


루멜리 히사리  성벽에 붙어 있는 소공연장.


루멜리 히사리  성벽에 붙어 있는 소공연장.


루멜리 히사리  성벽 안에 있는 소공연장.


소공연장 옆의 나가는 길에 버려져있던 유물들.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ı) 성벽과 첨탑


[영상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루멜리 히사리 (Rumeli Hisari)


메흐메트 2세(Mehmet II, 1432년 3월 30일 ~ 1481년 5월 3일)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제7대 술탄이며,

처음으로 카이사르와 칼리프의 칭호를 쓴 인물이다.


1444년부터 1446년까지 짧은 기간 통치하다가 퇴위되고

나중에 1451년부터 다시 즉위하여 1481년에 죽을 때까지 집권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으며
오스만 제국의 판도를 대폭으로 넓혀‘정복자(Fatih)’란 별명으로 불렸다.


메흐메트 2세는 술탄 무라트 2세의 4남으로 세르비아 출신의 크리스트교도 여자 노예인
휘마 술탄(1410~1449)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2년 만에 메흐메트는 맏형이 총독으로 있던 소아시아의 도시 아마시아(Amasya)로 옮겨갔다.
3년 뒤 메흐메트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맏형이 죽자 뒤를 이어 아마시아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나중에 둘째 형이 아마시아 총독이 되었고 메흐메트는 마니사(Manisa) 총독이 되어
관습에 따라 2명의 선생과 함께 마니사로 이동했다.


1443년 둘째 형이 죽자 메흐메트는 술탄의 계승자가 되었으며
이듬해 부왕으로부터 에디르네(Edirne)에서 술탄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때 무라트 2세는 아들에게 여러 선생들을 붙여주었는데,
이들로부터 받은 이슬람 교육은 메흐메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잔티움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1404~1453)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세스 팔레올로고스(1405년 2월 8일 - 1453년 5월 29일)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1448년부터 치세가 시작되었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때 전사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에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와
마케도니아 지방 드라가슈 가문 출신의 세르비아인 아내 헬레나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냈으며,
1443년 모레아의 황제 소유영지를 통치하고 라틴인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448년 형인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자녀 없이 죽자,
다른 형제인 데메트리오스와 제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는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중재를 요청한 결과,
콘스탄티노스가 결정되어 미스트라에서 황제로 즉위했다(1449년).


1451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된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위협을 가해오자,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재결합에 동의함으로써
서유럽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무산되었다.


결국 가브리엘로 트레비사노가 이끄는 소수의 베네치아 공화국 함대와,
주스티니아니 롱고가 이끄는 제노바 공화국 용병의 지원을 받아
독자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위조직을 갖추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메메드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군대의 침공하는 것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1453년 5월 29일 일화로, 사석포(우르반 대포)를 동원한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 군이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마주보며 서있었을 때, 황제는 백마를 타고 3중 성벽을 지키는 8천 병사를 시찰하고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백마를 탄 그의 모습을 보고 '황제는 백마를 타는가?'라고 하며
타고 있던 흑마를 물리고 백마로 갈아탔다고 한다.


후에 메흐메트 2세가 스스로를 로마의 황제로 칭한 것을 생각나게 한다.
4900명 정도의 그리스인들(무기를 들 수 있는 남성에 수도승까지 모두 포함한)과
2000명의 자진해서 잔류한 외국 용병들이 메메드 2세를 맞아 싸웠다.


황제는 전선에 직접 나섰으며, "활을 쏘고 창을 던져라,
저들에게 로마인들의 후예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라!" 라며 사기를 북돋았다고 한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의 항복 제안에 대해서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에게 도시를 넘겨줄 권리는 나에게도, 이 곳에 사는 그 누구에게도 없소,
우리 모두를 위해서, 상호간의 이해에 따라, 우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자유 의지에 따라 죽을 것이오."


콘스탄티노플은 그 뒤에도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강력한 방어력을 바탕으로
몇번의 파상공세를 6천 남짓한 병사를 바탕으로 이겨낸다.


메흐메트 2세는 계속되는 실패로 원정을 지속할 지를 참모들에게 묻는다.
참모들은 딱 한 번의 총공세 이후에 황제와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하고 메흐메트 2세는 수긍한다.


마지막 공격지점은 외부 성벽 중 가장 약한 곳, 리쿠스강이 흘러드는 지점이었다.
황제는 첩자를 통해 공격지점을 들었지만, 방비를 단단히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바시-바주크에 의한 1차 공세, 정규군에 의한 2차 공세, 심지어 예니체리 군단의 3차 공세까지
모두 막아냈지만 비어있는 통로를 따라 올라간 오스만 병사가 탑에 오스만 군기를 세움으로써
성이 함락되었다고 생각해버린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한다.


설상가상으로 방어전을 지휘하고 있던 용병대장 주스티니아니가 투르크군의 사격에
부상을 입고 방어선에서 이탈하여 배로 도망간다.


배로 옮겨진 주스티니아니는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후 바다를 건너던 중 배 안에서 사망하고 만다.
주스티니아니가 부상으로 후송되자 방어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황제가 근위대와 함께 최후의 저항을 하고있는가운데 수비군이 열려있는 비밀문을 잠그지못했고
그 문을 통해 오스만 군대가 난입해오면서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당시에 "로마 제국은 창시자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하에서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이 소문은 들어맞고 말았다.


흥미롭게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플라비우스 모마일루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도
로마의 첫 번째 왕 로물루스와 로마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당시 천사들이 내려와 콘스탄티누스 11세를 구하여 대리석상으로 만들었으며,
투르크의 지배가 무너지고 그리스가 해방될 날 다시 부활하여 앞장서게 될 것이다.'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다르다넬스 대포


메흐메트 2세(Mehmet II)는 뛰어난 군사지도자로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고
이후 4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가 된 아나톨리아와 발칸을 정복했다.


메흐메트 2세는 술탄 무라트 2세의 4남으로 세르비아 출신의 크리스트교도 여자 노예인
휘마 술탄(1410~1449)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2년 만에 메흐메트는 맏형이 총독으로 있던 소아시아의 도시 아마시아(Amasya)로 옮겨갔다.
3년 뒤 메흐메트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맏형이 죽자 뒤를 이어 아마시아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나중에 둘째 형이 아마시아 총독이 되었고 메흐메트는 마니사(Manisa) 총독이 되어
관습에 따라 2명의 선생과 함께 마니사로 이동했다.


1443년 둘째 형이 죽자 메흐메트는 술탄의 계승자가 되었으며
이듬해 부왕으로부터 에디르네(Edirne)에서 술탄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때 무라트 2세는 아들에게 여러 선생들을 붙여주었는데,
이들로부터 받은 이슬람 교육은 메흐메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는 메흐메트 2세


첫 재위 기간에 메흐메트 2세는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헝가리, 교황, 비잔티움 제국, 베네치아 등은 어린 왕자가 오스만 제국 술탄으로 즉위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에서 십자군을 조직했다.


또한 당시 에디르네에서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대(大) 와지르(총리) 찬다를리 할릴 파샤(?~1453)와
자가노스 파샤(?~1462)·시하베딘 파샤와 같은 와지르(각료) 사이의 대결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와지르들은 각기 어린 술탄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었다.
1444년 9월 십자군이 도나우 강을 건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에디르네에서는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은 후루프파에 대한 학살이 일어났고
공포와 방화가 도시를 휩쓸었다.


어린 술탄은 아버지가 다시 돌아와 헝가리군과 싸워주길 바랐는데 아버지 무라트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술탄이 "당신이 술탄이시거든, 돌아와 당신의 군대를 이끌어주소서.
만약 내가 술탄이라면 나 지금 당신에게 명령하노니,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끌어주시오."
라는 편지를 보내자 무라트는 급히 돌아와 군대를 지휘했다.


1444년 11월 바르나(Varna)에서 무라트가 거둔 승리로 위기는 가라앉았다.
메흐메트 2세는 에디르네에서 계속 제위를 유지했고 무라트는 전쟁이 끝나자 마니사로 다시 은퇴했다.


이때부터 자가노스 파샤와 시하베딘 파샤는

어린 술탄에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정복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1446년 할릴 파샤가 예니체리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무라트를 에디르네로 불러와 술탄 자리에 복위시켰다.


할릴 파샤와 메흐메트는 서로 반목했다고 전해지며 나중에 할릴 파샤는 메흐메트가 다시 정권을 잡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때 비잔티움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죄로 처형당했다.


퇴위당한 메흐메트는 새로이 선생으로 임명된 자가노스 파샤·시하베딘 파샤와 함께 다시 한번

마니사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남색과 여색을 불문하고 난행에 젖어 지내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오스만군을 수송하려는 메흐메트 2세


1451년 2월 부왕이 죽자 메흐메트는 에디르네에서 다시 권좌에 올랐다.
그의 마음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계획에 대해서 유럽과 비잔티움은 그의 전번 재위 때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권위는 제국 내에서도 여전히 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술탄 즉위 때 관례상 내리는 하사품이 늦었다는 이유로 항의하는 예니체리를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과시했다.


그는 군조직을 강화해 앞으로의 정복전을 준비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필요한 외교적·군사적 준비에 모든 열의를 쏟았다.

우선 베네치아와 헝가리를 중립 상태에 남아 있도록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유리한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1452년 대부분의 시간을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제하기 위한
보아즈케센(뒤에는 루멜리 히사리)의 요새화 작업과 31척의 함대 건조 및
대구경 신형 대포를 주조하는 데 보냈다.


그는 헝가리인 총포제조기술자 우르본에게

유럽에조차 아직 알려지지 않은 크기의 대포(다르다넬스 대포)를 만들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할릴 파샤는 이런 계획들을 계속해서 반대했으며
콘스탄티노플의 포위기간(1453. 4. 6~5. 29) 동안 결정적인 순간에 소집된 2번의 전시 회의에서 반대 소리가 높아졌다.
반면 자가노스 파샤는 포위를 풀자는 제안에 격렬히 반대했다.


자가노스 파샤가 마지막 총공격의 임무를 부여받았고 총사령관 메흐메트 2세 자신은 총공격을 개시한 날,
신형 대포로 파괴한 성벽의 돌파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날 할릴 파샤는 체포되어 곧바로 에디르네에서 처형되었으며,
이미 메흐메트 2세의 장인이 되어 있었던 자가노스 파샤가 대 와지르 자리에 올랐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에 메흐메트 2세는 병사들에게 그 도시에 대한 3일 간의 약탈을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점령 첫날 저녁에 자신의 명령을 철회했다.


진주 행렬의 선두에 서서 입성한 메흐메트 2세는 곧바로

성 소피아 대성당에 가서 그곳을 모스크(아야 소피아)로 바꾸었다.


이후 풍부한 기금을 조성하고 모스크의 유지와 운영을 위해
매년 1만 4,000두카트(중세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발행된 주화) 금화를 그곳에 보내주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는 메흐메트 2세


메흐메트 2세가 마음에 품었던 과업 중 하나는 지금은 일반적으로 이스탄불로 불리는 이 도시를
세계적인 제국의 수도에 걸맞게 재건하는 일이었다.


조세를 재확립해 갈라타(콘스탄티노플의 상업지구)에 살다가 피난 간
그리스인과 제노바인들에게 돌아올 것을 권유하고 그들의 가옥을 돌려주었으며 신변의 안전을 보장했다.


도시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아나톨리아와 발칸의 이슬람교도와 크리스트교도를 강제 이주시켜
콘스탄티노플에 정착하도록 했다.
밀레트(Millet) 제도를 시행해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개체성을 인정해주었으며


1454년 1월에는 도시 안에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구를 복원하고
유대교의 대랍비와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를 두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중심가에 그 자신이 먼저 이슬람 학술기관과 상업시설을 설립하고
와지르들에게도 이와 같이 하도록 격려했으며 파괴된 비잔티움 제국의 건물들을 복원시켰다.


이러한 핵심기관을 중심으로 콘스탄티노플은 다시 발전했으며 1478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플과 인근 갈라타 지역에는 1만 6,324채의 가옥과 3,927개의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50년 뒤 콘스탄티노플은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함으로써 메흐메트 2세는 더없는 영광과 명성을 얻었고 커다란 권위를 얻었다.
그는 점차 스스로를 로마 황제의 후계자이고 성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슬람의 패자(覇者)라고 생각했다.


정복 계획을 미리 세워두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로마 제국의 부활과 그 영역을 역사상 최대로 확장하는 일에 몰두했다.


1454년 세르비아 군주 듀라드 브란코비치(1377~1456)가 공물을 거부하자
메흐메트 2세는 에디르네에서 출발하여 세르비아 문제에 개입해 첫번째로 세멘데르(Semender)를 공략했다.


1456년 스메데레보를 점령하고 듀라드 브란코비치에게 연공 납부와
유사시 오스만 제국에게 지원군을 보낸다는 조약을 강요했다.
더 나아가 동유럽으로 진격한 메흐메트 2세는 벨그라드(Belgrad)를 포위했으나


1444년에 바르나에서 부왕에게 패했던 후녀디 야노시(1400~1456)의 기습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포위를 풀어 에디르네로 물러났다.


듀라드 브란코비치는 일시적인 독립을 획득했으나 그해 사망했고,
그의 미망인과 세 아들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이듬해 막내아들 라자르 브란코비치(1421~1458)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두 형제를 몰아내었으나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라자르의 추방당한 형 스테판 브란코비치(1417~1476)가 세르비아 군주로 즉위했으나 1459년 3월 추방당했다.
1459년 6월 메흐메트 2세는 스메데레보를 다시 한 번 공격해 벨그라드를 제외한 세르비아 전역을 합병했고
이로써 벨그라드가 점령될 때까지 스메데레보는 헝가리 공략의 중심지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겐나디오스 2세(1400~1473)


에게 해의 작은 모레아(Morea) 공국 토벌을 위해 메흐메트 2세는
대 와지르 마흐무트 파샤(1420~1474)를 파견했고 자신도 2차례의 원정을 감행했다.


1460년 5월, 늘어나는 공물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한 모레아 공국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메흐메트 2세는 이를 기회로 삼아 모레아 공국을 침공했다.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동생 데메트리우스(1407~1470)는 사로잡혀 수감되었고,
또 다른 동생 토마스(1409~1465)는 도망쳤다.


여름이 지나갈 즈음 모레아는 사실상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했으나,
모넴바시아(Monemvasia)를 점령하고 있던 카탈루냐 해적들과 모레아 남쪽 마니(Mani) 반도는
베네치아의 지원 속에서 계속 저항했다.


모레아 북서쪽의 살메니코(Salmeniko)가 가장 오래 저항했으나
1461년 이곳마저 함락당하며 그리스 전역이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었다.


모레아 점령은 베네치아를 비롯한 지중해 해상 세력과의 맞대결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유리한 입지를 제공해주었다.

모레아 점령 이후 메흐메트 2세는 아나톨리아 주변에 대한 정복 사업에 착수했다.


특히 아나톨리아 북부를 감싸고 있는 흑해 연안의 도시들은 전통적으로 제노바의 식민 도시로 전락해
동서 교역의 막대한 이익이 제노바의 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보스포루스와 골든혼 내해의 갈라타까지 독점 교역권을 확장하려는 제노바의 제의를 거절하고,
제노바의 흑해 교역 중심지인 아마스라(Amasra)를 공략했다.


마흐무트 파샤의 오스만 함대가 아마스라로 진격했고 술탄 자신도 아나톨리아 내륙 도시 볼루를 거점으로
아마스라를 육지에서 공격해 1461년 아마스라는 오스만 영토에 병합되었다.


아마스라 정복의 여세를 몰아 메흐메트 2세는 또 다른 흑해 중부의 교역 중심지 시노프에 대한 정복을 단행했고
시노프를 지배하던 잔다르 공국의 왕 이스펜디야 베이는 항복했다.


다음으로 메흐메트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잔존세력인 트라브존 항을 공격했고
1461년 10월 트라브존 황제 다비드 콤네누스(1408~1463)는 오스만 제국에게 항복했다.


이어서 내륙 평정에 착수한 메흐메트 2세는 카라만 공국을 공략했고
아나톨리아에서 오스만 제국의 적대 세력은 악코윤루조만 남게 되었다.

메흐메트 2세가 묻힌 이스탄불의 파티 모스크


세르비아 토벌 이후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체페슈(1431~1476)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조공 납부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약탈하자 메흐메트 2세는 그에 대한 응징에 나섰다.


블라드는 기습 공격으로 오스만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으나 특유의 잔혹함과 화전 전술로 인해 인기가 없었고,
오스만군을 피해 헝가리로 피신했다.


헝가리는 봉신의 예를 지키지 않았다는 핑계로 블라드를 추방했고,
블라드는 결국 오스만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오스만군은 왈라키아의 수도 트르고비슈테(Targoviște)를 함락시켰고,
메흐메트 2세는 친(親) 오스만파인 블라드의 동생 라두(1435~1475)를 왈라키아 공작으로 세우고 철수했다.
이로써 왈라키아 또한 오스만 제국에게 귀속되었다.


이어서 몰다비아 군주 스테판 3세(1432~1504)가 조공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고 왈라키아에 대한 간섭을 시도하자
루멜리 지역의 사령관 하딤 쉴레이만 파샤(?~1490)​를 몰다비아 원정대장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1475년 10월 하딤 쉴레이만 파샤는 바슬루이(Vaslui) 전투에서 스테판 3세에게 대패했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직접 몰다비아 원정에 나서, 불리한 전황 끝에 아크데레 근교에서 스테판 3세를 격퇴하고

1476년 몰다비아도 오스만 제국에 편입시켰다.


관심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로 돌린 메흐메트 2세는 마흐무트 파샤를 보내
보스니아의 수도 아이차를 포위해 정복했고 클리티에 성에 피신해 있던 보스니아 왕이자 세르비아 군주인

스테판 토마셰비치(?~1463)가 항복함으로써 1463년 보스니아도 오스만 제국에게 복속되었다.


보스니아의 점령으로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를 통한 베네치아와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고
동시에 헝가리에 대한 견제 효과도 얻었다.


이어서 메흐메트 2세는 헤르체고비나 왕국으로 진입해

스테판 카소로비치(1404~1466)를 패주 시켜 항복시켰다.


스테판이 죽은 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만 제국의 루멜리 사령부에 편입되었고
스테판의 어린 왕자는 이슬람교로 개종해 후일 아흐메트 파샤(?~1517)로 알려져 대 와지르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파티 술탄 메흐메트 다리


1466년 봄 메흐메트 2세는 대군을 이끌고 알바니아를 침공했다.
알바니아는 스칸데르베그(1405~1468)의 지도 아래 저항하며 베네치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스칸데르베그는 오스만 제국이 베네치아와 전쟁을 하는 것을 이용하여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
베네치아는 두라조(Durazzo), 스쿠타리(Scutari)를 내어주며 알바니아를 지원했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원정을 떠나 엘바산(Elbasan) 요새를 지어

스칸데르베그를 남쪽의 베네치아와 분리·고립시켰다.


1467년 초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 사령관인 발라반 파샤를 격퇴했고 오스만군의 크루저(Krujë) 포위를 풀어냈다.
이어서 엘베산 요새까지 공격했으나 점령까지 하지는 못했다.


메흐메트 2세는 다시 알바니아 원정을 떠나 알바니아를 고립시켜 맹공을 퍼부었지만 실패했고,
겨울에 전염병이 돌자 물러났다.


그러나 1468년 1월 스칸데르베그는 베네치아의 레즈헤(Lezhe) 요새에서 사망했고,
메흐메트 2세는 10년에 걸쳐 알바니아를 잠식해 들어갔다.
1478년 슈코드라(Shkodra) 포위전을 끝으로 알바니아는 오스만 제국에 귀속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점령 이후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유럽의 십자군 결성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와 연대해 유럽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했다.


베네치아 역시 교역로의 새로운 주인인 오스만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희망했고

오스만 제국 또한 베네치아 공략에 필요한 해군력의 약화로 공략보다는 공존을 택하려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및 동지중해에서의 급격한 팽창 정책은 베네치아를 직접적으로 위협했고
오스만 제국의 해군력 또한 꾸준히 증강되었다.


이에 베네치아는 아나톨리아 동부와 남부 지중해의 반(反) 오스만 세력인 악코윤루조의 통치자 우준 하산(1423~1478)과

동맹을 맺고 카라만 공국의 카심 베이에게 군사 지원을 하면서 오스만 제국을 협공했으며 이즈미르를 공격했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1473년 6월 마흐무트 파샤에게 군대 지휘를 맡겨 아테네 근처 베네치아의 교역 거점인
유보아 섬을 공격하게 했고 자신은 육로로 그리스 남부의 테르모필레를 넘어 유보아 성채에 도착해 17일 만에 성을 점령했다.


아나톨리아로 돌아온 메흐메트 2세는 1473년 8월 에르진잔의 바슈켄트 전투에서 우준 하산을 격파했고
아나톨리아와 발칸 지방의 지배를 확고히 했다.


동맹세력을 잃은 베네치아는 1474년 오스만 제국에 사절을 파견해 1년간의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도 크림 반도에 대한 해상 원정에 치중했기 때문에 1년 동안 양국 간의 충돌이 잃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호 불가침 조약이 만료되자 베네치아 함대는 아나톨리아 해안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이에 오스만 함대는 베네치아 무역 거점들에 대한 원정을 시작해


1477년 사령관인 하딤 쉴레이만 파샤가 코린트 해협 북부의 레판토를 공격했다.
동시에 알바니아 총독인 알리 베이가 크루저를 공격했고 메흐메트 2세의 친정으로 크루저는 1478년 정복되었다.


이어 스쿠타리를 포위한 후 맹포격을 가해 점령했다.
결국 1479년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메흐메트 2세가 사용했던 검


1475년 대 와지르 게디크 아흐메트 파샤(?~1482)가 300척의 함선과 4만 명의 군사로
흑해 북부를 공격해 제노바의 무역 거점인 케페를 점령한 후 아조프 해로 진입해 아조프 성과 멘퀴브 성을 차지했다.


크림 칸국의 멩글리 기라이(1445~1515)는 생포되어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었고
흑해는 오스만 제국의 내해가 되어 육·해상 실크로드의 중개지로서 오스만 제국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흑해에 이어 다시 에게 해와 지중해 통제 정책으로 전환한 메흐메트 2세는 메시히 파샤를 보내 1479년 로도스 섬을 공격했다.
그러나 로도스 섬은 1522년 메흐메트 2세의 증손자 쉴레이만 1세 대에서 정복되었다.


베네치아와 평화 협정을 체결 한 이후 메흐메트 2세는 이탈리아 공국들의 내분을 이용하여
게디크 아흐메트 파샤로 하여금 이탈리아 남부 오트란토(Otranto)를 공격하게 했다.


1480년 7월 오트란토 해협에 상륙한 아흐메트 파샤는 이탈리아 남부의 브린디시와 타란토를 정복한 후
파죽지세로 이탈리아 내륙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봄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25km 떨어진 훈카르차이리(Hünkârçayırı)에서 사망했고
오스만 제국의 이탈리아 원정도 중지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죽기 전 며칠 동안 예전부터 앓아오던 통풍으로 심하게 고통받았으며, 독살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말년에는 맏아들 바예지트가 항상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부자간의 관계가 매우 나빠졌다.
재위 말기로 갈수록 메흐메트 2세의 재정정책에 대해 국내 전반에 불만이 커졌다.


특히 종교재단과 지주 귀족에게 속해 있던 2만여 부락과 농장을 군사 봉토로 할당했을 때가 가장 심했다.
따라서 메흐메트 2세가 죽자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은 술탄이 총애한 아들 젬을 버리고 바예지트를 즉위시켜
메흐메트 2세의 정책에 대한 반동을 시작했다.

루멜리 히사리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 정부를 재조직했고 최초로 형법과 신민에 관한 법률들을 하나의 법전에 집대성하고
헌법을 또 하나의 정교한 법전으로 마련해서 이 두 법전을 모든 하위 법률의 핵심으로 삼았다.


메흐메트 2세의 극히 독재적인 성향에서 오스만 술탄의 전형이 생겨났다.
그는 자신의 포고령이나 법령을 어긴 사람들에 대해 극히 잔인하게 처벌해 당시 사람들조차 지나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역대 술탄들 중 가장 편견 없고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그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과 그리스 학자들을 궁전으로 불러 모았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겐나디오스 2세에게 정교회 신조를 쓰게 하고 그것을 오스만 투르크어로 번역하게 했으며
궁정 안에 그리스어와 라틴어 서적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베네치아에서 젠틸레 벨리니(1429~1507)를 초청해 자신의 초상화(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를
그리고 궁전의 벽을 프레스코 화법으로 장식하게 했다.


그가 세운 장대한 모스크 주위에는 8개의 대학을 설립했는데,
이 대학들은 거의 1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 내에서 이슬람 과학의 수준 높은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가끔 '울라마'(원로 이슬람 학자)를 모아 자신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신학 논쟁을 벌였다.
그의 치세 동안 수학, 천문학, 이슬람 신학은 어느 오스만 시대보다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메흐메트 2세 자신도 1권의 디완(오스만 고전문학의 전통적 문체로 쓴 시집)을 남겼으며,
무슬림 남성에게 존재하던 남색을 애호하여 인질로 있던 크리스트교국의 젊은 왕자나 귀족의 영애들을 사랑하였다.

아나돌루 히사리(Anadolu hisarı)


보스포루스해협의 아시아 대륙에 지어진 요새이다.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재위 1389~1403)가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수비하기 위한 방어벽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건설하였다.


해협의 중간 지점, 600m폭의 좁은 병목구간에 위치하며, 약 7,000m² 부지에 축조되었다.
다섯 개의 망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층부에서 바라본 모습은 불규칙한 오각형 형태이다.
요새의 중앙에 있는 중심 타워는 25m이며 전체적으로 전통 오스만 제국의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건너편의 유럽 대륙 쪽에 있는 루멜리 히사리와 함께
보스포루스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을 감시하고, 외부 침략에 대비하였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터키 문화부의 주도로 손상된 부분을 복원하였고,
현재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지 않다.


[영상] Panorama 1453 History Museum


[영상] Istanbul 1453 Panorama Museum OFFICIAL HD



참조 ; https://cafe.naver.com/aqob/5773
http://harenstyle.com/221385549864
https://cafe.naver.com/gorekorea/48475
https://blog.naver.com/item35/220213994601
https://blog.naver.com/mi2591/140134331473
https://blog.naver.com/ylj1407/130105356672
https://blog.naver.com/choemhwa/221406700684
https://blog.naver.com/choemhwa/221408416362

https://blog.naver.com/wrinklecat/15725575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383&cid=40942&categoryId=4009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3678&cid=42864&categoryId=5085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6457&cid=40942&categoryId=3470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96460&cid=51736&categoryId=5173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39496&cid=40942&categoryId=33084
https://ko.wikipedia.org/wiki/%EB%A9%94%ED%9D%90%EB%A9%94%ED%8A%B8_2%EC%84%B8




단체 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장소를 이동하다보면 오래된 성곽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곳에 따라 내려서 둘러 보기도 하고 차창 밖으로 스쳐 보기도 했던 성벽과 첨탑들을 인터넷 자료를 모아 정리해 본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삼중의 성벽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난공불락의 도시로 불리게 된 데에는 이 성벽의 도움이 컸다.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사후 그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는 7살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가장 훌륭한 행정가이자 외교가인 민정총독 안테미우스는 섭정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이어져 온 성벽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직접 세운 성벽이 있었으나,
시가지가 너무 커져 이 성벽들로는 시가지를 충분히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안테미우스는 시가지를 보호하고 방위하기 위해 서기 413년부터 성벽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후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더불어 테오도시우스 2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남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은 해자를 갖추고 있으며,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 2미터 높이 5미터인 내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인 외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 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km정도만이 앞서 설명한 구조로 되어 있었고'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 구조로 되어 있었다.


성벽의 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제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수도 면전까지 영토가 유린되었다 해도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


1453년 투르크군도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몰고 왔으나 성내의 7천 남짓한 군대를 상대로 한 달 반 가량을 고전해야 했으며,
간신히 넘어 제도를 장악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성벽을 넘어온 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가능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지도


톱카프 궁전 가장 안쪽에서 내려다보이는 성벽으로, 413년 비잔틴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가 세웠다.
95개의 탑이 있는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바깥쪽 성벽의 높이는 10m, 두께는 5m로 튼튼하게 지어졌으며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단면도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3중 성벽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으로는 마르마라해부터
골든 혼(콘스탄티노폴리스의 내항)까지 이어진 육중한 성벽이다.


이 성벽 건설의 결과 과거 콘스탄티누스 대제때 건설한 성벽으로 방어할 수 없었던
넓어진 시가지를 방어할 수 있게 되어 더욱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조감도


성의 건설 년도를 기준으로 볼 때 가히 세계 역사상 최고의 요새라 할 수 있는 성벽이라 하겠다.
이렇게 건설된 성벽 방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동로마 제국이 약화되어 수도가 침략을 받았을 때조차
정공법으로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이 성벽은 그 유명한 훈족의 아틸라가 성벽만 보고서는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퇴각하게 만들었고,
수도를 포위해 쳐들어온 아랍 군대를 모조리 토양의 양분으로 만드는 등 여러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영원히 적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성벽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 대륙에 걸친 신흥 강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자 했던
21살의 젊은 술탄 마흐메트 2세의 야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고,
1453년 4월5일부터 시작된 대 공방전 끝에 마침내 5월 29일 결국 콘스탄티노플도 함락,
2천 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멸망에 이르고 만다.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가면 윗 이미지 아래와 같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해군이
골든혼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외벽(왼쪽: 오늘날 구시가지)과
골든혼 맞은편에 있는 성벽 (오른쪽: 오늘날의 신시가지) 사이를 바닷속으로 가로막았던 쇠사슬이 전시되어 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께서 울돌목에서 300 여척의 왜선을 격파할 때 사용했던 전법이랑 비슷한 거였다.
전쟁 당시 비쟌틴 제국의 군대는 불과 7천명 정도였고 오스만 군대는 8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날 이스탄불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가르는 골든혼 방어가 중요했던 이유는
외부로부터 전쟁물자를 조달하고 구원군을 요청할 때 이 골든혼 안쪽에 있는 비쟌틴 해군이 배의 숫자는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해전에 약한 오스만 해군의 해안 봉세를 뚫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만약 오스만 해군이 이 골든혼 안쪽으로 진입하게 된다면,

콘스탄티노플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에 빠지게 된다.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세계 전쟁사에 남을 골든혼 전투 장면도


파랑색 배는 오스만 제국 해군의 함선이고, 빨강색은 비쟌틴 제국 (동로마 제국)의 함선이다.
골든혼 입구에 그어진 선이 바로 바닷속 쇠사슬이다.


오스만 해군이 이 쇠사슬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술탄 마흐메트2세는
오늘날 갈라타 타워 뒷쪽의 나즈막한 언덕 위로 함선을 끌어올려 골든혼 진입에 성공하고
비쟌틴 제국 해군을 궤멸시킴으로써 콘스탄티노플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최후의 공성전에서 승리하여 서로마 시대부터 이어진 2,000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세워졌을 당시에는 성벽의 총 길이를 합치면 22.5km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였다.
하지만 지진과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상당 부분 파손되어 7~8세기에 페르시아 군과 아랍 군,
그리고 9세기에 불가리아 군과 러시아 군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지켰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다.


1453년에도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은 투르크 군으로부터 도시를 지켜냈으며,
당시 공격에 의해 단지 금만 갔을 정도로 튼튼했다.


오늘날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성벽이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고, 투르크에 의해 점령되었다.
투르크의 공격이 있을 때, 한 병사가 실수로 쪽문(크실로케르코스 문)을 닫지 않는 바람에
도시가 손쉽게 투르크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은 현재도 터키 정부의 허술한 관리로 인해 많은 부분이 사라지고 있다.
유네스코에서 많은 지원을 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나마 상태가 좋은 곳이 바로
톱카프 궁전 안쪽에서 볼 수 있는 레기움 문이나 메트로 톱카프 역 근처의 성벽이다.


바닷속 쇠사슬로 가로막힌 골든혼에 진입하기 위해 야산 위로 오스만 해군의 함선을 끌어 올리는 장면 (상상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으로 로마 제국은 다시 반으로 갈라졌고 동로마는

열여덟 살이 채 못 된 큰아들 아르카디우스, 서로마는 겨우 열 살인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가 통치하게 되었다.


Panorama 1453 박물관에 극사실화로 돔 천정에 그려진 전쟁터 장면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세상을 뜨기 전에

어린 두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해줄 인물들을 지명하는 승계 작업을 해놓았다.


아르카디우스의 후견인은 동로마 근위대장 루피누스,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은
반달족 지도자의 아들이며 이탈리아의 군사령관 스틸리코였다.
이 두 후견인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와 권력을 키웠으며 제국에 손해를 끼쳤다.

Panorama 1453 박물관에 극사실화로 돔 천정에 그려진 전쟁터 장면


스틸리코는 398년 호노리우스를 자신의 딸 마리아와 혼인시켜 세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10년 후 마리아가 죽자 그는 호노리우스를 마리아의 동생 테르만티아와 재혼시켰다.


Panorama 1453 박물관에 극사실화로 돔 천정에 그려진 전쟁터 장면


한편 루피누스 역시 황제의 인척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자신의 딸을 아르카디우스에게 시집 보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나약한 어린 황제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싶지 않았던 환관 출신의 시종장
에우트로피우스의 계략으로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Panorama 1453 박물관에 극사실화로 돔 천정에 그려진 전쟁터 장면


루피누스가 안티오크에 가 있는 틈을 노려 에우트로피우스가 황제에게

에우독시아라는 아름다운 처녀의 초상화를 보여준 것이다.


에우독시아는 프랑크족 장군과 로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콘스탄티노플의 귀족 집안에서 성장했다.


Panorama 1453 박물관에 극사실화로 돔 천정에 그려진 전쟁터 장면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에우독시아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신부감으로 선택했고
루피누스가 돌아오기 전에 결혼 준비가 모두 끝났다.


대포와 포신은 그림이 아니라 실제 장면을 묘사한 조형물이다.


에우독시아는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 황제 자리에 오른 지 석 달 만인 395년 4월 27일에 그와 혼인했다.

401년 4월 10일 콘스탄티노플에서 탄생한 이 아들이 테오도시우스 2세이다.


포신과 대포알은 그림이 아니라 당시에 사용했던 실제 무기 조형물이다.


테오도시우스는 탄생 이듬해 1월 10일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으며

그 직후에 이루어진 그의 세례식은 국가적인 축제였다.


이에 대해 가자(현재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위치한 지중해 주변의 도시)의

프로코피우스 주교는 이렇게 기록했다.


“어린 테오도시우스는 왕자로 태어났으며 탄생과 동시에 황제로 선포되었다.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고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제국의 도시들에 황제의 하사품과 선물을 든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대포알과 전쟁물품 등은 그림이 아니라 당시에 사용했던 실제 무기 조형물이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로 설교의 달인이라

‘황금의 입’을 지닌 성인으로 불렸다.


그는 설교 중에 자신의 헌신적인 추종자들인 보통 시민들의 가난함에 대조되는 궁전의 사치를 비판했다.
또 극장 무대에 올려지는 외설적인 공연들도 비난했다.



동로마 군대는 가이나스의 지휘 아래 있었는데 가이나스는

고트족 출신으로 황실 군대의 장군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지휘권을 잡자마자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으며

395년 11월 27일 헤브도몬에 도착했다.


가이나스는 그곳에서 아르카디우스와 루피누스를 만났는데

루피누스는 군대가 자신을 공동 황제로 추대할 것을 바란 듯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루피누스를 죽였으며 조시무스에 따르면

그 일은 스틸리코가 계획하고 가이나스가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가이나스는 400년 초 고트족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 그곳을 장악했다.
그러나 조시무스에 의하면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고트족 7,000명을 죽였으며
가이나스는 북쪽의 트라키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훈족의 왕 울딘에게 체포되었고 울딘은 400년 12월 23일에 그를 죽이고
그의 목을 아르카디우스에게 선물로 보냈다.


에우트로피우스가 399년 죄인으로 몰려 처형당하자 황후 에우독시아가 막후의 실력자로 부상했으며
400년 1월 9일 아르카디우스는 그녀에게 아우구스타(여제)의 칭호를 내렸는데
콘스탄티노플 건립 이후 첫 두 세기 동안 아우구스타의 칭호가 내려진 건 좀처럼 없었던 일이었다.



에우독시아는 남편 아르카디우스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했던 듯하며 따로 몇 명의 애인이 있었고
특히 황제의 수석 고문 요하네스의 경우 테오도시우스의 진짜 아버지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에우독시아의 잘못된 행실은 결국 황실의 부도덕성에 대해

비판하는 설교를 하던 크리소스토무스와의 불화로 이어졌다.



404년 6월 20일 둘 사이의 알력이 절정에 이르자 아르카디우스는 크리소스토무스를
폰투스(현재 터키 북동부 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추방했으며

크리소스토무스는 그곳에서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총대주교가 추방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대궁전 문에 모여 폭동을 일으켰으며 불을 질러 원로원과 하기아 소피아를 파괴했다.



크리소스토무스가 추방된 후 에우독시아는 승리의 기쁨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404년 10월 6일 출산 중에 죽었으며 성사도 교회에 묻혔다.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에우독시아의 때 이른 죽음을 콘스탄티노플의 위대한 성인 중 하나로 받들어지던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를 무자비하게 내친 것에 대한 하늘의 벌로 해석했다.



아르카디우스는 에우독시아보다 3년 반을 더 살고 408년 5월 1일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으며
성사도 교회의 아내 옆에서 영면에 들었다.



일곱 살의 테오도시우스가 아버지 아르카디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앉았다.
재위에 오른 뒤 첫 6년 동안 테오도시우스 2세는 죽은 아버지가 가장 신임했던 동로마 근위대장

안테미우스를 후견인으로 삼았으며 안테미우스는 41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섭정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 두상


테오도시우스 2세의 섭정 기간 동안 404년에 화재로 소실된 하기아 소피아를 대신할 대성당이 건축되었고
이 건축물은 현재 테오도시우스 교회라고 불린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안테미우스가 죽자 섭정의 역할은 황제의 살아남은 세 누이 중 제일 맏이인 풀케리아 공주에게 돌아갔는데
그녀는 당시 15세로 황제보다 겨우 두 살 위였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풀케리아는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받고 테오도시우스가 성년에 이른 416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10년동안 계속 막후 실력자로 행세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출입문


풀케리아는 16세에 순결 서약을 하였으며 대궁전의 그녀의 처소에는 남자의 출입이 금지되어
그녀의 섭정 기간 동안 궁정은 수녀원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그녀는 동생의 교육을 감독했으며 누나의 영향을 받은 테오도시우스는 평생 신학 뿐 아니라
과학에도 흥미를 갖게 되었고 정사보다 학문에 더 뜻을 두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테오도시우스는 여가 시간이면 글쓰기에 매달렸고 필체가 아름다워 역사가들 사이에서
‘달필가 테오도시우스’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체구가 작아서 성인이 되어서도 ‘작은 테오도시우스’라고 불렸으며
연대기 작가 요하네스 안티오케누스는 “그는 궁전에서 갇혀 지냈기에 크게 자랄 수가 없었다.”고 썼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테오도시우스는 때가 되자 누나 풀케리아에게 마땅한 신부감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풀케리아가 찾아낸 신부감은 아테네 철학자 레온티우스의 딸인 아름답고 학식도 높은 아테나이스였다.


아테나이스는 혼인하면서 기독교적인 이름인 에우도키아로 개명했으며
테오도시우스에게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아주었다.


아들 아르카디우스는 어린 나이에 죽었고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는 열다섯 살 때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혼인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발렌티니아누스는 호노리우스 사후 2년 만인 425년

여섯 살의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455년까지 서로마를 통치했는데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
막후에 그의 어머니이자 테오도시우스1세의 딸 아우구스타 갈라 플라키디아가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황제가 되자 라벤나(이탈리아 북동부의 도시)로 옮겼으나

콘스탄티노플에 궁전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새 성벽은 콘스탄티누스가 쌓은 성벽보다 트라키아 안으로 약 1.5킬로미터 정도 더 들어갔으며
마르마라(흑해와 에게 해를 잇는 바다. 흑해 쪽은 보스포러스 해협, 에게 해쪽은 다다넬즈 해협을 통해 연결되었다.)부터
골든혼(세계 각지의 귀한 물건들이 집결하는 항구이며 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까지 6킬로미터 이상을 뻗어 나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성벽 축조의 첫 단계인 성탑이 군데군데 있는 외겹의 벽은 근위대장 안테미우스의 지휘 아래 413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447년 일련의 대지진이 일어나 성벽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57개의 성탑이 무너졌다.


공교롭게도 때맞추어 훈족 아틸라 왕이 황금군단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치러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로마의 새 근위대장 콘스탄티누스의 지휘에 따라 즉시 성벽의 재건 작업이 시작되었다.


히포드롬의 모든 정파들이 작업에 참여했고 두 달도 안 되어 성벽은 전보다 더 튼튼하게 재건되어
결국 아틸라는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으로 공격 방향을 바꾸어야만 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이 시기에 서로마와 동로마는 그 어느 때보다 유대가 돈독했는데 바로 437년에
발렌티니아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와서 테오도시우스와 에우도키아의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혼인했기 때문이다.


당시 신랑의 나이는 열여덟, 신부가 열다섯 살이었다.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를 낳고 딸이 황후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겠다고 서약했던

에우도키아는 이듬해에 서약을 실행에 옮겼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이 시대의 새로운 종교적 논쟁은 예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관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자들은 예수에게 그 두 가지 본질이 공존하며
성모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단지 예수의 어머니라고 믿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431년 6월 7일 에페소스(현재 터키 서부 에게해 연안의 도시 에페스)에서 열린 제3차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단으로 결정되었으며 그 결과에 따라 테오도시우스는 네스토리우스를 이집트로 추방했다.
네스토리우스는 452년경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황후 에우도키아는 439년에 예루살렘에서 돌아왔으나 그후 얼마 안 되어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서 버림받았다.
황제가 그녀와 자신의 절친한 친구 파울리누스가 간통을 저질렀다고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자세히 알려져 있진 않지만 파울리누스는 443년에 처형당하고
그 이듬해에 에우도키아는 예루살렘으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테오도시우스는 재위 말기가 그리 평안하지 못했다.
누나 풀케리아와도 사이가 멀어져서 그녀는 대궁전을 떠나 헤브도몬에서 살게 되었다.


당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황제가 에우도키아와 풀케리아와 단절된 것을 재위 말기에
황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환관 크리사푸스 탓으로 보았다.


그러던 중 447년에 일련의 지진이 도시를 강타하여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무너지자
많은 이들이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이를 계기로 테오도시우스와 풀케리아는 화해했고 풀케리아는 프로클루스 총대주교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을 이끌고 지진을 막아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이윽고 땅의 요동이 멈추자 모두들 감사의 찬송가를 불렀다.
그때 특별히 작곡된 예수를 찬양하는 성가도 있었는데 그 노래는 지금도 그리스정교회 예배식에서 불리고 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테오도시우스 2세의 군대는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외국 용병들의 수가 지배적이었는데
특히 고트족과 알라니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의 재위 마지막 30년간 그의 군대를 이끈 군사령관은 알라니족 아스파르 장군으로
423년에 이탈리아에서 요하네스가 일으킨 폭동을 진압했고,
431년에는 함대를 이끌고 반달족과 싸웠으며, 441년에는 훈족 왕 아틸라와 전투를 벌였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아스파르는 막강한 권력을 지녔지만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야만족이었기에 아우구스투스 자리에 오를 수 없었으므로
테오도시우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아스파르는 자연스럽게 풀케리아와 연합했고
테오도시우스 재위 말기에 두 사람은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에페소스에서 열린 공의회는 테오도시우스 재위기의 마지막 사건으로 남았다.
말을 타고 콘스탄티노플을 벗어나 리쿠스 강을 따라 달리던 중 낙마한 테오도시우스가
450년 7월 28일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그는 성사도 교회에 묻혔고 황후 에우도키아는 10년 후 예루살렘의 성 스테파누스 교회에 안장되어
부부는 죽어서도 영영 만나지 못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us Suru)


오늘날 테오도시우스 2세는 천년 이상 콘스탄티노플을 지킨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그 이름이 기억되고 있다.
그 성벽은 이제 폐허만 남았지만 여전히 장엄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끝도 없이 이어진 성탑들과 흉벽들은 비잔티움의 영원한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터키어로는 '회색 매의 아치'라는 뜻의 'Bozdoğan Kemeri'라고 한다.
구시가지에 있으며, 378년 로마제국의 발렌스 황제 시대에 지어졌다.


오스만투르크 시대까지 주변에 있는 물을 끌어다가 궁전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처음 세워졌을 때는 길이가 1km나 되었지만 지진이나 비바람 등으로 무너져 내리고 지금은 800m 정도만 남아 있다.
높이가 26m로 규모가 매우 크며 현재는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올라가는 것도 금지되고 있다.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안내판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물을 궁전으로 끌어다줬던 발렌스 수도교. 도로와 공원을 가로지르는 큰 규모의 발렌스 수도교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가까이서 보면 26m의 높이로 상당히 높다. 차들이 아치문 사이로 지나다니는게 신기하다.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발렌스 수도교(Valens Aqueduct)



참조 ; https://trustyyyy.blog.me/221374455884
http://blog.daum.net/woodbine/11784509
https://blog.naver.com/gampo20/220899731584
https://blog.naver.com/kehsara2/221295126880
https://blog.naver.com/ilsong1226/221350914898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41000031
http://cafe.daum.net/shogun/Mq7W/410?q=%ED%85%8C%EC%98%A4%EB%8F%84%EC%8B%9C%EC%9A%B0%EC%8A%A4%EC%9D%98+%EC%84%B1%EB%B2%BD&re=1
http://cafe.daum.net/callalilies/Cn1c/76?q=%ED%85%8C%EC%98%A4%EB%8F%84%EC%8B%9C%EC%9A%B0%EC%8A%A4%EC%9D%98+%EC%84%B1%EB%B2%BD&re=1
https://ko.wikipedia.org/wiki/%ED%85%8C%EC%98%A4%EB%8F%84%EC%8B%9C%EC%9A%B0%EC%8A%A4_%EC%84%B1%EB%B2%BD
https://www.tripadvisor.co.kr/Attraction_Review-g293974-d2161587-Reviews-Walls_of_Constantinople_Istanbul_City_Walls-Istanbul.html
https://www.tripadvisor.co.kr/Attraction_Review-g293974-d2161587-Reviews-Walls_of_Constantinople_Istanbul_City_Walls-Istanbul.html#photos;aggregationId=101&albumid=101&filter=7&ff=34072931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384&cid=40942&categoryId=33739

https://blog.naver.com/njung425/220981784997




예레바탄 지하 궁전 (Yerebatan Basilica Cistern)


이스탄불에서는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라고 한다.

예레바탄 지하 궁전은 6세기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설했다.


이스탄불 구시가의 중심인 성 소피아 성당 인근에 있다.
궁전으로 불리지만 실제 용도는 지하 저수지였다.


건설에만 무려 7,000여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저수지는
길이 143m, 폭 65m, 높이 9m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
최대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규모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스탄불은 안정적인 물 공급이 중요했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 물을 저장해 둘 저수지가 많이 지어졌는데,
예레바탄은 그중 규모가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저수지의 물은 이스탄불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베오그라드 숲에서 끌어와
궁전과 성당 등으로 공급되었다.


저수지로 사용된 이곳이 지하 궁전이라 불리게 된 것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 때문이다.
저수지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아름다운 기둥 336개는 각지의 신전에서 운반해 온 것들이다.
저마다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들이 지하에 빽빽이 늘어선 모습이 신비롭다.


1885년에는 저수지 보수 공사를 거쳐 조명과 음향 시설을 설치하고 관람객을 위한 보도가 조성되었다.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 가게 등이 들어서고 때때로 공연도 열려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보수 공사 당시 바닥에 쌓인 진흙을 파던 중 저수지의 기둥 받침대로 추정되는 ‘메두사의 머리’ 조각 2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어디에서 운반된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메두사의 머리 하나가 거꾸로 놓인 채 발견된 이유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돌이 되어 버린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한다.
메두사의 머리는 지하 저수지의 가장 안쪽에 있다.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 구글 지도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는 성 소피아 성당에서 맞은편 방향으로 디반 욜루의 맨 위쪽 부근에 위치해 있다.
지하 궁전은 1987년에 수백 년 동안 쌓인 진흙과 폐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벌이면서 복원되었다.


본래 황실 수도 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에 공사를 시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인 532년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지하 궁전의 위치는 본래 황궁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했었지만 오스만 제국 시대에 폐쇄되었다.


예레바탄 사라이(지하 궁전, Yerebatan Sarayı) 입구


예레바탄 사라이는 ‘땅에 가라앉은 궁전’이란 뜻이다.
바실리카 시스턴(Basilica Cistern)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하 궁전은 현존하는 동로마 제국의 저수지 가운데서도 이곳이 가장 최대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한 축으로서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으며,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계단이 보인다.


이곳을 내려가면 코린트양식 등 기둥들 336개가 늘어서 있는 지하 공간을 볼 수 있는데,
이 공간 자체가 신비로운 모습이어서 궁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둥에는 다양한 문양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각 기둥이 각기 다른 신전 등에서 운반되어 왔기 때문이다.
당시로는 최단 기간인 2년 만에 완성한 지하 건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는 수심 50cm~1m 정도의 물이 담겨 있다.


이 위로 다리가 놓여 있어 관광객들이 구경할 수 있다.
대단히 인상적이기 때문에 영화 세트장으로 쓰이기도 하고,

이스탄불 예술 비엔날레 기간 동안에는 시청각 시설로 쓰이기도 한다.

이곳으로부터 19km 떨어진 벨그라드(Belgrad) 초원에서 발렌스 수도교를 거쳐 이곳까지 물을 끌어왔다.


당시 시민들의 생활용수를 저장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무려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이스탄불 최대 규모의 저수지였다.
일상적인 생활용수 공급 이외에도 포위 공격에 대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바닥에는 물고기들이 돌아다니고 동전들이 많이 잠겨 있다.


코린트식 배흘림기둥


코린트식 기둥은 주두가 휘감아도는 여러 줄의 아칸서스잎과

아바쿠스 가장자리 아래쪽의 작은 나선형 소용돌이 무늬로 이루어진다.

코린트식 기둥과 주두와 천정.


코린트식 배흘림기둥


저수지로 사용된 이곳이 지하 궁전이라 불리게 된 것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코린트식 대리석 기둥 때문이다.


건설에만 무려 7,000여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저수지는 길이 143m, 폭 65m, 높이 9m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


저마다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들이 지하에 빽빽이 늘어선 모습이 신비롭다.


여기에서는 도리스양식, 투스칸양식 등 다양한 기둥 양식이 보인다.

저수지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아름다운 기둥 336개는 각지의 신전에서 운반해 온 것들이다.

이름하여 '눈물을 흘리는 기둥'


2006. 3. 13.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 방문 기념 인증샷.


눈물을 흘리는 기둥


소원 기둥

실제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장면이란다.


이곳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집어 넣고 손바닥을 기둥 바닥에 댄 채,

소원을 빌면서 손가락이 떨어지지 않게 한바퀴를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에서 본 소원의 기둥이 생각난다.


2006. 3. 13. 눈물을 흘리는 기둥 앞에서도 인증샷


사진 왼쪽으로 남자 분이 손바닥을 기둥에 대고 엄지손가락을 중심으로 한바퀴 돌리는 장면과

이 장면을 카메라로 담는 분이 살짝 보인다.

모쪼록 소원이 이루어지시기를~

옆으로 놓인‘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은 지하 저수지의 가장 안쪽에 있다.

보수 공사 당시 바닥에 쌓인 진흙을 파던 중 저수지의 기둥 받침대로 추정되는 ‘메두사의 머리’ 조각 2개가 발견되었다.

과거 신전을 화려하게 장식했을 메두사 조각상이 지하에서 수조를 떠받치는 기둥 받침대로 변신했다.
이 조각상이 어디에서 운반된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옆으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는 괴물이기 이전에
화를 잘내기 좋아하는 그리스 신들에 의해 저주를 받게 된 수많은 불쌍한 희생물 중 한 명이다.


괴물 메두사는 고르곤 세 자매 중의 1명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출중한 미모의 여인이었으나
포세이돈과 사랑을 나눈 장소가 하필이면 근엄하기로 유명한 아테네의 신전이었다.


이들의 정사장면을 우연히 보게된 아테네 여신은 신성한 자신의 신전에서 음란한 행동을 한 메두사에 격분해
그녀에게 저주를 내려 머리 한 올 한 올을 뱀으로 변하게 했다.


또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는 즉시, 돌이 되는 흉측한 괴물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더불어 메두사의 자매들도 괴물로 만들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두 자매에게는 흉측한 모습과 함께 불사의 생명을 주었지만,
유독 메두사에게만은 불사의 생명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옆으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결국 불사의 생명을 얻지 못한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잘린 채
또다른 그리스 신화의 영웅만들기 내지는 아테네 여신의 방패 장식품으로 이용당한 불쌍한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메두사 베기에 성공해 영웅이 된 페르세우스 또한
아폴로 신탁에 의해 할아버지를 살해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신탁 결과를 무서워한 아크리시오스왕은 딸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청동 밀실에 딸을 가두었는데
이전부터 다나에의 미모에 정신이 팔린 제우스 신이 황금의 비로 변신하여 청동밀실 지붕으로 스며들어가 다나에를 임신시켰다.


놀란 왕은 그 모자를 방주에 실어 바다에 떠내려 보냈는데
그 방주가 정착한 세리포스의 왕의 명령으로 실시한 여러 가지 모험 중 하나가 바로 메두사 머리를 베어오는 것이었다.


모험은 성공적으로 끝나 영웅이 되어 다시 고향에 돌아오려던 페르세우스는 때마침 열리고 있던 경기대회에서 원반을 던졌는데,
그 원반이 우연하게도 페르세우스가 온다는 소문에 피신해 왔던 할아버지 아크리시오스 왕에게 맞아
왕이 목숨을 잃음으로써 아폴로 신탁은 잔인하게 실현되었다.

수난받는 ‘메두사의 머리 ’ 조각 기둥을 배경으로 인증샷.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화도 잘내서 후회할 짓들도 상당히 많이 했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신들을 친근하고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신들의 노여움에 의해 언제든지 신의 저주를 받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처럼 일반인들이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는 신화 속 주인공들은
그리스 시절부터 부적의 의미처럼 건축물에 조각되어지곤 했는데
메두사의 경우도 방패나 문짝, 사원 꼭대기 등에 새겨 넣어 부적이나 제의적인 마스크로 자주 이용했다.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지하저수조 물 속에 거꾸로 세워져 있는 메두사 머리를 보면

이런 물 저장소에 처박히게 된 사연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일설에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메두사의 상징을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하 저수조에 거꾸로 파묻었다고도 하고, 식수로 사용되는 물 저장소에

사악한 기운이 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부적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기독교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대 신으로서의 역할과 권위가

사라진 것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거꾸로 놓인‘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지하물 저장고인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는 532년에  유스티니아누스 비잔틴제국의 황제가 만들게 한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물은 많지만 정작 사람들이 마실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를 이탈리아 로마에서 이곳으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먼저 수도교를  만들라고 지시를 하였고
발렌스 황제 때 수도교가 완공이 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물탱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예레바탄 사라이"이다. 
이것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확장하여 다시 탄생하였다.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


지하물 저장고를 만들때 수많은 기둥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많은 기둥을 어디에서 가져올까 생각하다가 
에게해 지방에 있는 그리스 로마 신전에서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던 중 메두사 머리가 옮겨지게 되었는데  메두사는 원래 신전이 있는 도시의 어귀에 세워졌던 기둥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동네 어귀에 장승을 세워

잡신들과 나쁜 기운들이 못 들어오도록 막는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면 될 듯.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전에는 메두사를 꼭 부조로 만들어 놓는다고.


결국 이 기둥들은 지하 저수조를 만들려고 제작된 것이 아니라 모두 다른 곳에서 옮겨져 왔다.
따라서 모양이나 두께 둘래 높이가 각각 서로 다르다.


기독교가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공인이 되었지만

아직 사람들 마음 속에는 그리스 로마의 신화가 남아 있었다.   


이는 우리가 유교를 배우지 않더라도 가슴 깊은 곳에 유교 사상이 배어 있듯이
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그리스 로마의 신화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으로 기둥이 짧은 것은 밑둥으로 사용하고
기둥을 가로와 세로로 박아 놓아 부적의 의미로 삼았다고 한다.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  조각 기둥이 1500년 동안 이렇게 놓여있는 까닭을 헤아리며 인증샷.


그리스 사람들 중에는 터키 사람들이 그리스 신전을 파괴해서 탁월한 대리석 예술 작품들을 탈취하고,
그 대리석 예술 작품들로 지하 저수지를 만들면서 의도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기운을 눌러 버리겠다는 뜻을 담아
‘메두사의 머리’ 조각을 기둥 받침대로 삼고 바닥으로 눕혀 놓았다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역사적 죄악이자 만행의 징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스 사람들의 주장과는 별도로 메두사의 머리가 거꾸로 놓인 채 발견된 이유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돌이 되어 버린다는 전설 때문이라고도 한다.


기독교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대 신으로서의 역할과 권위가
사라진 것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다른 주장으로는 이곳저곳에서 가져온 부조물들을 짜맞추어 사용하다 보니

높이가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기둥 바닥 받침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메두사의 머리"여 너는 어찌하여 1500년 동안을 지하저수지에서 이렇게 거꾸로 놓여 있는 거니?

1885년에 저수지 보수 공사를 거쳐 조명과 음향 시설을 설치하고 관람객을 위한 보도가 조성되었다.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 가게 등이 들어서고 때때로 공연도 열려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참고로 서양의 기둥 양식에 대해서는 <그리스기행>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 편에서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참조 ; http://blog.daum.net/choemh/16141419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ıcı) 출구



[터키 여행-이스탄불]예레바탄 지하 저수조



참고 ; http://flyingboat.tistory.com/31
https://ljhoi.blog.me/221363753799

http://blog.daum.net/rollei66/1688460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3598&cid=42864&categoryId=50859
http://cafe.daum.net/mosadongcho41/3Kdz/75?q=%EC%98%88%EB%A0%88%EB%B0%94%ED%83%84+%EC%82%AC%EB%9D%BC%EC%9D%B4&re=1




히포드롬 광장 (Hippodrome Square)과 주변 지도


히포드롬 광장 (Hippodrome Square)


술탄아흐메드 자미의 서쪽에 위치한 히포드롬 광장은 3세기 초에 건설된 원형 경기장 터다.
영화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203년 로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대에 검투 경기장으로 처음 지어졌다.
이후 10만 명 정도를 수용하는 전차 경기장으로 바뀌었고 비잔틴제국의 중요한 국가행사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인 532년, 황제에 대한 불만으로 ‘니카의 난’이 일어나자
폭도들을 진압하고 처형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 이스탄불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으로 변신한 히포드롬 광장에서는 유서 깊은 기둥 3개를 볼 수 있다.
광장 북쪽에 있는 기둥은 이집트 카르나크 아몬 신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집트 오벨리스크’라고 불린다.


이 오벨리스크의 기단에는 경기를 관전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오벨리스크 건립에 관한 비문도 남아 있다.


광장 북쪽 끝에는 19세기 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에게 선물한 분수대가 있다.
오리엔탈 특급 열차로 이스탄불까지 운반되었다고 한다.


광장 한가운데는 큰 뱀들이 서로 엉켜 있는 청동 기둥이 서 있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그리스인들이 제작한 전승기념비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광장 남쪽의 오벨리스크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인 4세기에 처음 세워졌으나
제4차 십자군의 침입 당시 파괴되어 현대에 복원한 것이다.


히포드롬(Hippodrome)의 옛 모습.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전시 자료


히포드롬(Hippodrome)의 옛 모습.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전시 자료


히포드롬(Hippodrome)의 모습.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전시 자료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Obelisk of Theodosius, Obelisk of Tutmoses III)


오벨리스크(obelisk)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돌로 된 4각주. 방첨탑(方尖塔)이라고도 한다.
끝이 가늘고 피라미드형을 한 정상에 황금을 붙였으며 본체와 기대(基台) 표면에 봉헌의 명문(銘文)을 새겼다.
원래는 헤리오폴리스의 레신전의 성석(聖石) 벤벤을 모방한 것.


제5왕조(B.C. 2494경~B.C. 2345경)의 국왕들은 돌로 쌓은 오벨리스크를 신체(神體)로 하는 태양신전을 건립하고,
돌기둥 형태의 것은 제12왕조경(B.C. 1919경 이후)부터 신전 내에,
신왕국시대(B.C. 1567경~B.C. 1085경)에는 필론 앞에 한쌍씩 세웠다.


대부분은 애스원 산(産)의 화강암제. 후에 아시리아왕과 로마황제에 의하여 반출되어
현재 이집트 국내에 서 있는 것은 5기에 불과하다.
이중 최대의 것은 카르나크의 아몬 대신전에 하트세프수트 여왕이 건립한 높이 30m의 오벨리스크이다.


런던, 파리, 로마, 이스탄불 및 뉴욕 등의 광장과 공원에도 이집트로부터 반출된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이집트 세력이 일찍부터 미친 시리아, 팔레스티나에는 이집트신들에 대한 신앙으로 중기 청동기시대에 세운

비블로스의 태양 신전에 높이 80~150cm의 소형 오벨리스크가 다수 봉납되어 오벨리스크 신전이라는 이름이 있다.


같은 형의 소형 오벨리스크는 팔레스티나와 시리아에서도 발견되어
동(東) 지중해 연안지방(레반트)에 대한 이집트 문화의 보급을 표시하고 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마니슈투스의 오벨리스크』(수사 출토, 루브르 박물관),

아슈르바니파(?)의 『백작 오벨리스크』(니네베 출토, 대영박물관),
샤르마네얄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니므루드 출토, 대영박물관)라 통칭되는 4각주 석비는

국왕의 업적, 전쟁, 숭배 및 공납 등의 명문과 부조를 한 말하자면 기념비인데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Obelisk of Theodosius, Obelisk of Tutmoses III)


오벨리스크의 건축 의도에 대해서는 다산을 기원하는 구조물이 아닐까 하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학자들은 오벨리스크가 남근을 뜻하는 모양일 것이라 주장한다.


다만 진짜로 오벨리스크가 그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외설적인 건 아니다.
농경 사회인 당시에는 성관계가 쾌락 이전에 가정과 나라를 위해 필요한 행위였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는 지금은 히포드롬 광장에 자리하고 있지만 원래는 BC 1450년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시스 3세의

유프라테스강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룩소르 카르낙 신전에 세운 것이었다.


1,500여년이 지난 AD357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가 전리품으로 가져와 알렉산드리아에 처음 세웠다.
아스완 산의 분홍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오벨리스크는 처음 세워졌을 당시 30m가 넘었다고 한다.
이후 390년에는 다시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에 대한 해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us II, 337-361 재위)가 357년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오벨리스크를 옮겼으며,
390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아스완(Aswan)에서 생산되는 붉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본래 하단부를 포함해 30m였으나 일부가 파손되어 현재는 25.6m이다.


오벨리스크의 4면에는 각각 투트모스 3세가 B.C.1450년에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점령한 것을 기리는 내용이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

이집트의 상형 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기념비로,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이집트에서 약탈해 올 때는 너무 커서 밑둥을 자른 채 운반하고 기단 위에 다시 세웠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 오벨리스크를 3개로 분할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운반했다.


현존하는 것은 상단 부분이며, 대리석 받침대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만들게 한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3,500년 이전에 만들어졌지만 매우 좋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바로 뒤에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가 보인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하단부


흰 대리석으로 된 하단부는 테오도시우스 1세 때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4면에 각각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방문 인증샷


뱀기둥 (고대 그리스어: Τρικάρηνος Ὄφις, 터키어: Yılanlı Sütun)


뱀기둥은 터키 이스탄불 술탄아흐메트 광장에 위치해 있다.
새 수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 후계자 (특히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제국 전역에서 예술 작품을 모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식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경마장에는 특히 스피나라는 길 중앙 장벽에 설치되었다.

기둥이 만들어진 시기는 B.C.478년으로 추정된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패잔병들의 방패를 녹여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기둥은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지던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302-337 재위) 황제가 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로 옮기면서
세계의 중심이 새로운 곳으로 옮겨졌음을 나타내기 위해 현재의 장소로 옮겨왔다.


 뱀기둥


본래 기둥은 뱀 세 마리가 서로 휘감아 올라가는 형상으로,
뱀 세 마리의 머리가 기둥 꼭대기에서 직경 2m 가량의 황금 트로피를 받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트로피는 이스탄불로 옮겨지기 전에 유실되었으며, 뱀 머리는 17세기에 파손되었다.
뱀 머리 중의 하나는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으며, 다른 것은 런던 대영박물관에 있다.
기둥의 본래 높이는 8m였다고 하나 현재는 5m이다.


뱀기둥은 플라타이아이의 삼각대라는 제단, 원래는 기원전 5세기에 페르시아 전쟁의 일부인
플라타이아이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이를 가져 오도록 명령하여 경마장의 중앙에 설치했다.
이 기둥 정상부에는 3마리의 뱀 머리에 금 그릇이 있었다.
이 그릇은 제4차 십자군 중에 파괴 또는 약탈되었다.


뱀기둥


이 기둥 정상부에는 3마리의 뱀 머리에 금 그릇이 있었다. 이 그릇은 제4차 십자군 중에 파괴 또는 약탈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세밀화되어 뱀의 머리가 그려져 있으며, 적어도 17세기 말경까지 뱀의 머리가 있었다.


이 뱀의 머리의 일부는 복원되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델포이의 삼각대에 현존하고있는 것은 토대 부분만 뱀기둥이라고 되어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뱀 머리의 일부


오스만 제국 시대에 세밀화되어 뱀의 머리가 그려져 있으며, 적어도 17세기 말경까지 뱀의 머리가 있었다.
이 뱀의 머리의 일부는 복원되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델포이의 삼각대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토대 부분만 뱀기둥이라고 되어 있다.


콘스탄틴 오벨리스크 (Constantine Obelisk)


10세기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는 오벨리스크를 콘스탄티노폴리스 경마장 (술탄아흐메트 광장) 반대쪽에 세우게 했다.
원래는 금으로 도금된 청동 판으로 덮여 있었지만, 제4차 십자군에 약탈되었다. 벽돌의 일부 부분이 현존하고 있다.

콘스탄틴 오벨리스크 (Constantine Obelisk)


벽돌을 쌓아 만든 이 오벨리스크의 제작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10세기 경 콘스탄티누스 7세가 청동으로 표면을 장식한 후 이 오벨리스크의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화려했던 청동 장식은 제4차 십자군 원정 시기인 12세기에 유실되어, 지금은 이 헐벗은 오벨리스크만 남아 있다.

콘스탄틴 오벨리스크 (Constantine Obelisk)


높이 32m로 가장 높은 오벨리스크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술탄의 친위 부대인 예니체리가 타고 올라가는 등 군사 훈련 장소로 이용되어 훼손이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수세기 동안 지진과 약탈을 견디고 나서도 여전히 의젓하게 히포드롬 광장 한켠을 지키고 있다.

콘스탄틴 오벨리스크 (Constantine Obelisk)



카이저 빌헬름 분수대 (Kaiser Wilheml's Fountain)


히포드롬 광장 북쪽에 있으며 게르만 분수대라고도 불린다.
1898년에 이스탄불을 방문한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둘하미드 2세의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선물한 것이다.

카이저 빌헬름 분수대 (Kaiser Wilheml's Fountain). 게르만 분수대


8개의 대리석 아치 기둥 위에 푸른 돔을 올렸으며 기둥 모서리마다

양국 지도자 이름의 머리글자를 딴 석조 장식을 붙여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동맹을 상징하고 있다.
오리엔탈 특급열차로 이스탄불까지 운반되었다고 한다.

카이저 빌헬름 분수대 (Kaiser Wilheml's Fountain)에 대한 해설


카이저 빌헬름 분수대 (Kaiser Wilheml's Fountain)



참조 ; https://blog.naver.com/ahnys0/22122593973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3596&cid=42864&categoryId=5085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2736&cid=42635&categoryId=42635
https://namu.wiki/w/%EC%98%A4%EB%B2%A8%EB%A6%AC%EC%8A%A4%ED%81%AC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36433&cid=40942&categoryId=31931
https://blog.naver.com/choemhwa/221401668785
https://ljhoi.blog.me/221363753799
https://ko.wikipedia.org/wiki/%EB%B1%80%EA%B8%B0%EB%91%A5
https://ko.wikipedia.org/wiki/%EC%BD%98%EC%8A%A4%ED%83%84%ED%8B%B4_%EC%98%A4%EB%B2%A8%EB%A6%AC%EC%8A%A4%ED%81%AC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36432&cid=40942&categoryId=33084

https://ko.wikipedia.org/wiki/%EB%B1%80%EA%B8%B0%EB%91%A5

https://blog.naver.com/turkey_trip/221170465279






멀리 항구에서 보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17세기 초에 세워졌다.
건설 당시에 번역상의 오류로 황금 미나렛 하나를 세우는 대신 6개의 미나렛이 세워졌다.
"alti(여섯)"과 "altin(황금)"을 혼동한 것이다.


건축가에게는 천만 다행스럽게도, 술탄은 미나렛을 너무나 마음에 들어했고,
덕분에 6개의 미나렛 모두―그리고 건축가도―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늘날, 술탄아흐메트는 터키에서 유일하게 6개의 미나렛을 자랑하는 모스크이다.
과거에도 그랬듯, 이스탄불의 아시아 쪽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은 배로 이스탄불로 들어올 때 보이는 전경이다.


멀리서도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모스크의 웅장한 실루엣을 알아볼 수 있다.
황혼 무렵 보스포루스 해협의 크루즈를 타면 된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와 성 소피아 성당 (Hagia Sophia)


오스만 시대에 지어진 직경이 27.5m, 높이가 43m에 다다르는 술탄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는
규모면에서 터키 최대의 것으로,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그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한 독특한 형상의 회교사원이다.


그 내부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 모스크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돔의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은 스태인드 글래스로 장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들어 오는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 한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성 소피아 사원에 대적하기 위해 1616년 슐탄 아메트가 건축하였으며, 블루 모스크라고도 부른다.
거대한 돔 주위에 7개의 첨탑과 4개의 부속 돔에 기둥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외국 관광객에게는 블루 모스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보스포러스해협 바다에서 유람선을 타고 보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2006. 3. 14 인증샷.


바다를 배경에 두고 뒤에서 보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1609년부터 1617년까지 7년간의 기간을 거쳐 만들어진 터키의 대표적인 모스크(사원)로서
내부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터키 블루색상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모스크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다.


이슬람의 중요 종교 행사와 집회등의 공식 행사를 치루던 곳으로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공식 방문한 곳이다.
푸른 타일의 화려한 장식 뿐 아니라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스테인 글라스 장식도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위에서 보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터키어: Sultan Ahmet Camii)는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대표적인 모스크로,
세계문화유산인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유서깊은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스크 안 벽면을 온통 뒤덮은 푸른빛을 띠는 도자기 타일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늘을 배경에 두고 보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하기아 소피아에서 불과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가운데 커다란 돔에

수많은 작은 돔을 얹은 형태로 구성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수많은 기둥이 받치는 각각의 아치 위에

작은 돔이 둥글게 솟았고, 4단을 이루며 돔 숫자는 점점 작아지다가 마지막 거대한 중앙 돔에 이른다.
직경 23.5m의 거대한 중앙 돔은 작은 네 개의 돔이 받치고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출입구 풍경


돔 주변에는 수많은 창을 내어 자연의 빛이 내부로 비치게 했다.
돔 위에는 황금색 장식을 달았고 맨 꼭대기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별과 초승달을 얹었다.


2006. 3. 13. 방문 기념 인증샷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전경


오스만 제국 때의 모스크는 신학교, 목욕탕, 시장, 병원 등 사회 시설을 주변에 다 갖추고 있었는데,
이런 시설을 퀼리예라고 부른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도 이 같은 복합 시설을 갖춘 모스크였다.


이 모스크는 전 세계에서 여섯 개의 미나렛을 갖고 있는 유일한 모스크로

오스만 제국 술탄은 매주 금요일 이곳에서 예배를 보았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전경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크고 작은 돔의 균형과 모스크 양쪽에 쭉 뻗어 세워진 미나렛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모두 다섯 개의 문이 있는데 이중 모스크의 정면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개로 이 남쪽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2006. 3. 13.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출입구에서 인증샷.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출입구


모스크의 안뜰 가운데는 샤드르반이라는 분수대가 있고 사원 옆에는

신자들이 기도 전에 손발을 닦는 수도 시설인 육각형 모양의 세정소가 있다.


지금은 밀려드는 신자들을 위해 정원 바깥에 따로 대규모 세정시설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에

이 세정소는 오늘날 쓰이지 않는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첫 번째 입구


모스크 내부는 약 2만 1,000개에 달하는 파란색의 이즈닉 타일과

푸른빛의 260개 유리창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서양 사람들은 발음하기 어려운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로 부르기보다는 파란색의 타일이 많은 사원이라 하여 ‘블루 모스크’라 부른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두 번째 입구


모스크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2층 회랑은 현재 방문이 금지되어 있다.
내부에 있는 거대한 돔은 네 개의 거대한 기둥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돔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육중하게 만들어진 이 기둥은

직경이 5m가 넘어 일명 코끼리의 다리라고 불린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두 번째 입구 돔과 탑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모스크의 설교단(민바르)에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이 설교단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술탄의 전용 기도실이 있다.

여름에는 모스크의 내부를 아름답게 밝혀주는 조명이 켜진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두 번째 입구 탑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의 바로 북쪽 자리에 히포드롬이라 불리는 고대 동로마 제국의 경기장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도 이곳을 말의 광장이라는 뜻의 아트 메이다느라고 불렀다.


히포드롬에는 과거의 웅대한 모습은 다 사라지고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청동 뱀 기둥, 유스티니아누스 기념탑 등
세 개의 기념물이 독일이 만들어 기증한 분수대와 함께 남아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건물 탑


1616년에 오스만 제국 술탄 아흐메트 1세가 건축가 자개기술공(세데프캬르)

메흐메트 아아(Sedefkâr Mehmet Ağa 1540~1617)에게 명령하여 짓게 한 모스크로,
건축 연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메흐메트의 마지막 건축 작품이다.


당시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간 술탄이 금(알튼 altın)으로 모스크를 지으라고 무리한 명령을 내리자

도저히 불가능했던 터라 금이 아닌 6개(알트 altı)로 잘못 듣었다고 하여 첨탑을 6개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두 번째 건물 문을 지나면서


모스크는 첨탑이 몇 개인가가 그 모스크의 격을 결정하기 때문에

성지인 메카의 모스크와 첨탑의 수가 같다는 건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메카의 카바(Kâbe) 신전도 처음에는 첨탑이 6개였으나 술탄 아흐메트 1세가 건설비를 지원해서 7개가 되었고,
나중에 2개를 증축하여서 현재는 9개나 된다.


공교롭게도 아흐메트 1세도 메흐메트 아아랑 같은 1617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메흐메트 아아는 50살이나 나이 차가 있어 27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옆 세정소


사원 옆에는 신자들이 기도 전에 손발을 닦는 수도 시설인 육각형 모양의 세정소가 있다.
지금은 밀려드는 신자들을 위해 정원 바깥에 따로 대규모 세정시설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에

이 세정소는 오늘날 쓰이지 않는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그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하기아 소피아에 비해서 평가가 낮은 편이다.


아야 소피아가 거대한 돔형 건축물로 탄생한 것이 537년이고

블루모스크의 완공은 1616년이니 무려 1079년 후이다.


하지만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를 건설하기 전에 오스만 제국도 셀리미예 모스크 등의 많은 건축적 경험을 쌓았고,
아야 소피아가 가지고 있는 많은 단점들을 넘어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는 좀 더 완성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에 쓰인 푸른 타일들은

17세기 이즈니크 타일의 걸작으로 높은 문화, 예술적 가치가 있다.


아무튼 역사적 의의야 아야 소피아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이지만,

어찌되었건 둘 다 나란히 위치한 건축의 걸작이란 점은 분명하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입구


역시나 관광객이 많이 온다.

다만 박물관인 아야 소피아와 달리 여긴 모스크라서 들어가기가 까다롭다.


현지 무슬림들이 기도할때는 더더욱. 다행히 비(非)무슬림들도 들어갈 순 있지만,

신발을 벗어야 하는 등 예배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여자라면 스카프를 챙겨가야 한다.

머리카락을 가리지 않으면 모스크 안에 들어갈 수 없는데 후드 모자를 써도 안된다.


입구에서 스카프와 치마를 빌려주기 때문에 없다고 해서 당황할 필요는 없지만,
이스탄불에 모스크가 워낙 많다보니 이쪽을 여행할 땐 그냥 속편하게 스카프를 준비하는게 좋다.


하지만 무슬림국가에 온 이상, 비무슬림이어도 어느정도 예를 갖춰 옷을 챙겨입는게 좋다.
모스크에 들어갈 때 남자는 무릎부터 팔뚝까지 가리고,

여자는 발목부터 손목, 머리카락을 다 가려야 한다.


사원 앞 정결을 위한 세정소.

정원 바깥에 따로 세정소를 마련해 놓았다. 예배하러 온 사람들이 모두 손과 발을 씻는다.


예배하러 온 사람들은 여기 세정소에서 모두 손과 발을 씻는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해가 뜰때 들어오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타일에 반사되어 정말 아름답다고 한다. 
다만 그 시간대에는 무슬림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입구의 경비들과 이야기를 하던지 아니면 무슬림인척 하던가 하라고.


참고로 무슬림들의 기도시간으로 입장이 통제될 때는

근처의 건물에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에 대한 소개영상을 상영하고,
이슬람교 전반적인 것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이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광경. 예배하는 모습


내부 광경.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관광객이 다니는 통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예배드리는 곳.

오른쪽(Minbar)에 민바르가 있다.


민바르 (Minbar)


미흐라브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섰을 때 오른편에 위치한다.
모스크 전반에 사용된 건축 자재에 따라 민바르의 제작 재료도 달라지는데,
목재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우에 따라 석재로 만들기도 한다.


민바르는 부조 혹은 투각, 상감기법으로 《코란》명문을 새겨 넣거나
이슬람 예술에 주로 사용되는 식물 문양의 패턴으로 장식한다.


기능은 예배 의식을 마친 후 이맘이 올라가 설교를 하는 곳으로,
예언자 무함마드가 세 개의 단으로 구성된 곳에 올라 설교한 것이 민바르의 시초이다.
이후 여러 개의 층계가 놓인 설교단이 제작되었다.


가장 높은 단에 올라가는 것은 절대자(하느님, 알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은 언제나 겸손한 존재여야 한다는 종교적 교리 및 해석에 따라 최상단에 올라가는 것을 금기하고 있다.


이맘의 경우에도 위에서 두 번째 층계에 올라선다.
원칙상 민바르 위에 올라서서 설교하는 것은 무슬림이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종교 지도자로 여겨지는 이맘만이 이용한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전경.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전경.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의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디자인


○ 스테인드 글라스는 여러가지 빛의 조작효과와 구조상 여건에 맞아야 하기 때문에 힘든 작업이 요구된다.
반면 어떤 재료보다도 더욱 직접적으로 고도의 동적인 현상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용해

비세속적이며 생생하고 재치 있는 독특한 효과를 낸다.


광선은 하루의 시간과 계절, 날씨에 따라 계속 변화해서 빛의 효과에 의한 색조와 강도가

부드럽고 온화한 것에서 찬란하고 화려한 것으로 끊임없이 바뀌게 된다.


또한 시간뿐만 아니라 장소(초원과 숲, 온실과 감옥 등)에 따라서도 느낌이 달라지며,
개개인이 취하게 되는 시각의 자발적인 선택 과정도 각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스테인드 글라스.


○ 창을 통한 광선으로만 건축물의 밝기를 조절했던 중세 교회 건축물에서 12~13세기초의 예술가들은
주변의 어둠과 대비하여 찬란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위해 깊고 진한 루비와 푸른색의 유리창을 창작했고,
또 효과적으로 광선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그리자유 화법으로 불투명 메시(mesh)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교회의 벽이 더 많은 광선을 받아들이도록 개방됨에 따라 14~15세기에는

전보다 완화되고 절제된 색상조화로써 덜 침침한 효과를 선호하는 실질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재료와 기술 유리를 만들 때 유리의 착색은 녹은 상태의 유리에 붉은색은 동(銅), 푸른색은 코발트,
자주색은 망간, 노란색은 안티모니, 초록색은 철과 같은 금속 산화물을 첨가하여 이루어진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 중세의 유리판은 유리불기법(blow-molding)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녹은 유리를 대롱을 통해 방울을 불어 만든 다음 그것의 끝을 잘라 통형이 되게 한다.
한쪽 끝에서 길이로 이 통형을 갈라서 펴 판형을 만들고 이를 가마에 넣어 서서히 냉각시켜 완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얇은 색유리판은 스테인드 글라스 작가의 디자인에 따라 여러 조각으로 잘라낸 다음
이 색색의 유리조각들은 납띠를 가장자리에 고정시켜 모아 붙여서 전체 디자인에 맞게 구성한다.


이때 납띠는 그 자체도 디자인의 한 부분 역할을 하며,

개개의 납띠를 두른 조각들을 모아 철틀에 끼워넣어 유리창을 만든다.
또 유리조각들 표면에는 검은색 유리질 에나멜로 세부 디자인을 그려넣어 섬세한 장식 표현을 만들고 있다.


12~13세기에 만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은 우연이든 계획된 의도였든간에
유리의 두께가 일정치 않은 등 미숙하면서도 세련되어 이상적인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리기술이 발전해 더 크고 얇고 판판한 유리를 생산할 수 있었으나
이후에는 미학적으로나 시각적으로 이전보다 발전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후에 고딕 복고주의자들은 이런 결과를 인식하고 12~13세기에 쓰였던 소위 앙티크 유리의 색과 질,
음영효과를 발전시켜 초창기 수법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천장.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전통 수법


스테인드 글라스 예술은 '모자이크'와 '에나멜링'예술이 투명한 소재로 전환,

표현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모자이크 제작에서 여러 조각의 유리로써 기념적인 도상을 구성하는 개념이 생겨났고,
에나멜링에서는 금속 띠(테)로 유리조각들을 모아 붙이는 기술과 금속띠 자체를 디자인한 점,
또 세부장식이나 명문을 그려넣는 안료인 유리질 에나멜을 만들어 쓰는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에나멜 세공).


1110~40년 사이에 테오필로스(12세기 헬마쉬하우젠의 야금술사 루제루스로 추정됨) 수사가 쓴
〈공예 개설 Schedula diversarum artium〉에 최초로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기술이 서술되어 있다.


이 전통기법은 먼저 색깔의 구분이 나타나 있는 백도제(白塗劑)가 입혀진 탁자 위에 그려놓고,
색에 맞추어 각각의 유리판에 달구어진 뜨거운 철로 된 연장을 대고 움직여서 정확한 크기와 형태로 유리를 잘라낸 후,
눈금이 새겨진 인두(grozing iron)로 다시 가장자리를 다듬는다.
이때 조각들은 서로 접합시킬 납테를 두를 여분을 고려해야 한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기둥과 내부 천장.


○ 스테인드 글라스의 필요한 세부 디자인은 유리질 에나멜로 유리조각 위에 그려넣은 후에
가마에 넣어서 에나멜이 유리에 녹아 붙기에 적절한 온도로 가열한다.


그리고, 탁자 위에서 2개의 긴 납띠로 유리조각을 서로 연결하여 모아 붙여 전체 디자인에 맞게 구성하게 되는데,
유리의 가장자리에 둘리어지는 홈이 패인 납띠는 그 단면이 H자형으로 되어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천장.


○ 스테인드 글라스의 초창기 작품인 〈예언자 Prophets〉 같은 단일상으로 된 란셋 창에서는

납테에 의한 구획은 순전히 기능적이었으나, 이어 창의 크기가 커지면서 이런 구획은 다루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유리창을 수직과 수평으로 더 작게 분할하는 방법이 개발되었으며

따라서 유리창 전체 디자인에 맞도록 기하학무늬를 이루게 되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천장.


○ 이는 사실 큰 고딕 성당의 원형 창이 생겨나는 시기에 맞춰 디자인된 독창적 변화라고도 할 수 있다.
화면·장식·구조의 완전한 화합이 각기 단독으로는 이룰 수 없는 어떤 힘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조화가 스테인드 글라스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의 화려한 내부 천장.


14세기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의 발달


14세기초에 이르러 여러 가지 발달을 보게 되는데 초창기에 불가능했던 2차적인 색깔,
즉 흐린 황색, 이끼색, 자주색의 일반화가 가능해졌고 은염(銀鹽)으로 그린 노란색 색조유리도 발명되었다.


유리화가들은 유리 전면에 반색조의 투명 매트를 붙이거나 강조할 부분을 유리질 에나멜로 음영을 표시하고 모델링하는 등
많은 기술 발전을 이룩했으며, 특히 15세기에는 점차로 선의 사용도 숙달되고 세련되어갔다.


또 기술상 새로운 방법들도 추가되었는데, 맑은 투명 유리를 녹은 색유리에 잠깐 담그어 얇은 색유리 막을 입히는

입힌 유리(flashed glass)라든가 스테인의 두께와 열의 정도 또는 마연법에 따라 색상의 정도가 다르게 표현되기도 했다.

이로써 납띠에 의해서만 좌우되던 스테인드 글라스의 디자인이 차츰 납띠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천장.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후기의 발달


15세기말경 유리질 에나멜의 새로운 영역이 개발되고,
16세기 중엽에는 유리 위에 에나멜 안료로 그리는 기술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유럽전역의 정치적 혼란으로 색유리가 귀해졌고

전통적인 색유리 기법은 점차 새로운 방법으로 대치되어갔다.


16~20세기까지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술의 발전은 순전히 실용적인 것이었다.
16세기에 다이아몬드로 된 유리 커터가 발명되고

18세기에 에칭 입힌 유리기법을 위해 플루오르화수소산이 사용되었다.


19~20세기에는 가스·전기가마·납땜인두(soldering iron)도 쓰였으며,

색·질·두께가 다양한 커다란 유리판도 역시 20세기에 개발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30년경 프랑스에서 납띠를 대신하여 콘크리트에 유리를 끼우는 방법을 포함한
여러 기술 혁신과 투명 합성수지 접착제에 유리를 접착시키는 것 같은 실험적 기술이 쓰이면서
현대의 스테인드 글라스 작가는 다른 것이 따를 수 없는 다양한 표현을 구사하게 되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내부 천장.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의 주제


중세의 교회예술은 교훈적인 내용을 근본으로 하므로, 유리창에 그려진 주제는
성서의 해설과 교회나 성인(聖人)들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었다.
창문이 커짐에 따라 스테인드 글라스는 미적으로나 교리의 전달에서도 더욱 중요해졌다.


교회 건축에 쓰였던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의 도상학적인 배치계획은 몇 가지 요인을 고려하여 정해졌는데,
교회 건축의 십자형 평면은 그 자체가 4개의 중심지역으로 구분되고
각 지역의 건축형태나 태양의 방향에 따라 일정한 주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도상학).
예를 들어 샤르트르 성당에서는 성단의 5개 중앙 채광창과 북쪽 장미창은 성모 마리아에 봉헌되며
남쪽 장미창은 그리스도의 영광, 서쪽 장미창은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헌정되어 있다.


보통 성서에서 채택된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의 주제는

성인, 예언자, 그리스도, 성모의 생애, 최후의 심판 등을 포함한다.


그리고 12사도,〈신약성서〉·〈구약성서〉·〈요한의 묵시록〉의 내용, 황도12궁,
또한 이삭에서 그리스도에 이르는 계보 등이 가장 인기 있는 주제들이었다.


때로는 도상학적 배치와는 관계없이 유리창의 작품 헌납자의 뜻이나

개인의 기호에 따른 주제도 묘사되었다.


가장 큰 성당인 샤르트르 성당에서 보면, 176개의 창에 2,500㎡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쓰였으며,
3개의 장미창은 각각 직경 12m로 거대하게 구성되었는데,
이는 1203~40년 사이의 40여 년에 걸쳐서 9명의 작가가 완성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성직자들이 창의 드로잉을 유리 숙련공들에게 제공해 제작하기도 했는데
대영박물관의 12세기 문헌에는 성 구트락의 생애를 그린 것이 그 대표적인 예로 되어 있다.


중세 후기에는 글로 쓴 드로잉을 받아서 예비 스케치를 마련해 후견인의 승인을 받은 후,
실제 크기의 최종 도안을 완성했던 과정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글로 된 교시의 예는 헨리 7세가

영국 그리니치의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에 봉헌한 드로잉에서 볼 수 있다.


14세기에는 양피지나 종이 위에 그려진 각각 다른 모양의 완성된 도안들을 보관하는 것이 유리공들의 관습이어서
이러한 도안그림들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오랫동안 다시 사용되었는데
1450년에 죽은 요크 지방의 한 유리공은 유언으로 도안그림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중세 후기에는 숙련공의 유리공장은 고도로 조직된 사업체로서 각종 등급의 디자인을
후견인이나 주문자의 비용 여하에 따라 생산해내고 있었다.


봉헌자가 성직자이든 평민이든 간에 주제 선택과 표현방법에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최종 디자인은 반드시 당대 예술 성향을 구현할 수 있는 예술작가인 마스터 유리공(숙련 유리공)만이 완성할 수 있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서양의 스테인드 글라스


스테인드 글라스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부터 있었으나 중요한 장식미술로서 진전된 것은
훨씬 후에 이르러서였으며 그 발전과정은 더디었다.


12세기 이전의 스테인드 글라스의 존재는 문헌기록과 발굴자료에서 확인되었으나 자료가 너무 간략해서
그 기술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충분히 살펴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라틴 교회의 교부들, 즉 락탄티우스, 프르덴티우스, 성 히에로니무스의 기록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 색유리창에 대해 언급되어 있으며
5세기의 시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프랑스 리옹의 색유리창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또한 교황 레오 3세(795~816 재위)는 로마의 산파올로 바실리카를 위한 색유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미 유럽에서는 카롤링거 왕조 이전부터 부자들의 건축물에 색유리창이 크게 퍼지고 있었음을,
669년의 영국 요크 대성당이나 영국 선덜랜드의 멍크웨어머스 수도원에서 발견되는
7세기말부터의 색유리창 조각들에서 알 수 있다.


이들 초창기 중세 유리창들은 상당히 다양해서 처음에는 창틀 부분에 얇은 대리석, 설화석고(alabaster),
석고 또는 나무판 등으로 메워넣고 여기에 구멍을 뚫어 색유리를 끼우는 '모자이크'창의 형태도 있었다.


이 모자이크 창은 서유럽에서는 로마네스크 시기에도 쓰였으며 11세기초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처
토르첼로 대성당과 피렌체의 산미니아토 교회에서도 보인다.


이런 초기방법에서도 창틀에 유리파편들을 붙일 때 납띠가 쓰였을 것이며 이미 4세기경부터는
유리창 끼우기에 납으로 된 띠가 쓰였음이 발굴에서 확인된 바 있다.


최초의 납테로 된 유리 디자인은 9세기경

프랑스 랭 지방의 세리레메지에르 교회에 있는 작은 패널화(1918 파손됨)이다.


초기의 색유리창은 그림으로 장식되지 않고, 비교적 간단한 도안의 색유리로만 구성되어 있었는데
9세기까지는 그림이 도안된 색유리창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 글라스는 독일의 로르슈에서 발굴된 유리파편들인데
이들은 그리스도의 두부 형상으로 복원되면서 이 형상은 카롤링거 왕조의 회화와 형식이 유사함을 보여주는
9, 10세기 또는 11세기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완전한 스테인드 글라스 그림은
12세기초에 속하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성당에 장식된 5명의 예언자 상이다.


카롤링거 왕조와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에서는 구조상 창의 숫자가 적고 크기도 작았기 때문에
화려한 장식은 창보다는 넓은 벽과 둥근 아치형 천장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후기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에서는 창의 배치와 개방성을 강조해
이때부터 스테인드 글라스 그림이 주된 예술양식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북유럽에서는 교회장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카롤링거 왕조 미술, 로마네스크 예술).


그림을 그린 스테인드 글라스 창은 보통 서유럽에서 발명된 고유한 것으로 여겨져왔지만,
초창기 발전과정에는 아직 모호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12세기초부터는 비교적 합리적으로 발전되어갔는데 중세 후기의 스테인드 글라스의 정교함과 세련됨은
주제의 자연주의적 해석에 있어서 프레스코나 이젤 화가들의 기량과도 겨루게 될 정도로
예술적으로 크게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12세기의 다른 중요한 작품으로 파리 근교의 생드니 수도원에 남아 있는 것과
파리의 생샤펠에서 보이는 15개의 창에 1,134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찬란한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을 들 수 있으며
13세기의 작품으로 현존하는 것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은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을 예로 들 수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13~16세기까지는 중요작품들이 만들어지지만 스테인드 글라스는

예술형태로서 퇴보하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효과를 추구했는데

이러한 사실주의적 경향은 스테인드 글라스 기술이 덜 적절할 뿐만 아니라,
작가들이 고도의 광선-굴절 성질을 구사하던 작업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스테인드 글라스 예술이 쇠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19세기에는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에 대한 흥미가 부흥되었는데
이는 고딕 미술의 부흥과 관계가 있으며 많은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번 존스의 디자인이나 윌리엄 모리스 같은 미술공예운동의 지도자들과
미국의 루이스 컴퍼트 티퍼니 등에 의해 찬란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아르 누보 운동으로 스테인드 글라스는 장식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건축작품에서 크게 활용했다.


20세기에는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페르낭 레제 같은 유명화가들의 디자인으로

찬란한 현대의 유리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사원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한국의 스테인드 글라스


서양의 장식예술인 스테인드 글라스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스테인드 글라스의 시작이 그러하듯 종교단체를 통해서였다. 


1898년 초창기 서양식 건축(고딕 건축)인 명동대성당이

파리 외방선교회의 의뢰로 프랑스의 베네딕투스 수도원 수사들에 의해 지어졌고
여기에 유리창 장식으로 스테인드 글라스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장식은 성서의 구절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예를 들어 잉태한 마리아에서 천상모후의 관을 씌워드리는 예수까지
그리스도의 일생을 묘사한 15편의 장면과 나뭇잎 모양 등을

기하학적 모티프로 응용하여 장식한 유리창 등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은 대중화되지 못했고
1968년에 들어서면서 가톨릭교도이며 종교미술에 심취한 화가 이남규가 스테인드 글라스에 깊은 관심을 쏟게 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뜻있는 사제의 주선으로 그는 오스트리아 수도원과 파리 베네딕투스 수도원 공방에서
3년 여 동안 제작기법을 익히고 돌아왔다.


그가 돌아와 예술성을 접목한 정통 스테인드 글라스를 성당건축에 설치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스테인드 글라스의 장을 열었고, 특히 각 성당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제작한 서울 중림동·혜화동·역촌동 성당, 인천 가좌동성당 등의 작품들은
그의 독특한 현대미술 성향과 전통기법을 조화시킨 예술품이다.


더욱이 1982~84년까지의 명동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복원작업은 서양 수사가 제작한 것을
한국의 예술가가 새로운 시각으로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종교단체를 통해 확산된 스테인드 글라스는 상업적인 일상용품으로 생산되기도 했는데,
제작과정이 번거롭고 비싸다는 단점 때문인지 크게 확산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건축물에서 예술공간의 부분장식으로 조금씩 다시 사용되고 있어
스테인드 글라스의 폭은 점점 넓어지고 있는 경향이다.


술탄 아흐메드 영묘 (Tomb of Sultan Ahmed)


술탄 아흐메드 1세(Sultan Ahmed I, 1590-1617)의 시신이 모셔진 영묘로서,

술탄아흐메드 모스크 북쪽에 있는 독립된 건축물이다.

현재는 술탄아흐메드 공원과 마주보고 있다.


1616년에 완공되었는데, 정사각형의 토대 위에

다각형의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여러 개의 돔이 연결된 구조이다.
내부는 화려한 장식 타일과 섬세하게 세공된 목재로 꾸며져 있다.

 술탄 아흐메드 영묘 해설문


술탄 아흐메드 영묘는 16세기에 완공된 것으로 40명의 왕족이 묻혀 있다고 한다.
14대 술탄이었던 아흐메트는 13세에 술탄의 자리에 올라 26세에 술탄의 이름이 붙은 마지막 사원인

술탄 아흐메트 사원(블루 모스크)을 완성했다. 하지만 1년 뒤인 1617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블루 모스크 근처, 술탄 아흐메트 공원과 마주보는 곳에는 블루 모스크 사원의 주인인 술탄 아흐메트 1세와
황후였던 코셈(Kosem), 아들인 16대 술탄, 무라드 4세(Murad IV),

17대 술탄이었던 오스만 2세(Osman II) 등 그의 일가족의 묘가 있다.

술탄 아흐메드 영묘 내부


영묘는 술탄 아흐메트 사원(블루 모스크)을 만든 건축가 메흐메트 아아(Mehmet Ağa)가

술탄 아흐메트 1세가 사망한 지 3년 후인 1619년에 완공하였다.


영묘 내부에 들어가면 화려한 타일과 스테인드글라스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특히 천장과 벽에 꾸며진 푸른색과 흰색의 아름다운 장식 타일이 눈길을 끈다


200221@차노휘


200221@차노휘


200221@차노휘



보스포러스해협 바다에서 유람선을 타고 보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2006. 3. 14 인증샷.


EBS 블루모스크



[터키 여행-이스탄불]블루 모스크, 술탄아흐메드 사원/Blue Mosque, Sultan



참조 ; https://blog.naver.com/mi2591/140134331473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3s0848b
http://cafe.daum.net/globalsangyoung/MbGL/2938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4100002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1660&cid=42866&categoryId=4286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36431&cid=40942&categoryId=31931
http://cafe.daum.net/krcos/nwSk/291?q=%EB%B8%94%EB%A3%A8%20%EB%AA%A8%EC%8A%A4%ED%81%AC&re=1
http://cafe.daum.net/hnjmg/MHSi/1341?q=%EB%B8%94%EB%A3%A8%20%EB%AA%A8%EC%8A%A4%ED%81%AC&re=1
https://namu.wiki/w/%EC%88%A0%ED%83%84%20%EC%95%84%ED%9D%90%EB%A9%94%EB%93%9C%20%EB%AA%A8%EC%8A%A4%ED%81%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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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8%A0%ED%83%84_%EC%95%84%ED%9D%90%EB%A9%94%ED%8A%B8_%EB%AA%A8%EC%8A%A4%ED%81%AC






황제 전용 출입구 모자이크


황제 전용 출입구 모자이크


하기아 소피아를 출입하는 입구 중에서 오직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의

위쪽 박공벽(tympanum)을 장식하는 9세기 말~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옥좌에 앉은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Ο Χριστός Παντοκράτωρ)'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사람은
레온 6세 현제(866~912, 재위:886~912) 또는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옌니토스 황제(905~959, 재위:913~959)로 추정된다.


그리스도가 든 책에 적힌 문구는 요한 복음서 20장 19절 "평화가 너희와 함께"와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이다.
좌우의 원형 공간에는 각각 성모 마리아와 대천사 가브리엘을 나타냈다.


의장과 모자이크


원래의 하기아 소피아 내부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닥달로 인해 빠르게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비교적 장식이 간단한 편이었다.
기둥 하단 등도 조각 장식이 없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비교적 이른 기독교 시절이라 성인들의 인물묘사인 이콘의 법칙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점도 있다.
아무튼 성당 내부는 금빛 모자이크를 쓰되 간단한 도안들로만 장식되어졌다.


그러나 이후 수백년 동안 성당은 다채로운 마감재를 사용해

성모와 예수, 성인, 황제, 황후 및 각종 도안으로 구성된 모자이크로 장식하게 되었다.


하기아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뀌면서 비잔티움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회칠로 덮였지만
20세기부터 시작된 복원작업으로 몇몇 모자이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하지만 위에 나온대로 회칠하고 그려진 이슬람 문양 제거에 반발도 커서

이젠 회칠 제거 및 모자이크 복원은 80년 넘게 중단된 상태이다.


남서쪽 입구 복도에서 비잔틴제국의 자존심인 성 소피아 성당 모자이크를 본다.

예수에게 콘스탄티노플 성을 바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성 소피아 성당을 바치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하기아 소피아를 성모자에게 바치고 있는 모습


남서쪽 입구 복도 모자이크


우측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좌측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하기아 소피아를 성모자에게 바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옥좌에 앉은 성모는 무릎에 앉힌 아기 예수를 감싸고 있는데,

아기 예수는 왼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성모자의 좌우에 있는 ΜΡ와 ΘΥ는 Μήτηρ(어머니)와 Θεού(하느님의)의 모노그램으로

'하느님의 어머니', 곧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2006. 3. 13  관람 기념 인증샷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


후진(apse) 모자이크


후진의 반 돔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쎄오토코스(Θεοτόκος, 하느님의 어머니) 모자이크라고도 한다.
6세기에 제작되었다가 8세기의 성상 파괴 때 훼손되었던 것을 9세기 경에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서 받침대 위에 발을 올려놓았는데

대좌와 옥좌 모두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 모자이크


2층 천장 어두운 구석에 위치한 이 모자이크는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866~913, 재위:912~913)가
왼손에 보주를,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든 모습을 표현했다.

조이 여제와 그 남편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 모습 모자이크


조이 여제와 그 남편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 모습 모자이크


조이 여제(978 경~1050, 재위:1028~1050)와 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1000경~1055, 재위:1042~1055)가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든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세기에 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좌우에 있는 IC와 XC는 Ιησούς Χριστός(예수 그리스도)의 모노그램이다.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 황제가 들고 있는 돈자루는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상징한다.


여담이지만 조이 여제는 결혼을 3번 했는데 남편이 바뀔 때마다

이 모자이크의 남편 얼굴과 문구도 바뀌었다고 한다.

콤니노스 황제와 황후와 황태자 모자이크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1087~1143, 재위:1118~1143)와 이리니 황후(1088~1134),
그리고 황태자 알렉시오스 콤니노스(1106~1142, 측면에 그려져 있어서 정면에서는 안보인다)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짙은 청색 옷차림의 성모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22년에 제작되었다.


조이 여제의 모자이크에서와 마찬가지로,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의 손에 들린 돈자루 역시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의미한다.

콤니노스 황제와 황후 황태자 모자이크


데이시스(Deësis) 모자이크


'데이시스'란 간청, 애원을 뜻하는 단어로, 심판자 그리스도가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을 거느린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261년에 제작되었다.


하기아 소피아 내부의 다른 모자이크보다 훼손 상태가 심각해 성모는 얼굴과 왼쪽 어깨 부분만 남아 있고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은 그보다는 양호한 편이라 상반신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데이시스(Deësis) 모자이크


2006. 3.13 관람 인증샷


북쪽 박공벽(tympanon) 모자이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역임한 성 요안니스 흐리소스토모스(왼쪽)와 성 이냐시오(오른쪽)가

십자가로 장식된 하얀색 성의를 입은 모습과, 이들을 포함한 여러 성인들을 형상화했다.


이 모자이크들에는 유독 회칠이 가해지지 않았는데,

그리스나 기독교권은 높은 곳에 못 올라서 회칠을 칠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터키에선 그럼 높이로는 무시 못할 블루 모스크라든지 그런 건 누가 지었냐며 반론하고 그냥 놔둔 거라고 주장한다.

결국 정확한 이유는 불명. 다만 트라브존의 아야 소피아도 그렇고,


오스만 시대에 모스크로 개조된 많은 옛 동로마 건축물에서 이런 현상이 발견된다.
아마도 자잘한 성화 한 두개 정도는 남겨두어 이 건물이 원래 성당이었음을 밝히는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트라브존의 아야 소피아 같은 경우, 같은 건물을 둘로 나눠 한쪽은 정교회 성당으로,

한쪽은 모스크로 사이좋게 나누어 썼었다.

옴팔리온(Omphalion)


내부 바닥에는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옴팔리온이 있다.

옴팔리온은 그리스어로 배꼽이라는 뜻이다.


원형 대리석들이 바닥에 끼워져 있는 형태이며,

비잔티움 제국의 역대 황제가 이 자리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하기아 소피아를 세운 이래 니케아 제국 시대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지 못한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이다.

서예 원판. 술탄 압뒬메지트 1세 때 추가된 원판이다.


직경은 7.5m이고 8개의 원판이 있는데 각각 알라, 무함마드, 4명의 정통 칼리파와 무함마드의 손자 2명(하산과 후세인)이다.
현재 이 원판은 이슬람에서 가장 큰 서예 원판이다.



터키여행 이스탄불 성소피아성당, Turkey Istanbul , Ayasofya



출처 ; https://namu.wiki/w/%ED%95%98%EA%B8%B0%EC%95%84%20%EC%86%8C%ED%94%BC%EC%95%84




성 소피아 사원의 평면도


성 소피아는 기독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기간 306~337년)시대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였다고 하지만, 첫 번째 교회가 완공된 것은 360년, 즉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때였다.

이 첫 번째 건물은 기본적으로 장방형 바실리카(basilica) 형태에 목재 지붕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실리카란 원래 로마의 공공건물을 이르는 말이지만,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를 짓기 시작했을 때
달리 본받을 만한 건축 양식이 없었으므로 초기 교회는 바실리카의 형태로 지어졌다.
이후 장방형 평면을 갖는 교회 건물을 바실리카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성 소피아 사원 입면도


첫 번째 교회는 404년 대지진으로 극히 일부만 남고 거의 파괴되었다.
두 번째 교회는 오랜 기간에 걸친 재건과 보수 끝에 415년 완공되었다.


그 구조는 첫 번째 교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두 번째 교회는 532년의 폭동(Nika Riot) 때 완전히 불에 타고 파괴되었다.


세 번째 교회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ianus)의 재위 기간 중인 532년부터 537년까지

약 5년에 걸쳐 두 번째의 교회 건물과 매우 다른 새로운 형태로 지어졌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지진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보수를 거쳤고 19세기에 또 한번 크게 보수를 거쳤지만
현재의 건물은 537년에 완성된 건물의 기본적인 구조를 보인다.
즉 바실리카 형과 돔(dome)을 가진 원형 로마 건축의 형태가 배합된 독특한 새로운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돔을 강화하기 위한 외부 벽 버팀 


이 교회의 가장 신기한 특징은 내부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가운데에는 지름이 약 32m 정도인 돔이 있고
그 돔은 지상 57m 되는 높이에 올라앉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큰 돔을 이렇게 높이 올리기 위하여 건축가들(Anthemius of Tralles와 the Elder Isidorus of Miletus)은

새로운 공법을 고안하였다.


그것이 곧 펜덴티브(pendentive)라고 하는 구조로

돔의 바로 아래 네 군데에 보이는 구면(球面)의 일부처럼 굽은 삼각형 벽이다.
현재 내부 수리 공사로 복잡한 이 사진에서는 하나는 완전히 보이고 또 하나는 반쯤 보인다.


이 펜덴티브는 평면도의 가운데 부분에서 보이는 도형(⌼)처럼
돔의 원형을 안에 넣을 수 있는 가상의 사각형에서 원형을 제한 네 모서리의 삼각형을 입체적으로 상상하면 된다.


돔 바로 아래의 동·서 양쪽에는 각각 이 돔과 같은 지름의 반(半) 돔이 있고

이들 각각의 양쪽에는 또 작은 반쪽 돔 두 개씩이 붙어 있다.


즉 돔의 무게를 네 개의 아치(반 돔 두 개, 그리고 남·북쪽의 아치형 벽면)가 받치고,
또 이 네 개의 펜덴티브는 무게를 그 바로 아래 기둥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 밖에도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돔에 쓰인 벽돌의 무게는

그 이전까지 만들어진 벽돌 무게의 12분의 1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창문으로 밑 부분을 빙 돌린 그 커다란 돔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창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전통적인 비잔틴 양식의 주두(柱頭)


비잔틴 건축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겉모습보다 내부 장식에 치중하는 것이라면

이 성 소피아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겉에서 보면 높은 돔의 무게를 받쳐주기 위해 세운 버팀벽(buttress)들이 여기저기 있어 하나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으나
내부에는 아름답게 부조된 비잔틴 특유의 주두(柱頭)를 가진 대리석 기둥, 모자이크(mosaic)로 장식된 벽면들,
기타 찬란한 금빛의 여러 가지 장식품들로 화려했던 원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대성당의 변화 양상
조감도 오른쪽 테오도시우스 대제 때 모습. 가운데 537년 때 모습. 왼쪽 끝 557년 때의 모습.


동로마 제국 건축의 최고 걸작이자 정교회의 총본산이었던 곳.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후 메흐메트 2세의 명으로 모스크로 바뀌었다.


터키 공화국 수립 후 아타튀르크의 지시로 박물관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5년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명칭인 아야 소피아(Αγία Σοφία)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으로, 동방 교회에서는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하기아 소피아, 아야 소피아, 성 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 성당, 성 소피아 대성당 등으로 불린다.
터키에서 터키 리라가 굉장히 인플레이션이 심했을 때에는 미국 달러로 입장료를 받은 적도 있다.


하기아 소피아는 로마 제국의 기술력이 만들어낸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일 뿐더러,

당시 세워진 그 어떠한 건축물보다도 광대한 실내 공간을 가진 건물이었다.
이 성당은 16세기에 스페인 세비야의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성당이기도 했다.


돔의 직경만 하더라도 31.87m로, 로마의 건축물인 판테온 다음 가는 크기였으며
수백 년 뒤의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피렌체의 두오모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석조 돔이기도 했다.
물론 이 건축물이 르네상스 건축물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대성당 입면도


초기의 대성당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후 30년이 지난

360년 2월 15일 대제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첫 번째 하기아 소피아를 건설했다.


당시에는 '위대한 교회(Μεγάλη Ἐκκλησία, 메갈리 에클리시아)'라고 불렸으며
건축은 목조 지붕의 바실리카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창건한지 40년도 지나지 않은 404년 6월 20일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내 에브도시아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Ο Άγιος 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를 박해하여 추방할 때

수도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소실된 대성당은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치세 때인 415년 10월 10일에 재건되었으나
120여년 뒤인 532년 1월 13일경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휩쓴 니카의 반란 때 일어난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첫 번째 하기아 소피아와는 달리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의 흔적은

현존하는 하기아 소피아의 일부 원기둥 등에 약간 남아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재건


대성당이 전소된지 열흘 후인 532년 2월 23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하기아 소피아의 세 번째 재건을 결정하면서
이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바라며 물리학자인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트랄레스의 안시미오스에게 설계를 맡겼다.


유스티아누스는 그의 정복 사업이 그러하였듯이 이 공사에도 엄청나게 빠듯한 기한을 주고 닥달했다.
그리스인인 두 사람은 전문적인 건축가가 아니었지만 1만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어 532년부터 537년까지
채 6년도 걸리지 않은 공사기간을 통해 당시까지 사상 유례가 없는 광대한 규모의 대성당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대성당의 건설을 위해 제국 전역에서 각종 자재들이 공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원기둥들을 징발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마침내 537년 12월 27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나스가 집전한 하기아 소피아의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대성당의 웅장함에 감동한 황제는 하기아 소피아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능가했다고 생각해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완공 이후 하기아 소피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주교좌가 위치한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비잔티움 제국 역대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정치적·종교적 의례가 거행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된 다양한 성유물들이 봉안된 성소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십자군에게 털렸다.

동로마 건축의 전성기의 정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며 또한 대단히 빠르게 완공한 역사적 건물이다.
하지만 기존 건축물을 뛰어넘는 규모와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한 무리한 공사와 실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


헌당식 이후 20년이 지나기도 전인 553년 8월과 557년 12월 14일 두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강타한 지진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상징인 중앙돔에 금이 갔고, 결국 558년 5월 7일에 발생한 지진을 견디지 못해 중앙돔이 무너졌다.


붕괴 직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이시도로스에게 즉각적인 복구를 명령했으며,
이에 따라 젊은 이시도로스는 중앙돔을 원래의 위치보다 6.25m 가량 낮추고 구조를 보강하여 건축했다.


그로부터 약 3백년이 흐른 859년에 발생한 화재와 869년 1월 8일에 발생한 지진으로

대성당의 버트레스(half dome)가 파괴되었다가 바실리오스 1세 황제에 의해 수리되었다.


120년 뒤인 989년 10월 25일의 대지진으로 서쪽 돔의 아치가 붕괴되자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 황제는
아르메니아인 건축가 티리다티스에게 수리를 명령해 6년간의 공사 끝에 994년 5월 13일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약 350년이 지난 1344년 10월에 발생한 지진으로 중앙돔에 다시 금이 가더니

2년 후인 1346년 5월 19일에 대성당 곳곳이 또 무너졌다.
이때의 피해는 8년 동안 공사에 들어가서 1354년에 끝났다.


성상 파괴와 십자군의 약탈


730년, 레오 3세 황제(Λέων Γ΄, 685~741, 재위 : 717~741)가 모세의 십계명 중 우상숭배 금지를 내세워

성상을 파괴할 것을 내용으로 한 칙령을 공포하면서 제국 전역이 헬게이트로 빠져들었다.


성상파괴론자와 성상옹호론자가 너 죽고 나 살자를 외치며 갑론을박 하는 사이,
비잔티움 제국의 대표적인 성당인 하기아 소피아를 장식하던 수많은 조각상과 모자이크 예술품들이 훼손되어 철거되었다.


성상 파괴의 광풍은 아테네의 이리니 여제(Ειρήνη η Αθηναία, 752경~803, 재위 : 797~802)가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일단락되었고, 하기아 소피아에는 다시금 성상과 성화상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1204년 4월 9일, 공격하라는 이슬람은 공격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 점령한 십자군은
도시를 마구잡이로 약탈하고 파괴하는 반달리즘을 자행해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당대의 재부가 모여 부유하기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때의 약탈로 전성기의 화려함이 괴멸되었다.


도시 곳곳에 있던 수많은 보물들이 십자군들에게 털렸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모후 성 헬레나 이래로
비잔티움 제국이 열성적으로 수집해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여러 성당에서 소중하게 모시던 각종 성유물 또한
십자군들의 손에 의해 강탈되어 서유럽으로 빼돌려졌다.


이 덕분에 비잔티움 제국 동방정교회 신도들은

 "십자가 든 악마에 견주면 초승달 이교도가 그래도 사람이다."이라면서 두고두고 이를 갈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십자군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가톨릭 성당으로 바꾸고 정복 직후 사망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시신을 매장하여 무덤을 만드는 폭거를 저지르기에 이른다.


다만 단돌로의 무덤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후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파괴되어 사라졌으나, 그 자리는 아직도 남아있다.


2층 오른편에 가보면 Henricus Dandolus라고 라틴어로 쓰여진 돌판을 볼 수 있는데

거기가 무덤 자리로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이미 그 위치가 알려져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죽은 사람 무덤이라 그런지 터키인들도 건드리긴 영 껄끄러웠는 듯하며
19세기 이탈리아에서 무덤이 있던 자리에 돌판을 세웠다.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탈환된 후에야 황폐해진 하기아 소피아도 정교회 성당으로 환원되었으며
1317년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가 대성당 북쪽과 동쪽에 새로운 버트레스를 증축했다.

입면도
절충적인 원개 바실리카식 성당, 돔을 직접적으로 지탱하는 기둥을 볼수 없다. 허공에 떠있는 듯하다.


예언, 최후의 순간, 전설


로마 제국에서는 언젠가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숙명론적 예언이 오랫동안 전해졌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로 1453년에 병력을 동원하자 사람들은
"로마 제국은 창건자의 이름과 같은 황제 때 멸망한다"는 예언을 떠올리고는
로마 제국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이자 비잔티움 제국의 실질적인 창건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마지막 황제가 될 거라며 불길하게 여겼다.


또한 달이 차 있을 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지만,
5월 24일에 보름달이 떠서 이제 달이 기우는 일만 남은데다가

하필이면 바로 그날 밤에 월식이 일어나 시민들을 공황상태에 빠지게 했다.


5월 25일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비가 그친 5월 26일에는 짙은 안개가 도시 전체를 뒤덮었는데,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호하던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도시에서 떠나는 걸 숨기기 위해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고 수군거렸다.


오스만 제국의 총공세가 시작된 5월 28일, 시민들은 하기아 소피아로 향해
"이교도가 성벽을 넘어 대성당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대천사 미카엘이 강림해 빛나는 검으로 그들을 지옥불에 던져 넣으리라"는
오래된 예언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오스만 병사들이 하기아 소피아로 몰려들자 대성당의 거대한 청동문이 닫혔지만
얼마 못가서 병사들이 청동문을 때려 부수고 내부로 난입했다.


반항하던 몇몇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예배를 드리던 나머지 사람들은 포로로 잡혔으며
성찬예배를 집전하던 사제들은 지성소에서 끌려나가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성가를 불렀다.


여기서 전설이 하나 생기는데, 최후의 순간 몇몇 사제들이 성반과 성작을 움켜쥐고 대성당의 벽 너머로 사라졌으며,
하기아 소피아가 모스크에서 성당으로 바뀌는 날 다시 나타나 성찬예배를 마칠 것이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단면도


오스만 제국

1453년 5월 29일 메흐메트 2세(1432~1481 재위:1444~1446, 1451~1481)가 이끌던 오스만 제국에게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던 날, 이 성당도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이 성당만은 남겨두라고 엄명을 내리고

말에서 내려 성당 안을 보며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다른 이야기론 병사들이 성당을 약탈하자 메흐메트 2세가 탐욕스런 약탈행위를 기분이 나쁘듯 쳐다보긴 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 병사들에게 대가로 사흘 동안의 약탈 행위를 허락한다고 약속했던게 있어서 놔두었다.


다만 몇몇 병사들이 메흐메트 2세가 보는 앞에서 소피아 대성당에 불을 지르자 분노하면서 불을 끈후에 그들을 잡아와서 채찍질하며
'약탈은 허락해도 소피아 대성당을 불태우는 짓은 절대 허락 안했다'며 주의를 줬다고 한다.


사실 국왕이 보는 앞에서 국왕이 절대 손대지 말라고 한 대성당에 불을 지른 행동은 사형당해도 할말이 전혀없는데
해당 병사들을 채찍질만하고 주의를 주는데서 끝난걸 보면 메흐메트 2세는 정말로 관대한 국왕이라고 할수있다.


다른 이야기로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나서

그날 저녁으로 이 성당에서 저녁예배를 드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병사들에게 약속한 사흘 동안의 약탈 기간이 끝나고 나서 그는 공석이 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자리에
옌나디오스 2세 스콜라리오스를 임명하고 정교회와의 공존을 허락했다.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대대로 비잔티움 황제가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메흐메트 2세가 총대주교 취임식에 필요한 은제 십자가도 손수 마련해 옌나디오스 2세 스콜라리오스를 임명한 것은
종교적 관용을 베푸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비잔티움 황제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적법한 계승자임을 나타낸 것이기도 했다.


단, 하기아 소피아는 아야 소피야라는 이름을 그대로 보존한 채 이슬람 성원으로 개조하고
내부의 모자이크에 회칠을 하여 성화들을 가리며 건물 자체는 그대로 남게 되었으며,
성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바예지드 2세(1447~1512 재위:1481~1512.)와 셀림 2세(1465~1520, 재위:1512~1520) 때
건물 주변에 네 개의 미나레트(첨탑)을 증축했다.


위의 성당 내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건물과 제대의 방향이 약간 틀어져 있다.
이는 원래 예루살렘 방향으로 세워진 제대를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메카 방향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서 모든 예배는 메카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

평면도


터키 공화국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터키 공화국을 수립한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는
국교를 없애고 세속주의 정책을 취하면서 아야 소피아 이슬람 성원을 개방한다.


이슬람 신도만이 출입할 수 있었던 이곳을 비이슬람인도 보게 만들었고,
미국 및 유럽 고고학자들이 오스만 제국의 정복 당시 덧칠했던 회칠을 제거하여 성화가 드러나게 하는 것도 허락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회칠 위에 그려진 코란의 내용과

이슬람의 온갖 문양이 훼손된다는 반발에 1931년 회칠 제거를 금지시킨다.


그리고 1935년에 새롭게 박물관으로 문을 열게 했다.
이와 함께 하기아 소피아 내부에서의 모든 종교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2013년에 들어와 하기아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라 논란이 일고 있다.


왼쪽은 로마의 판테온, 오른쪽은 537년 당시 하기아 소피아 성당.


기본 구조는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와 같은 석조 볼트 천장을 활용한 광대한 면적의 건물과
"판테온"과 같은 돔형 천장을 가진 건물의 조합을 시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형태의 건물이었다.


물리학자인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안시미오스가 설계한 것도 특징적인 부분인데,
당시의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장인 집단의 축적된 경험적 지식을 기반으로 설계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다.


물리와 수학 이론을 동원하여 건축물의 구조를 설계하려고 했던 것은

오늘날의 건축 공학으로 이어지는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례없이 큰 건축물을 원했고, 전례가 없다는 것은

기존 장인들의 경험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물리적인 계산이 불가능했던 당시로서는 한계가 명확하여 하기아 소피아의 구조는 불완전했고,
완공되기 전부터 거대한 돔과 단기간의 완공을 위한 부실 공사 때문에 붕괴될 위험이 많았다.

하기아 소피아가 가진 문제의 핵심은 거대한 반구형의 돔 무게를 버티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돔은 가볍고 내구성이 좋은 건축자재들을 활용해 만들어졌지만,
높이 56m에 직경 31m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인해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돔을 받쳐주던 30.5m 폭의 대형 아치 4개로도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볼트의 일종인 펜덴티브(삼각궁륭)를 사용해 대원개를 형성한 결과,
펜덴티브가 각 아치 사이의 틈을 메꾸어 돔의 무게로 인해 옆으로 벌어지려는 아치의 수평추력을 완화시켜줬다.


그러나 돔은 계속해서 아치와 그 밑의 기둥을 짓눌렀고,
기둥은 바깥으로 쓰러질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공사 와중에 붕괴 위기가 오자
돔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들의 바깥 부분인 회중석 부분에 좌·우에 4개의 대형 버팀목을 만들고,
한쌍의 버팀목을 연결시켜 위·아래로 아치형의 회랑들을 개축해 기둥이 밀려나는 것을 버티게 하였다.


이런 급한 땜질에도 불구하고 회랑들의 가장 윗쪽 아치에 균열과 함몰, 뒤틀림이 발생했는데,
이는 아직도 버티는 힘이 모자란다는 증거였다.


만약 회랑의 아치를 좀 더 작게 만들거나 메꿔버렸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각 버팀목마다 4군데의 아치형 회랑을 너무 크게 뚫었기에 버팀목이 약해진 것이었다.


결국 버팀목 위에 기둥과 아치를 더 세워 힘을 보태고, 가로 지지대를 추가한 후
가장 위에 있는 아치를 벽돌로 겉을 메꿔서 좁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진행된 상단부의 뒤틀림을 고칠 수는 없어

지금도 이 공간에 가면 천장이 뒤틀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앙 기둥들이 밀려나게 되자 당연히 돔이 올라갈 공간 역시 정사각형이 아니라

좌우로 길죽한 직사각형 모양이 되게 되었다.


결국 시간이 부족했던 건축가들은 그 위에 완전한 원형 돔은 포기하고,

대신 타원형으로 돔을 완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구조적을 봤을 때 타원형 돔은 완전한 원형 돔보다 비균일하게 무게를 전달하므로 다소 불안정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서 성당은 완공될 수 있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성당이 건설될 때부터 이시도로스와 안시미오스는 이 지역이 지진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둥이 허용된 것 이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방지하는 턱을 만드는 등 어느정도 내진 설계를 했다.


그러나 완공 이후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발생한 기록적인 지진으로 결국 558년에 돔이 붕괴되고 만다.
안시미오스와 이시도로스는 이미 사망하였기에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젊은 이시도로스가 공사를 맡게 되었다.
새로운 이시도로스는 이 성당의 돔을 연구한 뒤 돔의 결함을 발견하게 된다.


기존의 돔은 채광을 위해 짧은 기둥들을 빙 둘러 원형으로 세운 드럼인 스트롱길롱을 놓은 뒤

그 위에 돔을 올렸는데, 이는 지진에 매우 취약하였다.


그래서 젊은 이시도로스는 기둥을 사용한 스트롱길롱 대신 훨씬 두꺼운 벽들로 바꾸고
돔의 위치를 6.25m 정도 낮춰 벽에 좀 더 안정되게 지지되도록 바꾸었다.


또, 젊은 이시도로스는 전체 공사기간과 비교하면 매우 긴 4년이란 시간동안 돔을 보수 할 수 있었고,
돔에 쓰인 회반죽 등이 마른 후에야 건축용 지지대를 철거하는 등 안정된 방법을 쓸 수 있었다.


외벽에 추가된 버팀목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지진 등으로 인해 돔과 성당은 부분적으로 계속 파손되었고,
수백년이 흐르면서 돔의 무게 때문에 점점 기둥들이 바깥쪽으로 기우는 것이 보이게 되었다.


9세기에 이르러서는 건물 외부에 서유럽의 고딕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버트레스와 비슷한 버팀목을 추가하기 시작했고,
훗날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비슷한 땜질을 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기울어져 있는 기둥들이 보인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설계상의 문제가 계속해서 터져나오고,
세월의 풍파를 맞아오는 와중에도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자재의 품질 덕도 있다.


먼저 벽돌의 경우 로도스 섬의 점토로 만들어진 것인데 물에 던져도 뜰 정도로 가볍다고 한다.
또 로마의 시멘트와 콘크리트 기술이 쇠퇴한 중세 유럽과는 달리,
포졸란 시멘트와 콘크리트 기술이 이어져서 이를 성당을 개축할 때 사용하였다.


포졸란 시멘트는 지중해 서부의 채석장에서 발견되는 화산재인 포졸라나와

석회 등을 사용하여 만든 시멘트로 인장강도가 매우 우수하다.


하지만 최대 강도에 이를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단기간에 공사가 이루어졌다면,
뒤틀림 문제에 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포졸란 시멘트 기술은 계속 전승되어서 오스만 제국까지 이어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접수한 오스만 제국의 사람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존중하는 뜻에서 파괴하지 않고 모스크로 고쳐 사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도 이와 비슷한 위대한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16세기에 술레이만 대제는 건축가 시난에게 좀 작지만,

하기아 소피아와 유사한 구조의 술레이마니예 모스크를 세우게 하였고,
이후 술탄 셀림 2세는 역시 시난에게 하기아 소피아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모스크를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맞은편에 세우게 하였다.


그것이 1574년 완성된 셀리미예 모스크다.

하기아 소피아보다 돔 실내 면적은 약간 작지만 구조적, 외형적으로는 보다 발전되었다.


또한 1617년에 술탄 아흐메트는 건축가 메흐메트 아아(Mehmet Ağa)에게 하기아 소피아의 가까운 곳에

보다 넓은 면적을 가진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트 자미)를 세워 마주보게 하여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하기아 소피아는 이들보다 천년이나 전에 지어졌다는 점이다.


인근에는 이리니 성당이 톱카프 궁전 바로 앞에 있지만,

오스만시대 이후로 창고로 쓰고 있어서 공개하지 않으며,
이스탄불 서쪽의 에디르네카프(Edirnekapı) 너머 에윱구(Eyüp Belediyesi)에

카리예 박물관(Kariye Müzesi)이라는 이름의 비잔틴성당이 하나 더 있는데,
비잔틴양식의 성당건축과 모자이크를 보기 위해서는 그쪽도 함께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카리예 박물관 또한 오스만 시기에 회칠로 덮여 모스크로 사용된 적이 있지만,

오히려 회칠로 덮힌 덕에 훨씬 더 나은 상태로 이콘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곳은 트라브존(구 트레비존드)의 아야소피아 성당과 마찬가지로 13-14세기,

즉 팔라이올로구스 양식의 이콘들 가운데서도 걸작품들을 볼 수 있으며,
회칠 전부가 벗겨진 상태라 성당으로서의 옛 모습도 확인해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데이시스 중앙부 전통적인 비잔틴 양식의 그리스도 모자이크


이들 모자이크는 이 건물이 모스크로 전환된 후 모두 회칠을 하여 몇 세기 동안 그 존재가 잊혀졌었으나
1935년 박물관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후 벽을 씻어내는 작업을 한 결과 상당수 모자이크는 빛을 보게 되었다.
몇 세기를 걸쳐 제작된 이들 모자이크는 각 시대 양식을 반영하여 그 자체로도 상당히 귀중하다.


이 그림에 보이는 예수상은 양쪽에 각각 세례 요한과 성모 마리아가 자리를 같이한

'Deesis(전 인류를 위한 기도의 표현)'라는 테마의 가운데 예수 상이다.


이 작품의 연대에 관해서는 13세기 후기라는 설과 14세기 초기라는 설이 있지만

얼굴의 음영 변화를 세밀하게 나타낸 것으로 보아 14세기 초기의 작품일 가능성이 많다.


세계 각지에서 민족적 종교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성 소피아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 분쟁을 초월하고 살아남은 증인이다.


당시 모슬렘 지도자들의 종교적 관용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를 지닌 예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보존된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의 하기아 소피아 내부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닦달로 인해

빠르게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비교적 장식이 간단한 편이었다.

기둥 하단 등도 조각 장식이 없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비교적 초대 교회 시절이라

성인들의 인물 묘사인 이콘의 법칙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점도 있다.
아무튼 성당 내부는 금빛 모자이크를 쓰되 간단한 도안들로만 장식되었다.


그러나 이후 수백년 동안 성당은 다채로운 마감재를 사용해 예수와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 천사, 황제, 황후 및 각종 도안으로 구성된 모자이크로 장식하게 되었다.


1204년 십자군이 성 소피아 성당을 점령하면서 1000년 가까이 이어지던 성화들을 다 지우고

가톨릭 화가가 그린 성화들을 채웠기 때문이다.


당연한 게 이교도가 더럽힌 곳을 탈환했다고 명분을 내세운 십자군이

정작 그 이교도가 그린 성화를 놔둔다면 말이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교도가 세운 곳이지만 성당은 정화해 우리 종교의 성전으로 만든답시며

개조하고 성화들을 싹 지우고 다시 그렸던 것.


그러다가 1261년 여길 되찾은 정교회 측은 가톨릭 성화들을

싸그리 지우고 다시 그림들을 기록 및 그림을 토대로 재현, 복원했다.


하기아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뀌면서

동로마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회칠로 덮여졌다.


20세기부터 시작된 복원 작업으로 몇몇 모자이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지만,
회칠하고 역시 5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문화재인 이슬람 문양을 제거하는 데 따른 반발이 커

이 작업은 80년 넘게 중단된 상태이다.


사실, 1000년에 이르던 옛 성화들을 제거하던 게 다름아닌 기독교 십자군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제거된 성화들이나 모자이크를 복원한 것도 1261년 일이므로,
200년 남짓 남아있다가 1453년 이후 회칠로 덮여졌기에 500여년이 넘은 이슬람 문양도

문화재로 값어치가 있는 만큼, 함부로 제거하기에 그렇다.


설계, 구조와 재료, 보수


비잔티움 건축의 전성기의 정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며

또한 대단히 빠르게 완공한 역사적 건물이다.


하지만 기존 건축물을 뛰어넘는 규모와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한 무리한 공사와

실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기본 구조는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와 같은 석조 볼트 천장을 활용한 광대한 면적의 건물과
"판테온"과 같은 돔형 천장을 가진 건물의 조합을 시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로써는 새로운 형태의 건물이었다.


물리학자인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안시미오스가 설계를 한 것도 특징적인 부분인데,
당시의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장인 집단의 축적된 경험적 지식을 기반으로 설계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다.


물리와 수학 이론을 동원하여 건축물의 구조를 설계하려고 했던 것은

오늘날의 건축 공학으로 이어지는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례없이 큰 건축물을 원했고, 전례가 없다는 것은

기존 장인들의 경험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물리적인 계산이 불가능했던 당시로써는 한계가 명확하여 하기아 소피아의 구조는 불완전했고,
완공되기 전부터 거대한 돔과 단기간의 완공을 위한 부실 공사 때문에 붕괴될 위기가 많았다.


[KBS 영상] 아야 소피아 박물관 (Hagia Sophia Museum)


[아주TV 동영상] 비잔틴 건축물의 최고 걸작! 터키 성 소피아 성당


참조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406881&cid=58425&categoryId=58425
https://namu.wiki/w/%ED%95%98%EA%B8%B0%EC%95%84%20%EC%86%8C%ED%94%BC%EC%95%84#fn-8
http://rigvedawiki.net/w/%ED%95%98%EA%B8%B0%EC%95%84%20%EC%86%8C%ED%94%BC%EC%95%84
https://blog.naver.com/naya_hug/40064874286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신성한 지혜(Holy Wisdom)’를 의미한다.
라틴족의 지배를 받았던 1204년에서 1261년까지를 제외하고 360년에서 1453년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플 대성당(cathedral of Constantinople)이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1453년 5월 29일부터 1931년 까지는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었으며 1945년 2월 1일 미술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성 소피아 성당의 교회당은 서기 360년, 이스탄불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던 동로마 제국시기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첫 번째 건물은 궁전 근처에 위치했으나

404년경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남아있지 않다.


415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명으로 두 번째 교회가 축성되었으나

이 건물도 532년경의 화재로 인해 성 이레네 성당과 함께 사라졌다.
몇몇의 대리석 조각들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세 번째 건물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으로

532년에서 537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황제는 이전 건물과 완전히 다른 거대하고 웅장한 바실리카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를 위해 그리스 물리학자 밀레투스의 이시도르스(Isidore of Miletus)와

수학자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Anthemius of Tralles)를 고용했다.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시리아, 이집트 등 제국의 각 지역에서 재료가 조달되었으며

고용된 인부들은 10,000여 명에 이르렀다.


황제는 대주교와 함께 537년 12월 27일 거대한 행사와 새로운 바실리카를 열었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모자이크는 후대(565–578)에야 완성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553년에서 557년의 지진으로 건물의 메인 돔과 동쪽의 돔이 피해를 입었으며

558년 5월 7일에는 추가적인 지진으로 메인 돔이 붕괴되었다.


황제는 즉시 복원할 것을 명하며 밀레투스의 조카 이시도르스(Isidorus)에게

이 일을 맡겼는데 그는 돔의 형태를 바꾸었다.


그는 정방형의 평면 위에 돔을 설치할 때

돔 밑바닥에 쌓아 올리는 구면 삼각형의 부분과 함께 늑골이 있는 돔을 만들었다.


이후에도 건물과 내부의 인테리어는 지속적인 시련을 겪었다.
726년경에는 많은 이콘들이 파괴되었으며 종교적인 그림과 조각들은 사라졌다.


1204년에서 1261년까지는 유럽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1453년부터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종, 제단 등은 제거되었으며 대부분의 모자이크는 회반죽으로 덮였고

이슬람적인 상징물들이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서 추가되었다.
현재는 다시 복원 중에 있다.


멀리서 바라본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이스탄불(Istanbul)은 아시아와 유럽을 경계짓는

보스포러스(Bosphorus) 해협에 임한 터키의 가장 큰 항구 도시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동로마제국의 수도였을 때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1453년 시작된 오토만 터키시대에는 흔히 이스탄불로 불리었다.


1922년 터키 공화국이 수도를 앙카라(Ankara)로 옮긴 후

1930년 정식으로 이스탄불이라고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로마가 476년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한 이후에도 동로마제국은 중세 기간 동안

이 곳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유지되었다.


위에서 본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전경


성 소피아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 분쟁을 초월하고 살아남은 증인이다.
당시 모슬렘 지도자들의 종교적 관용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를 지닌 예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보존된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본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전경


1,700여 년 전 건축되어 비잔틴 건축의 으뜸으로 꼽히는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 이슬람 건축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들은 성 소피아 성당처럼 거대하고 웅장한 이슬람 사원을 만들고 싶어 했고,
그것은 대 건축가 시난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다


시난의 건축물은 오스만 제국의 전형적인 이슬람 사원 형태를 띠고 있으며,
사원과 함께 학교, 숙소, 시장, 묘지 등의 복합 부속 건물을 함께 지었다.


건물 전체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큰 돔을 중심으로

주변 부속 건물들이 사원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시난과 제자들은 이스탄불에만 3,000여 개의 이슬람 사원을 세웠는데
그 중에서도 성 소피아 성당 맞은편의 술탄 아흐메트 사원은 블루 모스크란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전경


모슬렘 건축의 특징적인 뾰족 탑 미나렛(minaret) 두 쌍이 15세기와 16세기에 각각 추가되었다.
그리고 건축사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건물은 성 소피아일 것이다.


'소피아(sophia)'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육신의 형태로 세상에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이나 지혜'를 가리킨다.


1935년부터는 현대 터키의 수립자 아타튈크(Atatürk)의 명에 의하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는 기독교회로 건립되었으며 동로마제국의 멸망 후에는 모슬렘 교도들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되면서
모슬렘 건축의 특징적인 뾰족 탑 미나렛(minaret) 두 쌍이 15세기와 16세기에 각각 추가되었다.


2006. 3.13 방문 기념 인증샷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전경


○ 비잔틴제국이 기독교 세계에서 이슬람 세계로 바뀜에 따라

교회를 필두로 제국의 기독교 문화유산도 운명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성소피아성당이 이슬람제국 아래서 겪은 수난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도 결국 이슬람교 사원으로 바뀌었으나,

성소피아성당은 제국이 패망하면서 기구한 길을 걸어야 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메흐메드 2세는 비잔틴제국이 망한 뒤

성당에 들어가 알라에게 예배한 다음 성당 내부를 파괴했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입면도


○ 세월이 흐르면서 투르크인들은 성소피아성당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또 모스크 건축을 모방했지만,

처음에는 정복자의 파괴 본능이 기승을 부렸다.


그들은 다음해인 1454년에 성당을 개조해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성소피아성당은 이미 제4회 십자군에게 한 차례 능욕을 당했다.


교황에게 파문당한 바 있는 제4회 십자군은 비잔티움을 점령하고 마음껏 노략질했을 뿐만 아니라

성소피아성당의 제단을 파괴하고 성물을 나누어 가졌다.


성 소피아성당 입구 군악대 메흐테르 (Mehter Military Band)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출입구


○ 성당 안으로 끌고 들어온 말과 당나귀들이 미끄러져 넘어지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칼로 찔러 죽여 성당을 피로 물들였다.


그런 오욕의 역사를 가진 성당은 이번에는 이교도의 소유물이 됨으로써

더 큰 수난을 겪어야 했다.


비잔티움이 이스탄불로 개명된 다음 성소피아성당은 곧바로

기독교 교회에서 이슬람교 사원으로 바뀌었지만 수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성당 중앙 출입문. 옛날에는 황제와 황후만 출입할 수 있어 황제의 문이라 불렸다.


문 위 천장에 모자이크가 살짝 보인다.

성당 출입구는 모두 9개가 있다.


중앙의 황제문을 중심으로 살짝 보이는 양쪽의 작은 2개의 문으로는 귀족들,

그 옆으로 더 작은 문으로 세례를 받은 일반인이 출입했다.


그나마 세례를 받지 못한 일반인들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외랑에서 예배를 보았다.


황제의 문 위의 모자이크


문 위에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6세가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청하는 모습이 모자이크로 만들어져 있다.


○ 성당 내부를 장식했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오늘날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현재 2층 한쪽 벽에 그야말로 손바닥 만하게 남아 있는 기독교 성화 모자이크가

원래 성당 내부의 모습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새로 세운 첨탑 4개는 그것이 모스크임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2001년 봄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가

느닷없이 자국 영역 안에 있는 바미얀대불을 폭파해 버린 것과 견주어 볼 때,
오스만 투르크족이 성소피아성당 및 기타 기독교 문화유산에 대한 조처는

그나마 이성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모와 황제 모자이크


성모와 황제 모자이크


성모 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과 아야 소피아를 바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모습으로 944년에 만들어졌다.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봉헌된 그림으로 가각 4세기 6세기 인물들을 그린 상상화이다.
성모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는 그의 신성을 암시하는 종이 두루마리를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 황제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


성당의 외랑에 있는 문을 통해서 안쪽으로.


성당의 외랑


내랑으로 들어가면서.


내랑으로 들어가면서.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전경


○ 이슬람교 탈레반 정부는 자신들의 신앙과 배치되는 불상이라 하여

폭파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대포를 동원해 폭파했다.


광신 집단이 인류의 빛나는 문화유산을 무참히 파괴한 것이다.
오스만제국은 적어도 성소피아성당과 그밖의 로마 유산을 가능한 보전하려고 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오스만 투르크족은 이교도와 이교 문화에 비교적 관용을 베풀었다고 평가한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전경


여기에서 보면 바닥에서 돔 가운데가  미흐라브(mihrab),

왼쪽으로 슐탄이 예배드리는 장소가 있다.

오른쪽에 민바르(Minbar)는 살짝 보일듯 말듯.


바닥은 일반대리석, 벽면은 데칼코마니 양식의 타일식 대칭으로, 

기둥은 통대리석으로, 천장은 비잔틴 양식의 돔으로 되어 있다.


건축 당시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이었지만 후대에 지어진 성당에 밀려 현재는 4번째 성당이다.

자연광을 조명으로 사용하도록 지었다.


터키에서는 1백년마다 대형 지진이 발생하는데

내진 구조가 뛰어나 15번 이상의 지진을 이겨내기도 했다.


미흐라브(mihrab)와 민바르(Minbar)가 공존하여 예배드리는 곳


성소피아 성당은 916년 동안 교회로, 481년 동안은 이슬람 사원으로

그리고 1935년 이후부터는 박물관으로 그 생명을 이어왔다.


성모 마리아와 이슬람의 알라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 두 종교가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다.


1453년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 사원이 되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기존의 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이슬람 사원의 건축물과 장식을 만들어 놓은 점이다.
코란의 문구를 새겨 넣은 스테인드 글라스도 그 중의 하나다.


좌측 중앙에 있는 것이 미흐라브(mihrab)이다.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는 방향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해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정 동방향에 비해서 메카 방향인 동남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중앙제단이 서로 방향이 다른 것이 한꺼번에 있다는 것이 가장 이색적이고 특징적이다.  


정동향에 위치한 성모자상을 직선으로 따라 내려가면 그 자리에서 약 15도 정도 빗겨난 자리에

이슬람의 예배 방향인 미흐라브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는 금요 예배 때 설교하는 장소인 민바르(Minbar)가 있고
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왼쪽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예배를 보는 장소가 있다.
종교가 다르고 900년 뒤에 건축한 부속물이지만 어느것 하나 튀는 곳도 어색한 곳도 없다.

 미흐라브(mihrab)


미흐라브(mihrab)란 이슬람 건축에서 모스크의 예배실은 메카의 방향으로 향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그 안쪽 벽에 설치된 작은 니치(壁龕)모양의 오목상(凹狀, 들어간모양)을 말한다.


우상(偶像)이 없는 모스크는 미흐라브가 예배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목표로서 중요시되고,

가장 정성들여 장식되어 있다.


미흐라브가 모스크에 도입된 것은 8세기 초로 생각되며,

그리스도 교의 교회당 아프시스에서 착상된 것으로 추측한다.


규모가 작은 모스크의 경우 벽의 일부 중앙 부분만 만들기도 하며,
모스크의 규모가 클 수록 키블라의 방향이 틀어질 수 있는 것을 감안하여 한 벽면 전체를 미흐라브로 사용한다.


기원은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제자들이 예배 방향에 대하여 묻자 무함마드가 두 기둥 사이에 깃발을 꼽아
'이곳을 향해서 기도하라'라고 이야기 한데서 비롯되었다.


전형적인 모습은 8세기 초에 확립된 것으로,

주로 양쪽에 기둥이 있고 안쪽으로 움푹 들어가있는 니치(壁龕) 형태를 하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 고대 성당의 니치나 비잔틴 교회의 내부 공간 애프스(apse)을 모방하였다고 보는 측면도 있다.
후대에는 공간을 따로 만들어 방의 형태를 띠기도 하며, 천장 부분에 돔을 축조하기도 한다.
정해진 형태는 없으며, 지역과 왕조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민바르(Minbar)


민바르는 이슬람교에서 설교(khuṭbah)를 행하는 연단이다.
가장 단순한 것은 3칸의 계단이 이어져 있으며, 대체로 계단의 위쪽에 반구형의 상자가 달려 있고
또 여닫이문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오를 수 있게 생겼다.


마호메트는 원래 메디나의 모스크에서 종려나무 기둥에 기대어 설교했다.
〈하디스 Ḥadῑth〉(마호메트의 언행록)는 마호메트가 그뒤 모스크에서 대표단을 영접하기 위해

2개의 계단이 달린 의자를 사용했고 또한 그리스인 또는 아비시니아인 목수가

위성류 나무로 만든 이 이동 민바르에서 설교했다고 전한다.


그의 후계자인 칼리프들은 권위의 상징으로 이 민바르를 사용했다.
이슬람 시대가 시작되어 첫 세기 동안에는 지방 총독도 주로 통치자로서의 관할권을 과시하기 위해

민바르에서 연설하거나 청원을 들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통치하에서 설교가 정보의 제공이나 정치적·논의적 특성을 상실하고

단순히 종교적 설교가 되자 민바르도 종교적 상징물이 되었다.


사실상 그것은 좀더 견고하게 만들어졌으며, 계단의 수도 점점 늘어났고

보통 돌이나 벽돌로 만들어 카티파(qaṭῑfah)라는 천을 씌우기도 했다.


슐탄이 예배드리는 장소
알라와 무함마드 사이에 마리아와 예수가 있어 서로 공존하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부분


○ 세계 각지에서 민족적 종교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성 소피아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 분쟁을 초월하고 살아남은 증인이다.


당시 모슬렘 지도자들의 종교적 관용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를 지닌 예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보존된 것으로 생각된다.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부분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실내 부분


천장까지 20층 높이의 건물이다.
중앙돔을 두 개의 반돔이 받치는 기둥도 없이 버티는게 참으로 대단하다.


2006. 3.13 방문 기념 인증샷


2006. 3.13 방문 기념 인증샷


6개의 날개가 달린 천사 세라펨.


본당 천정을 올려다 보면 가운데 돔의 네 귀통이에 6개의 날개가 달린 천사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는데
현재도 여전히 복원 작업이 진행중이다.


1층 본당 둘러 보고는 2층의 갤러리로 올라가는 가는 길. 1,500년 동안 있어 온 역사의 통로.


2층에서 찍은 성모상


천국의 문과 지옥의 문이라 불리는 대리석 문. 12세기에 이곳에서 중요한 종교회의를 했다고 한다.



이레네 황후의 모자이크.


12세기 초 작품으로 성모에게 안긴 아기 예수에게 봉헌하는 황제 요한 콤네누스 2세와 황후 이레네의 모습이다.
헝가리 출신의 황후 이레네는 조에 황후와 달리 금발 머리와 붉은 뺨으로 표현되었다.
이레네 황후의 옆 벽면에는 이 모자이크가 만들어지고 얼마 후 결핵으로 죽은 왕자 알렉시오스의 그림이다.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


베네치아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로 제4차 십자군 원정을 이끌며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베네치아 역사에 있어서는 영웅이겠지만 비잔틴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의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십자군에 의해
약탈 되고 파괴하는 등 엄청난 문명적 재앙을 겪는데 일조한 면이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조국 베네치아가 아닌 적국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에 묻혀 있는 것도 흥미롭다.



연결 통로.


소원의 기둥


소원을 빌며 엄지손가락을 구멍에 넣은 채 손바닥을 기둥 바닥에 대고 360도를 다 돌리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 기둥에 기대어 두통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후대인들도 그 치유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면 들어준다고 한다.


소원의 기둥에서 소원을 빌며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넣고 열심히 돌리는 모습.


소원의 기둥


제례주 보관통
1천 사오백년은 되었을 역사적 유물일텐데 사람들이 자연스레 만지고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살짝 충격적.



성 소피아 성당 분수(우물)

입구에 있는 이 분수(우물)는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 손발을 씻기 위해서 1740년 마흐무드 1세때 건설한 것이다.


2006. 3. 13. 관람을 마치고 성 소피아 성당 분수에서 인증샷. 


[EBS 영상] 성 소피아 성당.mp4


[KBS 영상] 성 소피아 성당.mp4


참조 ; https://blog.naver.com/angeljjin106/22130207256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76184&cid=46710&categoryId=46710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23&cid=43069&categoryId=4306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70718&cid=47318&categoryId=4731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406881&cid=58425&categoryId=5842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0587&cid=42635&categoryId=4263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96706&cid=40942&categoryId=33076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8m2047a

https://blog.naver.com/fightclub/221347352245





2006. 3.11 오후 6시 40분 아테네를 출발하여 오후 8시 15분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 1시간 35분 소요.

이스탄불 ERESIN TOPKAPI 호텔에 여장을 풀고 숙박.

3. 12. 호텔에서 조식 후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성소피아 사원으로 이동.


이스탄불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렀으며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Mehmet Ⅱ1432~1481)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Osman Empire)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보스포루스 해협(Boğaziçi denizi)과 마르마라 해(Marmara denizi), 할리치 만(Haliç) 사이에서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경계선 위에 위치한 터키의 도 및 그에 속한 동명의 도시.


도시가 두 대륙에 걸쳐 있다는 지리적 특이성으로도 유명하다.

인구는 2014년 기준 14,377,018명.


과거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으며,

동로마 제국 시기인 중세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다.
물론 터키의 최대 도시이기도 하다.
 
베욜루 남부의 갈라타 지구는 중세에 제노바나 베네치아의 무역상사가 있었던 곳이며,
부두에는 국내외의 배들이 모이고 아시아쪽의 하이달파샤역(驛)으로 떠나는 페리보트도 이곳을 기점으로 삼았다.


금융·무역의 중심지로서 오스만은행을 비롯하여 국립은행·외국은행이 많다.

베욜루 동부는 택시광장을 중심으로 일류 호텔·레스토랑·극장·대상점 및 각국의 영사관이 늘어서 있다.


골든혼의 남쪽인 이스탄불은 옛날의 이스탄불이 자리잡았던 전통 있는 지구로,
지금도 비잔틴시대의 성벽이 서쪽 경계를 둘러싸고 있다.


아흐메드 사원(블루모스크) · 쉴레이만 사원의 2대 이슬람 사원을 비롯하여
예니성당 · 하기아 소피아(현재 박물관) · 토프카피 궁전(현재 박물관) · 고고학박물관 ·

터키-이슬람 미술관, 고대 오리엔트미술관, 그리고 이스탄불대학 등이 있으며

이 도시의 전성기를 생각나게 하는 대시장(그랜드 바자르)도 있다.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둔 아시아쪽의 위스퀴다르는 전형적인 터키 양식의 도시로
많은 이슬람교 사원이 있으나 지금은 신흥주택지로 발전하고 있으며, 유럽 쪽과는 페리보트가 왕래한다.


세리미에 병영(兵營)과 나이팅게일 병원이 있으며

남부에는 바그다드 철도의 시발역인 하이다르파샤역이 있다.


터키 최대의 공업도시이기도 한 이스탄불은 섬유 · 식품가공 · 농기구 · 고무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군수공업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이스탄불항은 전국 수입액의 70%, 수출액의 20%를 취급하며

매일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선박은 130척이 넘는다.



고대


신화에 따르면 메가라라고 불리는 도시에 비자스(Βύζας)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다.
그는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왕좌를 이어받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식민지 도시를 개척하고자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였던 델포이 신탁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그녀는 "눈 먼자의 도시의 반대 편에 도시를 세우라"라고 말했다.


이 눈 먼자의 도시의 정체는 칼케돈(Χαλκηδών)이며

이 도시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


여사제의 조언을 들은 비자스는 메가라의 개척자들과 함께

그 땅을 찾아 항해했다.


목적지 근처에 다다른 비자스 왕자 일당들은 한 땅을 발견하였는데 그 땅은

북쪽으로는 금각만이 있고 동쪽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있어서

항구도시의 입지조건으로 매우 좋았다.


흑해 연안에 있는 도시들은 지중해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가야 하므로 이 지역의 중요성이 높다.


그래서 그들은 BC 667년 여기에 도시를 세웠고

사람들은 도시의 이름을 왕자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으로 불렀다.


칼케돈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칼케돈 또한 메가라 사람들에 의해 개척되었고 비잔티움 개척 이전인 BC 685년에 세워졌다.


그런데 그들은 금각만을 끼고 있어서 입지조건이 더 좋은

보스포루스 해협 서쪽에 개척하지 않고 해협 동쪽에 도시를 세웠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칼케돈을 세운 집단들이 도시를 해협 서쪽에 건립하는 것의 이점을

"보지 못하였다"고 판단해서 개척자를 장님이라고 여기게 된 것.

그 후 이 도시는 바다와 바다를 낀 항구도시로 발전한다.


그리스 상인을 위한 지역 거점의 역할을 하던 이 도시는 동시대 사람들한테는 그 방탕함과 해이함으로 악명이 높아
어느 여행자는 비진티움 사람들을 두고 "술독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비잔티온은 BC 491년 다리우스 1세 치세의 페르시아가 점령하였으나

BC 477년 아테네를 위시로 한 델로스 동맹에게 다시 탈환되어 그리스계 도시로 쭉 남다가

AD 46년 로마 제국이 점령했으며 로마식 이름인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세


본디 비잔티움(Byzantium)이라는 이름의 고대 그리스 시절 건설된 로마 제국의 지방도시였다.
비록 인구 100만의 수도 로마나 인구 50만의 제국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수준으로 번영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거점이자 제국의 무역 도시 중 하나였는데
평범한 무역 도시였던 이 도시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꾼 사람은 바로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정치 시절 서방 부제의 자리에 있었을 때부터 150여 년 간의 위기로 쇠락할 대로 쇠락하였으며
전통적인 다신교 문화와 공화주의적 정치 관례가 남아있던 로마를 대체할 제 2의 수도 건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조건은 이집트나 소아시아 등의 경제적 중심지와 문화적 중심지인 그리스를 포함하는 제국의 동방과 가까운 곳이며
당시 제국을 위협하던 가장 큰 세력인 다뉴브 강 이북의 이민족 및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국경과 가까워
이들의 침입 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한 곳이었다.


본디 그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자리로 모이시아 속주의 세르디카(Serdica)를 생각하고 있었고
"세르디카는 짐의 로마가 될 것"이라는 말 또한 여러 번 언급했으나 사두정치를 끝내기 위한 리키니우스와의 내전 도중 벌인

비잔티움 공성전을 통해 비잔티움이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최적의 장소라는 곳을 깨닫게 되었다.


324년 내전을 종결짓고 제국 유일의 황제 자리에 오르자마자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였고
곧바로 비잔티움을 제국의 수도에 걸맞는 도시로 바꾸는 대공사에 착수했다.


수도 완공식이 있었던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는 친히 이곳을 로마 노바(Roma Nova), 즉 '새로운 로마'라 명명하였으나,
좀 더 세세한 명칭은 로마 노바 콘스탄티노폴리타나(Roma Nova Constantinopolitana). '콘스탄티누스의 새로운 로마'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의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일단 이름은 이렇게 붙었지만, 도시가 동로마 제국을 넘어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유명한 도시가 되면서
점차 '도시 중의 여왕(바실리사 톤 폴레온/Βασιλὶς τῶν πόλεων)',

이걸 넘어서 더 흔하게는 그냥 도시(이 폴리/ η Πόλη)라고 불렀다.


즉,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마저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앞에선 '도시'가 아닌 마을로 불리고

시골 취급 당할 정도로, 도시라는 이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의미로 널리 쓰였다.


마치 조선시대부터 한양이라는 자기만의 이름이 있었음에도

우리들은 그 도시를 계속 수도라는 의미의 '서울'로 불러온 것처럼.
그 뜻을 생각하면 나중에 나오는 터키어 명칭 '이스탄불'과도 상통하는 명칭이다.


중세시대에 도시가 일단 삼각형의 양변이 보스포루스 해협에 면해 있기에

육지의 한변만 방어하면 되는 천혜의 요지이다.


게다가 당대 어떠한 공성병기로도 뚫을 수 없다는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의 위엄은 대단했다.
도시를 노리고 쳐들어 온 수많은 이민족들을 모조리 트라키아 땅의 양분으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4차 십자군 전쟁 당시엔 동맹걸고 들어온 십자군에게 패하긴 했지만.


게다가 삼각형의 양변이 접한 바다가 단순히 외딴 곳이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이다 보니
전시가 아닌 평시  상황에서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가 될 수도 있는 땅이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제국이 콘스탄티누스의 자식들 및 조카들에 의해 나뉘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은 제국 동방, 즉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맡게 되었다.


중세 서양 세계의 강대국 중 하나였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만큼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들 중 하나였으며
특히 제국이 경제적으로 절정기에 달했던 콤니노스 왕조 마누엘 1세의 치세에는 총 인구 40만여 명 중
외국인 인구가 6만에서 8만에 달했을 정도로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로서 번영했다.


그러나 1204년 도시를 침략해온 4차 십자군에 의해 3일 동안 도시 전역이 약탈당하고
그들이 세운 괴뢰국, 라틴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하고
1263년, 니케아 제국이 도시를 탈환하고 제국을 재건했으나 도시는 이미 활기를 잃은 지 오래,
그 뒤로 제국이 점차 쇠락하면서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에 도시 인구는 겨우 4만 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1453년, 도시를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기를 갈망한

메메드 2세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끝내 함락된다.


역사적으로 이 함락은 함대포를 끌고 와서 포격을 하고,

방어군의 10배가 넘는 정예 예니체리들의 돌격으로 무너졌다고 하지만,
야사에 따르면 성문 샛길을 잠그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샛길을 잠그고 안 잠그고를 떠나서 이미 전황은 오스만 제국 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운 상태였고,
그보다 10만 공격군에 방어군이 7천 명밖에 없었으니 그때까지 버틴 게 오히려 용하다.


삼각형 모양의 비잔티움 모습


콘스탄티노플은 두 면이 바다에 인접해 있고, 나머지 1면은 3중의 성벽으로
적의 공격을 철통같이 방어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거대한 3중 성벽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 쯤 되는 시기에 오스만 제국 메흐메트 2세에게 1453년 점령을 당하여
2200 여 년을 이어온 로마제국 및 비잔틴제국은 처참하게 멸망하고 만다.


특히 오스만 군은 해전에 매우 약했던 만큼, 방어 측은 육지의 성벽 한 곳만 집중하면 되었다.
오스만은 바다에서 싸우고 싶어도 바다가 매우 거칠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바다에 접한 두 면 중, 위쪽 면이 금각만(Golden horn)이다.
금각만은 바다에 능한 방어군이 그 입구를 쇠사슬로 막아 놓아서 오스만 공격군이 갈 수 없었던 곳이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정복왕답게 메흐메드 2세는 육지에 기름칠한 통나무를 깔고,

마르마라해(sea of Marmara)에 있던 배를 사람의 힘으로 밀어서 금각만으로 진입한다는 대담한 작전을 세운다.
잔잔한 금각만에서 오스만이 공격해 오자 병력이 부족한 방어군은 힘없이 패하고 만다.

벨리니가 그린 메흐메트 2세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이 도시를 수도로 정한 인물과 이름이 같은 콘스탄티누스2세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오랜 기간 많은 희생이 따른 전쟁이었기 때문에 메흐메트는 정복군에게 4일 간의 약탈 시간을 주게 된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겁탈당하고 노예로 전락했다.
더불어 수많은 비잔틴 문화유산들도 사라졌다.


메흐메트 2세는 빠르게 혼란을 해결해 나간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고 거대한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470년 동안 이어지게 된다.

금각만 (Golden Horn)에서 바라본 모습.


남동쪽을 향해 찍은 사진으로, 오른쪽의 육지가 파티흐(Fatih) 구, 즉 테오도시우스 성벽 안의 콘스탄티노플 시가지이다.

만(灣)의 상류는 이스탄불 북부를 흐르는 알리베이쿄이(Alibeyköy)강과 카이타네(Kağıthane)강과 연결되며,
하류는 서쪽으로 마르마라해와, 동쪽으로는 보스포루스해협과 닿아 있다.


총 길이는 7.5km이며, 폭이 가장 넓은 곳은 750m,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약 35m이다.

만의 명칭은 지형과 역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만에 위치한 수많은 무역항을 통해 들어오던 재화(財貨)
또는 수면에 비치는 석양의 금빛 색조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지정학적으로 이스탄불의 역사적인 중심지를 감싸고 흐르면서 자연적인 방어선을 이루고 있으며,
내해로서 파도가 잔잔하고 수심의 변동이 적어 항구로 활용되었다.


고고학 발굴 기록에 따르면 B.C. 7세기경부터 만 주위에 항구ㆍ창고ㆍ주거지 등이 밀집한

대규모 정착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로마 제국 시대 이후로 경제적, 전략적 요충지로 발전하였다.


비잔티움제국 시대에는 해군본부가 주둔하였으며, 해안을 따라 군사적 목적의 성벽을 쌓았다.
또한 높은 감시탑을 세우고 수중에 대형 쇠사슬을 걸어 만으로 드나드는 선박을 통제하였다.


비잔틴 시대의 감시탑은 1204년 십자군 전쟁 때 크게 손상되었고,
1348년에 제노바인(Genoese)이 새로이 탑을 세웠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갈라타 타워이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에도 메흐메드 2세가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상업 및
주거지역을 보전할 만큼 무역항으로서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근대 이후 이스탄불 인구 증가와 산업화로 인하여 수질 및 주변지역이 오염되었지만,
1980년부터 정화작업을 시작하여 현재는 깨끗한 수질과 생물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양쪽 해안을 따라 다양한 유적지ㆍ공원ㆍ상업지구가 공존하며

이스탄불의 주요 관광지로 명성을 얻고 있다.


만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다섯 개가 있다.
상류에는 1974년 완공된 할리쉬 다리(Haliç Bridge)가 있고, 1912년에 완공되어 교통 및 관광 목적으로 사용되다가
1992년 화재로 유실된 뒤 현재는 관광 목적으로 일부만 복원된 에스키 갈라타 다리(Eski Galata Bridge, 옛 갈라타 다리)가 있다.


중류에는 1940년 완공된 아타튀르크 대교, 인도교이자 도시철도가 지나가는 골든 혼 메트로 다리가 있으며,
하류에는 화재로 유실된 옛 갈라타 다리를 재현하여 새로 제작한 갈라타 다리(Galata Bridge, 1994년 완공)가 있다.


현대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당시에 불가리아군이 차탈자(Çatalca)까지 내려와서 이스탄불을 위협한 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이 지역은 오늘날 이스탄불 광역시에 포함되어있을만큼 이스탄불과 지척에 있는 거리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코앞인 보스포루스 해협에 영국 함대가 몰려와 위협을 가한 바 있다.


오스만 제국이 1차대전에서 패하자 세브르 조약으로 인해 제국은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했고
그리스 왕국은 승전국이라고 신나서 이스탄불을 탈환하겠다고 터키로 진공했다.


그리스는 이스탄불을 탈환할 뻔했지만 무리한 진공으로 인해 아타튀르크에게 패퇴당했고,
이미 연합군(주로 영국군)측이 이스탄불을 접수한 상태로 그리스군이 코 앞까지 다가오자 영국이 개입한다.


영국은 에게 해의 섬과 코스탄티니예를 포함한 동트라키아 지방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력을 넣었고
아타튀르크는 후자를 선택. 이로써 도시는 다시 터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1922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수도의 지위는 상실하고,
아타튀르크를 수반으로 하는 신생 터키 정부는 오스만 왕가와 귀족들을 반역자로 규정하여 모두 추방시켰고
기존 세력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수도를 아나톨리아 땅의 튀르크계의 발원지와 같은 척박한 땅 앙카라로 천도하였다.


이 때 도시 이름은 코스탄티니예에서 이스탄불(Istanbul)로 바뀌었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뷔윅아다(Buyuk Ada). 프린세스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섬.


이스탄불은 한때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그리스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협정 당시에 이스탄불 전체 인구의 1/3 이 그리스인인 현실을 고려해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은 추방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박해는 아타튀르크 사후 특히 1950년대 들어 키프로스 문제와 관련해 그리스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가속화되었으며
이 시기 터키 정부의 묵인 속에 이루어진 시민들의 조직적인 약탈과 폭행까지 행해져 1960년대를 기준으로 인구는 급감하게 된다.


1955년은 아직 영국 식민지였던 키프로스에서 키프로스는 그리스라며

그리스와 통합을 요구하는 시위와 폭력 행위가 극에 달해 있을 시절이다.


아테네에서도 반 터키 시위가 있었고, 특히 이스탄불과 마찬가지로
로잔 조약을 통해 추방에서 제외된 트라키아 서부 지방의 튀르크계 주민들에게도 박해가 벌어졌다.
그러자 터키에서도 반 그리스 여론이 치솟기 시작했고, 그게 폭력 사태로까지 번졌다.


1930-40년대까지만 해도 터키와 그리스 관계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동구권의 공산화로 인해 잔뜩 긴장한 양측 정부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둘 다 제정신은 아니었다.


또 오스만 제국이 소멸되고 나서 오스만 제국 국적이 말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터키 공화국으로 신청하지 않은 그리스계 무국적자들이 이스탄불에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동안 이들은 외국인도 아니고 자국인도 아닌 상태로 거주허가증만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때의 키프로스의 반 튀르크 시위 이후 법적 이유를 들어 하나 둘 추방시킨다.


백여 년이 지난 2015년 현재는 거주민의 겨우 0.01%만이 그리스계이다.
이들은 정교회를 믿는 인구만 한정한 것으로 마찬가지로 그리스 혈통이지만 19세기 말과 터키 독립전쟁 시기
그리스에서 추방된 무슬림인 기리틀리(Giritli)의 수는 훨씬 더 많으며,
오스만 제국 시절에 터키화된 그리스계 인구는 여전히 이스탄불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갈라타 다리 (Galata Köprüsü)


사진 속 나무다리인 갈라타 다리 (Galata Köprüsü)는 여러번 불이 나서 여럿차례 재건되었다가

지금은 돌 및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로 남아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는 터키의 산업화와 더불어 이스탄불의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비록 수도는 앙카라로 이전했지만 오스만 제국시절부터 남아있던 인프라는 어디 안 가고 남아있었고,
비록 그리스인들이 추방되었다지만 정작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엘리트 계급으로 군림하던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유력 가문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고,
지리적으로 유럽과 인접하기 때문에 이스탄불 위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스탄불 하면 오늘날 관광 중심지인 구 성벽 내와 갈라타, 위스퀴다르, 카드쾨이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 전까진 논밭이나 임야지였던 곳에 시골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마구자비로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난개발이 시작되었다.


물론 정부도 가만히 있진 않아서 단속도 했지만, 이들은 공무원들이 죄다 퇴근한 밤중에 건물을 지었고,
'밤에 지어진 집'이라는 뜻의 게제콘두(Gecekondu)가 여기저기 들어서자

정부도 하는 수 없이 수도와 전기를 공급해주었다.


우리나라 개발독재 시절에야 그냥 국유지 무단점유로 다 구속하고 불도저로 죄다 밀어버렸겠지만
이슬람 관념상 집없는 사람을 내쫓긴 좀 그래서 일단 지어진 집들은 인가를 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밤중에 몰래몰래 날림으로 지은 달동네가 멀쩡할 리는 없었고,

지진이나 각종 사고로 피해를 많이 겪었다.


한때 이스탄불 내 주택의 무려 65%가 무허가 게제콘두였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제대로된 주택이나 아파트로 개선된 상태이다.


하지만 이미 개발된 부지에 대한 전면재개발은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게제콘두 시절 형성된 비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도 개선되지 못하고 남아있어

이스탄불의 악명높은 교통정체의 원인이 되고 있다.


갈라타 다리 (Galata Köprüsü)


도개교(跳開橋)로 총 길이는 490m이고, 폭은 42m이다.
양방향으로 각각 3차선 차도와 도보가 있으며, 중앙에 트램(Tram) 노선이 지나가도록 건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골든 혼에 처음 다리가 놓인 것은 6세기부터였다.
동쪽의 갈라타(Galata) 지구와 서쪽의 에미뇌뉘(Eminönü)를 잇는 위치에 다리를 건축하고자 처음 시도한 것은
1502년 술탄 바예지드 2세(Bayezid II, 1481~1512 재위)였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설계를 의뢰하였으나 기술적인 문제로 건설되지 못하였다.

1845년에 술탄 압둘마지드 1세의 어머니 발리데(Valide) 왕비의 명령으로

최초의 다리가 건설되었고, 18년간 사용되었다.


1863년에 술탄 압둘아지즈(Abdulaziz, 1861~76 재위)가 다리를 재건하였고,
7년 뒤 프랑스 회사에 의해 증축되어 1875년에 완공되었다.
그 결과 다리의 길이는 480m, 폭은 14m가 되었다.


이 다리는 1912년에 철거되어 골든 혼의 상류로 옮겨졌으며, 현재 구 갈라타 다리(Old Galata Bridge)로 불린다.
1912년에 독일 회사가 놓은 새 다리는 길이 466m, 폭 25m이며, 1992년에 화재로 파괴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현 다리는 터키 건축회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1994년에 완공되었다.


2006.03.14 숙소 ERESIN TOPKAPI 호텔 앞에서 기념 인증샷


2006.03.14 숙소 ERESIN TOPKAPI 호텔 앞에서 기념 인증샷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AD 1200 3D 역사 동영상




비잔티움(Byzantium) AD 1200 3D 동영상



참조 ; https://namu.wiki/w/%EC%9D%B4%EC%8A%A4%ED%83%84%EB%B6%8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4980&cid=40942&categoryId=34070
http://blog.naver.com/youngjoot/22137005152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38603&cid=40942&categoryId=32348

https://blog.naver.com/dltpvnd/221017355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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